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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이용순(李龍淳) 금전 차용증 1 고문서-증빙류-차용증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英 李龍淳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英 李龍淳 李敎英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영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영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이다. 이 증서는 금액과 상환기한 및 방법 등을 명기하여 차용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썼다. 금액은 3원50전이다. 먼저 이 금전을 차용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변제 기한은 1915년 10월 15일로 약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서로 걸지 않기로 하고, 연 이자는 3할로 하였다. 본 약정에 따라 본 이자와 함께 기한 내에 지체 없이 갚기로 하고 이 금전차용증 1장을 작성하여 교부한다는 것이다. 이 차용증에 대해 증주(證主)는 이교영이며, 차용인은 이용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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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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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3년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5.7 (大正)12.5.7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60원 92전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60원 92전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이다. 이를 우편으로 수령자에게 보내면 지정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우편환(郵便換)이다. 한문과 일본어 혼용체이다. 기호번호 난에는 번호가 찍혀 있다. 뒷면에는 위체료 및 기타 요금에 관한 사항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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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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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12.2.13 (大正)12.2.13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20원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 1923년 보성(寶城) 소인이 날인된 20원의 통상위체금수령증서(通常爲替金受領證書)이다. 이를 우편으로 수령자에게 보내면 지정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우편환(郵便換)이다. 한문과 일본어 혼용체이다. 기호번호 난에는 번호가 찍혀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요금이 기재되어 있다. 뒷면에는 위체료 및 기타 요금에 관한 사항이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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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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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이용순(李龍淳) 금전 차용증 2 고문서-증빙류-차용증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先 李龍淳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一日 李敎先 李龍淳 李敎先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선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 1915년 2월 21일에 이용순이 이교선에게 차용한 금전에 대한 증서이다. 이 증서는 금액과 상환기한 및 방법 등을 명기하여 차용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썼다. 금액은 20원이다. 월 이자는 3할로 정하였다. 먼저 이 금전을 차용한 것이 확실함을 확인하고, 변제 기한은 1915년 4월 30일로 약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서로 걸지 않기로 하고, 본 약정에 따라 본 이자와 함께 기한 내에 지체 없이 갚기로 하면서 이 금전차용증 1장을 작성하여 교부한다는 것이다. 이 차용증에 대해 증주(證主)는 이교선이며, 차용인은 이용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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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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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5년 이상근(李相根) 화조(禾租) 보관증 고문서-증빙류-증서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日 李相根 李龍淳 大正四年舊乙卯二月二十日 李相根 李龍淳 李相根 (印), 李大淳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0일에 이상근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화조(禾租) 보관증 1915년 2월 20일에 이상근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화조(禾租) 보관증이다. 보관하는 화조의 수량과 지급규정 및 당사자 등이 기재된 문서이다. 보관하는 화조는 2석2조이며 곡물의 종류는 대두(大斗)이다. 화조는 소작인 등의 조세로 받은 곡물을 말한다. 이 화조를 보관하는 사실이 확실함을 다짐하고, 어느 때든지 이 증서를 휴대하고서 도착하는 즉시 지체 하지 않고서 내주기로 약정하였다. 보관주는 김상근이며, 아보인은 이대순이다. 아보인은 거간 혹은 중개인을 가리킨다. 보관을 위탁한 사람은 이용순이다. 보관주와 아보인은 이름 아래에 날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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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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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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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

土地所有權保存ニ付證明申請書一 不動産ノ表示一 所在地 始興郡 秀岩面 物旺里 淡字 六九七-一 宅地 九百四拾坪 不動産ノ價格金 六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七-二 田地 貳百八拾六坪貳合 不動産ノ價格金 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八 田地 壹百拾八坪五合五夕 不動産ノ價格金 六圓也一 所在地 上同 鱗字 六四 六四一 畓地 壹千九拾五坪壹合參夕 不動産ノ價格金 貳百圓也一 證明ノ目的 所有權保存一 所有者ノ住所氏名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所有者 李宜容 (印)一 不動産ノ價格金 貳百七拾六圓也一 登錄稅金 八拾參錢也右土地ハ自己ノ所有ナルコトテ保存證明セラレ度別紙面テ添附レ此段及申請候也大正三年 七月 卅一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申請人 李宜容 (印)始興郡廳 御中證明濟證明官吏 始興郡守 尹弼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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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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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일산 손공 행장 一山孫公行狀 공의 휘는 종순(鍾純) 자는 치성(致誠)으로 일산(一山)은 그의 호이다. 손씨(孫氏)는 계통이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나왔다. 신라 시대에 효자 손순(孫順)이 석종(石鐘)을 얻는 기이한 일이 있어서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그 효성을 장려하였다. 죽은 뒤에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이 분이 시조이다. 세대가 전해 내려와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은 고려 태조를 도와 높은 공적을 세워 밀양에 봉해졌다. 또다시 8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사공 변(抃)은 청백리에 뽑혔으며 명신에 들어갔다. 또 4대가 지나 밀성군 빈(贇)이 나왔으며, 또 6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목사 책(策)이 나왔으니, 바로 조선 시대이다. 목사의 현손(玄孫)인 영귀당(咏歸堂) 비장(比長)은 문과와 증시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충간했던 뜨거운 마음은 조정에서 으뜸이니69) 그 일이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영귀당의 증손 도봉(道峰) 홍적(弘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지냈는데, 명종 을사년에 사국(史局)을 담당하여 당시 일을 곧바로 기술하여 여러 임씨들의 무고에 걸려들어 위원(渭原)70)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가시니, 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안(扶安)의 옹정(甕井)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 분이 참봉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승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양성(陽城)71)에서 순국하였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조부 경엽(景燁)과 부친 철우(哲宇)는 금곡(錦谷) 송능상(宋能相)72) 공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는데, 두 분 모두 효도로 정려를 받았다. 모친은 조양 임씨(兆陽林氏)와 나주 나씨(羅州羅氏)로 모두 맑은 덕을 지녔다. 공은 나씨의 소생으로 다섯 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 5월 23일에 정읍현(井邑縣) 석산리(石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영민하여 14~5세가 되기 전에 사서(四書)를 통하여 또래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부로(父老)들이 대성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정묘년(1867년)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14살이었는데, 어른처럼 상례를 치렀다. 장지를 정할 때 여러 형과 조카들이 한 방에 모여 필점(筆占)으로 구하였으나 모두 영험하지 않았다. 공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기에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되어 붓을 휘둘렀는데 영험함을 얻어 좋은 무덤의 터를 잡게 되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응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곡(奠哭)의 여가에 《가례(家禮)》를 읽기를 멈추지 않으니 공의 예학이 정밀하게 되었다. 대개 이 때부터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서, 항상 찾으려고 하나 찾지 못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73) 기일을 만나면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오열하니 마치 처음 초상이 날 때처럼 하였다.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집안을 꾸리며 남은 힘으로 책을 읽어 의문이 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가 경연관 운창(芸牕) 박성양(朴性陽)74)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선생은 공을 한 번 보고서 그 마음이 표리여일하다는 것을 알고서 순(純), 성(誠) 일(一)의 세 글자로 이름과 자와 호를 지어주면서 가상하게 여겼다. 공은 선생을 깊이 믿고 종유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하자 3개월 동안 가마(加麻)75)하였다.모친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병이 나자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에 허리띠를 벗지 않았다. 이렇게 석 달을 하니 몸이 수척해져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여러 형들이 중도(中道)에 지나치다고 꾸짖자 이에 잠시 침소에 나아가 쉬었다.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주니 그날은 넘겼지만, 마침내 무자년(1888년) 11월 9일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공이 예를 지켜 장사를 치룬 것은 이전 부친상에서 이미 그러하였으니, 현재 정과 예를 다하고 그 법도를 엄하게 한 것은 실로 공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공은 상을 마치자 종중의 모임에서 의논을 제시하기를 "이처럼 세도가 무너졌으니 영화를 어찌 구하리오. 다만 후생을 교육하여 선대의 업을 실추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돈을 갹출하여 계를 만드니, 불어난 재물이 자못 상당하여 집을 세워서 학문을 익힐 장소로 삼고 책을 구매하여 독서할 바탕으로 삼았다. 자질(子姪) 이외에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대단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힘써 그들을 기쁘게 하여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본성은 이단을 물리치는데 엄격하였기에 방술(旁術)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저들도 기가 절로 죽어서 감히 자신의 방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동비(東匪)들의 기세를 올릴 때 호남이 가장 심하였고 그 중에서도 정읍이 더욱 심하였는데, 오직 공이 살던 마을은 침범하지 못하였다.친족의 자녀 가운데 가난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가 있거든 공이 앞장서서 재물을 내었고 이어서 여러 친족에게서 거둬 도와서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마을에 공부할 때를 놓친 자가 있으면 밤에 공부하기를 권하여 가르치니, 사람들이 손 선생이라 불렀다. 근처에 고용한 노비들도 또한 정강성(鄭康成)의 집안 노비들처럼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76) 공은 조상을 추모함에 정성을 다하여 먼 시대 조상의 분묘의 의물을 험한 길을 찾아가 고생 고생하여 마침내 마련하였다. 평생의 뜻은 다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 넉넉함 드리우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성취시키는 것뿐으로, 다른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주 굶주리는 근심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물건을 사양하거나 받는 의리에 대단히 엄격하여 만일 마음에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니, 식자들이 만석군(萬石君)77)의 자질로 유공작(柳公綽)의 가법78)을 행하여서 이 둘을 겸하면서도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들보다 낫다고 하였다. 향도(鄕道)의 선비들이 사실을 기록하여 서로 추천하여 읍영(邑營)에서 상과 물건을 내렸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상과 물건을 싸서 돌려보낸 것이 여러 차례였다.을사년(1905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평소 공의 이름을 듣고서 오래 친한 이처럼 대하였으며 돌아갈 때 글을 써서 장려하였다. 그 후로 공은 자주 편지를 보내 많은 것을 질정하였다. 공은 항상 문생과 자질(子姪)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이 한결같이 바르면 온갖 이치가 절로 밝아져서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자는 육행(六行)79)에 한 가지라도 흠결이 없는 연후에 바야흐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본령(本領)이니, 정성을 다해 사람을 가르친 것도 또한 이와 같다.기미년 11월 1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였다.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며, 붕우와 문생 가운데 가마(加麻)한 자들이 상당하였다. 석산(石山)의 뒷 산록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양(南陽) 홍씨 신영(信永)의 따님으로,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집안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한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마땅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덕원(德源)이고 차남은 행원(行源)이다. 덕원의 아들로 성하(聖夏)가 있고 사위로는 고광문(高光文)이 있다. 행원의 아들로는 성환(聖桓), 성훈(聖訓), 성근(聖根)이 있고 사위로는 이동열(李東烈)과 고광조(高光晁)가 있다. 성환의 아들로는 기선(淇宣)과 오선(五)이 있다.오호라!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매번 공이 춘추에 성묘하러 올 때 반드시 길을 둘러서 찾아와 서로 매우 기뻐하였다. 처음에 내가 공에게 절을 올릴 때 나아가 아직 어렸는데, 그러나 공의 청아한 용모는 따뜻하면서도 굳세어 존경함이 일어났고 차분한 말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단정하고 장중한 선비임을 알았다. 공이 성묘하러 올 때가 되면 공과 선친이 대화하는 말을 자주 들었으니, 간곡한 진심에서 하는 말에서 학문이 지극하고 덕이 높음을 알 수 있으며 개연히 근심하는 말은 세상의 교화가 풀어지고 도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읍에서 오는 선비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공이 집과 향촌에서 행한 바는 옛날 법도를 따라 지금 세상에 드문 것으로 올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다. 이에 공이 마음에 지닌 바와 행한 바가 옛날 법도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도를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겠다.지금 다시 공의 종손 성철(聖徹)이 지은 가장(家狀)을 얻어서 읽어보니 부모를 섬기고 상에 거하며 지결을 세워 마음을 전한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에 공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체(全體)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이 가장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학문하는 과정에 대해 소략하며 아울러 논저의 요지 한 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학문하는 차례와 조예의 깊음, 귀숙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장에서 '성리의 여러 책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가례》와 《소학》 그리고 《상서》를 대단히 좋아하였다.'라 하였으니, 대저 격물치지의 방법은 성리에서 나오고 제가치국의 정치는 모두 위 세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보면 공의 학문이 격물치지에 깊으며 그 아는 바를 미뤄 가정에 행하고 나라에 미친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유문(儒門)에서 서로 전하는 정법은 지와 행을 함께 닦는 것이니, 공이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대개 공의 자질은 원래 아름다운데다가 공부까지 지극하였으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조상인 영귀당(咏歸堂)과 도봉(道峰)의 덕을 마음에 담고 명현인 운창(芸牕)과 간재(艮齋)에게 의심을 질의하였다. 시와 예를 길이 전하여 안으로 행실이 갖춰지고 학문의 문로(門路)가 올바름을 얻어 아름다운 은혜를 남겼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이 어찌 기록하여 세상의 입언군자에게 고하지 않으랴. 공의 맡아들 덕원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못났지만 선대의 깊은 우의를 생각하매 감히 사양하지 못하니 삼가 가장을 서술하고 나의 견해를 붙여 이상과 같이 찬술한다. 公諱鍾純字致誠, 一山其號也.姓孫氏, 系出慶尙道密陽府.新羅時有孝子孫順, 得石鍾之異, 王賜宅米褒之, 卒謚文孝, 是爲始祖.傳至廣理君兢訓, 佐麗太祖, 有嵬勳, 得是封.又八傳而文科司空抃, 選淸白, 入名臣.又四傳而有密城君贇, 又六傳而至文科牧使策, 則本朝時也.牧使玄孫咏歸堂比長, 文科重試, 副提學, 忠言偉烈, 卓冠朝端, 事在《國朝實錄》.咏歸曾孫道峰弘績, 文科翰林, 明宗乙巳, 掌史局, 直書時事, 爲群壬所構, 謫渭原卒, 士林追慕立祠扶安甕井.生叅奉承憬, 壬辰亂, 起義旅, 殉于陽城, 於公爲八世祖.祖景燁.考哲宇, 從遊錦谷宋文公門, 兩世幷以孝命旌.妣兆陽林氏, 羅州羅氏, 俱有淑德, 公羅氏出, 兄弟五人, 序居末.以哲宗甲寅五月二十三日, 生于井邑縣石山里第.才性穎悟, 未成童, 通四子書, 儕流莫及, 父老望大成.丁卯丁外艱, 年十四, 執喪如成人, 謀葬地, 諸兄若姪, 聚會一堂, 將以筆占求之皆未靈, 公未冠故最後及之, 乃揮筆得靈, 協吉永窆, 人異其誠感.奠哭之暇, 讀《家禮》不輟, 公之禮學致精.蓋自此日, 以早孤未養爲恨, 恒如有求不得之人.當忌辰, 淚哭嗚咽, 如袒括初.貧無以爲學, 餘力劬書, 疑輒記之, 就質于經筵官芸牕朴先生, 先生一見, 知其心事, 表裏如一, 以純誠一三字, 錫名字號而嘉之, 公服信從遊, 及沒加麻三月.事母夫人, 極其愛敬, 有癠, 少不離側, 夜不解帶, 凡三朔, 羸瘠幾生病, 諸兄責以過中, 乃暫就寢處以自扶.至革, 裂指注血, 得甦一日, 竟以戊子十一月九日, 遭艱.公之執禮, 在前喪已然, 則今之盡情禮嚴防限, 實又疏節也.喪畢立議宗中曰: "世降如許, 榮貴何求.惟敎育後生, 毋墜先業爲第一義." 乃醵金樹契, 其蓄頗鉅, 建齋爲肄業所, 購書爲讀書資.子姪外遠近來學者衆, 敎誨不倦, 因材有成多可觀.接人務用歡心, 不少簡忽, 然性嚴於闢異, 故凡以旁術至者, 幷不假顔, 彼亦氣自餒縮, 不敢售辯.甲午東匪之熾, 湖南最甚, 井邑爲尤, 而惟公一洞無汙.族子女貧未婚嫁者, 自公先捐, 繼排諸族而助之, 俾不失時.里人失學者, 勸夜學而敎之, 人謂孫先生.近地雇傭奴婢, 亦識字有如鄭康成家云.誠於追遠, 遠代墳墓儀物, 跋涉勤楚, 終底有成.平生志業, 惟在承先裕後, 修身成物, 他不念及.故屢空之憂, 人所不堪, 而處之晏如.尤嚴辭受之義, 苟係未安, 一毫不取, 識者謂萬石君質, 行柳公綽家法, 兼有而正己過之.鄕道章甫, 摭實交薦, 至有邑營賞物, 而不以自居, 封還以送者累矣.乙巳, 謁艮齋田先生, 先生素聞公名, 視若夙親, 歸則書以獎之.自後公有累度書面, 多所就質.恒語門生子姪曰: "此心一正, 則萬理自明, 天下無難事." 又曰: "學者, 於六行, 無一欠缺, 然後方可謂學." 此實公之本事, 故丁寧敎人者, 亦如是.己未十一月一日, 考終于家, 壽六十六, 遠近莫不嗟惜曰: "君子逝矣." 朋友門生加麻者, 若干人.葬于石山後麓艮坐原.配南陽洪氏信永女, 固窮宜家, 一不見憂色, 宜其爲君子配也.生二男, 長德源次行源.德源男聖夏, 壻高光文.行源男聖桓·聖訓·聖根, 婿李東烈·高光晁.聖桓男淇宣·五宣.嗚呼, 公, 我先人友也.每公春秋楸行, 必迂路而訪, 甚相歡焉.始余拜公, 年尙幼.然見公淸雅之容, 溫栗可敬, 安定之言, 倫脊無差, 心知其爲端人莊士矣.及其省事, 熟聽公與先人語者, 懇然之誠, 學至而德崇, 慨然之憂, 敎弛而道喪. 曁士從楚南來者, 皆言'公家鄕所行, 絶今遵古, 鮮不出乎正者', 知公所存所發, 無愧乎古, 所謂篤信好學者矣.今又得公從孫聖徹所撰家狀而讀之, 幷悉其事親居憂立訣傳心之詳, 於是乎公之全體始終, 可謂備知矣.但是狀也, 細述行治, 而畧於爲學節度, 幷不及論著要旨之一二, 無由考其進修次第, 造詣淺深, 歸宿在何何4)也.雖然有云'性理諸書, 無不精鍊, 酷好《家禮》《小學》《尙書》.' 夫格致之方, 出於性理, 家國之政, 具在三書, 卽此而觀公之功深格致, 而推其所知, 行之家而可及於邦國者, 槩可想也.儒門相傳定法, 知行交修者, 非此歟.蓋公天資旣美, 人功亦至, 念德乎咏歸道峰之顯祖, 質疑於芸牕艮齋之名賢, 詩禮永傳而內行備, 門路得正而嘉惠存, 猗歟盛矣.是烏可不書之, 以告世之立言家乎.公之嗣子德源, 請余以狀德之文, 顧雖無似, 念先誼之重, 不敢言辭, 謹按叙家狀, 而略附己見, 撰次如右云爾. 충간했던……으뜸이니 그 내용은 앞의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임압손공행장(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에 보인다. 위원 평안북도에 있는 군이다. 양성 경기도 안성의 옛 지명이다. 금곡 송능상 1710 ~ 1758.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능(士能)이며, 호는 운평(雲坪)·동해자(東海子)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쌓아 약관에 명성을 떨쳤다.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등과 교유를 맺었으며, 문인으로는 조카인 송환기(宋煥箕)가 유명하다.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 한원진의 설을 좇아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동조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집인 《운평집》이 있다. 찾으려고……못하였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노(魯)나라의 안정(顔丁)은 부모의 거상(居喪)을 잘하였다. 부모가 죽은 처음에는 황급히 뛰어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부모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는 부모를 멀리 바라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장례(葬禮)를 마치고는 마치 부모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안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슬퍼하였다.〔顔丁善居喪 始死皇皇焉如有求而弗得 旣殯望望焉如有從而弗及 旣葬慨然如不及其反而息〕"라고 하였다. 운창 박성양 1809~1890.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정강성의……한다 정강성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으로, 강성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 노비들은 책을 읽을 줄 알아 평상시에 《시경》의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文學》 만석군 만석군(萬石君)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고 경제(景帝) 때에 구경(九卿)에 이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석분은 본디 공경하고 근신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입었던바, 그의 아들 건(建), 갑(甲), 을(乙), 경(慶) 또한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 착한 행실과 효도하고 근신함〔馴行孝謹〕으로 인하여 각기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에 올랐으므로, 경제가 이르기를 "석군 및 네 아들이 모두 이천석이 되었으니, 신하에 대한 높은 대우가 그 가문에 다 모였다.〔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擧集其門〕"라 하고, 석분을 만석군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유공작의 가법 당(唐)나라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유공작(柳公綽)에 대해서는 소학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유공작은 동생 유공권(柳公權)과 우애가 깊어 항상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였다. 유공작이 죽자 그의 아들 유중영(柳仲郢)은 한결같이 삼촌 유공권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며, 또 아버지의 가법을 받들어 잘 준수하였다. 《小學 善行》 유공작(柳公綽)의 아내 한씨(韓氏)가 고삼(苦蔘)과 황련(黃連)과 웅담(熊膽)을 섞어 환약을 만들게 한 다음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공부할 때마다 이 환약을 입에 머금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다. 《小學 嘉言》 유변(柳玭)'은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라 하였다. 육행 육행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周禮 地官 大司徒》 이 말은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何'자 한 글자는 衍文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익부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羅益夫 丁卯 익부가 나를 종유(從遊)한 지 이미 삼 년입니다. 옛사람은 대개 삼 년으로 하나의 큰 한계를 정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예컨대 "삼년유성(三年有成),55) 삼년고적(三年考績),56)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57) 등의 유가 그것입니다. 익부는 과연 한 가지 소득이 있어서 손에 쥘 만한 것이 있는가요? 그렇지 않다면 익부가 세월을 허비한 것이 애석할 뿐 아니라 내가 사람을 잘못 인도한 것이니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옛사람은 20년 동안 하나의 노(怒)자를 다스리는데도 미진함이 있었다고 했으니, 익부가 만약 하나의 지(志)자를 결정해 옮기지 않았다면 그 공부가 민첩해 옛사람이 노(怒)자를 다스린 것보다 넉넉하여 삼년의 소득이 또한 많다고 할 것입니다. 대저 지(志) 한 글자를 이미 정했다면 백가지 방도가 모두 올곧을 것이니 이를지나 더 나아가면 위로는 성인이 되고, 다음은 현인이 되며, 또 그 다음은 선신(善信)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자질과 기량, 공부와 능력의 크기와 깊이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지(志)가 혹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 비록 삼년 사이에 강변(講辨)의 웅패(雄沛)함이 강하(江河)와 같고, 문장의 아름답고 찬란함이 별자리와 같다 할지라도 어찌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익부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징험하여 앞날의 성취를 이루십시오. 나는 장차 익부가 삼년의 배움으로 종신토록 덕업을 쌓을 것이라고 예견해보겠습니다. 益夫之從我遊, 已三年矣.古人有爲多以三年定一大限, 如云三年有成, 三年考績, 三年學不至於毅之類是也.益夫果有一副所得可以藉手乎? 否則非惟益夫之費日爲可惜, 我之誤人亦可恥也.雖然昔之人, 有二十年治一怒字未盡者, 益夫若能定一志字, 移易不得, 則其下功敏速, 優於昔人治怒, 而三年之得, 亦已夥矣.夫一志旣定, 百度皆貞, 過此以往, 上而爲聖, 次而爲賢, 又其次而爲善信之人.惟在其才器工力小大淺深之如何爾.志或有未盡定者, 雖使三年之間, 講辨之雄沛若江河, 文章之麗爛若星斗, 尙何足謂有得乎? 請益夫自驗自志, 管取他日成就.吾將以益夫三年學, 卜終身德業. 삼년유성(三年有成)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자신이 등용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 삼년고적(三年考績) 《서전》 〈순전(舜典)〉의 "3년마다 한 번씩 성적을 고사(考査)하였다.〔三載考績〕"라고 하였다.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 《논어》 〈태백(泰伯)〉에 "3년을 배우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얻기가 쉽지 않구나.〔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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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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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오 석규에게 보냄 무진년(1928) 與洪燦五 錫奎 戊辰 대저 옥(玉)이 원석 가운데 있으면 한 개의 돌을 벗어나지 못하고, 목재가 산에 있을 때는 한그루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숙련된 석공이 탁마(琢磨)하고 대장(大匠)이 승착(繩斲) 해야 규(圭 홀), 새(璽 옥새), 장(璋), 찬(瓚 제기) 등으로 각각 그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고, 동량(棟樑 마룻대와 들보), 각최(桷榱 서까래) 등으로 각 쓰임에 들어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완성할 수 없고, 나무는 먹줄을 따라야 바르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쪼고, 갈고, 먹줄을 대어 깎아냄에 그 헤치고 쳐내는 것이 매우 심하지만, 옥과 나무가 일찍이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 쓰임을 다하게 함으로서 그 본성을 이루어주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사람 또한 그러합니다. 만일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꿈틀대는 한 동물일 뿐입니다. 반드시 엄한 스승에게 채찍질을 받고 외경하는 벗에게 연마와 질책을 받은 연후에 현성(賢聖), 호걸로 각각 그 그릇을 완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고, 간언(諫言)을 따라야 성인이 된다."5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승과 벗의 채찍과 질책은 석공과 목수의 갈고 깎아내는 것에 비하면,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안마하는 것보다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채찍과 질책을 받는 자가 자신을 해칠까 의심하여 마음을 편안케 가지지 못한다면 덕업이 무엇을 쫓아 정밀하고 완숙하게 되겠습니까? 그대 형제는 약관의 나이에 두각이 뚜렷하니 진실로 사람 가운데 소중한 보배요, 빼어난 목재입니다. 그러니 원하건대 더욱 깎고 쪼는 다스림을 받아들여서 규장(圭璋)과 동량(棟樑)의 쓰임을 이루기 바랍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말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공을 돕고자 합니다. 夫玉之在璞, 未離乎一箇石, 材之在山, 未離乎一箇木.及乎良工琢磨之, 大匠繩斲之, 圭璽璋攢, 各致其美, 棟樑桷榱, 各中其用.故曰 玉不琢, 不成器, 又曰木從繩則正, 夫琢磨之繩斲之也, 其戕賊椓喪, 亦已甚矣, 玉與木之不曾怨者, 以盡其用而遂其性也.惟人亦然.苟不學問, 則實不離乎蠢動一物而已.必也鞭策於嚴師, 淬礪於外友, 然後賢聖豪傑, 各成其器.故曰不學不知道, 又曰從諫則聖.然師友之策礪, 其視工匠之琢斲焉, 不啻爬痒按痛之不若.而受之者, 乃或疑其厲己而不安意焉, 則德業安從而得精熟哉? 君之昆季, 弱冠嶄然, 誠人中之重寶秀木.吾願其益受鑿沙斤錫之治, 俾成圭璋棟樑之用.故爲是說, 助其進修之功. 배우지……된다 "옥은 조탁하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거룩해진다[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서경》 〈열명(說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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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거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張文居 己巳 편지에서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에서 가히 스스로를 닦는 절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선생을 인용해 말한 것에서 반드시 스승삼고 본받을 바를 알았을 터인데, 다시 나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요? 대개 동래(東萊) 선생의 기질은 그 병폐가 치우치고 조급함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궁자후박책인(躳自厚薄責人)"63)이라는 한마디 말을 얻어 번연히 고치고 깨달았는데, 그것이 마치 베틀을 돌리는 것처럼 민첩하고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그러니 그대 또한 자신의 기질 병폐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또 고서(古書) 가운데 어떤 말이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세요. 성심으로 그것을 구한다면 반드시 들어맞지 않는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바둑판을 맞이한 자는 미혹되고, 곁에서 보는 자는 맑다는 그 이치가 없지는 않으니, 그대가 타인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대를 보건대 진밀(縝密)하고, 견실(堅實)하고, 응정(凝靜 의젓함)하고, 간묵(簡默)하여 진실로 물에 두어도 새지 않고 산처럼 움직임이 없을듯합니다. 그러니 학문에 나아가는 아름다운 자질인데 여기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다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라는 의미에서 질책하자면 그대에게 편체(偏滯), 혼침(昏沈)의64) 병폐가 있는듯합니다. 그리하여 대수(大受)65), 부유(富有)66)에 방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맞는 약재를 구해주자면 《주역》 경문의 관이거지(寬以居之)67), 《논어》의 불가불홍(不可不弘)68), 《중용》의 고명(高明)69), 《맹자》의 대용(大勇)70)이 해당될 것입니다. 그대가 시험 삼아 세월의 공부를 더하여 힘써 나아간다면 동래선생의 한번 변하여 효과를 거둔 것과, 빠르고 느림은 같지 않더라도 평생 터득한 전체의 대용은 동래선생이 거둔 효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더욱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所需變化氣質之法, 可見自修之切實.而其引呂東萊先生而爲說者, 是必知所以師法矣, 乃復求於鄙說何也? 蓋東萊之氣質, 病在偏乖粗急.故得躳自厚薄責人一語幡然改悟, 若轉機之捷, 反手之易.賢亦試思, 我之氣質, 病在何處.古書中何語可藥吾病.心誠求之, 必無不中之理也.雖然當局者迷, 傍觀則淸, 不無其理, 賢所以求之於人者, 無乃以此也歟? 以吾觀於賢者, 縝密堅實, 凝靜簡黙.眞置水不漏, 如山不動.進學美質, 何以加此? 但責備以論, 則似有偏滯昏沈之病.而恐妨於大受富有.若求其對證之劑, 則大易之寬以居之, 論語之不可不弘, 中庸之高明, 孟子之大勇, 其可以當之乎.賢者試可歲月之功, 而力進之, 則其與東萊之一燮奏效者, 遲速雖不同, 其生平全體大用之所得, 又非如東萊已奏之效而止也, 豈不更快哉? 궁자후박책인(躳自厚薄責人)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몸소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을 책하기를 적게 한다면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躳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있다. 편체(偏滯), 혼침(昏沈) 편체는 치우치고 침체되는 것이며, 혼침은 정신을 놓아서 혼미해지는 것이다. 대수(大受)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작은 일에 알 수는 없으나 큰 것을 받을 만하고, 소인은 큰 것을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일에 알 수는 있다.〔君子, 不可小知而可大受也;小人, 不可大受而可小知也.〕"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부유(富有)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을 대업(大業)이라고 이르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성덕(盛德)이라고 이른다.[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라는 말이 있다. 관이거지(寬以居之) 《주역》 〈건괘(乾卦)〉에 "군자는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분별하며, 너그러움으로써 거하고 인으로 실행한다.〔君子學以聚之 問以辨之 寬以居之 仁以行之〕"라고 하였다. 불가불홍(不可不弘)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선비는 그릇이 크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고 하였다. 고명(高明) 《중용장구》 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도 삼으니,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을 극진히 하고 중용을 따른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라고 하였다. 대용(大勇) 《맹자》 〈공손추 상〉에 "내 일찍이 대용(大勇)을 부자(夫子)에게 들었다.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吾嘗聞大勇於夫子矣.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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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은기 【계축년(1913)】 樵隱記 【癸丑】 선비는 세상에 태어나 공자와 맹자의 도를 배우고 요순과 같은 임금의 조정에 서서 위로는 임금에게 인(仁)과 의(義)를 진달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이로움과 은택을 베푸니, 이것이 선비의 상도(常道)이지만 혹 천하의 변란을 만나 도를 행할 수 없으면 이내 이름과 자취를 감추고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르기를,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9)라고 하였다. 그러한즉 은둔은 현인이 즐겨 하는 바가 아니고, 또한 군자가 그만둘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옛날에 은둔했던 사람 중에는 어염(魚鹽)과 저자 가운데에서 은둔한 자가 있었고, 밭두둑이나 담장을 쌓는 곳 사이에서 은둔한 자도 있었으니10), 이는 모두 그 처한 바에 따라 은둔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영주산(瀛洲山)에서 남쪽으로 20리 되는 모의촌(慕義村) 내에서 광산 김공(光山金公)이 몸을 닦고 의를 행한 지 어언 50년이 되었는데, 근래에 오랑캐와 짐승 같은 자가 가득하고 위아래가 전도된 것을 보고서 더욱 자취를 숨긴 채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단절하였으며, 이내 거처하는 집에 '초은(樵隱)'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거처한 바가 산에 의지하고 있음을 취한 것으로,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내가 삼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참으로 세속을 끊을 생각을 품었다면 비록 도시나 시장에 거처한다 하더라도 은둔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만일 외물을 사모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록 구름 속에 눕거나 노을 속에 깃든다 하더라도 다만 헛된 이름만 훔칠 수 있을 따름이니, 이로 말한다면 은거의 실제는 겉으로 내세우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하겠다.내가 알기에 초은공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열매를 주워 모아 동생(董生)처럼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바치고11), 땔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삶으며 요부(堯夫)12)에게 주역의 이치를 물어서 이미 효성스럽게 봉양하는 방법을 다하였고, 또 신묘하게 꼭 들어맞는 흥취를 얻었다. 때때로 또 붉은 벼랑과 차가운 시냇물 사이에서 우유자적하여 계수나무 부여잡고 가을바람에 읊조리며 고금의 득실을 비웃고,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청상곡13)을 연주하면서 이생의 영욕을 잊어버리고 초연히 세속 밖에서 스스로를 즐기느라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지도 몰랐으니, 비록 소산(小山)14)과 같은 자가 일어나 산중에서 머물기 어렵고 세모에 무료하다는 말로 부른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역(大易) 주역(周易)》의 이른바 현인의 은둔이라는 것에 합치되는 것이니, 그 '초은'이라는 이름과 어찌 그 실상이 부합하지 않겠는가. 士生乎世, 學孔、孟之道, 立堯、舜之朝, 上陳仁義於君, 下加利澤於民, 是其常也, 而厥或値天下變亂, 道不可行, 則乃韜名晦迹, 獨善其身焉.故《易》曰: "天地閉, 賢人隱." 然則隱非賢人之所樂爲, 而亦非君子之所得已也.是以古之隱者, 有於魚鹽市肆之中者, 有於耕稼版築之間者, 此皆莫不因其所處而隱也.瀛洲山南二十里慕義村中, 有光山 金公, 修身行義, 五十年于玆.近見夷獸充斥, 冠屨倒置, 益復韜晦, 杜門謝世, 乃以樵隱扁其居室, 取其所處之依乎山也.請余以記實.余竊以爲士苟抱絶俗之想, 雖城居市處, 不害其爲隱; 苟不免於外慕, 雖雲臥霞棲, 適足以竊虛名.由是言之, 隱居之實, 不在乎標榜, 在乎其心之如何爾.吾知樵隱公, 登山採拾, 供董生之甘旨, 柝薪烹魚, 問易理於堯夫, 旣盡孝養之方, 又得妙契之趣, 而時復優遊自適於丹崖寒流之間, 攀桂樹而咏秋風, 笑古今之得失; 撫枯桐而發淸商, 忘此生之榮辱, 翛然自樂於物表, 不知老之將至.雖有以山中難留歲暮無聊之說招之, 如小山者作, 不足以動其心.則此正合《大易》所謂賢人之隱也.其於樵隱之名, 豈不副其實也哉? 천지가 …… 은둔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라는 내용이 보인다. 옛날에 …… 있었으니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순(舜)은 밭두둑 사이에서 발신하였고, 부열은 담장 쌓는 곳에서 등용되었고, 교격은 어물과 소금을 파는 가운데에서 등용되었고, 관이오는 사관(士官)에 갇혔다가 등용되었고, 손숙오는 바닷가에서 등용되었고, 백리해는 시장에서 등용되었다.〔舜發於畎畆之中, 傅說擧於版築之間, 膠鬲擧於魚鹽之中, 管夷吾擧於士, 孫叔敖擧於海, 百里奚擧於市.〕"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생(董生)처럼 …… 바치고 당나라 때 안풍(安豐)에 은거하였던 동소남(董邵南)을 말한다.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효성을 다해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게 하자,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이면 나가 밭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책을 읽도다. 종일토록 쉬지 못하였으니, 혹은 산에서 나무하며, 혹은 물에서 고기 잡네.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에 올라 안부를 물으니, 부모는 근심스러워하지 않고, 처자식은 원망하지 않도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 《小學 善行》 요부(堯夫) 송(宋)나라의 유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자로, 이정지(李挺之)에게서 도가(道家)의 학문을 배우고 상수학(象數學)을 정립하여 역학(易學)의 대가가 된 인물이다. 저서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이 있다. 청상곡(淸商曲) 궁ㆍ상ㆍ각ㆍ치ㆍ우(宮商角徵羽)의 오음(五音) 가운데 가을에 속하는 상음(商音)의 맑고 구슬픈 노래를 말한다. 소산(小山) 소산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문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회남왕에게 초사류(楚辭類)의 사부(辭賦)를 많이 지어 바쳐 자신들을 불러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그중 굴원(屈原)에 가탁하여 산속은 군자가 거처할 곳이 못 되므로 속히 나오라는 내용의 〈초은사(招隱士)〉라는 작품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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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후당기 【기미년(1919)】 寒後堂記 【己未】 평상시에 법도를 잃지 않는 것은 쉽고, 변란을 만나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은 어려우니,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모두 잃은 자는 반드시 소인이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모두 얻은 자는 반드시 군자인(君子人)이다. 이 때문에 쉬운 것을 얻고 어려운 것을 잃은 자는 있지만, 어려운 것을 얻고 쉬운 것을 잃은 자는 없다.고금을 두루 살펴보건대, 시골의 훌륭한 선비와 나라의 대인이 평소에 전철을 잘 따라서 세상에 이름이 성대하게 알려진 경우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이 뼈에 사무치고 재앙이 피부에 임박하며, 혹 이단의 학설이 치성하여 천하를 바꿈에 미쳐서는 기가 꺾이고 현혹되어 그 지켜 왔던 것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드무니, 어찌 참으로 어렵지 않겠는가.대저 여름철의 기후가 한창 기세를 부릴 때에는 온갖 수목의 잎이 무성하여 온통 청록색 일색이 완상할 만하더니 조금 있다가 매서운 서리가 거듭 내리고 북풍이 성난 듯 세차게 불어대면 지난날 청록색 일색으로 완상할 만하던 것들이 쓸쓸하게 더 이상 생기가 없어지고, 단지 소나무 가지와 잣나무 잎만이 한 겨울에도 창창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군자가 변란을 만나 변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비슷하니, 뜻이 깊구나!  우리 부자께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시들지 않는다고 탄식함이여. 뜻이 있구나! 정의 이공(精毅李公)이 한후당(寒後堂)이라 명명함이여.아, 공 또한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물을 마시며 책을 읽을 때에 글 읽는 소리가 맑게 울렸고, 사방 이웃이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어도 집사람이 꾸어 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으니, 우뚝하도다! 가난함을 편안하게 여기는 굳센 마음이여. 삿되고 편벽된 말이 세상에 가득하고 온갖 갈림길이 사람을 현혹함에도 칠순의 나이에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나아가 질정할 곳을 두고서 남아 있는 수명이 부족한 줄 잊어버리는 데에 이르렀으니, 확고하도다! 도를 믿는 독실한 마음이여.다만 지금 천지가 막혀 우리의 도에 닥친 재앙이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공이 이미 잘하는 것을 인하여 훗날까지 미루어 적용할 수 있다면 곰 발바닥처럼 두꺼울지 생선처럼 얇을지, 기러기 털처럼 가벼울지 태산처럼 무거울지는 반드시 미리 계산하고 앞서 정한 바가 있을 것이다.15)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어찌 다만 당(堂)에 명명한 것이 뜻에 걸맞을 뿐이겠는가. 바로 사람 중의 소나무와 잣나무라 일컬어도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내가 장차 푸른 가지 부여잡으며 기풍 아래로 달려가고, 푸른 솔잎을 어루만지며 남은 그늘에 의탁하여 배회하고 서성거리며 한 해를 마칠 것이니, 바라건대 평범한 나무라고 해서 멀리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영광스러움이 크겠다. 處常而不失度易; 遇變而不易操難.難易俱失者, 必小人也; 難易俱得者, 必君子人也.是故得於易而失其難者有矣夫, 未有得其難而失乎易者也.歷觀今古, 鄕黨善士、邦國大人, 能循塗轍於平日, 蔚然聞達乎世者, 何限? 及乎凍餒切骨, 禍災剝膚, 厥或異說熾而易天下, 能不隕穫驚惑, 以喪其守者鮮焉, 豈不誠難矣乎? 夫夏令方殷, 萬木敷葉, 羣靑衆綠, 一色可玩, 少焉霜威疊降, 朔風怒號, 向之靑綠一色可玩者, 索然無復生意, 只見松柯柏葉, 蒼蒼特挺於大冬中.君子之遇變, 不變蓋似之.旨哉! 吾夫子歲寒後凋之歎也; 有志哉! 精毅 李公 寒後堂之命名也.噫, 公亦豈易得哉? 歠水讀書, 書聲淸越, 四隣積粟如山, 絶不許家人借貸, 卓乎其安貧之固.邪詖盈世, 百岐眩人, 七耋負笈, 就正有所, 至忘年數之不足, 確乎其信道之篤.第今天地閑塞, 吾道之禍, 有不可測者, 公能因其所已能, 而推用於異日, 則熊厚魚薄, 毛輕山重, 必有所宿算而前定者矣.誠有然者, 奚但命堂之稱志而已哉? 直謂人中之松柏, 殆無愧矣.吾將攀翠柯而趨下風, 撫蒼髥而庇餘蔭, 盤桓徜徉而卒歲也.幸無以凡木而遠之, 則與有榮也大矣. 공이 …… 것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생선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구절과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의 "사람은 언젠가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더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라는 구절의 내용을 인용하여 후한당의 주인인 이공이 죽는 날까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와 의리를 지킬 것을 예상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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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기 【기미년(1919)】 懶齋記 【己未】 방과 마루, 문과 창, 대야와 사발 등에 명(銘)을 두는 일은 고금의 사람이 잠시도 폐지한 적이 없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뜻을 여기에 담지 않은 것이 없기에 나는 나재공(懶齋公)의 편호(扁號)에 대해서 그가 법문(法門)을 깨고 어긴 것을 내심 괴이하게 여겼다가 그 재명(齋銘)을 읽고 난 뒤에 이름을 명한 것이 화둔 선생(華遯先生 전우(田愚))에게서 나왔고, 그 뜻이 매우 깊고 간절하여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그 말과 뜻을 부연하여 진술해도 되겠는가?무릇 천하의 일이란, 민첩함과 노둔함은 각기 그 유를 따르고, 장점과 단점은 똑같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으니, 비록 조물주의 신묘함으로도 비오는 날씨와 갠 날씨를 둘 다 갖출 수 없고, 해와 달의 밝음으로도 낮과 밤을 함께 비출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게으른 것이 있는 뒤에 부지런한 것이 있으니, 부지런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은 반드시 게으르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악에 게으른 자가 반드시 선에 부지런한 자이고, 영리에 부지런한 자가 바로 의리에 게으른 자임을 알겠다.현재 공은 독으로 창을 내고 가시덤불로 대문을 만들어 살면서도 넓은 저택처럼 여기고, 여기저기 꿰맨 옷을 몸에 걸치면서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재주가 서툰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게으른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의당 부지런한 것은 삼천 삼백(三千三百)16)을 강론하고 일도양단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스승의 뜻을 좇음이여, 나는 그가 허물을 면했음을 알겠다.내가 또 생각하건대, '게으름[懶]'이라는 글자는 '심(心)'방에 '힘입을 뢰[賴]'자로 이루어졌으며, 마음은 의리의 본심이 있고 또한 이욕의 사심이 있으니, 진실로 본심을 힘입는다면 이는 또한 악에 게으른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힘입는 것이 사심에 있다면 두렵게 여길 만한 것이 의리에 게으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또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이 되는 기관(機關)이니,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고, 인간 세상을 경계시키고 반성하게 할 수 있는 점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공에게 고하고 편액 뒤에 끌어다 이어 써서 이 재실에 오르는 자에게 질정하도록 권고하였다. 室堂、戶牖、盤盂之有銘, 今古人未之或廢, 而莫不勤勵之意是寓.余於懶齋公之扁號, 竊怪其用打乖法門, 及讀其齋銘, 然後知命名出自華遯先生, 而其意之深切, 有匪夷所度者矣, 請敷其說而衍其義可乎? 凡天下之事, 敏鈍各以其類, 長短均有得失, 雖以造化之神也, 而未得雙備於雨暘, 日月之明也, 而不能通照於晝夜, 而況於人乎? 是故有所懶而後有所勤, 無所不勤者, 必無所不懶者也. 吾知其懶於惡者, 必勤乎善者也; 營利勤者, 乃義之懶者也.方公甕蓽而爲廣廈, 身百結而不恥生理之疏.懶也若是, 宜其所勤者, 三千三百之是講, 而一刀兩段之是務也.居是齋而遵師旨乎, 知其免矣.夫抑余又念懶之爲字, 從心從賴, 心有義理之本心, 亦有利欲之私心, 苟本心之是賴, 斯不亦懶於惡者乎? 如所賴在於私心, 可畏者非懶於義乎? 此又舜、跖之機關, 尤不可不愼, 而有足以警省人世者.旣以告之於公, 牽連書之扁後, 諗質于登斯齋者. 삼천 삼백(三千三百) 크고 작은 예절을 말하는 것으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서는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27장에서는 "넉넉히 크도다. 예의가 삼백 가지이고, 위의가 삼천 가지이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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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을유년(1945) 答金聖九 乙酉 그대가 초상을 당한 후 이미 일주기가 되어 연제를 지낼 때 일찍이 몸소 조문하지 못하여 조문 편지로 대신하고, 그대 형님의 부음을 받은 후 시일이 또 이미 오래되었는데 조문 편지조차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사(人事)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멀리서 은혜로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대 집안의 상사의 고통과 조국부흥의 바람을 간절히 말씀하셨는데, 저를 한 집안의 친척으로 여겨주는 것과 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후의를 깊게 느꼈으니,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작고하신 그대 형님의 일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도를 부흥시키고 강토를 회복하는 데에 쓰지 않은 계책이 없었건만 끝내 금년 7월 8일에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먼저 열흘 전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오늘의 기쁜 소식은 통괄적으로 말하면 온 국민의 보편적인 경사이고 단편적으로 말하면 당신 집안 일가의 경사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대 선친과 선형의 밝은 충심은 죽을 때까지도 굳건함이 이미 이와 같았고, 모친을 여의어 상중에 있는 당신은 오십 년 동안 문을 닫고 스스로를 바르게 하였습니다. 당신 막내 동생의 여러 해 동안 우울한 생각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신장되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이미 즐거이 쳐다보며 기염을 토해내니, 작고하신 분들의 혼령이 살펴봄이 또한 어찌 매우 밝아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것으로 소회를 푸시어 절대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도리어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질병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처음으로 통쾌한 일을 봤으니, 삼려대부 굴원처럼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고 싶었던 소원78)을 이룰 수 있음을 스스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처음에는 병을 무릅쓰고 문하에 이르러 먼저 위로의 예를 드리고 아울러 소회를 모두 토로하려고 했는데, 끝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지 못한 채 다만 셋째 아들 형관을 보내 대신 가게 하니, 정말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다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은 비록 매우 용렬할지라도 다행히 왜놈의 더러움엔 오염되지 않았으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주셔서 흥성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自尊遭憂, 朞而練矣, 曾不躳吊而替以狀, 自承令伯氏訃音, 日亦久矣, 而狀且未遑.責以人事, 宜遭疎斥, 乃蒙遠賜惠狀.尊門喪禍之痛․祖國興復之幸, 說到懇至, 有若一家之親, 深感厚意, 不知攸謝.噫, 先伯氏一生, 承先庭遺志, 扶道復疆, 計無不至, 而竟未聞今年七月八日之喜報, 先逝於旬日前, 寧不悲哉? 雖然, 今日喜報, 統言則萬姓之普慶, 偏言則謂尊門一家之慶, 可也.先父兄炳然之丹, 至死蘊結既如是, 哀侍之半百歲, 杜門自靖, 令季氏積年壹鬱之思想, 又如何哉? 而乃一朝見伸, 生者既快覩而吐氣, 則神鑑亦豈不孔昭而悅豫乎? 幸願以是遣懷, 切勿過悲, 還以自慰, 如何? 澤述疾病垂死, 始見快事, 自幸遂屈三閭度世之願已耳.初欲力疾詣門, 先伸慰禮, 兼究所懷, 竟以不能自振, 而止送第三子炯觀替行, 殊切歉悚, 幸再恕之.兒子雖庸甚, 尚幸不染倭穢, 願一言之敎, 俾有興成也. 삼려대부……소원 주희(朱熹)가 유덕수(劉德修)에게 답한 편지에 "굴원이 지나간 일은 미칠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서 속진의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기를 원함이 있었으니, 이 또한 당시 사람들의 망녕된 일을 견디지 못하여 그들이 마침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매양 글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기만 하면 한 번 크게 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屈平以往者不及來者未聞, 而有長生度世之願, 亦是不堪時人之妄作, 而欲見其末梢作如何出場耳. 每讀至此, 未嘗不發一大笑也〕"하였다. 《주자대전속집(朱子大全續集)》 권6 〈답유덕수(答劉德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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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기 【정미년(1907)】 庭松記 【丁未】 모든 생물이 생장하는 데에 다행스러운 것이 있고 불행한 것이 있으며, 또 불행 중에 다행한 것이 있고 다행 중에 불행한 것이 있으니, 내 집에 외따로 자라는 소나무로 징험해보면 그것이 진실로 옳음을 알 수 있다.이 소나무는 뜰 가의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생장하여 뿌리와 줄기가 이리저리 굽어지고 꺾여 재목답지 못하고, 가지와 잎이 서리서리 얽히고 막혀 뻗질 못하니, 다행이 깊은 산의 울창한 숲 속에서 생장하여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천 사람을 덮어주는 것과 비교하면 불행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장인이 베거나 나무꾼이 자름에 미쳐서는 깊은 산에서 생장한 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리지만, 이것은 운치를 아는 시인이나 청렴한 선비에게 취해져 쉬거나 머무는 사랑을 받아 꺾이고 베어지거나 잘리고 뽑히는 우환이 없으니, 이에 다행 중에 불행한 점이 있고, 불행 중에 또한 다행한 점이 있다.아, 옛 군자는 불행스럽게도 깊은 골짜기나 머나먼 바닷가의 변방에 있을 때에는 가난하여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곤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인을 좋아하는 자가 일어나면 천거하여 묘당(廟堂)의 높은 자리에 두어서 녹봉으로 부유하게 하고 관작으로 귀하게 하며, 신의로 맡기고 공경으로 존숭한다.내가 비록 오늘날 세상에도 또한 옛 군자처럼 위에 있는 자에게 등용되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좋은 땅에서 자라지 못하였으나 끝내 사람의 사랑을 받는 소나무가 이러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감흥이 일어 마지않는 이유이고,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1)는 우리 공자가 이미 찬양하였으니, 앞으로 날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읊조릴 것이다. 凡物之生, 有幸者, 有不幸者, 又有不幸而幸者, 幸而不幸者.以余家所存孤松驗之, 知其信然矣.是松也, 生於庭除瘠埆之地, 本幹屈曲而不材, 柯葉鬱結而不揚, 視幸而生乎深山茂林之中, 上干雲霄, 下庇千人者, 可謂不幸也.然及乎匠石斬焉, 樵者伐焉, 則生乎深山者, 將一朝而盡, 而此則爲韻人淸士之所取, 有憩稅盤桓之愛, 而無敗伐剪拜之患.於是乎, 幸者有不幸矣, 不幸者亦有幸矣.嗟呼, 古之君子, 不幸而在荒谷絶海之濱, 貧不能自食, 窮不能自保, 幸而有好賢者作, 進而置之廟堂之上, 富之以祿, 貴之以爵, 任之以信, 尊之以敬.余雖不知今之世, 亦有如古之君子, 爲在上者所取.然今松之不生樂地而終爲人愛者, 有似乎此.此余所興感而不已者也.若其歲寒後凋之節, 吾夫子已贊揚之, 方且日三復焉.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맨 늦게 시드는 절개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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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암기 【정미년(1907)】 果菴記 【丁未】 외제(外弟) 자정(子貞)이 일찍이 나에 말하기를,"내가 거처하고 있는 암자에 '과(果)'로 편액을 하였으니, 형님께서 저를 위해 그 사실을 기록해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이에 응답하여 말하기를,"이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과'에서 무엇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세상이 여러 음(陰)이 양(陽)을 박해하는 시기여서 그대는 먹지 않고 남겨둔 큰 과일[碩果]을 보호하듯 하나의 양[一陽]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가?2)《예기》에 이르기를, '장차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한다.'3)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부모가 이미 돌아가신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이라고 하였다면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신 자는 더욱 알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취한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유(由 계로(季路))는 과감하니,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4)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계로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아니면 세상의 혼란이 이미 극도로 심하여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은둔자처럼 과감하게 하려는 것인가?또는 혹 타고난 기질에 얽매여 대인(大人)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행하는 것을 반드시 과감하게 하여 오히려 선비라는 이름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인가? 그대는 나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게나."하였다. 자정이 말하기를,"괴이하군요! 형님이여.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하여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노력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자기는 천 번을 노력해야 한다. 이 방법을 과감하게 잘한다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건해진다.'5)라고 하여 진실하게 당부하는 뜻을 다했으니, 이것이 학문을 하는 전체요, 덕에 들어가는 큰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과감하게 잘한다[果能]'의 '과'가 있는 줄 모르고, '과' 중에 단지 한 가지 일로 말한 것과 성인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과'만을 취하여 견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제가 암자에 편액을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제가 사숙하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께서 시험 삼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그 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이에 문득 깨닫고서 말하기를,"내가 알겠다. 무릇 성인이 성인이 되는 이유는 명철하고 강건하기 때문이고,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우둔하고 유약하기 때문이니, 우둔하고 유약한 것을 변화시켜 명철하고 강건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변화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될 수 없고, 비록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과감하고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또한 될 수 없으니, '과'라는 한 글자는 천 마리 소보다 힘이 세고 열 마리 호랑이보다 용감하니, 바로 평범한 사람을 단련시켜 성인으로 만들어주는 성패의 기관이 된다.만약 과감하게 행하여 명철함과 강건함에 이를 수 있다면 음이 성대한 세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저절로 하나의 양을 보호하고 지키기를 큰 과일처럼 할 수 있을 것이고, 선을 하려고 할 때에 저절로 부모를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며, 뜻을 얻어 정사에 종사하게 되어서는 저절로 계로처럼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은둔자의 과감함6)이나 소인이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7)은 또 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간옹이 명한 이유와 자정이 편액을 한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자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지금에서야 비로소 '과암(果菴)'의 사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남은 감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힘을 쓰는 방법은 공자가 다섯 가지 부조(不措)8)의 가르침을 두었으니, 내가 앞으로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하였다. 外弟子貞嘗謂余曰: "吾所居之菴, 扁之以果, 兄爲我記其實." 余應之曰: "是不難.然余未知子奚取於果也? 今之世, 群陰剝陽, 子欲保一陽, 如碩果之不食耶? 《記》曰: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此爲父母已沒者言.然旣云'父母雖沒' 則其父母俱存者, 尤可知矣.子其有取於此耶? 孔子曰: '由也果, 於從政乎, 何有?' 子其有志於從政而學季路耶? 抑世亂已極, 不可以有爲, 故欲長往不返, 如隱者之果哉耶? 又或氣稟所拘, 不能爲大人, 則無寧所行必果, 猶欲不失士之名耶? 子其明告我." 子貞曰: "異哉! 兄也.孔子曰: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人一己百, 人十己千, 又以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剛.' 致其丁寧之意.此爲學之全體, 入德之大方.兄不知有果能之果, 乃取果之只以一事言者及聖人所不屑之果而擬之, 何也? 吾之扁菴, 蓋出於此, 而亦非吾之所私艮齋 田先生之所命也.兄試思之, 必得其說." 余乃憬然而悟曰: "余知之矣.夫聖人之所以爲聖人者, 以其明且剛也; 凡人之所以爲凡人者, 以其愚且柔也.能變愚柔而爲明剛, 則凡人亦可以爲聖人矣.雖欲變之, 而不用學問百千之功, 未可也; 雖用學問百千之功, 而不果能用之, 亦未可也.果之一字, 大於千牛, 勇於十虎, 乃鍛凡鑄聖之成敗機關也.苟能果而致明剛焉, 則遇陰盛之世, 自能保守一陽而如碩果矣; 將爲善, 自能思父母而必果矣; 得志而從政, 自能如季路之果矣.至於隱者之果哉, 小人之行果, 又不足道矣.艮翁之所命, 子貞之所扁, 其以此哉." 子貞喜曰: "今乃記得果菴之實, 無復餘蘊矣.其用力之方, 夫子有五不措之訓, 吾方且自勖焉." 오늘날 …… 것인가 《주역》의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5개의 음이 하나 남은 양을 박해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박괘 상구(上九)〉에 "마지막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대한제국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박괘〉에 비유하고, 이에 대처하는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박괘 상구〉의 효사(爻辭)를 인용해 표현한 것이다. 선한 …… 행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 장차 선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고, 장차 선하지 못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수치와 욕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라는 내용이 보인다. 유(由)는 …… 있겠습니까 《논어집주》 〈옹야(雍也)〉 제6장에 보인다. 널리 …… 강건해진다 《중용장구》 제20장에 보인다. 은둔자의 과감함 원문의 "은자지과재(隱者之果哉)"를 국역한 것으로,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孔子)가 천하를 경륜할 뜻을 지니고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삼태기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한 은사(隱士)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것이다.〔莫己知也, 斯已而已矣.〕"라고 말하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게 처신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다.〔果哉! 末之難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소인이 …… 것 《논어집주》 〈자로〉 제20장에 자공(子貢)이 '선비[士]'의 세 번째 수준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을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국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또한 그다음이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다섯 …… 부조(不措) 《중용장구》 제20장 제19절에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면 놓지 않는다.〔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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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육재기 【경신년(1920)】 樂育齋記 【庚申】 태인(泰仁) 서쪽, 용산(龍山) 남쪽에 고 반포재(伴圃齋) 이공(李公)의 학당이었던 옛 터가 남아 있었는데, 그 5대손 재형(載珩)과 광범(廣範)이 종당(宗黨)의 자제들을 위해 그 터에 서재(書齋)을 지어 '낙육(樂育)'이라 명명하고 나에게 한 마디 말로 권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에 대해 추맹씨(鄒孟氏 맹자)가 천하에 왕 노릇 하는 즐거움도 그 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17) 이는 매우 큰일인지라 덕이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여기에 해당할 수 있거니와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또 영봉인(穎封人)을 들어 실증하였으니,18) 사람을 교화하는 한 가지 선이나 그릇을 완성해 주는 한 가지 재주라도 또한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모든 천하 후진의 부형(父兄)과 스승, 존장이 된 자들은 큰 즐거움으로 스스로를 작게 여겨 자처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광범은 이러한 의리를 깊이 아는 자일 것이다.반포공(伴圃公)은 영조와 정조의 태평성대한 때를 만나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지위가 3품(品)까지 올랐으니, 문장과 현명함, 재능이 반드시 세상에 우뚝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에 걸맞게 나아갔다면 금자(金紫)와 은청(銀靑)19) 등 어느 관작이든 될 수 없었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이것을 버리고 취하지 않았으며, 산림 속 여막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설치한 것은 학사(學舍)와 강단(講壇)이고, 일삼은 것은 후진을 이끌어 도와주는 것이며, 가르친 것은 효제ㆍ충신(孝弟忠信)과 궁리ㆍ수신(窮理修身)의 도였으니, 가벼운 일과 중대한 일 사이에서 즐거움으로 삼을 바를 잘 가렸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에게 미친 아름다운 은혜를 생각하면 진작하는 자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었을 것인데, 그 시대가 멀고 유풍이 아득하여 대강 고찰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지금 광범이 이 일을 한 것은 본디 자제들을 교육할 곳을 마련하고, 또한 선조의 일을 계승하기 위해서이다. 한 가지 일에 자애와 효성의 도가 갖추어졌으니, 어느 누가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하의 일은 이름과 실상이 서로 걸맞기 어려우니, 실상이 있지 않으면 이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청컨대 내가 '낙육'이라는 이름에 대해 인재를 기르는 실상을 논해보고자 한다.그 실상의 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오직 반포공이 가르친 효제ㆍ충신과 궁리ㆍ수신의 도가 이것일 따름이다. 대저 글을 널리 읽고 힘써 기억하며, 문장을 공교롭게 하고 언사를 화려하게 하도록 가르치고, 일의 공적을 중시하고 명예를 좇게 하여 세상에 팔리기를 구하되 자기에게 체득함이 없는 것은 비록 인재를 기른다는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상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하고 어른에게 읍양(揖讓)의 예절을 지키며, 임금을 사랑하고 벗과 친하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자기의 사욕을 이기도록 가르쳐서 자신에게 덕을 갖추고 남에게 선을 미루어 가게 하는 것은 그 실상이 있고 그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고금의 교육계에서 이미 증험한 허상과 실상이다.그러나 근래에 서구의 학문이 한창 치성하고 풍조가 한번 바뀌게 되어서는 임금이나 어버이가 자신과 평등하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무리들이 잇따라 나오고, 늙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말하면서 능멸과 모욕을 방자하게 행하며, 금전을 숭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절하게 권면하고 어려움을 위급하게 여기는 풍조가 씻은 듯이 없어졌으며,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기이한 재주가 되어 하늘과 사람의 도가 어두워졌고, 몸을 닦는 것은 위생으로 간주되어 선왕의 예의가 무너졌다. 무릇 이것들은 모두 사람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큰 환란이니, 더욱 통렬한 마음으로 싫어하고, 분한 모습으로 배척하여 물과 불처럼 여기며 밟아서는 안 되고, 독약처럼 여기며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다.청컨대 광범은 강인하고 굳세며 순수하고 올바른 사람을 맞이하고 미친 풍조를 잘 막아서 이 서재에서 헛되이 겉만 꾸미는 군자를 끊어 버리고 단단하게 오직 실상만을 가르치길 바란다. 진실함이 쌓이고 오래도록 힘쓴다면 훗날에 큰 덕을 지닌 사람이 이 서재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진실로 그렇게 된다면 광범이 선조의 훌륭한 가업을 잇는 것은 참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교육을 즐거움으로 삼는 공적이 또 어찌 횡거 선생이 영봉인을 허여한 것에 견주겠는가.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 중 한 가지를 자신이 직접 소유하는 데에 진실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장차 눈을 씻고 그 날을 기다린다. 泰仁之西, 龍山之陽, 有故伴圃齋 李公學堂遺址.其五世孫載珩、廣範爲宗黨子弟, 就其址築書齋, 名之以樂育, 請余一言而勖之.余惟得天下英材育之, 鄒孟氏謂其樂, 王天下且爲之下, 此大小大事, 宜若德足爲天下師者, 乃可以當之.而橫渠先生, 又進穎封人而實之.則知一善之化人、一材之成器, 亦足以與此.而凡爲天下後進之父兄師長者, 不容以其樂之大者而自小不居也審矣.廣範其惟深知此義者乎. 蓋伴圃公當英、正盛際, 早捷巍科, 位陞三品, 文章賢能, 必有卓然乎世者.稱此而進, 金紫、銀靑, 何所不可, 乃舍此不取, 退藏林廬, 所設者學舍講壇, 所事者誘掖後進, 所以敎之者, 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也, 可謂擇所樂於輕重之間者也.想其嘉惠之及, 蔚然有作者之輩出, 而恨其世遠風邈, 無所槩攷也.今廣範之爲此擧, 固爲子弟敎育地, 而亦所以述先事也.一物而慈孝之道備, 夫孰不嘉尙之也? 雖然, 天下事, 名與實相稱之爲難, 實之不存, 名何有焉? 余於樂育之名, 請得以論育才之實.實之道烏乎在? 亦惟伴圃公所敎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是已.夫敎之以博文强記、巧文麗辭, 重事功徇名譽, 求售乎世而無得乎己者, 雖有育才之名, 而非其實也.敎之以定省揖讓、愛君親友、格致省克, 進德乎己而推善於人者, 是則有其實而副其名者也.此固古今敎育界已驗之虛實.至若近日歐學方熾, 風潮一變, 謂君親平等, 而亂賊接踵矣; 謂年老無用, 而凌辱恣行矣; 謂金錢是崇, 而切偲急難之風掃如矣.窮理歸於奇技, 而天人之道晦; 修身看作衛生, 而先王之禮壞.凡此皆戕人禍世之大患, 尤當痛心而惡之, 扼腕而斥之, 如水火之不蹈, 烏喙之勿食者也.請廣範延剛毅純正, 能障狂潮, 絶虛文之君子於是齋, 斷斷然惟實之是敎, 眞之積而力之久, 則安知異日不有大德人出自是齋中也耶? 苟其然者, 廣範箕裘之紹, 固不須言, 其樂育之功, 又豈橫渠所與穎封人比哉? 孟子所謂三樂之一者, 固不害爲身親有之也, 方且拭眸而俟之. 천하의 …… 하였으니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사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 실증하였으니 횡거 선생은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횡거는 그의 호이다. 영봉인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신하 영고숙(穎考叔)으로, 국경을 지키는 관리[封人]를 지냈기에 영봉인이라 하였다. 영고숙은 장공이 아우 숙단(叔段)의 반역을 편든 어머니 강씨(姜氏)를 유폐하고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효심을 미루어서 장공에게 미치게 하여 그 역시 효자가 되게 하였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元年)》에 전해지고, 《시경(詩經)》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행은 다함이 없다. 길이 너의 동류에게 주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구절이 있는데, 장재가 이를 인용하여 〈서명(西銘)〉에서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동류에게 효심을 전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育英才, 潁封人之錫類.〕"라고 하였다. 금자(金紫)와 은청(銀靑) 금자는 금으로 만든 인장(印章)과 자주빛 인끈을 뜻하는 '금인자수(金印紫綬)'의 준말이고, 은청은 은으로 만든 인장과 푸른 인끈을 뜻하는 '은인청수(銀印靑綬)'의 준말로, 모두 고관대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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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음재기 【기미년(1919)】 惜陰齋記 【己未】 임자년(1912) 가을에 구산 선생(臼山先生 전우(田愚))이 경전을 안고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계화도(繼華島)20)에 들어가자, 사방에서 속정(束脡)의 예21)를 행하며 찾아오는 선비들이 대체로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4년이 지난 병진년(1916)에 우리 문하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계화도의 학사에 수용하지 못하여 우리 자제들이 계화도에 머물며 학업을 익히기가 어렵다."하고서 이내 장인을 불러 조그마한 서재를 세웠다. 서재가 완성된 뒤에 구산옹이 '석음(惜陰)'이라 명명하니, 내가 자제의 반열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에 감히 한 마디 말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여 말하였다."서재의 이름이 어찌 대우(大禹)가 촌음(寸陰)을 아낀 뜻22)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촌음을 아낀다[惜陰]'는 것은 어찌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쓴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성현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업적은 모두 촌음을 아끼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니, 유독 대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한 것은 대순(大舜)이 촌음을 아낀 것이고23), 밤을 이어 날이 새도록 우러러 생각하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것은 주공(周公)이 촌음을 아낀 것이며24),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느라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은 것은 공자가 촌음을 아낀 것이고25), 의리를 찾기 어려워 세월을 흐르는 강물처럼 여긴 것은 회옹(晦翁)이 촌음을 아낀 것이다.옛 경전의 가르침에서 찾아보면 《주역》의 "종일토록 힘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한다."26)라는 것과 《서경》의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다."27)라는 것, 《시경》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한다."28)라는 것, 《논어》의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한다."29)라는 것 등이 어느 것 하나 이러한 뜻 아닌 것이 없으니, 위대하구나! '촌음을 아낀다'는 뜻이여.성현의 언행은 해와 별처럼 밝고,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은 정려(鼎呂)30)보다 무거우니, 이 서재에 거처하는 자들이 어찌 감히 편안함을 짐독(鴆毒)처럼 보고 부지런히 애쓰는 것을 생맥산(生脈散)31)으로 여겨서 밤낮으로 허물을 반성하며 제때에 몸을 완성하지 않고,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방종하며 세월만 헛되이 버리겠는가.송독하고 강론하며 글을 엮고 글자를 쓰는 것도 또한 배우는 사람이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철(先哲)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의리와 선행에 그 노력을 다하지 않고, 오직 이런 것에만 힘쓰면서 촌음을 아끼는 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쳤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부형과 선생의 지극한 뜻이 아닐 것이니, 이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歲壬子秋, 臼山先生抱經入扶風之繼華島, 四方之士行束脡而來者, 蓋百數計. 越四年丙辰, 我門父老咸曰: "華之舍不容矣.吾子弟在華, 其艱乎肄業." 乃召匠, 立小齋.齋旣成, 臼山翁命之曰惜陰.澤述在子弟列者, 乃敢一言勖同人曰: "斯齋之名, 豈非取諸大禹惜寸陰之義乎? 而惜陰云者, 豈非勤勵不息之謂乎? 余惟從古聖賢盛德大業, 皆從惜陰中做出來, 非獨大禹爲然.鷄鳴而起, 孜孜爲善, 大舜之惜陰也; 仰思繼日, 得之待朝, 周公之惜陰也; 好古敏求, 終日不食, 孔子之惜陰也; 義理難尋, 日月如流, 晦翁之惜陰也.求之典訓, 《易》之'日乾夕惕'、《書》之'所其無逸'、《詩》之'日就月將'、《語》之'學不如及', 何莫非此箇義諦, 大矣哉! 惜陰之旨也.聖賢言行, 炳若日星, 父師訓誨, 重於鼎呂.居是齋者, 敢不視燕晏如鴆毒, 服勤苦爲生脉, 夙夜省愆, 及時成身, 而徒自伈俔游泛, 枉獘流光也哉? 至於誦讀講辨, 綴文寫字, 亦學者之不容廢者.然若不於先哲所思所求之義與善者, 致其力焉, 惟是之務, 而曰惜陰之能事已畢, 則絶非父兄先生之至意也, 是不可以不知也." 계화도(繼華島) 부안군 계화면에 있었던 섬 계화도(界火島)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72세에 이곳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속정(束脡)의 예 제자가 글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갈 때 간단한 예물을 바치는 예절을 말한다.《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속수의 예를 행한 자 그 이상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수(脩)는 포(脯)이니, 10정(脡)이 1속(束)이다. 속수는 지극히 박한 예물이지만 예를 갖추고 오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대우(大禹)가 …… 뜻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에 "대우는 성인이면서도 오히려 촌음을 아끼셨으니, 보통 사람의 경우는 마땅히 분음을 아껴야 할 것이다.[大禹聖者,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라고 하였다. 새벽닭이 …… 것이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하는 자는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탐하는 자는 도척(盜蹠)의 무리이다. 순과 도척의 구별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없다. 이익과 선행의 사이인 것이다.〔鷄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鷄鳴而起, 孶孶爲利者, 蹠之徒也. 欲知舜與蹠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하였다. 밤을 …… 것이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세 왕의 덕을 겸비하여 그분들이 행한 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였다.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으로 날을 이어서 하였고,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고 하였다. 옛것을 …… 것이고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종일토록 ……두려워한다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 厲無咎.〕"라고 하였다. 안일함이 …… 삼는다 〈무일(無逸)〉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아! 군자는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 것입니다.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나서 안일하면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를 알 것입니다.〔嗚呼! 君子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라고 하였다. 날로 …… 진보한다 〈경지(敬之)〉에 "나 소자는 총명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하여 학문이 계속해서 밝아져 광명에 이르고자 한다.〔維予小子, 不聰敬止, 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라고 하였다. 배움은 …… 한다 〈태백(泰伯)〉에 "공자가 말하기를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면서도 오히려 때를 놓칠까 두려워해야 한다.'라 하였다.[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라고 하였다. 정려(鼎呂) 하(夏)ㆍ은(殷)ㆍ주(周)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과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인 대려(大呂)로, 모두 크고 무거운 물건이다. 생맥산(生脈散) 인삼(人參), 맥문동(麥門冬), 오미자로 구성된 처방으로, 원기를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는데, 《동의보감》에 여름철에 이 세 가지 재료에 황기, 감초를 넣어 끓여서 물 대신 마시면 기력이 샘솟고, 폐를 깨끗하게 하며 심장의 열을 내려 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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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양재기 【을축년(1925)】 宗陽齋記 【乙丑】 음양(陰陽)이 천지에 있으면서 대대(待對)가 되어 한 해를 이루니, 공이 비록 어느 한 쪽을 빠뜨릴 수 없지만, 그 공을 논하면 양은 폄을 주관하고 음은 움츠림을 주관하며, 양은 생육을 주관하고 음은 살육을 주관한다. 때문에 성인이 《주역》을 말할 때에 항상 양을 부축하고 음을 억제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음양으로 사람을 논하면 양은 군자가 되고 음은 소인이 되며, 음양으로 덕을 말하면 양은 선덕(善德)이 되고 길덕(吉德)이 되며, 음은 악덕(惡德)이 되고 흉덕(凶德)이 된다. 이리하여 '음양'이라는 두 글자는 숙특(淑慝 선악(善惡))의 큰 관건이 된다.최군 민열(崔君敏烈)은 만종산(萬宗山)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지명을 인하여 '종양(宗陽)'으로 그 집의 편액을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을 받아 이른바 '큰 관건'이라는 것을 안 자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동서(東西) 두 물결이 일으킨 비바람에 천지가 뒤집혀 삼강(三綱)32)이 무너지고 사유(四維)33)가 사라져서 세상이 이미 순전한 곤(坤)34)의 상태에 들어갔다. 비록 그렇지만 하늘에서 나온 도의 근원은 변하지 않고, 부여 받은 마음의 떳떳한 본성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35)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때에 저 음을 곤란하게 하고 이 양을 강하게 하고자하는 뜻을 편액에 담았으니, 최군과 같은 사람은 그 뜻이 어찌 더욱 깊지 않겠으며, 그 관건이 어찌 더욱 크지 않겠는가.또한 군은 일찍이 육양 선생(六陽先生 전우(田愚))을 따라 배우면서 큰 제방이 되는 인도(人道)를 들을 수 있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일단의 음이 더욱 횡행하여 변괴가 관패(冠佩)36)의 사이에서 거듭 나오는 것을 목도하였으니, 비록 이 양을 종주로 삼고 저 음을 배척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절실한 것으로, 단지 천하를 위해서 근심한 것만은 아니다.아, 육양이 바친 자정의 의리는 바로 화양(華陽)37)이 명나라를 존숭한 것이고, 또한 자양(紫陽)38)이 촉한(蜀漢)을 황제의 정통으로 삼고, 추양(秋陽 공자)39)이 중하를 안으로 삼은 것이다. 육양을 종주로 삼은 것은 바로 삼양(三陽)40)을 종주로 삼은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비록 그렇지만 양을 종주로 삼은 실상은 편호(扁號)와 기문, 명문 사이에서 기필을 취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먼저 내 마음 위에서 증험한 폄과 움츠림, 생육과 살육의 생각을 따라 흉덕과 악덕을 제거하고 길덕과 선덕에 나아가서 한 명의 군자다운 사람이 된 뒤에야 거의 종양재의 주인이 되는 것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군은 힘쓰기 바란다. 陰陽之在天地, 相待而成歲.功雖不可以偏闕, 論其功則陽主舒而陰主慘, 陽主生而陰主殺.故聖人之說《易》也, 常扶陽而抑陰, 其意可知也.是故以之語人, 則陽爲君子, 陰爲小人; 以之語德, 則陽爲善爲吉, 陰爲惡爲凶.於是乎陰陽二字, 爲淑慝之大關矣.崔君 敏烈居萬宗山之陽, 因地名而以宗陽扁其齋, 其亦受聖人之意而知所謂大關者乎? 顧今二洋風雨, 天地翻覆, 三綱頹墮, 四維喪絶, 世已入乎純坤矣.雖然, 出天之道源不變, 降衷之秉彛罔墜, 是所謂陽無可盡之理者非此乎? 于斯時也, 乃欲艱彼而强此, 寓之於扁額, 如崔君者, 其意豈不尤深? 其關豈不尤大乎? 且君曾從學于六陽先生, 得聞人道之大防矣.山頹之後, 一陰滋橫, 目見變怪之疊出乎冠佩間, 則雖欲不宗此而斥彼, 又可得乎? 是則尊師衛道之切己, 不直爲天下憂也.嗚呼! 六陽之獻靖, 卽華陽之尊明, 亦紫陽之帝蜀, 秋陽之內夏也.宗六陽, 乃所以宗三陽也, 豈不偉哉? 雖然, 宗陽之實, 不可取必於扁號、記銘之間.須先從吾心上驗慘舒生殺之念, 去凶惡而就吉善, 成得一箇君子人, 然後庶不愧爲宗陽齋主人.君其勖哉. 삼강(三綱)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으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사유(四維)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원칙, 즉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를 이른다. 순전한 곤(坤) 《주역》에서 여섯 효가 모두 음효(陰爻)로 이루어진 〈곤괘〉을 말한다. 양은 …… 없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서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관패(冠佩) 관리들이 착용하는 의관(衣冠)과 몸에 차는 장신구로, 관리를 비유한다.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의 별호로, 그가 60세 때에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에 은둔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자양(紫陽) 주희(朱熹)의 별호로, 그가 1184년 복건(福建) 숭안(崇安)의 무이산(武夷山)에 자양서원을 짓고 한가로이 지낸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추양(秋陽)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 증자가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삼양(三陽) 화양 송시열과 자양 주희, 추양 공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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