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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吳士益 丙子 답장을 받들어 읽으니, 제 편지에 거론한 '중간에 끊어짐이 없음[無間斷]' 세 글자에 대해 반복해서 추론하고 연구하여 천인합심(天人合心)의 묘함에 이르러 극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단초를 열었고 그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문답이 이와 같다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비록 옛날의 이른바 연주를 듣고 그 마음이 바다에 있고 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지음(知音)23)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나가서 그 나머지를 다 안다면 장차 아무리 미세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단단하여도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의리가 아무리 정미(精微)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끝내 규명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으며, 천하가 의회(疑賄 의심스럽고 불분명함)가 비록 변론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해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에 고마움이 깊고 깨우친 것이 많았습니다.다만 제 편지 중에 '기심편견(忮心偏見 시기심과 편견)' 네 글자로 온 세상의 사류(士流)를 병통으로 여긴 것을 논한 다음, 인하여 우리 문하가 분열된 이유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저를 책망하여 반성하는 것으로 귀결을 지었습니다. 비록 군자가 고식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24)에 감사하지만 그것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돕는 지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장차 어떻게 함께 천하의 의회를 변론하고 천하의 의리를 규명하여 중간의 끊김이 없이 천인합심의 묘한 경지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멍하게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만드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아, 저는 이미 타고난 바탕이 아름답지 못하고 사욕도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평소에 안으로 보존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시기심과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 많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사를 위하여 무함을 변론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그것이 공심(公心)과 정견(正見)에서 나왔다고 자신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며 저승에서 선사에게 절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은 저와 30년을 함께한 오랜 벗이고 저는 이에 또한 13년간 한결같은 성심으로 대하였으니,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고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서25) 거의 이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형의 헤아리지 못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저는 바야흐로 형을 시기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서 더불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형은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다하여 더불어 말 할 수 없다고 여기니, 이른바 '친구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친구를 모른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아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중합니다. 마음이 이미 어두이니, 비록 의론의 일치가 있다고 한들 어찌 귀중하겠습니까? 또한 형이 지나쳤습니다.이미 "대체(大體)의 시비(是非)는 진실로 정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착함과 악함의 큰 가름은 어찌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미 연전에 "선사를 무함한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사람은 석농(石農)26)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음석(陰城)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양쪽의 사람을 화합시키고자 하니, 이것은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대저 성현의 학문은 '명변(明辨)' 공부가 많은 부분을 차지고 또 역할이 큽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학문하는 다섯 가지 일로 애공(哀公)에게 고할 때에 '독행(篤行)' 한 가지 일 외에는 모두 '명변' 공부였습니다.27) 오직 그 실재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행업(行業)에 드러난 것도 그러합니다. 《춘추》의 '선한 자를 포상하고 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도 원래 '명변'의 일입니다. 이후의 현인도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를 변론하고,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을 변론하고, 우암(尤庵)이 흑수(黑水)28)를 변론 한 것이 모두 이런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사 간옹선생(艮翁先生)은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변론은 진실로 큰일이었지만 사문(師門)과 관계된 일로는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黙) 문장을 배척하여 물리쳐서 전옹(全翁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진실로 평생의 사업이었습니다.29) 때문에 숨을 거두시기 전 며칠 사이에 쓴 문자는 이 의리가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우리들이 함께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지금 형은 이를 본받지 않고 양쪽을 화합시키려고 하니 그 또한 성현의 뜻과 다릅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기와 편견에 지나치게 징계하려다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정이지 않은 사심은 진실로 사심이거니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 또한 사심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음성의 《정절사전》에 운운한 것에 대해 비록 음성을 엄호하는 전순형(田舜衡)도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다 하였고, 음성과 당을 함께 하는 권순명이(權純命)도 오히려 의심스럽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반드시 설왕설래 할 필요가 없으니 한갓 붓과 혀를 낭비할 뿐이다."라고 한 것은 더욱 괴이합니다. 우리들의 강론은 이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질문하여 오직 옳은 것을 취할 뿐입니다. 제 설이 고견에 탐탁하지 않다면 상대의 설을 따를 수 없고 나의 견해를 버릴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따를 수가 없고 무엇 때문에 버릴 수 없는지를 마땅히 분명히 말해서 그 곡절과 핵심을 명백하고 시원하게 해서 자신의 심사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는 방법입니다.또 도리는 무궁한 반면 사람의 식견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현인의 현명함으로도 이기를 논함에 무려 9차례의 왕복 편지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식견으로 모든 의난(疑難)에 결단코 한 두 차례의 의논으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형이 알지 못함이 아닌데도 오히려 견고하게 벽을 세우고 자신의 견해를 묵수하여 의견을 주고받으려고 않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어서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인식한데서 나온 단안(斷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아! 이미 형이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또 형과 더불어 말할 수 없으니, 지난번에 온 시대를 돌아보면서 오로지 우리 형만 바라보았던 뜻이 혼자만의 소리였음이 절로 부끄럽습니다. 형이 이미 이와 같다면 세상에 누가 다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며 나와 더불어 말할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붓을 태우고 벼루를 깨뜨려서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한 글자도 쓰지 않겠습니다. 비록 대단히 무료할 지라도 일을 줄이고 정신을 아끼는 것에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득히 남쪽을 바라보며 편지를 씀에 슬플 뿐입니다. 奉讀惠覆,其於鄙書所擧"無間斷"三字,反覆推究,以至於天人合心之妙而極焉.是可謂我發其端,爾窮其致.苟問答之若此,其相長雖古所謂海山知音,何以加此? 推此以盡其餘,則將無微之不入,無堅之不破.天下義理雖曰精微,豈有終不可究? 天下疑晦,雖曰難辨,豈有終不可決之理哉? 區區於此感荷者深,警發者多矣.但其論鄙書中"忮心偏見"四字所病幷世士流者,而因言吾門分裂之由,終歸結於責弟以反省,雖感君子不以姑息之愛,然謂之相長知音如上所云,則未也.將何以與之辨天下之疑晦,究天下之義理,以致無間斷合天人之妙也哉? 使人憮然失圖,不知所以爲心.噫,弟旣質之不美,私之未克,平日所存所發,宜其出於忮心偏見多矣.至於爲師辨誣一事,敢自信其出於公心正見,而仰對蒼天而不愧,歸拜先師而有所藉手也.兄於弟三十年久要,弟於此亦十三年一誠,觀由察安,庶可以洞悉此心,而兄之不諒,胡至於此? 弟方謂兄爲不忮不偏可與語者,而兄則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所謂"故人知君,君不知故人"者此也.人之相知,貴相知心,心旣昧矣,雖有議論之合,亦奚足貴哉? 且兄過矣.旣云"大體之是非,固有在焉",則淑慝之大判,豈不若薰蕕之不同器、永炭之不相容乎? 故已於年前,以"不可不謂之誣師之書, 此人不當呼以石農"之言斥陰矣.今乃又欲兩邊之人與之和融,是欲薰蕕同器、永炭相容者也.夫聖賢之學,明辨之功,爲多且大,故孔子以爲學五事告哀公也,篤行一事外,皆是明辨工夫.惟其實旨之若此,故著之行業者亦然.《春秋》之褒善誅惡, 元是明辨之事.後此之賢蓋莫不然,孟子楊墨之辨,朱子蘇陸之辨,尢菴黑水之辨,皆是也.至我先師艮翁先生心性理氣之辨固爲大事,而事有關於師門者,則斥退嘉金之文以辨全翁之誣者,實爲生平事業.故以至屬纊前數日所著文字,亡非此義,此吾輩之所共親睹者也.今兄不此之法,而槩欲兩邊之合,其亦異乎聖賢之旨矣.此曷故焉? 殆過懲於別人之忮偏,而不免於有意爲公之私也.不公之私固私,有意爲公之私亦私也,可不畏哉? 惟其如是,故於陰撰鄭傳云云,雖以田舜衡之護陰,猶謂之不成說,權純命之黨陰,猶謂之可疑者,猶不覺其爲非,亦復如之何哉? 不寧惟是.又謂之"不須說往說來,徒費筆舌",則尢可怪也.吾人講論,非爲利也,非爲名也.虛心相質,惟是是取.鄙說有不槩於高見,則當明言爾說之不可從,我見之不可舍,如何而爲不可從,如何而爲不可舍,使曲折肯綮,明白通暢,吾之心事,人皆見之.是爲實心相與之道.且道理無窮,人見有限.故雖以栗、牛兩賢之明,其論理氣,至有九度之往復.今以吾輩之見,凡於疑難,決非一二次商確而所能了案者.兄非不知而猶堅壁墨守,不欲復論者,非有他焉,吾知其現出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之斷案也.嗚呼! 旣不得知心於兄,又不得與語於兄,向者環顧幷世,單望吾兄之意,自慙孤掌之嗚也.兄旣如此,則世間誰復有知我心、與我語者? 從今以往,焚筆碎硯,不復作一字書於人已矣.雖甚無聊,覺得省事嗇神,爲不妨者耶? 悠然南望,臨紙冲悵. 연주를……지음(知音)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高山)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가 "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 하였고, 유수(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열자(列子)》〈탕문(湯問)〉 군자가……것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군자는 도덕에 입각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반면, 소인은 그저 고식적으로만 사람을 사랑한다[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라는 말이 보인다. 말미암은……살펴서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는 "그 행하는 바를 보며, 그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석농(石農) 오진영의 호이다. 김택술은 오진영의 호를 부르지 않고 '오(吳)', '음성(陰城)', '음인(陰人)' 등으로 폄하하여 부르고 있다. 음성은 오진영이 말년에 기거한 곳이다. 공자가……공부였습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우리……사업이었습니다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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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병자년(1936) 與吳士益 丙子 저는 근래 《주자대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읽다가 "의리는 미루어 찾기가 어렵고 공부는 중간에 끊어지기 쉬운데,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니 매우 걱정되고 두렵다."14)라는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놀라서 경계하고 반성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세월은 하늘에 달려있고 의리는 사물에 달려 있으니, 그 쉽게 흘러가고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지력으로 그 본래 모습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공부는 나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성취하여 그 밝음이 일월과 같게 되고 그 이름이 우주에 드리우게 되면, 의리는 쉽게 찾을 수 있고 세월은 영원히 길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것' 이 한 가지 일은 어찌 우리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일찍이 생각해보았는데, 우리들과 성현이 천지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은 공부가 중간에 끊어졌는가, 끊어지지 않았는가의 어떠함에 관계된 것이니, 어찌 다만 기질을 청탁(淸濁)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이제 성현의 지난 자취를 가지고 구해보면, "오히려 촌음을 아꼈다."15)는 것은 대우(大禹)의 끊어지지 않음이고, "도를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16)는 것은 문왕(文王)의 끊어지지 않음이며, "밤으로써 날을 이었다."17)는 것은 주공이 끊어지지 않음입니다. 공자(孔子)가 먹는 것을 잃어버리고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 것18)도 끊어지지 않음이고, 안자(顔子)가 선을 가슴에 깊이 새긴 것19)도 끊어지지 않음입니다. 부지런히 두려워하며 스스로 힘써 그치지 않는 공부가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재 상황은, 밖으로는 몸가짐을 삼가지 못하고 말을 함에 법도가 없으며, 안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정밀하지 못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이 치밀하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모두 중간에게 끊어짐으로 인해 생긴 결과입니다. 그리고 송독(誦讀)에 과정이 없고 강론(講論)이 부지런하지 못하며20) 왕복(往復)에 기일을 넘기는 것도 모두 중간에 끊어진 것입니다. 끝내 어떻게 공을 세우고 이름을 드리우며 찾기 어려운 이치를 보아서 흐르는 세월과 함께 영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하며 편안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형은 근래에 날마다 더욱더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절로 기뻐할 운치가 있고 이처럼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십니까?이로 인하여 오늘날 세상을 생각해보니, 성학(聖學)은 사라지고 의리(義理)는 막혀서 학자라고 불리는 자도 공자의 이른바 "학문이 강습되지 못함을 근심한다."21)는 것과 정자의 이른바 "학문은 반드시 강습을 한 뒤에 밝아진다."22)는 것에 대해서 아득히 무슨 일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간혹 알아서 종사하는 자들도 그 사이에 편견과 시기심이 뒤섞여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끝내 도리어 어두워지지,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오직 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밝음은 충분히 사리(事理)를 밝힐 수가 있고, 공명함은 충분히 물아(物我)를 공평하게 할 수 있어서, 다만 옳음을 구하고자 하면서 그 중도를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러니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형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함께 하기를 좋아하며 벗이 된 이유입니다.지난번 논했던 오진영의 《정절사전》 가운데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없는 것은 가장 큰 관건입니다. 형은 그것을 가져다 근거로 삼으면서 해가 없다고 하였고, 저는 즉시 변론하여 근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논한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다시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니, 아마도 이미 평소의 견해에 분명하여 더는 번거롭게 일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은데도 오히려 이와 같다면, 우리들은 모두 이미 노쇠하였고 또 세상이 어지럽고 길도 다하여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하나의 의심나는 뜻도 오히려 또한 의견을 주고받는데 게을러서 달을 넘기고 해를 지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한다면 의심스럽고 강론해야 할 수천수만의 무궁한 의리에 대해 또한 모두 장차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발돋움하고 바라는 나머지 우연히 주자의 가르침에 감개한 바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누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弟之近課在《朱子大全》,而讀至"義理難推尋,工夫易間斷,而歲月如流,甚可憂懼"之訓,未嘗不惕然而警省也.蓋歲月在天,義理在事物,其易逝難尋,非吾智力之所能反其本相.惟工夫在我,苟不間斷而成之,其明如日月,其名垂宇宙,則義理可易尋,歲月可永長.然則不間斷一事,豈非吾輩之所當勉者乎?竊嘗惟之,吾輩之與聖賢,天淵之相縣,實係工夫不間斷與否之如何爾,豈獨以氣質之淸濁哉? 今以聖賢之往跡求之,"猶惜寸陰",大禹之不間斷也; "望道如未之見",文王之不間斷也; "夜以繼日",周公之不間斷也.孔子之忘食敏求也,是不間斷; 顔子之拳拳服膺也,是不間斷.其乾乾惕厲,自强不息之功,旣皆如此矣.至於吾輩之現狀,則外而持身之不謹、出言之無章,內而窮格之不精、存省之不密,固皆是間斷所致,以至誦讀之無程、講論之不勤謹、往復之踰時,亦無一而非間斷也.終何以成工垂名明見難尋之義理而永久如流之歲月哉? 弟之所瞿瞿然不寧者,此也.未知兄近日日間,益復慥慥,自有喜悅之趣,而無此瞿然之情否?仍念此世,聖學湮亡,義理晦塞,號爲學者,於孔子所謂"學之不講是憂"、程子所謂"學必講而後明"者,茫不知何事.其或知焉而從事者,又雜以偏見忮心於其間,其所欲明之者,究竟反以晦之,寧不可歎哉? 惟兄則不然,明足以燭事理,公足以平物我,只欲求是而恐失其中.顧瞻幷世可與語者,舍兄而誰? 此弟之所以樂與之友也.向論吳傳中華夷無分,係是大關,而兄之援據而謂其無害,弟之立辨而謂非其據者,已經一朔,而尙無復然否之盛敎,豈已犂然於雅見而無所事乎更煩而然耶? 如其不然而猶爾者,吾儕俱己衰矣,且世亂途窮,死亡無日,只此一款疑義,猶且緩稽往復,閱月經年而未決,則其於千頭萬緖無窮義理之可疑可講者,又皆將如之何哉? 仰企之餘,偶有感於朱子之訓,不覺縷縷至此,未知吾兄以爲如何? 의리는……두렵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3 〈답여백공(答呂伯恭)〉에 "공부는 중간에 끊어지기 쉽고, 의리는 미루어 찾기 어려운데,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니 매우 걱정되고 두렵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功夫易間斷 義理難推尋 而歲月如流 甚可憂懼 奈何奈何]"라고 하였다. 오히려……아꼈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은 "대우는 성인인데도 오히려 촌음을 아꼈으니, 중인들은 의당 분음을 아껴야 한다[大禹聖者,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 도를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문왕은 백성을 볼 때 혹시라도 다칠까 염려하였고, 도를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처럼 여겼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如未之見]"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밤으로써……이었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삼왕을 겸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우러러 생각하여 밤으로써 날을 이어서, 다행히 터득하면 그대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고 하였다. 공자가……것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분발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학문을 즐기며 근심을 잊으며, 늙어 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하였고,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선을……것 《중용장구(中庸章句)》 제8장에,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顔回)의 사람됨은 중용의 길을 택하여 행하면서, 어떤 한 가지 선을 얻으면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다[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 則拳拳服膺而不失之矣]"라고 하였다. 강론(講論)이 부지런하지 못하며 원문은 '講論之不謹'인데, 문맥을 살펴 '謹'을 '勤'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학문이……근심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말하기를 "덕이 닦아지지 못함과 학문이 강습되지 못함과 의를 듣고 옮겨가지 못하며 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근심이다[德之不修、學之不講、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 是吾憂也]"라고 하였다. 학문은……밝아진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의거하면, 이 구절은 위의 공자가 "덕이 닦여지지 못하고 학문이 강습되지 못한다."는 구절에 대한 윤씨(尹氏)의 해석으로 되어 있다. 번역에서는 원문대로 우선 번역했음을 밝혀둔다. 윤씨는 "덕은 반드시 닦여진 이후에 이루어지고, 학문은 반드시 강습된 이후에 밝아지며, 선을 보고 능히 실천하고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 네 가지는 일신의 요체이다. 진실로 능히 하지 못하면 성인도 오히려 근심하는데 하물며 학자이겠는가.[德必修而後成, 學必講而後明, 見善能徙, 改過不吝. 此四者日新之要也. 苟未能之, 聖人猶憂, 況學者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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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吳士益 丙子 문을 닫고 한 해가 다하는데 서로 위문하는 사람도 없어서 거의 귀양 가서 사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즈음에 반가운 편지를 받으니 얼굴에 먼저 화색이 돌았습니다. 더구나 편지 첫머리에서 "설산에서 밤에 등불을 켜고 독서하고 궁구하니 저도 모르게 춤을 춘다."라고 했으니, 생각만 해도 부럽습니다. 이것은 형이 몸소 장차 돌아온다는 좋은 소식이지만 사랑하나 도울 길 없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천지가 뒤집어져 우리 당이 더욱 더 고립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저에게 기대를 걸고 격려하여 천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서고 퇴폐한 시류에서 지주(砥柱)5)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진실로 은덕을 알고 감격하여 사양하고 싶지 않거니와 또한 형도 스스로 사양하지 않고 같은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젊은 날을 헛되이 보내고 늦은 나이에 스스로 후회스럽다."고 하였는데, 비록 스스로 혐의하는 말이지만 또한 이런 후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되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은 바로 길상(吉祥)의 조짐이기 때문입니다."매번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괴롭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매우 잘 이해하여 혹시라도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형 한 사람의 근심이 아니고 저도 항상 하는 근심하는 바이며 또한 고금의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천고 이래로 도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 한마디 말을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니, 훌륭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형이 만약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는 괴로움이 없다면 반드시 강하를 터 내린 것 같아 그 성대한 기세를 막을 수 없는 것6)이 반드시 순임금보다 크게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임금이 깊은 산중에 있었을 때에 야인들과 또한 어떠했습니까? 또한 오늘날 형과 같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임금은 일찍이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난 것에 대해 이처럼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반드시 함양하여 기다리고 여유롭게 터득하였기 때문에 통달할 수가 있었습니다.또한 천지 사이에서 만물은 모든 측면에서 다 완벽하기 어려우니 각각 서로 가감을 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측면에서 다 완벽하고자 하니, 이것은 우리들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예컨대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명예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천승의 나라를 양보하는 것도 애당초 그 마음과 어긋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천승의 나라를 양보해야만 비로소 명예를 취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동시에 취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좋은 명예를 취하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천승의 나라를 취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두 가지 모두 반드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른바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은 바로 이를 통해 마음을 터득하는 바탕임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삼가 살피건대, 우리 선사는 평소에 일을 만나면 곧바로 행하여서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구차한 모습이 없이 곧바로 실천하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는데, 능히 시원하면서도 항상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도를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의 한 가지 질문이 나로 하여금 이를 힘쓰게 했으니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으며, 형도 이를 힘쓰기 바랍니다. 편지 끝에 형이 스스로 말씀하기를 "한 터럭의 사사로운 뜻도 이 사이에 보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저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다시 위로 더 나아가 반드시 이치에 맞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사로운 뜻이 없더라도 또한 끝내 옳지 못한 것에 빠짐이 있을 것입니다. 형은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유자(儒者), 중화(中華), 오랑캐[夷]를 각각 하나씩 거론하면 유자에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있고, 중화에는 내외(內外)와 명실(名實)이 있고, 오랑캐에는 반전(半全)과 진가(眞假)가 있어서 각각 묶어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상대적으로 거론하면 유자는 유자이고, 중화는 중화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입니다. 명목이 한 번 세워지면 터럭만큼도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니, 한 번이라도 혹 서로 경계를 넘게 되면 이에 명분이 이미 혼란해지고, 실제 또한 그것을 뒤따르게 됩니다. 예컨대 아버지와 자식의 명분이 서로 경계를 넘게 되면 장차 아버지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아버지 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형은 장차 명분이 서로 경계를 넘는 것을 허용하여 또한 활간(活看)7)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오진영(吳震泳)이 지은 〈정절사전(鄭節士傳)〉에 "유자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중화인 즉시 오랑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유자와 오랑캐를 상대지어 "유자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고 했으니, 이는 유자와 오랑캐에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중화와 오랑캐를 상대지어 "중화인이 즉시 오랑캐가 된다."고 했으니, 이는 중화와 오랑캐에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유자와 오랑캐가 서로 뒤섞이면 오랑캐일 뿐이고, 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뒤섞이면 오랑캐일 뿐입니다. 이것으로 입언하여 세상에 공포해서 이를 통해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니 한번 전해지고 재차 전해지면 그 효과는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즉시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조경헌(趙景憲)의 편지에는 "군자는 단독으로 거론하여도 유덕(有德)과 무덕(無德)을 통틀어 말할 수 있다. 설령 변하는 것이 있더라도 명분을 넘거나 실지를 잃게 되는 우려가 없고, 이로써 스스로 힘쓰면 또한 절로 유덕의 지경에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병통이 없게 되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고견을 듣기를 절실히 바랍니다."활간(活看)"이라는 말은 자세히 음미해보면 문자(文字) 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위(事爲) 상에도 있는 것 같으니, 더 헤아려야할 것 같습니다. 단지 문자로만 말한다면, 만약 모든 경우 이 방법만 쓴다면 잃어버리는 것은 한 글자를 밝히지 못한 것에 불과하지만 또한 장차 죽어 넘어진 시체가 백만이 되게 하고 후세에 재앙을 끼치는데 이르게 됩니다. 하물며 사위의 경우는 죽어 넘어져 죽은 시체가 백만이고 후세에 재앙을 끼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닐 것이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자가 자리를 바꾼 이후에 끝날 것입니다. "활간"을 어찌 감히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옛 성현의 용심(用心)을 상고해 보면, 예컨대 '유정유일(惟精惟一)'8), 문리밀찰9), 호찰통언10), 명변지11), 상설지12)' 같은 것은, 어느 말이던 모두 감히 활간의 뜻을 쉽게 여기지 않아서 마침내 태평의 실지를 이룬 것입니다. 종래 활간을 형처럼 쉽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미 나타난 효과로써 말을 한다면, "중화인이 즉시 오랑캐가 된다."는 말은 조금도 문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누군들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형은 마침내 스스로 미혹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깜짝 놀라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담장이 무너지면 도적에게 편한 길을 내주는 것이니, 밤을 틈타서 침입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간사한 덕이 있지 않다면 어찌 아첨을 묻는 일이 있겠습니까?13) 형을 위해 깊은 우려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기에 언급하였습니다. 門掩歲窮,無人相問,殆同謫居,莫慰我心,際承華翰,顔先回色.況其書首有曰"雪山夜燈,看硏舞蹈",想以爲羨.此其兄以身將至之好消息,已不勝莫助之愛矣.又有以天地翻覆吾黨益孤爲心痛,而推弟負望用勵,壁立千仞,砥柱頹流.弟固知感而不欲辭,亦欲兄之不自辭而知感也.至其自謂"虛過少壯,晩自悔恨",雖是自嫌之辭,亦是不可無此悔心,悔心之萌,吉祥之兆故也."每苦事心相違"之云,此宜大煞理會,不或有放過者.此非但兄一人之所爲患,亦弟之所常爲患者,亦古今人之所同爲患者.千古以來,道之不明,亶爲坐此一言不得區處之方而致也,可謂大哉問也.使兄若無事違之苦,其必能若決江河,沛然莫之能禦,不必多讓於大舜矣.然則舜之在深山之中,其與野人者又如何? 亦不過如兄今日之日矣.而想未嘗以事心相違,恁地自苦而己,必涵泳而待之,優遊而得之,是以達也.且夫天地之間,物難兩全,各相乘除而成.今也欲兩全之,此爲吾人之通患.如好名之人能讓千乘之國,苟知名之爲可取,則讓千乘之國,初非違於其心,何也? 讓千乘之國,方爲取名之資故也.今欲幷取,是非但不知取好名,幷與不知取千乘之國者,二者皆必無成矣.然則凡厥吾儕所謂事心相違者,正是資以得心之地者,不其明乎? 竊伏見我先師平日遇事輒行,靡或少有依違苟且之態,一直做去,無所回護,所以能致沛然而常覺裕如者,用是道也.兄之一問,能使我勉此及之,感不自戢,亦欲兄之勉此也.書末兄之自謂"無一毫私意加於其間"云者,弟亦謂然,但欲更進上頭,必於當理,否則雖能無私,而亦有卒陷不韙者矣.兄又以爲如何?儒、華、夷各自單擧,則儒有君子小人,華有內外名實,夷有半全眞假,皆各得統而言之矣.若以之相對,儒則儒也,華則華也,夷則夷也.名目一立,不可毫髮踰其界,至一或相踰,是名已亂而實亦隨之.如父子之名相踰,而其將不有以父爲子以子爲父者乎? 如此則兄將許其名之相踰,而亦可活看得耶? 今吳傳曰: "儒不能華,華卽夷也." 儒與夷相對而曰"儒不能華",是儒與夷庸有別乎? 華與夷相對而曰"華卽夷",是華與夷庸有別乎? 儒夷相混則是夷而己矣,華夷相混則是夷而己矣.以此立言而公諸世,思以易天下,一傳再傳,則其效將成如何? 此其所以不得不立辨者然也.趙景憲書,則其君子是單擧而可通有無德而言者,設有變者,元無踰名失實之慮,以之自勉,則亦可自進於有德,斯其所以爲無病耳.切願更聞高論."活看"之云,細味之,非徒在文字上,亦似在事爲上,恐更商量.只以文字言之,若一切用此法,所失不過一字不明,而亦將至於伏屍百萬,流禍後世,況在事爲奚啻伏屍禍世而己哉? 必至於天地翻覆,父子易位而後已.活看豈敢易言乎哉? 稽古聖賢用心,如"惟精惟一"、"文理密察"、"好察邇言"、"明辨之"、"詳說之"者,何莫非不敢容易活看之意而遂致太平之實者? 從未有易言活看如兄者也.今以其已效者言之,"華卽夷"之爲不可稍解文理者,孰不知其如此? 而兄乃自迷,此豈非憬然可悟者耶?墻垣之壞,賊人之便也,恐有乘夜而侵入者.不有邪德,安有問佞? 不勝爲兄深長之慮,是以及之. 지주(砥柱) 중국의 황하(黄河)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강하를……것 맹자가 이르기를 "순 임금이 깊은 산중에 거처하실 적에는 나무, 돌과 함께 거처하시며, 사슴, 멧돼지와 함께 노시니, 깊은 산중의 야인과 다른 점이 드물었는데, 한 선언을 듣고 한 선행을 봄에 미쳐서는 마치 강하를 터 내린 것 같아 그 성대한 기세를 막을 수가 없으셨다.[舜之居深山之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 及其聞一善言, 見一善行, 若決江河, 沛然莫之能禦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활간(活看) 글을 볼 때에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유정유일(惟精惟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문리밀찰(文理密察)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1장에 보이는 구절로, 문(文)은 문장, 이(理)는 조리, 밀(密)은 상세(詳細), 찰(察)은 명변(明辯)을 뜻한다고 한다. 호찰이언(好察邇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6장에 공자가 순 임금의 덕을 일컬어 "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남의 악을 감춰 주고 선한 일은 드러냈다.[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라고 하였다. 명변지(明辨之)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널리 배우고, 상세히 따져 묻고, 신중히 사색하고, 명백히 가리고, 독실히 행하라.[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라고 하였다. 상설지(詳說之) 《맹자(孟子)》 〈이루하(離婁 下)〉에 "널리 배우고 상세히 말한다.[博學而詳說之]"라고 하였는데, 박학에 힘쓴다는 의미이다. 간사한……있겠습니까 《진서(晉書)》 〈안함전(顔含傳)〉에, 안함이 말하기를 "나는 듣건대, '남의 나라를 칠 때에 어진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 하는데, 전번에 풍조사(馮祖思)는 나에게 아첨하는 일을 물었으니, 내게 간사한 덕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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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이 서병갑에게 보내려던 편지에 대한 변론 【1937년】 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 【丁丑】 맹자가 말하기를, "그 말을 들으면 사람이 어떻게 실상을 숨길 수 있겠는가.16)"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회피하는 말에서 곤궁한 실상을 알 수 있다.17)"라고 하였는데, 지금 오진영의 이 편지를 보니 더욱 그 말이 참으로 맞음을 알겠다.그가 말하기를, "선사께서 전훈(田壎)의 말을 듣고 《병암집(炳庵集)》18)을 대신 인허를 받게 하셨고, 김지암(金持庵)의 청 때문에 《오수(五粹)》19)을 대신 인허를 받게 하셨다. 다섯 현인과 병암(炳庵)을 위해 대신 인허를 받았다면 선사를 위해 대신 인허를 받는 것도 또한 후세 사람이 스스로 헤아려서 미루어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말없는 가르침'이라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한 편 가운데 가장 크게 긴요하고 관건이 되는 말이다.그러나 선사께서 전훈의 요청으로 대신 인허를 받게 하였다는 말은 원래부터 믿을 것이 못 되고, 또 그의 설을 따라 말하면 지난날에 그의 무리인 최원(崔愿)은 "책을 인쇄하는 것에 대해 두루 논의한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고,【〈읍고문(泣告文)〉】 김세기(金世基)는 "병정(丙丁)년간에 업자(業者)가 대신 인허를 받은 것"을 말한 것이라 했으며,【〈읍고문(泣告文)〉】 우형근(禹炯根)은 "옛 성인의 책, 이를테면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를 오늘날 세상에 간행한다 하더라도 옛 성인에게는 허물이 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라 했다.【〈답현통(答玄通)〉】 그러나 《병암집》을 의론해 인쇄했다는 말은 모두 없었다. 오진영은 "책 상인이 스스로 인허를 받아서 책을 인쇄하는 것"을 말한 것이라 했지만,【〈답전정재서(答田靜齋書)〉】 또한 《병암집》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말머리를 고쳐서 "전훈의 말이라 하지 않았던가? 《병암집》을 의론하여 인쇄하기 위해 이런 분부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교묘하게 선사께서 이유흥(李裕興)에게 보낸 임술년(1922) 편지를 끌어다 이으려 했지만 편지 가운데 아주 조금도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없자, 또 스스로 단정하여 말하기를, "이 당시에 만약 전훈의 대신 인허를 받는다는 설이 없었다면 비록 빨리 《병암집》을 인쇄하고자 한들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교묘하기는 교묘하다. 그러나 지난날에 두루 의론했던 책이 어찌 오늘날의 《병암집》이 될 수 있겠으며, 지난날의 병정년간이 어찌 오늘날의 임술년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당시 여러 집안의 간소한 문집을 간행할 때에도 또한 대부분 인허를 받은 일이 없었으니,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드러낼 뿐이다.《오수(五粹)》를 대신 인허 받았다는 설이라 하는 것은, 문헌이 이미 보이지 않으니, 말은 고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증할 수 없는 것이고, 판주(板主)를 일찍이 행하지 않았으니, 일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지 못하는 것이며, 감삭(勘削)은 당연히 있지 않았고, 다섯 현인은 또 오늘날의 사람이 아니니, 유례(類例)가 원래부터 같지 않아 애초에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고증할 수 없는 말과 행하지 못하는 일, 같지 않은 예를 억지로 실제의 고증과 실제의 일, 실제의 근거로 만들었으니,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드러낼 뿐이다.병암(炳庵)은 선사께서 심법(心法)을 전한 아우이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함은 인자(仁者)의 마음이다.20) 간행ㆍ배포를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경계를 남겨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자기가 바라지 않았던 일을 심법을 전한 아우에게 베풀었겠는가. 선사의 인(仁)은 결코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병암을 위해 대신 인허를 받게 했다는 것은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드러낼 뿐이다.또 저 "대신 인허를 받는다."는 것은 결국 누구를 대신하는 것인가? 책을 저술한 사람을 대신하는 것인가? 그 자손을 대신하는 것인가? 그 문인을 대신하는 것인가? 선사께서는 인허를 받지 말라고 한 유서에서 "훗날[異時]"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자신이 죽은 뒤를 말한 것이다. 당신 자신이 인허를 받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글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고,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제재를 받고 감삭을 당하는 것은 곧 몸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글로나 이 시기로나 자손이 인허를 받는 것도 또한 선사 자신이 욕되는 것이고, 문인이 인허를 받는 것도 또한 선사 자신이 욕되는 것이며, 업자가 인허를 받는 것도 또한 선사 자신이 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선사를 위해서 대신 인허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진작 말이 되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그래서 "말을 들으면 곤궁한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전훈이나 《오현수언》을 대신 인허를 받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헤아려서 미루어 사용한 것이다."고 하였다. 때문에 '말없는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이미 지극히 온당치 못한 것이다.그가 처음 서씨에게 답할 적에 인허를 받는 것이 문집 간행의 첫 번째 불가함으로 여겨서 "바다를 건너가고자 했다."라고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맑고 깨끗한 것을 자처하면서 선사를 더럽히고 욕보이는 것이 도리어 어떠한가? 나는 그래서 "이 네 글자를 지어서 그의 무함이 더욱 깊어졌고, 이 〈의서(擬書)〉를 지어서 그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다."고 말한 것이다.선사께서 묘적(墓籍)의 등록21)을 허락하신 것을 끌어다 증거로 삼은 것은 또한 변론할 것이 못 된다. 묘적은 등록하지 않으면 무덤을 파서 시신을 불태우는 변고를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고는 간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에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 불에 태울 사람은 없을 것이니, 그가 그것들을 나란히 놓고 똑같이 하려는 것은 애초에 어린아이도 속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걸핏하면 서로 관련도 없는 선사의 평소 말과 일을 끌어다가 번번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증거로 삼으니, 통탄스럽다.대체로 그는 변박과 성토를 만난 초기에는 그래도 때때로 가리고 숨기려는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성립시키는 것이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여겨 조금도 거리낌 없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한 번만 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른바 "말없는 가르침"이라는 편지가 갑자기 서씨에게서 나오자 그 무함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헤아려서 하라는 말과 비교해 더욱 분명하여 숨기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용납할 곳이 없다면 차라리 이미 쏘아진 화살과 같은 이것을 끝마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 터럭만큼도 선사를 염려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인가.내가 또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가 이미 말없는 가르침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의리로 삼아 선사께서도 꺼리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면 또 어찌하여 서씨가 이 편지를 드러낸 것을 원수처럼 본 것인가? 대체로 끝내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무함한 죄를 자복하여 사죄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미워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을 드러낸 것을 원수처럼 본 것이다. 이것이 그 정상이니,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애처롭게 여길 것이다.현통(玄通)22) 중에 "만약 우리 선사께서 문고를 인가받기를 청하도록 분부했다면 이는 마음으로 반복하여 불충(不忠)할 것을 품은 것이다."라는 말을 가리켜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범했다고 말하면서 '적도의 무리[賊輩]'라는 이름까지 더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주자가 "만약 고상하고 현묘한 도리를 지니고서도 성인이 이를 숨겼다면 이는 성인이 대단히 형편없는 사람으로 불충불신(不忠不信)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또한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범했다고 말하면서 "운운(云云 적도의 무리)"이라는 이름까지 더할 것인가? 그는 현동의 통문이 주자에게서 받은 바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그렇게 말한 것은 이것으로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혀서 무함을 변론하는 사람이 자신을 해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삼은 것이니, 이것이 또 미워하고 주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후세의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문리(文理)를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아닐 것이니, 틀림없이 그의 계책이 너무나 허술하고, 재주가 너무나 졸렬하며, 마음이 너무나 험악함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가소롭다고 여기는 사람까지 있을 것이다. 그 밖에 근거 없는 말이나 꾸며낸 말, 이치에 어긋난 말, 악다구니는 모두 위에서 변론한 여러 말들을 예로 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 아울러 그만 적는다. 孟子曰: "聽其言也, 人焉廋哉?" 又曰: "遁辭知其所窮." 今觀震泳此書而益見其信然矣. 渠謂"先師聞田壎說而敎代認《炳庵集》, 爲金持庵請而敎代認《五粹》. 爲五賢爲炳庵而代認, 則爲先師代認, 亦是後人自量而推用者. 故曰'不言之敎'." 此爲一篇中最大緊關. 然先師以田壎代認說云者, 元不足信. 且從渠說言之, 前日渠黨崔愿之謂"泛論印書"【〈泣告文〉】, 金世基之謂"丙丁年間, 業者代認"【〈泣告文〉】, 禹炯根之謂"古聖人書, 如《詩》《書》《語》《孟》, 今世刊行, 而古聖人不爲累"【〈答玄通〉】, 而幷無《炳庵集》議印, 震泳之謂"冊商自認印書"【〈答田靜齋書〉】, 而亦無《炳庵集》說者. 今焉猝然改頭曰: "不曰田壎說乎? 爲《炳庵集》議印而有是敎也." 巧引先師與李裕興壬戌書承之, 而書中無半點認意, 則又自斷之曰: "此時若無田壎代認說, 雖欲速印《炳集》得乎?" 巧則巧矣. 然前日泛論之書, 安得爲今日之《炳集》? 前日丙丁之年, 安得爲今日之壬戌乎? 且其時諸家簡少文集之刊行, 亦多無認. 則多見其說不去矣. 《五粹》代認說云者, 文旣不見, 則言非可證而無證矣, 板主之不曾行, 則事非可行而不行矣, 勘削之不當有, 五賢之又非今人, 則類例元自不同, 而初不足爲據矣. 以無證之言不行之事不同之例, 强作實證實事實據, 則多見其說不去矣. 炳庵先師傳心之弟. 己所不欲, 勿施於人, 仁者之心也. 以請願刊布決是自辱, 遺戒勿爲之, 己所不欲者, 施之於傳心之弟? 先師之仁, 決不如是. 則爲炳庵代認之云, 多見其說不去矣. 且夫"代認"者, 竟是代誰? 代著書人乎? 代其子孫乎? 代其門人乎? 先師於勿認之遺書, 旣云"異時", 則是以身後言者也. 非當身之自認而猶云"自辱"者何也? 文者, 心之所存, 心者, 身之所主. 故文之受制見勘, 卽無異於身之見辱也. 以此文以此時, 則子孫認之也, 是先師自辱, 門人認之也, 是先師自辱, 業者認之也, 是先師自辱. 然則元來爲先師代認之云, 早見其說不去矣. 吾故曰: "聽其言, 知其所窮也." 然而渠猶謂"因壎《粹》代認而自量推用." 故曰"不言之敎"者, 已極無當. 渠於初答徐氏, 旣以認爲刊集之第一不可而謂欲越海, 又曰: "原從先師不言之敎" 則其自居淸楚, 汙辱先師者, 顧何如也? 吾故曰: "撰此四字而彼誣益深, 作此擬書而彼罪益重." 至若引先師許籍墓而作證, 則又不足辨. 墓不籍而遭掘塚焚尸之變固也, 稿不刊而世無發之篋而焚之火者. 則渠之比而同之, 初不可以欺尺童. 然其動引先師平日言與事之無相涉者, 輒作認敎之證者, 爲可痛也. 蓋渠遭辨討之初, 猶時有掩諱之狀, 今也則證成認敎者, 愈爲的確, 少無忌憚, 大書特書不一書者何也? 以其所謂"不言敎"之書, 猝發於徐氏也, 自知其誣視杏下料量說, 益明難掩, 而無地可容, 則無寧了此旣發之矢, 而毫不念先師也, 是可忍乎哉? 余且怪夫彼旣以不言之敎爲不得不然之義, 而爲先師之所不諱. 則又何以讐視徐氏之發此書也? 蓋以終無柰以無爲有, 而又不欲服謝誣罪. 然名則可惡, 故自不覺讐視發之者也. 是其情狀, 焉可廋哉? 然則非可怪也, 伊可哀也. 指玄通中"若吾師敎稿乞認, 則是懷以心反覆不忠"語, 謂上犯不敢言之地, 而加以賊輩之名, 則渠於朱子所言"若有高妙底道理而聖人隱之, 是聖人大無狀, 不忠不信"者, 亦將謂上犯不敢言之地, 而加以云云之名乎? 渠非不知玄通有所受於朱子, 而猶且云爾者, 欲以此亂人視聽, 而作辨誣人賊渠之報復也. 此又可惡而可誅者. 然今與後之人, 未必皆不通文理者, 則適見其計太疏手太拙心太險, 而至有謂可笑者矣. 其他遊辭飾說悖言惡口, 皆當以右辨諸說例之而可見. 故玆幷已之. 그 …… 있겠는가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사람에게 있는 것 가운데 눈동자보다 진실한 것이 없으니, 눈동자는 그 악을 감추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또렷하고 가슴속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릿하니,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고 그 눈동자를 살펴본다면 사람이 어떻게 실상을 숨길 수 있겠는가.〔存乎人者, 莫良乎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회피하는 …… 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편벽된 말에서 가려 있는 실상을 알며, 정도에 지나친 말에서 빠져 있는 실상을 알며, 부정한 말에서 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실상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곤궁한 실상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병암집(炳庵集) 전우(田愚)의 문인 김준영(金駿榮, 1842~1907)의 문집으로 전우가 서문을 썼다. 김준영은 본관이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병암(炳菴)이다. 전우보다 한 살이 적었으나 전우를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고, 간재(艮齋)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수(五粹) 《오현수언(五賢粹言)》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헌회(任憲晦)가 문인 전우(田愚)ㆍ신기선(申箕善) 등에게 명해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다섯 현인의 문집에서 명문을 발췌해 1905년에 간행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기가 …… 마음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중궁(仲弓)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문을 나갈 때는 큰손님을 뵙는 듯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라고 답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묘적(墓籍)의 등록 일제 강점기 때 묘지의 위치, 제주(祭主)의 본적, 주소, 신분, 씨명 및 관리인 참고사항 등의 내용이 기재된 묘적계(墓籍屆)를 군의 헌병분견소에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현통(玄通) 《후창집》 권9 〈답전사견(答田士狷)〉에 "현동통문(玄洞通文)"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현동에서 보낸 통문을 가리키는 듯하다. 현동은 간재의 묘소가 있는 전북 익산시 삼기면에 있는 마을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진영이 이원재에게 답한 편지에 대한 변론 【1927년 10월】 吾震泳答李遠齋書辨 【丁卯十月】 선사께서 전옹(全翁)30)의 문집에 얼마나 많은 문자를 산정(刪正)하셨습니까. 그런데 심(沈)이 나 이(李) 같은 여러 사람들이 원수로 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이승욱(李承旭)이 "간 재(艮齋)가 전옹의 문집을 고쳤으니, 이것은 간재의 문집이지, 전옹의 문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무함하고 모욕한 것에 대해서 집사께서는 혹 듣지 못했는지요?선사께서 전옹의 문집을 산정하신 것은 산정이 온당한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원수로 대하는 것은 사사롭고 망령된 것이다. 오진영이 선사의 문고를 산정한 것은 진실로 산정이 온당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하물며 첨가하고 고치기까지 한 것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들이 변론하고 성토하는 것은 공정하고 참된 것이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전옹의 글을 고친 적이 없으니, 이승욱의 말은 진실로 대부분 무함과 모욕이다. 오진영은 실제로 선사의 글을 고쳤으니, 그가 고친 것은 어찌 간재의 문집이 아닌 오진영의 문집이 아니겠는가. 그가 망령되게 삭제하고 첨가하며 고친 부분은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에 있으니, 그 사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응당 가져다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하나 들어 말할 겨를이 없다.집사께서는 비록 "선사께서 직접 스스로 수정하셨다."라고 하셨지만, 선사께서는 "후고 (後稿)31)가 겨우 책을 이루긴 했으나 정본(定本)은 아직 아니다."라고 하셨고, "후고는 정 신이 혼미하여 수정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하셨으며, "사고(私稿)를 정리하여 바로잡는 것 은 전적으로 이견(而見 오진영)을 믿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평소 말씀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손수 정중하게 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 자신의 말이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게 한 분부가 자기 자신의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리하여 바로잡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과 어구가 겹쳐서 늘어져 있는 것이나 고증과 근거가 사실에 어긋난 것, 글자가 빠진 것, 잘못된 것, 어긋난 것, 뒤섞여 있는 것 등의 부분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어찌 자기 마음대로 고쳐 짓도록 허여한 것을 말하겠는가. 선사의 둘째 아들 정재(靜齋)가 항상 말하기를,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박죽천(朴竹川)의 신도비(神道碑)의 초고를 완성하시고 오진영에게 수정하거나 윤색하도록 명하셨는데, 오진영이 조금도 겸양이나 삼감이 없이 고치고 삭제하여 거의 절반이나 줄여버렸다. 오진영이 떠난 뒤에 선인께서 '이와 같은 것은 오히려 묘갈(墓碣)로 삼기에도 부족하니, 모두 되돌려놓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선사께서 일찍이 나에게 훈계하시기를, "이견의 글은 기이함을 숭상하니, 부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보면 선사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는 매번 후고는 아직 정본(定本)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며 다른 사람을 막는 파병(欛柄 칼자루)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미 정본을 이루었다."라는 가르침이 있는 전고(前稿)32)에 대해서도 또한 멋대로 손을 놀려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컨대 〈분언(㤓言)〉이나 〈신혁균서(申赫均書)〉, 〈전불관전(田不關傳)〉 등의 글을 고치거나 삭제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전고이다.】 여기에서 그의 말이 곤궁함을 볼 수 있다.삭제가 온당하지 않는데 삭제한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삭제가 온당한데 삭제하지 않는 것도 또한 죄가 됩니다. 삭제가 온당한지 여부를 모르면서 삭제한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삭제가 온당한 줄 알면서도 삭제한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더욱 죄가 됩니다.그는 대고(大稿)에 대해 삭제가 온당하지 않는 것들을 삭제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려움 없이 첨가해 넣는 것을 차마 범하여 썩어 백골이 된 선사의 가르침을 속였으며, 게다가 자기의 생각으로 고치기까지 하였으니, 죄가 또 첨가한 것보다 더 크다. 우리들이 변론하고 성토할 때에 삭제가 온당하지 않은 것을 삭제한 것에 대해 단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첨가하고 고친 것에 대해서 더욱 단죄하였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요란하게 단지 삭제의 온당함과 부당함만을 말하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는 아마도 글을 교정함에 삭제하는 전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현혹하는 수단이다.오늘날의 변론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의 변론이 있을 것이고, 사람의 변론이 있지 않으 면 반드시 하늘의 변론이 있을 것입니다.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그가 먼저 말했으니 일이 줄어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진본(晉本)33)이 이미 출간되었고, 수본(手本)도 또 남아 있으니, 들어 대조해보면 그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훗날의 논변과 하늘의 논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즉시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논변될 수 있을 것이다.'고쳤다[改]'라는 한 글자는 내 알 바 아닙니다. 이것으로 선사를 무함한 자눈 이승욱의 무 리이고, 이것으로 이놈을 무함한 자는 집사의 측근입니다. 이놈이 외람되게도 선사의 뒤를 따라 이런 죄목을 얻었으니, 분수에 영광입니다.그가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고, 또 옹정(甕井)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선사께서 홀로 계실 때 스스로 헤아려서 하도록 명하셨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라고 선사를 무함한 것을 가지고 사람이 성토했을 때에 곧바로 큰 소리 치며 말하기를, "내 입으로 말한 것을 듣지도 못했고, 내 손으로 쓴 것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찌하여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으로 나를 무함할 수 있는가?" 하였는데, 지금 "'고쳤다[改]'라는 한 글자는 내 알 바 아니다. 이것으로 이놈을 무함했다."라는 이 말도 말의 느낌이 똑같다. 이는 바로 그가 늘 하던 버릇이니, 어찌 상대하여 변론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가 일마다 매번 자신을 선사에게 비기는 것이 정말 통탄스러울 뿐이다. 아, 순(舜)ㆍ우(禹)를 본받았다는 왕망(王莽) 같은 사람이나 문왕(文王)에 의탁했다는 조조(曺操)와 같은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34)훗날에 척안(隻眼)과 거벽(巨擘)35)이 "이(李) 아무개가 오(吳) 아무개를 죽였다."라고 크게 쓸 것이니, 집사께서 무덤 속에서 일어나신들 아마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척안과 거벽은 수본일 뿐이니, 어찌 훗날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벌할 수 있는 것이 《춘추(春秋)》의 법이니, 어찌 다만 이 아무개뿐이겠는가. 하늘의 태양이 환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덤 속은 말하지 말라."심(心)이 곧 성(性)이요, 성이 곧 심이다."라는 말은 모름지기 《주자대전(朱子大全)》 70권 끝에 나아가서 한 번 읽고, 열 번 읽고, 백 번 읽고, 천 번 읽어보면 확실히 정자의 말이고, 왕양명(王陽明)의 말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런 뒤에 와서 나를 친다면 나는 그것을 공손히 받을 것이다.이 한 조목은 백 번 천 번 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진영의 견해가 옳다. 그러나 문고를 어지럽힌 일을 견해가 옳은 것과 함께 논해서는 안 된다. 이원재는 무슨 까닭으로 고치거나 첨가한 많은 진장(眞贓 확실한 증거)들을 버려두고 단지 이것을 들어 질문한 것인지 내심 괴이하게 여긴다.〈회퇴율삼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로 전 호남이 쾅쾅거려 일곱 성인이 모두 길 을 잃었다36)고 들은 것 같습니다. 비록 환혼단(還魂丹) 한 알을 바치고 싶지만 아마도 명 월주(明月珠)를 어두운 곳에 던져주는 꼴이 될 뿐입니다.37)변론이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에 보인다.제가 도리어 절로 괴이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 있는데, 사오 년 이래로 호남 사람이 나를 황 천(黃泉)에 묻고자 하여 푸른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어지럽힐 때에 과연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겠는가. 스스로 황천에 묻히고서 사람들이 묻고자 했다고 말하니, 이것이 참으로 괴이하고 우습다. 또 최원(崔愿)ㆍ 김세기(金世基)ㆍ정운한(鄭雲翰)의 무리로 하여금 유서를 여자 종이 석개(石介)의 편지38)를 위조한 것처럼 위조한 것이라고 무함하게 하고, 무함을 변론한 사람들을 지극히 흉험하고 아주 패악한 말로 무함하게 하였는데, 이 당시에도 또한 과연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을 황천에 묻고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묻었다고 말하니, 이것이 또 괴이하고 우습다.전(田)의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과, 최(崔)의 답서와, 성(成)의 투고(投稿) 등 병사를 옮겨가듯 허다한 공격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꿔가며 번갈아 나오고 서로 생겨나더니 선사의 문고를 멋 대로 고쳤다는 커다란 죄목이 뒤이어 나왔습니다.단지 이른바 "은행나무 아래의 말"만 보더라도 이미 선사를 무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라는 것은 과연 누가 쓴 것인가? 그런데도 오히려 "전(田)이 인허를 받으려고 생각했다. 최가 답한 편지이다."라고 하니, 만약 꿈속의 잠꼬대가 아니라면 바로 사람을 속여 다 귀머거리로 만들려는 것이니, 대단히 괴이하고 우습다. "성이 투고했다"는 것도 또한 말하지 말고, 아울러 사림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압송한 일도 두 강(姜)에게 핑계대지 말라. 정재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어찌하여 검국(檢局)에 들어간 것인가? 처음에는 강과 절교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끝까지 절교하지 않은 것인가? "진주의 인쇄는 오 아무개가 주장한 것이다."라는 글이 어찌하여 그의 무리에서 나온 것인가? 이조원(李祖遠)이 선사의 손자를 압송한 것이 통쾌한지 아닌지로 권순명을 기롱하였는데, 어찌하여 얼굴만 붉힌 채 답변하지 못한 것인가? 【이조원이 권순명을 기롱한 말은 이창난(李昌煗)이 전해 준 것이다.】하늘이 혹 모진 목숨을 빌려준다면 또 무슨 죄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애써 일으 키는 분란이 그칠 때가 없을 듯합니다. 일 많은 화아(化兒 조물주)가 나의 한 가닥 모진 목 숨을 쥔 채 많은 담대한 남자들을 가지고 노니, 이 때문에 괴이함과 웃음이 그치지 않습니 다.이미 선사를 무함했고, 사림에 화를 끼쳤으며, 선사의 손자를 압송했는데, 끝내 또 문고까지 고쳤다. 하늘이 만약 그로 하여금 늙도록 죽지 않게 한다면 또 어떤 죄악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일 많은 조화의 아이가 고집 세고 사나운, 대담한 남자 한 명을 태어나게 하고, 많은 무리들을 장난삼아 나오게 해서 세도(世道)에 화를 끼침이 그칠 때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웃을 마음은 없고 단지 괴이함과 탄식만이 절절할 뿐이다. 先師於全翁集, 刪正幾多文字? 而爲沈李諸家仇對何也? 至若李承旭之謂"艮改全集. 是艮集, 非全集."之誣辱. 執事其或未聞歟?先師之刪正全翁集, 當刪正者也, 諸家之仇對, 私而妄也. 震泳之刪先師稿, 固多不當刪者, 而況添之改之乎? 吾輩之辨討, 公而眞也. 先師不曾改全翁文. 旭說固多誣辱也. 震泳則實改先師文, 其所改者, 豈非是震集非艮集也乎? 其妄刪添改處, 有〈晉本考辨錄〉在. 欲知其實者, 自應取覽. 今不暇枚擧.執事雖曰: "先師親自修整." 先師則曰: "後稿僅能成冊, 而定本則未也." 曰: "後稿神迷, 不暇 修整." 曰: "私稿釐正, 專恃而見." 雅言不啻, 而手筆鄭重. 是何得爲自道? 而非實如今來喩 也.雖使釐正之訓, 非盡出於自道, 其曰"釐正"云者, 指辭語疊蔓考據爽實及漏誤舛錯等處而言, 豈許其任自改撰之謂乎? 先師仲子靜齋常曰: "先人草定朴竹川神道碑, 命震泳修潤. 震泳略無謙愼, 改之刪之, 減得幾半. 震去後. 先人曰: '如此則爲墓碣, 猶不足, 皆還存'" 先師嘗訓澤述曰: "而見文尙奇, 愼勿效也." 觀此二者, 可知先師心也. 且渠每諉以後稿未成定本爲禦人欛柄. 然則其於前稿有旣成定本之訓者, 亦多恣行手勢何也?【如改刪〈㤓言〉〈申赫均書〉〈田不關傳〉之類, 皆前稿.】 於此可見其說之窮也.不當刪而刪, 固罪也. 當刪而不刪, 亦罪也. 不知當刪與否而惟刪之罪, 固罪也, 知其當刪而惟 刪之罪, 尤罪也.渠於大稿, 非惟刪不當刪, 又無難添入忍犯, 欺其朽骨之訓, 又至於改之以己意, 則罪又大於添也.吾輩辨討, 非惟罪其刪不當刪, 尤罪其添之改之也. 渠乃譊譊然只說當刪不當刪而以張皇之, 蓋以校文有刪之之例故也. 此眩人手段也.不有今辨, 必有後辨, 不有人辨, 必有天辨.吾所欲言, 渠先道之, 覺得省事. 然晉本旣出, 手本又在, 擧以照準, 則渠之有罪無罪, 不待後辨天辨而卽可以辨乎今人矣.改之一字, 非吾所知也. 以此誣先師者, 承旭輩也, 以此誣此漢者, 執事側也. 此漢猥從先師後 而得此目, 於分榮矣.渠答徐柄甲書, 分明說"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又答甕井書, 分明說"先師獨命自量爲之", 及人之討以誣師有認意, 則輒大言之曰: "不聞吾口語, 不見吾手筆, 何得誣吾以誣師也?" 今此"改之一字, 非吾所知, 以此誣此漢"之云, 卽同一口氣. 乃渠恒習, 何足對辨? 但渠事事每自擬於先師者, 絶可痛也. 噫, 王莽之學舜禹, 曺操之托文王, 何代無之?後有隻眼巨擘, 大書: "李某殺吳某." 執事冢中起來, 却恐未易矣.隻眼巨擘, 手本是已, 何待後日? 人人誅之, 《春秋》法也, 豈但李某? 皇天白日, 赫赫臨之, 休說冢中."心則性, 性則心", 須就朱子大全七十卷末, 一讀十讀百讀千讀, 確然是程語而非王語. 然後來 打之, 吾當恭受之.此一款, 不待百讀千讀而震泳之見却得是, 不可以其亂稿而幷與其得是者而論之也. 竊怪夫遠齋, 何故舍多改添眞贓, 而特擧此而質問也.似聞以〈晦退栗三先生說質疑〉, 全湖洸洸, 七聖皆迷, 雖欲獻還魂丹一粒, 而恐爲明月珠之暗投 耳.辨見〈晉本考辨錄〉鄙却自有怪笑者, 自夫四五年來, 湖南之欲埋我黃泉, 而不見靑天也.誣師亂稿之時, 果見頭上靑天乎? 自埋黃泉而謂人埋之, 此眞怪笑. 且使愿世基雲翰輩誣遺書以女奴石書之僞造, 誣辨誣人以窮凶絶悖之語, 此時亦果見頭上靑天乎? 埋人黃泉而謂人埋渠, 此又怪笑田之認意, 崔之答書, 成之投稿, 許多移兵之擊, 改頭換面, 迭出互生, 擅改師稿之一大罪目踵 生矣.但就所謂"杏下說"觀之, 已足以知誣師矣. 而況"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者, 果是誰書乎? 而尙曰: "田之認意, 崔之答書." 若非夢中囈語, 正是欺人盡聾, 大可怪笑. 成之投稿, 且休說. 幷與禍士林押師孫而莫諉兩姜. 靜齋與渠書, 胡爲而入檢局? 始謂絶姜, 胡爲而不終絶也? "晉印吳某主張"之文, 胡爲而出渠黨也? 李祖遠之譏權純命以押師孫快否也, 而胡爲面赤不能答也?【李譏權之語李昌煗所傳】天或假頑命, 不知又生何罪, 諸位之勞攘, 恐無已時. 多事化兒把我一縷頑命, 玩弄許多膽男子. 是以怪笑之不已耳.旣誣師矣, 禍士林矣, 押師孫矣, 終又改稿矣. 天若使渠老而不死, 則又不知作得何許罪惡也. 多事化兒生得一箇頑戾膽男子, 弄出許多徒黨, 貽禍世道, 無已時也, 天意何居? 是則笑之無心, 而只切怪嘆也已. 전옹(全翁)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가리킨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명로(明老)이며,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후고(後稿) 간재의 글 중에서 1913년 이후의 글을 산정(刪定)ㆍ편차(編次)한 것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전고(前稿) 간재의 글 중에서 1906년에 산정(刪定)해 두었던 문고(文稿) 36책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초고(草稿)를 합하여 산정한 25책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진본(晉本) 1926년 10월에 간재의 문인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의 문집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순(舜)ㆍ우(禹)를 …… 없겠는가 순ㆍ우ㆍ문왕은 중국 고대 태평시대 때 성인으로 추앙받은 임금이고, 왕망ㆍ조조는 중국 역사에서 왕을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한 대표적 인물이다. 척안(隻眼)과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일곱 …… 잃었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황제(黃帝)가 구자산(九茨山)에 가서 대외(大隗)를 만나 보고자 할 때,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양성(襄城)의 들녘에서 길을 잃어 물어볼 곳도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호남의 학자들이 진주본의 〈회퇴율삼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이 세 분들의 주장이 바르게 전달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환혼단(還魂丹) …… 뿐입니다 이 분들의 주장에 대해 변론하여 바로잡고 싶지만 도리어 논란만 키우게 될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환혼단(還魂丹)은 기사회생시키는 선약(仙藥)을 말하는데, 보통 중병을 치료하는 양약(良藥)의 뜻으로 쓰인다. 명월주(明月珠)를 어두운 곳에 던진다는 말은 밤중에 명월주를 행인에게 던져 주면 고맙게 생각하는 대신 칼을 먼저 뽑아 들려고 한다는 '명주암투(明珠暗投)'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여자 …… 것 원문의 '여노석서(女奴石書)'를 번역한 것이다. 송나라 때 간신 하송(夏竦)이 자기를 배척한 석개(石介)를 무함하고자 여자 종으로 하여금 석개의 필체를 모방하여 위조 편지를 쓰게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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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발설에 대한 변론 【1915년】 傳鉢說辨 【乙卯】 유문(儒門)에서 이른바 '의발을 전한다.[傳鉢]'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가(佛家)의 말을 빌린 것으로, 도통(道統)을 전하는 것을 '의발을 전한다.'라고 한다.도통은 요(堯)와 순(舜)이 천하를 전하고 받는 것처럼 서로 직접 전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인가?"그렇지 않다.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은 시대가 달랐고, 정자(程子)와 맹자(孟子)는 세대의 격차가 넓었다.""그 말은 옳다. 그러나 같은 세대에 살다가 스승은 늙어 죽고, 제자는 어짊이 가장 뛰어났을 때 서로 전하고 받는 것이 '통(統)'이니, 면제(勉齋)와 주자(朱子), 한수(寒水)와 우암(尤庵)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다 그렇지는 않다. 증자(曾子)와 우암은 공자(孔子)와 사계(沙溪)가 죽었을 때에 나이가 적었고, 어짊도 또한 반드시 가장 뛰어나지는 않았다.""그렇다면 결국 어떤 것인가?""도통은 덕에 있지, 시기가 먼저인가 뒤인가, 전함을 직접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있지 않다. 참으로 그 사람이라면 비록 시기가 뒤에 있다 하더라도 도통은 진실로 그에게 있을 것이고, 만약 그 사람이 아니라면 비록 직접 받았다 하더라도 도통은 그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오진영과 그의 무리들은 매번 선사께서 의발을 전한 사람을 변박하며 성토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오진영이 일찍이 말하기를, "귀산(龜山)은 의발을 이천(伊川)으로부터 전해 받았지만 주자는 그가 노(老)·불(佛)에 빠졌다고 하였으며24), 면제(勉齋)는 의발을 주자로부터 전해 받았지만 과재(果齋)는 그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비난하였으니25), 의론의 옳고 그름은 의발을 전했느냐 전하지 않았느냐와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진실로 옳다. 그러나 가령 선사의 의발이 진실로 오진영에게 전해졌다 하더라도 죄가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치는 데에 이르렀다면 변박하고 성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애초에 의발을 전한 일이 없는 데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선사께서 임종하실 때에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이 했던 것처럼 문인에게 중책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함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도리어 기미년(1919) 3월의 편지를 끌어와 도통을 전한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편지는 권면한 것이지 허여한 것이 아니니, 그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또 이 해 겨울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파리(巴里)에 던져준26) 뒤에 선사께서 즉시 최병심(崔秉心)27)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앞뒤로 일어나지 않고 글이 없었던 것은 또한 받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서양(西洋)과 상해(上海)에 우리나라 유자(儒者)들의 서한이 있는데, 모두 내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고 하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맹랑한 오진영이 전담 심부름꾼을 보내 와서 이름을 서명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단연코 허락하지 않았었네."라고 하셨다. 이름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에 권순명(權純命)28)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다공(茶公)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몸이 먼저 머리를 깎였으니, 매우 통탄하고 분개한들 어찌하겠는가. 아무개가 나에게 그 전철을 다시 밟게 하니, 무슨 소견인지 모르겠네."라고 하셨다. 경신년(1920) 중대하고 바른 학맥을 근심하고 뒷일을 염려하셨던 날에 "오이견(吳而見 오진영)이 끝내 일을 벌이려는 속셈을 두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보건대 오진영의 무리인 권순명이 기록한 〈화도치명록(華嶹治命錄)〉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뒤에 또 이기환(李起煥)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나와 종유했던 사람 중에 오직 김덕경(金德卿) 한 사람만이 도를 위반하지 않고 훗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네. 나머지 여러 군들은 각기 하나씩 장점이 있지만 치우치고 잡박한 병통을 면치 못하니, 훗날에 과연 정맥(正脈)을 잃지나 않을지 모르겠네."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개가 일의 공적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성정(誠正)29) 공부가 멀어졌네. 물을 것도 없이 이는 단지 식견이 부족해서이니, 식견이 낮으면 일이 모두 비루해진다네. 모름지기 토사법(吐瀉法)을 써야만 비로소 나아갈 곳이 있을 것이네."라고 하셨다. 무릇 선사께서 말씀하신 "일을 벌이다[事爲]"와 "일의 공적[事功]" 이것은 모두 파리장서의 일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을사(乙巳) 연간에 전화구(田華九)와 전경구(田敬九)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道義)를 꾀하지 않는다고 오진영을 배척한 결안(結案)으로 총괄된다. 이와 같은데도 오진영과 그 무리들은 아직도 감히 선사가 의발을 전했다고 가탁하면서 자신들을 대단하게 여기고 남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아, 내가 이것을 변론하는 것은 그의 무리와 대적해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깨우치고, 선사의 전함이 그 사람이 아님을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夫儒門所謂"傳鉢"者何也? 借佛家語, 謂傳統爲傳鉢也. 道統可相傳受若堯舜之於天下乎? 曰"非然也. 孔子之於周公異時也, 程子之於孟子曠世也." 曰"此則然矣. 在幷世而師老而歿, 弟賢而最焉, 則其所相傳受者是統也. 勉齋之於朱子, 寒水之於尤庵, 非此乎?" 曰"不盡然也. 曾子尤庵之於孔子沙溪歿也, 年旣少而賢亦未必最也." 曰"然則竟如何?" 曰"統在德, 不在時先後傳親否. 苟其人也, 雖時後, 統固存焉, 如非其人, 雖親受, 無存焉." 吳震泳與其徒每謂先師傳鉢人不當辨討, 此何說也? 震嘗有言曰: "龜山鉢傳自伊川, 而朱子謂淫於老佛. 勉齋鉢傳自朱子, 而果齋非其人道心說. 議論之是非, 不係於鉢之傳不傳." 此言良是. 使先師之鉢實傳乎震, 罪至於誣師改稿, 不可不辨討, 況初無傳鉢事乎? 先師臨終, 無託重門人如朱宋之爲者, 世所共知. 則乃引己未三月書, 把作傳統之證. 然是書也, 勸勉而非許與, 則未見其然. 且自是年冬, 冒署師銜, 投之巴里之後, 則先師卽與書崔秉心曰: "鄙之前後不起與無書, 亦有所受而然. 今聞西洋與上海有東儒書, 皆署鄙名云, 天下豈有如許事耶? 孟吳專使來請署名. 余斷不許矣." 其不許名之時, 與書權純命曰: "茶公事未及成而身先被髠, 深用痛慨, 如之何? 某之勸余復蹈其轍, 不知其何所見也." 至於庚申患重正慮後事之日, 則有曰: "吳而見終是有事爲底意." 今見載震黨權純命所記〈華嶹治命錄〉者是也. 又與書李起煥曰: "從余遊者, 惟金德卿一人, 可望其不畔乎道而有待於後矣. 不幸遽已逝矣. 自餘諸君, 各有一長, 而未免於偏駁之病. 不知異日果能不失正脈否?" 又曰: "某人以事功爲人所笑, 誠正工夫遠矣. 無可問, 此只欠見識, 見識低矮, 事皆卑陋. 須用吐瀉法, 乃有進處." 凡此先師所云"事爲""事功", 皆指巴書事, 而總之爲乙巳年間與華敬二子書斥震以功業爲重不計道義之結案也. 如此而震與其徒尙敢詑先師傳鉢而自大凌人乎? 噫, 吾之辨此, 非欲與渠輩對鬨, 特以曉夫世之誤認而惜先師傳非其人者. 귀산(龜山) …… 하였으며 귀산은 정자(程子)의 문인 양시(楊時)를 가리킨다. 정자의 학문은 양시를 거쳐 나종언(羅從彦)에게 전해지고 다시 이통(李侗)을 거쳐 주자에게 전해졌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여기에 인용된 말의 출처는 상세하지 않으나, 주자의 〈중용서문(中庸序文)〉에 "정문(程門)의 제자들이 그 스승의 말을 위반하고 노ㆍ불에 빠진 자가 있었다.〔程門弟子, 有或倍師說, 而淫於老佛者.〕"라고 하였는데, 귀산도 그 중에 한 사람인 듯하다. 면제(勉齋)는 …… 비난하였으니 면재는 황간(黃榦)의 호로,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문인이다. 과재(果齋)는 이방자(李方子)의 호로 주희의 문인이다. 이 …… 던져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의병에 참여했던 김덕진(金德鎭)ㆍ안병찬(安炳瓚)ㆍ김봉제(金鳳濟) 등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는데, 전우(田愚)가 이 서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자 오진영이 몰래 스승의 이름을 서명하여 보낸 일을 말한다. 최병심(崔秉心) 1874~1957.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경존(敬存)이며, 호는 흠재(欽齋)이다. 전주 출신으로 이병우(李炳宇)·전우(田愚)의 문인이다. 1904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흠재문집(欽齋文集)》 30권 14책이 있다. 권순명(權純命) 1891~1974.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고경(顧卿)이며, 호는 양재(陽齋)이다. 고부 출신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1910년 경술국치 뒤에 스승을 따라 서해의 군산도(群山島)ㆍ왕등도(旺嶝島)ㆍ계화도(繼華島) 등지에서 15년 동안 학문에 몰두하여 화도주석(華島柱石)이라 불리었으며, 스승의 문집ㆍ예설(禮說)ㆍ연보(年譜)ㆍ척독(尺牘) 등을 편집ㆍ출간하였다. 고부 태산사(台山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양재집(陽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정(誠正) 《대학장구》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 중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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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8 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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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여 달준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全子與達準 ○辛酉 허명(虛名)의 비유는 자신을 말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북방(北方) 풍기(風氣)의 질박함은 남토(南土)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좌하는 자실과 모습이 순박하니 반드시 외면을 힘쓸 분이 아니니, 진실로 감히 외람되게 대낮에 등불 같은 도움조차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허명' 이 두 글자는 근세 유문(儒門)의 공통된 근심거리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저 이름은 유적(儒籍)에 올려놓았지만 전혀 계책이 없는 자는 말할 거리가 못됩니다. 그런데 주성(州省)에서 명망을 받고 있는 모모(某某)의 경우는 성리(性理)의 심오함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천인(天人)의 함의도 극치까지 궁구하지만 그 마음과 몸가짐을 살펴보면 간혹 주위 사람의 의심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에 대해 모여서 따지고 변론하여 예(禮)를 제정한 본뜻에 훤할 것 같지만 그 집에서 행하는 것을 살펴보면 간혹 이해가 걸려 있을 경우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 배운 바를 미루어 자신과 집안에 적용하는데도 오히려 어긋남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어찌 《대학》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실지를 함께 논하길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바야흐로 또한 가득히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실학(實學)으로 자처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취할 경우에도 또한 그 실견(實見)과 실덕(實德)이 어떠한가를 묻지도 않고, 한갓 언어문자의 풍부함으로 모두 똑같이 실학이라고 하며,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하게 되면 후세 또한 실학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어찌 오늘과 후세에 어찌 조금의 도움이 없겠습니까마는, 명망과 실지가 서로 걸맞는다고 말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세속의 조롱과 업신여김을 부르고 도술이 비하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한 가지에 대해 우리들은 정히 주제로 삼아 더욱 힘을 써서 자신의 처신과 남을 살핌에 있어 이런 풍조에 갇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虛名之喻, 認出自道.北方風氣質實, 非南土之比,座下之資貌淳樸,必非務外者,則固不敢猥獻晝燈之下助矣.第此二字,爲近世儒門之通患則久矣.彼掛名儒籍,全没猷爲者, 已不足道.其在某某之佣望州省者,理邃性奧, 毫分縷析,天人之蘊, 期究極致, 觀其用心行己, 則或不能絕旁人之疑.常節變目,聚訟居辨,制禮本旨,若將瞭然,觀其行之家庭,則或失守於利害之際.推其所學,用之一己一家,猶齟齬若此,尚何望與論《大學》治平之實乎? 然而方且充然自多,處之以實學; 人之取之也,亦不問實見實德之如何,徒以言語文字之富,僉同謂之實學; 遺文傳之後世,後世亦以爲實學.是其言論風旨,豈無少裨於今與後, 而謂之名實之相稱,則末也.此所以來世俗之嘲侮而道術之汙下也.此一著,吾輩正宜做題加勉, 處已與觀人, 求其不囿於此風也.未知尊意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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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형 기진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田舜衡璣鎮 ○乙亥 지난번 이별한 것이 꿈만 같은데, 어느 날에나 다시 만나겠는지요? 멀리 그려 마지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문(斯文)의 시비(是非)가 있은 이래로 마침내 무한한 추악한 제목을 얻게 되었으니, 비록 집에 앉아있다 하더라도 집안에서도 척연히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항상 감히 불초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저를 방문한 자가 있더라도 또한 감히 기뻐하는 마음을 두지 못하고 문득 두렵고 곤란한 마음이 생겨서 다시 어떤 책망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었고, 또 헤어지고 나서는 다시 전하는 말이 있어서 다시 무슨 죄를 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웠습니다.지난번에 형이 은혜롭게 방문했을 때에는 평소의 정의와 멀리서 찾아온 부지런함을 생각하니, 어찌 기쁜 마음에 신발을 거꾸로 신고 악수114)를 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로서는 실로 처음에 조금 두렵고 곤란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니, 화살에 맞은 새가 굽어진 나무만 보고도 놀란다고 하는 것115)이 어찌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그 모습을 보고서는 비록 그 곤름(囷廪)116)을 다 기울이지 않고 또한 그 성부(城府)를 완전히 열지는 않았지만117), 사사로이 생각하기를 과연 평소에 바라던 바를 저버리지는 않았고 점점 간담을 서로 보여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여겼습니다.그리고 형이 다시 방문했을 때에 저는 이미 먼저 두렵고 곤란한 마음을 끊어버렸으니, 이미 말씀을 듣고 얼굴을 볼 일이 없었고, 또한 곤름을 기울고 성부를 열지 않아도 흔쾌히 저의 간담을 열어 보이는데 더는 여지를 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지 않음이 있었는데, 이는 내가 머뭇거리고 의심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갑자기 쉽게 마음을 쏟아낼 수 없었던 때문입니다. 형은 혹 이점에 대하여 저를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아니한지요?대개 형은 호남(湖南)과 음성(陰城) 사이에 대해 일찍부터 그 시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만 저계야(褚季野)118) 같은 자가 형과 서로 잘 지내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같은 길을 가게 됨을 면치 못했을 뿐이니, 이것은 진실로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근래에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의 입언(立言)이 해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략 변론하였는데, 형은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진영이 변론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자, 형은 또 그렇지 않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그 잘잘못의 소재를 분명코 알 수 있었습니다. 오진영이 다시 내가 절의를 배척하는 사설(邪說)을 한다고 여겨서 오랑캐의 재앙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는데, 형은 이에 대해 또 어떻게 여기십니까?근년 이래로 비록 평범한 말이라도 입을 떠나기만 하면 허물이 곧바로 따라서 생겨납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시비와 관련된 것은 그 그림자만 대략 언급하여도 엄한 꾸짖음이 사방에서 닥칩니다. 비록 평소에 매우 친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도 매번 살펴주지 않고 비정하다고 하니, 일단의 애타는 심정을 누구와 함께 말하겠습니까? 매번 자문하고 자답할 뿐입니다.형이 멀리 영남으로부터 서해의 바닷가까지 와서 생사를 묻고 다시 마음을 위로해 주시다가, 얼마 안 되어 이별하여 가셨는데, 어찌 저로 하여금 한 번 기쁘게 했다가 한 번 슬프게 하십니까? 근래는 더욱 무료하여 애오라지 지난날에 다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써서 보내니, 또한 장차 이를 이어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형은 아마 제가 형을 서운하게 하지 않았음을 아실 것입니다. 向別如夢,不知從者何日返抵耶? 區區遠溯不已.第念自有斯文是非以來,遂得無限醜題,雖坐在自家,家裡未嘗不惕然愧恨者多.是以尋常不敢以不肖面目自露於人.其或有相訪者,亦不敢有欣喜之心,而輒生畏難之意,以爲不知復有何等責問也,又懼夫退而不知復有傳說而使重得何罪也.往者,兄之惠然見顧也,揆以平日情誼及其遠于之勤,則奚啻欣喜倒屣握手而已哉? 而弟實不能初無絲毫畏難之心,豈其傷弓之鳥見曲木而驚是耶? 及聽其言而觀其貌也,則雖不盡傾其囷廪,而亦不全閉其城府,私竊以爲果不負平昔所望而漸有可以肝膽相示之路頭矣.及兄之再訪也,弟已先絕畏難之心,則已無事於聽言觀貌矣,亦且無待於囷廪之傾、城府之開,快將我肝膽相示,無復有餘.而却猶未然,非我有所趑趄疑殆而爾,實緣凌遽未易輸寫者.兄或於此,不以爲簡我,尚未可知也.未知不然否.蓋兄於湖陰之間,非不早燭其是非者,但有褚季野者,與兄相善,故不免與之同歸耳,此固不必再言者.至於近日吳作《鄭節士傳》,弟見其立言之有害,故不得已有所略辨者,兄旣不以爲非.吳之於辨有所云云者,兄又不以爲然,則得失所在,斷可見矣.吳復以我爲排節義之邪說,而與於夷禍之甚者,兄於此又以爲如何? 年來雖尋常說話,纔脫於口,吝輒隨生.況其稍涉是非者,略及影響,誅責四至.雖號平日相親之厚、相識之甚者,每不見察,加以非情,一段耿耿,向誰與語? 每自問自答而已矣.兄遠自嶺表以來西海之濱,旣問死生而復論心曲,而不須臾而別,則安得不使我一喜而一悵也? 近益無聊,聊將往日未盡輸寫之萬一以去,且將繼此而有言矣.兄庶幾知我之不簡兄也. 신발을……악수 《구당서(舊唐書)》 〈유업전(劉鄴傳)〉에 유업(劉鄴)이 찾아오자 너무도 반가워 신발을 거꾸로 신고 영접했던 이덕유(李德裕)의 고사가 있다. 화살에……것 화살을 맞아 본 경험이 있는 새는 활을 당기는 시늉만 하여도 그만 놀란 나머지 공중에서 떨어지고 만다는 뜻으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과 비슷한 우화이다. 《전국책(戰國策)》 〈금책(楚策) 4〉 곤름(囷廪) 곳간 : 균름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인데, 여기서는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아래의 성부(城府)도 마찬가지이다. 그 성부(城府)를……않았지만 원문은 '不全閉其城府'인데, 문맥을 살펴 '閉'를 '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저계야(褚季野) 저계야는 입으로 시비를 말하지 않으나 속으로는 시비(是非)가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칭찬하여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서,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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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부 해룡에게 보냄 무인년(1938) 與吳翼夫海龍 ○戊寅 옛날 30년 전에 같은 방을 쓰면서 학업을 같이 할 때 서로 기약한 것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이윽고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천지가 뒤엎어지고, 세상 일이 다단하여 학업에 둔 뜻도 해이해졌습니다. 비록 이후에도 계속 만나서 일찍이 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옛날에 했던 것처럼 경전(經傳)을 강론하여 정미한 뜻을 찾고 명리(名理)를 상의하여 극치를 궁구해서 이른바 서로 기약한 것을 구하는 일은 아마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형은 비록 학문을 표방한 적은 없었지만 덕기(德氣)를 하늘로부터 타고났고 효우(孝友)를 가정에서 행하여, 밖으로는 뭇사람과 화합하면서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었고 안으로는 의리를 밝혀 시비를 아셨으니, 이것은 그 이름은 없지만 그 실지는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한갓 이름만 달고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어서 걸핏하면 허물이 있고 재앙이 또한 뒤따르는 자로서는 부끄러울 뿐입니다.선사가 돌아가신 뒤에는 변괴가 거듭 출연하고 의리가 캄캄하게 막혔습니다. 선사를 오래 따라서 독서를 더욱 많이 한 자는 그 견해가 더욱 어긋나며 그 마음이 더욱 험하여, 선사를 무함함에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 선사를 따른 것은 의리를 듣기 위함이고, 책을 읽는 것은 심술을 밝히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저는 형의 친동생이 아니지만 편지를 조금 읽어보니, 곧 "만약 '간옹(艮翁)이 인의(認意)와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절의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고, "인의와 인교에 관한 설이 있고부터 많은 사람들이 간옹을 의심하였다. 먼저는 유서(遺書)가 있다 하여 절의(節義)라는 명성을 취하였고, 뒤에는 홀로 앉아계실 때 명한 것이 있다 하여 원고의 간행을 인가하는 사사로움을 이루었는데, 매우 불행한 일이다. 간옹의 문인들은 마땅히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에 관한 설에 대해 분명히 분별하고 통렬히 배척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선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만 선사가 온전히 선사가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얼마나 명쾌하며 얼마나 엄정합니까! 이에 사람의 견식과 심술에는 본디 등급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앞서 우러러 칭찬했던 "그 이름은 없지만 그 실지는 있다."고 한 것을 더욱더 증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또 영재종(令再從) 두남(斗南 오해겸(吳海謙))은 명민하고 민첩한 자질로 선사를 오래도록 따르고 책을 많이 읽은 것이 우리 형에 비교하면 어찌 몇 배가 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이처럼 명쾌하고 엄정한 반면, 두남은 도리어 저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정견(定見)을 바꿨으니, 나는 진실로 그 사이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남을 위해 근심하는 것이 형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진실로 깊습니다. 이것은 천고토록 우리 사문(斯文)의 큰일로서 사정(邪正)을 구분하고 주적(主賊)을 판별하는 것이니 관련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이 때문에 깊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실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은 집안의 친척이니 어찌 제가 벗으로서 근심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모쪼록 때때로 의리에 근거하고 이치를 논하여 명백하게 고하여 깨우쳐서 두남이 의리가 아닌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를 두남과 함께 보고, 제가 두남에게 보낸 편지도 가져다 보아서 기어코 반복해서 논변하여 실효를 거두기를 기대합니다. 憶昔三十年前,同牕聯業也,所相期者果如何? 旣而邦運不幸,滄桑翻覆; 世故多端,志業廢弛.雖其源源相從,未嘗不在此事之中,至於講質經傳, 精義是索, 商確名理, 極致是究, 以求所謂相期者,如曩時之爲,則蓋未之有也.竊念吾兄雖無學問之標榜,然德氣禀於天,孝友行於家,外和於衆而自有所守,內明於義而知其是非,是則可謂無其名而有其實.而如弟之徒然佣名而無所實得,動輒有咎而禍亦隨之者,知所愧也.屬當山頹之後,變怪疊出,義理晦塞,從師愈久而讀書愈多者,其見愈差,其心愈險,其所以誣陷先師者,無所不至.噫! 從師所以聞義理也,讀書所以明心術也,胡爲而至此? 絕不可曉也.若吾,兄之非親弟而少讀書, 則乃曰"若云艮翁有認意、認教,則大傷節義",曰"自有認意、認教之說,人多有疑以艮翁.先有遺書取節義之名,後有獨命濟認稿之私者,甚是不幸.爲艮翁門人者,當於認意、認教之說,明辨痛斥,不使毫髪近於先師,然後先師爲先師".凡諸說何其明快! 何其嚴正! 乃知人之見識心術本自有品第,而向所仰贊"無其名有其實"者,尤可驗矣.且也令再從斗南之聰明敏達,從師久讀書多,視吾兄奚啻倍蓗? 然而兄則如是明嚴,斗則却眩彼說而忽改定見,吾誠不知所以爲說於其間.然爲斗而憂者,加於爲兄而喜者,則誠有之.此是千古斯文大事,邪正之分,主賊之判,所關甚重,故憂之不得不深,言之不得不切也.兄在同堂之親,豈下如弟朋友之憂? 望須時時據義論理,明白告喻,俾不陷於非義,如何? 此書與斗同看,弟與斗書亦取看,期於反覆論辨,以收實效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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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崔性武 丁巳 제가 젊었을 때에 학자들 사이에 나아가 놀면서 성 안의 준수한 사람들과 사귐이 많았습니다. 얼마 후에 시대가 변하여, 빈부가 기세를 달리하니 발걸음이 멀어지고, 신구(新舊)가 길을 달리하니 희망97)은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어져 세상의 버림을 받은 채 혼자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형이 옛 사귐을 변하지 않고 샘물이 끊임없이 뒤를 잇듯이 계속해서 달마다 시간마다 이런 은혜를 두터이 베풀어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이런 은혜는 세인들의 비당(比黨)98)이 하는 짓과는 같지 않으니 참으로 추구하는 도(道)가 같고, 지닌 뜻이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단지 이전에 왕래한 것에 대하여, 애써 보답하려고 변폭99)하는 허례를 꾸미겠습니까? 간을 뽑고 적심(赤心)100)을 이끌어내어 서로 이택101)의 바탕으로 삼아서, 지니고 추구하는 것을 더욱 굳건하고 더욱 바르게 하기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청사년간(青蛇年間)102)에 태잠(台岑)에서 풍욕하며, 창강에서 눈 밟고 달구경 하자던 우리 두 사람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 이후로부터 나는 초상(初喪)의 재앙에 정신을 빼앗기고 근심과 가난이 피부를 찔러서 여러 해 동안 심난하게 이룬 것이 없었습니다. 형 또한 병에 핍박을 받아 이전의 공부와 인사를 익힐 겨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마음먹었던 일에 부합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 크게 개탄하였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산 이후로,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지고, 일찍이 겪었던 염병과,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것들은 혼연히 전생의 일처럼 잊혀지고, 미래의 경영과 도모로 바라거나 즐거운 것들 또한 모두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몸을 단속하며 이치를 연구하여 선인의 유체(遺體)103)를 완성하고, 옛사람의 실마리를 궁구하여 찾으니, 비유하자면 겨울을 겪은 나무가 눈서리에 온갖 타격을 받았지만 오직 생의(生意)가 있음에 잘 배양하여 해치지만 않는다면 거의 꽃과 잎이 피어나고 가지와 줄기가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의 뛰어남과 민첩함은 말세에 드물게 보는 것이니, 하늘이 내려준 상서로움을 얻어서 묵은 병을 점점 제거하고 날마다 기를 따른다면 다소 막힌 뜻이 장차 반드시 강하고 굳세게 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주와 뜻으로 처음에 발원(發願)을 생각하고 조금 쉬었던 발걸음을 일으켜서 상스러운 세속의 정을 끊어버리고 고명한 곳에 마음을 두어 명교(名教)104)로써 즐거움을 삼고,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105), 삼가 한 삼태기가 부족함106)도 없게 한다면, 우뚝한 성취는 옛사람과 우열을 다툴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이 졸렬하고 누추한 사람도 이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마지막 불빛을 더할 것이니107) 어찌 일찍이 도모하지 않습니까? 만약 다시 헛되이 천천히 가면서 지체한다면 눈 깜빡할 사이조차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겨우 몇 년만 지나면 강사(强仕)108)의 나이가 되고, 형 또한 이모(二毛)109)의 나이가 될 것입니다. 성인의 이른바 '40세가 되어도 알려지는 것이 없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110)는 것으로 논해보면 마땅히 이렇게 끝날 것만 같습니다.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111)와 거백옥(蘧伯玉)의 지비(知非)112)는 군자에게 칭도되고 현자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우리들이 여기에서 종사할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한번 하면 나는 백 번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하면 나는 천 번 한다.'는 것은 비록 애써 힘쓰는 자를 위해서 말한 것이지만, 나이가 많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욱더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더불어 사귐에 서로 힘써 수양하고 서로를 경계하여 이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澤述少日,出遊翰墨間,獲交省內雋秀者,多矣.旣而,時移世變,或貧富異勢,足跡齊蜀,或新舊殊塗,襟期燕越,見棄于世,踽涼自遣.惟兄不渝舊交,源源過從,以月以時,此惠諒厚,不省所以效報也.然故人此惠,非若細人之比黨爲也.實以所趨者同道,所執者同志也.區區豈敢徒爲尚往來,務報施以餙邊幅之虛禮? 將抽肝輸赤,互資麗澤,以求所執 所趨之 愈堅愈正焉,可也.仍念往在青蛇年間,台岑風浴滄江雪月,吾兩人所期者.顧何事自是厥後,我則喪禍奪魄,憂貧剝膚 攸攸數載 憒憒無成.兄亦爲二竪子所逼,未暇溫理前功人事之多.故夙心之難副.蓋有如此者,而俯仰穹壤,堪可浩慨,廬此以來,百念俱灰,曾經之疢疾,凡可憂可苦者,渾忘若前生事,來頭之營謀,凡可欲可樂者,亦舉不入於胷中.惟欲飾身研理,用成先人之遺體,究見古人之緒意,譬如經冬之樹,飽喫霜雪打撲而,惟有生意者,存善培養,而不戕賊,則庶見敷花葉,而達枝幹矣.吾兄之俊敏,固叔季之罕覯,而獲天降祥,宿祟漸袪,向日隨氣,少沮之志,將必日以強堅矣.以若之才之志,念初發之願,起少歇之脚,絕情於猥俗,玩心於高明,以名教爲樂地,將聖訓作佩服,不敢半塗而廢,愼無一簣之虧,則多就之卓,將伯仲古人.而如拙陋者,風斯下而附末光也,何不早早圖之? 如復虛徐而稽緩,則轉眄之間,日月不待矣.今弟纔過數歲,是強仕之齡; 兄亦洽滿二毛矣.以聖人所謂 '四十無聞,不足畏.'者,論之,宜若終於斯而已者.但衞武之抑戒,伯玉之知非,見稱於君子,而不害爲賢者,則吾輩於此,可以知所從事矣.蓋'人一己百,人十己千',雖爲困勉者設,年紀遲大如吾輩者,尤不可以不勉.願與交修胥勖,庶不枉度此生也. 금기(襟期) 가슴으로 품는 기대, 희망, 뜻을 가리킨다. 비당(比黨) 이익을 위하여 어울려 지내는 무리. 변폭(邊幅) 변폭(邊幅) 또는 표폭(表幅)이라고도 쓴다. 이는 겉을 휘갑쳐서 꾸미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간을 뽑고 피를 보내어 상대방에 충심(忠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택(麗澤)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주역(周易)》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청사년간(靑蛇年間) 1905년 을사년(乙巳年)을 말한다. 유체(遺體) 부모가 남겨준 몸이라는 뜻으로, 자기 몸을 일컫는 말이다. 명교(名敎) 유가(儒家)가 정한 명분(名分)과 교훈을 준칙(準則)으로 하는 도덕관념. 중도에 그만두다 《중용(中庸)》 제11장의 "군자들은 도(道)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지만,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라는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자포자기한다'는 말은《논어(論語)》〈양화(陽貨)〉의 집주(集註)에 "이른바 하등(下等)의 어리석은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자포(自暴)하는 자와 자기(自棄)하는 자이다……자포하는 자는 학문을 거부하여 믿지 않고, 자기하는 자는 학문을 끊고 배우지 않으니 성인이 함께 살더라도 이런 사람을 변화시켜 선(善)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정자(程子)의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한 삼태기(一簣) 《논어(論語)》 〈자한(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말광(末光) 해와 달이 지면서 내뿜는 희미한 빛. 미력(微力)을 비유한 말로,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구자시표(求自試表)〉에, "반딧불 촛불은 하찮은 빛이지만, 해와 달에 광휘를 더하리이다.[螢燭末光 增輝日月]" 한 데서 온 말이다. 강사(强仕)의 나이 4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 上)〉에 "나이 사십을 강이라고 하니, 이때에 벼슬길에 나선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이 나온다. 이모(二毛) 이모지년(二毛之年)의 줄임말. 흰 머리카락 두 올이 나는 나이 곧 백발이 나기 시작하는 나이로 32세를 말함. 서진(西晉)의 학자 반악(潘岳)이 산기성(散騎省)에서 숙직하며 '추흥부(秋興賦)'를 지어 읊기를 "서른두 살에 처음 흰 머리카락 두 올을 보았네."라 읊은 데서 유래하는 말임. 최장렬은 1887년생으로 1917년에 31세였다. 40세가……없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니,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억계(抑戒) 시 《시경(詩經)》에 실려 있는 위 무공(衛武公)의〈억계(抑戒)〉 시이다. 위 무공은 늙어서도 〈억계〉 시 12장을 지어 항상 곁에서 외우게 해서 마음을 깨우치고 신하들로 하여금 늙었다고 멀리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 거백옥(蘧伯玉) 지비(伯玉知非)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육십이 되었을 때,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고쳤다는 고사를 말한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라는 말이 나온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 장례 때의 홀기 【1922년 9월 13일 당시에 내가 집례를 담당하였는데, 전재 선생502) 장례 때의 홀기를 인하여 가감하였다.】 先師襄禮時笏記 【壬戌九月十三日, 時余當執禮, 因全齋先生襄禮時笏記, 增損.】 계빈(啓殯)503) ○내외 오복지친(五服之親)504) 및 문인들은 각각 위에 나아가 전(奠)505)을 차린다. 축(祝)이 집사자를 인솔하여 손을 씻고 음식을 들게 하며【먼저 탁자를 조계(阼階)의 동남쪽에 설치하고, 전의 음식 및 술잔과 주전자를 그 위에 두고 수건으로 덮는다. 대야와 수건을 음식의 동쪽에 설치하되, 별도로 탁자를 두어 깨끗이 씻은 대야와 새로 빤 수건을 그 동쪽에 설치한다.】, 동쪽 층계로 올라가 영좌(靈座)506) 앞에 이르러 포는 동쪽, 젓갈은 서쪽에 놓게 한다. 축이 분향하고 술잔을 씻어 술을 따르며 이를 마치면 북향하고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고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주인(主人 상주(喪主)) 이하는 슬픔을 다해 곡하고 재배한 다음 계빈한다.조조(朝祖)507) ○집사자는 사당 앞 양쪽 계단 사이에 자리를 편다. 축이 영좌 앞에 이르러 북향하고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고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일하는 자들이 들어오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주인과 중주인(衆主人)508)은 지팡이를 들고【땅에 짚지 않는다.】 서서 살핀다. 축이 혼백(魂帛)509)을 모시고 앞서서 사당 앞으로 간다. 여러 집사는 제수 및 교의(交椅)510)와 탁자를 받들어 다음에 가고 명정(銘旌)511)이 다음에 간다. 일하는 자들이 영구(靈柩)를 들고 다음에 가고 주인 이하는 따라가며 곡을 한다.남자는 오른쪽【서쪽】으로 가고 여자【모두 개두(蓋頭)512) 차림을 한다.】는 왼쪽【동쪽】으로 가며, 복(服)이 중한 사람은 앞에, 복이 경한 사람은 뒤에 선다. 복이 없는 친척[無服親] 가운데 남자들은 복을 입는 남자들의 오른쪽에, 복이 없는 친척 가운데 여자들은 복을 입는 여자들의 왼쪽에 있되, 모두 주인과 주부의 뒤를 따른다. 사당에 이르면 중문(中門)을 연다. 일하는 자들이 양쪽 계단 앞의 자리 위에 관을 놓되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나간다. 축이 집사자를 인솔하여 영좌 및 전상(奠床)을 영구의 서쪽에 동향으로 차리게 한다. 주인 이하는 영구의 동쪽에 있되 서향하고, 주부 이하는 영구의 서쪽에 있되 동향하며, 모두 북쪽을 윗자리로 하고【주인에게 모친이 있으면 주부의 왼쪽에 특별한 자리를 설치한다.】, 서서 슬픔을 다해 곡을 하고 그친다.영구를 청사(廳事 대청)로 옮김 ○집사자는 청사에 휘장을 치고 자리를 편다. 일하는 자들이 들어오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축이 북향하고 꿇어앉아 영좌에 다음과 같이[云云] 고하고, 고하기를 마치면 혼백을 받들며 영구를 인도하되 오른쪽으로 돈다.【동쪽에서 남쪽으로 돈다.】 주인 이하는 곡하며 따르기를 이전처럼【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에 있다.】 하여 청사에 이른다.일하는 자들은 영구를 자리 위에 두되 머리가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나간다. 축이 영좌 및 전상【바로 이전의 전이다.】을 영구 앞에 남향으로 차린다. 주인 이하는 자리에 나아가【조조의 때처럼 하되 남쪽을 윗자리로 하고 천석(薦席)을 깐다.】 앉아서 곡을 한다. 문인들은 계단 아래에 북향하여 동쪽을 윗자리로 하고 서되 겹줄[重行]로 하여 곡하며, 영상(靈床)을 치우고 바로 교대하며 곡한다.【만일 염하기 전이면 발인까지 이른다.】 친척과 손님이 치전(致奠)513)하고 부의(賻儀)한다.기물을 진설함 ○방상(方相)514), 시자(侍者), 명정(銘旌)515), 의탁(椅卓), 영거(靈車)516), 만장(輓章)517), 공포(功布)518), 대여(大轝 큰 상여)【곁에 운불삽(雲黻翣)이 있다. ○밤에는 이를 거두어 보관했다가 이튿날 다시 진설한다.】의 순서이다.조전(祖奠)519) ○일포시(日晡時 저물녘)【저녁에 상식(上食)520)을 올린 뒤이다.】에 조전을 차린다.【음식은 이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축이 분향하고 술을 따르며 이를 마치면 북향하고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고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주인 이하는 재배하고 곡을 할 때 슬픔을 다한다. ○밤에 대문 안의 오른쪽에 횃불을 설치한다.영구를 옮겨 상여로 나아감 ○이튿날 상여꾼이 대여(大轝)를 중정(中庭)에 들이되 남향으로 하게 한다. 집사자는 조전을 거둔다. 축이 북향하여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고하고 마침내 영좌를 옮겨서 곁에 둔다.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역부(役夫)를 불러서 영구를 옮겨 상여로 나아간다. 이에 실되 머리를 남쪽으로 하게 하고 베로 만든 새끼줄로 묶어서 아주 견고하고 실하게 한다. 주인은 영구를 따라서 곡하며 내려와 싣는 것을 지켜본다. 부인은 휘장 안에서 곡을 한다. 모두 실으면 축이 집사자를 인솔하여 영좌를 영구 앞에 남향하도록 옮겨두게 한다.견전(遣奠)521) ○집사자는 전을 차린다.【찬(饌)은 이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축은 분향하고 술을 따르며 이를 마치면 북향하고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고한다. 주인 이하는【부인은 거기에 참석하지 않는다.】 곡을 하고 재배하며 마침내 전을 거둔다.【집사자는 대로 만든 그릇에 남은 포를 담는다. ○식사 때 상식을 올린다.】축이 혼백을 받들어 영거에 올리고 분향함 ○별도로 신주를 상자에 담아 혼백 뒤에 둔다. 집사자는 견전 때 남은 포를 영거에 들인다. 부인은 이에 개두 차림을 하고 휘장을 나와 계단을 내려와 서서 슬픔을 다해 곡을 하고 재배한다.영구가 떠남 ○방상(方相), 시자(侍者), 명정(銘旌), 의탁(椅卓), 영거(靈車), 만장(輓章), 공포(功布), 대여(大轝)【운불삽은 대여 양 곁에 있다.】가 차례대로 따라간다. 주인 이하는 곡을 하며 따라간다.【조조 때의 차례처럼 한다.】 복이 없는 친척이 다음이고, 문인이 다음이고, 빈객이 다음이다.도중에 잠자고 머묾 ○집사자는 영구 앞에 영좌를 차린다. 조석으로 곡을 하고 전을 올리며【석전(夕奠)을 올릴 때 견전에 올렸던 포를 치운다. 조전(朝奠)을 올린 뒤 올렸던 포를 싸서 영거(靈車)에 넣는다. 매일 이처럼 한다.】, 식사 때 상식(上食)을 올리고, 야간에는 주인 및 중주인이 모두 영구 옆에서 잠을 자며, 친척과 문인들이 함께 지켜주고 중정(中庭)에 횃불을 설치한다.묘지에 도착함[及墓] ○(상여가) 도착하기 전에 집사자는 먼저 묘도(墓道)의 서쪽에 영악(靈幄)522)을 설치하되 남쪽을 향하게 하고, (혼백을 안치할) 교의와 탁자를 놓는다. 친척과 빈객이 머무는 막차는 영악 앞 십수 보에 남향하여 있다.방상이 도착함 ○창으로 광의 네 귀퉁이를 친다.영거가 도착함 ○축이 혼백을 받들어 영악의 자리로 나아가고, 신주 상자는 혼백 뒤에 두며, 마침내 전을 차리고 물러난다.【조전에서 남은 포는 이때 이르러 바로 거둔다.】영구가 도착함 ○집사자는 먼저 광(壙)의 남쪽에 자리를 펴고, 등(凳)523) 두 개를 놓는다. 영구가 도착하면 싣고 있던 것을 풀어서 등상(凳上)에 안치하되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결과(結裹)524)를 제거한다. 축은 공포(功布)로 영구를 닦고 이금(侇衾)525)으로 덮는다. 집사자가 명정을 취하여 강목(杠木)을 제거하고 영구 위에 놓는다. (각각) 자리에 나아가 곡을 한다. ○주인 및 오복친(五服親)은 광의 동쪽에 서서 서향하되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겹줄로 하고, 문인들은 광의 남쪽에 서서 북향하되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겹줄로 하고 모두 곡을 한다.이에 하관함[乃窆] ○주인과 중주인은 곡을 그치고 직접 임하여 하관하는 것을 살펴봐야 하니, (하관하는 일은) 가장 세심하게 살펴 공을 들여야 하고 잘못하여 기울거나 떨어트리거나 움직이거나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먼저 짧은 강목 2개를 사용해서 회격(灰隔) 위에 가로로 놓고, 또 긴 강목 2개를 사용하여 광(壙) 입구에 가로로 놓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게 한다. 명정(銘旌)과 구의(柩衣)를 거두어 곁에 둔다. 따로 긴 강목 2개를 사용하여 영구 위 양쪽 끝에서 가로로 들고, 베 2가닥을 사용하여 이를 접고 영구 밑 양쪽 끝에 씌워, 그 베 4곳의 끝을 수직으로 올려 가로로 들고 있는 강목의 허리에 매달아 묶는다.하나의 강목마다 양쪽 끝에 베를 매어 일제히 그 강목의 4군데 끝을 들고, 영구를 옮겨 광 입구에 있는 2개의 강목 위에 놓아 그 사방(四傍)을 바르게 한다. 그리고 바로 들고 있는 강목을 약간 들면서 광 입구에 있는 2개의 강목을 제거하고, 들고 있는 강목을 조금씩 놓아 내리면서 짧은 강목 위에 영구를 안치한다. 그리고 다시 매달려 있는 영구와 베의 길이를 헤아려 광 밑에 닿을 수 있게 한 뒤에 다시 처음처럼 맨다. 두 사람을 회격 상하에 나누어 서게 하여 손으로 영구의 네 귀퉁이를 눌러서 기울지 않게 하고, 또 강목을 조금 들어서 짧은 강목을 제거하고 그대로 조금씩 내린다.이미 내렸으면 베를 풀고 강목을 제거하여 그 베를 빼내고, 흰 실[素絲]을 사용하는데 길이는 관과 같고 영구 위에 세로로 놓으며, 중앙은 옆으로 놓은 종이에 먹줄로 표시한 곳과 정확히 맞게 한다. 밀랍과 점사(粘絲)를 사용하여 양 끝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또 금정기(金井機)526) 면의 먹줄로 표시한 곳에 한 가닥 가는 새끼를 당겨 자세히 보아 실[絲]과 새끼[繩]가 서로 맞게 하여 그 바름을 살펴본 뒤, 실과 새끼 및 영구 상하에 표시한 종이를 제거한다. 설면자(雪綿子)527)를 사용하여 영구 위의 먼지를 닦아서 깨끗하게 한다. 주인은 구의와 명정을 정돈하되 평평하고 반듯하게 하고 운불삽[翣]은 광에 넣지 않는다.증(贈)528) ○주인은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다. 집사자가 검은 비단[玄]과 붉은 비단[纁]을 받들어 주인에게 준다. 주인이 이를 받들어 영구 위 동쪽에 두되 검은 비단이 위에, 붉은 비단이 아래에 있게 하며, 곡을 하고 재배하며 이마를 조아린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슬픔을 다해 곡을 한다.회격(灰隔)529)에 덮개를 덮음 ○회판(灰板)530)을 회격 위에 놓고, 삼물(三物)531)을 고루 섞은 것으로 밟아서 채운다.【영구 안이 흔들리게 하지 않고, 다만 많이 사용하여 채워지기를 기다린다.】흙을 채움 ○흙을 1자쯤 넣을 때마다 바로 가벼운 손놀림으로 촘촘하게 다진다.토지신에게 제사함 ○축이 집사자를 인솔하여 묘소의 왼쪽에 신위를 설치하되 북쪽에 가깝게 하여 남행하게 하고 자리의 남쪽 끝에 찬을 차리며, 또 대야와 수건을 그 동남쪽에 설치한다. 고자(告者)【먼 친척이나 혹은 빈객이 맡는다.】가 길복(吉服 평상복)을 입고 신위 앞에 북향하고 선다. 집사자는 그 뒤에 있고【서쪽을 윗자리로 한다.】, 모두 재배한다. 고자와 집사자는 모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다. 고자는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는다.집사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서향하여 무릎을 꿇고, 또 한 사람은 잔을 들고 동향하여 무릎을 꿇는다. 고자는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르고 주전자를 돌려주고, 잔을 들어 땅에 붓고 다시 술을 따라서 신위 앞에 올린다.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꿇어앉는다. 축이 축판(祝板)을 들고 고자의 왼쪽에 동향하여 서고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云云] 축문을 읽는다. (축문 읽는 것이) 끝나면 (축은)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고자 이하는 모두 재배하고 거두어 나간다.지석을 내림 ○광 안의 남쪽 [가까이]에 먼저 벽돌 한 겹을 깔고 지석을 그 위에 놓으며, 또 벽돌로 사방을 둘러싸고 그 위를 덮는다. 다시 흙을 붓는 것은 또한 1자 정도를 기준으로 삼되, 공이질을 치밀하게 하여 견고하게 다진다.신주를 씀[題主] ○집사자는 영좌의 동남쪽에 서향으로 탁자를 설치하여 벼루와 붓과 먹을 그 위에 놓아두고【연적(硯滴)도 갖춘다.】, 탁자 맞은편에 대야와 수건 각각 2개【하나는 동쪽에 있는데 받침대가 있는 것으로 축이 씻는 것이고, 하나는 서쪽에 있는데 받침대가 없는 것으로 글씨를 쓰는 자가 씻는 것이다.】를 놓는다. 주인은 탁자 남쪽에 북향으로 선다. 중주인은 그의 왼쪽에서 조금 앞에 있다. 축이 손을 씻고 신주를 꺼내어 탁자 위에 눕혀 놓는다.글씨를 잘 쓰는 자가 손을 씻고 서향하여 서서【혹 앉아서 쓰기도 하니, 일에 편하게 한다.】 먼저 함중(陷中)532)에는 '【고(故) 처사(處士) 전공(田公) 휘우(諱愚) 자자명(字子明) 신주(神主)】'라고 쓴다. 분면(粉面)533)에는 '【현(顯) 조고(祖考) 처사 부군(府君) 신주, 효손(孝孫) 일효(鎰孝)534) 봉사(奉祀)】'라고 쓴다. 쓰기를 마치면 축이 신주를 합하여 받침에 꽂고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혼백 상자를 그 뒤에 둔다. 분향하고 술을 따라 올린 후, 축문판(祝文板)을 들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주인도 꿇어앉는다.】 읽는다. 읽기를 마치면 축문을 가슴에 품고【남겨두었다가 초우(初虞)535) 때의 축문과 함께 태운다.】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간다. 주인 이하는 재배하고 슬픔을 다해 곡을 하고 그친다.신주를 받들어 영거에 올림 ○축은 신주를 받들어 독(櫝)536)에 들일 때, 깔개를 사용하고 다시 덮개를 하지 않으며, 덮지 않은 채로 영거에 올린다. 혼백 상자는 그 뒤에 있고【쓴 신주를 들이고 남은 포로 전을 올린다.】, 분향한다.영좌를 거두고 떠남 ○집사자는 영좌를 거두고 마침내 떠난다. 주인 이하 및 문인들은 곡하고 재배하며 묘소에 인사를 드리며, 곡하면서 따르기를 올 때의 의식처럼 한다. 다만 자제 한 사람을 남겨 두어 흙을 채우고 봉분 만드는 일을 살피게 한다.반곡(反哭)537) ○주인 이하는 영거를 받들고 길에서 천천히 걸으며 곡하고 집에 도착하면 곡한다. 집사자는 먼저 영좌를 설치한다. 축이 신주 궤를 받들어 서계(西階)로 올라가 교의 위에 받들어 안치하고, 혼백 상자는 그 뒤에 안치한다. 주인 이하는 서계로 올라 영좌 앞에서 슬픔을 다해 곡을 하고 그친다. 啓殯 ○外內五服之親及門人, 各就位設奠. 祝率執事者, 盥手擧饌 【先設卓子阼階東南, 置奠饌及盞注于其上, 巾之. 設盥盆帨巾于饌東, 別以卓, 設潔滌盆新拭12)巾於其東.】, 升自阼階, 至靈座前, 脯東醢西. 祝焚香洗盞斟酒, 訖北向跪告云云, 俛伏興. 主人以下哭盡哀, 再拜乃啓殯.朝祖 ○執事者布席于祠堂前兩階間. 祝詣靈座前, 北向跪告云云, 俛伏興. 役者入, 婦人退避. 主人及衆主人輯杖【不拄地.】立視. 祝奉魂帛前行, 詣祠堂前. 諸執事奉奠及椅卓次之, 銘旌次之. 役者擧柩次之, 主人以下哭從. 男右【西】, 女【皆蓋頭.】左【東】. 重服在前, 輕服在後. 無服之親, 男居男右, 女居女右, 皆次主人主婦之後. 至祠堂, 開中門. 役者致柩於兩階前席上, 北首而出. 祝帥執事者, 設靈座及奠于柩西東向. 主人以下柩東西向, 主婦以下柩西東向, 俱北上【主人有母, 特位於主婦之左.】, 立哭盡哀止.遷于廳事 ○執事者設帷布席於廳事. 役者入, 婦人退避. 祝北向跪告于靈座云云, 訖奉魂帛導柩右旋.【從東而南.】 主人以下哭從如前【男右女左.】, 詣廳事. 役者致柩于席上南首而出. 祝設靈座及奠【卽前奠.】于柩前南向. 主人以下就位【如朝祖時而南上, 藉以薦席.】坐哭. 門人立於階下北向東上, 重行哭, 撤去靈床乃代哭【如未斂前, 以至發引.】. 親賓致奠賻.陳器 ○方相, 侍者, 銘旌, 椅卓, 靈車, 輓章, 功布, 大轝.【傍有翣. ○夜則斂藏之, 厥明更陳之.】祖奠 ○日晡時【夕上食後.】設祖奠.【饌如前儀.】 祝焚香斟酒訖, 北向跪告云云, 俛伏興. 主人以下再拜, 哭盡哀. ○宵設燎于門內之右.遷柩就轝 ○厥明轝夫納大轝于中庭南向. 執事者撤祖奠. 祝北向跪告云云, 遂遷靈座, 致傍側. 婦人退避. 召役夫, 遷柩就轝. 乃載南首, 以布索維之, 令極牢實. 主人從柩, 哭降視載. 婦人哭於帷中. 載畢, 祝率執事者, 遷靈座于柩前南向.遣奠 ○執事者設奠.【饌如前儀.】 祝焚香斟酒訖, 北向跪告云云. 主人以下【婦人不在.】哭再拜, 遂撤奠.【執事者以竹器盛餘脯. ○食時上食.】祝奉魂帛, 升靈車焚香. ○13)別以箱盛主, 置帛後. 執事者以遣奠餘脯納于靈車. 婦人乃蓋頭, 出帷降階, 立哭盡哀, 再拜.柩行 ○方相, 侍者, 銘旌, 椅卓, 靈車, 輓章, 功布, 大轝【翣在大轝兩傍.】以次而行. 主人以下哭從.【如朝祖之序.】 無服之親次之, 門人次之, 賓客次之.塗中宿舍 ○執事者設靈座於柩前. 朝夕哭奠【夕奠時, 撤遣奠餘脯. 朝奠後, 裹餘脯, 納靈車. 每日如此.】, 食時上食, 夜則主人及衆主人, 皆宿柩傍, 親戚門人共守衛之, 設燎于中庭.及墓 ○未至, 執事者先設靈幄於墓道西南向, 有椅卓. 親賓次在靈幄前十數步南向.方相至 ○以戈擊壙四隅.靈車至 ○祝奉魂帛, 就幄座, 主箱, 置帛後. 遂設奠而退.【朝奠餘脯, 至是乃撤.】柩至 ○執事者先布席於壙南, 置兩凳. 柩至脫載, 置凳上北首, 去結裹. 祝以功布拭柩, 幠用侇衾. 執事者取銘旌, 去杠置柩上, 就位哭. ○ 主人及五服之親, 立於壙東西向, 北上重行, 門人立於壙南北向, 東上重行皆哭.乃窆 ○主人及衆主人撤哭, 臨視下柩, 最須詳審用力, 不可誤有傾墜動搖. 先用木杠短者二, 橫置灰隔上, 又用長杠二, 橫置壙口, 不令搖動. 徹銘旌柩衣, 置傍側. 別用長杠二, 橫擧于柩上兩頭, 用布二條摺之, 兜柩底兩頭, 以其布四端, 直上懸係於所橫擧之杠腰. 每一杠繫布兩端, 齊擧其杠四頭, 遷柩置壙口兩杠上, 正其四傍, 乃微擧所擧杠而去壙口兩杠, 漸漸放下所擧杠, 安柩於短杠上, 更量懸柩布長, 可到壙底然後, 復係如初. 令二人分立灰隔上下, 以手按柩四隅, 令不偏倚, 而又微擧杠, 去短杠, 仍漸下之. 已下, 解布去杠, 抽出其布, 用素絲, 長與棺同, 縱置柩上, 中央正當橫紙標墨處. 用蠟粘絲, 兩頭令不動, 又於金井機面標墨處, 以一條細繩引著而照看, 令絲與繩相當, 以審其正然後, 去絲繩及柩上下標紙. 用雪綿子, 拭柩上塵. 主人整柩衣銘旌, 令平正, 翣不入壙.贈 ○主人盥帨. 執事者奉玄纁授主人. 主人奉以奠于柩上東邊, 上玄下纁, 哭再拜稽顙. 在位者皆哭盡哀.加灰隔蓋 ○以灰板加於灰隔上, 以三物拌勻14)者, 躡實之.【勿令震動柩中, 但多用之, 以俟其實.】實土 ○下土每尺許, 卽輕手築之.祠土地 ○祝帥執事者, 設位於墓左近北南向, 設饌於席南端, 又設盥盆帨巾於其東南. 告者【遠親或賓客.】吉服, 立於位前北向. 執事者在其後【西上.】, 皆再拜. 告者與執事者皆盥帨. 告者進跪位前. 執事一人取注西向跪, 一人取盞東向跪. 告者取注斟酒反注, 取盞酹于地, 又斟酒奠于神位前. 俛伏興, 少退跪. 祝執板, 立於告者之左東向, 跪讀云云. 訖復位. 告者以下皆再拜徹出.下誌石 ○壙內近南, 先布甎一重, 置石其上. 又以甎四圍之, 而覆其上. 復下土亦以尺許爲準, 密杵堅築.題主 ○執事者設卓於靈座東南西向, 置硯筆墨於其上【硯滴亦具.】, 對卓置盥盆帨巾各二.【一在東有臺架, 祝所盥, 一在西無臺架, 書者所盥.】 主人立於卓南北向. 衆主人在其左少前. 祝盥手出主, 臥置卓上. 善書者盥手西向【或坐書, 便於事.】, 先題陷中曰【故處士田公諱愚字子明神主.】. 粉面曰【顯祖考處士府君神主孝孫鎰孝奉祀.】. 題畢, 祝合主植趺, 奉置靈座, 帛箱置其後, 炷香斟酒. 執板, 出於主人之右, 跪【主人亦跪.】讀之. 畢懷之【留與初虞祝同焚.】, 興復位. 主人以下再拜, 哭盡哀止.奉主升車 ○祝奉主, 納于櫝, 用藉而不復鞱, 不覆蓋, 升車. 帛箱在其後.【納題主, 奠餘脯.】 焚香.徹靈座而行 ○執事者徹靈座遂行. 主人以下及門人, 哭再拜辭墓, 哭從如來儀. 但留子弟一人, 監視實土成墳.反哭 ○主人以下奉靈車, 在塗徐行哭, 至家15)哭. 執事者先設靈座. 祝奉主櫝, 升自西階, 奉置椅上, 帛箱置其後. 主人以下升自西階, 靈座前哭盡哀止. 전재 선생(全齋先生)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이다. 자는 명로(明老)이며, 호는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계빈(啓殯) 장사지내기 위해 빈소(殯所)를 열고 관(棺)을 꺼내 오는 것을 말한다. 오복지친(五服之親) 유복친(有服親)이라고도 한다.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 또는 다섯 가지의 상례 복제를 말한다. 다섯 가지의 상례 복제는 즉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를 이른다. 전(奠) 장례 때 죽은 사람의 영전에 제물(祭物)을 차려 놓는 것, 또는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영좌(靈座) 혼백이나 신위(神位)를 모시는 자리이다. 조조(朝祖) 발인(發靷) 하루 전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사당으로 가서 조상을 뵙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조묘(朝廟)와 같은 뜻이다. 이는 살아 있을 때 외출하려면 반드시 어른에게 고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가묘(家廟)가 협소하여 혼백으로 대신하였다. 중주인(衆主人) 상주의 형제들을 가리킨다 혼백(魂帛) 신주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모시나 명주를 접어 영위를 모셔 놓은 자리에 봉인하는 신위를 말한다. 교의(交椅) 신주(神主)나 혼백상자(魂帛箱子)를 놓는, 다리가 긴 의자를 말한다. 명정(銘旌) 장례식에 쓰이는,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 따위를 적은 조기를 말한다. 개두(蓋頭) 여인들이 머리에 쓰던 쓰개의 한 가지이다. 치전(致奠) 친척이나 친지가 상가에 가서 제수를 차려 놓고 제문을 읽으며 슬퍼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방상(方相) 방상씨(方相氏)라고도 한다. 주대(周代)의 관명으로 역귀(疫鬼)와 산천의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였다. 광부(狂夫)를 도사처럼 관복을 입혀 방상씨 가면을 쓰고 양손에 창과 도끼를 들고, 무서운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영구를 인도하였다. 묘지에 이르면 먼저 광 안으로 들어가 사방 모퉁이를 창으로 쳐 잡귀와 액을 쫓는다. 《주례(周禮)》 〈하관(夏官) 사도 제사(司馬第四)〉, 《가례(家禮)》 권5 〈상례(喪禮) 진기(陳器)〉 명정(銘旌) 명기(銘旗)라고도 한다. 장사지낼 때 죽은 사람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품계, 관직, 성씨 등을 기재하여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하관(下棺)이 끝난 뒤에는 관 위에 씌워서 묻는 기(旗)를 말한다. 영거(靈車) 관을 실은 수레를 말한다.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으로, 장사를 지낼 때 상여 뒤에 들고 간다. 공포(功布) 관을 묻기 전에 관 위의 먼지를 털고 닦는 데 쓰는 삼베 헝겊이다. 발인할 때 명정과 함께 영여 뒤, 상여 앞에 세우고 가면서 상여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조전(祖奠) 발인 하루 전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상식(上食) 아침저녁으로 식사하기 전에 신위(神位) 앞에 차려 올리는 것, 또는 그 음식을 말한다. 견전(遣奠) 발인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로, 노전(路奠), 노제(路祭)라고도 한다. 영악(靈幄) 하관(下官)하기 전에 영구를 놓아두는 천막을 말한다. 등(凳) 괴임 나무[塊木]로, 영구를 받치는 것이다. 길이는 관의 너비에 준하고, 발의 높이는 3~4치로 한다. 결과(結裹) 영구를 끈으로 묶어 맨 것을 말한다. 이금(侇衾) 영구 위에 덮는 홑이불 같은 긴 베를 말한다. 금정기(金井機) 금정틀이다. 묘의 구덩이를 팔 때 굿의 길이와 너비를 정하는 데 쓰는 틀이다. 굵은 나무로 우물 정자(井字)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묘의 구덩이를 팔 때 이 틀을 땅에 놓고 그 안으로 파서 굿을 짓는다. 설면자(雪綿子) 풀솜이다.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다. 증(贈) 《예기》 〈잡기 상(雜記上)〉의 주에 "증은 물품으로 곽(椁) 안의 죽은 자를 송별하는 것이다.[贈以物送別死者於椁中.]"라고 하였다. 회격(灰隔) 광중(壙中)에 내려놓은 관 밖을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것을 말한다. 회판(灰板) 광중에 관을 넣고 그 밖에 얇은 판자를 곽처럼 두르고 관과 판자 사이에 석회를 넣는 것을 말한다. 삼물(三物) 석회, 모래, 황토를 말한다. 함중(陷中) 신주 뒤쪽의 몸체 안쪽에 길게 파 놓은 홈이다. 망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를 쓴다. 분면(粉面) 신주 앞면을 분(粉)가루와 아교를 섞어 발라 희게 만든 것이다. 일효(鎰孝) 전일효(田鎰孝)이다. 간재의 장손(長孫)이다. 초우(初虞) 장사지낸 뒤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혼령을 위하는 제사로, 장사 당일을 넘기지 않고 지낸다. 독(櫝) 신주를 넣어 두는 궤이다. 반곡(反哭) 묘지에서 장례가 끝난 다음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과 돌아온 뒤에 곡하는 일로, 장례 의식의 한 가지 절차이다. 보통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서부터 곡을 시작하고 집에 도착하면 신주를 영좌에 모시고 다시 온 가족이 모여서 곡을 한다. 拭 대본에는 '栻'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수정해서 번역하였다. ○ 대본에는 없으나 문맥을 살펴 보충하였다. 拌勻 대본에는 '伴均'로 되어 있는데 《가례(家禮)》 권5 〈상례 이(喪禮二)〉에 근거해 수정하였다. 家 대본에는 '館'으로 되어 있는데 《가례》 권5 〈상례 이〉에 근거해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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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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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시고 규칙 試考規則 一. 시험 날짜는 매달 1일과 15일로 정한다.一. 품행은 심신의 착함과 그렇지 못함을 살피고, 강송(講誦)은 통, 약, 조, 불을 보며, 성리과, 예과, 사과, 정치과, 법과, 수과는 문제를 뽑아 제공한 답안의 맞고 맞지 않음을 보고, 간문(看文)은 정밀함을 취하며, 작문은 글로 적어 잘못됨이 없는 것을 취하고, 서(書)는 바르게 쓴 것을 취하되 자학(字學)을 기준으로 하여, 얻은 점수의 다소(多少)를 병합하여 등급을 매긴다.一. 품행 점수: 특등 15점, 1등 12점, 2등 9점, 3등 6점.一. 강 점수: 특등【음과 뜻이 모두 순통(純通)469)이다.】 12점, 1등【음과 의가 모두 통이다.】 10점, 2등【음은 통이고 뜻은 약, 음은 약이고 뜻은 통이다.】 8점, 3등【음은 통이고 뜻은 조, 음은 조이고 뜻은 통, 음과 뜻이 약이다.】 6점, 4등【음은 통이고 뜻은 불, 음은 불이고 뜻은 통, 음은 약이고 뜻은 조, 음은 조이고 뜻은 약이다.】 4점, 5등【음은 약이고 뜻은 불, 음은 불이고 뜻은 약, 음과 뜻이 조이다.】 2점.一. 성리과와 예과 점수: 특등 12점, 1등 9점, 2등 6점, 3등 3점.一. 사과, 정치과, 법과, 문장과, 서과, 수과, 제술과의 점수: 특등 10점, 1등 8점, 2등 5점, 3등 2점.一. 갑반: 121점을 얻은 자는 특등(特等)을 시상하고 별도로 특반(特班)이 되며, 80점 이상을 얻은 자는 1등을 시상하며, 60점 이상을 얻은 자는 2등을 시상하며, 40점 이상을 얻은 자는 3등의 포장(褒狀 상장)을 시행하며, 20점 이하를 얻은 자는 을반에 강등한다.一. 을반: 89점을 얻은 자는 특등을 시상하고 갑반으로 승반하며, 60점 이상을 얻은 자는 1등을 시상하며, 45점 이상을 얻은 자는 2등을 시상하며, 30점 이상을 얻은 자는 3등의 포장을 시행하며, 15점 이하를 얻은 자는 병반에 강등한다.一. 병반: 79점을 얻은 자는 특등을 시상하고 을반으로 승급하며, 53점 이상을 얻은 자는 1등을 시상하며, 40점 이상을 얻은 자는 2등을 시상하며, 26점 이상을 얻은 자는 3등의 포장을 시행하며, 13점 이하를 얻은 자는 정반에 강등한다.一. 정반: 69점을 얻은 자는 특등을 시상하고 병반에 승급하며, 43점 이상을 얻은 자는 1등을 시상하며, 34점 이상을 얻은 자는 2등을 시상하며, 22점 이상을 얻은 자는 3등의 포장을 시행하며, 11점 이하를 얻은 자는 무반(戊班)에 강등된다.一. 갑반에서 3번 시험을 보아 모두 1등을 한 자는 특반에 올라가고, 을반, 정반, 병반에서 3번 시험을 보아 모두 1등을 한 자도 각각 승반(陞班)한다. 一. 試日, 以每月初一日, 十五日爲定.一. 操行考其心身臧否, 講誦視其通略粗不, 理禮史政法數, 抽問題, 觀其供答合否, 看文取其精密, 作文取其 命辭無差, 書取楷正而準字學, 幷以所得點數多少爲等.一. 操行點, 特等十五, 一等十二, 二等九, 三等六.一. 講點, 特等【音義俱純通.】十二, 一等【音義俱通.】十, 二等【音通而義略, 音略而義通.】八, 三等【音通而義粗, 音粗而義通, 音略而義略.】六, 四等【音通而義不, 音不而義通, 音略而義粗, 音粗而義略.】四, 五等【音略而義不, 音不而義略, 音粗而義粗.】二.一. 理 禮點: 特等十二, 一等九, 二等六, 三等三.一. 史政法文書數製點: 特等十, 一等八, 二等五, 三等二.一. 甲班, 得百二十一點者, 施特等賞, 別爲特班, 得八十點以上者, 施一等賞, 得六十點以上者, 施二等賞, 得四十點以上者, 施三等褒狀, 得二十點以下者, 降乙班.一. 乙班, 得八十九點者, 施特等賞, 陞甲班, 得六十點以上者, 施一9)等賞, 得四十五點以上者, 施二等賞, 得三十點以上者, 施三等褒狀, 得十五點以下者, 降丙班.一. 丙班, 得七十九點者, 施特等賞, 陞乙班, 得五十三點以上者, 施一等賞, 得四十點以上者, 施二等賞, 得二十六點以上者, 施三等褒狀, 得十三點以下者, 降丁班.一. 丁班, 得六十九點者, 施特等賞, 陞丙班, 得四十三點以上者, 施一等賞, 得三十四點以上者, 施二等賞, 得二十二點以上者, 施三等褒狀, 得十一點以下者, 降戊班.一. 甲班三考皆得一等者, 陞特班, 乙丙丁班三考皆得一等者, 亦各陞班. 순통(純通) 책을 외우고 그 내용에 통달한 것을 말한다. 一 대본에는 '二'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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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 규칙 【1925년】 敎課規則 【乙丑】 一. 서사(書社) 학생의 학업 고하를 구분하여 갑을병정 4반을 정한다.갑반 교과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역경》, 《춘추(春秋)》.【원과(原課)】《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성리과(性理課)】《의례(儀禮)》, 《예기(禮記)》, 《가례(家禮)》.【예과(禮課)】《좌전(左傳)》, 《마사(馬史 사기(史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우리나라 역사의 여러 서적.【일본과 서양사도 본다. ○사과(史課)】《성학집요(聖學輯要)》, 《반계수록(磻溪隨錄)》.【정치과(政治課)】《대전통편(大典通編)》.【당시에 시행되는 법률도 본다.】 【법과(法課)】팔대가(八大家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문장과(文章課)】을반 교과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원과】《예기》, 《사례편람(四禮便覽)》.【예과】《자치통감강목》, 《속자치통감강목》, 우리나라 역사의 여러 서적.【사과】《고문진보(古文眞寶)》.【문장과】병반 교과서:《소학(小學)》, 《대학》, 《논어》.【원과】《사례편람》.【예과】우리나라 역사의 여러 서적.【사과】정반 교과서:《요결(要訣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 《대학》.【원과】《사례홀기(四禮笏記)》.【예과】우리나라 역사의 여러 서적.【사과】一. 원과는 주간에 행하고 간과(間課)【성리과, 예과, 사과, 정치과, 법과, 문장과】는 야간에 행한다. 또 서(書), 수(數), 제술(製述) 3과를 두되, 서는 주간에, 수와 제술은 밤에 행한다.【야간 공부의 여러 목록은 모두 밤마다 과목을 돌려가면서 한다.】一. 옛사람의 인재를 이루는 공부는 음악보다 큰 것이 없는데, 폐하고 이지러져 회복되기 어렵다. 이제 우선 다만 창가(唱歌)하여 악과(樂課)에 해당시켜 부디 감발(感發)의 생각에 도움이 되길 바라니, 〈부자송덕가(夫子頌德歌)〉, 〈권학가(勸學歌)〉, 〈오륜가(五倫歌)〉467)가 있다.一. 사생은 일찍 일어나 사장에게 읍례를 행하고, 또 분반별로 서로 읍한다. 사장은 갑반과 을반에게 원과를 수업하고, 갑반과 을반은 병반과 정반에게 원과를 나누어 수업한다.一. 아침식사 후 학당에 올라갈 때에 사생 중 2인이 당상 북쪽을 향해 서서 모두 〈부자송덕가〉를 부르고, 저녁 식사하기 전 학당을 내려갈 때에 〈권학가》를 부른다.【2인도 당상에서 한다.】 강일에는 강습을 중지하고 시험을 본 뒤에 연속해서 〈부자송덕가〉, 〈권학가〉, 〈오륜가〉를 부른다.一. 매달 1일과 15일 강을 행할 때 서로 읍례를 행한다. 갑반 이하는 사장 앞으로 나아가 지정에 따라 보름 동안의 원과 중에서 1장을 배송(背誦)468)하고, 사장은 통, 약, 조, 불을 정한다.【강규는 별도로 보인다.】 강이 파하면 또 성리과, 예과, 사과, 정치과, 법과, 문장과, 서과, 수과, 제술과를 시험하여 각 과에서 성적이 뛰어난 자에게 포상을 시행한다.一. 근만부(勤慢簿)와 선과적(善過籍)을 두어 제생의 왕래가 일렀는지 늦었는지, 과정을 채웠는지 빼먹었는지, 심지가 부정한지 바른지, 언동이 공경스러운지 방자한지를 기록하여 품행의 고하를 증험하여 이로써 시험 보는 날의 승반(陞班)과 강반(降班)에 대비한다. 一. 分社生學業高下, 定甲乙丙丁四班. 甲班敎課書, 《大學》, 《論語》, 《孟子》, 《中庸》, 《詩經》, 《書經》, 《易經》, 《春秋》.【原課】 《近思錄》, 《性理大全》.【性理課】 《儀禮》, 《禮記》, 《家禮》.【禮課】 《左傳》, 《馬史》, 《綱目》, 《續綱目》, 東史諸書.【日本, 西洋史亦看.○史課】 《聖學輯要》, 《磻溪隨錄》.【政治課】 《大典通編》.【時行法律亦看. 法課】 八大家.【文章課】 乙班敎課書, 《大學》, 《論語》, 《孟子》, 《中庸》.【原課】 《禮記》, 《四禮便覽》.【禮課】 《綱目》, 《續綱目》, 東史諸書.【史課】 《古文眞寶》.【文章課】 丙班敎課書, 《小學》, 《大學》, 《論語》.【原課】 《四禮便覽》.【禮課】 東史諸書.【史課】 丁班敎課書, 《要訣》, 《小學》, 《大學》.【原課】 《四禮笏記》.【禮課】 東史諸書.【史課】一. 原課用晝, 間課【理禮史政法文】用夜. 又有書 數製述三課, 書用晝, 數製用夜.【夜課諸目, 皆每夜輪課】一. 古人成材之功, 莫大於樂, 而廢缺難復. 今且只行唱歌以當樂課, 庶助感發之思, 有〈夫子頌德歌〉, 〈勸學歌〉, 〈五倫歌〉.一. 社生早起行揖禮于社長, 又分班相揖. 社長授甲乙班原課, 甲乙班分授丙丁班原課.一. 朝飯後上學時, 社生中二人, 堂上北向立, 幷唱〈夫子頌德歌〉, 夕飯前下學時, 唱〈勸學歌〉【二人亦於堂上.】. 講日則輟講, 試考後, 連唱〈頌德〉, 〈勸學〉, 〈五倫歌〉.一. 每月初一日, 十五日設講, 行相揖禮. 自甲班以下, 就社長前, 隨其指定, 背誦一章於一望原課中, 社長定通略粗不.【講規別見.】 講罷, 又試考理禮史政法文書數製, 各課優等, 行褒賞.一. 置勤慢簿, 善過籍, 記諸生往來早晩, 課程充闕, 心志邪正, 言動敬䮇, 驗取操行高下, 用備試考日陞降. 〈부자송덕가(夫子頌德歌)〉 …… 〈오륜가(五倫歌)〉 이 3편과 〈석음가(惜陰歌)〉는 유학가사(儒學歌辭) 4편으로 《사가집(四可集)》에 수록되어 있다. 배송(背誦) 책을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서 그 내용을 외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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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예설쇄록 禮說鎖錄 사람들의 물음에 답함유세차 운운. 삼가 아뢰건대 봉분(封墳) 수리에 경건하지 못하고, 묘위(墓位)500)가 실전(失傳)되어 제향할 곳이 없으니, 정의(情誼)와 예의에 모두 결함이 있습니다. 이에 선배들이 이미 정한 논에 따라 삼가 몇 대 조고 모관 부군의 묘 곁으로 나아가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냅니다. 삼가 바라건대 혼령께서 영원히 여기에 의지하소서.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공경히 고하고 삼가 고합니다.【위는 선조비(先祖妣)의 묘가 실전되어 고(考)의 묘 옆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낼 때 고하는 말이다.】 ○을사년(1905)유세차 운운. 삼가 아뢰건대 몇 대 조비 모봉 모씨의 분묘가 실전되어 제향할 곳이 없으니, 정의와 예의에 모두 결함이 있습니다. 이에 장차 부군의 묘 곁으로 나아가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공경히 고하고 삼가 고합니다.【위는 고위(考位)에 고하는 말이다.】하늘에서 나라에 재앙을 내려 섬나라 오랑캐가 능멸하여 짓밟고, 적의 예봉이 닿는 곳에 인민(人民)이 숨고 도망하여 선대의 묘사(廟祠)501)를 능히 받들어 지킬 수 없으니, 분통이 터지고 황망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상의 신주를 임시로 매장하는 일은 전현(前賢)의 설이 있어 지금 대란(大亂)을 만나 감히 임시로 묻습니다. 삼가 난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도로 봉안할 것이니,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고 가슴이 막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공경히 고하고 삼가 고합니다.【위는 난에 임하여 신주를 임시로 매장할 때 고한 말이다.】 ○무신년(1908) 答人問維歲次云云. 伏以封修不虔, 墓位失傳, 薦享無所, 情禮俱缺. 玆遵先輩已定之論, 謹就顯幾代祖考某官府君墓傍, 築壇行祭. 伏惟尊靈永世是依, 謹以酒果用伸, 虔告謹告.【右先祖妣墓失傳, 築壇考墓傍, 行祭告辭.乙巳】維歲次云云. 伏以顯幾代祖妣某封某氏墳墓失傳, 薦享無所, 情禮俱缺.將就府君墓傍, 築壇行祭. 謹以酒果用伸, 虔告謹告.【右考位告辭.】天禍邦家, 島夷陵踏, 敵鋒所觸, 人民竄亡, 先世廟祠, 莫克奉守, 憤痛忙迫, 罔知攸爲. 先主權埋, 前賢有說, 今値大亂, 敢行權埋, 恭俟亂平, 卽當還奉, 至痛在內, 臆塞無言. 謹以酒果伸, 虔告謹告.【右臨亂埋主告辭. 戊申】 묘위(墓位) 묘제의 비용을 위하여 경작하는 논밭을 말한다. 묘사(廟祠)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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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우연히 기록하다 偶錄 요즘 세상에서 상기(喪紀)가 모두 무너져 걷잡을 수 없는 유속(流俗)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고, 심지어 선비들까지도 더는 예법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편안하게 일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자식의 상을 틈타 그 손자의 혼례를 치렀는데도 아무 재(齋)의 선생이 되는 데 해롭지 않다고 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펴내고, 상 중에 몰래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는데도 그를 입언군자(立言君子)라고 하여 천 리를 붙좇아 달려가 금석문자(金石文字)를 요청한 자가 있으며, 상중에 첩을 들이고도 스승의 산소를 이장(移葬)할 때 재물을 낸 공인(功人)471)이 있다. 이목(耳目)의 미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보고 듣지 못한 것도 헤아릴 수 있다.아! 사마광(司馬光)이 이른바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472)'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진수(陳壽)가 불우했던 것473)은 논할 만한 여지가 없으니 매우 한심하다. 기년복(朞年服) 중에 혼례를 치르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큰 예법에 관계되는데도 요즘 선비들 중에는 이를 준수하는 자가 전혀 없다. 심지어 "이는 3년 상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니 변통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는 하지 않고, "나의 마음과 힘이 부족하다." 하고 도리어 "예가 지나치다."라고 하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아! 천하가 모두 변해도 선비가 변치 않는다면 장차 세상이 회복되는 문명(文明)해질 날이 있을 것인데, 지금 오히려 사대부의 의복을 입고 있는 자들이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오랑캐와 금수가 되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초종지례(初終之禮)474)에서 이미 소렴(小斂)하고 또 대렴(大斂)하는 것은 자식이 차마 그 어버이를 야박하게 대하지 못해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로써 시체를 방정하게 하고 관 속을 채워서 운구(運柩)할 때에 흔들리는 것과 뒷날 골절(骨節)이 흩어지는 폐해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습(襲)은 하지만 염은 하지 않고 바로 입관하면서 "교(絞)로 사자(死者)를 묶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서로 옮겨 가며 그 허물을 본받아 거의 풍속이 되었으니, 이는 교금(絞衾)475)의 베를 사용하지 않는 데서 차마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일 차마 어버이를 두터운 땅 속에 매장하지 못한다면 또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하에 진실로 구걸하다가 길에서 죽은 자가 아니면 어찌 염하지 않은 주검이 있겠는가.범 충선공(范忠宣公)476)이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명성을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다면 선을 행할 길이 없을 것이다.477)"고 하였는데, 내가 그 아래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원망을 사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다면 악을 미워하는 날이 없을 것이다."고 하겠다.도(道)를 배우는 것은 심술(心術)의 본원(本原)을 주로 삼아야 하니, 여기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하늘의 이치를 통달한 학문과 남보다 빼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도를 배웠다고는 할 수 없다.조금이라도 스스로 잇속을 차리려 한다면 결국 도적의 일을 할 수 있다.온갖 악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 먹고살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이천(伊川)이 종통(宗統)을 빼앗은 일478)은 대현(大賢)이 행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현자를 위해 숨긴 것이 무슨 서적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폐해를 궁구해보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것은 어버이기에 당연히 숨겨야 하고, 현자를 위하여 숨기는 것은479) 현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숨기지 않아야 한다. 현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능히 의리(義理)를 다하기 때문인데, 현자가 뜻밖에 다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도 후대 사람들이 숨겨 다한 것으로 삼는다면 또한 어찌 무시하고 본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학자는 이를 버려두고 말하지 않아야 하지만 강론과 궁격(窮格 궁리와 격물)할 때에 이르러서는 끝내 숨겨서는 안 된다.동일한 사심(師心)인데도 마음속에 갖추어진 바의 성리(性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자기의 마음을 엄사(嚴師)로 삼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고, 다만 영각(靈覺)을 가리켜 말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사심이 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예서(禮書)에 '지자(支子)480) 중에 거처를 달리하는 자가 각자 그 처자(妻子)의 상(喪)을 주관한다.481)'는 설이 있는데, 이것으로 전례를 삼아 지자 중에 거처를 달리하는 자가 각자 그 자녀의 혼례를 주관한다면 옳지 않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김성구(金聖九 김노동(金魯東))가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논하는 자들이 살아서는 서파(西坡)482)요 죽어서는 농암(農巖)483)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생전의 입장에서 말하면 서파의 문명(文名)이 매우 훌륭했던 반면에 농암은 알려진 것이 없고, 사후의 입장에서 말하면 《농암집》이 성행(盛行)한 반면에 《서파집》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때문에 후대 사람 중에 문장을 논하는 자들도 반드시 죽어서는 후창(後滄)이라는 말이 있을 것임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글을 짓는 것은 말이 의미를 통하게 하고자 할 뿐이지만 잘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성(誠)은 그 극치를 말하면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아도 도에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484) 데에 이르고, 그 가까운 것을 말하면 말은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한다485)는 데에 있다. 경(敬)은 그 극치를 말하면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태평해진다486)는 데에 이르고, 그 가까운 것을 말하면 거처할 때 공손히 하고, 일을 행할 때 공경하는487) 데에 있다.경이 상하를 통하고 시종을 이루는 도가 될 뿐만 아니라, 성도 상하를 통하고 시종을 이루는 도가 된다. 자사자(子思子)가 말하기를 "성은 사물의 시작이며 끝이다.488)"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그 가까운 것을 힘써 노력하여 그 극치를 기약해야 한다.동성혼(同姓昏)을 미워하는 것은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성(姓) 자(字)가 같음을 미워하는 것이니, 혐의를 분별하고 미세한 것을 분명히 하며489), 기미(幾微)를 방비하고 조짐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성 자가 같으면 뿌리가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지라도 혼인할 수 없으며, 성 자가 같지 않으면 뿌리가 같음을 알지라도 혐의할 것이 없다. 중국 같은 경우는 3대 이후에는 서로 여러 성과 혼인하였으니, 어찌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뿌리가 같음을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로 말해보면 누가 다시 김씨와 권씨의 통혼(通婚)에 대해서 혐의하겠는가. 그러나 류씨, 차씨, 김씨, 허씨가 통혼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지나친 것 같다.490)우리나라의 동성혼은 신라의 경우에는 대부분 동당(同堂)의 안에 있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고, 고려는 왕가의 경우 신라와 같지만, 사대부에 있어서는 관향을 구별하였다. 우리 대한은 왕가의 후비(后妃)에는 동성이 없었으나 부마(駙馬 왕의 사위)는 있었고, 사대부는 동관(同貫)을 겨우 피했으나 이관(異貫)을 제멋대로 행했으니, 천여 년 동안 모두 오랑캐의 풍습을 면하지 못하였다.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이후 구속(舊俗)이 크게 바뀌었고, 게다가 여러 번 동성이관(同姓異貫)에 대해 금혼(禁婚)하는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 나라 안의 대성(大姓)들은 오랑캐 풍습에 물든 이가 전혀 없었는데, 오직 김씨와 이씨 두 성이 대부분 면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말하는 자는 관향이 많고 수가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지만, 국내 각 성씨를 가진 많은 사람의 수가 어찌 더욱 많지 않겠는가.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동성에게 장가들었으니491), 예를 안다고 이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그것을 숨겨 오맹자(吳孟子)492)라고 한 것은 동성혼이 수치스럽다는 것을 깊이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는 예를 아는 자일 것이니, 오히려 통행되는 예를 알면서도 태연하게 수치심이 없는 자보다 낫다.옛날에 남자는 30세에 장가들고 여자는 20세에 시집갔으니, 누이동생의 시집이 매번 오빠보다 먼저인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누이동생이 오빠보다 먼저 시집가는 것을 도혼(倒婚)493)이라고 하니, 이는 매우 옳지 않다. 예의 뜻에 근본하여 이를 논해보건대 오빠의 나이가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는데, 20세 넘은 시집 못간 누이동생보다 먼저 장가든다면 도혼이라 이를 수 있다.왕융(王戎)이 거상(居喪)에 삼가 예를 잘 지키고 얼굴에 손상이 없자, 사람들은 이를 두고 '육효(肉孝)'라 하였고494), 완적(阮籍)이 몇 말의 술을 먹고 큰소리로 한 번 고함을 치며 야위고 쇠약해져 뼈만 앙상하게 되자,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골효(骨孝)'라 하였으니495), 두 사람을 견주어 헤아리면 허실과 우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매우 그렇지 않다. 완적이 극히 야위었으나 예법을 파기했고, 왕융이 야위지 않았으나 힘써 예제(禮制)에 미쳤으니, 자식 된 자는 절대 육효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여겨 골효의 행실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게다가 얼굴에 손상됨이 없는 것이 효에 무슨 해가 되겠으며, 어찌 야위고 쇠약해져 생명을 해치는 자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뿐만 아니라 거상의 도는 경(敬)이 제일이고 애(哀)가 그다음이니, 만약 생명을 공경하여 예를 행하면서 하나하나 절도에 맞는다면, 상중에 있더라도 어찌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부끄럽지 않다[仰不愧俯不怍]는 내적 기쁨이 있지 않겠는가.맹자가 참칭(僭稱)한 제나라 왕에게 신하라고 자처하고496), 주자가 오랑캐의 신하인 송 고종(宋高宗)을 섬긴 일497)에 대해 평소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선사(先師 간재(艮齋))의 문집을 읽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후가 왕으로 참칭한 것이 이미 세속의 관례가 되었기에 맹자가 혐의하지 않고 그의 부름에 응했고, 고종이 비록 오랑캐의 신하일지라도 결국 조종자손(祖宗子孫)이기에 주자가 그를 보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의혹이 더욱 심해졌으니, 이미 속례가 되었기 때문에 혐의할 수 없다면, 결국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예를 들어 양화(陽貨)가 대부(大夫)로 참칭하였는데, 공자도 대부의 예로 대우해 준 것498)은 맹자가 제나라 왕을 혐의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가 처신한 것은 본래 묘한 도가 있었으니, 다만 선사께서 이른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송 고종이 조종 자손이 되는 것은 진실로 그렇지만 결국 오랑캐의 신하이니, 주자가 어찌 오랑캐의 배신(陪臣)499)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병자(丙子)와 정묘(丁卯)의 호란 이후 제현(諸賢)이 또 모두 주자를 본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현들에게 반드시 미진(未盡)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성현의 평소 의리로 이를 증명하면 막혀 통하지 않는 것이 또 이러하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今之世, 喪紀壞盡, 滔滔流俗, 固不足言, 至於儒流者, 更無防閑, 而人亦恬以爲常, 有乘子喪, 婚其孫, 而不害爲某齋先生, 刊集行世矣, 有服闇生子, 而爲立言君子, 副走千里, 請金石文字者矣, 有喪中畜妾而亦爲爲師緬葬, 出財之有功人矣. 耳目之及己如此, 其不見聞又可圖矣. 噫! 溫公所謂國有正法, 陳壽坎坷者, 無地可論, 甚可寒心. 至於朞服中不婚嫁, 亦係大防, 而見今士子絶無遵守者. 甚則至曰: "此非三年喪之比, 變通可也."舍, 曰: "吾心力不足.", 反謂禮過中, 此眞所謂不可與言者. 嗚呼! 天下皆變而士子不變, 則將有陽復文明之日, 今尙持峩冠博帶者, 身行口言乃如此, 豈可望擧世之不胥歸於夷獸乎哉?初終之禮, 旣小斂焉, 又大斂焉, 非惟人子不忍薄寒其親, 亦所以方正尸體, 充滿棺中, 使無運柩時搖動及他日骨節解散之弊. 今人多襲而不斂, 卽入棺中而曰: "絞束死者, 有所不忍.", 轉相效尤, 幾至成俗, 此非不忍取利於不用絞衾之布也. 苟爲不忍埋之厚壤之中, 亦可以已乎? 天下苟非乞丐之死道路者, 焉有不斂之尸乎?范忠宣公曰: "人若避好名之嫌, 則無爲善之路.", 余足其下曰: "人若避取怨之嫌, 則無惡惡之日.".學道以心術本原爲主, 於斯有所不足, 則雖有通天之學, 絶人之行, 謂之學道則未也.一毫自占便宜心, 畢境能作盜賊事.萬惡皆從不食力生.伊川之奪宗, 不可以大賢所行而效之也.爲賢者諱, 未知出自何書, 而究其弊則無所不至.爲親者諱, 以其親故當諱也, 爲賢者諱, 以其賢故不當諱也. 所貴乎賢者, 以其能盡義理也, 賢者偶有未盡, 而後人諱之以爲盡也, 則亦豈無視以爲法乎? 故學者雖當置之不言, 然至於講論, 窮格之際, 則終不可得以諱之矣.同一師心, 而有指心中所具之性理而言者, 所謂以己心爲嚴師是也, 有但指靈覺而言者, 所謂師心自用是也.禮書有支子異居, 各主其妻子喪之說, 以此例之, 支子異居者, 亦各主其子女之昏, 未爲不可歟.金聖九嘗謂余曰: "我國之論文章者, 有生西坡, 死農巖之說, 此言以生前言, 則西坡文名甚盛, 而農巖無聞, 以死後言, 則《農巖集》盛行, 而《西坡集》未然. 吾以是如後人論文章者, 亦必有死後滄之說也.". 余曰: "惡! 是何言也? 吾之爲文, 但欲辭達而未能也.".誠語其極則至於不勉而中, 不思而得, 語其近則在於言必信, 行必果10).敬語其極則至於篤恭而天下平, 語其近則在於居處恭, 執事敬, 非但敬爲徹上下, 成始終之道, 誠亦爲徹上下, 成始終之道矣. 子思子曰: "誠者物之終始.", 學者要當勉其近而期其極也.所惡於同姓昏者, 非惟爲其同根, 惡其姓字之同, 所以別嫌, 明微, 防幾, 杜漸也. 姓字之同11), 雖明知非同根, 不可婚也, 姓字之不同, 雖知其同根, 無所嫌也. 如中國三代以來, 相婚諸姓, 豈不擧同根於三皇五帝乎? 以我東言之, 孰復嫌於金權之通婚乎? 若柳車金許之不通婚, 恐涉過中也.我東同姓之婚, 在新羅則多在同堂之內, 更不可言. 高麗則在王家同於新羅, 在士夫家則別其鄕貫. 我韓則王家后妃無同姓, 而駙馬有之, 士夫則僅避同貫, 而恣行於異貫, 千餘年總不免夷虜之風矣. 趙靜菴以後, 舊俗大革, 且累有同姓異貫禁婚之朝令, 國中諸大姓絶無犯染夷風者, 獨金李兩姓, 多不免, 可勝痛哉! 說者諉以貫衆數夥, 無可柰何, 然國內各姓人數之夥, 豈不尤多乎?魯昭公之娶同姓, 不可謂知禮. 然其必諱之爲吳孟子者, 深知同姓婚之恥而然也, 則終是知禮者矣, 猶賢於認爲通行之禮而坦然無恥者也.古者男子三十而娶, 女子二十而嫁, 則女妹之嫁, 每先於男兄例也. 今人謂女先兄而嫁者爲倒婚, 甚不可也. 若本禮意而論之, 男兄年未三十, 而先女妹年踰二十未嫁者而娶者, 可謂倒婚也.王戎居喪謹守禮, 容顔無損, 人謂之肉孝, 阮籍飮酒數斗, 擧聲一呼, 毁瘠骨立, 人謂之骨孝, 比量二人, 似有虛實優劣. 然此殊不然. 阮雖毁極, 破棄禮法, 王雖不毁, 勉及禮制, 爲人子者絶不可恥肉孝之名而慕骨孝之行也. 且容顔無損, 何害於孝, 豈不逾於毁瘠傷生者乎? 非惟是也, 居喪之道, 敬爲上, 哀次之, 若能敬生執禮, 一一中節, 則雖在憂中, 豈不有仰不愧, 俯不怍之內喜乎?孟子稱臣於僭稱之齊王, 朱子事臣虜之宋高宗, 平生疑之, 及讀先師文集, 謂戰國諸侯之稱王, 已成俗例, 故孟子不以爲嫌而應其聘, 高宗雖臣虜, 畢竟是祖宗子孫, 故朱子輔之. 然小子之惑滋甚, 以已成俗例而可以無嫌, 則其究也, 何所不至! 如陽貨僭稱大夫, 而孔子亦以大夫之禮待之, 亦猶孟子之不嫌於齊王也 抑孔孟所處, 自有妙道, 而不但如先師所云歟? 宋高之爲祖宗子孫固然, 而畢竟是虜臣, 則朱子豈不爲虜之陪臣乎? 我韓丙丁以後, 諸賢又皆取法於朱子矣, 此皆聖賢必無未盡處, 而以聖賢平日義理證之, 則窒塞未通又如此, 柰如之何? 공인(功人) 공복인(功服人)으로, 상복(喪服)의 오복(五服) 중 대공(大功)과 소공(小功)의 옷을 같이 일컫는 말이다. 대공복의 상기는 9개월이며 소공복은 5개월이다. 나라에서 …… 있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상중에 있으면서 음악을 듣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자는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其居喪, 聽樂及嫁娶者, 國有正法.]"라고 하였다. 《소학》 〈가언(嘉言)〉 진수(陳壽)가 …… 것 진수는 중국 서진(西晉) 사람인데, 상중에 병이 나서 여종에게 환약을 만들게 한 일로 죄를 받고 침체되어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다. 《소학》 〈가언〉 초종지례(初終之禮) 초상이 난 때로부터 졸곡까지의 장례절차이다. 교금(絞衾) 소렴과 대렴 때 시신을 싸서 묶는 이불이다. 시신의 형체를 깊숙이 싸서 시신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소렴할 때 교금으로 싸기만 하고 묶지 않으며, 대렴 때 비로소 끈으로 묶는다. 범 충선공(范忠宣公) 범순인(范純仁, 1027~1101)으로, 충선은 그의 시호이다. 자는 요부(堯夫)이다. 《송사(宋史)》 권314 〈범순인열전(范純仁列傳)〉에 나온다. 이천(伊川)이 …… 일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8)의 후손 사이에 발생한 종통 문제이다. 정호가 아버지인 정향(程珦, 1006~1090)보다 먼저 죽자 정이가 종통을 계승하였고, 정이 사후에 종통이 적손(適孫)인 정앙(程昻)에게 간 것이 아니라 정이의 중자(衆子)인 정단언(程端彥)에게 돌아갔는데, 이는 정이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이 《이정외서(二程外書)》 권7 〈호씨본습유(胡氏本拾遺)〉에 나온다. 어버이를 …… 것은 "존귀한 사람을 위해 기휘하고,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고, 현자를 위하여 기휘한다.[爲尊者諱, 爲親者諱, 爲賢者諱.]"라는 말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 전문(傳文)에 나온다. 지자(支子) 맏아들 이외의 아들을 말한다. 지자(支子) …… 주관한다 《예기》 〈분상(奔喪)〉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형제가 함께 살더라도 각각 그 상을 주관한다.[父沒, 兄弟同居, 各主其喪.]"라고 하였고, 주(註)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형제가 함께 살더라도 각각 처자의 상을 주관하니, 주거를 함께 하는 것이 그와 같다면 주거를 달리하는 경우를 따라서 알 수 있다.[父沒之後, 兄弟雖同居, 各主妻子之喪矣, 同宮猶然, 則異宮從可知也.]"라고 하였다.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관지(貫之)이며, 문장에 뛰어나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로 일컬어졌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화(仲和)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억지로 …… 되는 "성(誠)이라는 것은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아도 도에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연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다.[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라는 말이 《중용장구》 제20장에 나온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공손함을 …… 태평해진다 《중용장구》 제33장에 "군자는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태평해진다.[君子篤恭而天下平.]"라는 말이 나온다. 거처할 …… 공경하는 번지(樊遲)가 인(仁)을 묻자, 공자가 "거처할 때 공손히 하고, 일을 행할 때 공경하며, 남을 대할 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라고 답한 내용이 《논어》 〈자로〉에 나온다. 성은 …… 끝이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성은 사물의 시작이며 끝이니, 성실하지 못하면 사물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고 하였다. 혐의를 …… 하며 《예기》 〈예운(禮運)〉에 "이 때문에 예라는 것은 임금에게 치국의 중요한 수단[大柄]이 되니, 이를 통해서 혐의를 분별하고 미세한 것을 분명히 한다.[禮者, 君之大柄也, 所以別嫌明微.]"라고 하였다. 류씨 …… 같다 후창은 차씨와 류씨, 김씨와 허씨는 시조와 본관이 같지만, 성자(姓字)가 다르기에 통혼하지 못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생각한 것 이다. 노(魯) …… 장가들었으니 노나라 소공이 동성(同姓)인 오(吳)에 장가들고는 그것을 꺼려 송(宋)나라 여자인 것처럼 꾸몄다는 내용이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오맹자(吳孟子) 노나라와 오나라는 같은 희성(姬姓)이기 때문에 오맹희(吳孟姬)라고 해야 하지만, 송나라에서 시집온 것처럼 오맹자라고 했다. 도혼(倒婚) 형제자매 중에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이다. 왕융(王戎)이 …… 하였고 왕융(234~305)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사람으로, 자는 준충(濬沖)이다. 그가 모친상을 당해 예법를 따르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피골이 상접하여 지팡이를 짚어야만 일어나곤 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두고 사효(死孝)라고 찬탄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권43 〈왕융전(王戎傳)〉 그러나 본 글에서 왕융의 '사효'를 '육효'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다. 완적(阮籍)은 …… 하였으니 완적(210~263)의 자는 사종(嗣宗)이고, 아버지는 후한(後漢) 말의 명사이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완우(阮瑀)이며, 혜강(嵆康)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이다. 그가 모친상을 당해 거상 중일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에 취하고 돼지고기를 먹기도 하였다. 《진서(晉書)》 권49 〈완적열전(阮籍列傳)〉 맹자가 …… 자처하고 《맹자집주》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제선왕은 성이 전씨이고 이름은 벽강(辟彊)이니, 제후로서 왕이라고 참칭(僭稱)하였다.[齊宣王, 姓田氏, 名辟彊, 諸侯僭稱王也.]"라고 하였고, 이 장에서 맹자가 제선왕을 만나 대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자가 …… 일 정강(靖康) 2년(1127)에 금 태종(金太宗)이 남침하여 북송은 멸망하고, 고종(高宗)이 강남에서 즉위하여 남송(南宋)이 세워졌는데, 신하로 자신을 낮추면서 금나라에 납공(納貢)했다. 주자는 송의 고종, 효종, 광종, 영종 네 조정을 거쳐 전운부사(轉運副使), 환장각대제(煥章閣待制), 비각수찬(秘閣修撰) 등의 벼슬을 지냈다. 《송사(宋史)》 양화(陽貨)가 …… 것 《논어》 〈양화〉에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가 천자(天子)를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로, 송 고종이 오랑캐의 신하로 낮추었으니 주자가 배신이 된다는 말이다. 果 대본에는 '實'로 되어 있으나 《논어》 원문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姓字之同 대본에는 없으나 문맥을 살펴 보충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대암서사에서 제군에게 보임 【1926년】 臺巖書社示諸君 【丙寅】 농부가 살이 익고 땀이 비 오는 듯하며, 손바닥과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여도 수고로움을 모르는 것은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공(百工 온갖 장인)이 공장에 있을 때 구상하고 애쓰되, 좋지 않으면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기물(器物)을 정밀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적녀(績女 길쌈하는 여자)가 삼으로 실을 만들고 고치에서 실을 뽑을 때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자며, 척(尺)과 촌(寸)을 쌓아서 장(丈)과 필(匹)을 이룬다. 상인이 길에서 생각하며 견주어 헤아리는 데에 정신을 소모하면서도 꺼리지 않는 것은 행상(行商)470)하여 이익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어부와 수렵인은 깊은 숲으로 달려가고 큰 바다로 들어가 거의 호랑이와 고래의 먹잇감이 된 후에 얻는 것이 있다.선비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편안히 지내면서 사민(四民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으뜸이 되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윤상(倫常)의 도를 익히고 정치와 교화의 방법을 궁구하여 이를 자신의 몸에 체득하고 남에게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생업을 편안히 하고 성품을 이루게 하며,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때를 얻으면 그 혜택이 성대하고, 비록 곤궁할지라도 풍의(風義 풍도와 의리)와 서론(緖論 조리 있는 언론)이 오히려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선비이다. 그러므로 편안히 지내면서 으뜸이 되어도 너무 지나침이 되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그 실제를 살펴보면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어 먹는 것은 농부의 곡식이고, 입는 것은 길쌈하는 자의 베이며, 장인의 기물, 상인의 물품, 어부와 수렵인의 음식물을 의지하고 사용하니, 이는 백성의 좀으로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선비가 되려고 배우는 그대들은 명산(名山)의 큰 집에 양식을 가져가서 먹고 계절에 맞게 옷을 입으며 모든 공구(供具 필요한 물품)가 여유롭지만 이는 본디 당연한 것이라고 하여 스스로 편안하게 여긴다면 어찌 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이러한 자가 경학과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크게 명실(名實)을 이루어 장차 퇴폐한 풍조에서 홀로 우뚝한 기둥이 되어 혼란한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을 부지하면, 조만간에 천운이 안정되어 크게 인간 세상에 꾀함이 있을 것이다.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소인은 몸을 수고롭게 하니,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수고롭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편안하다. 그런데 이제 미치지 못한 자질로 백성을 구제하는 바람에 응하니, 수고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가만히 보건대 그대들이 마음을 쓰는 것이 도리어 농부, 장인, 상인, 소인의 노력만 못하니, 나는 그대들이 백성의 으뜸이 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워 혹 백성의 좀이 될까 두렵다. 이와 같을 바에야 차라리 돌아가서 각자 농부, 장인, 상인의 한 가지 일을 하여 스스로 그 일에 부끄러움과 죄가 없는 것을 누리는 것만 못하니, 각자 두려워하고 힘써 노력할 줄을 알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용렬한 스승이 남의 자제를 그르치는 것은 용렬한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죄가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남의 스승된 자를 위한 따끔하고 매서운 교훈이다. 내가 여기에 한 마디 덧붙여 말하기를 "제자가 스승을 어기고 자신을 그르치는 것은 병든 사람이 의사를 꺼려 자신을 죽이는 것과 죄가 같다."라고 하니, 이 또한 마땅히 남의 제자가 된 자를 위한 따끔하고 매서운 교훈이다.이를 통해서 반론해보면, 훌륭한 스승이 남의 자제를 이루어 주는 것은 훌륭한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것과 공이 같고, 제자가 스승을 따라 자신을 이루는 것은 병든 사람이 의사를 믿고 자신을 구제하는 것과 공이 같으니, 이 또한 마땅히 남의 스승이 된 자와 남의 제자가 된 자를 위한 하늘의 복음(福音)이다. 형편없는 내가 그대들과 함께 따끔하고 매서운 교훈에 조심하며 복음에 나아가고자 한다. 夫農者炙膚沐汗, 腁手胝足而不知勞者, 爲百畝易也. 百工居肆, 運思費力, 不善事不措者, 欲器物精也. 績女緝麻繅繭, 早興晏寢, 積尺寸以就丈匹. 商者用慮於道途, 弊精於較量而不憚者, 以行貨而贏利也. 漁與獵者馳深林, 入大洋, 幾爲虎鯨食然後, 有所獲也. 夫士者何爲者也? 安居而爲四民首, 不以泰乎? 講倫常之道, 究政敎之術, 得之身而施之物, 俾百姓之安業遂性, 得其時, 其澤沛然, 雖窮焉, 風義緖論, 猶足以持世者士也. 故安且首焉, 而不爲泰也. 若考其實而無有, 食農者粟, 衣績者布, 工之器, 商之貨, 漁獵之味, 是資是用焉, 是爲民蠹, 厥罪罔赦. 諸君學爲士者, 名山傑舍, 齎粮而食, 適節而衣, 一應供具裕如也, 而以爲是固然而自安, 豈非謂業乎? 斯者窮經硏理, 隆成名實, 將以峙頹流之獨柱, 扶一陽於純坤, 早晩天定, 大有猷爲於人世乎. 夫君子勞心, 小人勞力, 勞心者勞, 勞力者逸, 今以不逮之資, 酬大發願, 顧不勞而得乎! 竊覵諸君之用心, 反不若農工商賈小人之勞力, 吾恐諸君之難望乎民首而或歸乎民蠹也. 與其如此, 曷若歸而各作農工商賈之一業, 自食其功之爲無愧無罪也, 其各悚惕而知勖. 昔人云: "庸師誤人子弟, 與庸醫殺人同罪.", 此爲爲人師者頂門針. 余有一言足之曰: "弟子違師誤身, 與病人忌醫殺身同罪.", 此亦當爲人弟者頂門針. 由是反而論之, 良師成人子弟, 與良醫活人同功, 弟子從師成身, 與病人信醫濟身同功, 此又當爲爲人師爲人弟者天福音, 請淺拙與諸君之兢兢乎頂針, 進進乎福音也. 행상(行商)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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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갑신년(1944) 與趙子貞 甲申 영자부(令子婦)의 묘문(墓文) 중에 '하종(下從)' 두 글자는 마땅히 고쳐야 하니, 근간에 과연 고쳐 새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하종'이라는 문자가 어느 책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남편의 죽음에 따라 죽는다는 명칭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람들 간에 이견이 없습니다. 남편이 죽은 부인에게는 열행(烈行)이 큰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은 한갓 하종의 열행만 알고 수절(守節)의 열행은 알지 못합니다. 원래 하종의 열행이 수절하는 것만 못하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후사를 세우는 것이 최선의 열행이 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주자(朱子)가 《소학(小學)》을 편찬한 때에 제일 앞에 진 효부(陳孝婦)76)를 기재하면서 하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은(晩隱) 황전(黃㙻)의 말이 훌륭한데, "세상에 열부(烈婦)로 이름이 난 자는 많다. 그러나 그 중에 남편이 비명에 죽었거나 혹은 적에게 겁탈을 당해 의리가 아니어서 이 때문에 죽는다면 우뚝한 일이다. 만약 부부의 정을 참지 못하고 한갓 하종만 하고 다시 아비 잃은 아이를 돌보고 후사를 세워서 남편 제사를 전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그 남편이 아내만 좋아했다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니, 또한 어찌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뜻도 마땅히 또한 이런 것이었습니다.대저 금석(金石)의 문자는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합니다. 영자부가 어찌 아프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죽은 지 20일 만에 죽었겠습니까? 비록 하종의 열행이 지극한 것이더라도 진실로 감히 사실과 어긋나게 그 내용을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지극하지 않은 경우에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으며, 하물며 영자부가 병석에서 "제가 비록 박명이나 병이 나아서 뱃속의 아이를 순산하여 지아비의 후사를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묘에 비(碑)를 세우는 것은 선행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장점은 가리고 그 단점을 거짓으로 썼으니, 혼령이 알게 된다면 어찌 지하에서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글을 지은 사람이 이처럼 호도(糊塗)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대개 남편이 죽고 오래지 않아서 죽은 것을 하종이라 하는 것도 또한 속견(俗見)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극하지 않은 것을 지극하다고 하여 이것을 가지고 망자를 뒤미처 찬미하는 것은, 비록 사실을 아니더라도 후중한 쪽을 따르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말하지만, 오히려 망자를 도리어 해치는 것임을 알지 못한 듯합니다. 이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명(高明)한 분이 묘문을 짓는 사람을 깊이 믿고서 죽은 며느리에게 해가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서둘러 개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답답합니다. 令子婦墓文中"下從"二字,在所當改,未知間果改刻否? 蓋"下從"之文,雖不詳始出何書,而認爲夫亡從死之名,則人無異辭矣.婦人喪夫者,烈行爲大.今之人徒知下從之烈,不知守節之烈.而元不知下從之烈不如守節, 而養舅姑立嗣承爲盡善之烈.并不知朱子編《小學》之日,首載陳孝婦而一不及於下從者也.是善乎晩隱黃公之言, 曰: "世以烈婦名者多矣.然其中夫死非命,或賊劫非義,于是死則卓哉.如不忍伉儷之情,徒以下從,不復以撫孤立嗣,使夫祀有傳,則只彰其夫好內耳, 亦何懿之有!"【止此】朱子之意,宜亦以是也.夫金石文字,當以其實.令子婦豈不病終於夫亡二旬乎? 雖使下從之烈爲至者,固不敢爽其實而溢其辭,況於未至者乎? 況於令子婦席有"我雖薄命, 願得病愈,順生腹中兒,以承夫後"之言乎? 銘于墓, 所以彰善行.今乃掩其所長,誣書其短,靈而有知,豈不恨於冥冥乎? 不料作文人之若是糊塗.槩以夫亡未久而死爲下從也,抑亦不免俗見.以未至者爲至者,而以此推贊亡者,謂雖非其實,無妨從厚,而却不知反損亡者歟? 是不可知矣.但高明之篤信其人,不覺損害亡婦,而不汲汲於改正者,深可憫憫也. 진 효부(陳孝婦)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사람이다. 변방(邊方) 수비군(守備軍)으로 떠난 남편이 죽자, 친정 부모는 자식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을 가엾게 여겨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진 효부는 남편이 떠날 때 노모(老母)를 잘 모시겠다고 승락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여 듣지 않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잘 모셨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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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베갯머리에서 曉枕 맑은 새벽 베개에서 잠 못 자는데 曉枕淸無寐추위 겁나 감히 일어나지 못하네 怕寒不敢起묻노니 그대 무슨 생각하는가 問爾何所思하나하나 자신을 반성한다네 歷歷反省己스승 섬김에 성실한 공경 부족했고 事師少誠敬부모 봉양에 맛있는 음식 빠뜨렸네 養親闕甘旨몸가짐은 법도에 어긋났고 飭躬違繩墨강학은 성리에 어두웠구나 講學瞽性理잘못된 말은 이미 욕을 불렀고 言玷已招辱지나친 술 또한 부끄럽구나 酒困亦可恥지난 일은 이미 간할 수 없으나 往者旣不諫오히려 어린 나이를 핑계 댈 수 있네 尙可諉淺齒이렇게 지천명387)의 나이에 이르도록 迨此知命日허물을 어찌하여 그치지 못하나 愆尤胡未已본원이 원래부터 단정치 않으니 本原原不端발로된 것이 의당 잘못이 많네 發處宜多累사람을 사귈 때 손익에 어둡고388) 交人昧損益일을 처리할 때 중도를 잃었구나 處事失中軌신의는 향리에도 미쁘지 못하고 信未孚鄕里명령은 처자에게도 행해지지 않네 令不行妻子근심하고 탄식하나 어찌 하리오 憂歎可柰何반성하며 부끄러워 죽고 싶구나 撫躬愧欲死너는 듣지 못했는가 爾其未之聞병을 알았으면 약이 여기에 있네389) 知病藥在是우선 일찍 일어나서 莫如且夙興그침 없이 부지런히 하는 것이 가장 좋지 孜孜作不止 曉枕淸無寐, 怕寒不敢起.問爾何所思, 歷歷反省己.事師少誠敬, 養親闕甘旨.飭躬違繩墨, 講學瞽性理.言玷已招辱, 酒困亦可恥.往者旣不諫, 尙可諉淺齒.迨此知命日, 愆尤胡未已.本原原不端, 發處宜多累.交人昧損益, 處事失中軌.信未孚鄕里, 令不行妻子.憂歎可柰何, 撫躬愧欲死.爾其未之聞, 知病藥在是.莫如且夙興, 孜孜作不止. 지천명 원문의 '지명(知命)'은 '지천명(知天命)'을 말한 것으로 쉰 살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爲政》 손익에 어둡고 해로운 벗과 유익한 벗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세 가지이며, 해로운 벗이 세 가지이다. 곧고 진실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며, 편벽되고 아첨을 잘하고 말만 잘하면 손해가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 하였다. 병을……있네 주자가 혹인(或人)에게 답한 편지에, "이것이 병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곧 약이다.[知得如此是病, 卽便不如此是藥]"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晦菴集 卷64 答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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