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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돌아가는 김예옥【선진】을 전송하는 서문 【병오년(1906)】 送金睿玉【璿鎭】北歸序 【丙午】 무릇 사람이 벗을 사귈 적에 거처의 멂과 가까움으로 인하여 감정의 친근함과 소원함이 있으니, 이는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동문인 벗 김예옥(金睿玉)은 나와의 거리가 천여 리가 되는데도 4년 사이에 두 차례나 찾아왔으니, 거처하는 곳이 매우 먼데도 감정의 친근함이 또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사람이 서로 찾는 것은 소리와 기운[聲氣]1)이 같기 때문이다. 소리와 기운이 진실로 같다면 비록 남쪽과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월나라와 진나라처럼 소원할지라도 도리어 한 눈에 바라보이는 거리만큼이나 가깝게 느껴지고 정분이 두터운 친척처럼 친근하게 여겨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이 또한 필연의 이치이다.오늘날 사람과 벗하는 것만 그러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 사람과 벗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대저 옛사람이 뜻을 두었던 것은 도학(道學)이고, 보존했던 것은 인애(仁愛)이며, 지켰던 것은 의리(義理)이니, 후대 사람이 진실로 성명(性命)과 윤상(倫常)의 도학을 구해서 문장이나 일의 공적과 같은 허물에 동요되지 않고, 만물을 한 몸처럼 여기는 인애를 이루어서 남과 나의 서로 다른 형체의 사사로움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며, 굳세고 변하지 않는 의리를 세워서 빈천이나 위력의 곤란에 옮겨가지 않을 수 있다면 이는 후대 사람이 옛사람과 또한 소리와 기운이 같게 되는 것이다. 소리와 기운이 같다면 세대가 서로 멀다 한들 또 어찌 그 친근함에 틈을 낼 수 있겠는가.지금 나와 예옥은 비록 말세에 태어났지만 벗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고,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의 학문이니, 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같다면 이는 소리와 기운이 같은 것이다. 이것이 거처하는 곳이 멀어도 감정이 친근한 이유이다. 다만 옛사람의 학문에 대해 안목이 어두워 명철하지 못한데다 입장이 확고하지 못하여 안주하는 것도 어려워 하니, 이것이 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힘써 각기 그 소원을 이룬다면 거처의 멂은 멀게 여겨지지 않고 더더욱 가깝게 느껴지며, 친근한 감정은 더더욱 친근해지고 소원해지지 않아서 옛사람과 더불어 세 벗이 될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서문을 지어 서로 더불어 돌아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린다. 凡人之爲友也, 因居之遠近而有情之親疏, 此理勢然也. 余同門友金睿玉, 與余相去也, 凡千有餘里, 而得見再訪於四載之間, 居之甚遠而情之相親, 又若此何也? 人之所以相求者, 以聲氣之同也. 聲氣苟同, 雖朔南之遠, 越秦之踈, 反不啻莽蒼之近, 懿戚之親, 此亦必然之理也. 非惟與今人友爲然, 尙而與古人友亦然. 夫古人之所志者道學也, 所存者仁愛也, 所守者義理也. 後之人誠能求得性命倫常之道, 而不動乎文章事功之累, 成得萬物一體之仁, 而不役乎人我相形之私, 立得强矯不變之義, 而不移乎貧賤威武之困焉, 則是後人之於古人, 亦同一聲氣也. 聲氣之所同, 世之相遠, 又何以間其親也? 今余與睿玉, 雖生於叔季之世, 然所欲友者, 乃古人也, 所欲爲者, 乃古人之學也, 所欲者旣同, 則是聲氣之同爾, 此所以居遠而情親者也. 第於古人之學, 眼力黭黮而未明, 脚跟依違而難住, 是又吾二人之所共勉者. 勉之不已, 至於各遂其願, 則居之遠也, 不遠而愈近, 情之親也, 愈親而不踈, 直可與古人而幷爲三友矣, 豈非幸哉? 於是乎書之, 相與歸而俟之. 소리와 기운[聲氣] 친구 사이에 함께하는 뜻이나 취향을 비유하는 말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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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 김씨 문계안의 서문 【신유년(1921)】 扶寧 金氏門契案序 【辛酉】 《시경》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11)"라고 하였으니, 뽕나무와 가래나무조차 선조의 손때가 남아 있다 하여 오히려 공경하였는데, 하물며 선조의 넋이 의탁하고 있는 묘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봉분을 하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태고의 풍속이 됨을 면치 못하고 무덤가의 나무를 베지 않는 것이 바로 선왕의 제도가 됨을 알 수 있다.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로 우리 왕조에 이르러 더욱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마음을 다하여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봄ㆍ가을과 세시(歲時)ㆍ속절(俗節)마다 가까이로는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멀게는 시조까지 미루어서, 성묘하는 의식과 분향하는 제사를 때에 맞게 하고 공경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제사를 지내는 예법은 제왕가(帝王家)와 다르니 체협(禘祫)12)은 감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제사는 친진(親盡)13)하지 않았더라도 때로 기피하는 경우가 있으니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는 오히려 그만 둘 수 있다. 그러나 종친 관계가 이미 끝나고, 묘소에서 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끝내 조상에 대한 마음을 드러낼 곳이 없게 된다. 이로 보면 친진에 1년에 한 번 묘소에서 제사지내는 것[歲一祭]이 예의 중도에 맞는 제도가 되니, 더욱 정성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매번 보건대, 잔약한 자손과 가난한 종족의 집안은 해마다 여러 신위에 올리는 제물을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중유(仲由)가 예를 행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14), 맹자가 기뻐할 수 없다고 훈계한 것15)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다.종친의 영재인 인술(仁述)이 이러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친족과 의론하여 약간의 자본을 모으고 하나의 계를 설립하여 먼 훗날을 경영할 계책을 도모하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권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의 일은 비록 진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16) 하더라도 사물이 없으면 또한 그 진실함을 볼 수 없다. 지금 제사로 논하면 재계(齋戒)와 애정, 정성은 진실함이고, 제수 물품[牲羞]과 제기[籩豆]는 사물이다. 한낱 사물만 있고 진실함이 없다면 진실함도 또한 헛된 것이고, 만약 사물이 없다면 비록 진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담기겠으며, 선조가 어디에서 흠향하겠는가. 그렇다면 사물과 진실함 둘 다 지극하여 어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완전한 의론이며, 그 중에서 본말과 경중을 말한다면 《주역》에 "동쪽 이웃집에서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집에서 검소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 못하다.17)"라는 경계가 있으니, 이것이 또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만약에 혹 서쪽 이웃의 검소한 제물마저 없게 된다면 효자와 효손의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한마디 말로 결단하여 말하기를, "무릇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되 사물에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진실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그대는 이러한 데에서 거의 벗어났음을 알겠다.또 생각하건대, 사람이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진실함을 다하는 것은 내 몸이 태어난 근본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 몸을 공경하지 않으면 이는 근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18)"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몸을 해치고 근본을 상하게 한 것이 죄가 될 만함은 일찍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근본을 잊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가 바라건대, 이 계안에 들어간 사람은 제물을 잘 갖추어 해마다 선조의 묘소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후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자신을 공경하라'는 성인의 가르침에 종사하여 간단한 말과 걸음걸이 등의 작은 언행부터 몸을 세우고 세상일에 응대하는 등의 큰일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왕의 도와 옛 현철의 법규에 어긋난 점이 있거든 전전긍긍하여 감히 잠시라도 거기에 거처하지 않음으로써 선조에게 욕됨이 없기를 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몸을 공경함이 클 것이고, 선조를 선양한 초손(肖孫)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선조의 묘소를 공경히 닦고 때마다 제사를 경건히 받드는 것은 다만 인사의 한 가지 소략한 항목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어찌 이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문으로 인해 이렇게 말하여 책머리에 쓰게 한다. 《詩》云: "維桑與梓, 必恭敬止. " 桑梓以祖先手澤之存, 而猶加敬焉, 況於祖先體魄攸託之丘壟乎? 是知不封不樹, 不免爲荒古之俗, 而不斬丘木, 乃得爲先王之制也. 自漢、唐以降, 逮夫我朝, 尤盡情於墓祭, 春露秋霜, 歲時俗節, 近自祖禰, 遠推其所自, 瞻掃之儀, 香苾之奉, 罔不惟時惟虔, 是固天理人情之不容已者也. 余謂士夫家祭禮, 與帝王異, 禘祫非所敢, 祭則親未盡而有時忌者, 墓祭猶可已也. 宗已毁而墓又不祭, 則終無所用其情也, 是則親盡歲一祭, 爲禮之中制, 而尤當盡誠者也. 然每見人家孱孫貧族, 多有不給於每歲累位之薦者, 仲由之歎無以爲禮, 孟子之訓不可爲悅, 良有以也. 宗英仁述, 爲是之憂, 議與諸族, 合若干資, 立一契, 以圖經遠計, 請余一言以勖之. 余惟天下之事, 雖不誠無物, 而無物亦無以見其誠. 今以祭祀論之, 齋戒愛慤, 其誠也; 牲羞籩豆, 其物也. 徒有其物而無其誠, 則誠亦虛矣, 若無其物焉, 則雖有誠, 何所寓乎? 而祖先安所享乎? 然則物、誠兩至, 不可偏廢者, 固不易之完論, 就中而語本末輕重, 則《易》有"東鄰殺牛, 不如西家礿"之戒, 此又在所當審. 若或幷與西礿之物而闕焉, 則孝子慈孫之心, 復如何哉? 余故斷之以一言曰: "凡祭先而不盡力於物者, 必其無誠者也. " 而子於此, 庶知其免矣夫. 抑又念之, 人之所以盡誠於祭先者, 爲吾身所生之根本也. 故孔子曰: "不能敬其身, 是傷其本. " 由此言之, 戕身傷本之爲可罪, 未嘗不甚於不祀而忘本也. 吾願入此契者, 勿以克備粢牲, 歲祀先墓, 作後承之能事, 更須從事乎聖人敬身之訓, 自片言尺步之細, 以至立身酬世之巨, 苟有背於先王之道、前哲之規者, 兢兢然不敢須臾處焉, 以求無忝乎所生, 則其爲敬身也大矣, 而可謂揚先之肖孫也. 其在敬修丘壟, 虔奉蒸嘗, 特不過爲人事之一疏節爾, 盍於是勉乎哉? 因序此語, 俾書其卷首云. 부모가 …… 공경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보인다. 체협(禘祫) 조상의 신주를 한곳에 모셔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친진(親盡)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중유(仲由)가 …… 탄식하고 중유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의 이름으로,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자로(子路)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구나.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제대로 봉양할 수가 없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제대로 예를 행할 수가 없다.〔傷哉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라며 탄식하였다. 맹자가 …… 것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가 노(魯)나라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올 때 충우(充虞)가 맹자에게 "모친상에 관목(棺木)이 너무 아름다운 듯하였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법 제도상 할 수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고, 재력이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다. 할 수 있고 재력이 있으면 옛사람들이 모두 사용했으니, 내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不得, 不可以爲悅, 無財, 不可以爲悅. 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라고 하였다. 진실하지 …… 없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진실함은 사물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니, 진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진실함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동쪽 …… 못하다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오(九五)〉에 "동쪽 이웃집에서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 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집에서 의 검소하게 제사를 지내어 실제로 그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東鄰殺牛, 不如西鄰之禴祭, 實受其福.〕"라는 구절이 보인다. 자기 …… 것이다 《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군자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지만 몸을 공경하는 것이 큰일이 된다. 몸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가지이니,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공경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그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은 그 뿌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상하게 하면 가지도 따라서 죽는다.〔君子無不敬也, 敬身爲大. 身也者, 親之枝也, 敢不敬與?  不能敬其身, 是傷其親. 傷其親, 是傷其本. 傷其本, 枝從而亡.〕"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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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계안 서문 【갑자년(1924)】 尊義契案序 【甲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돌아가신 지 3년이 되는 갑자년 9월9일에 문하의 제자들이 현동(玄洞)의 묘사(墓祀)에 나아가 참여하고서 제사가 끝나자 모두 한숨을 지으며 말하기를,"선생은 도가 높고 의리가 정밀한데다 학문이 바르고 가르침이 갖추어져 학문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풂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용과 뱀이 위험을 알림에 산이 이미 무너졌고19), 오토(烏兎)가 번갈아 달려감에 영실(靈室)이 또 철거되었다20). 봄바람이 부는 자리가 아득하니21), 가을달의 마음22)을 누가 전해주겠는가? 오직 이 현동 한 언덕은 선생께서 만년토록 의탁할 곳으로, 넋이 아래에서 영원히 편안하고, 정령이 위에서 오르내리실 것이니, 우리 무리들이 국과 담장[羹墻]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보거나 강한(江漢)을 그리워함에23)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곳에서 강학하여 선생의 전함을 영구히 하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니. 어찌 서로 안(案)을 연합하여 규례을 세우고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계를 수립함으로써 장구토록 추모하고 강학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도모해 구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이것을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대저 추모는 마음에 달려 있고, 학문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으리오.24)'라고 하였으며, 또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25)'라고 하였다. 스스로 진실하고 스스로 힘쓸 수 있다면 한 꽃님 만큼의 조그마한 향기를 피우는 공경을 오히려 펼 수 있을 것이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사물을 빙자하여 진실함을 드러내고 남에게 가탁하여 공효를 바라는 일을 일삼겠는가."하였다. 바른말로 질책하는 자가 말하기를,"아니, 그렇지 않다. 훌륭한 일은 권면해야 하고 잘못된 일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옛날의 도이니, 만약 홀로 공부한다면 이는 권면하고 경계해야 하는 도를 사용할 곳이 없게 된 지 오래되었을 것이고, 만약 마음으로 추모하고 저 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뒤에 죽을 사람이 숭상하여 받드는 책무는 어디에 그 정성을 다하겠는가? 더욱이 지금 사문(師門) 내에 변괴가 갖가지로 나와서 인허에 대한 무함26)이 유행함에 태양처럼 빛나던 고결함이 거의 어두워졌고, 제토(祭土 제전(祭田))을 팔아버림에 제물[粢牲]을 갖추지 못하여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 소자들이 서로 닦고 힘을 합쳐 평소 지극히 정대했던 가르침을 복종하여 지키고 아울러 사후(死後)의 대사를 이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생께서 전수하신 한 학맥을 이어 밝혀서 부처와 같은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이 일은 단연코 그만 둘 수 없다."하니, 힐난했던 자가 예! 예! 하며 수긍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론이 모두 동일하자 규례를 수정하고 이름을 차례대로 앞뒤에 기록해 넣었으며, 물건은 힘에 따라 마련하고 회강(會講)은 봄가을의 향사(享祀)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음날 계안이 완성한 뒤에 '존의계(尊義契)'라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이 계안에 참여하는 문인과 후학들로 하여금 모두 선생의 도의를 추존하여 앙모할 수 있게 하고, 만나는 변고도 오직 그 의리를 존숭하여 대응하게 할 따름이다. 惟艮齋 田先生旣沒之三年甲子九月九日, 門弟子進參於玄洞之墓祀. 祀畢, 衆皆咨嗟而言曰: "先生道尊而義精, 學正而敎備, 嘉惠學者至矣. 龍蛇告厄, 山已頹矣, 烏兎迭奔, 靈又撤矣. 春風之坐邈焉, 秋月之心孰傳? 惟玆玄洞一邱, 先生萬年之宅, 體魄永安于下, 精靈陟降乎上, 吾儕羹墻之見, 江漢之思, 捨此焉奚之? 祀於斯, 講於斯, 以永先生之傳, 其在斯矣, 盍相聯案立規, 出義樹契, 圖夫慕之講之之具於久遠也乎?" 有難之者曰: "夫慕在乎心, 學在乎己. 故曰: '中心藏之, 何日忘之?' 又曰: '爲仁由己, 而由人乎?' 能自誠而自力, 一瓣之敬, 尙可伸也. 文武之道, 庶不墜地, 何事乎藉物而見誠, 假人而責效乎?" 有正言而質之者曰: "否, 不然. 善之當勸, 過之當戒, 古之道也. 如獨學之, 是當勸戒之道之無所用也久矣. 苟慕之以心, 而不用夫物, 後死者崇奉之責, 安所盡其誠乎? 況今門墻之內, 變怪百出, 認誣行而日光之潔幾晦矣, 祭土斥而粢牲之闕無幸矣. 不有我小子輩, 交修協力, 服守平日至正之敎 幷濟身後之大事, 其何以紹明先生一脈之傳, 而報佛恩之萬一乎? 今日此擧, 斷不可已也. " 難者唯唯. 乃僉議詢同, 修定規例, 序名以入錄 先後, 而物則隨其力, 會講用春秋享祀. 翼日案旣成, 命名曰尊義契, 蓋欲使門人後學之參是案者, 皆有以尊仰先生之道義, 而所値之變, 亦惟尊其義而應之云爾. 용과 …… 무너졌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죽음을 예언하고 비유한 말이다. 용과 뱀이 위험을 알렸다는 것은 현인군자의 죽음을 예언하는 말로, 후한의 대유(大儒)인 정현(鄭玄)의 꿈에 공자(孔子)가 나타나 이르기를 "빨리 일어나라. 금년은 용의 해이고 내년은 뱀의 해이니라.〔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하자, 잠을 깨고서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으며, 그해 6월에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으며,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산이 이미 무너졌다는 것은 스승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자신이 죽을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오토(烏兎)가 …… 철거되었다 세월이 흘러 3년상이 끝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오토(烏兔)는 해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 옥토끼가 있다고 하는 신화에서 유래하여 세월을 가리킨다. 봄바람이 …… 아득하니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이 세상에서 떠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찾아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을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14》 가을달의 마음 스승의 고결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등적(鄧迪)이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아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빙호추월은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맑은 가을 달이 담겼다는 뜻이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국과 …… 그리워함에 돌아가신 스승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하였고, 공자 사후에 문인(門人)인들이 공자를 추모하여 유약(有若)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연유로 그를 공자를 섬기던 예로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옳지 않다. 부자의 도덕은 마치 강한의 물로 씻고 가을볕으로 쬔 듯이, 하도 희고 깨끗하여 더할 수가 없다.〔不可.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마음속에 …… 잊으리오 《시경》 〈소아(小雅) 습상(隰桑)〉에 보인다. 인을 …… 있겠는가 《논어집주》 〈안연(顔淵)〉 1장에 보인다. 인허에 …… 무함 전우가 생전에 일제하에서 자신의 문집를 간행하지 말도록 유언하였는데, 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으로부터 일제의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 일을 가리킨다. 《後滄先生文集 券14 徧告同門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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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재27)에서 제군들을 전송하는 서문 【갑자년(1924)】 慕賢齋送諸君序 【甲子】 남산(南山)28)의 꼭대기에서 한스러운 마음을 읊고 영파(映波)의 강물29)에 이별의 정을 실어 보내니, 암담하게 넋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오늘 이별의 모습이 아니겠으며, 간절하게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줄 것을 바라여 산중고사(山中故事)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제군(諸君)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인자(仁者)가 아닌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기어이 말하라고 한다면 청컨대 산과 물의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행신(行贐 노자(路資))을 대신해도 되겠는가?무릇 산은 높고 큰 것을 바라지 않겠으며, 물은 깊고 드넓은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남산의 높은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곤륜산(崑崙山)을 이고 있어야 조종(祖宗)이 되고, 영파의 물이 드넓고 깊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좌해(左海 동해(東海))라야 조종으로 삼을 바가 되니, 고대 성인이 천하를 작게 여기고 물이 되기 어렵다고 탄식한 것30)은 어찌 진실로 그렇지 않겠는가.아, 옛 사람으로부터 감흥을 일으켜 준칙으로 삼은 선비만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남산을 돌아보고 저 영파를 바라봄에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풍모가 사라지지 않은 자는 신무장(申武壯 신호(申浩))과 이문정(李文靖 이식(李植))이 아니겠는가.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왕의 일이 몹시 위급하여 옷과 치아를 집으로 보내고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편안하게 여긴 것31)은 열렬한 충성이 아니겠는가. 택풍당(澤風堂)에서 홀로 덕을 세워 대가(大家)의 보불(黼黻 문장(文章))이 온 나라에 화려하게 빛난 것은 찬란한 문장이 아니겠는가. 두 공은 진실로 이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땅에서 옛사람의 일을 논하는 자라면 두 공을 버려두고 누구를 논하겠는가.그러나 이는 친근하고 감동하기 쉬운 사람으로 말한 것이니, 이러한 단계를 지나 더 나아가서 등급에 따라 위로 올라가고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구한다면 반드시 성인에게 극처를 귀결시킨 뒤에 그쳐야 할 것이네. 때문에 "인(仁)이 요(堯) 임금만 못하고, 효가 순(舜) 임금만 못하고, 학문이 공자만 못하면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32)"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뜻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군자의 도는 작은 것을 먼저 하고 큰 것을 뒤로 하며, 아래로부터 사람의 일을 배워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네. 그러므로 인은 반드시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효는 반드시 신명(神明)과 통하고 사해(四海)에 빛나기를 바라며, 학문은 반드시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네. 그러나 또한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 앉아 있을 때는 시동처럼 하고 서 있을 때는 재계하는 것처럼 하는 것 등의 따위를 버려둔 채 단번에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있지 않으니, 청컨대 제군들은 돌아가 가정 안에서 구하고 마음과 육체 사이에서 살펴서 그 규범을 크게 하고 그 공효를 세밀하게 함으로써 끝내 변화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묘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경전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한다.33)"라고 하였네. 또 말하지 않았는가. "흐르는 물의 속성은 구덩이를 다 채우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다.34)"라고 하였네. 나는 이로 인해 단정하여 "곤륜산을 오르는 것은 남산에서 시작될 것이고, 동해에 도달하는 것은 영파에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하니, 제군들이여, 내 말을 믿고 힘쓰기를 바란다. 賦恨乎南山之巓, 送情乎映波之流, 黯然其欲銷魂者, 非今日別離景色乎? 懇懇乎其欲我一言有贈, 擬作山中故事者, 非諸君之意乎? 我則縱愧非仁者, 無已則請以山水喩喩之用, 替行贐可乎? 夫山不欲其高大乎? 水不欲其深廣乎? 南山之高. 非不聳拔超卓, 必戴崑崙而爲祖; 映波之水, 非不汪然而深, 必左海爲其所宗. 前聖所歎小天下、難爲水者, 豈不信然乎? 噫. 士之興感乎古人而準則之者, 奚獨不然? 睠焉南山, 瞻彼映波, 閱千秋而風不沫者, 非申武壯、李文靖乎? 蛟龍有城, 王事孔棘, 衣齒送家, 視死如歸者, 非烈烈焉忠乎? 澤風有堂, 獨立闕德, 大家黼黻, 華國光邦者, 非煥煥乎文乎? 二公固生且長乎玆地, 于玆地, 欲尙論者, 舍二公, 其誰乎? 然此自其親近易感者言, 過此以往, 等而上之, 遠而求之, 則必要其歸極於聖人而後已. 故曰: "仁不如堯, 孝不如舜, 學不如孔子, 皆自棄也. " 學者立志, 顧不當若是乎? 雖然, 君子之道, 先小而後大, 下學而上達. 故仁必欲其萬物各得其所, 孝必欲其通神明光四海, 學必欲其不勉不思而得. 而亦未有舍棄愛保赤子、冬溫夏凊、坐尸立齊之類, 而能一蹴而至焉者. 請諸君歸而求之家庭之際, 察之心身之間, 大厥規而細厥功, 終以致乎變化位育之妙也. 傳不云乎? "行遠必自邇, 登高必自卑. " 又不云乎? "流水之爲物, 不盈科不行. " 余乃因此而斷之曰: "陟崑崙者, 其自南山而始; 達東海者, 其自映波而始. " 諸君乎, 其尙信及而勉乎哉. 모현재(慕賢齋)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남산리에 있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광(李洸)이 향풍을 바로잡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직한 남산동 백발회(南山洞白髮會)에서 유래하였다. 그 뒤 이식(李植)이 종조부인 이광의 백발계(白髮契)를 다시 조직하여 향풍을 길러 향약을 실천하였는데, 한동안 기능이 약화되었다가 1862년(철종 13) 옛날 백발회 유지에 모현재를 창건하고, 동계(洞契)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산(南山)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00.1m이다. 고부면소재지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남산으로 불린다. 영파(映波)의 강물 전북 정읍시 영파동에 위치한 영파정(映波亭) 근처에 흐르는 현 정읍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영파정은 1601년(선조34) 이광(李洸 1541~1607)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창건한 누정으로 이곳에서 백발계회(白髮契會)를 조직하여 향풍을 기르고 학문을 권장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고대 …… 것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다른 물은 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 종유한 사람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은 말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 것 신호는 정유재란 때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어장(守禦將)으로서 성 안으로 쳐들어오는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죽기 전에 말고삐를 잡고 다니는 노비에게 입고 있던 옷과 치아 하나를 노비에게 주고서 집으로 돌아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임을 알리게 했다고 한다. 《息庵遺稿 樂安郡守贈刑曹判書申公諡狀》 인(仁)이 …… 것이다 《맹자집주》 〈진심장 상(盡心章上)〉 29장 주에 여시강(呂侍講)이 "인이 요임금만 못하고, 효가 순임금민 못하고, 학문이 공자만 못하면 끝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고, 마침내 천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니, 중도에 폐하여 스스로 앞의 공을 버리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仁不如堯, 孝不如舜, 學不如孔子, 終未入於聖人之域, 終未至於天道, 未免爲半塗而廢, 自棄前功也.〕"라고 말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먼 …… 시작한다 《중용장구》 제15장에 보인다. 흐르는 …… 않는다 《맹자집주》 〈진심장 상(盡心章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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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제를 배송하는 서문 【을축년(1925)】 拜送靑帝序 【乙丑】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 을축년) 건진월(建辰月 3월) 30일 병자(丙子) 날에 청제(靑帝)35)가 정령(政令)를 펼쳐 시행한 지 90일이 되어 공적이 이루어지고 임기가 만료됨으로써 적제(赤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수레를 타고 돌아가자, 만백성이 그의 공덕을 생각하고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여 허둥지둥 나와 전송하는 자가 산천을 뒤덮고 거리를 메우니, 천지의 조화 중에 살아가는 내가 두견새 우는 봉우리36)에 올라 맑은 물을 떠서 조전(祖奠)을 차려 놓고 두 손 모아 절한 다음에 글을 올려 청하기를,"아, 청제(靑帝)께서 군주가 되셨을 때에 인자하고 온화하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만물에 두루 미쳤습니다. 이에 만물이 즐겁고 화락하여 모두 그 은택을 입은 것이 마치 자애로운 그물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버리고 떠나시니, 모든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부디 힘써 머물러서 큰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하니, 청제가 말하기를,"아니다. 오직 황천(皇天)께서 사계절을 정하여 만물을 이루고, 이에 사방의 군주를 명하여 각기 그 운행에 따라 그 공덕(功德)을 이루게 하셨다. 춘목(春木)에 만물을 낳는 것은 청제의 공이니, 그 덕은 인(仁)이다. 하화(夏火)에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적제(赤帝)의 공이니, 그 덕은 예(禮)이다. 추금(秋金)과 동수(冬水)에 만물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저장되는 것은 백(白)과 흑(黑) 두 제(帝)에게 공이 있으니, 의(義)와 지(智)가 그 덕이다. 인과 생(生)에 비록 내가 능하다고 하지만, 의ㆍ예ㆍ지와 장(長)ㆍ성(成)ㆍ장(藏)은 각각의 유사(有司)에 있는 것이고, 내가 실제로 부여한 것은 없다. 가는 것이 지나가고 오는 것이 이어지는 것은 도의 본체이고, 옛 것이 물러나고 새로운 것이 대신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이다. 나는 갈 것이니, 너는 슬퍼하지 말라."하였다. 내가 또 청제에게 두 손 모아 절하고 대답하기를,"봄은 사계절의 시작이고, 인은 사덕(四德 인의예지) 중에 으뜸입니다. 만물을 낳아주는 봄이 아니면 무엇에 의지하겠으며, 성장하고 수장(收藏)하는 공은 사사로움이 없는 인이 아니면 어느 곳에 예ㆍ의ㆍ지의 덕을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낳은 것을 자라게 하는 것이고, 거두는 것은 이 낳은 것을 거두는 것이고, 저장하는 것은 이 낳은 것을 저장하는 것이며, 이 인을 절제하는 것이 예이고, 이 인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 의이고, 이 인을 아는 것이 지이니, 공과 덕은 청제께서 그 조종이 되고, 세 방위는 그 갈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고 각기 그 권능을 돌리시니, 이것이 인이 되는 이유입니다.아, 운명에 맡기고 천리를 따르는 것은 위대한 지혜이고, 현인을 추대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성대한 덕이니, 청제의 거취를 어찌 감히 고집스럽게 청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현재 천지의 기운이 막혀 예의가 땅에 떨어져 똥이 되고 피와 살이 도탄에 빠진 것은 또한 한 시대의 기운 중에 한겨울에 해당하니, 원컨대 청제께서는 돌아가 황천을 모시는 날에 청제처럼 큰 인덕(仁德)의 성인을 빨리 태어나도록 간절하게 청하여 팔방의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온 세상을 천수를 누리는 태평한 세상으로 올려주기를 마치 청제께서 곡풍(谷風 동풍)을 불어넣어 얼음을 풀리게 하고 단비를 내려 여러 무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하소서. 황천은 지극히 인자한지라 어진 말을 반드시 들어줄 것이니, 청제께서는 도모하소서. 그러면 비록 하루를 행하더라도 오히려 일 년을 머무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하니, 청제께서 이를 듣고서 측은해 하는 것이 마치 가엾게 여기는 점이 있는 듯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마치 생각하여 수긍하는 점이 있는 듯하였다. 이윽고 가벼운 바람이 잠깐 일어나더니 수레를 재촉해 서둘러 떠나가시자 하직하고 물러나 돌아오니, 산의 두견새는 울음을 그치고, 날은 저물어 갔다. 惟旃蒙赤奮若建辰月三十日丙子, 靑帝布政行令之九旬, 以功成期滿, 禪位赤帝, 駕言退歸. 惟萬衆民庶, 思其德, 不忍去, 望望焉出餞者, 蓋遍山塡街. 化中生金澤述, 登望帝之峯, 酌淸泉而設祖, 拜手進文而請曰: "於戲, 靑帝之爲君也, 乃仁乃和, 好生之德, 洽于萬物. 萬物熙皞, 咸沐厥澤, 若嬰乎慈. 今忽舍去. 凡厥衆生, 何以爲心? 願且勉留, 以卒大惠. " 靑帝曰: "否. 惟皇天定四時遂萬物, 乃命四方主君, 各用厥行, 成厥功德. 春木生物, 靑帝功也, 厥德仁; 夏火長物, 赤帝功也, 厥德禮; 秋金冬水, 物成物藏, 白、黑二帝有功, 義、智, 其德也. 夫功惟集衆, 德難兼全. 惟仁惟生, 雖曰'予能', 義、禮與智, 長、成且藏, 各司攸存, 予實無與. 且往過來續, 道之體也; 舊謝新代, 理之常也. 予其逝矣, 爾其勿悲. " 澤述又拜手復于帝曰: "春爲四時之首, 仁爲四德之長, 非春之生物, 何資? 而成長收藏之功, 非仁之無私, 安所見禮義智之德乎? 故長者, 長此生, 收者, 收此生, 藏者, 藏此生, 節斯仁者爲禮, 宜斯仁者爲義, 知斯仁者爲智. 惟功惟德, 惟帝其宗, 三方其支, 乃不專其美, 各歸其能, 此其所以爲仁歟. 嗚呼, 任運順理, 大智也, 推賢代己, 盛德也. 惟帝去就, 豈敢固請? 但有一焉, 見今天地閉塞, 禮糞義壤, 血塗肉炭, 亦一世運之大冬. 願帝歸侍皇天之日, 懇懇請亟生大仁德聖人如帝者, 掃八宇之妖沴, 躋一世於仁壽, 若帝之噓谷風而解氷凍, 降甘雨而惠群類也. 皇天至仁, 仁言必聽, 帝其圖之. 雖行之日, 猶留之年也. " 靑帝聞之, 惻然若有所㦖, 黙然若有所思而首肯者. 俄而輕風乍起, 趣駕翛然而行. 辭退歸來, 山鵑啼罷, 日之夕矣. 청제(靑帝) 봄을 주관하는 동쪽의 신(神)을 가리킨다. 오행설(五行說)에 의하면 청색과 봄은 모두 목(木)에 속한다. 적색(赤色)과 여름은 화(火)에 속하여 여름을 주관하는 남쪽의 신을 적제(赤帝)라 하고, 가을과 백색(白色)은 금(金)에 속하여 가을을 주관하는 서쪽의 신을 백제(白帝)라 하고, 겨울과 흑색(黑色)은 수(水)에 속하여 겨울을 주관하는 북쪽의 신을 흑제(黑帝)라고 한다. 두견새 …… 봉우리 원문의 '망제(望帝)'는 전국 시대 말엽의 촉(蜀)나라 왕 두우(杜宇)로, 억울하게 왕위를 선양한 뒤에 서산(西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원통한 넋이 두견새가 되어 봄이면 밤낮으로 애절하게 피를 토하며 운다는 전설로 인해 두견새를 비유하기도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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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族弟士毅 丙寅 세상에서는 바야흐로 내가 밤에 꿈꾼다고 여기는데, 나는 낮에 참된 일을 겪는다고 여깁니다. 참과 꿈, 낮과 밤을 과연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에 일도(日度)141)와 성전(星躔)142)이 이미 만고에 바뀌지 않는 즉, 갑이 낮과 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을이 잠자는 것과 꿈꾼다고 하는 것을 하늘이 실로 살피실 것이니, 절로 마땅히 그 득실을 변정(辨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낮에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밤에 꿈이 되니, 꿈에서 주공을 뵙는 것은 항상 이 도를 행하려는 마음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낮에 외물에 곡망(梏亡)143)되면 어찌 밤의 꿈이 편안하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사람이 능히 낮에 하는 일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꿈꾸는 일을 반드시 맑게 한다면, 이것으로 극진할 것입니다. 우리 아우가 별지에서 "낮과 밤이 서로 어긋나서 낮에는 수고로워도 꿈은 맑다"고 하는 말은, 혹 일시의 어떤 이유에서 나왔지, 정답 되는 말은 아니기에 그러므로 이렇게 언급해둡니다. 世方處我以夜以夢, 自處以晝以眞.眞夢晝夜, 果惡乎定.天地之日度星躔, 旣萬古不易, 則甲之是晝是夜, 乙之是寐是寤, 天實鑑只, 自應辨定其得失也.且晝之所思, 夜必爲夢, 夢見周公, 以其常存行此道也.朝晝梏亡, 亦安保其夜夢之安也.人能晝眞之必正, 而夜夢之必靑, 斯其至矣.別幅晝夜相違晝勞夢淸之喩, 或出一時有爲, 而究非竟語, 故玆及之. 일도(日度) 해가 다니는 길로 황도(黃道)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육기가 나이 사십에 친구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허전함을 비탄조로 읊은 〈탄서부(歎逝賦)〉에서 "슬프다. 강물은 온갖 물줄기를 모아 큰 흐름을 이루는데, 그 물줄기는 날마다 도도하게 흘러가고, 세상은 온갖 사람들을 겪으면서 세대를 이루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둘씩 늙어서 사라지는구나.〔悲夫. 川閱水以成川, 水滔滔而日度, 世閱人而爲世, 人冉冉而行暮.〕"라고 하는데서 일도가 나온다. 《文選 卷16》 성전(星躔) 별자리로 성좌(星座)이다. 곡망(梏亡) 《孟子 告子上》 에, 물욕의 구속을 받아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밤낮으로 생장시킨 바와 이른 새벽의 맑은 기운에 의해 호오(好惡)의 본성이 남들과 비슷하게나마 겨우 되살아났지만, 낮의 소행이 이를 곡망함이 있으니, 곡망함이 반복되면 야기(夜氣)가 족히 보존될 수 없다.〔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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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族弟士毅 丙寅 어제 대암(坮巖)에서 돌아오니 정겨운 편지가 책상에 놓여있었습니다. 바삐 편지를 열어 읽어보니 그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도 읽기 전에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습니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가눌 수 없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아우의 언론과 사상이 전일과 문득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우는 오당(吾黨) 중에서 평소 강의(剛毅)하다고 칭찬받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어찌하여 굳건한 소나무와 오래된 잣나무와 같은 그대가 세찬 눈바람에 압박되어 꺾이고 좌절되려하십니까! 혀 차는 소리로 괴이한 일이라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윽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는 아마도 우리 아우가 때를 만나 마땅함을 제제하여 평상시와 변화시에 처할 의리의 취지를 지극히 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그대가 먼저 이미 생각해서 얻고, 틈 없는 사이인 나에게 토로하고, 자신이 몸소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닌즉, 그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은 대개 과도한 우려였습니다. 또 밤에 능히 편안히 누울 수 있었습니다.비록 그렇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은 몸의 주인으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고, 말은 또 마음의 소리인지라 그 마음에서 발생해서 그 일을 해치게 된다."144)라고 맹자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성인이 이 말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씀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청컨대 그대의 편지에서 거론한 바를 근거해서 대략 논하겠습니다. 대저 하늘의 호오(好惡)는 진실로 나의 뜻한 바가 아니요, 또한 저들의 뜻한 바도 아닙니다. 대개 하늘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할 따름입니다. 나와 저들의 선악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우리에게 재난을 내리고 저들을 형통하게 한다고 하여, 하늘이 우리의 악을 싫어하고 저들의 선을 좋아한 것을 의심하여 끝내 의리에 안주할 바를 궁구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저들을 따른다면,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대저 기수(氣數)145)의 어긋남은 하늘이 홍수나 큰 가뭄같이 원래 자가(自家)의 일에 속한 것도 오직 하늘도 어찌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인사의 득실에 있어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이로써 아우는 '의를 따라 함께 하는 것은 진실로 군자가 되고, 세상과 함께 변하여 옮겨가는 것146)'은 결코 떳떳한 훈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시대와 형세를 아는 것을 정자(程子)는 "역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일렀지만, 또 말하기를 "시세가 비록 변하더라도 내 어찌 감히 현재의 왕의 제도를 변화시키거나 어기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공자는 반고(反古)147)를 훈계하여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효성스러운 우리 아우의 오늘날 시대를 알고 옛 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겠느냐는 훈계를 생각해 보니, 공자와 정자의 취지를 놓친 게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에 이르러서는 선성인 공자와 선현인 정자의 학문을 생각하고 힘써서, 세도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기약하는 것이 이 일입니다. 만약 유자가 졸렬한 법도를 고수하는 것을 깊이 애석하게 여긴다면, 나는 아우가 말하는 '졸렬한 법도를 지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졸렬한 법도라는 것이 천하의 왕 노릇하는 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관중(管仲)의 기량이 작은 것 같다148)고 한다면, 그것은 옳거니와, 혹 제멋대로 걷고 시속을 쫓는 일을 못하는 것을 가리켜 졸렬하다고 한다면, 이는 천하를 이끌어서 금수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고견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우리 아우가 한번 소회를 토로하여 그 씩씩한 마음을 한번 통쾌히 한 것인데, 나는 한번 그대의 의론을 듣고 가히 우려하여 질병이 되었으니, 인정이 같지 않고 어찌 상반되는지요?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보고서 끝내 한마디 말149)로써 실수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昨自坮巖歸, 情翰留案.忙手披讀, 其喜何旣.然讀之未半, 不覺惘然如有所矣.恍然惚然, 無以爲懷, 其故何哉.以吾弟言論思想, 忽異於前日也.吾弟非吾黨中素剛毅稱者乎.胡爲乎貞松古柏,爲虐雪獰風之壓迫而欲摧折也.咄咄怪歎, 夜不能寐, 旣而徐思之, 此殆吾弟欲因時制宜, 以極常變義理之趣.旣得之於思, 試一吐於無間, 非謂身親如何也, 則其惘然恍惚者.蓋過慮也.於是又夜能安寢.雖然又反思之,心身之主也,思出於心, 言又心聲也, 發於其心, 害於其事, 孟子旣云, 聖人不易斯言, 則吾何敢釋然如也.請就來喩所擧而略論之.夫天之好惡, 固非吾之所志, 亦非彼之所志.蓋好善而惡惡而已.吾與彼之善惡,果未知安在.然若以天之厄吾而通彼, 疑天之惡吾惡而好彼善, 遂不究義理之攸安, 而舍吾從彼則左矣.夫氣數之舛差, 天於洪水太旱之元屬自家事者, 尙且柰何不下, 况於人事之得失乎.是知義之與比, 固爲君子, 而與世推移, 決非經訓也.且知時識勢, 程子謂學易之方, 而又謂時勢雖變, 某安敢變違時王之制.孔聖戒以反古, 而非先王之德行, 不敢行.又以爲孝吾弟今日識時反古之訓, 無乃失孔程之旨乎.至於吾所當爲者, 思勉先聖賢之學, 期補世程之萬一是也.若以儒者膠守拙規爲深惜. 則不省其拙規者指何也.若謂不知有王天下之道, 如管仲之器小則可矣, 或指不能闊步趨時而爲拙, 則此率天下而爲獸也, 高見豈至此乎.吾弟則一吐所懷, 壯心爲之一快, 而吾則一聞高論, 過憂爲成一疾, 人情不同, 何若是相反, 是必有其故也.幸惟深思遠覽, 無終爲一言之失如何.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 에 "마음속에서 생각을 일으켜 급기야는 정사에 해를 끼치고 만다.〔發於其心 害於其政〕"라고 하였다. 기수(氣數) 길흉ㆍ화복의 운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5년조에 "귀갑(龜甲)으로 점을 치는 것은 사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서초(筮草)로 점을 치는 것은 기수(氣數)를 대표하는 것이다. 사정이 발생한 뒤에 현상이 있게 되고, 현상이 있으면 사정이 더 발생하고, 사정이 더 발생한 뒤에 기수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의를 따라……옮겨 가는 것 본문의 '義之與比'는《논어》〈이인(里仁)〉에 "군자는 천하의 모든 일에 대하여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없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없어서 오직 의로운 것을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하였다. 또한 '與世推移'는 《사기(史記)》권84 굴원열전(屈原列傳)의 어부사(漁父辭)에,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미루어 옮겨가나니, 온 세상 사람이 혼탁하거든 어찌 그 흐름을 따라서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夫聖人者, 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擧世混濁, 何不隨其流已揚其波.〕"라고 하였다. 반고(反古) 《중용》 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행하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재앙이 그 몸에 닥칠 것이다.' 〔子曰: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烖及其身者也.〕"라고 하였다. 옛 도리에 반하지 말라고 경계함을 이른다. 관중의……같다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구나.'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관중은 검소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삼귀대를 지었으며 가신의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子曰:'管仲之器, 小哉!' 或曰:'管仲儉乎?' 曰:'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라고 하였다. 한 마디 말 《논어》 〈자로(子路)〉에 "정공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은 이와 같이 기필할 수는 없거니와 사람들 말에 「나는 임금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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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유고》37) 서문 《晩隱遺稿》序 삼가 일찍이 보건대, 예나 지금이나 가문에서 뛰어난 선비와 석학을 배출하여 집안의 명성을 창성케 한 것은 대체로 그 선대의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경우가 많은데, 지금 만은 처사(晩隱處士) 황공(黃公 황전(黃㙻))에게서 그것이 진실로 그렇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우리 호남의 황이재 선생(黃頤齋先生 황윤석(黃胤錫))은 온 나라의 석학이고, 공은 바로 그의 대인(大人 부친)이니, 위로는 취은(醉隱)ㆍ산촌(山村)ㆍ구암(龜巖)38)의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이재의 어짊을 열어 주었다. 만약 이재만 있는 줄 알고 만은이 있는 줄 모른다면 이는 비유하자면 한낱 서산(西山)의 학문이 정심하고 해박한 것만 알고 목당노인(牧堂老人)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이니39), 어찌 옳겠는가.공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공부가 이미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나 일곱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자 만년에 선포(仙浦) 구양(龜陽)의 거처에 은둔하여 영화로운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끊고 경학(經學)에 마음을 침잠하여 백수(白水)ㆍ목산(木山)ㆍ두호(杜湖 조정(趙晸)) 등 명성과 덕망이 있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장려와 인정을 받았으며, 일대 유림의 종장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와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같은 두 선생께서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여기에서 공을 알 수 있다.수사(修辭)에 드러난 것은 소박하고 진실한데다 상세하고 분명하여 일에 나아가 실정을 논하고 사물로 인하여 이치를 말했을 뿐, 기이함을 숭상하거나 꾸밈을 다하여 사람의 눈과 귀를 기쁘게 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대체로 이른바 '말은 뜻이 통하게 하면 그만이다.40)'라는 것이 이것일 것이다. 언지(言志)의 작품41)은 천기(天機)에서 얻은 것이 깊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즉시 쏟아 내면서도 태연자약하여 여유가 있었고, 다듬고 수식하지 않아도 청아하고 울림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외고 읊조림에 저절로 흥이 느껴지는 정취가 있었다. 늘 말하기를, "시는 모든 문장 체재의 조종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성정(性情)의 발현에 통하지 않은 데가 없는 묘리를 스스로 징험했을 것이다. 총괄하면 공은 덕행과 학문, 식견이 성대하게 모범이 되었으니, 당시에 비록 이옹(頤翁)의 높은 재주로도 또한 공의 영향을 받아 성취한 것이 있었음은 속일 수 없다.임오년(1942) 봄에 구양(龜陽)에 와서 이재 속집(頤齋續集)의 교정을 끝내고, 아울러 공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였는데, 8대손 서구(瑞九)가 이 일로 인하여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니, 내가 일어나 말하기를,"아, 또한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옹은 진실로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황씨(黃氏)의 선학(先學)이 공에 이르러 더욱 완비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아버지가 북돋우고 아들이 창달시켜 서로 뜻을 얻음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구나. 이것을 어찌 크게 써서 서문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42)"라고 하였으니, 내가 바라건대, 이 유고를 읽은 후손들은 가문의 명성이 창성한 근본을 생각하여 가업[箕裘]을 무궁토록 이어가야 할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자식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43)"라고 하였으니, 내가 바라건대, 이 유고를 읽은 후생들은 전대 현인들이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현양한 자취를 생각하여 힘써 따라야 할 것이다. 竊嘗觀夫古今人門之出鴻儒碩匠而昌家聲者, 蓋多本其先學而來. 今於晩隱處士 黃公, 益驗其信然矣. 我湖之黃頤齋先生, 通國之鴻碩, 而公卽其大人, 上承醉隱、山村、龜巖之學, 下以啓頤齋之賢. 如使知有頤齋而不知有晩隱, 則是譬之徒知西山之精博而不知有牧堂老人, 豈可乎哉? 公少治科業, 業旣精至, 七擧而猶不中, 晩而隱於仙浦 龜陽之居, 絶意榮途, 潛心經學, 爲白水、木山、杜湖諸名德所獎與, 一代儒宗如渼湖、屛溪二先生, 至以好學稱之, 斯可以見公矣. 其著於修辭, 則平實詳明, 就事論情, 因物說理而已, 無尙奇致飾, 悅人耳目之態, 庶所謂辭達者是也. 至於言志之作, 得之天機者深. 故卽寫境遇而紆餘有地, 不事雕琢而淸越有響, 使人諷詠, 自有興感之趣. 常曰: "詩者, 文章百體之宗. " 抑有以自驗性情之發, 無往不通之妙也歟. 總之公德行文識, 蔚然望範乎. 當時雖以頤翁高才, 亦有所受而成, 不可誣也. 壬午春余來龜陽, 校訖頤齋續集, 而幷及公遺文. 八世孫瑞九, 因請序之. 余作而曰: "吁, 不亦盛乎. 頤翁固尙矣, 黃氏先學, 至公益備者又如此, 父而培之, 子而達之, 相得益章猗歟哉. 是烏可不大書之, 以爲序乎?" 《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 吾願後孫之讀是稿者, 宜思家聲所昌之本, 紹箕裘於無窮也哉. 《易》不云乎? "有子, 考无咎. " 吾願後生之讀是稿者, 宜思勉追前修立揚而顯其親也哉. 《만은유고》 조선후기 학자 황전(黃㙻, ?~1771)의 시·서(書)·제문·만사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4권 2책. 석인본. 1943년 8대손 서구(瑞九)가 편집ㆍ간행하였다. 취은(醉隱)ㆍ산촌(山村)ㆍ구암(龜巖) 취은은 황전의 조부인 황세기(黃世基)의 호이고, 산촌은 황전의 부친인 황재만(黃載萬)의 호이다. 구암은 미상이다. 서산(西山)의 …… 것이니 서산은 남송 때 경학가인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호이고 목당노인은 채원정의 아버지인 채신여(蔡神與, 1089~1152)의 호이다. 채신여로부터 아들 원정, 손자 연(淵)ㆍ원(沅)ㆍ침(沉), 증손자 격(格)ㆍ모(模)ㆍ항(杭)ㆍ권(權)에 이르기까지 남송의 대유(大儒)로, 이들을 아울러 "채씨사세구유(蔡氏四世九儒)"라 불렀다. 말은 …… 그만이다 《논어집주》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언지(言志)의 작품 시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한 것이요, 노래는 말을 길게 읊은 것이요, 소리는 길게 읊음에 따른 것이요, 음률은 읊는 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다.〔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 되느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하였다. 자식이 …… 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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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옹집44) 중간 서문 【을축년(1925)】 栗翁集重刊序 【乙丑】 사람들은 언제나 글이 사람 때문에 전해진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거니와 나는 삼가 사람이 글 때문에 전해진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또한 옳을 것이다. 율옹 선생(栗翁先生) 송공(宋公 송징(宋徵))은 충효(忠孝)와 대절(大節)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니,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할 때에는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껏 봉양하면서 난리 가운데에 있음을 잊게 하였고, 광해군의 조정에서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고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인조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하여 왕의 일에 힘썼고, 병자년(1636) 태학(太學 성균관)에 있을 때에는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였으며, 정축년(1637) 이후로는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세상에 나아가 공명을 이루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공이 천지를 지탱하고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는 데에 수립한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공의 손에서 나온 문장은 비록 천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마치 공을 보듯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글이 사람 때문에 전해진다는 것이다.정축년 이후에 저술한 것들은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尊華攘夷] 의리 아닌 것이 없었으니, 〈종루(鍾樓)〉라고 제목한 시에서 "어찌 차마 신종황제의 덕을 배반하며, 무슨 얼굴로 선조대왕의 영령을 대하겠는가[忍背神宗皇帝德, 何顔宣祖大王靈]"라고 한 것이 더욱 절실하고 통쾌하여 사람들이 비록 공의 손에서 나온 작품인 줄 미처 알지 못했지만 먼저 입에 오르내렸으니, 공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또 이와 같다. 지금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를 암송하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된다면 이는 사람이 글 때문에 전해진다고 이를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가?요약하면 공의 글은 사람과 글 때문에 모두 전할 만 하니, 이것이 인릉(仁陵 순조(純祖)) 병술년(1826)에 이미 간행하고, 갑자(甲子)가 두 번 지난 올 해 기축년(1949)에 다시 간행하는 이유이다. 나는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간행되어 전하는 데에 쇠퇴함이 없을 줄 알겠다. 추월산은 무너지지 않고, 담양의 강물은 장구히 흐르면서 공의 인품과 글이 함께 존재할 것이니, 또 어찌 흩어지고 빠진 나머지 권부(卷部)가 적다고 개탄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을 우러러 보며, 큰 길을 따라간다.45)"라고 하였는데, 나는 공에게 실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라 10대손 환욱(煥郁)이 와서 중간(重刊)의 서문을 청하기에 공경하고 앙모하는 마음을 써서 돌려보낸다. 人恒言文以人傳, 此固然也. 余竊謂人以文傳, 亦可也. 栗翁先生 宋公, 有忠孝大節, 明《春秋》大義. 宣祖壬辰, 奉母避難, 備經險阻, 而一心忠養, 使之忘在難中. 昏朝廢母議起, 疏斥爾瞻, 卽日還鄕. 仁廟甲子适變, 募義旅以勤王事, 丙子在太學, 請斬虜使. 丁丑以後, 杜門遯跡, 不求進取, 公之所樹立撑天地扶人紀者, 旣如此, 則文之出自公手者, 雖曠千載之遠, 孰不愛重之, 若見公乎? 此所謂文以人傳也. 丁丑後述作, 無非尊華攘夷之義, 而其題〈鍾樓〉詩, "忍背神宗皇帝德, 何顔宣祖大王靈?" 尤深切痛快. 人雖未及知出自公手, 而先已膾炙于口, 公之詩感發人心, 又如此. 至今三百有餘年, 人爭誦其詩, 而知有其人, 則此可謂人以文傳者, 不其然乎? 要之公之文以人以文, 皆可傳焉. 此所以旣刊於仁陵丙戌, 而重刊於再周甲今年己丑者也. 吾知其愈久愈刊, 傳之無替矣. 秋山不崩, 潭水長流, 公之人、文, 與之俱存, 又烏足以散逸餘卷部之少致慨也哉? 《詩》云: "高山仰止, 景行行止. " 吾於公實有之. 十世孫煥郁來請重刊序,. 爲之書敬慕之意而歸之. 율옹집 송징(宋徵, 1564~1643)의 저서인 《율옹유고(栗翁遺稿)》를 가리킨다. 초판본은 불분권 1책이고, 목판본이며, 1826년(순조 26) 6대손 재일(在一)과 이신(以新) 등이 처음 편집ㆍ간행하였고, 권두에 송치규(宋穉圭)의 서문과 권말에 이헌승(李憲承)의 발문이 있다. 높은 …… 따라간다 《시경》 〈거할(車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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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유고》 서문 【을축년(1925)】 《德溪遺稿》序 【乙丑】 맹자가 말하기를,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이미 그 사람의 어짊을 알고 있으면서 그 시와 글을 외고 읽지 않는다면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기억하건대, 옛적에 선인(先人 선친)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고 있었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근래 고 덕계(德溪) 최공(崔公)은 효성이 도타운 사람이다."하셨고, 얼마 뒤 여러 장로(長老)들에게 들었을 때에도 또한 말이 한결같고 이간하는 말이 없었기에 당시 나이가 어렸음에도 마음속으로 삼가 앙모할 줄 알았다.몇 해 전에 공의 자손 경렬(暻烈)과 인렬(寅烈) 두 어른을 따라 공의 장(狀)ㆍ전(傳)ㆍ천(薦)의 글을 보고서 어린 시절에는 온청(溫凊)을 살피는 일46)에 부지런했고, 상사(喪事)와 제사에 마음과 의례가 모두 극진했으며, 백발의 노령 때에는 어린아이 때처럼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것이 참으로 '효성이 도타웠다'는 일컬음에 부합하였음을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덕(德)을 아는 말에 감복하면서도 오히려 공의 글을 미처 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 해 가을에 또 공의 종손 민렬(敏烈) 군을 따라 공의 시와 글을 모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영탄(咏歎 시)과, 기(記), 차(箚)의 사이에 드러난 것들이 대체로 육아(蓼莪)와 풍수(風樹)47)에 관한 뜻이 많았으니, 이른바 '한 번 말을 할 때에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는다.'라는 것처럼 공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 나머지도 또한 모두 인륜을 바로잡고 의리를 독실하게 하며, 풍속을 교화시키고 후배를 권장하는 말이었는데, 겸손하고 온화하며 간절하고 진실한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였으니, 이른바 효자와 어진 사람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인가?아, 공의 글은 적막하다고 이를 만하니, 그 저작이 또한 걸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소 실천한 끝에 터득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쳐가는 바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맹광(孟光)48)과 같은 현숙한 부인이 있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계방(季方)49)과 같은 동생이 되기 어려운 동생이 있었으니, 한 가지 의절로 공을 총괄할 수 없음이 또 분명하다. 그런데 저 높다란 관을 쓰고 패옥을 늘어뜨린 채 세상에 자신을 내세우는 자들은 그 뛰어난 의론과 풍부한 작품이 의당 세도에 도움이 있을 것 같은데, 그 귀결을 궁구하면 혹 윤리를 거스르고 도의를 해치거나 풍속을 무너뜨리고 후배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몸으로 실천한 데에서 터득함이 없어 학문이 진실하지 못한 때문이다.나는 공에게 통가(通家 인척(姻戚)의 후생이 되기에 서문을 짓는 일을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글을 읽고서 더욱 깊이 공을 알게 되었으니, 일찍이 감탄했던 바를 써서 오늘날과 훗날의 상론가(尙論家 비평가)로 하여금 시와 글을 암송하고 읽는 것이 그 사람 때문이고, 그 문장 때문이 아님을 알게 하며, 삼가 추부자(鄒夫子 맹자)의 말 밖에 숨어 있는 뜻을 드러낼 따름이다. 孟子曰: "誦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竊嘗以爲旣知其人之賢, 而不誦讀其詩、書, 則尤不可也. 記昔敬承先人敎, 有曰: "近故德溪 崔公, 純孝人也. " 旣而聞諸諸長老, 亦一辭而無間, 時年尙幼, 然心竊識慕矣. 年前從公之孫暻烈、寅烈二丈, 得見公狀、傳、薦文, 備知齠齔溫凊之勤、喪祭情文之盡、白首孺慕之至, 允合純孝之稱, 而服知德之言矣. 猶以未及讀公之文爲恨, 是歲秋, 又從公從孫敏烈君, 盡得公詩若文而讀之. 其發於咏歎、記、箚之間者, 大抵多蓼莪、風樹之意. 所謂一出言而不敢忘父母者, 公其人焉. 其餘亦皆正倫篤義, 化俗獎後之言, 而謙和懇實, 令人感發, 所謂孝子仁人之辭者此耶? 噫, 公之文, 可謂寂寥矣, 其作亦非傑然者. 然惟其得於躬行之餘, 用於及人之地. 故刑于而有孟光之賢, 友于而有季方之難, 其不可以一節蔽公也又審矣. 彼岌冠委佩, 標榜乎世者, 其偉論豊作, 宜若有裨益世道, 而究其歸, 或不免乖倫害義, 敗俗誤後而止, 何哉? 無得乎躬行而學之不實故也. 余於公爲通家後生, 不敢辭弁卷之役. 旣幸讀公之文而知公益深, 且書所嘗感慨者, 使今與後尙論家, 知誦讀詩書之以其人, 不以其文, 竊以發鄒夫子言外之意云爾. 온청(溫凊)을 …… 일 부모님을 모시는 예절로, 추위와 더위에 손상되지 않도록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육아(蓼莪)와 풍수(風樹)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과 추모를 노래한 것이며, 풍수는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 것으로,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맹광(孟光) 후한(後漢) 때 양홍(梁鴻)의 아내로, 현숙한 아내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본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을 구하지 않는 남편을 따라 패릉산(覇陵山)에 은둔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여 밥을 지어 남편에게 올릴 때마다 밥상을 자기 이마의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가 전해진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梁鴻》 계방(季方) 동한(東漢) 때 진식(陳寔)의 둘째 아들인 진심(陳諶)의 자로, 그의 형 진기(陳紀 원방(元方))과 함께 총명하고 효성스럽기로 유명하여 "원방은 아우가 되기 어렵고, 계방은 형이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弟, 季方難爲兄.〕"라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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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유고》50) 서문 【신사년(1941)】 《瑞樵遺稿》序 【辛巳】 선비들이 빈흥(賓興)51)의 법이 폐지되면서부터 모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고, 도를 지켜 자중하는 자는 사람들이 도학(道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에게 '도학'과 '과학(科學)'이라는 다른 칭호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가 아니면 그 지위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심지어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처한다면 설사 공자께서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말하기를, "급제 여부를 생각 밖에 둘 수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또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나누어 과거 공부를 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뜻이 빼앗길까 근심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비가 진실로 뜻을 빼앗기지 않고, 바깥 사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니, 인물을 논하는 자들이 굳이 '도학'과 '과학'의 칭호에 구애되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내가 근고(近故)의 선비를 보건대, '과학'으로 이름이 나면서도 '도학'의 실제가 있는 사람은 서초 선생(瑞樵先生) 이공(李公)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공은 학문이 이미 뛰어났고, 친족이 또 현달하였으니, 만약 조금만 뜻을 굽히고 세속을 따랐다면 지름길로 벼슬에 나아가 한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높은 점수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리어 벼슬을 구하는 것을 엄격하게 단절한 채 시종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의를 지키며 백발의 노령에 이르도록 얻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나이를 올리는 것[加年]으로 도모할 것을 권하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누굴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허물이 될 만큼 뜻을 빼앗기지 않아서 '도학'을 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오직 마음에 보존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발현한 언사도 또한 이에 걸맞았으니, 일찍이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을 때에 시험을 주관했던 사람이 "공의 문장은 학문 속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재(全齋) 임문경공(任文敬公 임헌회(任憲晦))은 공이 지은 유소(儒疏)를 보고 말하기를, "의리가 명백하니, 과거를 보는 유생의 말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행한 일은 어버이를 섬겨 상사(喪事)와 제사의 예절을 다한 것과 학문을 강론하여 후배의 선비를 성취시킨 것, 중화를 존숭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원할 것을 상소로 청한 것, 사직을 지키기 위해 병인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한 것들이 또 모두 도의상의 일 아닌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데도 공을 '과학'의 선비라고 일컬을 뿐이라면 인물을 평론하는 공이 아닐 것이다.아, 지금 이 유고는 과거 문장 이외에 공이 평소 저술한 것들을 편찬한 것이니, 나의 고루함으로 어찌 감히 그 글을 알겠는가. 나 또한 "의리가 명백하고 학문 속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공에 대한 평론과 같을 뿐이고, 교지에 응하여 바친 〈삼정책(三政策)〉은 식자들이 공이 도를 행하는 방법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당시에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을 탄식하였다.아, 공의 덕행과 학문으로 일찍이 당대 유림의 종사에 가탁하여 스스로 일컫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것이 비록 한스럽게 여길 만한 것 같지만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차라리 실상이 있고 이름이 없기를 바랄지언정 실상이 없이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공은 이름 이외의 실상이 있으니, 이는 매우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공의 손자 서산(瑞山) 어른 이풍호(李灃鎬)와 증손 이한응(李漢膺)이 서문을 청함에 다만 위와 같이 공을 논하여 세상 사람들이 도학을 자처하되 누가 됨을 면치 못하고, 명예와 이익에 그 뜻을 빼앗겨서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공의 휘는 희석(熙奭)이고, 자는 주보(周輔)이며, 전의(全義) 사람이다. 8세조(八世祖) 문정공(文貞公) 석탄 선생(石灘先生 이신의(李愼儀))은 나라의 저명한 신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고조 이엽(李爗)은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니, 공은 이미 위로 계승할 선조가 있고, 지금 이서산과 이한응이 행의(行義)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으니, 또한 아래로 전할 후손이 있다. 아! 성대하다. 士自賓興之法廢, 皆由科擧出身, 其守道自重者, 則人以道學目之. 故士乃有道學科學之異稱. 然欲行道者, 非此無以進乎其位. 故朱子至謂居今之世, 使孔子復生, 不免應擧, 而曰: "得失置之度外, 亦不累也. " 程子則又使學者, 分治擧業, 而曰: "不患妨功, 惟患奪志. " 然則士苟能不奪志, 爲累於外物, 斯可耳. 論人者, 不必拘於道、科之稱, 而有所軒輊也審矣. 以余觀於近故之士, 以科學名而有道學實者, 惟瑞樵先生 李公其人歟. 公學旣優而族又顯, 如使少屈其志以徇俗, 則席藉蹊徑, 非無地也, 高占嵬捷, 非不易也, 乃嚴絶干售, 終始一節, 以至老白首無得. 人或勸以加年以圖, 則厲聲言: "吾誰欺? 欺天乎? " 斯豈非不奪志爲累, 而無愧其爲道學者乎? 惟其存諸心者如此, 故發之爲辭亦稱是. 嘗首選鄕試, 主試者謂: "公文從學問中來. " 全齋 任文敬公見公所製儒疏曰: "義理明白, 非科儒口氣. " 其行之爲事, 則事親而盡喪祭之禮、講學而成後進之士、尊華而疏請復萬東之廟、衛社而謀起丙寅之旅, 又皆罔非道義上事. 如是而稱公爲科學之士已者, 非月朝之公也. 今此遺稿, 編公平日功令外著作者. 以余固陋, 何敢知其文? 亦惟曰"義理明白, 從學問中來"者, 如當日公評已矣. 至於應旨所獻〈三政策〉, 識者謂公行道之具在此, 而歎時不能用焉. 嗚呼, 以公德學未嘗託當世儒宗以自名. 故知之者鮮. 雖若可恨, 然名實之不相副也久矣. 是以君子寧欲有實而無名, 深恥實去而名存. 公乃有名外之實, 則是甚可貴者, 庸何病也? 余故於公之孫瑞山丈 灃鎬、曾孫漢膺之請弁文也, 特論公如右, 欲以警夫世之自居以道學而不免累, 名利奪其志, 以至於欺天、人者. 公諱熙奭, 字周輔, 全義人. 八世祖文貞公 石灘先生爲國朝名臣. 高祖文科承旨爗, 望重一世. 公旣上有所承. 今瑞山、漢膺以行義能世其家. 亦下有所傳. 於虖盛哉. 서초유고 조선후기 학자 이희석(李熙奭, 1820~188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시문집. 1941년 이희석의 증손 이한수(李漢秀)ㆍ이한섭(李漢燮)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택술(金澤述)의 서문과 권말에 이한수의 발문이 있다. 2권 1책이고, 석인본이다. 빈흥(賓興)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이다.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할 때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였다. 《周禮地官 大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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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유고》 서문 【경오년(1930)】 《省菴遺稿》序 【庚午】 옛적에 우리 구산 선사(臼山先師 전우(田愚))께서 '심을 작게 여기고 성을 존숭한다.[小心尊性]'는 것으로 가르침과 배움의 주요 핵심을 만드시고, 이내 대중들에게 크게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성이 스승이고, 심이 제자이다."라고 하시자, 당시 심을 종주로 여기는 제가(諸家)들이 거의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학설을 듣고 크게 놀라고 조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오직 문하의 선비들만이 믿고 복종하였으며, 배움의 경지에 따라 또한 얕고 깊음의 구분이 있었는데, 지금 《성암유고(省菴遺稿)》을 보건대, 독실하게 믿고 기쁘게 복종한 사람으로 김공 용선(金公容璿)만한 사람이 없으니, 성암은 그의 호이다.무릇 성은 본말이 순전한 선(善)이고, 심은 근본이 선하지만 말단이 간혹 선하지 않다. 때문에 성을 근본으로 하면 성인이 되고, 심을 근본으로 하면 석씨(釋氏 부처)가 되니, 이것이 정도와 이단의 큰 판별이 된다. 그러나 성은 순수하고 심은 맑아서 색상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심과 성은 동일한 물건이다.[心性一物]'라는 설이 있게 되었고, 성은 작위(作爲)가 없고 심은 작위가 있어 운용이 심에 달려 있기 때문에 심지어 '심은 군주이고 성은 백성이다.[心君性民]'라는 설까지 있게 되었으니, 본디 이치를 보는 것이 투철하지 않으면 이러한 요결을 세울 수 없고, 공부가 정밀하지 않으면 이러한 요결을 믿을 수 없다.대체로 공은 어려서부터 과거 문장을 익혀 용을 잡고 여주(驪珠)를 얻는 데52)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지만, 만년에 실제적인 학문에 뜻을 두어 일찍이 지었던 과거 문장을 모두 불태우고, 예물을 안고 선사를 뵈었다. 한번 심과 성에 관한 설을 듣고서는 말을 하자마자 깊이 이해하였고, 물러나 서신과 차자의 사이에 발론한 것들은 '심을 작게 여기고 성을 존숭한다.'와 '성이 스승이고 심이 제자이다.' 등의 뜻을 드러내 밝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원고 속에 나타난 것들이 태반이 모두 이 학설에 관한 것들이었으니, 이로 볼 때 공의 타고난 자질과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 만약 공이 어려서부터 도학을 추구하고, 혹 하늘이 긴 수명을 빌려주었다면 반드시 견해가 더욱 밝아지고, 의론이 더욱 적절하여 비단 원고에 실린 것이 단지 지금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니, 비록 오직 선사에게만 전해져 오는 하나의 정통을 계승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心을 종주로 여기는 이단의 의론을 옛사람의 이른바 '말끔하게 없앴다'는 것처럼 배척할 수 없을 것이라 이르더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공의 아들 김인기(金仁基)가 공의 원고를 차례대로 편집하고 한마디 말을 하여 도와 줄 것을 청하니, 나는 실로 글재주가 없기에 공의 시와 글 등 여러 작품에 대해 망령되이 논찬(論贊)을 둘 수 없었고, 단지 심ㆍ성의 단안을 이 편집의 총괄적인 요지로 여겼기 때문에 책머리에 그 대체를 특별히 기록할 따름이다. 昔我臼山先師, 以小心尊性, 作敎學主腦, 乃大呼於衆曰: "性爲師而心爲弟也. " 時則心宗諸家, 幾遍域中, 聞其說, 鮮不大驚而小怪者, 惟及門之士信服, 而隨學所至, 亦有淺深之分矣. 今觀《省菴遺稿》, 其篤信而悅服者, 莫若金公容璿焉, 省菴公之號也. 夫性者, 本末純善也; 心者, 本善而末或不善也. 故本性則爲聖人; 本心則爲釋氏. 此正道異端之大判也. 然性粹然而心瑩然, 色相易混, 故乃有心性一物之說焉. 心有爲而性無爲, 運用在心, 故至有心君性民之說焉. 自非見理透徹, 不能立此訣, 非用功精密, 不能信此訣矣. 蓋公早事公車, 屠龍探驪, 人莫或先, 晩志實學, 悉焚曾著功令文, 懷贄謁師, 一聞心、性之說, 輒言下深會, 退而發於書箚之間者, 無非著明小心尊性、性師心弟之旨, 而其見於稿中者, 太半皆此說也. 是其天資穎悟之有大過人者, 不可誣矣. 若使公早年求道, 或天假遐齡, 必其見益明, 論益切, 不但如今載稿者而已. 雖謂之不足以承先師單傳一統, 而據以斥心宗異論, 若古人所謂廓如也, 吾不信也. 公子仁基編次公稿, 請一言而相之. 余固不文, 其於詩文諸作, 不能妄有論贊, 但以心、性之案, 爲是編總旨也, 故特識其大者於卷首云爾. 용을 …… 데 과거 시험에 필요한 문장이나 시문을 짓는데 기교가 뛰어남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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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씨세적》 서문 【을유년(1945)】 《平海黃氏世蹟》序 【乙酉】 《예기》에서 말하기를, "선조에게 선한 행실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53)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신의 이름이 선조 다음에 있는 것은 순종함이요, 후세에 밝게 보여 주는 것은 가르침이다.54)"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선한 행실을 칭송하고 찬양하여 천하에 밝게 보이는 것은 진실로 효이거니와 그 선한 행실을 본받아서 몸을 정숙하게 하고 후손에게 전하는 것은 더욱 그 효를 드러내는 것이다.무릇 본받을 만한 선한 행실은 본디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있지만, 멀지 않고 가까우며 소원하지 않고 친밀하여 취하는 데에 어렵지 않은 사람으로 또 누가 그 선조와 같겠는가. 이것이 옛적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임금에게 고할 때마다 걸핏하면 탕(湯)과 문무(文武)를 일컬었던 이유이고, 오늘날 황군 건익(黃君鍵翼)이 《세적》을 만든 이유이다. 황씨의 문헌이 나라 초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거니와 군이 지(誌)ㆍ갈(碣)ㆍ장(狀)ㆍ서(序)에 있는 선한 행실을 기록하여 빠짐없이 합쳐서 한 번 보면 훤히 알 수 있게 한 것도 또한 부지런한 일이었다.아, 인간의 어떤 세상에 경전이 나라를 망친 도구가 되고, 유가의 무리들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물건이 되어 꾸짖음과 욕이 산처럼 쌓인 적이 있었던가? 생존해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들어 아는 것이 없다고 이미 배척하였으니, 오랜 세월이 지난 선대를 배척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군은 이러한 때에 경전과 유학을 생각했던 조상을 사모하고 본받는 데에 부지런하였으니, 이것이 세속 사람은 어질지 못하고 밝지 못한데다 순종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여 불효가 되고, 군은 어질고 밝은데다 순종하고 가르쳐서 효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이른바 "세상 사람은 떳떳함이 없고, 서군(徐君)은 떳떳함이 있다."55)는 것을 나 또한 말하니, 황씨의 후손되는 사람들이 어찌 편집의 뜻을 체득하여 떳떳함이 있는 도에 힘쓰지 않겠는가. 게다가 우리 조정은 중세 이후로 단지 벌열(閥閱)과 문화(文華)56)만을 서로 숭상하고 내실이 없었으니, 이것이 멸망을 취하고 꾸짖음과 욕을 가져오게 된 이유이다. 만약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편찬으로 남들보다 뛰어남을 구하려 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군에게 결단코 이러한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자신의 몸으로 보존하기를 바란다. 《記》曰: "先祖有善而不知, 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 " 又曰: "身比焉, 順也; 示後世, 敎也. " 蓋稱揚先祖之善, 明著天下, 固孝也, 而取則其善, 淑身而裕後, 則尤見其孝. 夫善之可則, 固有從上聖賢, 然不遠伊邇, 不疎伊親, 取之不難, 又孰若其祖乎? 此昔之伊、周所以告君動稱湯、文而今日黃君 鍵翼《世蹟》之所由作也. 黃氏文獻, 自國初至于近世而不絶, 固盛矣. 君於紀善之誌、碣、狀、序, 聯輯無遺, 一覽瞭然, 亦勤矣. 嗚呼, 人間何世, 經傳爲亡國之具, 儒流爲誤人之物, 詬罵之積山如也? 生存之父祖, 已斥以無聞知, 則何有於已久之先世乎? 君乃以此時, 惟經惟儒之祖, 是慕是則之勤. 此世俗所以不仁明不順敎爲不孝, 而君得爲仁明順敎而孝者也. 所謂世人無常而徐君有常者, 吾亦云爾. 爲黃氏後進者, 盍體編輯之意, 勉有常之道乎? 抑我朝中世以降, 徒以閥閱文華相尙而無其實. 此所以取滅亡而來詬罵者. 如曰: "不免慣習, 將以是編求多于人. " 則吾知君之決無是也, 請以身保之. 선조에게 …… 것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보인다. 자신이 …… 가르침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보인다. 세상 …… 있다 서군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서막(徐邈)을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이 권력자의 취향이나 사회 풍조에 따라 변하였지만, 서막은 평소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였는데, 진(晉)나라 노흠(盧欽)이 평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떳떳함이 없고, 서공은 떳떳함이 있다.〔世人之無常, 而徐公之有常也.〕"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 벌열(閥閱)과 문화(文華) 벌열은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이 성대한 것을 말하고, 문화는 내실이 없이 외면만 화려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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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유고》57)의 서문 【열재 소 어른58)을 대신해서 지음. 무인년(1938)】 《小心齋遺稿》序 【代悅齋 蘇丈作. 戊寅】 글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없다면 비록 많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동문 소심재(小心齋) 황공(黃公)이 남긴 글에서 대략 느낀 점이 있다. 대체로 천지 사이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으니, 양이 성장하면 음이 소멸하고, 음이 성장하면 양이 소멸한다. 성인께서는 이것을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비유하여 《주역》의 태(泰) 괘와 비(否) 괘에서 둘로 나누어 상대적으로 말하면서 음을 억제하고 양을 부양하는 뜻을 곡진하게 다하였으니, 후세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즉 성인의 뜻을 체득하여 의리(義理)를 강론하고 인사(人事)를 논할 때에 공정함을 숭상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과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는 것,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세상을 돕는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공은 강학(講學)에 전심한 60년 중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을 스승으로 섬긴 것이 거의 4분의 3이나 된다. 무릇 학문의 요체 다섯 가지59) 가운데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한 가지를 차지하고, 학(學)ㆍ문(問)ㆍ사(思)ㆍ변(辨) 네 가지는 모두 변별하는 일로 앎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니, 앎이 진실하기 때문에 행함이 독실한 것이다. 이것이 공성(孔聖 공자)의 종지(宗旨)이다.선생의 학문은 이러한 종지를 터득하였다. 근원을 말하면 성리(性理)를 근본으로 주요 핵심을 삼아서 겉으로 존숭하되 속으로 폄하하는 심종(心宗)을 변박하였다.60), 담당한 일을 말하면 종신토록 스승에 대한 윤리를 보호하여 겉으로 칭찬하되 속으로 기롱하는 가뢰(嘉誄)를 변박하였다.61) 그 나머지 의리를 강론하고 일을 논한 것들도 이에 걸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것이 모두 보호하고 물리치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 그 마음을 공변되게 하여 세상을 근심하고 돕는 것이 되는 이유이다.공의 학문은 또 선생의 요지를 얻었고, 아울러 공변된 마음을 얻었으니, 명칭이 애매모호하고 형상이 다른 천지의 이(理)와 기(氣), 인물의 심(心)과 성(性)에 대해 모두 학ㆍ문ㆍ사ㆍ변의 공부를 이미 다하여 기어코 분명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고, 가부(可否)에 관계된 의리나 시비(是非)에 연관된 일을 논할 때에는 못과 쇠를 자르듯 더욱 분명하여 물과 진흙이 뒤섞인 것과 같은 애매모호한 태도가 없었다.사문(斯文)의 변고가 문하 내에서 나왔을 때에는 사는 곳이 가깝고 안면이 친숙한 이들의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천 리 밖의 교유가 소원한 이들의 공정한 의론에 응하여 단호하게 삿된 설을 물리쳤다.62) 이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합당함을 얻은 공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스승을 무함하고 문고(文藁)를 어지럽힌 자들의 죄를 알게 되어 시비가 크게 진정되었다. 이것으로 양을 성장시키고 음을 소멸하는 천도를 돕고, 양을 부양하고 음을 억제하는 성인의 뜻을 체득하여 저 진실하게 알고 독실하게 행하는 학문의 요지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공의 글은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에 참으로 이견이 없고, 때가 마침 그러했기 때문에 공효가 더욱 드러났다.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지극히 순박하였고,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함이 정밀하여 무릇 논하고 저술한 것들이 모두 마음으로 얻은 것에 근본을 두었으며, 글을 지음에 공교롭게 다듬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쏟아냈으니, 이른바 "말은 뜻이 통하면 될 뿐이다."63)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무함을 변박한 글은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병에 든 물을 쏟아 내는 것처럼 더욱 조리가 있고 유창한데다 시원스러워 사람의 입에 회자되었다.생각건대 공이 별 탈이 없었을 때에 나는 매번 편지를 받을 때마다 엄숙하게 읽고 높은 의기에 감복하였는데, 지금 공의 아들 신연(信淵)이 온전한 유고를 보여주고 서문을 청하니, 더욱 그 깊은 경지를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옛날과 오늘을 우러러보고 굽어보매 지하에서 공을 일으켜 우리 유가를 진작시킬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니,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삼가 서문을 쓴다. 文而不能有補於世, 雖多亦奚以爲? 吾於同門小心齋 黃公遺文有槩焉. 蓋天地間, 有陰有陽, 陽長則陰消; 陰長則陽消. 聖人以之比類於君子、小人之進退, 於《易》否、泰之卦, 兩下對說, 而惓惓致意於抑陰扶陽, 其憂患後世, 可謂至矣. 然則體聖人之意, 凡於講義理論人事之際, 能尙公去私、衛正闢邪、好善惡惡者, 皆得爲補世之文也. 公專心講學六十年, 師事艮齋 田先生之日, 殆四之三焉. 夫學之要五, 篤行居一, 學問思辨四者, 皆辨之事, 而爲知之眞, 眞知故篤行. 此孔聖宗旨, 先生之學得其旨. 語源頭, 則本性理爲主腦, 辨陽尊陰貶之心宗, 語當務, 則閑師倫以終身, 辨陽贊陰譏之嘉誄, 其餘講義論事, 莫不稱是, 皆所以公其心於衛闢好惡, 而爲憂世補世者也. 公之學, 又得先生之旨, 而幷得其公心, 於天地理氣、人物心性之名目疑似色相同異, 旣皆致學問思辨之功, 期於不明不措, 其論義係可否、事關是非者, 則尤釘斬鐵截而無和泥帶水之象矣. 及其斯文之變, 出於門墻之內也, 則舍近居親面之私情, 應千里疎知之公論, 惟斷斷邪說之闢焉. 於是以公好惡之得當, 人皆知誣師亂稿者之罪, 而是非大定, 以之贊長陽消陰之天道, 體扶陽抑陰之聖意, 而不墜夫眞知篤行之學旨. 若公之文, 謂之能補乎世者, 信無異辭, 而時適然, 故效益著焉. 公內行淳至, 存省精密, 凡所論著, 皆本心得, 而爲文不工鍊琢, 直寫己意, 所謂辭達者是也, 而辨誣之文, 尤條暢滂沛, 如破竹建瓴, 膾炙人口矣. 念公無恙日, 每得書莊讀, 而感服高義. 今公子信淵之示以全稿而請弁文也. 益悉其蘊而愈加敬焉. 俯仰今昔, 恨不得起九原振吾黨也. 爲之慨涕而謹書之. 《소심재유고》 근세 유학자 황종복(黃鐘復, 1858~1935)의 문집이다. 소심재(小心齋)는 그의 호이고, 충청도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열재 소 어른 근세 유학자 소학규(蘇學奎: 1859∼1948)로, 열재(悅齋)는 그의 호이고, 자는 정습(正習)이다.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학문의 …… 가지 널리 배우며[博學], 자세히 물으며審問, 신중히 생각하며[愼思], 밝게 분변하며[明辯], 독실하게 행하는[篤行] 것을 말한다. 《中庸集註 20章》 성리(性理)에 …… 변박하였다 홍직필ㆍ임헌회로 이어져 온 전우(田愚)의 간재학파(艮齋學派)는 성(性)을 이(理)로, 심(心)을 기(氣)로 인식한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性師心弟]', '성은 존귀하고 심은 비천하다[性尊心卑]' 등의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심이 성정을 통솔한다[心統性情]'라는 기존의 정통적 성리학설과 배치되었다. 때문에 심을 이로 파악하는 학파[心宗]들의 거센 반론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반론에 대항하여 스승 간재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며 변론한 것을 말한다. 종신토록 …… 변박하였다 간재 전우가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祭文) 가운데 기롱(譏弄)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하여 제문(祭文)을 돌려보내고 김평묵의 문인 유중교(柳重敎)와 홍재귀(洪在龜) 등으로부터 절교(絶交)의 편지를 받았을 때에 스승 간재를 도와 김평묵의 만사[嘉誄]에 숨겨진 기롱을 변박한 일을 말하는 듯하다. 사문(斯文)의 …… 물리쳤다 간재 전우 사후에 문집의 간행을 두고 오진영(吳震泳)을 중심으로 한 영남과 충청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일제의 인허를 받는 데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만을 간행하자 주장하였고, 김택술(金澤述)을 중심으로 한 호남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일제의 인허를 받아 간행하지 말라'는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문집의 간행을 반대하였을 때에 황종복은 충청에 거주하면서 호남 쪽 문인의 주장을 옹호하며 문집의 간행을 반대한 일을 말한다. 말은 …… 뿐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말은 뜻이 통하면 될 뿐이다.〔辭達而已矣.〕"라는 공자의 말로, 글은 아름다운 수사보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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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草峰) 유공(劉公) 묘명 –계사년(1953)- 草峰劉公墓銘【癸巳】 유씨는 대성이라 劉爲大姓천하에 두루 있으니 遍于天下한나라 때 크게 번창하여 漢時大昌중국의 황제가 되었지 帝于華夏태상황제의 太上皇帝40세손인 四十世孫문양공 전은 文襄公荃송나라에서 고려로 왔다네 自宋而鮮누구와 동쪽으로 건너왔는가 孰與東渡칠학사가 함께 왔네33) 七學士同거타군(거창(居昌))에 거처하였으니 居居佗郡고려 문종 때였네 時麗文宗8세를 내려와 승비는 八傳承備복야의 높은 관직에 올랐네 僕射官崇3세를 내려와 창은 三世而敞시호가 문희공으로 謚文僖公다섯 고을의 사우에서 五郡祠宇성대하게 제향을 받들고 俎豆其豊강릉을 본관으로 삼았으니 江陵爲貫공훈으로 봉해져서라네34) 以其勳封3세를 내려와 한량은 三傳漢良무장 현감에 제수되었고 授官茂長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龍蛇之亂진양(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殉節晉陽고창 검암사에서 향사(享祀)하였네 享于高敞儉巖之祠2세를 내려와 덕부는 再傳德部정읍으로 이주하니 井邑之移원종공신이었네 原從功臣4세를 내려와 학련은 四傳鶴連아들 태우를 두었는데 有子泰祐고부에서 역병을 피해 古阜避疫오곡의 초장으로 옮겼으니 梧谷草庄자손이 여기에 거처를 정했네 子孫奠宅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니 天爵有隕통정대부의 노직이었네 通政老職4세를 내려와 제윤은 四傳濟允당호를 초봉이라 지으니 草峰扁室초명은 윤갑이고 初諱允甲자방은 자라네 子房表德부친은 만진이니 考維萬鎭대를 이어 문학이 있었고 繼世文學모친은 개성 왕씨로 妣開城王부친은 소택이네 其父昭澤공은 순조 公生純祖갑자년(1804, 순조4) 9월에 태어났으니 甲子九月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 지녀 生有異質어버이 섬기는 법 알았지 知事親法학문할 나이가 되어 及其就學《효경》을 숙독하였고 熟讀孝經부친이 중병 앓을 적에는 大人沈疾근심하는 기색 드러냈지 憂色于形뒤뜰에 제단 쌓아 築壇後園하늘과 귀신에게 빌었고 祝天禱神끝내 큰 변고를 당해서는 竟當大故하늘이 무너진 듯하였네 若崩其天가슴 치고 곡하며 애도하느라 擗哭攀號얼굴이 새카맣게 되니 深墨其顔상을 견디지 못할까 염려하여 慮不勝喪도리어 자신 책망하였네 反責其身눈물 흘리며 통곡하면서 痛哭泣下예가에게 묻기를 問於禮家"삼년상의 제도는 三年之制박정하지 않은가" 其不薄耶예가가 안타까워하며 禮家憮然위로하고 답하기를 慰而答云"효성스럽구나, 그대의 말이여 孝哉汝言그러나 예는 따라야 한다네" 然禮當遵후에 모친상을 당해서도 後丁妣憂부친상과 똑같이 하였지 前喪一轍평생토록 어버이의 기일 만날 때면 平生每値考妣夫日초상을 치를 때처럼 슬퍼하여 哀同袓括살아계실 때 같이 지극히 삼갔네 致如在恪제사 받들 적에는 凡於奉祀제수(祭需) 넉넉하고 깨끗하였으니 豊潔粢牲죽은 이 섬기고 산 사람 후히 모심에 事死厚生깊이 바른 도를 얻었다고 하겠네 深得乎程늦도록 아들 보지 못해 嗣續遲遲근심으로 애태웠으니 憂心惸惸후사 없는 것이 불효35)라는 無後不孝성인의 가르침 경계할 만하네 聖訓可驚세 아들을 낳으니 三龍矯矯꿈에서 선조의 영령에 감응한 것이리라36) 夢感先靈순임금이 종신토록 부모 사모한 일37) 舜終身慕공에게서 다시 보았으니 於公復覿향리에 추천이 있어 鄕有剡薦여론이 일제히 일어났네 輿論齊發공은 걸맞은 사람 아니라며 公謂非人추천장 손으로 찢었으니 手裂狀紙자처한 바를 논하면 論其自處진실로 또한 고매한 선비로다 誠亦高士초장동에 草庄之洞정려가 내리지 않는 것은 不表宅里서울과 지방의 유사가 京鄕有司불민하여 이리 된 것이로다 不敏致此천수 누리고 돌아가시니 考終正寢회갑의 다음 해이고 周甲之翼거마산 巨馬之山효죽 기슭 孝竹之麓병좌(丙坐) 언덕이 負丙之原공의 묘역이로다 惟公隧域공의 현량한 부인은 公之良配전주 이씨로 全州之李정수의 따님이니 正壽之女부덕이 아름다웠지 婦德克美공은 비록 없었으나 公雖沒矣아들들 모두 가르치고 畢敎諸子8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後八年沒때는 임신년(1872, 고종9)이로다 玄黙涒灘공의 왼편에 합장하였는데 墓祔公左오곡으로 이장하였도다 梧谷緬遷아들 세 사람은 諸子三人권, 영, 로이니 曰權英魯세 '병' 자를 보태면 加以三秉항렬의 순서를 볼 수 있네 行序是覩공, 학, 형, 성과 孔鶴炯星창, 대 여섯 사람은 閶大六人손자 항렬로 '열' 자를 쓰니 孫行以烈이렇게 해서 순서를 볼 수 있네 如是而觀이름 위에 '재' 자를 보탠 加載名上증손이 16인인데 曾孫十六한 사람이 쌍둥이를 낳았네 一龍二佰순, 동이 연달아 태어나고 淳東連茁원, 금이 재롱을 부리고 元金繞膝관, 현이 나란히 서 있으며 冠現比立그 다음은 남, 두이고 其次南斗그 다음은 만, 철이며 其次晩喆근, 근, 숙, 문 등 瑾根淑文창대하여 다 남기지 못하네 昌大未畢아, 모든 행실의 근원인 효는 嗚呼 百行之源공이 간직한 것이니 公之所存이는 옛날에도 此在古先명철한 임금이 중시했도다 明王重焉선을 표장하여 旌淑彰善풍성을 수립했건만 樹之風聲후세는 경시하여 後世輕之치화가 밝혀지지 않았도다 治化不明후손이 한으로 여기다가 后孫爲恨묘소를 이장하면서 有事佳城열 자 비석으로 十尺貞珉공의 실정을 드러내려 하기에 表公實情학렬과 재순이 鶴烈載淳나에게 명을 지어 달라 부탁하였네 屬余爲銘초야에 있다 하여 莫曰草野말이 가볍고 사람이 못났다 하지 말라 言輕人䢇자고로 사론은 自古士論또한 중히 여길 만하도다 亦足爲重 劉爲大姓, 遍于天下。漢時大昌, 帝于華夏。太上皇帝, 四十世孫。文襄公荃, 自宋而鮮。孰與東渡? 七學士同。居居佗郡, 時麗文宗。八傳承備, 僕射官崇。三世而敞, 謚文僖公。五郡祠宇, 俎豆其豊。江陵爲貫, 以其勳封。三傳漢良, 授官茂長。龍蛇之亂, 殉節晉陽。享于高敞儉巖之祠。再傳德部, 井邑之移, 原從功臣。四傳鶴連, 有子泰祐, 古阜避疫。梧谷草庄, 子孫奠宅。天爵有隕, 通政老職。四傳濟允, 草峰扁室。初諱允甲, 子房表德。考維萬鎭, 繼世文學。妣開城王, 其父昭澤。公生純祖, 甲子九月。生有異質, 知事親法。及其就學, 熟讀《孝經》。大人沈疾, 憂色于形。築壇後園, 祝天禱神。竟當大故, 若崩其天。擗哭攀號, 深墨其顔。慮不勝喪, 反責其身。痛哭泣下, 問於禮家: "三年之制, 其不薄耶?" 禮家憮然, 慰而答云: "孝哉汝言! 然禮當遵。" 後丁妣憂, 前喪一轍。平生每値考妣夫日, 哀同袓括, 致如在恪。凡於奉祀, 豊潔粢牲。事死厚生, 深得乎程。嗣續遲遲, 憂心惸惸。無後不孝, 聖訓可驚。三龍矯矯, 夢咸*(感)先靈。舜終身慕, 於公復覿。鄕有剡薦, 輿論齊發。公謂非人, 手裂狀紙, 論其自處, 誠亦高士。草庄之洞, 不表宅里, 京鄕有司, 不敏致此。考終正寢, 周甲之翼。巨馬之山, 孝竹之麓。負丙之原, 惟公隧域。公之良配, 全州之李。正壽之女, 婦德克美。公雖沒矣, 畢敎諸子。後八年沒, 玄黓涒灘。墓祔公左, 梧谷緬遷。諸子三人, 曰權英魯。加以三秉, 行序是覩。孔、鶴、炯、星, 閶、大六人。孫行以烈, 如是而觀。加載名上, 曾孫十六。一龍二佰, 淳、東連茁。元、金繞膝, 冠、現比立。其次南、斗, 其次晩、喆。瑾、根、淑、文, 昌大未畢。嗚呼! 百行之源, 公之所存。此在古先, 明王重焉。旌淑彰善, 樹之風聲。後世輕之, 治化不明。后孫爲恨, 有事佳城。十尺貞珉, 表公實情。鶴烈、載淳, 屬余爲銘。莫曰草野, 言輕人䢇。自古士論, 亦足爲重。 송나라에서……왔네:칠학사는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許董), 송규(宋奎), 최호(崔沍),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를 말한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 유창이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으면서 올린 각종 간언(諫言)이 간신들의 모함을 입자, "진실한 직언을 용납지 않는 이 땅에서는 더 머물 수 없다" 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칠학사와 함께 1082년(문종36)에 바다를 건너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 이르렀다. 공훈으로 봉해져서라네:유창은 조선 개국공신 2등에 녹훈(錄勳)되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옥천은 강원도 우계(羽溪)의 별칭인 옥당(玉堂)에서 따온 듯한데, 강릉의 속현(屬縣)이다. 후사……불효:《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중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不孝有三 無後爲大]"라고 하였다. 꿈에서……것이리라 원문은 '夢咸先靈'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咸'을 '感'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순임금이……일:《맹자》 〈만장 상〉에 "큰 효자는 평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니, 나이 50이 되어도 부모를 사모한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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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 조공 묘명 斗北趙公墓銘 북두 조공은 斗北趙公인환이 휘이고 麟煥其諱치휴가 자일세 致休其字벽성(김제(金堤)의 옛날 이름)을 본관으로 삼았으니 貫于碧城문량(文良 조간(趙簡)의 시호)으로부터 나왔고 文良自出부친은 상렬이로다 考曰相烈모친은 누구인가 其妣維何함양 박씨와 朴籍咸陽인동 장씨이지 仁同維張부친은 가선대부에 추증되고 考贈嘉善모친은 정부인에 봉해졌으니 妣貞夫人박씨가 공을 낳았다네 朴擧公身순조 경진년(1820, 순조20)과 純祖庚辰고종 정묘년(1867, 고종4)이 高宗丁卯생몰 연표로다 生卒年表몸소 고기 잡고 나무하며 躬執漁樵몸과 마음 극진히 봉양하여 養盡體志자식의 직분 다하였네 子職克備.부모상 당해서는 內外丁艱예제를 준수하였고 遵用禮制제사도 정성 지극하였네 追遠亦至독서하고 몸 단속하였으니 劬書飭躬학문에 전심하는 서재가 藏修有室두산 북쪽에 있었다네 斗山之北세상사 관여치 않고 不關塵累시 읊으며 자적하였으니 嘯咏自適오직 풍월만이 있었도다 惟有風月젊은 유생이 배움을 청하러 오면 襟佩踵門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不倦厥誠후생에게 은혜 베풀었지 嘉惠後生의성 김씨는 義城氏金진실로 현량한 배필이라 實惟良配부덕(婦德)이 매우 아름다웠네 閨範孔懿아들은 철규요 男惟澈圭딸은 송영식과 女宋榮植김영표에게 시집갔네 金永表室달식과 일식이 達植日植두 손자이니 是曰二孫그 후손이 매우 번성하였지 其後彌蕃섭, 국, 홍, 문과 燮國洪汶봉, 경, 서, 명이 琫卿絮明손자의 아들인 증손이라네 孫之子曾'찬'을 항렬자로 삼아 以燦爲行모두 이름에 보탰으니 皆加其名나머지는 많아서 쓰지 못하노다 餘繁不登천태산 기슭 天台之麓와우 언덕에 臥牛之岡엄숙한 봉분 있다네 有肅斧堂명을 지은 자 누구인가 銘之者誰나는 실로 같은 마을 사람이라 余實同里그 말에 거짓 없도다 其言匪詭. 斗北趙公, 麟煥其諱, 致休其字。貫于碧城, 文良自出, 考曰相烈。其妣維何? 朴籍咸陽, 仁同維張。考贈嘉善, 妣貞夫人, 朴擧公身。純祖庚辰, 高宗丁卯, 生卒年表。躬執漁樵, 養盡體志, 子職克備。內外丁艱, 遵用禮制, 追遠亦至。劬書飭躬, 藏修有室, 斗山之北。不關塵累, 嘯咏自適, 惟有風月。襟佩踵門, 不倦厥誠, 嘉惠後生。義城氏金, 實惟良配, 閨範孔懿。男惟澈圭, 女宋榮植, 金永表室。達植、日植, 是曰二孫, 其後彌蕃。燮、國、洪汶, 琫、卿、絮、明, 孫之子曾。以燦爲行, 皆加其名, 餘繁不登。天台之麓, 臥牛之岡, 有肅斧堂。銘之者誰? 余實同里, 其言匪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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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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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族弟士毅 丁卯 편지에서 말한 권순명(權純命)의 일은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잃고 보름도 되기 전인 사람과 혼인을 한 것은 허물이 아니고 바로 악(惡)입니다. 하물며 김희중(金熙中)씨가 전한 바로는, 저 상중(喪中)인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권씨가 강요했다는 설이 나오게 되어서는 그 정상(情狀)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증자가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얻으면, 애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150)고 하셨으니 그 권순명의 행위를 궁구해보면 참으로 가련합니다. 대개 상중을 틈타서 처를 취하는 것은 이것은 아비가 없는 짓입니다. 또 더불어 동일한 죄를 받는다는 것은 예율(禮律)에 공통된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가 사라진 시대를 만나서 몸소 유자의 의관을 입고 친히 아비 없는 짓을 범하니, 그 죄를 생각하건대 가련한 것이 아니고 통분한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 권순명이 오진영에게 붙어서 스승의 의리를 무함하고 사인(士仁)을 구속시키고, 또 선사의 손자에게 화를 끼치는 것은, 이는 스승을 업신여기는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끝내 아비를 없이 여기는 것도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지요! 또 김종희(金鍾熙)가 이현기(李鉉璣)씨를 마주하여 이곳 후창 쪽 사람을 매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이완용과 조정을 함께 할지언정, 이 도적들과 세상을 나란히 하지 않겠다"고 전했는데, 참으로 비웃을 만합니다. 저 김종희가 진실로 이러한 큰 바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샘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스스로 매장하지 아니하며, 또 어찌하여 빨리 매국노의 발 아래로 달려가서 조정을 함께 하지 않습니까?아아! 스승을 위하여 변무(辨誣)한 사람을 미워하고, 매국노와 조정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법을 무릅쓰고 인산(因山)151) 전에 혼례를 행하여 무군(無君)의 자취를 즐겨 밟았던 것입니다.152) 대개 김종희 또한 오진영의 스승을 업신여김에 붙어서 권순명과 자취를 같이한 자입니다. 스승이란 만법(萬法)의 근원이니 이미 스승을 업신여기는 자라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이 어찌 일관(一串)된 일이 아니겠는지요! 오호라, 참혹합니다. 示權純命事備悉.其與喪父望者爲昏, 非過也乃惡也.而况金氏熙中所傳非彼之欲, 乃權之强之之說出, 而其情狀暴露矣.曾子曰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究厥所爲, 眞可哀也.蓋乘哭娶妻, 是爲無父.與受同罪, 禮律通然.當此蔑倫之世, 身被縫章, 親犯無父, 言念其罪, 非可哀也, 又可痛也.雖然彼黨震泳, 而誣師義械士仁而禍師孫者, 則其無師也久矣.終以至於無父者, 何足怪乎.又示以金鍾熙對李氏鉉璣罵此中人曰, 寧與完用同朝, 不與此賊幷世, 極可好笑.渠信有此所大願也, 何不掘地及泉而自葬, 又何不疾趣賣國賊脚下而同朝也.噫疾爲師辨誣人, 願與賣國賊同朝者, 非無君之心乎.此所以冒法行婚於因山前, 甘蹈無君之跡也.蓋熙亦黨震無師, 與命同轍者.師者萬法之原也, 旣爲無師者, 則無父無君, 豈非一串事乎.嗚呼慘矣. 만약……말라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맹씨의 사사로 임명된 양부(陽膚)가 증자에게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증자가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민심이 떠난 지 오래되었다. 만일 범법한 실정을 파악했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라고 하였다. 인산(因山) 조선 시대,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과 왕비,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이다. 이 때문에……것입니다 이 말은 "스승을 위해 변무한 사람을 미워하고 이완용과 조정에 함께하기를 원하니, 이러한 무리들이야말로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종황제 인산 전에 혼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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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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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사의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族弟士毅 丁卯 초육일에 정재(精齋) 어른153)이 와서 말하기를, "고윤거(高允擧)에게 들어보니, 고윤거가 말하기를 '권순명이가 나의 집안의 부음을 듣고도 혼기를 물리지 않고 발행(發行)154)한 날에 가서 비로소 말을 하고 또 혼례한 후에 귀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한결같이 근자에 들은 것과 서로 부합하니,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하게 된 간악한 상황이 참으로 우습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죄를 돌리는 악한 태도도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듣자니 권순명은 여전히 석농(石農)155)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이 뚜렷하게 근거가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또 권순명이 말하기를, "원재(遠齋)가 한번은 석농의 필주(筆誅)156)를 겪고 나서는 염상(鹽霜)의 풀이 되었다"고 말하니 더욱 가소롭습니다.157) 初六日靜丈來言, 聞諸高允擧, 則命也聞高訃而不退婚期, 始往言於發行之日, 又歸家於?禮之後.一與此近所聞相符, 欲巧反拙之奸狀可笑也.歸罪其父之惡態可憎也.聞權猶大言石農改師稿,鑿鑿有據.又言遠齋一經石農筆誅, 爲鹽霜之草, 尢可笑也. 정재(精齋) 어른 오병훈(吳秉勳, 1870~1964)으로 호가 정재(精齋)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간재에게 받은 서신 40여 통이 전한다. 발행(發行) 상여가 출발한 날이다. 석농(石農) 오진영이다. 필주(筆誅) 글로 하는 성토로 필삭(筆削)과 같은 뜻이다. 죄 있는 자를 실제로 죽일 권한이 없어서, 그 죄상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세상에 남기는 것을 말한다. 죄악을 글로 써서 비판하는 것이다. 또……가소롭습니다 원재는 후창 쪽의 사람인데, 권순명은 "원재가 우리를 그렇게 성토하더니 오진영이가 한번 성토하니 풀이 소금에 절여지고 서리에 시든 것과 같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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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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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사의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族弟士毅 戊寅 지난번에 보계(譜系)158)의 범례를 물어보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대보공(大輔公)에게 이미 시조라고 쓰고 또 이부공(吏部公)에게도 시조라고 쓴다면, 한 성(姓)의 계보에서 두 시조가 있게 되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이부공을 중조(中祖)라고 쓴다면 부안에 본관을 둔 김씨의 족보가 여기서 시작되는데,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마땅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이부공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시조라고 쓰고 궐초(厥初)159)를 대보공이라 쓴다면 '궐초'라는 두 글자는 살아있는 시대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원조(遠祖)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가리키는 것이 광범위하여, 그러므로 주자가 8대조까지 원조라고 칭했으니, 성씨을 얻고 관을 나눈 조상 이부공에게는 가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보공은 본디 우리 김씨를 처음 있게 한 조상이니, 시조라고 〈김씨세계(金氏世系)〉 편에 쓰고, 이부공은 모조(某祖)라고 쓰지 말고, 다만 〈부녕김씨세계(扶寧金氏世系)〉 편에 일세(一世)라고 쓰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라고 주(註)를 달면 아마 잘못이 아닐 듯한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向詢譜系書例, 竊思之, 於大輔公旣書始祖, 又書始祖於吏部公, 則一姓之系, 有兩始祖者, 固爲不可.於吏部公欲書以中祖, 則貫扶之金譜, 始於此, 而謂之中祖者, 亦恐未當.以此而書始祖於吏部公, 以厥初書於大輔公, 則厥初二字, 是指生人時代之言, 非指祖上當身之言, 亦不親貼.至於遠祖,所指泛廣, 故朱子於八代祖亦稱之, 則非可書於得姓與分貫之祖也.然則如之何而可也.大輔公固始生之祖,以始祖書之於金氏世系之篇.吏部公則不書某祖,只書一世於扶寧金氏世系之篇,而註以新羅敬順王之后, 恐不爲朱, 未知如何. 보계(譜系) 한 집안의 혈통과 역사를 적은 책이다. 궐초(厥初) 어떤 일의 맨 처음이라는 뜻이다.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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