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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166) 절사께 올리는 제문 【임오년(1942, 대한민국24)】 祭李節士【台6)鉉】文【壬午】 아아 절의의 선비여 嗟嗟節士,살아계신듯 늘름하네 凜凜如生,거센 물결 막아선 돌기둥 하나 頹波一柱,새벽 하늘에 빛나는 외로운 별 曙天孤星,팔도강산에 생기가 돌고 山河生色,우리 유사(儒士)의 자랑스런 영예이네. 吾黨有榮.나이 서른셋 비록 젊지만 卅三雖短,천년을 가도 스러지지 않을지니 不朽千春,곁에 모시던 어른들 슬퍼하지만 在侍雖惻,인(仁)을 이루어 부모를 현창했네. 成仁顯親.하늘에 해는 둘이 아니고 天無二日,사람은 아버지가 둘이 아니니 人無二父,기왕에 아버지가 둘이 아니면 旣無二父,어찌 다른 성을 바꾸어 쓰겠는가! 二姓何語.우리 유학의 법도에서는 吾儒法門,두발의 예법이 매우 중대하니 髮爲大節,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지언정 寧可無生,부모께 받은 머리털 어찌 자르랴. 不可無髮.이와 같은 절사의 여러 말씀들 凡此君言,천지신명도 보증하리니 可質神明,백대의 뒷 선비들이 士子百世,길이 모범으로 따르리. 永作式程.문산의 죽을 약167)은 효력이 없고 文腦無力,동계의 할복168)은 뜻을 못 이루었으니 桐劒未伏,일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事不從心,시간은 매우 급박하였네. 時係倉卒.뛰어나다, 우리 절사는 豈如節士,칼 둘을 몸에 감추었다가 身藏二鍔,하나는 비록 빼앗겼지만 一雖見奪,또 하나로 마침내 매듭지었네. 一乃結局.지혜와 용기 함께 갖추어 智勇雙全,특히나 기발하고 우뚝하니 尤爲奇絶,옛부터 지금까지의 사람들 往古來今,누가 이와 더불어 짝하겠는가? 疇能與匹.사람들이 절사에게 말하였네 人言節士,왜 땅을 비켜 피하지 않는가 胡不避地,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非曰不然,온전히 다 갖추기를 바래서였네. 是出責備.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何限世間,결단을 미루다 무너졌는가 遲決見敗,한(漢)의 충신은 하나 없고 維非漢臣,온통 오랑캐의 아전들 뿐이니 疇乃滿吏,아, 선비가 절의를 함에 있어 嗟君之爲,연유한 까닭 어찌 없겠는가. 豈其無自.시대를 살피고 정의를 헤아림이 諒時度義,나도 절사와 똑 같았기에 我則無間,동쪽 바라보고 길게 통곡하며 東望長慟,얼굴 한번 못 본 한을 품고서 恨無一面,이승과 저승으로 나뉜 채 惟有幽明,서로의 같은 마음 비춰봅니다. 照心一片.슬픔의 말들로 제물을 대신하고 悲辭替奠,뜨거운 눈물로 술잔을 채워서 熱淚作巵,높은 데 올라 멀리 제향하며 登高遙祭,풍백에게 부쳐 보내 드리오니 寄之風師,아아 우리 절사시여 嗟嗟節士,혼령 계시거든 알아 주소서. 靈倘有知. 嗟嗟節士, 凜凜如生, 頹波一柱, 曙天孤星, 山河生色, 吾黨有榮。 卅三雖短, 不朽千春, 在侍雖惻, 成仁顯親。 天無二日, 人無二父, 旣無二父, 二姓何語。 吾儒法門, 髮爲大節, 寧可無生, 不可無髮。 凡此君言, 可質神明, 士子百世, 永作式程。 文腦無力, 桐劒未伏, 事不從心, 時係倉卒。 豈如節士, 身藏二鍔, 一雖見奪, 一乃結局。 智勇雙全, 尤爲奇絶, 往古來今, 疇能與匹 人言節士, 胡不避地, 非曰不然, 是出責備。 何限世間, 遲決見敗, 維非漢臣, 疇乃滿吏, 嗟君之爲, 豈其無自。 諒時度義, 我則無間, 東望長慟, 恨無一面, 惟有幽明, 照心一片。 悲辭替奠, 熱淚作巵, 登高遙祭, 寄之風師, 嗟嗟節士, 靈倘有知。 이태현 저본의 이름 '李台鉉'을 필사 과정의 오자로 보아 '李太鉉'으로 고쳐 읽고 번역한다. 이태현(李太鉉 1910~1942)은 호가 정암(精菴)이고 흠재 최병심(欽齋崔秉心 1874~1957)의 제자인데, 전라북도 남원에서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일장기 게양거부, 신사참배 거부, 창씨개명 반대 등의 저항운동을 하였고, 경찰의 수배를 받던 중 남원의 순사주재소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결하였다. 문산(文山)의 죽을 약 남송의 애국지사 문천상(文天祥)이 전투 중에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죽으려고 독약을 먹었으나 약효가 없어 못 죽었던 일을 말한다. 《송사(宋史)》 권418 문천상전(文天祥傳). 동계의 할복 병자호란 때 동계 정온(桐溪鄭蘊)이 여진과의 화의에 반대하며 할복 자결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台 임오년(1942)에 순사(殉死)한 남원의 우국지사 이태현(李太鉉)의 '太'를 '台'로 잘못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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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께 두 번째 올리는 제문 再祭田士狷文 유세차 무인년(1938) 11월 무자삭(戊子朔) 18일 을사날은 현광 전일중(玄狂田鎰中) 형이 운명한 지 25개월이 되는 날입니다. 벗 김택술은 몸이 아파 가지 못하므로, 날짜를 사흘 앞두고 아들 경태(炯泰)에게 소박한 제수를 준비하여 묘소에 가서 다음과 같이 곡하게 합니다.아, 벗의 묘소에는 풀이 묵으면 곡하지 않는다159)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벗의 정의가 두텁기 때문에 묵은 풀이 자라기 전에 묘소에 가서 곡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 묵은 풀이 난 뒤에는 곡하지 못하도록 금하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지난봄에 그대의 궤연 앞에 이미 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2년이 지난 묵은 풀지 자란 뒤에 묘소에 곡을 하는 것은 정의가 두텁다는 점 말고도 서로 공감하는 대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아, 형은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와 수준 높은 문장 실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고금의 높은 식견으로 작은 절목에 대해 소홀히 하셨습니다. 반면에 저는 재주가 부족하고 문장도 진부하였으므로 오직 일상적이고 옛것을 따를 줄만 알았지 감히 자유분방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기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따져본다면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맞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형의 수준 높은 의론을 저는 의리에 부합한다고 여겨 사용하였으니 남들이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며 버리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형의 바른 말에 대해 저는 잘못을 지적해 준다고 좋아하였으니 남들이 귀에 거슬린다며 듣기 싫어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형도 저의 이러한 점을 인정하여 세월이 오래 지나도 우정이 더욱 두터웠습니다.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선생님을 무함하고 선생님의 글을 훼손하여 사림을 헤치고 선생님의 자손을 억압하는 변고가 계속해서 발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현혹되고 두려워하여 문하의 모든 사람들이 못된 사람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때였는데 거울과 같은 밝은 식견과 날카롭고 엄정한 의리로 서까래와 같은 붓을 휘둘러 조부의 무함을 밝혀내고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고립된 군사처럼 분전하는 저를 도와서 시종일관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둔 사람은 오직 형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두터운 정의 말고도 서로 공감하는 대의가 있다는 것입니다.아, 형이 운명한 뒤로 저는 더욱 외로운 신세가 되었고 선생님에 대한 무함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오진영(吳震泳)160)이 기록하자 말씀하지 않은 가르침이 되었고, 김세기(金世基)161)가 글을 쓰자 저는 흉적(凶賊)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널리 인쇄하여 배포하였으니 그들의 위세가 이르는 곳마다 변고가 가일층 심해져서 평소 못된 이들을 공격하던 강력한 무기를 버리고 저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아버지와 선생님께서 변무(辨誣)한 글을 유고에서 없애고서 무리에 붙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보면 나머지는 알 수 있습니다. 형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마음을 먹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와병 중에 최태일(崔泰鎰)162)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고(先考)에 대한 무함을 씻어내지 못한 것이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영영 예언이 되고 만 것입니까. 아, 원통할 따름입니다.그렇지만 마침내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저 (오진영의) 무리는 지금 말하기를 "분명히 인허가 분부가 있었고, 이는 주자와 우암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한테 인허를 신청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바다를 건너 (上海에 가서) 말끔히 간행하자 하였던 것163)이 아니었습니까? 전날에는 하면 안 되었던 일이 어떻게 지금은 주자와 송자의 법문(法門)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후의 모순되는 말들 속에서 스승에게 오명을 씌우고 거짓 증거로 남의 말을 막는 진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이 눈은 현혹시킬 수 없고, 지금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후대의 어진 사람은 속일 수 없습니다. 형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고 제가 흉적(凶賊)으로 몰리지 않을 수 있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대개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천명입니다.164) 비록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이라도 이렇게 치부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소인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스스로 직분을 다하고 기다릴 뿐입니다. 형의 글은 평소 진영의 말을 변론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장차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제게 정리를 부탁하셨으니 제가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이미 글들을 모아 잘 필사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살아있을 때 서로 열전을 작성하기로 했던 약속이 틀어졌으니 돌아가신 형과 살아있는 제가 서운하게 생각할 바입니다. 그러나 졸렬한 솜씨로 형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장차 그럴 날이 있을 수도 있을 테지만 비루한 저의 모습을 십분 완벽하게 그려낼 훌륭한 솜씨는 영원히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더욱 한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아, 제가 말한 여러 가지를 형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이보다 어려운 일이 없고 이보다 좋은 행운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함과 간사를 물리치고 아버지와 스승을 지키는 일은 또 사람에게 더없이 중대한 일입니다. 형과 제가 15년 동안 함께한 일이 어찍 여기에 있었습니다. 비록 춥고 배고프며 병을 앓는 중이라도 서로 권면하여 더욱 힘썼으니 이것이야말로 얻기 어렵다는 마음 맞는 사람을 얻은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들이 만든 재앙이 비록 심해도 형을 모시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도끼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던 형의 충고를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줄도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공(蛩)이 궐(蟨)을 놓치고 낭(狼)이 패(狽)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165) 어떻게 다행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을 닫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은 채, 제 입과 마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제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위로하는 지경이니 이것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살아있어도 슬프고 죽었어도 즐거운 경우가 있는 줄은 그 누가 알겠습니까.저는 금년 이후로 풍습증(風濕症)이 심해지고 진기가 손상되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승에서 형을 따라다니며 이 즐거움을 함께할 날이 있을 것이니 이는 제가 슬퍼할 날이 또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빈 산의 작은 무덤에서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말해도 듣지 않으니 홀로 방황하며 떠나지 못한 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생각도 끝이 없습니다만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만 줄입니다. 아, 형의 영령이시여, 제 마음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維歲次戊寅十一月戊子朔十八日乙巳, 玄狂田兄觀化二十五月之期也。 在世友金澤述病不能行, 前三日使子炯泰遠具薄奠, 往哭于墓, 曰: 嗚呼! 朋友之墓有宿草而不哭, 此蓋謂朋友情重, 哭墓宜不待草宿, 非謂草宿之後, 禁不得哭之也。 若余之於子, 則旣哭象生於昨春矣。 今又哭墓於再宿草之後者, 豈非以情重之外更有大義相感者存乎? 嗚呼! 兄有過人之才、高世之文, 故眼空今古, 忽略細節。 弟則下劣之才、陳腐之文, 故惟知循常襲故, 不敢自放。 論以氣像意思, 宜其落落而難合也。 然而兄之高論, 弟則以其合義理而用之, 不若人之謂行不掩而棄之也。 兄之直言, 弟則幸其攻過惡而喜之, 不若人之以逆耳而惡聞也。 故兄亦以是而取弟也, 交契之情久而益重矣。 乃若山頹之後, 誣師亂稿, 禍士林押師孫之變疊出層生, 人皆疑眩怵怖, 而擧一門入於陰窟之時, 以照鏡之明, 用斬釘之義, 揮如椽之筆, 辨祖誣繼父志, 而助弟衛師之孤軍, 終始一節死而後已者, 則惟兄一人而已。 此所謂情重之外更有大義相感者也。 嗚呼! 自兄云亡, 此身益孤, 師誣益深, 震泳之書焉而不言之敎的矣。 世基之文焉而此身爲凶賊矣。 旣以此印布旁午, 則氣燄所到變加一層, 有棄其平日打陰之金剛椎而從彼者矣。 有刪其父師辨誣之文於遺稿而羣附者矣。 推此以想, 餘外可知, 使兄而在者, 又未知見作何懷。 而病中所與崔汝重書以先誣未雪爲地下不瞑之恨者, 永爲言讖也歟! 嗚呼! 其可寃也已。 雖然竟有一事, 渠今謂的有認敎而受之朱宋。 然不曾以請認爲誠有不可, 而欲越海淸楚乎? 前日之不可者, 今安得爲朱宋之法門乎? 前後矛盾之間, 灼見其脫汙加師、誣證禦人之眞狀矣。 衆眼可眩, 隻眼難眩, 今人可欺, 後賢難欺。 兄之可以瞑目, 弟之可免凶賊, 豈不在此乎? 蓋道之將行也歟, 命也。 道之將廢也歟, 命也。 雖以孔子之大聖猶如此斷置, 况我輩小子乎! 只當爲所當爲, 自盡其職而俟之。 至於兄之文字, 蓋平日辨震之作, 而收拾之囑出於將絶之際, 則弟何敢忽諸? 謹已裒輯繕寫, 以備傳後, 惟是生前互爲立傳之約, 事謬不然者, 足爲幽明之憾。 然拙工之追寫尊像將或有期, 而陋貌之肖出妙手永不可得, 此尤爲生者之恨也。 嗚呼! 凡此所言, 其知乎, 否乎? 夫人之生世, 得一同心, 無上難事, 無上達運, 至於斥誣邪衛父師, 又人之無上大事。 而兄之於弟, 十五年間所與同者, 惟在於是。 雖凍餒疾病之中, 胥勖而彌勵, 此可不謂難得之同心乎? 是以彼之禍難雖甚, 恃兄爲幸而無懼, 今焉以後, 不惟斤可撤而絃可斷, 卽是蛩失蟨而狼失狽矣。 其何以有幸也? 杜門息交, 口與心語, 形與影吊, 是生而猶死, 兄則日與古之賢人君子忠臣義士之明靈遨遊帝鄕, 論心話情, 有足樂者, 是死而猶生, 夫孰知生之可悲, 死之可樂, 有如此哉! 弟自今年以來, 風濕流注, 眞元喪敗, 勢不能久, 追兄於九天之上, 與同此樂也有日, 是則吾之悲又將不幾時矣。 今此空山之一抔, 呼不應而語無聽, 獨彷徨而不去, 涕漣漣而柰何! 言未盡而意無窮, 待相見而止此。 嗚呼, 兄靈! 俯鑑吾心! 벗의……않는다 《예기》 〈단궁(檀弓)〉에 "붕우의 묘소에 한 해를 넘겨 풀이 묵으면 곡하지 않는다.[朋友之墓, 有宿草而不哭焉。]"라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의 유학자로, 전우(田愚)의 제자이다. 스승의 문집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김세기(金世基) 스승 전우(田愚)의 문집을 일제의 허가를 받아서라도 간행하자는 오진영의 주장에 동조하여, 최원(崔愿)ㆍ정운한(鄭雲翰)과 함께 문인들에게 서신을 발송하였다. 최태일(崔泰鎰) 1899~?, 본관은 전주, 자는 여중(汝重), 호는 백졸(百拙)이다. 고부에서 출생하여 김택술과 전우를 사사하였고, 저서로 《백졸사고(百拙私稿)》를 남겼다. 바다를……것 오진영은 이전에 전우의 문집을 일제의 인허에 의해 검열ㆍ취사를 거쳐 간행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바다 건너 중국 상해에 가서 발행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후창집》권14 〈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 대개……천명입니다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는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명이니, 공백료 그 자가 명을 어떻게 하겠는가.[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라고 하였다. 공(蛩)이……같습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공(蛩)은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 공공거허(蛩蛩巨虛)라는 짐승을 말한다. 궐(蟨)은 앞발은 쥐의 발 같고 뒷발은 토끼의 다리와 같아서 잘 달리지 못하므로 공공이 늘 궐을 위해 먹이를 구해 주고 급한 일이 있으면 업고 달아났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낭(狼)과 패(狽)는 모두 이리의 일종인데 낭은 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으며, 패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다. 이로 인해 낭과 패는 서로 의지하여 함께 다니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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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께 올리는 제문 祭田士狷文 유세차 정축년(1937) 4월 26일 임술날에 이승의 사람 김택술은 눈물 섞인 술잔을 올리고 진심을 담은 글을 들고서 벗 현광 전일중(玄狂田鎰中) 형의 영연(靈筵)에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아, 시대는 멀어지고 인물은 떠나가 도는 사라지고 풍속은 변했으며, 천리(天理)는 밝지 못하고 인심(人心)은 바르지 못하며, 시비가 뒤바뀌고 사정(邪正)이 뒤섞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근대에 이르러 당쟁의 화를 겪은 경험 때문에 선비가 어떤 주장을 하면 그 좋고 나쁨은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혼동(混同)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충신과 역신을 구분하지 않고 유림들 사이에서는 공로가 있는 사람과 허물이 있는 사람을 밝히지 못하니, 식자들의 한탄이 이미 매우 깊은 상태입니다.우리 간재(艮齋) 선생님의 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개 성인 문하의 학문은 분명하게 변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만두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조목153) 가운데 독행(篤行)도 한 가지 조목이고 학문과 사변(思辨)이 모두 명변(明辨)하는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크게는 심성(心性)과 도기(道器), 이기(理氣)와 상하(上下)로부터 작게는 고금 인물의 현부(賢否)와 언행(言行)의 득실(得失)에 이르기까지 공변된 마음과 올바른 시각으로 자세히 강구하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사문(師門)에 관한 비방과 무함에 대해서는 특히 변백(辨白)하고 호위하는 임무를 다하였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침 없이 이어가 저 선비들의 뒤섞어 흐리는 습관을 크게 한번 씻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천리가 다시 밝아지고 인심이 다시 바르게 되었습니다. 근대 당쟁에서의 시비도 이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아, 그대는 돌아가신 선생님[先師]의 손자로서, 선사께서 명변(明辨)이 중요하다 가르치신 뜻을 그대는 일찍 들어 알았습니다. 장차 한 자루 붓으로 천지 만물의 변화불측(變化不側)한 이치를 밝히고, 한 마디 말로 오랜 세월 동안 의심되어 확정되지 않았던 사안들에 대해 결단하려는 것이, 그대가 품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처할 집이 없고 먹을 식량이 없어 반평생을 도로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 못된 사람들이 선생님을 무함하고 선생님의 글을 고치는 변고가 발생하자 그대는 선사께서 임무로 삼으셨던 변별하고 지켜내는 일을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겨울에 비추는 것과 같은 밝은 식견과 쇠도 절단하는 것과 같은 엄정한 의리로 서까래 같은 큰 붓154)으로 이치에 타당한 글을 지어 선사의 대의를 밝히니 선사의 대의가 해와 달처럼 환하게 밝아졌고, 못된 사람들이 저지른 비리를 잡아내니, 그들의 비리가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무리와 그들을 비호하던 이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그대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고 원수처럼 미워하였습니다.선사의 명변하는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선사를 해치려는 못된 사람들의 변고를 목격하고도 침묵을 지키며, 기꺼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넘쳐납니다. 흘러내려온 세상의 풍속을 바꾸기 어려움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천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인심이 더욱 사악해졌으니 또 10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날 저 못된 사람[陰人]들을 성토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들 가운데 말을 바꾼 사람들이 많아져서 못된 사람들과도 화합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속에 사류(士類)를 해치고 선사의 손자를 가둔 사람155)을 넣었으니, 이 또한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그대는 홀로 시종일관 한결같은 절의를 지켜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하게 입장을 고수하였으니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들은 반드시 술을 마시며 축하할 것입니다. 아, 원통합니다.비록 그렇지만 그대의 의리(義理)는 천지 사이에 우뚝 설만 하고, 그대의 의론(議論)은 성인이 다니 나타나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대의 문장은 후세에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대는 비록 죽더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대가 남긴 것들을 보존할 것이니 저들이 어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대가 어찌 원통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다만 못난 나는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선생님을 위해 적들을 성토하려다가 온갖 재앙과 역경을 겪은 나머지 거의 죽다 살아나 쓸쓸히 혼자 남았습니다. 다행히 그대가 옆에 있어서 의지하고 도움이 되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그대가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사실상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릴 것이라는 걱정을 하게 되고 호랑이가 죽으면 이리가 슬퍼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으로 변고가 그치지 않을 것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나의 재주는 미약하고 적들의 세력은 막강하니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고, 방치한 채 따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막중하니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의리를 강구해 볼 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그대의 영령이 어둡지 않거든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나의 지혜를 이끌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대개 이 일은 만세의 영원을 기약해야 하며 한 때에 기필할 사안이 아닙니다. 예컨대 촉나라와 위나라는, 그 현격한 차이가 서로 견줄 수 없는 상대였기에 심지어는 천여 년 뒤의 회옹(晦翁 朱熹) 선생에 이르러서야 주인과 도적156)의 위상의 논의가 정해졌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다만, 그대는 고명한 재주, 명쾌한 변론, 강직한 기상, 정밀한 견해, 넉넉한 문장 그리고 큰일을 하려는[有爲] 뜻 등을 지녀 세상 사람들과 어긋났던 데다 또 그대를 알아주는 지기(知己)도 없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쓸쓸하게 지내다가 상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막다른 길에서 곤궁하였기 때문에 남을 힘들게 하고 자기에게 누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평소 곧이곧대로 말하는 성격이라 면전에서 남의 허물 지적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사람은 적고 미워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게다가 못된 무리들이 비방하며 그대와 관계된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곧 그대를 얕보고 모욕하였으며 심지어 위로 조상에 –원문 빠짐-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이는 더더욱 서글픈 일입니다.내가 그대를 보건대 신학문(新學問)을 배우라는 권유를 듣지 않고 끝까지 옛사람의 전통을 지킨 것을 선사(先師)께서 가상하게 여기셨고, 평소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으며 장기나 바둑 같은 놀이를 가까이하지 않은 것을 사우(士友)들이 모두 압니다. 이것은 이미 선비의 본모습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얼굴과 기상이 선사와 매우 닮았고, 재주와 기백도 선사와 같으며, 학문의 뜻을 병변하는 것도 선사에게 들었고, 음해와 무고를 물리치는 것도 선사에게서 전수받아, 김평묵(金平默) 제문의 심법(心法)도 물리쳤습니다.157) 따라서 그대와 같은 사람은 선사의 여러 손자 가운데 선사의 일체(一體, 사지 가운데 하나)를 얻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말을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의 이 말이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실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기 때문에 앞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갈 줄만 알았는데, 그대는 밝은 지혜와 통달한 식견을 가졌으므로 항상 정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대는 나를 비루하다 기롱하였고 나는 그대의 방종을 염려하였으니, 서로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상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된 사람들의 변고가 있기 전, 저의 집에서 하룻밤 이야기를 나눈 뒤로부터 17년 동안 우정이 변하지 않았으니 저는 진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대가 운명한 뒤로 저를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르는 것을 물을 상대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옛사람이 말한 바 보태주는 세 벗158)이 바로 그대와 같은 사람이며, 오래 사귀어도 좋은 사람이 그대와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이처럼 이로운 벗을 잃게 되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아아! 그대가 병이 나자 저의 집에 머무는 것이 위태하여 안 되겠다 하여 귀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이것이 영원한 작별이구나 하였는데, 그대가 또 편지를 보내서 "제가 지은 글들은 저의 목숨이 담겨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쳐야 하는 부분과 재고해 볼 부분이 있은데 이것을 우리 김형께서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드리는 이 말씀을 절대로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대단히 서글퍼서 코끝이 시렸습니다. 고치고 재고(再考)하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지만 글들을 모아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니 어찌 머뭇거리겠습니까. 다만 나는 그대보다 대여섯 살 많아서 먼저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평소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려던 일은 지금 도리어 그대에게서 부탁받았으니 이처럼 사람의 일이란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득한 우주 사이에 이 한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눈물은 다 말라도 말은 끝이 없고 말은 다했지만 뜻을 다 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밝은 영령께서는 간격이 없으니 나의 이 괴로운 심정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 슬프도다! 흠향하소서! 維歲次丁丑四月二十六日壬戌, 陽界人金澤述奠和淚之酌, 操瀝肝之文, 告于玄狂田友之靈, 曰: 嗚呼! 世遠人亡, 道喪俗渝, 天理不明, 人心不正, 是非顚倒, 邪正淆雜者, 久矣。 至于我東近代, 則又懲於分黨之禍, 士之持論者, 不問臧否, 一以混同爲主。 至於在朝廷而忠逆無分, 在儒林而功罪難明, 有識之歎亦已深矣。 惟我艮翁先師之爲道也, 則不然。 蓋以聖門之學明辨爲大, 五不措之目, 篤行者一, 而學問思辨總是明辨工夫, 故自心性道器、理氣上下之大者, 以至古今人物賢否、言行得失之詳, 旣皆以公心正見精究而明覈之。 若事關師門之誣謗, 則尤盡辨白閑衛之職, 逮夫屬纊之日而不掇, 一洗夫混淆之士習。 於是乎天理復明, 人心復正, 凡近代黨爭之是非亦可因是而息矣。 嗚呼! 子以先師之孫, 早聞先師所受明辨爲大之旨, 蓋將以一筆明天地萬物變化不測之理, 一言決千古疑似未定之案者, 是其志也。 而居無室廬, 食無資粮, 棲屑道路, 忽忽半生, 未之有成矣。 屬當山頹後, 陰人誣師改稿之變, 則子以先師辨閑之職爲法, 以照鏡之明、截鐵之義, 下如椽之筆, 昭先師之大義, 日月呈光, 捉陰人之眞贓, 毫髮莫逃, 幷與其黨與護法者, 而嚴斥之。 彼之於子, 蓋畏之如虎, 疾之如讐矣。 夫以先師明辨之學出其門者, 目見賊師之變而環顧含嘿, 甘歸於非人之科者滔滔焉, 由來世風之難變固如是矣。 至于近日, 則天理益晦, 人心益邪, 又非十年前時節。 前日之謂陰可討者, 亦多有反覆變舌, 謂陰可和於加以禍士類囚師孫之後者, 吁亦何心? 子獨終始一節, 愈往愈力, 彼安得不畏且疾也? 聞子之死, 其必酌酒而相賀矣。 嗚呼, 寃哉! 雖然子之義理足以建諸天地, 子之議論足以俟聖不惑, 子之文章足以炳烺後世, 子雖死而久, 生者存其實, 彼何足喜, 子何足寃? 惟是無狀, 不自量力, 爲師討賊, 飽經禍難, 幾死僅生。 孑然獨立, 惟幸以有子在而猗角以爲勢。 今忽一曙, 子已至此, 我實有唇亡齒寒之憂, 虎死狼悲之感。 前頭變故無有已時, 欲與之有事乎, 則才弱敵强, 性命難保; 欲置之勿問乎, 則師生義重, 不可但已。 嘿究義諦, 如何則可? 惟靈不昧, 俯息相吹, 冥誘我衷, 隨機應接, 俾勿失宜焉。 蓋此事萬世以爲期, 非可以取必於一時者。 夫以蜀魏不敵之懸, 甚至千餘年後, 晦翁夫子而主賊論定, 是又可以無憂矣。 但以子高明之才、敏快之辨、剛直之氣、精細之見、紆餘之文、有爲之志, 旣與世而相違, 亦無人之知己, 窮途踽凉, 竟以夭終於衰絰之中, 其何以不寃抑, 惟其困於窮途也? 故時不免弊人而累己, 且生平口直, 好面折人過, 以故好者少而惡者多。 加以陰黨之積毁, 語及於子, 聞者輒鄙夷之, 至謂上【缺】其祖者有之, 重可悲也。 以余觀子不聽新學之勸, 而終爲守舊人者, 先師之嘉尙; 平居手不釋卷, 博奕之戱一不近前者, 亦士友之所共知也。 此已不失士子本色, 顔貌氣像酷似先師, 才性氣魄亦同先師, 明辨學旨聞自先師, 辨斥陰誣傳自先師, 退逐金誄之心法, 若子者, 謂先師諸孫中具先師之一體, 不爲過矣。 世有知言者作, 謂吾說之不阿好也。 若乃余之好子, 則余亦不知其故。 余實鈍拙, 故徒知循守塗轍, 子則明達, 故常欲脫略繩墨。 子譏我陋, 我慮子放, 視厥云爲, 可謂每每相反。 然蓋自陰變前, 弊廬一夜話後, 十七年交好無替, 余實不知其故。 但自子之逝, 覺得箴規之無可聞, 疑晦之無可問, 則始知古所謂直諒多聞者, 卽子是已, 久而相好者, 卽子是已。 而奄忽之間失此益友, 豈不痛悼? 嗚呼! 子病, 淹弊廬殆不可爲而歸。 斯可謂永訣, 而子又書來, 曰: 所述文字, 是吾命所在, 而有可改可商者, 此不得不兄自任之, 千萬毋負此將死之言。 此言絶悲, 聞之鼻酸, 改商雖不敢, 收拾繕寫, 以備傳後吾責也, 豈敢虛徐? 惟是吾於子, 有肩隨之長而當先逝者。 平日之吾欲託子者, 今焉反受子託, 人事之難測有如此者。 茫茫宇宙, 此恨曷已? 淚雖盡而辭不盡, 辭雖窮而意無窮。 惟明靈之無間, 庶憫我之苦情! 嗚呼, 哀哉! 尙享! 다섯 가지 조목 《중용장구》 제20장에는 학자가 반드시 지녀야할 다섯 항목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서까래같은 큰 붓 매우 뛰어난 문장력을 말한다. 진(晉)나라 왕순(王珣)이 꿈속에서 서까래처럼 큰 붓을 얻었는데, 나중에 조정의 책문(冊文)과 시의(諡議)를 맡아 썼다 한다.《晉書 卷65 王珣列傳》 손자를 가둔 사람 전우의 맏손자 전일효(田鎰孝 자 士仁)을 고소하여 감옥에 가둔 일을 말한다. 《후창집》권14 〈輪告同門同志〉 주인과 도적 중국의 삼국시대 유비(劉備)의 촉한(蜀漢)을 한(漢)나라의 정통을 이은 국가로, 조비(曹丕)의 위(魏)나라를 찬탈에 의한 도적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김평묵(金平默)……물리쳤습니다 전우의 스승 임헌회(任憲晦)가 별세하자 이항로(李恒老)의 제자 김평묵이 그를 위한 제문을 쓰며 모욕하는 자구를 넣은 것을 전우가 꾸짖으며 반려한 일을 말한다. 임헌회는 김평묵과 논쟁하며 화서(華西)학파의 성리설을 비판하였고, 전우 역시 견해를 달리 하였다. 보태주는 세 벗 《논어》 〈계씨(季氏)〉에 "보태주는 벗 셋과 덜어가는 벗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보탬이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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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렬144)께 올리는 제문 祭崔性武【長烈】文 유세차 갑자년(1924) 4월 24일 병오날은 과동(果東) 최군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사흘에 갈장(渴葬)145)하는 날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사귄 벗 김택술(金澤述)은 그 날 밖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널을 만나 슬피 곡하고, 가마(加麻)146) 하고 광(壙) 앞에 갔다가 3개월 뒤에 벗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잠깐 사이에 무덤의 풀이 우거졌습니다. 평소의 아교칠 같던 우정을 생각하면 소략한 애도의 발길이 남보다 늦어져 부끄럽습니다. 이에 눈물 섞인 술과 슬픔에 간장 에이는 글을 준비하여 소상을 하루 앞둔 정해날에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아, 하늘은 어찌하여 자질이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내지도 않으면서 앗아가기는 빨리한단 말입니까. 좋은 싹은 기르기 어렵고 쉽게 말라 죽으며, 지초 꽃은 열흘도 못 가는데 뻗어나는 덩굴은 뽑아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올빼미와 살무사처럼 못된 무리들이 천하에 가득한데 기린과 봉황처럼 훌륭한 인물은 어쩌다가 나타나며 또 게다가 굶주리고 넘어지는 고난을 당하니 천고의 한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하늘이 그대에게 한 것을 보면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앗아간 것이 마치 희극과 같습니다. 한번 보면 기억하는 재주와 천리나 되는 먼길을 달려가려는 뜻을 부여해 주었으면서 20년 동안 병을 앓게 했고 끝내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앗아갔습니다. 이것이 어찌 빨리 앗아간 것이 아니며 지극히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인해 옛사람이 〈대초(大招)〉와 〈천문(天問)〉147)을 지었던 것입니다.아, 그대에게 있어 나는 재주로 말하자면 진실로 견주 수 없는 둔마(鈍馬)148)입니다. 그러나 도가 있는 스승의 문하에 먼저 배우러 갔다는 이유로 그대와 벗이 되어 생강이 나무에서 난다고 해도 믿고 버선을 거꾸로 신어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명한 그대가 지나치게 미혹된 것이었으니, 이택(麗澤)의 도움도 되지 못하고 마직(麻直)의 보탬도 되지 못하였으니149) 식견이 얕고 인품이 비루하여 실제가 없는 제 자신이 대단히 부끄러웠습니다. 이것은 다만 내가 일찍 구옹(臼翁, 전우(田愚))과 (사제의) 분의를 맺은 참에 그대가 원대한 성취가 있을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기를 바란 나머지, 애덕(愛德) 군자인 그대에게 가만히 다가간 것이었고, 내가 마음에 기뻐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몸에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들어, 그대는 큰 한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약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비록 저녁에 죽어도 무슨 서운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대에게 준 마지막 충고였습니다. 그대가 폐백150)을 싣고 험한 길을 나아가 마침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던 것은, 어쩌면 나의 이 말에 도움 받아 발동된 것이었을까요? 많은 못된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서서 우리 동방에 석과(碩果)151)와 같은 인물이 되리라던 그대의 당당한 생각은 저 푸른 하늘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렇게 억눌러 꺾어버려 저 땅에 묻히게 하였으니, 훤칠하게 빼어난 인물과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질을 모두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인재가 줄어가는 것이 안타깝고 우리 무리가 날마다 외로워지는 것이 고통스러우니 어찌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겠습니까.아, 그대는 천성적으로 남다른 정성스런 효심을 타고났습니다. 지난번 모친상을 당해서는 수척한 모습으로 예법을 철저히 지키더니, 신음하며 죽을 위기까지 이르자, 선생님께서 건강 해침을 책망하는 편지까지 보내 타이르셨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효성스러운 그대가 팔순의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끝까지 봉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하에서도 절절하게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가 세상을 떠나고 아홉 달 뒤에 부친께서도 운명하셨으니 아마도 영령께서는 구천에서 부친을 모시고 평소보다 더 효도하고 계실테지요.아, 그대와 내가 사귄 날짜를 헤아려 보면 칠천 이백일입니다. 고부의 천태산(天台山)에 눈 내리고 달 밝을 때와 창강(滄江) 동쪽에서 바람 쐬고 목욕하며 즐거이 어울린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대는 병상에서 약을 먹으며 야위어갔고, 나는 가난과 곤경 속에 근심하고 상심하였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헤어져 지낸 날은 많았고 만나는 날은 적었으니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 간절하면서도 만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늘에게 바람을 빌려 한 시절 즐겁게 가까이 지내려던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바랐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올봄에 그대 살던 아름다운 마을에 와 머물게 되어서 덕문(德門)의 자제와 사방의 뛰어난 인재들이 한데 모여 날마다 옛사람의 학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도 함께 한다면 당연히 곱절이나 즐거울 것입니다. 지난날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 그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우연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생사의 먼 갈림은 예측하할 수가 없군요. 동산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꾀꼬리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한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다만 생각건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을 날도 있는 법이니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면 나는 구천에서 그대와 어울려 영원토록 즐겁게 지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슬퍼할 날은 얼마 되지 않고 슬퍼하지 않을 날은 영원하다."152)라는 것은 한유(韓愈)가 먼저 깨달아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아, 슬픕니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維歲次甲子之四月二十四日丙午, 果東崔子觀化第三日渴葬之期也。 在世友金澤述自外而歸, 道遇其柩, 哭之慟遂, 加麻臨壙, 而終三月, 流光忽忽, 轉眄之頃, 墓草已宿, 念膠漆之平素, 愧鷄絮之後人, 乃以和淚之酌、剔肝之文, 奠于小祥前一日丁亥而告之, 曰: 嗚呼! 天於美質, 何生之寡而壞之速也? 夫嘉苗難植而易槁, 芝榮不旬, 而蔓草薙而難絶, 鴟梟虺蝮滿天下, 麟鳳之出, 間一覩而從又飢且踣焉, 千古之恨庸有極乎? 天之於子, 生之奪之, 有若戱劇, 旣賦之以一覽輒記之才、長途千里之志, 旋厄之以二十年貞疾, 竟促之以三紀餘短折, 是豈非壞之速、恨之極者乎! 此古人所以大招天問之不得不作也。 嗚呼! 吾於子, 語其才則實十駕之不及, 但以先遊有道之門, 爲子之所取益, 薑生樹而猶信, 倒著襪而不謂錯, 其柰高明之過惑, 麗澤之無所資, 麻直之靡能補, 多慙淺陋之無實。 惟是早定分于臼翁, 庶遠大之有聞, 吾竊附於愛德。 非余心之不悅。 柰二竪之嬰身, 子不勝其太息, 若乃苟斯道之朝聞, 雖夕死而何憾? 是吾最後忠告者。 而子之載十脡而間關, 終遂願於生平者, 豈有動於斯言之助發歟? 排群陰而獨立, 作碩果乎東方, 子之亭亭一念彼蒼可質顧乃壓之摧之, 埋却黃塵, 幷與其頎頎之秀、休休之美, 而一閟無覿, 慨人才之衰少, 痛吾黨之日孤, 其何以不嗟嗟而怛怛乎? 嗚呼! 子之天性誠孝, 固有異乎人者。 而曾在內艱日也, 欒欒然不從權, 於呻吟濱死之中, 至蒙先師傷生之書責, 觀此一事, 其餘可悉。 以子之孝, 奄棄親於八耋, 念未終養, 應切泉下之泣, 而子逝九朔, 尊府繼沒, 庶陟降侍于九天, 追孝愛於平昔也歟! 噫! 吾與子交, 以日計者, 七千有二百。 天台雪月, 滄東風浴, 惠然從者未幾日月, 子則㱡㱡乎刀圭床第之間, 我則憂傷貧難之攸迫, 蓋別多而會少, 恒戀戀而難釋願, 天借風以樂時月促膝者, 非吾兩人所欲乎! 吾於今春來住仙里, 得與德門子弟及四方賢俊, 日求古人之業, 若吾子在而共之, 應一倍之快樂, 乃前日之欲之而未得者, 偶成於今日子逝之後, 若是乎死生參商之難測也。 每園蔭濃綠, 鸎聲砭耳, 輒恨好我之不復得, 而泫然之不覺也。 但念人旣有生, 會當有終, 過幾多寒暑, 吾將從子于九天之上, 娛樂以閱萬劫, 所謂悲不幾時, 而不悲者無窮期, 非昌黎公之先獲也耶? 子其知乎, 未乎? 噫乎, 哀哉! 尙享! 최성무 장렬 최장렬(崔長烈, 1887~1924)의 자는 성무(性武), 호는 과동(果東)이다. 1921년에 전우(1841~1922)를 뵈었으며, 저서로 《과동유고(果東遺稿)》를 남겼다. 갈장(渴葬) 사망에서부터 장사 지내기까지 일정한 기간이 있는데, 그 기간을 무시하고 서둘러 장사 지내는 것이다. 가마(加麻) 관에 삼베 테두리를 두르거나 겉옷에 삼베헝겊을 붙여 마음의 상복을 입는 것인데 벗이나 선후배가 한다. 〈대초(大招)〉와 〈천문(天問)〉 대초(大招)는 초(楚)의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지 9년 만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측하고 스스로 자신의 혼(魂)을 부르는 뜻으로 지은 글이고, 천문편(天問篇)은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산택(山澤)을 방황할 때, 우주의 모든 일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늘에 묻는 내용으로 지은 글로서, 모두 억울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둔마(鈍馬) 원문은 '십가(十駕)'인데 열 배나 능력이 떨어지는 둔한 말을 말한다. 《순자》 〈수신(修身)〉의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택(麗澤)의……못하였으니 벗으로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겸사이다. 이택은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고 하였다. 마직(麻直)은 《순자》 〈권학(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폐백 원문은 '十脡 : 포 열 줄'인데, 제자가 스승께 집지할 때 바치는 예물이다. 《논어》〈술이(述而)〉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포(脯) 한 속(束) 이상을 가지고 와 집지(執贄)의 예를 행한 자에게는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子曰: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보이는데, 주자의 주에 "'수(脩)'는 포(脯)이니 10개를 '속(束)'이라 한다. 옛날에 서로 만나볼 적에는 반드시 폐백(幣帛)을 바쳐 예의로 삼았는데, 한 속(束)의 포(脯)는 지극히 적은 것이다.……다만 찾아와서 배울 줄을 모르면 가서 가르쳐 주는 예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예를 갖추고 찾아오면 가르쳐 주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脩, 脯也, 十脡爲束. 古者相見, 必執贄以爲禮, 束脩, 其至薄者.……但不知來學, 則無往敎之禮, 故苟以禮來, 則無不有以敎之也。]"라고 해설하였다. 석과(碩果) 과일 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사람들이 따 먹지 못하여 겨우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다시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큰 덕을 지닌 채 소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에서 온 말이다. 슬퍼할……영원하다 한유(韓愈)가 조카인 성로(成老)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 "(나도 죽을 날이 머지않아) 슬픔에 잠길 날이 얼마 안 되고, (죽어서 만나 함께하며) 슬퍼하지 않을 날이 무궁하다.[悲不幾時, 而不悲者無窮期。]"라고 하였다.《韓昌黎集 卷5 祭十二郞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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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국 관수께 올리는 제문 祭金光國【觀洙】文 유세차 병오년(1906) 8월 무자날에, 어린 벗 부안 김가 김택술은 몇 줄의 애도사를 지어서 처량한 바람 속에 술 한 잔 올리고, 돌아가신 백헌(柏軒) 거사 울산김공의 혼령께 곡하며 아룁니다.오호! 처음에 제가 공을 뵙게 된 것은, 저 갑진년(1904) 5월에 영주(瀛洲)의 산 개울가에서 열을 함께 식히면서였고, 그 뒤로 다시 백방산(栢芳山)133)의 숲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옥천(玉川)의 계곡과 비탈은 전에 공의 선조 담로(湛老) 께서 문회의 장소로 점찍은 길지였습니다. 공은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던 중, 구옹(臼翁 田愚)께서 저더러 공의 집에 가 강습(講習)의 절차를 협의결정하고 참가자의 명단을 작성하게 하셨습니다. 깊고 진지한 정의가 본래 특별하였기에 덕을 즐기는 교유와 동몽을 훈도하는 모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다시 공경한 면려와 책선이 더해졌으니, 모두가 도의를 기약한 만남이었고, 소인들의 꿀처럼 입에 단 사귐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창주(滄洲)134)에 있는 저에게 왔다 가시면서 머잖아 다시 만나자 하셨었는데, 공께서는 저를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홀연히 돌아가셨습니다. 제 마음의 슬픔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일찌기 공께서 연세가 높아지면 장차 당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는 학문을 이루시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문에 어찌 불운이 많아 이처럼 다급하게 미쳐 36년이 안되어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아아! 밝은 구슬이 깊고 깊은 못에 빠졌으니 그 누가 가슴 누르며 슬퍼하지 않겠습니까?오호! 사람이 세상을 삶에는 곤궁과 영달로 손익을 셈할 수 없고, 장수와 단명으로 득실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직 저 심지와 조행이 어떠한가를 보아 그 사람됨의 허실을 가릴 수 있습니다. 만약 능히 명민하고 신실하여 도를 얻는데 나아간다면, 이는 곧 공자님 말씀하신 호학(好學)의 가르침을 준행(遵行)하는 것입니다. 공께서 하신 바가 진실로 이것이었으니, 달리 또 무엇이었겠습니까? 아아! 공을 저 배움 없이 늙고서 죽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어 보면 하늘과 심연의 차이에 그치지 않습니다.오호! 공께서는 일찌기 저에게 말하셨습니다: "그대의 선조 지포(止浦)135) 공은 덕업이 위대하고 문장이 뛰어나셨네. 바라건대 나에게 그 유집(遺集)을 보내주어 심술(心術)을 밝히는 도리를 알게 해주시면 고맙겠네." 아아! 저는 승낙하고 나서도 (출판의)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여러가지 사정으로 장애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 사람 연릉계자(延陵季子)는 무덤에 칼을 걸어136) 의리를 지켰는데, 이제 저도 그의 마음을 따라 문집 한 부를 공의 상자에 담아 드리며, 어루만지고 펼쳐 읽으시는 모습을 마음에 그립니다. 아아, 공이시여, 밝은 혼령이 있으시거든 저의 쌓이고 맺힌 속 마음을 살펴주소서! 維年丙午之八月戊子, 少友扶安金澤述掇數行之哀辭, 奉一酹於凄風, 哭于故柏軒居士蔚山金公之靈, 曰: 嗚呼! 始余之識公也, 粤以甲辰之歲敦牂之月, 共濯熱於瀛嶽之泉石, 復接袂於栢芳之林樾。 惟玉川之澗與阿, 昔公先祖湛老之所卜吉于以文會于玆地。 公之有志未遂, 厥惟久日。 臼翁命余小子就公家而議定講習之節, 聯名姓於一案。 誼之深摯, 固已有別, 肆有樂德之遊、訓蒙之會, 益加之以切切, 蓋相期者道義, 不比小人之交甘如蜜。 頃過余於滄洲之上, 謂未久而復促膝, 公已忽其不待而歸, 我心悲傷, 其未可遏。 曾擬公於遐齡, 庶幾升堂而入室, 夫何斯文之運多蹇, 遽此未及三紀而沒? 繄明珠, 其沈於九淵, 其孰不掩抑而悵怛? 嗚呼! 人之於世, 窮達不足爲損益, 修短不足爲得失。 惟觀夫立心制行之如何, 可辨其爲人之虛實。 苟能敏且愼, 而就有道, 寔遵宣聖好學之訣。 公惟展也有玆, 又胡爲乎? 咄咄! 瞻彼老無學而不死之人, 不啻天淵之懸絶。 嗚呼! 公嘗語余: 惟君之先止浦翁德業宏偉, 文章發越, 幸貽我以遺集, 俾知所以開明心術。 嗟! 余已諾而未及踐職, 由事故之多掣。 我思古之人延陵季子掛劒之義, 先獲我心之所出, 爰奉一部置公之篋, 怳若見其摩挲而披閱。 嗚呼! 公有不昧者存, 諒此衷曲之蘊結。 백방산(栢芳山)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과 복흥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창주(滄洲) 전라북도 순창군에 창주 마을이 있고, 남원시에 창주서원이 있는데 이들 중 어느 지명을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 지포(止浦)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 초명은 백일(百鎰)이다. 연릉계자(延陵季子)……칼을 걸어 생전에 한 약속을 죽은 뒤에라도 이행함을 말한다. 연릉계자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인데, 노(魯)나라로 사신 가는 도중에 방문한 서(徐)나라 군주가 자신의 보검(寶劍)을 갖고 싶어 하자 사명 마치고나서 주리라고 마음먹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미 죽은 서군(徐君)의 묘에 가서 나무에 보검을 걸어 놓고 떠났다 한다. 《史記ㆍ吳太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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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외숙141) 최공께 올리는 제문 祭季舅崔公文 유세차 경신년(1920) 8월 계유삭(癸酉朔) 19일 신묘날은 나의 넷째 외숙 최공의 연제(練祭) 날입니다. 그 하루 전 경인날에 생질인 김택술(金澤述)과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 형제들이 삼가 닭과 떡의 제물을 올리고 곡하며 영연(靈筵)에 아룁니다.오호! 사람이 세상에 와서 가족이 번성하고 살림이 넉넉하여 장수와 복록을 누리다가 가는 이가 모두 몇 안 될 것입니다. 대개는 가난한 빈지문 안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다 염교 잎 위의 아침 이슬처럼 도중에 스러져갑니다. 그리고 가끔 이쪽은 부족하고 저쪽은 풍부하며, 동쪽에서 잃고 서쪽에서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외숙처럼 먹고살기 어려움과 운세의 쇠락을 한 몸에 모아 겪다가 마침내 짧은 삶을 끝낸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아! 우리 외숙 댁은 대대로 효도ㆍ우애하여 고을 사람들의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20년 전 큰 외숙께서 계실 때에는 용처럼 날쌘 네 종형제와 어여쁜 두 자제142)가 위아래에서 정숙하고 화락하여 화기(和氣)가 집안에 가득 찼으니 최씨 가문이 창대하리라 믿음을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찌 그리도 믿을 수 없는 재앙을 내려 팔구년 사이에 쌍벽(雙璧)이 침몰되고 삼장(三璋)이 연이어 부러지니, 사람들은 떠나가고 집은 텅 비고 말았습니다. 공께서는 홀로 남은 조카 만길(萬吉)143)과 외로이 의지하며 남으로 북으로 품팔이 일꾼을 하고 굶주림을 겪다가, 요즈음에 이르러 조금 풀릴만 하였는데 공께서 갑자기 병이 들어 끝내 못 일어나셨습니다.아아, 슬프다! 전에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친정이 쇠락한 한을 마음에 두시어 부고가 올 때마다 슬피 통곡하시는 것을 곁에서 보며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질병의 불길이 잦아든 후 점점 생기가 회복되어, 공께서 자녀를 두고 조카 만길도 장성하여 결혼하고 나서는, 어머니께서 때때로 한번 가보시면 슬픔을 기쁨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제가 쌓은 재앙으로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공께서는 슬픔에 몸을 베인 듯 아파하였고, 수시로 저의 창동(滄洞) 여막에 찾아오시어 마주 보며 울음을 삼킨 것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어머님 닮은 용모를 그래도 외숙에게서 볼 수 있구나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그 비슷한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길게 부르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오호! 공께서 돌아가신 뒤 다시 화가 뒤따랐습니다. 며칠도 안 되어 만길이 마저 아내를 잃었으니, 집안 살림이 기왓장처럼 깨어질게 뻔합니다. 이제 공의 식구와 합쳐 있고 없는 것을 함께 한다 하니, 보는 눈에 아린 눈물이 가득차 차라리 눈에 못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명절 제사를 어찌 모시며, 으앙대는 다팔머리를 어찌 기르겠습니까? 만약 오늘날 제 어머님이 계셨으면 또 어떤 마음이셨을지 모르겠으니, 그것이 더더욱 슬플 따름입니다. 기수(氣數)의 어긋남 때문에 복과 재앙이 거꾸로 내리는 일이 없지 않지만, 하늘이 내렸다가 하늘이 되돌리는 것은 실로 항상된 이치입니다. 최씨 가문의 의로운 행실과 외숙의 선한 덕성에 마침내는 하늘의 보답이 있을 것을 저는 압니다. 이제 공의 두 아들과 만길의 한 아들은 상서로운 예천(醴泉)의 샘이 마르지 않았고, 신령한 영지(靈芝)의 뿌리가 아직 있어, 이제 장차 퐁퐁 솟아 흐르고 휘황한 꽃을 피울 것을 믿고 기다리려 합니다. 이 하나의 소원은 진실로 저희 조카들이 축성하며 기다리는 바이며 또 공께서 유명(幽明)을 넘어 지켜보실 바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공께서는 상제 곁을 오르내리면서 위에서 음우(陰佑)를 다하실 터이니, 아래서도 분수껏 거들고 지키는 것이 저희 조카들의 길이겠습니다. 밝으신 혼령께서는,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흠향하소서! 維歲次庚申八月癸酉朔十九日辛卯, 我季舅氏崔公之鍊期也。 前一日庚寅, 甥姪金澤述、鳳述、萬述、億述謹具鷄糕之奠, 哭告于靈筵, 曰: 嗚呼! 人之於世, 族盛家殷, 身享壽祿而終者, 凡幾人矣。 槩乎殘門窮蔀, 艱苦百端, 薤上朝露, 中途溘然。 然或嗇乎此而豊乎彼, 失之東而得之西者, 則有之矣。 孰有如吾舅氏之艱食衰運咸萃一身, 而終之以年且促短也? 噫! 我舅氏之世承孝友, 固鄕黨之所稱豔者。 二十年前伯舅之在世也, 四龍矯矯, 雙棣韡韡, 上下肅雍, 和氣滿室, 崔門昌大, 於玆益信。 夫何皓天難諶, 殃慶靡定, 八九年間, 雙璧幷沈, 三璋繼折, 人旣云亡, 室亦磬虛。 公與孤姪萬吉孑然相依, 南賃北傭, 喫飢如飽, 捱到近日, 可以少紓, 則公遽遘疾, 竟爾不起。 嗚呼! 悲哉! 昔我先慈以親家衰替, 至恨在心, 每一喪報之至, 輒慘怛痛絶, 傍觀爲之心折已。 而病燄旣熄, 生道漸復, 公已有育, 而萬吉亦壯有室, 先慈時一往見, 有足以回悲而作歡者矣。 逮夫不肖積釁禍延先慈, 公慼慼然痛之若割, 而時時來顧不肖滄苫達廬相對呑聲者, 不知其幾矣。 意謂顔範之彷彿者, 猶可見於舅氏矣。 今焉而後, 幷與彷彿者而不見, 安得不長號而深慟也? 嗚呼! 公沒之後, 禍不單行, 未數日萬吉喪其室, 家道瓦裂, 不言是圖, 猶且合幷公眷, 共厥有無, 滿目辛酸, 寧欲無覩。 歲時先祀何以奉之, 髧髧呱呱何以鞠之? 如使今日而先慈在者, 又不知何以爲心也, 是重可悲已。 蓋氣數之差, 雖不無倒施錯降, 天定天返, 實理之常, 崔氏之行義, 吾舅之德善, 吾知其終獲報於天者也。 今公之子二人, 萬吉之子一人, 醴泉之源不竭, 靈芝之根尙在, 煌煌之秀, 混混之流, 庶將執契而俟之。 惟此一願, 固姪輩之所祝成期待, 而亦公之所炯炯幽明者也。 竊想陟降帝側, 應盡冥佑於上, 而若其隨分扶護於下, 則亦姪輩之道也。 尊靈不昧, 庶幾鑑之。 尙饗! 넷째 외숙 족보에 의하면 넷째 외숙은 최경렬(崔磬烈, 1878~1920)로 보인다. 여기서 '넷째'는 사촌형제들 중의 넷째를 말한다. 김택술의 외조부 최석홍(崔錫洪, 1836~1881)은 형 최석현(崔錫賢)과 아우 최석주(崔錫周)를 두었다. 최석현의 장남은 창순(暢淳, 1852~1919)이고 차남 응렬(應烈)은 종숙부 최석중(崔錫中)에게 입계하였다. 최석홍의 장남은 기렬(璣烈, 1865~1901)이고, 차남 경렬(磬烈, 1878~1920)은 계부 최석주(崔錫周, ?~1885)에게 입계하였다. 《全州崔氏中郎將公派世譜》권3 〈少尹公派〉 네 종형제와……두 자제 큰 외숙 최창순(崔暢淳) 및 최응렬(崔應烈), 최기렬(崔璣烈), 최경렬(崔磬烈)의 네 종형제, 그리고 최창순의 두 아들 규상(圭庠, 1873~?)과 규남(圭南)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길(萬吉) 최기렬(崔璣烈)의 아들 규천(圭千, 1890~1948)의 초명(初名)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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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손자 계손 아명은 하중을 본 날에 작년 가을에 썼던 '손'자 운을 거듭 쓰다 신미년(1931) 10월 6일 見長房孫繼孫【夏重兒名】日 疊昨秋孫字韻【辛未十月六日】 너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계손이라 지어주니 錫汝嘉名曰繼孫마음 깊이 이를 취해 선조를 잘 이어야 한다 深心爰取善承先문정 현조께서 너와 같은 해에 태어나셨으니372) 文貞顯祖同庚降김씨의 종손으로 팔대를 전했구나 金氏宗昆八葉傳사성이 섶을 멘 일은 일찍이 바라는 바요373) 思聖荷薪曾所望중궁의 뿔을 쓴 일 또한 마땅한 의론이다374) 仲弓用角亦宜論네가 능히 일찍 성취하고 내가 장수한다면 爾能夙就我長壽집안의 명성을 사람들이 잊지 않으리라 庶使家聲人不諼 錫汝嘉名曰繼孫, 深心爰取善承先.文貞顯祖同庚降, 金氏宗昆八葉傳.思聖荷薪曾所望, 仲弓用角亦宜論.爾能夙就我長壽, 庶使家聲人不諼. 문정……태어나셨으니 문정정(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가 태어난 해가 신미(辛未)년이기에 같은 해 태어났다고 한 것이다. 김구는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사성이……바요 가업을 잘 계승하라는 뜻이다. '사성(思聖)'은 《중용》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자사(子思)인데, 공자(孔子)의 손자이다. 《중용》은 자사(子思)가 공자의 뜻을 조술하여 지은 저술이다. '하신(荷薪)'은 아비가 쪼개놓은 장작을 아들이 지는 것으로 가업을 계승하는 것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7년 조에 "옛사람의 말에 '그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그 아들이 능히 짐 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고 하였다. 중궁의……의론이다 선조가 비록 미천하더라도 훌륭한 손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중궁(仲弓)은 공자 제자 염옹(冉雍)의 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천하고 행실이 나빴으나, 염옹은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므로, 공자가 염옹을 두고 이르기를 "얼룩소 새끼일지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반듯하게 잘 났으면, 비록 그것을 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산천이 그것을 버리겠는가.[犂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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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의 운을 써서 최형식 복열 에게 주다 疊前韻 贈崔亨植【栿烈】 무슨 물건 구하길래 남들이 구하는 것과 다른가 所求何物異人求높디높은 곳에 있지 않고 깊은 곳에 있지도 않네 不在高高不在幽샘물이 끝내는 바다에 이르는366) 걸 보아야 하니 須看泉流終放海삼태기의 흙으로 산을 쌓는367) 일 마다하지 말라 莫辭簣土積成邱몸은 말세의 풍진368)에서 벗어나 서고 身超叔季風塵立마음은 당우의 일월369)에서 노닐어야지 心向唐虞日月遊진중하게 그대에게 지경법370)을 부치니 珍重寄君持敬法키 하나에 정신을 두어야 배를 몰 수 있네371) 有神一柁可行舟 所求何物異人求, 不在高高不在幽.須看泉流終放海, 莫辭簣土積成邱.身超叔季風塵立, 心向唐虞日月遊.珍重寄君持敬法, 有神一枕可行舟. 샘물이……이르는 학문에 근본이 있고 과정을 차례로 거친 후 도를 터득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의 "근원이 있는 물이 계속 흘러서 밤낮을 그치지 아니하여 구덩이가 가득 찬 뒤에 나아가 사해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라고 하였다. 삼태기의……쌓는 끝까지 노력하여 목표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경》 〈여오(旅獒)〉에 "아홉 길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공이 허물어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말세의 풍진 혼란한 세상을 말한다. 원문의 '숙계(叔季)'는 말세(末世)라는 뜻이다. 숙(叔)과 계(季)는 끝[末]이라는 뜻이므로 쇠란(衰亂)한 세상을 숙세(叔世), 망하게 된 세상을 계세(季世)라 한다. 당우의 일월 '당우(唐虞)'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이고, 곧 태평성대였던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지경법(持敬法)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북송(北宋)의 정이(程頤)는 주경 공부를 학문의 요체로 파악하면서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키……있네 배를 몰려면 키에 집중해야 하듯이 '주일무적(主一無適)'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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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시암130)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叔諟菴公文 유세차 경오년(1930) 11월 5일 무신날은 시암(諟菴) 김공의 탈상일이온데 족질 김택술(金澤述)은 연고가 있어 참례하지 못하고, 하루 전인 정미날에 삼가 제물과 제문을 갖춰 둘째 아들 형태(炯泰)를 시켜 영전에 우러러 아룁니다.오호! 공께서 가신지 25 개월이 되어, 이제 궤연을 물리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친분(親分)과 정의로는 같은 할아버지를 둔 손자이고 같은 스승을 둔 동문인데, 술 한 잔과 몇 줄 제문의 성의도 보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시대의 법망이 날로 엄밀해져 손발을 둘 데가 없고 골짜기 구덩이에 떨어져 죽을 날이 다가오니, 맹자가 말한 바 죽음을 면하기도 부족하여 예법을 갖출 여유가 없습니다. 비록 뜻있는 선비라 하여도 오늘의 세상을 피하기 어려운데 망한 나라의 버려진 하민들은 장차 어디에 떨어질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 세상 함께 사는 선비들은 공께서 현철하심에도 장수를 못 누림을 아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께서 훌쩍 멀리 떠나시어 이곳 사정을 깜깜히 모르게 되심을 부러워합니다.아아! 공께서는 평생을 살면서 효우(孝友)로 종친들과 돈독하였고, 벗들을 성실한 행동으로 감복시켰고, 부지런히 권면하고 가르쳐 교육을 일으키셨습니다. 공의 덕은 확고히 세도에 보탬이 되기에 충분하였고, 그래서 저들이 두터이 감복함은 역시 사람의 마음에 같은 것이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이 이처럼 날마다 달마다 극심하게 변하며, 어찌하여 하늘은 우리 백성의 도덕을 이토록 무너져 없어지게 놓아둔단 말입니까? 만약 구천에서 오늘 다시 일어나 오신다면, 저는 공은 곧 공이고 세상은 곧 세상임을 알아 서로 혼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께 슬피 곡하면 곧이어 시대를 아파하는 통곡이 함께 터져나오니, 이를 어이한단 말입니까?오호! 공의 시원스레 쏟아내는 말씀, 우뚝이 높은 기개, 온화한 용모, 엄연한 자세는 실로 혼탁한 세상의 호걸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도ㆍ감복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영영 두터운 흙 아래 묻히고 나면 장차 어디서 다시 공의 모습을 뵈오리까? 이제는 일제의 검은 옷을 입고, 상투를 잘리는 화를 당하게 될 조짐입니다. 억만 백성이 절멸되어 가는 중에 유가의 류가 앞장을 서니 장차 위아래 사람들이 다 뒤따라가 망한 나라의 궁성과 왕릉131) 사이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희희낙락할 날이 멀지 않습니다. 유명(幽明)에 갈리는 슬픔은 오래 이어지지 않고, 저승에서 만나 기뻐할 시간은 무궁하다132)는 말로 미리 위안을 삼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밝으신 혼령께서는 이 붉은 마음을 굽어 살피소서! 維歲次庚午十一月五日戊申, 諟菴金公之祥期也。 族姪澤述有故未赴, 前一日丁未, 謹具奠與文, 使次子炯泰敬告于靈几, 曰: 嗚呼! 公之沒, 今爲二十有五月, 靈將撤矣。 平生親誼如余之同祖孫、同師生者, 曾不以一酌酹數行文見誠, 豈人情哉! 時網日密, 手足莫措, 溝壑在前, 死亡無日, 孟子所謂救死不贍, 奚暇治禮者, 雖云士子而難免乎今之世矣。 而故國遺黎幷不知將如何下落也。 此所以幷世群彦, 雖惜公之賢而無壽, 而亦羨公之翛然遐擧, 冥然無知也。 噫! 公之在世, 孝友之篤孚宗黨, 誠幹之實服朋友, 勸敎之勤興學者, 公之德固足以有補乎世, 而彼孚服興感者亦自有人心之所同然也。 夫何世變之極, 日異月殊, 天惟與我民彛大泯亂至此也? 如使九原復作乎今日, 吾知其公自公、世自世, 而不相入也。 然則傷時之痛, 如之何不幷與哭公之悲而交相發也? 嗚呼! 沛然之談、傑然之氣、溫然之貌、儼然之像, 實爲叔世人豪, 而令人傾服者。 永一閟於厚壤, 將於何而復覿? 目今黑服之行, 勒剃之履霜也, 萬姓殄滅之中, 儒流居先, 行將追隨上下, 於淸都泉坮之間, 嬉嬉如平昔也有日矣。 所謂悲不幾時, 而不悲無窮者, 預可爲慰焉。 惟尊靈之不昧, 庶垂鑑於衷赤。 시암 김낙구(金洛九 1875.6.3.~1928.11.5.)의 호이며, 조명은 낙규(洛奎)이고 자는 석우(錫禹)이다. 궁성과 왕릉 원문은 '청도(淸都)와 천대(泉坮)'인데, 청도(淸都)는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상(天上)의 궁성이고, 천대(泉坮)는 무덤과 저승을 말한다. 유명(幽明)에……무궁하다 제문을 올리는 자신도 머지않아 저승에 가 다시 만날 것임을 말한다.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는 조카를 위한 제문에서 자신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다시 만날 것이니 헤어지는 슬픔은 얼마 안 되고, 함께하며 기뻐할 날은 무궁하다고 말하였다. 《韓昌黎集ㆍ祭十二郞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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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형 만당122) 김공께 올리는 제문 【신묘년(1951)】 祭外從兄晩棠金公文【辛卯】 오호, 김공께서는 嗚呼! 惟公,기린과 봉처럼 빼어나고 麟鳳之秀,금과 옥처럼 깨끗하여 金玉之潔,예원의 아름다운 문사가 藝苑詞翰,수천 명 중에 으뜸이셨습니다. 千人之傑.갑오년 천 명의 과거123)에서 靑馬千科,사람들이 서로 밀며 다투자 人爭相軋,공은 천하고 번잡하다 여겨 公謂猥雜,초연히 마음을 거두고 超然不屑,평소에 품었던 큰 뜻으로 素蓄大志,세상을 나가리라 생각하고 欲爲世出,서울을 여기저기 배회하며 徘徊京師,시대의 물정을 조용히 관찰하셨습니다. 靜觀時物,옛 의관은 불 꺼진 재처럼 식었고 衣冠灰冷,오랑캐 복식의 바람은 뜨거우니 卉氈風熱,돌아가 내 전답을 일구고 歸治我田,곡식과 과실 거두어 有禾穎栗,부모님 평안히 모시고 父母孔安,제사 향기롭게 지내면 祭祀其苾,이 또한 집안의 정사이니 是亦爲政,어찌 꼭 나라 일만을 보겠습니까. 于國何必.시절 형편은 날로 무너져 내리고 世給日降,곤궁한 선비들은 끝내 숨을 죽이는데 窮士竟窒,성품 기개 강직하고 호쾌한 공은 性氣介爽,이런 세상에 나가는게 부끄러워 恥與出沒,인자의 마을을 찾고 골라서 擇卜仁里,용화산 바위 굴에 머무셨는데 龍華巖穴.덕은 이웃 있어 외롭지 않아 德鄰不孤,문 밖에 수레 발자국 이르고 門外車轍,가슴 열어 시사를 수창하며 開發唱酬,망국의 슬픈 노래124) 끝이 없었네. 風泉餘闋,만년에는 본심을 공부하여 晩加存養,석연히 깨달아 통달하고 犁然會達,인자의 수복을 누려 仁者有壽,팔순의 높은 나이에 오르며 躋乎大耋,한결 같이 희고 밝아 始終皦然,생과 사에 순하며 평안하셨습니다. 順寧存沒.아아! 嗚呼!나는 공에게 我之於公,친형처럼 대하였고 親兄是埒,공은 나를 公之於我,친동생 줄에 두셨습니다. 親弟之列,아홉 살엔 뒤를 따라 九齡隨後,정읍 남쪽에서 날마다 글 배우고 楚南課日,열세 살에는 시경을 외워 十三誦詩,나의 집에 와서 가르쳐주며 就敎我室,나의 성취를 곁에서 도우면서 助我成就,간절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蓋無不切.나는 구산125)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余師臼山,헛된 이름을 밖에 흘렸는데 虛名外溢,공은 실로 여겨 속으로 반기면서 公實內喜,잣나무의 기쁨126)을 보여 주셨습니다. 自况柏悅,늘그막에 공부하는 사람처럼 以若老學,때때로 제게 질문을 하셨는데 時試問質,공은 몰라서가 아니었고 公豈不知,나는 긴 설명을 다 못 하면 余豈有說,이끌어 궁극에 닿게 하시니 引而歸極,공의 덕은 이처럼 우뚝하셨습니다. 公德斯屹.남과 더불어 선을 지음은 與人爲善,맹자가 밝혀낸 순임금의 마음이고 舜心孟發,아래로 물음을 부끄러워 않음은 不恥下問,중니가 칭찬한 공문자127)의 미덕이라 孔美尼曰,이에 마음으로 기뻐 감복하였으니 用是悅服,공은 이처럼 탁월하셨습니다. 公乃度越.먼 곳에 떨어져 살았지만 地雖落落,해를 걸러 가끔은 마주 앉아 間年促膝,서로 함께 강설하고 토론하면 互相講討,그 즐거움은 샘물처럼 솟았고 此樂豈竭,형제이자 지기의 벗으로 兄弟知己,진실로 대하지 않음 없었습니다. 莫曰非實,흥암(興巖)128)에서 기축년 興巖己丑,단오날 작별하며 말하시기를 端陽之別,그대는 몇 살 더 젊은데 子差少我,다시 한번 와 주지 않겠는가? 盍圖再佸,공의 정녕한 당부 말씀 公言叮嚀,어찌 감히 잊고 소홀하겠습니까만 豈敢忘忽,작년 시월 초겨울에 去年初冬,제 몸이 풍질을 맞아 余中風疾,공의 말씀 못 맞춘 일 생각하며 念難副敎,싯구 짓는 이 마음 처절합니다. 作詩悽絶.오늘이 지나가면 今焉以後,영원히 유명으로 서로 갈리려니 幽明永截,끝없이 망망한 이 우주 茫茫宇宙,어디에서 이 한을 풀어보리까? 此恨莫洩.그러나 제가 공 뒤를 따를 날도 然我從公,먼 뒷 일은 아닐 터이며 匪久日月,정령으로 서로 만나 精靈相隨,천년을 함께 할 것이니 千秋不滅,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리라던 悲暫喜永,한창려129)의 작별의 말을 올립니다. 昌黎明訣.오호 슬프도다! 嗚呼哀哉!흠향하소서! 尙饗! 嗚呼! 惟公, 麟鳳之秀, 金玉之潔。 藝苑詞翰, 千人之傑, 靑馬千科, 人爭相軋, 公謂猥雜, 超然不屑, 素蓄大志, 欲爲世出, 徘徊京師, 靜觀時物, 衣冠灰冷, 卉氈風熱, 歸治我田, 有禾穎栗, 父母孔安, 祭祀其苾, 是亦爲政, 于國何必, 世給日降, 窮士竟窒, 性氣介爽, 恥與出沒, 擇卜仁里, 龍華巖穴, 德鄰不孤, 門外車轍, 開發唱酬, 風泉餘闋, 晩加存養, 犁然會達, 仁者有壽, 躋乎大耋, 始終皦然, 順寧存沒。 嗚呼! 我之於公, 親兄是埒, 公之於我, 親弟之列, 九齡隨後, 楚南課日, 十三誦詩, 就敎我室, 助我成就, 蓋無不切。 余師臼山, 虛名外溢, 公實內喜, 自况柏悅, 以若老學, 時試問質, 公豈不知, 余豈有說, 引而歸極。 公德斯屹, 與人爲善, 舜心孟發, 不恥下問, 孔美尼曰, 用是悅服。 公乃度越, 地雖落落, 間年促膝, 互相講討, 此樂豈竭? 兄弟知己, 莫曰非實, 興巖己丑, 端陽之別, 子差少我, 盍圖再佸? 公言叮嚀, 豈敢忘忽? 去年初冬, 余中風疾, 念難副敎, 作詩悽絶。 今焉以後, 幽明永截, 茫茫宇宙, 此恨莫洩。 然我從公, 匪久日月, 精靈相隨, 千秋不滅, 悲暫喜永, 昌黎明訣。 嗚呼哀哉! 尙饗! 만당 김희현(金熺鉉, 1872~1951)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정오(定五)이다. 김택술은 그를 위해 1944년에 〈만당시고서(晩棠詩稿序)〉를 썼다. 갑오년……과거 원문의 '청마(靑馬)'를 갑오년을 뜻한다. 음양오행에서 청색은 나무[木]으로 갑(甲)에 속하고, 말[馬]은 오(午)에 속한다. '천과(千科)'는 수백 명을 뽑기 위한 수천 명의 과거시험을 말하는데, 당시의 갑오년 식년 사마시에서는 1055명이 합격하였다. 망국의 슬픈 노래 원문은 '풍천(風泉)'인데, 《시경》의 편명인〈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합친 말이며, 모두 나라의 쇠망을 걱정하며 슬퍼하는 노래이다. 구산(臼山)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의 호이다. 그는 자가 자명(子明)이고, 구산 이외의 다른 호로 추담(秋潭)과 간재(艮齋)를 썼다. 잣나무의 기쁨[栢悅] 친우가 잘 된 것을 함께 기뻐함을 말한다.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文選 卷16》 공문자 위(衛)나라 대부 공어(孔圉)이다. 그가 '문(文)'을 시호로 얻은 까닭을 자공(子貢)이 묻자, 공자가 "스스로 명민한데 남에게 배우기를 좋아했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라고 대답하였다. 《논어ㆍ공야장(公冶長)》 흥암(興巖) 장성군 북하면 용암리 흥암으로, 단오절 행사로 시회를 하였던 곳인 듯하다. 한창려(韓昌黎) 당나라 창려(昌黎) 출신의 사상가 한유(韓愈)이다. 그는 조카를 위한 제문에서 자신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다시 만날 것이니 헤어지는 슬픔은 얼마 안 되고, 함께하며 기뻐할 날은 무궁하다고 말하였다. 《韓昌黎集ㆍ祭十二郞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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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를 탄식하다 水災歎 작년엔 큰 가뭄으로 백성들 먹을 것 없더니 去年大旱民無食금년엔 큰 물이 지고 또 하늘까지 넘치구나 今年大水又滔天집들이 떠내려가며 잠기고 사람도 죽으니 漂溺室廬人且死파묻히고 무너진 좋은 밭이 얼마나 많은가 埋汰良田幾十千눈에 가득한 비참한 모습 차마 볼 수가 없으니 滿目悲慘不忍見작년이 도리어 풍년이라 할 수 있겠네 去年還可謂康年만민들 고개 숙이고 울며 서로 말하길 萬民垂首泣相語내 좋지 못한 시절 태어난 게 한스러울 뿐이라 하네 我生只恨丁不辰척식157)의 동풍은 어찌 이리도 강경한가 拓殖東風一何競농촌의 생활은 지극히 어렵고 괴롭다오 農村生活極艱辛해를 이은 사나운 재해 또 이와 같으니 連年暴災又如此기운 것을 엎어버리는 건 이치가 그렇네158) 傾者覆之理其然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어떻게 살꼬 無廬無食何以生가을이 되면 또 응당 세금을 독촉하겠지 當秋亦應索稅錢머나먼 저 북만주의 한랭한 땅으로 逖彼北滿寒涼地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터전을 옮기네 知我貧氓移居廛어진 하늘은 그 언제나 재앙을 거두어159) 仁天悔禍知何日내 땅 벌어 먹고 우리 임금에게 바치면서 食吾土地貢吾君즐겁게 취하여 태평성대160)를 구가하게할까 嘻嘻醉歌康衢煙 去年大旱民無食, 今年大水又滔天.漂溺室廬人且死, 埋汰良田幾十千.滿目悲慘不忍見, 去年還可謂康年.萬民垂首泣相語, 我生只恨丁不辰.拓殖東風一何競, 農村生活極艱辛.連年暴災又如此, 傾者覆之理其然.無廬無食何以生, 當秋亦應索稅錢.逖彼北滿寒涼地, 知我貧氓移居廛.仁天悔禍知何日, 食吾土地貢吾君, 嘻嘻醉歌康衢煙. 척식(拓殖)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가리킨다. 1908년(순종2) 일본이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기운……그렇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하늘이 물건을 낼 때는 반드시 그 재질을 따라 돈독하게 하니, 뿌리가 잘 박힌 것은 북돋워주고 기운 것은 엎어버린다.[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栽者培之, 傾者覆之.]"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재앙을 거두워 원문의 '회화(悔禍)'는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것인데, 하늘이 내렸던 재앙을 거두어 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11년 조에 "만약 과인이 죽어 땅 속에 묻힌 뒤에 하늘이 예로써 허나라에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한다면, 어찌 이 허공으로 하여금 다시 사직을 받들게 하지 않겠는가.[若寡人得沒于地, 天其以禮悔禍于許, 無寧玆許公復奉其社稷.]"라고 하였다. 태평성대 원문의 '강구연(康衢煙)'은 강구연월(康衢煙月)의 준말로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이다. 강구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사통팔달의 큰길을 이르고, 연월은 달빛이 연기에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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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 선생 김공께 올리는 제문 祭炳庵先生金公文 유세차 정미년(1907) 12월 8일 갑자날에 병암(炳庵)선생 김준영(金駿榮)10)공께서 돌아가셨는데, 모시고 배웠던 부령 사람 김택술은 병란 때문에 길이 막혀 곧바로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듬해 무신년 9월 14일 병신날에 삼가 제문을 지어 그 사위 전경구(田敬九)11)에게 주며 날짜가 되면 대신 영연에 고하게 합니다.아아, 공께서는 嗚呼惟公,신령한 기운으로 태어나 寔靈攸鍾,도량이 크고 굳세었고 寬弘惟毅,기질은 침중하되 총명하였으며 沈默亦聰,아름다운 천연의 자질을 美哉天質,풍부하게 부여받으셨습니다 旣賦以豐,그 덕은 어떠하였는가 其德伊何,우뚝히 높으셨으니 屹乎其崇,마음은 경계를 가르지 않아 心不畛域,겉과 속이 한결같았고 表裡皆通,행동은 규범을 준수하고 行守塗轍,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닦았으며 動靜均功,실답고도 화려하면서 實而有華,화합하되 뇌동하지 않았으며 和而不同,진실로 군자다워 允矣君子,중도(中道)에 거의 이르셨습니다 庶幾厥中.그 학문은 어떠하였는가 其學伊何,심연처럼 깊고 깊어 淵乎其深,체(體)와 용(用)을 다 갖추었고 該備體用,고금의 일을 관통하였으며 究貫古今,문사(文辭)는 평이함 숭상하였고 辭尙菽粟,이치는 떳떳한 인륜을 구하셨습니다 理求彛倫,먼저 안 사람이 뒷사람을 깨우친다고 先知覺後,옛사람이 말하였으니12) 古人有言,벗들이 멀리서도 찾아와 有朋自遠,선비들이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衿珮盈門,목마른 이는 물을 배고픈 사람은 밥을 飮渴食飢,각각의 기량에 맞게 채워주셨고 各充其量,가르침을 베풀며 지치지 않았으니 敎惟不倦,애써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匪出勉强.세상이 공의 덕을 알지 못하여 世不知德,훌륭한 도를 실행할 길이 없었고 行道無梯,이에 간직하고 닦기를 힘썼으니 于以藏修,장소는 시내의 서쪽13)이었습니다 于川之西,공께서 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厥求惟何,유신국(有莘國) 옛 사람의 그 뜻이었는데알아주는 군주를 기대하셨는데14) 有莘其志,좋은 재목이 산에서 부질없이 늙어가고 材老于山,아름다운 옥은 그릇 속에 담겨만 있었습니다. 玉藏于器.아, 못난 저는 嗚呼無狀,공 뵙는 소원을 일찍 이루어 荊願早遂,약석(藥石) 같은 가르침으로 藥石之訓,저리고 굳은 곳을 고쳐주셨습니다. 醫我痿痺,안자(顔子)는 사물(四勿)을 일삼았고 顔事四勿,증사는 삼귀(三貴)를 말하였으니15) 曾言三貴,진실로 여기에 힘써 노력하면 苟務乎此,넘어지고 자빠짐을 면하리라 庶免顚躓,저는 그 말씀을 좇아 하면서 我其從斯,감히 걱정하고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敢有虞貳.두 번이나 먼 길을 오셔서 再命遠駕,저의 아버지와 교유하시고 託交家君,낙요재(樂要齋)16)의 기문 지어주시자 樂要之記,저의 집 문미가 밝게 빛났으니 光增楣間,두터운 은혜에 감복하여 感服厚眷,가슴에 새겨두고 잊지 않았습니다. 佩心銘肝.전몽(旃蒙)의 해17)에 歲維旃蒙,공께서 남쪽 행차에서 돌아오시다 公返南旆,고황(膏肓)의 질병18)을 얻게 되어 時嬰二竪,여로에 간고(艱苦)를 겪으셨는데 行李艱憊,멀리까지 나아가 전송하면서 遠于拜送,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했지만 如喉見罣.하늘의 이치는 매우 진실하여 天理孔諶,금방 쾌유되리라 생각했습니다 謂遄痊快,공께서도 저를 위로하시며 公亦慰余,머지않아 다시 만날 터이고 非久可對,만나고 헤어짐은 무상한 것이니 散合無常,어찌 족히 슬퍼하겠는가 하셨습니다. 何足悵慨?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孰謂一病,한 번 든 병에 끝내 돌아가실 줄을19) 竟違妄五?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번의 작별이 孰知此別,천년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永隔千古?우뚝이 높으신 그 덕을 有屹其德,이제 저는 어디서 우러러보고 我仰何所?심연처럼 깊으신 그 학문을 有淵其學,이제 저는 어디에서 구합니까 我於何求?후배들이 가르침 받을 곳을 잃었으니 後生失敎,길 잃은 수레들을 누가 인도하며 孰導迷輈?큰 뜻을 펼치지 못하셨으니 大志未展,세상의 벼리를 이제 누가 지탱합니까 孰扶世綱?아, 온 세상 사람들이 嗟幷世人,사도(斯道)를 위해 가슴아파합니다. 爲道盡傷,하물며 공의 덕행은 矧公德行,간재 선생님 문하의 고족으로서 艮翁高足,순수함이 특히 아름다워서 嘉乃純粹,사문(師門)이 기뻐하였고 師門所悅,마치 공자의 삼천 제자 중에 有似三千,안자와 증자의 반열이었으니 顔曾之列.애통하신 간재 선생님의 슬픔은20) 夫人之慟,더 말해 무엇 하겠으며 尙復何說,모든 동문들도 凡在同門,다 같이 슬퍼하였습니다. 亦均忉怛.아, 예전에 공께서는 嗚呼昔公,저를 자식처럼 대하고 視我骨肉,가르칠 만하다 여기며 謂我可敎,큰 덕의 군자를 기대하셨고 期我大德,저도 공을 뵙기를 余亦視公,백부 숙부로 여겨 諸父伯叔,의심나고 모르는 것을 나아가 묻고 就質疑晦,점괘처럼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如信筮卜,그런데 어찌하여 끝까지 은혜 주지 않고 胡不卒惠,이처럼 갑자기 버리고 떠나신단 말입니까. 棄之若遺?아,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噫人於世,가까운 친지(親知)라 할지라도 雖曰親知,마음 주는 지기(知己)를 얻는 것은 許心相得,먼 옛날부터 드물었습니다 邃古幾希.공께서는 현명하시고 저는 범상하여 公我賢凡,진실로 용과 돼지처럼 달랐으니21) 固判豬龍,일의 가부(可否)를 정함에 이르러 事有可否,사람들은 모두 동쪽으로 가고 衆皆從東,저만 홀로 서쪽으로 가도 我獨于西,공께서는 간혹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公或見從,평생에 다행으로 여긴 것이 自幸生世,공께 버림받지 않음이었는데 不棄于公,이제는 모두 끝났으니 今焉已矣,그 누가 제 마음을 알아준단 말입니까 孰諒此衷?이처럼 혼란한 시대를 만나 値此時亂,전란의 먼지가 사방에 가득하여 兵塵四塞,편찮으실 때 문병도 못하고 病不聞善,장례 때 상여 끈도 못 잡았습니다 葬未執紼,거친 글과 간소한 제수로 蕪辭菲奠,이제야 한 번 곡하는데 始展一哭,제 슬픈 곡 소리 구천에 닿을지 聲徹九原,흐르는 눈물 양 손에 가득합니다 淚盈雙掬.아아, 높으신 혼령께서는 嗚呼尊靈,밝게 임하시어 이 마음 받으소서! 尙垂昭格! 維歲次丁未十二月八日甲子, 炳庵先生金公棄後學。 侍敎生扶寧金澤述阻於兵亂, 未卽奔哭, 乃於翼年戊申九月十四日丙申, 謹具文奠, 屬其外甥田敬九, 以至日替告于靈筵, 曰:嗚呼惟公, 寔靈攸鍾, 寬弘惟毅, 沈默亦聰, 美哉天質, 旣賦以豐, 其德伊何, 屹乎其崇, 心不畛域, 表裡皆通, 行守塗轍, 動靜均功, 實而有華, 和而不同, 允矣君子, 庶幾厥中。 其學伊何, 淵乎其深, 該備體用, 究貫古今, 辭尙菽粟, 理求彛倫, 先知覺後, 古人有言, 有朋自遠, 衿珮盈門, 飮渴食飢, 各充其量, 敎惟不倦, 匪出勉强。 世不知德, 行道無梯, 于以藏修, 于川之西, 厥求惟何, 有莘其志, 材老于山, 玉藏于器。 嗚呼無狀, 荊願早遂, 藥石之訓, 醫我痿痺, 顔事四勿, 曾言三貴, 苟務乎此, 庶免顚躓, 我其從斯, 敢有虞貳, 再命遠駕, 託交家君, 樂要之記, 光增楣間, 感服厚眷, 佩心銘肝。 歲維旃蒙, 公返南旆, 時嬰二竪, 行李艱憊, 遠于拜送, 如喉見罣。 天理孔諶, 謂遄痊快, 公亦慰余, 非久可對, 散合無常, 何足悵慨? 孰謂一病竟違妄五, 孰知此別永隔千古? 有屹其德, 我仰何所? 有淵其學, 我於何求? 後生失敎, 孰導迷輈? 大志未展, 孰扶世綱? 嗟幷世人, 爲道盡傷, 矧公德行, 艮翁高足, 嘉乃純粹, 師門所悅, 有似三千, 顔曾之列。 夫人之慟, 尙復何說, 凡在同門, 亦均忉怛1)。 嗚呼昔公, 視我骨肉, 謂我可敎, 期我大德, 余亦視公, 諸父伯叔。 就質疑晦, 如信筮卜, 胡不卒惠, 棄之若遺? 噫人於世, 雖曰親知, 許心相得, 邃古幾希, 公我賢凡, 固判豬龍, 事有可否, 衆皆從東, 我獨于西, 公或見從。 自幸生世, 不棄于公, 今焉已矣, 孰諒此衷? 値此時亂, 兵塵四塞, 病不聞善, 葬未執紼, 蕪辭菲奠, 始展一哭, 聲徹九原, 淚盈雙掬。 嗚呼尊靈, 尙垂昭格!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병암(炳菴)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항로 등의 주리설(主理說)과 한원진(韓元震) 등의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비판하고 스승 전우(田愚)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전경구(田敬九) 1872~1917, 자는 계문(季文)이며, 전우(田愚)의 네째 아들이다. 먼저……말하였으니 이윤(伊尹)이 탕(湯)의 부름을 받고 나아갈 때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낼 적에 먼저 안 사람이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자가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끔 하였다.[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시내의 서쪽 김준영이 살았던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천서(川西) 마을을 말한다. 1900년에는 천서정사에서 간재 전우가 강회를 열었다. 유신국(有莘國)……그 뜻 유신국의 옛 사람은 이윤(伊尹)을 말하는데, 탕왕의 상왕조 수립에 큰 공훈을 세운 정치가로 유명하다. 초년에는 초야에서 농사지으며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다가, 탕왕에게 세 차례의 초빙을 받고 나아가 도우며 요리법으로 정치를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자(顔子)는……말하였으니 안자가 공자에게 인(仁)을 물은 다음 실천할 조목을 다시 물었는데,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하였다. 사물(四勿)은 바로 이 네 가지를 가리킨다. 《論語 顔淵》증자(曾子)가 "군자가 도에 귀한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용모를 움직임에 포만함을 멀리하며 안색을 바르게 함에 믿음에 가깝게 하며 말을 냄에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남을 멀리하라.[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라고 하였는데, 삼귀(三貴)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泰伯》 낙요재(樂要齋) 김낙진(金洛進, 1859~1909. 김택술의 부친)의 재실로서, 김준영이 그 기문을 지었다. 전몽(旃蒙)의 해 전몽은 고갑자(古甲子)로 을(乙)에 해당하는데, 선생 작고 2년 전인 을사년(1905)을 말하는 듯하다. 고황(膏肓)의 질병 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의 꿈에 두 꼬마 아이[二竪]의 모습을 한 병마(病魔)가 고황(膏肓) 사이에 숨어들어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春秋左傳.成公10年》 돌아가실 줄을 망오(妄五)는 무망괘의 구오(九五)를 가리킨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에 "구오는 잘못이 없는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것이다.[九五, 无妄之疾, 勿藥有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구오의 점괘와 어긋났다[違妄五]고 표현했으므로 쾌차하지 못하고 운명한 것을 의미한다. 애통해하는 간옹의 슬픔은 안자가 죽었을 때 공자가 슬피 곡하자 종자(從者)가 "선생님께서 너무 애통해하십니다.[子慟矣]"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내가 너무 애통해하느냐?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고서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느냐?[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용과 돼지처럼 달랐으니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서른 살에는 골격 이루어져, 마침내 한 사람은 용 한 사람은 돼지 된다네.[三十骨格成, 乃一龍一猪。]"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배운 사람은 신룡(神龍)이 변화함이 있는 듯하고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돼지가 변화함이 없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怛(달) 저본의 '怚(저)'를 오자로 보아 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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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선생님께 올리는 제문 祭良齋先生文 유세차(維歲次)1) 임술년(1922) 9월 신유삭(辛酉朔) 13일 계유일(癸酉日)은 우리 구산(臼山) 선생님께서 멀리 떠나시는 날입니다. 문인인 저 부령(扶寧) 사람김택술(金澤述)은 선생님께서 병환을 앓으시던 때와 빈소를 차리고 염을 하던 날에 이미 심장이 타들어 가고 오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제 계빈(啓殯)2) 사흘 전 정묘날에 정성껏 준비한 제물과 슬픔을 다 담은 글을 가지고 영구(靈柩) 앞에 두 번 절하고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아, 선생님의 도학은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셨으니3) 그 공로는 맹수를 몰아내고 홍수를 막은 것에 못지않으십니다.4) 이렇게 생민(生民)의 명맥을 담당하고 사문(사문)의 적통이 되었는데, 어이하여 이렇게 갑자기 세상일을 잊고 영영 가시었습니까?마음[心]이 곧 리[理]이고, 리에 작위가 있다[理有爲]는 설이 온 천하에 시끄러웠는데, 우리 선생님의 리는 참되고[眞] 기는 신령[靈]스러우며, 성(性)은 스승[師]이고 심(心)은 제자[弟]라는 바른 설명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뒤집히고 뒤섞이는 것을 막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큰 도학과 큰 공로 중에서 더욱 찬연히 빛나는 부분입니다. 서구(西歐)의 사조(思潮)가 범람하고 양계초(梁啓超)5)의 학문이 창궐하는 속에서, 선생님께서 두발을 신명(身命)보다 중히 하고 윤리를 강토보다 크게 여기며 방호하지 않으셨더라면 아마도 관 쓴 선비들이 금수의 땅으로 갈 뻔하였습니다. 법문(法門)의 파괴가 넘쳐나서 입으로는 공자(孔子)와 안회(顔回)의 말을 하고 몸으로는 혜강(嵇康)과 완적(阮籍)6)의 행동을 하는 속에서, 선생께서 군자의 법복(法服)과 구용(九容)7)을 먼저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사람과 말이 같은 길을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초연한 자세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셨으니 고고한 봉황이 하늘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과 같았고, 의연히 스스로의 의리를 지키셨으니 푸른 잣나무가 한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또한 선생님의 높은 행적과 올곧은 절의였으니 세속의 유자(儒者)들은 따라 할 수 없는 바였습니다.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천하는 이제 이치에 맞지 않는 학설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오랑캐의 풍속이 인류를 집어삼키게 될 것입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규범과 사군자(士君子)가 출처(出處)하는 의리도 장차 어지럽고 깜깜해질 것입니다. 세상의 공도(公道)를 위해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간절하고 지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선생께서 남기신 글이 세상에 있으니 천지를 바로 세우고 귀신에게 질정할 만합니다. 떳떳한 본성은 실추되는 이치가 없고 밝은 하늘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날이 있습니다. 저는 선생의 도가 하늘의 해와 달처럼 영원히 빛날 것을 압니다. 이것이 지금과 뒷사람의 위안거리입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슬픔이야 어찌 다할 날이 있겠습니까. 제가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깊은 사랑과 큰 기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약관의 나이에 가사를 담당하게 되고 가업이 풍비박산 되어 7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늙으신 어머니를 모셔야만 했습니다.8) 그 결과 쇠를 단련하고 옥을 갈아낸 것처럼 정밀한 선생의 의리와 터럭 하나까지도 분명하게 분석하시는 선생의 밝은 이치에 대해 선생의 문하에서 차분히 익혀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전전긍긍하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선생의 큰 규모와 큰 종지(宗旨)뿐이었으니 선생께서 제게 기대하신 것과 제가 선생께 배울 것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습니까.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셨으니 다시 누구를 봉양하겠습니까. 끝까지 종사해야 할 일은 오로지 정신을 집중해서 학문을 연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선생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선생의 문하에서 제자의 직분을 다하면서 선생의 정미한 학술을 배워 처음의 기약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돌아가실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아, 잠시 촛불을 잡으며 모셨지만 경계의 말씀을 받지 못하였는데, 엊그제 갑자기 선생께서 돌아가시는 슬픔을 만났습니다. 6월 초에, 한 번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앓아누우시기 전에 "후창은 어찌 이리 오지 않는 것이냐."라고 하셨다고 하니,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흐릅니다. 아, 선생께서는 비록 멀리 떠나시지만 그 길을 가깝고, 모습과 음성은 비록 감추셨지만 아직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훤칠한 칠 척의 모습을 어찌 감히 스스로 저버리겠습니까. 면면히 이어지는 실마리를 어찌 감히 실추시키겠습니까. 빛나는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밝은 해가 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갈려 위에 계시고 아래에 있지만 근심도 없으며 두 마음을 품지도 않겠습니다.9) 아, 슬픕니다. 흠향하시옵소서! 維歲次壬戌九月辛酉朔十三日癸酉, 我臼山先生卽遠之辰也。 門人扶寧金澤述旣焦心裂臟於疾病殯斂之日, 乃於啓殯前三日丁卯, 以精意之奠、盡情之文, 再拜哭訣于靈柩之前, 曰: 嗚呼! 先生之道可以繼往而開來, 先生之功不下驅猛與抑洪, 任生民之命脈, 爲斯文之嫡宗, 胡爲乎遽忘世而長終也? 心卽理、理有爲之說, 喙喙盈天下, 不有我先生理眞氣靈、性師心弟之正案, 太極陰陽其何以不翻覆錯亂? 先生之大道大功, 此其較著燦燦者也。 歐潮汎濫、梁學猖獗, 微先生髮重身輕、倫大疆小之防, 或幾乎冠冕之走翔矣。 法門多壞滔滔, 孔顔口而嵇阮行, 微先生之先敎以法服九容, 或幾乎人馬之道同矣。 超然潔身, 孤鳳天風, 毅然自靖, 翠柏大冬, 又先生之高蹈貞節, 而蓋世儒之不可從也。 嗚呼! 先生旣逝矣。 天下其將易於喙喙矣, 蹄跡其將陷溺人類矣。 聖門敎學之規, 士君子出處之義, 其將貿貿昧昧矣。 公而爲世道悲者, 如之何不切摯也? 雖然遺文在世, 足以建天地質鬼神, 彛性無終墜之理, 皓天有必返之辰。 吾知其先生之道將日月于天, 是可以慰今與後之人也。 若小子之私慟, 豈有其窮時? 出入先生之門墻, 蓋二十年于茲, 恩愛之深、期待之重, 或非餘人之可比。 而弱冠當室, 靑氈風飛, 七載躬耕, 白首在闈。 粹然我先生鍊金磨玉之精義, 燦然我先生析縷分毫之名理, 未得從容乎席間, 而潛會乎心體, 兢兢然夙夜匪懈者, 惟先生之大規模大宗旨, 先生之望小子, 小子之學先生, 豈其若是而止乎? 一自孤露, 復誰爲養? 究竟一事惟在專心窮硏, 方且晨夕灑掃, 以至先生臨年, 庶得聞精微之蘊, 而不負乎初期。 豈意其先生之不以待而棄之若遺? 噫! 曾燭俄執, 難承戒於氷淵尼歌, 再宿遽見慟於樑山。 六月初欲一對討之書, 寖疾前某來何遲之言, 每思之, 不覺心崩而淚泉也。 嗚呼! 先生雖遠, 其道則邇, 形聲雖閟, 尙愼聽視。 軒軒七尺, 豈敢自棄? 緜緜一緖, 豈敢失墜? 赫靈在天, 皦日臨地, 幽明上下, 無虞無貳。 嗚呼, 哀哉! 尙饗! 유세차(維歲次) 제문(祭文)의 첫머리에 관용적으로 쓰는 말로, '간지(干支)를 따라서 정한 해로 말하면'의 뜻이다. 계빈(啓殯) 발인하기 전에 빈소를 열고 관을 꺼내 오는 것을 말한다. 선현을……인도하셨으니 주희는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를 찬양하여 "옛 성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를 열어 줌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도 낫다.[繼往聖, 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하였다 선생의……못지않으십니다 간재의 공로가 우임금이나 주공의 공로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옛날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려서 천하가 태평해졌고, 주공이 이적들을 겸병하고 맹수들을 몰아내자 백성들이 편안해졌다.[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라고 하였다. 양계초(梁啓超) 청나라 말기의 광동성 출신 정치가이다. 1873~1929, 자는 탁여(卓如)ㆍ임보(任甫), 호는 임공(任公)ㆍ음빙자(飮冰子)이다. 강유위(康有爲)와 함께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주도하며 변법자강(變法自疆)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저서로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등이 있다.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중국 삼국시대의 선비들인데, 산도(山濤)·상수(向秀)·유영(劉伶)·완함(阮咸)·왕융(王戎)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불린다. 상류사회의 위선을 폭로하고 유가(儒家)의 예교(禮敎)를 비웃으며 풍류와 청담(淸談)을 즐기고 기벽(奇癖)한 언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구용(九容) 《예기(禮記)》 〈옥조(玉藻)〉편에 말한 군자의 아홉 가지 용모 즉, 무거운 발걸음[足容重], 공경한 손놀림[手容恭], 단정한 눈짓[目容端], 진중한 입[口容止], 조용한 목소리[聲容靜], 곧게 든 머리[頭容直], 엄숙한 기상[氣容肅], 덕스러운 선 자세[立容德], 장엄한 얼굴빛[色容莊] 들을 말한다. 그러나……했습니다 간재의 문하에서 공부 계속하지 못했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가사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친 별세를 말한 것이다. 근심도……않겠습니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두 마음 품지 말고 근심하지 말지어다, 상제가 너를 굽어보고 계시노라.[無貳無虞, 上帝臨女。]"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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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2 卷之二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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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숙 영방을 위한 애사 【기미년(1919)】 權敬叔【寧邦】哀辭 【己未】 사람은 태어나서 끝내 돌아가네 人之生兮終有歸,당연한 이치인데 또 무엇을 슬퍼할까? 理之常兮亦何悲?홀로 중년에 꺾여 단명했으니 獨中途兮短折,모두가 이를 두고 마음 아파하네. 孰不傷兮于玆?아, 경숙(敬叔)이 세상에 태어남에 嗟敬叔兮生世,이 집안 보배 나무의 새 가지였네. 寔人門兮寶樹枝。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 돌아가셨고 背我父兮在腹,또 끝내 형제도 많지 않았네. 亦終鮮兮塤篪。어머니가 홀로 빈 방 지키며 我母兮守空幃,고아 길러 종사(宗祠)를 보전하셨지. 養孤兮保我宗祠。아이가 이미 자라 부모께 효도하니 兒旣長兮孝親,온온히 공손하여 덕의 바탕이 있었네. 溫溫恭兮維德基。복사꽃 같은 처자를 아내로 맞았는데 桃之夭兮授室,어여쁜 그 모습 아홉 열을 손꼽았네 洵九十兮其儀。당에 계신 어머니 경사를 기뻐하면서도 母在堂兮欣慶,옛 일 생각하며 도리어 탄식했다네. 念疇昔兮還歔欷。자식 노릇 다하고 남은 힘으로 供子職兮餘力,계화도의 스승300)을 좇아 섬겼지. 華之嶹兮從師。권씨 가문 이제 창대하리라 權之門兮昌大,거북점 시초점들 말하였는데 灼我龜兮揲我蓍。몸에 홀연히 질병 감기더니 忽沈疴兮纏身,어찌 갑자기 어머님 곁을 떠나는가? 何遽訣兮萱闈。남편 곡하던 눈물로 또 아들까지 곡하니, 哭夫淚兮又哭子,하늘은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皇天有知兮無知。내가 믿는 건 오직 너뿐이었는데, 余所恃兮惟汝,이제 혼자 살아서 어떻게 할까, 今獨生兮何爲。부형들 눈물 줄줄 흘리니 諸父兄兮涕泗滂,가문의 운이 애절하구나. 我門祚兮其哀摧。내가 차마 말하는데 我幹兮忍言,할아비 제사에 누가 시동 노릇 할 것인가. 我祖蒸嘗兮孰尸?어린 아이 꺼억꺼억 울며 아비 부르고, 呱呱泣兮呼爺,젊은 아내 오열하니 누구 위해서인가. 靑閨咽兮爲誰?햇빛 엷어가니 하늘 색 참담해지고, 日色薄兮天爲慘,산도 애달파하고 물도 수심에 찼네. 山之哀兮浦之思。향당의 부로들도 깜짝 놀라서, 鄕父老兮驚怛,이 사람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胡期人兮至斯?저 우매하고 나쁜 아이들은 彼嚚童兮惡子,제 부모 싫어하며 눈 부릅떠도, 病厥親兮恣睢。탈 없이 강성하여 병 안 걸리고 羌壯盛兮無疾,편안하고 즐겁게 수명 다하는데, 終厥身兮晏嬉。어찌하여 효도 잘한 이 사람은 胡斯人兮善孝,천수를 빼앗기고 자식도 못 남기나? 旣奪壽兮無胤遺。하늘의 도를 보면 보응이 어긋났으나 諒天道兮錯報,그 연유 따져봐도 짐작할 수 없구나. 究厥由兮莫推。생각하니 천기는 운행이 멋대로여서 惟氣運兮縱橫,고금에 항상 들쭉날쭉 어긋났네, 亘古今兮參差。훌륭한 안연(顔淵)이 일찍 죽어 値不幸兮子淵,성인 중니(仲尼)가 역리(逆理)를 만났고, 遭逆理兮仲尼。백세의 스승은 갓끈 고쳐 매고 죽었고301), 百世師兮結纓,천고의 청빈한 이는 끝까지 굶주렸네. 千古淸兮窮飢。저 성현들의 높은 덕, 彼賢聖兮崇德,하늘이 사랑하여 살리고자 했어도 天所愛兮欲生之。그 기운 도도하여 막을 수 없고 柰此氣之滔滔莫遏兮,끝없는 한탄이 하늘 땅에 가득하였네. 窮霄壤兮恨罔涯。이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傷伊人兮無祿,하늘을 원망한들 또 어찌 할 것인가. 亦怨天兮奚居。사악하여 간특한 짓을 쌓다가 嚚且惡兮稔姦慝,늙은 몸이 죽었다면 그 누가 탄식할까? 身老死兮孰齎咨?자네가 그처럼 묘하고 착하여 若子兮妙善,남의 눈물 흐르게 하는구나. 令人兮淚淋漓。구구하도다, 수명의 길고 짧음, 區區兮修短,어찌 세세히 다 따져볼까? 又奚事乎細推?영령이여 편안히 가시고, 英靈兮安往,부디 내 말에 한을 깨끗이 씻어내소. 庶洩恨兮我辭。 人之生兮終有歸, 理之常兮亦何悲? 獨中途兮短折, 孰不傷兮于玆? 嗟敬叔兮生世, 寔人門兮寶樹枝。 背我父兮在腹, 亦終鮮兮塤篪。 我母兮守空幃, 養孤兮保我宗祠。 兒旣長兮孝親, 溫溫恭兮維德基。 桃之夭兮授室, 洵九十兮其儀。 母在堂兮欣慶, 念疇昔兮還歔欷。 供子職兮餘力, 華之嶹兮從師。 權之門兮昌大, 灼我龜兮揲我蓍。 忽沈疴兮纏身, 何遽訣兮萱闈。 哭夫淚兮又哭子, 皇天有知兮無知。 余所恃兮惟汝, 今獨生兮何爲。 諸父兄兮涕泗滂, 我門祚兮其哀摧。 我幹兮忍言, 我祖蒸嘗兮孰尸? 呱呱泣兮呼爺, 靑閨咽兮爲誰? 日色薄兮天爲慘, 山之哀兮浦之思。 鄕父老兮驚怛, 胡期人兮至斯? 彼嚚童兮惡子, 病厥親兮恣睢。 羌壯盛兮無疾, 終厥身兮晏嬉。 胡斯人兮善孝, 旣奪壽兮無胤遺。 諒天道兮錯報, 究厥由兮莫推。 惟氣運兮縱橫, 亘古今兮參差。 値不幸兮子淵, 遭逆理兮仲尼。 百世師兮結纓, 千古淸兮窮飢。 彼賢聖兮崇德, 天所愛兮欲生之。 柰此氣之滔滔莫遏兮, 窮霄壤兮恨罔涯。 傷伊人兮無祿, 亦怨天兮奚居。 嚚且惡兮稔姦慝, 身老死兮孰齎咨? 若子兮妙善, 令人兮淚淋漓。 區區兮修短, 又奚事乎細推? 英靈兮安往, 庶洩恨兮我辭。 계화도의 스승 계화도(界火島)는 전라북도 부안의 동진반도 서북쪽 바다의 섬인데, 전우(田愚)가 이곳에 은거하여 강학하며 섬 이름을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갓끈……죽었고 죽음의 자리에도 의연한 자세를 취함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전투 중에 죽으면서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끈을 풀지 않는 법이다." 하며 갓끈을 다시 매고[結纓]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春秋左傳》(哀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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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사 哀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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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유 석기의 자사 【신미년(1931)】 田大有【奭淇】字辭 【辛未】 저 구산(臼山) 전우(田愚) 어르신 惟臼山翁,도덕 높고 학문 순정하셨으며 道尊學純,선행 쌓고 경복(慶福) 남기시어 積善有慶,그 후손이 매우 창성하였네. 克昌後昆,수재 전석기(田奭淇)는 田秀奭淇,바로 그분의 증손이네. 實維曾孫.신(辛)의 해 국화의 구월 重光菊秋,우뚝히 관 쓰는 날에, 突弁之辰.그 부친 나에게 빈객(賓客)을 청하네 有父戒賓,아들 이름 할아버지가 주셨으니 兒名祖錫,거기에 자를 붙여 축원하는 일은 字而祝之,그대가 부디 힘써 주시라고. 吾子其勖.주나라 소공(召公) 희석(姬奭)296)은 余念召伯,그 덕이 성인 주공(周公)과 같았으니 元聖同德,아마도 옛 사람을 흠모함이 厥或慕古,첫 이름 주던 그날부터 있었겠다. 在肇錫日.구산 어르신 지니신 마음 臼翁有心,나는 헤아려 알기 어려우나 余難忖度,다만 자전(字典)의 뜻을 참고하여 但考字書,석(奭) 자를 대(大)로 풀었다. 以大訓奭.나 혼자 이러한 의미를 취하여 竊取斯義,대유(大有)로 자를 붙여주니, 大有欽之,듣건대 큰 사람은 我聞大人,충실하여 광휘를 발한다 하였다.297) 充實光輝.어떻게 거기에 이르를까 曷以造此,대체(大體)를 따라 대인이 되라298) 大體從其,맹자가 가르친 바이니 鄒聖有訓,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豈其我欺.눈과 귀에는 욕망이 있고 耳目有欲,마음은 생각을 관장하니 心官則思,욕망은 잘 막아 제어하고 欲當遏窒,생각은 정심하게 다듬어야 한다. 思當精硏.절제하고 정제하여 以窒以精,인(仁)에로 돌아가리니 歸宿于仁,인(仁)이 원숙하면 仁到熟處,크게 교화하여 성(聖)이 된다. 大化而聖.소강공(召康公) 희석(姬奭)의 덕업도 康公德業,이로 말미암아 성대해지고 亦由此盛,큰 복을 받아 膺受多福,천명에 부합하였다. 配天之命.이것을 생각하며 수행하여 是爲念修,조상께 광영을 드릴지니 于祖有光,오, 우리 대유(大有)여 於戱大有,어기지 말고 잊지 마시라. 勿愆勿忘. 惟臼山翁, 道尊學純, 積善有慶, 克昌後昆。 田秀奭淇, 實維曾孫, 重光菊秋, 突弁之辰。 有父戒賓, 兒名祖錫, 字而祝之, 吾子其勖。 余念召伯, 元聖同德, 厥或慕古, 在肇錫日。 臼翁有心, 余難忖度, 但考字書, 以大訓奭。 竊取斯義, 大有欽之, 我聞大人, 充實光輝。 曷以造此, 大體從其, 鄒聖有訓, 豈其我欺。 耳目有欲, 心官則思, 欲當遏窒, 思當精硏。 以窒以精, 歸宿于仁, 仁到熟處, 大化而聖。 康公德業, 亦由此盛, 膺受多福, 配天之命。 是爲念修, 于祖有光, 於戱大有, 勿愆勿忘。 주나라 소공(召公) 희석(姬奭)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이자 주공(周公)의 형인 소공(召公) 희석(姬奭)으로서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을 도와 성강지치(成康之治)를 이루며 의 네 왕을 도와 주왕조의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그의 채읍(采邑) 소(召 : 현 陜西省 岐山 西南)와 강왕의 이름을 따 '소공(召公, 邵公), 소백(召伯), 소강공(召康公)' 등으로도 불리운다. 여기서는 증조부 전우(田愚)가 희석(姬奭)의 석(奭)자를 따와 전석기(田奭淇)의 이름에 쓴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큰 사람……발한다 《맹자》〈진심(盡心)〉편에 "충실하여 광휘가 있는 이를 대인이라고 하고, 크게 교화한 이를 성인이라 한다.[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라는 구절이 있다. 대체……되라 《맹자》〈고자(告子)〉편에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라는 구절이 있다. 주희(朱熹)는 대체는 마음을, 소체는 이목(耳目) 등의 감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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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가 두광국을 승상으로 삼지 않은 것에 대한 변론 【1926년】 漢文帝不相竇廣國論 【丙寅】 두루 함께 하는 것을 공(公)이라 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사(私)라 하며, 이(理)를 따르는 것을 공이라 하고 정(情)을 따르는 것을 사라 하니, 공은 본디 공이고 사는 본디 사이다. 그런데 또한 공 같으면서도 공이 아니고 사 같으면서도 사가 아닌 것이 있으니, 의도를 갖고 공을 행하는 것은 공 같으면서도 공이 아니고, 혐의(嫌疑)를 피하지 않은 것은 사 같으면서도 사가 아닌 것이다.한 문제(漢文帝)가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삼지 않은217) 경우는 의도가 있는 공이고 혐의를 피하는 사일 것이다. 천하의 치란(治亂)은 승상에게 달렸고, 승상의 훌륭한지 여부는 덕에 달렸으니, 그 쓰고 버리며 임용하고 파직하는 것을 마땅히 천하와 함께 공평하게 해야 한다. 만일 그 사람이 현명하다면 친해도 쓰고 소원해도 써야 하지만, 그 사람이 현명하지 않다면 친해도 쓰지 말고 소원해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진실로 친하기 때문에 재능이 없는 자를 잘못 써서 한쪽으로 치우치고 정을 따르는 사에 빠져서는 안 되고, 또한 친하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을 버리고 쓰지 않아서 의도를 두고 혐의를 피하는 사로 귀결되어서도 안 된다.두광국의 현명함은 내가 알 수 없지만, 문제가 이미 어질고 덕행이 있다고 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조정의 신하 중에서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겼을 것인데, 다만 황후의 동생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사롭게 편애한다고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생각하다 임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천하의 치란과 관계된 막중한 승상을 임용하지 않고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린 구구한 일개 뜻을 굽혀 따른 것이니, 그 공을 하고자 한 것이 실제로는 공이 아니고, 사를 없게 하고자 한 것이 바로 참으로 사가 되었다. 그러니 자기 하나의 몸도 오히려 이처럼 어찌할 수 없는데, 어찌 족히 현명한 자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를 태평성대에 올려놓을 수 있겠는가.어찌하여 요임금이 그 사위에게 천하를 전해 준 것218)과 무왕이 그 아우에게 총재(冢宰)를 맡긴 것219)을 보지 않는가. 아우와 사위의 친함은 황후의 동생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요임금과 무왕에게 사사로움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고, 순임금과 주공이 함부로 받았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순임금과 주공의 재능이 맡길 만하여 요임금과 무왕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문제가 혐의를 피하여 두광국을 등용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일찍이 도를 묻고 선을 밝히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체득한 것이 없어서 내적으로 스스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혹자가 묻기를 "척원(戚畹)220)의 화는 국세(國勢)에 있어서 반드시 이르는 것이니, 문제가 이렇게 한 것은 여러 여씨의 난221)을 거울삼아 기미와 조짐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써 방비하였는데도 오히려 왕망(王莽)의 화222)가 있었으니, 문제가 미리 내다보고 알았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후대의 근심거리를 염려하여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서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뒷날 목이 메일 것을 걱정하여 먼저 스스로 음식 먹기를 그만두는 것이니, 어찌 옳은 것이겠는가. 게다가 종실(宗室)에는 관숙(管叔)과 채숙(蔡叔)223)이 있고, 소원한 자로는 동탁(董卓)224)과 조조(曹操)225)가 있었으니, 예로부터 국가에 재앙을 미친 자가 어찌 모두 척원이겠는가. 그러나 문제의 염려가 이러한 데에서 나왔다면 그러한 견해가 비록 반드시 옳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마음은 알 수 있을 뿐이니 내가 어찌 구차하게 헐뜯겠는가. 다만 하나의 '사(私)'자를 높힌 것이 됨을 벗어날 수 없을 뿐이니, 이는 문제가 문제가 되는 까닭일 뿐이기에 나의 의론이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普同之謂公, 一偏之謂私, 循理之謂公, 循情之謂私, 公固公, 私固私, 亦有似公而非公, 似私而非私者, 有意爲公, 似公而非公, 不避嫌疑, 似私而非私也. 若漢文帝不相竇廣國, 其有意之公, 避嫌之私乎! 夫天下之治亂, 係乎相, 相之臧否, 係乎德, 其用舍任罷, 當與天下共公之. 苟其人之賢也, 親亦用, 疏亦用, 其人之不賢也, 親亦勿用, 疏亦勿用, 固不可以親而枉用不才, 陷一偏循情之私, 亦不可以親而舍賢不用, 歸有意避嫌之私也. 廣國之賢, 吾不可知, 文帝旣云賢有行, 則其心以爲朝臣無出其右, 而但以皇后弟故, 恐人以爲私, 而久念不用, 此枉屈莫重天下治亂所係之相國, 曲徇區區一箇計較商量之意, 其欲爲公者實不公, 其欲無私者乃眞私, 自家一副身子, 尙此柰何不下, 烏足以盡群賢之用, 躋天下於隆治乎? 盍觀堯之傳天下於其甥乎? 武王之任冢宰於其弟乎? 弟甥之親, 非后弟之可比, 天下不以堯武爲有私, 不以舜周爲冒受者, 以舜周之才可任, 而堯武之心無愧也. 吾以爲文帝之避嫌而舍廣國, 由其未嘗問道明善, 無得乎心而內自不足故也. 或曰: "戚畹之禍, 國勢所必至, 文帝之爲此, 所以鑑乎諸呂之亂, 而防微杜漸也. 以此爲防, 猶有王莽之禍, 文帝其可謂先見乎?". 曰: "未然也. 慮後世之患而不用賢而致治, 是憂他日之噎而先自廢食也, 豈可乎? 且宗室而有管蔡, 疏遠而有卓操, 從古禍國家者, 豈皆戚畹乎? 然文帝之慮, 若出於此, 則其見雖未必是, 其心則可知已, 吾何苟訾? 但不過爲一私字所崇, 擺脫不得, 此其所以爲文帝而已, 而吾議之到也. 한 문제(漢文帝) …… 않은 《사기(史記)》 권9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에 "효 문제가 황후의 아우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삼을 생각을 하고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내가 그를 편애한다고 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두광국은 재능이 있고 덕행이 있기 때문에 그를 승상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으나, 오랫동안 이 일을 생각한 후에 옳지 않다고 여겼다.[孝文帝欲用皇后弟竇廣國爲丞相曰: '恐天下以吾私廣國.'. 廣國賢有行, 故欲相之, 念久之不可.]"라는 내용이 나온다. 요임금이 …… 것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의 소서(小序)에 "옛날 제요(帝堯)가 총명하고 문채나고 사려가 깊어 덕이 천하에 충만하였는데, 장차 지위에서 물러나 우순(虞舜)에게 양위(讓位)했다.[昔在帝堯, 聰明文思, 光宅天下, 將遜于位, 讓于虞舜.]"라고 하였다. 무왕이 …… 것 《서경》 〈주서(周書) 채중지명(蔡仲之命)〉에 "주공이 총재로 있으면서 백공[百官]을 바로잡았다.[惟周公位冢宰, 正百工.]"라고 하였다. 척원(戚畹) 척리(戚里)와 같은 말로, 임금의 내척과 외척을 뜻한다. 여러 …… 난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황후(皇后)인 여태후(呂太后)가 죽자, 주발(周勃)과 진평(陳平) 등이 함께 도모하여 여산(呂産)과 여녹(呂祿)을 주살하고, 모든 여씨의 남녀를 모두 잡아 참살(斬殺)하였다. 《한서(漢書)》 권97 〈외척전상(外戚傳上)〉 왕망(王莽)의 화 왕망은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생질이었는데, 뒤에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유자 영(孺子嬰)을 세워 섭정하면서 가황제(假皇帝)라고 칭하였다. 뒤이어 찬탈하고 국호를 신(新)이라고 하였는데, 재위 15년 만에 광무(光武)의 정벌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한서(漢書)》 권99 〈왕망전(王莽傳)〉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두 아우이다.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이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뒤에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함께 모반하였는데,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관숙과 무경을 죽이고, 채숙을 내쫓았다. 《사기》 권35 〈관채세가(管蔡世家)〉, 《서경》 〈주서 금등(金縢)〉, 〈주서 채중지명(蔡仲之命)〉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동탁(董卓) 139~192. 중국 후한(後漢)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다.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 출신이다. 소제(少帝)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뒤에 공포정치를 행해 후한(後漢)의 멸망을 가속화하였다. 그러나 폭정을 일삼아 반동탁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양자인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조(曹操) 155~220. 중국(中國)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이다. 본성은 하후(夏侯)이고 자는 맹덕(孟德)이다. 황건적의 난을 다스려 군공(軍功)을 세웠다. 원소(袁紹)와 같이 도적과 흉노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탁(董卓)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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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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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66)에게 보이다 示泰兒 귀농해 얼굴에 먼지 뒤집어써도 네 뜻을 들어준 건 聽汝歸農面撲塵조묘에 제물67)을 올리는 일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爲關祖廟薦蘩蘋힘이 남으면 곧 글을 보는 걸68) 어찌 아니 따르랴 盍從餘力卽看字몸을 세우려면 먼저 어버이를 섬겨야하리라 如欲立身先事親예랑69)이 재상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誰識兒郞爲上相동자70)가 천년토록 드러난 걸 다시 감탄한다 更歎董子著千春일생의 성공과 실패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一生成敗知安在벗이 손해되는 이웃인지 이익되는 이웃인지만 묻는다 但問交朋損益隣 聽汝歸農面撲塵, 爲關祖廟薦蘩蘋.盍從餘力卽看字, 如欲立身先事親.誰識兒郞爲上相, 更歎董子著千春.一生成敗知安在, 但問交朋損益隣. 태아 김택술의 둘째 아들 형태(炯泰)를 가리킨다. 제물 원문의 '번빈(蘩蘋)'은, 빈과 번이라는 식용(食用)의 수초(水草)들인데, 옛날에는 이것들을 제사에 썼으므로, 제물의 뜻으로 쓰인다. 《춘추좌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공명함과 신의가 있다면……물 위에 뜬 물풀과 흰쑥과 마름 같은 나물이라도……조상의 제사상에 올릴 수 있다.[苟有明信,……蘋蘩薀藻之菜,……可薦於鬼神.]"라고 하였다. 힘이……걸 《논어》 〈학이(學而)〉에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예랑(兒郞) 예관(兒寬)으로, 한(漢)나라 때 어사대부(御使大夫)가 된 사람이다.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던[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 고사가 있다. 《漢書 卷58 兒寬傳》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로,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무제(武帝) 때에 유학(儒學)을 국교(國敎)로 삼은 것도 그의 영향이 크다. 뒤에 강도상(江都相)을 거쳐 교서왕상(膠西王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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