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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중 봉화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姜和中 鳳和 己卯 저는 재주가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방법도 알지 못하여 사람들이 저를 끼어주지 않습니다. 다만 떳떳한 성품이 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능히 호오(好惡)128)를 알기 때문에 원수와 적들이 앞에 가득하고 화와 근심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허물이 될까 두려워하여 저를 멀리합니다.오직 그대만이 멀리서 돌아봐주시고 또 편지를 보내시어, "총명하고 특달(特達)함이 남쪽 조선에서 뛰어나고, 신독(愼獨)하고 진실함이 후진들의 법칙이 된다"는 등의 말로 칭찬해 주셨습니다. 좌하(座下)께서는 구차하게 사람을 칭찬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이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미워해도 살피시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129)그러나 살펴도 가히 취할만한 것이 없으면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에 끝내 귀결되지 않겠습니까?130) 심지어는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겸손하시어 천근(淺近)한 저의 학문에서 얻은 것을 살펴보기에 이르러서는, 이는 진실로 옛날 군자가 학문에 민첩하고 하문(下問)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돌이켜보면 내 마음에 얻은 바는 없지만 어찌 이로 인하여 평일에 듣는 것을 받들어 올려서 성대한 뜻을 체인(體認)131)하고, 아울러 저의 소견을 그대에게 질문하지 않겠습니까?주자가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대체로 학문을 할 때는 다만 한 개의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기를 요하여, 저것인 비(非)를 버리고 이것인 시(是)를 취하기를 요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시(是)와 비(非)는 마음이 있을 때는 천리와 인욕의 기미(機微)이고, 일에 있어서는 득실의 관문이 되며, 말을 들을 때는 사특함과 정도의 차이이며, 사람을 볼 때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입니다. 그러니 이 네 가지에 있어서 분명하게 눈을 붙여서 어떤 것이 리이고, 득이고, 정도이고, 군자이며, 어떤 것이 인욕이고, 실이고, 사특함이고, 소인인가를 간파하여야 합니다.진실 되게 힘을 써서 극복하고 또 행하거나 그치며, 부척하거나 물리치며 친하거나 소원하게 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분별하여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132)이 말이 주자의 본 뜻에 어긋나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힘쓰는 나머지, 또한 이 말로 그대의 요청에 우러러 색책(塞責)133)하고자 합니다. 진실로 그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134) 예로부터 세속의 풍습에 갇히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 하기 어려우니, 혹 조금이라도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 있으면, 행여 그릇된 견해와 망령된 말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이 네 가지에 뜻을 더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僕材不逮人, 學不知方, 人所不齒.徒以彝性不泯, 猶能知好惡, 故仇敵滿前, 禍患隨後, 人皆恐爲所累而遠之.惟座下旣垂遠顧, 又致耑書, 以聰明特達, 出於南鮮, 愼獨眞實柯則後進等語稱之.座下非苟譽人者, 是必出於衆惡必察之公心.然察之而無可取, 則不終歸於一言之不知乎.至於過自撝謙而求見淺學之所得,則是固古之君子敏學下問之事.顧雖無自心之所得, 豈可不因是而奉獻乎日之所聞.以體盛意而幷質所見也哉, 朱夫子有訓曰, 大凡爲學只要分別一箇是非, 去彼而取此耳.竊惟所謂是與非者, 在心則爲理慾之幾, 在事則爲得失之關, 聽言則邪正之異也, 觀人則君子小人之別也.於此四者, 明著眼而見得熟爲理得正與君子, 孰爲慾失邪與小人.實用力而克復之, 行止之, 扶斥之, 親疎之, 則是所謂分別而去取也.不知此不爽朱子本旨否乎.而區區自勉之餘,亦欲以此仰塞尊請.固知其爲已見之昭陵, 從來世風易囿, 化質難盡, 或有一分坐在者, 幸勿以爲錯見妄言, 而不妨加意於此否. 호오(好惡)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며,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고 하였다. 본문의 중오필찰(衆惡必察)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衆惡之 必察焉〕"라고 하였고,《맹자》〈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 만하다고 말한 뒤에 살펴보아 죽일 만한 점을 발견한 뒤에 죽여야 합니다.〔國人皆曰可殺然後, 察之 見可殺焉然後, 殺之.〕"라고 하였다. 한마디 말로……않겠습니까 《논어》〈자장〉에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기도 하므로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체인(體認) 마음속으로 깊이 이해하여 부응함이다. 진실……것입니다 극복한다는 말은 극은 인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행지(行止)한다는 것은 득 있는 것을 행하고 실수한다는 것을 그친다는 것이고 부척(扶斥)한다는 것은 정도를 붙들어 올리고 사특함을 배척한다는 것이며, 군자를 친애하고 소인을 멀리한다는 것이다. 색책(塞責) 책임을 벗기 위하여 겉만 둘러대어 꾸미는 것이든지, 어떤 요청에 부응하여 책임을 면하는 것이다. 본문의 소릉(昭陵)은 《新唐書 卷97 魏徵列傳》에 나오는 말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 태종이 문덕황후를 그리워한 나머지 그녀가 묻힌 소릉을 바라보려고 원중(苑中)에 층관(層觀)을 지어 놓고는 때때로 관망하다가 하루는 위징(魏徵)과 함께 올라갔는데, 위징이 "신은 눈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종이 손으로 소릉을 가리켜 보여 주자, 위징이 "이 소릉 말입니까?"라고 반문하기에 태종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위징이 "신은 폐하께서 멀리 있는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과 같은 것은 신이 벌써 보았습니다.〔臣以爲陛下望獻陵, 若昭陵, 臣固見之.〕"라고 답하였는데, 태종이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층관을 헐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헌릉(獻陵)은 태종의 부친인 당 고조의 능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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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함 동영에게 답함 임오년(1942) 答姜敬涵 東泳 ㅇ壬午 만년에 공부의 효과를 거둔다는 말씀에서 족히 진학을 부지런히 하신 뜻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우물을 팔 때에도 샘을 얻기에 도달하기 어렵고, 석가산을 쌓을 때도 한 삼태기 때문에 쉽게 그르칩니다. 이와 같이 선비는 항시 만년에 이지러집니다. 《시경》에서 이르길, "모두가 시작은 있지만 끝은 능히 마치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135)애시(哀侍)136)는 이미 이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고 맹서할 줄 아시니,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도, 이에 은혜로운 가르침을 이 과루(寡陋)한 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서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노년에 이르러서는 경계함이 득실에 있다"137)라고 하셨습니다.애시는 나이가 오순(五旬)에 가까운즉, 역시 점차 늙어갑니다. 가정의 일을 짊어지는 것은 비록 그만 둘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의 생각과 일에서 항상 모름지기 재산을 보존하고 생계를 꾸리는 일을 줄이고 학문을 쌓고 덕을 세우는 분수를 더해나가야 합니다. 요컨대 한가지의 일삼음이 있은 연후에138) 거의 가히 만년의 공을 거둘 수가 있을 것이니, 행여 이 말로써 뜻을 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收功晩節之喩, 足見進學彌勤之意.蓋井難及於得泉, 山易虧於一簣.士常失於晩節.詩所謂鮮克有終者此也.哀侍旣以此自知戒誓,則宜無靠於別人, 乃以惠敎望此寡陋者何哉.雖然竊嘗聞孔子之訓曰, 及其老也, 戒之在得.哀侍年近五旬, 則亦己向老矣.擔任家務, 雖不可己, 於日間意念事行,常須减却保産營生分數.添却積學立德分數,要有一段必有事焉然後, 庶可以收晩節之功矣, 幸以此加意如何. 시에서……했습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 편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을 믿을 수 없도다.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그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도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하였다. 애시(哀侍) 서간문에서 흔히 쓰는 말로, 거상(居喪) 중에 있으면서 홀아버지나 홀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는 어머니 상 중에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노년에……있다 《논어》 〈계씨(季氏)〉에 "군자에게 세 가지 경계함이 있으니, 젊을 때엔 혈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경계함이 여색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한창 강하므로 경계함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므로 경계함이 얻음에 있다.〔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斗, 及其老也, 血氣既衰, 戒之在得.〕"라고 하였다. 본문의 '필유사언(必有事焉)'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장(浩然章)에 보이는 말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에 반드시 종사하여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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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계유년(1933) 與族弟希淑 癸酉 전서(前書)에서 유시하기를 "창응(蒼鷹)은 시렁에 있어도 청산에서 날기를 꿈꾸고, 늙은 천리마는 마구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먼 길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뜻과 이 꿈은 곧 공자(孔子)가 도(道)를 행하고자 하여 주공(周公)을 본 것과 같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고자 함이니, 어찌 이 뜻과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만약 추풍(秋風)이 높지 않은데 창응이 산에서 날고, 얼음이 녹지 않았는데 천리마가 길에서 달린다면 병들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러니 우선 그 날개를 다듬고 그 발을 가뿐하게 하여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옛날의 현재(賢才)가 재덕(才德)을 감추고 은둔하면서 태평을 기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견해도 이렇게 마음에 정산(定算 결정함) 한지 오래되었을 것이다.듣자 하니 여산(黎山)에 사는 동족 기백(基伯)이 나에게 문장을 지어서 군(郡)의 일로 선조(先祖)의 사당을 건립하는 의론을 발기하라고 말해놓고, 조정의 명령으로 서원을 철폐했는데, 옥사(屋社)22) 후에 신설하는 것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장을 쓰거나 의론을 일으키는 것 모두 나에게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편치 않다고 말한 것은 실로 나의 뜻과 같다. 일찍이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미 철폐된 서원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설의 경우 조정의 명령과 관계가 없으니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나재(懶齋)와 함재(涵齋) 두 어른의 설이고, '이미 철폐된 것도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김성구(金聖九)의 설이다. 선사(先師)께서 어떤 사람에게 서원의 터에서 단향(壇享)하는 것을 허여한 것이 〈연재설(淵齋說)〉에 보이는데, 다시 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린 일이 대고(大稿)에 보인다. 신설 여부에 대해서는 선사의 정론을 당일에 듣지 못했으니, 부디 잘 생각해서 고견을 알려주는 것이 어떠한가? 前書喩以蒼鷹在架, 夢飛靑山, 老驥伏櫪, 志在長途.此志此夢, 卽孔子之欲行道而見周公也.士生斯世, 幼而學之, 壯而欲行之, 安得無此志此夢也? 然若秋風未高, 鷹飛于山, 氷凍未解, 驥走乎程, 其不見病也者幾希.且可刷其翮輕其足而俟之.古之賢才, 所以抱藏才德隱遯俟淸者此也.想高見以此定算于中者久矣.聞黎山族基伯, 謂我作文發起於郡事先祖建祠之議, 而以朝令掇院, 屋社後新設爲未安云.以文以發, 俱我無是.然其所云未安者, 實吾意也.嘗以此問人, 則以爲旣掇之院不可以復.若新設則非關朝令, 可爲之者, 懶涵兩丈說也.旣掇者猶不敢復, 况新設乎者, 金聖九說也.先師許人以院址壇享, 見淵齋說, 復以書止之事, 見大稿.而新設與否, 未聞定論於當日矣, 幸入思議, 示以高見如何? 옥사(屋社) '옥사(屋社)'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는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여 천지의 기운이 통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天子大社 必受霜露風雨 以達天地之氣也 是故喪國之社屋之 不受天陽也〕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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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으로 돌아가는 윤경습【영학】을 전송하는 서문 【병오년(1906)】 送尹卿習【永學】歸會寧序 【丙午】 지난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선조(宣祖)께서 나의 12대 종조(從祖) 운강공(雲江公 김계(金啓))에게 명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삼았는데, 대간(臺諫)이 자격이 미달한다고 논하자, 임금께서 이를 굳게 거부하였고, 고봉(高峯) 기문헌공(奇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이 또한 말하기를,"회령은 무관 당상(堂上)의 직임이니, 김모(金某)의 직임은 품계를 뛰어넘었고, 문관을 무관의 직책에 등용하는 것은 문신을 대우하는 법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변방의 근심이 이미 깊으니, 실로 그 직임이 어렵다. 지금 적합한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품계의 차서를 논하겠는가?"하시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보고 변방의 근심이 되는 회령이 과연 어떠하기에 임금께서 조정의 의론을 굳게 거부하고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신 것인가 의아해 하였다.어느 날 벗 윤경습(尹卿習)이 회령에서 나를 방문하자, 내가 회령의 경계와 형세에 대해 듣기를 원하니, 경습이 말하기를,"회령부는 두만강이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 강 밖으로 후춘(後春), 금굴(金窟) 등과 같은 지역은 지금 모두 청나라와 러시아의 소굴이 되었고, 목릉(穆陵) 연간에는 몽고와 여진의 유민들이 뿔을 당기며 서로 자웅을 겨루어 두만강 이북이 하루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우리의 경계에 거주하는 여러 오랑캐들이 또 회령과 경흥(慶興) 사이에서 재앙을 일으키니, 우리 회령이 외부의 침입을 근심한 지가 오래 되었다."하였다. 내가 그 지세를 듣고 시대를 참고하니 근심스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성조(聖祖)께서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서 결정한 계책이 진실로 마땅하였다. 이윽고 경습이 돌아갈 때에 시를 지어 나를 권면하니, 내가 한 마디 말로 보답하였다."회령은 그대가 사는 곳이니, 내가 청컨대 변방의 근심에 대한 설로 비유하겠네. 융경의 시대에 변방의 근심이 회령에 있었으나 성조께서 낸 계책에 힘입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정과 재야, 국내와 국외에 변방과 같은 근심이 아닌 것이 없지만 나에게 관직이 없으니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네. 그러나 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은 내가 그 책임을 사양할 수가 없네.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외부의 유혹이요, 객기(客氣)라네. 외부의 유혹은 외적(外敵)이 속이는 것이고, 객기는 외적이 침략하는 것이니, 방종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라나도록 내버려 둔다면 속이는 것들은 장차 나를 능욕하고 압박하려 할 것이며, 침략하는 것들은 나를 발로 차고 짓밟으려 할 것이니,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대저 군주가 외적을 막는 것과 학문을 하는 자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그 이치가 같다네. 나에게 뜻이 있는 것은 군주에게 장수가 있는 것과 같고, 나의 모든 신체는 군주의 삼군(三軍)과 같으니, 먼저 반드시 나의 뜻을 정립하는 것은 왕이 남중(南仲)에게 명하여 삭방(朔方)에 가서 성을 쌓게 하는 것2)과 같고, 뜻이 정립됨에 따라 모든 신체가 명령을 따르는 것은 목야(牧野)에서 군사에게 맹세함에 따라 천 명 백 명의 군사가 짧은 창을 들고 긴 창을 세우는 것3)과 같네. 속이는 것들은 나의 정대함을 지켜 제압하고 복종시키되 마치 문덕(文德)을 크게 펴자 유묘(有苗)가 와서 복종하는 것처럼 하고4), 침입하는 것들은 나의 의리를 행하여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하되 마치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 법을 간략하게 하여 진나라의 포학한 정치를 없애는 것처럼 해야 하네.5)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이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학문을 하는 자는 여기에서 힘써야 할 바를 알 수 있네. 또 회옹(晦翁)의 말을 기억하건대, '중원 땅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 내 한 몸의 사사로운 생각은 없애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건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외적을 막을 수 있지만, 외적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네.지금 우리 그대는 뜻이 정해지고 사학(斯學)의 본원이 이미 확립되어 외부의 유혹과 객기의 근심이 적을 것임을 나는 진실로 알고 있네. 그러나 하늘까지 넘쳐나는 물과 온 들판을 태우는 불은 졸졸 흐르는 물과 살살 타오르는 불꽃에서 시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우리 그대는 돌아가서 더욱 자기 자신을 이기는 공부에 힘써서 외유와 객기의 싹이나 맥락이 내 몸 한 쪽에 몰래 숨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회옹의 이른바 '없애기 어렵다'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쉬운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만약 조정에 섰을 때에 나라에 변방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그것이 만연하여 도모하는 것이 어렵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오늘날 뽕나무 뿌리를 벗겨서 둥지를 얽을 수 있는 것6)처럼 하고, 우리 선조가 운강공에게 회령을 맡긴 것처럼 할 것이 틀림없음을 나는 알고 있으니, 우선 이렇게 써서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겠네." 往在隆慶己巳, 宣祖命我從十二世祖雲江公爲會寧府使. 臺諫論以資格未準. 上牢拒之. 高峯 奇文憲公, 亦言: "會寧武夫堂上之任, 金某仕越其階, 文用武職, 非待文臣之揆也. " 上曰: "邊憂旣深, 實難其任. 今得其人, 何論階次?" 終不允余. 嘗觀此疑會之爲邊憂, 果何如, 而上之牢拒廷議, 斷自宸衷, 如是之決也. 一日尹友 卿習, 自會寧過余. 余願聞會之疆域形勢. 卿習曰: "會之爲府, 豆滿之江, 經其西北, 此江以外, 如後春、金窟等地, 今皆爲淸、俄窟宅. 在穆陵年間, 蒙古、女眞之遺種, 猗角相雄, 豆滿以北, 無日不風塵. 諸胡之居我界者, 又作孼於會寧、慶興之間. 蓋吾會之憂外寇者久矣. " 余聞其地勢, 參以時代, 其有可憂者可知, 而聖祖綜覈之算, 固其宜也. 已而卿習將歸, 贈詩以勖余, 余報之以一言曰: "會寧子之居也, 我請以邊憂之說喩之. 隆慶之世, 邊憂在於會寧, 而賴聖祖之成算. 逮夫今日, 朝野中外, 無非邊憂, 而我無官守, 則我不敢言. 至若邊憂之在我, 則我不得辭其責也. 邊憂之在我者何? 乃外誘也, 客氣也. 外誘, 寇之詐譎者也; 客氣, 寇之衝突者也. 縱而不治, 任其滋長, 則詐譎者, 將陵壓矣; 衝突者, 將蹴踏矣, 可不憂哉? 夫人主之禦寇, 學者之克己, 其理一也. 吾之有志, 如君之有帥; 吾之百體, 如君之三軍. 先要立定吾志, 如王命南仲, 往城于方; 志立而百體從令, 如誓軍牧野, 千夫百夫, 稱戈立矛. 詐譎者, 守吾正大而制服之, 如誕敷文德, 有苗來格; 衝突者, 行吾義理而掃淸之, 如入關約法, 除秦暴虐. 苟能若此, 邊憂之在我者, 何足憂乎? 學者於此, 可以知所勉矣. 抑又記晦翁之言曰: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意難除. ' 由此觀之, 克治其己者, 必禦外寇; 能禦外寇者, 未必克己, 亦可知已. 今吾子志定, 斯學本原旣立, 外誘客氣之憂, 吾固知其小. 然滔天燎原, 未嘗不始於涓涓焰焰. 吾子歸而益加克己之功, 使二者之苗脈, 不容潛藏於一邊, 則晦翁所謂難除者, 亦將不難矣, 況其易者乎? 如使立人之朝, 而國有邊憂, 則吾知其不使蔓延難圖, 如今日之爲能撤桑綢戶, 如我宣祖之任會寧於雲江公也必矣, 姑書此而俟之. " 왕이 …… 것 《시경》 〈소아(小雅) 출거(出車)〉에 "왕이 남중(南仲)을 명하사 삭방에 가서 축성하게 하시니 수레를 냄이 많고 많으며 깃발이 선명하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목야(牧野)에서 …… 것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제후들을 규합하여 목야에서 은왕(殷王) 주(紂)와 싸우기 전에 군사들에게 맹세했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書經 牧誓》 속이는 …… 하고 순(舜) 임금이 우(禹)를 시켜 유묘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유묘가 완강히 저항하자 군대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문덕(文德)을 더욱 닦고 양쪽 섬돌에서 춤을 추니, 70일 만에 유묘가 와서 항복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書經 大禹謨》 침입하는 …… 하네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진(秦)나라의 보물 창고를 봉하고서 그곳의 장로들에게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와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죄에 맞게 처벌하겠다는 세 가지 약조를 맺어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를 일소하고 민심을 크게 얻은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뽕나무 …… 것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이 장맛비를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둥지의 문을 칭칭 감는다면, 이제 너희 아래 사람들이 혹시라도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말로,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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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족보》 서문 【간재 선생을 대신하여 짓다. 임자년(1912)】 《星州李氏族譜》序 【代艮齋先生作. 壬子】 씨족이 족보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주관(周官)은 나라의 세대를 잇는 직책을 맡았고7), 정자(程子)는 친족을 수록하여 풍속을 도탑게 하라는 가르침을 두었다. 대체로 위로는 유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돈독히 하고, 옆으로는 분파(分派)까지 그 은혜를 독실하게 하는 것으로는 족보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씨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성산 이씨(星山李氏)가 우리나라에 드러난 것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부터 이미 그러하여 이름난 정승[名卿]과 큰 스승[碩匠]이 역사서에 빛나고, 예천(醴泉)의 근원과 영지(靈芝)의 뿌리에서 갈래가 많아지고 가지가 번성하듯 훌륭한 조상에서 수많은 자손이 나와 각 도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지난 날 순조(純祖) 경인년(1830)에 대보(大譜)를 만든 뒤로 다시 수찬할 겨를이 없게 된 지 지금 8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먼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갑자기 모이기 어렵게 되었으니, 친함이 다하여 길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탄식이 진실로 염려할 만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이씨의 제공(諸公)들이 파보(派譜)를 편찬한 이유이니, 친한 종족으로부터 먼 종족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고 이를 만하다.족보를 수찬하는 중요한 뜻이 삼가 생각건대, 여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자신에게 두터이 하고 후손에게 넉넉하게 해야 비로소 선(善)을 다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하였다. 내가 이씨 선대의 덕행을 살펴보건대, 농서공(隴西公)의 공경과 검약ㆍ문열공(文烈公)의 충성과 정직ㆍ경원공(敬元公)의 겸양ㆍ문경공(文敬公)의 도학(道學)ㆍ 귀암공(龜巖公)의 효성과 우애와 같은 것들은 모두 후대의 본보기가 될 만한데, 하물며 후손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지금 이 족보에 기록된 제공들이 가깝게는 자신의 몸가짐과 집안에서의 처신으로부터 조정에 서서 세상에 보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선대의 덕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욕됨이 없기를 기약한다면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들이 저절로 응당 예의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고, 사업에 조처하는 것들이 반드시 도의에 꼭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을 후손들에게 미루어 가서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선대의 공열을 빛나게 드러내고 후손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도가 이에 성대해질 것이다. 이것으로 보건대, 또 어찌 계통을 밝히고 친족을 수록하는 것으로 근본을 돈독히 하고 은혜를 도탑게 하는 바탕을 삼아서 족보를 수찬하는 것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서문을 써서 이공 병민(李公秉玟)의 청에 부응한다. 族之有譜, 其來遠矣. 周官掌邦國繫世之職, 程子有收族厚俗之訓. 蓋上溯所自, 以敦其本, 旁及所分, 以篤其恩者, 莫切於譜, 而有族之不容已者也. 星山 李氏之顯於東方者, 自羅、麗已然, 而名卿碩匠, 光史耀乘, 醴源芝根, 派衆枝繁, 散在各省者, 不億其麗矣. 往在純廟庚寅大譜之後, 不遑再修者, 今爲八十餘年之久, 而雲仍彌蕃, 猝難湊合而親盡塗人之歎, 誠爲可慮. 此今日李氏諸公派譜之所爲編也, 可謂由親及遠而當務爲急矣. 至於修譜之要義, 竊謂不在於此而已. 必也紹厥先懿, 禔之於身, 而裕之於後, 乃爲盡善也. 故《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 余觀李氏世德, 如隴西公之恭儉、文烈公之忠直、敬元公之謙退、文敬公之道學、龜巖公之孝友, 皆可爲來世之準繩, 況在於後承乎? 今諸公之譜於斯者, 近自持身處家, 以至立朝酬世, 苟能念念先德, 期於無忝, 則發於言行者, 自應不背於禮矣, 措諸事業者, 必將脗合於道矣. 以此推及於後承, 而莫不皆然, 則其光闡先烈燕翼來昆之道, 於斯爲盛. 此又豈可以明系收族爲敦本篤恩之地, 作修譜能事而已哉? 於是乎序之, 以副李公 秉玟之請. 주관(周官)은 …… 맡았고 주관은 《주례(周禮)》 〈소사(小史)〉에 "소사는 나라의 기록을 관장하여 계세(繫世)를 정하고 소(昭)와 목(穆)을 분변한다.〔小史掌邦国之志. 奠繫世, 辨昭穆.〕"라는 기록에 의하면 소사(小史)를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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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 노공 묘표 계사년(1953) 百泉盧公墓表【癸巳】 옛날 나의 선사(先師) 간옹(艮翁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은 학문이 주밀하고 도가 정밀하여 당세의 종장(宗匠)이 되었는데 그 종지(宗旨)로 말하면 '성사심제(性師心弟)'104) 네 글자뿐이니, 스승도 이것을 가르치고 제자도 이것을 배웠다. 선생이 평소 말하기를, "돌아가 구하면 성사가 있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심제에서 말미암는다. 이 이치가 오묘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응당 철저히 궁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백천 광산(光山) 노공 휘 철수(澈秀), 자 형일(瑩一)이 실지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성사심제의 설을 보기를 구한 뒤에 곧장 부안의 계화도(繼華島)에 들어가 폐백을 가지고 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기쁘게 열복하여 마음을 수립하고 행실을 제어하여 오로지 사문(師門)을 표준으로 삼았다.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착용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속해 몹시 춥거나 더울 때라도 편의를 취한 적이 없었다. 편안히 거처하며 일이 없을 때는 경전의 뜻에 잠심(潛心)하고 사리(事理)를 묵묵히 궁구하였으며, 밤에도 인정(人定)이 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과 《격몽요결(擊蒙要訣)》로 가르쳤고 그 다음에 사서삼경을 가르쳤는데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는 데 힘쓰지 않고 등급을 뛰어넘어 위로 천리(天理)를 배우는 경지에 오르는 것은 근본을 세우고 실지를 힘쓰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집에는 반드시 사당을 두었고 사당에는 반드시 신주를 두었으며, 관은 반드시 세 번 갈아 씌우고,105) 혼례가 있을 때는 반드시 친영(親迎)하였다. 남자는 위모(委貌)에 도포(道袍)를 착용하고 부인은 화관(華冠)에 심의(深衣)를 착용하였다. 생일에도 장수를 축원하는 하례를 받지 않고 상장(喪葬)에는 술과 고기로 조문객을 대접하지 않았다.세상이 변한 뒤에는 노중련(魯仲連)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말로 칭제(稱帝)를 거부한 의리106)와 서부원(徐孚遠)이 땅을 피해 머리카락을 온전히 지킨 절개107)로 자신에게 맹세하고 사람을 가르쳤으니 이 또한 간옹의 특별한 뜻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무리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먼저 공의 머리를 억지로 깎아서 온 세상을 위협하려고 하니 공이 이에 달아나 장수(長水)의 노곡산(蘆谷山)으로 들어갔다. 훗날 나라가 회복된 뒤에는 돌아와 노년을 보내니, 공의 학문이 이에 명망과 실제가 모두 사문에서 드높았다. 신묘년(1951) 3월 2일에 임종하였으니 함평군(咸平郡) 초동(草洞) 동쪽 대동(大洞)의 묘좌(卯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대개 성사심제란 무릇 학문하는 사람이 모두 성사의 순선(純善)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고, 사문을 표준으로 삼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의 현명함을 따라 스승으로 섬겨 그 선(善)을 취하는 것이다. 성사와 인사(人師)는 비록 천인(天人)의 구분이 있으나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삼아 선을 취하니, 덕을 이룬다는 점은 똑같다. 공이 간옹을 표준으로 삼은 것이 이미 전일하고 또 오래되어 마침내 덕과 행실을 이루었으니 간옹이 주장한 성사심제의 도에 대해 아는 것이 어찌 요연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노공(潞公)과 이천(伊川)이 있었더라면 송(宋)나라 원풍(元豊)의 정백자(程伯子)처럼108) 공이 사도(師道)를 잘 밝혔다고 묘비에 쓰지 않았을 것이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 점은 기록할 만하다.공은 고려 대호군(大護軍) 서(恕)가 시조이다. 본조의 우의정 경평공(敬平公) 숭(嵩), 이조 참의 상의(尙義), 안찰사(按察使) 의(毅), 대사헌 자원(自元)이 드러난 조상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된 봉령(鳳齡) 및 정윤(鼎允), 건순(建淳), 문한(文漢)은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이다. 문한은 효행(孝行)이 있었다.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동순(東淳)의 따님이니 부덕(婦德)이 있었다.공은 고종(高宗) 신미년(1871, 고종8) 6월 7일에 태어났다. 재주가 총명하고 성품이 굳세고 과감하여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우뚝히 거인(巨人)과 같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거상(居喪)을 잘 치르고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정성으로 받들고 이전의 일을 배웠다. 부인은 함평 모씨(咸平牟氏)로 대엽(大燁)의 따님이며 장령 달겸(達兼)의 현손이다. 아들은 병채(炳寀), 병우(炳㝢)이고 딸은 함평 이계근(李啓根), 해주(海州) 정학근(鄭學根)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양자는 학귀(鶴貴)이고, 차남의 아들은 학귀인데 양자로 나갔고, 홍귀(鴻貴), 응귀(鷹貴), 난귀(鸞貴)이다. 서범(書範), 복범(復範)은 사위 이계근의 소생이고, 관섭(寬燮), 중섭(重燮)은 사위 정학근의 소생이다.문인 서인남(徐仁楠)이 가장을 지어 천 리 길을 오가며 나에게 묘표를 청하였으니 그 정성이 매우 간절하고 또한 공의 학문이 전해진 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昔我先師艮翁先生, 學熟而道精, 爲世宗師。若其主腦所存, 則"性師心弟"四字是已。師以是敎, 及門者亦以是學。先生雅言曰: "歸求有性師, 虛受由心弟。此理妙無餘, 直須窮到底。" 百泉光山盧公諱澈秀字瑩一之志實學也, 求見性師心弟之說, 然後卽入扶風之繼華嶹, 贄謁先生, 欣欣然說服, 立心制行, 專以師門爲標準。律身則日必冠帶以自飭, 極寒酷暑, 未嘗取便。燕居無事, 則潛心經義, 默究事理, 夜亦人定而後就寢。敎人則先以《小學》、《要訣》, 次及四書三經, 曰: "不務下學, 而躐上上達, 非立本務實之意。" 居家則家必有廟, 廟必有主, 冠必三加, 婚必親迎。男子委貌道袍, 婦人華冠深衣。晬日不受壽賀, 喪葬不以酒肉待吊客。世變以後, 則以魯仲連蹈海却帝之義、徐孚遠避地全髮之節, 自誓與敎人, 此又艮翁之特志也。以是爲時輩眼釘, 欲先加勒削於公, 而威脅一世, 公乃走入長水之蘆谷山中, 復國後, 歸還終老, 公之學, 於是乎望實俱隆於師門矣。考終以辛卯三月二日, 藏于咸平郡草洞東大洞卯坐原。蓋性師心弟者, 凡學者皆當標準乎性師之純善也, 標準師門者, 從師先覺之賢而取其善也。性師、人師, 雖有天人之分, 在學者師之而取善, 成德則一也。公之標準艮翁, 旣專且久, 竟成德行, 則其明於艮翁所主性師心弟之道者, 豈不瞭然矣乎? 世有潞公伊川而在者, 安知其不以公之能明師道題其墓, 若有宋元豊之程伯子乎? 是可以書之也。公, 高麗大護軍恕, 其始祖。本朝右相敬平公嵩、吏曹參議尙義、按察使毅、大憲自元, 其顯祖。壽通政鳳齡及鼎允、建淳、文漢, 其高、曾、祖、禰。文漢有孝行。妣河東鄭氏, 東淳女, 有婦德。公生以高宗辛未六月七日, 才性聰明剛果, 自幼動止, 屹如巨人。孝友善居喪, 誠奉先志, 學前事也。配咸平牟氏, 大燁女, 掌令達兼玄孫。子炳寀、炳㝢, 女適咸平李啓根、海州鄭學根。長旁繼男鶴貴, 次房男鶴貴, 出。鴻貴、鷹貴、鸞貴。書範、復範, 李壻出; 寬燮、重燮, 鄭壻出。門人徐仁楠, 撰成狀德文, 往返千里, 請余表阡, 其誠甚勤, 而亦可見公之學有所傳也。 성사심제(性師心弟):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뜻이다. 간재는 주자와 율곡의 이기(理氣)에 대한 관점을 따라 성을 이로 심을 기로 보았다. 심은 기이지만 기의 정상(精爽)이기 때문에 거울이 본래 밝은 것과 같으면서도 기질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거울의 티끌에 의해 부식되어 때때로 밝지 않은 것과 같다. 반면 성은 혼연지선(渾然至善)하므로 심은 믿을 수 없고 성을 스승으로 삼고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임옥균, 艮齋 性師心弟와 性尊心卑의 韓國心性論上의 位置, 간재학논총, 간재학회, 2008》 관은……씌우고:관례(冠禮) 때 행하는 의식으로 치포관(緇布冠), 피변(皮弁), 작변(爵弁)의 순으로 관을 갈아 씌운다. 《禮記正義 冠義》 노중련(魯仲連)이……의리: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기면 포위를 풀겠다고 요구하였다. 이때 노중련은 조(趙)나라에 있었는데 신원연에게 가서 진나라가 칭제하여 천하를 다스리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서부원(徐孚遠)이……절개:서부원은 명(明)나라 말기 사람으로 자는 암공(闇公)이다. 명나라가 청(淸)나라에 망한 뒤 진자룡(陳子龍), 하윤이(夏允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에 항거하였으나 패배하고 대만(臺灣)으로 들어가 죽었다. 《明史 陳子龍列傳》 노공(潞公)과……정백자(程伯子)처럼:노공은 문언박(文彦博)의 봉호(封號)이고, 이천은 정이(程頤)의 호이다. 원풍은 신종(神宗) 때 사용한 연호이고, 정백자는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원풍 8년(1085)에 정호가 죽자 문언박이 중론을 수렴하여 묘표에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 하였다. 또 정호의 아우 정이가 그 서문을 썼는데 "성인의 도로 하여금 환하게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하셨다.[使聖人之道煥然復明於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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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김공 묘표 병인년(1926) 學生金公墓表【丙寅】 내가 옛날에 할머니 김씨를 곁에서 모실 적에 할머니가 가르치기를, "우리 영광 김씨(靈光金氏)는 대대로 효를 서로 계승하였다. 나의 아버지 휘 택려(宅麗)는 산송(山訟)을 당해 원통함을 설욕하겠다고 혈서를 쓰고 이로 인하여 묘소의 의절(儀節)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진 자는 장수하는109) 이치가 실현되어 조정에서 은혜롭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내려주었다. 내 오라버니 우성(佑聲)은 매번 맛있는 반찬을 소매에 넣어 어버이에게 바쳤는데 소매가 이 때문에 해지고 너덜너덜해지니 사람들의 말에 이견이 없었다. 나의 조카 석종(錫宗)은 선대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였고 그 아내 송씨(宋氏)도 부녀자의 도리를 지켰으니 너는 알아두어라."라고 하였다. 소자(小子)가 삼가 기억하여 감히 잊지 못하였으니, 대개 이 3세가 바로 공의 부친과 조부, 증조이다.공의 휘는 기현(琦鉉)이고 자는 국서(國瑞)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후하며 심지(心地)가 돈독하고 진실하였으니 효성과 사랑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진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겼기에 성심으로 아버지를 섬겨 농사와 고기잡이로 봉양하였다. 시병(侍病)할 때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병이 위독해졌을 때는 밤에 하늘에 기도를 올렸으며, 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였으니 이는 약관 때 있었던 일이다.형인 경현(卿鉉), 종현(綜鉉), 옥현(玉鉉)과는 우애와 공경이 더욱 독실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하고 조카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보았으니 형제간에 친밀하여 화목한 기운이 가득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대범하여 겉치레가 없어 순수하고 진실한 기운이 말과 용모에 드러났으니 이는 또 향리에 있으면서 남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공이 태어난 날은 고종(高宗)이 즉위한 지 9년째인 임신년(1872) 12월 12일이고, 졸(卒)한 날은 53년 뒤인 갑자년(1924) 5월 15일이며, 장지는 정읍군(井邑郡) 우순면(雨順面) 사거리(四巨里) 선영(先塋) 아래 유좌(酉坐) 언덕이고, 부인은 재신(在愼)의 따님인 우주 황씨(紆州黃氏)와 우현(禹鉉)의 따님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인데, 우순면 외장리(外墻里) 뒤 간좌(艮坐) 언덕이 전배(前配)의 묘소이다. 아, 나는 공에게는 중표제(中表弟)110)가 되는데 친종형제(親從兄弟)111)처럼 서로 알고 지냈으니, 공과 같은 분은 아마도 옛날의 이른바 종족과 향당(鄕黨)이 칭찬하고 십실(十室)에도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112)는 말에 해당할 것이다.영광 김씨는 고려조(高麗朝) 문안공(文安公) 휘 심언(審言)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의 병마사(兵馬使) 휘 해(該)는 왜적을 토벌하다가 순절(殉節)하였으니 충렬(忠烈)이 역사에 밝게 드러나 있다. 공의 현명함은 단맛이 나는 샘물은 근원이 깊다는 것을 더욱 믿겠다. 후사가 없어서 백형(伯兄)의 셋째 아들 원표(源表)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천도(天道)의 보답이 인색하다는 의문이 있었으나 원표는 봉양하고 장례를 치르는 데 자식의 직분을 잘해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관식(觀植), 정식(廷植)이다. 그 후손이 번창하여 다하지 않으니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113)가 아마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김 유인(金孺人)이 재산을 털어 비석을 세워 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으니 또한 공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볼 수 있다. 余昔侍王母金氏側, 有敎曰: "吾靈光氏, 世孝相承, 吾父諱宅麗, 遭山變, 血書雪寃, 因竭誠墓儀。仁壽有諶, 恩錫通政。吾兄佑聲, 每袖美饌獻親, 袖爲之弊爛, 輿誦無異辭。吾姪錫宗, 能趾先美, 而其妻宋氏, 亦執婦道, 汝知之乎!" 小子敬識而不敢忘。蓋玆三世, 卽公之父若祖曾也。公諱琦鉉, 字國瑞。生質樸厚, 心地敦實, 其孝愛, 天植也、家傳也。幼喪母爲至恨, 事父以誠, 耕漁爲養。侍病暫不離側, 至革, 夜禱天, 及喪, 哀戚甚, 此在弱冠時也。與兄卿鉉、綜鉉、玉鉉友悌尤篤, 有無共之, 視諸姪猶己出, 棣陰塤箎, 和祥藹蔚。性坦率, 袪邊幅, 淳實之氣, 形於言貌, 此又居鄕接物者然也。其生高宗踐阼九年壬申十二月十二日, 其卒後五十三年甲子五月十五日, 其葬井邑郡雨順面四巨里先塋下枕酉原, 其配紆州黃氏, 在愼女; 光山金氏, 禹鉉女, 雨順面外墻里後艮坐原, 其前配墓也。噫! 余於公爲中表弟, 而相知如親從昆季矣, 若公者庶幾古所謂宗黨之稱、十室之有歟。靈光之金, 以麗朝文安公諱審言爲上祖。我世宗朝, 兵馬使諱該, 討倭殉節, 忠烈炳史。公之賢又益信醴泉之遠源也。無嗣, 取伯兄第三子源表爲後。有疑天道之報嗇, 而源表能供子職於養送。有二子, 觀植、廷植。其昌未艾, 福善之理, 其在斯乎! 金孺人殫財樹石, 用表公懿, 亦見刑于攸及也。 어진 자는 장수하는:《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중표제(中表弟):중표는 조부나 부친의 자매의 자식과 조모나 모친의 형제자매의 자식을 뜻한다. 김택술은 김기현에게 6촌 아우가 된다. 친종형제(親從兄弟):친사촌 혹은 친형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십실(十室)에도……있다:《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한 공자의 말을 가리키는 듯하다. 선한……이치:《서경(書經)》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음탕한 사람에게 화를 내린다.[天道福善禍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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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 황공 묘표 龜溪黃公墓表 지난 광무(光武) 갑진년(1904, 고종41)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남쪽으로 가면서 태인(泰仁)을 지날 적에 학문에 뜻을 둔 황 사문(黃斯文) 경삼(景三) 보(甫)가 마침 이 고을에 머물고 있어서 전 선생이 행차하는 수레에 와서 배알하고는 보고 감화되어 경복(敬服)하여 수일이 지나도 해이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헌걸차고 수려하며 성품이 쾌활하고 말에 호방한 기상이 있었으니 전 선생이 매우 아꼈다. 내가 전 선생을 모시고 있어서 황공과 교유할 수 있었는데 매우 즐거웠다. 이후로는 다시 서로 보지 못하였으나 매번 그리운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임오년(1822, 순조22) 봄 내가 흥성(興城)에 와서 《이재선생속집(頤齋先生續集)》을 편집하고 교정하였는데 황군 하영(河永)이 그 사이에 본생(本生) 선고(先考)인 구계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내게 묘문(墓文)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구계는 바로 지난 날 내가 즐겁게 교유했던 경삼 보의 자호(自號)였다. 생각건대 이때 공은 한창 장년이었고 나는 약관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39년이 지나 공의 묘소에 있는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 되었고114) 나도 머리카락이 짧아졌으니 슬프구나. 옛날과 지금을 조용히 생각해보면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공의 휘는 종태(鍾台)이니 이재(頣齋)의 5세손이다. 이옹의 학문은 천지의 깊은 뜻을 궁구하고 윤상(倫常)의 도리를 강론하여 널리 배워서 핵심을 요약하는 데로 돌아가고 체(體)를 밝혀 용(用)으로 나아가 종장(宗匠)의 고족제자(高足弟子)115)이자 온 나라의 명류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유자의 학문이고 공이 뜻한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 가업을 계승하는 일이 후손에게는 더욱 중한 책임이라 맹세코 장차 간옹을 한 번 섬겨 이 일에 전심하여 얻지 못하면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당장의 공정(工程)이었는데 갑자기 2년 뒤 3월 20일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아, 애석하다.간옹이 영전에 나아가 슬피 곡하고 추후 〈교경당기(敎經堂記)〉116)를 지어 간절하게 공의 뜻을 말하여 그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들을 면려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대략을 볼 수 있다. 지금 상세한 행적이 이 가장에 보이니 연재(淵齋) 송 선생(宋先生 송병선(宋秉璿))이 고암서원(考巖書院)에서 청강(聽講)하고 시로 술회한 일과 교경당에 학계(學契)를 세워 정규(定規)로 차서(次序)를 정한 것을 참고하면 진실로 현인을 사모하고 후학을 장려하는 선비의 본분이었다. 심지어 권세가가 당시 수령과 결탁하여 이치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위세와 화기(禍機)가 번갈아서 목전에 임박하였는데 조금도 마음이 꺾이지 않고 천천히 이치에 근거한 말 한마디로 포악한 짓을 함부로 일삼는 순검(巡檢)을 굴복시켰으니 이는 또 임기응변의 지혜와 재간이다.대개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일찍이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때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개고기 13마리를 연이어 써서 병을 낫게 하였다. 매번 조상의 제사가 있을 때면 비록 큰 설한(雪寒)을 만나도 반드시 60리 떨어진 곳에 달려가 참석하였다. 또 형을 섬기는 데 지극히 공손하였으니 사람의 큰 근본이 이미 수립되었다. 이러한 재주와 뜻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을 축적하였다면 어찌 도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등용되어 뜻을 행할 수 없었겠는가. 가학(家學)을 잇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세상에 보탬이 되었을 터인데 수명이 막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천지가 광대하여도 사람이 오히려 유감이 있다117)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평해 황씨(平海黃氏)는 먼 윗대부터 세계(世系)가 있는데 대대로 현귀(顯貴)한 관직118)을 계승하였으니 모두 매산(梅山) 홍 선생(洪先生 홍직필(洪直弼))이 지은 이재의 묘명(墓銘)에 있다.119) 고조, 증조 이하도 또한 가업을 계승하였다. 부친은 휘 재진(在鎭)이니 사람을 살린 음덕(陰德)이 있었다. 모친은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호) 선생의 후손이다.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현명하여 바른 행실이 있었다. 공이 죽은 뒤 곡을 할 때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시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하였으며 자녀를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장남은 하영인데 중부(仲父)의 후사로 나갔다. 그 다음은 하준(河準), 하운(河雲)이다. 딸은 홍순석(洪淳錫)에게 시집갔다. 하영은 4남 4녀를 두고, 하준은 1남 1녀를 두고, 하운은 4남 1녀를 두고, 딸은 3남 3녀를 두었다. 내외의 손자가 번창하여 다하지 않으니 하늘이 공이 생전에 누리지 못한 복을 보답한 것이 여기에 드러났다. 내가 이에 공의 평소 뜻과 사적을 모아 드러내어 부안 변산(邊山) 성공봉(成功峰) 임좌(壬坐) 묘소에 새겨서 행여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서 공경해야 할 바를 알게 한다. 往在光武甲辰, 艮齋田先生之南駕, 歷泰仁也, 有黃斯文景三父志於學者, 適寓居是郡, 來拜行幰, 觀感敬服, 累日而靡懈。爲人頎而秀, 性豁如快, 言論有豪邁氣, 田先生甚愛之。余陪間席, 獲與遊甚歡, 後不復相見, 然每思之不能已。歲壬午春, 余來興城, 編校《頣齋先生續集》也。黃君河永, 間嘗以其本生先考龜溪公家狀, 屬余墓文。受而閱之, 龜溪卽曩余所歡景三父自號也。念是時, 公方壯年, 余弱冠餘, 至今忽忽爲三十九年, 而公之墓, 木已拱, 余亦鬂髮種種, 悲夫! 俯仰今昔, 其何敢辭? 公諱鍾台, 頣齋五世孫也。頣翁之學, 究天地之蘊, 講倫常之理, 由博而反約, 明體而適用, 爲宗師高足, 通國名流, 是所謂儒者之學, 而公所志者卽此也。其箕裘之業, 在後承尤爲重責, 誓將一事艮翁, 專致斯事, 不得不措, 卽目前工程, 而遽以再明年三月二十日, 不起疾, 嗚呼惜哉! 艮翁臨靈哭哀, 追作〈敎經堂記〉, 眷眷言公志, 而慰其父, 勉其子, 此可以見公之槩也。今其詳見於是狀, 則參淵齋宋先生之聽講考巖, 而詩以述懷, 設興學契于敎經堂, 而序以定規者, 固慕賢獎後士子之本事。至於遭勢家之締結時宰, 加以橫逆也, 威熖禍機, 交迫於前, 而不少挫沮, 徐以據理一言, 折服肆暴方張之巡檢, 是則又臨遽應變之智幹也。蓋公性孝, 嘗有親癠, 家雖貧, 連用犬肉十三首而愈。每値先祀, 雖大雪寒, 必奔參於六十里地, 而又事兄極恭, 人之大本旣立矣。以若才志, 積以格致誠正之學, 則何道之不可生? 何用之不可行哉? 非惟足以紹家學, 亦將見裨益人世, 而大命限之, 莫遂其願, 所謂天地之大, 人猶有憾者, 此歟? 平海氏, 遠有代序, 世承簪獻・(軒), 俱在梅山洪先生所撰頣齋墓銘。高曾以下, 亦世其家。考諱在鎭, 有活人陰德。妣蔚山金氏, 河西先生后。配義城金氏, 賢有行。公之沒, 哭不以聲, 安尊章心。敎子女有法。男長河永, 出爲仲父后。次河準、河雲。女適洪淳錫。河永四男四女, 河準一男一女, 河雲四男一女, 洪室三男三女。內外孫熾昌未艾, 天所以報公不食者, 於是乎著焉。余乃撮公平生志事而表章之, 俾刻于扶安邊山成功峰壬坐之阡, 庶過者觀之, 而知所敬焉。 묘소에……되었고: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것을 개탄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32년 조에 진 목공(秦穆公)이 진(晉)나라를 공격하러 떠나는 진(秦)나라 군대를 곡한 건숙(蹇叔)에게 사람을 보내 "네가 중수만 살고 죽었더라도 네 무덤가에 심은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은 되었을 것이다.[中壽 爾墓之木拱矣]"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종장(宗匠)의 고족제자(高足弟子):황윤석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교경당기(敎經堂記):현재 《간재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천지가……있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성인이라도 능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천지가 광대하여도 사람이 오히려 유감스러워하는 바가 있다.[雖聖人 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라고 하였다. 현귀(顯貴)한 관직:원문은 '簪獻'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獻'을 '軒'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매산(梅山)……있다:현재 《매산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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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동 최공 묘표 무자년(1948) 果東崔公墓表【戊子】 우리 당(黨)에 뛰어난 재주와 우뚝한 뜻을 지녔는데 오랫동안 고질병을 앓아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은 이가 있으니 과동 거사 최공 장렬(長烈) 자 성무(性武), 또 개자(改字) 성귤(性橘)이 그 사람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 고려의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고, 서산사(書山祠)에서 제향(祭享)을 받는 본조의 판관(判官) 증 참판(參判) 희정(希汀)의 13세손이며, 참봉(參奉) 병우(秉宇)의 아들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여흥 민씨(驪興閔氏)인데 민씨가 공을 낳았다. 태어난 날은 고종(高宗) 정해년(1887, 고종24) 4월 13일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 장로(長老)들이 대기(大器)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을사년(1905) 겨울 《시경(詩經)》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 만에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20편을 마쳤고, 〈패풍(邶風)〉 이하도 이와 같았다. 간혹 사서(史書)를 보았는데 눈으로 훑고 지나가도 잊지 않았다. 문장을 짓는 재사(才思)가 뛰어나 말을 하면 문리(文理)를 이루었다. 당시 나이가 19세였기 때문에 내가 보기 드문 인물이라 경탄하고 인하여 도학(道學)의 존귀함과 오늘날 세상에서 도학의 종장(宗匠)으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있다고 말해주니 공이 즉시 기뻐서 말하기를, "저는 마땅히 도학에 종사하여 간옹을 스승으로 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이로부터 뜻은 날로 더욱 높아지고 힘쓰는 것은 날로 더욱 부지런해졌는데 다음 해에 병이 생겼다. 비록 존성(存省)하고 궁구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으나 병이 심해 직접 선생을 찾아가 질정하는 것은120) 형편상 억지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후에는 선뜻 마음을 바꾸고 일어나 말하기를, "만약 이대로 시일만 보낸다면 평소의 뜻을 저버리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라 하고는 이에 신유년(1921) 봄 나와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폐백을 갖추어 화도(華島)에서 전 선생을 뵙고 제자의 예를 행하니 선생이 아끼고 소중히 여겨 〈귤송(橘頌)〉의 "나이는 비록 젊으나 스승과 어른으로 삼을 만하네."121)라는 글귀의 뜻을 취해 성귤로 자를 고쳐 이름과 조응(照應)하게 하였다. 공이 받은 기대가 이러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선생이 돌아가시고 공도 끝내 갑자년(1924) 4월 22일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슬프구나.부인은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영중(永中)의 따님이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호)) 선생의 후손이다. 아들은 재익(載翊), 재철(載哲), 재용(載鏞)이다. 세 아들이 낳은 남녀는 도합 십수 인이다.공은 재주와 학문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병중에서 거상(居喪)을 잘 치러, 간옹이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생각하지 않느냐는 경계까지 하였다. 선인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해 간옹에게 명(銘)을 청하던 날 비오듯 눈물을 흘렸으니 효성스러운 자손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큰 근본이 이미 수립되었으니 나머지 행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학문하는 절도로 말하면 바야흐로 거친 데에서 정밀한 경지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수명에 막혀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거듭 유감스럽다.아, 공은 내가 마음으로 사귄 사람이다. 평소 강론하고 토론할 적에 나의 변변찮은 말을 한결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은 것은 나를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스승에게서 얻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고, 공이 죽은 뒤 내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슬퍼하는 것은 공을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유학(儒學)이 흥성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해서이다. 그러니 지금 묘표를 지어 달라는 김재익의 요청에 대해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재주와 뜻은 있었으나 좋은 운수가 없었던 사실을 갖추어 써서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송장동(送將洞) 유좌(酉坐) 언덕을 지나가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이 이런 사람이 있어 여기에 안장되었다는 것을 알아서 대대로 알려지게 한다.122) 吾黨有以儁才卓志, 久抱貞疾, 學不充量而沒者, 果東居士崔公長烈字性武, 又改字性橘, 其人也。其先全州人, 高麗侍中、文成公阿後, 本朝判官、贈參判享書山祠希汀十三世孫, 參奉秉宇子。其妣礪山宋氏、驪興閔氏, 而閔氏出。其生高宗丁亥四月十三日。幼而才性超人, 長老以大器期之。乙巳冬, 挈《詩經》就余同業, 一日而畢〈周〉、〈召〉二什, 自〈邶〉以下亦如之。間覽史書, 過目不忘。藻思發越, 吐辭成理。時年十九, 余旣驚歎其罕覯, 因告以道學之尊貴, 今世道學宗師, 有艮齋田先生在, 公卽欣然曰: "吾當從事道學而師艮翁。" 自是志日益高, 力日益勤, 而至翼年, 疾祟已作, 雖存省窮硏無間, 病健奈負笈就正, 其勢難强。最後幡然而作, 曰: "若因循如此, 靠負素志, 枉過一生。" 乃以辛酉春, 伴余舁疾, 涉海具贄, 謁田先生于華島, 行弟子禮, 先生愛重之, 取〈橘頌〉年歲雖少可師長之義, 改字以性橘而應其名。其見期待如此, 然而不久, 而先生棄後學, 公亦竟以甲子四月二十二日不起, 悲夫! 配蔚山金氏, 永中女, 河西先生後。男載翊、載哲、載鏞。三房所生男女, 合十數人。公以才學悅父母心。母沒而善居喪於病中, 至有艮翁不念先人遺體之戒。盡誠先事, 謁銘艮翁之日, 淚下如雨, 可不謂孝子孫乎? 大本旣立, 餘行可推。至於爲學節度, 方且由粗入精, 而阨於命數, 未克大就, 重可憾也。嗚呼! 公余心交也。平日講討, 一信瞽說而靡他者, 匪私我也, 信其得之乎師也; 公沒而余過時愈悲者, 匪私公也, 悲吾軍之不張也。今於載翊阡表之請, 其何忍辭? 乃備書其有才志無運命, 俾後人之過井邑郡山內面送將洞枕酉原者, 知世聞曾有斯人而藏于此也。 병이……것은:원문은 '病健奈負笈就正'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奈'가 잘못되었거나 탈자가 있는 듯하다. 우선 '奈'를 빼고 번역하였다. 나이는……만하네:《초사(楚辭)》 〈귤송〉에 "귤의 나이는 나보다 젊으나 스승과 어른으로 삼을 만하네. 고결한 행실이 백이에 견줄 만하니 법상으로 만들어 모시고파라.[年歲雖少 可師長兮 行比伯夷 置以爲像兮]"라고 하였다. 〈귤송〉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강남(江南)으로 쫓겨난 후 자신의 고결하고 변하지 않는 지절을 귤에 빗대어 읊은 노래이다. 일찍이……한다:원문은 '知世聞曾有斯人而藏于此也'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世聞'이나 다른 곳에 오류가 있는 듯한데 확인할 수 없어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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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김씨 묘표 경인년(1950) 恭人金氏墓表【庚寅】 공인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구(坵)의 후손이며, 고려 말의 충신 군사(郡事) 광서(光叙)의 7세손이며, 첨정(僉正) 증 도승지 직손(直孫)의 현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옹천(甕泉) 석홍(錫弘)의 증손이며, 사인(舍人) 청수재(淸修齋) 서성(瑞星)의 손자이며, 현감(縣監) 수복(壽福)의 따님으로, 통덕랑(通德郞) 도곡 처사(桃谷處士) 함풍(咸豊) 이유(李瑜) 공의 부인이다. 이공은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호(陵號))의 충신인 참봉(參奉) 안(岸)의 현손이며, 진사(進士) 낭곡(浪谷) 억영(億榮)123)의 아들이며, 대사간 죽곡(竹谷) 선생 장영(長榮)의 출후자(出後子)124)이다.공은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호) 정유년(1597, 선조30) 섬의 오랑캐가 다시 침입한 날에 부안 청등(淸嶝)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인도 같은 날 사로잡혔으나 역시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두 사람의 순절이 이루어진 것이 지주(池州)가 포위되었을 때의 조묘발(趙卯發) 공125) 부부와 같은 점이 있으니, 아, 열렬하도다. 아, 장렬하도다. 옷과 신발을 부안 상서면(上西面) 도화동(桃花洞) 오좌(午坐) 언덕에 함께 매장하여 묘소로 보이게 만드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공경을 표하였다.삼가 생각건대 공인이 이룬 의(義)는 진실로 천성이 올곧고 굳세기 때문이니 역시 남편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영향을 끼쳤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논하면 태어난 곳과 시집간 곳이 모두 명문(名門)이고 법도 있는 가문이라 문정공의 유풍(遺風)이 여전히 전해지고 죽곡의 가르침이 당시까지 현존하였다. 그리하여 평소에 그 영향을 받았으니 어려움에 임했을 때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지를 어찌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겠는가. 시인이 석인(碩人)의 현명함을 읊으면서도 오히려 족류(族類)의 현귀(顯貴)함을 하나하나 일컬었는데126) 하물며 공인의 선조의 성대한 아름다움이겠는가. 어찌 칭송하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아들 홍순(弘詢)은 진사이고 홍의(弘誼)는 통덕랑이고 홍원(弘源)은 후사로 나갔다. 딸은 참봉 이형(李逈), 진사 송후옥(宋後玉)에게 시집갔다. 홍순의 아들은 환(晥)이고 홍의의 아들은 시(時), 환(㬇)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후손들의 숫자가 더욱 많아져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부인(婦人)의 선은 열행(烈行)보다 큰 것이 없으니 선으로 인한 남은 복이 마땅히 이러한 것이다.10세손 윤환(潤煥)이 내가 공인과 동종(同宗)인 후세라 하여 족질(族姪) 양범(陽範)과 주범(周範)을 보내 묘표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그 청이 글솜씨 때문이 아니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입절(立節)한 사실을 쓰고 그것이 가문에 근본하고 후손에게 보답이 미쳤다는 것도 아울러 써서 시종(始終)을 보인다. 恭人扶寧金氏, 文貞公、止浦先生坵后, 麗末忠臣郡事光叙七世孫, 僉正、贈都承旨直孫玄孫, 己卯名賢甕泉錫弘曾孫, 淸修齋、舍人瑞星孫, 縣監壽福女, 爲通德郞、桃谷處士咸豊李公瑜之配。公莊陵忠臣叅奉岸玄孫, 進士、浪谷億齡·(榮)子, 大司諫、竹谷先生長榮出後子。公於穆陵丁酉島夷再猘之日, 戰殉于扶安淸嶝之野。恭人同日被執, 亦不屈而殉。殉節雙成, 有若池州之圍, 趙公昂發夫妻, 嗚呼烈哉! 嗚呼壯哉! 以衣履合藏於扶安上西面桃花洞負午原, 視以爲墓, 過者式之。竊惟恭人所就, 固以天性貞毅, 亦見君子之刑于攸及。然推本而論, 所生所適, 皆名門法家, 文貞之風韻猶傳, 竹谷之謨訓現存, 平日之所擩染, 豈不能明取舍於臨難乎? 詩人賦碩人之賢, 猶歷稱族類之貴顯, 而况於恭人先懿之盛乎? 其可以無辭矣乎? 男弘詢, 進士; 弘誼, 通德郞; 弘源, 出後。女適叅奉李逈、進士宋後玉。弘詢男晥, 弘誼男時、㬇。餘不錄。今後麗彌繁, 至不可數。婦人善莫大於烈, 善之餘慶, 宜其然也。十世孫潤煥, 以余爲恭人同宗後人, 遣族姪陽範、周範, 請表墓之文, 其請也不以文, 則不以終辭, 乃旣書立節實事, 幷書其本乎世類, 報於後昆者, 以見始終云爾。 억영(億榮):원문은 '億齡'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하여 '齡'을 '榮'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출후자(出後子):다른 사람의 후사로 나간 아들이라는 뜻으로 형인 이억영의 양자로 나갔다. 조묘발(趙卯發) 공:원문은 '趙公昂發'이다. 《송사(宋史)》 〈충의열전(忠義列傳)〉에 근거하여 '昂'을 '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남송이 멸망할 무렵인 1274년에 지주 통판(池州通判)을 지내고 있었는데 원(元)나라 군사가 양자강을 건너 침입하자 달아난 지주(知州)를 대신하여 성을 지키다가 항복을 권유받고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從容堂)에서 자살하였다. 《宋史 卷450 忠義列傳5》 시인이……일컬었는데:석인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부인인 장강(莊姜)을 가리킨다. 족류의 현귀함을 일컬었다는 것은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인(碩人)〉 첫 장에서 "제나라 임금의 따님이요 위나라 임금의 아내이며, 태자의 누이이고 형나라 임금의 처제이며, 담나라 임금은 형부가 되신다네.[齊候之子 衛候之妻 東宮之妹 邢侯之姨 譚公維私]"라고 하여 장강의 친족이 누구인지 읊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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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김씨 묘표 갑신년(1944) 孺人金氏墓表【甲申】 위(衛)나라의 시인은 장강(莊姜)의 현명함을 찬미하면서 "제(齊)나라 임금의 따님이요 위나라 임금의 아내이며, 태자의 누이이고 형(邢)나라 임금의 처제라네."라고 하였다. 저 시인은 작위가 높은 사람은 친속(親屬)도 오히려 칭송할 대상에 들어간다고 여긴 것이니, 하물며 그 친속이 도덕, 문장, 충의, 학행과 같은 천작(天爵)127)이 높은 어진 자에 해당하는 경우이겠는가.고창군(高敞郡) 고사방(古砂坊) 수랑동(水浪洞) 안산(案山) 갑좌(甲坐) 언덕에 안장된 유인 부안 김씨는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구(坵)와 충경공(忠景公) 익복(益福)의 후손이며, 평해(平海) 황 이재(黃頤齋) 선생 윤석(胤錫)의 손자며느리이며, 수촌(壽村) 처사(處士) 일한(一漢)의 맏며느리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고 법도 있는 가문에 시집갔으니 안으로 받은 가르침과 밖으로 이룬 것이 진실로 자연히 보통과 차이가 있다. 단옹(檀翁) 수경(秀瓊)을 남편으로 삼고 회와(晦窩) 중섭(中燮)을 아들로 삼았으니 단옹이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은 것과 회와가 집안일을 잘 맡아 다스리고 행실을 독실하게 한 것이 또한 어찌 내조(內助)에 힘입고 모의(母儀)가 이루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유인의 어짊을 더욱 알 수 있다.태어난 날은 정조(正祖) 임인년(1782, 정조6) 3월 20일이고, 3세조는 계열(啓烈), 수극(壽極), 인감(仁鑑)이며, 외조부는 생원(生員)인 화순(和順) 최강우(崔綱宇)이며, 졸(卒)한 날은 헌종(憲宗) 을사년(1845, 헌종11) 6월 23일이다. 아들은 바로 중섭이고 딸은 전의(全義) 이봉년(李鳳年)에게 시집갔다. 병택(炳宅)은 외손자이다.5세 적손(嫡孫)인 서구(瑞九)가 재종숙(再從叔) 건익(鍵翼)이 장차 표석(表石)을 세우려 하는 것 때문에 내가 유인의 동종(同宗)이라 하여 음기(陰記)을 부탁하는 한편 애초에 행적을 기록한 글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내가 말하기를, "문제없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보지 못하면 그 벗을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유인의 그 법도가 매우 가까우니128) 어찌 다만 옛말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인가(人家)에서 으레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는 등의 말을 기록하는데 또 어찌 견주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기록해 후세에 보여줄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衛之詩人, 美莊姜之賢, 而曰: "齊侯子, 衛侯妻, 東宮妹, 邢侯姨。" 彼以爲爵位隆顯者, 親屬猶在所稱。况乎其屬在道德、文章、忠義、學行天爵尊之賢者乎?若高敞郡古砂坊水浪洞案山枕甲原所藏孺人扶安金氏, 文貞公、止浦先生坵, 忠景公益福之後, 平海黃頣齋先生胤錫之孫婦, 壽村處士一漢之冡婦。生乎名族, 入乎法門, 內而所受, 外而所成, 固自有異。以檀翁秀瓊爲夫, 晦窩中燮爲子, 檀翁之隱德不仕, 晦窩之克家篤行, 亦豈無內助之須、母儀之成? 其賢尤可知也。其生, 正祖壬寅三月二十日, 其三世, 啓烈、壽極、仁鑑, 外祖生員和順崔綱宇, 其卒, 憲宗乙巳六月二十三日, 其男卽中燮, 女適全義李鳳年, 炳宅, 其外孫。五世嫡孫瑞九, 以其再從叔鍵翼將樹表石, 謂余爲孺人同宗, 屬以記陰, 且以初無狀行文爲歉。余曰: "無傷也。古語云'不見其人, 見其友', 今見孺人之其則甚近, 豈但如古語已也? 而人家例狀婦德備至等語, 又何足比論哉? 是可以書之視後。" 천작(天爵):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으로 도덕을 수양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때문에 천작이라고 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와 충신을 지니고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고, 공경대부는 인작이다.[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고 하였다. 유인의……가까우니:《시경(詩經)》 〈빈풍(豳風) 벌가(伐柯)〉에 "도끼 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리 있지 않도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하였는데, 본보기로 취할 수 있는 법칙, 기준 등이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유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유인의 훌륭한 가족과 자손을 보면 유인의 훌륭함을 자연히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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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비 유인 송씨 묘표 曾祖妣孺人宋氏墓表 부안군(扶安郡) 주산면(舟山面) 둔계리(遯溪里) 상천동(上泉洞) 임좌(壬坐) 언덕은 나의 증조비 유인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장지로, 나의 증조고(曾祖考) 천태 부군(天台府君) 부안 김공 휘 석규(錫圭) 자 내삼(乃三)의 묘소 동쪽에서 20보 떨어진 곳에 따라서 장사 지낸 곳이다. 천태 부군은 높은 재주와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안연(顔淵)과 똑같은 수명을 누리고129) 돌아가셨으니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석해하였다.유인은 바야흐로 군자가 처자식에게 모범이 되는 교화를 입어 배필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갑자기 남편을 잃어 끝없는 애통함으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위로 시부모를 염려하여 애통한 심정을 견디며 나아가 위로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돌아보아 눈물을 머금고 길렀으니 남편의 유지를 헤아린 것이다. 이해에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또 여섯 번의 상이 줄지어 나와 집안의 명운이 쇠락하고 남은 재산도 지가(支家)에서 차지하여 생계를 꾸릴 길이 없었다. 이에 유인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운데 빙옥(氷玉)과 같은 절개를 지켜 종사(宗事)를 계승하고 문호(門戶)를 세우니 수명이 팔순을 넘기자 손자와 증손들이 앞에 늘어설 만큼 많아졌다.아,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인의 선으로는 열행(烈行)이 가장 크다. 유인은 이미 천서(天敘)를 따르고 인륜을 다하였으니 끝내 복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인의 선이 어찌 보답을 바란 것이었겠는가. 다만 의(義)가 있음을 알았을 뿐이니, 이것이 열행이 되는 까닭이다.선대에 고려 호산군(壺山君) 유익(惟翊)이 있으니 이분이 비조(鼻祖)이고,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가 현조(顯祖)이며, 본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도봉(道峰) 세정(世貞)이 12세조이다. 부친은 학생(學生) 현석(顯錫)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성환(星渙)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경신년(1800, 순조즉위)에 태어났고, 고종(高宗) 기묘년(1879, 고종16) 12월 7일에 졸(卒)하였다. 천태 부군의 세계(世系)와 덕은 부군의 묘표에 있다.과거 유인이 시집올 때 70여 세인 조고(祖姑 남편의 조모)가 있었는데 봉양을 전담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고가 파를 좋아하였는데 비록 한겨울이라도 파를 얻어131) 갖추어 올렸다. 매일 밤중이나 꼭두새벽에 반드시 일어나 육병(肉餠)과 탕(湯)을 마련해 올렸는데 아침마다 이 때문에 머리를 빗었다. 몸에 닿는 속옷을 무시로 세탁하면서도 난색을 보이는 일이 조금도 없었고 10년을 하루처럼 하니, 조고가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나를 효성으로 섬긴다."라고 하였다. 이에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다른 사람이 지적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 기록할 만한 일이다.아, 충, 효, 열(烈)은 사람의 삼강(三綱)이라 우주를 지탱하고 일월(日月)을 비추니 한 가지도 얻기 어려운데 유인은 그 중 두 가지를 가졌다. 세상에 주자(朱子)의 뒤를 잇는 사람이 나와 《소학(小學)》을 엮는다면 유인의 사행(事行)이 어찌 뒤에 있겠는가. 이에 삼가 묘비의 뒤쪽에 드러내 써서 그렇게 될 날을 기다린다. 자손에 대한 기록 역시 천태 부군의 묘표에 있다. 유인이 돌아간 지 60년이 되는 날에 증손 택술이 삼가 짓는다. 【글이 완성된 뒤 14년이 지난 임진년(1952) 10월에 천태 부군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惟扶安郡舟山面遯溪里上泉洞負壬之原, 我曾祖妣孺人礪山宋氏之藏, 而從葬我曾祖考天台府君扶寧金公諱錫圭字乃三之墓東二十步者也。天台府君, 有高才至行, 不幸壽同顔淵而歿, 人感惜之。孺人方被刑于之化, 配德無違, 而遽喪所天, 慟霣罔極, 如不欲生。然上念舅姑, 忍痛進慰, 下顧子女, 含淚撫育, 惟夫子遺志是體。是歲, 皇舅背世, 又六喪繼出, 家道索然, 餘存爲支家所占, 資生無由。乃孺人守氷玉之節於凍餒之中, 以承宗事, 以樹門戶, 壽躋八旬, 而孫曾列前。嗚呼! 《書》曰: "天道福善。" 婦人善行, 烈爲最大。孺人旣順天叙, 而盡人倫, 則卒以獲福, 宜矣。然其爲善也, 豈望報乎? 只知有義而已, 此其所以爲烈也。其先有高麗壼山君惟翊, 是爲鼻祖。貞烈公松禮爲顯祖。本朝己卯名賢道峰世貞, 爲十二世祖。考學生顯錫。妣文化柳氏, 星渙女。生以純祖庚申, 卒以高宗己卯十二月七日。天台府君世德, 在其墓表。始, 孺人之于歸也, 有祖姑年七十餘, 任專養之責, 祖姑嗜蔥㵩, 雖隆冬, 亦護・(獲)蔥具進。每夜中或曉頭必起, 供肉餠湯獻之, 每朝爲之櫛髮。親身褻衣, 無時洗濯, 少無難色, 十年如一日。祖姑常曰: "是事我孝。" 於是乎孝婦之稱, 人無間然, 此又可書者也。嗚呼! 惟忠孝烈, 爲人三綱, 撑拄宇宙, 輝暎日月, 一猶難得, 而有其二焉。世有後朱子作, 編《小學》之書, 則孺人事行, 豈在後乎? 玆謹表書于阡碑之陰而俟之。子孫錄亦在天台府君之表。孺人下世周甲日, 曾孫澤述謹撰。【文成後十四年壬辰十月, 合窆于天台府君墓。】 안연(顔淵)과……누리고:안연은 32세에 요절하였다. 하늘의……내린다:《서경》 〈탕고(湯誥)〉에 보인다. 얻어:원문은 '護'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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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 유인 김씨 묘표 祖妣孺人金氏墓表 아, 나의 조비 유인 김씨는 춘추 94세가 되어 병진년(1916) 3월 13일에 졸(卒)하였다. 나의 선고(先考)가 7년 먼저 임종하여 내가 삼가 승중복(承重服)을 입었는데 때에 구애를 받아 예월(禮月)을 기다려 안장하지 못하고 신산(新山)을 겨우 마련해 성복(成服)하고서 부장(赴葬)132)하고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달천리(達川里)에 있는 조고(祖考) 우신재(又新齋) 부군(府君)의 묘소에 합장(合葬)하였다.아, 나의 조비의 품행으로도 죽어서 효자의 집상(執喪)을 받지 못하고 또 예로 장사 지내지도 못하였으니 애통하도다. 내가 선군(先君)의 평소 뜻을 대신 이루어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여묘(廬墓)하고 상복을 벗은 뒤 7년째인 병인년(1926) 4월 13일에 같은 군 이평면(梨坪面) 한수리(漢水里) 뒤 건좌(乾坐) 언덕에 이장하였다.유인은 성품이 올곧고 전일하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장중하여 시집가기 전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20세 때 나의 조고에게 시집왔는데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모두 알맞은 도리를 얻었다.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수 없자 길쌈에 부지런하였는데 밤새도록 길쌈하느라 등불을 피워놓았고 그 불을 이용해 아침밥을 지었으니, 20여 년을 이렇게 하여 8섬지기 밭을 사서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가엾게 여기지 않아 갑자기 남편 상을 당하였는가. 당시 나의 선고는 겨우 9세로 혈혈단신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애통한 심정이 간절하여 기절했다가 소생하였다. 그러나 유인 자신은 반함(飯含), 염(殮), 장례, 제사를 모두 예로써 치렀다. 남편의 유지를 잘 헤아려 더욱 근검하여 하인을 독촉해 힘써 농사짓게 하고 자신도 길쌈을 하니 재산이 날로 더욱 여유로워졌다. 맛있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시어머니를 편안히 봉양하였으며, 스승을 맞이해 자식을 가르쳐 학문이 성취되어 이름이 드러났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한다."라는 것이 어찌 아버지에게만 그러한 것이겠는가.위로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시어머니를 섬기는 일부터 아래로 하인을 부리고 이웃과 사귀는 일까지 평소 경서나 역사서를 배운 일이 없는데도 자연히 절도에 맞았다. 안으로는 기름, 소금, 메주, 채소 등 사소한 물건부터 밖으로는 전토(田土)와 금곡(金穀) 등 크고 번잡한 것까지 또한 사령(使令)을 의지하지 않고 친히 그 수량을 다 헤아렸다. 이는 대개 뜻이 견고하고 힘이 안정되어 이미 수절(守節)하는 우뚝함이 있었고 집안을 보호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었으며, 식견이 밝고 재주가 민첩하여 역시 일을 처리하는 법칙이 있었고 남을 응대하는 지혜가 있었다.아, 나의 조비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수고하여 가업을 일으키고 만년에는 또 정절(貞節)을 수립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길이 제향(祭享)을 받고 아래로는 자손이 그 은혜를 받았으니 조비의 공과 덕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시인의 "아, 잊지 못하겠네."133)라는 시구(詩句)가 어찌 왕가(王家)만 그러한 것이겠는가. 또 대저 사람은 삼강(三綱)이 있는데 열행(烈行)이 그중 하나를 차지한다. 유인의 열행이 인도(人道)를 극진히 하고 강상(綱常)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일을 기록하는 자가 그 점을 써서 후세에 본보기를 전해야 하고, 비단 후손이 잊지 않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세계(世系)는 영광(靈光)에서 나왔다. 고려조의 명신(名臣)인 문안공(文安公) 심언(審言)의 후손이고, 본조의 충신인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세손이고, 효자(孝子) 통정대부(通政大夫) 택려(宅麗)의 따님이다. 모친은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근혁(根爀)의 따님이다. 태어난 날은 순조(純祖)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4일이다. 나의 조고인 부안 김공 휘 경순(景淳) 자 명헌(明憲)은 세계가 그 묘표에 갖추어져 있다.1남 낙진(洛進)은 학행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었다. 3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광산(光山)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갔는데 열행이 있었고, 계녀(季女)는 함안(咸安) 조기용(趙基鏞)에게 시집갔다. 내외 손자에 대한 기록도 역시 조고의 묘표에 상세하다.아, 유인의 성품과 행실은 진실로 장중하고 꿋꿋하고 굳세었으나134) 마음 씀씀이는 도리어 관대하고 화평하였으며 자애롭고 은혜로웠다. 이 때문에 종복이 잘못을 저지르면 비록 엄하게 꾸짖고 용서하지 않았으나 곧바로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이치로 깨우쳤다. 일상에서 먹고 입는 것은 비록 터럭만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집안이나 곤궁한 이웃은 모두 은혜에 감격하였으니 이에 인덕(仁德)을 볼 수 있고, 수명이 90여 세에 이른 것은 성인의 말에서 징험할 수 있다.135)손주를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나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렸을 때는 성취를 기대하고 장성해서는 편안하고 왕성하기를 바라 모든 말과 염려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어 학문은 몸을 수양하지 못하고 가업은 남겨 주신 것을 지키지 못해 지극한 은혜를 저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대신 봉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조금밖에 올리지 못하였고 땅을 골라 이장할 때는 계획이 엉성하였으니 더욱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웠다. 나의 나이가 60에 가까워 질병이 점점 심해져서 하루아침에 죽어 조비의 평소 사행(事行)과 함께 전해지지 않고 민멸될까 깊이 두려웠다. 이 때문에 일찍이 보고 들은 것을 드러내 써서 묘비 뒤쪽에 갖추어 새긴다. 기묘년(1939) 계동(季冬) 유인의 생신에 손자 택술이 삼가 짓는다. 嗚呼! 我祖妣孺人金氏, 春秋九十有四, 而卒於丙辰之三月十三日。以我先考先七年而歿, 不肖祗服承重, 以時拘, 不能待禮月窆, 新山僅經, 成服赴葬, 合封於井邑郡德川面達川里祖考又新齋府君之墓。嗚呼! 我祖妣之行治也, 而沒不得孝子之執喪, 又不得葬之以禮, 痛矣哉! 不肖替遂先君素志, 廬墓側三年, 服闋後七年丙寅四月十三日, 移葬于同郡梨坪面漢水里後坐乾原。孺人稟性貞一, 持身端莊, 自在家時, 有令譽。年二十, 歸我祖考, 爲婦爲妻, 咸得其道。家貧無以爲生, 則勤於紡績, 績燈達夜, 因其火朝炊者, 餘二十年, 買得八石種落, 調度稍裕, 夫何遭天不吊, 遽當晝哭? 時我先考甫九歲, 孑然單矣, 大厦棟摧, 尙何言哉? 痛崩迫切, 絶而復甦。己則含歛葬祭俱以禮。克體夫子遺志, 益復勤儉, 課僮力穡, 身且執績, 業日加裕, 甘旨畢備, 尊姑安養, 延師敎子, 成學彰聞, 古所謂善繼述者, 豈獨於父然也? 上自奉先事姑, 下至御僕交隣, 素無資書史, 而能自中節, 內自油塩豉菜之微末, 外至土田金穀之巨煩, 亦不待使令, 親悉其數, 蓋志堅力定, 旣有守節之卓, 保家之難; 識明才敏, 亦有處事之則, 應物之智也。嗚呼! 我祖妣始而勤勞起業, 晩又樹立貞節, 上而祖宗永其享, 下而子孫受其賜, 惟功與德, 莫與之京, 詩人之於戲不忘, 豈惟王家然也? 且夫人有三綱, 烈居其一, 孺人之烈, 能盡人道扶綱常, 則宜有秉筆者書其事, 垂法來世, 不但後承之不忘已也。系出靈光。麗朝名臣文安公審言後, 本朝忠臣大護軍該九世孫, 孝子通政宅麗女。妣咸陽朴氏, 根爀女。其生純祖癸未十二月四日。我祖考扶寧金公諱景淳字明憲, 世系具在其墓表。一男洛進, 有學行, 遺集刋行。三女: 長適光山金在浩, 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季適咸安趙琪鏞。內外孫錄, 亦詳祖考墓表。嗚呼! 孺人性行, 固莊毅堅拙, 乃其用心, 却寬和慈惠, 是以家衆有過, 雖嚴訶不貸, 而旋卽解顔, 喩之以理。日用喫著, 雖毫不妄費, 而貧族窮隣, 莫不懷恩, 斯可以見仁德, 而其壽至耄期者, 有徵於聖言也夫! 愛孫切至, 於不肖尤焉。幼而期望成就, 長而冀祝安旺, 言言念念, 無所不至, 而不肖無狀, 學不成身, 業未守遺, 靠負至恩。父沒替養, 甘旨薄略, 擇地緬襄, 局面低拙, 尤極痛恨。年近六旬, 疾病侵尋, 深恐一朝溘然, 幷與平日事行, 而泯沒無傳。故玆表書所嘗見聞者, 用備刻于墓碑之陰。己卯季冬孺人生辰, 孫澤述謹撰。 부장(赴葬):가난이나 다른 사정으로 빨리 장사 지내는 것이다.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소(疏)에 보인다. 아 잊지 못하겠네:시인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아, 전왕을 잊지 못하겠네.[於乎 前王不忘]"라고 읊은 시에서 따온 말이다. 《詩經 周頌 烈文》 굳세었으나:원문은 '堅拙'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拙'은 오류가 있는 듯하다. '拙'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성인의……있다:《논어》 〈옹야(雍也)〉에 "어진 자는 장수한다.[仁者壽]"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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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강씨 묘표 병술년(1946) 孺人姜氏墓表【丙戌】 부인(婦人)에게 사군자(士君子)의 언행이 있으면 이를 여사(女士)라고 하니, 평택(平澤) 임덕(林德) 공의 계배(繼配)인 유인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그런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문밖을 나가지 않고 부모 곁에서 날을 마쳤으며, 아버지가 등창을 앓을 적에는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비록 다급한 상황이라도 큰소리를 내거나 매서운 안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여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애석해하였으니 유인에게 이미 사군자의 자질이 있음을 안 것이다.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직접 뵈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제삿날마다 3일 동안 고기와 훈채(葷菜)를 먹지 않았고, 비록 설한(雪寒)이라도 목욕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 제사가 끝나면 남은 슬픔으로 날을 마쳤고, 반드시 소복을 착용한 채로 종사한 것은 기일(忌日)에는 소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학가(禮學家)의 논의에 부합하였다.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이 대신 앓기를 기도하고 약을 지어 올려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끝내 불행을 당하게 되어서는 하종(下從)하겠다고 마음먹고 6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았으나 아주버님이 간절하게 울면서 타일렀으므로 선뜻 마음을 돌리고 아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따라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일어나 장례를 살피고 예를 따라서 상을 마쳤으니 맹자의 죽지 말아야 하는 정밀한 의리136)를 잘 본 것이다.임종 때 아들에게 이르기를, "효는 덕의 근본이니 한 사람이 효도하면 한 집안이 화목하고 집안이 화목하면 백복(百福)이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또 《대학(大學)》의 "한 집안이 인(仁)하면 한 나라가 인을 일으킨다."라는 뜻과 서로 표리가 된다. 이러하였다면 여사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오늘날은 예의(禮義)가 땅을 쓸 듯 사라져 서로 오랑캐가 되었는데 부녀자들 또한 심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어떻게 하면 구원(九原)에서 유인을 다시 살려 세상의 모범으로 삼아 점점 명철한 부인이 많이 나타나게 할 수 있겠는가.유인의 증손 양호(讓鎬)가 70세의 나이로 재차 나에게 와서 묘문(墓文)을 청하면서 가장을 보여주었는데 가장이 간략하고 엄정하여 믿을 만하였다. 이 때문에 큰 행적을 써서 나머지를 보여 부안 시어산(侍御山) 남쪽 곤좌(坤坐) 묘소에 새기게 하였으니 이곳을 지나가는 사방의 부녀자들이 이곳이 여사가 안장된 곳임을 알고 사모하며 본받기를 바란다.유인은 참의(參議) 극문(克文)의 후손이고, 사인(士人) 문상(文相)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경인년(1830, 순조30)에 태어났고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호(陵號)) 임오년(1882, 고종19)에 졸(卒)하였다. 임공은 충정공(忠貞公) 언수(彦修)와 직제학(直提學) 맹의(孟義)의 후손이고, 학생(學生) 종효(宗孝)의 아들이다. 3남을 두었으니 석황(錫黃), 출계(出繼)한 석오(錫伍), 석상(錫祥)이다. 3녀는 연안(延安) 이덕형(李德亨), 고흥(高興) 유광진(柳光鎭), 전주(全州) 최규영(崔奎永)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손자는 태순(泰淳)이고, 삼남의 손자는 치순(致淳)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婦人有士君子言行, 則是之謂女士。若平澤林公德之繼配孺人晉州姜氏, 其人也。自幼跡不出門, 及日親側。大人患疽, 口吮而愈之, 未嘗皺眉。平居雖倉卒, 無疾遽聲色。大人鍾愛, 惜其不爲男子子, 則知其已有士君子姿質。及適人, 以未顔舅姑爲至恨, 每諱辰, 三日不肉不葷, 雖雪寒, 沐浴致潔。祭畢, 餘哀彌日, 其必以素服從事者, 合於禮學家忌日縞素之論。夫子疾㞃, 禱代致藥, 靡不殫誠。竟至無幸, 矢心下從, 絶水漿者六日, 因夫兄之泣喩剴切, 幡然回心, 指其子曰: "所從在此。" 起視送終, 遵禮畢喪, 則能見得鄒孟氏可以無死之精義。臨終謂其子曰: "孝爲德本, 一人孝則一家和, 家和百福至。" 此又與《大學》"一家仁, 一國興仁"之旨相表裏。夫如是, 可不謂女士矣乎? 嗚呼! 今之日, 禮義掃地, 淪胥爲夷, 而婦女亦甚, 誠可寒心, 安得起孺人於九原, 而柯則乎世, 馴致哲媛之多見也? 其曾孫讓鎬七耋, 再造請墓文, 而示以狀, 狀簡嚴可信, 爲之書大者, 而見其餘, 俾鐫于扶安侍御山南枕坤之阡, 庶域中巾幗之過此者, 知其爲女士之藏, 而有以慕效也夫。孺人, 叅議克文後, 士人文相女。生以純祖庚寅, 卒以洪陵壬午。林公, 忠貞公彦修、直提學孟義後, 學生宗孝子。三男: 錫黃, 錫伍出繼, 錫祥。三女: 延安李德亨、高興柳光鎭、全州崔奎永。長房孫泰淳, 季房孫致淳。曾玄以下不盡錄。 죽지……의리:《맹자》 〈이루 하(離婁下)〉의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可以死 可以無死 死 傷勇]"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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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부 유인 김씨 묘표 정축년(1937) 孝烈婦孺人金氏墓表【丁丑】 내가 일찍이 남양(南陽) 홍군(洪君) 석규(錫奎), 석모(錫模) 형제를 본 적이 있는데 총명하고 준수함이 대단해 빠른 시일에 대성할 듯하였다. 얼마 뒤에 형제가 사는 마을을 들렀는데 집안이 풍족하고 사람이 넉넉하였으니 내가 그 선조 중에 선을 행한 사람이 있어서 하늘이 후손에게 보답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어느 날 홍석규가 부친 홍덕의(洪德義)의 명을 받들고 증조비(曾祖妣) 유인 김씨의 행록(行錄)을 보여주고는 묘표를 청하였는데 내가 그 행록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유인은 29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이 대신 앓기를 원하였고,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째어 피를 흘려 넣어 3일 동안 회생할 수 있게 하였다. 거의 숨이 끊어지려 할 적에 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3일 동안 연명하게 하였다. 고복(皐復)을 마친 뒤에는 물과 곡식을 끊어 물을 쏟아내듯 피를 토하고 누차 하종(下從)하려 하였으나 구조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윽고 선뜻 마음을 바꾸고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죽으면 육순인 시부모는 누가 봉양하겠으며, 여덟 살배기 아이는 누가 키우겠는가. 나는 차라리 늙은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아이를 키워 죽은 남편의 마음을 이루어 종부(從夫)의 큰 일로 삼는 것이 낫다."라 하고 이에 집안일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여 시부모를 섬기는 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예로써 하고 올바른 방도로 자식을 가르쳐 사군자(士君子)의 문하에서 학문하게 하였다. 평소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공경으로 몸가짐을 하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고 검소함으로 가산을 다스리면 패가(敗家)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아, 사람의 선은 효(孝)가 그 근본이고 부인의 선은 또 정렬(貞烈)보다 큰 것이 없다. 유인이 한 일로 말하면 진실로 사람으로서 지극히 근본적이고 가장 큰 선이다. 또 선뜻 마음을 고쳐 위로 계승한 바가 있고 아래로 전한 바가 있어 50년을 한결같이 하여 가문이 백세, 천세 동안 이어질 기반을 세웠다. 이것이 어찌 한때 원통한 마음이 격해져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절개와 열행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하고 그만인 것과 비교할 만한 일이겠는가. 대개 유인이 이런 선을 행한 것은 스스로 그 도리를 다했을 뿐이니 어찌 보답을 바랐겠는가. 자연히 그렇게 하여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고, 좌계(左契)를 갖고서137) 후세를 기다려 몸이 남은 복을 받아 생전에 자손의 효성스러운 봉양을 받았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보답한다는 옛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나는 원컨대 유인의 후손이 된 자는 마땅히 오늘날의 성대함이 모두 유인의 덕이라는 점을 알아 〈대아(大雅)〉의 염수(念修)의 의미138)를 생각하여 선을 행하는 데 힘써 유인이 스스로 그 도리를 다했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또 나아가 공경하면 치욕을 멀리하고 검소하면 패가를 면한다는 평소의 경계가 "공손하면 치욕을 멀리하고139) 자신을 단속함으로써 잘못되는 경우는 드물다.140)"라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은연중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아 늘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문을 창대하게 하기를 오늘날과 같게 할 뿐만 아니라 무궁한 세월 동안 유인의 덕을 받도록 해야 한다.유인의 본관은 강진(康津)이고, 충민공(忠敏公) 회련(懷鍊)의 후손이다. 부친은 영표(永杓)이고, 남편은 인표(麟杓)이니 익원군(益原君) 경림(景霖)의 후손이다. 아들은 성연(性然)이고, 딸은 청송(靑松) 심태한(沈泰漢)에게 시집갔다. 덕의의 아우는 진의(鎭義)이다. 석원(錫元), 석춘(錫春), 석률(錫律)은 덕의의 삼남, 사남, 오남이다. 춘택(春澤), 정택(正澤), 형택(炯澤)은 석규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많아서 기록하지 못하니, 번성함이 끝이 없다. 유인은 을축년(1925)에 졸(卒)하였으니 태어난 철종(哲宗) 신해년(1851, 철종2) 4월부터 75년의 수명을 누렸다. 부안군 산내면(山內面) 자미동(滋味洞) 동북쪽 산기슭 간좌(艮坐) 언덕에 묘소가 있다. 余嘗見南陽洪君錫奎、錫模兄弟, 聰俊發越, 若將一日而千里。旣而過其里, 蓋家溫而人足, 余意其先有爲善, 而天報之於其後也。日, 錫奎奉其大人德義命, 示以其曾祖妣孺人金氏行錄, 而請表墓之文。余觀其錄, 孺人年二十九, 夫病, 禱天願代。其革也, 裂指注血, 得回甦三日。其垂絶也, 又斷指延命三日。旣皐復, 絶水穀, 吐血如注, 累欲下從, 被救未遂。旣而幡然改曰: "我之若此, 六旬舅姑疇養? 八歲兒子疇成? 我豈若奉老成幼, 遂亡夫之心, 爲從夫之大者乎?" 乃勤於治家, 事舅姑, 生死以禮, 敎子以義方, 使遊學士君子門。雅戒其子曰: "敬以持身, 則辱可遠矣; 儉以治産, 則敗可免矣。"嗚呼! 人之善, 孝爲其本, 婦人之善, 又莫大乎貞烈。若孺人之爲, 固人極本最大之善, 而其幡然改心, 上有所承, 下有所傳, 五十年如一, 而樹人家千百世之基者, 豈一時寃激殺身, 以博節烈之名而已之可比哉? 蓋孺人之爲此善也, 自盡其道而已, 豈望報乎? 天然而不待, 執左契以俟異世, 而身受餘慶, 孝養於生前。爲善者天報以福, 古人之言, 豈不信哉? 余願爲孺人之後者, 當知今日之盛, 皆孺人之德, 而思〈大雅〉念修之義, 勉於爲善, 而以孺人自盡其道之心爲心。又進而知敬則遠辱、儉則免敗之雅戒, 暗合於聖賢恭遠恥辱、以約失鮮之訓, 而念念在玆, 俾其門昌大, 不但如今日, 而受孺人之德於無窮也。孺人籍康津。忠敏公懷鍊后。其父永杓, 其夫麟杓, 益原君景霖后。其子性然。女靑松沈泰漢。德義弟鎭義。錫元、錫春、錫律, 德義之三四五房男也。春澤、正澤、炯澤, 錫奎男。而餘煩不錄, 其盛未艾也。孺人卒以乙丑二月二十三日, 距其生哲宗辛亥四月, 得年七十五。墓于扶安郡山內面滋味洞東北麓坐艮之原。 좌계(左契)를 갖고서:좌계는 《노자(老子)》 79장에 "성인은 좌계를 갖고 있더라도 남에게 빚을 갚으라고 추궁하지 않는다.[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라고 한 데서 따온 말로, 채권자가 가지고 있는 문서이다. 여기서는 유인 김씨가 후일 보답을 받을 만한 선행을 쌓았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염수(念修)의 의미:《시경》 〈대아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한 데서 따온 말로,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자신도 덕을 닦는다는 의미이다. 공손하면 치욕을 멀리하고:《논어》 〈학이(學而)〉에 유자(有子)가 "공손함을 예에 가깝게 하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恭近於禮 遠恥辱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자신을……드물다:《논어》 〈이인(里仁)〉에 보이는 공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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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유인 이씨 묘표 갑술년(1934) 烈婦孺人李氏墓表【甲戌】 왕촉(王蠋)이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141)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두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미 충(忠)이고 열(烈)이다. 돌아보건대 세상 사람은 꼭 임금을 위해 죽고 남편을 위해 죽는 것만을 가장 뛰어난 일로 여기고 처한 상황의 당부(當否)는 논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만약 왕촉이 군대로 협박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목을 매어 죽지 않았을 것임을 나는 알겠다. 또 이 점을 통해 남편이 죽으면 곧 하종(下從)하는 것이 꼭 옳지는 않다는 것도 알겠다.유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함성군(咸城君) 극해(克諧)의 후손이고, 탐진(耽津) 안성용(安性用) 공의 아내이다. 시집을 갔을 때 시부모와 동서가 없어서 홀로 집안일을 맡아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길쌈하였으며, 죽을 먹으며 지내도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았으며, 예로 남편을 받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100리 밖으로 출타하였는데 흉음(凶音)이 갑자기 도착하니 곡하고 혼절했다가 깨어났다. 초종(初終)이 지난 뒤에 마음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의 명운이 박하니 죽느니만 못하다."라 하고는 집 뒤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가서 목을 매 죽으려고 하였다. 이때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이 응애응애 울자 선뜻 마음을 고치고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끝이고 안씨의 대는 끊어지니 무슨 얼굴로 구천(九泉)에서 남편을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부지런히 집안을 다스렸으니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고생을 겪으며 정절을 지키고 성실하게 30년을 살다가 임술년(1922, 철종13) 3월 6일에 졸(卒)하였다.아들 재욱(在旭)은 지금 장년으로 곧 노년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병길(炳吉), 병엽(炳葉)이다. 기업(基業)을 세우고 명성을 보존하였으니 사람들이 아무개 집안이 있는 것은 모두 유인의 공임을 안다. 비유하자면 약한 나라의 신하가 선왕(先王)의 부탁에 마음을 다해 수고하여 구업(舊業)을 잇고 복원한 것과 같으니 아, 어질도다.옛날 조씨(趙氏)에게 난이 있을 때 저구(杵臼)는 죽고 정영(程嬰)은 고아를 보호하였다.142) 저구가 죽었기 때문에 정영이 고아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인데도 오히려 죽음을 쉬운 일로 여기고 고아를 보호한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으니, 하물며 한갓 죽기만 하는 경우이겠는가. 만약 유인이 쉬운 일을 취하고 어려운 일을 버렸다면 안씨가 안씨가 되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한갓 죽기만 하는 것은 매우 쉽고 또 완전히 좋지는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또 집안과 나라를 보호하여 임금과 남편을 위로하지 않는 것을 비록 충렬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안재욱이 부안 우산(右山) 안 대소(大沼) 북쪽 갑좌(甲坐) 언덕에 유인을 장사 지내고 비석을 마련해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유인의 정절과 현명함이 드러나지 못할까 두렵고 세상의 논의가 보이지 않는 것을 거듭 탄식하여 특별히 써서 드러낸다. 王蠋有言: "忠臣不二君, 烈女不二夫。" 苟其不二, 斯已忠烈矣。顧世之人, 必以死君死夫爲其尤, 而不論其所處當否, 則惑矣。使蠋而不遭兵劫者, 吾知其頸必不經矣, 又以是知夫死輒下從者之未必爲是矣。孺人咸平李氏, 咸城君克諧之後, 耽津安公性用之妻。旣歸, 無舅姑娣姒, 獨當家務, 夏畦冬績, 歠粥不戚戚, 奉夫子以禮。一日, 夫子出百里外, 凶音忽至, 哭絶而甦。經初終, 矢之心曰: "吾之薄命, 不若死。" 至家後大樹下, 欲結項而死。時有幼子, 生未期, 呱呱泣, 乃幡然改曰: "吾死, 此兒休矣, 安氏絶矣, 何顔見夫子於泉下?" 自是尤勤治家, 時年二十三。辛苦貞信, 積三十年, 以壬戌三月六日卒。男在旭, 今壯且老。有二子, 炳吉、炳葉。樹立基業, 保存聲名, 人知有某家, 皆孺人功。譬如弱國之臣, 盡瘁付託, 纘復舊業。猗歟賢哉! 昔趙氏有難, 杵臼死之, 程嬰保孤, 杵之死, 所以成程之保孤, 猶易其死, 而難保孤, 况徒死者乎? 向使孺人取其易而舍其難, 安氏之爲安氏, 未可知也。於是乎益信無所處而徒死, 甚易且未善。又以其不保家國慰君夫, 雖謂不足爲忠烈, 不爲過矣。在旭葬孺人於扶安右山內大沼北甲坐原, 伐石而請余文。余旣懼貞賢之未闡, 重歎世論之無見也, 特書而表之。 왕촉(王蠋)이……않는다: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화읍(畫邑)의 현인으로, 왕에게 올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초야에서 농사하며 지냈다. 연(燕)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왕촉을 연나라 장수로 삼고 만호(萬戶)의 식읍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왕촉이 사양했다. 이에 악의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화읍을 도륙하겠다고 협박하자, 왕촉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녀(貞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라고 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史記 田單列傳》 조씨(趙氏)에게……보호하였다: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 3년 대부 도안가(屠岸賈)가 대신 조삭(趙朔)의 집안을 몰살하였다. 이때 조삭의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궁중에 숨어 유복자를 낳았는데 조삭의 벗인 정영과 저구(杵臼)가 조삭의 아이를 보호할 계책을 세웠다. 정영은 조삭의 진짜 아들인 조무(趙武)를 안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고, 저구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삭의 아이로 꾸며 숨어 살다가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였다. 경공 15년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조무를 조씨의 후계자로 삼아 조씨의 종사를 다시 계승하게 하였는데, 정영은 조무가 관례를 올리던 날 저구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趙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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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부 유인 김씨 묘표 경인년(1950) 孝烈婦孺人金氏墓表【庚寅】 부안군(扶安郡) 상림리(上林里)의 임기삼(林基三) 군이 재차 나의 집에 찾아와 울면서 고하기를, "나의 선비(先妣)는 효열과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졸(卒)한 지 29년이 되었는데도 시대가 변해 이미 정표(旌表)할 곳이 없고, 자손은 식견이 우매하여 명망 있고 박학한 사람의 찬양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나이는 이미 육순이니 지금 이를 처리하지 못하면 행적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깊이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묘표에 새길 말 한마디를 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임기삼의 이웃에 사는 벗인 이장일(李章一)이 함께 와서 증명해 주었다. 이장일은 내 종조고(從祖姑)의 사위로 순수하고 진실한 고가(故家)의 후예이다. 이에 가장을 살펴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유인은 부안 김씨로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이며, 고려 말의 충신인 광서(光叙)의 17세손이며, 화곡 선생(火谷先生) 명(銘)의 11세손이며, 학생(學生) 석록(錫祿)의 따님이며, 시집가서 보안(保安) 임지환(林祉煥) 공의 부인이 되었다. 임공은 서하(西河) 절의공(節義公) 춘(椿)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상학(相鶴)의 아들이다.유인은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맛있는 음식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니 사방의 이웃이 칭송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흉년이 들어 기축년(1889) 봄에 임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가솔을 이끌고서 진안(鎭安)으로 이사하였다. 4년이 지난 계사년(1893)에 임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유인이 손가락을 째어 수명을 연장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니 애통하여 혼절했다가 막 깨어나서 하종(下從)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다가 곧바로 자신이 죽으면 어린 아들을 보호하지 못해 남편 집안의 후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선뜻 생각을 고치고 삼가 염(殮)하고 장사 지내는 것을 살폈다.또 생각하기를, "타향 출신의 과부라 외인의 겁탈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여 이에 갈고리로 입 언저리를 끌어당겨 추한 얼굴로 바꾸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기를, "만전을 기하는 방도로 보면 이곳에서 거처해서는 안 된다."라 하여 집 뒤쪽 깨끗한 곳에 시아버지의 진사 교지(敎旨)와 방목(榜目)을 매안(埋安)한 뒤 칠순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10세 아들과 8세 딸을 데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안은 채로 진안을 떠나 부안으로 돌아왔다.2년이 지난 을미년(1895)에 혼자서 370리 떨어진 진안에 가서 교지와 방목을 도로 모셔 옷깃 안에 감추고 남편의 유해를 파서 수습해 물건을 포장한 것처럼 싸서 짊어지고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도 남에게 들킬까 염려하여 밤에는 유해를 베고 누워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렇게 15일이 지나서 고산(故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전후로 떠도느라 답답하고 죽을까 두려운 심정과 쇠와 돌처럼 단단한 백절불굴의 뜻은 형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만년에는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졌으나 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기르는 일부터 장사, 제사, 혼례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예절을 다하여 고단하고 쇠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니, 아, 장대하도다.71세가 되어 임술년(1922) 9월 28일에 임종하였다. 태어난 날은 철종(哲宗) 임자년(1852, 철종3) 9월 5일이다. 묘소는 상림리 선영 아래 간좌(艮坐) 언덕이다. 아들은 기술(基述), 기삼이고, 딸은 청도(淸道) 김한주(金漢湊)에게 시집갔다. 손자 을진(乙鎭), 길진(吉鎭)은 장남 소생이고, 길진은 차남의 양자로 나갔다. 외손은 김기홍(金璣洪), 기철(璣哲), 기오(璣五)이다.대개 옛날에 효열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는 한(漢)나라 진씨(陳氏) 부인143)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 유인의 일로 비교해 논하면 가난하고 고생하며 떠도는 가운데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봉양한 것은 전택과 재산이 있었던 진씨와 비교하여 유인이 더 어렵고, 위로 받고 의지할 만한 자녀 하나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를 지킨 것은 2남 1녀를 둔 유인과 비교하여 진씨가 더 어렵다. 그러나 얼굴을 추하게 바꾸고 먼 길을 오가며 반장하여 처지가 곤궁하고 다급한 때에 선인의 사적을 보전한 것으로 말하면 고금을 두루 꼽아도 보기 드문 일이다.삼가 생각건대 유인은 진씨에 비해 더 나은 점만 있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진씨는 태수(太守)가 이를 보고하여 조정에서 상을 내리고 주자(朱子)가 사적을 기록하여 명성이 오랜 세월 전해지게 하였는데, 유인은 알려진 바 없이 조용하고 겨우 궁벽한 시골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 지은 변변찮은 묘표를 얻었으니 슬퍼할 만하다. 후세 사람은 부디 이곳이 효열부가 안장된 곳임을 알아서 공경을 표할지어다. 扶安郡上林里林君基三, 再踵余門, 泣而告之曰: "吾先妣有孝烈至行, 而其卒爲二十九年, 時世移易, 旣無處乎褒旌, 子孫識昧, 幷未得名碩贊揚, 而賤齒已六旬, 及今無以爲所, 則深恐泯而無傳, 願吾子幸惠一言于阡表。" 其隣友李章一偕來證之。李, 余從祖姑之婿, 而淳眞故家裔也。乃按狀而讀之。孺人, 扶寧金氏, 文貞公坵之後, 麗末忠臣光叙十七世孫, 火谷先生銘十一世孫, 學生錫祿女, 嫁爲保安林公祉煥之配。林公, 西河節義公椿后, 進士相鶴子也。事舅姑孝, 雖貧, 甘旨無闕, 四隣稱頌。戊子歲大無, 己丑春, 林公奉母率眷, 移居鎭安。粤四年癸巳, 疾革, 孺人裂指乞命而不得, 則慟絶方蘇, 矢心下從, 旋思我死, 幼子不保, 夫家無後, 遂幡然改圖, 謹視斂葬。又思他鄕孀婦, 恐有外劫, 乃鉤引口頰, 變作醜容, 然又思萬全之道, 此不可居。埋安皇舅進士敎旨、榜目於家後潔地, 陪七耋皇姑, 率十歲子、八歲女, 抱三歲乳男, 棄鎭還扶。經二年乙未, 隻身往鎭三百七十里, 還奉敎榜, 藏之衣襟中, 掘斂夫子骸體, 裹作物包樣, 擔負以行。猶恐被人發露, 夜則枕骸而臥, 達曙不寐。凡十有五日, 而返葬故山。其前後瑣尾拂鬱, 死喪憂懼之情, 鐵肝石腸, 百折不回之志, 有不可形言者。晩而家益艱, 奉母鞠幼, 以至葬祭婚嫁, 能盡情節, 樹立孤弱之門戶, 噫其壯矣! 壽七十一而終于壬戌九月二十八日, 其生則哲宗壬子九月五日。其墓上林里先塋下艮原, 其男基述、基三, 女淸道金漢湊。孫乙鎭、吉鎭, 長房出, 吉繼次房。外孫金璣洪、璣哲、璣五也。蓋古之孝烈俱備者, 莫尙於漢陳氏婦, 然今以孺人之事比論, 則貧苦流離之中, 忠養其姑, 視陳氏之有田宅財物, 孺人爲難; 無一箇子女可慰藉, 而一心守義, 視孺人之有二子一女, 陳氏爲難。至於變作醜容, 返葬千里, 保全先蹟於顚沛奔走之時, 歷選今古而罕覯者。竊謂孺人於陳氏, 有過之, 無不及焉。然而陳氏, 太守以聞, 朝廷賞賜, 朱子錄之, 聲名永世, 孺人則寥寥無聞, 僅得窮鄕陋文, 如余者筆而表其墓, 亦足悲夫! 後之人, 尙識其爲孝烈婦藏而式之哉!後滄先生文集卷之二十四 終 진씨(陳氏) 부인:16세에 시집을 왔다가 수자리 서러 떠난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는데, 늙은 시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개가하지 않고 정성으로 모셨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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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 홍재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族弟士毅 弘梓 乙丑 어제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하여 시초점을 쳐서 항괘(恒卦)에서 해괘(解卦)로 가는 괘를 얻었고, 또한 금귀(金鬼)가 왕성하여 비록 변괘가 되어 복덕(福德)을 등지는 곳으로 나아가나 매우 힘이 없습니다. 현제(賢弟)가 시초점을 쳐서 진괘(震卦)에서 풍괘(豐卦)로 가는 괘를 얻은 것과 흡사 서로 동일하니 누가 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습니까?대개 화복(禍福)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물을 필요가 없고, 다만 나의 의리를 극진히 할 뿐입니다. 그 효사를 보며 말하기를, "그 덕을 항상(恒常)하지 않으면 곧 부끄러움이 닥치게 된다"139)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공자께서도 평소에 칭하였던 것인즉 신명(神明)이 우리들에게 훈계한 것이 깊고 절실했습니다. 만약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의리에 미진한 바가 있다면, 이는 덕이 항상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이 큰 것이니, 선사께 죄를 얻게 되고 신명에게도 죄를 얻게 되는 것이니, 가히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두려운 마음으로 더욱 성찰하여 드디어 '항'이라는 글자로 나의 서재에 편액으로 삼았으니, 대개 주자가 자호한 돈옹(遯翁)의 고사140)를 외람되게 본뜬 것입니다. 비록 주자는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니 자신의 원고를 불사르고 그 자취를 숨긴 것은 마땅할지라도, 우리들은 일이 선사에 관계되니 마땅히 선사의 의리를 밝혀서 그 덕을 떳떳하고 지속해야 합니다.감추고 드러내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처신하는 도리는 일찍이 동일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또한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전날 밤에 객관(客館)에서 우리 아우가 운운한 말이 나의 마음에 합치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마침 항덕(恒德)의 훈계를 신명에게 얻어 그로써 느낀 것을 적어 언급하니, 생각건대 깊이 헤아려 주리라 봅니다. 昨有人爲余筮, 得恒之解.亦金鬼旺盛雖變出午福德而太無力.與賢弟筮得震之豊, 恰恰相同, 孰謂占不可信也.蓋禍福天定不須問, 只要盡吾義而己.觀其爻辭曰, 不恒其德, 或承之羞, 而此爲孔子之雅稱者, 則神明之所以戒吾輩者, 深且切矣.若貪生惡死, 義有所未盡, 是德不恒而羞之大, 得罪先師矣, 得罪神明矣.可不戒哉.於是惕然加省, 遂以恒字扁吾齋, 蓋僭擬朱子自號遯翁故事也.雖然朱子事關當身, 焚己稿而遯其跡固也, 吾輩則事關先師, 當明師義, 恒其德也.晦顯之雖殊, 道未嘗不同, 此又不可不知也.前夜客館, 賢弟有所云云, 有會于心.適得恒德之戒于神明, 因以識感者告及, 相深見諒也. 《주역》恒卦 九三爻의 爻辭에 "그 덕이 항구하지 않은지라 혹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리라.〔不恒其德, 或承之羞.〕"라고 하였다. 주자가 자호한 돈옹(遯翁)의 고사 송 영종(宋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와 조여우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때 주희 등이 조여우의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에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을 위학(僞學)이라고 규정하고는 주희의 학문을 일체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이때 주희가 수만 언의 봉사를 작성하여 조여우를 변호하려고 하였는데, 문인 채원정이 점을 쳐 보니 둔괘(遯卦)가 동인괘(同人卦)로 변하였으므로, 주희가 잠자코 초고를 불사르고는 마침내 둔옹(遯翁)이라고 호를 바꿨다는 기록이 전한다. 《周易筮述 卷8》《吹劍錄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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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로 돌아가는 장명숙【진우】을 전송하는 서문 【임자년(1912)】 送張明叔【鎭宇】歸北艮序 【壬子】 옛날 주(周)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 말기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나타나고 변방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자, 이에 우리 부자(夫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바다를 건너 오랑캐 나라에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으니8), 백대가 흘러 내려온 뒤에 그 말씀을 듣고 그 시대를 상상하면 아직도 사람으로 하여금 슬피 탄식하게 하는데, 하물며 혼란스럽고 멸망해 버린 우리나라는 주나라 말기에 비하면 어떠하겠는가. 짐승 같은 오랑캐가 사람을 핍박하고 예의는 땅을 쓴 듯 없어져서 우리 유자(儒者)는 도가 행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조차 세상에 용납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부자께서 살아 계셨다면 멀리 떠나갈 것이 틀림없고, 한갓 말 사이에 드러낼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돌아보건대, 우리나라의 사류(士類)들은 대부분 구차하게 인습을 그대로 따르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하였기에 노예의 치욕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고, 멸망의 재앙을 또 장차 밟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늘 동지를 위해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겼고, 또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며 탄식하였다. 그런데 임자년(1912) 여름에 사문(斯文) 장명숙(張明叔)이 폐사(弊社)로 나를 찾아왔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대체로 걸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뒤에 듣건대, 대대로 부령(富寧)에 살면서 가문의 명망이 매우 성대했는데, 지난해 합방(合邦)의 변고를 만나 원수 왜노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침내 가족을 데리고 북간도(北間島)로 들어가 거주하였고, 관북(關北 함경도)의 여러 공들도 또한 함께 간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용감하구나. 이 일이여. 무릇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은 멀리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느긋해 하고 가까이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급하게 여기니, 본래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매우 가까운 재앙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고향을 편안하게 여기고 타향으로 이주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기 마련이다. 지난해의 변고는 참으로 나라를 위해 통곡할 만한 것이었지만, 내 한 몸에 미칠 재앙으로 치자면 눈앞에 바로 닥칠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직 대의(大義)를 보고 고상한 뜻을 숭상하여 친척이나 벗들과 왕래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좋은 논과 큰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배불리 먹는 이로움을 포기한 채 머나먼 지역인 궁벽한 땅 밖에서 종적을 감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사이에 삶을 부치며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하였으니, 실로 의리가 중요하고 이해(利害)가 가볍다는 것을 실제로 터득하여 알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노예의 치욕과 멸망의 재앙에 대처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가 초연하게 홀로 서서 참으로 공자의 무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임을 알겠다.그러나 이로 인하여 삼가 권면할 것이 있다. 옛날 부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비루하여 거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을 보이자, 부자께서는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9) 대저 오랑캐의 풍속은 진실로 비루한데, '군자가 거주한다면 비루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덕이 자신에게 닦여지고 교화가 남에게 미쳐 옛 습관을 버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간도 한 구역은 북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역대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선대 현인의 유풍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그 풍속이 비루하지 않다고 이를 수 없다. 바라건대 그대와 제공은 단지 뜻을 숭상하고 의리를 지키며 치욕을 멀리하고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끝마쳤다고 여기지 말고, 또 자기에게 보존된 것을 깊게 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넓혀서 덕으로 이끌고 예(禮)로 거느리며 인(仁)으로 적셔 주고 의(義)로 연마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크게 바꾸어 도에 이를 수 있게 함으로써 성학(聖學)의 일파가 북간도에서 창도되고 밝혀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부자께서 바다를 건너 오랑캐 땅에 거주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받들어 좇았다고 이를 수 있으니, 청컨대 그대는 돌아가서 더욱 힘쓰고, 또한 이것으로 제공에게 질정하라." 昔周末之浸衰也, 亂賊接踵, 裔戎猾夏. 於是吾夫子慨道之不行, 而有浮海居夷之語. 百世之下, 聞其語, 想其時, 尙能使人悲歎而涕零, 矧玆我邦之亂亡, 視周末何如也? 夷獸逼人, 禮義掃地, 爲吾儒者, 非惟道之不行, 身且不見容於世, 如使夫子而在者, 其遐擧遠引也必矣, 不徒發於言辭之間而已也. 顧此我邦士類, 類多因循苟且, 不能果決勇行, 奴隷之辱, 旣不能免, 而滅亡之禍, 又將蹈焉. 是以常爲同志慨惜, 而亦自愧歎于中. 壬子夏, 張斯文 明叔訪余於弊社, 與之語, 蓋傑然而有志節者也. 旣而聞其世家富寧, 族望甚盛, 而値往年合邦之變, 恥作讎奴之民, 遂挈家入北艮島居焉, 而關北諸公, 亦多同往者. 余曰: "勇哉此擧也. 夫人之常情, 緩於遠而急於近. 自非有剝膚切近之災, 不免安土而重遷. 往年之變, 誠可爲國家痛哭, 而在一身之禍, 非目下切近者. 而惟大義是睹, 高志是尙, 舍親戚朋友過從之樂, 棄良田厦屋安飽之利, 鏟跡於絶域荒陬之外, 寓生於草根木皮之間, 若將終身而不悔. 苟非實見得理義之重而利害之輕, 烏能辦此奴隷之辱、滅亡之禍? 吾知其超然獨立而誠無愧孔子之徒也. 然因此而竊有奉勉者. 昔夫子之欲居九夷也, 或有以陋不可居見疑者, 則夫子答以'君子居之, 何陋之有?' 夫夷狄之俗固陋矣, 而其曰'君子居之則不陋'者何也? 誠以其德修于己, 而化及於人, 使去其舊習, 遂成美俗也. 今此艮島一區, 僻在北陲, 列聖聲敎之所不曁, 先賢遺風之所未聞, 其俗不可謂不陋. 願明叔與諸公, 毋但以尙志守義, 遠辱免禍, 爲能事已畢, 又能存乎己者深而施諸人者廣, 導之以德, 率之以禮, 漸之以仁, 摩之以義, 丕變民俗, 以至乎道, 使聖學一派, 倡明於北艮. 然後乃可謂奉遵夫子浮海居夷之至意也. 請明叔歸而勉旃, 亦以奉質於諸公. " 부자(夫子)께서 …… 하셨으니 부자는 공자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라고 하였고,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셨다.〔子欲居九夷.〕"라는 구절이 보인다. 옛날 …… 답하였다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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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 선생 문집10)의 서문 遜愚先生文集序 《예기》에 이르길,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예(禮)와 의(義)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의를 지키고 예를 밝힐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대체가 이에 확립된 것이니, 예를 들면 세손익위사 사어(世孫翊衛司司禦)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정민(貞敏)인 손우 선생(遜愚先生) 홍공(洪公)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공은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스승으로 섬겨 《춘추(春秋)》의 의리를 들었기에 정축년(1637) 이후로 개연히 바닷가에 은둔할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정공 양(鄭公瀁)ㆍ강공 흡(姜公恰)ㆍ홍공 우정(洪公宇定)ㆍ심공 세장(沈公長世)과 더불어 벗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일컬었고, 동춘 선생(同春先生 송준길(宋浚吉))은 시를 지어 주어 세상을 피해 정절을 지키도록 권면하였으니, 의리를 지켰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서(禮書)에 전념하여 책을 이룰 만큼 글을 모으고 기록하여 집안에서 시행하는 것이 이미 도타웠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또한 넓었기 때문에 우암 선생(尤菴先生 송시열(宋時烈))이 공을 예학(禮學)으로 추천하며 동지 중에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예를 밝혔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가 있고 예가 있으니, 대체를 확립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문정공(文正公)은 평범한 선비를 천거할 사람이 아니고, 우암은 차례를 밟지 않고 승급시켜 등용할 후보자로 추천한 것을 보건대, 또한 공이 세상을 경영할 인재임을 알 수 있다.문예(文藝)는 군자에게 지엽적인 일인지라 진실로 중시하거나 경시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공이 오직 숭상했던 것은 예와 의였기 때문에 평소 저술한 것이 이 두 가지 사이를 넘지 않았음에도 인륜의 명분을 가르치는 유교(儒敎)를 크게 돕기에 충분하였으니, 유집(遺集)의 간행을 또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예와 의가 사라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재앙이 그칠 날이 없어 혼자서는 힘쓰기 어렵게 되었음을 개탄하고, 앞선 시대에 닦아놓은 공덕이 이미 멀어졌음을 슬퍼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비로소 공의 예와 의에 관한 책이 세상에 나와 퍼지게 되었으니, 300년의 오랜 세월 동안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은 하늘이 어쩌면 오늘날을 기다려 때에 맞는 쓰임으로 삼아 천운이 돌아오고 양기가 회복되는 징조로 삼아서일 것이다. 공의 10세 손 사목(思穆)과 사철(思哲)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기에 내가 공의 평생 대업과 마음속에 느낀 바를 위와 같이 간략하게 쓸 따름이다. 《記》曰: "人之所以爲人者, 禮、義也. " 人苟能秉義而明禮, 人道之大體斯立矣. 若司禦贈吏判謚貞敏 遜愚先生 洪公, 卽其人乎. 公師事淸陰 金文正公, 聞《春秋》之義, 丁丑以後, 慨然有蹈海之志, 遂入太白山, 與鄭公 瀁、姜公 恰、洪公 宇定、沈公 長世爲友, 世稱太白五賢. 同春先生贈詩, 有遯世守貞之奬. 可不謂之秉義乎? 專精禮書, 裒輯成編, 行之家者旣敦, 惠諸人者亦廣. 故尤菴先生推公禮學, 爲同志中第一, 可不謂之明禮乎? 義且禮焉, 可不謂大體之立乎? 蓋觀乎文正公非尋常士子之薦, 尤翁不次陞用之擬, 亦可以知公經世之才矣. 至於文藝, 是君子之末務, 固不足重輕. 公惟其所尙者, 禮、義也. 故其平日所著, 不越乎二者之閒, 而有足以大裨名敎者. 遺集之刊, 又烏可已乎? 顧今禮、義滅亡, 天地翻覆之禍, 靡所止屆, 慨隻手之難力, 悼前修之已遠. 于斯時也, 乃得公禮義之書, 出而行之世. 其所以未遑於三百年之久者, 天其或者留待今日, 以爲適時之用, 而作天返陽復之兆也歟. 公十世孫思穆、思哲, 屬愚以序. 余略書公生平大致及所感于中者, 如右云爾. 손우 선생의 문집 손우 선생(遜愚先生)은 홍석(洪錫, 1604~1680)으로, 손우는 그의 호이며, 문집은 그의 저서인 《손우문집(遜愚文集)》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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