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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 丙寅 소자[小子, 제자(弟子)]라는 호칭은,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전부터 보내오신 편지마다 선생(先生)이라는 글자가 있었으니 옛날 학사(學士)중 연장자를 선생이라고 한다는 글이 있었고,65) 지금 세속에 이 풍조가 성행하니 감히 대뜸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크게 괴이하게 여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오래전부터 바꿀 수 없는 일정한 내력이 있는 두 글자를 함께 써서 갑자기 오늘날 편지에서 저를 부를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설사 당신과 제가 실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유익함이 있더라도 이미 선사를 선생이라고 불렀으면 타인을 선생이라고 재차 불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하루도 실제로 사제(師弟)였던 적이 없는데 그저 향모하는 지성스러운 마음만으로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당신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것은 선사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뒤 문하의 연소자들이 노성(老成)한 이들에게 학업을 마치더라도 더 이상 사제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라고 가릉(嘉陵)과 김(金), 류(柳)의 일을 거론하는 김에 전거(前車)의 귀감66)으로 삼으셨으니 지금도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부디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小子之稱, 惡是何言? 前此來函, 每有先生字, 意謂: "古有學士年長者之文, 且今俗此風盛行, 則雖不敢遽當, 亦不須大怪矣." 孰謂其幷以遠有來歷一定不易之二字, 忽稱於今書? 雖使高明與吾, 實有敎學相長之益, 旣已稱於先師, 則不當再稱於他人, 況未曾有一日師弟之實, 而徒以向慕之勤, 有此妄擧, 何所當乎? 高明之所以致此, 以其不曾聞先師之訓也. 我死之後, 及門年少雖卒業于老成, 勿爲復以師弟之名相稱, 因擧嘉陵、金․柳事, 爲前車之鑑, 至今言猶在耳. 千萬已之已之. 학사……있었고 맹자와 송경(宋牼)이 석구(石丘)에서 만났을 때 송경이 맹자에게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 조순손(趙順孫)이 "학사 중 연장자이므로 선생이라고 하였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孟子 告子下》 전거의 귀감 《순자(荀子)》 〈성상(成相)〉에 "앞 수레가 넘어졌는데 뒷 수레가 모르니 언제 다시 깨달을까?"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선인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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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여러 사람들에게 답함 임술년(1922) 10월 答淸道諸人 壬戌十月 경신년(1920) 9월 제가 계화도(繼華島)에 들어가 선생께 "옛날에 쓰신 선친의 전문(傳文)83)을 묘표(墓表)로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하고서 이어 본초(本草)를 드리니, 선생께서 한 번 다 보시고 "다행히 그 체제가 묘표로 삼을 만하니 고치겠다."라고 하시고, 또 "그렇다면 문고(文稿)에도 옮겨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마침 밤이 깊어 김귀락(金龜洛)에게 본초에 주필(朱筆)로 전(傳)자는 묘표(墓表)자로 고치고 찬(贊)자는 명(銘)자로 고치게 하였으나 문고에는 미처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일이 생겨 급히 떠났습니다. 허나 스승의 명을 받았는 데다가 개정본이 있었으므로 줄곧 의심없이 자신하였고, 김확재[金確齋, 김학수(金鶴洙)]어른께서 묘표를 쓰는데 이름을 빌려주셨습니다.신유년(1921) 여름 그 연유를 희경[禧卿, 유영선(柳永善)]에게 알려서 문고에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희경은 그저 저의 말을 믿고 선생의 앞에서 의심없이 떼어 옮겼는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라고 하셨습니다. 희경이 제가 한 말을 선생께 말씀드리자, 선생께서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종현(鍾賢, 김택술(金澤述))이 어찌 했겠는가? 이는 반드시 내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어찌 굳이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하는 희경의 편지에 있는 말입니다.】고경[顧卿, 권순명(權純命)]이 계화도에서 와서 이 일을 제게 말하기에, 제가 개정본을 고경에게 보여주고 사실대로 모두 말하였습니다. 고경이 그 연유를 가서 여쭙자 선생께서 그때서야 깨달으시고 제게 편지를 보내어, "옛날 지은 선공의 전찬(傳贊)은 지금 이미 묘갈명으로 고치고 다른 부분은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또 확재가 묘비에 글을 쓰는데 이름을 빌려주었다면 내가 감히 고사(固辭)할 수 없으니 나중에 사고(私稿)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가 전찬(傳贊) 2자를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뒤에 보낸 편지에는 묘비에는 표(表)로 새기고 사고에는 전편(傳編)에 그대로 두고 주(註)를 더하라는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한마디도 간절히 여쭙지 못하였고 전의 끝에 주를 달았는지 않았는지도 몰랐습니다.지난번 계화도에서 각처의 선비들에게 부음(訃音)을 알릴 때 문고를 꺼내 보니 전 말미에 첨가한 주는 있는데 묘비와 문고를 구별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경신년 초의 명과 신유년 초의 편지대로 되돌리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서 희경에게 "주어(註語)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알리자 희경이 즉시 "그렇다면 옮기는 것이 맞다."라고 하여, 이에 희경이 편(編)을 옮기고 제가 전찬 2자를 고쳤습니다. 목록에 "묘표에 옮겨 넣었다[移入墓表]." 4자도 희경이 썼습니다. 당시 순재[舜在 성기운(成璣運)] 및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으니 애당초 제가 멋대로 고친 것이 아닙니다.대저 선생의 주는 실로 묘비에 표로 새기고 문고에는 전편에 넣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애당초 선친에게 인색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을 난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을 지을 때 및 작년 가을에 보낸 편지에 모두 이 말이 있습니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은 처음에 "묘비에 표로 새기고 문고에는 전편에 넣으려는 것은 듣자하니 선생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표편(表編)에 넣었고 순재는 처음에 "선생께서 왜 제목을 고치지 않으셨을까?"라고 말한 뒤로는 또한 다른 말이 없었으니, 어찌 모두 사사로운 친분에 이끌려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뜻밖에 갑자기 여러분들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자리에 형중[亨仲, 이종택(李鍾宅)]과 경보[敬父, 김종희(金鍾熙)]도 참여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당시에는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다가 지금에서야 근거를 끌어다 세워 호도(糊塗)한 잘못이라도 있는 양 저를 몰아가니 너무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개 오늘날 우리들이 피차를 막론하고 어찌 스승의 문고가 완전무결하기를 바랄 뿐만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스승의 명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선친의 글은 전편에 그대로 두는 것이 본디 온당합니다. 이는 선친에게 아무런 보탬이나 손해가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헤아려주십시오.청도에서 당시에 오진영이 "이 주어(註語)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운운하여 이런 까닭에 앞뒤로 두 개의 논의가 있었으니 스스로 죄송한 마음에 보내는 답장입니다. 이 편지에서 "결국 표편에 넣기로 하였습니다."라고 한 말은, 마땅히 끝 부분에 "이 주어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표편에 넣기로 정했습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문장이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흠입니다. 대개 훗날 저쪽에서 이를 꼬투리 잡아 말할 줄 생각 못했으므로 더 유념하여 살피지 않아서 이런 허술함이 있게 된 것입니다.계해년 가을 권순명이 편지로 "제가 신유년 겨울에 문고에는 전편에 그대로 두고 본가는 표로 고쳤다는 편지를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전(本傳) 아래 또 친필 주해가 있으니 혹시 다시 처분이 있을 듯합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대개 유영선은 이미 주어를 보고서 옮기는 것이 맞다고 하여 옮기면서 '묘표에 옮겨 넣었다.[移入墓表]' 4자의 친필도 함께 옮겼습니다. 오진영도 '이 주어를 보면 누가 표편에 넣자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결정하였습니다. 권순명은 끝내 친필로 주해를 달았다는 이유로 다시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당초에 전을 표편에 넣는 것은 본디 그들도 같이 보고서 공정하게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진영은 제가 선친의 전에 농간을 부리다가 탄로나서 수정받았다고 하면서 원수로 여기니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아, 그 험악한 마음씨를 어찌 제가 감당하겠습니까? 【추기하였다.】 庚申九月 澤述入華島 請于先生曰: "昔年下筆先人傳文, 願改作墓表." 因以本草獻之, 先生一覽畢曰: "幸其體裁可作墓表, 其改之也." 且曰: "然則文稿亦當移定也." 時値夜久, 只令金龜洛就本草, 以朱筆, 改傳字爲墓表字、改贊字爲銘字, 文稿未及移定. 而翼朝有故急出, 而旣承師命, 且有改定本, 故一向自信無疑, 又得確齋金台寫表借銜矣. 辛酉夏, 以其由告禧卿, 使之移稿, 禧卿但信澤述言, 於先生前, 無疑割移. 先生曰: "胡爲而然?" 禧卿以澤述言白, 先生曰: "余所不許, 鍾賢豈爲之? 是必有余諾, 然亦何必乃爾?"【余所不許以下, 禧卿書中語.】 顧卿自華島來, 以其事語澤述, 澤述以改定本示顧卿, 具告以實. 顧卿以其由往稟, 先生始悟, 下書澤述曰: "昔年所作先公傳贊, 今旣以碣銘, 而它不易一字. 且又得確台丈寫書借銜, 則愚未敢固辭, 而俟後就私稿, 不得不改傳贊二字也." 後番下書, 則以墓刻用表私稿仍傳添註之意, 敎之. 故更無一言懇稟, 而傳末之註不註, 亦不知之矣. 向者, 華島通訃于各處謁文家也. 出見文稿, 則傳末有添註, 而無墓與稿區別之語. 故意"先生其復庚申初命、辛酉初書歟?" 乃告禧卿曰: "註語如此." 禧卿卽曰: "然則移定可也." 於是禧卿移編, 澤述改傳贊二字, 目錄中移入墓表四字, 亦禧卿筆. 其時舜在及諸人, 皆在座, 初非澤述擅改也. 大抵先生之註, 雖實出於表墓傳稿之意, 初非有慳惜於先人, 特以防他人之難處也.【作傳時及昨秋下書, 皆有此語.】 石農之始謂刻表傳稿, 聞是先生意云, 而終入於表, 舜在之初有先生何不改題之說而後, 亦無他辭者, 豈皆牽於顔私而爲之哉? 料外忽承僉狀, 雖甚惶愧. 然向日座上亨仲、敬父皆參在, 何故黙無一言, 今乃引立援據, 歸人於有若糊塗之科, 殊不可曉也. 蓋今日我輩, 無論彼此, 豈不但欲師稿之盡善歟? 師命旣然矣, 則先人文字, 仍置傳編, 自是穩貼. 此於先人無所增損, 澤述豈敢有貳見乎? 伏惟僉諒.淸道當日, 吳謂: "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云云, 所以有前後貳論, 自悚之答書也. 此書中終入於表, 當作"終曰: '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 而定入於表." 而文不詳備是欠, 蓋未料後日彼邊之執此爲言, 故不加意察之, 而有此疏漏也. 癸亥秋, 權純命書有曰: "此漢辛酉冬, 旣傳文稿仍傳本家改表之下書, 然本傳下, 又有親筆註解, 則恐或更有處分."云云, 蓋柳旣見註語謂"移定可也"而移之, 幷有移入墓表四字之親筆, 吳又謂"觀此註語, 孰不以爲入表"而決定矣. 權終以親筆註解謂更有處分. 當初傳之入表, 自是渠輩同見公決者, 而今吳謂余幻弄父傳而綻露見釐正, 而作仇, 則渠輩又同然一辭, 吁其險心, 何可當也?【追識】 선친의 전문 김택술의 선친은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으로 《간재집(艮齋集)》 〈김벽봉전(金碧峯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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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여러 사람들께 답함 계해년(1923) 答淸道諸人 癸亥 아무개들이 아룁니다. 10월에 보내신 답장에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옛날에는 감춰졌다 지금 드러나 앞뒤로 차이가 있다고 반복해서 깨우쳐주신 것으로도 이미 감사한데 곧바로 친절하게 미혹된 부분을 지적하셨으니,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무어라 사례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이 삼가 생각건대 천리와 인정은, 진실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기수(氣數)가 기승을 부려 드러나고 감춰지는 차이가 있고 진실로 동일한 것이지만 시기에 따라 같고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무릇 간재의 사고(私稿)를 간행하자는 거사가 벌써 심상(心喪)을 지내는 3년 동안 있었으니 영전이나 묘소에 간소(刊所)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어찌 천리와 인정에 지극히 합당하여 의석(議席)에서 준엄하게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처음 발의는 붕우(朋友)인 정평언[平彥, 정형규(鄭衡圭)]가 익산(益山) 현동(玄洞)에 간소를 설치하여 옛날 자공(子貢)이 시묘살이했던 의리84)를 붙이고자 하였는데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의 난처하다는 말 때문에 그만 두었습니다. 두 번째 발의는 예동(禮洞)의 김우(金友)가 계화도에서 재무를 관장하고자 했는데 아들 경부(敬父)와 다투어 정지하였습니다. 세 번째 발의는 영, 호남의 사람들이 다시 상의하려고 했는데 석농이 고함치고 손을 휘둘러 이루지 못했습니다. 네 번째 발의는 김석린(金錫麟)이 계화도에서 사고를 교정하려고 했는데 유희경이 당돌하다고 논척하여 이날까지 못했습니다. 천리와 인정이 ▦▦▦않고자 하여도 기세에 가려졌으니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같다는 것은 인심이 같은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억지로 똑같게 한데서 나왔습니다.호남에서는 걱정 없이 간행할 수 있다는 보장은 영남에서는 일제에 인가(認可)받는 근심을 넘어야 한다는 점에 비할 수 없으니 여막을 지키면서 간소를 설치하는 것은 의리에도 부끄러움이 없고 예에도 합당하니 이에 천리와 인정이 다시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억지로 똑같이 한 것과 달리 참으로 인심이 똑같은 데서 나올 것입니다.석농이 대의(大議)를 말하고 순재가 업무를 맡았으니 누가 중망(衆望)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겠습니까? 간행하자는 논의를 낸 이는 본디 발인(發靷) 전 천백 인 중에 있었고 간소를 영남에 보내자는 이는 반우(返虞) 뒤 수십 인 중에 있었으며, 영남으로 사고를 보내는 경우는 선사의 친아들 정재[靜齋, 전화구(田華九)]도 미처 몰랐으니 아마 모두 동의하시는 가운데 끝내 동의하지 않는 분이 있고, 급박하지 않은 가운데 끝내 갑작스러운 점이 있는 듯합니다.지난 섣달의 경장(更張)은 과연 잘못된 거행이었으니, 도(道)로 스승을 섬기는 데 합당하였다면 과감하게 결정하여 속히 진행해야지 곧바로 다시 상의한 것은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사고를 받들어 전적으로 진행한다고 이미 편지에 썼다면 화합하는지 순응하는지를 막론하고 단지 신의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데 끝내 예월(輗軏)의 경계85)를 면치 못한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지엽(枝葉)이지 본질적인 논의가 아닙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국가의 일로 따지자면, 가령 반드시 임금을 떠난 뒤에야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경우 혹 그렇지는 않겠지만 임금을 따르며 나라를 보존하는 경우와 어찌 같겠으며, 가령 반드시 여막을 떠난 후에야 사고를 완성할 수 있는 일의 경우 혹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천리를 온전히 체득하고 인정을 두루 흡족하게 하는 경우와 어찌 같겠습니까?여러 공들께서 아마도 회답해주시리라고 밤낮으로 바란 지가 오래되었는데 답장에서 너희는 너희 갈길 가고 우리는 우리 갈길 간다는 결안(結案)이 갑자기 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로 하여금 멍하게 어찌할 바 모르게 하니, 저희들이 이에 또한 더 이상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그동안 스승이 몸소 정리한 사고대로 묘재(墓齋)에서 간역을 시행하여 속히 활자로 인쇄하여 일을 끝마칠 계획입니다. 혹여 가르침을 어기고 제 멋대로 하는 점을 헤아리어 깊이 탓하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某等白. 承十月惠覆, 以天理人情之今昔隱顯、先後異同, 反復詰喩, 旣以仰感, 指迷旋切, 愧悚莫省所謝也. 雖然, 鄙等竊以爲天理、人情, 固顯然底, 而氣之所乘, 有隱現之殊, 固同然底, 而時之所隨, 有異同之分也. 夫刊稿之擧, 旣在心喪三年內, 則設於靈前或墓下, 豈非天理人情之至當而峻發於議席哉? 初發而鄭友平彦之欲設於玄洞, 以寓古人築場之義也, 則爲石農難處之說而罷之: 再發而禮洞金友之欲爲掌財於華島也, 則爲其子敬父所爭而止之: 三發而嶺、湖諸人之欲再作商議也 則爲石農之所喝揮而未成: 四發而金錫麟之欲校稿於華島也, 則爲柳禧卿之斥以唐突而不得于斯時也. 天理人情 雖欲不▦, 爲氣勢所蔽, 而顯行得乎? 然則其所謂同者非人心之所同然, 出於不得已之强同也. 及其有湖刊之保無憂慮而不比嶺之涉於認累, 則守廬而設刊, 於義無愧, 於禮爲得, 於是乎天理、人情益復顯. 然而貳於向之强同者, 乃眞出於人心之同然也. 石農之發大議, 舜在之受幹務, 孰敢以爲不合衆望也? 但刊議之發, 固在於發引前千百人中, 而刊所之之嶺, 乃在於返虞後數十人中, 其送稿於嶺也, 至如先師親子靜齋, 而亦未及知, 則恐僉同之中, 終有未同者存也: 不遽之中, 終有卒遽者存也. 客臘之更張, 果涉錯擧, 則已如其合於以道事師也, 宜乎勇決而速行之, 其旋爲更商者, 果何意也? 奉稿專進, 旣筆之於書, 則勿論其洽和與順應, 但要信義之是守, 而竟不免輗軏之戒者, 又何也? 雖然, 此皆枝葉而非本之論也. 請以來書所喩國家事質之, 如必離君而後可存宗社, 則已或其未然, 孰若從君而存國也? 如必離廬而後可完稿事, 則已或其未然, 孰若一擧兩得而爲全體天理、周洽人情也乎? 諸公之庶幾回見, 日夜望之者久矣. 豈意其我邁爾征之結案, 忽發於盛敎也? 使人惘然而失圖也, 鄙等於此, 亦復奈何? 只得奉先師遺訓, 依前後稿親定本, 設役於墓齋, 亟圖活印而竣事矣. 倘蒙恕其違敎自專而不深罪之, 則幸甚. 자공이 시묘살이했던 의리 익산 현동은 전우의 초장지(初葬地)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예월의 경계 예월은 수레와 우마(牛馬)를 연결해주는 장치인 멍에, 끌채 등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신의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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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人 丙辰 보내신 편지에서, "사람은 태어나 성(性)이 똑같고 심(心)과 기질(氣質) 또한 본디 똑같은데, 다만 용처(用處)에서 심, 기질이 성을 주재하지 않아서 천년 동안 완전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고, "본디 선한 심과 본디 맑은 기를 보존하여 용(用)을 가지런히 하여 체(體)와 합한다."라고 하셨는데, 제 견해는 이 부분에 속으로 헤아려볼 점이 있습니다."심, 성, 기질은 만인이 본디 같다."라고 한 이상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높고 낮은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처에서 심, 기질이 성을 주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용(用)이란 것이 과연 이것이 무엇이기에 모두 똑같은 셋 가운데서 차이를 스스로 만듭니까?예전에 이로 인하여 설을 얻었었습니다. 성은 무위(無爲)한 것이므로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여 성인과 범인이 똑같은 바입니다. 심은 유위(有爲)한 기이니 본디 선하지만 흘러서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근본을 말하면 모두 똑같지만 말단을 말하면 다름이 있습니다. 기질에 이르면 기가 드러나 작용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근본은 청수(淸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음양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초기를 말했을 뿐이니, 유기(游氣)가 형질을 이룬 뒤에는 청탁(淸濁)과 수박(粹駁)이 만 가지로 고르지 않습니다.온갖 고르지 않은 물건으로 천하의 온갖 일을 대응하면 가벼이는 어긋나고 무겁게는 패악스러운 변고가 있을 터이고, 본디 선한 마음이라는 것도 따라서 직분을 잃어 순선한 성을 받들어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용처에서 성을 주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용이 어긋나는 과실을 논하자면 기질의 구애(拘礙)로 심이 잘못 응대하게 되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부여받은 기질이 고르지 않아 성에 갖춰진 바를 알아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8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찰하여 사욕을 이기는 방도를 논하자면 모두 이 마음이 주인이 되어 반드시 기질을 따르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자께서 "학문하여 크게 유익한 것은 스스로 기질 변화를 구하려는 데 있다.88)"라고 하였습니다.그렇지만 기질이 사람에 따라 같지 않음은 마치 흙탕물은 맑은 층과 탁한 층이 다양하고 철이 섞인 은은 순정한 부분과 불순한 부분이 들쑥날쑥한 것과 같아서, 상지(上智)는 순은과 맑은 물이고 하우(下愚)는 질이 나쁜 철과 진흙덩어리입니다. 무도(無道)한 자들을 제외하고, 현자 이하로 천고에 위대하고 독실한 선비들 중에 평생 심력을 쌓아 변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유기가 두터워 맑게 하지 못하여 더 이상 음양의 화생(化生)을 회복할 수 없게 됨을 끝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처음의 기는 그 성취를 궁구해보면 지극히 넓고 높고 정미하고 깊지만 끝내 약간의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다른 나머지들은 논할 겨를 없고 도량이 협소한 백이(伯夷), 공손치 않은 유하혜(柳下惠), 뛰어난 재기의 맹자(孟子)에 이르러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로써 말하자면, 보내신 편지에서 본심과 본기를 보존하여 체에 합하고 용을 가지런히 하기 어렵다는 말씀이 더욱 분명합니다.【이하 빠짐.】 來喩謂: "人生性同, 心與氣質亦本同, 特於用處, 心、氣質之不宰於性, 而千載無完人." 又謂: "保其本善之心、本淸之氣, 齊其用而與體合." 淺見於此有商量于中者矣. 旣曰: "心、性、氣質, 萬人本同." 則宜無聖、狂高下之殊, 而又曰: "特於用處, 心、氣質之不宰於性" 所謂用者, 果是何物, 而自作差異於三者皆同之中也? 嘗因此而得其說焉. 夫性者, 無爲之物也, 故純粹至善而聖、凡之所同也. 心者, 有爲之氣也, 其本雖善, 而流或爲惡, 語其本則皆同, 語其末則有異也. 至於氣質則氣之克著, 而見於作用者也. 其本雖曰淸粹, 此以二氣化生之初而云爾, 逮夫游氣成質之後, 則淸濁粹駁, 有萬不齊. 將有萬不齊之物, 以應天下之萬事, 乃有輕差重悖之變, 所謂本善之心者, 從而失職, 而不能奉循乎純善之性. 來喩所謂用處之不宰乎性者 豈非此也? 蓋論用差之失, 則以氣質之拘而致心之錯應, 故朱子曰: "氣稟不齊, 不能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 論省克之方, 則都管此心作主而必令氣質聽順, 故張子曰: "爲學大益, 在自求變化氣質也." 雖然, 氣質之隨人不齊, 如帶泥之水淸濁多般、和鐵之銀純雜相錯, 上智之純銀․淸水、下愚之惡鐵․泥塊. 除是不道, 自賢者以下, 千古俊偉篤實之士, 積生平心力, 欲其化而入聖者, 何限, 而終無奈得乎游氣者重而澄淸不得, 無以復陰陽化生. 厥初之氣, 究其所就, 雖極博高精深, 終未免帶些氣質, 他餘不暇論. 至於伯夷之隘、柳下惠之不恭、孟子之英氣, 可知已. 末由此言之, 來喩所謂保本心、本氣, 而齊用合體之難者, 尤較然也.【以下缺】 부여받은……못한다 이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인용하였다. 학문하여……있다 이는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2 〈어록(語錄)〉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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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1 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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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李元浩 乙卯 망운시(望雲詩)를 보내주시니, 멀리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이보다 앞서 진실로 형이 문단의 거벽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웅장하게 주제를 구성하고 정밀하게 다듬으며 빛나게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에 이처럼 구비되어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장차 위축되어 물러나 피할 겨를이 없는데 다시 뛰어난 작품으로 한발(旱魃, 가뭄의 귀신)을 꾸짖고 비를 내릴 신룡(神龍)을 감동시켜 한 번 하토(下土)에 비를 뿌려주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어찌 시 제목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또한 생각해볼 때, 옛날에 영웅호걸로 진나라 황제가 달을 꾸짖고108) 노양(魯陽)이 해를 휘둘러 되돌아가게 했다109)는 일들은 원래 이치를 벗어난 세속의 이야기에 속합니다. 오직 문공 한유의 정치하고 진실한 문장만이 형산의 구름을 몰아내고110) 조주의 악어를 길들였으니111) 이것은 믿을 만하지만, 이를 본받고자 한다면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두지 말라고 한다면, 하늘을 공경한 시인의 뜻을 체득하여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도록 하는 것이 역시 하나의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인(學人)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 공경함을 쓰는 도리이니, 애오라지 이런 뜻을 받들어 화답합니다. 그러나 어찌 시라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못난 사람의 평범한 말이니, 부디 비웃지 않으시겠지요? 望雲詩見惠, 深感不遐. 前此固知兄之爲詞林巨擘, 而不圖意匠之雄, 鍊工之精, 出色之燁, 若是其備也. 如弟者, 將畏縮退避之不暇, 乃復以雄篇傑作, 呵旱魃動神龍而一霑下土望之, 是豈著題語哉? 且念古之雄傑, 如秦帝之喝月․魯陽之揮日, 元屬理外野說, 惟韓文公精誠文章, 開衡山之雲, 馴潮州之鳄, 此則可信, 而欲效嚬, 則非其人焉. 無已則體詩人敬天之意, 欲與擧世之人, 恐懼修省, 以冀感天悔禍, 亦一事也. 此爲學人無時無處不用其敬之道, 聊將此意奉和, 然豈詩乎哉? 眞陋生常談, 幸不見哂否? 진나라……꾸짖고 당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시 〈진왕음주(秦王飮酒)〉에서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달을 꾸짖어 거꾸로 가게 하는구나, 은빛 구름 촘촘히 덮힌 궁궐은 환하기만 하구나〔酒酣喝月使倒行, 銀雲櫛櫛瑤殿明〕"라 했다. 노양(魯陽)……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노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 군대와 한창 전투하던 중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휘둘러서 태양을 90리나 뒤로 물러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 형산의……몰아내고 한유의 시에 "내가 찾아온 것은 마침 가을비 내리는 계절이라, 음기가 어둑하건마는 씻어낼 맑은 바람도 없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기도를 올리니 뭔가 반응이 있는 듯도, 신명이 어찌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조금 있자 운무가 개며 드러나는 뭇 봉우리, 쳐다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버티고 서 있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3 〈알형악묘수숙악사제문루(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정성이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할 수는 있었지만, 헌종의 미혹을 돌릴 수는 없었다. 〔公之精誠 能開衡山之雲, 而不能回憲宗之惑〕" 하였다. 조주의……길들였으니 당 헌종(唐憲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나갔는데, 그곳 악계(惡溪)에 사는 악어(鰐魚)가 백성들의 가축을 마구 잡아먹어서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마침내 직접 가서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더니, 바로 그날 저녁에 시내에서 폭풍과 천둥벼락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는 물이 다 말라서 악어들이 마침내 그곳을 떠나 60리 밖으로 옮겨가 더 이상 조주에는 악어의 폐해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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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李元浩 辛巳 근래에 받은 정중서(鄭重書)의 시는 의리를 명확하게 보고 의론을 공평하게 가졌으니, 진실로 제가 평소에 소망한 것과 부합되는 것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나를 아는 것이 깊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원대하며, 나를 경계하는 것이 간절하고 나를 가르치는 것이 지극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은 십 몇 년 동안 뜻을 같이 한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얻은 것으로, 덕을 사랑함으로써 충고하여 이끌어주는 데에 본래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제가 덕 있는 사람을 친애하여 부족한 점을 닦아 인을 보충하는 이익을 얻기 바라는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못났을지라도 어찌 감격하여 부합되도록 도모할 줄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도를 믿고 덕을 넓히며 의리를 정밀히 하여 우뚝 태산 같이 높은 산이 된다고 한 것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결단코 저같이 못난 사람이 희망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것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합니까?'믿는 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실질적 이치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세에 막힌 경우에는 또한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자가 어찌 도를 믿고 덕을 넓히고 의리를 정밀히 하여 태산 같이 높은 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육씨(육구연) 한명이 있어서 그와 대립하여 오늘날까지도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의심과 믿음이 반반인데 하물며 오늘날 후생(後生)에 있어서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나의 재주와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의리를 밝게 분별함에 마음을 다하여 제자의 직분을 닦음으로써 굽어보고 우러름에 부끄럼이 없기를 구할 따름입니다.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최근에 《남당집(南塘集)》을 읽어 보니 '마음에 우열이 있다'고 논하면서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다"112)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우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마다 똑같이 청기를 얻어서 마음이 된다면 어찌 성인과 바보의 구별이 있습니까? 또한 고려 때 신씨와 왕씨의 구분을 논하면서 "옛날부터 황제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간의 길고 짧은 것은 모두 나라를 취득한 방법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로부터 비롯된다. 왕씨가 신씨에게 멸망을 당하고, 우리 조선이 신씨에게서 나라를 취득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바르게 얻어서 국운이 신령스럽고 오래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나, 이 설은 어떻습니까?제가 생각할 때, 마음에 과연 우열이 있다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장의 주에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하고, 마음이 발한 것에 따라 마침내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한다"113)는 설은 어떻게 조처합니까? 국조(國祚)의 장단이 과연 나라를 바르게 얻었냐의 여부와 관계가 있고, 심지어 이것을 가지고 왕씨냐 신씨냐를 변론한다면 나라를 순정(純正)하게 얻은 명나라가 오히려 나라를 바르게 얻지 못한 당나라와 송나라의 국운의 길이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견으로 꺼리지 말고 분석하여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頃所拜承鄭重書詩, 有以見見義之明․持論之公, 固副平日之所望者. 又以見知我者深, 期我者遠, 而戒我者切, 教我者至. 是則初得於十數年來同人往復中者, 始知以德之愛忠告之導, 自有法門. 而區區所以親近有德, 望其獲攻闕輔仁之益者, 不爲虛矣, 顧雖無似, 豈不知感而欲圖副也? 但所謂信道弘德精義, 而屹然爲泰山喬嶽者, 地位甚高, 决非如我無似者之所可企及, 此將奈何?至於信仰在此, 不在彼之云, 實理則然, 而氣勢所障, 亦有不盡然者. 朱子豈不是信道弘德精義之泰山喬嶽, 乃有一陸氏者與之角立, 而至于今是非未定, 而疑信相半, 况於今後生乎? 此又無如之何矣. 只當不關吾材地, 不問人信否, 盡其心於明辨義理, 而修弟子之職, 以求俯仰無愧而已, 未知如何? 比觀《南塘集》, 有論心有優劣, 而曰"聖人之心, 清氣聚而虛靈;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 此其有優劣也. 若人人同得清氣以爲心, 則何以有聖愚之別? 又論麗朝辛王之辨, 而曰"自古帝王享國長短, 皆由於得國之正不正. 王氏滅於辛氏, 而我朝取之於辛氏, 故得之正而國祚靈長." 未知此說何如? 鄙意心果有優劣, 則《大學》明德註, 人得乎天, 虛靈不昧, 因發遂明, 以復其初之說, 何以區處? 國祚長短, 果係於得國正否, 而至以是辨其爲辛爲王, 則得之純正之明, 反不及得之不正之唐宋者何也? 幸以高見勿憚剖示焉. 성인의……허령하다 한원진은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리를 자각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사욕을 자각한다〔聖人之心, 淸氣聚而虛靈, 故常覺於理,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라고 말하였다. 《남당집(南塘集)》 권15 〈여참신부(與沈信夫)〉. 사람이……회복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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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병술년(1946) 答李元浩 丙戊 물으신 '연제(練祭) 후에 부판(負版), 벽령(辟領), 최(哀)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간옹(전우)뿐만이 아니라 전옹 임원회부터 이미 그러했습니다. 전옹은 "소상(小祥)에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다는 것은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이 《가례》를 따른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례》를 따랐다가 최근에 다시 생각해보니 《의례》를 따라 제거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겠다."라고 말했고, 간옹은 "주자가 말년에 《서의(書儀)》에서 대공 이하의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 것은 속례(俗禮)로서 옳지 않다고 하셨으니【군신복의에 보임】 《가례》의 연복의 제도는 마땅히 아직 확정되지 않은 논의라고 해야 한다.【여기까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벽령은 바로 '적(適)'이라는 것입니다. 《의례》 〈상복〉편 기문의 가공언(賈公彦) 소(疏)에서는 "'적'이라고 명명한 것은 애척(哀戚)의 감정이 오로지 돌아가신 부모 때문에 기인하여 나머지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114)라고 말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서는 "'최(衰)'라는 것은 꺾는다[摧]는 뜻이니, 효자가 슬퍼서 마음이 꺾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판에 대해서는 미처 고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효자가 부친을 여읜 것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이런 것으로 논해보면, 만약 연제를 지내고 이 세 가지 물건을 제거한다면, 이것은 오로지 부모의 상에 기인했다는 뜻, 슬퍼하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처음에는 있었지만, 끝날 쯤엔 없는 것이 되니, 삼년을 마치도록 제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공복 이하의 상복을 입는 대상은 부모의 상을 당한 효자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세 물건인 부판․벽령․최를 갖추지 않는다'는 내용이 예의에 맞는 것 같은데, 주자가 말년에 무엇 때문에 속례라 비난했습니까? 당초에 《의례》의 오복(五服)에서는 모두 세 물건을 갖추고 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대상은 또한 친상(親喪)에 비할 바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대공으로부터 그 이하는 사용하지 않고, 기년복의 경우에 세 물건을 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성인이 예를 만든 뜻은 세 물건을 오로지 효자를 위해서만 설치한 것이 아니니, 위의 '오로지 부모에게 기인했다'는 등의 설과 같은 경우는 다만 이것으로 오복의 슬픈 정을 나타내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마땅히 친상의 연제 이후에 제거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에서도 모두 마땅히 써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어떠합니까? 자세히 고증하여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편지의 말미에 운운한 것은 저의 뜻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들[일본]을 축출한 것은 대부분 열강의 힘이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헤이그에서의 뜨거운 피와 하얼빈에서의 우레 같은 폭탄은 일본을 축출하는 뿌리이고, 워싱턴에서의 외교와 중경에서의 임시정부는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며, 상해에서의 열 명의 장교를 오살시킨 것과 일본 동경에서 부거(副車)를 잘못 맞힌 것은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고, 갑신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을 축출한 열매이니, 어찌 일본을 축출하는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미 쫓겨났다면 나라는 진실로 저절로 존재하게 되거늘 또한 어찌 나라를 세우는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오히려 국정을 주도하는 사람이 늦었을 뿐이니, 우리들이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맞고도 맞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비록 일찍이 정치에 종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이를 그만두고 돌아와야 하니, 이제 어찌 본디 포부도 없는 사람이 문밖에 나서서 일이 아직 안정되기 전인 정당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所詢練後不去負版․辟領․衰, 非惟艮翁, 自全翁已然. 全翁曰: "小祥去負版․辟領․哀衰, 備要․便覽從家禮也, 愚嘗從家禮, 近更思之, 從儀禮不去尢好." 艮翁曰: "朱子晚年以書儀大功以下之去負版․辟領․衰, 爲俗禮而非是者【見君臣服議】, 則家禮練服之制, 當爲未定論矣【止此】." 盖辟領即適也.〈喪服〉記疏曰: "適者哀戚之情, 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儀節》曰: "衰者摧也, 以孝子有哀摧之志." 負版未及考. 然亦似以孝子喪親爲負罪也. 以此論之, 若練而去此三物, 是適緣父母哀摧負罪之意, 有始無終也. 其終三年不去, 明矣. 大功以下, 非孝子之比, 則《書儀》《家禮》之不備三物者, 似得禮意, 而朱子晚年何以俗禮非之? 當初《儀禮》之五服, 皆備三物者, 何也? 朞服亦非親喪之比, 而《書儀》《家禮》之只從大功以下不用, 朞服則存之, 又何也? 抑聖人制禮之意, 三物非專爲孝子設, 如上適緣父母等說, 但以此表五服之哀情歟. 然則今當非惟不去於親喪練後, 於朞功緦皆當用之, 又明矣, 如何如何? 幸細考而囬示焉.書末云云, 鄙意不盡然. 彼之逐去, 大都是列強之力, 以在我者言之, 海牙之熱血, 哈爾之轟雷, 逐日之植根也, 華蝢之外交, 重慶之臨政, 逐日之抽幹也, 上海之鏖斃十將, 日京之誤中副車, 逐日之逹枝也, 甲申之正式宣戰布告, 逐日之結實也, 豈可槩謂逐不自我? 彼既逐去, 則國固自在矣, 又何云建國猶遲? 但猶遲主國政之人爾, 吾流自重之云, 極是極是. 如弟者, 雖使曾已從政, 猶當致事而歸, 今豈可以素無抱負之人, 出門外, 參事未定前政黨中耶? 勿慮勿慮. '적'이라고……의미이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 '云適者 以哀戚之情指適緣於父母不兼念餘事'에 대하여 《구사당선생속집(九思堂先生續集)》 권3 〈최부판벽령설(衰負版辟領說)〉의 송희준 번역은 "적(適)은 슬픈 마음을 지적(指適)함이니, 부모로 인해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適者, 指適, 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상변통고(常變通攷)》 권9 〈상복제도총론(喪服制度總論)〉의 벽령(辟領) 부분의 한국고전의례연구회 번역은 "적(適)은 슬퍼하는 마음이 부모에게로 향하여 감으로 인하여 다른 일을 겸하여 생각하지 못함이다.〔適者, 以哀戚之情, 指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 하였고, 대공이하무부판벽령최(大功以下無負版辟領衰) 부분의 번역은 "적은 부모에게 향하여 가는 마음 때문에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이다.〔適者, 指適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DB〉 그런데 송(宋)나라 섭숭의(聶崇義)가 편찬한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 권15의 '左右辟領, 謂之適者, 以哀戚之情, 當有指適, 緣於父母, 不兼念餘事, 以示四處皆有悲痛'이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지적(指適)'은 '귀결', '쏠림', '지향'의 뜻인 듯하다. 그러면 가공언의 소는 "적(適)이라고 명명한 것은 슬퍼하는 마음이 한곳으로 귀결되기 되기 때문이니, 부모로 인하여 다른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이해해야 할 듯하다. 김택술은 '적(適)'을 '오로지', '단지'라고 이해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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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선덕의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洪文善德義 ○戊辰 저는 거칠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함께 하려 하지 않는데 좌하가 잘못 들음으로 인하여 자식을 보내 학문을 묻게 하고, 이어서 사랑하는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칭찬이 지나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생기니 감사함을 느낄 겨를도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그 아버지가 땔나무를 쪼개면 그 자식은 메고 온다115)고 했고, 훌륭하게 활을 만드는 집안의 자식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116) 했습니다. 좌하께서 땔나무를 쪼개고 활을 만든 것을 좌하의 자식이 본보기로 삼는 근본으로 사용하기를 대단히 바라니, 이것이 이른바 부친이 창업함에 자식이 계승한다117)는 것인데, 누추한 제가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물이 묘연한 시대에 세도의 책임이 훌륭한 후배에게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저는 훌륭한 당신의 자식에게서 바라는 바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편지를 주고받는 초기이지만 이런 진실된 속마음을 터놓고 말씀을 드려서 의로운 가르침을 돕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를 바라니, 혹시라도 간곡히 헤아려 꾸짖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僕粗朴迂拙, 人所不齒, 乃被座下誤聽, 遣子問學, 繼賜寵牘, 稱詡過當, 慙懼并作, 不遑知感. 竊嘗聞其父析薪, 其子負荷, 良弓之子, 必學爲箕. 深願座下之析薪爲弓, 用資令胤柯則之本, 是則所謂父作子述, 淺陋者何與之有? 當此人物眇然之時, 世道之責, 不於後來之秀而誰哉? 鄙於令胤望之也深. 故雖於往復之初, 進此心肝之語, 冀助義教之一端, 或可曲諒不讁否? 그……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7년의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훌륭하게……배운다 세업(世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하였다. 부친이……계승한다 공자(孔子)가 문왕(文王)에 대해 "근심이 없었던 분은 문왕뿐일 것이다. 왕계를 아버지로 삼고 무왕을 아들로 삼았으니, 아버지가 시작하자 아들이 계승하였다.〔無憂者, 其惟文王乎. 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父作之, 子述之〕"라고 하였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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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 민열에게 보냄 을해년(1935) 答崔以求 敏烈 乙亥 나의 문장을 그대가 전할 만하다고 여겨서 선사(繕寫)하여 소장하려고 한다는데 아마도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데 본디 문장에 재주와 식견도 없고 또 힘을 쏟아 붓지도 않았습니다. 나아가 유학자의 이치가 뛰어난 문장으로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지도 못했고, 물러나 문인의 기교있는 말로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장차 누구에게 보일 것이며 누구에게 전하겠습니까? 대저 고금의 문장에 진력했던 자들에 대해서도 육일옹(六一翁 구양수)은 오히려 다 사라졌다고 슬피 탄식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맹자(孟子), 한유(韓愈),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 네 현인의 문장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전해지는 실체를 궁구해보면,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변별했고, 한유는 노자와 불가를 변별했고, 주자는 육상산(陸象山 육구연)을 변별했고, 송시열은 흑수(黑水)1)를 변별했으니, 이처럼 이단을 변별한 것을 제이의(第二義)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오씨와 김씨가2) 무함(誣陷)과 배신의 변을 일으켜 사도(師道)가 밝혀지지 못함을 통분해하고 사벽(辭闢)3)할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여 허다한 심력을 소비해 수많은 문장을 썼습니다. 확연한 효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단을 물리치는 무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많이 양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맹자, 한유, 주자, 송시열 네 현인의 마음을 본받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 맹자께서 우(禹)임금, 주공(周公), 공자, 삼성의 공을 이은 것도 실로 이점(이단을 물리친 것)에 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의 학문은 하나도 성취한 바가 없지만 오직 이 일만큼은 가히 손에 쥐고 선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간옹의 도가 끝내 어두워질 이치가 없으니, 나의 변문도 사라지지 않을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태양 빛에 의지하고 천리마 꼬리에 붙어서 함께 비추고 아울러 이르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밖의 부수적인 글들은 오직 변문에 의지해 함께 전해질 것입니다. 그대가 써서 소장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점을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鄙文君以爲可傳, 欲繕寫而藏之, 恐不必爾也.自念於此, 素無才識, 又不致力.進不得爲儒者理勝之文之裨蓋世敎退, 不得爲文人巧麗之辭之悅人耳目.將誰觀而誰傳? 夫以古今盡心於文字間者, 六一翁猶發泯滅可悲之歎, 况如余者哉? 惟是孟韓朱宋四賢之文, 傳至于今炳炳如也.而究其可傳之實, 則辨楊墨, 辨老佛, 辨象山, 辨黑水者, 不可作第二義看矣.吾於吳金誣倍之變, 痛師道之不明, 慨辭闢之無人, 費了許多心力, 立了許多文字.廓如之效, 雖不能奏, 言距之徒, 曾不多讓, 自以爲法孟韓朱宋四賢之心. 如孟子承禹周孔三聖之功者, 實在於此.又自以爲平生爲學, 無一所就, 惟此事可以藉手見先師也.噫! 艮翁之道, 無終晦之理, 則吾之辨文, 亦可保其不泯.所以依光附尾, 同照并致者, 又在於此.而外此漫著, 惟賴辨文而并傳歟.君之欲寫藏而備不虞者, 其有見於此耶. 흑수(黑水) 윤휴를 가리킨다. 윤휴가 살았던 경기 여주(驪州)의 '여(驪)' 자가 '검은 말 여' 자로 검다는 뜻이 있고 거기에 여강(驪江)이 있으므로 윤휴를 배척하는 측에서 그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오씨와 김씨 간재의 문인이었던 오진영과 김용승으로 보인다. 사벽(辭闢) 말로 밝혀 물리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자운(揚子雲)이 이르기를 '옛날에 양주와 묵적이 정도(正道)를 막으므로 맹자가 말로 밝혀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았다.[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廓如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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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崔以求 乙亥 지난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의 족형인 원숙(元淑)씨를 방문했습니다. 원숙이 이르기를 '그대의 집례(執禮)와 여묘(廬墓)가 나의 가르침에서 흥기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근래에 지은 〈과족제최효자여묘(過族弟崔孝子墓廬)〉라는 시를 보여주며, 그 가운데 "'상(喪)을 만나서 예를 행하는데 어진 기풍이 있다(丁憂執禮有仁風)'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어진 기풍은 실로 그대 후창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내가 "이 무슨 말인가요? 나의 행의(行義)는 진실로 남을 교화시킬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효성이 지극하고 거상(居喪)을 잘하는 가풍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어찌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을 버리고 타인의 가르침에 흥기되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은 형께서 잘못 아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이 말은 이미 실질을 잃은 것인즉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러했던 까닭은 그대가 나를 오랫동안 종유하여 깊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생각해보건대 그대가 만일 처음도 잘하고 마지막 끝도 잘 맺어서 세상에 이름이 거론되기를 소련(小連)과 대련(大連)5)처럼 한다면 어찌 나에게도 영예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대가 만일 정문(情文)6)을 다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뒷말을 두게 된다면 나에게도 어찌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이미 그렇다 하고, 또 생각해보니 집상(執喪)의 예를 다해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효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학문을 하여 덕을 세워서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성취하는 것은 효의 전체입니다. 그러니 치우치거나 온전히 다하는 사이에 소효(小孝)와 대효(大孝)가 갈리는 것입니다. 지금 심산 외로운 여막 가운데서 만 가지 인연을 끊고 오직 어버이 효도 일념만을 자석이 남쪽을 가리키듯 할 것입니다. 같은 효라고 하면 어찌 편소한 효만 일삼고 온전하고 큰 효는 힘쓰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삼년간 독례(讀禮)7)의 여가에 경전을 읽고 의리를 생각하고 궁구하여 많은 근본자리를 세운다면 일생동안 덕을 세우고 몸을 닦는 효에 있어서도 힘쓰기 쉬울 것이니, 그렇게 하는 일이 지극히 옳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남들이 나에게 이택(麗澤)8)의 공이 많다고 할지라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가르침의 근원을 묻는다면 그것은 옛날 구산옹(臼山翁)9)의 교화를 친히 받들어 흥기한 것임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별지)조석(朝夕)의 곡(哭)은 생전의 혼정신성(昏定晨省)을10) 본뜬 것입니다. 혼정신성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니 조석의 곡도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묘(廬墓)에는 묘소에 궤전(饋尊)이 없는데 조석의 절까지 아울러 없앤다면, 이는 끝내 종일토록 묘소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조석으로 묘소에 올라갈 때에는 마땅히 절하고 곡을 해야 합니다. 이 절하고 곡하는 선후는 소학(小學)에 "왕부(王裒)가 조석으로 절하고 꿇어앉아 비통하게 호곡했다."라는 문장에 근거함을 볼 수 있습니다. 向日歸路, 訪貴族兄元淑氏.淑謂哀之執禮廬墓爲興賤子之風.因出其近作〈過族弟崔孝子墓廬〉詩, 丁憂執禮有仁風之句曰, 此所謂仁風, 實指後滄而言.余曰惡是何言? 吾之行義, 固無可以風人者.設有之, 其家自有篤孝善居喪之世風.安得舍其世風而興他人風? 兄誤矣誤矣.蓋此言旣失實際, 則不必再道.但其所以來此, 則豈非以哀從我久而信之深也乎.因此而思之, 哀能克始有終, 稱名於世若小大連之爲, 則豈不有榮於我乎? 又反此而思之, 哀若未盡情文, 人得以議其後, 則於我亦豈好聞乎? 此旣然矣, 抑又念之, 執喪盡禮以報劬勞之恩, 孝之一事, 爲學入德以成親之遺身, 孝之全體.偏全之間, 大小分矣.今於深山孤廬之中, 萬緣潛息, 惟有孝親一念如鐵指南.等是孝也, 豈容徒事偏小而不勉全大乎? 須於三年讀禮之暇, 看取經傳, 念究義理, 立得幾多本地, 其於一生立德成身之孝, 庶易爲力, 至可至可.苟如是也, 人 謂我麗澤有功, 不欲多讓.若問風之所自, 自是舊日親承臼山翁之風而興之者, 有不可誣也, 如何如何?(別紙)朝夕哭, 是象生時定省.定省不拜者, 朝夕哭亦當無拜.然至於廬墓, 墓旣無饋尊, 而并無朝夕拜, 則是終日無拜於墓也.其可乎? 朝夕上墓當拜哭.拜哭先後, 據小學王裒朝夕拜跪悲號之文, 可見. 소련(小連)과 대련(大連) "소련과 대련이 거상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걱정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예기(禮記)》 〈잡기(雜記)〉 정문(情文) 내용과 형식으로, 예를 들면 제사(祭祀)에 있어서 조상을 사모하는 것은 정(情)이고, 제사를 드리는 의식(儀式)은 문(文)에 해당한다. 독례(讀禮) 거상(居喪) 중에는 상례 및 제례와 관련된 예서(禮書)만 읽어야 해서 상중에 있음을 말한다. "장사 지내기 전에는 상례를 읽고, 장사 지낸 뒤에는 제례를 읽는다.[未葬讀喪禮, 旣葬讀祭禮.]"《예기(禮記)》 〈곡례(曲禮)〉 이택(麗澤)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성장해 감을 뜻한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예기》 〈곡례(曲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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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유 한응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李士裕 漢膺 庚午 내가 처음 여행하던 숙소에서 그대를 만났을 때에 단결한 용모와 청아한 자태, 굳은 지조와 화락한 말을 보니 타고난 유자(儒者)의 기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와 며칠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경도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간에 어찌 이처럼 좋은 자질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마음속에 뜻으로 숭상함이 있을 것이니 함께 도에 나아갈만한 자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마음으로 흠복하고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홀연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스스로 말하길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을 하고 싶어 주경야독 하였고, 근자에는 객지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도를 향한 일념이 불길처럼 타올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편지를 받들고 세 번 탄식하기를 "이러했구나! 이 사람이" 하면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궁함을 당해 뜻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를 얕게 알았을 것입니다. 아! 나 또한 25세 이후로 농사지으며 독서하면서 온갖 곤고를 겪은 세월이 7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가업을 그르쳐서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해서 정신을 가다듬어 독서에 정진할 시기인데, 농사일로 몸을 수고롭게 하고 먹고 살아야할 계산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이 이처럼 오래된다면, 학문을 쌓고 학업을 늘리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금일에 이르도록 '오류(汙流)들을 부끄러워하여 함께 하지 아니하고 구학(溝壑)을 가리켜 잊지 않는 뜻'을 대략이나마 세운 것은 일찍이 곤궁을 당하던 날의 힘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제 온 편지를 읽어보니 나와 그대가 겪었던 일과 뜻한 바가 너무나 흡사하여 이미 동병의 탄식이 절실합니다. 처음에 더불어 도에 갈만하다고 여겼던 자가 끝내 함께 돌아갈 수 있어서 더욱 다행으로 여깁니다. 아! 천하에 얻기 어려운 것이 동지인데, 이미 동지를 얻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힘쓰게 하여 이른바 도학을 구하고자 생각지 않는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진실한 마음은 성심(誠心)입니다.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원성을 가르칠 때에12) 성심으로 하였고 망언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편지에서 '나를 선생 대군자라 칭하고 쇄소(灑掃 물 뿌리고 비로 쓰는 일)의 일을 제공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나의 실제 모습을 마주하면 진실로 실질과 맞지 않는 망언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청하건대 향후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런 넘치는 칭찬은 삭제하시고, 정성스럽고 진정으로 교유하여 함께 귀숙(歸宿)할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옳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귀숙할 곳 또한 쉽게 찾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생토록 몸가짐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밝게 착안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용기 있게 발걸음을 디딘 연후에 거의 참된 경지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대와 몇 건의 서약을 세우고자 합니다. 궁리(窮理)는 절근(切近)한 것을 먼저하고 현원(玄遠)을 멀리합시다. 마음 닦는 것은 작은 악(惡)도 끊고 은독(隱獨)을 삼갑시다. 자기를 닦는 것은 허명을 멀리하고 실덕을 힘씁시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근검에 힘쓰고 영리추구를 그치며, 세상을 부지하는 것은 윤리를 숭상하고 물욕과 이익을 낮추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문사를 경시하고 경학을 중시합시다. 이로 말미암아 추구해나가서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13)면 비록 진리에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僕始遇高明於旅次也, 見其端潔之容, 淸雅之態, 介然之操, 藹然之言, 天來是儒者氣像.與之語數日, 不覺傾倒.以爲世間安得有好資質若此? 是必中有志尙, 可與適道者也.心固欽服, 蓋經歲而未嘗暫忘也.忽承辱牋, 奉審自道早孤欲學, 中兼耕讀, 近作舘苦之狀, 而向道一念, 如火益烈, 自有不可遏者.僕奉簡而三歎曰, 有是哉! 若人也, 於是乎益知其自幼絶異之質, 蓋信其當窮益堅之志, 微此書, 吾猶淺知夫若人也.噫! 僕亦二五以後, 且耕且讀, 備經困苦爲七年者.爲其失怙敗業奉老艱食故也.此正年壯力强致精劇讀之時, 而犂鋤之役勞其身, 粟帛之筭撓其心, 若此之久, 其不能積學而富業也審矣.雖然至于今日, 粗立羞汙流而不同, 指溝壑而不忘之志者, 未始非當日困衡之力也.今讀來書, 僕與高明所遭所志, 恰恰相似.旣切同病之歎.復辛始之可與者終之同歸矣.嗟乎! 天下難得者同志也, 旣得同志, 而不思所以實心交勗以求所謂一箇道學, 豈不可惜? 夫實心者誠心也.昔溫公敎元城以誠也以不妄語爲先.今惠書之稱僕以先生大君子供灑掃之役等說, 果當於僕之眞狀而爲誠實不妄之語乎.切乞向後書來, 刪却此等溢獎, 斷斷以眞情相, 與同尋歸宿之地, 至可至可.僕又竊念歸宿之地, 非容易可尋.須於生平行己處事, 明著眼, 專著心, 勇著步然後, 庶可識眞境所在.今欲與高明立數件誓約曰: 窮理則先切近而後玄遠.治心則絶纖惡愼隱獨. 修己則遠虛名而勉實德.理家則務勤儉而息營求.扶世則尙倫理而下物利. 敎人則輕文辭而重經術.由此求之, 不得不措則雖不中不遠矣.高明以爲如何? 사마온공……때에 사마온공은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3)으로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 부른다. 원성은 북송의 명신인 유안세(劉安世, 1048~1125)로 그가 원성 사람이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宋史》에 〈劉安世列傳〉이 있다. 얻지……않는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얻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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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병노】을 전송하는 서문 【갑자년(1924)】 送李君【炳魯】序 【甲子】 "맹자 뒤에 태어나 성인의 도를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친 사람으로 공이 창려 한자(昌黎韓子)119)보다 더 큰 사람이 없는데, 맹자의 도통을 계승한 자를 거슬러 올라가 논할 때에 한자를 논하지 않고 주(周)ㆍ정(程)120)을 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답하기를,"그의 문장이 너무나 성대하기 때문입니다."하니, 내가 말하였다."이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문장은 도학이 숭상하는 바가 아니지만, 또한 버리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도통을 계승할 수 있다면 문장의 성대함이 비록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병통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잠시 틈을 내줄 수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겠네.대저 한자의 문장은 기운이 창성하고 뜻이 잘 전달되며, 이치가 명확하고 의미가 장대하였으니, 비유하면 순풍을 만난 돛대이고 잘 달리는 말의 발굽이며, 해처럼 빛나고 못처럼 깊네. 한자가 삿된 학설을 배척한 것은 마치 용문(龍門)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킨 것121)처럼 확연히 통하고 흡연히 안정되었네. 문장으로 인해 도를 밝히고, 도가 밝혀짐에 문장이 더욱 드러났으니, 서로 병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서로 도움이 되었네. 그러니 문장의 성대함이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아, 한자의 문장은 진실로 성대하였으니, 주ㆍ정이 미치지 못한 바이고, 세도(世道)에 대한 한자의 공이 또한 위대하였으니, 어찌 대번에 주ㆍ정보다 낮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도통이 한자에게 있지 않고 주ㆍ정에게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네.성인의 도는 격치(格致)122)를 귀하게 여기고 실천을 요체로 삼는데, 애석하게도 한자는 이 두 가지를 궁구하지 않았네.123) 때문에 성삼품(性三品)124)을 말한 것은 도의 근원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서장(書狀)을 투척하여 천거를 구한 것125)은 자중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네. 이것이 맹씨(孟氏)의 도통을 접하지 못한 이유이네.오늘날 선비 중에 문장을 가지고 놀며 조충소기(雕蟲小技)126)를 공교롭게 하는 자는 실로 말할 것도 없고, 대가(大家)의 법도를 좇아 답습하며 백세토록 화려한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한자에 뜻을 두지 않는 자가 없네. 한자는 진실로 호걸스러운 선비이니, 한자에 뜻을 둔 것을 나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한갓 그의 못처럼 깊고 고색창연한 문장만을 기뻐하되 성인의 학문을 보호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공적이 되는 줄 모르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의 공적이 사문(斯文)에 있음을 알고서 사모하되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데에 이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네.그래서 나는 한자에 뜻을 둔 세상의 선비들이 문장이라면 내가 대적할 수 있고, 공적이라면 내가 맡을 수 있으며, 또 격치와 실천에 착수하여 한자가 궁구하지 못한 것을 궁구하되 정밀하고 익숙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네. 이와 같이 한다면 한자의 문장을 문장으로 삼고, 주ㆍ정의 도를 도로 삼아서 도통이 진실로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니, 문장도 또한 도에서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나를 따라 공부한 이군 병노(李君炳魯)는 도학에 뜻을 두었고, 아울러 문장을 닦는 자이기에 그가 돌아갈 때에 특별히 이러한 말을 주어서 문장이 비록 도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도통이 문자에 있지 않고, 공이 비록 도를 보호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천을 지극히 다하는 것이 성인의 도가 됨을 알게 하였다. 後孟子而明聖道、闢異端者, 功莫尙乎昌黎 韓子, 而尙論繼孟子統者, 不于韓而于周、程, 何哉? 曰: "爲其文章之太盛也. " 曰: "是何傷哉? 文非道之所尙, 亦非其所棄, 苟可以繼其統, 文之盛, 縱不足增美, 庸可以爲病乎? 請得間而爲之說. 夫韓子之文, 氣昌而辭達, 理明而意長, 譬如風檣駿蹄, 日皦淵深. 韓子之斥邪說, 如鑿龍門而疏九河, 廓然而通, 翕然而定, 因文而明道, 道明而文益彰, 不惟不相病, 實爲之相資. 文盛之於統不繼, 奚涉哉? 噫, 韓子之文, 固盛矣, 或周、程之所未逮也. 韓子世道之功, 亦偉矣, 何遽讓乎周、程? 然其道統之不于韓而于周、程者, 厥有由焉. 聖人之道, 以格致爲貴, 踐履爲要, 惜乎韓子之未究乎此二者也. 故說性三品, 未足爲知道之源, 投書求薦, 不知其自重之道. 此其所以未接乎孟氏之統也. 今之士之操弄觚墨、雕蟲小技之是工者, 固不足道, 其欲追步大家軌範, 彰華聞于百世者, 擧莫不志乎韓子. 韓子誠豪傑之士, 志韓子, 吾不曰'不可', 但徒喜其淵然蒼然之文, 而不知閑聖闢異之爲功, 則未可也; 知慕其功在斯文, 而不究其不繼統之有由, 亦未可也. 故余欲世之志韓子者, 文乎其能吾敵矣, 功乎其能吾任矣, 又能實下手於格致踐履, 究韓子之所未究而精熟之. 是則文韓子之文, 道周、程之道, 道之統, 固在我矣, 文亦不于道有光乎. " 從余遊者李君 炳魯, 志於道而兼治文者, 於其歸也, 持此說而贈之, 使知文雖資乎道, 而道之統不在文; 功雖足以衛道, 而必極踐履之爲聖道. 창려 한자(昌黎韓子) 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로, 창려는 그의 호이다. 주(周)ㆍ정(程) 주는 주돈이(周敦頤)를, 정은 정호(程灝)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용문산(龍門山)을 …… 것 우(禹) 임금이 이 아홉 물줄기의 길을 내어 범람을 막은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기(史記)》 권87〈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를 소통시킬 때에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腁胝, 面目黧黑.〕"라는 구절이 보인다. 격치(格致) 격물(格物)ㆍ치지(致知)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인 격물ㆍ치지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한다. 애석하게도 …… 않았네 한유는 〈원도(原道)〉에서 《대학》의 '팔조목'을 언급하면서 격물ㆍ치지를 제외시켰다. 성삼품(性三品) 한유는 〈원성(原性)〉에서 "성의 품등에는 상중하 세 가지가 있다. 상품은 선할 뿐이고, 중품은 인도하여 위나 아래로 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품은 악할 뿐이다.〔性之品有上中下三, 上焉者善焉而已矣, 中焉者可導而上下也, 下焉者惡焉而已矣.〕"라고 하여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였다. 《昌黎文集 卷11》 서장(書狀)을 …… 것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와〈상재상서(上宰相書)〉 등을 말한다. 《古文眞寶 後集》 조충소기(雕蟲小技)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詞麗句)로 문장만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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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군 중립【남주】에게 주는 서문 【기사년(1929)】 贈白君中立【南柱】序 【己巳】 "자사(子思)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보살피고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목공(繆公)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유지하고 보호하는 사람이니127),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다.백군 중립(白君中立)이 나에게 편지를 부쳐 선생 곁에 사람이 없을까 근심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물품을 공급하고 심부름을 담당하는 평범한 사람이 내 곁에 없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아마 학문에 힘쓰고 도를 구하여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였을 것이니, 중립의 근심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근심이 아니라, 바로 학계에서 공공으로 근심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갓 근심할 줄만 알고 근심을 제거하는 방도를 모르면 안 될 것이다.중립도 또한 일찍이 내 곁에 있다가 지금은 비록 한가로운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지만, 그대의 마음과 힘을 전일하게 하고, 그대의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등을 단정하게 하여 예전에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 그대의 앎을 이루고, 그대의 실천을 채워가면서 날마다 위로 도달해 마지않을 수 있다면 나와 그대가 비록 북과 남으로 멀리 떨어져 일 년쯤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함께 나아가고 마음이 함께 모여서 화락한 즐거움이 종고(鍾鼓)와 금슬(琴瑟)이 한 자리에서 연주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립이 날마다 내 곁에 있으면서 무리를 따르고 대열을 쫓되 일정함이 없이 하다 말다 하면서 큰 새가 날아오거든 활을 쏘아 잡을 것만 생각한다면 학문을 강론하고 설명하는 것이 책상 위에서 떠들썩하게 일어나고, 절을 하고 읍을 행하는 예절이 술잔과 제기 앞에서 어지럽게 행해진다 한들 한갓 형식일 뿐이고 즐거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만약 더해져서 열이 되고 백이 된다면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고 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함으로써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게 될 것이니, 또한 어찌 내 곁에 사람이 있기를 바라겠는가.중립이여! 다른 사람이 스승의 곁에 있기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몸이 아닌 마음으로 스승의 곁에 있을 방법을 꾀하여 그대부터 먼저 행함으로써 이와 같은 자가 많아진다면 나는 날마다 형체가 없는 데에서 서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얻어서 외롭지 않을 것이니, 이 글을 중립에게 주는 것이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無人乎子思之側之人, 伺候道達之人; 無人乎繆公之側之人, 維持調護之人, 一是凡衆之人; 一是賢智之人也. 白君 中立寄余書, 以無人乎先生之側爲憂. 此豈謂供給使令凡衆人之無吾側哉? 蓋云力學求道希賢智者之無有也. 中立之憂, 非爲一人之私, 乃爲學界公共而憂之也. 雖然, 徒知憂之, 而未知所以去憂之方, 則未也. 中立亦嘗在乎吾側矣. 今雖索居燕處, 能專爾心力, 端爾視聽, 將前日所受乎師長者而致爾知實爾踐, 日進上達而不已焉, 則吾與子雖朔南遠而歲年睽, 神與之往, 心與之會, 融融之樂, 若鍾鼓琴瑟之作於座矣. 使中立日在乎吾側, 隨羣逐隊, 作輟無常, 鴻鵠將至, 思授弓繳而射之, 則講說騰乎几案, 拜揖紛乎樽俎, 徒爲文具, 未足以爲樂矣. 如此者, 若加而爲十百, 則將聒聒乎吾耳, 擾擾乎吾心, 不勝其苦而走之也, 亦奚願有人乎吾側哉? 中立乎, 無求別人之在師長側, 自圖所以在師長側之以心而不以身, 從子先之, 而若是者衆, 則吾將日獲相長之樂於無形, 而不見其孤也. 是爲中立賜, 顧不大歟? 자사(子思)의 …… 사람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노나라 목공은 자사의 곁에 자신의 성의를 전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자사에 대하여 편안히 여기지 못하였고,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은 목공의 곁에 보좌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몸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다.〔昔者, 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 則不能安子思, 泄柳、申詳無人乎繆公之側, 則不能安其身.〕"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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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유고》 서문 《可石遺稿》序 맹자가 이미 당세의 군자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말하기를,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천고의 사람과 벗한다."128)라고 하였고, 양웅(揚雄)도 또한 현 시대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후대의 자운(子雲)을 기다렸으니129), 아, 고금 상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한 명의 사람을 얻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은 것130)이 진실로 이 때문이다.옛적을 추억하건대, 나와 공은 요행히 같은 세상에 태어났고, 학업도 또한 유학으로 같았기에 서로 다투어 따르고 쫓으면서 글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에 유람하며 완상하는 정취를 더하여 경전(經傳)의 대지(大旨)와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변별하고 분석하는 이치에 이르렀으니, 나는 공이 군자다운 사람임을 알아보고서 스스로 지기(知己)라 이르며 후대의 자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은 이미 구천(九泉)에 있고, 나도 또한 노쇠하였으니, 난세에 선인 군자(善人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친구와 지기가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얼마 뒤에 유고(遺孤) 진호(珍浩)가 부친이 평생토록 저술한 것들을 모아 나에게 주고 교정하게 하니, 내가 교정과 편찬을 마치고 진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훌륭하다! 옹의 문장이여. 대저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사람을 알기 어려움만 못하니,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오히려 능숙하게 통달했는지도 모르는데, 사람에 대해 또한 어찌 참으로 군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지난날 지기라 일컬으며 자운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자못 스스로를 속인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아, 옛적에 알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에 알게 되었고, 당시에 보지 못했던 것을 죽은 뒤에 보게 되었으니, 공으로 보면 후대의 자운 한 명을 얻게 되어 구천에서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또한 알지 못했던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여 종자기와 백아의 풍모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것인가? 훗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간결한 시문(詩文)을 보고서 의론이 바르고 확실함을 자세히 살핀다면 거의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孟子旣難得當世君子而曰: "尙友千古. " 楊雄亦未見現代知己, 以待後世之子雲. 嗚呼, 古今上下, 得一知己, 若是之難耶? 鍾子期死, 伯牙不復彈琴, 良以是也. 夫憶昔余與公, 幸生一世, 業亦同儒, 爭相追逐, 文墨杯酒之歡, 加以游賞之情, 以至辨柝經傳大旨、天人性命之理. 吾知公爲君子人, 而自謂知己, 不待後世之子雲也. 於焉轉眄之頃, 公已九原, 而余亦衰老矣. 不惟亂世善人君子, 難得易失, 而朋舊知己之凋落, 何如是也? 未幾, 遺孤珍浩, 輯厥考生平著作, 投余而較之. 余旣校旣編, 授珍浩而告之曰: "善哉! 若翁之文. 夫文之難知, 不若人之爲難知, 而所謂文者, 吾尙未知其能達焉, 人亦安知其眞爲君子耶? 向稱知己焉, 不待子雲者, 殆不近於自誣耶? 噫, 昔年之所未知也, 而知之於今日, 當時之所不見也, 而見之於死後. 不惟公之得一後世子雲, 可以無憾於九泉之下, 而在余亦可以少償不知之過, 而無愧於鍾、伯之風也耶? 後之覽是集者, 見其詩文之簡, 而委議論之正且確, 庶知余言之不誣也. " 옛 …… 벗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양웅(揚雄)도 …… 기다렸으니 양웅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운은 그의 자이다. 한유(韓愈, 768~824)의 글에 "양웅이 《주역》에 비겨서 스스로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나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자,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오면 반드시 이 글을 좋아할 것이다.〔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했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唐宋八大家文抄 卷4 與馮宿論文書》 종자기(鍾子期)가 …… 것 춘추 시대에 백아(伯牙)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우뚝 솟은 것이 태산 같도다.〔善哉! 峩峩兮若泰山.〕"라고 하고, 백아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물이 넘실넘실하는 것이 강하 같도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여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버려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진다.《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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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종락에게 답함 정해년(1947) 答金周伯 宗洛 ○丁亥 일전에 형님께서 오사익(吳士益)과 함께 보낸 안부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최근에 권모씨가 방문하여 나에게 간재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는 통문에 서명할 것을 청하기에 내가 후창과는 서로 상의했냐고 물으니, 권씨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하였소. 내가 지척 간에 있는데 어찌하여 미처 하지 못하였느냐고 말하였으나 마음속으로 몹시 이상하게 여겼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형님이 우리 문하에서 발생한 호남과 영남의 시비에 대하여 일찍이 대강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 곡절을 깊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선사께서 간행을 인가하는 교시를 하였고, 유서는 위조되었다고 하면서 스승의 원고를 고쳐서 어지럽게 만들고 끝내 간행을 인가받는 것이고,【권순명은 오씨와 강씨가 고소한 변고에 검찰국에 가서 그들의 증인이 되었다】호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스승의 무함을 분별하고 원고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유훈을 지켜서 원고를 베껴 받들어 보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음과 숯처럼 서로 의견이 상반되어서 양립할 수 없게 된 지가 20여년이나 되었습니다.몇 해 전에 영남으로부터 시비를 덮어두고 화해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의논하러 오지 않는 것은 바로 거절하면서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워서인데 그들은 "우선 미처 만나지 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게 거짓을 꾸며 속입니까? 저의 의리로는 저 무리들이 마음을 고쳐 죄를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함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다면 마땅히 "도의는 중대한 사안이고 사후의 문집 간행은 사소한 사안인데 저들이 이미 스승의 큰 것을 깨뜨렸으니 어찌 작은 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과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피차간의 시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承尊駕同吳士益枉存, 語弟曰"近權某見訪, 請余參名, 爲艮翁建祠通文, 余問已與後滄相議乎? 權曰姑未及, 余曰咫尺之地, 有何未及也? 然心甚恠之云云." 此盖兄於鄙門湖嶺是非 雖曾畧聞, 尚不深知其曲折故也. 盖嶺之所主謂先師有認教, 謂遺書偽造, 改亂大稿而終於認刊也.【權於吳姜告訴之變, 往檢局爲其證人】湖之所主, 辨師誣, 正稿亂, 守遺訓而鈔出奉藏也. 水炭相反, 不能兩立者, 爲二十餘年.年前自嶺有盖是非講和之請, 而竟不得矣. 今不來議者, 正恐拒不相見, 乃曰"姑未及." 何其糊塗而詐僞也? 在吾之義, 則彼輩革心服罪之前, 斷不與同事. 被人問則當曰"道義大者, 後事少者, 彼既破師大者, 則安可爲成其少者, 而合之乎云矣?" 於此益可見彼此之是非也, 未知兄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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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노동에게 보냄 경신년(1920) 與金聖九 魯東○庚申 저는 일찍이 그대가 순씨(筍氏)의 용1)이며 사씨(謝氏)의 보배2)라고 들었는데, 진실로 묘령(竗齡)의 영재로서 그 재주와 뛰어난 식견과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이 탁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채워 전진한다면 사씨의 보배나 순씨의 용도 비루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문(儒門)에서 석진(席珍)3)을 중시하고 문명의 세계에서 현룡(見龍)4)을 우러르니, 한 집안의 경사스러운 복은 굳이 축하할 필요도 없고, 축하할 만한 것은 세도(世道)에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아, 도가 천하에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여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고, 의론의 동이(同異)가 부류에 따라 달리하여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과불급의 차이 때문에 대도가 실행되지 못하고, 의론의 동이에 대해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밀한 의리가 항상 어둡습니다. 지금 그대는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재주로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는 마음을 보존하고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는 절반 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행하는 사람도 또한 학문을 좋아해야 하고,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또한 반드시 견해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질은 아름다운데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큰 도를 깨우치기 어려우니 이것이 근심거리이고, 마음은 공평한데 견해가 바르지 않으면 쇳덩이를 은이라 부르게 되니 이것이 두려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재주가 치우쳐 중도를 잃은 자, 스스로 옳다고 하여 이치에 어두운 자와 더불어 똑같이 도를 밝힐 수 없는 데에 귀결됩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견해를 바르게 하는 바탕이 되고 견해가 바른 것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하나의 이치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는 수준에 이르고, 견해가 바르게 되어 터럭만큼도 오차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밝힌 지극한 공이요, 우리 유자들의 능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생의 많은 일들 중에서도 큰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힘쓰기를 바라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기 바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학문을 논하자면 빙산의 일각처럼 초라하고 그림속의 떡처럼 실질이 없으며, 그 병폐를 말하자면 구멍이 백 개이고 상처가 천개입니다. 외람되게 교유하게 되었으니, 경계의 말을 기다릴 겨를도 없어야 합니다. 다만 그대에게 일시의 금란지교(金蘭之交)5)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한송백(歲寒松柏)6)을 의탁하기 때문에 참람됨과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작은 정성을 바쳐 애오라지 종신토록 학업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리고 꾸짖지 않기를 바랍니다. 僕曾聞足下爲荀氏之龍、謝氏之寶, 實未圖竗齡英材, 超識敦行, 若是其卓卓也.充此而進, 謝寶荀龍, 陋矣奚道? 儒門之席珍是重, 文明之見龍是仰, 一家慶福不須賀, 所可賀者世道幸.鳴呼, 道之難明於天下也久矣.知愚之過不及也, 而中行之難得, 同異之殊倫也, 而公心之罕覯.過不及之差也, 故大道不行; 同異之自是也, 故精義常晦.今足下以不偏不倚之材, 存無黨無偏之心, 其於明道也, 思過半矣.然中行矣, 又須好學; 公心矣, 又須正見.質美而不好學, 則大道難聞是患; 心公而見不正, 則喚鐵作銀可畏, 其與偏材之失中、自是之昧理者, 同歸於不能明道一也.蓋好學者, 所以爲正見地也; 見正者, 乃好學之驗也.好學而至於無一理之不究, 見正而至於無一毫之或差, 然後始可謂明道之極功、吾儒之能事.此是一生大小大事, 不容不加勉者, 故敢以仰勗, 惟足下圖之.至如僕者, 論其學則氷山畵餅, 語其病則百孔千瘡, 既蒙辱交, 宜俟箴砭之不暇, 而特於足下不欲以一時之金蘭相擬, 惟歲寒之松柏是託.故不覺僭妄, 先效微忱, 聊作終身業勸過規之地, 惟冀恕究不讁. 순씨의 용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을 가리킨다. 이 여덟 사람이 모두 재덕(才德)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2 〈순숙열전(荀淑列傳)〉이후 다른 사람의 재주 있는 자제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씨의 보배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의 자질들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훌륭한 자제가 많음을 뜻한다. 《진서(晉書)》 권79 〈사현전(謝玄傳)〉 석진(席珍) 좌석 위에 앉아 있는 보배[席上之珍]라는 뜻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와 학문이 있는 유자(儒者)를 뜻하는 말이다. 《예기(禮器)》 〈유행(儒行)〉에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갖추어 두고 나라의 초빙을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 以待聘〕" 하였다. 현룡(見龍) 아직 뜻을 얻지 못한 인재를 상징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효(九二爻)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아야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절단한다.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세한송백(歲寒松柏) 추운 계절을 꿋꿋이 견뎌내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추운 계절에도 늘 푸른 송백처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간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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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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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경신년(1920) 答金聖九 庚申 편지에서 말한 것을 받들어 살펴보니 지행이 해이하여 빼어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스스로 겸양하는 의례적인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여 보탬이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를 통하여 참된 마음을 바쳐서 서로 함께 하는 일단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뜻을 굳건히 세워서 해이해지지 않게 하고 행실을 독실이 정진시켜 느슨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찌 학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어찌할 수 없이 이치와 의리를 드러내는 것은 미약해지고 은미해졌으며 기욕의 폐단은 강성해지고 무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분발한다고 한들 긴 시간 동안에 안이하게 지낸 것을 이길 수 없고, 천리를 가는 배는 항상 대부분 도중에 그쳐서 잠시 뜻을 세웠다가도 곧바로 해이해지고 또 잠시 나갔다가도 곧바로 느슨해지는 사이에 유유한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이것은 천고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제가 옛날 약관이었을 때 뜻한 바와 행한 바는 비록 말할 것은 못되지만, 일찍이 옛사람에 뜻을 두고 배우려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매번 마음속으로 스스로 믿어 말하기를 "옛날에 특별히 통달한 사람은 비록 일찍 성취했다 하더라도 모두 장성한 이후에 세운 것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약관의 젊은 나이이니 또한 십여 년의 공부를 한다면 옛사람을 따라잡는 데 있어서 반절은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십 년이 흘러서, 가만히 내가 한 말과 행위를 옛사람이 30세 때 했던 성취와 비교해보니, 언덕이 태산과 화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며 "내가 가졌던 옛날의 지행은 진실로 대부분 해이해졌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옛 사람들이 덕을 완성한 것은 대부분 40세 때나 50세 때였으니, 내가 비록 몇 년 어그러졌으나 이제라도 힘써 정진한다면 오히려 미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선이 될 금단의 소식은 아직 없고 서릿발 같은 흰 머리가 먼저 침범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0세 전에는 아득하고 망망하였으니 한문공(한유)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묘한 도와 정미한 의리는 비록 기미를 살피고 마음에 깨닫고 싶으나 이미 젊은 날의 총명이 아니요, 중임과 대업은 비록 멀리 끝까지 궁구하고 싶었을지라도 장년의 역량이 없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지난날에 떠돌며 논 것을 슬퍼하고 초심에 부합하기 어려움을 개탄하여, 때때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레가 뒤집힌 이후에 큰 길을 살피는 것이니 팔이 부러지기 전에 좋은 의사를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 한량이 경험한 바를 거울과 경계로 삼아서, 세월이 많다는 것을 믿는다 말하지 말고, 지극한 도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여, 더욱 큰 뜻에 힘을 쓰고 큰일을 궁구하여, 가깝게는 부모의 유체를 보존하고, 멀리는 성현의 일맥을 잇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때를 잃었지만, 속으로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나 삼대 속의 쑥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얼굴은 비록 새로이 알았을지라도 마음만은 옛날부터 사귄 것 같습니다. 헛된 칭찬으로 사람에게 아첨하고 싶지는 않고, 거듭 참된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준다는 비유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해하여 잘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奉審書中所自道, 有志行懈弛, 無以聳拔等語, 知是出自撝謙例語.然既係下問而求益者, 則請得以因此, 而效實心相與之一端也.夫志之欲其堅立而不懈, 行之欲其篤進而不弛, 豈不是學者之所願? 終無奈理義之發弱而微, 氣欲之蔽強而繁, 一日之奮發, 不能勝長時之燕晏, 千里之輈, 常多半途之廢, 乍立乍解乍進乍弛之間, 悠悠歲月不待我矣, 此千古之通患也.僕之昔在弱冠也, 所志所行, 雖不足道, 亦未嘗不欲古之人是志是學, 每有自恃于中者曰: "往昔特逹之人, 雖云夙就, 皆壯而後有立焉.我尚弱而少矣, 且用十許年工夫, 其於追古人也, 思過半矣." 焂忽之間, 十霜已周, 靜把己之云爲, 視古人三十時所就, 則懸乎若丘垤之於泰華矣.乃自悔懊曰: "我向來志行, 固多解弛也." 然猶有所自慰者曰: "古人之成德, 多在於四十五十, 我雖蹉, 却幾年迨此, 勉進尚可及也." 孰知金丹無信霜白先侵? 四十前茫茫蒼蒼, 非獨韓文公然也.竗道精義, 雖欲研幾悟, 心而已, 非少日之聰明.重任大業, 雖欲遠致極究, 而奈無壯年之力量, 悼往日之游泛, 慨初心之難副, 有時乎泫然而泣下.覆轍之後, 坦途亦審, 折肱之前, 良醫何求? 幸足下以此漢之所經歷者爲鑑戒, 勿謂富年之可恃, 恒懼至道之難聞, 益勵大志, 勉究大事, 近以成父母之遺體, 遠以紹賢聖之一脈也.僕雖失時, 竊願爲驥尾之蠅, 麻中之蓬也.僕於足下, 面雖新知, 心惟舊交.既不欲以虛譽媚人, 而重有感於實心相與之喩, 不覺罄竭至此, 想亦見諒而樂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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