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유인 김씨 묘표 祖妣孺人金氏墓表 아, 나의 조비 유인 김씨는 춘추 94세가 되어 병진년(1916) 3월 13일에 졸(卒)하였다. 나의 선고(先考)가 7년 먼저 임종하여 내가 삼가 승중복(承重服)을 입었는데 때에 구애를 받아 예월(禮月)을 기다려 안장하지 못하고 신산(新山)을 겨우 마련해 성복(成服)하고서 부장(赴葬)132)하고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달천리(達川里)에 있는 조고(祖考) 우신재(又新齋) 부군(府君)의 묘소에 합장(合葬)하였다.아, 나의 조비의 품행으로도 죽어서 효자의 집상(執喪)을 받지 못하고 또 예로 장사 지내지도 못하였으니 애통하도다. 내가 선군(先君)의 평소 뜻을 대신 이루어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여묘(廬墓)하고 상복을 벗은 뒤 7년째인 병인년(1926) 4월 13일에 같은 군 이평면(梨坪面) 한수리(漢水里) 뒤 건좌(乾坐) 언덕에 이장하였다.유인은 성품이 올곧고 전일하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장중하여 시집가기 전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20세 때 나의 조고에게 시집왔는데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모두 알맞은 도리를 얻었다.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수 없자 길쌈에 부지런하였는데 밤새도록 길쌈하느라 등불을 피워놓았고 그 불을 이용해 아침밥을 지었으니, 20여 년을 이렇게 하여 8섬지기 밭을 사서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가엾게 여기지 않아 갑자기 남편 상을 당하였는가. 당시 나의 선고는 겨우 9세로 혈혈단신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애통한 심정이 간절하여 기절했다가 소생하였다. 그러나 유인 자신은 반함(飯含), 염(殮), 장례, 제사를 모두 예로써 치렀다. 남편의 유지를 잘 헤아려 더욱 근검하여 하인을 독촉해 힘써 농사짓게 하고 자신도 길쌈을 하니 재산이 날로 더욱 여유로워졌다. 맛있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시어머니를 편안히 봉양하였으며, 스승을 맞이해 자식을 가르쳐 학문이 성취되어 이름이 드러났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한다."라는 것이 어찌 아버지에게만 그러한 것이겠는가.위로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시어머니를 섬기는 일부터 아래로 하인을 부리고 이웃과 사귀는 일까지 평소 경서나 역사서를 배운 일이 없는데도 자연히 절도에 맞았다. 안으로는 기름, 소금, 메주, 채소 등 사소한 물건부터 밖으로는 전토(田土)와 금곡(金穀) 등 크고 번잡한 것까지 또한 사령(使令)을 의지하지 않고 친히 그 수량을 다 헤아렸다. 이는 대개 뜻이 견고하고 힘이 안정되어 이미 수절(守節)하는 우뚝함이 있었고 집안을 보호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었으며, 식견이 밝고 재주가 민첩하여 역시 일을 처리하는 법칙이 있었고 남을 응대하는 지혜가 있었다.아, 나의 조비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수고하여 가업을 일으키고 만년에는 또 정절(貞節)을 수립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길이 제향(祭享)을 받고 아래로는 자손이 그 은혜를 받았으니 조비의 공과 덕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시인의 "아, 잊지 못하겠네."133)라는 시구(詩句)가 어찌 왕가(王家)만 그러한 것이겠는가. 또 대저 사람은 삼강(三綱)이 있는데 열행(烈行)이 그중 하나를 차지한다. 유인의 열행이 인도(人道)를 극진히 하고 강상(綱常)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일을 기록하는 자가 그 점을 써서 후세에 본보기를 전해야 하고, 비단 후손이 잊지 않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세계(世系)는 영광(靈光)에서 나왔다. 고려조의 명신(名臣)인 문안공(文安公) 심언(審言)의 후손이고, 본조의 충신인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세손이고, 효자(孝子) 통정대부(通政大夫) 택려(宅麗)의 따님이다. 모친은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근혁(根爀)의 따님이다. 태어난 날은 순조(純祖)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4일이다. 나의 조고인 부안 김공 휘 경순(景淳) 자 명헌(明憲)은 세계가 그 묘표에 갖추어져 있다.1남 낙진(洛進)은 학행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었다. 3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광산(光山)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갔는데 열행이 있었고, 계녀(季女)는 함안(咸安) 조기용(趙基鏞)에게 시집갔다. 내외 손자에 대한 기록도 역시 조고의 묘표에 상세하다.아, 유인의 성품과 행실은 진실로 장중하고 꿋꿋하고 굳세었으나134) 마음 씀씀이는 도리어 관대하고 화평하였으며 자애롭고 은혜로웠다. 이 때문에 종복이 잘못을 저지르면 비록 엄하게 꾸짖고 용서하지 않았으나 곧바로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이치로 깨우쳤다. 일상에서 먹고 입는 것은 비록 터럭만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집안이나 곤궁한 이웃은 모두 은혜에 감격하였으니 이에 인덕(仁德)을 볼 수 있고, 수명이 90여 세에 이른 것은 성인의 말에서 징험할 수 있다.135)손주를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나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렸을 때는 성취를 기대하고 장성해서는 편안하고 왕성하기를 바라 모든 말과 염려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어 학문은 몸을 수양하지 못하고 가업은 남겨 주신 것을 지키지 못해 지극한 은혜를 저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대신 봉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조금밖에 올리지 못하였고 땅을 골라 이장할 때는 계획이 엉성하였으니 더욱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웠다. 나의 나이가 60에 가까워 질병이 점점 심해져서 하루아침에 죽어 조비의 평소 사행(事行)과 함께 전해지지 않고 민멸될까 깊이 두려웠다. 이 때문에 일찍이 보고 들은 것을 드러내 써서 묘비 뒤쪽에 갖추어 새긴다. 기묘년(1939) 계동(季冬) 유인의 생신에 손자 택술이 삼가 짓는다. 嗚呼! 我祖妣孺人金氏, 春秋九十有四, 而卒於丙辰之三月十三日。以我先考先七年而歿, 不肖祗服承重, 以時拘, 不能待禮月窆, 新山僅經, 成服赴葬, 合封於井邑郡德川面達川里祖考又新齋府君之墓。嗚呼! 我祖妣之行治也, 而沒不得孝子之執喪, 又不得葬之以禮, 痛矣哉! 不肖替遂先君素志, 廬墓側三年, 服闋後七年丙寅四月十三日, 移葬于同郡梨坪面漢水里後坐乾原。孺人稟性貞一, 持身端莊, 自在家時, 有令譽。年二十, 歸我祖考, 爲婦爲妻, 咸得其道。家貧無以爲生, 則勤於紡績, 績燈達夜, 因其火朝炊者, 餘二十年, 買得八石種落, 調度稍裕, 夫何遭天不吊, 遽當晝哭? 時我先考甫九歲, 孑然單矣, 大厦棟摧, 尙何言哉? 痛崩迫切, 絶而復甦。己則含歛葬祭俱以禮。克體夫子遺志, 益復勤儉, 課僮力穡, 身且執績, 業日加裕, 甘旨畢備, 尊姑安養, 延師敎子, 成學彰聞, 古所謂善繼述者, 豈獨於父然也? 上自奉先事姑, 下至御僕交隣, 素無資書史, 而能自中節, 內自油塩豉菜之微末, 外至土田金穀之巨煩, 亦不待使令, 親悉其數, 蓋志堅力定, 旣有守節之卓, 保家之難; 識明才敏, 亦有處事之則, 應物之智也。嗚呼! 我祖妣始而勤勞起業, 晩又樹立貞節, 上而祖宗永其享, 下而子孫受其賜, 惟功與德, 莫與之京, 詩人之於戲不忘, 豈惟王家然也? 且夫人有三綱, 烈居其一, 孺人之烈, 能盡人道扶綱常, 則宜有秉筆者書其事, 垂法來世, 不但後承之不忘已也。系出靈光。麗朝名臣文安公審言後, 本朝忠臣大護軍該九世孫, 孝子通政宅麗女。妣咸陽朴氏, 根爀女。其生純祖癸未十二月四日。我祖考扶寧金公諱景淳字明憲, 世系具在其墓表。一男洛進, 有學行, 遺集刋行。三女: 長適光山金在浩, 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季適咸安趙琪鏞。內外孫錄, 亦詳祖考墓表。嗚呼! 孺人性行, 固莊毅堅拙, 乃其用心, 却寬和慈惠, 是以家衆有過, 雖嚴訶不貸, 而旋卽解顔, 喩之以理。日用喫著, 雖毫不妄費, 而貧族窮隣, 莫不懷恩, 斯可以見仁德, 而其壽至耄期者, 有徵於聖言也夫! 愛孫切至, 於不肖尤焉。幼而期望成就, 長而冀祝安旺, 言言念念, 無所不至, 而不肖無狀, 學不成身, 業未守遺, 靠負至恩。父沒替養, 甘旨薄略, 擇地緬襄, 局面低拙, 尤極痛恨。年近六旬, 疾病侵尋, 深恐一朝溘然, 幷與平日事行, 而泯沒無傳。故玆表書所嘗見聞者, 用備刻于墓碑之陰。己卯季冬孺人生辰, 孫澤述謹撰。 부장(赴葬):가난이나 다른 사정으로 빨리 장사 지내는 것이다.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소(疏)에 보인다. 아 잊지 못하겠네:시인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아, 전왕을 잊지 못하겠네.[於乎 前王不忘]"라고 읊은 시에서 따온 말이다. 《詩經 周頌 烈文》 굳세었으나:원문은 '堅拙'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拙'은 오류가 있는 듯하다. '拙'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성인의……있다:《논어》 〈옹야(雍也)〉에 "어진 자는 장수한다.[仁者壽]"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