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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 종장에게 보냄 병자년(1936) 與懶齋宗丈 丙子 지난봄에 제가 조자정이 부북첨좌에게 편지를 주어서 계화도 제사에 음성의 무리를 똑같이 나오게 한 것이 잘못됨을 논한 일에 연좌되어, 어른에게 스승을 폄하한 자를 용서했다는 죄목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로 두려워하며 날마다 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직 이 몸이 비난을 만나서 비록 어른께 충고를 한 것에 대해 근래에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다만 어른께서 실수로 잘못 들어간 것이 거울처럼 명백한데도 천박한 저를 수용하기 어려움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겨울이 되어 석동에서 알현한 기회를 얻었고, 죄를 준 이유에 대해 받들어 물었습니다. 답하시기를,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것이 무슨 말이냐? 그대에게 뿐만 아니라 조자정도 일컬었다."라고 운운하여 저는 그 과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의 과실을 알고 사과를 받았으니, 내가 어찌 감히 전에 받았던 혐의를 기억하고 마침내 충고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음성의 오진영이 인교(認敎)로 스승을 속여 대절을 없애버림에, 어른께서 문장으로 성토하고 아울러 그 당171)들을 다스려서 스승을 높이는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오진영이가 손수 쓴 증거물에 의거한 것이니, 우연히 잘못 기입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지 한 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태도를 고치고 전철을 바꾸어서 그 무리를 스승의 영정이 지척에 엄히 계시는 앞에 나오게 하고, 또 음성의 오진영과 더불어 마주보며 인사하고선 예전의 강론과 예설을 이야기하니,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선사를 망령되게 한 적에게 붙는 일에 빠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대저 이러한 실수172)는 보통의 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대의와 관련 있으니 방치하여 다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정자가 말했습니다. "학문의 도는 불선함을 알았다면 빨리 고쳐서 선을 따르는 것뿐이다."라고 했으니, 종장을 두고 비록 사람들이 스스로 이기는데 성벽이 있는 분이라 일컫더라도 지금 이 일에 대해서는, 또한 마땅히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 빨리 고쳐서 다시 옛날의 길함173)을 따르지 않습니까. 만약 "불선하다 여기지 않는다면 이전에 어른이 동참했던 오진영을 성토한 문장이 여기에 있으니 그 문장을 가지고 다시 스스로를 다스린다면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니 그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일찍이 김용승이 자주 말했던174) 현천문(玄阡文) 첨주 중에 나오는 김태희 김익용 등 여러 군자가 남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 다시 옛날처럼 잘 사귀며 지내자고 했다고 합니다. 종장(宗丈)께 우러러 질문하니, 종장께서 대답하기를 "나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이와 같다면 남을 사주한 자는 우선 제쳐두고 남에게 사주를 받은 자는 어떠한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마땅히 박인규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가 말을 조작175)했다는 것을 책망하겠다."라고 말씀하시고, 근래에 다시 현동으로 찾아가 김 씨를 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에 김 씨와 절교한 것이 어찌 그가 스승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미 절교했는데 이제 찾아가 만난 것은 김 씨가 더욱 거리낌 없이 드러내놓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하여, 간옹(艮翁)의 의견과 대립하고 그 학도들이 윤문으로 포장하는 날이 있기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과연 무슨 의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호라, 어른께서 나이가 많고 덕이 빛나는 때에 스승을 존중했던 대의가 곳곳에서 파괴되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깊이 하셔서 빨리 훗날을 잘 마무리하는 쪽으로 바꾸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澤述於昨春, 連坐於趙子貞, 與扶北僉座書, 華祀齊進陰黨之非, 至得恕貶師之自於宗丈矣.自是以後, 懔懔惴惴, 日俟誅討之至.惟其身方遭斥, 雖欲忠告宗丈, 近事之未安, 而無路可通.竊恨明鑑之失入, 而賤身之難容也.何幸作冬, 獲拜席洞, 仰質加罪之由, 則答謂, "是何言是何言? 非惟於君, 幷與謂子貞云云." 而吾知其過矣.蓋旣已知過而見謝, 則吾何敢記前嫌, 而終不思忠告乎? 昔日, 陰震之誣先師以認敎, 而蔑其大節也, 宗丈以文聲討而幷治其黨與, 以盡尊師之道.此皆據渠手筆眞贜, 而非偶誤之失入, 將終身以之, 而非一時之事也.不圖今日改度易轍, 旣進其黨於畵像儼臨咫尺之前, 又與陰震對揖, 敘舊講論禮說, 不覺自陷於妄師附賊之歸也.蓋此鑄錯, 非比尋常.而有關大義 則不宜置之, 不復理會也, 明矣.程子有言 "學問之道, 知其不善, 則速改而從善而已," 宗丈雖人所稱癖於自勝者, 今於此事, 亦應不敢自以爲善矣.然則何不速改之, 以復食舊之吉乎? 如曰"不以爲不善, 則前日尊銜同參之討震文自在, 卽以其文還可自治, 而無所容身矣" 爲之奈何?曾以金容承, 瀆告玄阡文添註中, 金泰熙金益容, 諸君子, 知見賣於人請, 復交歡, 如平昔之云.仰質則答謂, "我無是也, 若是則賣人者姑舍, 見賣者爲何等人? 我當致書朴仁圭責其造言矣"云, 而近乃往見金於玄巖何也? 蓋前之絶金, 豈非以其倍師乎? 旣絶之矣, 今之往見, 正在金益無忌憚, 顯有自成一家, 對立艮翁之意, 至有其從輪文鋪張之日, 未知此果何等義理.鳴呼, 宗丈以年高德邵之時, 尊師大義, 在在破壞, 豈非可恨? 願澄神深念, 亟改以善後則幸甚. 당여(黨與) 같은 뜻을 가지고 한편이 되는 무리를 말한다. 주착(鑄錯) 인간 세상에서 쓸데없이 정력을 낭비하며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 소종(唐昭宗) 연간에 위박 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羅紹威)가 주전충(朱全忠)과 연합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위부(魏府)의 아군(牙軍) 8천 인을 소탕하는 숙원을 풀었으나, 그 과정에서 주전충을 대접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탕진한 나머지 자신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후회하여 "6주 43현의 무쇠를 모아 줄칼 하나도 주조하지 못했다.〔合六州四十三縣鐵 不能爲此錯也〕"라고 말한 주성대착(鑄成大錯)의 고사가 전한다.《자치통감(資治通鑑) 당소종천우(唐昭宗天祐3年)》 《북몽쇄언(北夢瑣言)》 권14 여기에서 착(錯)은 곧 옥석(玉石)을 다루는 도구인 줄칼(鑢)이라는 뜻과 함께 착오(錯誤)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스스로 큰 착오를 빚었다는 뜻으로 쓴 말이었다. 그래서 이 주착(鑄錯)의 고사가 만회할 수 없는 중대한 실수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식구덕(食舊德) 옛날의 덕을 먹는다. 즉 본분에 따른 평상의 덕을 누린다는 말이다. 독고(瀆告) 독고(瀆告)는 경솔하게 고하거나 번거롭게 묻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몽괘(蒙卦) 단(彖)〉에 "처음 묻거든 고해줌은 강중하기 때문이요, 재삼 물으면 번독함이니, 번독하면 고해주지 않음은 몽을 번독하게 하기 때문이다.〔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瀆則不告 瀆蒙也〕"라고 하였다. 조언(造言) 요망한 말을 만들어 조작하는 것으로 주(周)나라에서 제정한 여덟 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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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 문중에 올림 기미년(1919) 上粉齋門中 己未 지난 가을 판곡(板谷) 유허비41) 일로 일의 단서를 여쭈었습니다만 그 말씀을 다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이 땅은 죽계(竹溪 김굉(金鋐)) 선조께서 당시 학문에 전념하시고 명석(名碩)들이 서로 종유하던 곳일 뿐만 아니라, 누세토록 노래하고 곡하고 종족이 모이던 곳42)이니, 곧 우리 김씨 일파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입니다. 문정공이 선학(仙鶴)43)에 처음 거처하고 화곡공(火谷公)44)이 개박(介朴)에 난을 피한 곳과 견줄 게 아닙니다. 똑같은 선인(先人)의 자취이고 똑같이 자손이 있는 곳인데 어떤 데는 빗돌이 찬란하여 사람의 이목을 통쾌하게 하고, 어떤 데는 모두 풀만 무성하여 지나는 사람의 탄식을 자아내니 진실로 어떻게 된 것입니까. 참으로 한숨만 나옵니다.지난 일은 탓할 수 없지만 앞으로 올 일은 가히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만약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겨 지난 자취와 옛일을 빗돌에 근거를 남겨 말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나고 세월이 흘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식하는 사람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비록 현명하고 효성스런 자손이 나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일을 하고자 해도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청하건대,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려 서둘러 대사(大事)를 도모하십시오. 昨秋, 以板谷遺墟碑事, 微稟其端, 未究其說.不審再入思議否? 蓋此地, 非惟竹溪先祖當日藏修名碩相從之所, 乃累世歌哭聚族之處, 則吾金一派桑梓故里.有非文貞公仙鶴初居, 火谷公介朴避亂之比也.同是先跡, 均有子孫之地, 或貞珉煥然快人耳目, 或鞠爲茂草行路齎咨, 是誠何以? 良可一吁.往旣勿諫, 來者可追.今若視爲無事, 不使往蹟故事, 憑諸片石之堪語, 則世經年移, 幷與其指點咨嗟者而無矣.後雖有賢孝子孫者出, 欲擧今日之未遑, 奚從而施之哉! 伏乞深思永慮, 亟圖大事焉. 판곡(板谷) 유허비 죽계(竹溪) 김횡(金鋐)의 유허비로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이 지었다. 판곡(板谷)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부안 김씨 직장공파의 세거지이다. 노래하고……곳 진(晉) 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에는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는 여기에서 국빈(國賓)과 종족을 모아 즐길 것이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선학(仙鶴) 선은(仙隱)의 옛 지명이다. 화곡공(火谷公) 김명(金銘)이다. 직장공파 매죽공(梅竹公) 김종(金宗)의 손자로 죽계공(竹溪公) 김굉(金鋐)의 중형(仲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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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종중에 보냄 무인년(1938) 與星齋宗中 戊寅 제가 듣건대, 지난번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34) 일로, 일이 분란이 많아 비석의 글자를 깎아내는 변고까지 있었다하여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고가 우리 종파 사람에게서 나왔다니 마음이 몹시 편치 않음이 또 어떻겠습니까. 곧 당사자가 사죄하고 또 종중에서 처벌하였다하니 그 일은 이미 잘 처리 된 것으로 압니다. 요사이 또 듣건대, 한 쪽 의론만으로 뒷면의 음기(陰記)를 갈아 없애려고 한다던데 과연 이런 말이 있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문중 일의 분란이 그칠 날이 없을까 두렵습니다.제가 일전에 여러 번 비문(碑文)의 일로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은 칭찬과 선양이 온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지 비단 칭호(稱號)에만 있을 뿐만이 아니니, 이 글의 칭양(稱揚)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을 받을 때 '선생'이라 불러주길 청하여, 받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이미 새겨서 세웠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글을 사양하고 쓰지 않으려 해도, 그 글을 지은 이가 세상을 떠났으니 일이 심히 의미가 없고, 글 또한 보낼만한 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등의 부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조상을 폄훼하고 선사를 높인다는 배척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아, 조상을 폄훼하는 것은 큰 악행입니다. 천하에 어찌 조상을 폄훼하는 악행을 하고서 능히 그 선사를 높이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제가 조상을 폄훼했다고 하는 것도 원래 그 실정이 아니며, 제가 선사를 높였다고 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종중의 조치가 마땅치 않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하였고, 위로 선조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니 실지로는 선조를 높인 일이지 선사를 높인 일이 아닙니다.만약 이 문장이 연재(淵齋)35)나 면암(勉菴)36), 송사(松沙)37), 약재(約齋)38) 같은 제현의 손에서 나왔을지라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의론을 세울 것입니다. 어찌 구구하게 저의 선사께서 지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좋구나, 고인(古人)의 말이여! 그 말에 이르기를 "천하는 본래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이 스스로 어지럽힌다."39)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앞면을 다시 새긴 것도 이미 옳지 않은데, 지금 또 사리를 궁구하지도, 사람들의 비난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뒷면을 갈아 없애는 것은 또한 안 될 일입니다. 어찌 모두 아무 일이 없는데 스스로 어지럽혀서 분란을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제가 오늘 첨존께 아뢰는 것은 전날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개 지켜온 견해가 전후로 한결같이 이와 같아 단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종중 일에 대한 걱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말씀 드리니, 실정이 아닌 배척과 외부의 비방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첨존(僉尊)께서는 천리의 자연스런 이치를 따라서 한 쪽의 부당한 논의를 무마하시어, 크게 그릇된 일을 하여40) 외부의 모멸을 받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竊聞向以仙隱洞遺墟碑事, 事多紛紜, 至有鑿碑之變, 萬萬可駭.而變出鄙派中人, 心切不安, 又如何哉? 旋聞當人謝罪, 而自宗中處罰, 則知其事已得當矣.近又聞一邊議論, 欲磨去後面陰記云, 未知果有此說否? 若爾則竊恐宗事之紛紜, 無有已時也.區區前此累以碑事與諸宗辨者.有曰:"文貴稱揚得當.不徒在稱號之間.而此文之稱揚, 則蔑以加矣.", 有曰:"受文時, 請稱先生而得之則善矣.念不及此, 旣已刻立, 則無辭可說矣.", 有曰:"雖欲退文不用, 旣不及作文家在世, 則事甚無謂, 文亦無可送處矣."之類, 不勝其多, 而至被貶祖尊師之斥矣.嗚呼! 貶祖大惡也.天下安有有貶祖之惡而能尊其師之理乎? 謂我爲貶祖者, 元非其情, 謂我爲尊師者, 亦非其實.特以恐宗中之擧措無當, 致人譏議, 上累祖先而然, 則實亦尊祖非尊師也.假使此文出於淵齋、勉菴、松沙、約齋諸賢之手, 亦當如是立論.豈區區爲鄙先師所作而然哉? 善乎, 古人之言! 曰:"天下本無事, 庸人自撓之." 向之改刻前面, 已是不可, 今又不究事理, 不恤人譏, 而爲磨去後面之尤不可者.則豈非皆無事自撓以致紛紜者乎? 澤述今日爲僉尊仰告者, 不過前日之與諸宗辨者.蓋所執之見, 前後一直如是, 斷無他意矣.宗事之憂, 不能自已, 有此瀝誠之言, 非情之斥.外來之謗, 有不可顧者.伏願僉尊循天理自在之理, 鎭一邊未當之論, 無至鑄大錯受外侮之地, 千萬幸甚.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의 유허비이다. ?간재집(艮齋集)? 권18에 「지포김문정공유허비음기(止浦金文貞公遺墟碑陰記)」로 실려있다. 간재가 이 비문을 지을 당시 '선생'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고 지은 것이 간재가 세상을 떠난 후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 좨주(祭酒)에 기용된 뒤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상소 10조를 바치며 진언하였다가, 다음날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 대전 회덕으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고,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문신이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1852~1916). 자는 회경(晦卿)‧영중(英仲), 호는 난곡(蘭谷)‧약재(約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흠모하여, 19살 때부터는 회덕(懷德) 남쪽, 우암이 기거했던 소재동에 자주 방문하였다. 저술로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천하는……어지럽힌다 당 나라 육상(陸象)이 한 말이다. 크게……하여 당 소종(唐昭宗) 연간에 위박 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羅紹威)가 주전충(朱全忠)과 연합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위부(魏府)의 아군(牙軍) 8천 인을 소탕하는 숙원을 풀었으나, 그 과정에서 주전충을 대접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탕진한 나머지 자신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후회하여 "6주 43현의 무쇠를 모아 줄칼 하나도 주조하지 못했다.[合六州四十三縣鐵, 不能爲此錯也.]"라고 말한 주성대착(鑄成大錯)의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唐昭宗天祐3年》 《北夢瑣言 卷14》 여기에서 착(錯)은 곧 옥석(玉石)을 다루는 도구인 줄칼[鑢]이라는 뜻과 함께 착오(錯誤)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나소위가 스스로 큰 착오를 빚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 주착(鑄錯)의 고사가 만회할 수 없는 중대한 실수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증전도인(贈錢道人)〉 시에 이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에는 한번 뜻이 쾌했어도, 일이 지난 뒤엔 부끄러움이 남는 법. 모르겠네 몇 주의 무쇠를 모아, 이 하나의 착오를 빚어냈는지.[當時一快意, 事過有餘怍, 不知幾州鐵, 鑄此一大錯.]"라고 표현한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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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유학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69세) 고문서-증빙류-호적 丙子 李箕斗 丙子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76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76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의 기재는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69세(무진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유원, 조가 국진, 증조가 규명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65세(임신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승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규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28세(기유생)이다. 며느리는 조씨인데, 나이가 33세(갑진생)이며 본관이 한양이다. 천구질에는 비 1명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곧 둑덕(29세)이다. 왼쪽 끝에는 보성군수의 서압(署押)이 있으며, 중앙에는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그 위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썼으며 또 관인을 찍었다. 끝의 병자식(丙子式)은 병자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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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箕斗 年五十六戊寅 本星州 父 學生 有源 祖 學生 國鎭 曾祖 學生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李氏 齡六十二壬申 籍全義 父 學生 光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圭容 年二十五己酉 婦 趙氏 齡三十甲辰賤口秩 婢 㪲德 年二十六癸酉式 行郡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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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유학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56세) 고문서-증빙류-호적 癸酉 行郡守 李箕斗 癸酉 郡守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行郡守[押]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73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73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의 기재는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56세(무인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유원, 조가 국진, 증조가 규명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62세(임신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광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규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25세(기유생)이다. 며느리는 조씨이며, 나이가 30세(갑진생)이다. 천구질에는 비 1명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곧 둑덕(26세)이다. 왼쪽 끝에는 행군수의 서압(署押)이 있으며, 중앙 하단에는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비껴서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주협개인 위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썼으며 바로 위에 관인을 찍었다. 끝의 계유식(癸酉式)은 계유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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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箕斗 年五十三戊寅 本星州 父 學生 有源 祖 學生 國鎭 曾祖 學生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李氏 齡五十八甲戌 籍全義 父 學生 光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甲容 年二十二己酉 婦 趙氏 齡二十七甲辰賤口秩 婢 㪲德 年二十三庚午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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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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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부군 제단비 參奉府君祭壇碑 부안군 석동산은 우리 부녕 김씨의 선영이다. 장사랑 군자감 참봉과 유인 청주 김씨를 함께 장사지낸 묘소는 직장공의 묘소 왼쪽 아래 계좌(癸坐)에 있는데, 그 봉분이 누구 것인지 분명하지 않을까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낸다. 부군의 휘는 정길(鼎吉), 자는 응구(應九)로, 죽계(竹溪) 선생 휘 굉(鋐)의 큰 아들이다. 세계(世系)는 동강 죽계공 묘갈에 모두 적혀 있으며, 모친은 병절교위 시산 허씨 강(剛)의 따님으로 만력 병자년(1576) 5월 26일 태어났다.부군은 자질이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아우와의 우애가 대단히 돈독하였다. 성리의 학문에 부지런하였으며 학행으로 군자감 참봉에 천거, 제수되었다.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청의 병사들이 곧바로 한양을 침범하자, 임금이 남한산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포위를 당하여 바야흐로 위급할 때 교서가 포위 가운데서 나왔는데, 문사가 대단히 뼈에 사무치게 간절하였다. 부군은 변고를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군이 모욕을 받으면 신하는 죽는 것이 분수이다."라고 하고서, 사우(士友) 및 종친들과 의병을 규합하여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을 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옥과 현감 이흥발(李興浡) 공, 대동 찰방 이기발(李起浡) 공, 순창 군수 최온(崔蘊) 공,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공, 전 찰방 유즙(柳楫) 공 등과 여산에 모의청을 설립하여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부군은 마침내 모은 병사와 군량미를 이끌고 다섯 공에게 찾아가 합류하였다. 이에 전략을 세워 청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가 이뤄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췄다. 이 일은 《호남창의록》에 실려 있다.인조 을유년(1645) 8월 26일 돌아가시니, 향년 73살이었다. 장남은 필(泌)이다. 차남은 숙(潚)으로,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선대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호는 지와(止窩)이다. 막내는 택(澤)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다. 호는 포정(浦亭)이다. 딸은 송연(宋淵)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세열(世烈), 세석(世奭), 세광(世光), 세융(世隆), 세설(世卨), 세열(世說), 세량(世亮), 세기(世基) 등으로 모두 통덕랑이다.오호라! 부군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고 태어나 올바른 가학을 배워 부지런히 수신하여 성실함으로 이루었다. 그러므로 실상과 이름이 드러나서 구고에서 우는 학의 울음이 높은 하늘에 들렸으니,496) 이에 부군의 덕과 학문을 알 수 있다. 북쪽 오랑캐의 난리 때 백수의 노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군부의 위급함에 구원하러 달려갔다가 강화가 맺어진 뒤에 자취를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굳센 충절과 엄격한 의리는 천추의 후대에도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시와 예를 전하여 지와공은 조상의 뜻과 일을 계승하였으며 포정공은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세상에 드러냈으니,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준 법도497)도 또한 볼 수 있다. 학문의 여사(餘事)인 문장에 대해서도 장인 동호공(東湖公)에 대한 만사의 글에서도 또한 그 조금을 알 수 있다.498) 묘소에 비석이 없으니, 다만 행한 업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무덤인지 의심을 면키 어려웠다. 이는 비록 두어 대 후에 빈한하여 옮겨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흥성과 쇠퇴, 현달함과 은거함은 또한 운수가 정해져 있어서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윽이 후손으로서 감개함을 견딜 수 없다. 삼가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제단의 비석을 다시 세우는 날을 기다려 음각으로 새긴다.임신년 중추절에 10대손 택술은 삼가 쓴다. 維扶安郡席洞山, 我扶寧金氏世阡也.有將仕郞軍資監參奉, 孺人淸州金氏合窆之墓, 在直長公墓左下癸坐, 而有疑其封, 築壇立碑, 歲一祀之.府君諱鼎吉字應九, 竹溪先生諱鋐長子.世系具在同岡竹溪公墓碣, 妣詩11)山許氏秉節校尉剛女, 生于萬曆丙子五月二十六日.天資卓爾, 早襲庭訓, 事親至孝, 友弟彌篤, 勤於性理之學, 學行薦除軍資監參奉.崇禎丙子淸兵直犯京師, 上幸南漢, 被圍方急, 敎書自圍中出, 辭甚痛切.府君聞變, 慨然曰, "主辱臣死, 分也." 與士友及宗族, 糾合義兵, 收聚穀粮, 爲勤王策.適玉果縣監李公興浡、大同察訪李公起浡、渟昌郡守崔公蘊、前翰林梁公曼容、前察訪柳公楫, 設募義廳于礪山, 傳檄列邑.府君遂以所聚兵粮, 往會同五公, 謀畵方略, 進至淸州, 聞和成痛哭而歸, 杜門晦迹, 事在《湖南倡義錄》.以仁廟乙酉八月二十六日卒, 享年七十有三.長男泌, 次潚, 孝友爲任, 克纘先業, 號止窩.季澤, 文科禮曹正郞, 號浦亭.女, 宋淵.孫, 世烈、世奭、世光、世隆、世卨、世說、世亮、世基, 皆通德郞.嗚呼! 府君禀天資之美, 受家學之正, 修之勤而成之實, 故實與名彰, 以至臯鶴之聲, 聞于九天, 則斯可以知德學矣.北胡之亂, 白首起義, 赴君父之急.和成之後, 晦跡不仕, 則忠之壯義之嚴, 足以有辭千秋矣.詩禮有傳, 得止窩公之繼述志事 ; 浦亭公之立揚顯親, 則貽謨之法, 亦可見矣.至於餘事文章, 則觀於挽內舅東湘許公之辭, 又知一班矣.墓闕顯刻, 不惟行業之不昭示, 幷與斧堂之不免疑, 則是雖數世之後貧單遷徙之故.然盛衰顯晦, 亦有數存焉, 非人力之致歟.竊不勝後承之慨恨也已.謹識如右, 俾俟壇碑改竪日, 鐫之于陰.歲在壬申仲秋日, 十世孫澤述謹書. 구고에서……들렸으니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는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 학덕이 임금에게 알려진다는 말이다. 자손에게……법도 '이모(貽謨)'는 이모(貽謀)와 같은 말로 조상이 자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남겨 주는 것을 뜻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豊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조금을 알 수 있다 《진서(晉書)》 권80 〈왕헌지열전(王獻之列傳)〉에 "대롱을 통해 표범을 보기 때문에, 때로 표범의 무늬만을 본다.〔管中窺豹 時見一班〕"라는 말이 나온다. 詩는 時의 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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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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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형태가 거처하는 집의 상량문【계유년(1933)】 次子烔泰居室上樑文【癸酉】 동우의 제도는 선왕에서 내려왔으니 棟宇制自先王어찌 둥지에 거처하고 굴속에 살까. 豈可巢居而穴處등급별 위엄은 사람 일에서 정해지니 等威定於人事달팽이 집이나 대궐 누각과 다르다네. 有異蝸廬與龍樓위나라 형(荊)이 맑은 마음으로 知衛子之淸心집에 잘 거처함을 알겠고,481) 善居乎室하후는 검소한 덕으로 見夏后之儉德허름하게 그 궁실을 지은 것을 보았노라.482) 卑作其宮부귀한 처지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在貴富而猶然빈천하게 살면서 어찌 화려함을 말하랴. 處貧賤而奚道후창거사 김택술은 後滄居士金澤述포의의 곤궁한 선비로 布衣寒士콩잎이나 먹는 가난한 사내라네. 藿食窶夫쑥대로 문을 내고 대나무로 문을 만드니 蓬戶蓽門비루한 마을에서 근심을 견디기 어려우며, 難堪憂於陋巷가지나 잎 같은 손자와 자손이 枝孫葉子외람되이 여러 아들들에게 많다네. 猥多口於諸房이미 지금 재산까지 떨어졌으니 旣乏現財장공예483)처럼 함께 살림할 수 없고, 計無公藝之共産각자 자신 힘대로 먹고 사니 各食其力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484)할 형편이라네. 勢將秦人之出分이에 둘째 아들 형태가 乃爲次子烔泰창동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築室于滄東之里능력이 넘쳐서가 아니라 非曰能之어쩔 수 없어서라네. 不得已也마을 안 작은 땅을 얻어 터로 삼았는데 得村中隙地爲址앞이 트이고 시원하니 氣像開朗마치 기다리는 듯하였어라. 有待如焉집안의 재주 좋은 이를 빌려 목공으로 삼으니 借門內巧手作工마음이 서로 기뻐하여 情意歡洽흠 잡을 데가 없었도다. 無間然矣목재는 대부분 선대의 산에서 나왔기에 材多出於先麓많은 돈을 쓰지 않았으며, 不費夥金사방 이웃들이 서로 일을 도와준 덕에 役相助於四隣더욱 힘을 줄일 수 있었도다. 更覺省力융희 27년 계유년 以隆熙二十七年癸酉10월 27일 갑인일 미시에 들보를 올리는데, 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겨울인데도 따뜻하고 온화하니 冬暖而若和煦아니 이것은 천지가 도운 것이 아닌가. 莫是天地之眷扶일이 다급한데도 제 때에 마치니 事遽而趁定期마치 신명이 도운 듯하여라. 如或神明之助佑이른바 얼마 걸리지 않아 완성한 것이니 是所謂成之不日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구나. 亦可曰事非偶然누가 세 가(架)가485)의 집을 비루하다 하는가 誰言三架之陋卑거처하는 곳이 무릎이나 들어갈까 하지만 所居不過容膝이미 장생의 경계하는 말을 들었네. 已聞張生之箴語어찌 다만 집이 크고 화려해야만 豈獨巨寢之輪奐이에 친족을 모으기를 乃得可以聚族반드시 진의 장로(張老)의 축송하는 말과 같으랴.486) 必如晉老之頌辭돌아보건대 곤궁한 인생길에 남은 생애는 顧窮途餘生자신의 분수를 헤아려 알맞게 처신하여야 하는데, 度身分而苟合더구나 망한 나라의 유민으로 况亡國遺庶의리를 헤아려보면 마음이 편치 않도다. 揆義理而未安이에 밭 갈고 길쌈하면서 爰處焉耕織다만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고 사누나. 但得喫著之不空이렇게 살면서 효도하고 자애로우며 是居而孝慈오직 윤리가 실추되지 않길 바라노라. 惟望倫常之勿墜길일을 점쳐서 吉日玆筮하찮은 소망을 써 보노라. 微願庸書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소중한 학문 연원은 회옹에서 나왔어라. 珍重淵源有晦翁인한 마을을 골라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487) 擇不處仁焉得智창동488)의 마을 이름은 뜻이 무궁하여라. 滄東里號意無窮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아득히 〈주남〉을 생각하며 〈갈담〉489)을 읊조리네. 遙想周南咏葛覃묻노니 집안에 무엇이 있는가 借問家中何所有뜰에 가득한 방초는 모두 의남490)이라네. 滿庭芳草總宜男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석동산 경치는 눈앞에 희미하네. 席洞山光望裏迷해마다 서쪽으로 성묘 가는 길에 歲歲西歸瞻掃路서리 밟고 슬퍼하며491) 글을 짓지 못하네. 履霜感愴不堪題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사방의 뭇 별 북극성을 향하누나. 四面群星拱北極한 집안의 정치492)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爲政一家當若斯요컨대 핵심은 내 덕을 쓰는데 있도다. 要知樞紐用吾德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상제가 밝게 임하니 누군들 우러르지 않으랴. 上帝明臨孰不仰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하여 마음을 둘로 하지 않을지니 夙夜孜孜毋貳心인을 실천함은 참으로 그 방심을 구하는데 있도다. 爲仁亶在求其放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곤궁하여 아래에 있으면 마땅히 들에서 밭 갈아야 하네. 窮而在下宜耕野만약 힘써 농사짓고 다른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苟能力穡無他求서자의 고풍493)이 어찌 다른 것이랴. 徐子高風豈別者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삼재494)가 들어오지 않으며 三災不入온갖 상서로움이 점차로 이르기를. 百祥漸臻자손이 시와 예를 익혀 변하지 않으며 子孫服詩禮而不渝짐승으로 변하는 새로운 풍조로 돌아가지 않기를. 無歸新風化獸之類가도와 세운이 모두 화태하여 家道與世運而俱泰높은 대문에 네 마리 수레495)를 볼 날이 있기를. 庶見高門容駟之時 棟宇制自先王, 豈可巢居而穴處.等威定於人事, 有異蝸廬與龍樓.知衛子之淸心, 善居乎室.見夏后之儉德, 卑作其宮.在貴富而猶然, 處貧賤而奚道.後滄居士金澤述, 布衣寒士, 藿食窶夫.蓬戶蓽門, 難堪憂於陋巷.枝孫葉子, 猥多口於諸房.旣乏現財, 計無公藝之共産.各食其力, 勢將秦人之出分.乃爲次子烔泰, 築室于滄東之里, 非曰能之, 不得已也.得村中隙地爲址, 氣像開朗, 有待如焉.借門內巧手作工, 情意歡洽, 無間然矣.材多出於先麓, 不費夥金.役相助於四隣, 更覺省力.以隆熙二十七年癸酉, 十月二十七日甲寅未時上樑.冬暖而若和煦, 莫是天地之眷扶.事遽而趁定期, 如或神明之助佑.是所謂成之不日.亦可曰事非偶然, 誰言三架之陋卑.所居不過容膝, 已聞張生之箴語.豈獨巨寢之輪奐, 乃得可以聚族, 必如晉老之頌辭.顧窮途餘生, 度身分而苟合.况亡國遺庶, 揆義理而未安.爰處焉耕織, 但得喫著之不空.是居而孝慈, 惟望倫常之勿墜.吉日玆筮, 微願庸書.抛樑東, 珍重淵源有晦翁.擇不處仁焉得智, 滄東里號意無窮.抛樑南, 遙想〈周南〉咏〈葛覃〉.借問家中何所有, 滿庭芳草總宜男.抛樑西, 席洞山光望裏迷.歲歲西歸瞻掃路, 履霜感愴不堪題.抛樑北, 四面群星拱北極.爲政一家當若斯, 要知樞紐用吾德.抛樑上, 上帝明臨孰不仰.夙夜孜孜毋貳心, 爲仁亶在求其放.抛樑下, 窮而在下宜耕野.苟能力穡無他求, 徐子高風豈別者.伏願上樑之後, 三災不入, 百祥漸臻.子孫服詩禮而不渝, 無歸新風化獸之類.家道與世運而俱泰, 庶見高門容駟之時. 위나라……알겠고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하후는……보았노라 공자가 말하기를,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 음식은 박하게 먹으면서 귀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효성을 극진히 하며,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 제사에 착용하는 불과 면류관은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며, 거처하는 궁실은 나직하게 지어 살면서 치수 사업에는 힘을 다하였으니, 우 임금은 내가 흠잡을 수 없도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 하였다. 《論語 泰伯》 장공예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진나라 사람들처럼 분가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의하면 "진나라 사람들은, 부유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재산을 나눠 주어 가정을 독립시키고, 가난한 집 자식은 장성하면 처가살이를 나간다.〔秦人家富子壯則出分, 家貧子壯則出贅.〕"라고 하였다. 세 가(架) 일반적인 집은 다섯 가(架)로 이루어지는데, 세 가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집이다. 다섯 가에 대해서는 앞의 〈전주최씨종회각상량문(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 참조. 어찌……같으랴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무(趙武)가 저택을 준공했을 때 다른 대부들이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는데,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규모가 큼이여. 아름답도다, 꾸밈이 화려함이여. 제사(祭祀) 때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는 여기에서 곡읍(哭泣)을 하고, 연례(宴禮)에는 여기에 국빈(國賓)과 종족(宗族)을 모으게 될 것이다."라고 송축(頌祝)의 말을 하자, 주인인 조무가 답사(答辭)에서 "무(武)가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곡(哭)하고, 여기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서 연례를 할 수 있다면, 이는 내 목숨을 온전히 누린 다음 선대부(先大夫)가 묻힌 구원(九原)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북면(北面)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군자(君子)가 이 일을 두고 평론하기를 "장로는 송축하는 말을 잘했고, 조무는 기도하는 말을 잘했다.[善頌善禱]"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인한……하리오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후(仁厚)해야 좋으니, 잘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창동(滄東) 동쪽의 창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주자는 만년에 창주정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그 외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갈담(葛覃)〉 《시경》의 편명으로, 주 문왕(周文王)의 비 태사(太姒)가 신분이 귀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며 시집을 간 뒤에도 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내용이다. 의남 풀이름으로, 훤초(萱草)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서리 밟고 슬퍼하며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한 집안의 정치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공자가 "《서경》에 효(孝)에 대해 말하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그것을 정치하는 데에 미루어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꼭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는가.〔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 서자의 고풍 우암은 주자는 항상 서유자(徐孺子)의 고풍을 칭송하였다고 하였는데, 유자(孺子)는 서치(徐穉, 97~168) 자이다. 후한 예장(豫章)의 학자로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직접 농사지으며 공손 검약하여 고사(高士)로 불렸다. 삼재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를 가리킨다. 높은……수레 한나라 우공(于公)이 옥사(獄事)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였으므로 사람들에 의해 생사(生祠)가 세워지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집을 수리하면서 "내가 음덕을 많이 쌓은 만큼 우리 자손 중에 고관이 많이 나올 테니 좁은 문을 개조해서 사마(駟馬)의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야 하겠다."라고 하고는 대문을 높이 세웠다. 그런데 과연 그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이 되고 나서 그 뒤를 이어서 대대로 자손들이 봉후(封侯)된 '우공고문(于公高門)'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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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이건 상량문【갑신년(1944)】 以承齋移建上梁文【甲申】 삼가 생각하건대 묘부직인 총인은 《주례》에 실려 있으니463) 竊以載冡人墓夫職於周禮그 법은 선왕에서 나왔으며, 法規自先王하늘의 곧은 우레는 후회가 없다는 상은 《주역》에서 취하였으니464) 取天貞雷悔象於羲經동우가 이전 제도를 회복하였어라. 棟宇復前制치제465)에 어찌 장소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致齊豈無所也공사를 마치니 어찌 그리 다행한가. 訖功何其幸歟생각건대 우리 김씨의 창동 이승재는 惟我金氏之滄東以承齋위치가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位置則在一偏지와공과 통덕랑 때문에 충의위를 배향하니466) 均爲止窩公通德配忠義병사467)의 제도를 따랐건만, 祖之丙舍制度끝내 그런대로 아름답지 않으니 終不苟美실로 장계파와 관계된 일이라네.468) 實繫長季派두세 군의 반인 二三郡半백 가구의 공의(公議)가 일었어라. 百戶之公存창설은 옛날 병인년 겨울이었는데 創造在昔丙寅冬지금 갑신년까지 유지하였더니, 維持到今甲申歲어찌 세월이 흘러 변고가 발생하여 夫何時移事變갑자기 일겁의 상전벽해를 만나게 되었구나. 遽遭一劫之滄桑이는 실로 점괘에 어긋나 성인도 알 수 없는 것으로 是實筮違聖迷다섯 가지 근심469) 중에 물길이 됨은 헤아리기 어려웠어라. 難料五患之溝道기산으로 가서 이주하였듯470) 之岐山而遷徙어쩔 수 없으니, 不得已焉초구471)로 정하여 경영하니 卜楚丘而經營참으로 끝을 잘 마무리하였도다. 允臧終矣그 땅도 또한 이 산 안에 있으며 其地亦此山之內그 공은 즉 얼마 걸리지 않았어라. 厥功卽不日之間기와와 재목은 아직까지 온전하니 瓦材尙全비용은 절약되어 비록 이전 장부를 그대로 쓰는 것과 같지만,472) 費省雖同長府之舊貫정밀한 물건이 대단히 귀하니 物精極貴일이 커서 종묘를 새로 짓는 것에 뒤지지 않네. 役鉅不下悶宮之新成힘을 다 쏟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데 力殫而心勞시국이 어렵고 가문의 운이 막혔다고 말하지 마라. 莫謂時局艱門運否의견이 일치되어 일이 완성되니 議協而事濟또한 하늘의 신령과 선조의 영혼이 도왔도다. 亦見天神佑先靈扶지난번 갑신년 술월(戌月) 粤以涒灘閹茂之年月미일(未日) 오시(午時)에, 協洽敦牂之日時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리니 竪柱上梁허공에 무지개가 걸리고 용이 날아오르는 듯 虹掛龍騰於半空이십 년 만에 다시 장관을 보며, 再覩壯觀於卄載백 척 높이로 새가 솟아오르고 꿩이 날 듯473) 鳥革翬飛於百尺같은 재목에 빛이 남을 거듭 보네. 重瞻生色於一材이에 여섯 아랑위 노래를 외쳐서 肆颺六偉之章여러 장인의 흥을 돋우노라. 庸助衆匠之興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정토의 동쪽에 가을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는구나. 秋月圓升淨土東물가 가까운 누대에 먼저 달빛 비추니 近水樓臺先得照이전처럼 밤바다 창동에도 비춰주기리라. 依前夜夜入滄東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높디높은 두승산은 저 남쪽에 깎아지른 듯하네. 斗嶽嶄嶄截彼南인자는 산을 좋아하였는데 어찌 수를 누리지 못하였나 仁者樂山那無壽남쪽의 노인성474)을 밤에 바라볼 필요가 없겠구나. 不須夜看老星南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성인의 경전은 그 당시 서쪽 중국에서 왔다네. 聖經當日自中西제사를 받든다는 밝은 가르침475) 분명한데 以承祭祀明明訓어찌 감히 동쪽으로 와서 다시 서쪽으로 가겠는가. 豈敢來東復倒西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만 리의 이내와 먼지 멀리 북쪽에서 피어나는구나. 萬里烟塵遠直北천에 하나 황하가 맑을 때가 있겠지만476) 千一河淸行有期시인이 이미 〈북풍〉477)을 지었다네. 詩人且己賦風北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모름지기 오묘한 도가 형이상임을 알아야 하네. 要知道妙形而上천도를 깨닫는 것은 참으로 인륜을 배움에 있나니 達天亶在學人倫자제는 효성과 공경에 마음을 두어야 하리. 子弟存心孝悌上어영차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넘실거리는 긴 시내가 그 아래를 감싸도네. 長川滾滾繞其下복의 근원 쉬지 않아 또한 이와 같으니 福源不息亦如斯지란과 옥수478)는 연이어 나와 슬하에 가득하리라. 蘭玉承承滿膝下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기둥과 서까래가 더욱 견고하고 楹桶彌堅향기로운 제수는 더욱 정결하길. 苾芬益潔위씨 정원의 화수처럼 韋園花樹장차 천백 대 영원히 전하기를 기약하며,479) 將期千百世永傳주나라 구릉의 무성한 쑥마냥480) 周陵菁莪열두어 무리가 연달아 배출됨을 볼 것이라. 庶見十數輩連出 竊以載冡人墓夫職於《周禮》, 法規自先王.取天貞雷悔象於《羲經》, 棟宇復前制.致齊豈無所也, 訖功何其幸歟.惟我金氏之滄東以承齋, 位置則在一偏.均爲止窩公、通德配忠義, 祖之丙舍制度.終不苟美, 實繫長季派.二三郡半, 百戶之公存.創造在昔丙寅冬, 維持到今甲申歲.夫何時移事變, 遽遭一劫之滄桑.是實筮違聖迷, 難料五患之溝道.之岐山而遷徙, 不得已焉.卜楚丘而經營, 允臧終矣.其地亦此山之內, 厥功卽不日之間.瓦材尙全, 費省雖同長府之舊貫.物精極貴, 役鉅不下悶宮之新成.力殫而心勞, 莫謂時局艱門運否.議協而事濟, 亦見天神佑先靈扶.粤以涒灘閹茂之年月, 協洽敦牂之日時.竪柱上梁, 虹掛龍騰於半空, 再覩壯觀於卄載.鳥革翬飛於百尺, 重瞻生色於一材.肆颺六偉之章, 庸助衆匠之興.兒郞偉抛樑東, 秋月圓升淨土東.近水樓臺先得照, 依前夜夜入滄東.兒郞偉抛樑南, 斗嶽嶄嶄截彼南.仁者樂山那無壽, 不須夜看老星南.兒郞偉抛樑西, 聖經當日自中西.以承祭祀明明訓, 豈敢來東復倒西.兒郞偉抛樑北, 萬里烟塵遠直北.千一河淸行有期, 詩人且己賦〈風北〉.兒郞偉抛樑上, 要知道妙形而上.達天亶在學人倫, 子弟存心孝悌上.兒郞偉抛樑下, 長川滾滾繞其下.福源不息亦如斯, 蘭玉承承滿膝下.伏願上樑之後, 楹桶彌堅, 苾芬益潔.韋園花樹, 將期千百世永傳.周陵菁莪, 庶見十數輩連出. 묘부직인……있으니 《주레(周禮)》 〈춘관(春官) · 총인(冢人)〉에 실려 있다. 하늘의……취하였으니 〈대장(大壯)〉괘 효사의 전체적인 내용을 아울러서 표현한 것이다. 〈대장〉은 상량문에서 천둥소리처럼 웅장한 건물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치재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재(散齋)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하면서 밖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고, 다음에 치재(致齋)하여 목욕재계하고 오직 제사만 생각한다. 지와공과…배향하니 지와공은 후창의 9대조인 숙(潚)의 호이다. 후창의 10대조인 정길(鼎吉)의 차자인 숙과 막내인 택(澤)의 자제들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충의위는 후창의 7대조인 욱(奧)을 가리킨다. 병사(丙舍) 묘지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실로……일이라네 정길의 차자인 지와공 계열만 배향하고 장자(長子)와 계자(季子) 계열은 배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가지 근심 묘지를 쓸 때 꺼리는 다섯 가지 경우로, 뒷날 도로가 될 곳, 성곽이 될 곳, 도랑이나 못이 될 곳, 세력가에게 빼앗기게 될 곳, 농지가 될 곳을 말한다. 《近思錄 卷9 治法11》 기산으로 가서 이주하였듯 《맹자》에 "태왕이 빈(邠) 땅에 거주할 때 적인(狄人)이 침입하자 그곳을 떠나 기산의 아래로 가서 거처하였다."는 말에서 나왔다. 초구 적(狄)의 침입으로 위나라가 멸망하자, 제 환공(齊桓公)이 적을 정벌하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은 다음 위나라를 다시 세우고 문공을 임금으로 세워 주었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정읍의 옛 이름이 초산(楚山)이다. 여기서는 이 둘을 중의적으로 사용하여 옮겨간 재각을 정읍에 정한 것을 나타내었다. 이전……같지만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하였다. 새가…날 듯 《시경》 〈사간(斯干)〉에서 집을 새로 지어 낙성식의 잔치를 벌이며 송축하면서 "새가 날아가듯 하며, 꿩이 나래 친 듯하니, 군자가 오르는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하였다. 남노성 수명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남극성(南極星), 남극노인(南極老人)이라고도 한다. 나라가 태평하게 다스려지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추분(秋分) 무렵에 남쪽 교외에 나타난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천문지(天文志)〉 제사를……가르침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천에……있겠지만 하처(河淸)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준 말이다. 원래 황하는 본래 흐린 강이어서 맑아질 리가 없지만,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징응(徵應)〉, 《사문유취》 등에는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탄생한다."라고 하였다. 〈북풍〉 《시경》의 북풍(北風)은 백성들이 학정(虐政)을 피하여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면서 부른 노래이다. 지란과 옥수 지란옥수(芝蘭玉樹)는 훌륭한 자제들을 가리킨 말이다.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일찍이 여러 자질(子姪)들에게 어떤 자제(子弟)가 되고 싶으냐고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지란 옥수(芝蘭玉樹)가 뜰에 나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자제들을 비유한다. 위씨……기약하며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주나라……쑥이여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서 "무성하고 무성한 쑥이, 저 구릉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陵〕"라고 하였는데,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으로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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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조씨 부용재 상량문【정축년(1937)】 金堤趙氏孚用齋上樑文【丁丑】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니 乃孚用禴《주역》 〈췌괘〉 육이의 효사를 취한 것이라네.441) 取易萃二爻之辭이에 〈사간〉처럼 爰處斯干서남쪽에 백도나 되는 담장을 보노라.442) 見西南百堵之築분명코 근본에 보답하는 예를 치를 것이니 必有事報本之禮참으로 조상이 계신 듯한 재계를 극진히 하리라.443) 亶爲致如在之齊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고을의 조씨는 竊惟吾鄕之趙氏벽성444)의 세가이며 碧城世家청구의 오랜 가문이다. 靑丘古族문량공445)은 크게 현달하여 文良大顯당시에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 固冠冕乎當時남쪽 영주로 이사하였으니 瀛州南遷또한 가업을 계승한 후손이라네.446) 亦箕裘乎後裔저 여러 대 늘어선 무덤을 보니 睠彼累世之列兆만 년 가는 가성인 줄 알겠네. 認是萬年之佳城봄, 가을로 성묘하니 瞻掃春秋비와 서리의 감회가 얼마나 많은가.447) 幾多雨霜之感소와 목으로 차례대로 모여 있으니448) 會序昭穆더욱 화수의 기쁨449)이 있구나. 更有花樹之歡진씨가 어버이를 그리는 정자를 지었으니450) 甄氏作思親之亭마음은 그 옛날과 같고, 情同千古문자가 친족을 모을 집을 만들었으니451) 文子成聚族之室지금의 급선무라네. 務急當今종친의 사람들이 힘을 합치니452) 肆同人于宗곧 〈대장〉의 상사(象辭)라네.453) 卽大壯之以象백 년 동안 공을 들여 기른 송백이 養百年積功之松柏참으로 오늘을 위해 재목으로 쓰기에 적합하고, 正爲此日適合於用材완벽하게 길한 터를 잡으니 占十全純吉之址基전부터 미리 비밀스럽게 보관하여 일이 있기를 기다린 듯. 有若前期藏秘而待事돈으로 돕고 몸으로 일을 하며 金以助身以役많은 자손이 기꺼이 달려왔도다. 衆孫樂趨졸렬한 이는 힘을 쓰고 뛰어난 이는 머리를 쓰며 拙用力巧用心여러 장인이 참으로 고생하였어라. 羣工良苦이른바 얼마 걸리지 않고 완성하니 所謂成之不日어찌 하늘로부터 도움이 아니랴. 豈非佑之自天웅장하고 화려하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則高則華저 제운루를 어찌 취할 것인가.454) 彼齊雲之奚所取이에 그런대로 갖추고 그런대로 아름다우니 是爲苟完苟美위나라 형(荊)처럼 칭송을 받으리라.455) 乃衛室之曾見稱얼마나 많이 마음속으로 경영하였는가 幾多心上之經營비로소 평소 정성된 효도에 부합하네. 始副平日誠孝비로소 눈앞에 우뚝 솟음을 보게 되매 始見眼前之突兀다투어 사방에서 축하하는 글을 바치누나. 爭獻四方賀章달력을 펼치니 달과 날이 이미 좋은데 鳳曆披而月日旣良무지개 들보가 걸리니 노래를 뒤따라 부르노라. 虹樑掛而歌頌隨昌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좌해는 본래 유학의 도가 높다고 일컬어졌네. 左海素稱吾道崇예제는 원래 전현의 가르침에서 나오니 禮制原從前哲敎그 유풍을 오늘 이곳에서 보노라. 遺風今日見斯中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무수한 필봉이 뾰쪽뾰쪽 늘어섰구나. 筆峰無數列尖尖지령과 천운이 서로 부합하는 날이니 地靈天運相符日그 기(氣)로 문장이 뛰어난 남아를 얼마나 배출하려나. 鍾出文章幾箇男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천 길 천태산456)은 하늘과 나란하여라. 天台千仞與天齊높은 행실에 갖춘 학문은 하학을 말미암았으니 行高有術宜由下누가 상달에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 하는가. 上達誰言不可梯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넘실거리는 벽골은 30리 떨어져 있어라. 碧骨迢迢一舍隔신전으로 언제나 독룡을 섬멸할까457) 神箭何年殲毒龍거센 바람458)은 백 대에도 멈추지 않네. 雄風百世未能息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밝고 밝은 상제를 머리에 이고 우러르네. 上帝明明頭戴仰선조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날마다 그 곁에 있으니 陟降先靈日在傍남긴 존체(尊體)에 대한 공경을 어찌 소홀히 하랴. 敬行遺體豈宜放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증손이 농사짓는 밭에 해마다 풍년이 드는구나.459) 有田歲熟曾孫稼제사 지내기 편하게 마침 재실이 완성되니 利成祀事適成齋낙성의 잔치에 술잔이 넘쳐도 무방하리. 宴落不妨因餕斝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삼광460)이 비춰주며 三光照應온갖 신령들이 보호해 주기를. 百神護持지켜서 영원히 전하리니 守而永傳어찌 이덕유의 평천장 경계461)를 기다리랴. 何待李氏平泉之戒끊임없이 이어가야 하니 引之勿替절로 주나라 〈초자〉의 시에 그 내용이 있어라.462) 自有周人楚茨之詩 乃孚用禴, 取《易》〈萃〉二爻之辭.爰處〈斯干〉, 見西南百堵之築.必有事報本之禮, 亶爲致如在之齊.竊惟吾鄕之趙氏, 碧城世家, 靑丘古族.文良大顯, 固冠冕乎當時.瀛州南遷, 亦箕裘乎後裔.睠彼累世之列兆, 認是萬年之佳城.瞻掃春秋, 幾多雨霜之感.會序昭穆, 更有花樹之歡.甄氏作思親之亭, 情同千古.文子成聚族之室, 務急當今.肆同人于宗, 卽〈大壯〉之以象.養百年積功之松柏, 正爲此日適合於用材.占十全純吉之址基, 有若前期藏秘而待事.金以助身以役, 衆孫樂趨.拙用力巧用心, 羣工良苦.所謂成之不日, 豈非佑之自天.莫曰則高則華, 彼齊雲之奚所取.是爲苟完苟美, 乃衛室之曾見稱.幾多心上之經營, 始副平日誠孝.始見眼前之突兀, 爭獻四方賀章.鳳曆披而月日旣良, 虹樑掛而歌頌隨唱.抛樑東, 左海素稱吾道崇.禮制原從前哲敎, 遺風今日見斯中.抛樑南, 筆峰無數列尖尖.地靈天運相符日, 鍾出文章幾箇男.抛樑西, 天台千仞與天齊.行高有術宜由下, 上達誰言不可梯.抛樑北, 碧骨迢迢一舍隔.神箭何年殲毒龍, 雄風百世未能息.抛樑上, 上帝明明頭戴仰.陟降先靈日在傍, 敬行遺體豈宜放.抛樑下, 有田歲熟曾孫稼.利成祀事適成齋, 宴落不妨因餕斝.伏願上樑之後, 三光照應, 百神護持.守而永傳, 何待李氏平泉之戒.引之勿替, 自有周人〈楚茨〉之詩. 정성스럽게……것이러네 《주역》 〈췌괘(萃卦) 육이(六二)〉에 "정성이 있어야 약(禴)을 씀이 이롭다.〔孚乃利用禴.〕"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주에 "약(禴)은 제사함에 간략하고 박하게 하는 것이니, 박하게 제사하여 물건을 갖춤을 숭상하지 않고 다만 성의(誠意)로써 신명과 사귀는 것이다." 하였다. 《伊川易傳 卷3》 〈사간〉처럼……보노라 《시경》 〈사간(斯干)〉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는 하였다. 1장(丈)이 1판(板)이 되고, 5판(板)이 1도(堵)가 된다. 조상이……지극히 하리라 《논어》 〈팔일(八佾)〉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이 계신 듯이 하였고, 신을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였다. 벽성 김제의 옛 지명이다. 문량공 조간(趙簡)으로, 충렬왕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에 검교첨의평리,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업을 계승한 후손이라네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봄, 가을로……많은가 《예기》 〈제의(祭義)〉에 보이는 말로,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소와……있으니 무덤 배열 방식에 소목장(昭穆葬)이 있다. 중앙을 시조로 하여, 2세 ‧4세 ‧6세는 왼쪽으로 세워 소(昭)라고 하고, 3세 ‧5세 ‧7세는 오른쪽으로 세워 목(穆)이라고 한다. 화수의 기쁨 앞의 〈전주최씨종회각상량문(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에 보인다. 진씨가‥‥지었으니 앞의 〈전주최씨숙사재중건상량문(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文)〉에 보인다. 문자가……만들었으니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종친의……합치니 이 말은 《주역》 〈동인괘〉 육이의 "남과 함께 하기를 종족끼리 하니 비린(鄙吝)한 방도이다.[同人于宗 吝]"라 하여 부정적으로 이해하였는데, 여기서는 집안 친척끼리 힘을 합쳐 부용재를 건립함을 이른다. 〈대장〉 상사(象辭)라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후세 성인이 궁실로 바꾸어서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풍우에 대비하였으니, 대장괘에서 취한 것이다.〔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라고 한 말에서 뜻을 취하였다. 웅장하고……취할 것인가 제운루는 당나라의 조공왕(曹恭王)이 세운 누각으로,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자성(子城)의 위쪽에 있다. 왕우칭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에, "제운과 낙성이 높기야 높다.[齊雲落星高則高矣]"라고 하였다. 그런대로……받으리라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천태산 정읍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천태산을 가리킨다. 신전으로……섬멸할까 세 발의 화살로 돌궐을 진압한 설인귀(薛仁貴)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독룡 즉 왜놈을 무찌르는 비유로 사용되었다. 거센 바람 웅풍(雄風)은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보인다.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부리자 송옥이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여 풍간하였는데, 후대에 내려와서는 제왕에 대한 송가(頌歌)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증손이……드는구나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 이덕유의 평천장 경계 평천장은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끊임없이……있어라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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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최씨 종회각 상량문【무인년(1938)】 全州崔氏宗會閣上樑文【戊寅】 삼가 생각하건대, 종족을 모으는 것이 조상을 높이는 의리라 여겨 竊以收宗族爲尊祖之義그 예를 만든 것은 선왕이며, 制其禮者先王상재를 공경하여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을 내어 敬桑梓出思親之心시를 지은 이는 효자로다.417) 作此詩者孝子이런 까닭으로 문자가 크고 화려한 건물을 완공한 것은 是故文子之能成輪奐室실제는 종족을 모으려는 의도였으며,418) 實爲聚族之謀평천장의 꽃과 바위를 지키지 못하면 若乃平泉之未保花石庄선조를 계승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있으리.419) 有愧述先之事옛 사람의 득실을 살펴보면 觀古人之得失지금의 향배를 알 수 있으리라. 知今日之從違삼가 생각건대 최씨는 恭惟崔氏전주에 관향을 두어 籍自全州좌해에 명망이 드높았어라. 望著左海벼슬아치가 대를 이어 무리로 나오고 承簪纓而輩出현달하여 마침내 큰 가문이 되었네. 賢達遂爲華門자손이 번창하여 사방에 흩어져 거처하니 繁雲仍而散居영남, 호남에서 대성(大姓)이라 일컬어지네. 嶺湖亦稱大姓이곳 동촌리 유지는 惟玆東村里遺址일찍이 중랑장420)이 처음 거처하였지. 曾是中郞將始居종대는 마을 이름으로 불리우며 宗垈稱爲洞名많은 사람들이 전설을 이야기하니 萬口傳說어릴 때 사마광과 비슷하네.421) 有同兒童之君實옛 집을 그대로 종회각으로 만들었는데 舊廬因作會閣한 마음으로 아끼고 보호하니 一心愛護어찌 소백의 감당422)만 못하겠는가. 奚啻召伯之甘棠산천은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니 山川供麗明형국의 신령한 기운이 다하지 않았고, 全局之靈運不盡초목에 정채로움이 남아 있으니 草木留精彩그 당시의 풍운이 아직도 존재하누나. 當日之風韻尙存거리가 적당하니 道里適切이미 가문의 일에 왕래하기에 편하며, 旣便門事之來往묘소가 멀지 않으니 丘壟不遠또한 재계하여 시제 지내기도 좋아라. 亦可歲祀之齊明다만 당우가 세월이 오래되어 只緣堂宇之積年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은 걱정이 되누나. 或虞風雨之有日지금까지 계속 보수하였으나 嗣葺旣事죽루의 썩지 않는 공을 거두기 어려워서,423) 難收竹樓不朽之功기꺼이 지을 것을 거듭 도모하니 肯構重謀어찌 〈대고〉의 후손이 있다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인가.424) 盍遵大誥有後之訓길한 점을 얻어 위는 대들보 아래는 서까래 나란하니425) 得吉占上棟下宇사람과 거북점이 모두 따르네. 人龜俱從다섯 도리〔架〕426) 네 기둥의 집을 지으며 建築舍五架四楹회랑과 창고도 갖추었어라. 廊庫亦具당장 해야 할 급한 일이니 事在當下之急務애당초 이전 공보다 잘 됨을 구하지 말아야 하네. 初非求多前功여러 사람들이 의연금을 내어 사용하니 費出各人之義捐종가의 재물을 부러워할 필요 없네. 幷不有羡宗物저 도끼질과 저 톱질은 斧彼鉅彼모두 대목장의 지시를 듣고, 咸聽都匠指揮공사를 시작하면서 經之營之한 가문의 계획대로 결정하였도다. 共決一門計劃이른바 오래 되지 않고 완성하니 所謂成之不日어찌 하늘로부터 도운 것이 아니랴. 豈非佑之自天이에 주자의 《강목》처럼 乃以紫陽綱目일을 기록할 때 해를 앞세웠으며,427) 記事之首年왕희지의 난정처럼 右軍蘭亭좋은 날을 골라 모임을 열었도다.428) 修褉之良日조심스레 긴 들보를 허공에 올리는데 謹上修樑半空기다란 무지개가 떠있나 의심했고, 疑長虹之掛평지에 이목을 집중시키니 聳動觀聽平地채색의 꿩이 날아오른 듯하여429) 見彩翬之飛골짜기가 빛이 나네. 光輝洞壑낙성식의 연회가 곧 열리리니 宴將設於成落제비가 축하하러 처마에 찾아오며,430) 燕賀來簷화목한 가운데 강론할 장소가 있나니 講有所於睦和큰 복이 집안에 넘치리라. 鴻福呈戶아! 그대 여러 목공들 일을 잠시 멈추고 嗟爾暫輟衆工之役내가 목청껏 부르는 여섯 아랑위 노래를 들어보게나. 聽我高唱六偉之歌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높은 한벽당431)에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어라. 寒碧高堂聞國中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432) 무한한 흥취로니 魚躍鳶飛無限趣지금도 옥동433)에는 맑은 바람이 부네. 至今玉洞有淸風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울창한 완산에 청람(晴嵐)434) 흩어졌구나. 完山鬱鬱罷晴嵐맑은 기운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자니 試看淑氣有如許앞뒤로 기운 모아 태어난 준걸이 몇이던가. 前後鍾生幾傑男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구미의 풍조를 누가 막을 것인가. 歐美風潮孰障堤전배들은 이제 구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前輩無由九原作지금 세상의 도에 탄식만 이는도다. 如今世道堪歎兮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주덕산435)의 푸른 봉우리 경치는 바뀌지 않구나. 周德靑巒不改色무덤에 서리와 이슬은 해마다 내리는데 霜露佳城年復年흐릿하게 조상을 본 듯하여 마음이 놀라네.436) 僾然如見其心惕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상천이 응당 도를 없어지게 하지 않으리라. 上天應不道終喪마땅히 자제는 유학의 글을 읽어야 하니 端宜子弟讀斯文부지런히 부지런히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리라. 好著孜孜自勉强어영차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출렁출렁 남천437)은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滾滾南川流不舍사람 일이나 사물의 실정이나 이치가 다르지 않으니 人事物情無二致근원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이와 같다네. 有源皆是如斯者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기둥과 서까래가 오래토록 튼튼하며 楹桷長固종친438)들은 더욱 친하길. 花樹愈親참으로 참을 수 있다면 苟能忍之어찌 장공예처럼 백 번 쓸 필요가 있겠는가.439) 何待公藝百字형제간에 서로 좋아하여 式相好矣〈사간〉의 수장처럼 지내시라.440) 自有斯干首章 竊以收宗族爲尊祖之義, 制其禮者先王.敬桑梓出思親之心, 作此詩者孝子.是故文子之能成輪奐室, 實爲聚族之謀.若乃平泉之未保花石庄, 有愧述先之事.觀古人之得失, 知今日之從違.恭惟崔氏, 籍自全州, 望著左海.承簪纓而輩出, 賢達遂爲華門.繁雲仍而散居, 嶺、湖亦稱大姓.惟玆東村里遺址, 曾是中郞將始居.宗垈稱爲洞名, 萬口傳說, 有同兒童之君實.舊廬因作會閣, 一心愛護, 奚啻召伯之甘棠.山川供麗明, 全局之靈運不盡.草木留精彩, 當日之風韻尙存.道里適切, 旣便門事之來往.丘壟不遠, 亦可歲祀之齊明.只緣堂宇之積年, 或虞風雨之有日.嗣葺旣事, 難收竹樓不朽之功.肯構重謀, 盍遵〈大誥〉有後之訓.得吉占上棟下宇, 人龜俱從.建築舍五架四楹, 廊庫亦具.事在當下之急務, 初非求多前功.費出各人之義捐, 幷不有羡宗物.斧彼鉅彼, 咸聽都匠指揮.經之營之, 共決一門計劃.所謂成之不日, 豈非佑之自天.乃以紫陽《綱目》記, 事之首年.右軍蘭亭, 修褉之良日.謹上修樑半空, 疑長虹之掛.聳動觀聽平地, 見彩翬之飛.光輝洞壑, 宴將設於成落, 燕賀來簷.講有所於睦和, 鴻福呈戶.嗟爾暫輟衆工之役, 聽我高唱六偉之歌.兒郞偉抛樑東, 寒碧高堂聞國中.魚躍鳶飛無限趣, 至今玉洞有淸風.兒郞偉抛樑南, 完山鬱鬱罷晴嵐.試看淑氣有如許, 前後鍾生幾傑男.兒郞偉抛樑西, 歐美風潮孰障堤.前輩無由九原作, 如今世道堪歎兮.兒郞偉抛樑北, 周德靑巒不改色.霜露佳城年復年, 僾然如見其心惕.兒郞偉抛樑上, 上天應不道終喪.端宜子弟讀斯文, 好著孜孜自勉强.兒郞偉抛樑下, 滾滾南川流不舍.人事物情無二致, 有源皆是如斯者.伏願上樑之後, 楹桷長固, 花樹愈親.苟能忍之, 何待公藝百字.式相好矣, 自有〈斯干〉首章. 상재(桑梓)를……효자라네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문자가……의도였으며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평천장의……있으리 평천장은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으로,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중랑장 고려 충정왕 때 중랑장을 지낸 최용봉(崔龍鳳)이다. 어릴 때 사마광과 비슷하네 군실(君實)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字)가 이다. 그가 어렸을 때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물을 담아 놓은 큰 항아리에 빠지자, 딴 아이들은 놀라 도망했으나 사마광은 돌로 항아리를 깨뜨려 살게 한 일이 있다. 소백의 감당 감당은 《시경》 〈소남(召南)〉의 편명이다.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 희석(姬奭)이 서백(西伯)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감당 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어려워서 왕우칭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의 마지막 부분의 "계속해서 지붕을 이어준다면 아마도 이 죽루가 썩지 않을 것이다.[嗣而葺之 庶斯樓之不朽也]"는 말에서 온 것이다. 기꺼이……않을 것인가 선대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을 잘 이어 나가기를 힘썼다는 뜻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 그 아버지가 밭을 일구었거늘, 그 자식이 기꺼이 파종도 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수확하려 하겠는가. 고익이 기꺼이 '내 후손이 있으니 기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 厥父菑 厥子乃弗肯播 矧肯穫 厥考翼 其肯曰 予有後 弗棄基〕"라 하였다. 고익(考翼))은 《서경집전(書經集傳)》에 "고익(考翼)은 부로가 공경히 섬기는 자들이다."라 하였다. 길한……나란하니 앞의 〈여충사유지강당중건상량문(旌忠祠遺址講堂重建上樑文)〉에 보인다. 다섯 도리〔架〕 다섯 개의 도리로 이루어진 집을 말한다. 다섯 개의 도리는 후기(後庋), 후미(後楣), 동(棟), 전미(前楣), 전기(前庋)를 말하는데, 이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방(房)과 실(室)과 당(堂)이 구분된다. 주자의……앞세웠으며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대개 세(歲)를 표기하여 년(年)을 먼저하고."라고 하였다. 세(歲)는 간지(干支)를 가리키고 년(年)은 모왕모년(某王某年) 또는 모년(某年)을 가리킨다. 《자치통감강목》의 맨 처음에는 "戊寅 周威烈王二十三年"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해는 "己卯 二十四年", "庚辰 安王元年"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왕희지의……열었도다 '우군(右軍)'은 우군장군을 지낸 왕희지(王羲之)이다. 〈난정기(蘭亭記)〉의 서문을 지으면서 "이 날에 하늘은 맑고 기운은 청명하여 온화한 바람이 화창했다."라고 하였다. 채색의……듯하여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제비가……찾아오며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큰 집이 완성되면 제비와 참새가 깃들 곳이 생겨 서로 축하한다.[大廈成而燕雀相賀]"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한벽당 전주 최씨 시조 문성공 최아(崔阿)로부터 4대손인 최담(崔霮)이 전주에 낙향하여 지은 별장이다. 물고기……나니 천지(天地)의 도(道)가 밝게 유행(流行)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였으니, 천지의 도가 위아래에 밝게 드러난 것을 말한 것이다.[詩云鳶飛戾天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옥동 전주 완산구 환벽당 서쪽 일대가 옥류동으로 불리었다. 청람 맑은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주덕산 완주 소양면 주덕산을 가리킨다. 무덤에……놀라네 《예기》 〈제의(祭義)〉에 보이는 말로,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남천 전주를 가로지르는 전주천을 가리킨다. 종친 당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시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서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려.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참으로……있겠는가 장공예(張公藝)의 고사는 앞의 〈전주최씨숙사재중건상량문(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에 보인다. 형제간에……지내시라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은 새로 집 지어 낙성(落成)할 때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그 집에 거처하는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게 잘 살기를 축원한 노래인데, 그 시에 "질펀히 흐르는 물가요, 그윽한 남산이로다. 대나무가 떨기로 난 듯하고, 소나무가 무성한 듯하도다. 형과 아우 다 모여서, 서로 잔 권하며 좋아하고, 서로 딴마음 없으리로다.〔秩秩斯干 幽幽南山 如竹苞矣 如松茂矣 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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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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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388) 상량문【병인년(1926)】 以承齋上樑文【丙寅】 어찌하여 승냥이와 수달이 짐승과 물고기로 제사 지냄389)을 보지 않는가 盍觀豺獺之祭獸魚사람의 도가 그와 같지 않을 수 있는가. 可以人道而不若새가 나는 듯한 아름다운 재실390)을 이에 바라보니 聿覩鳥翬之呈飛革참으로 군자가 거처할 곳이로다. 允矣君子之攸居뜻이 있으면 일은 끝내 성취되니 有志者事竟成치재하고서 조상이 있는 듯 제사지내네.391) 致齋而祭如在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김씨는 竊惟吾金포옹392)에서 나와 계노393)가 원조(遠祖)가 되니 系浦翁而祖溪老참으로 훌륭한 후손이라 하겠도다. 寔謂醴源之流부풍394)에 관향을 두고서 영주395)를 건넜으니 貫扶風而渡瀛州보배로운 감귤에 비교할 탱자가 아니네.396) 非比寶橘之枳문장과 행실이 반듯하니 文行濟濟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마라 경계하네. 戒勿墜其家聲후손들이 연이어 나왔으니 雲昆繩繩참으로 절로 넘치는 경사가 있도다. 信有自乎餘慶다만 청빈하여 물력이 가난하였기에 只緣物力之淸窶선조를 넉넉하게 받듦에 부족하게 되었구나. 致闕先事之美豊칠팔 대 이백 년 동안 七八代二百年제전을 맡아 담당할 자가 없었으며, 旣少祭田之選掌오육 리 서너 묘소에도 五六里數四兆재사를 마련할 경황이 없었다네. 不遑齋舍之始營제수를 올리는데 상례(常禮)를 바꾸어 供苾芬而易常돌려가며 행하니 온당하지 않고, 輪行未穩예측할 수 없는 비바람을 만나면 値風雨之不測이리저리 내달리니 법도가 아니어라. 駿奔無儀얼마나 다행인지 선령이 저승에서 도와 何幸先靈之冥扶이에 가문의 의논이 일치하게 되었구나. 乃獲門議之克協이곳 송산397)의 선영은 惟玆松山之壟선조의 터전398)을 겸하고 있어라. 兼是桑梓之基멧부리의 기슭은 밝아 岡巒麓明두승과 천태의 여러 산보다 뛰어난 경치를 보이며, 挹勝形於斗台諸嶽거리는 중간이어서 道里均敵궁사리와 달전리399) 각 선영의 중심을 차지하였어라. 占中心於宮達各塋이에 천간이 병(丙)이고 지지가 인(寅)해를 만나 爰値干丙支寅그 해에 터를 잡았으니400) 維年遂胥해(亥) 방향을 바라보고 사좌(巳坐)에 집을 지었네. 枕亥面巳其宇많고 적은 것은 내 재산에 맞춰서 多寡稱吾有기꺼이 종사(宗事)의 재물에 도움을 주고, 樂助力於宗財공교로움과 졸렬함은 그 재주에 따라 巧拙隨其才몸소 큰 공사에 수고로운 일을 담당하였어라. 親執勞於巨役변산의 큰 목재를 옮겨오니 輸邊山之大木어찌 등림401)의 좋은 재목에 뒤지랴. 豈遜鄧林之良材근방의 목수에게 일을 맡기니 任近坊之梓人영 땅의 도끼를 휘두르는 고수402)를 기다릴 필요 없어라. 無待郢斤之高手완성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莫曰成不日也이른바 그 진심을 다하였기 때문이라오. 所謂盡其心焉아름답고 웅장하니 美奐美輪비록 장노(張老)의 축하에 비기기는 어렵지만,403) 縱難擬於張禱그런대로 갖추고 그런대로 아름다우니 苟完苟合형의 거처에 거의 부합하는도다.404) 庶同符於荊居자사의 《중용》에서 '이승(以承)'을 취하여 이름을 지으니 取思傳而錫名신명이 도처에 충만하여 위에서 있는 것 같음을 보리라.405) 瞻洋洋乎在上붉은붓으로 써서 현판을 내거니 摹朱筆而揭額놀랄 만큼 휘황하여 새로운 듯하여라. 驚煌煌焉若新아! 그대 뭇 장인들이 긴 대들보를 들 때 嗟爾衆工修樑之抛나의 짧은 아랑위 여섯 곡을 들어 보게나. 聽我六偉短詞之唱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東소중한 공자와 주자의 도가 동방에 있네. 珍重尼晦道在東선조가 살아 계실 때 어진 마을을 골랐으니 先祖當年仁里卜지금도 아름다운 이름이 바로 창동406)이라네. 至今嘉號是滄東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南우리 집안의 가법을 삼남에서 부러워하는구나. 吾家家法豔三南추모하여 덕을 닦음407)이 아내의 모범408)이 됨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念修不出刑妻外《시경》을 붙들고 〈이남〉을 읽도록 하게나. 請把毛詩讀二南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西석동409)의 무덤은 조용히 서쪽을 향해 있구나. 席洞佳城暗拱西봄 이슬 가을 서리410)는 해마다 되풀이되는데 春露秋霜年復歲얼마나 많은 관복 입은 자손이 매번 서쪽으로 달려가는가. 幾多冠服每趨西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北한강 북쪽은 바람에 강물411)이 오열하네. 風泉嗚咽漢之北충성으로 옮길 곳412) 없어 탄식하노니 堪歎無地可移忠밤에 홀로 부질없이 북두성만 바라보네. 獨夜虛勞倚斗北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上정령이 밝게 구천의 하늘 위로 올라가는구나. 精靈昭陟九天上너의 마음 둘로 하지 않는다면 신령도 응당 들으리니 爾心不貳神應聽높고 높은 하늘에 부질없이 계시다고 하지 마라. 無曰高高徒在上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抛樑下태산에 높이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이누나.413) 泰山高處小天下원래 효도와 공손은 신명과 통하니 元來孝悌通神明상달하려면 모름지기 아래로부터 배워야 하리라. 達上須知自學下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모든 신령들이 준엄하게 보호하고 百靈峻衛온갖 상서로움이 사방에서 몰려들기를. 萬祥鼎臻어찌 창대하지 않으랴 安得不昌최산남414)의 집안만 홀로 그러하지 않으리. 罔專崔山南門戶끊임없이 이어가서415) 勿替引之〈초자〉의 증제사, 상제사416)를 영원히 전하라. 永傳周楚茨烝嘗 盍觀豺獺之祭獸魚, 可以人道而不若.聿覩鳥翬之呈飛革, 允矣君子之攸居.有志者事竟成, 致齋而祭如在.竊惟吾金, 系浦翁而祖溪老, 寔謂醴源之流.貫扶風而渡瀛州, 非比寶橘之枳.文行濟濟, 戒勿墜其家聲.雲昆繩繩, 信有自乎餘慶.只緣物力之淸窶, 致闕先事之美豊.七八代二百年, 旣少祭田之選掌.五六里數四兆, 不遑齋舍之始營.供苾芬而易常, 輪行未穩.値風雨之不測, 駿奔無儀.何幸先靈之冥扶, 乃獲門議之克協.惟玆松山之壟, 兼是桑梓之基.岡巒麓明, 挹勝形於斗、台諸嶽.道里均敵, 占中心於宮、達各塋.爰値干丙支寅, 維年遂胥, 枕亥面巳其宇.多寡稱吾有, 樂助力於宗財.巧拙隨其才, 親執勞於巨役.輸邊山之大木, 豈遜鄧林之良材.任近坊之梓人, 無待郢斤之高手.莫曰成不日也, 所謂盡其心焉.美奐美輪, 縱難擬於張禱.苟完苟合, 庶同符於荊居.取《思傳》而錫名, 瞻洋洋乎在上.摹朱筆而揭額, 驚煌煌焉若新.嗟爾衆工修樑之抛, 聽我六偉短詞之唱.抛樑東, 珍重尼、晦道在東.先祖當年仁里卜, 至今嘉號是滄東.抛樑南, 吾家家法豔三南.念修不出刑妻外, 請把《毛詩》讀〈二南〉.抛樑西, 席洞佳城暗拱西.春露秋霜年復歲, 幾多冠服每趨西.抛樑北, 風泉嗚咽漢之北.堪歎無地可移忠, 獨夜虛勞倚斗北.抛樑上, 精靈昭陟九天上.爾心不貳神應聽, 無曰高高徒在上.抛樑下, 泰山高處小天下.元來孝悌通神明, 達上須知自學下.伏願上樑之後, 百靈峻衛, 萬祥鼎臻.安得不昌, 罔專崔山南門戶.勿替引之, 永傳周〈楚茨〉烝嘗. 이승재 부안 석동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승냥이와……제사 지냄 《예기(禮記)》에, "1월에는 수달이 고기를 제사지내고, 9월에는 승냥이가 짐승을 제사지낸다.[孟春之月獺祭魚季秋之月豺祭獸]" 하였다. 새가 나는 듯한 재실 '비혁(飛革)'을 풀이한 말인데, 춘추 시대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무너진 궁실을 다시 짓고 낙성을 알리니, 사람들이 송축하여 읊기를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으며,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으니, 군자가 올라가서 정사를 다스릴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詩經 斯干》 치재하고서……제사지내네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재(散齋)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하면서 밖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고, 다음에 치재(致齋)하여 목욕재계하고 오직 제사만 생각하는 것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이 계신 듯이 하였고, 신을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였다. 포옹(浦翁) 지포(止浦) 김구(金坵)로 고려 원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계노 후창의 11대조 죽계(竹溪) 김횡(金鋐)을 가리킨다. 자는 여기(汝器)이다. 부풍 부안(扶安)의 옛 지명이다. 영주 정읍 고부의 옛 지명이다. 보배로운……아니네 《주례》 〈고공기(考工記)〉에서 "귤이 회수를 넘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들은 영주를 건넜지만 탱자처럼 변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송산 정읍 칠보면 송산을 가리킨다. 선조의 터전 '상재(桑梓)'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가리키는데, 《시경》〈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러러 뵐 분으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으며, 의지할 분으로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고 하여 고향을 의미한다. 궁사리와 달전리 궁사리는 정읍 태인에 있는 마을이며 달전리는 덕천면에 있는 마을이다. 터를 잡았으니 《시경》 〈대아(大雅) 면(綿)〉에서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니, 이에 강씨 부인과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한 데서 온 말이다. 등림(鄧林) 전설상의 숲이다. 옛날에 과부(夸父)가 해를 쫓아 달려서 해가 들어가려 할 즈음에 목이 말라 하수(河水)와 위수(渭水)를 마셨는데도 부족하여 대택(大澤)의 물을 마시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목이 말라서 죽고, 버려진 그의 지팡이가 화(化)하여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 《山海經 卷8 海外北經》 영 땅의……고수 《장자》 〈서무귀(徐无鬼)〉에서 "영 지방 사람이 코끝에 백토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것을 깎아 내게 하였다. 그러자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 내기 시작하였는데, 백토를 다 깎았는데도 코를 다치게 하지 않았고 그 영 지방 사람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라 하였다. 아름답고……축하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조무(趙武)가 저택을 준공했을 때 다른 대부들이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는데,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규모가 큼이여. 아름답도다, 꾸밈이 화려함이여. 제사(祭祀) 때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는 여기에서 곡읍(哭泣)을 하고, 연례(宴禮)에는 여기에 국빈(國賓)과 종족(宗族)을 모으게 될 것이다."라고 송축(頌祝)의 말을 하자, 주인인 조무가 답사(答辭)에서 "무(武)가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서 곡(哭)하고, 여기에 국빈과 종족을 모아서 연례를 할 수 있다면, 이는 내 목숨을 온전히 누린 다음 선대부(先大夫)가 묻힌 구원(九原)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북면(北面)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군자(君子)가 이 일을 두고 평론하기를 "장로는 송축하는 말을 잘했고, 조무는 기도하는 말을 잘했다.[善頌善禱]"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원래 장로는 송축을 잘하고 조무는 기도를 잘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뒤바꿔 사용하였다. 그런대로……부합하는도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여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잘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하였다.[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자사의……보리라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전한 책이라고 한다. 《중용》에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깨끗이 재계하고 의복을 성대히 입고 제사를 받들게 하면, 신명이 충만하여 마치 위에 있는 듯하기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하기도 하느니라.[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 하였다. 창동(滄東) 동쪽의 창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주자는 만년에 창주정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그 외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추모하여 덕을 닦음이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하였다. 아내의 모범 《시경》 〈사제(思齊)〉에서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그 덕이 미쳐서,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하였다. 석동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을 가리킨다. 봄 이슬 가을 서리 《예기》 〈제의(祭義)〉에서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있게 되니, 이는 추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에 젖으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서 반드시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되니,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하였다. 바람과 강물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충성으로 옮길 곳 효심을 충성심으로 바꿔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효경》 〈광양명장(廣揚名章)〉의 "군자는 어버이를 모시는 효심이 깊기 때문에, 그 효심을 임금에게 바꿔 적용하여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태산에……보이누나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최산남 앞의 〈이승재상량문(以承齋上樑文)〉에 보인다. 끊임없이 이어가서 《시경》 〈소아(小雅) 초자(楚茨)〉에 "심히 순하고 심히 때에 맞아 극진하였으니 자자손손 중단하지 않고 길이 이어 나가리라.〔孔惠孔時 維其盡之 子子孫孫 勿替引之〕"라고 하였다. 〈초자〉의 증제사, 상제사 《시경》 〈소아(小雅) 초자(楚茨)〉에서 "너의 소와 양을 정갈히 마련하여 나아가 증(烝) 제사를 지내며 상(嘗) 제사를 지내니〔絜爾牛羊 以往烝嘗〕"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전주 최씨 숙사재358) 중건 상량문【계유년(1933)】 全州崔氏肅事齋重建上樑文【癸酉】 평상시와 다르게 먹고 다른 곳에서 거처하며 食必變居必遷마땅히 제향의 재계를 엄숙하게 해야 하네. 宜肅享祀之齋戒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일을 잘 이어받아 志善繼事善述건물이 설립되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359) 重覩堂構之建修만일 오랜 세월의 경영이 없었다면 苟無積年經綸어찌 짧은 기간에 우뚝 서게 됨을 보랴. 豈見不日突兀삼가 생각건대, 최씨는 竊惟崔氏세계가 전주에서 나왔으니 系出完府먼 조상 문성공360)은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라. 遠冑文成公之顯名후손이 영주361)로 나뉘었나니 派分瀛州또한 맑은 명성의 원조(遠祖) 소윤362)이 있었네. 亦有少尹祖之淸譽높은 벼슬아치 끊이지 않았으니 簪纓不絶덕과 인을 쌓아서 생긴 것 아님이 없도다. 罔非積德累仁之由충성과 효도하는 자손이 무리로 배출되었으니 忠孝輩興어찌 다만 수많은 자손으로 번창함에 그치리오. 豈但百族億麗之盛이 지역 분토동363)을 바라보니 睠玆一區粉土之洞만 년 묘소가 들어앉을 자리임을 알겠네. 知是萬年佳城之藏칠보364)에서 흘러와 형국을 이뤘으니 來從七寶而成形마치 그 부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듯. 如回顧其父祖앞으로 반등365)을 마주하여 안산이 되는데 前對半登而作案손을 맞잡고 읍하는 아이 같아 기쁘구나. 喜拱揖之兒孫대개 동복공366)이 남쪽으로 온 뒤로 蓋自同福公南來비로소 이 산에 유택을 정하였네. 始卜玆山地遺宅사직공367)이 뒤를 이은 후로 繼司直以後여러 대의 종손과 지손이 함께 썼네. 累代宗支共同덕촌368)의 묏자리를 정하니 占德村之兆다른 언덕의 정령들이 이웃하였어라. 別岡精魄鄰近수백 리 신령한 기가 모였는데 萃靈氣數百里반천 년 비와 이슬을 지나왔도다. 歷雨露半千年진군(甄君)의 정자369)에 영원한 그리움을 부치니 寓永思於甄亭선영에 대한 감회가 얼마나 많은가. 幾多松梓之感위장(韋莊)의 집에 뿌리가 같으니 曾同根於韋室어찌 화수회의 기쁨이 없겠는가.370) 那無花樹之歡돌이켜 생각해보면 병사371)를 緬惟丙舍창건하고 수리하여, 創之修之그 갑자가 粤在甲周두 번 세 번 지났어라. 三去再去당실이 기울어지고 무너졌지만 堂室頹圯도연명은 무릎도 펴기 힘든 방에서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었으며,372) 陶元亮親戚情話之膝難容자손은 번창 하였나니 雲仍繁昌이문정의 집은 태축과 봉례에게는 대단히 좁았어도.373) 李文靖太祝奉禮之廳頗隘이윽고 노나라 창고는 그대로 물려받기가 어려웠으니374) 旣難仍於魯府이에 주나라 영대를 경영하기 시작하였어라.375) 爰經始於周臺사람들이 모두 거북점을 따르니 人協龜從비록 크게 길하다는 이치376)를 얻었지만, 雖獲九疇之大吉힘이 부족하고 공사가 커서 力綿事鉅천 근의 무거운 짐을 인 듯하였네. 若擔千斤之重任다만 다행히도 기와를 빚고 재목을 잘라와 惟幸搏是瓦斷是材다른 산의 흙과 나무를 빌리지 않았고, 不借他山之土木실로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없는 사람은 힘을 내어 實賴有者財無者力기꺼이 여러 자손들의 정성스런 마음을 받았어라. 樂用諸孫之誠心넓고 툭 트인 마루와 방은 寬敞軒房이전보다 규모가 커졌으며, 增制度於厥舊골짜기에 빛이 나니 輝映洞壑새로운 건물에 이목이 집중하였네. 聳觀瞻於維新한갓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지 마라 毋徒曰人事之當然이 또한 신명이 도와주었도다. 抑亦爲神明之攸助이 정도면 그런대로 모이고 갖추어졌으니 苟合矣苟完矣어이 위나라 형(荊)이 살림살이를 잘한다고 논하랴.377) 奚論衛室之善居참으로 크고 아름다우니 美輪焉美奐焉영원히 친족이 모여 제사 지내기에 부합하누나.378) 允符張禱之聚族달력을 펼쳐보니 날과 달이 길하다고 하며 鳳曆披而日月告吉무지개가 떠오르며 칭송하는 말이 뒤따라 오르도다. 虹榤掛而頌辭隨騰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東상두산379)에 해가 떠올라 주렴에 붉은 햇살 가득하네. 象頭初日滿簾紅그대 위해 '여승'의 구절380)을 외우노니 爲君誦獻如升句희가381)만 복록을 높게 되지 않기를. 未獨姬家福祿崇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南우산의 아름다운 나무가 푸르러 빽빽하네.382) 牛山佳木翠森森자제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여 寄言子弟須勤學이 양심으로 잘 함양하기를. 將此良心善養涵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西울창한 봉래와 영주산383)은 하늘과 맞닿았네. 蓬瀛鬱鬱與天齊사람이 장수하면 신선과 짝을 하는데 人而長壽還仙侶모름지기 쉬지 않고 열심히 인을 행해야 하리라. 要在爲仁自强兮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北덕성은 푸르고 푸른 색이 변하지 않네. 德城不改蒼蒼色선조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이전 왕을 모시니 先靈陟降侍前王이곳에서 여전히 옛 나라를 보는 도다. 此處依然見故國어영차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上규성384)은 언제나 서광을 쏘아댈까. 奎宿何時瑞彩放땅의 운수와 하늘의 아름다움 서로 합한 듯하니 地運天休若相符후진이 대가가 될 것을 우두커니 기다려 보리라. 佇看後進作鴻匠어영차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 兒郞偉抛樑下증손의 기장은 들판 밭에서 익어가는구나.385) 曾孫稼穡宜田野단술을 빚으니 얼마나 향기로운가 釀成酒醴何馨香게다가 맑은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도다. 復有淸泉流不舍삼가 바라건대, 伏願들보를 올린 뒤에 上樑之後동우가 오래 견고하며 棟宇長固묘소가 영원히 평안하길. 邱壟永安종족이 서로 화목하며 宗族相與雍和장공예가 함께 거처한 것386)이 公藝之同居옛날에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말 길. 罔專美於古효도하고 공경하니 어찌 창대하지 않으랴 孝敬豈不昌大비교하기 드문 최산남387)을 山南之罕比다시 오늘에 보기를. 復見於今 食必變居必遷, 宜肅享祀之齋戒.志善繼事善述, 重覩堂構之建修.苟無積年經綸, 豈見不日突兀.竊惟崔氏, 系出完府, 遠冑文成公之顯名.派分瀛州, 亦有少尹祖之淸譽.簪纓不絶, 罔非積德累仁之由.忠孝輩興, 豈但百族億麗之盛.睠玆一區粉土之洞, 知是萬年佳城之藏.來從七寶而成形, 如回顧其父祖.前對半登而作案, 喜拱揖之兒孫.蓋自同福公南來, 始卜玆山地遺宅.繼司直以後, 累代宗支共同.占德村之兆, 別岡精魄鄰近.萃靈氣數百里, 歷雨露半千年.寓永思於甄亭, 幾多松梓之感.曾同根於韋室, 那無花樹之歡.緬惟丙舍, 創之修之. 粤在甲周, 三去再去. 堂室頹圯, 陶元亮親戚情話之膝難容. 雲仍繁昌, 李文靖太祝奉禮之廳頗隘. 旣難仍於魯府, 爰經始於周臺.人協龜從, 雖獲九疇之大吉.力綿事鉅, 若擔千斤之重任.惟幸搏是瓦斷是材, 不借他山之土木.實賴有者財無者力, 樂用諸孫之誠心.寬敞軒房, 增制度於厥舊.輝映洞壑, 聳觀瞻於維新.毋徒曰人事之當然, 抑亦爲神明之攸助.苟合矣苟完矣, 奚論衛室之善居.美輪焉美奐焉, 允符張禱之聚族.鳳曆披而日月告吉, 虹榤掛而頌辭隨騰.兒郞偉抛樑東, 象頭初日滿簾紅.爲君誦獻如升句, 未獨姬家福祿崇.兒郞偉抛樑南, 牛山佳木翠森森.寄言子弟須勤學, 將此良心善養涵.兒郞偉抛樑西, 蓬、瀛鬱鬱與天齊.人而長壽還仙侶, 要在爲仁自强兮.兒郞偉抛樑北, 德城不改蒼蒼色.先靈陟降侍前王, 此處依然見故國.兒郞偉抛樑上, 奎宿何時瑞彩放.地運天休若相符, 佇看後進作鴻匠.兒郞偉抛樑下, 曾孫稼穡宜田野.釀成酒醴何馨香, 復有淸泉流不舍.伏願上樑之後, 棟宇長固, 邱壟永安.宗族相與雍和, 公藝之同居, 罔專美於古.孝敬豈不昌大, 山南之罕比, 復見於今. 숙사재(肅事齋) 현재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 송내 마을에 있다. 동복 현감을 지낸 전주 최씨 동복공(同福公) 최자목(崔自睦)을 비롯하여 12분의 시제(時祭)를 모시는 곳이다 건물이……되었도다 '당구(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줄임말로, 부조(父祖)의 창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함을 가리킨다. 《서경》 〈대고(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는 충숙왕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로 문하시중을 지냈다. 영주(瀛州) 전라북도 고부의 옛 이름으로, 영주산이 있다. 소윤(小尹) 최득지로, 호는 율헌(栗軒)이다. 사헌부 감찰, 한성 소윤 등을 지냈다. 분토동 정읍 고부면 분토동을 가리킨다. 칠보 전라북도 정읍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반등 고창의 반등산을 가리킨다. 동복공 최자목(崔自睦)으로, 최득지의 아들이다. 사직공 동복공의 당질 최강(崔崗)을 가리킨다. 덕촌 최희정(崔希汀)의 호로 자는 정지(汀之)이다. 직제학 최담(崔霮)의 후손이다. 진군의 정자 진군은 송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그의 대(代)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위장의……없겠는가 위장은 당나라 사람이다.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 하였다. 화수회는 친족끼리의 모임을 뜻한다. 병사 묘지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당실이……나누었으며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좁은 집이지만 편안하구나.……친척들과 정담 나눠 즐거워하고."라고 하였다. 자손은……좁았어도 이 문정은 송(宋)나라 태종(太宗) 때의 명재상 이항(李沆)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이항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 집이 앞마당에서 말 한 마리를 겨우 돌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초라하였는데, 어떤 이가 이에 대해 지적하자, 이항이 말하기를, "집은 자손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 집은 재상의 집으로는 누추하지만, 태축이나 봉례의 집으로는 매우 넓다.〔居第當傳子孫, 此爲宰相廳事誠隘, 爲太祝奉禮廳事已寬矣.〕"라고 한 일이 있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 태축과 봉례는 모두 제사를 맡은 태상시(太常寺)의 관직으로 재상의 자제들에게 내리는 음직이다. 노나라……어려웠으니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사재가 오래되어 그대로 쓰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나라 영대에서 시작하였네 《시경》 〈영대(靈臺)〉에 "영대를 짓기 시작하여 공사를 벌이니 서민들이 와서 일하는지라 하루도 못 되어 완공하였도다.〔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라고 하였다. 원거와 영대 두 구절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하는 재실을 후손들이 달려와서 도와 빨리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크게 길하다는 이치 구주(九疇)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가지 이치를 말한다. 여기서는 점을 쳐서 얻은 이치의 개념으로 번역하였다. 어이……논하랴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위(衛)나라 공자(公子) 형(荊)을 평가하기를, '그는 집안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 살림을 나서 재물을 소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모였다.」라고 하였고, 조금 더 장만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갖추었다.」라고 하였고, 부유하게 되자, 「이만하면 그런대로 훌륭하다.」 하였다.'〔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少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라고 하였다. 참으로…부합하네 앞의 〈사경재상량문(思敬齋上樑文)〉에 보인다. 상두산 정읍 태인에 있는 산이다. 여승(如承)의 구절 당(唐)나라 유변(柳玭)이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余見名門右族, 莫不由祖先忠孝勤儉, 以成立之; 莫不由子孫頑率奢傲, 以覆墜之. 成立之難如升天, 覆墜之易如燎毛. 言之痛心. 爾宜刻骨.]"라는 내용이 있다. 희가(姬家) 주나라의 성이 희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천자가 되기까지 매우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고생하였는데, 우리 집안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매우 조심해야 함을 이른다. 우산의……빽빽하네 《맹자》 〈우산장〉에서 인간의 본성을 우산의 나무에 비교하였으니, 아래 보이는 '양심'을 출처 근거가 된다. 봉래와 영주산 부안의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으로 불린다. 규성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열다섯째 별자리에 있는 별이다. 굴곡이 문자 획과 비슷해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것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전한다. 증손의……익어가는구나 《시경》 〈보전(甫田)〉에 "증손의 농사가 이엉 같고 수레의 끌채 같으며, 증손의 노적이, 모래톱 같고 언덕과 같은지라, 이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며, 이에 만 개의 수레 짐칸을 구하노니, 서직과 도량이, 농부의 복이라, 큰 복으로 보답하니, 만수무강하리로다.〔曾孫之稼 如茨如梁 曾孫之庾 如坁如京 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 報以介福 萬壽無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공예처럼……것이 장공예의 집안은 9대가 함께 살았는데,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그 집에 들러 그 많은 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묻자 장공예가 종이에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다. 그 뜻은 존장(尊長)의 의복과 음식이 고르지 않거나 아랫사람의 예절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다투게 되는데, 능히 서로 참는다면 집안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小學 卷6 善行》 최산남 최산남은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을 말한다. 최관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 부인(唐夫人)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형제와 자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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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79)의 〈오진영이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를 보고나서〉를 제2조로 첨부함 【1936년】 附田士狷〈觀吳震泳答金聖章書〉第二條 【丙子】 오진영이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 중에 이른바 "우리 문하에 간행의 다툼이 있는 이후로 내가 받은 무함의 죄안(誣案)이 종남산(終南山)과 나란할 뿐만이 아니네. 이것이 비록 스스로 공 경하고 삼가지 못해 불러들인 것이겠지만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 외에는 물증을 잡을 만한 것이 없네."라는 것은 앞뒤로 있었던 그의 일과 그의 편지를 일제히 없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전체의 국면을 총괄해 묶어서 호남의 두세 사람의 큰 죄안으로 만든 것이다. 지 금 또 그의 말을 따라서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을 제외하고, 단지 그의 지금 이 편지 중에서 진상을 파악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한다면 원통함이 없을 것인가? 이미 "연원과 선현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라고 말했다면 의리를 끌어대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 마땅한데, 지산 영감이 살아 계신 동안에 절교를 알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초상을 치른 뒤에는 여러 차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류(陽類 군자)가 없어진 것이 비통하고, 우리 무리들이 더욱 외롭게 된 것이 가슴 아프네."라고 하였으며, 또 돌아가 신 뒤에 달려가 아부하고자 하면서 말하기를, "김성구가 가벼이 참언(讒言)을 믿고서 상을 당했을 때에 부고하지 않으니, 사람을 부당하게 끊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네." 하였다. 과 연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면 연원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는 말이 또 어찌 그의 편지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이것으로나 저것으로나 죄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의 손에 서 만들어져 나와 더 이상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이 아닌 데에서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세상의 월조가(月朝家)에게 한 마디 비평을 내려주길 청하노라. 吳震泳稱答金聖章書中所謂"自有吾門刊閙以來, 震所得誣案, 不啻齊終南. 此雖不自敬愼所召, 湖南二三人舌尖筆尖外, 無可捉贓者矣", 是將前後渠事渠書, 一歸之於無之, 而總束全局, 作 湖南二三人一大罪案者也.今且從渠說除湖南二三人舌尖筆尖, 直從渠今此書中捉贓, 使渠伏 辜, 無寃可乎? 旣曰: "詆斥淵源先賢矣." 則宜其引義之不暇, 而志令生前, 旣不聞有告絶, 於 其喪後, 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 傷吾輩之益孤." 又欲趨附於身後而曰: "聖九輕信讒言, 遭喪不訃, 絶人不當, 若是無據." 果可如此, 則詆斥淵源之說, 又何以出於渠書也? 以此以彼, 罪有不容赦者. 從渠自手辦出, 非復湖南二三人舌尖筆尖而捉贓則在, 請世之月朝家下一評焉 전사견(田士狷) 간재 전우의 손자인 전일중(田鎰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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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김재술을 애도하는 글 悼族弟在述文 유세차 을해년(1935) 8월 8일 문중의 형 후창(後滄)이 글로써 아우 김재술(金在述)의 영전(靈前)에 애도하며 말한다.아아, 횡사(橫死)와 요절(夭折)은 육극(六極)에서도 첫 번째이니,177) 그 누가 억울하지 않으랴만, 하물며 이 사람은 부들이 아니고 난초이며, 돌이 아니고 옥석인데도 난초처럼 불타고 옥석처럼 깨졌으니, 이를 또 어쩌면 좋은가! 너는 나이 열다섯에 칠경(七經)을 다 읽었고, 열일곱에는 장편의 시를 지었으니, 난초에서 꽃이 피어나고 옥석에서 귀한 그릇이 나오기를 눈 비비며 기다렸다. 이처럼 사문(斯文)이 망하고 도학(道學)이 쇠퇴한 때를 당하여서, 네가 칠일 뒤면 싹을 틔우는 종자(種子)178)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였거늘 오늘에 이를 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진실로 함께 사는 온 세상의 선비들이 희망을 잃었구나.생각건대 오늘날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 선비를 재갈 물려 오랑캐로 만들고 사람을 억눌러 짐승으로 만드는데, 나이 젊은 초학자가 먼저 그 화를 당하는구나. 무릇 사람이 오랑캐나 짐승이 되어 장수를 누리기보다는, 선비가 되고 사람이 되어 죽는 것이 나은 줄은 눈이 밝은 사람이 아니어도 다 안다. 지금 네가 이미 오랑캐가 되거나 짐승이 될 화를 떨쳐 벗어버리고, 선비와 사람의 본래 면목을 온전히 지니고 돌아갔다. 후인은 너의 묘에 '고(故) 사인(士人) 김군(金君) 아무개의 묘'라고 하리라. 그런 즉, 불행하게 일찍 죽은 것은 얼마 안 되는 기간이고, 사람으로 죽은 행복을 길이 지니는 시간은 무궁할 것이다. 이것으로 구천에 있을 네게 위로가 되겠느냐? 아아, 슬프도다! 維歲乙亥八月八日, 後滄族兄爲文悼汝族弟在述之靈, 曰: 嗚呼! 凶短折居六極之首, 其孰不掩抑, 矧此非蒲伊蘭, 非石伊玉, 蘭樊玉碎, 又將奈何! 汝年十五誦貫七經, 十七能作舂容大篇, 蘭之抽花, 玉之成器, 拭目可俟。 當此文喪道衰之時, 七日種子於汝焉望之, 孰知今日以至於此? 此固幷世羣彦之所失望也。 顧今天地翻覆, 勒士爲夷, 壓人作獸, 而年少初學, 先受其禍。 夫人與其爲夷爲獸而壽, 不若爲士爲人而死, 不待明者而後知。 今汝旣己超脫乎夷獸之禍, 而全得士人本面而歸, 俾後人題其墓, 曰: 故士人金君某之墓。 然則不幸而夭者不幾時, 而幸福而長存者無窮期矣。 是可以慰汝於九原者耶? 嗚呼, 悲夫! 횡사와……첫 번째이니 《서경 홍범(書經 洪範)》에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을 열거하였다. 오복은 장수, 부유, 강녕, 덕을 좋아함, 올바르게 수명을 다함이고, 반대로 육극은 요절ㆍ횡사, 질병, 근심, 가난, 악함과 나약함을 말한다. 칠일……종자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칠일이 지나면 회복하는 것은 하늘의 운행이다'[七日來復, 天行也。]'에서 온 말로, 사물과 인사(人事)의 변환이 대개 7일을 한 주기(周期)로 일어나는 것이 천지자연의 법칙이므로 다시 양기(陽氣)를 회복하는 씨앗이 되어줄 희망을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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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 아우인 자유 김인술에게 곡하며 올리는 글 哭宗弟子由【仁述】文 묵재(默齋)거사 김군 자유(子由)가 별세함에, 종친인 늙은이 후창 김택술(後滄金澤述)이 그 장례를 와서 보았고, 다시 해를 넘겨 을해년(1935, 대한민국17) 4월 10일 을유날에 제문을 들고 묘 앞에서 통곡하노라.아아, 아우 자유야! 嗟嗟子由,어찌 이에 이르렀단 말이냐! 胡至此焉!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好學之難,옛날에도 찾기 어려웠는데 在昔猶然,하물며 지금 이 말세 어디에 矧玆叔季,그런 특출한 이가 다시 있겠는가? 孰復超倫?그런데 너는 배움에 임하여 而子於學,마치 팔진미인듯 좋아하며 嗜若八珍,다 알 때까지는 놓치 않고 不得不措,배고픔도 추위도 잊었지. 忘飢與寒.난형난제라고 너를 칭찬해도 以難許子,누구도 그것을 넘친다 말 안했지. 莫云其溢,시험이 있은 뒤에 칭찬 있다고 所試之譽,성인 공자께서 말씀하셨지.176) 聖人有曰.싹이 트고 이삭이 패었으니 旣苗而秀,이제 의당 그 열매 보려는데 宜見其實,아아, 아우 자유야! 嗟嗟子由,어찌 이리 홀연히 갔느냐! 胡此奄忽!너의 나이 열 아홉에 子年十九,공부하러 나에게 왔는데 就我講硏,뒤이어 스승님 별세하시고 屬當山頹,호남 영남이 갈려 시끄러웠지. 湖嶺紛紜.너는 말했지, 어린 제가 子謂後生,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莫適所從.널리 순후한 스승을 찾느라 博求純師,온 나라를 다 돌아다녔지. 殆遍國中.돌아와 나에게 사과하며 말했지 歸則謝我,망녕되이 다른 문에 발 들였다고. 妄涉他門,금과 철은 섞이지 않으니 金鐵不雜,문채와 실질을 함께 갖춘 이는 文質兼全,지금 이 세상에는 當今之世,선생님 한 분 뿐이니 先生一人,다른 모든 것 끊겠다고 斷斷無他,서신으로 하늘에 서약했지. 一書誓天.나는 본디 그런 사람 못 되는데 余固非人,네 아는 바가 부족하여 子豈知哲,나를 잘못 추앙하였으니 謾加推尊,너무나도 어리석었다 할 만하지. 適足痴絶.실답게 서로 돕는 것 實實相與,이것이 서로 보태는 학우인데 是爲互益,나를 따르는 학도들 蓋從我者,무려 수십 수백 명에 이지만 無慮十百,날이 갈수록 더 미더운 이는 久而愈信,바로 네가 그사람이었지. 惟子是獲.아아, 자유야! 嗟嗟子由,어찌 이리 끝낸단 말이냐! 胡至此極?아, 내가 공부를 하여 繄余爲學,도학의 명성은 비록 없지만 道雖無聞,심회 푼 시와 문장은 所述詩文,합하면 약간 여러 편이구나. 總若干篇.네가 다듬어 고치고 擬子筆削,모아 전해주기를 바랐었는데 庶不泯泯,어찌 알았더냐 오늘 이렇게 孰知而今,네가 남긴 글을 내가 고칠 줄을. 校子遺文.네 마음 담긴 글 만지는데 摩挲心畫,내 눈물 글씨 사이에 젖는구나. 淚入紙間.너는 외로운 가족에 태어나서 子生孤族,가문의 명성 키워주기 바랐는데 期昌家聲,용봉이 날다가 떨어져 내린 듯 龍顚鳳墮,박 차오름 중천에서 그쳤구나. 中天未騰,몇 권 책으로 허무하게 寂寥數卷,너의 평생을 끝마치니, 了子平生,이와 같이 멈추는 것이 若此而止,어찌 너의 본래 뜻이었으랴? 豈子素志?너의 아버님 서신 보내와 尊府書來,너의 원고 정리 말씀하시어 言子稿事,내가 미루어 늦추지 못하고, 余豈虛徐,아버지의 정 지극하여 爲父情至,남의 손 빌려 글씨 쓰니 書倩他手,너의 글을 어찌 할까? 子文何置.너의 정경 생각하면 言念情境,코가 시큰 거리는데, 替爲酸鼻.구천에 있는 너도 子於泉下,눈물 콧물 흐르겠지. 亦應涕泗.아아, 자유야! 嗟嗟子由,어찌 이렇게 길이 떠났느냐? 胡此永逝.중요한 단 한 가지 但有一焉,사람의 한 세상 삶은 人之生世,장수와 요절은 묻지 않고 莫問壽夭,행하여 지은 바가 귀하니, 有爲則貴,따뜻함과 배부름 백년 누려도 煖飽百年,삶의 무게에는 상관 없단다. 輕重靡係.너는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子縱無壽,이렇게 문장 남겨놓았으니, 遺此文字,가감승제 하고 남은 乘甲除乙,득실이 어떠한가? 得失何似.유명을 달리한 너의 한이 幽明之恨,이것으로 위로가 되는구나. 所慰者此.아아, 자유야! 嗟嗟子由,어찌 차마 말하랴, 尙可忍言,네가 떠나가고 나니 自子之逝,오른팔 잃은 듯하여 如失右肩,영결의 글 한 편을 一文永訣,지금까지도 미루면서 豈至此延,가슴에 감겨 얽힌 슬픔 悲纏于中,어찌 말할 줄을 몰랐구나. 不知所云.이제야 비로소 정회 재단하여 今始裁情,새 무덤에 와 아뢰니, 來告新阡,새 무덤이 어디인가 新阡于何,전날 네가 재계하던 곳이구나. 昔子營齋.세상 일은 미리 잴 수 없으니 事變莫測,생각하면 마음에 불 꺼져 식는구나. 思之心灰,너의 혼령이 있어 안다면 子如有知,나의 말 듣고 잔 들거라. 聽言飮盃. 默齋居士金君子由之沒也, 同宗後滄老夫澤述來視其喪, 復以翌年乙亥四月初十日乙酉操文, 一慟于其墓, 曰: 嗟嗟子由, 胡至此焉! 好學之難, 在昔猶然, 矧玆叔季, 孰復超倫? 而子於學, 嗜若八珍, 不得不措, 忘飢與寒。 以難許子, 莫云其溢, 所試之譽, 聖人有曰。 旣苗而秀, 宜見其實, 嗟嗟子由, 胡此奄忽! 子年十九, 就我講硏, 屬當山頹, 湖嶺紛紜。 子謂後生, 莫適所從, 博求純師, 殆遍國中。 歸則謝我, 妄涉他門, 金鐵不雜, 文質兼全, 當今之世, 先生一人, 斷斷無他, 一書誓天。 余固非人, 子豈知哲, 謾加推尊, 適足痴絶。 實實相與, 是爲互益, 蓋從我者, 無慮十百, 久而愈信, 惟子是獲。 嗟嗟子由, 胡至此極? 繄余爲學, 道雖無聞, 所述詩文, 總若于篇。 擬子筆削, 庶不泯泯, 孰知而今, 校子遺文。 摩挲心畫, 淚入紙間。 子生孤族, 期昌家聲, 龍顚鳳墮, 中天未騰, 寂寥數卷, 了子平生, 若此而止, 豈子素志? 尊府書來, 言子稿事, 余豈虛徐, 爲父情至, 書倩他手, 子文何置。 言念情境, 替爲酸鼻。 子於泉下, 亦應涕泗。 嗟嗟子由, 胡此永逝。 但有一焉, 人之生世, 莫問壽夭, 有爲則貴, 煖飽百年, 輕重靡係。 子縱無壽, 遺此文字, 乘甲除乙, 得失何似? 幽明之恨, 所慰者此。 嗟嗟子由! 尙可忍言, 自子之逝, 如失右肩, 一文永訣, 豈至此延, 悲纏于中, 不知所云。 今始裁情, 來告新阡, 新阡于何? 昔子營齋。 事變莫測, 思之心灰, 子如有知, 聽言飮盃。 시험이……말씀하셨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내가 만약 누구를 칭찬한다면 아마 시험해 본 바가 있을 것이다.[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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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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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사유 한응께 올리는 제문 祭李士裕【漢膺】文 유세차 기축년(1949) 12월 22일 갑술날에 시당(時堂) 이군께서 별세하셨습니다. 늙은 벗 김택술은 병 때문에 가서 곡하지 못하고 49일이 지난, 경인년 2월 11일 계해날에 깊은 애도의 글과 부족한 제수를 상가(喪家)의 집사께 보내드리며, 날짜 되면 궤연에 술 따르고 다음의 제문 읽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아아 슬프다! 嗚呼哀哉!내가 처음 만난 그대는 始余遇子,모습이 마치 옥이었네 如玉其人,말과 행동이 올바르고 言動稱是,천연의 고운 자질이었네. 美質自天.여행길에 만난 사람들이라 彼此于旅,품은 뜻 털어놓을 겨를이 없었고 不遑傾囷,여로에서 돌아온 후 서신 보내어 歸而致書,나눈 이야기 대략 천 마디였네. 蓋千餘言.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고 無言不到,펴 보이지 않은 마음이 없어 無心不披,면학의 일념을 말하고 勉學一念,바른 방향을 곧장 가리켰지. 直針南指.섬 오랑캐들 포학 심하여 島奴肆虐,유생의 관을 쓰고 못 다니니 儒冠難容,만나 머리 모을 길이 없이 盍簪無路,동과 서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 落落西東.지난 중광(重光)의 신미년169)에 往在重光,하늘이 고마운 바람을 놓아 天借好風,내 수레가 동쪽에 나아가 我車東征,드디어 서산(瑞山)170)에 이르렀네. 于瑞山中.의를 행하며 세상을 초탈한 行義超世,안풍(安豐)171)의 풍모 다시 보니 再見安豊,지식과 견해가 더욱 정밀해져 識見益精,전날의 어린 사람이 아니었네. 非前日蒙.나더러 말하길 연로해서도 謂余到老,세상 티끌에 물들지 않았다 하면서 不渝世塵,두류산172) 바람에 시 읊으며 頭流風咏,열흘을 함께 노닐었네. 追隨一旬.선인 문집에 글을 부탁하며 託以先集,천년을 전하기를 기대하시니 期傳千春,나는 알맞은 사람 아니었지만 余雖非人,그대는 미덕을 좋아하셨지. 子則好懿.큰 집173)에서 얼마전 물러나와서 鉅閭俄退,맺힌 울기 토해낼 만하건만 可吐鬱氣,우리의 궁색한 처지는 然吾儕窮,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니 前後一轍.얼굴 보는 것은 커녕 舍曰以面,서신도 자주 못 보냈네. 魚鴈亦豁,지난 가을 서신 보내오시어 昨秋書來,그대 오래 앓은 병을 알리고 知君積病,간과 담을 다 꺼내 보이며 呈露肝膽,속 마음 모두 다 말씀하셨네. 曲盡辭令.스승과 생도라 하기에는 曰師曰生,마땅치 않은 바 있으니 則非所當,벗의 도리로 서로 대하며 友道相處,어찌 힘써보지 않겠는가 寧可不蘉,이와 같이 회답하며 以是答去,뒷날 함께 밤 보내기 기다렸는데 俟後聯床,어허, 이런 말 주고 받은 편지가 咄此往復,영영 이별하는 장이 되고 말았네. 爲永訣場.증자(曾子) 말하길 인(仁)의 먼길은 曾聖有訓,죽은 다음에야 끝난다 하였네.174) 死而後已,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면 一息尙存,선비의 무거운 짐 못 벗는다니,175) 不懈于此.이것은 주자(朱子)의 말로 是爲朱子,증자의 가르침을 푼 것이네. 曾訓之釋.옛날과 뒷날의 누구에게도 古往今來,그대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네. 子無愧色.아, 아쉽다 나의 거친 공부는 嗟余蕪學,바른 연원을 물려받은 것이지만 縱出的源,살아서는 마음으로 주고받지 못했고 生無心交,죽어서는 전해 줄 길이 없네. 死無可傳,유명을 건너 서로 믿을 이 幽明相信,그대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만 孰復如君?죽은 이의 뜻은 지중한데 死者意至,산 사람의 정은 경박하여 生者情薄,단 한번 곡하는 제사에도 一哭之奠,직접 술잔 따르지 못하니 未由親酌,천년 아득히 긴 날 지나도 悠悠千古,이 큰 한이 어이 다할까? 此恨何極!아아, 슬프도다! 嗚呼哀哉! 維歲己丑之十二月二十二日甲戌, 時堂李君觀化之辰也。 老友金澤述病未往哭, 粤四十九日, 庚寅歲二月十一日癸亥, 寄深哀之文, 薄奠之需, 託喪家執事, 以至日酌酒讀文于象生之筵, 曰: 嗚呼, 哀哉! 始余遇子, 如玉其人, 言動稱是, 美質自天。 彼此于旅, 不遑傾囷, 歸而致書, 蓋千餘言。 無言不到, 無心不披, 勉學一念, 直針南指。 島奴肆虐, 儒冠難容, 盍簪無路, 落落西東。 往在重光, 天借好風, 我車東征, 于瑞山中。 行義超世, 再見安豊, 識見益精, 非前日蒙。 謂余到老, 不渝世塵, 頭流風咏, 追隨一旬。 託以先集, 期傳千春。 余雖非人, 子則好懿。 鉅閭俄退, 可吐鬱氣, 然吾儕窮, 前後一轍。 舍曰以面, 魚鴈亦豁, 昨秋書來, 知君積病, 呈露肝膽, 曲盡辭令。 曰師曰生, 則非所當, 友道相處, 寧可不蘉。 以是答去, 俟後聯床。 咄此往復, 爲永訣場。 曾聖有訓, 死而後已, 一息尙存, 不懈于此。 是爲朱子, 曾訓之釋。 古往今來, 子無愧色。 嗟余蕪學, 縱出的源, 生無心交, 死無可傳, 幽明相信, 孰復如君? 死者意至, 生者情薄, 一哭之奠, 未由親酌, 悠悠千古, 此恨何極! 嗚呼, 哀哉! 중광(重光)의 신미년 중광(重光)은 천간 신(辛)을 말하는데, 김택술이 이한응을 경오년(1930)에 처음 만나고, 이듬해 신미년(辛未年)에 두 번째로 만난 것으로 보인다. 서산(瑞山) 광주의 서석산(瑞石山 : 무등산)을 지칭하는 듯하다. 안풍(安豐) 안풍은 당나라 은사(隱士) 동소남(董邵南)이 주경야독하며 살던 곳이다. 여기서는 이한응이 농사지으며 글 읽는 집을 가리킨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김택술은 1924년 3월 19일에서 4월 7일 사이에 지리산을 유람했다. 큰 집 원문 '거려(鉅閭)'는 '큰 집, 큰 마을'로서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지 불분명한데, 경찰서나 감옥을 가리키지 않는가 의심된다. 증자……하였네 《논어》〈태백(泰伯)〉에 증자(曾子)가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인(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하였다. 목숨이……벗는다니 증자의 윗 말에 주희(朱熹)는 "(선비가) 한 목숨이라도 남아있으면 인(仁)에의 뜻을 조금도 늦추면 안 된다.[仁者……一息尙存, 此志不容少懈。]"라는 해설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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