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師墓文 유세차 을축년 7월 을해가 초하루인 2월 병자일에 문인 김택술은 다가오는 두 번째 휘신(諱辰)246)에 감회가 이는데 끝이 없는 재앙의 변고를 당하여 삼가 글을 짓고 제수를 갖춰 간재 선생의 묘소에 고합니다."옛날 공자는 주나라가 쇠퇴함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고, 주자는 송나라 말기에 태어나 《강목(綱目)》을 지었으니, 모두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큰 경계를 엄격히 한 것입니다. 오호라! 우리 선생께서 도체의 근원에 통철하고 성(性)을 높이는 학문을 밝혀서 영원히 후대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은 천지의 대경(大經)과 사람의 대륜(大倫)이 아님이 없는데, 맞닥뜨린 때가 주나라나 송나라의 말세보다 심하니,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엄격한 경계는 선사(先師)의 거질의 원고 가운데 더욱 제일가는 의리입니다. 선사께서는 머나먼 바다 외로운 섬에서 서공(徐公)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247) 노중련(魯仲連)처럼 치욕을 품고 있었는데,248) 임금의 나라가 패망함에 이르자 피눈물을 흘리며 흰 상복을 입고서 생애를 마쳤으니, 또한 만년(晩年)에 대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선생의 도의와 행한 업적은 한말의 공자와 주자로, 백 대가 지나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249)어찌하여 천하는 오랫동안 사문(斯文)에 곤궁과 재액을 낳아서 불행하게도 패륜의 도적 오진영(吳震泳)250)이 문하에서 배출되어 선생의 의로운 경계를 파괴하여 무너뜨리고 선생의 뜻과 절개를 어둡게 덮어버립니까. 이윽고 또 다시 담장 안에서 창과 방패를 정비하고서 끝내는 오랑캐에서 손을 빌려 죽은 사람의 몸에 피를 흘리듯 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대개 그는 사려(邪戾)한 기를 모으고 교활한 본성을 품부 받은 자로 성질이 원래부터 스스로 일반적인 것에 어긋났었지만, 그러나 죄악이 커서 극에 달하기 전에는 누가 먼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약삭빠르고 방자하며 말을 잘하고 안색을 잘 꾸미며 온갖 양상으로 속여 제멋대로 술수를 부리고 사람을 현혹시키기 일을 즐겨하는 등의 폐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바로잡아주시고 채찍질 해주신 약석(藥石)을 또한 지극하게 베푸셨는데, 이른바 '이견(而見)251)은 사공(事功)을 중하게 여겨서 도의를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 선비 된 자가 아무개 궁과 통하여 아무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 '사공(事功)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식견이 저열한 어떤 사람이 나252)에게 다공(茶公)253)이 머리를 깎은 복철(覆轍)254)을 실천하라고 했다.'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앞서 엄한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고 할 밖에 무엇이겠습니까.그러나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고 문사와 변론이 능숙하니 명리(名理)255)를 밝히고 외부의 모욕을 막는 것에 도움을 준 자들이 또 때때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며, 식견이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권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리와 눈, 비와 이슬이 모두 가르침이 아님이 없다는 것에 해당합니다. 마땅히 그 배척함을 두려워하여 악을 제거하고 그 권장함을 기뻐하여 더욱 노력하여서 나 자신을 성취하고 사문의 후사(後事)에 힘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나쁜 습관은 제거하기 어려워서 본래 성질이 드러나 사공을 중시하고 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으니 원고를 간행하는 의논을 앞서서 외쳤습니다. 남을 이기기 좋아하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사사로움으로 호남 사림을 배체한 체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서울에서의 문집 인가를 도모하고 거질의 원고를 받들어 원수 놈의 관청에 바치며 책을 판매하는 도적놈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선사에게 대단히 누를 끼친 것입니다.게다가 자신의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는 사악한 생각으로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출판에 대해) 인가할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연이어 편지로 써서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업자가 스스로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일찍이 지시하셨다.'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상에 앉아 계시다가 진영에게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는 그대가 모름지기 잘 헤아려서 하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오호라! 사람을 속이는 죄도 나쁜데 더구나 스승을 속이는 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스승을 속이는 것은 큰 죄인데, 더구나 공자와 주자를 이어 《춘추》의 경계를 엄하게 지키는 큰 스승을, 대의를 파괴하는 일로서 속인다면 그 죄는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문하의 제자의 입장해서 해야 할 도리는 마땅히 매가 참새를 쫓듯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말고 담장에서 내쫓고 제자의 문적에서 삭제하여야 합니다.선사께서 평소에 동문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를256) 진심으로 바라며 선비들의 싸움을 마음 아파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니, 마땅히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수많은 편지에서 언급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믿게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위로 고하고 아래로 사죄하게끔 하는 것을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기하여 음험하다고 저를 지목하고 대중을 홀려서 미치게 만든다고 매도하면서, 오만하게도 자신은 옳다고 하여 일찍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놈에 청원하여 문집을 간행, 배포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니 삼가 절대로 따르지 말라.'257)고 한 편지가 나오자, 스승을 속인 죄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강경하게 서서 '죽음에 이르러도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니, 「헤아려서 하라」,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는 등의 말은 확실하다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에 오진영의 무리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아무개 공은 우리 선사께서 의발을 전하였으니,258) 어찌 속이는 말을 하겠는가. 「홀로 있을 때 명하신 것」은 증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해 알겠다고 답한 것259)에 해당하다.'라고 합니다. 이에 남기신 편지는 저 한 때의 일이고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은 이 한 때의 일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며, 남기신 편지와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이 나란히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도 있으며, 남기신 편지가 위조라고 여기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그 밖의 사람들은 이에 '오 아무개 옹은 고제(高祭)라. 스승의 마음을 깊이 아는 자인데 그 말이 어찌 속이는 데 이르겠는가. 아마도 아무개 옹260)께서 이런 의도를 지니고 이런 지시를 하셨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앉아서 비웃고 서서 팔뚝을 휘두르며 작게는 기롱하고 크게는 욕을 합니다. '이런 스승이 있으니 이런 제자가 있도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으니, 귀로 차마 듣지 못하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오진영이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이르는 자들은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편당을 지어 아부하며 나쁜 놈끼리 서로 도와 함께 나쁜 짓을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며, 선사께서 평소 오진영을 배척하는 엄한 가르침과 제자들이 편벽되고 잡박하여 의발을 전할 자를 고르지 못하겠다는 정론에 대단히 배치됩니다.그러나 선사께서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했던 뜻으로 헤아려보면 '오진영이 본래 고족(高足)의 반열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편벽된 주장입니다. 다만 그가 고족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의심을 불러들임이 더욱 심한데, 우암이 생각한 고제(高弟)로써 증명한다면,261) 끝내 그 일에 대해 분명할 수 없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까울 것입니다.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득 찰대로 찼는데,262) 또 다시 감히 거질의 원고에 나아가 자신이 직접 나눠서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정선(精選)한 한 부를 마침내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263)을 시켜 인허를 구걸하여 받고 인쇄하여 판매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말로 속이는 것이 지금 일로서 증명되었으며 앞에서 붓과 혀로 가르침을 깨뜨린 것을 지금 몸으로 직접 부숴버린 것이니, 이 얼마나 잔혹합니까.허가를 받아 인쇄한 견본에 보태고 빼는 것과 고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였습니다. 시의(時義)에 관련된 모든 것은 구절마다 삭제한 것은 오진영이며, 저작자라고 크게 쓰인 이름은 강태걸입니다. 이와 같으니 오진영의 문집, 강태걸의 문집이라고 해도 옳을 것인데 오히려 억지로 명명하여 《간옹고》라고 하였으니, 참람하게 분수와 의리를 범하며 이름과 실제가 서로 어긋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선생의 썩은 뼈는 아는 것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두려워할 줄 안다.'고 하겠습니까.대개 오진영이 건드린 선생의 순정한 도와 광명한 의리는 곳곳이 깨지고 어두워졌는데, 의리가 어두워지고 도가 깨졌으니 선생은 이제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공자와 주자 이후로 《춘추》의 의리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게 되어 천지는 온통 암흑이 되어 오랫동안 어둡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속인 것이 끝이 없어서 이미 너무나도 원통한데, 세상 재앙의 참혹함은 또한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윤리가 사라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변고를 보고도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문하에 사람이 없으며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 23년이 됩니다. 자질이 얄팍하고 재주가 적어서 비록 가르침의 만 분의 일도 받들어 새기지 못하지만 그러나 기대를 받은 것은 깊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두텁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性)을 스승으로 높여 도를 지키려는 뜻에 감히 붙따라 변석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뒤따랐기에 왜놈의 인허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매하여 읽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저 강하여 대적하기 어려운 기세를 헤아려보면 외로운 군인이 깨끗이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다행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떳떳한 본성이요 막을 수 없는 것은 공론이니, 남기신 편지가 널리 퍼져서 선생의 뜻을 해와 별처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성토하는 문장이 답지하여 오진영의 죄에 대해 도끼를 함께 휘두르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함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264)능히 말을 잘하는 무리들이 이런 지경이 되면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마땅히 스스로 새로워지고 이후로는 행동을 개선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자신의 속임을 자복하고 선사의 묘소에 고하며 흉악한 붓을 거둬서 불속에 내던져서 빠른 시일 내에 인가를 받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고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세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벌이 침을 쏘아대거나 뱀이 독을 내뱉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사나워져서 허가를 받아 판매하지 못한 것을 사람이 방해하였다고 힘써 무고하여 강태걸(姜泰杰)로 하여금 이미 진천 경찰서에 고소하게 하였고 또 다시 전주 검사국에 고소하여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두 가지 법률 조항에 걸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는 것입니까.소자는 통문을 지었다는 까닭으로 더욱 저들이 이를 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을 때 '오진영은 선사의 명예를 훼손한 자이니, 명예를 훼손한 법은 오진영에게 해당한다. 인가를 받아 판매를 금지하려 한 것은 내가 우리 선사를 위해 그 무고를 분별하고 가르침을 지킨 것인데, 세상에서 선생의 책을 영업하는 것은 대단히 많거늘 어찌 반드시 선사께서 인가를 금지한 원고를 영업하는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영업을 방해한 법률은 해당되지 않으니 죽기를 맹세코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무사하게 아무런 일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봉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때때로 적용되는 법률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앞날의 재앙을 어찌 끝까지 면할 수 있겠습니까.일찍이 들으니, 스승을 섬기는 도리는 임금, 부친과 같아서 다만 그들이 계신 곳에 목숨을 바친다265)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7척의 몸으로 곤란을 당하자 안자는 오히려 목숨을 바치려 하면서 뒤따랐는데,266) 더구나 사문 만 대의 도리가 손상됨을 입었는데 소자가 어찌 감히 한번 죽는 것을 아껴서 그 무함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한문공(韓文公)이 말한 '도가 나로 말미암아 전해진다면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여한이 없다.'267)고 한 것은 바로 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인(閭人)268)이 집권하여 법을 적용함이 이치에 어긋나고 기이하니 저 자신이 미처 죽지 않았습니다만 머리를 깎이는 곤욕이 먼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 없다.'269)고 성인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 신체를 훼손당하여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였어도 또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선생께서 이에 대해 정론(定論)을 두었으니, 어찌 감히 소홀하겠습니까.옛 사람이 이르기를 '스승이란 인재를 양성하는 모범(틀)이다.'270)라고 하였으며, 또한 '감히 자신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271)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선생께서 줄포 경찰서의 묘적(墓籍)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오진영이 거짓으로 서명한 화(禍)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자진(自盡)할 도구를 몸에 지니고 계시면서 '모욕을 받아 죽는다면 차라리 조용히 먼저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셨으니, 소자가 현재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선다면 선생을 본받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해보면, 선생께서는 나의 충심을 헤아려서 머리를 끄덕일 것입니다. 오호라! 이전에 천 년 하고도 천 년의 시간이 있었고 이후로 만 대 하고도 만 대가 있을 것인데, 공자와 주자가 엄정하게 세운 《춘추》와 《강목》의 의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의 마음과 진영의 죄와 소자의 죽음을 귀신이 분명하게 살필 것이며 후대의 수많은 성인이 잘 알 것이니, 소자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日丙子, 門人金澤述感諱辰之載邇, 遭禍變之罔極, 謹構文具奠而告于艮齋先生之墓.曰 : "昔孔子當周衰而作《春秋》 ; 朱子生宋末而修《綱目》, 皆所以嚴君臣華夷之大防也.嗚呼! 我先生洞道體之源, 明尊性之學, 以垂敎於永世者, 無非天地之大經, 人生之大倫, 而所値之時, 有甚於周、宋之末, 則君臣華夷之嚴防, 尢爲大稿中第一義也.絶海孤島, 握徐公之髮, 抱魯連之恥, 至乎君國之破亡, 血涕縞素而終其身, 則又大義之見乎晩節者也.先生之道義行業, 殆韓末之孔、朱者, 百世而可俟也.夫何天下久生斯文窮厄, 不幸有悖賊吳震泳者, 出於門下, 先生之義防焉, 破壤之 ; 先生之志節焉, 晦昧之.旣又修戈戟于門墻, 終至於假手閭夷而伏尸流血, 嗚呼! 尙忍言哉.蓋其鍾邪戾之氣, 稟慓猾之性者, 生質元自乖常, 然罪大惡極之前, 孰得以先斷.惟是便儇挑達, 巧言令色 ; 欺詐變幻, 挾數任術, 喜事惑人之弊, 無所不至.故先生之箝錘藥石, 亦畢施備至, 至如'所謂而見, 以事功爲重, 而不計道義.' '焉有士子而可以通某宮做事某人.' '以事功見笑於人.' '識見低矮某人, 勸余復蹈茶削覆轍.'等訓, 則其斥之嚴見之先, 顧何如也.然其識解之穎悟 ; 文辯之捷給, 有可資以發名理禦外侮者, 則又時加愛重, 至以見識發揮期獎之, 眞所謂霜雪雨露, 無非敎也.宜乎懼其斥而去惡 ; 喜其獎而加勉, 有以成身, 而賴及師門之後事也.而無柰惡習難除, 本質彰露, 以重功輕道之心, 倡出認刋稿之議, 以好勝自用之私, 含7)湖無拘而圖京認, 奉大稿而納讐府, 輪8)販賊, 此已累師之大者.而又以脫罪嫁師之惡念, 公然告諸人曰 : '先師曾有認意.' 繼而筆之書曰 : '先師嘗敎業者自認, 著者無關, 不必深拘.' 又曰 :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 「世不可知, 文稿須自料量爲之.」' 嗚呼! 誣人罪也, 而况乎誣師乎.誣師, 大罪也, 而况乎繼孔、朱而嚴《春秋》之防之大宗師, 誣之以破敗大義之事, 則其罪又何如也.在門弟子道, 宜其揮墻割籍, 若鷹鸇逐雀之不暇也.念先師平日血願同門之塤篪, 心痛士類之矢石, 宜亦有所處之道.故篇篇累牘, 面面衆喩, 使之自信自服而上告下謝者, 非不勤且誠矣.彼乃目之以猜險 ; 罵之以衆狂, 傲然自是, 曾不動念.及其'請願刋布決是自辱愼勿勉從'之遺書, 出也, 知其無奈乎誣罪之莫逃, 則乃悍然立'臨死不易辭之, 誓以確「料量」、「不拘」等說.' 於是震之徒, 爭曰 : '某公, 吾師傳鉢, 豈其誣言.有以「獨命」當曾子一貫之唯者.' 有以遺書爲彼一時而獨命爲此一時者 ; 有以遺書獨命爲幷行而不悖者 ; 有指遺書爲僞造者.外之人乃曰 : '吳某某翁, 高弟.深知其師之心者, 其言豈至誣也.容有某翁之有是意是敎也.' 坐嗤立排, 小譏大罵.至有言'有是師有是弟.' 耳不忍聞 ; 口不忍道.噫! 謂'震傳鉢'者, 固出於其徒阿好黨附同惡相濟之私, 而絶背先師平日斥震之嚴訓及晩年諸子偏駁未有擬望之定論矣.然揆以先師愛重期獎之意, 則謂'震本非高足之列'者, 亦偏論也.惟其爲高足也, 故致外疑之滋甚, 而尢菴所慮以高弟而證之, 則終不可辨明者, 不幸而近之矣.罪至於此, 已極貫盈, 而又敢就大稿, 而手分之編輯, 所謂精選者一部, 竟使其徒姜泰杰, 乞出認許而印販之, 向以言誣者, 今焉實之以事矣 ; 向以筆舌破訓者, 今焉身親碎之矣, 何其酷也.至其認印見本, 則添刪改動, 恣其所欲.凡係時義, 句句拔去者, 震也, 大書其著作者氏名, 則杰也.如是則震集杰集, 斯可矣, 猶復强名之曰, 《艮翁稿》, 僭犯分義, 乖錯名實, 莫此爲甚, 豈可謂'少能知懼於先生朽骨無知之戒'者乎.蓋震泳之所觸先生純正之道光明之義, 在在破晦, 義晦而道破, 先生不得爲先生.先生不得爲先生, 則孔、朱以降, 春秋之義, 無人接續, 而天地窣窣, 其長黑矣.師誣罔極, 旣切痛寃, 世禍之酷, 亦可寒心.見此倫亡經墜之變, 而恬然視爲無事, 則是門下無人 ; 世界無人.伏念小子之出入先生之門, 爲二十有三年.質薄材短, 雖未能承服萬一之誨, 然見期則不可謂不深 ; 受恩則不可謂不厚矣.竊不自量, 敢附於尊師衛道之義, 從辨討之列, 而幷禁認販本之購讀, 料彼强亢難敵之勢, 非孤軍之所能廓然.惟幸不泯者秉彛 ; 莫遏者公論, 遺書之布 ; 先生之義, 共覩日星, 討文之到, 震泳之罪, 同揮鈇鋮, 報佛之恩, 豈敢云然.能言之徒, 其或在斯, 苟有毫分人心者, 宜思自新善後之道, 服其誣而告諸墓 ; 收凶筆而付之火, 亟罷認販之役, 屛息潛伏, 以俟幷世之裁處, 胡乃蜂螫蛇毒, 愈往愈烈, 乃以認販之未售, 爲辨9)誣人沮害, 令姜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以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 爲綱打之計.而小子則以製通之故, 尢爲彼之所甘心.頃被檢局訊質, 答謂'震是損害先師名譽者, 損名之律, 震可以當之.禁止認販, 吾爲吾師辨誣守訓, 世間營業, 不勝其多, 而豈必以先師禁認之稿爲營業物乎.妨業之律, 非所當也, 誓死不服.' 無事而出.然彼鋒益銛, 時律難測, 前頭之禍, 安得以終免.竊嘗聞事師之道, 同於君父, 惟其所在, 則致死焉.師門七尺之軀之遇難, 顔子猶必捐生而赴之, 而况師門萬世之道之被喪, 小子豈敢惜一死而不明之.韓文公所謂'使道由某而傳, 雖滅死萬萬無恨'者, 正吾心也.但今閭人執命, 用法乖異, 身未及死, 而髡役之辱先至.'士可殺不可辱.' 聖有明訓, 變形而死, 死且有辱, 先生曾有定論, 豈敢忽諸.古人云, '師者, 人之模範.' 又曰 : '不敢信己而信其師.' 昔先生之斥茁署勒籍, 處震泳冒書之禍也.恒以自盡之具隨身曰 : '與其見辱而死, 無寧從容先裁.' 小子今於死生之際, 不法先生而何以哉.伏想先生鑑我衷而首肯也.嗚呼! 前有千千年, 後有萬萬世, 孔、朱所嚴《春秋》、《綱目》之義, 終不可得以泯焉, 則先生之心, 震泳之罪, 小子之死, 神祗昭昭, 後聖林林, 小子尙復何言.謹告." 휘신 기일(忌日)과 같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서공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서공(徐公)'은 서부원(徐浮遠)으로, 호는 동해(東海), 명나라 말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간재척독》 〈답박노원(答朴魯原)〉에서 "서동해 -부원- 는 항상 머리카락을 잡고서 통곡하며 고황제를 부르면서 '외로운 신하는 머리카락으로 절개를 삼고 시와 예로 벗을 삼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가 구천에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만에서 14년을 거처한 뒤에 조주의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생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처럼 치욕을 품고 살았는데 '노련(魯連)'은 제나라 선비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백 대가……것입니다 '百世而可俟'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의 준말이다. 《중용》 29장에서 ""통치자의 도는 자신이 지닌 덕을 근본으로 하여 일반 백성에게 징험을 하는 것이요, 삼왕에게 상고해도 오류가 없는 것이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이요,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1886년(고종 23)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수업을 받았고, 1897년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하여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전우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하였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오진영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이견(而見) 오진영의 자이다. 식견이……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은 충고해주는 오진영을 가리키며, '나'는 간재 자신을 가리킨다. 다공 미상. 《간재집》을 보면 왜에게 머리를 깎인 것으로 보인다. 권2 〈답남중칙(答南仲則)〉, 권3 〈답서병갑(答徐柄甲)〉 등에 그러한 내용이 보인다. 복철 원래 수레가 줄줄이 뒤집힌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명리 원래 명리는 명(名)은 명칭(名稱)을 말하고, 이(理)는 도리(道理)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명분(名分)의 의미로 보인다. 화목하게 지내기를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을 불고 아우는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여 매우 좋은 형제애를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문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왜놈에……따르지 마라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의발을 전하였으므로 '전발(傳鉢)'은 의발(衣鉢)을 전한다는 뜻이다. 의발은 본디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특히 학문 전수(學問傳授) 등의 경우에 쓰인다. 증자가……답한 것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參乎, 吾道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曾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아무개 옹 스승 간재를 가리킨다. 우암이……증명한다면 이이(李珥)의 낙발(落髮)에 대해 그의 고제인 김장생이 증언하였다면 그 설은 끝내 변명할 수 없다는 말로 간재의 고제라고 일컬어지는 오진영이 스승이 하지 않은 말을 햇다고 무함했으니 이 사실은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권8의 〈여오사익, 기축(與吳士益, 己丑〉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죄가……찼는데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구양수의 〈논여이간차자(論呂夷簡劄子)〉에서 " 이간의 죄악은 가득차서 사적이 환하게 드러납니다.[夷簡罪惡滿盈 事跡彰著]"라고 하였다. 강태걸(姜泰杰) 자는 자흥(子興),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거주하였다. 스승의……하겠습니까 주희(朱熹)가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塵刹, 삼라만상)을 받든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 하겠네.[將此⾝⼼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全》 卷36 〈答陳同甫〉 《능엄경(楞嚴經)》주석에는 "성과(聖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은(佛恩)을 갚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삼는다.[以此爲報不報之恩也]"라고 하였다. 뒤 구절의 말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어찌 책을 인간하는 행위를 하느냐는 의미이다. 스승을…바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보이는 말로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고 나는 들었다. 어버이는 나를 낳아 주셨고, 스승님은 나를 가르쳐 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 주셨다. 어버이가 안 계셨으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임금님이 길러 주지 않았으면 먹고살지 못했을 것이고,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니, 이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 주신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 중 어느 분과 있든 간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壹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 하였다. 공자께서……뒤따랐는데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광(匡)에서 곤액을 당했을 때 안연이 뒤쳐졌다가 따라왔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회(回)야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子在 回何敢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만약 공자가 해를 입었으면 안자(顔子)가 반드시 죽음으로써 구했을 것이다.'라고 주자가 말하자, 혹자가 '안로(顔路 안연의 아버지)가 있는데 안연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주자가 말했다.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면 단지 죽을 뿐이다. 이것과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어려움을 당한 상황에서는 그 말대로 할 수 없다.[事偶至此 只得死 此與不許友以死之意別 不許以死在未䖏難以前 乃可如此 䖏已遇難 却如此說不得]"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38 子畏於匡章》 한문공이……없다 한문공은 한유(韓愈)를 가리키며, 이 문장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 여인(閭人) 미상. 아마도 무식한 왜놈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선비는……없다 《예기》 〈유행(儒行)〉편에 보이는 말이다. 스승이란……모범이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나오는 말이다. 감히……믿었다 《근사록》 〈치지(致知)〉에서 이천 선생이 문인들에게 답하는 말에 "공맹의 문인이 어찌 모두 현철한 자만 있었겠는가. 진실로 중인들도 많았으니, 중인으로서 성인을 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겠지만 오직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구한 뒤에 얻었는데, 지금 제군들은 나의 말에 대하여 조금만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다시는 생각해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끝내 다르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含은 오자로 보인다. 輪은 輸의 오자로 보인다. 辨은 辦의 오자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