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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헌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洪韋軒 己卯 지난해 섣달에 편지를 올릴 때 외람되게도 존자의 선친 겸와공에 대한 찬사(贊辭)를 지어 올리고, 주제넘고 경솔하여 누를 끼친 것이 그 죄가 가볍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말은 간단하고 뜻은 갖추어졌으니, 어찌 감복하지 않겠는가?" 하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몇 사람이 아끼고 보호하여 서로 종유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인데 가난하고 병이 들어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셨으니, 다정하신 인자의 말씀은 못난 저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생애 어느 날에나 어른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친구가 서로 사귈 때는 모름지기 서로 아끼고 보호하는 중에 덕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는 한 가지 일이 있어야만 진정한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된다고 여겼는데, 매번 보면 사람들이 이것을 서로 베풀어 행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간혹 먼저 베풀어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아낀다고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원수처럼 틈이 벌어진 뒤에야 그만두니, 이런 세상의 이런 풍습을 장차 어떻게 해야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지요? 집사께서 이에 대해 만약 묘한 계책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의 자는 종현(鍾賢)이고 호는 후창(後滄)이니 모두 선사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후창이라고 한 것은 중봉(重峯)이 호를 후율(後栗)로 한 일6)을 모방하여 저에게 주자가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했던 일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자 하여 권면하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비록 감히 감당할 수는 없으나 선사의 뜻은 학자로 하여금 반드시 스스로 성현을 기약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그 곡절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기에 급급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김택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주자의 뒤를 계승하는 것에 비길 수 있는가? 그 죄는 죽일 만하다." 하니, 자못 가소롭습니다. 客臘奉書日, 猥呈尊先謙窩公贊辭, 方懼僭率奉累獲罪匪輕, 乃蒙"言簡意備, 胡不感服"之喩.事出不圖, 自幸無已.又喩以"吾儕幾人, 愛護相從, 今日急務, 而貧病莫遂." 藹然仁者之言, 區區無似, 亦所願言, 而未知此生何日造拜軒下否也.竊嘗以爲朋友相與, 須於愛護之中, 有德勸過規一段事, 乃爲眞愛獲, 每見人之以此相施者, 鮮矣.其或有先施者, 則非惟不認爲相愛, 竟成仇隙而後已焉.此世此習, 又將如何而可銷也? 執事於此, 如有妙術, 願聞之也.賤字鍾賢, 號後滄, 皆先師所命.而其云後滄者, 倣重峰號以後栗之事, 欲其後於朱子之滄洲而勸勉之也.顧雖不敢當, 先師意則乃使學者, 必以聖賢自期也.或者不知曲折, 急於擠人, 乃曰: "金澤述, 何敢自擬於後朱子也? 其罪可誅.", 殊可笑. 중봉(重峯)이……일 중봉은 조헌(趙憲, 1544~1592)의 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서 율곡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또 다른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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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헌에게 답함 答洪韋軒 저번에 편지를 올릴 때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솔직하게 무릅쓰고 말씀을 드렸으니, 오직 큰 허물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바다와 같은 도량으로 용서해주시고 옛날 강론했던 우의와 오늘날의 연고를 말함에 진실한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조금도 간극이 없으시니 군자의 아량은 못난 제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문집의 분배가 거의 다 끝난 뒤에 특별히 경소의 문집을 보내주셨으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이 어른은 참으로 제가 공경하여 우러르는 분입니다. 또한 일찍이 저의 집에 왕림하여 사문의 작고하신 뒤의 연보를 작성하는 일에 대해 논의한 적도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후인의 도리에 있어 이미 돌아가신 분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 약간의 도움이나마 미치지 못했으니, 마땅히 현재 비석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주어야 하는데 가슴 아프게도 빈털터리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2원을 보내드리니, 돈이 비록 매우 부끄러워 땀이 나지만 그래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당신의 조카 복경(復卿 김인영)이 이미 죽었다 들었습니다. 비록 신구(新舊)의 학문으로 길을 달리하여 바람난 말과 소가 서로 관심이 없듯 먼 관계이지만 옛날 같은 문하에 있었고 또 나이도 동갑인 정의를 생각할 때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간재의 문하에 옛날 홍씨, 이씨, 김씨가 있어 '세 명의 갑신생[三甲申]'으로 일컬어졌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당(陰黨)이 이로 인하여 내가 홍 아무개를 보러 갔던 일을 가지고 총독부 내의 한 자리를 구하러 간 것이라고 무함하였으니, 아, 얼마나 심한 짓입니까? 들으니, 복경이 정재(靜齋 전화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람이 선사를 오래도록 따라 뜻에 터득한 바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소의 존경하는 뜻을 표하고 다시 스스로 겸손해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무함한 자의 말과 같다면 어찌 복경의 이러한 편지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단지 한 차례 웃음거리에 붙일 일이며, 족히 말할 것이 못됩니다. 向日奉書, 未及量度, 率直冒瀆, 惟大何是懼.乃蒙海恕, 講昔之誼, 語今之故, 眞意藹然, 少無間隔, 方知君子雅量, 非淺腹所料.又承另惠敬所稿於分帙幾盡之餘, 尤以爲感.此丈, 固生所敬仰.亦曾臨獘廬, 議及師門百歲後年譜事矣.在生之道, 旣未及略助於往者之刊役, 則宜用力於目下之碑事, 而傷哉! 赤手柰如之何? 此呈二圎, 金雖甚愧汗, 猶賢乎已否.令姪復卿, 聞已不淑云.雖新舊殊途, 馬牛之不及, 然念昔同門同庚之誼, 豈不悲傷? 人皆知艮門舊日有洪李金三甲申之稱.故陰黨因是, 誣此漢以往見洪某求督府內一窠任.噫! 何其甚也? 聞復卿與靜齋書, 語及此漢以其從師之久, 意有所得, 致多少敬意, 更有自歉之意云, 若如誣者之言, 豈有復卿此書之理乎? 雖然, 只可付之一笑而不足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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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靜齋田丈 癸酉 현동의 묘에 석물이 없다는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한탄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삼백 원의 돈이 진실로 모으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으기 어려운 것은 의론입니다. 이제 사인(士仁)이 이장하고자 하고 순형(舜衡)이 힘을 쓰고 있으니, 비록 정성과 힘이 있는 자라도 누가 이 일에 기꺼이 참여하여 돈만 쓰고 구설을 초래하려고 하겠습니까? 기이하도다! 한쪽 사람의 무함으로 선사의 평생 절의가 사라진 마당에 동문의 그 많은 재물로 고용한 사람들이 손을 댄 난본(亂本)을 간행하면서 유어비어와 이간하는 말로 스승 집안 형제들의 불화를 초래하는 바람에 장사지내는 날 즉시 갖출 수 있었던 석물을 십여 년이나 오래도록 까마득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이 잔인합니다. 용동에서 간행한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우리 어른이 그 일에 참여한 것은 지금에 이르러 뒤늦은 후회가 있지 않으십니까? 시세와 의리로 헤아려 보건대, 이장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사인이 마음을 돌리기만 한다면 석물의 비용을 마련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 없을까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부디 정성을 들여 사인의 마음을 돌려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성의 오진영이 한창 스승을 무함할 때에 사인이 그들 편이 되었던 것은 사실 한때 미혹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함재 어른을 찾아가 전날의 잘못을 사죄하고, 제 동생을 찾아와 저에게 그러한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사람이 이미 잘못을 깨달으면 마땅히 이전의 허물을 추궁하지 말고 합심하여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듣건대 올가을 선사의 기일에 임참봉(任參奉)이 우리 어른의 허물 때문에 제사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진실로 자식의 도리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조카와 화합하지 못하는 뜻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율곡이 말하기를, "한 집안 사람이 불화하는 것은 다만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88) 했으니, 이 말을 생각해 볼만 합니다. 비록 그러나 제 견해로 헤아려 본다면 우리 어른이 선대의 일을 성취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는 것으로 석물보다 더 급한 게 있습니다.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이것이니, 왜입니까? 석물은 훗날에 정성과 힘이 있는 자가 있다면 가능하고, 가장과 연보는 우리 어른처럼 사실을 두루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완급을 결국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玄阡石儀之闕, 誠如下喩所歎.然三百圓金, 實非難合.所難合者, 議論也.今士仁欲緬遷, 而舜衡宣力焉, 雖有誠力者, 孰肯與於是役, 費金而招口哉? 異哉! 一邊人之誣了, 先師生平節義銷了,同門幾多物力, 印出手分之亂本, 而以游辭間言, 致師家骨肉之不和.使此葬日, 卽具之石儀, 茫然於十餘年之久, 其心忍矣.至於龍刊之事, 又何爲而然者? 吾丈之與其役, 至今不有追悔乎? 大抵揆以時勢義理, 緬葬不可爲者.如得士仁回意, 則石儀之運謀出力, 不患無人.幸積誠而回之, 如何? 方陰之誣師也, 士仁之右彼, 實爲一時之惑.年前來謁涵丈, 謝前日迷錯, 訪見舍弟, 傳意鄙生而去.人旣覺悟, 不宜追咎, 而同心圖後事, 可也.聞"今秋師忌, 任參奉以吾丈之累, 不參祀有言"云, 如此者, 固爲子道之不安, 亦不爲示不和令姪之意乎? 栗翁言"一家之人不和, 只爲誠意未盡." 此可思也.雖然料以淺見, 吾丈所痛先事未就, 有尤急於石儀者.家狀年譜, 是也, 何也? 一則後日之有誠力者, 可能, 一則非吾丈之備知事實者, 不可能.二者之緩急, 竟如何? 願有以深諒焉. 한 집안……때문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40 〈자경문(自警文)〉에 보인다. 〈자경문〉에는 화(和)가 아닌 화(化)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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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季弟汝安 庚午 보내온 편지에 괴로운 상황은 반도 못 읽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 비록 그렇지만 천하의 일이란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다. 최근 한두 가지 목격한 일로 보면 괴로움이 되돌아 즐거움이 되는 경우가 있더구나. 한번 들어 보거라. 어떤 사람은 억척스럽게 이익을 도모하여 봄에 꾸어주고 가을에 거두면서 은혜와 원한이 교차하고,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와 자고 먹는 것을 제 때 못하면서, 겨우 터전과 재산을 일궜지만 도적이 집으로 들어와 칼날이 몸에 닿으니, 그것을 면한 사람은 다행이다.어떤 사람은 자식이 돈 쓰는 것을 금하다가 독살을 당하거나 자식을 명토(名土)로 옮겼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한다. 그 망하지 않은 것은 재물이지만, 그 집안은 망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재물이 없고 가난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런 근심에 이르렀겠느냐. 우리들이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집안에 앉아서 글을 보고 있으니 가령 구덩이에 빠져 죽더라도 저들이 칼날과 독으로써 하는 것에 비하면 또한 복되지 않겠느냐.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곧바로 스스로 행복하여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어떠냐? "변복(變服)은 변형(變形)의 조짐이다."고 논한 것은 옳다. 혹자는 치의(緇衣)ㆍ고구(羔裘)를 끌어들이고 우리나라는 푸른색을 숭상하여 문제가 없다고들 하는데 잠꼬대라고 이를 만하다. 저들은 이미 예의를 썩은 흙덩이로 여기는데 우리는 다행히 옛 옷을 입고 있고, 저들이 이미 강토(疆土)를 빼앗았는데도 우리는 나라를 아끼고 있다. 가죽이 남아 있지 않고서 털을 어떻게 전하겠느냐. 그 푸른 것이 장차 검어지고, 검은 것은 장차 자를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처음부터 변복령에 복종하면 끝내 도망하여 벗어날 수 있겠느냐. 근래 절구 시 하나에 뜻을 드러내어 지어보았다.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온 지 몇 천 년이 되었는가 殷師東來幾千年흰 옷을 숭상하는 유풍이 오늘까지 전해졌네 尙白遺風此日傳하물며 우리 상을 당한 자손들이 矧我孤哀當室子차마 검은 옷을 몸에 입을 수 있겠는가 忍將黑服著身邊저들에게 할 답을 갖춘 셈이니 깊은 말은 하지 않고 우선 여기까지 만하겠다. 來章艱苦之狀, 讀之未半, 不覺淚雨.雖然, 天下事有乘除.以近日一二目擊事觀之, 有可以回苦作樂者矣.試聽之, 有人矻矻孜孜, 以利爲謀, 春散秋斂, 恩怨交至.晨出夕歸, 寢食失時, 僅得基業, 而暴客入室, 白刃逼身, 其得免者, 幸也.有人禁子用錢, 幾遭其所毒, 移子名土, 又遭其所訴.雖其不亡者財, 而其家則不可謂不亡矣.使二人者無財而貧, 豈至此患乎? 吾儕雖云艱寠, 尙得坐屋裏看文字, 卽使有塡壑而死, 視彼以刃以毒者, 亦不爲福乎?念之至此, 卽可以自幸而不以爲戚也.如何如何? "變服爲變形之兆."所論, 是矣.或者引緇衣羔裘, 我國尙靑而爲無傷, 可謂夢囈語也.彼旣糞壤禮義, 我幸其爲古衣;彼旣奪取疆土, 我愛其爲國尙.則皮之不存, 毛將安傳? 其靑者將黑, 黑者將薙, 吾無疑也.始服其令, 終其逃脫乎! 近有一絶詩, 見志曰:"殷師東來幾千年, 尙白遺風此日傳.矧我孤哀當室子, 忍將黑服著身邊." 爲備答彼, 故不欲深言, 而姑及此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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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季弟汝安 戊辰 편지를 보니 품행이 단정치 못한 것을 뉘우침이 자못 절실하구나.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나간다면 무슨 덕인들 세울 수 없겠는가. 요즘 들어 일마다 세세한 절목(節目)은 때마침 우연히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세세한 행동에 신중하지 않으면 끝내 커다란 덕에 누를 끼치고, 잠시 풀어 놓으면 천 리로 달아난다. 세세한 절도가 우연히 그렇다고 하여 통렬히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 또한 이 잘못을 끊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젊고 팔팔하기는 고사하고 더군다나 이젠 늙었다. 지금 뜻한 바를 보니 깨우친 것이 많구나.엄숙하고 통명(通明)한 사람은 人之齊聖술을 마셔도 온공(溫恭)히 이겨내거늘 飮酒溫克저 어둡고 어리석어 알지 못하는 자들은 彼昏不知한결같이 취함이 날로 심해지도다 壹醉日富각기 너의 위의를 경건히 할지니 各敬爾儀천명은 다시 오지 않느니라80) 天命不又이는 옛사람이 형제를 경계시키는 시이자, 실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말이다. 지금 마땅히 이 시를 희생 위에 올리는 글81)로 삼아서 지금부터 관을 덮을 때까지 맹세코 범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 일 하나를 마치면 다른 허물을 고치는 것도 쉬이 힘을 얻을 것이다. 주자가 말한 "한결같이 밖으로 내달려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모두 술을 끊은 예를 기준으로 하여 끊었습니다."82)라고 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어떠한가?앞의 편지에서 스승의 학문을 이어 담당하고 후생을 고무시켜 나아가게 할 사람이 없는 것으로 "사문(斯文)이 길이 어두워지고 천도(天道)가 의지할 데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가 없다고 하여 필시 천하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육조(六朝)와 오대(五代)의 수백 년간에 성인의 학문을 이어서 후학을 고무시켜 나아가게 한 이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끝내는 송(宋) 나라 제현이 사도(斯道)를 창명(昌明)하는 데 이르렀으니, 지난 일에서 징험할 수 있다. 또 천하는 지극히 넓고 태어나는 사람은 지극히 많으니, 일방(一方)에서 떨쳐 일어나 의연히 도를 담당하는 이가 없으리란 걸 어찌 알겠는가. 이제 눈앞의 한 문하에 사람이 없다고 미루어 단정해 버린다면, 일세(一世)의 사람을 모조리 기만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또 하늘이 나에게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품과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은 마음과 굳세고 씩씩하며 바르고 빼어난 형체를 부여해 주었다. 만약 과연 일문(一門)과 일세에 사람이 없다면, 내가 품부 받은 선과 여러 미덕으로 유독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없겠는가. 익주(益州)는 피폐하고 유선(劉禪)83)은 암약(闇弱)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공명(孔明)이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운이 영영 끝났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성패(成敗)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84)라고 말하고는, 몸소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였다. 하물며 사도(斯道)는 하늘이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으리니, 국가의 흥망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른바 "하늘이 변하지 않으니, 도 역시 변하지 않는다.",85) "천년이 되어도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항상 그러한 도의 이치이다."86), "양(陽)에는 다하는 이치가 없다."87) 등의 설은 천고의 격언이다.도를 배운다는 선비가 어찌하여 믿음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성급히 스스로 억측하여 단정하는가? 이는 일세를 속이고 천하를 버리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혹 이로 인하여 풀이 죽고 타성에 젖어 마침내는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버리는 부류로 돌아갈까 저어되니,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과 시비를 따지고 다투지 않아야 함은 참으로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이는 다만 일이 자기 한 몸에 관련된 것일 때 말이고, 부형(父兄)과 선사(先師)에 관련된 것이 있다면 자제와 문생 된 자로서 어찌 편안히 아무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세교(世敎)와 학술의 커다란 관건에 미쳐서는 더욱 입을 닫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그러므로 맹자는 양주(楊朱)ㆍ묵적(墨翟)에 대해서, 주자는 육구연(陸九淵)88)ㆍ진량(陳亮)89)에 대해서 일찍이 '시비를 다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금일에 있어서는 '부강(富强)한 것이 윤리나 강상보다 중하다.'거나 '예수가 공자보다 성인이다.'라는 등의 일종의 괴이한 논의는, 우리가 마땅히 다투고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에 해당한다. 다만 덕이 정립되지 못하고 식견이 투철하지 못하며 필력이 장대하지 못하면 우선 날카로움을 비축했다가 발휘해야 될 것이다. 대개 이 두 가지 조목은 네가 세상의 도에 절망하고 자기 편한 데 안주하여 큰 성취에 방해될까 염려되어 나도 모르게 말이 여기에 이르렀다. 헤아려서 주의하길 바란다.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은 참으로 갑작스레 마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이 진실로 함께 모이면 몸이 하나로 모이지 않더라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너와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선성(先聖)의 도이고, 힘쓰는 것은 선인(先人)의 가르침이며, 좋아하는 것은 경전(經傳)의 의리(義理)이고, 싫어하는 것은 세속의 더러움과 비루함이다. 빛깔 없는 아가위 꽃90)이 두 곳에서 서로 비추고, 소리 없는 질 나발과 젓대91)가 날마다 서로 화응하니, 그 함께 모임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만약 지상(志尙)은 길이 다르고, 호오(好惡)는 취향이 다르다면, 비록 탁자를 같이 하고 이불을 나란히 하여 밤낮으로 함께 한들 어찌 그 마음이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서로 위로하며 천천히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동기와 골육이 구렁에 나뒹구니 세상을 사는 즐거움이 더욱 싫습니다."라는 말에서는 우려가 매우 깊고 천륜의 정이 지극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사가 절박하고 뜻이 애상(哀傷)하니 어찌하여 굳이 그리하는가? 무릇 몸이 구렁에 있음은 지사(志士)가 잊지 않는 것이고, "하늘이 살리고 하늘이 죽인다."92)는 것은 달인(達人)의 말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다소 유쾌해질 것이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어서는 마땅히 아귀(餓鬼)가 되어야지, 다시 수귀(愁鬼)가 되어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93)라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치에 닿은 견해이다.옛사람이 또 말하기를, "곤란이 극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데 이르면,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슬기롭게 스스로 마음을 너그러이 풀어놓으라."94)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가 비록 곤궁함이 심하나 또한 앉아서 서책을 보고 학도를 지도하고 여력으로 조금이나마 집안을 다스려 여전히 먹고 입으며 죽지 않으니, 밭을 갈거나 삯일을 하거나 등짐을 지면서 자질구레한 재물을 얻어 입에 풀칠하는 자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이로 헤아려 보면 한바탕 더욱 유쾌해질 것이다. 일전에 규모를 조금 바꾸어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겠다고 말한 것은 너의 지상(志尙)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것이 일시의 충동에서 일어난 것이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털끝만큼의 생각이라도 아직 마음속에 있다면 일찍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무릇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고루 네 갈래 신분의 백성이지만 청탁(淸濁)과 아속(雅俗)의 품격이 절로 다르다. 성인의 "채찍을 잡는다."95)는 말 역시 유래가 있는 말이지만 실제에서 나온 게 아니라 다만 부귀는 결코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평소에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일에 몸을 굽혀 나아가서 종신토록 좋아할 즐거움을 버릴 수 있겠는가.사람의 앎에 있어서 자신을 아는 데 밝은 것을 귀히 여긴다. 스스로 예전을 징험하고 장래를 헤아려 보면, 우리의 타고난 복과 심력이 과연 풍족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다만 현재의 분수를 따라 살아감만 못할 것이다. 만약 앞으로 생활이 조금 풀린다면 참으로 싫지 않겠지만, 끝내 여기서 그치더라도 편안히 여길 뿐 다른 게 없다. 불행히도 구덩이 속 시체가 되어도 또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천명을 알며, 덕을 세우고, 자신을 이루는 도가 될 것이다. 어떠냐? 見書, 以行修未端, 悔懊頗切.稱此以進, 何德之不可立哉.至於近日, 事事細節, 時適偶爾.然不矜細行, 終累大德, 晷刻放之, 千里其奔.其不可以細節適爾而不痛懲也, 審矣.吾亦未斷此失, 迄至于今, 舍曰少壯, 矧玆老大.今見所志, 警發多矣."人之齊聖, 飮酒溫克.彼昏不知, 壹醉日富.各敬爾儀, 天命不又." 此古人兄弟相戒之詩, 而實爲吾輩準備語也.今當以此詩作牲上載書, 從玆至于蓋棺, 誓不相犯焉, 已矣.了此一事, 他過之改, 亦易得力.朱子所謂"一種向外走作, 心悅之者, 皆準止酒例絶之"者, 可庶幾矣.如何如何? 前書, 以無有承當師學而鼓進後生者, 謂"斯文之永晦、天道之無恃, 從可知矣." 此非以無道必天下而棄之者乎? 六朝五季數百年間, 不見有承聖學而鼓進後學者.然卒至於有宋, 諸賢倡明斯道, 已事可驗也.且天下至廣, 人生至衆, 安知不有奮起一方, 毅然任道者.而乃以目前一門之無人, 而推斷而已, 則不幾於盡欺一世之人乎? 且天賦我以純粹至善之性, 虛靈不昧之心, 强壯正秀之形.若果一門一世之無人焉, 則以我所稟之備善衆美, 獨不可以當此任乎? 夫以益州疲弊, 劉禪闇弱, 孔明非不知其無可如何.然而不曰:"國運永訖.", 但曰:"成敗非所逆覩.", 而自盡鞠躬盡瘁之力.而况斯道之極天罔墜, 非比國之有興亡.若乃所謂"天不變, 道亦不變."、"千秋必返, 道之常."、"陽無可盡之理."等說, 千古之格言也.士之學道者, 胡不信及乎此, 而遽自臆斷也.是則非惟欺一世、棄天下.恐或因此而沮喪偸墮, 終歸於自欺自棄之科, 可不省哉.不宜與人較爭是非, 固如所喩.然此但以事涉一己者言, 若有關於父兄、先師者, 則爲子弟、門生者, 豈可晏然無事而已.且若至於世敎、學術之大關, 則尤爲不容含黙者.故孟子之於楊ㆍ墨、朱子之於陸ㆍ陳, 曾不以不宜較爭是非已之.在今日則如"富强重於倫綱"、"耶蘇聖於孔子"等一種怪論, 吾輩在所當爭而不可已者也.但德未立, 識未透, 而筆力未壯, 且可蓄銳而發之耳.蓋此二款, 有慮汝之望絶世道, 安於自便, 有妨大就.故不覺言之至此, 想諒加意也.團聚之樂, 固難猝辦.然心苟團聚, 則身不團聚, 何病焉.彼此所志者, 先聖之道;所勉者, 先人之敎;所好者, 經傳義理;所惡者, 世俗汚陋.隔色棣花, 兩地交暎, 無聲塤篪, 逐日相和, 其爲團聚, 孰加於此.如使志尙殊途, 好惡異趣, 雖同卓聯被, 以日以夜, 安能捄其心之燕越哉? 用是相慰而徐圖之, 可也."同氣骨肉, 宛轉溝壑, 益厭生世之樂."之喩, 可見憂慮之遠、倫情之至.然辭涉切迫, 情犯哀傷, 何必乃爾也.夫身在溝壑, 志士不忘, 天生天殺, 達人有言, 思之到此, 多少快活.且昔人云:"死當爲餓鬼, 不宜復爲愁鬼, 以一身供兩役." 此眞理到之見.昔人又云: "到困極難勘處, 常將不如我者, 巧自寬解." 今吾輩雖窮甚, 亦坐而看書, 課學徒, 餘力略些幹家, 猶得喫著不死, 其視耕田行傭負任而得零財糊口者, 可謂遠勝.以此算來, 更快一場.前以少變舊規經營些業見告.揆以汝之志尙, 知是發於一時衝激, 非由中而出也.然不免一毫念頭尙在裏許, 則不如早早刷刷棄去之也.夫士農工商, 均爲四民, 淸濁雅俗, 品格自殊.聖人"執鞭", 亦有爲之言, 非出實際, 特以明富之決不可求.則吾輩安可俯就平日不屑之業, 分却終身所好之樂乎? 人之有知, 貴其自知甚明.試自驗前量來, 吾輩之福分心力, 果能豊足者乎? 不如且隨現分活去.如得前頭稍紓, 則固所不厭.終止於斯而已, 亦安之無他.不幸而至爲溝中瘠, 又無如之何矣.此當爲安分、知命、立德、成身之道.如何如何? 엄숙하고……않느니라 《시경》 〈소완(小宛)〉의 시 구절이다. 희생……글 《맹자》 〈고자 하〉에 다음 구절이 보인다. "오패 중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가장 강성하였는데,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에서 제후들을 모아놓고 희생을 묶어, 그 위에 맹약하는 글을 올려놓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의식을 하지 않고 명령하였다." 한결같이……끊었습니다 《주자대전》 권31 〈답장경부(答張敬夫)〉에 나오는 대목으로 일부 생략되었다. 유선(劉禪) 중국 삼국 시대 촉(蜀)나라 유비(劉備)의 아들이다. 소열제(昭烈帝) 유비가 죽자 제위를 이어받은 그는, 제갈량(諸葛亮) 등 어진 신하들이 죽은 뒤 황호(黃皓) 등 간신을 중용하여 국정을 문란하게 하다가 나라를 잃었다. 성패(成敗)는……아닙니다 제갈량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이……않는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나니,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도 또한 변하지 않는다.[道之大原, 出於天, 天不變, 道亦不變.]" 라고 하였다. 천년이면……이치이다 "千秋必返 理(古)之常"이란 말이 순경(荀卿)의 말로 전하여 온 것 같다. 양(陽)에는……없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라고 하였다.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자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ㆍ상산(象山)이다. '심즉리(心卽理)' 설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유교의 고전인 육경(六經)조차도 '내 마음의 주각(註脚)'이라 하여 주자와 대립하였다. 진량(陳亮) 1143~1194. 자는 동보(同甫), 호는 용천선생(龍川先生)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강력히 반대하여 1183년 절교를 이끌어 낸 송나라의 학자 관료이다. 그는 주희와 친하면서도 학문적 지향은 달랐으니, '사공지학(事功之學)'을 주장하여 실제적인 공용(功用)과 효과를 중시하고 이학가(理學家)들의 '의리(義理)'를 실질이 없는 빈말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서로 《용천문집(龍川文集)》ㆍ《용천사(龍川詞)》 등이 있다. 아가위 꽃 아가위 꽃은 《시경》 〈상체(常棣)〉에 "아가위 꽃 그 꽃송이 울긋불긋 아름답네. 오늘의 모든 사람 중에 형제보다 좋은 건 없네.[常棣之華, 卾不韡韡.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우애 있는 형제를 가리킨다. 질나발과 젓대 서로 가락이 잘 맞는 두 개의 관악기로서 보통 형제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 〈소아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 불고, 아우는 피리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 하였다. 하늘이……죽인다 《주자어류》 권132에 보인다. "어떤 이가 호방형(胡邦衡)이 신주(新州)에 17, 8년간 있어도 아무 탈 없는 것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이 살리고 하늘이 죽이는 것이니, 도의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죽어서는……된다 《송자대전》과 김규오(金奎五, 1729~1791)의 《최와집(最窩集)》에 따르면,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 유배지에 있을 때 어떤 이가 전혀 근심 어린 빛이 없는 까닭을 묻자, 답한 말이라 한다. 곤란이……갖는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 초록된 《복수총서(福壽叢書)》라는 책의 질병을 물리치는 열 가지 방법 중 세 번째 "늘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와 흡사하다. 채찍을 잡는다 《논어》 〈술이(述而)〉에 보이는 공자의 말이다. "만약 부가 추구해서 되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가 하겠지만, 만일 추구해서 될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子曰 :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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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유고 발문 【본손을 대신하여 지음. 신해년(1911)】 礱巖遺稿跋 【代本孫作 辛亥】 옛날 조선 중기에 정치가 훌륭하고 교육이 밝아 여러 어진이가 나왔으니 당시 우암(尤庵) 송선생의 도덕이 유림의 종장이었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 일휴(逸休 이숙(李䎘)) 같은 분들이 도학이나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우리 6대조 농암(礱巖)152)선생께서도 그 시대에 태어나 우암에게 사사하셨는데, 매우 사랑과 인정을 받아 《주서차의(朱書劄疑)》 교정을 맡을 정도에 이르렀다. 또 문곡 같은 분들과 도덕과 의리로 사귀며 매우 자주 왕래하여서, 서로 토론하고 고쳐주며 함께 성장하는 도움을 얻었다. 이처럼 선생은 학문이 바르고 덕행이 뛰어났으니, 평론하는 후세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보고 그 산을 알게 될 것이다.그런데 후손이 쇠잔해서 그의 평생의 저술이 거의 다 산실되어, 그 정채롭고 미묘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하니, 이것이 후학과 후손의 한이자 아픔이었다. 집안 아우 김일상(金一相)이 집안의 옛 첩문(牒文)들을 정리하고 선현의 문집을 참고하여 한권으로 모은 다음 출판에 올려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 비록 유고의 분량이 간략하여 선생이 지녔던 바의 전체를 보기는 어려우나, 종전에 흩어져 볼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터럭하나 만큼의 무늬나 고기 한 점의 맛은 될 터이니 후학과 후손의 한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만하다.또 대개 사람들이 선현을 존경하여 추모하는 것은 저서의 많고 적음에 관계되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이 품은 덕의 실다움과 남에게 하는 감화의 깊이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공자 문하의 안연(顔淵)이나 민자건(閔子騫)은 쓴 책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도 철인 열 명의 첫머리가 되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유고가 어찌 터럭하나나 고기 한 점에 그치고 말겠는가? 온전한 표범가죽의 아름다움이나 온전한 정(鼎)의 진미도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이 유고를 읽는 이들은 선생의 글이 다행히 민멸되지 않은 것을 마음에 위로로 삼는 데 그치지 말고, 바로 이 유고로써 선생의 도학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찾아 몸에 체득하고 마음에 터득하기를 바란다. 이에 유고 책의 말미에 삼가 써서 배움에 뜻을 둔 후예와 후학들에게 알린다. 在昔○國朝中葉, 治敎休明, 群賢輩作時, 則有若尤菴宋先生之道德蔚爲儒宗, 而又有文谷、老峯、屯村、逸休諸公, 或以道學懸名, 或以德望著世。 我六世祖礱巖先生生于斯時, 事師尤翁, 亟被愛重奬與, 至有《朱書劄疑》校正之託。 又與文谷諸賢道義相交, 往復甚勤, 有講訂相長之益, 則其學問之正, 德行之卓, 尙論先生者可以見木而知其山矣。 但嗣承零替, 平日所著散逸殆盡, 精微之蘊不少槩見, 是爲後學之恨而遺裔之痛, 復如何哉! 家弟一相掇拾於家藏古牒, 參考於先賢遺集, 裒成一卷, 添入附錄, 登諸剞劂, 爲壽傳之擧。 雖其篇帙簡略, 難以見先生所存之全體, 然視向之散逸不見, 則猶足爲一毛之斑、一臠之味, 而後學之恨、遺裔之痛可以少慰矣。 且夫人之尊慕先賢不係於著書之多寡, 惟在其德之存己者實, 而感人者深。 是故, 孔門之顔、閔未聞有成書, 而不害爲十哲之首。 然則是編也, 奚啻爲一毛一臠而止也? 雖全豹之美、全鼎之珍亦不過此矣。 讀是集者, 毋但以先生之書幸而不泯, 慰之於心, 亦將卽此而求先生道學之全體大用, 體之於身而得之於心也。 玆敢謹書卷末, 以吿遺裔與後生之志學者。 농암(礱巖) 농암은 김택삼(金宅三 1649~1703)의 호이며, 김택술의 방계 육대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실제로 나아간 적은 없다. 숙종 때 세워진 부안의 '유천서원' 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농암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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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실기의 뒤에 쓰다 【임술년(1922)】 題茂東實紀後 【壬戌】 충장공(忠壯公) 정분(鄭苯)145)을 조상으로 삼으면서 후손됨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무동 정천경(茂東鄭天卿)146)이 바로 그 사람이다. 아, 광양(光陽)의 화147)와 금성(錦城)의 의리148)는 그 충성이 하나다. 애일당(愛日堂)의 편액과 양지(養志)의 정성은 그 효가 하나다. 삼공(三公)의 공훈과 두 현의 치적은149) 그 정사가 하나다. 조상이 되어 후손을 이끌고 후손이 되어 조상을 계승하여, 한 사당에서 같이 제사받으며 그 광휘가 고금에 빛난다. 아아, 아름답구나!후손 정헌태(鄭憲泰)가 〈무동실기(茂東實紀)〉를 보여주면서 내게 한 마디 말을 요청했다. 내가 말하기를, "공이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리고 아름다운 행적을 현양하는 것들은 참으로 미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데, 끝내는 윤상(倫常 인륜의 상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성인의 학문에 종사하는데, 성인의 학문은 인륜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윤상이 다 무너져버린 때를 만났으니, 그대는 의당 크고 작은 일에 응수(應酬)하고, 평상과 변괴를 대처(對處)하면서 오직 윤상을 본무로 삼아 급급히 진력하여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고 세상에 보탬을 주어야 할 것이다. 선조가 남긴 글을 주워 모으는데 온 힘을 다하는 것을 선조를 현창(顯彰)하는 능사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면 앞에서는 무동이 충장공을 계승하였고, 뒤에서는 그대가 두 조상을 이어받아서, 대대로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선열을 빛나게 함이 될 것이니, 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시경》에 이르기를, '네 조상을 생각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 지어다.'150)라고 했고, 또 '효자의 효 다함이 없으니, 길이 너희에게 복이 내리리라.'151)라고 했다. 그대는 힘쓸지어다. 祖忠壯公而不愧爲肖孫者, 茂東鄭公諱天卿, 其人也。 噫! 光陽之禍、錦城之義, 其忠, 一也。 愛日之扁、養志之誠, 其孝, 一也。 三公之業、二縣之績, 其政, 一也。 祖而裕孫, 孫而繼祖, 一祠同享, 輝光今古。 猗歟, 休哉! 後孫憲泰示以茂東實紀, 要余一言。 余謂公之繩祖武而著懿蹟者, 固卓乎難及, 然究不出倫常之外矣。 今吾子從事乎聖人之學, 聖人之學盡人倫是已。 迨此倫常壞盡之日, 吾子宜於應細酬大、居常處變, 汲汲然惟倫常之是務是盡, 有以立身而裨世, 勿以極力於攟摭遺集, 爲揚先之能事也。 是則茂東繼忠壯於前, 吾子紹二祖於後, 世濟其美, 有光先烈, 豈不偉哉! 詩云: 無念爾祖, 聿修厥德。 又云: 孝子不匱, 永錫爾類, 吾子勖哉。 정분(鄭苯) 1382~1454, 본관은 진주,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이고, 시호가 충장(忠莊)이다. 단종 2년의 계유정난 때 우의정이었던 그는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1838년(헌종4)에 그를 배향한 진주 도동서원(道洞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천경(鄭天卿) 1547~1600, 본관은 진주, 자는 국좌(國佐), 호는 무동(茂東)이다. 임진왜란 때 동생 정원경(鄭元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어가를 호종하였다. 광양(光陽)의 화 단종 2년의 계유정난 때 우의정 정분이 광양에서 죽임을 당했다. 금성(錦城)의 의리 임진왜란 때 정천경이 동생 정원경과 의병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듯하다. 두 현 정천경은 정산(定山)과 전의(全義)의 현감을 하였다. 네 조상……닦을 지어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잘 닦으라는 의미로서, 《시경》〈문왕(文王)〉편의 구절을 인용하였다.[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 효자의……내리리라 《시경》〈기취(旣醉)〉의 구절을 인용하였다.[孝子不匱, 永錫爾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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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실기 발문 【병술년(1946)】 墨巖實紀跋 【丙戌】 묵암 이문평(墨巖李文平)143)선생은 정릉(靖陵 중종) 때의 명신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제자로서 무오사화에 걸려들었는데 그 유배된 곳에서 풍도와 절조가 숭앙을 받았고, 정암(靜菴 조광조)과 제현들이 기묘사화 때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공정한 마음으로 신원(伸寃)을 위해 애썼다. 그리하여 상공 청음(淸陰 김상헌)은 그를 '원우(元祐) 시대의 온전한 사람'144)이라고 칭송했고, 큰 어르신 우암(尤庵 송시열)께서는 '도량 크고 넓어 포용을 잘하고, 정성을 다하여 사기(士氣)를 세웠다.'고 찬양했으며, 유현(儒賢) 전재(全齋 任憲晦)는 '공평한 군자'라고 인정했으니, 모두 다 적확한 논의들이다.후학이 이에 대해 무엇을 쓸데없이 더 보태랴. 다만 여러 차례 전쟁을 겪은 탓에 저술들이 흩어지고 없어져 그 갖가지 아름답고 풍부한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매우 한스럽다. 하지만 그 세상에 드러난 위대한 업적과 조정에 가득 전하는 공정한 창언(昌言), 이 모두가 선생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것이니, 또 마음 아파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해지고 잘려나간 글들이나마 전해진 것이 그런대로 날개깃 하나로 온전한 봉새를 알아보기에 충분한 것과 같다. 비석과 묘지(墓誌)에 새겨진 찬사, 국사와 야사에서 논급하고 찬탄한 도의와 풍격들을 크고 작음과 시작 종말을 가림 없이 모두 다 수집하였다. 이렇게 전래되고 수집된 것을 모아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한 부의 실기(實紀)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실기의 작성은 선생의 후손 이봉상(李鳳祥)이 시작하였고, 이창식(李昌植)의 증수(增修)를 거쳤는데,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했다. 이제 14세손 이교환(李敎煥)이 혼자 수고한 끝에 비로소 판각하고 널리 배포하려 하면서, 그 족인 이희준(李熙俊)을 시켜 내게 말 한 마디를 청하였다. 나는 선생의 풍도를 들은 것이 적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그 덕을 상세하게 알았고, 또 말세에 보기 드문 이교환의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겨, 기꺼이 글을 써 책 끝에 붙인다. 墨巖李文平先生, 靖陵名臣也。 罹畢齋師門戊午之禍, 而風節高於竄謫, 見靜菴諸賢己卯之敗, 而心事公於伸救, 是以淸陰相公稱之以元祐完人。 尤菴大老, 贊之以休休容物, 懇懇扶陽。 全齋儒賢許之以公平君子, 皆確論也。 後學於此又何贅焉? 惟是累經兵燹, 著述蕩逸, 無以見宗廟百官之美富。 雖若可恨, 然偉業著世, 昌言滿朝者, 莫非文章之發見, 亦何傷也? 而又爛簡斷篇之所傳, 猶足以見一羽而識全鳳。 顯刻幽銘之所揄揚, 國乘野史之所論贊行誼風旨, 鉅細始終無不畢擧, 輯此所傳所徵而合編, 則所謂實紀一部者, 是也。 實紀之成, 始於先生□世孫鳳祥, 增修於□世孫昌植, 而久未刊行。 今十四世孫敎煥獨自賢勞, 始付剞劂而廣布, 屬其族熙俊, 請余一言。 余少聞先生之風, 而今幸知德之詳, 重嘉敎煥慕先之罕覯於叔季也, 樂爲之書卷尾。 이계맹(李繼孟) 1458-1523.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ㆍ묵암(墨巖). 시호 문평(文平)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19년 기묘사화 후에 찬성(贊成)의 자리에 올랐으나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물러났다. 《中宗實錄 18年 2月 28日》 《燃藜室記述 卷8 乙卯黨籍》 원우(元祐)……사람 심한 당쟁 속에서도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원우는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인데, 이 때 사마광(司馬光)ㆍ소식(蘇軾)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왕안석(王安石)ㆍ채경(蔡京) 등의 신법당(新法黨)이 심하게 대립하여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 여기서는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勳舊派)의 대립으로 발생한 사화들을 말하고 있는데, 김상헌은 이계맹 신도비명에 '여러 차례 변고를 겪으면서도 평소의 지조를 굳게 지키어 끝내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았다. 공은 바로 원우(元祐) 시대의 온전한 사람이다.[累更變, 堅持素,終不失令, 公豈非元祐之完人也。]'라고 썼다.《淸陰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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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139) 발문 【간재선생을 대신하여 지음. 경신년(1920)】 沙溪全書跋 【代艮齋先生作 庚申】 우리나라에 도학이 밝은 것은 그 공로가 성현을 잇고 후학을 연 현인들에게 있는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어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위로 석담(石潭 율곡)을 이어 받아 아래로 화양(華陽 송시열)을 열며 스승이 짓고 제자가 서술하였는데, 도가 크고 근심이 없었던 이는 오직 사계 김장생(金長生)140) 선생이다.겸손하고 돈후하며 바르고 실다운 자품(資品), 만물을 살리는 봄과 만물을 싣는 대지의 덕, 전례와 정학의 가르침 등은 참으로 백세가 지나고 만대를 기다려도 덮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주장[立言]과 가르침[垂訓]을 적은 원고 외에도 또 책을 이룬 것이 무릇 아홉 종류인데 세상에 유행한 지 오래되었다. 그 사이 후손 김 아무개가 이 아홉을 하나로 합해 전부를 중간(重刊)하였다. 이는 대개 판본이 닳아 읽기 어려운 것을 마음 아파하여, 학자들이 통틀어 열람하기에 편하게 한 것이다. 책이 이루어지자 이름을 전서(全書)라 하고 내게 발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내가 이 책을 보니 경설(經說)이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론(禮論)이다. 삼가 생각해보면, 예는 사람 몸의 바탕이고 나라를 지탱하는 동량이니, 뼈대가 꺾어지면 죽고, 기둥이 부러지면 무너지는 것은 필연의 이치다. 이것이 선생께서 특히 예교를 중하게 여기신 까닭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상하가 오직 선생의 예교를 강구(講究)하고 실천했더라면, 오늘날 같은 풍천(風泉)의141) 눈물을 흘리고 금수(禽獸)를 개탄할 일이 있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이러한 때를 만나 선생의 책이 중간되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바라는 바는, 박(剝)이 극에 이르면 다시 복(復)이 되고142) 어지러움[亂]이 극에 달하면 다시 다스려지니[治], 장차 선생의 가르침이 세상에 다시 밝혀져서 인륜의 기강이 서고 국가의 천명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나아가 그 덕과 그 학문을 지니고 선생을 계승할 사람이 나타나 사도(斯道)의 명맥 한 줄기가 길이 땅에 안 떨어지게 해주는 것이다.나는 김씨의 이번 일로써 천운 회복의 개시를 짐작하며 세도(世道)를 위해 참으로 깊이 기뻐한다. 출간하는 일을 돕는 것은 무거운 책임인데 내가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다만 느끼는 바가 있어 참람됨을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이 글을 썼다. 我東之明道學, 功存繼開之賢, 固前後繼作也。 而承石潭下而啓華陽, 師作弟述, 道大而無憂者, 其惟沙溪金先生乎! 謙厚正實之資, 春生地負之德, 典禮正學之敎, 洵百世以俟萬代無弊也。 其立言垂訓原稿外, 又有成書凡九種而見行者久矣。 閒者, 後孫某某乃合九爲一成, 全部而重刊之。 蓋病其板刓難讀, 且便學者通覽也。 書成, 名之以全書, 徵跋於余。 余觀是書, 經說居四之一外皆禮論。 竊惟禮者人身之質, 幹國家之棟樑, 幹摧則亡, 棟折則覆, 理之必然。 此, 先生所以尤重禮敎者也。 早使我邦上下, 惟先生禮敎之是講是踐, 豈有今日之泣風泉而慨翔走也乎? 吁其悲夫! 于時而乃得先生書之重刊, 夫豈偶然哉! 意者剝極而復, 亂極而治, 將見先生之敎復明於世, 人紀以立, 邦命復續, 又進以有之德之學, 繼先生而作者, 俾斯道一脈永不墜地也歟! 吾以金氏此擧卜天返之權輿, 而爲世道幸者深矣。 相役重任也, 余何敢? 特有所感者存, 不覺僭越, 而爲之書如此云爾。 사계전서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의 문집은 3종이 있다. 1687년의 정묘운각본(丁卯芸閣本) 14권 6책, 1792년의 임자개각본(壬子改刻本) 13권 5책, 1922년 임술신간본(壬戌新刊本,) 51권 24책이다. 이 발문은 사계전서를 간행하기 위한 글로서 1920년에 지어졌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서울 출신이다. 김집(金集)의 아버지이고, 송익필(宋翼弼)의 제자이며, 그의 문인으로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윤순거(尹舜擧)·최명길(崔鳴吉) 등 당대 명사들이 많았다. 풍천(風泉)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의 편명을 줄여서 지칭하는 말이다. 모두 주나라 왕실이 점점 쇠약해져 망하는 것에 대해 개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박(剝)……복(復)이 되고 박(剝)은 음도(陰道)가 극성한 때로서 '침삭(侵削), 상해(傷害), 탈락(脫落), 소진(消盡)'을 말하고, 복(復)은 양(陽) 하나가 다시 생겨나는 때로서 '회복(回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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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집 발문 【을축년(1925)】 白水集跋 【乙丑】 내가 일찌기 옛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백수 양응수(白水楊應秀)158) 선생이 산중에서 고고하게 사는 고을의 어진 선비라고 하였다. 그가 남긴 글을 얻어 읽어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신유년(1921) 가을 양병회(楊秉晦)군이 선생의 유고 일부를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선조의 문집을 서둘러 간행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일곱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문장 교정의 일을 구산선생(田愚)께 찾아가 부탁하였더니, 다시 어르신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잘 생각해 주십시오." 나는 학식이 보잘 것 없어 진실로 이 일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구산선생님의 무거운 명이 있었고 또 그 글을 보게 된 것이 기뻤다. 그래서 허락을 해놓고는 시험 삼아 손대며 끝마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을축년(1925) 봄 양군이 다시 와 독촉했고, 나는 이에 삼가는 마음으로 매우 힘써 진행하였다. 그리고 교정의 일을 마친 후 양군(楊君)의 요청에 따라, 외람되이 책 말미의 발문(跋文) 한 말씀을 덧붙인다.옛날에 호걸인 선비가 자신을 위한[爲己] 학문을 하였다 했는데, 나는 선생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널리 배우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되돌아 요약하고자 함이요, 도학에 깊이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터득하기 위함이니, 이것은 맹자의 가르침이 아닌가?세상의 학문 높은 명문가를 보면 어떤 이는 지식과 정보가 풍부하고 표현이 휘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이 부시고 귀가 울리게 하는데, 그것이 마치 페르시아의 보석이 눈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아, 실제의 쓸모를 찾아보면 보이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남이 한 말만 믿고 진부한 옛 것을 답습하면서 자신은 옛 사람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킨다고 하는데, 자신의 마음에 돌이켜 증험할 줄은 전혀 모르고 거의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전하기만 하기도 한다.선생의 학문은 이와 달랐다. 경전,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며 그 예악과 명칭과 사물을 분명하게 파악했고, 그 요체로서는 마음의 성품과 신묘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래서 많이 기억하고 글을 꾸미는 것까지는 미칠 겨를이 없었다. 선생이 궁구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궁극의 도리였는데, 반드시 마음으로 깨달아 신묘하게 이해하기를 기약하였다. 따라서 만약 의심을 아직 털어내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이 옛 성현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맹자가 말한바, 돌이켜 요약하며 스스로 터득하려 한다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글과 말을 숭상하는 풍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호걸이 아니면 할 수 있을까? 되돌아 요약하고 스스로 터득하고자 하면 이것 또한 자기를 위함[爲己]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 지닌 바가 이와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행실은 법도에 충실하고 덕은 원근 모두에게 두터웠으며, 마침내는 언덕의 학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으니, 아아, 탁월하도다!나의 어리석고 비루함으로는 선생이 돌이켜 요약하고 스스로 터득한 바의 미묘한 결론은 실로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재 유언집(大齋兪彦鏶)159)이 지은 상덕문(狀德文 行狀)을 후세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다 참고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내 일은, 함부로 첨삭은 않고 중복된 것만 빼내고 오자를 바로잡는 등으로써 양군의 성의에 부응한 것 뿐이다. 오호라! 이 일은 구산(臼山) 선생님이 명하신 바인데 어느새 여러 해가 흘렀다. 멀리 계화도(繼華島)를 바라보지만, 산은 이미 무너지고 말았다.160) 일은 비록 마쳤으나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을 분은 안 계시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양군이 가는 돌아가는 편에 크게 한숨 쉬며 이렇게 써 드린다. 竊嘗聞於尙論之家, 知白水楊先生之爲泉上高足、域中賢儒, 而恨未得其遺文而讀之也。 辛酉秋, 楊君秉晦以先生遺稿一部示余曰: 先集之未遑印布, 七世于玆, 校讐之任往請于臼山先生。 先生命託之吾子, 吾子其念之。 余惟學淺識莽, 固不敢與此者, 但重違師命, 且喜得見其書也。 旣諾之, 而試手未了者, 久矣。 乙丑春, 楊君復來促之。 余乃是勤是務之惟謹, 業旣卒, 以楊君請, 竊附一言于卷末曰: 古有豪傑之士爲己之學, 吾於先生見之矣。 夫博學詳說, 將以反約, 深造以道, 欲其自得, 非孟氏之訓乎? 觀夫世之學問名家者, 或博記聞富, 文辭張皇, 震耀於人, 如波斯之物, 無非悅目之珍, 而求其實用則無有也。 或憑口藉耳, 蹈故襲陳, 自謂謹守前言, 而全昧乎反驗身心, 幾乎鸚鵡之傳語者有之矣。 惟先生之學異乎是, 循環乎經傳子史, 講明乎禮樂名物, 而求其要則心性神理之奧, 故强記麗文之不暇及也。 所窮者, 天人之極致, 而必期心契而神解, 故苟其疑之未祛, 有不以前賢而强從者。 孟氏所謂反之約而欲自得者, 非此乎? 不囿乎崇文尙口之風, 非豪傑而能之乎? 欲其反約而自得, 斯不亦爲己乎? 其存乎內者如此, 故著乎外者, 行敦乎規矩, 德孚乎遠近, 竟至皐鶴之聞天, 猗歟卓哉! 顧余昧陋, 其於反約自得微妙去處, 實不得以揣測, 則大齋兪公所撰狀德文, 在後之人自當就而考焉。 故今日之役不容妄有所存刪, 但去其重複, 正其帝虎, 以副楊君之勤意爾。 嗚呼! 是役也, 臼翁所命, 而倏忽之間日月幾何? 粤瞻華山, 山旣頹矣。 役雖訖而就質無所, 寧不慨傷! 於楊君行也, 太息書此而歸之。 양응수(楊應秀) 1700(숙종26)~1767(영조43),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이며, 순창 출신이다. 유언집(兪彦鏶) 1714~1783,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정(士精), 호는 대재(大齋)이다.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경연관과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하였다. 계화도(繼華島)……무너졌다 김택술의 스승인 전우(田愚: 호 臼山, 艮齋)는 1912년에 부안 계화도에 들어가 강학하다가 1922년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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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실기 발문 【병인년(1926)】 新齋實紀跋 【丙寅】 군자의 언행은 세상의 법칙이 될 수 있다. 그런즉 세상 사람들이 군자의 실기(實紀)를 만들고 그것을 가져다가 한 나라 한 고을의 법칙으로 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저 신재(新齋) 채(蔡)공의 어짐과 효성은 능히 하늘을 감동시켜 어머니의 먼 눈을 뜨게 하였고, 그것을 남들이 배워 따라했고 마을에 전해져 칭송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관이 기록하고 방백이 추천하여, 정려와 증직의 포상이 조정에서 내리고 사림이 제향하며 존숭하였다. 그 훌륭한 자취와 아름다운 명성은 이제 고을의 법이 되었다. 그런데 채동필(蔡東必) 군이 실기의 자료를 편집하는 것은 선조를 위하는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요순(堯舜) 같은 성인도 우사(虞史) 두 책154)이 있은 다음에야 요(堯)임금의 공경하고 밝으며 공평하고 문채로움, 그리고 순(舜)임금의 깊고 지혜로우며 신중하고 아름다움과 같은 허다한 덕업(德業)이 오래도록 잘 드러났다. 이 두 책은 바로 요와 순의 실기이다. 무릇 실기가 비록 군자의 덕을 실제 그대로 싣지 못하더라도, 그 다행스러운 바는 후세 사람이 기리며 사모하는 것이다. 동필 군이 흩어진 원고와 스승님의 가르침 그리고 제가의 칭송의 글을 모아 《신재실기(新齋實紀)》를 만든 것은 장래 선조의 유업을 본받으려는 후손들로 하여금 더욱 밝히 알고 더욱 기리도록 할 것이니 이를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공이 진리를 깨달은 나머지 얻은 바의 주옥같은 말씀들이 전해지지 않고, 행실과 업적을 살펴보기 어려운 것은 애석하다. 비록 그러하나 공이 농암(礱巖)155)을 사사하고 도암(陶菴)156)과 교분을 맺어 학문의 바른 연원과 도의의 큰 보탬을 얻었다. 그리고 공경(恭敬)을 주로 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바로 유학의 근원인데, 이를 또 농암에게 배우셨다.대체로 옛 현자들은 일이관지(一以貫之) 및 성(性)ㆍ천도(天道)에 관한 말157)을 듣고서 증자(曾子)와 자공(子貢)의 학문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대의 고금과 지위의 고하에 차이가 있지만, 바로 이 경(敬)과 지(知)의 전수에 의해서 다른 말 필요 없이 공의 학문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여기에 쓴다. 君子言行可以爲天下法則, 則天下人爲其實紀, 降此而法則乎一國一鄕者亦然。 若新齋蔡公之賢孝能感天而致母瞖之明, 學及乎人而有傳里之稱。 故史氏錄之, 方伯薦之○旌贈褒朝家, 祠祝崇士林, 懿蹟徽韻至今爲鄕邦法。 東必君之捃摭實紀爲爲先能事。 不已勤乎? 未然也。 夫以堯舜之聖, 猶待虞史二典之述, 然後欽明平章、濬哲愼徽, 許多德業著詳乎萬世。 玆二典者, 卽堯舜之實紀。 蓋紀雖無與君子實德, 所幸在後人誦慕。 君之裒稡逸稿、師訓及諸家贊述, 合成新齋實紀, 俾來許箕裘模範者, 得以愈詳愈慕, 烏可已哉! 惟其粹言得於契悟之餘者無傳, 難以考行業之有自惜哉! 雖然公師事礱巖, 託契陶菴, 旣得淵源之正, 道義之益。 至若主敬窮理, 乃斯學源頭, 而又與聞於礱翁。 蓋昔賢以一貫、性、道之聞謂見曾貢之學, 則雖世有古今, 地殊高下, 卽此敬知之傳授, 有不待言而知公之學者, 是可以書。 우사(虞史) 두 책 우(虞)는 순(舜)임금의 나라를 말하며, 두 책은 《서경》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가리킨다. 농암(礱巖) 농암은 김택삼(金宅三 1649~1703)의 호이며, 김택술의 방계 육대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실제로 나아간 적은 없다. 숙종 때 세워진 부안의 '유천서원' 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농암유고』가 있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호이다. 이재는 본관이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이유겸(李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李䎘)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만창(李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관한 말 공자가 "증삼(曾參)아 나의 도(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 하자 증삼이 "예(알겠습니다)!" 하고[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論語.里仁》], 또 자공(子貢)의 물음에도 일이관지라고 대답한 것[予, 一以貫之。《論語.衛靈公》], 그리고 자공(子貢)이 "선생님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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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季弟汝安 丁巳 이번 행차에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혹시라도 내가 스승께 힘써 말하지 않았다고 여겨 마음에 겸연쩍은 것이 있는가?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이런 마음이 있다면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맹자께서 말하기를, "돌아가 구하면 여러 스승이 있다." 하였고,50) ?예기?에 말하기를, "삼왕(三王)51)과 사대(四代)52)는 오직 스승에 말미암았다." 하였다.53) 무릇 성사(性師)와 경사(經師)가 스승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고금의 사람들이 반드시 인사(人師)를 찾아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성(性)과 리(理)는 은미하여 보기 어렵고 성인의 말은 오묘하여 알기 어려워, 자연히 나면서부터 알아 마음으로 깨닫고 몸소 터득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귀를 잡고 입으로 전수해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전해진 묘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사(人師)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인사(人師)가 없어서는 안 됨을 알았다면, 그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여 명단에 들고[入案], 호칭을 세워 사제의 관계를 맺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그렇지만 스승이 가르치는 바와 제자가 배우는 바는 곧 도(道)와 의(義)에 있지 호칭에 있지 않으니, 그 안과 바깥, 이름과 실제[文實]의 완급을 또한 알 수 있다. 무릇 70명의 제자 무리 중에 안자(顏子)와 증자(曾子)가 가장 어렸고, 그들이 공자를 스승이라 부른 것은 의당 자로(子路)와 자공(子貢)보다 늦었지만 유독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맹자는 친히 학업을 전수 받지 않았지만 끝내 그 도를 전해 받았고, 유원성(劉元城)54)은 온공(溫公)55)에게 5일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종신토록 쓰임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도의 전수를 얻음은 공력을 들이는 기민함과 독실함에 관계된 것이지, 스승이라 일컬음이 빠른 지 늦은 지와 관계가 없는 것 또한 이미 분명하다.나의 이 말은 비록 어폐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실지 수업을 받지 않으면서 외람되이 아무개의 문인이라고 일컫는 자를 경계하기에는 또한 매우 적절하지 않겠는가? 이번 행차가 당초 계획과 어긋난 것은 목전에 놓인 시의(時義)에 스스로 헤아리는 바가 있어 그런 것이지, 오로지 이를 징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의 이치가 실로 이와 같은 점이 있다. 이제 네가 간옹(艮翁)에 대하여 비록 예물을 드리고 사제 관계를 맺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맹자의 몸소 가르침을 받지 않음과 원성(元城)의 5일의 가르침에 견주면, '넉넉히 남음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원컨대 삼석(三席)56)에서 들은 것을 가지고 정밀하게 궁구하고 힘써 행하되 얻지 못하더라도 그만두지 말고, 평상시 말과 행동은 들은 바 뜻에 부합되게 하여라. 그러면 설령 당시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였더라도 후세에 도를 전해 받은 제자가 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예물을 바치고 사제 관계를 맺기를 다음번을 기다려 반드시 실행하기로 한 자임에랴? 만약 이번 행차가 헛되이 돌아왔다고 하여 스스로 조금이라도 그만두고 물러나려는 생각이 있다면, 결코 도를 구하고 실제에 힘쓰는 본뜻이 아니다. 혹시라도 남에게 내보이려고 명성 있는 분을 가까이하려는 사사로운 뜻이 개입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今行, 未遂汝願而歸, 豈或意吾不力言於函席, 而有歉然于中者乎? 苟無是心則已, 如不免有此, 此有不然者存也.孟子曰:"歸而求之, 有餘師." 記曰:"三王四代, 惟其師." 夫性師、經師, 罔非師也.而古今人之必求人師而學之者, 何也? 誠以性理微而難見, 聖言奧而難知, 自非生知之心悟而體得者, 必待耳提口授而後, 得相傳之妙.然則其不可無人師也, 審矣.旣知人師之不可無, 則其行脩入案、立號定倫, 又不容已也.然師之所以敎、弟子之所以學, 乃在於道義而不在稱號, 則其內外文實之緩急, 又可知已.夫七十之列, 顔、曾最少, 其稱師, 宜由、賜之後, 而獨得其宗.子思之門, 孟子不親受業, 而卒傳其道, 劉元城得溫公五日敎, 而爲終身用.由此觀之, 得道之傳, 係乎用功之敏篤, 無係乎稱師之早晩也, 亦已審矣.吾之此言, 雖若有弊, 其爲無實業而猥稱某門人者之戒, 則不亦切乎? 若乃今行之違初料, 以目下時義, 自有商度者而然, 非爲專懲乎此戒也.然事理實有如此者.今汝於艮翁, 雖未及納贄定倫, 視孟子之不親炙、元城之五日敎, 則可謂優餘矣.願將所聞於三席者, 精究力行, 不得不措, 要使日用云爲, 符合所聞之旨, 則假使未得稱師於當日, 不害爲後世傳道之弟子.況納贄定倫, 容俟後回而必行者乎? 若因今行之虛歸, 有自小隳退之念, 則決非求道務實之本旨, 或涉爲人近名之私意, 天必厭之. 맹자께서……하였고 《맹자》 〈고자 하〉에 보인다. 전국 시대 조군(曹君)의 아우인 조교(曹交)가 일찍이 맹자의 문하에 들어가서 요순(堯舜)의 도를 배우겠다고 청한 데 대하여, 맹자가 이르기를 "대저 도는 큰길과 같은 것이니,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구하지 않은 게 병통일 뿐이니, 그대가 집에 돌아가서 구한다면 배울 만한 스승이 많을 것이다.[夫道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에 대해서 주희는, "배울 만한 스승이 많다는 것은 곧 집에 돌아가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의 일에서 구한다면 자기 본성의 분한 내에 오만 이치가 다 갖추어져서 처하는 곳마다 발현하여 이 모두가 스승으로 삼을 만하여 머물러서 학업을 전수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孟子集註大全》 삼왕(三王) 중국 고대(古代)의 세 임금. 즉 하 우왕(夏禹王), 은 탕왕(殷湯王), 주 문왕(周文王) 또는 무왕(武王)을 일컫는 말임. 사대(四代) 우(虞)와 하(夏)ㆍ상(商)ㆍ주(周)의 삼대(三代)를 합친 말이다. 옛……하였다 《예기》 〈학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군자는 배움에 이르기 어려움과 쉬움을 알고 그 자질의 아름다움과 나쁨을 안 뒤에 널리 가르칠 수 있으며, 널리 가르칠 수 있은 뒤에 스승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은 뒤에 장(長)이 될 수 있고, 장이 될 수 있은 뒤에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승은 그를 통해 군주가 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승을 선발하기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 기록에 '삼왕(三王)과 사대(四代)가 오직 스승에 말미암았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 然後能博喩, 能博喩然後能爲師, 能爲師然後能爲長, 能爲長然後能爲君.故師也者, 所以學爲君也.是故擇師不可不愼也.《記》曰"三王四代唯其師", 其此之謂乎!]" 유원성(劉元城) 북송의 명신인 유안세(劉安世, 1048~1125)로, 그가 원성 사람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인데, 철종(哲宗)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으나 간신인 장돈(章惇)에 의해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등 멀고 험악한 곳으로 일곱 번이나 유배 가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으니, 소식(蘇軾)은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온공(溫公) 송나라의 명재상 사마광(司馬光, 1019~1086)으로,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수(迂叟),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속수선생(涑水先生)으로 불린다. 사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으로 부른다. 저서로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 있다. 삼석(三席)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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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箕斗 年七十五戊辰 本星州 父 學生 有源 祖 學生 國鎭 曾祖 學生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李氏 齡七十一壬申 籍全義 父 學生 承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圭容 年三十四己酉 婦 趙氏 齡三十九甲辰 籍漢陽 子 幼學 瑀容 年二十五戊午 婦 羅氏 齡二十九甲寅 籍錦城賤口秩 婢 㪲德 年三十五 分心 年二十一 奴 富文 年十五壬午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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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유학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75세) 고문서-증빙류-호적 壬午 李箕斗 壬午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82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82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은 생략하고 통호수는 붉은색으로 8통 4호라 썼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75세(무진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유원, 조가 국진, 증조가 규명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71세(임신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승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장자가 규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34세(기유생)이다. 맏며느리는 조씨인데, 나이가 39세(갑진생)이며 본관이 한양이다. 차자는 우용인데, 직역이 유학이며 나이가 25세(무오생)이다. 둘째며느리는 나씨인데, 나이가 29세(갑인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천구질에는 비 2명과 노 1명이 기재되어 있다. 비는 둑덕(35세)과 분심(21세)이며, 노는 부문(15세)이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는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거꾸로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하단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썼으며 그 위에 관인을 찍었다. 끝의 임오식(壬午式)은 임오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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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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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箕斗 年七十二戊辰 本星州 父 學生 有源 祖 學生 國鎭 曾祖 學生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李氏 齡六十八壬申 籍全義 父 學生 承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圭容 年三十一己酉 婦 趙氏 齡三十六甲辰 籍漢陽賤口秩 婢 㪲德 年三十二己卯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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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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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강당 제정축문【스승의 명을 받들어 지음. 을묘년(1915)】 華島講堂祭井祝文【奉師命作 乙卯】 드높고 드높은 산악이 維嶽巍巍이 땅의 진산285)이 되고 作鎭玆土그 빛나고 빛나는 신령이 厥靈赫赫뭇 생령들에게 은택을 내리는지라 惠澤羣生아무개 등이 某等이 곳에 온 뒤로 入此以來모두 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咸蒙神賜다만 이 옛 우물만이 惟此舊井혹 그 물줄기가 짧아지므로 或短其流모두 우려스럽다고들 하니 僉曰可憂어찌 깊이 팔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盍思深鑿가래질하기도 하고 삽질을 하기도 하여 載鍬載鍤그 근원을 파내자 用濬厥源콸콸 마침내 흘러나와 混混乃來아무리 마셔도 다하지 않는지라 飮之不竭관리들286)에겐 기쁨이 넘치고 喜動冠珮숲 골짝엔 광채가 더해졌습니다 光增林壑오직 신명의 은총이니 維神之恩어찌 감히 잊고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其敢忘忽마침내 길한 날짜를 정하여 肆卜吉日정결한 술밥을 이에 베푸노니 精饎斯陳신께서는 밝게 강림하시어 神其昭臨부디 흠향하고 돌아보아 庶幾歆顧상서를 불러오고 환란은 막아서 致祥弛患무궁히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惠我無疆 維嶽巍巍, 作鎭玆土.厥靈赫赫, 惠澤羣生.某等, 入此以來, 咸蒙神賜, 惟此舊井.或短其流, 僉曰可憂, 盍思深鑿.載鍬載鍤, 用濬厥源, 混混乃來, 飮之不竭.喜動冠珮, 光增林壑.維神之恩, 其敢忘忽.肆卜吉日, 精饎斯陳.神其昭臨, 庶幾歆顧, 致祥弛患, 惠我無疆. 진산(鎭山) 마을이나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을 말하는데, 주로 고을의 뒤쪽에 위치한다. 관리들 원문의 관패(冠佩)는 관리들이 모자와 몸에 차는 장신구로, 보통 관리들의 복장을 이른다. 여기서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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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師墓文 유세차 을축년 7월 을해가 초하루인 2월 병자일에 문인 김택술은 다가오는 두 번째 휘신(諱辰)246)에 감회가 이는데 끝이 없는 재앙의 변고를 당하여 삼가 글을 짓고 제수를 갖춰 간재 선생의 묘소에 고합니다."옛날 공자는 주나라가 쇠퇴함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고, 주자는 송나라 말기에 태어나 《강목(綱目)》을 지었으니, 모두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큰 경계를 엄격히 한 것입니다. 오호라! 우리 선생께서 도체의 근원에 통철하고 성(性)을 높이는 학문을 밝혀서 영원히 후대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은 천지의 대경(大經)과 사람의 대륜(大倫)이 아님이 없는데, 맞닥뜨린 때가 주나라나 송나라의 말세보다 심하니,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엄격한 경계는 선사(先師)의 거질의 원고 가운데 더욱 제일가는 의리입니다. 선사께서는 머나먼 바다 외로운 섬에서 서공(徐公)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247) 노중련(魯仲連)처럼 치욕을 품고 있었는데,248) 임금의 나라가 패망함에 이르자 피눈물을 흘리며 흰 상복을 입고서 생애를 마쳤으니, 또한 만년(晩年)에 대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선생의 도의와 행한 업적은 한말의 공자와 주자로, 백 대가 지나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249)어찌하여 천하는 오랫동안 사문(斯文)에 곤궁과 재액을 낳아서 불행하게도 패륜의 도적 오진영(吳震泳)250)이 문하에서 배출되어 선생의 의로운 경계를 파괴하여 무너뜨리고 선생의 뜻과 절개를 어둡게 덮어버립니까. 이윽고 또 다시 담장 안에서 창과 방패를 정비하고서 끝내는 오랑캐에서 손을 빌려 죽은 사람의 몸에 피를 흘리듯 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대개 그는 사려(邪戾)한 기를 모으고 교활한 본성을 품부 받은 자로 성질이 원래부터 스스로 일반적인 것에 어긋났었지만, 그러나 죄악이 커서 극에 달하기 전에는 누가 먼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약삭빠르고 방자하며 말을 잘하고 안색을 잘 꾸미며 온갖 양상으로 속여 제멋대로 술수를 부리고 사람을 현혹시키기 일을 즐겨하는 등의 폐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바로잡아주시고 채찍질 해주신 약석(藥石)을 또한 지극하게 베푸셨는데, 이른바 '이견(而見)251)은 사공(事功)을 중하게 여겨서 도의를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 선비 된 자가 아무개 궁과 통하여 아무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 '사공(事功)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식견이 저열한 어떤 사람이 나252)에게 다공(茶公)253)이 머리를 깎은 복철(覆轍)254)을 실천하라고 했다.'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앞서 엄한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고 할 밖에 무엇이겠습니까.그러나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고 문사와 변론이 능숙하니 명리(名理)255)를 밝히고 외부의 모욕을 막는 것에 도움을 준 자들이 또 때때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며, 식견이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권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리와 눈, 비와 이슬이 모두 가르침이 아님이 없다는 것에 해당합니다. 마땅히 그 배척함을 두려워하여 악을 제거하고 그 권장함을 기뻐하여 더욱 노력하여서 나 자신을 성취하고 사문의 후사(後事)에 힘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나쁜 습관은 제거하기 어려워서 본래 성질이 드러나 사공을 중시하고 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으니 원고를 간행하는 의논을 앞서서 외쳤습니다. 남을 이기기 좋아하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사사로움으로 호남 사림을 배체한 체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서울에서의 문집 인가를 도모하고 거질의 원고를 받들어 원수 놈의 관청에 바치며 책을 판매하는 도적놈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선사에게 대단히 누를 끼친 것입니다.게다가 자신의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는 사악한 생각으로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출판에 대해) 인가할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연이어 편지로 써서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업자가 스스로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일찍이 지시하셨다.'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상에 앉아 계시다가 진영에게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는 그대가 모름지기 잘 헤아려서 하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오호라! 사람을 속이는 죄도 나쁜데 더구나 스승을 속이는 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스승을 속이는 것은 큰 죄인데, 더구나 공자와 주자를 이어 《춘추》의 경계를 엄하게 지키는 큰 스승을, 대의를 파괴하는 일로서 속인다면 그 죄는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문하의 제자의 입장해서 해야 할 도리는 마땅히 매가 참새를 쫓듯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말고 담장에서 내쫓고 제자의 문적에서 삭제하여야 합니다.선사께서 평소에 동문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를256) 진심으로 바라며 선비들의 싸움을 마음 아파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니, 마땅히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수많은 편지에서 언급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믿게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위로 고하고 아래로 사죄하게끔 하는 것을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기하여 음험하다고 저를 지목하고 대중을 홀려서 미치게 만든다고 매도하면서, 오만하게도 자신은 옳다고 하여 일찍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놈에 청원하여 문집을 간행, 배포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니 삼가 절대로 따르지 말라.'257)고 한 편지가 나오자, 스승을 속인 죄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강경하게 서서 '죽음에 이르러도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니, 「헤아려서 하라」,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는 등의 말은 확실하다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에 오진영의 무리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아무개 공은 우리 선사께서 의발을 전하였으니,258) 어찌 속이는 말을 하겠는가. 「홀로 있을 때 명하신 것」은 증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해 알겠다고 답한 것259)에 해당하다.'라고 합니다. 이에 남기신 편지는 저 한 때의 일이고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은 이 한 때의 일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며, 남기신 편지와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이 나란히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도 있으며, 남기신 편지가 위조라고 여기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그 밖의 사람들은 이에 '오 아무개 옹은 고제(高祭)라. 스승의 마음을 깊이 아는 자인데 그 말이 어찌 속이는 데 이르겠는가. 아마도 아무개 옹260)께서 이런 의도를 지니고 이런 지시를 하셨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앉아서 비웃고 서서 팔뚝을 휘두르며 작게는 기롱하고 크게는 욕을 합니다. '이런 스승이 있으니 이런 제자가 있도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으니, 귀로 차마 듣지 못하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오진영이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이르는 자들은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편당을 지어 아부하며 나쁜 놈끼리 서로 도와 함께 나쁜 짓을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며, 선사께서 평소 오진영을 배척하는 엄한 가르침과 제자들이 편벽되고 잡박하여 의발을 전할 자를 고르지 못하겠다는 정론에 대단히 배치됩니다.그러나 선사께서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했던 뜻으로 헤아려보면 '오진영이 본래 고족(高足)의 반열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편벽된 주장입니다. 다만 그가 고족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의심을 불러들임이 더욱 심한데, 우암이 생각한 고제(高弟)로써 증명한다면,261) 끝내 그 일에 대해 분명할 수 없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까울 것입니다.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득 찰대로 찼는데,262) 또 다시 감히 거질의 원고에 나아가 자신이 직접 나눠서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정선(精選)한 한 부를 마침내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263)을 시켜 인허를 구걸하여 받고 인쇄하여 판매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말로 속이는 것이 지금 일로서 증명되었으며 앞에서 붓과 혀로 가르침을 깨뜨린 것을 지금 몸으로 직접 부숴버린 것이니, 이 얼마나 잔혹합니까.허가를 받아 인쇄한 견본에 보태고 빼는 것과 고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였습니다. 시의(時義)에 관련된 모든 것은 구절마다 삭제한 것은 오진영이며, 저작자라고 크게 쓰인 이름은 강태걸입니다. 이와 같으니 오진영의 문집, 강태걸의 문집이라고 해도 옳을 것인데 오히려 억지로 명명하여 《간옹고》라고 하였으니, 참람하게 분수와 의리를 범하며 이름과 실제가 서로 어긋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선생의 썩은 뼈는 아는 것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두려워할 줄 안다.'고 하겠습니까.대개 오진영이 건드린 선생의 순정한 도와 광명한 의리는 곳곳이 깨지고 어두워졌는데, 의리가 어두워지고 도가 깨졌으니 선생은 이제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공자와 주자 이후로 《춘추》의 의리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게 되어 천지는 온통 암흑이 되어 오랫동안 어둡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속인 것이 끝이 없어서 이미 너무나도 원통한데, 세상 재앙의 참혹함은 또한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윤리가 사라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변고를 보고도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문하에 사람이 없으며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 23년이 됩니다. 자질이 얄팍하고 재주가 적어서 비록 가르침의 만 분의 일도 받들어 새기지 못하지만 그러나 기대를 받은 것은 깊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두텁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性)을 스승으로 높여 도를 지키려는 뜻에 감히 붙따라 변석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뒤따랐기에 왜놈의 인허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매하여 읽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저 강하여 대적하기 어려운 기세를 헤아려보면 외로운 군인이 깨끗이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다행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떳떳한 본성이요 막을 수 없는 것은 공론이니, 남기신 편지가 널리 퍼져서 선생의 뜻을 해와 별처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성토하는 문장이 답지하여 오진영의 죄에 대해 도끼를 함께 휘두르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함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264)능히 말을 잘하는 무리들이 이런 지경이 되면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마땅히 스스로 새로워지고 이후로는 행동을 개선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자신의 속임을 자복하고 선사의 묘소에 고하며 흉악한 붓을 거둬서 불속에 내던져서 빠른 시일 내에 인가를 받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고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세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벌이 침을 쏘아대거나 뱀이 독을 내뱉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사나워져서 허가를 받아 판매하지 못한 것을 사람이 방해하였다고 힘써 무고하여 강태걸(姜泰杰)로 하여금 이미 진천 경찰서에 고소하게 하였고 또 다시 전주 검사국에 고소하여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두 가지 법률 조항에 걸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는 것입니까.소자는 통문을 지었다는 까닭으로 더욱 저들이 이를 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을 때 '오진영은 선사의 명예를 훼손한 자이니, 명예를 훼손한 법은 오진영에게 해당한다. 인가를 받아 판매를 금지하려 한 것은 내가 우리 선사를 위해 그 무고를 분별하고 가르침을 지킨 것인데, 세상에서 선생의 책을 영업하는 것은 대단히 많거늘 어찌 반드시 선사께서 인가를 금지한 원고를 영업하는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영업을 방해한 법률은 해당되지 않으니 죽기를 맹세코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무사하게 아무런 일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봉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때때로 적용되는 법률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앞날의 재앙을 어찌 끝까지 면할 수 있겠습니까.일찍이 들으니, 스승을 섬기는 도리는 임금, 부친과 같아서 다만 그들이 계신 곳에 목숨을 바친다265)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7척의 몸으로 곤란을 당하자 안자는 오히려 목숨을 바치려 하면서 뒤따랐는데,266) 더구나 사문 만 대의 도리가 손상됨을 입었는데 소자가 어찌 감히 한번 죽는 것을 아껴서 그 무함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한문공(韓文公)이 말한 '도가 나로 말미암아 전해진다면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여한이 없다.'267)고 한 것은 바로 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인(閭人)268)이 집권하여 법을 적용함이 이치에 어긋나고 기이하니 저 자신이 미처 죽지 않았습니다만 머리를 깎이는 곤욕이 먼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 없다.'269)고 성인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 신체를 훼손당하여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였어도 또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선생께서 이에 대해 정론(定論)을 두었으니, 어찌 감히 소홀하겠습니까.옛 사람이 이르기를 '스승이란 인재를 양성하는 모범(틀)이다.'270)라고 하였으며, 또한 '감히 자신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271)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선생께서 줄포 경찰서의 묘적(墓籍)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오진영이 거짓으로 서명한 화(禍)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자진(自盡)할 도구를 몸에 지니고 계시면서 '모욕을 받아 죽는다면 차라리 조용히 먼저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셨으니, 소자가 현재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선다면 선생을 본받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해보면, 선생께서는 나의 충심을 헤아려서 머리를 끄덕일 것입니다. 오호라! 이전에 천 년 하고도 천 년의 시간이 있었고 이후로 만 대 하고도 만 대가 있을 것인데, 공자와 주자가 엄정하게 세운 《춘추》와 《강목》의 의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의 마음과 진영의 죄와 소자의 죽음을 귀신이 분명하게 살필 것이며 후대의 수많은 성인이 잘 알 것이니, 소자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日丙子, 門人金澤述感諱辰之載邇, 遭禍變之罔極, 謹構文具奠而告于艮齋先生之墓.曰 : "昔孔子當周衰而作《春秋》 ; 朱子生宋末而修《綱目》, 皆所以嚴君臣華夷之大防也.嗚呼! 我先生洞道體之源, 明尊性之學, 以垂敎於永世者, 無非天地之大經, 人生之大倫, 而所値之時, 有甚於周、宋之末, 則君臣華夷之嚴防, 尢爲大稿中第一義也.絶海孤島, 握徐公之髮, 抱魯連之恥, 至乎君國之破亡, 血涕縞素而終其身, 則又大義之見乎晩節者也.先生之道義行業, 殆韓末之孔、朱者, 百世而可俟也.夫何天下久生斯文窮厄, 不幸有悖賊吳震泳者, 出於門下, 先生之義防焉, 破壤之 ; 先生之志節焉, 晦昧之.旣又修戈戟于門墻, 終至於假手閭夷而伏尸流血, 嗚呼! 尙忍言哉.蓋其鍾邪戾之氣, 稟慓猾之性者, 生質元自乖常, 然罪大惡極之前, 孰得以先斷.惟是便儇挑達, 巧言令色 ; 欺詐變幻, 挾數任術, 喜事惑人之弊, 無所不至.故先生之箝錘藥石, 亦畢施備至, 至如'所謂而見, 以事功爲重, 而不計道義.' '焉有士子而可以通某宮做事某人.' '以事功見笑於人.' '識見低矮某人, 勸余復蹈茶削覆轍.'等訓, 則其斥之嚴見之先, 顧何如也.然其識解之穎悟 ; 文辯之捷給, 有可資以發名理禦外侮者, 則又時加愛重, 至以見識發揮期獎之, 眞所謂霜雪雨露, 無非敎也.宜乎懼其斥而去惡 ; 喜其獎而加勉, 有以成身, 而賴及師門之後事也.而無柰惡習難除, 本質彰露, 以重功輕道之心, 倡出認刋稿之議, 以好勝自用之私, 含7)湖無拘而圖京認, 奉大稿而納讐府, 輪8)販賊, 此已累師之大者.而又以脫罪嫁師之惡念, 公然告諸人曰 : '先師曾有認意.' 繼而筆之書曰 : '先師嘗敎業者自認, 著者無關, 不必深拘.' 又曰 :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 「世不可知, 文稿須自料量爲之.」' 嗚呼! 誣人罪也, 而况乎誣師乎.誣師, 大罪也, 而况乎繼孔、朱而嚴《春秋》之防之大宗師, 誣之以破敗大義之事, 則其罪又何如也.在門弟子道, 宜其揮墻割籍, 若鷹鸇逐雀之不暇也.念先師平日血願同門之塤篪, 心痛士類之矢石, 宜亦有所處之道.故篇篇累牘, 面面衆喩, 使之自信自服而上告下謝者, 非不勤且誠矣.彼乃目之以猜險 ; 罵之以衆狂, 傲然自是, 曾不動念.及其'請願刋布決是自辱愼勿勉從'之遺書, 出也, 知其無奈乎誣罪之莫逃, 則乃悍然立'臨死不易辭之, 誓以確「料量」、「不拘」等說.' 於是震之徒, 爭曰 : '某公, 吾師傳鉢, 豈其誣言.有以「獨命」當曾子一貫之唯者.' 有以遺書爲彼一時而獨命爲此一時者 ; 有以遺書獨命爲幷行而不悖者 ; 有指遺書爲僞造者.外之人乃曰 : '吳某某翁, 高弟.深知其師之心者, 其言豈至誣也.容有某翁之有是意是敎也.' 坐嗤立排, 小譏大罵.至有言'有是師有是弟.' 耳不忍聞 ; 口不忍道.噫! 謂'震傳鉢'者, 固出於其徒阿好黨附同惡相濟之私, 而絶背先師平日斥震之嚴訓及晩年諸子偏駁未有擬望之定論矣.然揆以先師愛重期獎之意, 則謂'震本非高足之列'者, 亦偏論也.惟其爲高足也, 故致外疑之滋甚, 而尢菴所慮以高弟而證之, 則終不可辨明者, 不幸而近之矣.罪至於此, 已極貫盈, 而又敢就大稿, 而手分之編輯, 所謂精選者一部, 竟使其徒姜泰杰, 乞出認許而印販之, 向以言誣者, 今焉實之以事矣 ; 向以筆舌破訓者, 今焉身親碎之矣, 何其酷也.至其認印見本, 則添刪改動, 恣其所欲.凡係時義, 句句拔去者, 震也, 大書其著作者氏名, 則杰也.如是則震集杰集, 斯可矣, 猶復强名之曰, 《艮翁稿》, 僭犯分義, 乖錯名實, 莫此爲甚, 豈可謂'少能知懼於先生朽骨無知之戒'者乎.蓋震泳之所觸先生純正之道光明之義, 在在破晦, 義晦而道破, 先生不得爲先生.先生不得爲先生, 則孔、朱以降, 春秋之義, 無人接續, 而天地窣窣, 其長黑矣.師誣罔極, 旣切痛寃, 世禍之酷, 亦可寒心.見此倫亡經墜之變, 而恬然視爲無事, 則是門下無人 ; 世界無人.伏念小子之出入先生之門, 爲二十有三年.質薄材短, 雖未能承服萬一之誨, 然見期則不可謂不深 ; 受恩則不可謂不厚矣.竊不自量, 敢附於尊師衛道之義, 從辨討之列, 而幷禁認販本之購讀, 料彼强亢難敵之勢, 非孤軍之所能廓然.惟幸不泯者秉彛 ; 莫遏者公論, 遺書之布 ; 先生之義, 共覩日星, 討文之到, 震泳之罪, 同揮鈇鋮, 報佛之恩, 豈敢云然.能言之徒, 其或在斯, 苟有毫分人心者, 宜思自新善後之道, 服其誣而告諸墓 ; 收凶筆而付之火, 亟罷認販之役, 屛息潛伏, 以俟幷世之裁處, 胡乃蜂螫蛇毒, 愈往愈烈, 乃以認販之未售, 爲辨9)誣人沮害, 令姜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以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 爲綱打之計.而小子則以製通之故, 尢爲彼之所甘心.頃被檢局訊質, 答謂'震是損害先師名譽者, 損名之律, 震可以當之.禁止認販, 吾爲吾師辨誣守訓, 世間營業, 不勝其多, 而豈必以先師禁認之稿爲營業物乎.妨業之律, 非所當也, 誓死不服.' 無事而出.然彼鋒益銛, 時律難測, 前頭之禍, 安得以終免.竊嘗聞事師之道, 同於君父, 惟其所在, 則致死焉.師門七尺之軀之遇難, 顔子猶必捐生而赴之, 而况師門萬世之道之被喪, 小子豈敢惜一死而不明之.韓文公所謂'使道由某而傳, 雖滅死萬萬無恨'者, 正吾心也.但今閭人執命, 用法乖異, 身未及死, 而髡役之辱先至.'士可殺不可辱.' 聖有明訓, 變形而死, 死且有辱, 先生曾有定論, 豈敢忽諸.古人云, '師者, 人之模範.' 又曰 : '不敢信己而信其師.' 昔先生之斥茁署勒籍, 處震泳冒書之禍也.恒以自盡之具隨身曰 : '與其見辱而死, 無寧從容先裁.' 小子今於死生之際, 不法先生而何以哉.伏想先生鑑我衷而首肯也.嗚呼! 前有千千年, 後有萬萬世, 孔、朱所嚴《春秋》、《綱目》之義, 終不可得以泯焉, 則先生之心, 震泳之罪, 小子之死, 神祗昭昭, 後聖林林, 小子尙復何言.謹告." 휘신 기일(忌日)과 같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서공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서공(徐公)'은 서부원(徐浮遠)으로, 호는 동해(東海), 명나라 말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간재척독》 〈답박노원(答朴魯原)〉에서 "서동해 -부원- 는 항상 머리카락을 잡고서 통곡하며 고황제를 부르면서 '외로운 신하는 머리카락으로 절개를 삼고 시와 예로 벗을 삼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가 구천에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만에서 14년을 거처한 뒤에 조주의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생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처럼 치욕을 품고 살았는데 '노련(魯連)'은 제나라 선비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백 대가……것입니다 '百世而可俟'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의 준말이다. 《중용》 29장에서 ""통치자의 도는 자신이 지닌 덕을 근본으로 하여 일반 백성에게 징험을 하는 것이요, 삼왕에게 상고해도 오류가 없는 것이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이요,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1886년(고종 23)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수업을 받았고, 1897년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하여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전우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하였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오진영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이견(而見) 오진영의 자이다. 식견이……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은 충고해주는 오진영을 가리키며, '나'는 간재 자신을 가리킨다. 다공 미상. 《간재집》을 보면 왜에게 머리를 깎인 것으로 보인다. 권2 〈답남중칙(答南仲則)〉, 권3 〈답서병갑(答徐柄甲)〉 등에 그러한 내용이 보인다. 복철 원래 수레가 줄줄이 뒤집힌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명리 원래 명리는 명(名)은 명칭(名稱)을 말하고, 이(理)는 도리(道理)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명분(名分)의 의미로 보인다. 화목하게 지내기를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을 불고 아우는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여 매우 좋은 형제애를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문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왜놈에……따르지 마라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의발을 전하였으므로 '전발(傳鉢)'은 의발(衣鉢)을 전한다는 뜻이다. 의발은 본디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특히 학문 전수(學問傳授) 등의 경우에 쓰인다. 증자가……답한 것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參乎, 吾道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曾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아무개 옹 스승 간재를 가리킨다. 우암이……증명한다면 이이(李珥)의 낙발(落髮)에 대해 그의 고제인 김장생이 증언하였다면 그 설은 끝내 변명할 수 없다는 말로 간재의 고제라고 일컬어지는 오진영이 스승이 하지 않은 말을 햇다고 무함했으니 이 사실은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권8의 〈여오사익, 기축(與吳士益, 己丑〉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죄가……찼는데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구양수의 〈논여이간차자(論呂夷簡劄子)〉에서 " 이간의 죄악은 가득차서 사적이 환하게 드러납니다.[夷簡罪惡滿盈 事跡彰著]"라고 하였다. 강태걸(姜泰杰) 자는 자흥(子興),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거주하였다. 스승의……하겠습니까 주희(朱熹)가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塵刹, 삼라만상)을 받든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 하겠네.[將此⾝⼼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全》 卷36 〈答陳同甫〉 《능엄경(楞嚴經)》주석에는 "성과(聖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은(佛恩)을 갚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삼는다.[以此爲報不報之恩也]"라고 하였다. 뒤 구절의 말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어찌 책을 인간하는 행위를 하느냐는 의미이다. 스승을…바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보이는 말로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고 나는 들었다. 어버이는 나를 낳아 주셨고, 스승님은 나를 가르쳐 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 주셨다. 어버이가 안 계셨으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임금님이 길러 주지 않았으면 먹고살지 못했을 것이고,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니, 이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 주신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 중 어느 분과 있든 간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壹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 하였다. 공자께서……뒤따랐는데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광(匡)에서 곤액을 당했을 때 안연이 뒤쳐졌다가 따라왔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회(回)야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子在 回何敢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만약 공자가 해를 입었으면 안자(顔子)가 반드시 죽음으로써 구했을 것이다.'라고 주자가 말하자, 혹자가 '안로(顔路 안연의 아버지)가 있는데 안연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주자가 말했다.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면 단지 죽을 뿐이다. 이것과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어려움을 당한 상황에서는 그 말대로 할 수 없다.[事偶至此 只得死 此與不許友以死之意別 不許以死在未䖏難以前 乃可如此 䖏已遇難 却如此說不得]"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38 子畏於匡章》 한문공이……없다 한문공은 한유(韓愈)를 가리키며, 이 문장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 여인(閭人) 미상. 아마도 무식한 왜놈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선비는……없다 《예기》 〈유행(儒行)〉편에 보이는 말이다. 스승이란……모범이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나오는 말이다. 감히……믿었다 《근사록》 〈치지(致知)〉에서 이천 선생이 문인들에게 답하는 말에 "공맹의 문인이 어찌 모두 현철한 자만 있었겠는가. 진실로 중인들도 많았으니, 중인으로서 성인을 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겠지만 오직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구한 뒤에 얻었는데, 지금 제군들은 나의 말에 대하여 조금만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다시는 생각해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끝내 다르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含은 오자로 보인다. 輪은 輸의 오자로 보인다. 辨은 辦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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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 을유년(1945) 2월 임오삭(壬午朔) 24일 을유일(乙酉日)에 효자 택술은 감히 현고 벽봉거사 부군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삼가 생각하건대 伏以옛날 문정공237) 昔文貞公우리 현조께서는 惟我顯祖도학 이외에도 道學以外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하였으니 名世文章동벽238)의 정밀함을 품부 받고 稟東壁精서경239)의 솜씨를 독차지하였습니다 擅西京手시와 표문에 가장 뛰어나 最長詩表고려와 조선에 으뜸이었으니 冠維麗韓식견이 있는 이들의 숭상하는 논의는 有識尙論모두 같아서 이론이 없었습니다. 一辭無異이십이 대를 지나 歷世廾二부군이 이으셨는데 府君繼之뛰어난 자질을 지녀 卓然之資이미 그 닮은 모습을 보이니 旣見其肖오직 시와 표문에 뛰어나 惟詩若表잘하는 것 역시 똑같았습니다 長處亦同젊은 시절의 예봉은 少日銳鋒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고 人莫敢敵늘그막에는 더욱 순숙해져서 晩更純熟석장들이 감탄하고 칭송하였으나 碩匠賞稱마침내 그 마음을 쓰는 것은 乃其用心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則不在此자신에게 돌이켜 실천하며 反己實踐약례240)하고 구인241)하였으니 約禮求仁어디서나 한결같이 一彼一玆경중을 분별하였습니다 輕重是判평생 동안의 문장은 生平文字다만 약간 편뿐이었는데 止若干篇오직 그 많지 않기 때문에 惟其不多현명함을 더욱 볼 수 있으니 尢見可賢소자들이 공경히 보전하여 小子敬保옥을 잡은 듯 물 가득찬 그릇을 받들 듯242)하였습니다 執玉奉盈이 상전이 벽해되는 세상의 변화243)를 만나 値此滄桑예상치 못한 일을 어찌 대비나 하였겠습니까 不虞曷備이에 판각할 것을 도모하여 爰謀剞劂힘을 합친 자손들이 同力子孫날짜를 지정해두고 일을 끝마쳐서 指日竣功거의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庶幾不泯존경께서 묵묵히 도와주신 덕이니 尊靈默佑그 얼마나 다행입니까 何其幸歟거듭 우리 집안을 생각해 보건대 重念吾家고려 말 이후로 麗季以降칠백 년 세월 지나는 동안 閱年七百어질고 덕스러운 인물들이 서로 이어 賢德相承어떤 이는 향사에 배향되고 或享鄕祠어떤 이는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或作朝宰어찌 논저하여 豈無論著후세244)에 전할 만한 이가 없겠습니까 來許可傳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니245) 然無有乎매번 남몰래 통탄스러워하였습니다 每竊痛歎아마도 그 처음에 無乃其始편차와 인쇄에 소략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마는 編梓有踈비록 주밀하고 상세하게 하였더라도 抑雖周詳끝내 그 망실하였기 때문입니다. 終致其失문정의 문집 이후로는 文貞集後오직 부군의 문장뿐이니 惟府君文서로 아득히 마주하고 있는 것은 相對遙遙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亦不偶爾우리 집안의 일이 吾家有事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孰大於玆고금을 생각해 보니 俯仰古今슬픔과 경사가 매우 교차합니다 交切悲慶삼가 그 사실을 아뢰오니 謹告其實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冀垂鑑臨 維歲次乙酉二月壬午朔二十四日乙巳, 孝子澤述, 敢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之墓.伏以昔文貞公, 惟我顯祖.道學以外, 名世文章.稟東壁精, 擅西京手.最長詩表, 冠維麗韓.有識尙論, 一辭無異.歷世廾二, 府君繼之.卓然之資, 旣見其肖.惟詩若表, 長處亦同.少日銳鋒, 人莫敢敵.晩更純熟, 碩匠賞稱.乃其用心, 則不在此.反己實踐, 約禮求仁.一彼一玆, 輕重是判.生平文字, 止若干篇.惟其不多, 尢見可賢.小子敬保, 執玉奉盈.値此滄桑, 不虞曷備.爰謀剞劂, 同力子孫.指日竣功, 庶幾不泯.尊靈默佑, 何其幸歟.重念吾家, 麗季以降.閱年七百, 賢德相承.或享鄕祠, 或作朝宰.豈無論著, 來許可傳.然無有乎, 每竊痛歎.無乃其始, 編梓有踈.抑雖周詳, 終致其失.文貞集後, 惟府君文.相對遙遙, 亦不偶爾.吾家有事, 孰大於玆.俯仰古今, 交切悲慶.謹告其實, 冀垂鑑臨.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로, 문정(文貞)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권장하였고, 원종 때 유경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시록을 수찬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동벽(東壁) 문장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여기서는 김택술이 문장에 재능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진서(晉書)》 권11 〈천문지 상(天文志上)〉에 "동쪽 벽에 두 별이 있어 문장을 주관하니, 천하의 도서를 갈무리한 비밀 창고이다.[東壁二星, 主文章, 天下圖書之祕府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西京) 서한(西漢 전한(前漢)) 시대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문장이 크게 흥성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참고로, 이때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가의(賈誼), 사마상여(司馬相如), 동방삭(東方朔) 등이 있다. 약례(約禮) 예로써 요약한다는 말로, 예를 통해 몸을 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하였고, 또 《논어》 〈자한(子罕)〉 안연(顔淵)이 공자에 대해 "선생님께서 질서 있게 사람을 잘 지도하시되, 글로써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를 요약하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인(求仁) 인(仁)을 구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평가하여 말하기를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옷을……듯 공경히 보전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로서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있고, 온화한 기운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쁜 낯빛이 있고, 기쁜 낯빛이 있는 자는 반드시 온순한 태도가 있는 법이니, 효자는 마치 옥기(玉器)를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받들 듯 지극히 공손한 모습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하고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한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孝子, 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희(朱熹)의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에도 보인다. "컴컴한 방안에도 밝게 임하니 옥을 잡고 가득한 물그릇 들 듯이 조심하여 다급할 때나 잠깐 사이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有幽其室, 有赫其臨, 執玉奉盈, 須臾顚沛.]"라고 하였다. 《心經附註 卷4》 상전(桑田)이……변화 창상지변(滄桑之變)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고, 뽕나무밭이 변하여 큰 바다가 된다는 말로, 흔히 세상의 변화가 매우 심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창해상전(滄海桑田),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도 한다. 후세 원문은 '래허(來許)'인데, 이는 후세를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하무(下武)〉에 "밝도다. 후세에서 그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한다면 아, 만년토록 하늘의 복을 받으리라.[昭玆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도 없으니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문왕부터 공자까지 500여 년이니, 태공망과 산의생은 직접 보고서 문왕의 도를 알았고, 공자는 들어서 알았다. 공자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100여 년이니, 성인의 세대와 이처럼 멀지 않고 성인이 거주하던 곳과 이처럼 매우 가까운데도 아무도 들은 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 若孔子則聞而知之. 由孔子而來, 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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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維歲次) 갑신년(1944) 6월 을유삭(乙酉朔) 6일 경인일(庚寅日)에 효자(孝子) 택술(澤述)은 삼가 맑은 술을 차려놓고 감히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峯居士) 부군(府君)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오호라 우리 집안은 嗚呼吾家누대에 걸쳐 단명하였습니다 累世短壽부군께서 임종(臨終)할 때에 府君臨終불초한 저의 손을 잡고는 執不肖手우리 할아버지는 나이가 曰吾祖年삼십 이세로 세상을 마쳤고 三十二畢아버지는 사십 삼세였으며 父四十三이제 나는 오십 일세이니 今吾五一매 대마다 십 년의 수명이 더해진 것이다 每世加十너는 마땅히 회갑까지는 살 것이요 汝當回甲너의 자식은 칠순까지는 살 것이니 汝子七旬그 이치가 기필할 만하다고 하셨는데 其理可必이 말이 너무나도 슬퍼 此言絶悲듣자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聞之心折불초한 저의 올해 나이가 不肖今年과연 하신 말씀에 부합되는지라 果符所言부군의 그날의 원통함에 庶慰府君위로가 되었을 것이니 當日之寃신명과 사람의 사이에 神人之際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亦云可慶그런데 마침 이 세상의 화란을 당하여 屬玆世禍죽음의 운명이 가까이 다가오니235) 近止大命마음 썩히고 머리 아파하며 腐心疾首근심과 울분이 함께 생겨납니다 憂憤相幷늙은이들이야 괜찮지만 哿矣老者자성236)들이 애달픕니다 哀哉子姓살아생전 매우 아끼시던 마음이 平日至愛유명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何間幽明후손들을 보전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庶保後昆우러러 존령(尊靈)을 믿습니다 仰恃尊靈부디 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甲申六月乙酉朔六日庚寅, 孝子澤述, 謹以淸酌之奠, 敢昭告于顯考碧峯居士府君之墓.嗚呼吾家, 累世短壽.府君臨終, 執不肖手曰 : "吾祖年, 三十二畢.父四十三, 今吾五一.每世加十, 汝當回甲.汝子七旬, 其理可必." 此言絶悲, 聞之心折.不肖今年, 果符所言, 庶慰府君當日之寃.神人之際, 亦云可慶.屬玆世禍, 近止大命.腐心疾首, 憂憤相幷.哿矣老者, 哀哉子姓.平日至愛, 何間幽明.庶保後昆, 仰恃尊靈.尙饗. 마침……다가오니 원문의 '근지대명(近止大明)'은 대명근지(大命近止), 즉 기근이 들거나 왜적이 침입하여 전란에 휩싸인 것 등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위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죽음이 가까운지라, 우러러볼 곳이 없으며 돌아볼 곳이 없노라.[大命近止, 靡瞻靡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일을 가리킨다. 자성(子姓) 자손을 의미하는데, 특히 손자(孫子)와 손녀(孫女)의 항렬을 말하기도 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와 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先妣墓文 유세차 을축년(1925) 7월 을해삭(乙亥朔) 27일 신축일(辛丑日)에 불초자(不肖子) 택술은 망극한 재앙을 만나 성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매우 애통해하며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峰居士) 부군(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아룁니다.오호라! 우리 현고께서는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품어서 일찌감치 과장(科場)에서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지푸라기를 줍듯이 공업을 쉽게 이루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자(孤子)로서 집안 살림을 맡은206) 뒤에는 조부모님과 어머니에 대해 변변찮은 음식207)으로도 봉양하기가 어렵게 되자, 거업(擧業 과거 공부)을 그만두고 몸소 밭을 갈면서도 담박하여 외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불초한 제가 조금 장성하여 글을 읽을 줄을 알게 되자, 평생 완수하지 못한 지업(志業)을 저에게 이루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엄하게 독책하고 권면하여 깨우쳐주며 격려하고 점차적으로 연마시키며 성취시키는 모든 방법을 매우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글을 지으면 점찬(點竄)208)을 직접 해 주시어 완본을 이루도록 하고, 글을 외우면 살피고 점검하기를 부지런히 하시어 거질(巨帙)을 이어 다 외울 수 있도록 하셨으니, 대개 불초한 제가 오늘날 대강이나마 문자를 이해하게 된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께서 잘 인도해 주신 가르침209) 덕분입니다.이윽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되자, 불초한 저를 불러다 고하시기를 "옛말에,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210)라고 하였는데,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기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다지도 변하였으니, 학문을 함에 비록 여력이 있다고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 사학(斯學 유학(儒學))의 요점은 오로지 도를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하고 성인이 전수하신 것을 이어서 명성과 녹리(祿利)의 사이에 참여하지 않는 데에 있다. 지금 세상 학문의 종주(宗主)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계시니, 너는 찾아가 뵙도록 하라." 하시고는, 마침내 짐을 꾸리고서 봉산(蓬山) 월명암(月明菴)의 여차(旅次)에서 절하고 모셔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간옹(艮翁 간재)께서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의 집에 방문했던 옛 일211)을 인용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레가 임하여 하룻밤을 묵음에 수레를 탄 장자(長子)212)와 금패(襟珮)213)를 착용한 후영(後英)들이 구름처럼 많이들 모여드니, 부군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습니다. 불초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현인(賢人)이 지나는 곳마다 산과 시내에는 생기가 돌고, 쑥대와 싸리에는 광채가 더해지는 법이다. 비록 가령 네가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의 즐거움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폐백을 갖추어 천안(天安)의 금화산(金華山) 안에서 사제간(師弟間)의 분수를 정하게 하고는, 장원을 팔아서 여비(旅費)를 마련하여214) 해마다 반드시 두 차례씩 찾아오셨습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귀의할 바를 얻고 대강이나마 도리를 아는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의 가르침215) 덕분입니다. 온 마음이 성(性)을 높이고 우러르며 일마다 성에서 법을 취하며 어진 이를 구하는 정성216)과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217)에 이르러서는 종신토록 변치 않았고, 옛것을 좋아하라는 교훈과 본성을 높이라는 지결(旨訣)은 백발이 되어서도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는 또한 부군이 간옹에 대해 순수하게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은 스승으로 삼은 것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간옹을 스승으로 삼고 부군을 아비로 삼았습니다. 대개 선사(先師)의 운위(云爲)는 어떤 것인들 오묘한 도리와 정밀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오직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218) 군신(君臣)과 화이(華夷)의 경계를 엄하게 하고 본성을 높이며 옳은 것을 구하고 죽어도 변치 않은219) 지결, 이것만을 제일의(第一義)220)로 삼았습니다. 부군의 언행(言行)도 어떤 것인들 아름다운 가르침과 훌륭한 행적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그중 최고는 사정(邪正)의 구분과 의리(義利)의 분별을 분명히 판단하여 동난(東亂)221)을 만나 이웃에서 사귄 비적(匪賊)의 괴수(魁首)를 끊어버리고, 단발령이 내려지자222) 부자간에 똑같이 죽기로 맹세한 것이니, 이는 평생 지절의 일부분223)이니, 불초한 제가 감화되고 가슴에 새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私)와 시비(是非)의 길에서 전전긍긍하여 감히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224) 비록 이해(利害)와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이 앞에 닥쳐와도 맹세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려서 아비와 스승의 덕에 누를 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오호라! 사문(斯文)이 곤액을 당하여 간옹의 문하에 오진영(吳震泳)225)이라는 자가 나와 간사하고 패악하며 거짓되고 기만하는 짓을 함이 끝이 없습니다. 일제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뜻을 저버리고서 경부(京府)에 원고를 보내어 스승의 덕을 더럽히고,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거나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는 등의 말226)을 지어내서 스승을 '인가하신 뜻이 있으셨다.'거나 '인가하신 가르침이 있으셨다.'고 무함하며, '청원하여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의 남기신 편지227)를 버리고서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사의 해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의리와 서릿발처럼 엄하고 절벽처럼 우뚝한 절조가 흐릿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차마 듣지 못할 기롱과 비난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넘치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는 망극한 스승의 무함을 애통해하고 크게 손상된 세도(世道)를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론을 거두어 취해서 남기신 편지를 배포하여 선사의 뜻을 밝히고, 성토하는 글을 보내 오진영의 죄를 바로잡아 스스로 스승을 높이고 도를 호위하는 뜻을 붙였으니, 이는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없어지지 않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높이는 것을 자신(自信)한 것입니다.아, 저 오진영은 마침내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고 판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토하는 글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강태걸을 시켜 진천 경찰서(鎭川警察署)에 고소한 다음, 재차 전주 검사국(全州檢事局)228)에 고소하도록 하고서 '명예손해(名譽損害)'와 '업무방해(業務妨害)'에 대한 두 가지 법률을 변무인(辨誣人)에게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이 때문에 통문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저 사람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달 초 2일에 이미 검사국의 조사를 받았는데 힘써 항변하여 굽히지 않았고, 이번 달 25일에 또 재차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지 않았으니,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어찌 끝낼 수 있겠습니까. 끝낼 수 없다면 의리상 부모가 남겨주신 당당한 칠 척(尺)의 몸이 오랑캐에게 치욕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으니, 다만 마땅히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고229) 웅장(熊掌)을 취하여230) 스스로 한결같이 섬기며231)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다하면 될 뿐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어려서부터 완악하고 몽매하여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닦지 못하였는지라 죄역(罪逆)이 누적되어 스물여섯 살에 현고(顯考)께 화가 뻗쳤고, 그 8년 뒤에 또 현비(顯妣)를 잃었으니, 원통해하고 통곡하며 뒤늦게 뉘우쳐봐야 다시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히 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진실로 불초한 저의 계술(繼述)232)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만 부조(父祖) 두 대와 고비(考妣) 네 위(位)를 선영(先塋)에 임시로 매장한 것이 길이 평안하시기에 부족함이 있기에, 앞으로 경영하여 모두 받들어 면례(緬禮 이장(移葬))해서 불초한 저의 효도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부군의 다하지 못한 정성을 뒤늦게나마 이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모두 불초한 저의 지식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의 학문이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불러온 결과인지라, 불효 중에서도 더욱 심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비록 그러나 부군께서 평소 불초한 저에게 바라시던 것은 다만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고 춘추의 의리를 지켜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고서 죽도록 하고자 한 것뿐이었으니, 오늘날의 의체(義諦)는 혹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불효를 행하였습니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선대의 일은 계제인 억술이 있으니, 거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부군의 효학(孝學)ㆍ 절의(節義)와 선비의 효경(孝敬)ㆍ 덕범(德範)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재 선사께서 천표(阡表)와 행장발(行狀跋)에 밝혀 찬미해주셨으니, 대명(大名)의 신필(信筆)인지라 충분히 백세토록 썩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의 불효 가운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선사께서는 또 불초한 저의 뜻과 학문에 대해 표문에서는 선고에 근본을 미루어주시고,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고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233)으로 행장의 발에서 불초한 저를 기약해 주셨으니, 그렇다면 불초한 저의 평생 동안의 한 번 말하고 한 번 움직이는 동안의 선악이 부모의 영욕(榮辱)이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내몰리고 엎어지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을 만남에 있어서이겠습니까.옛날에 주자(朱子 주희(朱熹)는 정자(程子)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영광으로 여겼고,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宋時烈)은 황고(皇考)의 묘에 고한 글234)234)에서 이를 인용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현인과 더불어 한가지로 파패(破敗)당한 것이 영광스러운 일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불초한 저 또한 감히 스스로 선사께서 무함을 받은 날 선사를 무함한 적의 손에 죽는 것을 비록 감히 주자와 송 선생이 당한 일에 참람되게 비의할 수는 없겠지만, 거의 천년 뒤에는 불초한 저의 한 번의 죽음이 어버이에게 영광을 드린 것인지, 치욕을 끼친 것인지에 논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오호라! 말은 이쯤에서 마치지만 마음은 다함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존경께서는 이 심정을 밝게 살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十七日辛丑, 不肖子澤述, 遭禍罔極, 性命不保.銜痛致哀, 謹稽首, 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嗚呼! 惟我顯考.負超羣之材, 抱立揚之志, 早飛英於場屋, 擬功業之芥拾.夙孤當室之餘, 層堂篤老, 菽水爲難, 則廢擧躬耕, 泊然而不慕外也.及乎不肖稍長, 能知讀書, 則欲以生平未遂之志業, 責成於不肖.凡所以嚴督獎喩激厲漸磨成就之道, 靡極不至, 製課而點竄之是親, 完本成焉 ; 誦程而考飭之是勤, 巨帙聯焉.蓋不肖今日粗解文字者, 秋毫皆府君之式穀也.已而世道大變, 無復可望, 則召不肖而告之曰 : "古有云, '學而優則仕.' 學之優, 誠難矣.然世變如許, 學雖優, 將安用諸.且斯學之要, 亶在明道誠身, 全天賦紹聖傳, 無與乎名祿之間.今世學問宗主, 艮齋田先生在, 汝往謁之."遂治裝, 令拜于蓬山之月明菴旅次.得艮翁之引郭林宗訪茅容故事.駕臨一宿, 長者車轍, 後英襟珮, 林林如雲, 則府君喜形于色.謂不肖曰 : "賢人所過, 山川生色, 蓬蓽增彩.雖使汝占巍科, 豈如今日之樂." 因具贄, 使定分于天安金華山中, 鬻庄辦斧, 歲必再度.嗚呼! 不肖得所依歸, 粗識道理者, 秋毫皆府君之義方也.至於心心尊仰, 事事取法, 緇衣之誠, 臧倉之辨, 終身而不渝 ; 好古之規, 尊性之訣, 白首而彌篤, 此又府君之於艮翁, 不純師之師也.嗚呼! 不肖以艮翁爲師, 府君爲父, 蓋先師之云爲, 何莫非妙道精義, 惟是絶島獻靖, 嚴君臣華夷之防, 尊性求是至死不變之訣, 爲第一義也 ; 府君之言行, 亦莫非嘉訓懿蹟, 而最是判邪正之分義利之辨, 遭東亂而絶匪魁於隣交, 當薙變而誓父子之同死者, 爲平生志節之一斑也.不肖之所擩染服膺者如此.故凡於公私是非之塗, 兢兢然不敢放過, 雖利害禍福死生之當前, 誓不欲負父師敎而累父師德矣.嗚呼! 斯文窮厄, 艮翁之門.不幸有吳震泳者出, 奸悖誣罔, 罔有紀極.舍無認而投稿京府, 以累師德, 造料量不拘等說, 誣師以認意認敎, 棄請願自辱之遺書, 令其徒姜泰杰出認而印稿.於是先師日光玉潔之義, 霜嚴壁立之節, 昧昧破破, 而不忍聞之譏罵, 漲天溢地矣.不肖痛師誣之罔極, 憂世道之大害, 竊不自量.收取公論, 布遺書而明先師之義, 行討文而正震泳之罪, 自附於尊師衛道之義.蓋出於是非不泯之天, 而自信其奉遵父師之敎也.噫! 彼震泳.乃以認印之難成, 販賣之未售, 爲討文之沮害.使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于辨誣人.而不肖則以製通也.故尢爲彼之所甘心.去月初二日, 已被檢局調訊, 力抗不屈.今月廾五日, 又被再呼不往.前頭之禍, 安得以已乎.無己則義不容以父母所遺之堂堂七尺, 受辱於閭夷, 只合輕鴻毛而取熊掌, 以自盡事一致死之義而已.嗚呼! 不肖幼少頑昧, 不修子職.罪逆積重, 弱冠有六, 禍延顯考.厥後八年, 又喪顯妣, 寃酷痛號, 追訟靡逮.承先裕後, 不墜家聲, 固不肖繼述之責.而惟是父祖兩世考妣四位, 權厝先塋有欠永安.方且經紀, 幷奉緬襄, 少洩不肖不孝之恨, 追繼府君未盡之誠.此事未遂, 遽當大禍, 莫非不肖知不能量力, 學不能保身而致之, 則不孝中尢不孝也.雖然, 府君平日所望於不肖者, 惟欲奉聖賢之敎, 守春秋之義, 無忝所生而死, 則今日義諦, 或得免虧, 行辱親之不孝.而先事之未遑, 有季弟億述在, 庶可以有恃也.至於府君之孝學節義, 先妣之孝敬德範, 俱蒙艮翁先師闡美於阡表狀跋, 大名信筆, 足以不朽於百世, 則不肖不孝中一幸, 旣在乎此.而先師又以不肖之志學, 推本先考於表文, 以顯親來許, 期不肖於狀跋.然則不肖生平一言一動之善惡, 莫非父母之榮辱.矧此顚沛之際死生之大者乎.昔朱子遭請斬於攻程之時, 自以爲光華.尢菴宋先生, 引此於告皇考墓文, 以證與栗、牛兩賢同其破敗之爲榮.不肖亦敢自以爲以先師被誣之日見死於誣師賊者, 雖不敢僣擬於朱宋之所遭.庶千載之下, 有論不肖一死之貽其親者, 是榮是辱矣.嗚呼! 言止此而意無窮.伏惟尊靈, 昭鑑此衷.謹告. 집안 살림을 맡은 원문은 '당실(當室)'이다. 이는 부친이나 형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대부분 적자(嫡子)가 당실을 했으므로 적자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변변찮은 음식 원문의 '숙수(菽水)'는 콩과 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데, 곧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효도를 제대로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를 극진히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바로 효라 이른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점찬(點竄)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고치고 다듬는 일을 말한다. 당(唐)나라 왕발(王勃)이 비송(碑頌)을 지을 때마다 미리 몇 되의 먹을 갈아 놓고 한번 붓을 잡고서 써 내려가면 한 번도 점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복고(腹稿)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語資》 잘……가르침 00쪽 주 00) 참조. 학문을……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보인다. 곽임종(郭林宗)이……일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현자를 알아보고 그를 정성스레 모셔가려고 했던 노력에 대한 내용을 말한 듯하다. 참고로, 《명현씨족언행유고(明賢氏族言行類稿)》 권24에 "옛날 모용은 농가의 아들이었다. 닭을 잡아서는 요리하여 그의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곽임종(郭林宗)에게는 채소반찬으로 접대하니, 곽임종이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하고 나서 학문할 것을 권고한 끝에 그가 사해의 명사(名士)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수레를 탄 장자(長子)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의 수레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패(襟珮) 푸른 옷깃을 두르고 푸른 패옥(佩玉)을 찬 유생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옥,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비(旅費) 마련하여 원문의 '판부(辦斧)'는 도끼를 마련한다는 말로, 도끼란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여비를 의미한다. 이는 《주역(周易)》 손(巽)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물자와 도끼를 잃는다.[喪其資斧]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가르침 원문은 '義方'이다. 자세한 내용은 00쪽 주 00) 참조. 어진……정성 원문의 '치의(緇衣)'는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에 "검은 옷이 잘도 어울리는 분, 해지면 내가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라고 하였고, 또 《예기》 〈치의〉에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치의〉 편처럼 한다.[好賢如緇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구하려는 정성을 의미한다.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 미상(未詳)이다.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 간재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간 바 있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처한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죽어도 변치 않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곤궁했을 때의 뜻을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君子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章句 第10章》 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동난(東亂) 1894년(고종31)에 있었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들어왔던 일본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고는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부분 원문읜 '일반(一斑)'은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아이도 역시 대롱으로 표범을 엿보면서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此郞亦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롱 구멍을 통해 표범의 얼룩무늬를 엿본다는 것으로, 전체의 모습을 조관하지 못하고 겨우 사물의 일부분만을 보는데 그치는 아주 협소한 안목이나 소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世說新語 方正》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9 〈답진부중(答陳膚仲) 4〉에 "근래에 벗들의 독서가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는데도 곧장 이와 같이 대충대충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近覺朋友讀書多是苟簡, 未曾曉會得, 便只如此打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타과(打過)'에서 "그냥 지나치다는 말과 같다.[猶言放過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주희(朱熹)가 진공석(陳孔碩)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집안일이 산적하여 학문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으니, 이는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바로 공부를 하는 현장일 따름이니, 매사에 도리를 꿰뚫어 데면데면 지나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承以家務叢委妨于學問爲憂, 此固無可奈何者. 然亦只此便是用功實地, 但每事看得道理, 不令容易放過.]"라고 한 데서도 보인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말 오진영이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이병은(李炳殷)에게 보낸 편지에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청원하여……편지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사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반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强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검사국(檢事局) 일제 강점기에 검사(檢事)가 일을 보던 곳을 가리킨다. 기러기…여기고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웅장(熊掌)을 취하여 목숨보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좋아하고 웅장도 내가 좋아한다. 하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도 내가 좋아하고 의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결같이 섬기며 원문의 '사일(事一)'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준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의리와도 통한다.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글을 가르쳐 준 스승과 밥을 먹게 하여 준 임금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말하기를 "백성은 부모, 스승, 임금의 셋에서 사는지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國語 晉語》 《小學集註 明倫》 계술(繼述) 효자가 선세(先世)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무릇 효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조상의……것 원문의 '래허(來許)'은 《시경》 〈하무(下武)〉에 "앞으로 올 날 밝히어, 조상의 발자취를 이으면, 아, 만년이 되도록 하늘의 복 받으시리라.[昭茲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을 의미한다. 우암(尤庵)……글 《송자대전( 宋子大全)》 권151의 〈고황고수옹선생황비정경부인곽씨묘문(告皇考睡翁先生皇妣貞敬夫人郭氏墓文)〉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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