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선생사고진주본1)고변록 艮齋先生私稿晋州本考辨錄 권1진주본 28판(板) 좌(左) 5행(行) : 〈김혼천에게 답한 편지[答金混泉]〉화도수정본2) : 〈혼천 김 공께 답한 편지[答混泉金公]〉 【《전고(前稿)》3). 이하 같다.】○변(辨) : 혼천(混泉 김만수(金萬壽))은 계미(1823, 순조23)생으로 선사보다 열여덟 살이 많으므로 '공(公)'자를 붙여서 그를 공경한 것이다. 지금 '공' 자를 뺀 것은 선사의 뜻이 아니다.진주본 36판 좌 11행 : 지난번 유림의 소장에 이것을 인용한 것은 대개 장자(張子 장재(張載))4)를 끌어다가 자기편에 넣어 타인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向來儒疏引之, 蓋欲援張子而入於己, 以拒他人之非己. ] 【〈심참판에게 답한 편지[答沈參判]〉. 이하 같다.】진주본 37판 우 3행 : 지금 유림 소장(疏狀)의 말과 같은 경우[今如儒疏之言]화도수정본 : '유소(儒疏)'는 둘 다 '소유(疏儒)'로 되어있다.○변(辨) : 한 글자가 도치되면 글이 가리키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권235판 좌 5행 : 제가 충정을 다해 말씀드린 것은 여기에 그칠 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청컨대 각자가 들은 바를 존숭하고 각자가 아는 바를 행하는 것을 일삼기를 바랍니다. 더는 꼭 의견이 같아지기를 바랄 수 없으니, 주자가 한탄한 것과 같습니다. 【〈유치정(柳穉程)5)에게 보내려고 한 편지[擬與柳穉程]〉】화도수정본 : 각 단락이 한 칸 내려와 있다.○변(辨) : 단락을 달리하여 내려서 쓴 것은 특별히 간절한 뜻을 드러낸 것인데, 지금 이어서 한 단락으로 만든 것은 선사의 의도를 놓친 것이다.권317판 우 7행 왼쪽.화도수정본 : 〈김정사에게 물은 편지[問金正斯]〉.지난 편지에서 저에게 말씀하신 국상(國喪) 중에는 삼베옷과 무명 갓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섣달 상제(祥祭) 후에도 그대로 흰 갓과 흰 의대(衣帶)를 착용하려고 한 것은, 대개 망한 나라 유민(遺民)의 한을 빗댄 것입니다. 자손과 문하생 같은 경우는 꼭 그럴 필요가 없으니, 이 의리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서두익(徐斗益)이 전한 바를 들으니 위(韋) 공은 제가 상제(祥祭) 후에도 그대로 흰 갓과 흰 의대를 입겠다고 한 말을 좋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상 1개 조목이 있다. 【《후고(後稿)》6). 이하 같다.】○변(辨) : 선사께서 생전에 시휘(時諱 시대에 용납되지 않는 언행)에 크게 관련된 것을 골라 별집(別集)으로 만들었는데 그나마 관련이 적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러한 글들은 단지 시의를 논한 것이지 시휘에 관련된 것이 아닌데, 무슨 관련이 있다고 별집에 넣었는가? 이런 경우가 매우 많은데 결코 선사의 평소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의리(義理)와 관계된 글을 원집(原集)에 보이지 않게 하였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바이다.27판 우 11행 : 집에는 부형(父兄)이 있는데도 존중하지 않고, 세상에는 성현이 있는데도 존경하지 않으며, 하늘에는 상제(上帝)가 있는 데도 무람없이 굴고, 자신에게는 천성이 있는데도 폄훼합니다.[家有父兄而也不尊, 世有聖賢而也不尊, 天有上帝而也可褻, 身有天性而也可貶. ] 【〈박정단7)에게 답한 편지[答朴正端]〉】화도수정본 : 4개의 '야(也)'자가 없다.○변 : 자기 견해로 선사의 문장에 글자를 더하였으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권417판 우 6행 왼쪽.화도수정본 :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答盧仁吾]〉 1편이 있다.제가 죽은 뒤에 누가 그 도통을 전수(傳受)할 사람인지 여쭈셨습니다만 제가 스스로 소견이 없으니 그 밖에 또 무엇을 묻겠습니까? 정자(程子) 문하의 여러 사람에 대해 회옹(晦翁 주자) 이 또한 '그 스승을 저버리고 이단에 빠졌다.'8)라고 하였으니, 도를 전하기 어려운 것이 심합니다. 병암(炳菴)9)이 병이 없을 때, 저는 그 학문이 깊고 지식이 바르며, 지조가 견고하고 덕이 두터워 위로 전옹(全翁 임헌회(任憲晦))의 실마리를 이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머지 제군들 중에는 마땅히 기대하거나 바랄만한 사람이 없으니, 저는 선숙(禪宿)10)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변 : 이것은 선사께서 떠난 이를 애도하고 앞날을 걱정한 글인데 차마 없앨 수 있는가?20판 우 3행 : 본생가(本生家)11)의 가모(嫁母 아버지가 죽고 개가한 어머니)는 당연히 대공복(大功服 9개월 복)을 입어야 합니다. 대개 한편으로는 출계(出系 양자로 감)하고, 한편으로는 개가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이 다하기 전까지는 백립(白笠)12)을 착용하고 이후에는 묵립(墨笠)13)과 묵대(墨帶)14)를 써서 심상(心喪)15)을 마치면 될 듯합니다. 【〈유선일에게 답한 편지[答柳善一]〉】화도수정본 : 없다.○변 : 이것은 정론(定論)이 아니므로 친히 삭제하신 것이다. 김익용(金益容)이 〈김택술(金澤述)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본생가의 개가한 어머니에 대해 마땅히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은 《매산집(梅山集)》16)에 실려 있는데 선사께서 붙여둔 찌지로 살펴보면, 기년복이 합당한 듯합니다. 말씀하신 대공복 설은 진주본에는 실려 있으나 화도본에는 없습니다. 아마 대공복으로 낮춘 것이 미안하여 친히 삭제하신 게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이 말하기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아우의 첩자(妾子)를 취하여 양자로 삼아 적통을 이었다면, 이른바 '첩자(妾子)의 어머니'는 곧 아버지가 데려다 데리고 산 사람이 아닙니므로 마땅히 재가한 어머니는 자최(齊衰)18) 장기(杖朞)19)를 입어야 합니다. 양자로 삼았으면 마땅히 복제(服制)를 낮추어야 하므로 부장기(不杖朞)20)를 입어야겠지요. 부장기를 입는다면 본생가의 적모(嫡母)와 차이가 없으니 대공복을 입고 심상(心喪) 3년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21)라고 하였다.선사께서 말씀하시길 "적모와 차이가 없으니 구애받아서는 안 될 듯하다. 대개 서자는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적모(嫡母)와 첩모(妾母)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장기(杖朞)하니 두 어머니가 차이가 없는데 어찌 굳이 구애받겠는가? 그렇다면 매옹(梅翁 홍직필(洪直弼))이 대공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은 다만 적모와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적모가 없으면 낮추지 않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권619판 우 11행 : 지금처럼 …… 족하께서 의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는 자세한 사정[如今 …… 足下 守義力學之詳] 【〈최근술(崔近述)22)에게 답한 편지[答崔近述]〉】화도수정본 : 지금처럼 오로지 문사만 숭상하고 의관을 벗어던지는 세상에서 이런 지극한 논의를 들으니 진실로 우러러 감탄합니다. 이윽고 또 변순하(邊舜何)ㆍ전평중(田平中)으로부터 족하께서 의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시는 자세한 사정을 들었습니다.[如今專尙文辭, 擺脫衣冠之世, 得聞此至論, 固已敬歎. 旣而又從邊舜何、田平中, 聞足下守義力學之詳. ]○변 : '문(聞)'자를 삭제하면 '상(詳)'자가 마땅치 않다. 산삭(刪削)에 급급하여 선사의 글이 문리가 통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아주 괴이한 일이다.20판 우 1행 :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서 위도 검고 아래도 검어23) 도무지 자신을 드러낼 곳이 없다.[士生斯世 上黲下黷 靡所於自見] …… 【〈허암경(許巖卿 허업(許業))에게 답한 편지[答許巖卿]〉】화도수정본 : '자현(自見)'이 '왕(往)'자로 되어있다.권1041판 우 : 〈권영손에게 보낸 편지[與權永巽]〉 '언어수요(言語須要)∼' 조목. 【경신년(1920)】화도수정본 : 〈김현순에게 답한 편지[答金玄淳]〉에 있다. 【《전고(前稿)》. 을사년(1905)】권1112판 좌 : 〈박란서에게 보낸 편지[與朴蘭緖]〉 '사습과 민속[士習民俗]∼' 운운한 1개 조목.화도수정본 : 없다.○변 : 망령되이 한 편을 추가해서는 안 된다. 사사로운 안면에 구애되어 다시 변통(變通)을 행하는 것은 썩은 백골을 속이는 짓이며 선사께서 남긴 글에 무지한 것이다.권127판 좌 7행 : 도체(道體)가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지 못하면 뒤에는 곧 자립하지 못할 것입니다.[道體 被人不敬, 後便不立. ]' 【〈이희진에게 답한 편지[答李喜璡]〉】화도수정본 : '후(後)'자가 없다. 【《후고(後稿)》. 이하 같다.】권1328판 좌 12행 : 저 사람이 강하게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꾸짖을 가치도 없습니다. 괴이한 일이고 괴이한 일입니다.[彼之强拗, 固不足責也. 怪事怪事. ] 【〈박대현에게 답한 편지[答朴大鉉]〉】화도수정본 : '책(責)' 아래에 '야(也)'자가 없고, '우리 형문(亨文)24)처럼 탁 트이고 호방한 사람이 어찌하여 다시 여우처럼 의혹하여 깨우치지 못하십니까?[若吾亨文之疏通豪爽者, 何復狐惑而莫之醒也? ]' 라는 19자가 있다.변 : 이미 "참으로 꾸짖을 가치도 없습니다.[固不足責也. ]"라고 하고서 다시 어떻게 '괴이한 일[怪事]'이라는 말을 하겠는가? 이 사이에 반드시 '약오형문(若吾亨文)∼' 이하 19자가 있어야만 문리가 성립된다. 지금 형문의 괴이하게 여길 만한 일은 삭제하고 다만 '괴사(怪事)'라는 글자만 남겨둔 것은 무슨 의도인가? 참으로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다.37∼8판 : 그의 설(說)은 그래도 침잠하여 생각해볼 만하지만, 이런 중요한 부분에서 어긋난 경우, 어찌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는 태도를 용납하겠소? 대저 우리 낙중(洛中)의 선현이 조술(祖述)한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기품(氣稟)은 혹 다르지만, 성ㆍ리(性ㆍ理)는 하나이니, 기질을 맑게 다스려 본성을 회복한다.'는 설(說)은, 그 천명(天命)ㆍ인심(人心)ㆍ성학(聖學)ㆍ세도(世道)에 있어 어디 걸리거나 막히는 데가 있다고 사서집주(四書集註) 장구(章句)의 철판(鐵板) 정본(定本)을 버리고 이에 스스로 '태극이 음양 속에 있으면 곧 본연이 아니다. 천성이 기질 속에 있으면 곧 본연이 아니다.'는 설을 지어 스스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정전(正傳)'이라고 하며 천하를 바꿀 것을 생각하시오? 나는 슬며시 이러한 설을 세운 것이 성리학에 무슨 도움이 되며, 심술(心術)의 쓰임에 무슨 개명(開明)이 된다고 기력을 모조리 쏟고 예의와 겸손을 버려가며 스스로 호락(湖洛)을 뛰어넘고 사우(師友)를 깔보는 잘못을 저질러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괴이쩍소.고금 천하에 음양(陰陽)이 있지 않은 태극(太極), 기화(氣化)가 있지 않은 천명(天命), 형기(刑器)가 있지 않은 도(道)를 본 적이 있소? 지금 '천지(天地)의 성(性)'이라고 말하면 비록 백 명의 정제경(鄭濟卿)이라도 반드시 '기질을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성(性)'25)이라고 지칭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천지(天地)' 두 글자가 이미 천기(天氣)와 지질(地質)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또 '천명지성(天命之性)'을 말하면서 또한 일찍이 인(人)ㆍ물(物)의 형기에서 벗어나 말한 적이 없소.이것은 또 《중용》 첫 구절의 주석에 갖추어져 있소.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풀이하기를 "주자가 기로서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되었다고 하였으니,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기에 나아가면 이(理)는 그 속에 있다."26)라고 하였소. 이러니 이것이 어찌 이(理)가 기(氣)에 있다고 해서 본연(本然)을 얻지 못하겠소?《성리대전(性理大全)》 해석에서 풀이하기를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 한다."27)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은 인(人)ㆍ물(物)이 타고난 기를 품부 받아서 천명의 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오. 이는 《중용장구(中庸章句)》와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소주(小註)가 한 판에서 찍어낸 것처럼 같고,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모두 아는 것이오.그런데 유독 정제경(鄭濟卿)만 다른 눈을 갖고 다른 혀를 놀려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 남까지 잘못되게 하였다오.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이 뱃속에 잉태된 처음부터 진실로 이렇게 어긋난 이치를 품부 받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소?[獨鄭濟卿, 具得別眼, 掉得異舌, 旣以自誤又以誤人. 此豈其人胚胎之初, 眞有稟得恁乖之理而然耶? ]내가 경산(磬山) 강대집(姜大集)28)에게 말하기를 "기질로부터 말하면 비록 인ㆍ물의 품부 받은 성(性)이 같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실로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지금 정제경의 말과 같으오. 이윽고 그 오류를 이내 깨닫고 예전의 견해를 통렬히 버리고 그 뒤로는 감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소. 지금 그 사람이 비록 힘껏 옛 견해를 주장하지만, 또한 그가 잘못을 깨닫고서 바른 데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어찌 단정하겠소?만약 타인이 그가 급히 고치기를 바라 있는 힘껏 함께 변론하여 배척하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더 고집하게 하여 더더욱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 원컨대 이견(而見 오진영)이 다만 노주(老州 오희상(吳煕常))29)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스스로 믿고 친한 친구들과 마주하고서 대략 큰 원두(源頭)를 들어서 설명하여, 그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다시는 함께 설왕설래하여 성문(聖門)의 차분하고 순후한 기풍을 훼손하지 마시오. 【〈오진영30)에게 답한 편지[答吳震泳]〉.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소주(小註)에는 '독정제경(獨鄭濟卿)' 이하 '리이연야(理而然耶)'까지 39자31)가 삭제되었다.변 : 소주를 본문으로 만들고, 삭제한 것을 도로 남겨둔 것은 선사의 지극한 의도와 매우 어긋난다.권146판 우 3행 : 그 언행과 심술의 망령되고 어긋남[妄錯]은 털끝만큼이라도 입이나 붓끝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 심제(心弟)가 성사(性師)를 배우는 도리라오. 내가 이에 장차 이견(而見 오진영(吳震泳))이 견해가 있는지 없는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볼 것이니, 이견은 공경히 듣고 삼가 지킬지어다. 【내 성품이 평소 어리숙하여 그대 마음에 들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이 한 마디는 이견의 평생 스승이 되기에 무방할 것이다.】화도수정본 : 아래의 '이견(而見)' 아래에 또 '이견(而見)' 2자가 있다. 소주(小註) 끝에 '주제넘게 말하여 거듭 죄송합니다.[僭越之言 知罪知罪]' 8자가 있다.○변 : 재차 '이견'을 부르고 나서 '주제넘다', '죄송하다'고 하며, 간곡하고 엄중한 뜻을 다하였다. 지금 그것을 삭제하였으니, 어쩌면 그리 듣기 싫어한단 말인가.권1611판 : 〈정세영에게 답한 편지[答鄭世永]〉.만약 '인(人)ㆍ물(物)의 기(氣)가 비록 만 가지로 다르더라도 이(理)의 품부(稟賦)받은 것은 같다.'라고 한다면, 내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찌 단번에 '예'라고 대답하기를 아끼겠소? 만약 말하기를 "성인과 범인은 기가 이미 다르니 이(理)의 품부 또한 다르다. 【인ㆍ물(人物)과 성ㆍ범(聖凡)이 호문(互文)이다.】"라고 하면, 비록 그와 함께 종일토록 말하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것32)은 할 수 없으니, 다시는 말하지 않겠소. 우선 '동수이품(同受異稟)'의 설을 잠시 내려두고 서둘러 심술(心術)에 나아가 공사(公私)와 득실(得失)의 분변(分辨)을 정밀히 살펴주길 바라오.[如曰人物氣 雖萬別而理之稟受則同. 則愚於言下. 何惜一唯. 若曰聖凡氣旣不同則理之稟受亦異. 【人物聖凡互文.】 則雖與之言終日. 亦莫能不違如愚矣. 請不復也. 請且少置同受異稟之說. 急要就心術. 精察公私得失之辨焉也. ]화도수정본 : 〈정세영ㆍ박창현에게 답함[答鄭世永朴昌鉉]〉 '여왈(如曰)' 위에 '이공(二公)' 2자가 있고, '청(請)'과 '차(且)' 사이에 '이군(二君)' 2자가 있으며, '변(辨)'자 아래는 '언야(焉也)' 2자가 없다.15판 우 13행 왼쪽.화도수정본 : 〈정세영에게 답한 편지[答鄭世永]〉.훗날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눈을 감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소. 경(卿)과 이견(而見 오진영)이 기운을 낮추고서 이치를 따르고 논쟁을 풀고서 화해하면 내 눈이 감길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치전(致奠)33)을 해도 내 흠향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두 사람이 이기(理氣)에 대한 소견을 억지로 바꾸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심기가 화평하여 성정의 덕에 어그러지지 않는 것을 구하기를 바랄 뿐이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권1735판 9행 : 매일 날이 저물면 오늘 하루의 일과를 간략히 점검하여라.[每至夕陽. 簡此一日所爲. ]【〈최종문에게 답한 편지[答崔鍾文]〉】화도수정본 : '차(此)'가 '점(點)'으로 되어있다.변 : 이런 경우는 아마 착오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들 판본의 정오표(正誤表)에는 보이지 않으니 또한 이것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또 교정이 미진하다면 굳이 깊이 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결국 그만두면 화도수정본의 본 문장을 알 길이 없으므로 마침내 기록한다.권1939판 좌1행 : '호론제현(湖論諸賢)' 【〈김택술에게 답한 편지[答金澤述]〉】화도수정본 : '호론제선생(湖論諸先生)'으로 되어있다. 【《전고(前稿)》】권206판 우 11행 :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은 음양(陰陽)과 심령(心靈)을 형이상으로 여겼으니 기욕(氣慾)의 폐해를 살피지 못한 것이다.[象山以陰陽心靈. 爲形而上. 爲不察氣慾之害. ] 【〈전기진에게 답한 편지[答田璣鎭]〉】화도수정본 : 아래 '위(爲)'자는 '이(而)'로 되어있다. 【《후고(後稿)》】17판 좌 : 〈천하운에게 보낸 편지[與千河運]〉 【을묘(1915)】29판 좌 : 〈노헌구에게 답한 편지[答盧憲九]〉 【병진(1916)】화도수정본 : 모두 없다.권231판 우 12행 : 선비로서 한가로이 세월만 보내는 자가 유독 궁색하고 추한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후배에게 삼가 권하노니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시게.[士子而悠泛者. 獨無竆醜之恥乎. 奉勸後輩. 宜加惕念] 【〈유영선에게 답한 편지[答柳永善]〉.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후배(後輩)'가 '희경(禧卿 유영선(柳永善))'으로 되어있다. 【《전고(前稿)》】7판 좌 10행 : '목상(穆上)'화도수정본 : '이모(李某)'로 되어있다. 【《후고》. 이하 같다.】26판 좌 7행 : 다만 평소 소견을 무릎 꿇고 고명(高明)께 올립니다.[只對平昔所見者, 跪進於明者之前. ]∼ 【〈김효술에게 답한 편지[答金孝述]〉】화도수정본 : '대(對)'가 '장(將)'으로 되어있다.29판 : 〈구연직에게 답한 편지[答具然直]〉화도수정본 : 〈아무개에게 답한 편지[答某]〉변 : 문인 중 변절자는 《관선록(觀善錄)》34)과 《사고(私稿)》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선사께서 평소 법문(法門 문하)을 엄정히 하셨는데 지금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에 멋대로 고쳤으니, 이것은 스승을 속이는 것이며, 아주 무지한 것이다.33판 〈윤하명에게 답한 편지[答尹夏明]〉 【기미년(1919)】화도수정본 : 없다.권242판 우 10행 왼쪽.화도수정본 : 〈최원에게 답한 편지[答崔愿]〉모문(某門)은 우리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선생의 유파가 아닙니까. 설사 그들이 혹시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도리로는 다만 애석히 여기는 마음과 화평한 말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본래 마음으로 이치를 따르는 학문이니, 어찌하여 서로 더불어 면려하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그와 서로 배격하여 유기일(柳基一)35)ㆍ홍재구(洪在龜)36) 등 여러 사람이 유 지평(柳持平 유중교)37)을 원수로 본38)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마십시오. 저는 스스로 저의 이 마음은 매옹을 대하고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39)을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깁니다.이상 1개 조목이 있고, 한 칸을 내렸다.15판 좌 12행 : 요즘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조포저(趙浦渚 조익(趙翼)40))가 선조에게 고한 말을 읽어보았습니다.[比讀宋子大全趙浦渚告宣廟之言. ] 【〈박동신에게 답한 편지[答朴東信]〉】화도수정본 : 요즘 《송자대전(宋子大全)》을 읽고 조포저가 선조에게 고한 말을 얻었습니다. 【조포저의 말은 〈신도비문(神道碑文)〉에 보인다.】26판 좌 : 〈김식원에게 답한 편지[答金植沅]〉 【정사년(1917)】30판 좌 : 〈양정호에게 답한 편지[答梁正鎬]〉화도수정본 : 모두 없다.권259판 왼쪽 : 〈김종현에게 답한 편지[答金鍾玄]〉 "사군자(士君子)∼" , "인혹가기(人或可欺)∼", "왈의즉(曰義則)∼" 3개 조목.화도수정본 : 없다.권263판 우 11행∼좌 1행 : 김평묵(金平默)은 유중교(柳重敎)의 개안(改案)41)에 대해서 결코 함부로 객기(客氣)를 부려 그 깊이 허여(許與)한 고제(高弟)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중교가 김평묵에게 답장한 편지에 "스승을 죄에 빠뜨렸다고 배척하여 땅을 치고 통곡한다는 말을 하였으며, 아버지를 쏘았던 일로42) 지목하여 대의멸친(大義滅親)43)하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44)라고 하였다.45)】 유중교는 김평묵의 비난에 대해 결코 구차하게 승낙하며 억지로 그 불안정한 정안(正案)46)을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47) 【유중교는 김평묵의 말을 마지못해 따라 정안(正案)을 세웠다가 김평묵이 죽고 나서 환수하였다.】48) 【〈관서의 제생에게 보낸 편지[與關西諸生]49)〉】화도수정본 : 김평묵은 유중교의 개안(改案)에 대해 결코 객기에 휘둘려 그가 깊이 허여한 고제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중교가 김평묵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스승을 죄에 빠뜨렸다고 배척하여 땅을 치고 통곡한다는 말을 하였으며, 아버지를 쏘았던 일로 지목하여 대의멸친(大義滅親)하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중교는 김평묵의 비난에 대해 결코 사사로운 뜻에 이끌려 도로 그 불안정한 구설(舊說)에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중교가 화서의 상(像)에 고한 글50)에서 스스로 이전에 조정하고 보완했던 것을 오류로 여기고 그 정안(正案)을 환수하였다. ○《전고(前稿)》】21판 우 13행 : '즉기(卽氣)'는 …… 【누락】 이(理)를 해칠 뿐만 아니라, 결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본뜻이 아닙니다.[卽氣 【缺】 非惟害理 亦絶非農巖老洲之本旨也. ] 【〈김용승에게 답한 편지[答金容承]〉.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즉기(卽氣)'와 '비유(非惟)' 사이에 "'즉호기(卽乎氣 기에 나아가다)'로 본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즉시기(卽是氣 곧 기이다)'로 본다면 …… [作卽乎氣看. (則)51)無碍. 若作卽是氣看. (則)]"이라는 15자가 있다. 【《후고》. 이하 같다.】○변 : 억지로 삭제하여 글을 망쳐놓고, 어찌하여 누락되었다고 하는가?22판 좌 4행 : '유위(有爲)' 두 글자에 대해 또한 "이(理)는 자연히 주재가 되니 신(神)이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이 한 구절은 노주(老洲 오희상)의 말이다.】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有爲二字, 亦曰自然爲主宰, 非如神之有情意造作. 【此一句. 老洲語. 】 則可無疑矣. ]'.의 아래.화도수정본 : '즉기(卽氣)'의 '즉(卽)'을 '취(就)'자로 보면 글이 명료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卽氣之卽, 如作就字看, 尤覺灑然矣. ] "라는 14자가 있다.변 : '취(就)'자로 보는 것과 상단의 '즉호기(卽乎氣 기에 나아가다)'로 보는 것을 서로 조응(照應)하면 한 편의 주안점이 된다. 그리고 선사께서 명료하게 말씀하신 것을 어찌 명료하지 않다고 삭제하는가.권2743판 우 3행 : 소주(小註) '청안현(淸安縣) 문방리(文芳里) 최동준가(崔東晙家)' 10자. 【〈성산서사의 제군에게 보임[惺山書社示諸君]〉】화도수정본 : 없다. 【《전고(前稿)》. 이하 같다.】변 : 관련이 있는 본래 주석은 또 대부분 삭제하고, 있으나 없으나 무관한 자신의 주석은 도리어 함부로 넣었으니 이 무슨 심보란 말인가?권281판 좌 8행 : 제현들은 모름지기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자기에게 있는 도를 지키며 남을 애달피 여기는 마음을 베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누락】[切望諸賢須存得畏天之心, 守得在己之道, 施得悲人之情. 此不是小事. 【缺】] 【○〈제군(諸君)에게 보임[示諸君]〉】화도수정본 : '소사(小事) '아래 '결(缺)' 자가 없다.○변 : 말이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글이 없는 것인데 누락[缺]되었다 하니 괴이하다.권292판 우 : 다시 살펴보건대, 퇴계(退溪) 옹이 고봉(高峯 기대승)에게 답한 편지52)에는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른다.[理發而氣隨之]'라고 말하고 나서, 하단에 또 '이(理)가 타니 기(氣)가 간다[理乘氣行]'라는 말이 있으며,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한다.[人非馬不出入]'라는 비유가 있습니다.김이정(金而精)53)의 편지에는 먼저 '동(動)하는 것은 심(心)이고 동하게 하는 소이는 성(性)이다.'54)라고 말하고 나서, 하단에 다시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른다.[理發而氣隨]'라는 말이 있습니다.이굉중(李宏仲)55)의 편지56)에도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다.[理發氣隨]', '성(性)과 이(理)는 형태가 없다.[性理無形影]', '심(心)과 정(情)이 두루 실어 발용(發用)한다.[心情該載發用]'57)라는 말을 앞뒤로 아울러 썼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른다.[理發而氣隨之]'는 것은 선생의 생각엔 이(理)를 따라서 발한 것이 자연스러운 동(動)이고 또한 그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만약 '이(理)가 스스로 발하여 기(氣)가 뒤를 따른다.[理自發氣隨]'고 보면, 이른바 '출입하지 못한다.[不出入]'나 '형태나 그림자가 없다.[無形影]' 등의 말과 저절로 서로 모순되어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읽는 분께서는 청컨대 깨우치는 말 한마디 내려주십시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퇴계 옹이 임종하기 몇 달 전에 고봉에게 답한 편지는 이(理)의 묘용(妙用)을 '살아서 드러나 행하는 것[活而顯行]'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야대(夜對)에서 말한 것이 미정된 논의가 아니라는 걸 또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야대(夜對)에서 말한 것은 사단(四端)에 나아가서 이 마음[心]이 이(理)를 따라서 발한 것을 가리키고, 고봉과 왕복한 글은 도리어 물격처(物格處)에 나아가 이 이(理)가 심(心)을 따라 이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피차 뚜렷하게 빈주(賓主)의 구분이 있어서 서로의 잣대를 가지고 의문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고봉의 회신 편지에 '이 이(理)는 자재(自在)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퇴계는 이 설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더는 논의가 없었으니, 안타깝고 안타깝습니다. 우옹(尤翁 송시열) 또한 주자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누차 말하였거늘 후학이 이 점에 대해 어찌 하나만 고집하여 그 나머지를 폐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회ㆍ퇴ㆍ율삼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화도수정본 : 그렇다면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른다.[理發而氣隨之]'를 그대로 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 이(理)를 따라서 발한 것이 자연(自然)의 동(動)이며 그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그대로 두고 고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퇴계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임금께 올린 후 여러 번 고친 것을 편치 않게 여긴 점이 문집에 자주 보입니다. 지금 옛날 그대로 둔 것은 아마 이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고 기필코 이(理)가 이(理)를 따라서 발하여 【이발(理發)】 타는 바의 기틀[所乘之機]이 따라서 동(動)한다는 【이기수(而氣隨)】 의미로 간주하여 정한다면 아마 결코 퇴계의 본지는 아닐 겁니다. 이에 고명에게 답합니다. 【《후고(後稿)》】○변 : 이 제목을 '질의'58)라고 명명한 것은 결단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코 퇴계의 본지가 아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갱안(更按)∼'이하의 설은 의심이 담겨있는 미정된 말이니 어디에 제목을 명명한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선사께서 친히 서두에 쓰기를 "경신년(1920)에 다시 보아도 의심이 없고, 임술년(1922) 정월 보름날 세 번째 보아도 의심이 없으니 삭제하지 말아야 옳다."라고 하시며 후인이 고치고 삭제하여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는 폐단을 엄격히 막은 까닭이다. 저쪽에서는 '갱안(更按)∼' 이하를 선사가 남진영(南軫永)59)의 말을 써서 최병심(崔秉心)에게 대신 초안을 잡으라고 명한 것이라 여기고, 남진영이 보내고 청도(淸道)60)에서 첨입(添入)하였다. 대개 잠시 초안을 잡은 것을 폐기하여 원고에 넣지 않은 것인데, 남진영이 보내고 오진영이 첨입하였다. 여러 해 동안 정밀히 검토해보시고 의심이 없으니 삭제하지 말라고 재삼 간곡하게 하신 말씀을 깨뜨리고 무너뜨렸다. 아, 무엄하도다!권306판 우 4행 : '용포(用布)【누락】' 【○〈최복설략(衰服說略)〉】화도수정본 : '용포(用布)' 아래에 누락된 글자는 없고, '사방 8치로, 접으면 4치가 된다. [方八寸, 摺爲四寸. ]'라는 7자가 있다. 【《전고(前稿)》. 이하 같다.】○변 :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숙근에게 답한 편지[答周叔謹]〉에 이르기를 "베를 폭 4치, 길이 8치를 쓰는 것은 그 양쪽 끝을 접으면 곧 사방 4치가 되니, 옷깃 옆에 붙인다."라고 하였다. '베는 사방 8치를 사용하고 접으면 4치가 된다.'는 문장은 없다. 그러니 지금 이 '방팔촌(方八寸)'의 '방(方)'은 '장(長)'자의 오기이다.대개 선사께서 인용한 〈답주숙근서(答周叔謹書)〉는 '벽령(辟領)61)은 옷깃 옆에 붙인다.[綴於領旁]'는 것을 주로 증명하였다. 《가례(家禮)》와 대강 같지만, 그 앞뒤로 각각 2치, 4치의 장단ㆍ득실은 상세히 논하지 않다가 이희진(李喜璡)의 편지62)에서 비로소 이를 언급하였다. 두주(頭註)에 "'방팔촌(方八寸)'의 '방(方)'은 《주자대전》을 고찰해보면 마땅히 '장(長)'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일부러 원문 7자를 삭제하고서 누락되었다고 하는가?39판 좌 7행 : 이것은 인물을 평하는 사람63)이 마땅히 조심해야 할 바이다. 또 매산(梅山 홍직필)의 자인소(自引疏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밝힌 소)에 이르기를 "신의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아뢰는 의견)는 지극히 망령되고 경솔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삼가 수실(首實)64)의 의리에 부쳐 해당 형률을 적용하시길 외람되이 청합니다."65)라고 하였다. 이것은 명백하게 바로잡아 고친 것인데도 지금 연재(淵齋 송병선)가 '앞뒤가 서로 끊어진다[前後相截]', '반쯤 올라가다 아래로 떨어진다[半上落下]', '양쪽으로 잘린 의리[兩截義理]' 등의 말로 비방하니 무엇 때문인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이 퇴계가 복제(服制)를 개정한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온 나라가 도움을 입었으니, 그 이로움이 크도다!"66)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우암이 둔촌(屯村)67)에게 답한 편지68)에 있다. 어찌하여 지금의 군자는 옛날의 군자와 다른가. 【〈연재의 「수문잡지(隨聞雜識)」를 보고 지은 글[看淵齋雜識]〉】화도수정본 : 이것은 인물평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조심해야 할 바이다. ○《숙재집(肅齋集)》69)의 〈홍오곡(洪鰲谷)70)에게 보낸 편지[여홍오곡서(與洪鰲谷書)]〉를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선생의 헌의(獻議)와 상소문 초안을 공경히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애초 임금을 감히 친척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매번 사계(沙溪 김장생)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설을 의심 없이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곧 이 일로 인해 축식(祝式)을 이정(釐正 글을 정리하여 바로잡음)하면, 이 이후 시기하는 사람의 떠들썩한 비방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필코 그 정도(正道)를 더럽히려는 간계를 부리려는 자를 단번에 쓸어버려 후환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권3212∼3판 : 〈전씨보도(田氏譜圖)〉 소주(小註)의 관계(官階 벼슬의 등급).화도수정본 : 관계(官階)가 없다.23판 우 12행 : '구창주(仇滄柱)' 조목 위 【〈쇄묵(瑣墨)〉.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윤철규(尹喆圭)가 임금의 칙령이라고 거짓으로 전하여 빈사(賓師)를 꾀어 쫓아내었다.71) 조정에서 비록 자세히 조사하지 않을지라도 선비들은 도리어 소리 높여 규탄해야 한다. 주자가 지은 〈진 정헌공(陳正獻公) 【준경(俊卿)】 행장〉72)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공이 주청하여 말하기를 "왕기(王琪)가 망령되이 임금의 뜻을 전하여 변방의 신하에게 격문을 보내 성벽을 증수(增修)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국가의 중차대한 이해와 조정의 중대한 기강에 관계되고 폐하의 중대한 호령(號令)입니다. 지금 왕기가 범한 이와 같은 일은 삼가 율문(律文)을 살펴보건대 '거짓으로 칙서를 만드는 자는 교살(絞殺 목매달아 죽임)한다.'73)고 되어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속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왕기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파직하라는 유지가 있었다.지금 윤철규의 죄는 왕기와 비교하여 가볍지 않으며 무거운 것이 분명하다. 마땅히 이 진장(陳章 임금께 올린 글)을 끌어오면, 비록 교살(絞殺)하고 삭직(削職)할 수 없을지라도 족히 세계에 대의(大義)를 밝히고 적의 무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유림이 조금 진작될 것인데, 아직도 하지 않으니 안타깝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동판(同板) 좌12행 : '학자수선(學者須先)' 조목 위.화도수정본 : 듣자니 서당에 군수를 초치(招致)하여 강좌(講座)에 오르게 하고 제생들에게 나와 강좌에 나오게 했다고 한다. 옛날 송(宋)나라 고항(高閌)74)의 자(字)는 억숭(抑崇)인데 귀산(龜山)75)과 화정(和靖)76)을 종유(從遊)하였다. 고종(高宗)이 태학(太學)에 행차하였는데, 진희(秦熺)77)가 집경(執經)하고, 고(高) 공은 당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주역》 〈태괘(泰卦)〉를 강론하였다. 그러자 호오봉(胡五峯)78)이 편지로 꾸짖어 말하기를 "합하(閤下)는 국자감 수장이 되어 능히 대론(大論)을 세우고 천인(天人)의 이치를 밝히지 않고, 이에 도리어 권신에게 아부하고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어 태평(太平)한 시대의 전례(典例)를 거행하기를 구하여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만하니 평생의 지행(志行)이 모두 사라질 것이오."라고 하였다. 지금 곤재(髡宰 머리 깎은 군수)에게 경전을 잡고 가숙(家塾)에서 강(講)을 듣게 하였으니 오봉이 다시 살아난다면 무어라고 하겠는가.전조망(全祖望)이 〈장춘서원기(長春書院記)〉79)를 지어 이르기를 "진(秦)씨가 나라를 맡아 사릉(思陵)80)이 태학에 행차할 때, 헌민(憲敏)이 【고항(高閌)의 시호이다.】 《주역》 〈태괘〉를 강한 것을 호오봉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진재(秦梓)81)가 헌민에게 혼인을 요구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헌민이 결국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서야 오봉은 비로소 의심이 풀렸다. 대개 명절(名節)이 잘 닦여진 대유(大儒)는 한 걸음도 구차하지 않다. 헌민이 현량(賢良)한 친구에게 부끄러움이 없었기에 곧 그는 스승의 문하에서 통서(統緖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선비들에게 때때로 〈장춘서원기〉를 외우게 하여 스스로 수립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고공은 구산(龜山 양시(楊時)) 문하의 고제(高弟)이다. 그의 《춘추집주(春秋集註》는 호문정(胡文定)82)보다 훨씬 낫고, 그의 《후종례(厚終禮)》는 주자가 많이 채용하였다. 이 또한 사산(謝山 전조망)의 말이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24판 우7행 : '건곤십변(乾坤十變)' 조목 위.화도수정본 : 1) 시배(時輩)들이 인력거꾼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명하니 모두 반대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머리를 깎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다시 명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당신들 영업은 일본 사람이 대신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인력거꾼들이 글을 지어 통지하여 말하길 "차라리 영업을 못 할지언정 머리는 절대로 깎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신년(1908) 8월 11일 신문에 실려 있다.83) 1908년 09월 08일 자 《대한매일신보》의 한글판에 〈인력거군의 삭발반대〉라는 제목으로 "근일에 각 경찰서에서 인력거군을 삭발하라고 신칙하였다는 말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일전에 중부 묘동에 사는 인력거군 신태윤, 김경춘, 조덕규 등이 발론(發論)하기를 차라리 영업을 폐지할지언정 부모의 유발은 깎지 못하겠다고 극히 반대함으로 중부 경찰서에서 잡아다가 속히 삭발하라고 신칙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이 말은 위로 천성(天聖)84)에 합치되니, 기특하구나.】아, 저 수레 위에 높이 앉아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은 아무개 대신(大臣), 아무개 대신은 부끄러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관찰사, 군수, 고을 수령, 관리가 성명 아래에다 삭발 여부를 기재한 것을 보면 삭발하지 않았다고 쓴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저들이 평소 인력거꾼 보기를 얼마나 천대하고 멸시하였는데 지금 곧 이와 같으니, 어찌 부끄러워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우리 학자들은 마땅히 이를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맹세코 인력거꾼의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2) 사산 전씨(謝山全氏)85)가 송나라 유학자 왕후재(王厚齋)의 상기(像記)86)를 지었는데, 거기에 명나라 유학자가 논한 '후재(厚齋)가 원나라에 들어가 산장(山長 서원의 장)이 되었다.'라는 한 구절로 변론을 세워 이르기를 "이 일은 사전(史傳), 가전(家傳), 지승(志乘 지리서)에 모두 없으니 그 출처를 모르겠다. 그러나 명령에 응하였다 해도 산장은 임명하는 관직이 아니니 굽힌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까지이다.】내가 생각건대 말세에는 이런 터무니없는 무고가 많다. 예를 들어 목은 이색이 본조(조선의 조정)에 들어갔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절개를 지키지 못한 무리가 현인의 명예를 더럽혀 자기의 치욕을 면하기를 바란 것이다. 몇 년 전 신문에 최(崔) 공이 머리를 깎았다고 무함(誣陷)하여 싣고서 개화된 신식 모자를 지어 올리자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 【정미년(1907) 6월 25일 자 신문】지난해 신문에 또 〈남쪽 유학자, 개명(開明)으로 향하다[南儒向明]〉87), 〈무엇을 깎았다고 어디로 피하였나[削何避何]〉88) 둘을 실어 암암리에 나를 지목하였다. 이것은 모두 변절한 자들이 허위로 떠드는 것인데도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또한 기쁘게 듣고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들 무리는 선비의 무리를 원수처럼 보면서도 오히려 의지하려고 하니 참으로 가증스럽고 또한 가소롭다.이상 2개 조목이 있다.25판 우10행 : '성인지심(聖人之心)' 조목 위.화도수정본 : 1) 윤색(尹穡)89)이 처음 발탁되어 기용되었을 적에 "다만 오랑캐와 평화롭게 지내면 2∼3개월 만에 기강이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공실지(龔實之)90)가 이르기를 "틀림없이 그 사람이 귀가 먹었구나. 감히 이런 말을 하다니."라고 하였다.91) 몇 해 전 아무개 인사가 말하기를 "일본 사람은 우리에게 진심으로 호의적이니, 우리가 능히 서로 믿는다면 반드시 그 힘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나는 말한다. 저들이 우리의 병영과 진영을 철거하고 병기를 모조리 거두어 갔으며, 일체 도움이 되는 일도 아울러 없애는 데까지 이르렀는데도 아직도 그들에게 호의가 있다고 믿으니 이 사람은 참으로 눈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 《주자어류》에 기록된 윤색의 말을 보면 귀머거리와 장님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호담암(胡澹菴)92)이 《춘추해(春秋解)》를 지은 다음, 정억년(鄭億年)에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고 범직각(范直閣)93) 【여규(如圭)】에게 편지를 보내 알렸다. 범(范)공이 답하기를 "정억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십니까? 유예(劉豫)94)의 좌상(左相)이 아닙니까? 빼버리십시오. 호(胡) 공의 식견이 이 정도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라고 하였다.95)3)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범촉공(范蜀公)96)이 〈온공묘지(溫公墓誌)〉를 지을 적에 소동파가 지은 행장을 전용(全用)하였는데, 명(銘)에는 당시 간사한 무리의 일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소동파가 고치라고 명하자, 촉공이 소동파에게 직접 짓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촉공의 이름이 빠졌고 그 후 도리어 무사하였다. 만약 범촉공이 지었다면 아마 소인들에게 파헤쳐지는 것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조 인물 130권 9판 청국본(淸國本)97)에 보인다.】주자가 위원리(魏元履)의 묘지(墓誌)98)를 지었는데 증적(曾覿)99)의 권세가 한창 성하였기 때문에 위원리가 증적을 소환하는 일에 대해 상소하여 논한 일100)을 싣지 않고 말하기를 "무덤에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남헌(南軒)101)이 묘표를 지은 것 또한 이런 의도와 비슷하다. 나중에 주자는 묘표에다 발문102)을 써서 비로소 다 드러내었다.○내가 전옹(全翁 임헌회) 묘문(墓文)에 기록하기를 "예수의 사설에 대한 폐해는 반드시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난 뒤에야 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만(潤萬 임헌회의 아들 임감재(任坎宰))은 사악한 무리가 온 나라에 두루 가득하고 그 기세 또한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을 걱정하고 그 비석을 헐어버릴까 염려되어 삭제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심히 불쾌하다. 지금 주자가 논한 범(范) 공의 저작과 주자가 지은 위(魏) 공의 묘지(墓誌)103)를 살펴보면 또한 어쩌면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 융희 2년) 11월 5일, 나는 왕등(暀嶝)104)에 있다. 오늘은 마침 선사의 기일이다. 돌아가신 선사를 그리는 마음105)을 주체할 길이 없다.이상 3개 조목이 있다.권336판 우 13행 왼쪽. 【〈분언(㤓言)〉.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오늘날 서양의 각 나라 중 영국이 가장 부강하다고 이름이 났다. 그러나 천주교도가 결당(結黨)하고 반란을 도모하여, 의회의 전당 아래에 구멍을 파고 화약을 숨겨 왕(제임스 1세)이 오면 폭파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06) 찰스의 둘째 동생(제임스 2세)이 직위를 이었는데 평소 천주교에 익숙하여 억지로 백성을 따르게 하였다. 백성은 예수교에 익숙하여 오래도록 변치 않으려 하였다. 바다 건너편 네덜란드 총독(윌리엄 3세)을 불러 국왕으로 삼았다.107) 또 국민이 예수교를 신봉하였으나 메리는 【여성스러운 자태가 세상에 다시없이 뛰어났다.】 여전히 천주교를 고집하였는데 남편을 죽인 사특한 행실이 있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이 재물을 따로 하여 굶주림과 추위에도 서로 구제하지 않았고, 빚을 져도 서로 갚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길에 지나다니는 남처럼 대하였다. 삼강이 무너진 것이 이와 같은데 그 외에 또 무엇을 논하겠는가? 진실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이익[利]'한 글자에서 나온 것이다. 심하구나, 이익의 폐해여! 어찌하여 집정자는 깨닫지 못하는가?이상 1개 조목이 있다.14판 좌 13행 왼쪽.화도수정본 : 국가의 환란이 극에 달하고 위망(危亡)이 경각에 달려있다. 가령 임금이 '구하여 밝음을 향해 간다.[求而往明]'108)는 의리를 알고서 지극한 정성으로 현인을 구하여, 극진히 공경하여 맞이하고 진실로 믿어 임용한다면, 현자(賢者)는 그 출처가 마땅히 어떠해야겠는가? 나가서 세상에 쓰인다면 각 나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겠는가? 그들과 함께 같은 조정에서 있는 것은 화(華)ㆍ이(夷)가 뒤섞여 살 수 없는 의리며, 묘(苗 벼)ㆍ유(莠 피)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이치이다. 만약 배척하여 몰아내고자 해도 저들의 세력은 성대하고 우리 힘은 부족한데 어찌 능히 정직한 도로서 대놓고 쫓아낼 수 있겠는가? 만약 현자가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 《주역》 둔(遯) 괘의 '때와 더불어 행하다[與時行]'109)와 비(否) 괘의 '뜻이 임금에게 있다.[志在君]'110), 건(蹇)괘의 '국가의 어려움에 힘을 다하다.[蹇蹇]111)' 등등의 말은 진실로 이미 맞지 않을 것이다. 또 성인이 도가 없다고 해서 천하를 버리지 않는 마음112)과는 같지 않으니, 어떤지 모르겠다. 또 음(陰)이 성하여 양(陽)에 대항하면 군자 또한 행할 수 없을 것이로다! 아마 성인이 천하를 보면 할 수 없는 때가 없으니 또한 반드시 대처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묘용(妙用)은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내 견해를 말하자면, 오늘날 마땅히 수용할 것은 오직 둔(屯) 괘의 '조금 바르게 함의 길하다[小貞之吉」'113)이다. 이른바 '정(貞)'이라는 것은 뜻을 세워 강학하고, 현인을 등용하고 사특한 사람을 물리치며, 의를 숭상하고 이익을 낮게 보며, 상벌(賞罰)을 공정하고 엄중히 하며, 쓰임새를 조절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종류가 이것이다. 이 몇 가지를 진실로 능히 깊이 밝혀 실행할 수 있다면 저 각국의 사람들이 반드시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여 깔보지 못할 것이다. 각국이 이미 세운 조약은 하루아침에 모조리 바꾸려고 한다면 다만 재앙만 불러오고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지금 우선 국가 경영과 민생에 심히 불편한 몇몇 조항을 골라 지성으로 그 이익과 손해를 개진하여 점차 변통할 길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이 만약 자기 편한 대로만 하고 우리나라를 돕지 않는다면 곧 교린(交隣)의 도리가 아니다. 또한, 반드시 외교적 응대를 잘해서 그 시비를 판가름하여 저들에게 잘못을 돌리면 저들이 비록 강하고 사나울지라도 끝내 잘못으로 인하여 세게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저들의 기이한 기술과 괴이한 기교 따위는 배운들 어디에 쓰겠느냐? 그런데도 이런 것을 저들에게 구하여, 저들이 이것으로 우리에게 교만을 떨게 하겠는가? 이제부터 단칼에 두 동강을 내어 다시는 뜻을 두지 않고 저들에게 바랄 것이 없다는 뜻을 보인다면, 우리가 비록 작고 약하지만, 또한 정도를 지켜 스스로 강하게 될 것이다. 정자(程子)가 어려움[蹇]에 대처하는 도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무릇 어려움에 대처하는 것은 반드시 곧고 바름을 지키는 데 달려있다. 설사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바른 덕을 잃지 않을 것이니, 이 때문에 길하게 된다. 만약 어려움을 만나 굳건히 지키지 못하여 사특함과 참람(僭濫)함에 빠진다면, 비록 구차히 어려움을 면하더라도 또한 악덕(惡德)이니, 의리와 천명을 아는 자는 하지 않는다."114)라고 하였다. 오늘날 선왕의 옛 법도를 행하지 않고 도리어 오랑캐의 새로운 법칙을 본받으며, 우리 백성은 도외시하고 도리어 승냥이를 도성 안에서 기른다. 이것이 이른바 '사특함과 참람함에 빠지는 것'으로 의리와 천명을 아는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16판 우 9행 왼쪽.화도수정본 : 지금 시대는 천지의 바른 기운이 이미 쇠퇴하고 성현의 도(道)가 점점 미약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랑캐와 금수(禽獸)가 나라 안에 마구 돌아다니고 다른 종족과 사설(邪說)이 사람들 마음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 유자(儒者) 몇 사람은 곤궁하고 낮은 자리에 있지만 더불어 서로 칼끝을 겨눠서는 안 된다. 【이천(伊川) 선생115)이 말하기를 "시대의 성쇠와 세력의 강약에 대해 《주역(周易)》을 배우는 사람은 응당 깊이 알아야 한다."116)라고 하였다.】 또 모름지기 친구들과 함께 침잠하여 서로 강론하며, 묵묵히 더불어 만회(挽回 바로잡아 돌이킴)하는 것이 부모가 남겨준 몸을 지키고 선사의 도학을 전수하며 우리 임금의 교화를 보조하는 길이다. 거의 하나 남은 열매를 먹지 않고 남겨놓는 것117)처럼 다시 생겨나는 근본이 될 것이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22판 좌 4행 왼쪽.화도수정본 : 1) 근래 한 가지 의론을 듣건대, 이르기를 "오랑캐도 사람이니 외면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것은 언뜻 인자하고 후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저들이 비록 사람의 형상이지만 그 기운은 진실로 동물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것을 일러 '우리 동족이 아니면 반드시 그 마음이 다르다.'118)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그것을 일러 '인간과 금수 사이에 있어서 끝내 교화하기 어렵다.'119)라고 말한 것이다. 옛날부터 이적과 함께 섞이면서 끝내 무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선왕이 그들을 물리친 것은 저들이 물리침을 당할 만한 이치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쫓아내 물리쳤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이른바 "사물은 각각 그 사물에 맡기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또 천지는 무엇인들 포용하지 않으며 성인은 무엇인들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다만 대처하는 데 도리가 있으니 일찍이 그 이치 하나를 가지고 일괄적으로 베풀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에 있어 전혀 천리(天理)와 인욕의 분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논하는 것 또한 이렇게 혼잡한 말을 거듭 꺼낸 것이다. 그 처음에 '외면할 필요가 없다.[不必外之]'라는 말을 한 것은 그래도 빈주(賓主)의 구분이 조금 있지만, 그 종국에 가서는 그들과 함께 동화되어 스스로 오랑캐가 된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풍속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단은 공격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자는 모두 이런 부류이다.2) 나는 모든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비록 '동포(同胞)'라고 할지라도 산과 바다가 막혀 있고 풍속이 통하지 않으면 지역이 이미 나누어지고 풍속도 각기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곧 천지자연의 이치이다. 오늘날 시론(時論)은 모두 만국이 통용하는 공법(公法)을 핑계로 삼는다. 그러나 화이(華夷)의 구분은 음양(陰陽)의 분변(分辨)처럼 참으로 혼동하기 어려운 것이다. 화(華 중화)와 화(華)가 함께 하고 이(夷 오랑캐)와 이(夷)가 함께 하면서 각 나라의 풍속 또한 각기 달라졌다. 내가 헤아려보건대, 천하만국의 법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할 수는 없고 다만 인민을 어지럽힐 뿐이다. 어찌하여 제공(諸公)들은 이렇게 하면 나라가 부유해질 수 있고, 군병이 강해질 수 있고, 백성이 보호되어 태평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가? 그러나 각국이 서로가 끌어당기면, 저들은 모두 저들의 욕망을 채우겠지만, 오직 우리나라만 조금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군대는 혼란스럽고 백성은 흩어져, 끝내 위망(危亡)한 형세가 머지않아 닥칠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아, 생각지 못함이 심하도다!3) 일전에 삼가 전교(傳敎 임금의 하교)를 보니 강약이 다르므로 일본과 서양의 기술을 배우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틀림없이 제공(諸公)들이 건의한 내용일 것이다. 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오랑캐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백성의 사력(死力 목숨을 아끼지 않고 힘을 쏟음)을 얻느니만 못하다. 만약 백성의 마음이 윗사람과 굳게 결속되어 풀 수 없다면 저들의 증기기관과 전선(電線)은 그 공교함을 베풀 데가 없을 것이다. 만약 백성의 마음이 흩어져 수습하지 못하면 비록 날카로운 병기가 있더라도 장차 누구와 함께 적을 막겠는가? 훌륭하구나, 주자(朱子)의 말이여! 이르기를 "옛날 성왕(聖王)이 이적(夷狄)을 제어하는 도리는 그 근본이 위강(威強)에 있지 않고 덕업(德業)에 있으며, 그 방비는 변경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그 도구는 병사와 식량에 있지 않고 기강에 있다."120)라고 하였다. 아, 오늘날 제공들 가운데 우리 임금 곁에서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4) 황준헌(黃遵憲)121)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환난을 막아주기를 바랐으나 나라 안에 식견이 있는 선비는 모두 불가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 무리 의론은 도리어 '신묘한 책략[神策]'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도성에서 이류(異類)를 기르고, 직언하는 사람은 영해(嶺海)로 귀양을 보낸다. 한비자가 말한 "가까이 있는 현자의 지모(智謀)를 쓰지 않고 천 리 먼 곳과 외교를 맺으니 회오리바람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면 외교를 맺은 먼 나라는 오지 못한다."122)라고 한 것이 어찌 오늘날을 두고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5) 오랑캐는 하루도 친해서는 안 되며 중화의 제도는 하루도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 천지 불변의 도리요, 춘추대의(春秋大義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이다. 오늘날 시대를 논하는 제공들은 곧 천하의 대세를 누군들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말하며, 오랑캐가 도성에 함께 거처하는 것을 보고서도 응당 행해야 할 오랜 일처럼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릴 적에 선비들의 마음을 잃고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서 무사한 적은 없었다. 지난번 중전이 궁을 탈출한 변란123)은 실로 일본 오랑캐가 도성에 머무른 것으로 인한 일이니, 어찌 구법(九法)이 무너지고 삼강(三剛)이 몰락한 것124)이 아니겠는가? 지금 사론(士論)이 들끓고 민심이 흩어져 위망(危亡)한 형세가 경각에 닥쳤는데도 제공들은 세상에 쓰이는 데에 경솔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급급하여 유학자의 몸으로 진상(陳相)의 행동125)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어찌 성인의 문하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 말처럼 천하의 대세는 비록 어쩔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도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누가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한 자[尺]를 굽히고 한 길[尋]을 굽혀 주저하며 떠나지 못하게 하였는가?6) 천하에 오랑캐가 있는 것은 인심(人心)에 이욕(利欲)이 있는 것과 같다. 진실로 천리와 인욕이 마음속에 병립하면서 끝내 무사한 경우는 있지 않고, 또한 제하(諸夏 중원의 나라)와 오랑캐가 한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면서 결국 무사한 경우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춘추》의 법은 중원의 나라를 안으로 삼고 오랑캐를 밖으로 삼았다.126) 학문의 도는 자기를 극복하여 예를 회복하는 것[克己復禮]이다. 이것은 천지 사이에 치우치거나 기댐이 없이 위로도 곧고 아래로도 곧은127) 바른 이치이니, 하루 한때라도 고쳐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제공들이 일본과 서양과 프랑스와 미국에 대처하는 것은 모두 이와 반대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올해 6월의 변란128)은 곧 천하 만세에 처음 보는 일이며, 천하만국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국모를 위해 죽은 사람이 없고, 한 사람도 역도를 토벌하자고 논의를 낸 사람도 없다. 또 한 사람도 이것을 찬탈이라 여기고 적을 물리치는 계책을 세우는 사람도 없다. 하나같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을 핑계의 단서로 삼고서 원칙을 지키자는 의론에 대해서는 시골뜨기의 무식한 부류라고 손가락질한다. 아, 나는 늘 속으로 만국공법은 만세의 정법(正法)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춘추의리(春秋義理)를 쓸모없는 물건으로 여기지만 향리의 무지한 눈에는 중하니, 무릇 성인의 사도(使徒)가 된 자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관대를 쓴 몸으로 승냥이와 이리의 무리가 되기를 달가워하지 않겠다.7) 지금 천하는 모두 오랑캐로 변하였다. 오직 우리나라만 의관을 지키니 박(剝) 괘의 상구(上九) 일효(一爻)만 변하지 않은 것129)과 같다. 그러므로 옛날 철인이 말하길 "우리들의 생은 오늘날 중국에 있지 않고 한 조각 깨끗한 땅에 있으니 이것이 매우 기특하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른바 '한 조각 깨끗한 땅'도 시대를 논하는 제공들이 또 따라서 더럽혔다. 심하도다, 그 불인함이여! 우리 유자(儒者)된 사람들이 마땅히 화이(華夷)의 분변을 엄격히 하여 만세의 대방(大防 법도)을 보존해야 하니 그래야 거의 상제(上帝)와 공자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 시의적절한 조치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8) 예로부터 이단은 그 설이 복잡하였지만, 그 주장은 하나였다. 하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이 이것이다. 우리 성현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성(性)'을 주로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이상 8개 조목이 있다.변 : '윤철규(尹喆圭)∼' 조목 이하부터 여기까지 여러 조목은 오랑캐와 시배(時輩)를 두루 논변한 것이지 직접 왜적을 배척한 것이 아닌데, 어찌 감히 선사의 수정본(手定本)을 고쳐서 모조리 별집(別集)에 넣었는가? 【아래 '근견청인(近見淸人)∼' 1개 조목, 〈김중옥에게 보내는 편지[答金重玉]〉의 별지(別紙) 2개 조목, 〈화ㆍ경 두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寄華敬二兒]〉의 3개 조목, 〈자서조동변(自西徂東辨)〉, 〈양집제설변(梁集諸說辨)〉 역시 그와 같다.】 '종고이단(從古異端)∼' 조목이 별집에 들어간 것은 더욱더 괴이하다.25판 좌 9행 : '양명(陽明)∼' 이하.화도수정본 : 각각의 단락이다.31판 우 4행 왼쪽.청나라 유자(儒者)들 가운데 대다수가 《가례(家禮)》는 주자의 저작(著作)이 아니라고 하며, 그 설이 매우 장황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보건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례》에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입곡(入哭)130)한다."131)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주인이 성복(成服)132)하기 전에 와서 곡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의(深衣)를 입어야 한다."라고 하였다.면재(勉齋)133)가 말하길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막 세상을 떠났을 때 검은 갖옷을 입고, 검은 관을 쓴 사람은 옷을 바꿔 입을 뿐이다.'라고 한 것은 병든 이를 봉양하는 사람을 근거로 말한 것이고, 《가례》에 실린 것은 조문하는 사람을 근거로 말한 것으로 글은 같지만, 뜻이 다르다."라고 하였다. 면재는 주자 문하의 고제(高弟)이다. 곧 《가례》 운운한 말이 있는데 어찌 《가례》가 주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례》에 이르기를 "선조를 제사 지낼 적에 조고(祖考)와 조비(祖妣)의 위패는 사당 안의 동서(東西)에 둔다."라고 하였다.《주자어류》 권90 39판 하손(賀孫)의 기록134)에 용지(用之)135)가 묻기를 "선생님의 제례는 입춘(立春)에 고조(高祖) 이상을 제사 지낼 적에는 단지 두 개의 위패만 놓아 옛날 사람의 협제(祫祭)136)와 같은 방식으로 하셨는데, 모름지기 신위마다 제사를 지내야 할 것 같은데요?"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나는 다만 정이천(程伊川 정이(程頤))의 설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선생님의 제례'란 실지 《가례》의 이 주(註)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면 《가례》가 주자의 저작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후대 유자의 수많은 설을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 있다.이상 1개 조목이 있다.35판 우 11행 왼쪽.화도수정본 : 근래 청나라 사람 채이강(蔡爾康)이 지은 〈송유이화중국론(宋儒貽禍中國論)〉을 보건대, 대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흉노(匈奴)와 돌궐(突厥)에 딸을 시집보내고 신하를 자처한 일을 인용하여 "2대의 치욕이 되기에 부족하다."라고 말하였다. 곧이어 말하기를 "송나라 유자(儒者)는 옛 교훈을 견강부회하여 이적(夷狄)을 배척했다. 그러나 '내하외이(內夏外夷 안쪽은 중화, 바깥쪽은 오랑캐)'는 노론(魯論 논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의 시속(時俗)은 송나라 유자의 고독(蠱毒)에 깊이 중독되어 걸핏하면 '외인(外人)은 오랑캐니 마땅히 배척하고 멀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아, 이게 무슨 말인가! 《서경》에 이르기를 "오랑캐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며, 도적들이 안팎으로 간악한 짓을 한다."[蠻夷猾夏, 寇賊姦宄. ]"137)라고 하며 오랑캐와 도적을 아울러 말하였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오랑캐를 이에 정복하였다.[戎狄是膺]"138)라고 하고, 《맹자》에 이르기를 "우임금은 홍수를 막고 뱀과 용을 몰아내었으며 주공은 오랑캐를 정복하였다."139)라고 하며 오랑캐를 뱀과 용, 홍수와 나란히 말하였다. 맹자는 또 일찍이 왜가리 소리를 한다며 남만(南蠻)을 배척하였다.140) 과연 가령 공자에게 '내하외이(內夏外夷)'의 뜻이 없었다면 또 무엇 때문에 관중(管仲)의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141)라고 하였겠는가? 또 "오랑캐에게도 군주가 있다."142)라고 한 것과 "비록 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143)라고 한 것, "비록 오랑캐의 나라일지라도 행해질 수 있다."144)라고 한 것들이 또한 모두 오랑캐를 도외시하는 의미인데 '노론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하니, 장차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는 것이리라. 아니면 또한 오랑캐에 익숙한 지 이미 오래되어 그들과 함께 동화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리라. 채이강이 또 말하기를 "복수는 공자가 말한 것이 아니라 송나라 유자(儒者)에게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수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원수가 있다면 마땅히 그 일의 대소를 보고 조처해야 할 것이다. 소소한 침범은 비록 일일이 대처할 수 없을지라도 임금을 시해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위력(威力)을 빙자하여 우리를 신하나 첩으로 삼으려는 부류에게 또 어찌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탕(湯) 임금은 동자를 위해서 복수했다.145) 공자는 '같은 하늘 밑에 살지 못한다.[不共戴天]'146),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以直報怨]'147)는 훈계가 있었다. 어찌 성현이 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채이강의 아버지를 구타하거나 살해하였다면 그는 장차 복수는 송나라 유자의 이론(異論)이라 하고서 느긋하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오늘날의 이른바 '시무(時務)'를 안다는 자들도 소견이 대부분 이와 비슷하다. 이러한데도 사물의 이치를 열고 백성을 교화할 수 있겠는가. 크게 탄식할 만하다. ○채이강의 의론은 임락지(林樂知)의 《중동전기(中東戰記)》 제7권에 실려 있다. 제1권 맨 처음에 조선의 궁내대신(宮內大臣)이 임락지에게 준 〈중동전기를 준 것에 사례하다[謝贈中東戰記]〉라는 편지가 실려 있는데, 이르기를 "이 책을 우리 폐하께 바쳤더니 다 읽고 나서 크게 칭찬하시고 이어 수놓은 병풍을 하사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임락지는 미국인이고, 채이강은 청나라 사람이다. 그들의 계책은 우리나라가 한결같이 오랑캐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다시는 원수를 갚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대신 된 자가 군왕에게 바치고 포상을 받기까지 했다니 그 한심함은 논할 겨를이 있겠는가!이상 1개 조목이 있다.43판 우 11행 : '성인무특(聖人無特)∼'이하 2개 조목.46판 좌 2행 : '애연사단(藹然四端)∼' 1개 조목.화도수정본 : 둘 다 〈해상산필(海上散筆)〉에 들어 있다. 【《후고(後稿)》】변 : 선사께서 친히 정하신 총목(總目)은 참으로 감히 멋대로 바꿔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분언(㤓言)〉과 〈해상산필(海上散筆)〉은 초년작과 만년작이라는 차이가 있잖은가!권3417판 우 3행 : 그 추향의 차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不可不審其所趨之分]화도수정본 : '지분(之分)' 2자가 없다. 【《전고(前稿)》. 이하 같다.】19판 우 11행 : 서자(庶子)가 있는데도 족질(族姪)을 세워 뒤를 잇는 것은 벼슬아치 집안이 모진 마음으로 도리를 해치는 잘못된 관습이다. 그렇다면 그 자식 또한 남의 후사(後嗣)로 주는 경우가 없겠는가. 부자간에 이렇게 하는 자가 과연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났으니 마땅히 천망(薦望 추천하여 후보자를 명단에 올리는 것)을 멈추고 그 폐단을 통렬히 혁파해야 한다.[有庶子而立族姪爲嗣者, 是仕宦家忍心害理之悖習. 而爲之子者, 無亦爲與爲人後者耶? 父子而如此者, 果能盡忠於君乎? 明良相遇, 宜停薦停望, 而痛革其弊也.]화도수정본 : '서(庶)'는 '친(親)'으로 되어있고, '폐야(弊也)' 아래에 소주(小註) '친자는 서자를 가리킨다.[親子指庶子]'라는 5자가 있다.○변 : '서자(庶子)'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친자(親子)'라고 하고서, 특별히 소주(小註)를 단 것은 자기 자식을 버리고 남의 자식을 취한 것이 의리에 해가 됨을 밝힌 것인데 함부로 삭제하고 고쳐서 본의를 크게 잃었다.21판 좌 9행 '시문천하(試問天下)' 조목.화도수정본 : 〈해상산필(海上散筆)〉에 들어 있다. 【《후고(後稿)》. 이하 같다.】동판 우 10행 : 아니면 기질이 선하지 않음이 있어서 지사(知思)가 선하게 운용되지 않는다.[抑氣質有不善. 而知思不善運用. ]화도수정본 : '이(而)'자가 없다.30판 좌 2행 : 성(性)은 진실로 지(知)도 없고 능(能)도 없지만, 그것을 일러 유독 태극에 해당할 수 없다고 하면 또한 오류일 것이다. 심(心)이 진실로 동정(動靜)과 감응(感應)이 있지만, 서 곧바로 '태극'이라고 하면 그 또한 오류이다. [性固無知無能, 而謂之不可獨當太極, 則亦誤矣. 心固有動靜感應, 而謂之直是太極, 則亦誤矣. ] 【〈해상산필(海上散筆)〉.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앞의 '역(亦)'자는 없다.권351판부터 6판 우측의 '인성전성(人性全善)∼' 조목 위까지.화도수정본 : 〈잡기(雜記)〉에 들어 있다.○변 : 조목의 단락을 바꾸어 두기 위해 선사가 손수 정한 〈잡기〉의 총목을 삭제하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이 편한가?36판 좌8∼9행 : '불가(佛家)는 심(心)에 나아가 성(性)으로 인식하니[佛家卽心認性] …… '라고 운운하고, '고증가(考證家)는 심에 천착하여 성을 업신여긴다.[考證鑿心蔑148)性]' 운운한 부분.화도수정본 : '고증(考證)' 아래에 '가(家)' 자가 있다.37판 좌측 '맹자귀구(孟子歸求)∼'이하부터 47판 우측 '피욕살시(彼欲殺時)∼' 조목, 51판 좌측 '성시태극(性是太極)∼'이하 3개 조목까지.화도수정본 : 〈잡기(雜記)〉에 들어 있다.권3638판 우12행 : '정모내이(鄭某乃以)' 【〈해옥병화(海屋病話)〉】화도수정본 : '내(乃)'가 '매(每)'로 되어있다.권3742판 우11행 : 공자(孔子)의 은거하고 침묵하라는 가르침149)은 또한 한때라 하고, 묵자(墨子)의 발을 싸매고150) 가는 것은 한 '중도(中道)'라 하며 …… 【〈화도만록(華島漫錄)〉】화도수정본 : 공자의 은거하여 침묵하라는 가르침 또한 '한계를 짓는 것[畫]'이라 하고, 묵자의 발을 싸매고 가는 것은 또한 '중(中)'이라 하며 ……권3823판 좌2행 : '저 광의 무리[彼光輩]' 【〈영모재기(永慕齋記)〉】화도수정본 : '광(光)' 아래에 '돈(墩)'자가 있다.권399판 우 10행 : 화서의 여러 설은 이미 성현의 본지가 아니다. 유중교가 드러내 밝힌 것151)도 화서의 본지와 어긋나지만, 또한 이미 회수하였으니 논할 것이 없다. 내가 보지 못하고 희령(希寗)152)이 본 것153)은 화서의 진정안(眞正案)이 아니라 곧 김평묵의 가정안(假正案)일 것이니, 무덤에서 일으켜 서로 함께 한바탕 웃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기타 심(心)ㆍ성(性)을 물(物)ㆍ칙(則)으로 나누고, 영각(靈覺)을 기(氣)에 분속(分屬)하고 신명(神明)을 형이하(形而下)라고 한 것들은 구학(舊學)의 틀에서 벗어나 도로 주자와 율곡의 정안을 얻었으니 사문에 공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만세의 학자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희령의 혼령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운ㆍ가154)왕복후론발(雲ㆍ柯往復後論跋)155)】화도수정본 : 자기를 세우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못하고 아무렇게나 서로 '네네'하는 것은 다만 직도(直道)에 흠이 되지 않겠는가. 정안(正案)의 본설은 이미 성현의 종지를 잃었고, 유중교가 드러내 밝힌 설은 또 화서의 본지와 어긋지만, 또한 이미 환수하였다. 나 또한 감히 망령되지 드러내지 못하겠지만 이외에 다른 설은 또한 심ㆍ성을 물ㆍ칙으로 나눈 것, 영각을 기에 분속(分屬)한 것, 신명을 형이하라고 한 것 등은 구학의 틀을 벗어나 다시 주자와 율곡의 정전(正詮)을 얻었으니 사문에 공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내가 슬며시 만세 학자와 함께하고자 한 것이다. 희령이 지각이 있다면 내가 서술한 의견을 착오라고 하지 않을까.31판 좌 6행 왼쪽.화도수정본 : 〈제조주백문(祭趙周伯文)〉 1편이 있다. 【《재후고(再後稿)》】권401판 : 〈죽천박선생신도비명(竹川朴先生神道碑銘)〉 위.화도수정본 : 〈율헌최공신도비명(栗軒崔公神道碑銘)〉, 〈연촌최선생신도비명(烟村崔先生神道碑銘)〉 2편이 있다. 【《후고(後稿)》. 이하 같다.】○변 : 두 비문에 대해 저들은 《국전(國典)》에 '2품 이상이 아니면 신도비를 지을 수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고 하여 삭제하였다. 그러나 《국전》을 두루 고찰해보았지만 이런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또 선사는 도암(陶菴)이 교감한 《율곡전서(栗谷全書)》 〈증통정대부 승지김공신도비(贈通政大夫承旨金公神道碑)〉156) 안의 '이에 신도비를 세운다[爰樹神道碑]'라는 문구를 근거로 이 두 비문을 지었으니 그 국전에 어긋난다고 하여 삭제하는 것은 망령된 짓이다. 별도로 비문에 대한 변론이 있으나 문장이 길어서 수록하지 않는다.동판(同板) 우 13행 : '진사직장(進士直長)' 【〈죽천박선생신도비명(竹川朴先生神道碑銘)〉.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진사(進士)' 아래 '사위(仕爲)' 2자가 있다.동판 좌 7행 : '고의(古義)를 토론하여 부지런히 애써서 학업을 돈독히 하다.[討論古義 勤苦篤業]'화도수정본 : '고의(古義)' 아래 '아침저녁으로 서로 경계하도록 꾸짖다.[朝夕相警責]'라는 5자가 있고, '독업(篤業)' 아래 '자삼년(者三年)' 3자가 있다.2판 우 4행 : '한결같이 가례에 의거하여[一依家禮] …… '6행 : '헌릉(獻陵)'화도수정본 : '가례(家禮)' 아래 '선생(先生)' 2자가 있고, '헌릉(獻陵)' 아래 '참봉(參奉)' 2자가 있다.동판 우 7행 : '기희(妓戱)'9행 : 응선(膺選)좌 2행 : '장원(掌苑)' 아래의 소주(小註) 중 '실(失)' 자.3행 : '여민쟁송(與民爭訟)'좌 4행 : '감사노지(監司怒之)'화도수정본 : '기(妓)' 아래 '유지(類之)' 2자가 있다. '응(膺)' 아래 '시(是)' 자가 있다. '실(失)'은 '일(逸)'로 되어있다. '민(民)' 위에 '촌(村)' 자가 있다. '노(怒)' 아래 '책(責)'자가 있다.속 권111판 우 9행 : '정식(精識)'【〈송회경에게 답한 편지[答宋晦卿]〉】화도수정본 : '정(精)'이 '고(高)'로 되어있다.38판 우측 : 〈윤명숙에게 답한 편지[答尹明肅]〉 【정사년(1917)】화도수정본 : 없다.속 권21판 우측 : 〈김기범에게 답한 편지[答金起帆]〉 【기해년(1899)】화도수정본 : 없다.15판 우 11행 좌측.화도수정본 : 〈김중옥157)에게 답한 편지[答金重玉]〉.〈별지(別紙)〉에 다음 2가지 조목이 있다.1) 문(問) : 근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건대, 한나라 소열제(昭烈帝) 장무(章武) 3년158) 5월에 후주(後主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가 즉위하였습니다. 개원(改元 연호를 고침)의 예에 준거해보면, 선제(先帝)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비록 하루일지라도 계묘년(223)은 마땅히 장무 3년에 속하는데, 곧 '건흥(建興) 원년(元年)'이라고 크게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당나라 중종(中宗) 경용(景龍) 4년159) 6월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였는데 그대로 경용 4년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예종 경운(景雲) 원년(元年)'이라고 분주(分註 본문 옆을 두 줄로 나누어 주석을 닮)하였고, 도리어 이듬해에 이르러 '경운 2년'이라고 크게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지난 정미년(1907, 융희 1년)은 곧 광무(光武) 11년인데, 그해 7월에 새 황제에게 선위하여 융희(隆熙)160)라고 개원하였습니다. 후세의 병필자(秉筆者)는 정미년을 광무 11년이라고 쓰고 융희 원년이라고 분주(分註)해야 합니까? 아니면 광무 11년을 세지 않고 융희라고 써야 합니까? 다만 본조(本朝)에서 이미 행해진 것으로 말하자면, 태조는 무인년(1398, 태조 7년)에 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였는데, 이듬해인 기묘년(1399, 정종 1년)을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정종은 경진년(1400, 정종 2년)에 태종에게 선위하였는데, 역시 이듬해인 신사년(1401, 태종 1년)을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지난번 개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입니까?답 : 후한(後漢)과 당(唐)나라의 예는 아마 모두 정례(正禮)가 아닐 것이다. 마땅히 본조의 정종과 태종이 행한 것을 정례로 삼아야 한다. 정미년(1907, 융희 1년)을 후주(後主)의 예를 따르는 것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병필자는 《자치통감강목》처럼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쓰면 그뿐이다.2) 문 : 아무개 어른이 지금까지 백립을 쓰면서 《춘추(春秋)》의 법이라며 스스로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지금 《춘추》의 주(註)를 고찰해보니 '상복을 벗지 않는다[服不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가 《춘추》의 글을 망령되이 첨가하였다고 헐뜯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옛날 사람 중에도 이러한 예를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까?답 : '상복을 벗지 않는다[服不除]'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였다면 백립(白笠)을 쓰는 것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송나라 때 휘종(徽宗)161)의 부음이 이르자 이일역월(以日易月)162) 하였다. 그러자 호치당(胡致堂)163)이 상소하여 말하길 "《예기(禮記)》에서 말하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상복을 벗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조서를 내려주십시오. 복상(服喪) 3년 동안 묵최(墨衰)164)를 입는 것은 곧 오랑캐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상복을 벗지 않는다[服不除]'는 글을 인용하고서 오히려 '복상(服喪) 3년'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그 뒤 흠종(欽宗)165)의 부음이 이르렀을 적에 주희(朱熹)와 장재(張載) 등 여러 선생은 종신토록 흰 옷과 관을 쓰라는 규제가 없었다. 어찌 고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송나라 덕우(德祐 공종(恭宗))166)가 세상을 떠나자 벼슬아치 중 종신토록 최복(衰服)을 입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방정학집(方正學集)》167)에 보인다. 전현(前賢)이 행한 것이 각기 달라 감히 딱 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의 이택당(李澤堂)168)은 정축년(1637)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뒤 검은 칠이 된 패랭이를 썼다. 신주촌(申舟邨)169)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지 못하자 종신토록 패랭이를 썼다.】 이상 2개 조목이 있다. 【《전고(前稿)》. 이하 같다.】17판 좌측 : 〈박사문에게 답한 편지[答朴士文]〉 【무오년(1918)】19판 우측 : 〈전사성에게 답한 편지[答田士誠]〉 【기미년(1919)】22판 우측 : 〈조동손에게 답한 편지[答趙東孫]〉 【기미년(1919)】28판 좌측 : 〈송순회에게 보낸 편지[與宋順會]〉 【경신년(1920)】화도수정본 : 모두 없다.38판 우 11행 : 굴신왕래(屈伸往來)하여 이기(理氣)가 자연스럽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다.[屈伸往來 理氣自然能如此]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答或人]〉】화도수정본 : '이기(理氣)'가 '이기(二氣)'로 되어있다.속 권37판 우 : 〈한경춘에게 답한 편지[答韓景春]〉 【경신년(1920)】19판 우 : 〈최명희에게 답한 편지[答崔命喜]〉 【무오년(1918)】화도수정본 : 모두 없다.속 권45판 우 12행 : 체일과 용수를 띠다.[帶體一用殊]" 【〈이희진에게 답함[答李喜璡]〉】화도수정본 : '체일(體一)' 앞에 '용수를 띠다[帶用殊]'가 있다.170) 【《후고(後稿)》. 이하 같다.】8판 좌측 : 〈조홍순에게 답한 편지[答趙弘淳書]〉의 '정(鄭)' 자 3개.화도수정본 : '모(某)'자로 되어있다.23판 좌측 : 〈어재원에게 답한 편지[答魚在源]〉33판 우측 : 〈어재원에게 답한 편지[答魚在源]〉 【기미년(1919)】33판 좌측 : 〈오진영에게 답한 편지[答吳震泳]〉 【갑인년(1914)】화도수정본 : 모두 없다.속 권55판 우 7행 : '자야(子也)' 아래. 【〈안병도에게 답한 편지[答安炳道]〉】화도수정본 : 소주(小註) '이한재(二韓齋)의 유자(儒者)가 나중에 다시 사이가 어그러졌다. 그러므로 비문을 오래도록 버려두었다[二韓齋儒, 後復相戾. 故永棄碑文. ]'라는 13자가 있다.41판 좌 11행 ∼ 42판 우 3행까지 : 의효전(懿孝殿)171)의 상사(喪事)에 신하와 백성은 원래 무복(無服 상복을 입지 않음)인데, 지금 기제(朞制 일년복)로 정한 것은 비록 예에 합당하지 않지만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릅니다. ∼ 제가 수최(受衰)172)한 것은 종전에는 미호(渼湖)173)의 전례(前例)에 따라 행한 것이고, 지금은 무복(無服)인데도 유복(有服 상복을 입음)을 행한 것입니다. [懿孝殿喪事, 臣民原來無服, 而今定以朞制, 雖未合禮, 旣是時王之制, 不得已而從之. ∼ 鄙人受衰, 從前依渼湖已例行之, 今則無服而爲有服歟! ] 【〈신혁균에게 답한 편지[答申赫均]〉】화도수정본 : '여(歟)'는 '여(與)'로 되어있다. '여(與)'자 아래에 '대상(大喪 국왕의 상)과 내상(內喪 왕비의 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복일(成服日)에는 다만 백립(白笠)을 쓰고 흰옷을 입었습니다. [大喪內喪有間. 故成服日, 只用白笠白衣已矣. ]'라는 18자가 있다. 【《전고(前稿)》】○변 : 선사께서 의효전의 상에 다만 백의를 입고 백립을 쓰고 수최(受衰)하지 않은 것은 그 무복(無服)인데도 유복(有服)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여(與)'를 '여(歟)'로 고치고 그 아래문구를 삭제하여 '수최한다'는 문구를 만들었으니, 선사의 사실과 예의(禮意)를 바꾸고 어지럽힘이 곧 여기에 이르렀구나!속 권611판 우 2행 : 하물며 부모가 남기신… [況且父母所遺]. 【〈노병준에게 답한 편지[答盧秉準]〉】화도수정본 : '차(且)'가 '차(此)'로 되어있다. 【《후고(後稿)》. 이하 같다.】속 권730판 우측 : 〈김식원에게 답한 편지[答金植沅]〉 【정사년(1917)】화도수정본 : 없다.36판 좌 12행 : 스스로 그 명을 재촉하다.[自促其命] 【〈이동윤에게 보낸 편지[與李東潤]〉】화도수정본 : '명(命)'이 '망(亡)'으로 되어있다.41판 좌측 : 〈김세기에게 답한 편지[答金世基]〉 【임술년(1922)】화도수정본 : 없다.42판 좌측 : 〈한성석에게 보낸 편지[與韓性錫]〉화도수정본 :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與某]〉속 권81판 좌 : 〈정태수에게 답한 편지[答丁兌秀]〉, 〈정영조에게 답한 편지[答鄭瑛朝]〉5판 우 : 〈범희엽에게 답한 편지[答范熙曄]〉동판 좌 : 〈범희원에게 답한 편지[答范熙元]〉11판 좌 : 〈변경원에게 답한 편지[答弁敬源]〉22판 우 : 〈박용길에게 답한 편지[答朴鏞吉]〉화도수정본 : 모두 〈아무개에게 답한 편지[答某]〉으로 되어있다.38판 좌 1행 왼쪽.화도수정본 : 〈화ㆍ경 두 아이174)에게 부치는 편지[寄華敬二兒]〉.일전에 인보(仁父)175)와 이견(而見 오진영)이 나가서는 나라를 보존하라고 권하였으니 이것은 공적을 중시하여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는 것으로 곧 가릉(嘉陵 경기도 가평)의 여러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헌(南軒)176)의 설 한 단락을 떠올려보건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공업(功業)에 뜻을 둔 자가 진실로 그 공적을 이루어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면 또한 기꺼이 할 것이다. 이는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도의에는 미치지 못한다. 옛날 사람은 오직 도를 지키고 의리를 밝힐 뿐이었다. 비록 세상을 덮을 만한 공적이 눈앞에 있어 할 만하더라도, 나에게 있는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편치 않으면 감히 따르지 않았다.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인 자는 반드시 현달하여 그 도가 천하에 행할 만함을 분명히 알고 나서 행한다.177) 대개 그 주로 삼는 것은 도(道)에 있으며 행함을 기필하지 않는다.178)고루한 내가 진실로 천리를 온전히 다한 대현(大賢)을 감히 논할 수는 없으나 그 뜻은 도의를 주로하고 공적에 얽매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견은 평소 다소 공적을 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인보(仁父)는 견지하는 것이 반드시 그와 같지는 않다. 다만 사세가 이미 극에 달하고 화(禍)와 욕(辱)이 이미 임박하여 적잖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 진실로 견해를 정하기도 어렵고 고수(固守)하는 이도 드물다. 다만 이것으로 또한 타고난 자질이 비록 아름다울지라도 사우의 강명(講明)이 그야말로 적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자는 《주역》 혁(革) 괘의 육이(六二)179)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시기가 알맞고, 지위를 얻었으며, 재주가 충분하니, 【나는 과연 이 세 가지가 있는가?】 개혁에 대처하기를 지극히 잘하는 자이다. 그러나 신하의 도리는 개혁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또 반드시 상ㆍ하가 믿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과연 상ㆍ하의 믿음을 얻었는가?】 그러므로 하루가 지나서야 개혁하는 것이다. 이(二)와 같은 재주와 덕은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나아간 시기가 천하의 폐해(弊害)를 개혁하고 천하의 정치를 혁신할 만하니 마땅히 나아가 도를 행하면 길하다. 나아가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때를 놓쳐 허물이 있게 된다.180)여기에서 두 군(인보와 이견)의 강권(强勸)과 나의 견지를 비교해보면 어찌 손바닥에서 보는 것처럼 훤하지 않겠느냐? 퇴(退) 대감181)은 비록 내 말을 옳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지난번에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라고 하였으니, 도리어 두 사람의 견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른바 '지난번'이라는 것은 곧 작년 가을 임성무(任聖武)를 보내어 유림이 마땅히 나아가서 행해야 한다고 말한 그것이다. 작년 가을을 올봄에 비교하자면 유자(儒者)가 상하가 믿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출각(出脚)한 의리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송강재(宋強哉)182)가 편지를 보내와 퇴 대감 설의 잘못을 힘껏 변론하며 도리어 종전에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였는데, 여기서 아마 퇴 대감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듯하다.예전에 이견이 처음 왔을 적에 맹사간(孟士幹)183)의 뜻을 전하며 "모 어른이 한번 일어나면 국내의 사류(士流)가 모두 호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서울은 모모가 있어 의지할 만하고, 대궐 안은 모 궁이 있어 통할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사군자(士君子)가 일을 하는데 어찌 모 궁이 하는 일을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견이 다시 와서 문득 말하기를 "모 인사가 요사이 이미 머리를 잘랐습니다. 참으로 의외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현인들이 헤아려 의지할 만하다고 여기는 자가 이러니 참으로 가소롭구나."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다 해도, 가령 내가 그 말에 따라 문을 나서서 외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고, 각국 공사관에 통지하여 열국의 공사(公使)와 한 차례 논쟁 끝에 진격하는 형세를 약간 물리고 급박한 재앙을 조금 늦춘다면 일시에 반드시 백성의 칭송을 두터이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군자의 출처어묵(出處語默)184)의 정밀한 의미겠는가? 작년 내가 퇴 대감의 설을 들어서 서장(徐丈)185)에게 물으니 나에게 답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시비를 알지 못하여 이런 침포(侵暴)한 행동을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맹사간은 어찌하여 그 스승이 이런 선견(先見)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가?이상 3개 조목이 있다. 【《전고(前稿)》】44판 우 5행 : 비천한 이는 조문할 적에 마땅히 사배(四拜)를 해야 한다.[卑賤之弔 當有四拜] 【〈일정에게 부친 편지[寄鎰精]〉】화도수정본 : '사(四)'는 '사(謝)'로 되어있다.속 권919판 우측 : 〈남진영ㆍ이휘재에게 써준 편지[贈南軫永李徽在]〉 【경신년(1920)】화도수정본 : 없다.20판 우 10행 : 올해 나와 제현들이 호남의 영주산(瀛洲山 정읍의 두승산(斗升山)에서 독서를 하였다.[今年, 余與諸賢, 讀書于湖南之瀛洲山中. ] 【〈유영선에게 훈시하다[訓柳永善]〉. 이하 같다.】화도수정본 : 나는 영주산에서 독서를 하였다.[余讀書瀛洲山中] 【《전고(前稿)》. 이하 같다】동판 좌 12행 :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을 준거로 삼는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운운[所受於函席者爲準 ○博文約禮云云].화도 수정본 : '위준(爲準)' 아래 권점(圈點)이 없고, '박문(博文)' 이하 모든 크고 작은 글자는 모두 소주(小註)로 되어있다.25판 좌측 : 〈유영설에게 보이다[示劉永渫]〉【신해년(1911)】화도수정본 : 없다.37판 우 9행 : 천하는 인의(仁義)를 이야기하기를 꺼렸다.[天下之談仁義爲諱]화도수정본 : '지(之)'가 '이(以)'로 되어있다. 【《후고(後稿)》】속 권1321판 좌 2행 : '손군(孫君)'화도수정본 : '손회은(孫晦隱)'으로 되어있다. 【《재후고(再後稿)》】속 권1413판 좌 : 〈수당유공묘갈명(遂堂柳公墓碣銘)〉186)14판 좌 : 〈유인오씨묘갈명(孺人吳氏墓碣銘)〉화도수정본 : 모두 '묘명(墓銘)'으로 되어있고, 묘명의 총목차가 있다. 【《후고》】18판 우 10행 : 〈운가심공묘지명(雲稼沈公墓誌銘)〉 위.화도수정본 : 〈동돈녕오공묘지명(同敦寧吳公墓誌銘)〉이 있다. 【《전고(前稿)》. 이하 같다.】속 권1541판 : 〈전불관전(田不關傳)〉. 최성범(崔性範)187) 군이 관서(關西)에서 돌아와 내게 말해준 것이다.전불관(田不關)이라는 사람은 만포(滿浦)188) 기생이었다. 첨사 전(田) 아무개가 기녀를 총애하여 낳은 아이인데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모에게 길러졌다. 자태가 아주 뛰어나고 삼가 외간 남자를 보지 않았다. 16세에 첨사 구(具) 모가 처음으로 가까이 모실 것을 명하였고, 임기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특별히 기생 명부에서 빼주었다. 불관은 가까운 친척에게 가서 의탁하였다.그 뒤 첨사 조명철(曹明喆)189)이 그 미모를 듣고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조명철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비록 전관(前官)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나 곧 진영(鎭營)의 노비일 뿐이다. 어찌 감히 명을 거역하느냐?"라고 하고, 여러 날 가두어 두었다. 단옷날이 되자 조명철이 여러 기생을 모아놓고 그네뛰기를 하였는데, 불관을 풀어주면서 함께 즐기며 놀게 하였다. 불관은 이모와 작별하며 "기생 팔자 참으로 애통합니다. 저 스스로 요량이 있으니, 오늘 이후로 아침저녁 밥은 준비하여 보내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그날 밤 조명철은 불관을 불러 저포놀이를 하였다. 불관은 조명철에게 취하도록 권하였다. 조명철이 곯아떨어졌다가 밤이 깊어서야 깨어보니 불관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날 관노를 시켜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상자 속에서 그 친척의 편지만 발견하였다. 편지에 '네가 만약 정절을 잃는다면 한 번 죽은 뒤에 묻어줄 뿐이다. 하지만 어찌 다시 동기로 대하겠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수문 밖까지 찾던 중 세검정(洗劍亭)190) 아래에서 발 없는 가체를 발견하였다. 치마는 강물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물속에서 시신을 찾았다.그날 밤 불관은 완연히 수중에서 걸어 나와 노래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 곡을 하였는데 듣는 사람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밤이면 밤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슬프게 원망하니 온 진영(鎭營)이 떠들썩해졌다. 조명철은 잠들 때나 깨어 있을 때 불관이 허공에서 나타난 것을 여러 번 보았는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하여 그 때문에 병이 들었다. 당시 수령이 듣고 임금께 아뢰자, 어사(御使)에게 명하여 진영 장수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최성범이 또 말하였다.희천(熙川)의 역평서재(驛坪書齋)에 이르러 병이 나서 걸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 함(咸) 아무개가 글 한 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안에 이런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일 하나 있었는데 펼쳐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병이 몸에서 사라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강계(江界) 군수 이(李) 아무개를 만나 말을 하니, 이 아무개가 "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익히 들었소. 아주 가상하고 탄복할 일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소자가 읍지에 기록할 것을 권하고, 그리하여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만포 기생 중 불관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滿浦妓生有不關불관이 당시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不關當日有何關멀리서도 알겠구나 세검정 앞 물이 遙知洗劍亭前水천고토록 향기로운 건 불관 한 사람 때문임을 千舌偏芳一不關화도수정본 : 최성범(崔性範) 군이 관서(關西)에서 돌아와 내게 말해준 것이다.전불관(田不關)이라는 사람은 만포(滿浦) 기생이었다. 첨사 전(田) 아무개가 기녀를 총애하여 낳은 아이인데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모에게 길러졌다. 16세에 자태가 아주 뛰어나고 마음가짐을 삼가 외간 남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첨사 구(具) 모가 처음으로 가까이 모실 것을 명하였고, 임기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특별히 기생 명부에서 빼주었다. 불관은 가까운 친척 집에 가서 의탁하였다.그 뒤 첨사 조명철(曹明喆)이 그 미모를 듣고 불렀으나 불관은 따르지 않았다. 조명철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비록 전관(前官)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나 그저 한 진영(鎭營)의 노비일 뿐이다. 어찌 감히 관명을 거역하느냐?"라고 하고, 여러 날 잡아 가두었다. 단옷날이 되자 조명철이 여러 기생을 모아놓고 그네뛰기를 하였는데, 불관을 풀어주면서 함께 즐기며 놀게 하였다. 불관은 이모와 작별하며 "기생 팔자 참으로 애통합니다. 저 스스로 요량이 있으니, 오늘 이후로 아침저녁 밥은 준비하여 보내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그날 밤 조명철은 불관을 불러 저포놀이를 하였다. 불관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명철에게 취하도록 권하였다. 조명철은 곯아떨어졌다가 밤이 깊어서야 깨어보니 불관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날 관노를 시켜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다만 상자 속에서 그 친척의 편지만 발견하였다. 편지에 '너는 우리 집안의 뼈와 살을 나눈 혈육이다. 네가 만약 정절을 잃는다면 한 번 죽은 뒤에 묻어줄 뿐이다. 하지만 어찌 다시 동기로 대하겠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수문 밖까지 찾던 중 세검정(洗劍亭) 아래에서 발 없는 가체를 발견하였고, 치마는 언덕 위에 있었는데 강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물속에서 시신을 찾았다.그날 밤 불관은 수중에서 걸어 나와 완연히 원한에 찬 통곡을 하였는데 노래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여 듣는 사람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밤이면 밤마다 오가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슬프게 원망하니 온 진영이 떠들썩해졌다. 조명철은 잠들 때나 깨어 있을 때에 불관이 허공에서 나타난 것을 여러 번 보았는데, 하소연하는 듯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하여 이 때문에 병이 들었다. 당시 수령이 듣고 임금께 아뢰자 어사(御使)에게 명하여 진영 장수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최성범이 또 말하였다.올봄 희천(熙川)의 역평서재(驛坪書齋)에 이르러 병이 나서 걸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 함(咸) 아무개가 글 한 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안에 이런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일 하나 있었는데 펼쳐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병이 몸에서 사라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강계(江界) 군수 이(李) 아무개를 만났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자 이 공이 말하기를 "나 또한 여기 와서 그 일을 익히 들었소. 아주 가상하고 탄복할 일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소자가 읍지에 기록할 것을 권하고, 이어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만포 기생 중 불관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滿浦妓生有不關불관이 당시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不關當日有何關멀리서도 알겠구나 세검정 앞 물이 遙知洗劍亭前水천고토록 향기로운 건 불관 한 사람 때문임을 千舌偏芳一不關○변 : 이 전(傳)은 진주 사람은 최명희가 대신 짓고 고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설령 대신 지었다고 해도 이미 친히 명(命)하고, 또 친히 감수(監修)하였다면 곧 선사가 직접 지은 것과 같으니 함부로 손대지 못한다. 더구나 대신 지은 것이 아니라 친히 짓는 걸 국영환(鞠瑛煥)191)이 당시 목격한 적이 있었음에랴. 이에 국영환의 기록을 아래에 덧붙인다.○선사께서 태안에 계실 때 내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최명희가 관서(關西)에서 돌아와 알현하고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꿇어앉아 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만포의 기생 전불관의 사실(事實)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께서 다 보고 나서 말씀하시길 "이렇게 천한 기생으로서 이런 절의가 있다니 또한 기특한 일 중 하나로다."라고 하시고, 그날 저녁에 〈전불관전〉을 지었다. 제생이 모두 베껴서 송독하였다. 나는 숙독하며 입에 올라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때는 무술년(1898) 봄 3월이다.화도수정본 《간재선생문집사차(私箚)》 상ㆍ하권에 〈여신앙여(與申仰汝)〉 장편 편지, 〈수현재우기(守玄齋偶記)〉, 〈자서조동변(自西徂東辨)〉과 〈양집제설변(梁集諸說辨)〉이 있다.【《전고》】 이미 진주본에는 〈신앙여에게 보낸 편지(與申仰汝)〉와 〈수현재우기(守玄齋偶記)〉는 원편(原編)에 옮겨 두고, 변(辨) 두 편은 《별집(別集)》에 넣었다. 卷一二十八板左五行: 《答金混泉》.華本: 《答混泉金公》. 【《前稿》. 下同.】○辨曰: 混泉癸未生, 長先師十八歲, 故加"公"字而敬之. 今刪之, 非先師意.三十六板 左十一行: 向來儒疏引之, 蓋欲援張子而入於己, 以拒他人之非己. 【《答沈參判》. 下同. 】三十七板右三行: 今如儒疏之言.華本: "儒疏"幷作"疏儒". ○辨曰 : 一字倒置, 人文所指迥異.卷二三十五板左五行: 愚之獻忠, 止於此而已. 如曰未然, 請以各尊所聞, 各行所知爲事, 無復可望於必同, 如朱子之所歎也. 【《擬與柳穉程》】華本: 各段低一格. ○辨曰: 別段低書, 所以別致丁寧之意, 今連作一段, 失先師意.卷三十七板右七行左方.華本: 有《問金正斯書》. 前書所敎愚, "在國恤中 麻衣布笠外 無他道理"之喩, 固當然也. 臘月祥後, 欲仍著素笠衣帶. 蓋用以寓亡國遺民之恨. 若乃子孫門生, 不必然, 此義未知如何. 【後聞徐斗益所傳, 則韋公以余祥後仍著素笠衣帶之說爲善. 】一條. 【《後稿》. 下同. 】 ○辨曰: 先師生前, 擇大關時諱者爲別集, 至其略涉者則否. 況此等文字, 只論時義, 不涉時諱, 何所關而入別乎? 若此類者, 甚多, 絶非先師平日意. 而使義理文字, 不見於原集, 誠所慨惋.二十七板右十一行: 家有父兄而也不尊, 世有聖賢而也不尊, 天有上帝而也可褻, 身有天性而也可貶. 【《答朴正端》】華本: 無四"也"字. ○辨曰: 以己見添字於先師文, 是何變也.卷四十七板右六行左方.華本: 有《答盧仁吾書》. 所詢愚身後誰可爲得其傳者, 愚自無所見, 其佗更何問也? 程門諸子, 晦翁且謂"其倍師而淫異", 甚矣, 傳道之難也. 炳菴無恙日, 愚意其邃學正識, 堅操厚德, 可以上續全翁之緖. 此友不幸遽九原矣. 自餘諸子未有可擬望者, 區區不勝禪宿之淚爾. 一篇. ○辨曰: 此爲先師悼往憂來之文. 忍滅之乎?二十板右三行: 本生嫁母, 當服大功. 蓋一出一嫁, 不得不然也. 服盡前着白笠, 自後用墨笠帶以終心喪, 恐得. 【《答柳善一》】華本: 無. ○辨曰: 此非定論, 故親刪者. 金益容《答金澤述書》曰: "本生嫁母, 當服大功說, 載《梅山集》, 而以先師附籤觀之, 服朞似宜. 所示大功之說, 載晉本而華本無者. 或以降服大功之未安而親刪否? " 梅山曰: "有人於此, 取其弟之妾子而子之, 因之承嫡, 所謂妾子之母, 乃父之不率育者. 當服嫁母齊衰杖朞者也. 過房則當爲之降服, 服不杖朞乎. 服不杖朞, 則與本生嫡母, 無差殊, 服大功, 伸心喪三年, 恐宜. " 先師曰: "與嫡母無差殊, 似不當拘. 蓋庶子父在而母亡, 則不分嫡母妾母, 同爲杖朞, 則二母無差殊, 何必拘乎? 然則, 梅翁之以大功爲宜云者, 但欲別於嫡母也. 若無嫡母者, 則不降而服朞, 可知也. "卷六十九板右十一行: 如今……足下守義力學之詳, …… 【《答崔近述》】華本: 如今專尙文辭, 擺脫衣冠之世, 得聞此至論, 固已敬歎. 旣而又從邊舜何, 田平中, 聞足下守義力學之詳. ○辨曰: 刪"聞"字, 則詳字無所當. 急於刪削, 以致先師之文, 文理未通, 大是異事.二十板右一行: 士生斯世, 上黲下黷, 靡所於自見, …… 【《答許巖卿》】華本: "自見"作"往"字.卷十四十一板右: 《與權永巽書》 "言語須要∼"條. 【庚申】華本: 《答金玄淳》 【《前稿》. 乙巳. 】卷十一十二板左: 《與朴蘭緖書》. "士習民俗∼"云云一條.華本: 無. ○辨曰: 毋得妄添一篇. 拘於顔私, 復行變通, 是欺其朽骨, 無知先師遺書也.卷十二七板左七行: 道體, 被人不敬, 後便不立. 【《答李喜璡》】華本: 無"後"字. 【《後稿》 下同. 】卷十三二十八板左十二行: 彼之强拗, 固不足責也. 怪事怪事. 【《答朴大鉉》】華本: "責"下, 無"也"字, 有"若吾亨文之疏通豪爽者, 何復狐惑而莫之醒也. " 十九字. ○辨曰: 旣云"固不足責. ", 則復何言"怪事"? 此間必有"若吾亨文"以下十九字, 然後方成文理. 今刪去亨文可怪之事, 獨存怪事字, 是何義意? 眞怪事怪事.三十七∼八板: 佗說猶或有沈吟之思, 至於此等大頭腦差誤處, 豈容有些依違不決之態也? 大抵如吾洛中先賢所述, 程、朱"氣稟或異, 而性、理一同, 澄治氣質, 而復還性初"之說, 則其於天命、人心、聖學、世道, 何所礙滯, 而棄却四書集註章句鐵板定本, 乃自撰出"太極纔在陰陽之中, 便非本然. 天性纔在氣質之中, 便非本然"之說, 自謂"此是洛、閩正傳 " 而思以易天下也? 區區竊怪夫如此立說, 何所裨益於性理之學;何所開明於心術之用, 而費盡氣力, 棄了禮遜, 以自歸於跨越湖、洛, 輕蔑師友之科, 使人苦痛苦痛. 古今天下, 曷嘗見不在陰陽之太極, 不在氣化之天命, (不在氣質之性. )1)不在形器之道? 來今言"天地之性", 則雖百濟卿, 必不敢指爲氣質弗性之性. 然殊不知"天地"二字, 已是指天氣地質而言也. 又如言"天命之性", 亦未嘗外乎人物形氣而言. 此又具在《中庸》首句註說矣. 《聖學輯要》釋"氣以成形, 理亦賦焉云, 理氣元不相離. 卽氣而理在中. " 此何嘗以理之在氣, 不得爲本然耶? 《大全》釋"生之謂性"云. 卽此人物所稟以生之氣, 而天命之性存焉. 此與《中庸章句》、《輯要》小註, 如印一板, 三歲孩兒, 亦皆知得. 獨鄭濟卿, 具得別眼, 掉得異舌, 旣以自誤, 又以誤人. 此豈其人胚胎之初, 眞有稟得恁乖之理而然耶? 愚與姜磬山大集語, "以爲從氣質言, 則雖說人物稟性不同, 實亦無害. ", 正如今濟卿之言. 旣而旋覺其誤, 而痛舍舊見, 自後不敢復如此說. 今其人, 雖力主舊見, 亦安知其不覺誤而歸于正也. 若他人欲渠急改, 而力與辨斥, 恐非惟無益, 或反使之愈執而愈不可救也. 願而見, 但自信老洲人物性論, 而對所親諸友, 略擧大源頭以說與, 使之不被其誤而已. 勿復與之說往說來, 以損聖門沈潛淳厚之風也. 【《答吳震泳》. 下同. 】華本: 作小註"獨鄭濟卿"以下至"理而然耶"三十九字刪去. ○辨曰: 小註作大文, 刪去者, 還存之, 大違先師用意之至.卷十四六板右三行: 若其言行心術之妄錯, 一毫不可掛於口頭筆尖. 是爲心弟學性師之道矣. 愚於是. 將以驗而見之有見無見、有德無德, 而見其敬聽而謹守之哉! 【愚性素癡昧, 未有可以當盛心者, 至此一言, 不妨作而見平生之師也. 】華本: 下"而見"下, 又有"而見"二字. 小註末有"僭越之言, 知罪知罪"八字. ○辨曰: 再呼"而見", 及"僭越、知罪"之云 以致丁寧嚴重之意. 今刪之, 豈其惡聞歟!卷十六十一板: 《答鄭世永書》 如曰: "人物氣, 雖萬別, 而理之稟受, 則同. " 則愚於言下. 何惜一唯? 若曰: "聖凡氣旣不同, 則理之稟受亦異. "【人、物、聖凡互文】, 則雖與之言終日, 亦莫能不違如愚矣. 請不復也. 請且少置"同受異稟"之說, 急要就心術, 精察公私得失之辨焉也.華本: 《答鄭世永朴昌鉉》 "如曰"上, 有"二公"二字, "請"、"且"之間, 有"二君"二字, "辨"字下, 無"焉也"二字.十五板右十三行左方.華本: 有《答鄭世永書》. 佗日此漢身後, 不須問瞑目與否. 卿與而見下氣以循理, 釋爭而得和, 則吾目瞑矣. 不然, 雖致奠, 吾不歆矣. 【吾非欲二公強改理氣所見. 只望心氣和平, 以求無乖乎性情之德而已. 】一條.卷十七三十五板九行: 每至夕陽, 簡此一日所爲. 【《答崔鍾文》】華本: "此"作"點". ○辨曰: 此類意其錯誤. 然旣不見於彼之正誤表, 亦難以此看做. 而又恐正之未盡, 則不必深論. 但遂已之, 則無以見華本本文, 故竟錄之.卷十九三十九板左一行: "湖論諸賢"【《答金澤述》】華本: "湖論諸先生" 【《前稿》】卷二十六板右十一行: 象山以陰陽心靈, 爲形而上, 爲不察氣慾之害. 【《答田璣鎭》】華本: 下"爲"字作"而". 【後稿】十七板左: 《與千河運書》 【乙卯】二十九板左: 《答盧憲九書》 【丙辰】華本: 幷無.卷二十三一板右十二行 : "士子而悠泛者. 獨無竆醜之恥乎. 奉勸後輩. 宜加惕念" 【《答柳永善》. 下同. 】華本 : "後輩"作"禧卿". 【《前稿》】七板左十行 : "穆上"華本 : "李某"【《後稿》. 下同. 】二十六板左七行 : "只對平昔所見者. 跪進於明者之前. "【《答金孝述》】華本 : "對"作"將".二十九板 : 《答具然直》華本 : 《答某》 ○辨曰 : 門人變節者, 割名於《觀善》之錄、《私稿》之編. 先師平日嚴正法門, 今擅改於旣沒之後, 此爲欺師, 無知之大者.三十三板 : 《答尹夏明書》 【己未】華本 : 無.卷二十四二板右十行左方.華本: 有《答崔愿書》某門非吾梅山先生流派乎? 使其或未思而有過擧, 在我之道, 但當用愛惜之心和平之辭以待之. 此自是將心循理之學, 盍相與勉之? 切勿與之兩相抵排, 而復蹈柳、洪諸人仇視柳持平之覆轍也. 愚自謂吾之此心, 可以對梅翁見毅堂而無愧矣. 一條, 而低一格.十五板左一二行: 比讀《宋子大全》趙浦渚告宣廟之言. 【《答朴東信》】華本: 比讀《宋子大全》, 得趙浦渚告宣廟之言. 【趙浦渚語, 見《神道碑文》. 】二十六板左: 《答金植沅書》 【丁巳】三十板左: 《答梁正鎬書》華本: 幷無.卷二十五九板左: 《答金鍾玄書》 "士君子云云"、"人或可欺云云"、"曰義則云云", 三條.華本: 無.卷二十六三板右十一行【止】左一行.金於柳之改案也, 決不妄使客氣, 惡詈其所深許之高弟矣. 【柳答金書 "斥之以陷師而發拍地慟哭之語;目之以射父而示大義滅親之意. "】 柳於金之惡詈也, 決不苟爲唯諾, 强立其所不安之正案矣. 【柳勉從金說, 立正案, 逮金沒而還收矣. ○《與關西諸生》】華本: 金於柳之改案也, 決不被客氣所驅, 而惡詈其所深許之高弟矣. 【柳答金書曰: " 斥之以陷師而發拍地痛哭之語;目之以射父而示大義滅親之意. "】 柳於金之惡詈也, 決不爲私意所牽, 而還就其所不安之舊說矣. 【柳告華西象文, 自以前日之調補爲誤, 而還收其正案矣. ○《前稿》】二十一板右十三行: 卽氣【缺】, 非惟害理, 亦絶非農巖老洲之本旨也. 【《答金容承》. 下同. 】華本: "卽氣"下、"非惟"上, 有"作卽乎氣看, (則)無碍. 若作卽是氣看, (則)" 十五字. 【《後稿》, 下同. 】 ○辨曰: 故刪而敗文, 何云缺也?二十二板左四行: "有爲"二字, 亦曰: "自然爲主宰, 非如神之有情意造作. " 【此一句. 老洲語. 】2) 則可無疑矣. 下.華本: 有"卽氣之卽. 如作就字看. 尤覺灑然矣. "十四字. ○辨曰: 作就字看與上段卽乎氣看相照, 爲一篇之眼目. 而先師所灑然者, 渠不灑然而刪之?卷二十七四十三板右三行: 小註"淸安縣 文芳里 崔東晙家"十字. 【《惺山書社示諸君》】華本: 無. 【《前稿》, 下同. 】 ○辨曰: 有關之本註, 且多刪, 而有無無關之自註, 乃冒入, 是何心也?卷二十八一板左八行: 切望諸賢須存得畏天之心, 守得在己之道, 施得悲人之情. 此不是小事. 【缺】 【○《示諸君》】華本: "小事"下, 無"缺"字. ○辨曰: 語已斷矣. 故本無文, 而云缺, 可異也.卷二十九二板右: 更按, 退翁答高峯書, 旣言"理發而氣隨之", 而下段又有"理乘氣行"之語, 有"人非馬不出入. "之譬. 金而精書, 先言"動者是心, 而所以動之故是性也. " 而下段復有"理發而氣隨"之語. 李宏仲書, 亦以"理發氣隨"及"性理無形影"、"心情該載發用"之語, 前後幷用之. 然則所謂"理發而氣隨"之者, 先生之意, 無乃以循理而發, 是自然之動, 而亦可謂之理發, 故云爾歟! 不然, 而若作理自發氣隨後看, 則與所謂"不出入"、"無形影"等語, 自相矛盾而不相通矣. 觀者, 請下一轉語.○或曰: "退翁臨終數旬前, 答高峰書以理用'爲活而顯行'者. 然則, 夜對之云, 又安知非未定之論乎? "余曰: "夜對說話, 是就四端上, 指此心之循理而發者;高峰往復, 却是就物格處, 指此理之隨心而到者. 彼此顯有賓主之分, 非可以相準而立疑者也. 況高峰回書有'此理不自在之累. '云, 而退翁未及見此說而下世. 故無復有之論, 惜矣惜矣! 至於尤翁, 又累言與朱子意不同, 則後學於此, 何其執一而廢其餘乎? "【《晦退栗三先生說質疑》】華本: 然則理發氣隨之仍存, 何也? 豈非循理而發, 是自然之動, 而亦可謂之"理發", 故仍存而不必改歟? 抑又念之, 退翁以《十圖》進御後, 頻數改易爲未安, 屢見於文集. 今之仍舊, 豈或以是歟! 不然而必欲作理循理而發【理發】, 而所乘之機隨而動【而氣隨】之義看定. 則恐決非退翁之本指也. 玆以質於明者. 【《後稿》】 ○辨曰: 此命題以質疑者, 決辭也. 故以"決非退溪本指"終焉. 若如"更按"以下說, 則是爲設疑之未定辭, 烏在其命題之義? 此先師所以親書書頭曰: "庚申再看, 無疑. 壬戌上元三看, 亦無疑, 勿刪爲得. ", 嚴防後人改刪失却本意之弊也. 彼邊謂"更按"以下, 先師用南軫永說, 命崔秉心代草者. 南送之, 淸道添入, 蓋一時試草棄不入稿者. 南則送之, 吳則添之, 破敗積年精檢無疑勿刪再三丁寧之訓. 噫! 其無嚴矣.卷三十六板右四行: 用布【缺】 【○《衰服說略》】華本: "用布"下, 無"缺"字, 有"方八寸, 摺爲四寸. "七字. 【《前稿》 下同. 】 ○辨曰: 《大全 答周叔謹書》云: "用布闊四寸, 長八寸者, 摺其兩頭, 卽方四寸, 綴於領旁. " 無"用布方八寸, 摺爲四寸"之文, 則今此"方八寸"之方, 是"長"字之誤寫. 蓋先師所引周書, 主證"辟領綴於領旁". 與《家禮》槩同, 而其前後各得二寸四寸之長短得失未及詳論. 至李喜璡書, 乃言之. 頭註當云 "方八寸"之方, 攷《大全》, 當作長, 可也. 何故故刪原文七字而云缺也?三十九板左七行: 此月朝家之所宜兢兢. 且梅山自引疏曰: "臣所獻議, 極涉妄率, 罪不勝誅. 謹附首實之義, 冒請當律. " 此是明白改正, 而今淵齋以"前後相截"、"半上落下"、"兩截義理"等語譏之, 何也? 梧陰論退溪改定服制事云: "一國賴之, 其利博哉! "此尤菴答屯村書. 胡爲乎今之君子異於古之君子也? 【《看淵齋雜識》】華本: 此月朝家之所宜兢兢也. ○附《肅齋集ㆍ與洪鰲谷書》: "先生獻議, 及上疏草, 敬覽. 而愚見從初以不敢戚君爲主. 故每謂沙溪、同春說, 當遵無疑. 今乃因事, 釐正祝式, 自此以後, 媢疾者之嘵嘵不已, 必欲售其醜正之計者. 可以一掃而無虞矣.卷三十二十二三板: 《田氏譜圖》 小註官階.華本: 無官階.二十三板右十二行: 仇滄柱條上. 【《瑣墨》 下同. 】華本: 有尹喆圭之詐傳飭令, 而誘逐賓師也. 朝廷雖不勘核, 章甫卻當聲討. 朱子所作《陳正獻公【俊卿】行狀》云: "公奏曰: '王琪妄傳聖旨, 移檄邊臣, 增修城壁. 此事係國家大利害、朝廷大紀綱, 而陛下之大號令也. 今琪所犯如此, 謹按律文: 「詐爲制書者絞. 」 惟陛下早賜處分. ' 於是有旨削琪官而罷之. " 今尹罪視王琪, 不輕而重, 明矣. 當引此陳章, 縱不得絞削, 亦足以明大義於世界, 使賊徒喪膽, 而儒林少振矣. 惜乎其未也. 一條.同板左十二行: "學者須先"條上.華本: 有聞有致郡守于書塾, 升講座, 令諸生詣講. 昔宋高閌字抑崇, 從龜山、和靖遊. 高宗幸太學, 秦熺執經, 高公時爲司業, 講泰卦. 胡五峯以書責之曰: "閤下爲師儒之首, 不能建大論明天人之理, 乃阿諛柄臣, 希合風旨, 求擧太平之典, 欺天罔人, 平生志行掃地矣. 今使髡宰執經聽講於家塾, 五峯復起, 謂當如何? " 全氏祖望作《長春書院記》云: "秦氏當國, 思陵臨太學, 憲敏 【高公諡】 講易之泰, 五峯疑焉. 及秦梓求昏于憲敏, 不得. 卒以見忤罷官, 五峯始釋然. 蓋大儒之砥礪名節, 一步不苟. 而憲敏之無愧良友, 卽其所以得統師門者也. " 余欲使士類時誦《長春院記》, 以自樹立. 【高公在龜山門爲高弟. 其《春秋集註》遠過于胡文定. 其《厚終禮》則朱子多采用之. 此亦謝氏說也. 】一條.二十四板右七行: "乾坤十變" 條上.華本: 有時輩令車夫削髮, 則皆反對曰: "我輩不削髮. " 復令曰: "然則, 汝輩營業, 日人代爲之. " 車夫爲文通諭曰: "營業寧可失也, 削髮決不爲也. " 【此載戊申八月十一日新聞. 此語上與天聖合, 奇哉! 】 噫! 彼車上高坐某大臣某大臣之髡首夷裝者, 能不愧死乎! 見今觀察、郡守、令鄕曲、官人, 就名姓下, 註以削不削, 則書不削者絶無. 彼平日視車夫輩, 何等賤侮, 而今乃如此, 豈不負醜入地乎! 我輩學者, 宜於此大加警惕, 誓毋爲車夫之罪人也. 謝山全氏作《宋儒王厚齋像記》, 其中以明儒所議 "厚齋入元爲山長"一節, 立辨云: "此事史傳、家傳、志乘皆無之, 不知其所出. 然卽令應之, 山長非命官, 無所屈也. "【止此】 余謂季世多此等誣妄. 如李牧隱入本朝之說, 亦其一也. 然此是當日失身之輩, 欲汙衊賢者. 以冀免己恥也. 年前新聞誣載崔公剃髮, 仍有製進開明帽之嘲. 【丁未六月二十五日新聞. 】 往年新聞, 又立《南儒向明》、《削何避何》兩題, 而暗指老拙. 此皆爲改節者之所譸張, 而爲新聞者, 亦喜聞而樂道之. 渠輩于儒流, 視爲讎敵, 而猶欲藉重, 眞可惡而亦可笑也. 二條.二十五板右十行: "聖人之心" 條上.華本: 有尹穡初擢用, 力言"但得虜和三二月. 綱紀自定. " 龔實之云: "便見佗人耳聾, 敢如此說" 年前某人言 "日人于我眞心和好, 我能相信, 必得其力. " 余曰: "彼使我撤兵營鎭營及盡收兵器而去, 一切有助之事, 幷令罷休, 而猶信其有好意, 此眞無目者. 今見《語類》所記尹穡語, 可謂聾瞽相對." 胡澹菴作《春秋解》, 求鄭億年作序, 而書報於范直閣 【如圭】. 范公答云: "鄭不知是何人? 得非劉豫左相乎? 請去之. 胡公見識如此, 極可歎也. 《語類》范蜀公作《溫公墓誌》, 全用東坡行狀. 而銘多記當時姦黨事. 東坡令改之, 蜀公令東坡自作. 因以蜀公名出, 其後却無事. 若范所作, 恐不免被小人掘了. 【見《本朝人物ㆍ百三十卷九板ㆍ淸國本》】 朱子作《魏元履誌》, 而以曾覿勢方盛, 不載魏公疏論覿召還事而曰: "恐貽丘隴之禍. "南軒撰表, 亦倣此意矣. 後朱子因跋墓表, 而始盡發之. ○愚作《全翁墓文記》 "耶穌邪說之害, 必至亡人之國而後已. " 潤萬慮邪徒遍滿國中, 而其勢, 亦甚可畏. 恐毁去其刻字, 令刪之, 然心甚未快. 今以朱子所論范公作及所撰魏公誌, 觀之, 亦或爲一道耶. 戊申至月五日, 愚在暀嶝. 是日適先師諱辰. 不勝羹牆之慕云爾. 三條.卷三十三六板右十三行左方. 【《㤓言》. 下同. 】華本: 有今日西洋各國, 英吉利最號富強. 而天主敎之徒, 結黨謀叛, 窖公會殿下, 藏火藥, 侯王至, 將轟殺之, 事覺誅死. 査理第二弟嗣位, 素習天主敎, 強民從之. 民習耶穌敎, 久不肯變. 渡海招荷蘭王爲主. 又國人競尙耶穌敎, 而馬理 【女姿絶世. 】 仍執天主敎, 殺夫有邪行. 又父子異財, 飢寒不相恤, 債負不相償, 終其身, 如路人. 三綱之斁敗如此, 其佗又何論也. 苟鞠其源, 咸出於利之一字. 甚矣! 利之爲害也. 柰之何執政者之莫悟也? 一條.十四板左十三行左方.華本: 有國家之屯難極矣. 危亡在呼吸間, 使主上知求而往明之義, 至誠求賢. 致敬以迎之、誠信以任之, 則爲賢者者, 其出處宜如何? 出而用世, 則其于各國, 何以待之? 與之同朝共居, 則華夷無混處之義、苗莠無相容之理. 若欲攘斥而驅遣之, 彼勢方盛, 吾力未足, 安能以正道顯然逐之乎? 若謂賢者不當出, 則遯之"與時行"、否之"志在君"、蹇之"蹇蹇", 固已不然. 又與夫聖人不以無道必天下而棄之之心, 不同矣. 未知如何? 抑陰盛而抗陽, 則君子亦不可以有行也歟! 恐聖人之視天下無不可爲之時, 則亦必有處之之術. 而其妙用非常人所能揣度. 姑以淺見言之, 今日所當受用者, 其惟屯之"小貞之吉"乎. 所謂"貞"者, 如立志講學、擧賢黜邪、尙義下利、信賞必罰、節用愛民之類, 是也. 此數者, 苟能深明而實行之, 則彼各國之人, 必將畏服而不敢侵凌矣. 至於各國已立之約, 則欲一朝盡更之, 徒致凶咎而事終不成. 今且先擇其甚不便於國計民生者若干條, 至誠陳其利害, 漸圖變通之道. 而彼若適己自便, 不恤我邦, 則便非交鄰之道. 亦必善爲辭令, 辨其是非, 而歸曲於彼, 彼雖強悍, 終難據曲以爲壯. 且彼之奇技淫巧之屬, 學之何用? 而乃以此有求於彼, 而使彼得以此致驕於我也? 自此宜一刀兩段, 不復置意, 以示無求於彼之意, 則我雖寡約3), 亦將守正以自強矣. 程子論處蹇之道曰: "凡處難者, 必在乎守正4). 設使難不解, 不失正德, 是以吉也. 若遇難而不能固守, 入於邪濫, 雖使苟免, 亦惡德也, 知義命者, 不爲也. " 今也不行先王之舊章, 反效裔戎之新法, 置吾民於度外, 却養豺狼於城中. 此所謂"入於邪濫"而知義命者之所不爲也. 一條.十六板右九行左方.華本: 有今之時, 天地正氣已衰、聖賢道術寖弱. 故夷狄禽獸, 橫行中國;異類邪說, 蠧食人心. 吾儒幾人竆而在下, 未可與之爭鋒. 【伊川先生言 "時之盛衰、勢之強弱, 學《易》者, 所宜深識. 】 且須與知舊朋輩, 潛相講辨, 默與挽回, 是爲持守父母之遺體, 傳述先師之道學, 以輔助吾君之風化. 庶幾如碩果不食, 以爲復生之本矣. 一條.二十二板左四行左方.華本: 有近聞一種議論, 謂"夷狄亦人, 不必外之. " 此疑於仁厚. 然殊不知彼雖人形, 而其氣則固與物無異. 是以謂之"非我族類, 其心必異也. "是以謂之"在人與禽獸之間, 而終難改也. " 自古未聞有與夷狄混雜而終無事者. 是知先王之攘之也, 以彼帶得見攘之理來, 從而攘之耳. 是所云"物各付物我無容心者也. " 且如天地何所不容、聖人何所不愛, 但處之有道, 未嘗以其理之一而槩施之也. 余謂爲此說者, 必其於自治之功, 絶無天理人欲之辨. 故其論爲邦之道, 亦復出此淆雜之言也. 夫其始也, 爲"不必外之"之言, 是猶微有賓主之分, 其終也, 與之俱化, 而不自知其爲夷也. 凡謂"流俗不必憂、異端不必攻"者, 皆此類也. 愚謂凡生於兩間者, 雖曰"同胞", 而山海爲之限隔、風氣爲之不通, 則區域旣分、俗尙各異. 此非人之所爲, 乃天地自然之理也. 今日時論, 咸以萬國通行之公法爲諉. 然華夷之分, 猶陰陽之辨, 固難混同. 至於華與華、夷與夷, 其國俗亦各不同. 以愚料之, 天下萬國之法, 必不可得而一. 徒亂人民而已, 奈何諸公, 以爲如是, 則國可富、兵可強、民可保, 而享太平之樂? 然殊不知各國相挻, 彼皆滿其所欲, 惟有我邦了無所益. 而軍亂民散, 終至於危亡之勢迫在朝夕. 噫! 其不思之甚也. 向者, 伏睹傳敎, 以強弱之異, 學倭、洋之技. 此必諸公之所建白. 愚竊謂效夷狄之奇技, 不如得百姓之死力. 苟百姓之心. 固結於上而不可解. 則彼之火輪電線. 無所施其巧矣. 若民心渙散. 不可收拾. 則雖有利器. 將誰與禦敵哉. 善乎朱子之言曰. "古昔5)聖王所以制御夷狄之道. (其本)6)不在乎威強. 而在乎德業. 其備不在乎邊境. 而在乎朝廷. 其具不在乎兵食. 而在乎紀綱. "嗚呼. 今日諸公. 孰有以此謦欬於吾君之側也.黃遵憲欲我國結日本聯美國. 以防俄羅之患, 而邦域之內有識之士, 咸以爲不可. 而一種議論, 却謂之"神策". 至養異類於輦轂之下, 竄言者於嶺海之間. 韓非所謂"不用近賢之謀, 外結千里之交, 飄風一朝起, 外交不及至者. " 豈非今日之謂乎? 裔戎之不可一日親、華制之不可一日變, 天地之常經、春秋之大義. 而今日時論諸公, 乃謂天下大勢誰可如何, 視諸夷之混處都城, 若應行故事者然. 然愚見竊謂自古爲國, 未有失士類之心、咈百姓之情, 而可以無事者. 向來中殿出宮之變, 實緣倭夷住城之由, 是豈非九法斁敗, 三綱淪滅者耶? 見今士論沸騰、民心渙散, 危亡之勢迫在呼吸, 而諸公輕於用世, 急於榮身, 不憚以儒學之身爲陳相之行. 豈不得罪於聖人之門耶? 且如其言, 而天下大勢雖無柰何, 而吾之所以出處去就之道, 則可以自由. 誰敎佗如此枉尺枉尋而低回不去乎? 天下之有夷狄, 猶人心之有利欲. 固未有天理人欲幷立於方寸之間而終無事者, 則亦未有諸夏裔戎雜處於一國之內而卒無事者矣. 故《春秋》之(法. )7), 內夏而外夷;學問之道, 克己以復禮. 此天地之間亭亭當當直上直下之正理, 不可一日一時而有所改易矣. 今者諸公所以處倭、洋、法、美者, 一切反是, 是何理也? 今年六月之變, 乃天下萬世之所創見、天下萬國之所未有也. 而在廷諸臣, 無一人爲國母死者、無一人發討逆之論者. 亦無一人指此爲釁以爲卻敵之計者. 而一味以萬國公法, 爲藉口之端, 若其守經之論, 又指爲鄕人無識之流. 噫! 區區常竊以爲萬國公法, 不如萬世正法. 弁髦春秋之義, 重於鄕里無知之目, 則凡爲吾聖人之徒者, 寧有死, 不忍以冠帶之身, 甘爲豺狼之群. 今天下擧化爲戎. 惟吾東獨保衣冠, 有如剝之上九一爻未變. 故曩哲言 "吾輩之生, 不在乎今日中州, 而在乎一片乾淨之地, 斯已奇矣. "自今觀之, 所謂"一片乾淨之地"、時論諸公, 又從而滓穢之. 甚矣! 其不仁也. 爲吾儒者, 正當嚴於華夷之辨, 以存萬世之大防, 庶不負上帝與孔聖焉爾. 是爲目下時措之宜也. 從古異端, 其說多端, 而其所主則一. 一者何? 心是已. 吾聖賢千言萬語, 無非是主性語. 八條. ○辨曰: 自"尹喆圭"以下至此, 諸條泛論夷狄時輩, 非直斥倭虜者. 何敢改手定而盡入別集乎? 【下"近見淸人"一條、《答金重玉書ㆍ別紙》二條、《寄華敬二兒書》三條, 《自西徂東》、《梁集辨》亦然. 】 至於"從古異端"條之入別, 尤可怪也.二十五板左九行: "陽明"以下.華本: 各段.三十一板右四行左方.華本: 有淸儒多謂《家禮》非朱子作, 其說甚長. 然以余攷之. 殊不爲然也. 《家禮》"親厚入哭"註, "主人未成服而來哭者, 當服深衣. " 勉齋曰: "《檀弓》 '始死, 羔裘玄冠者, 易之而已. ' 據養疾者言之, 《家禮》所載, 據弔者言之, 文同而意異. " 勉齋, 朱門高弟. 乃有《家禮》云云之說, 何可謂《家禮》非朱子作耶? 《家禮》"祭先祖, 設祖考妣位于堂中西東. "《語類ㆍ九十卷卅九板ㆍ賀孫錄》 "用之問 '先生祭禮, 立春祭高祖而上, 只設二位, 若古人祫祭, 須是逐位祭. " 曰: "某只依伊川說"云云. 所謂"先生祭禮" 實指《家禮》此註而言. 據此則《家禮》之爲朱子作, 不其明乎? 後儒許多云云. 可一筆句斷也. 一條.三十五板右十一行左方.華本: 有近見淸人蔡爾唐8)(康)所著《宋儒貽禍中國論》, 大槩引漢、唐之嫁女稱臣於匈奴、突厥, 而謂"不足爲二代之恥. " 乃謂"宋儒傅會古訓, 攘斥夷狄. 然內夏外夷, 《魯論》未著. 今俗深中宋儒蠱毒, 輒曰: '外人夷也, 當斥遠'云云. " 噫! 此何言也? 《書》曰: "蠻夷猾夏、寇賊姦宄. ", 以蠻夷與寇賊並言之. 《詩》曰: "戎狄是膺". 《孟子》曰: "禹遏洪水、驅蛇龍, 周公膺夷狄. ", 以夷狄與蛇龍洪水並言之. 孟子又嘗以鴂舌斥南蠻矣. 果使孔子無內夏外夷之意, 又何以稱管仲之功曰: "微此, 吾其被髮左袵矣乎! "且如"夷狄之有君"及"雖之夷狄, 不可棄"、"雖蠻、貊之邦行矣"之類, 亦無非外夷之意, 而今謂"《魯論》未著. ", 將誰欺? 欺天乎! 抑亦習夷旣久, 與之俱化而不自覺也歟! 爾康又謂"復讎孔子不言而出於宋儒. " 余謂無讎則已, 旣有讎, 則當視其事之大小而處之. 小小侵陵, 雖不可一一理會, 若弑君殺父與憑威力以臣妾我之類, 又豈可不報? 湯爲童子復讎. 孔子有"不共天以直報怨"之訓. 安可謂非聖人所言? 設有人于爾康之父, 或敺打之、或殺害之, 則渠將謂復讎宋儒之異論, 而恬然無報復之心乎? 今之所謂識時務者, 所見多此類也. 若是而可以開物化民乎? 大可歎也. ○蔡論. 見載於林樂知《中東戰記》第(七卷. 而第)9)一卷首, 載朝鮮宮內大臣, 與林樂知《謝贈中東戰記書》云: "此編, 獻我陛下, 已經乙覽, 大加褒奬, 仍賜繡屛"云云. 林是美人. 蔡是淸人. 其計欲我邦一味親附裔戎, 不復理會讎怨也. 乃爲大臣者獻之君上, 至蒙褒賞, 其爲寒心, 又暇論哉! 一條.四十三板右十一行: "聖人無特"以下二條.四十六板左二行: "藹然四端"條.華本: 幷入《海上散筆》 【《後稿》】 ○辨曰: 師親定總目, 固不敢擅換. 況《㤓言》、《散筆》, 有初晩之別乎!卷三十四十七板右三行: 不可不審其所趨之分也.華本: 無"之分"二字. 【《前稿》. 下同. 】十九板右十一行: 有庶子而立族姪爲嗣者, 是仕宦家忍心害理之悖習. 而爲之子者, 無亦爲與人爲10)後者耶? 父子而如此者, 果能盡忠於君乎? 明良相遇, 宜停薦停望, 而痛革其弊也.華本: "庶"作"親", "弊也"下有小註"親子指庶子"五字. ○辨曰: 不曰"庶子", 必曰"親子", 而特懸小註, 所以明舍己子, 取他子之爲害理也, 妄行刪改, 大失本意.二十一板左九行: "試問天下∼"條.華本: 入《海上散筆》. 【《後稿》. 下同. 】同板右十行: 抑氣質有不善, 而知思不善運用.華本: 無"而"字.三十板左二行: 性固無知無能, 而謂之不可獨當太極, 則亦誤矣. 心固有動靜感應, 而謂之直是"太極", 則亦誤矣. 【《海上散筆》. 下同. 】華本: 無上"亦"字.卷三十五一板【止】六板右: "人性全善"條以上.華本: 入《雜記》. ○辨曰: 爲換置條段, 至刪先師手定之《雜記》總目, 於心安乎?三十六板左八九行: "佛家卽心認性"云云、"考證鑿心滅11)性"云云.華本: "考證"下, 有"家"字.三十七板左: "孟子歸求"以下【止】四十七板右"彼欲殺時"條、五十一板左"性是太極"以下. 三條.華本: 入《雜記》.卷三十六三十八板右十二行: "鄭某乃以"【《海屋病話》】華本: "乃"作"每".卷三十七四十二板右十一行: 孔子隱默之敎, 亦謂之"一時";墨子裹足之行, 亦謂之"中道". 【《華島漫錄》】華本: 孔子隱默之敎, 亦謂之"畵";墨子裹足之行, 亦謂之"中".卷三十八二十三板左二行: 彼光輩 【《永慕齋記》】華本: "光"下, 有"墩"字.卷三十九九板右十行: 華西諸說, 旣非聖賢本旨, 柳氏表章, 又乖華西本旨, 而亦已還收矣, 則未論. 愚之未見, 而希甯之見者, 非華西之眞正案, 乃金氏之假正案. 惜不令起九原, 而相與一笑也. 他如心性分物則、靈覺屬氣、神明形下之類, 可謂"脫出舊學窠臼, 還得朱、栗正案, 有功於斯文. " 故區區欲與萬世學者, 共之. 希甯有知, 儻以爲如何? 【雲、柯往復後論跋】華本: 立我自是, 固爲未當, 而漫相唯諾, 獨非有欠直道乎! 正案本說, 旣失聖賢宗旨, 柳氏表章之說, 又乖華西本旨, 而亦已還收矣. 雖余亦不敢妄爲宣露, 而外他諸說, 亦心性分物則、靈覺屬氣、神明形下之類, 可謂"脫出舊學窠臼, 而復得朱、栗正詮 有功於斯文. " 故區區竊欲與萬世學者, 共之. 希甯有知, 儻不以述見爲差也歟?三十一板左六行左方.華本: 有《祭趙周伯文》一篇. 【《再後稿》】卷四十一板: 《竹川神道碑》上.華本: 有《崔栗軒》、《烟村神道碑》二篇. 【《後稿》. 下同.】 ○辨曰: 二碑, 彼謂"《國典》有'非二品以上, 不得爲神道碑'之文", 而刪去. 然歷考《國典》, 未見此文. 且先師據陶菴所校《栗谷全書ㆍ贈通政大夫承旨金公神道碑》中, "爰樹神道碑"之文, 而作此二碑, 則其謂違《典》, 而刪之者, 妄矣. 別有《碑辨》, 而文多不錄.同板右十三行: "進士直長" 【《竹川神道碑》. 下同. 】華本: "進士"下, 有"仕爲"二字.同板左七行: 討論古義, 勤苦篤業.華本: "古義"下, 有"朝夕相警責"五字、"篤業"下, 有"者三年"三字.二板右四行: "一依家禮"六行: "獻陵"華本: "家禮"下, 有"先生"二字、"獻陵"下, 有"參奉"二字.同板右七行: "妓戱"九行: "膺選"左二行: "掌苑"下小註中"失"字.三行: "與民爭訟"左四行: "監司怒之"華本: "妓"下, 有"類之"二字、"膺"下, 有"是"字. "失"作"逸". "民"上, 有"村"字. "怒"下, 有"責"字.續卷一十一板右八行: "精識"【《答宋晦卿》】華本: "精"作"高".三十八板右: 《答尹明肅書》 【丁巳】華本: 無.續卷二一板右: 《答金起帆書》 【己亥】華本: 無.十五板右十一行左方.華本: 有《答金重玉書ㆍ別紙》問: 近閱《綱目》, 漢昭烈ㆍ章武三年五月, 後主卽位. 準以改元例, 則先帝之崩, 雖一日於癸卯, 當屬之章武三年, 乃大書建興元年, 何也? 又唐ㆍ中宗ㆍ景龍四年六月, 睿宗卽位, 而仍大書四年, 其下分註睿宗ㆍ景雲元年, 乃至明年, 大書二年, 何也? 曩年丁未, 乃光武十一年, 而乃於七月, 禪位于新皇帝, 改元以隆煕. 後之秉筆者, 當於丁未書光武, 而分註隆煕乎. 抑不數光武十一年而書隆煕乎? 第以本朝已行者言之, 太祖以戊寅禪于定宗, 而以明年己卯爲元. 定宗以庚辰禪于太宗, 而亦以明年辛巳爲元. 曩之改元, 有何所據乎? 答: 後漢及唐例, 恐皆非禮之正. 當以本朝定宗、太宗所行爲正. 丁未之從後主例, 不知是如何. 而秉筆者, 直書其實, 如《綱目》已矣. 問: 某丈至今戴白, 自據以《春秋》之法. 今考《春秋》註, 有"服不除"之文. 或毁以妄添《春秋》文, 何也? 又古人亦有行此者耶? 答: 據"服不除"之文, 則戴白者, 何可非之? 但宋時徽宗訃至, 以日易月, 則胡致堂上疏言"《禮》言'讎不復, 則服不除. ' 願降詔旨. 服喪三年, 墨衰卽戎. " 此引"服不除"之文, 而猶曰"服喪三年. "何也? 其後欽宗凶問至, 朱、張諸先生, 無終身素衣冠之制. 豈古今不同而然歟? 宋ㆍ德祐後, 搢紳先生, 有終身衰服者, 此見《方正學集》. 前賢所行各異, 不敢質言. 【我朝李澤堂丁丑下城後, 用黑漆蔽陽子. 申舟邨以母讎未復, 終身戴蔽陽子.】 二條. 【《前稿》. 下同.】十七板左: 《答朴士文書》 【戊午】十九板右: 《答田士誠書》 【己未】二十二板右: 《答趙東孫書》 【己未】二十八板左: 《與宋順會書》 【庚申】華本: 幷無.三十八板右十一行: 屈伸往來, 理氣自然能如此. 【《答或人》】華本: "理氣"作"二氣".續卷三七板右: 《答韓景春書》 【庚申】十九板右: 《答崔命喜書》 【戊午】華本: 幷無.續卷四五板右十二行: "帶體一用殊"【《答李喜璡》】華本: "體一"上, "帶用殊". 【後稿下同】八板左: 《答趙弘淳書》三"鄭"字.華本: 作"某"字.二十二板左: 《答魚在源書》三十三板右: 《答魚在源書》 【己未】三十三板左: 《答吳震泳書》 【甲寅】華本: 幷無.續卷五五板右七行: "子也"下. 【《答安炳道》】華本: 有小註"二韓齋儒, 後復相戾. 故永棄碑文. "十三字.四十一板左十一行【止】四十二板右三行: 懿孝殿喪事, 臣民原來無服, 而今定以朞制, 雖未合禮, 旣是時王之制, 不得已而從之, ∼鄙人受衰, 從前依渼湖已例行之, 今則無服而爲有服歟. 【《答申赫均》】華本: "歟"作"與". "與"字下, 有"大喪、內喪有間. 故成服日, 只用白衣白笠已矣. "十八字. 【《前稿》】 ○辨曰: 先師於懿孝殿喪, 只用白衣笠而不受衰, 以其無服而爲有服也. 今改"與"以"歟"而刪其下, 以成"受衰"之文, 變亂先師之事實禮意, 乃至此乎!續卷六十一板右二行: 況且父母所遺∼. 【《答盧秉準》】華本: "且"作"此". 【《後稿》. 下同. 】續卷七三十板右: 《答金植沅書》【丁巳】華本: 無.三十六板左十二行: "自促其命" 【《與李東潤》】華本: "命"作"亡".四十板左: 《答金世基書》 【壬戌】華本: 無.四十二板左: 《與韓性錫書》華本: 《與某》續卷八一板左: 《答丁兌秀書》、《答鄭瑛朝書》五板右: 《答范熙曄書》同板左: 《答范熙元書》十一板左: 《答弁敬源書》二十板右: 《答朴鏞吉書》華本: 幷《答某》.三十八板左一行左方.華本: 有《寄華敬二兒書》. 頃者仁父、而見以出而存國見勸, 此是功業爲重, 而不計道義者, 却與嘉陵諸人, 不甚遠也. 記得南軒說一段云: "志存功業者, 苟可以成其功業而遂其志, 則亦所屑爲. 此與容悅者有間. 然未及乎道義也. 古之人惟守道明義而已. 雖有蓋世功業在前可爲, 而在我者, 有一毫未安, 不敢徇也. 天民者, 必明見夫達, 而其道可行於天下而行之. 蓋其所主在道, 而非必於行也. " 余之固陋, 固不敢與議於全盡天理之大賢? 然其志則主於道義而不欲爲功業所累也. 而見平日未免有些事功爲重底意思. 至於仁父, 所執未必與之同矣. 但被事勢已極、禍辱已迫, 而不免少動了. 信乎定見之難, 固守之鮮也. 只此亦可見天資雖美, 而師友講明, 正不可少也. 程子論革之六四12)(二)曰: "時可矣、位得矣、才足矣, 【余果有此三者乎? 】 處革之至善者也. 然臣道不當爲革之先. 又必待上下之信. 【余果得上下之信乎? 】 故已日乃革之也. 如二之才德、所居之地、所進之時, 足以革天下之弊、新天下之治. 當進而行道則吉. 不進則失可爲之時, 爲有咎也. " 此於二君之苦勸與余之堅執, 豈不昭然如視諸掌乎? 退台雖以吾言爲是, 然其曰"向來失可爲之機者. " 却與二君之見, 不甚異也. 所謂"向來", 卽昨秋遣任聖武, 言儒林當出而有爲者也. 昨秋之於今春, 儒者不待上下之信, 而遽然出脚之義, 有何分別乎? 宋強哉書來, 力辨退說之非, 而反疑其從前可以有爲而不爲者, 此似退台之不得辭其責也. 頃者而見之初來也, 傳孟士幹之意云: "某丈一起, 則國中士流皆響應. " 又曰: "京中則有某某可仗, 闕內則有某宮可通. " 余謂"士君子有爲, 詎可從某宮做事. " 及而見再來, 却言"某人比已剃髮. 誠是意外. " 余曰: "賢輩所擬以爲可仗者如此, 誠可笑也. " 雖然, 使余從其言, 而出門投書於外府, 照會於各館, 而與列國公使, 一番爭詰. 退得些子進勢, 緩得些子急禍, 則一時民譽必厚得矣. 然是豈君子出處語默之精義乎? 昨年余擧退台說, 以問於徐丈, 則答謂迂闊而曰: "彼豈不知是非, 而爲此侵暴耶? " 士幹豈不聞其師之有是先見而云爾歟! 三條 . 【《前稿》】四十四板右五行: 卑賤之弔, 當有四拜. 【《寄鎰精》】華本: "四"作"謝". 【《後稿》】續卷九十九板右: 《書贈南軫永李徽在》 【庚申】華本: 無.二十板右十行: 今年, 余與諸賢, 讀書于湖南之瀛洲山中. 【《訓柳永善》. 下同. 】華本: 余讀書瀛洲山中. 【《前稿》. 下同. 】同板左二行: 所受於函席者爲準. ○"博文約禮∼"云云.華本: "爲準"下, 無圈. "博文"以下, 幷大小字, 皆作小註.二十五板左: 《示劉永渫》【辛亥】華本: 無.三十七板右九行: 天下之談仁義爲諱.華本: "之"作"以". 【《後稿》】續卷十三二十一板左二行: "孫君"華本: "孫晦隱" 【《再後稿》】續卷十四十三板左: 《遂堂柳公墓碣銘》十四板左: 《孺人吳氏墓碣銘》華本: 幷作"墓銘", 而有墓銘總目. 【《後稿》】十八板右十行: 《雲稼沈公墓誌銘》上.華本: 有《同敦寧吳公墓誌銘》. 【《前稿》. 下同. 】續卷十五四十一二板: 《田不關傳》崔君性範, 歸自關西, 語余曰: 田不關者, 滿浦妓也. 僉使田某, 房妓幸愛所生, 九歲喪母, 被養於姨. 頗有姿色, 謹愼不見一人. 年十六, 僉使具某, 始令昵侍, 及遞歸, 特除妓案. 不關往依嫡親. 後僉使曺明喆, 聞其美召之, 不從. 曺怒曰: "汝雖前官所眄 卽鎭婢耳. 焉敢違令? " 囚多日. 値端陽, 曺集諸妓, 爲鞦韆戱, 釋不關, 同娛遊. 不關別姨母曰: "爲妓生八字, 極切痛. 自有料理, 今後朝夕之飯, 勿備送. " 是夕曺召不關, 賭樗蒲. 不關勸醉曺, 曺熟睡, 夜闌方覺, 不關無迹. 翌日令官隷四求, 但得其嫡親書篋中. 云"汝若失行, 一死之後, 埋之而已, 豈復以同氣待之乎? "尋到水門外, 忽見洗劍亭下髢髻無足. 裳在沿江上下. 日暮於水中得尸. 是夕不關宛然步水中, 哭如歌如訴, 聞者斷腸. 夜夜久益哀寃, 一鎭騷擾. 曺寤寐間, 屢見不關從空而至, 如欲索命, 因成疾. 時宰聞而奏之, 命御史勘罪鎭將. 性範又曰: 至熙川之驛坪書齋, 病不能行. 主人咸某, 出示一編書. 其中有此, 眞曠世之一奇蹟, 披閱之際, 不覺疾痛之去體. 歸途見江界郡守李某語之. 李云 "吾亦飽聞其事, 深用嘉歎. "小子勸書于邑誌, 因題一絶云"滿浦妓生有不關, 不關當日有何關. 遙知洗劍亭前水, 千古偏芳一不關. "華本: 崔君性範, 歸自關西, 語余曰: 田不關者, 滿浦妓也. 僉使田某, 房妓幸愛所生, 九歲喪母, 被養於姨. 年十六, 頗有姿色, 持心謹愼, 不見一人. 僉使具某, 始令昵侍, 及遞歸, 特除妓案. 不關往依嫡親家. 厥後僉使曺明喆, (聞其美, )13) 以房妓召之, 不關不從. 曺怒曰: "汝雖前官所眄, 卽一鎭婢耳. 焉敢違逆官令? " 牢囚多日. 時値端陽, 曺集諸妓, 爲鞦韆戱, 釋不關, 使同娛遊. 不關別姨母曰: "爲妓生八字, 極爲切痛. 自有料理, 今日以後朝夕之飯, 勿爲備送. " 是夕曺召不關, 賭樗蒲. 不關度不免, 勸醉曺, 曺熟睡, 夜闌方覺, 不關無迹. 翌日令官隷四求不得, 但得其嫡親書篋中. 有云 "汝以吾家骨肉. 汝若失行, 一死之後, 埋之而已, 豈復以同氣待之乎? " 尋到水門外, 忽見洗劍亭下髢髻無足, 裳在岸上. 沿江上下, 日暮於水中得尸. 是夕不關步自水上, 宛然冤哭. 如歌如訴, 聞者斷腸. 夜夜往來, 久益哀寃, 一鎭騷擾. 曺於寤寐間, 屢見不關從空而至, 如有控訴, 如欲索命, 因成疾病. 時宰聞而奏之, 命御史勘處鎭將之罪. 性範又曰: 今春至熙川之驛坪書齋, 病不能行. 主人咸某出示一編書. 其中有此事, 眞曠世之一奇蹟, 披閱之際, 不覺疾痛之去體. 歸途見江界郡守李某. 語次及之, 李公云 "吾亦到此, 飽聞其事, 深用嘉歎. " 小子勸書于邑誌, 仍題一絶云 "滿浦妓生有不關, 不關當日有何關. 遙知洗劍亭前水, 千古偏芳一不關. " ○辨曰: 此傳, 晉人謂崔命喜代作而改之. 然假使代作, 旣親命之. 又親監之, 便同先師親作, 固不敢犯手, 而況非代伊親, 有鞠瑛煥當日目見乎! 玆附鞠錄在下. ○先師在泰安日, 瑛煥侍側, 崔命喜自關西歸謁, 袖出一冊子, 跪獻曰: "此滿浦妓田不關事實也. " 先師看畢, 曰: "以若賤妓, 有此節義, 亦一奇事. " 卽夕作《田不關傳》. 諸生皆登鈔誦讀. 瑛煥熟讀上口, 至今不忘. 時則戊戌春三月也.華本有《私箚》上下卷, 《與申仰汝》長書, 《守玄齋偶記》, 《自西徂東》及《梁集諸說辨》. 【《前稿》】 是已晉本, 移置申書守記於原編, 二辨, 入別集. 진주본(晋州本) 1924년 문인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권순명(權純命, 1891∼1974) 등이 주도하여, 1926년 10월 진양인쇄소(晉陽印刷所)에서 연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을 말한다. 원편(原編) 43권, 속편(續編) 16권 합 30책의 《간재사고(艮齋私稿)》로, 전우 문집의 초간본이다.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 전우가 직접 수정(手定)한 것으로 문인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이 필사하여 보존하다가 김택술의 아들 김형관(金炯觀)이 198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전우전집(田愚全集)》으로 영인하였다. 전고(前稿) 전우가 고부(古阜) 백천재(百千齋)에 머무르던 1906년 3월, 김준영(金駿榮)에게 초고를 수습하게 하여 문고 36책으로 산정(刪定)해 두었고, 1912년 11월에는 1906년에 산정해 두었던 문고 36책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 이후에 수집해 둔 글을 합하여 성기운, 권순명, 유영선(柳永善, 1893∼1961) 등이 편집하고 전우가 직접 25책으로 산정하여 '전고(前稿)'라고 하였다. 장재(張載) 1020~1077.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이 구절의 앞뒤에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을 언급하고 있다. 유치정(柳穉程)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이다. 자는 치정(穉程), 호는 성재(省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평묵과 함께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52년 이항로의 명으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했다. 후고(後稿) 1921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권순명과 유영선 등이 1913년 이후 모아 둔 전우의 초고를 정리하였다. 이것을 전우가 직접 산정한 뒤 문인들에게 선사(繕寫)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후고'이다. 박정단(朴正端) 박만환(朴晩煥)이다. 전우의 제자이다. 정자(程子) …… 빠졌다 주자는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스승의 말을 저버리고, 노불(老佛)에 빠진 자가 또한 있었다.[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 亦有之矣. ]"고 하였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이다. 전우의 제자이다. 선숙(禪宿) 노선(老禪)'과 같은 말로, 학식이 높은 노숙한 선승(禪僧)을 일컫는다. 간재를 두고 이른 말로 보인다. 본생가(本生家) 양자로 간 사람의 생가를 말한다. 백립(白笠) 흰 베로 만든 갓이다. 국상(國喪) 때 일반 백성이 쓰거나, 대상을 지낸 뒤에 상주(喪主)가 썼다. 묵립(墨笠) 상례에서 먹물을 칠한 갓으로, 묵최(墨衰)의 심제인(心制人)이 쓰는 것이다. 묵대(墨帶) 상례에서 먹물을 들인 베띠로, 묵최의 심제인이 띠는 것이다. 심상(心喪) 상복(喪服)을 입지 않으면서 화려한 의복과 주육(酒肉)을 금하는 것이다. 매산집(梅山集)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집이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 홍직필의 자는 백응(伯應)ㆍ백림(伯臨)이고, 호는 매산(梅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리파로 한원진의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임성주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를 반대하였다. 자최(齊衰) 오복(五服)의 하나로 굵은 삼베로 짓되 아래 가를 좁게 접어서 꿰맨 상복이다. 장기(杖朞) 상례(喪禮)에서, 상주가 상장(喪杖)을 짚고 자최(齊衰)로 1년 동안 입는 상복(喪服)이다. 부장기(不杖朞) 상례(喪禮)에서 1년 동안 상복만 입고 지팡이는 짚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 …… 듯합니다 《매산집(梅山集)》 권10 〈답이자강(答李子岡 을유팔월초길(乙酉八月初吉))〉에 보인다. 최근술(崔近述) 최인자(崔仁字)이다. 위도 …… 검어 이적(夷狄)의 의복을 말한다. 《간재집 전편(艮齋集前篇)》 권2 〈여송동옥(與宋東玉)〉에는 '上' 앞에 '또 불행히도 이적의 변고를 만나[又不幸而値夷狄之變]'라는 문장이 있다. 형문(亨文) 박대현(朴大鉉)의 자(字)로 추정된다. 기질은 …… 성(性) 장재(張載)가 《정몽(正蒙)》 제6 〈성명(誠明)〉에 이르기를 "형이 있는 다음에 기질의 성이 있나니, 이것을 잘 회복시키면 천지의 성이 그대로 보존되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으로 여기지 않는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 ]"라고 하였다. 기로서 …… 있다 이 말은 원래 《중용》 1장에 나오는 주자(朱子)의 주(註)이다. 이이(李珥)가 《성학집요》 제1절 〈통설(統說)〉에 인용하였다. 타고난 …… 한다 이 말은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 권30에 "장자가 말하기를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하니, 성은 곧 기(氣)이고 기(氣)는 곧 성(性)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을 이른 것이다.[程子曰: 生之謂性, 性即氣, 氣即性, 生之謂也. ]'"라고 하였다. 강경산(姜磬山) 대집(大集) 강영직(姜永直)이다. 대집(大集)은 자, 경산(磬山)은 호이다. 오희상(吳煕常) 1763∼1833.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800년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818년 은거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황과 이이의 양설을 절충적 입장에서 취하였으며,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저서로 《독서수기》ㆍ《노주집》 등이 있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전우의 제자로 1926년 진주본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1929년 《추담별집(秋潭別集)》을 간행하였다. 1943년 간재의 〈행장〉을 지었다. 39자 "유독 정제경(鄭濟卿)은 다른 눈을 갖고 다른 혀를 놀려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 남까지 어긋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이 뱃속에 잉태된 처음부터 참으로 이렇게 어긋난 이치를 품부 받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소?[獨鄭濟卿, 具得別眼, 掉得異舌, 旣以自誤又以誤人. 此豈其人胚胎之初, 眞有稟得恁乖之理而然耶? ]"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비록 …… 것 《논어》 〈위정(爲政)〉에 "내가 안회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를 함에 내 말을 어기지 않음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더니, 물러간 뒤의 사생활을 살펴보건대 또한 충분히 발명(發明)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치전(致奠) 사람이 죽은 때 친척이나 스승 또는 벗이 제물(祭物)과 제문(祭文)을 가지고 조문하는 것이다. 관선록(觀善錄) 전우의 문인록이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출신지는 경기도 포천이다. 일찍이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항로 사후에는 김평묵을 사사하였다. 홍재구(洪在龜) ?∼1898. 자는 사백(思伯)이고, 호는 손지(遜志),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출신지는 강원도 춘천(春川)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에게서 배웠으며 김평묵의 사위이다. 유 지평(柳持平) 유중교를 말한다. 유중교는 1882년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유기일(柳基一) …… 본 유기일(柳基一)과 홍재구(洪在龜)는 김평묵의 제자로 유기일은 1976년 개항 문제를 두고 개항 반대 연명(聯名) 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맨 처음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중교를 비난하며 관계를 끊었다. 홍재구는 유중교가 화서의 심설을 수정한 안을 김평묵에게 올린 일에 대해 '대변(大變)'이라고 하며 유중교를 비난하였다. 박세화(朴世和) 1834∼1910. 함남 출신으로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충북 제천(월악산)에서 활동하였다. 조익(趙翼) 1579∼1655.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ㆍ존재(存齋),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장현광(張顯光)ㆍ윤근수의 문인이다. 개안(改案) 유중교가 화서 이항로의 심설에 대하여 제기한 수정안인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말한다. 화서의 핵심적인 사상인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은 마음은 이(理)를 위주로 한다는 설이다. 유중교는 만년에 스승의 설에 회의를 품고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의 입장을 취하였다. 유중교는 55세 때인 1886년에 김평묵에게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내,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논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여, 화서학파 간의 논쟁 즉 김평묵의 제자와 유중교의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 일에 흉노의 선우(單于) 두만(頭蔓)이 태자(太子) 묵특(冒頓)을 폐하고 후처(後妻)에서 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묵특을 죽이려 하였다. 묵특은 명적(鳴鏑)이라는 화살을 만들어 자기 아버지와 후모(後母), 후모에서 난 동생까지 모두 쏘아 죽이고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았다. 《史記 匈奴傳》 대의멸친(大義滅親) 큰 도리를 지키기 위해 부모와 형제도 돌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스승을 …… 보이셨습니다 유중교(柳重敎)의 《성재집(省齋集)》 권7 〈상중암선생(上重庵先生) 【戊子八月十九日】〉에 "스승을 죄에 빠뜨렸다고 지목하여 땅을 치고 통곡한다는 말을 하였으며, 아버지를 쏘았던 데 빗대어 대의멸친하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目之以陷師而發拍地慟哭之語, 喩之以射父而示大義滅親之意. ]"라고 하였다. 《후창집》에는 '목(目)'자가 '척(斥)'자로 되어있고, '유(喩)'자가 '목(目)'자로 되어있다. 유중교가 …… 하였다 유중교가 만년에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이의를 품고 자신의 견해를 세우자, 김평묵으로부터 함사사부(陷師射父 스승을 모함하고 아버지를 쏘다)라는 혹평을 받기에 이르렀다.[柳於晩年, 改定心說, 始被金斥, 至謂陷師射父. ]"라고 하였다. 《艮齋集 後編 卷3 答徐柄甲》 정안(正案) 유중교가 1888년에 두 가지 설을 절충해서 김평묵에게 보낸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말한다. 이 이후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김평묵(金平默)이 …… 것입니다 이 편지의 앞 구절과 대조하여 보아야 글의 뜻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다. 주기(主氣)를 주장한 간재는 김평묵과 유중교의 논쟁을 비판하여 화서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이 갖는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유중교는 …… 환수하였다 유중교는 만년에 스승의 설에 회의를 품고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의 입장을 취하였다. 유중교는 55세 때인 1886년에 김평묵에게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내,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논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후 김평묵과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57세인 1888년 10월에 김평묵을 찾아가서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올린다. 이후 62세인 1893년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3월 18일에 〈화서선생심설정안〉을 환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튿날 돌아가셨다. 관서의 …… 편지 진주본에는 〈관서의 제생에게 답한 편지[答關西諸生]〉로 되어있다. 유중교가 …… 글 유중교(柳重敎)의 《성재집(省齋集)》 권40 〈고화서선생유상문(告華西先生遺像文)〉을 말한다. 상(像)은 초상에 고하는 글을 말하는데 원문 '상(象)'은 '상(像)'과 통용되는 글자이다. 즉(則) 실제 화도수정본에는 '즉(則)'자 두 글자가 더 있는데, 《후창집》에는 빠져있다. 이 두 글자를 넣어야 15자가 되므로 추가하여 번역하였다. 고봉(高峯)에게 …… 편지 이황(李滉)의 《퇴계집(退溪集)》 권16 〈답기명언(答奇明彦) 논사칠정제이서(論四端七情第二書)〉를 말한다.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 1526∼?)이다. 자는 이정(而精), 호는 잠재(潛齋)ㆍ정암(靜庵), 본관은 경주이다. 퇴계 선생의 문인이다. 동(動)하는 …… 성(性)이다 김이정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로 이 글은 《퇴계집(退溪集)》 권29 〈답김이정(答金而精)〉에 보인다. 이굉중(李宏仲)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다.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저서로 《간재집》이 있다. 이굉중(李宏仲)의 편지 이덕홍(李德弘)의 《간재집(艮齋集)》 권3 〈상퇴계선생(上退溪先生)〉에 보인다. 심(心)과 …… 발용(發用)한다 《주자어류》 권5 〈성리 2(性理二) 성정심의등명의(性情心意等名義)〉에 "성(性)은 이(理)이고, 심은 포함하여 두루 싣고 널리 베풀어 발용하는 것이다.[性是理, 心是包含該載 敷施發用底. ]"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질의 이 논지의 제목인 〈회퇴율사선생설질의(晦退栗三先生說質疑)〉를 말한다. 대개 '질의'는 '의심나는 것을 묻다.'는 뜻으로 쓰는데 여기에서는 간재가 '질의'라는 제목을 쓴 의미를 '의심나는 것에 답한 결단하는 말'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명명하였다고 보고 있다. 남진영(南軫永) 1889∼1972. 자는 정함(靜涵), 호는 무실재(務實齋),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청도(淸道) 1922년 10월에 청도(淸道)에 소재한 성기운(成璣運)의 서재인 덕천재(悳泉齋)에 설치된 간소(刊所)를 말한다. 그러나 간역(刊役)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최병심(崔秉心)이 저자를 대신하여 지은 〈소윤최공신도비(少尹崔公神道碑)〉의 제목과 내용에 대해 오진영이 문제를 제기하여 오진영과 최병심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문인들이 오진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파(嶺南派)와 최병심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파(湖南派)로 양분(兩分)되어 반목하였고, 오진영은 결국 1923년 10월에 청도의 간소(刊所)를 철수하였다. 벽령(辟領) 삼베로 만든 상복 윗옷의 양어깨에 붙이는 베 조각이다. 이희진(李喜璡)의 편지 《간재집 후편》 권3 〈이희진에게 답한 편지[答李喜璡 을미(乙卯)]〉에 보인다. 인물을 …… 사람 원문 '월조(月朝)'는 '월단(月旦)'과 같은 말로 인물평을 가리킨다. 이성계의 이름이 '단(旦)'이라 피휘(避諱)한 것이다. 수실(首實) 관아에서 자신이나 남의 범죄 사실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신의 …… 청합니다 이 글은 유중교의 《성재집(省齋集) 별집》 권1 〈제왕승통고(帝王承統考二)〉에 보이는데, 일부만 간간이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홍직필이 기유년 헌종의 부묘(祔廟) 때 헌의하였는데, 이에 대해 송병선이 〈수문잡지〉에 평하였다. 매산이 처음 기유년에 올린 헌의의 오류를 깨닫고 스스로 자인소를 올려 다시 바른 설을 제시하였는데도 연재가 함부로 비평하였다. 온 …… 크도다 이 글은 윤두수의 《오음잡설(梧陰雜說)》에 보인다.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이다. 우암이 …… 편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61 〈여민지숙(與閔持叔) 병오오월(丙午五月)〉을 말한다. 숙재집(肅齋集) 조병덕(趙秉悳, 1800~1870))의 문집이다. 자는 유문(孺文), 호는 숙재(肅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홍직필(洪直弼)과 오희상(吳熙常)의 문하를 출입하였다. 이 글은 《숙재집》 권8 〈여홍헌문(與洪憲文)〉에 보인다. 홍오곡(洪鰲谷) 홍일순(洪一純, 1804∼1856)이다. 자는 헌문(憲文), 호는 오곡(鰲谷),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홍직필(洪直弼)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오희상(吳熙常)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오곡집(鰲谷集)》 4책이 있다. 윤철규(尹喆圭)가 …… 쫓아내었다 빈사(賓師)는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송병선이 을사늑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자, 경무사(警務使) 윤철규가 거짓으로 꾀어 강제로 수레에 태워 대전(大田)까지 쫓아 버리고, 칙명을 받들어 보호한다는 말로 핑계를 대었다. 진 정헌공(陳正獻公) 【준경(俊卿)】 행장 《주자대전(朱子大全)》 권96 〈승상위국진정헌공행장(丞相魏國陳正獻公行狀)〉에 실려 있다. 진 정헌공(陳正獻公)은 송(宋) 나라의 진준경(陳俊卿, 1113∼1186))이다. 자는 응구(應求)이며, 정헌(正獻)은 시호이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8년(1138) 진사시에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나 당시 재상인 진회(秦檜)와 화목하지 못하여 한직에 있다가, 진회가 죽자 효종(孝宗) 건도(乾道) 4년(1169)에 상서우복야 겸 추밀사(尙書右僕射兼樞密使)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거짓으로 …… 교살한다 《고당율소의(故唐律疏議)》 25권 사위(詐僞) 조(條)에 이르기를 "모든 거짓으로 칙서를 짓거나 글자를 증감한 자는 교살한다.[諸詐爲制書及增減者, 絞]"라고 하였다. 고항(高閌) 1097∼1153. 송나라 학자로 자는 억숭(抑崇), 호는 식재(息齋)이다. 절강(浙江) 영파(宁波) 사람이다. 귀산(龜山) 송나라 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이다. 자는 중립(中立),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검남(劍南) 사람이다. 화정(和靖) 윤돈(尹焞, 1071∼1142)의 호이다. 자는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 낙양(洛陽) 사람이다. 진희(秦熺) 1117∼1161. 자는 백양(伯陽)이고, 남송의 간신 진회(秦檜)의 양자이다. 호오봉(胡五峰) 송(宋)나라 학자 호굉(胡宏)의 호이다. 장춘서원기(長春書院記) 전조망(全祖望)의 《길기정집(鮚埼亭集)》 권16에 실려 있다. 사릉(思陵) 송나라 고종(高宗)의 능이다. 여기서는 고종을 말한다. 진재(秦梓) ? ∼1146. 자는 초재(楚材)이다. 진희(秦熺)의 양아버지인 진회(秦檜)의 맏형이다. 호문정(胡文定) 호안국(胡安國)의 시호이며, 그가 지은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말한다. 무신년 …… 실려 있다 1908년 8월 11일은 음력으로, 실제로는 1908년 9월 6일이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를 확인한 결과 9월 6일 자 신문의 내용은 단발했다는 것이고, 9월 8일 자 신문에 실린 것이 여기에 나온 것과 비슷한 내용이므로 날짜의 오류로 보인다. 천성(天聖) '하늘의 명과 성인의 가르침[天命聖敎]'이라는 말이다. 사산 전씨(謝山全氏) 전조망(全祖望, 1705∼1755)이다. 청대의 역사가이자 문학가이다. 자는 소의(紹衣) 호는 사산(謝山)이다. 왕후재(王厚齋)의 상기(像記) 전조망(全祖望)의 《길기정집(鮚埼亭集)》 권19 〈송왕상서화상기(宋王尚書畫像記)〉를 말한다. 왕후재는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이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심녕거사(深寧居士) 또는 후재(厚齋)이다. 송나라가 망한 뒤(1276) 고향에 은거하면서 20년 동안 경사(經史)를 강술했다. 남쪽 …… 향하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01월 21일자 논설에 "南中에 山林學者들이 頑固의 陋習을 未改하야 新學文을 反對하더니 近日에 有志某氏가 飮冰室文集數十卷을 買得하야 該學者先生에게 寄付하얏더니 此를 着味하야 閱覽한지 幾月에 思想이 一變하야 開明目的을 悟得한 者가 多하다니 吾儕는 先生을 爲하야 賀하노라."라고 실려 있다. 무엇을 …… 피하였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4월 16일자 논설에 "數月前에 何許一進會員이 忠南觀察使 梁在翼에게 某學者들이 倡義하려 陰謀한다고 嗾囑하야 田艮齋를 捉囚하얏더니 終無事實인지라 放送할 際에 梁氏가 言호되 此輩를 仍置하야셔는 畢竟에 禍胎를 構成하리라 하야 髮放送코자 하거늘 田山林及其門弟子의 倉皇히 會集하얏던者 數百名이 寧死언정 髮不可斷이라고 抵死反抗하야 僅得無事햐얏는대 田氏는 近日에 不知去處라고 南來人의 傳說이 有하더라."라고 실려 있다. 윤색(尹穡) 북송의 관료이다. 자는 소릉(少稷)이다. 산동성 연주(兖州) 사람이며, 강서성 옥산(玉山)에서 우거하였다. 저서로 《방재집(方齋集)》이 있다. 공실지(龔實之) 공무량(龔茂良, 1121∼1178)을 말한다. 자는 실지(實之)이며, 포전(莆田) 공둔(龔屯) 사람이다. 무고를 당하여 영주(英州)에 귀양 가서 죽었다. 윤색이 ……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 132에 실려 있다. 호담암(胡澹菴) 호담암은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명신(名臣) 호전(胡銓, 1102∼1180)이다. 자는 방형(邦衡)이고, 담암은 그의 호이다. 저서로 《담암문집》, 《담암사(澹菴詞)》가 있다. 범직각(范直閣) 범여규(范如圭, 1102∼1160)이다. 중국 송(宋) 고종(高宗) 때의 문신으로 자는 백달(伯達)이고, 직각은 호이다. 유예(劉豫) 송(宋)나라 부성(阜城) 사람으로 자는 언유(彥游)이다. 제남 지부(濟南知府)로 있을 때 금인(金人)에게 항복하고 금 고종(金高宗)으로부터 황제(皇帝)의 책립(册立)을 받아 대명(大名)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였다. 소흥(紹興) 연간에 송(宋)의 변경(汴京)을 쳐들어가다가 송병(宋兵)에게 대패하였다. 《宋史 卷475》 호암담이 …… 하였다 이 내용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1에 보인다. 범촉공(范蜀公) 송(宋)나라 범진(范鎭)의 봉호이다. 자는 경인(景仁)이다.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아 은퇴했다가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청국본(淸國本) 청국본은 청나라 판본을 말하고 이 글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0 〈본조사(本朝四)〉에 실려 있다. 위원리(魏元履)의 묘지(墓誌) 위원리는 송나라 건양(建陽) 사람 위섬지(魏掞之, 1116∼1173)이다. 자는 자실(子實)이다. 처음의 자는 원리(元履)였다. 호는 간재(艮齋)이다. 호헌(胡憲)을 사사하였으며, 주희(朱熹)와 교유하였다. 위원리 사후에 주자는 그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주자대전》 권91에 〈국록 위공 묘지명(國錄魏公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증적(曾覿) 1109∼1180. 자는 순보(純甫), 호는 해야노농(海野老農)이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30년(1160)에 건왕내지객(建王內知客)을 역임하였고,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에는 효종 동궁 시절의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권세가 커졌는데, 총애를 믿고 정사에 간여하였으며 뇌물을 많이 받았다. 《張撝之ㆍ沈起煒ㆍ劉德重 主編, 中國歷代人名大辭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9 下冊 2354쪽》 증적을 …… 일 증적은 관직에 있던 20여 년 동안 용대연(龍大淵) 등과 무리를 이루어 온갖 비리를 자행했기 때문에 탄핵을 받아 각각 복건 총관(福建總管), 절동 총관(浙東總管)으로 축출되었는데, 얼마 후 용대연이 죽자 효종이 증적을 가련히 여겨 소환(召還)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만두었다. 《宋史 卷470 曾覿龍大淵列傳》 남헌(南軒) 장식(1133∼1180)의 호이다. 남송(南宋)의 도학자로,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ㆍ낙재(樂齋)이며, 장준(張浚)의 아들이다. 발문 주희(朱熹)의 《회암집(晦庵集)》 권83 〈발위원리묘표(䟦魏元履墓表)〉를 말한다. 위(魏)공의 묘지(墓誌) 《주자대전》 권91 〈국록 위공 묘지명(國錄魏公墓誌銘)〉. 왕등(暀嶝) 전북 부안의 왕등도이다. 간재가 1908부터 3년간 머물다가 계화도로 옮겨갔다. 돌아가신 …… 마음 원문은 '갱장지모(羹墻之慕)'이다. 국과 담장을 보면서 옛사람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말로, 죽은 선왕(先王)이나 현인(賢人)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날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은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였으니,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천주교도가 …… 처형되었다 1604년 11월에 있었던 일명 '화약음모사건'을 말한다. 영국의 천주교도가 성공회와 왕 제임스 1세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반발로 의사당을 폭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바다 …… 삼았다 1688년 명예혁명에 따라 영국 의회의 초청으로, 1689년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2세와 그 남편인 네델란드의 총독 윌리엄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권리장전'을 수락하고 남편과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구하여 …… 간다 《주역》 〈둔(屯) ䷂ 괘 육사(六四) 상(象)〉의 구절로, 아래 사람을 구하여 앞으로 나아가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때와 …… 행하다 《주역》 〈둔(遯) ䷠ 괘 단전(彖傳)〉에 "둔형(遯亨)은 물러나서 형통하나 강한 것이 자리에 마땅하여 응함이라. 때와 더불어 행한다.[遯亨, 遯而亨也, 剛當位而應, 與時行也. ]"라고 하였다. 뜻이 …… 있다 《주역》 〈비(否) ䷋ 괘 초육(初六) 상(象)〉에 "띠풀을 뽑는 것이 곧고 길함은 뜻이 임금에게 있어서이다.[拔茅貞吉, 志在君也. ]라고 하였다. 국가의 …… 다하다 《주역》 〈건(蹇) ䷦ 괘 육이(六二)〉에 "왕의 신하가 국가의 어려움에 힘을 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王臣蹇蹇, 匪躬之故. ]"라고 하였다. 도가 …… 마음 《논어》 미자(微子) 6장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주석이다. 조금 …… 길하다 《주역》 〈둔(屯) ䷂ 괘 구오(九五)〉에 "은택을 어렵게 함이니 조금 바르게 함은 길하고 크게 바르게 함은 흉하다[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뜻을 굳게 하고 함께 좋아하여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조금 바르게 함은 길하고 크게 바르게 함은 흉한 것이다.[固志同好, 不容他間, 小貞之吉, 大貞之凶. ]"라고 하였다. 무릇 …… 않는다 《주역전의(周易傳義)》 하(下) 권14에 나온다. 《주역》 〈건(蹇) ䷦ 괘〉에 "건은 서남이 이롭고 동북은 불리하며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로우니 곧으면 길하리라. [蹇, 利西南; 不利東北; 利見大人, 貞, 吉. ]"라고 한 말을 해석한 것이다. 이천(伊川) 선생 정이(程頤, 1033∼1107)이다.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이다. 저서에 《이천역전(伊川易傳)》이 있다. 시대의 …… 한다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권10에 보인다. 하나 …… 것 《주역》 〈박(剝) ䷖ 괘 상구(上九)〉에 "하나 남은 과일은 먹지 않고 남겨 놓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섯 개의 효(爻)가 모두 음(陰)인 상태에서 맨 위의 효 하나만 양(陽)인 것을 석과로 비유한 것으로, 하나 남은 양의 기운이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다. 우리 …… 다르다 《좌전(左傳)》 성공(成公) 4년 조에 보인다. 인간과 …… 어렵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에 "이적은 곧 인간과 금수 사이에 있어서 끝내 교화하기 어렵다.[到得夷狄, 便在人與禽獸之間, 所以終難改. ]"라고 하였다. 본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옛날 …… 있다 주희(朱熹)의 《회암집(晦庵集)》 권13에 보인다. 황준헌(黃遵憲) 1848∼1905. 청(淸)나라 사람으로 주일 청국 공사(駐日淸國公使) 하여장(何如章)을 따라 참찬관(參贊官)으로 일본에 있었다. 고종 17년(1880)에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갔을 때 서로 국제 관계의 의견을 교환하고, 김홍집에게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ㆍ일본ㆍ미국 등과 협상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주었다. 김홍집이 복명과 함께 그 책을 왕에게 올렸다. 1882년 한ㆍ미 조약을 체결할 때 이홍장의 명령으로 조약문을 기초하였다. 가까이 …… 못한다 《한비자(韓非子)》 〈용인(用人)〉에 "가까이 현인의 지모를 쓰지 않고 천리 밖에 있는 만승의 나라와 외교를 맺는다. 회오리바람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면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구제할 수 없고 외교를 맺은 나라도 이르지 못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화가 없다.[不用近賢之謀, 而外結萬乘之交於千里, 飄風一旦起, 則賁、育不及救, 而外交不及至, 禍莫大於此. ]라고 하였다. 중전이 …… 변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왕후가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한 일을 말한다. 구법(九法)이 …… 것 구법은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으로, 곧 오행(五行)ㆍ오사(五事)ㆍ팔정(八政)ㆍ오기(五紀)ㆍ황극(皇極)ㆍ삼덕(三德)ㆍ계의(稽疑)ㆍ서징(庶徵)ㆍ오복(五福)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주와 묵적이 서로 어지럽히매 성현의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성현의 도가 밝지 못하면 삼강이 몰락하고 구법이 무너지며 예악이 무너지고 이적이 횡행할 것이니, 어찌 금수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楊墨交亂而聖賢之道不明, 聖賢之道不明, 則三綱淪而九法斁, 禮樂崩而夷狄橫, 幾何其不爲禽獸也. ]"라고 한 말이 보인다. 진상(陳相)의 행동 진상은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 나오는 인물로 진량(陳良)에게 배우다가, 허행(許行)의 학설에 미혹되어 스승을 배반하고 허행에게 들어갔다. 성현의 학문을 배우지 않고 이단의 학문을 배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중원의 …… 삼는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성공(成公) 15년 조(條)에 "《춘추》에서는 본국을 안으로 삼고 중원의 나라들을 밖으로 삼았으며, 중원의 나라들을 안으로 삼고 이적을 밖으로 삼았다.[春秋內其國而外諸夏, 內諸夏而外夷狄. ]"라는 말이 있다. 《춘추》에서는 본국 → 중국의 제후 → 그 밖의 다른 나라 순으로 비중을 두어 기록한다는 뜻이다. 천지 …… 곧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에 주희(朱熹)가 정정당당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것은 속어이니, 대개 치우치거나 기댐이 없이 위로도 곧고 아래로도 곧다는 뜻이다. [此俗語也, 蓋不偏不倚直上直下之意也. ]"라고 대답한 말이 나온다. 6월의 변란 갑오변란을 말한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왕실을 농락하고 국권을 무너뜨리고, 이후 일본의 주도하에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박(剝)괘의 …… 것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으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고 하였다. 박괘의 상(象)은 다섯 개의 음(陰) 위에 하나의 양(陽)이 자리 잡은 형상이다. 즉 여러 양이 모두 다 사라지고 오직 상구 한 효만 남아 있는 것이 마치 큰 과일은 먹히지 않아 다시 생겨날 가능성을 지닌 것과 같다는 뜻이다. 입곡(入哭) 우제(虞祭), 졸곡(卒哭), 소상(小祥), 대상(大祥) 등의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먼저 신주(神主) 앞에서 슬프게 우는 것이다. 친분이 …… 입곡(入哭)한다 《가례》 권4 〈상례(喪禮)〉에 "친구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이에 이르러 입곡(入哭)해도 괜찮다.[執友親厚之人, 至是入哭, 可也. ]"라고 하였다. 성복(成服)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로 보통 나흘 되는 날 입는다. 면재(勉齋) 송나라 황간(黃榦 : 1152∼1221)을 말한다. 면재는 호이고 자는 직경(直卿),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주자와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는데, 주희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학문을 전수하고 사위로 삼았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강학하였으며, 저서에 《육경강의(六經講義)》, 《예기집주(禮記集注)》 등이 있다. 하손(賀孫)의 기록 섭미도(葉味道)가 편집한 《주자어록(朱子語錄)》을 말한다. 하손은 섭미도의 초명이다. 자는 지도(知道).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수(文修)이며,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 사람이다. 주희(朱熹)를 사사(師事)하였는데, 당시 주자학(朱子學)을 금하고 있던 터라 지공거(知貢擧) 호굉(胡紘)의 배척을 받았다. 《주자어록(朱子語錄)》을 편집하였다. 용지(用之) 유려(劉礪)의 자이다. 호는 재헌(在軒)이며, 복건성(福建省) 장락(長樂) 사람이다. 유지(劉砥)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주희(朱熹)에게 수학하였다. 황간(黃榦)과 절친하였다. 협제(祫祭) 협(祫)은 합(合)의 뜻이니, 즉 여러 선령(先靈)을 한자리에 합하여 제사 지내는 일을 말한다. 《禮記 曾子問》 오랑캐들이 …… 한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에 보인다. 오랑캐를 …… 정복하였다 《시경》 〈비궁(閟宮)〉에 보인다. 우임금은 …… 정복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적에 우왕이 홍수를 억제하시자 천하가 평해졌고, 주공이 이적을 겸병하고 맹수를 몰아내시자 백성들이 편안해졌고,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昔者, 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라고 하였다. 계설(鴃舌) …… 배척하였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지금 남만(南蠻)의 왜가리 소리를을 하는 사람은 선왕의 도를 그르게 여긴다.[今也南蠻鴂舌之人, 非先之道. ]" 하였다. 이 사람이 …… 것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의 공을 찬양하면서 "만약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하였다. 오랑캐에게도 …… 있다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가 "오랑캐에게도 군주가 있으니, 중국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라고 했다. 비록 …… 안 된다 《논어》 〈자로(子路)〉에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거처할 적에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적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할 적에 충성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적(夷狄)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라고 하였다. 비록 …… 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말이 충성스럽고 미더우며 행동이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다.[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 ]"라고 하였다. 탕(湯) 임금은 …… 복수했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갈백이 밥 먹이는 자와 원수가 되자, 처음 정벌을 갈 땅으로부터 시작했다.[乃葛伯仇餉, 初征自葛. ]"라고 하였다. 《맹자》에 의하면, 갈백이 자기 선조에게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므로, 탕(湯) 임금이 그를 도와서 제사를 지내게 하려고 박(亳) 땅의 민중을 거느리고 갈백의 들에 가서 농사를 지어 주게 하였다. 이때 노약자들이 밥을 내다 먹이는데, 갈백이 자기 민중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밥 내온 사람들을 강요하여 빼앗되, 주지 않는 자는 죽였으며, 심지어는 한 동자가 밥을 내와서 먹이자, 그를 죽이고 빼앗기까지 하자, 탕 임금이 비로소 갈백부터 정벌을 시작했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같은 …… 못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부친의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못하고, 형제의 원수에 대해서는 복수하기 위해 항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하여 살지 않는다.[父之讎, 弗與共戴天; 兄弟之讎, 不反兵; 交遊之讎, 不同國. ]"라는 말이 나온다. 곧음으로 …… 갚는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직으로 원수를 갚고 덕으로 덕에 보답해야 한다. [以直報怨, 以德報德. ]는 도리를 말한다. 蔑 진주본의 원문에 따라 '蔑'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공자(孔子)의 …… 가르침 《논어》 〈계씨(季氏)〉에 "숨어 살면서 자신의 뜻을 구하고 의를 행하여 자신의 도를 이룬다.[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라고 하였고, 공자가 "말없이 속으로 기억해 두며,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는가.[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라고 겸허하게 말한 내용이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발을 싸매고 발을 싸맨다[裹足]'라는 것은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기거나 군살이 박혔을 때에 옷을 찢어 발을 감싸고 달려간다는 뜻이다. 《회남자》에 "옛날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묵자가 듣고서 딱하게 여겨 노나라에서 달려갔다. 열흘 밤낮을 달려 발이 누에고치처럼 부르텄는데도 쉬지 않고,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달려갔다. 영에 이르러 초나라 왕에게 유세하였다.[昔者楚欲攻宋, 墨子聞而悼之, 自魯趨而十日十夜, 足重繭而不休息, 裂衣裳裹足. 至於郢, 見楚王. ]"라고 하였다. 유중교가 …… 것 유중교가 화서 선생의 심설에 대하여 제기한 정안(正案)인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말한다. 희령(希寗) 한유(韓愉, 1868∼1911)의 자이다. 호는 우산(愚山),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한택동(韓擇東)의 아들이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ㆍ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ㆍ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수학하였으며, 백운정사(白雲精舍)에 모셔졌다. 저서로는 《우산집》, 《백곡지(柏谷誌)》 등이 있다. 내가 …… 것 한유(韓愉)의 〈운가왕복서후론(雲柯徃復書後論)〉에 "구산(전우)은 다만 성재(유중교)의 초년의 이론만 보고 이 말을 하였다. 만년의 정론은 …… 아마 구산이 다 보지 못한 듯하다.[臼山 只見惺齋初年之論而有此說, 若其晩歲定論 …… 恐臼山皆未之見也. ]"라고 하였다. 운ㆍ가(雲ㆍ柯) 운(雲)은 김평묵을 가리킨다. 경기도 영평(永平)의 운담(雲潭)으로 이거하여 운담정사를 짓고 살았다. 가(柯)는 유중교를 가리킨다. 1882년 춘천 남면 가정(柯亭)리로 이거하여 가정사(柯亭社)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운ㆍ가왕복후론발(雲ㆍ柯往復後論跋) 한유(韓愉)가 주용규(朱庸奎)의 《운담가정양문심설왕복시말(雲潭柯亭兩門心說往復始末)》을 필사하여 그 뒤에 〈운가왕복서후론(雲柯徃復書後論)〉을 썼다. 이 글은 한유가 쓴 〈운가왕복서후론〉에 간재가 발문을 쓴 것이다. 증통정대부 승지김공신도비(贈通政大夫承旨金公神道碑) 이이(李珥)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7 〈정언 증도승지김공신도비명(正言贈都承旨金公神道碑銘)〉을 말한다. 제목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이에 신도비를 세운다[爰樹神道之碑]'라는 문구가 있다. 대개 2품 이상 벼슬한 이만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데 김계(金啟)의 조부 김직손(金直孫)이 3품인 승지에 추증되고 신도비를 세웠다. 김중옥(金重玉) 김환각(金煥珏)이다. 장무(章武) 3년 장무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때의 연호(221∼223)이고, 장무 3년은 223년이다. 경용(景龍) 4년 경용은 중국 당나라 중종의 두 번째 연호(707∼710년)이고, 경용 4년은 710년이다. 융희(隆熙)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의 연호(1907∼1910)이다. 휘종(徽宗) 1082∼1135. 중국 북송(北宋) 제8대 황제(재위 1100∼1125)로, 성명은 조길(趙佶)이다. 신종(神宗)의 제11째 아들로서 형인 철종이 사망하자 신종왕후의 지지로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신ㆍ구양법의 균형을 취한 정치를 했었으나 섭정인 상태후(尙太后)가 사망(1101)한 후에는 신법을 부활하고 채경(菜京), 동관(童貫) 등에게 정치를 맡겨 실정이 많았다. 선화 7년(1125) 금나라 군이 남쪽으로 침공하자 황태자(흠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일역월(以日易月) 달을 하루로 쳐서 복(服)을 입는 제도로, 참최(斬衰) 3년인 경우 27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27일 동안만 상복을 입고 탈상(脫喪)한다. 호치당(胡致堂) 송(宋)나라 사론가(史論家) 호인(胡寅)을 말한다. 묵최(墨衰) 다듬은 베로 만든 직령(直領)에 묵립(墨笠 검은 갓), 묵대(墨帶 검은 띠)를 갖춘 복제이다. 흠종(欽宗) 1100∼1156. 중국(中國) 북송(北宋) 9대 황제(재위 1125∼1127)로, 이름은 환(桓)이다. 정강(靖康)의 변으로 아버지 휘종(徽宗)이 퇴위(退位)하게 되어, 그 뒤를 이어 즉위(卽位)하였으나 당시 금(金)나라의 압박이 심하여 마침내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흠종은 아버지와 함께 북쪽 오국성(五國城)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애(生涯)를 마쳤다. 덕우(德祐) 중국 남송(南宋) 공종(恭宗)의 연호(年號)로 1275∼1276년까지 2년 동안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공종을 말한다. 방정학집(方正學集) 명(明)나라 초기의 학자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문집이다. 방효유의 자는 희직(希直)ㆍ희고(希古), 호는 정학(正學)ㆍ손지(遜志), 시호는 문정(文正), 절강성 영해현 출신이다. 문풍이 한유(韓愈, 768∼824)와 비슷하다고 하여 '소한유(小韓愈)'로 불리었다. 후일 영락제(永樂帝)가 된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제위를 찬탈한 다음 등극 조서를 쓰라고 강요한 것을 거절했다가, 그의 일족 800여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또 다른 저서로는 《손지재집(遜志齋集)》이 있다. 이택당(李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ㆍ남궁외사(南宮外史)ㆍ택구거사(澤癯居士)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이다.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신주촌(申舟邨) 신만(申曼, 1620∼1669)이다. 자는 만정(曼情), 호는 주촌(舟村).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영의정 신흠(申欽)의 증손이다. 시직(侍直) 신익륭(申翊隆)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부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체일(體一) …… 있다 화도수정본에는 '帶用殊體一'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의효전(懿孝殿) 1904년 11월 5일(음력 9월 28일)에 승하한 순종(純宗)의 세자 시절의 부인 순명비(純明妃) 민씨(閔氏, 1872-1904)의 혼전(魂殿)이다. 여기서는 순명비 민씨를 가리킨다. 1905년(광무 9) 1월 4일 초우제를 시작으로 순명효황후의 혼전 의례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1907년(융희 1)까지 혼전 의례가 지속되었다. 혼전은 22개월 동안 의례가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왕이 살아 있는 동안 비(妃)가 죽은 경우 신주를 계속 모시고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종묘에 부묘되는 시기에 함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할 수 있다. 따라서 순명효황후의 신주를 모시는 의효전은 순종이 종묘에 부묘되는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수최(受衰) 상례에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슬픔을 줄여나가는 절차에 따라 상복을 거친 것에서 점차 고운 것으로 바꾸었다. 옷을 바꾸어 새로 지어 입는 것을 수최, 혹은 수복(受服)이라고 한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자는 백춘(伯春)이고 운루(雲樓)라는 다른 호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22년(경종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종조(從祖)인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사사(賜死)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될 적에 모친의 배소(配所)에서 공부하였으며, 1725년(영조1)에 부조(父祖)가 신원(伸冤)된 뒤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호락(湖洛)의 학파 중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을 지지하였으며, 그의 학풍은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하는 경향을 보였다. 저서에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화ㆍ경 두 아이 간재의 둘째 아들 화구(華九)와 셋째 아들 경구(敬九)이다. 인보(仁父) 김사우(金思禹)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청주이다. 전우의 문인이다. 남헌(南軒) 중국 남송의 유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이다. 천민인 …… 행한다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천민인 자가 있으니, 현달하여 천하에 도를 행할 만한 다음에 행하는 자이다.[有天民者 達可行於天下而後行之者也]" 한 데서 온 말인데, 몇몇 글자를 첨삭되어있다. 공업에 …… 않는다 이 내용은 장식의 《맹자설(孟子說)》 권7에 보이는데, 원문에 차이가 있다. 간재가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육이(六二) 원문 '사(四)'는 '이(二)'의 오자로 수정 번역하였다. 시기가 …… 된다 《주역전의 하(周易傳義下) 혁(革)괘)》에 보인다. 퇴(退) 대감 우국지사(憂國之士) 이성렬(李聖烈, 1865∼?)을 말하는 듯하다. 호는 회암(晦菴), 또는 퇴암(退菴)이다. 1888년(고종25)에 판관(判官)으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등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있을 때 직무상의 문제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뒤에 경상북도, 전라북도의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벼슬을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은거하여 민종식(閔宗植), 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義兵)을 규합했는데, 그 후 의병의 명부(名簿)가 압수되어 많은 동지가 체포되자, 이를 몹시 비통해하다가 결국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송강재(宋強哉) 송의섭(宋毅燮, 1865∼?)이다. 자는 강재(強哉), 호는 춘계(春溪)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부탄리에서 태어났다. 전우의 제자이다. 맹사간(孟士幹) 맹보순(孟輔淳, 1862∼1933)이다. 자는 사간(士幹), 호는 동전(東田)이다.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나 9세에 신갈 김수운에게 한학을 배우고 15세에 서정순(徐正淳)에게 수학하였다. 출처어묵(出處語默) 주희(朱熹)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録)》 권13 〈호문정공(胡文定公)〉과 《송사(宋史)》 권435 〈유림열전(儒林列傳)〉 등에 보이는 말로, 주진(朱震)이 소명(召命)을 받고 출처(出處)의 마땅함에 대해 묻자, 호안국이 "세상을 살면서 오직 학문을 강마하는 것과 정사를 논하는 문제는 응당 절절하게 물어 강구해야 하겠지만, 몸가짐의 대체인 떠날지 나아갈지 말할지 침묵할지의 기미에 대한 문제는, 마치 사람이 먹고 마실 때 그 배고픈지 배부른지 추운지 따뜻한지를 반드시 스스로 짐작해야 하는 것과도 같아 남에게서 이를 결정해서도 안 되고 또한 남이 결정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출처만큼은 숭녕(崇寧) 이후 모두 안으로 마음속에서 결단하였기에 비록 유작(游酢)이나 사양좌(謝良佐) 같은 어른들도 모두 이 문제를 꾀하지 못하였다.[世間惟講學論政, 則當切切詢究. 至於行己大致去就語黙之幾, 如人飲食, 其饑飽寒温, 必自斟酌, 不可決之於人, 亦非人所能决也. 安國出處, 自崇寧以來, 皆內斷於心, 雖定夫、顯道諸丈人行, 皆不以此謀之也. ]"라고 하였다. 서장(徐丈) 맹사간의 스승 서정순(徐正淳, 1831∼1905)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자는 유칠(幼七)이고 호는 야우(野愚)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수당유공묘갈명(遂堂柳公墓碣銘) 《간재집》에는 〈수당거사유공【지성】묘갈명(遂堂居士柳公【志聖】墓碣銘)〉으로 되어있다. 최성범(崔性範) 최명희(崔命喜, 1851∼1921)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성범(性範), 호는 노백(老栢)이다. 전우의 문인이다. 만포(滿浦) 조선 시대 평안도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에 있던 압록강(鴨綠江) 가의 마을 이름이다. 군사 방어 진지인 진(鎭)이 설치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명철(曹明喆) 당시 만포(滿浦) 첨사인 조명철(曺命喆)인 듯하다. 본관은 창녕이고, 수원에 거주하였다. 이 일은 《승정원일기》 정조 11년(1787) 1월 19일 기사에 보인다. 1787년 1월 19일에 이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고 이후 조명철은 의금부로 압송되어 곤장 100대 형을 속전(贖錢)하고 황해도 장연현(長連縣) 박산역(朴山驛)으로 유배갔다. 1789년 8월 10일에 해배되었다. 세검정(洗劍亭) 평안북도 강계군 만포의 압록강 기슭에 있는 조선 시대 누정이다. 관서팔경의 하나로 일컬어졌으나 1938년 일제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국영환(鞠瑛煥) 1874∼1954. 자는 영옥(英玉), 호는 연함재(鍊緘齋),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전북 완주군 비봉면(飛鳳面) 수선리(水仙里) 출신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연함재사고(鍊緘齋私稿)』 필사본(筆寫本) 2책이 전한다. 不在氣質之性 이 구절은 《간재집》에는 있는데 《후창집》에는 빠져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뒤 구절과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참고하여 봐야 한다. 此一句. 老洲語 진주본에는 있는데 《후창집》에 누락되어 추가하였다. 約 대본에는 '約'으로 되어있으나, 《간재집》에는 '弱'으로 되어있어 수정 번역하였다. 正 《주역전의(周易傳義)》 하(下) 권14에는 '貞'으로 되어있다. 昔 《회암집(晦庵集)》에는 '先'으로 되어있다. 뜻에는 차이가 없다. 其本 《후창집》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회암집(晦庵集)》과 《간재집》에 의거하여 첨가하여 번역하였다. 法 《후창집》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간재집》에 의거하여 첨가하여 번역하였다. 이 글자가 없으면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唐 다수의 용례에 근거하여 '唐'을 '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七卷 而第 《후창집》 원문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간재집》에 의거하여 첨가하여 번역하였다. 人爲 대본에는 '人爲'로 되어있으나, 진주본에 근거하여 '爲人'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滅 滅'은 '蔑'의 오자이다. 四 '四'는 '二'의 오자이다. 聞其美 《후창집》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간재집》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