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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삼일에 현광과 함께 천태산에 올라 2수 三月三日 同玄狂 上天台山【二首】 병 끝에 기력은 가을 매미 같은데 病餘氣力若秋蟬애써 봄바람에 고운 물색을 찾아갔네 强覓春風物色姸낯익은 청산이 손 모아 인사하고 慣面靑山來拱揖다정한 강물은 휘감아 도는구나 多情流水作回旋시는 본성을 쓰는 것이니 어찌 못난 솜씨 부끄러워하리 詩題本性寧羞拙꽃은 천연의 향을 취하는 것이니 문지르지 말라 花取天香莫遣撋멀리 난정410)을 생각하니 노쇠함만 더 절실해지니 曠感蘭亭衰益切한갓 옛일을 배워 따라서 할 뿐만 아니라오411) 非徒故事學相沿막다른 길이라도 호기가 가벼이 솟아서 窮途豪氣尙輕騫고상한 벗을 다시 얻어 돌 돈대에 오르네 更得高朋上石墩우군의 영화첩412)을 다투어 말하고 爭道右軍永和帖동로에서 늦봄에 옷차려 입은 일413) 따르려 하네 願從東魯暮春袢연기 먼지 이는 북쪽 변방 하늘이 얼마나 먼가 煙塵北塞天何渺꽃과 버들 핀 앞 시내엔 해가 정히 따사롭구나 花柳前川日正膃414)이번 만남도 잠시면 옛 흔적이 될 것이니 此會俄然成舊迹그대는 부를 지었던 손작의 자취415)를 따라야하리 之君儻踵賦台孫 病餘氣力若秋蟬, 强覓春風物色姸.慣面靑山來拱揖, 多情流水作回旋.詩題本性寧羞拙, 花取天香莫遣撋.曠感蘭亭衰益切, 非徒故事學相沿.窮途豪氣尙輕騫, 更得高朋上石墩.爭道右軍永和帖, 願從東魯暮春袢.煙塵北塞天何渺, 花柳前川日正膃.2)此會俄然成舊迹, 之君儻踵賦台孫. 난정(蘭亭)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 당대의 명사 40여 인과 함께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에 모여서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려 마시며 시를 지으며 놀았다. 한갓……아니라오 단순히 난정에서의 놀이만을 흉내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우군의 영화첩[右軍永和帖]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첩(蘭亭帖)을 말한다. '우군(右軍)'은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당대의 명사(名士)가 풍류를 즐긴 이야기가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나온다. 동로에서……일 봄에 초연히 산수에서 노니는 것을 말한다. '동로(東魯)'는 중국의 동쪽에 자리한 노(魯) 나라를 이른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膃 '溫'의 오기인 듯하다. 부를……자취 손작처럼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문인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은 뒤, 벗이었던 범영기(范榮期)에게 "그대가 이 글을 땅에 던져 본다면 금석의 소리가 나리라.[卿試擲地, 當作金石聲也.]"라고 한 고사가 유명하다. 《晉書 孫綽傳》 膃 '溫'의 오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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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에서 이우와 함께 읊다 酒川 同李友吟 더위를 식히는 데 청포181)를 쓸 필요 없으니 納涼不待用靑蒲살랑살랑 가을바람이 호수 밖에 일어나네 颯颯秋風動外湖흰 눈 같은 천 가닥 머리에 경사는 한스럽고 白雪千莖經士恨누런 구름 같은 백 가지 곡식에 야인은 즐겁네 黃雲百穀野人娛옛 거문고로 연주하는 유수곡을 들을만하니182) 古琴聊可聽流水암실에 진주를 던진다고 어찌 노여워하리183) 暗室何曾怒擲珠진솔한 한 번 유람으로 세속을 벗어나니 眞率一遊還脫俗신선을 찾으며 쓸데 없이 부르지 않는다네 不尋仙侶費相呼 納涼不待用靑蒲, 颯颯秋風動外湖.白雪千莖經士恨, 黃雲百穀野人娛.古琴聊可聽流水, 暗室何曾怒擲珠.眞率一遊還脫俗, 不尋仙侶費相呼. 청포(靑蒲) 푸른 부들로 만든 시원한 자리를 말한다. 유수곡을 들을만하니 서로의 뜻을 잘 안다는 뜻이다. 원문의 '유수(流水)'는 흔히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이다.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가 "태산처럼 높고 높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강하처럼 양양하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湯問》 암실에……노여워하리 서로 잘 알아서 오해하지 않는 사이라는 것이다. '명주암투(明珠暗投)'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漢)나라 때 추양(鄒陽)이 양왕(梁王)에게 올린 글에, "명월주나 야광벽 같은 보배라도 무작정 길 가는 사람에게 던져주면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보배가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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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백형을 방문하고 訪省菴白兄 멀리서 온 속인에게 맑은 빛을 접하게 해주시니 遠敎塵跡接淸輝단심이 있어 둘 다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네 爲有丹心兩不違유유한 세월에 귀밑머리 새로운데 歲月悠悠新鬢髮고달픈 풍상에 의관은 옛 것이네 風霜弊弊舊冠衣어느 곳 초당166)에서 봄 꿈을 깨었던고 草堂何處春醒夢당년에 율리167)에서 일찍 귀거래사 읊었지168) 栗里當年早賦歸대화를 하자 양격산169)을 기울인 듯하니 對話如傾涼膈散처마 너머 날리는 붉은 구름170) 걱정 않하네 未愁簷外火雲飛 遠敎塵跡接淸輝, 爲有丹心兩不違.歲月悠悠新鬢髮, 風霜弊弊舊冠衣.草堂何處春醒夢, 粟里當年早賦歸.對話如傾涼膈散, 未愁簷外火雲飛. 초당(草堂)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머물던 곳이다. 유비(劉備)가 남양(南陽)의 초당(草堂)으로 제갈량을 방문했을 때 "큰 꿈 누가 먼저 깨어났나, 평소에 나 스스로 아노라. 초당에 봄잠이 넉넉하고, 창밖의 해는 더디더디 기운다.[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라고 하였다. 율리(栗里)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은거한 곳이다. 그는 팽택 현령(彭澤縣令)이 된 지 겨우 80여 일만에 그만 두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율리(栗里)로 돌아갔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당년에……읋었지 성암이 벼슬하다가 그만 두고 귀향한 것을 비유한 듯하다. 양격산(凉膈散) 머리가 어둡고 어지러운 두혼(頭昏), 입술이 타서 까맣게 되는 순초(脣焦), 표리(表裏)에 모두 열이 있는 열번(熱煩), 속이 답답하면서 갈증이 많은 번조다갈(煩躁多渴)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붉은 구름[火雲] 더운 기운을 머금은 여름철 붉은 구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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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의 시우담을 지나며 過雲巖時雨潭 강의 흐름을 끊어 막고 큰 저수지 만드니 截防江流作巨浸창상161)의 천지의 변화 기다릴 것도 없네 滄桑不待天地變한 번 보라 동쪽 나루 드넓은 평야를 試看東津平野闊이렇게 관개하는데 얼마나 준비했는가 爲此灌漑幾磨鍊돌을 깨니 우레소리가 산악을 흔들고 伐石轟雷撼山岳철교가 허공에 솟아 귀신을 놀래키네 橋鐵跨空驚鬼神큰일을 별안간 마친 건 우연이 아닌데 浩役倏竣非偶爾물결은 파랗고 맑디 맑아 보기 좋구나 好看波濤碧粼粼하백과 해약162)은 이사해 집을 정하고 河伯海若移奠宅독룡과 큰 악어도 달려 서로 모이리라 毒龍巨鼉奔相聚바람이 한발163)을 몰아 땅 밖에 빠뜨리니 風驅旱魃地外淪멋진 이름을 시우라고 지어줌이 합당하네 嘉號端合錫時雨산을 파고 구멍 뚫어 거꾸로 흐르게 하니 鑿山通竅逆流之크고 작은 도랑이 여섯 고을 고르게 하네 小溝大洫均六州공적이 우임금 못지않다164) 다투어 말하고 爭道功不在禹下해마다 내 밭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네 年年我田大有秋풍년 들면 또 이보다 큰 기쁨이 없는네 有秋且莫大歡喜근년에 농사 이익이 얼마나 많던가 比年農利問幾多이익 적고 식구 많아 수세를 못 내자 利少食衆沒水稅토지를 압수해가니 어찌 할 것인가 其如押收土地何먼저 살펴보라 저들이 내놓은 소견을 先觀彼人所起見진실로 백성 위한다며 되레 자기 위했네 亶在爲民還爲己칼을 거꾸로 쥐었으니165) 또 어찌 하리오 倒持太阿亦何爲그칠 때가 없이 상해를 당할 뿐이라네 只見傷害無時已어찌하여 종전부터 나라 경영하는 자들은 如何從前經國者애초에 백성의 생업 힘써 만들지 않았나 初不盡力制民生남겨진 부의 자원을 엉뚱한 사람이 취하니 留與富源別人取귀와 눈이 어찌 귀머거리 소경을 면하리오 耳目何曾免聾盲아마도 산하를 예전대로 회복하는 날에야 倘是山河復舊日이 물건은 도로 우리의 소유가 되리라 此物還爲吾家有둘러보고 서성대며 마음 가누기 어려운데 周覽徊徨難爲情다함 없는 물줄기는 수문 입구에 쏟아지네 不盡流水瀉閘口 截防江流作巨浸, 滄桑不待天地變.試看東津平野闊, 爲此灌漑幾磨鍊.伐石轟雷撼山岳, 橋鐵跨空驚鬼神.浩役倏竣非偶爾, 好看波濤碧粼粼.河伯海若移奠宅, 毒龍巨鼉奔相聚.風驅旱魃地外淪, 嘉號端合錫時雨.鑿山通竅逆流之, 小溝大洫均六州.爭道功不在禹下, 年年我田大有秋.有秋且莫大歡喜, 比年農利問幾多.利少食衆沒水稅, 其如押收土地何.先觀彼人所起見, 亶在爲民還爲己.倒持太阿亦何爲, 只見傷害無時已.如何從前經國者, 初不盡力制民生.留與富源別人取, 耳目何曾免聾盲.倘是山河復舊日, 此物還爲吾家有.周覽徊徨難爲情, 不盡流水瀉閘口. 창상 '창상(滄桑)'은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고 뽕밭이 큰 바다로 변한다는 뜻으로, 세상사의 변화가 매우 큰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하백과 해약 '하백(河伯)'은 전설 속의 황하(黃河)의 신이고, '해약(海若)'은 바다의 신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서, 평소에 자만에 차 있던 하수(河水)의 신 하백(河伯)이 북해(北海)를 바라본 뒤에 북해의 신 북해약(北海若)에게 "내가 당신이 사는 여기에 와보지 않았더라면 매우 잘못될 뻔하였습니다. 나는 분명 영원히 대방가의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발(旱魃) 가뭄의 신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한발이 사나워 속이 타는 듯하며 불을 놓은 듯하도다.[旱魃爲虐, 如惔如焚.]"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가뭄의 신이다." 하였다. 공적이 우임금 못지않다 치수의 공적이 크다는 말이다. 우임금은 "사는 궁실은 낮게 지으면서 백성을 위한 치수(治水) 사업에는 힘을 다하였다.[卑宮室而盡力乎溝洫.]"고 한다. 《論語 泰伯》 칼을 거꾸로 쥐었으니 원문의 '도지태아(倒持太阿)'로, 권한을 남에게 넘겨주고 도리어 그의 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권67 〈매복전(梅福傳)〉에, 진(秦)나라가 "태아를 거꾸로 잡고서, 초나라에게 칼자루를 넘겨주었다.[倒持太阿 授楚其柄]"라는 말이 나온다. 태아(太阿)는 고대 명검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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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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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사위가 장인인 가선가부동지중추부사 이 아무개의 영연에 고하는 제문 모년에 사위가 장인인 가선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부군(李府君)의 영연(靈筵, 혼백을 모신 자리)에 고하는 제문이다. 명문가의 훌륭한 자손으로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행실로 두루 그 덕을 믿어 아무도 흠잡는 사람이 없었다. 곧고 간략하여 향당(鄕黨)에서 잊을 수가 없고, 당실(堂室)은 질서정연하여 온화한 기운이 깊고 넓었다. 이제 누가 장혈(掌血, 손바닥으로 한 번 때려서 혈흔이 생기게 함, 곧 성인의 가르침)하듯 정침(頂針, 이마 위를 침으로 찌름, 곧 남의 잘못을 매섭게 질책함)하듯 따끔하게 가르쳐 주겠는가. 옛일을 생각하니 새로이 마음이 아파 눈물을 글썽이며 애통해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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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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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기복제(朞服弟)인 모(某)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朞服弟 朞服弟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기복제인 모가 중숙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종질의 혼인 여부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상의하고자 보낸 간찰 기복제(朞服弟) 아무개가 수신자에게 중숙모(仲叔母)의 상을 당하였는데 종질(從姪)의 혼인 여부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상의하고자 보낸 편지이다. 가문이 불운하여 중숙모의 상을 당했다. 종질이 천화(天禍)로 매우 심하게 슬퍼하나 부디 편안히 중숙부를 모시기를 바란다. 다만 혼인은 3년 후가 정례(正禮)이고 3년 내는 권도(權道)로 행례(行禮)할 수 있으나 사대부 집안에서 차마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정세가 이러한 때에 급하더라도 3년을 기다리는 것이 형편상 어찌할 수 없다. 지난번 만났을 때에 벌써 이면(裏面)을 염려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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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장 한두 군의 집에 이르러 지어 주다 到金君君章【漢斗】家 有贈 작은 마을 땅이 비옥하고 샘물도 달아 小洞土肥泉復甘이가의 반곡87)이 또 종남88)에 있네 李家盤谷又鍾南소산의 상쾌한 기는 물 같이 청량하고 蘇山爽氣涼如水정택의 명징한 빛은 쪽빛처럼 푸르구나 定澤澄光碧似藍장년 시절은 원래 다시 올 수 없으니 壯歲從來難得再큰 재주는 응당 함께 삼재89)가 되어야지 大才端合共爲三그대에게 기대하니 사람과 땅이 서로 걸맞는 곳에서 期君人地相稱處위로 수사90)로 오르고 아래로 석담91)에 이르게 上溯洙源下石潭 小洞土肥泉復甘, 李家盤谷又鍾南.蘇山爽氣涼如水, 定澤澄光碧似藍.壯歲從來難得再, 大才端合共爲三.期君人地相稱處, 上溯洙源下石潭. 이가의 반곡 은자가 살기 좋은 곳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이가(李家)'는 당나라 때 이원(李愿)을 말하고, '반곡(盤谷)'은 지명으로 이원이 은거한 곳이다. 이원이 벼슬을 사직하고 물러나 이곳에 은거할 때 한유(韓愈)가 그를 송별하는 뜻으로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지어 그곳의 경관과 부귀 공명의 무상함 등을 자세히 설파하여 그를 극구 칭찬했는데, 그 글 가운데 "태항산 남쪽에 반곡이 있으니, 반곡 안에는 샘물이 맛 좋고 땅이 비옥하여, 초목이 무성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太行之陽, 有盤谷, 盤谷之間, 泉甘而土肥, 草木叢茂, 居民鮮少.]"라고 하였다. 종남(鐘南) '종(鐘)'자가 들어가는 곳의 남쪽으로 김군이 사는 곳을 말한다.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의 도(道)를 세움은 음(陰)과 양(陽)이요, 땅의 도를 세움은 유(柔)와 강(剛)이요, 사람의 도를 세움은 인(仁)과 의(義)이니, 삼재를 겸하여 두 번 하였기 때문에 역(易)이 여섯 번 그어서 괘(卦)가 이루어진다.[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畫而成卦.]"라고 보인다. 수사 원문의 '수(洙)'는 흔히 '수사(洙泗)'로 쓰인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수도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과 가깝고 또 그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자(孔子)나 유학을 가리킨다. 석담(石潭)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지명이다. 이이(李珥)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기에 이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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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일28)에 삼가 선군의 시에 차운하다 南至日 謹次先君詩 맑은 밤 우레소리 한 번 울리니29) 雷動一聲夜氣淸벽봉노자30) 가정 먼저 놀라노라 碧峯老子最先驚천 가닥 백발은 가는 세월 재촉하고 千莖白髮流年促아홉 마디 황종은 난율을 울리네31) 九寸黃鍾暖律鳴문득 뭇 음을 깎아내니32) 진정 뜻이 있어 忽剝羣陰眞有意고요히 만물을 관찰하니 더욱 감회가 많네 靜觀萬物更多情이제부터 좋은 절기가 백오일33) 남짓이니 此去良辰餘百五지팡이 짚고 나가서 춘성34)을 밟으리라 鞋筇稍可踏春城위는 선군인 벽봉(碧峯)옹께서 49세 때 지으신 〈동지(冬至)〉 시이다. 이제 23년이 되었으니 내 나이가 이 시를 지으셨던 선군의 나이에 비해 단지 3살이 적다. 옛날을 생각하고 지금을 슬퍼하니 서글픈 감회를 이길 수 없어서 삼가 차운하여 짓는다.분주한 해와 달이 하늘을 돌고 돌아 奔走雙丸轉太淸또 동지를 만나니 꿈에 먼저 놀라네 又逢南至夢先驚콩 흉년에 여러 집이 보내준 죽도 끊겼는데 豆荒粥斷千家送눈 쌓여도 우레는 미약하게 밤중에 울리네35) 雪積雷微半夜鳴훌쩍 세월 흘러 오십까지 며칠이나 남았나 忽忽五旬餘幾日유유한 온갖 감회에 마음 가누기 어렵구나 悠悠百感若爲情모친36) 모시고 시 읊던 일이 어제 같은데 北堂陪賦依如昨중간에 비바람 불더니 성시도 바뀌었구나 風雨中間易市城 雷動一聲夜氣淸, 碧峯老子最先驚.千莖白髮流年促, 九寸黃鍾暖律鳴.忽剝羣陰眞有意, 靜觀萬物更多情.此去良辰餘百五, 鞋筇稍可踏春城.右先君碧峯翁, 四十九歲冬至詩也.今爲二十有三年, 而不肖之齒, 視先君賦詩之年, 只少三歲矣.念昔愴今, 不勝悲感, 謹次韻而題.奔走雙凡轉太淸, 又逢南至夢先驚.豆荒粥斷千家送, 雪積雷微半夜鳴.忽忽五旬餘幾日, 悠悠百感若爲情.北堂陪賦依如昨, 風雨中間易市城. 동지일 원문의 '남지(南至)'는 동지(冬至)의 별칭이다. 우레소리……울리니 순음(純陰)의 달인 10월을 지나 동지(冬至)가 되면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지뢰복괘(地雷復卦)를 이루게 되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벽봉노자(碧峯老子) '벽봉(碧峯)'은 김택술의 선친 김락진(金洛進, 1859~1909)의 호이다. 벽봉노자는 김락진이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아홉……울리네 동지가 지나 따뜻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황종(黃鍾)'은 길이가 9촌이다. 옛날에 갈대 줄기의 얇은 막을 태워 그 재를 율관 속에 넣은 다음에 밀실(密室)에 놔두고 기후를 점쳤는데, 하나의 시절이 도래하면 그 시절에 해당하는 율관 속의 재가 들썩거리며 날려 그 계절이 돌아온 것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1년 12개월을 십이율려(十二律呂)에 배합하면 동짓달인 11월은 황종(黃鍾)에 해당되어, 11월의 동지에는 황종 율관의 재가 날아 움직인다. 《漢書 卷21上 律曆志上》 '난율(暖律)'은 따뜻한 절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중국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음률에 정통하여 피리를 부니 추운 북쪽 지방의 벼와 기장이 자라났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湯問》 뭇 음을 깎아내니 양이 자라서 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동지를 비유한 것이다. 9월에는 오음(五陰)의 박괘(剝卦), 10월에는 순음(純陰)의 곤괘(坤卦)가 되었다가 11월 동지(冬至)가 되면 다시 양 하나가 처음 생겨 복괘(復卦)로 순환된다. 복(復)은 음(陰)이 극성한 중에 다시 밑에서 일양(一陽)이 나오는 괘인데, 이것이 동지(冬至)에 해당되는 것이다. 좋은 절기가 백오일 원문의 '백오(百五)'는 한식(寒食)을 가리킨다. 동지(冬至)에서 한식날까지가 105일이 되므로 이렇게 칭한다. 춘성 봄날의 성인데, 봄이 무르익은 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우레는……울리네 동지일에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지뢰복괘(地雷復卦)를 이루게 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친 원문의 '북당(北堂)'은 어머니를 비유한다. 《시경》 〈백혜(伯兮)〉에 "어이하면 훤초를 얻어, 집 뒤에 심을꼬.[焉得諼草, 言樹之背.]" 하였는데, 모전(毛傳)에 "배(背)는 북당(北堂)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북당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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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86년 유인 정씨(孺人鄭氏) 숙부인(淑夫人)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孺人 鄭氏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孺人 鄭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유인 정씨를 숙부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유인 정씨를 숙부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정씨는 이기두의 조비(祖妣)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손자가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조부모는 추증의 대상이 된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 추봉된 작위가 숙부인이다. 숙부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3품 당상의 위호이다. 숙부인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추봉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손자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조비(祖妣)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의 세주에서 '부모는 자기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기 1등씩 낮추어서 준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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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1927년 문덕면 운곡리 소재 임야의 분할신고서(分割申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신고서 昭和貳年參月日 군수 昭和貳年參月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7년 3월 보성군수에게 제출하는 문덕면 운곡리 소재 임야의 분할신고서(分割申告書) 1927년 3월 보성군수에게 제출하는 문덕면 운곡리 소재 임야의 분할신고서(分割申告書)이다. 토지소재지와 지번, 지목, 지적(地積), 분할, 적요 등의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토지소재지는 문덕면 운곡리이며, 지목은 임야이다. 분할은 지번에 따라 면적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두 11곳의 지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적요에는 일부 소유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제출처는 보성군수이다. 지적도의 일부로 보이는 문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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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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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27년 이면용(李冕容) 등의 부동산등기 신청 위임장(委任狀) 고문서-명문문기류-위임장 昭和貳年貳月貳十六日 李冕容 昭和貳年貳月貳十六日 李冕容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7년 2월 26일에 이면용(李冕容) 등이 부동산등기 신청을 위임하는 위임장(委任狀) 1927년 2월 26일에 이면용(李冕容) 등이 부동산등기 신청을 위임하는 위임장(委任狀)이다. 부동산등기 신청에 관해 일체의 행위를 위임하는데 대리인의 선임을 허락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문과 일본어 혼용체이다. 토지의 매주(買主)는 이면용이며, 이름 아래에 날인이 되었다. 토지는 문덕면 운곡리 소재의 임야이다. 매주의 연명서(連名書)가 있는데, 매주 26명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있고 날인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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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계제 여안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季弟汝安 丙寅 우편이 와서 편지를 보니 무릇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네가 다 먼저 하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다만 명치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풀이 죽고 기운이 다 빠져 움츠려들어 머뭇거린다면 선친의 영령이 몹시 걱정할 테고, 또한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무릇 부모의 장례 전에는 성인도 오히려 몸을 훼손하여 병이 생길까 경계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 어버이가 돌아가신 걸로 인해 어버이가 남긴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불효가 된다.오늘 일은 비록 "애타고 절박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심한 데까지 이르느냐. 주자가 이른 "사단(四端)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 이런 게지. 하자평(何子平)이 장사(葬事)를 치르지 못하여 8년 동안 호곡(號哭)한 경우67)가 있었다. 만약 지금처럼 거의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8년이란 오랜 시간을 버티어 끝내 그 뜻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너는 성질이 너무 급해 내가 늘 걱정이다.지금 비록 어버이를 그리는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에서 나왔더라도 이런 성질을 너무 숭상하는 거 아니냐? 만약 누그러뜨리지 못하면 고치기 어려운 증상이 될까 싶으니 모름지기 속히 경계하도록 하여라. 그 간에 잠시라도 우리가 불효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의 덕에 누를 끼칠까 편치 않구나. 어찌 끝내 길택(吉宅)이 없겠느냐. 이는 족히 알 수 있으니 다만 나에게 달린 도를 다해야 할 뿐이다."규범을 지키고 보전하기 어려운 게 하나의 커다란 연구과제입니다."라고 한 말은 "지사(志士)는 구덩이 속에 시신(屍身)이 뒹굴게 될 것을 항상 잊지 않는다."68)는 말을 살피지 않은 것이다. 이제 평상시에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느냐. 다만 한계를 넘지 않는69) 가운데 가난을 구제할 계책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근래 네가 적은 글 중 볼만 한 것은 일일이 수록하여 나에게 보이도록 하여라. 이것은 예전에 선친께서 나에게 명한 것이니, 부디 어기지 말거라. 郵來見書, 凡吾所欲言者, 汝皆先獲, 復何言哉! 只覺中焦之塞而已.然因此而致心死氣竭, 蹙蹙靡靡, 則爲先親尊靈所深憂, 亦非吾之所願聞也.夫在父母葬, 前聖人猶以毁瘠生病爲戒者, 何也? 爲其因親亡而傷親遺者, 反爲不孝也.今日事, 雖云 "憫迫", 胡至於此甚.朱子所謂 "四端而有不中理"者, 此歟! 何子平情事未伸, 八年號哭則有之矣.若如今之幾不自保, 則何以支八年之久, 而終遂其志乎? 汝性頗急, 吾常慮之矣.今雖出於孝思痛切, 無乃夾些性氣所崇歟? 若不寬抑, 恐成難治之證, 須亟戒之也.其間不安暫爲吾不孝所累先妣之賢.豈終無吉宅? 是足以諶之, 而只可盡在我之道耳."守規難保, 一大硏窮"之云, 不省所謂 "志士不忘在溝壑." 不於今日用, 而更俟何時? 但思救窮之策於不踰閑之中, 則可爲耳.近來汝所記文字可觀者, 一一收錄以示我也.此是昔年先考所命於不肖者, 勿泛勿泛. 하자평(何子平)이……경우 하자평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60이 다 된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기근과 전란으로 8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 마치 어린애처럼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더울 때는 시원한 곳을 피하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南史 卷73 孝義傳上 何子平》 지사(志士)는……않는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온다. 한계를……않는 《논어》 〈자장(子張)〉에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드나듦이 있더라도 괜찮다.[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라는 자하(子夏)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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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季弟汝安 乙丑 몇 해 전, 청도(淸道)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왔는데 성순재(成舜在)64)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 나에게 말하기를 "임자년(1912) 간에 화도(華島 계화도)로 들어가 선사(先師)의 유고를 선사(繕寫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베껴 쓰는 것)할 때 노형께서 상중에 행상(行商)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사께서 선존장(先尊丈 돌아가신 남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속에 '아드님은 성인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합니다.[聖人自期]'라는 한 구절이 너무 지나치므로 선사께 말씀드려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 편치 않습니다."라고 하더구나.내가 말하길 "유고 작업을 할 때 단지 노형이 내가 장사를 했다고 여겨 그 글을 삭제했다고 들었는데, 저는 속으로 '공상(工商)은 사민(四民)의 직분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그 집이 가난하면 장사를 한들 학문에 무슨 문제가 될까.'싶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런대로 살 만하여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근년 이래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일이 번다하고, 집안일에 몰두하느라 규범을 지키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여, 이 구절이 참으로 과당(過當)하였으므로 노형과 이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들어보니 또한 한층 더하여 지목한 것은 노형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상중에 행상이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서 입니다."라고 하였다.성순재가 말하길 "그 당시 노형의 종족들께 들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보니 천하의 말이란 믿을 만한 데에서 들어도 온통 다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흠재(欽齋)65)가 이 면의 면장 말을 들어보니, '성기운(成璣運)이 관아의 형벌을 받고나서 분명히 민적(民籍)에 가입했다.'고 하였답니다. 면장의 말을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나는 참으로 입적(入籍)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저들이 사사로이 이름을 넣은 것은 내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더구나.대개 성순재의 이 말은 의도가 나의 일로 인해 자기 일을 해명하는 데 있다. 그가 "상중의 장사" 얘기를 운운한 것은 그 당시 실지로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갑자기 이를 들추어내어 입적(入籍)의 변명거리로 들이댄 까닭은 다 알 수 없지만 "그 소문을 믿지 못하겠다."고 운운한 얘기는 분명하다.내가 그러므로 다만 권순명(權純名)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나와 가까이 살고 있으니 내가 상중에 행상을 한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라고 하니, 권순명이 말하길 "나는 모릅니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행상은 자기 집안 일이 아닌데, 천하에 어찌 이웃 마을에서 모르는 행상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더 이상 소문의 출처를 캐묻지 않고 돌아왔다.돌아오는 길에 남진영(南軫永), 유영선(柳永善)과 동행하면서 내친김에 일러 말하기를 "내가 신해년(1911) 봄 상(喪)을 마치고, 그해 겨울 어떤 사람에게 빌려간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돈이 순창(淳昌)에 있다.'고 하여, 마침내 가서 받아내고 도중에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여 베로 바꾸어 돌아와 돈을 만들어 썼습니다. 단지 이 한 가지 일이 매매에 관계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장사'라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를 상중에 전가시키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하고는 한 번 웃고 말았다.저 운한(雲翰)과 제철(濟喆) 무리는 불고 씻는 데66) 열을 올리다가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에 성순재가 남을 끌어들여 자기를 변명한 얘기로써 뒤집어 면박하니 거상(居喪)이 무례하다는 사안이 갈수록 더욱 험해졌다. 성순재는 내가 임시로 재물을 맡은 것에 화가 났으나, 경묵(京默)에게 깨져 필시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쓸데없이 지필(紙筆)을 허비하여 성순재를 힐난하지 말거라. 아, 스승에 대한 모함도 아직 변론하여 밝히지 못하였거늘 자신과 관계된 일을 어찌 족히 변명을 하겠느냐. 다만 네가 꼭 알아야둬야 할 것이 있어 한 마디 하였다. 年前往淸道旋歸, 成舜在於衆中謂余曰:"壬子年間, 入華島, 繕寫師稿時, 聞'老兄喪中行商'之說.而先師與先尊丈書中, '令胤以聖人自期'一句, 語太過.故告先師而刪之, 至今未安."余曰:"稿役時, 但聞'老兄以吾爲商業 故刪其書', 而吾心以爲'工商參爲四民之職, 苟其家貧商業, 何害學問.' 但吾則且得捱過, 不至此境, 而因年來事育務煩, 埋頭幹蠱, 守規未篤, 此句實爲過當.故不與老兄辨理.今始聞之, 則又加一層指目, 是老兄自那時至于今, 認我爲喪中行商者也."成曰:"那時聞於老兄宗族間者, 如此矣.以今觀之, 天下之言, 不可以其聞於可信處, 而一切信之也." 因言 "欽齋聞此面面長之言, 則以爲成璣運當官刑後, 分明入民籍云.面長言孰不信之.但我實不許入籍, 則彼輩私自入名, 吾不可得以知之矣."蓋成之此言, 意在於因我之事以發明己事也.其云"喪商"之說, 那時實有所聞.抑臨時撰出, 對擧入籍之資, 皆未可知, "其不信所聞"云云之說.則昭然矣.余故但顧謂權純名曰:"君居我近, 吾之喪中行商, 君其知乎?" 權曰:"吾不知也." 余曰:"行商非自家屋裏事, 而天下焉有隣村所不知之行商乎?", 不復盤問言根而歸.歸路與南軫永、柳永善同行, 語次謂之曰:"吾以辛亥春解喪, 是年冬, 請人借金.其人以謂'金在淳昌,' 遂往推尋.而備路中不虞, 貿布而歸, 作錢用之.只此一事, 亦涉買賣.然謂之爲商則非實矣.轉而移之喪中, 則又誤矣." 一笑而罷.彼雲翰、濟喆輩, 疲於吹洗, 而不得疵瘢, 則乃以成之因人明己之說, 飜作面駁, 居喪無禮之案, 可謂愈出愈險也.成則怒我假掌財僞京黙之撲破, 必不爲之一言也.汝毋庸徒費楮筆而詰於成也.噫, 師誣尙未辨白, 事關自身者, 何足置辨.但在汝有不可不知者, 爲一言之. 성순재(成舜在) 성기운(成璣運, 1876~1956)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순재(舜在), 호가 덕천(悳泉)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문인으로 1917년 5월 24일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이다.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존(敬存), 호는 흠재(欽齋)이다. 이병우(李炳宇)·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불고 씻는 데 원문의 '취세(吹洗)'는 털을 불어 흠을 찾고 때를 씻어 흉터를 잡아내는 것으로, 숨겨진 남의 잘못을 상세히 들추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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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답함 기미년(1919) 答季弟汝安 己未 요즘 학문 연구에 매진하고 문장 실력이 향상됨은 〈중용의난(中庸疑難)〉과 〈이아서(李雅書)〉에서 알 수 있었다. 비록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겠지만 이를 확충해서 구하면 어찌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겠느냐.옛날 사람이 이르기를 "중용은 마치 살아있는 용이나 호랑이 같아 용을 무찌르고 호랑이를 때려잡는 수단이 있어야만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 두루 망라할 수 없음을 심하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큰 수단을 기다린 다음에 읽으려 한다면 큰 수단은 흔히 얻기가 쉽지 않으니 이 책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내 생각엔 일단 용을 물리치고 호랑이를 잡는 것을 바라지 말고 우선 누에를 제거하고 이[蝨]를 잡는 작은 수단을 써서 공부를 하면, 조리와 맥락이 눈앞에 확연하게 보여 실책을 하지 않을 게다. 모름지기 '중용' 두 글자를 간파하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니, 책 속의 수많은 항목과 개개의 정신이 두 글자에 담겨있다. 성(性)ㆍ중(中)ㆍ은(隱)은 중용의 본원(本原)이다. 도(道)ㆍ화(和)ㆍ비(費)는 중용의 조리(條理)이다. 삼덕(三德)59)은 중용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구경(九經)60)은 중용을 베푸는 바이다. 계구신독(戒懼愼獨)61)은 중용의 공부이다. 참찬화육(參贊化育)62)은 중용의 공효(功效)이다. 이를 총괄하여 하나의 '성(誠)'자를 중용의 핵심으로 삼았다. 참으로 이에 능통하여 하나하나 체인(體認)한다면 이 책을 읽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하늘이 인(人)과 물(物)에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 인과 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도(道)'라고 한다. 도가 품절(品節)을 얻은 것을 '교(敎)'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과 물에 나아가 자연의 도리를 설명한 것이다. 비록 "인과 물을 겸한 설"이라고 할지라도 그 실지는 사람을 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말하길 "사람이 자기의 성품을 안다."63)고 운운하였다. 대개 이 세 글자를 첫머리에 배열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른바 성(性)ㆍ도(道)ㆍ교(敎)가 모두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에 달려있고, 그 아래 문장의 계구신독(戒懼愼獨) 등 허다한 공부가 모두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이를 구하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도는 떨어질 수 없다."는 이 말은 도가 사람에게서 떨어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님을 밝힌 것이지 사람을 면려시켜 도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近日硏索之勤, 措辭之進, 《中庸疑難》及《李雅書》可見.雖不能一飯告飽, 充此以求, 何患無成.古人云:"中庸如生龍活虎 有屠龍搏虎手段 乃可讀." 此甚言其包羅不周也. 然必待大手段而後讀之, 則大手段未易多得, 而此書不幾於虛器乎! 吾意且莫要屠龍搏虎, 且下掃蠶捉蝨底細手段工夫, 要見條理脈絡, 躍如於前, 未爲失算也.須看中庸二字, 爲此篇骨子, 篇中許多頭項箇箇精神, 注在二字上.曰性、曰中、曰隱, 中庸之本原也.曰道、曰和、曰費, 中庸之條理也.三德者, 中庸之所入也.九經者, 中庸之所施也.戒懼愼獨, 中庸之工夫也.參贊化育, 中庸之功效也.總之以一誠字爲中庸之樞紐也.果能於此, 一一體會, 則其於讀是書也, 亦何難之有?自天之命於人物而謂之性, 自人物之所當行者而謂之道, 自道之得品節者而謂之敎.此三者, 統就人物上, 說自然底道理.雖曰 "兼人物說", 其實則以人爲主.故《章句》曰:"蓋人知己性"云云.蓋以此三字, 排列於劈頭者, 使人知曰性、曰道、曰敎, 皆在我所固有者, 而下文戒懼愼獨許多工夫, 皆求所以不違乎此三者也.道不可離, 是明道之於人, 非可離之物, 非勉人以不離於道也. 삼덕(三德) 삼덕(三德)은 지(智), 인(仁), 용(勇)을 가리킨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붕우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曰 : "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敎也"五者, 天下之達道也, 智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라고 하였다. 구경(九經)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도리. 《중용(中庸)》에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들을 알아주는 것[體群臣], 백성을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이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지방의 미개인을 어루만지는 것[柔遠人], 제후를 회유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다. 계구신독(戒懼愼獨) 사려(思慮)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물이 없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도 항상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에 마음을 두어,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남이 모르고 나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생각까지 삼가는 것을 말한다. 《中庸章句 首章》 참찬화육(參贊化育) 《중용장구》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으며, 또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어야 본성을 다할 수 있으니, 본성을 다하면 사람의 본성을 다하게 할 수 있고 사람의 본성을 다하면 물건의 본성을 다하게 할 수 있고 물건의 본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하였다. 사람이……안다 《중용》 수장(首章)에 대한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대개 사람들이 자기 몸에 성이 있음은 알면서 그것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일에 도가 있음은 알면서 성에서 말미암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있음은 알면서 나에게 본래부터 소유되어 있는 것을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사께서 여기에서 첫 번째로 이 점을 드러내 밝히셨으니, 동중서(董仲舒)의 이른바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 또한 이러한 뜻이다.[蓋人知己之有性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故子思於此, 首發明之, 而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亦此意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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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季弟汝安 丁巳 형복(炯復)이가 돌아와 근래 네가 아주 부지런히 글을 읽다 문득 한밤중이 되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내 마음이 크게 위로 되는구나. 우리 집안이 이 지역에 살아온 지 또한 8대가 되었는데 가문이 한미하고 가난하여 남에게 드러낼 게 없었다. 다만 대대로 문행(文行)이 이어졌고, 돌아가신 부친 또한 효와 공경, 절제된 행실, 시와 예로 집안을 부지하여 당세의 대군자(大君子)에게 중망을 받았다. 이는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내가 그것을 이어서 열심히 공부하여 몸을 이루어 위로 선친의 뜻을 천명하고 아래로 후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기질이 이미 순수하지 못하고 행실에도 힘을 쏟지 않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탓하며 슬픔에 잠겨 즐겁지 않구나. 우리 여안이가 독려하지 않아도 이 일에 뜻을 두고서 의리에 잠심하고 법도에 몸을 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아마 선친(先親)의 영령이 지하에서 인도하여 입신(立身)하고 덕을 이루게 하여 가문의 명성을 빛나게 하려는가보다. 나 역시 깨우치고 분발한 것이 깊고 도움을 얻은 것이 크구나. 그러나 사람의 정력은 한계가 있어 계속하기가 어렵고 기운에는 성쇠가 있어, 뜻이 따라서 견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만약 그 마음을 과하게 써서 효과를 얻지 못하면 정력이 이미 소진되어서 의지는 해이해진다. 이것이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나아감이 예리하면 물러남이 빠른 근심'이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입지(立志)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겠느냐.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죽은 후에야 그치는 것이 이것이다. 용공(用功)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겠느냐.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잊지 말고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復兒回, 知近頗劇讀, 輒到夜分, 大慰我懷.吾家居玆土, 且八世, 族寒而貧, 無以炫耀於人者.但世以文行相承, 先君又以孝敬制行詩禮持家, 見重於幷世大君子.此可以有辭矣.不肖繼之, 宜其奮學成身, 上以闡先志, 下以範後昆, 質旣未純, 行又不力, 兀兀無成.遽近不惑之年, 撫躬自咎, 愀然不樂.何幸吾汝安, 不待督勸, 而有志斯事, 潛心於義理, 置身於繩墨.意者, 先人之靈, 有以冥誘, 使之立身成德, 用光家聲也.吾亦警發深, 而得助大矣.然人之精力, 有限而難繼, 氣之盛衰, 志隨而堅脆.若過用其心, 而求效不獲, 則精力旣竭, 而志意瓓珊.此所以有"有始鮮終、進銳退速"之患也.然則, 立志也, 當如何? 仁以爲己任, 死而後已, 是也.用功也, 當如何? 必有事焉, 勿忘勿助, 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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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 억술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季弟汝安 億述 丙辰 비가 계속 내리는 좁은 여막에서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으니 부모님을 잃은 아픔45)과 형제를 그리는 마음46)으로 정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는데 이러한 때에 네 편지를 받으니 비할 데 없이 위로가 되는구나. 같은 가족끼리 잘못을 뉘우친다하니 내 마음이 슬픔에 복받치는구나. 무릇 이렇게 서로 질책하는 것은 모두 곤궁한 처지를 구제하는 계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내가 어리석고 못나 사업을 그르쳐서 너에게 걱정을 안겨주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대저 집안의 흥망은 비록 말하기를 "인사(人事)의 선악에 달려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을 궁구하면 운기(運氣)의 통색(通塞)에 관계되어 있으니 더 이상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느냐. 비록 그렇지만 또 삼가 부지런히 하여 후일의 만전을 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기를 바란다. 고인이 이르기를 "곤궁해도 의를 잃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곤궁해도 또 더욱 굳건히 하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가난 때문에 뜻을 버리지 말고 늘 스스로 격려하여 기량(器量)과 덕업(德業)을 이루고 가문의 명성을 잇기를 바란다.아, 옛날의 선비 된 자는 영화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선비 된 자는 치욕을 부른다. 옛날의 독서한 이는 천 종(鍾)의 녹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독서한 이는 종신토록 굶주린다. 우선 농사일에 부지런히 힘써서 선조를 받들고 아래로 자식을 기르는 것이 낫다. 부디 피차(彼此)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성내지 말고 고생을 참아내며 한결같이 실천해나가, 내가 철수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길 바란다.나 또한 장차 쟁기를 잡고 호미를 메고, 몸을 땀으로 적시고 발에 흙을 묻히면서 옛사람이 자신의 힘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의리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단지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만 힘쓰고 의로써 몸을 바르게 하고 예로써 집안일을 처리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 사람과 짐승이 구분되는 것이다. 짐승을 면하고 사람이 되길 구하고자 하면 또한 독서가 아니면 이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서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느냐! 농사에 밝은 것은 시급한 것을 구하는 것이고, 독서에 힘쓰는 것은 평생의 대사임을 알겠다.친지들이 이곳을 들러 두 분의 묘소를 보고 모두 재해가 있을까를 우려하니, 안타깝고 근심스런 마음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구나. 저들이 묘금(墓禁)47)을 내리기 전에 이장하여 오늘날 합장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그러나 거센 바람과 폭우도 아침나절 내내 지속되는 경우는 없으니 저들의 금령이 비록 엄혹할지라도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느냐. 다만 한스러운 것은 맨손이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한 가지 일에 있어 계속 생각을 여기에 두어야 한다.너는 스무 살이 안 되어, 비록 장대하다고는 해도 기혈의 충만함이나 근골의 견고함은 여전히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상(喪)을 이기지 못한 것은 불효를 면치 못하는 것48)이다. 그러니 먹고 마실 적에 역량에 맞춰 행하도록 하여라. 積雨隘廬, 累然塊坐, 蓼莪之痛, 鶺鴒之懷, 定無淚乾之時, 際得手滋, 慰沃可敵.同堂悔過之云, 吾心惻惻有動.凡此相責, 皆爲救窮失策.而總由吾迂拙敗業, 以致汝憂, 是可愧也.大抵家之興敗, 雖曰:"在於人事臧否.", 究其本, 則實係運氣通塞, 復何怨尤.雖然, 又不容不謹勤善後, 以冀上天之悔禍也.古人云:"窮不失義.", 又曰:"窮且益堅.", 願勿因貧窮而墮志, 常自激昻, 成器業而繼家聲也.噫, 古之爲士者, 致榮;今之爲士者, 招辱.古之讀書也, 有千鍾祿;今之讀書也, 有終身飢.不若且就畎畝中勤力, 奉先俯育之爲愈也.幸勿以彼此勞逸之不均爲慍, 忍辛耐苦, 一意做去, 待吾之撤歸也.吾亦將操耒荷鋤, 沾體塗足, 追古人非力不食之義也.然徒務口腹之充, 而不知以義飭躬以禮處家, 則是人獸之所分.欲求獸之免而人之爲, 又非讀書, 無以致之也.然則讀書豈可以已乎! 是知明農者, 救時之急務;讀書者, 終身之大事也.親知過此, 見兩位墓所, 皆慮有災害, 憫憂之心, 如坐針氈.恨未及彼人墓禁前移窆, 而得今日合祔也.然疾風暴雨, 無崇朝之遲, 彼禁雖嚴, 豈能久乎! 但所恨者手赤耳.須於此一著, 念念在玆也.汝是弱冠前, 雖曰"壯大", 氣血之充, 筋骨之固, 尙不及我.不勝喪, 不免爲不孝.此則飮食之時, 量力而行之也. 부모님을 잃은 아픔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슬프고 슬프도다 부모님 생각, 낳고 길러 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던가.[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형제를 그리는 마음 원문 영원(鴒原)은 《시경》〈소아(小雅)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묘금(墓禁)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강제로 개인묘지를 일절 금지시키고 공동묘지만을 허용하며 화장을 적극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다. 상(喪)을……것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이 났는데도 음식이나 약물로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은 나를 낳아 주신 부모에 대해서는 불효이고 자손에 대해서는 자애롭지 못함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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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八月初旬日 李鐺 伊彦宅 乙丑八月初旬日 李鐺 伊彦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18_001 1925년 8월 10일에 재종질 이당이 일미(一米)를 자금 100원으로 이익을 붙여 빚을 탈출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언에게 보낸 간찰 1925년 8월 10일에 재종질 이당(李鐺)이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언(伊彦)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번 초순에 답장한 한 통의 서찰은 받아 보았을 것이라고 하고 재종조부(再從祖父)의 기체와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상대방의 체후와 자제들도 잘 성장하고 집안도 편안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재종질 자신은 집안 형편을 전에 보낸 서찰에서 자세히 말하였다고 하고, 오는 9월 사이에 일미(一米)를 집안의 자금 100원으로 이익을 붙여서 빚을 탈출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이번 그믐 안에 광주로 표행(漂行)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며 멀리서 정성스럽게 인사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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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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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나수열(羅壽烈) 간찰(簡札)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十月二十四日 羅壽烈 李敎成 乙亥十月二十四日 羅壽烈 李敎成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84_001 1935년 10월 24일에 외종질 나수열이 종증손(從曾孫)이 요절하는 일을 겪고, 김길중의 집 방문에 부재중이라는 내용 등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10월 24일에 전남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수각리(水閣里)에 사는 외종질 나수열(羅壽烈)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보내주신 서찰을 받으니 뵙고 토론한 것 같다고 하고 근래 부모님을 모시는 체후와 집안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집안이 불운하여 종증손(從曾孫)이 요절하는 슬픈 일이 생겼으니 진실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고 하였다. 일전에 김길중(金吉中)의 집을 가는 길에 고창읍에 들어갔는데 진사(進士)인 사촌 동생을 만나 김길중이 있는지 물으니 김길중이 군산(群山) 사위집에 가서 10일 뒤에 돌아온다고 하였다고 하고, 순화(順化)의 집에 들어가서 서로 의논하는데 숙부의 서신이 어제 왔다고 하였다. 더욱 통탄스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이번 달 안에 다시 김길중의 집으로 가서 여러 가지로 권유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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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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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箕斗 年六十九戊辰 本星州 父 學生 有源 祖 學生 國鎭 曾祖 學生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李氏 齡六十五壬申 籍全義 父 學生 承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圭容 年二十八己酉 婦 趙氏 齡三十三甲辰 籍漢陽賤口秩 婢 㪲德 年二十九丙子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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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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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13대조 매죽당 부군192)의 묘갈을 다시 세운 데 대해 고하는 글【임오년(1942)】 告十三世祖梅竹堂府君墓碣改竪文【壬午】 삼가 아룁니다 伏以비석에 새긴 글이 顯刻之文지난 숙묘조에 粤在肅廟외손193)인 撰自宅相이 충숙공194)에 의해 지어졌는데 李忠肅公세월이 멀어짐에 글자가 없어져서 歲遠字湮읽을 수가 없으므로 不可以讀오랫동안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였으나 久圖改竪힘이 모자라 이루지를 못하였습니다 力綿未成이제 여러 자손들이 今玆諸孫함께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協議同力좋은 돌을 새로 장만해 新具美石옛 묘갈문(墓碣文)을 새기니 用刻舊文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풍도가 懿行高風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永傳來許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서 謹以酒果정성을 펴 경건히 고합니다 用伸虔告삼가 고합니다 謹告 伏以顯刻之文, 粤在 肅廟, 撰自宅相李忠肅公.歲遠字湮, 不可以讀, 久圖改竪, 力綿未成.今玆諸孫, 協議同力, 新具美石, 用刻舊文, 懿行高風, 永傳來許.謹以酒果, 用伸虔告.謹告. 매죽당(梅竹堂) 부군(府君) 김종(金宗, 1471~1538)을 가리킨다. 자는 사앙(士仰)이다. 외손(外孫) 원문은 '택상(宅相)'이다. 진(晉)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외가(外家)인 영씨(甯氏)에게 양육되었는데, 집터의 풍수를 보는 이[相宅人]가 "장차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다.[當出貴甥.]"라고 예언하였다. 위서는 외조모를 위해 이 예언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후에 사도(司徒)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晉書 卷41 魏舒列傳》 '택상'은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나중에는 '외손'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 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를 가리킨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 또는 칠정(七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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