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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 전장희순에게 보냄 與鍊心田丈熙舜 ○乙亥 을해년(1935)삼가 며칠간 살펴보니, 사견(士狷)189)을 거친 충고를 받아들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와 밝은 창가에 앉아서 다시 정밀히 생각해 보니 의리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이미 견고하니, 어른이 말씀하신 사견의 말에 이치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견고하다는 어른의 말은 어른이 전한 말이다.】 이 일의 시비는 처음에 알기 어려우니, 다만 약간의 사심에 가리어서, 나재(懶齋) 어른이 스승을 폄하한 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으로 저를 꾸짖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꾸지람을 당한 이후로부터 황공스러웠으니, 생각해보건대 이것은 부북첨좌(扶北僉座)가 한결같이 말한 공적인 성토입니다. 저번 편지에 당신께서 나재 어른의 편지가 비정한 꾸짖음이라 했고, 신재(愼齋) 어른도 그렇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완전히 명교의 죄인이 되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고, 감격하여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만 크게 한스러운 것이 있으니, 당초에 음성을 성토하는 일은 신재 어른이 창의(倡義)하고 이 몸은 조수로서, 속임을 분별하고 원고를 고증하여 적을 목 베고 무리를 다스리는데 한 문장 한 의리도 그와 함께 하여 서로 상의하여 합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맹세하기를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열전을 함께 한다.'190) 했습니다. 오늘날 영구(嬰臼)191)처럼 의론이 잘 맞던 우리(신재와 후창선생)들이 의론이 다르게 되었고, 순원(巡遠)192)처럼 의기투합하던 우리들이 화합을 잃어서, 의견이 달라지고 정의(情誼)193)가 이렇게 벌어져서 이 지경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히 옛날 글상자를 열어서 신재 어른이 당시에 주었던 시 두편을 얻었습니다. 시에서 말하기를. "그대 오문(吾門)에 명성이 자자한데, 그리워하여 초강(楚江)194)길로 내방하였네. 속임을 변론하고 가르침을 밝혀 스승의 도를 신장시키고, 예를 익히고 경서를 논하여 후생을 창도했네. 춘추대의로 엄격함을 드러내었건만, 사악한 많은 말은 공평하지 않았네. 부끄럽게도 나는 한 일 없이 머리만 세었는데, 사귀는 정이 자상하여 상정에 지나치도록 경계하였네."라고 하였고, 또 시에 이르기를 "갑자기 스승이 돌아가시어 애통하며 통곡하니, 어찌 제자들이 다른 길을 걸었겠는가. 원수를 받아들여 원고를 발간하니 인심이 죽고, 인가를 성토하는 편지가 오니 사기가 살아났네.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 스승을 핑계 대니 음성의 죄가 크고,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름을 부추기니 사람들의 의론은 공평하네. 시비는 절로 정해지니 한탄할 필요 없겠지만, 다만 나의 행실이 실정에 부합할까 두렵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에 당을 다스리는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같지 않음이 오늘날 본 바와 같았다면, 추중(推重)하는 말과 서로 믿는 정이 시편에 나타남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대체로 제가 본 바로는 오늘날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종전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나만 홀로 이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신재 어른도 똑같이 공공의 문자를 만듦에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같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에서 말한바 "어찌 제자들이 길을 달리할 것인가."라는 말은 음성의 당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까? 《시경》에서 말한 "아 슬프도다, 권여(權輿)195)를 잇지 못함이여"196)라는 말은 지금을 이르는 것입니다. 펼쳐서 서너 번 읽음에 큰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시에 차운하여 쓰기를 "그때에 우리 어른은 의로운 소리를 제창했으니, 눈앞에는 단지 다른 길이 없었네. 《춘추》197)로 무리를 다스리는 것이 어찌 심하다 하리오, 《서경·우전(虞典)》에는 완악한 사람도 썼으니 함께 살고 싶어서였네. 무릇 인을 행함에 끝까지 하기는 드무니, 언제나 공평하게 하기를 생각했기 때문이네. 벗에게 선을 권하는 은근한 말은, 속히 회복하여 옛정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었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공을 그리다 만나지 못한 채 가을이 되어서, 북쪽을 바라봄에 멀고멀어 삼십 리 길이네. 비록 주장하는 것은 오늘과 다르지만, 공론이 후생에게 있을까 두렵네. 곤란한 말로 항상 괴로워하니 다른 사람이 믿지 않고, 허물이 이와 같음을 보니 뜻이 평안하지 않네. 끝내는 깊은 속임을 씻어내기 어려울까 두려우니, 푸르고 푸른 미륵봉은 정이 있는 듯하네.'라고 했다. 오호라, 이를 보니 이놈의 정이란 게 또한 슬픕니다. 우리 어른은 매번 내가 고집스러운 것으로 독부(獨夫)198)가 될까 불쌍히 여겼고, 동문들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뜻은 감동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큰 재앙에 붙어있기보다는 의리상 독립하여 두려울 것이 없을 뿐입니다. 아, 내가 어찌 다른 사람과 절교하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 이기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 속에는 반드시 심히 그만두지 못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시대에 나의 마음을 알아줄 종자기(鍾子期)가 없다면 마땅히 훗날 나의 글을 알아줄 양자운(揚子雲)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고치시기를 내가 날마다 고대하고 있다."199)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열통의 편지는 한 번 만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으니, 거의 신재 어른과 한번 말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려 했는데, 한번 이견(異見)이 있은 뒤로부터는 말과 소의 거마 소리가 서로 미침이 없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스승을 폄하한 자를 용서해줬다는 죄목을 얻어서 진실로 사우간을 추종하기 어렵게 되어, 읍에서 바람이나 쐬고 있으니,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竊覸日者, 自經士狷忠告, 似有採納之意未知.歸坐明牕, 更加精思, 知義理之不容已如堅, 丈所道, 狷言有理之悟否【堅丈語之所傳】.蓋此事是非, 初不難知, 只爲些私所蔽.以至有懶丈, 斥我以恕貶師之書矣.自遭此斥, 惶惶恐恐, 意謂此是扶北僉座, 一辭公討者矣.昨承, 吾丈以懶書爲非情之斥, 愼丈亦以爲然云.於是乎, 自幸不全爲名敎罪人, 感之而繼泣也.但有大可恨者, 當初討陰之役, 愼丈倡議, 此漢助手, 辨誣考稿 誅賊治黨, 一文一義, 無不與之, 互商合.決誓'以生同義而死同傳'矣.孰知今日, 嬰臼異論 巡遠失和, 意見之殊, 情誼之豁, 乃至於此乎? 偶閱舊篋得, 愼丈當日贈詩二首.詩曰: "有子吾門籍籍聲, 相思來訪楚江程.辨誣昭訓伸師道, 講禮論經倡後生.大義春秋揭嚴截, 衆言邪詖不公平.愧余無得空頭白, 交情偲偲戒過情." 又曰: "遽見山頹痛失聲, 奈何諸子異蹊程? 納讐稿出人心死, 討認書來士氣生.脫己諉師陰罪大, 斥邪扶正物論平.是非自定未須嘆, 只恐我行孚實情." 若於其時治黨與否之不同, 如今日所見者, 推重之辭, 交孚之情, 安得見於詩篇, 有如此者耶? 蓋此漢所見, 匪今斯今, 從前如茲.非惟我獨如此, 愼丈同製公共文字亦然.非惟同製文字, 此詩所云, "奈何諸子異蹊程"者, 非指陰黨乎? 詩云, "吁嗟乎不承權輿" 今之謂也.披閱三四, 不勝太息, 而次其詩曰: "當日吾公倡義聲, 眼前只此無他程, 麟經治黨豈云甚, 虞典書頑欲幷生, 大抵爲仁鮮究竟, 總緣有意作公平, 偲偲籍籍殷勤語, 遄復耑希見舊情." 又曰: "思公不見感秋聲, 北望迢迢一舍程, 縰然所主殊今日, 可畏公論在後生, 困言常苦人無信, 觀咎其如志未平, 終恐深誣難洗得, 蒼蒼彌峀若爲情." 鳴呼 觀於此, 此漢之情, 其亦戚矣.吾丈每以我之固執, 憫其爲獨夫而懼其不容於同門, 見憐之意可感.然竊自附於大過之時, 義獨立而無所懼耳.噫, 吾豈好絶人, 亦豈好勝人者哉? 其中必有甚不得已者存焉, 如無幷世之子期, 當有後世之子雲矣.雖然孟子有云, "庶幾改之, 予日望之"諺.又云, "十書不如一面." 尙欲與愼丈一番盡言, 俾無餘憾, 而一自異見之後, 非惟馬牛之風不相及.念此得恕貶師之目者, 誠難追從於士友間, 臨風於邑, 情不知裁. 사견(士狷) 《유재집(裕齋集)》 〈전사견(田士狷) 일중(鎰中)에게 답함〉 참고. 생사동전(生死同傳)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열전에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5 영구(嬰臼) 영구(嬰臼)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삭(趙朔)의 문객(門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을 말한다. 진나라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살해하자 공손저구는 정영과 함께 조삭의 고아를 세울 일을 논의하였다. 그래서 정영에게는 조삭의 아들을 안고 산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영아(嬰兒)를 데리고 달아나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하게 하였다. 결국 공손저구는 가짜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살해되고, 조삭의 아들은 정영에 의해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권43 〈조세가(趙世家)〉 쓰러뜨리려 해도 넘어지지 않을 듯이 꼿꼿한 그림 속의 나무를 공손저구와 정영의 절개에 비유한 것이다. 순원(巡遠) 당나라의 명신(名臣)인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병칭이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안녹산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187 〈충의열전(忠義列傳) 장순(張巡)〉 정의(情誼)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情)을 말한다. 초강(楚江)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투신자살한 소상강(瀟湘江)을 가리킨다. 시국을 걱정하며 자결한 굴원의 충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김택술의 처지를 굴원에 빗대서 한 말이다. 권여(權輿) 사물 또는 일의 시작이나 시초를 뜻하는 말로,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權〕를 먼저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의 판자〔輿〕부터 먼저 만드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못함이여 《시경(詩經)》 〈진풍(秦風) 에 보인다. 인경(麟經) 《춘추(春秋)》의 별칭이다. 《춘추(春秋)》가 애공(哀公) 14년의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독부(獨夫) 독부(獨夫)는 하늘도 버리고 백성도 버려 외롭게 된 통치자라는 뜻인데, 《서경(書經)》 〈태서 하(泰誓下)〉에 폭군 주(紂)를 독부로 명명하고 그의 죄악상을 나열한 내용이 나온다. 왕께서……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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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일전에 편지를 보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할 뜻을 표명하겠다 하신 말씀은 근래에 이미 실행하셨는지요?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은 우리 어른이 실제 주도하셨으니 절교는 사실 오래 전에 한 것이라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검사국에 소환되는 재앙이 있었을 때 한 번 편지가 있었고, 신도(新都)의 모임 때 한 번 만난 이후에 현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실 삼아 말하기를, "정재가 나와 이미 화해했다." 하니, 이전의 편지와 만남은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고, 이후의 식사대접은 비록 갑자기 벌어진 일이나 법도가 엄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니, 그래서 저쪽의 그럴 법한 말을 초래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어른이 선친이 무함 당한 것에 대한 통분이 유명(幽明)을 관통하여 저쪽을 끊을 마음이 금석처럼 단단하겠지만 누가 기꺼이 그러한 자취를 버리고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려 하겠습니까? 만약 계화도 사원에서 처음 제사 지냈던 날에 제창하여 논하기를, "춘추의 법은 난적(亂賊)을 다스릴 때 먼저 그 무리를 다스리니, 무릇 오진영의 당이 되는 자들은 제사 지내는 뜰에 들이지 말라." 했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서 대의가 밝게 드러났을 것이니, 누가 감히 이론을 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들으면 자연 간담이 서늘하여 다시는 감히 구실 삼아 말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봄에 또한 이 무리를 모두 끊어낸 것을 알게 되어 자연 번거롭게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원 사람들의 논의를 앞장세워 "오진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이것은 괴수만 섬멸하고 협박을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견해입니까? 조조(曹操)가 그 괴수가 되니 목을 베고, 순욱(荀彧) 등의 무리는 협박을 못 이겨 위협에 따랐을 뿐이니 징벌하지 말라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도와 이루고 스승의 원고를 같이 고친 자들은 모두 오진영과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당사자만 제거하고 그와 한 몸인 사람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제거한 사람은 한 명의 오진영이고, 같이한 사람은 수많은 오진영이니, 오진영은 말 한 마디 낯빛 한 번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국면을 온전히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은 실제로 의리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의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쁜 사심이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까? 뒤이어 음성의 괴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신이(愼李 신헌(愼軒) 이기환(李起煥))의 입에서 나와 우리 어른에게 의중을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 사람만 제거한다는 말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하는 말을 가지고 감히 일찍이 선사의 친아들을 시험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어찌 오진영을 배척함이 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른이 이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기환에 있어서는 이전에 성토를 제창했던 사람으로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진영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니, 그가 말한 "선사가 있으면 오진영이 없고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라는 수많은 엄정한 문자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요? 스스로 그 문자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죄를 감단(勘斷)한다면 자연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우리 어른께서 기롱하신 것처럼 세 토막을 내야 할 사람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만약 우리 어른이 빨리 편지를 보내 오진영과 절교한다고 표명한다면, 이기환이 감히 다시는 청하지 못할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나의 효를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기환이 악에 빠지는 것을 구하는 어짊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投書, 表絶陰震之喩, 近已實行否? 蓋討震之役, 吾丈實主之, 絶固久矣, 更不須言.但前有檢禍時一書, 新都會一面後, 有玄洞一飯之饋, 故彼得以藉言曰: "靜齋與吾已和." 前之書面, 固爲鑄錯.後之饋飯, 雖出倉卒, 失管不嚴則有之, 所以來彼近似之言也.雖吾丈先誣之痛, 貫徹幽明, 絶彼之心, 堅如金石, 孰肯舍其跡而諒其情乎? 若於華院始祭之日, 倡論曰: "春秋之法, 治亂賊者, 先治其黨, 凡爲震黨者, 勿入祭庭." 名正言順, 大義昭著, 孰敢異論乎? 使彼聞之, 自應膽落, 不復敢藉言, 衆人觀之, 亦知幷絶其黨, 而自不煩投書.惜乎, 其未也! 創院人之論曰: "除震一人外, 其黨皆可與同, 是爲殱厥渠魁, 脅從罔治之義." 噫, 此何見也? 謂曹操爲渠魁而誅之, 彧群輩爲脅從而罔治, 是果成說乎? 凡助成認誣, 同改師稿者, 皆與震一體人.若但除當人, 而與其一體, 是所除一震, 而所同者衆震, 震則不動聲色, 而坐定全局矣.未知爲此論者, 實昧義而然歟? 抑知其非義, 而不勝邪私之發歟? 從而至於欲致書陰魁之說, 出於愼李之口, 而詢及吾丈, 則又知除一人之云, 初非眞心.夫以忘師附賊之言, 敢嘗試於先師親子, 而無忌憚者, 豈非以見其斥震之不嚴而乃爾乎? 吾丈於此, 正可以自反也.在李則以前日倡討之人, 忽然改頭, 欲降于震, 則其所謂有先師則無震泳, 有震泳則無先師等, 許多嚴正文字, 將何以區處? 自以其文自勘其罪, 自不得容其身, 不但如吾丈所譏, 爲三截人而已也.雖然今若吾丈亟投書而表絶震, 則李不敢復請.非惟盡吾事親之孝, 亦爲捄李陷惡之仁, 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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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4월 與靜齋田丈 乙丑四月 지난 그믐에 답장을 올리며 온 정성을 다했고, 또 답장을 내려주시라고 청했는데 아직까지 잘잘못을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할 때 오진영과의 화해가 서리 내리면 곧 얼음이 얼 듯 이미 굳어진 것 같습니다. 비루한 제가 따뜻한 봄볕이 아니니 어떻게 해빙시킬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입장에서는 도리를 다 할 뿐이고, 들어주고 말고는 기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보내 세 번에 이르고, 세 번을 보내 효과가 없다면 그만둘 뿐입니다. 아, 우리 어른은 피눈물을 뿌리며 부친의 무고함을 변론하고 의로운 깃발을 휘날리며 음성의 도적을 성토한 전정재(田靜齋)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성토하던 도끼를 돌려 폐백으로 만들고 광명을 잃어 안개 속을 헤매신단 말입니까? 천만 번 그 까닭을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진영이 죄줄 만한 것이 없어 앞에서 성토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문집 간행을 그대가 헤아려서 하라', '인가 받는 것을 구애하지 말라' 하셨다는 오진영의 글과 '나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다', '절대로 따르지 말라' 하신 유서의 내용은 끝내 얼음과 숯처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오진영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른의 선고(先考)요 선사(先師)를 어디에 두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일찍이 인가를 받을 뜻이 있으셨다.〔曾有認意〕'는 네 글자는 우리 어른이 직접 들은 것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고소를 당한 화가 헤아릴 수 없어서입니까? 그렇다면 군자는 의리에 있어서 진실로 사는 것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이 있는데, 하물며 이 몸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돌려드리는 것이니 부친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물며 사림이 공적으로 다함께 받은 화이고 우리 어른이 홀로 담당할 일도 아닌 데이겠습니까? 저쪽을 수습하는 것이 뒷일을 도모하기에 이로워서입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의리를 바르게 하여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혀 공을 계산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군자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하물며 부친을 모함에 빠뜨린 자의 힘을 이롭게 여겨 부친의 뒷일을 도모한다면 부친의 혼령이 어찌 기꺼이 편안해 하시겠습니까? 가족의 보호와 화합을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부자와 숙질은 본디 친속이니, 진실로 외부 사람인 오진영을 기다린 이후에 보호하고 화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오진영은 내 부친의 큰 절개를 파괴시킨 자이니, 오진영과 화해하여 가족을 보호하고 화합하는 것을 구한다면 가족을 화합한 방법이 곧 내 부친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뿌리가 보존되지 못하는데 가지가 장차 어떻게 전해지겠습니까?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단 하나도 오진영과 화합할 의리가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어른께서 마침내 이와 같이 하고자 하신다면 이것은 또한 운수 소관이지 인력으로 될 일은 아니겠지요. 오호라, 일신의 이기기 어려운 사욕은 천 길의 구덩이로 떨어지기 쉽고, 한때의 잘못된 견해는 영원한 공론의 성토가 두려우니, 한 사람과 구차히 화합하여 온 세상의 버림과 배척을 받을 것이 부끄럽습니다. 우리 어른께서 다시 십분 생각하여 후회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심정으로 말을 다하여 이렇게 까지 하였으니, 만약 그르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부디 속히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去晦上覆, 旣罄衷悃, 又請賜答, 尙不聞皂白.竊想和震之霜氷已堅矣.鄙生之非陽春, 何足以解之? 但在我者, 有可以盡其道, 其聽與否, 有不可必.故一之再之, 以至于三, 三而無效, 則可以已矣.噫, 吾丈非灑血淚而辨親誣, 麾義旗而討陰賊之田靜齋乎? 胡爲乎回斧銊而作皮幣, 失光明而困霧霾乎? 千萬思量其故, 不可知也.謂震無可罪, 而前討之誤也耶? 則'料量''不拘'之震筆, '自辱''勿從'之遺書, 終是氷炭之不相容.謂震無罪, 則置尊先考先師於何地? 而况'曾有認意'四字, 非吾丈之親聞者乎? 爲訴禍之罔測也耶? 則君子之於義, 固有舍生而取之者, 而况此身還是親之遺體, 爲親而致死, 亦復何惜? 而况士林公共之禍, 而非吾丈之所獨當者乎? 爲收拾彼邊, 利圖後事也耶? 則正誼不謀利, 明道不計功, 固君子處事之方, 而况利陷親者之力, 圖親之後事, 則親之靈, 豈肯安乎? 爲家族之保合也耶? 則父子叔姪, 本是天屬, 固非待外人吳震泳而後, 可保合者.而况震是破壞吾親之大節者? 和震而求保合, 則其所以合家族者, 乃所以破壞吾親也.本之不存, 支將安傳乎? 以此以彼, 以東以西, 一不見其有和震之義, 吾丈乃欲如此, 是亦運氣攸關, 而非人力之致歟? 鳴呼, 一己之難克, 千仞之坑塹易陷, 一時之誤見, 千古之公討可畏, 一人之苟合, 擧世之棄斥, 是羞.切乞吾丈更加十思, 勿致後悔焉.情不自己, 極言至此, 如不爲非, 幸亟賜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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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을축년(1925) 3월 與靜齋田丈 乙丑三月 보내주신 편지의 숱한 내용이 오진영과 화해한다는 주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가 제 생각으로는 화해〔和〕라는 한 글자를 글 첫머리에 제목으로 둘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가 만약 흔쾌히 선사를 속인 죄를 자복한다면 수용하여 용서하는 것이 옳으나 그가 화해하자고 말한다면 불가합니다. 이에 우리 어른께서 저쪽의 자복을 기다리지 않고 화해를 허락하며 저쪽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가서 만난다면 원한을 푸는 것을 급히 하고 부모를 잊는 것을 쉽게 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우리 어른의 동빙한설〔冬氷雪〕같은 엄함으로 어찌 홀연 점진적이지 않은 따스한 바람과 단비를 지으신단 말입니까? 삼가 싹트고 자라는 공은 보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아, 우리 어른의 이번 일은 이익에 유혹되어서도 아니고 재앙이 두려워서도도 아닙니다. 오로지 진실로 양쪽을 수습해서 뒷일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그 마음과 형세의 측은함을 어찌 모른다 하겠습니까? 다만 문집을 간행하고 비석을 세우는 등의 일은 후인들이 선사를 높이 받드는 것일 뿐이고, 도의와 지절은 선사를 선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선사의 뒷일을 도모하고자 하면서 먼저 그 선사가 되게 하는 도의와 지절을 깨뜨린다면 비록 문집이 천하를 두를 만큼 많고 큰 비석이 백 척 높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선사의 실상이 있고 없음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일이 바른데서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동쪽을 수습하려다가 서쪽이 흩어지고 처음을 도모하려다가 끝이 망가지는 꼴이 되어버리는 데이겠습니까? 우리 어른께서 만약 옛 덕을 간직하여 확고하게 지켜서 사당(邪黨)을 엄히 배척하고 시비를 밝게 판정한다면 반드시 인심이 모두 복종하고 후사가 이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나 만약 한번이라도 저들이 스승을 무함한 죄를 흔쾌히 자복하기 전에 저들과 화합한다면 선사를 아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간옹의 도의는 이처럼 우뚝한데, 아들 아무개는 처음에는 음성의 속임수를 배척하다가 마침내는 음성 쪽에 붙어 아부하니, 삼패문(三悖文)186)이 아무개를 배척한 말이 전부 허언은 아니구나." 할 것이며, 선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오진영이 죄를 자복하지 않았는데 아무개가 먼저 그 그릇됨을 깨닫고 화해를 구걸했다. 그렇다면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을 받았다는 것은 오진영이 속인 것이 아니라 간옹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심히 구애될 필요 없다'는 말도 오진영이 속인 것이 아니라 간옹을 실제로 그런 말을 했고, 신해년의 유서는 간옹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아무개가 위조한 것이다. 간옹의 의리 없음이 이와 같구나!" 할 것입니다. 우리 어른이 천추에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선사가 영원히 다른 사람의 의심을 면하지 못한다면 지하의 원혼이 그 억울함을 언제나 씻을수 있겠습니까? 우리 어른의 현명함으로 어찌 조금도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우리 어른께서 일찍이 조카 사인(士仁 전효일)에게 편지를 보내 정모(鄭某)의 화해설을 비난하시며 "오늘 선친을 배반하고 내일 천사만종(千駟萬鐘)187)을 얻을지라도 만약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를 통하여 우리 어른이 이익에 유혹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일이 천사만종보다 그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전에 엄히 꾸짖었던 화합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연사(練祀)에 참여한 제공에게 올린 편지에서 "만약 의외의 일이 있다면 제가 마땅히 자임하고 제공들에게는 누를 끼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것으로 어른이 재앙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 고소한 재앙은 우리 어른만 홀로 당하고 여러 사람들이 감당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찌 갑자기 제공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뜻을 굽혀 홀로 당하지도 않은 화를 미리 염려하신단 말입니까? 우리 어른께서 보낸 그간의 문자가 산처럼 쌓여있고 백세의 공론이 우레처럼 매서운 데다가 또 이로운 바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후사에 유익할 것도 없는데, 어찌 그리 고달프게 이전의 절개를 버리고 기꺼이 오늘날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의 의롭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으려 하십니까? 절대로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호라, 제가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변론하고 성토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마침내 저들 무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했습니다만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속담에도 있으므로 한바탕 웃음거리로 치부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어른이 갑자가 태도를 바꿈에 이르러서는 스승의 무함을 씻느냐 마느냐가 크게 관련되어 있는 만큼 한번 고하고 두 번 고해서 들어주지 않으시면 마땅히 세 번을 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을 고하면 이미 자주 간하는 것이 되어 혹여 우리 어른께서 저를 소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또한 훌쩍훌쩍 울고 싶을 뿐입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 어른은 친히 선사의 유서를 받은 사람이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를 리가 있겠습니까? 구구한 저의 근심이라 결국엔 지나친 염려가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어른이 저들에게 죄를 자복하도록 하신 것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하지 않고 다만 선사께 누를 끼친 것으로 하고, 저들이 묘에 고하고자 하는 것도 무함한 것을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허물하는 것일 뿐인데, 우리 어른은 또한 시간이 지나면 효과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께서 전날 힘을 다해 오진영을 성토한 것은 다만 선친에게 누를 끼쳤기 때문이고 선친을 무함했기 때문이 아니며, 다만 저들이 스스로 실수한 허물 때문이고 선사를 무함한 죄 때문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반복해서 생각해도 끝내 우리 어른의 의중을 알지 못하겠으니, 또한 망연하여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살펴 답장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下喩, 縷縷無非和震主意, 竊以爲和之一字, 劈頭已是不著題.彼若快服誣師之罪, 則容而赦之, 可也, 其曰和之, 則未可也.乃吾丈不待彼服而許和, 不待彼來而往會, 不幾乎急於解仇, 而易於忘親乎? 以若吾丈大冬氷雪之嚴, 何其忽作無漸之和風甘雨也? 竊恐不見生成之功, 而反致災戾也.噫, 吾丈此擧, 非爲利誘也, 非爲禍怵也.亶出於收拾兩邊, 用圖後事, 則其情勢之戚, 豈云不知? 但刊稿竪碑等事, 後人之尊奉先師也, 道義志節, 先師之所以爲先師也.欲圖先師之後事, 而先破其所以爲先師者, 則雖文匝環海, 豐碑百尺, 其於先師之實之無有焉何哉? 而况事不出正, 人不見服, 將收之東而散之西, 圖之始而敗之終乎? 吾丈若能食舊而貞, 嚴斥邪黨, 明定是非, 則必見人心之翕服, 後事之利濟也.若一與彼和於快服誣罪之前, 其知先師者則必曰: "艮翁道義, 若是其卓, 其子某, 始斥陰誣, 而終焉比附陰邊, 三悖文斥某之言, 不是全虛.", 其不知先師者則必曰: "震不服罪, 某先覺其非而乞和, 然則杏下獨命, 非震之誣, 艮翁實有之, 不必深拘, 亦非震誣, 艮翁實有之, 辛亥遺書, 非艮翁手筆, 某之僞造也, 若是乎艮翁之無義也." 吾丈之得罪千秋, 猶是小事, 先師而永不免人疑, 則泉下之寃, 何時可雪? 以吾丈之明, 豈不少念乎此乎? 吾丈曾與令姪士仁書, 斥鄭某和好之說, 不曰: "今日背先人, 明日得千駟萬鐘, 苟有人心者, 何可爲也乎?" 吾以是知丈之不爲利誘也.但未知今日之事, 有何大於千駟萬鐘者, 而許前日嚴斥之和乎? 又呈練祀諸公書, 不曰: "若有意外之事, 則某當自任而不累諸公"乎? 吾以是知丈之不爲禍怵也.但今日震訴之禍, 未必吾丈之獨當.而諸人之不擔, 何遽屈不累諸公之志, 預慮不獨當之禍乎? 吾丈前後文字, 山堆如也, 百世之公論, 雷厲如也.且無所利也, 無所怵也, 無所益於後事也, 何苦而欲棄前節, 甘受今與後不義之斥乎? 絶不敢知也.鳴呼, 生不自量度, 從事辨討, 竟遭罔測之辱於彼輩, 賊反荷杖, 諺或有之, 付之一笑者久矣.至於今日吾丈之忽然改度, 師誣洗否之大關係焉, 一告再告而不見聽, 則當三告, 三告則已數, 而或遭吾丈之疎遠.念到于此, 又欲啜其泣矣.雖然吾丈是親受先師遺書之人, 豈有至此之理? 區區之憂, 知其終屬過慮也.但細觀下喩, 吾丈所以敎彼服罪者, 不以誣師, 而止以累師; 彼之所欲告基者, 不以服誣, 而止以引咎, 而吾丈又望其時月見效.然則吾丈前日盡力討震者, 但以累親, 而不以誣親, 但以彼自失之咎, 而不以誣師之罪乎? 反覆思惟, 終不識吾丈之意, 則又惘然無以爲懷也.綂賜深鑑, 下答千萬. 삼패문(三悖文) 3인의 패륜적 문건으로 오진영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의 우익을 자처한 최원(崔愿), 김세기(金世基), 정운한(鄭雲翰)의 서신을 말한다. 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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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季弟汝安 甲戌 자유(子由)가 초 3일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도를 구하는 간절함과 학문을 하는 근실(勤實)함, 이는 근래 노소(老少)중에서 비할 데가 없을 게다. 어찌 그 경쾌한 발굽이 한껏 내달리다가 중도에 넘어지고, 아름다운 곡식이 이미 이삭을 틔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할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 애석하고 애석하구나.7월 중 그 아이가 나를 보러 이곳에 왔었는데 내가 너의 병을 간호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네가 불행히도 학문을 달성하지 못할까 몹시 걱정하고 우려하며 돌아갔단다. 아직 몇 십일도 되지 않아 그 아이가 이렇게 되다니, 사람일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해보면 성인이 수(壽)를 오복(五福)의 으뜸에 둔 것이 어찌 평생 배부르고 편안한 것을 취한 것이겠느냐. 대개 그 덕업을 다하고 사람의 분수를 다 채우고자 한 것이다. 유호덕(攸好德 덕을 지키기를 좋아한다)98)과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죽음)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안자가 장수하지 못하여 세상을 교화하지 못한 것이 천고의 한(恨) 가운데 하나란다.지난번 너의 병은 필시 불행이라고 이를 만하였는데 마침내 무사하였다. 이는 어찌 하늘이 너를 오래 살게 하여 뜻과 소원을 달성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름지기 '하늘이 나를 이처럼 아끼는데도 내가 만약 저버리면 참으로 사람이 아님'을 항상 생각하여라. 또 '내가 만약 그때 자유처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면 어쩌겠는가?'를 항상 생각하여라. 환난 속에서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고난 속에서 십배면려(十倍勉勵)하는 것이 지극히 옳고 옳을 것이다. 子由以初三日, 不幸長逝矣.念渠求道之切, 爲學之勤, 此近老少無與爲比.豈意其快蹄方馳而中倒, 嘉穀旣秀而不實? 惜哉 惜哉! 七月中, 渠爲見余來此, 聞余往救汝病, 恐汝不幸而未究其學, 深致憂慮而歸.曾未幾旬, 渠乃至此, 人事誠不可測.因思聖人居壽於五福之首者, 豈取其飽安終身哉? 蓋欲其造極德業充盡人分也.觀於攸好德考終命, 其意可知.所以顔子無壽而未化, 爲千古一恨.向日汝病, 可謂必無幸矣.而竟得無事.安知非天欲壽汝而俾究志願耶? 須常思"天愛我若此, 而我若靠負, 眞非人也.又常思'我若當時溘然若子由者, 奈如之何? " 百折不回於顚沛之際, 十倍加勉於艱難之中, 至可至可.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 《서경》 〈홍범〉에, "오복은 첫 번째는 장수이고 두 번째는 부이며 세 번째는 강녕이고 네 번째는 덕을 좋아함이며 다섯 번째는 고종명이다.[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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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신미년(1931) 與季弟汝安 辛未 형관(炯觀)의 혼사가 여태 정해지지 않아 아마 듣고서 불쌍히 여기리라 생각된다. 대개 "가난이 문둥병보다 추하다."고 옛 속담에 말하였고, '구학문(舊學問)은 부패했다.'는 것이 지금 세상의 공론이다. 이 두 가지를 겸하였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코를 막고서 달아나려 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도리어 가리고 분별하는 바가 있으니 말하자면, "나에게는 세 가지 취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같은 성씨, 기년복(朞年服) 이상의 상(喪)을 당한 이, 부조(父祖)가 몸을 훼손한 이는 마땅히 맞지 않아 합치되기 어렵다."이다.나를 힐난하는 이가 말하기를, "본관이 다르고 성이 같은 혼인은 나라의 풍속에 유래가 오래되었고, 선현도 이를 면하지 못하였소. 거상(居喪) 중에 혼인하는 것은 학문에 독실하고 덕이 훌륭한 사람들도 근래에 많이 행할 뿐만 아니라, 저쪽에 상제(喪制)가 있는 것은 절로 저쪽 일에 속하지, 그대가 어찌 거기에 관련이 있소. 부조(父祖)가 몸을 훼손한 것은 대성(大姓)과 거족(巨族) 중에는 거의 집집마다 있는 것이오. 그대는 후생으로 학문이 남보다 아래고 친족도 번성하지 못하면서 구구히 이 세 가지 조건을 지켜서 굽히지 않으니, 심하오, 그대가 시국에 우활하여 일을 그르침이여!"라고 하였다.이는 공리(功利)로 말한 것이지 도의(道義)의 논의는 아니다.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변하지 않는 도[天經]에서 비롯되고, 성인의 가르침에 확립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 선 왕조에서 법으로 금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여기는 것은 고려의 풍속이 흘러 전해온 때문인데 선현이 면하지 못한 것은 심력이 미치지 못해서이다. 선비의 입신(立身)과 행기(行己)는 절로 정격(定格)이 있으니, 어찌 전례의 미진한 것으로 준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상례 중에 시집이나 장가가는 것은 《소학》에서 엄밀히 따지고96), 《가례》에서 분명히 금하였다.97) 요즘 학문하는 집안마저 무릅쓰고 행하니 의(義)를 팽개치고 도(道)를 어김이 심한 것은 애초에 말할 수도 없다. 저쪽에서 예를 범하는 것은 비록 저쪽 일에 속하지만, 우리가 그와 더불어 혼인하면 우리가 저쪽의 죄를 만드는 것이니 또한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몸의 훼손 여부는 화(華)ㆍ이(夷)의 큰 경계(境界)이다. 천하가 어지러워 더 이상 제한이 없음은 내 힘으로 구원할 바가 아니나, 오직 나는 자손이 화(華)를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먼저 오랑캐 모습을 취한 이가 존귀한 장인과 친밀한 시아버지가 된다면, 비단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자식에게서 중정(中正)함을 빼앗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 가지 관문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觀兒婚事, 尙此未定, 想聞之憫然也.蓋"貧醜於癩.", 古諺云然.舊學腐敗, 今世公論.兼此二者, 人之見我, 將掩鼻而走也.我乃反有所揀別, 而曰:"吾有三不取.同姓也, 有朞以上喪也, 父祖毁形也, 宜乎其戛戛而難合也."有譏余者曰:"貫異姓同之昏, 國俗尙矣, 先賢亦不免焉.乘喪而昏, 不惟篤學長德, 近多行之, 彼之有喪, 自屬彼事, 子何與焉? 至於父祖毁形, 大姓巨族之殆乎家家有者也.子以後生, 學出人下, 族又不盛, 區區守此三關而不撓, 甚矣, 子之迂局敗事也!" 此就功利上說, 非道義之論也.不取同姓, 出於天經, 而立於聖敎, 亦粵我先王朝法禁也.國人之滔滔, 因麗俗之流傳, 先賢之不免, 是心力之不及.士子立身、行己, 自有正格, 豈可以前例之未盡者爲準乎? 喪中嫁娶, 嚴討於《小學》之書, 明禁於《家禮》之篇.近日學家之冒行, 棄義悖道之甚者, 初不可說.彼之犯禮, 雖屬彼事, 我與之昏, 則我成彼罪, 亦不敢爲也.形之毁否, 華夷大防.天下淪胥, 無復制限, 非吾力之所捄, 惟是我欲子之守華也.而先取夷形者, 作其丈人之尊、半父之親, 非惟吾心之不安, 亦豈不奪中於子乎? 此三關者, 決不可得以踰也. 상례……따지고 《소학》 〈명륜(明倫)〉에 "여자는 다섯 가지 취하지 않음이 있다. 역적 집안 자식은 취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집안 자식은 취하지 않는다. 대대로 형벌을 받은 이가 있으면 취하지 않는다. 대대로 나쁜 질병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장자를 잃었으면 취하지 않는다[女有五不取.逆家子, 不取 : 亂家子, 不取 : 世有刑人, 不取 : 世有惡疾. 不取 : 喪父長子. 不取.]"라는 구절이 보인다. 《가례》에서……금하였다 《가례》 〈혼례(昏禮)〉에 "본인과 혼례를 주관하는 이가 기복제 이상의 상제가 없으면 혼례를 할 수 있다.[身及主昏者, 無朞以上喪, 乃可成昏.]"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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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유고 발문 【경오년(1930)】 琴谷遺稿跋 【庚午】 금곡 이문록(琴谷李文錄)161)공의 유고는 시와 문장 몇 편을 묶은 것인데 시가 8할을 차지한다. 세상 사람들은 선비의 우열을 저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평가한다. 또 어떤 이는 산문을 중시하고 시가를 경시하는 자가 있어, 툭하면 "시가 많다 해도 무에 볼 게 있는가?" 라고 한다. 둘 다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쓴 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나, 그 덕은 맹자가 미칠 수 없고, 공자가 육경(六經)을 손보았으나 시를 취하지 않고 버린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공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났고 예의는 세속의 모범이었으니, 그 조행이 진실로 탁월하였다. 그는 진사에 뽑혔는데 하찮은 명리를 구하지 않고, 반대로 높은 지향과 구차하지 않은 성신(誠愼)을 얻었다. 세상에는 쌓인 저서가 자기 키 만큼 되지만 어긋난 행실로 더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도 있는데, 공의 어짐을 보고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을 것이다.공의 시구들 중에서, "곧은 대와 연한 풀은 무엇이 다른가, 이제 두고 보소 된서리 견뎌내는 모습을[貞篁軟卉誰能辨, 待他將看耐勁霜]"은 굳세고 변함없는 지조이다. "문을 열면 여뀌 붉은데 밀물 차오르고, 발 걷으니 푸른 오동 위로 달 떠오르네.[門開紅蓼潮登後, 簾捲靑梧月上初]"는 화창하고 상쾌한 기상이다. 나아가 지조를 언술한 〈수세음(守歲吟)〉과 정치를 풍자한 〈우핵(雨核)〉에서는 공의 분수를 편안히 지키는 공부와 세상을 경륜할 도량을 볼 수 있다.저 거창하고 난만한 작품들은 그 화려한 빛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지만 한 마디도 귀에 담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 글들을 보면 과연 어떠한가! 나는 평언을 바라는 본 댁의 청에 따라 이와 같이 소견을 논하며, 세상 사람들이 우열과 경중을 잘못 아는 미혹을 풀고자 한다. 琴谷李公遺稿, 總詩文若干篇, 而詩居十之八。 世之人論士優劣以著述多寡, 又有重文而輕詩者, 輒曰: 詩稿雖多, 奚以觀? 皆惑也。 顔淵未聞有成書, 而其德非孟氏之所及。 孔子之修六經也, 未嘗棄詩而不取, 此可以知也。 公誠孝根天, 禮義範俗, 則行固卓爾也。 其選上庠, 非屑屑名利, 而得者則志尙又不苟矣。 世有著書等身而虧行汙名者, 視公之賢, 可知愧死焉。 其詩如'貞篁軟卉誰能辨, 待他將看耐勁霜, ' 剛堅不渝之操也。 '門開紅蓼潮登後, 簾捲靑梧月上初, ' 和暢灑落之象也。 至於守歲吟之言志, 雨核詩之諷政, 又足以見安分之學、經世之器也。 彼鉅章漫篇, 炳烺眩人, 而無一言足聽者, 觀此又何如也? 故余於本家相言之請, 論其所見如此, 以開夫世人優劣輕重之惑者。 이문록(李文錄) 1779~1843, 본관은 고부, 자는 학중(學中), 호는 금곡(琴谷)이다. 부안출생의 효자로 유명했고 35세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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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84세) 고문서-증빙류-호적 辛卯 行郡守 李箕斗 辛卯 郡守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行郡守[押]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91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91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는 모두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이며, 나이가 84세(무진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유원, 조가 증통정대부이조참의 국진, 증조가 증통훈대부사복시정 규명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정부인으로 추봉되었으며 나이가 79세(임신생), 본관이 전의이다. 적(籍) 아래에 고(故)자가 있어 고인(故人)이 되었음을 나타내므로 그의 사조는 생략되었다. 호주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장자가 현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43세(기유생)이다. 맏며느리는 조씨인데, 나이가 48세(갑진생)이며 본관이 한양이다. 차자는 우용인데, 직역이 유학이며 나이가 34세(무오생)이다. 둘째며느리는 나씨인데, 나이가 38세(갑인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천구질에는 비 1명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둑덕(48세)이다. 하단에는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비스듬하게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또 약간 오른쪽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썼으며 그 위에 관인을 찍었다. 신묘식(辛卯式)은 신묘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제일 끝에는 행군수(行郡守)라 쓰고 그 아래에 서압(署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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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里 可川村 第統第戶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 李箕斗 年八十一戊辰 本星州 父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有源 祖 贈通政大夫吏曹參議 國鎭 曾祖 贈通政大夫司僕寺正 奎明 外祖 學生 羅商佐 本錦城 妻 貞夫人 李氏 齡七十七壬申 籍全義 父 學生 承植 祖 學生 懿鉉 曾祖 學生 志粲 外祖 學生 尹範殷 本咸安 子 幼學 玄容 年四十己酉 婦 趙氏 齡四十五甲辰 籍漢陽 子 幼學 瑀容 年三十一戊午 婦 羅氏 齡三十五甲寅 籍錦城賤口秩 婢 㪲德 年四十五戊子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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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81세) 고문서-증빙류-호적 戊子 李箕斗 戊子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88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88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는 모두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이며, 나이가 81세(무진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유원, 조가 증통정대부이조참의 국진, 증조가 증통훈대부사복시정 규명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정부인으로 추봉되었으며 나이가 77세(임신생),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승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장자가 현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40세(기유생)이다. 맏며느리는 조씨인데, 나이가 45세(갑진생)이며 본관이 한양이다. 차자는 우용인데, 직역이 유학이며 나이가 31세(무오생)이다. 둘째며느리는 나씨인데, 나이가 35세(갑인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천구질에는 비 1명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둑덕(45세)이다. 중앙에는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비스듬하게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하단에서 약간 오른쪽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썼으며 그 위에 관인을 찍었다. 끝의 무자식(戊子式)은 무자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그 아래에는 보성군수의 서압(署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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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진영에게 고소를 당한 뒤 막내 동생 여안264)의 시에 차운하다 6월 被震訴後 次舍季汝安韻 【六月】 약관에 사도265)를 추구하여 弱冠求斯道벌써 흰 머리가 빛나구나 鬂霜已生光부친과 스승의 평생 가르침은 父師生平敎음을 배척하고 양을 부양함이라 斥陰與扶陽일음의 우레266)를 차마 보랴 忍見一陰震육양의 담장267)을 부수는구나 打破六陽墻스승을 속이고 선비들을 해치니 誣師復禍士그는 하늘도 두려워 않는구나 其不畏上蒼세도의 근심거리 생각하나니 言念世道憂굽이굽이 애간장이 끊어지구나 曲曲斷寸腸글 지어 현동 묘소에 고하는데 綴文告玄阡봉분268)엔 가을풀만 무성하네 秋草蔭斧堂한 번 죽음 뭐 그리 애석하랴 一死何足惜단지 도가 망하지 않길 원하네 但願道不亡원컨대 함께 부친과 스승 따르고 願同遵父師생사간에 상도를 바꾸지 않으리 死生無易常서풍을 맞으며 한 번 맹세하고 一誓臨西風돌아가는 기러기 떼 슬피 보네 悵看歸鴈行 弱冠求斯道, 鬂霜己生光.父師生平敎, 斥陰與扶陽.忍見一陰震, 打破六陽墻.誣師復禍士, 其不畏上蒼.言念世道憂, 曲曲斷寸腸.綴文告玄阡, 秋草蔭斧堂.一死何足惜, 但願道不亡.願同遵父師, 死生無易常.一誓臨西風, 悵看歸鴈行. 여안(汝安) 김택술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字)이다.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도(道)를 말한다. 일음의 우레[一陰震] 음진(陰震)은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吳震泳)을 가리킨다. 육양의 담장[六陽墻] 간재(艮齋)의 높은 도를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말을 빌려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말을 전하자 자공이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라 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알 수가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고 하였다. 봉분 원문의 '부당(斧堂)'으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봉분이 당같은 것도 보았고 …… 도끼같은 것도 보았다.[見封之若堂者矣, …… 見若斧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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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한 자를 성토하고 배신자를 배척한 일을 벗 정경산 기성 이 도와준 것에 감사하며 2수 謝敬山鄭友【基聲】贊討誣斥倍 【二首】 스승 위해 몸이 꺾이는 것도 생각할 겨를 없어 爲師不暇念身摧외로운 군대 힘껏 이끌어 적의 수괴 성토했네 勖率孤軍討賊魁도를 밝히는데 공이 있다면 지나친 말이나 明道有功雖過語음이 다하면 혹여 한 양이 열리는 걸 보리라 窮陰或見一陽開-진영(震泳)241)-여문242)의 죄안을 스스로 펼쳐 열었으니 驪文罪案自陳開시호243)처럼 의심스런 마음이 그 근원 되었네 市虎疑情作厥胎죄상을 아는 데 어찌 꼭 맑은 거울 비춰보랴 知狀何須淸鑑照이제 배반하지 않았다 하니 마음244)도 어둡네 謂玆不叛昧靈臺-용승(容承)245)- 爲師不暇念身摧, 勖率孤軍討賊魁.明道有功雖過語, 窮陰或見一陽開.【震洙】驪文罪案自陳開, 市虎疑情作厥胎.知狀何須淸鑑照, 謂玆不叛昧靈臺.【容承】 진영(震泳) 오진영(吳震泳)을 말한다. 김택술은 오진영이 스승 간재의 뜻을 어기고 일제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했다고 비판하였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시호(市虎) 있지도 않은 것도 계속 반복하면 사실처럼 믿게 되는 유언비어를 말한다.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결국 믿게 된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內儲說上》 마음 원문의 '영대(靈臺)'로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영대를 침입하지 못한다.[不可內於靈臺.]"라고 하였는데, 곽상(郭象)의 주(注)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고 하였다. 용승(容承) 김용승(金容承)을 말하는 것으로, 후창이 쓴 〈관김용승백천재기언(觀金容承百千齋記言)〉을 보면 "그 스승을 배반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其爲倍師也, 蔑以加矣.]" 등의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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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사에 춘우정 김공287)을 봉안할 때의 축문【을유년(1945)】 泌陽祠春雨亭金公奉安祝文【乙酉】 빛나고 빛나는 매옹288)은 赫赫梅翁사문의 맹종이요 斯文盟宗빼어난 인산289)은 仁山有卓고족290) 가운데에 나열되었다오 列高足中누가 인의 단서를 이었는가 孰繼仁緖춘우정이 있으니 春雨有亭순수하고 바름은 전수받은 것이요 純正淵源온화하고 돈후함은 품부 받은 것이라네 和厚稟生의방291)은 연원이 있으니 義方有自현인인 성은292)으로부터였고 城隱其賢세덕을 미루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推溯世德월봉293)과 명천294)이 있다네 月峯鳴川학문은 충신을 주장하고 學主忠信마음은 성경을 오로지하여 心專誠敬정성스레 지키고 拳拳其守부지런히 공부하였네 孜孜其程하늘이 보이는 곳에서는 눕지 않았으니 見天不臥홀로 있을 때를 삼감이 지극하였고 至哉謹獨도둑을 불쌍히 여겨 사다리를 구해다 놓으니 矜盜覓梯인이 충족되었도다 仁用充足실행하지 못했으면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未行恐聞계로가 이와 같은 뜻을 지녔고295) 季路同志아무리 무식하여도 또한 가르쳐주었으니 空空亦敎공자도 이미 하신 일이라네296) 宣尼已事지금의 학문을 끊고 하지 않으며 絶今不爲오직 옛 도와 똑같이 하려 하였네 惟古是同존왕양이297)를 엄하게 하니 尊攘其嚴춘추대의가 높아졌다네 春秋義隆평생의 학문이 蓋生平學인의에 있었으니 在乎仁義평상시이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이거나 于常于變어찌 혹시라도 떠났겠는가 豈其或離사직에 지붕이 설치되었을 때298)에 逮夫屋社충분이 들끓어 올랐으니 忠憤炳炳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여 歸潔有道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바쳤네299) 一心獻靖어찌 저 원수 같은 금나라는 夫何讐金온갖 방법으로 으르고 더럽혀서 脅汙百端물리치고 물에 던지더니 牢却投水마침내는 뭇 산들을 무너뜨리는가 竟隕群山의대에 찬을 남겨 衣帶有贊문문산과 궤적을 함께하였으니 同轍文文그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한 것이 其所成取고인에 부끄럽지 않도다300) 不愧古人풍성이 이르는 곳마다 風聲攸曁사림들에게 광채가 더해지니 光增士林그 의열을 사모하는 것은301) 羹墻義烈삼십년 지난 지금도 여전한다네 卅載餘今마침내 하늘이 뉘우침에 屬玆天悔큰 원수를 몰아내었으니 驅逐鉅讐오랑캐302)들이 깨끗이 腥塵掃淸나라 안 여러 고을에서 사라졌도다 環海列州태산이 있는 고을이라 泰山之鄕선생을 제사지낼 만하니 先生可祭학문으로 보나 절의로 보나 以學以節누가 다시 이견을 세우겠는가 孰復立異사우가 완성되자 祠宇旣成오르내리며 퍼져 숙연하게 하는지라303) 陟降悽焄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304) 籩豆簿正유자305)들은 재빠르게 달려 다니네 章縫駿奔무성의 이웃이요 武城之隣비수의 북쪽이로다 泌水之陽정일의 제사에 어그러짐이 없으니 丁禋莫愆영원토록 향기로우리라 永世芬芳 赫赫梅翁, 斯文盟宗, 仁山有卓, 列高足中.孰繼仁緖, 春雨有亭, 純正淵源, 和厚稟生.義方有自, 城隱其賢, 推溯世德, 月峯、嗚川.學主忠信, 心專誠敬, 拳拳其守, 孜孜其程.見天不臥, 至哉謹獨, 矜盜覓梯, 仁用充足.未行恐聞, 季路同志, 空空亦敎.宣尼己事.絶今不爲, 惟古是同, 尊攘其嚴, 春秋義隆.蓋生平學, 在乎仁義, 于常于變, 豈其或離.逮夫屋 社, 忠憤炳炳, 歸潔有道, 一心獻靖.夫何讐金, 脅汙百端, 牢却投水, 竟隕群山.衣帶有贊, 同轍文文, 其所成取, 不愧古人.風聲攸曁, 光增士林, 羹墻義烈, 卅載餘今.屬玆天悔, 驅逐鉅讐, 腥塵掃淸, 環海列州.泰山之鄕, 先生可祭, 以學以節, 孰復立異.祠宇旣成, 陟降悽焄, 籩豆簿正, 章縫駿奔.武城之隣, 泌水之陽, 丁禋莫愆, 永世芬芳. 춘우정(春雨亭) 김공(金公) 김영상(金永相, 1836~1911.)로, 춘우정은 그의 호이다. 자는 승여(昇如), 초명은 김영조(金永朝), 본관은 도강(道康)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매옹(梅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응(伯應)ㆍ백림(伯臨),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이 있다.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 1814~1889)으로, 인산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나이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할아버지인 수구(洙榘)에게 학업을 닦았으며,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1858년(철종9) 도백(道伯)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1881년(고종18) 선공감 가감역, 전설시 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집(仁山集)》 17권이 있다. 고족(高足) 품행(品行)과 학식이 우수한 문인(門人)이나 제자를 의미한다. 의방(義方)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가정교육을 의미하기도 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성은(城隱) 춘우당의 아버지인 김경흠(金景欽, 1815~1880)으로, 성은(城隱)은 그의 호이다. 자는 덕현(德玄)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월봉(月峯) 춘우당의 9대조 김대립(金大立, 1550~미상)으로, 월봉(月峯)은 그의 호이다. 자는 신부(信夫)이다. 명천(鳴川) 춘우당의 8대조 김관(金灌, 1575~1635)으로, 명천(鳴川)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옥이(沃而)이다. 실행하지……지녔고 계로(季路)는 자로의 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으면 행여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일이라네 《논어》 〈자한〉에 공자가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양단을 들어서 다 말해주노라.[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실(王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할 때 이 원칙에 입각하였으므로,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고 한다. 사직에……때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에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신의 뜻을 바쳤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의대(衣帶)에……않도다 문문산(文文山)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으로, 문산(文山)은 그의 호이다. 문천상이 47세의 나이로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 띠에 찬(贊)을 남겼는데, 그 찬에 "공자께서는 인(仁)을 이루라고 하였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고 하였네. 생각건대 의를 다하면 인은 이르는 것이다. 성현들의 글을 읽고 배운 바가 무슨 일인가. 지금에나 이후에나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사모하는 것은 원문은 '갱장(羹墻)'인데, 이는 국과 담장을 보기만 하여도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는 말로 돌아가신 선왕이나 현인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랑캐 원문의 '성진(腥塵)'은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청나라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오르내리며……하는지라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그 기운이 발산하여 위로 날아 올라가서, 소명하고 훈호하고 처창함이 된다.[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해설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이고, 그 기운이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훈호이고, 사람의 정신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라고 하였다. 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께서 먼저 문서상으로 제기에 올릴 제수를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음으로써, 공급하기 어려운 사방의 귀중한 물품들을 문서상으로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은 제기에 올리지 못하게 하셨다.[孔子先簿正祭器, 不以四方之食, 供簿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자들 원문의 '장봉(章縫)'은 장보봉액(章甫縫掖)'의 줄임말로, 유자(儒者)로서의 지위, 곧 유자를 이른다. 《예기》 〈유행(儒行)〉에 "저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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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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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을유년(1945) 8월 무인삭(戊寅朔) 15일 임진일(壬辰日)에 문인(門人) 김택술과 조제원(趙濟元)은 삼가 선사 간재선생(艮齋先生)의 초상에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선생의 학문은 先生之學인을 체득하고 의를 따르는 것이었으니 體仁用義오직 그 의를 다하는 것이 惟其義盡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282) 所以仁至의를 어디에 다하여야 하겠습니까 盡義于何만 가지 모든 일에 하여야 하니 有萬其事화이와 군신에 대한 것이 華夷君臣바로 그 중 큰 것입니다 是其大致재앙 낀 시운을 만나 時値劫運섬의 왜인이 유리한 상황을 틈타서 島倭乘利우리나라의 땅을 빼앗고 奪我疆土우리 종묘의 기물을 부수었습니다 毁我宗器화가 군상에까지 미쳐 禍及君上전후로 원통하고 분한지라 前後寃懥함께 한 하늘을 일 수 없겠기에 頭不共天마침내 피란길을 떠났습니다 身乃避地십여 년이 지나도록 積十餘年눈물만 흘리고 있으나 有泫其淚인의의 바른 학문은 仁義正學변함없이 공론에 남아있습니다 公議無異오호라 嗚呼왜놈들이 없어진다면 그 즉시 죽더라도 倭亡卽死전혀 슬프지 않을 것이라며 萬萬無悲감개가 격렬하여 感慨激烈선생께서 시를 지으셨지요 先生有詩또한 검남의 시인 亦誦劒南〈시아〉의 노래의 示兒之詞중원을 평정하던 날 定中原日네 아버지께 고하라는 가사를 외우시고는283) 告乃翁祠고인의 말씀이 云古人言나보다 먼저 터득하였다 하셨는데 先我獲之그 말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아 言猶在耳마치 어제 들었던 듯합니다 如昨日時다행이 이제 幸玆호천이 비로소 돌아와284) 皓天始返나라의 명운이 다시 새로워지자 邦命重新지사들은 지혜를 내고 志士運智열강은 군대를 도와주어 列强助軍저 왜놈들 쓸어버리기를 掃去彼倭등에나 모기를 내쫓듯이 하고 如逐蝱蚊그 소굴까지도 幷其巢穴쳐부수고 불살랐습니다 載擣載焚우리 청구를 수복하여 復我靑邱강산에 아무런 탈이 없게 되니 無恙河山만백성이 모두 경사스럽고 萬姓普慶온 나라가 함께 기뻐합니다 八方同歡선생의 言念先生그날의 유언을 생각해보니 當日遺言이 쾌한 일을 보고서 見此快事어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豈容昧然그 곧장 지체가 없어야 하겠기에 宜卽無緩삼가 이에 거듭 아룁니다 謹玆告申바라건대 존령께서는 伏惟尊靈상청에서 기뻐하시고 喜動上淸구원에서 한을 푸시며 恨消九原때에 따라 조화를 타고서 因時乘機상제의 대궐을 출입하시어 周旋帝閽묵묵히 치도를 돕고 默相治道우리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리며 惠我生民가만히 유학을 보우하고 冥佑儒學우리 사대부들을 빛나게 해 주소서 輝我冠紳삼가 아룁니다 謹告 維歲次乙酉八月戊寅朔十五日壬辰, 門人金澤述、趙濟元, 謹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先生之學, 體仁用義.惟其義盡, 所以仁至.盡義于何, 有萬其事.華夷君臣, 是其大致.時値劫運, 島倭乘利.奪我疆土, 毁我宗器.禍及 君上, 前後寃懥.頭不共天, 身乃避地.積十餘年, 有泫其淚.仁義正學, 公議無異.嗚呼! 倭亡卽死, 萬萬無悲.感慨激烈, 先生有詩.亦誦劒南, 〈示兒〉之詞.'定中原日, 告乃翁'祠.云 : "古人言, 先我獲之." 言猶在耳, 如昨日時.幸玆皓天始返, 邦命重新.志士運智, 列强助軍.掃去彼倭, 如逐蝱蚊.幷其巢穴, 載擣載焚.復我靑邱, 無恙河山.萬姓普慶, 八方同歡.言念先生, 當日遺言.見此快事, 豈容昧然.宜卽無緩, 謹玆告申.伏惟尊靈, 喜動上淸, 恨消九原.因時乘機, 周旋帝閽.默相治道, 惠我生民.冥佑儒學, 輝我冠紳.謹告." 인을……방법입니다 남송(南宋)의 정치가인 문천상(文天祥)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쓴 자찬시(自贊詩)에, "공자는 인을 이룬다 하고 맹자는 의를 취한다 하였으니, 그 의를 다하는 것이 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라네.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배운 것이 과연 무엇이겠나.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도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검남(劒南)의……시인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이다. 육유는 자는 무관(務觀), 또 다른 호로는 위남(渭南), 노학암(老學菴), 구곡노초(九曲老樵) 등이 있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뒤에 자신의 시집을 《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실패하고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시아(示兒)〉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이다. 그 시에, "죽으면 온갖 일이 헛됨 원래 알고 있지만, 다만 구주 통일을 보지 못함 슬프구나. 황제의 군사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 제사 올릴 때 네 아비에게 알리는 일 잊지 말라.[死去原知萬事空, 但愁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라고 하였다. 《劍南詩稿 卷85》 호천(皓天)이 비로소 돌아와 호천은 밝은 천도(天道)를 이른다. 《순자(荀子)》 권18 〈부(賦)〉에 "호천이 돌아오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노라. 천추에 반드시 돌아옴은 옛날의 떳떳한 도이니, 제자가 학문에 힘쓰면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歲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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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11월 계사삭 15일 정미에 문인 김택술, 최태일(崔泰鎰) 등은 손자 일중(鎰中)이 보름날 아침 첨배(瞻拜)하는 것을 말미암아 선사 간재 선생의 유상(遺像)에 고합니다."삼가 아룁니다. 사문(斯文)의 발전과 침체는 비록 기화(氣化)의 흥성과 쇠퇴에 말미암지만 또한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에 기인합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세상이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운 것이 참으로 일정한 햇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장의 마지막에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함에 스스로 힘쓴다272)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방비책에 힘입고 있습니다. 옛날 전재(全齋) 선생의 상(喪)에 가릉(嘉陵)273)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을 올렸는데, 겉으로는 칭송하는 듯하였지만 속으로 기롱하는 것을 간파한 이가 적었습니다. 문인 가운데 세력을 두려워하고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앞 다투어 무마시키려고 하였고 간혹 간파한 자들은 도리어 선생께서 그 제문을 내친 것을 지나치게 행동하여 사단을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선생께서는 시종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스승과 제자274)의 논의가 붙들어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지나 안정되었습니다. 이전에 만약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사문(斯文)이 어찌 그러한 은택을 받았겠습니까. 이 또한 선생께서 스스로 힘쓰신 효과이며 또한 뒤에 죽을 저희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지난번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275) 문인 오진영(吳震泳)이란 자가 선사께서 일찍이 문집 간행에 대해 인가하신 뜻을 두시고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앉아 계시다가 「일을 헤아려서 처리하라.」라 명하였다'고 속였습니다. 사방에서 책망이 이르는 것에 대해 변론할 때면 또한 백방으로 말을 교묘하게 하여 겉으로는 기피하면서 뒤로는 몰래 증거를 댑니다. 그러나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276)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실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가르침을 따랐다.'는 문장이 나왔으니, '인가하신 가르침'이란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남김없이 자백한 꼴이었습니다. 그런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하는 것을 지나친 행동이라고 여겨서 강한 자는 말로 드러내고 부드러운 자는 낯빛으로 드러내며 휩쓸려 따라가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옛날의 근심거리는 밖에 있어서 그 근심이 적었는데, 지금의 걱정거리는 안에 있어서 그 걱정이 더욱 큽니다. 자손과 문인이 바야흐로 그 후의 일을 잘 대응할 수 없어서 동동거리며 편안하지 못합니다.또한 김용승(金容承)277)이란 자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때에 사특한 말을 널리 퍼트리며 그 틈을 탔으니, 오호라! 불인(不仁)함이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사에게 끝도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서는 영혼에 고하는 문장278)은 너무나 패악스러우니, 문장을 구성하여 여닫는 수단은 가릉의 김평묵에 비하면 앞뒤로 똑같다고 할 수 있으며, 겉으로는 기피하고 뒤로는 증거를 대는 심술은 음성(陰城)의 오진영에 비하면 또한 피차간에 서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문장에 '사우(師友)가 사우가 되는 것은 춘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뜻 보면 병통이 없는 말인 듯하지만 이는 실로 '전날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였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의 문장에서 이른바 '저자 호랑이의 의심을 면치 못하여 그렇게 명목을 세운 것이다.'279)라고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당시 오진영의 무함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아직 선생의 유서280)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의심하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데, 유서가 이윽고 나와 오진영의 속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어도 오히려 다시 의심스럽다고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살아 있을 때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타계한 이후에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며, 무함을 알기 전에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무함을 안 뒤에는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한 것은 비록 스승을 배반함을 속이고자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버티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며 사사로이 가학을 전수한다는 둥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나열하였습니다. 오호라!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지는 운수는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바인데, 어지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이해지며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지니,281) '하늘이 그 사이에 음으로 이르게 한 것 같다.'라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오진영이 속인 것은 그 행동이 뜻밖이어서 사람들도 또한 괴이하게 여겼기에 그 말을 들을 때 곧이곧대로 여기지 않았는데, 김용승이 선사를 모독한 것은 그 일을 뒤따라 일어나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여 그 말의 그릇됨을 알아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비로소 성토하게 되었으니, 오진영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사람의 핑계거리가 되어 그의 거짓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승은 음성의 오진영과 가릉의 김평묵이 다만 스스로 외치고 스스로 화답한 것에 비하면 어떤 자이겠습니까.옛날 선생의 역량으로도 오히려 한 때에 벌어진 것도 급히 안정시키기 어려웠는데, 현재 저희들의 연약함으로 어찌 오랜 기간 벌어진 일을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한 가지 일도 오히려 어려웠는데, 더구나 두 가지 일이겠습니까.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참담하고 아픈 마음을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니, 참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힘쓸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기는 하니, 다만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 문장을 따져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한다는 뜻을 삼가 부치면서, 과연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선생의 햇빛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지조와 인으로 덮어주고 의로서 길러주는 덕이 다시 세상에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자들의 현재의 책임입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저승과 이승이 비록 다르지만 신리(神理)는 절로 통할 것이니, 외롭고 약한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때때로 강림하여 은밀하게 도와주심을 마땅히 멈추지 말아주십시오. 일이 만약 그르다면 비록 사람들의 한 때 비난에서 도망할 수는 있지만 훗날 신령이 처벌은 면키 어려울 것이니, 오히려 어찌 감히 어리석게 김용승의 번거로운 글에서 그의 허물을 본받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높으신 영령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에 이르소서." 維歲次十一月癸巳朔十五日丁未, 門人金澤述、崔泰鎰等, 孫鎰中因望朝瞻拜, 敢昭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伏以斯文隆替, 雖由氣化之盛衰, 而亦因人事之得失.是以孟子論一治一亂, 固有常數, 而卒自勉以距詖閑聖, 至今賴其彌縫矣.昔者, 全翁之喪, 嘉金之文, 鮮有識破其外贊內譏.門人之畏勢樂謟者, 爭相扳去, 其或識破者, 反以先生之斥逐爲過擧生事.惟先生始終堅確, 師生之論, 得有所扶, 久而乃定.向者若無先生, 今日之斯文, 寧有影響乎.此亦先生自勉之效, 而又以望於後死者也.越自山頹, 門人有吳震泳者, 誣先師以曾有認意, 謂'杏下獨命, 「料量爲之.」' 至其辨責四至, 則又百方巧辭, 陽諱而陰證之.及震與徐柄甲書,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文, 出而認敎之說, 自白無餘.人猶有以聲討厥罪爲過擧, 强者發於言, 柔者顯於色, 靡然不可止矣.蓋昔之患在外, 其患小, 今之憂在內, 其憂大.子孫門人, 方無以善其後, 憧憧不自安.又有金容承者, 乃以此時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平日自謂'受罔極之恩.' 而告文絶悖, 而其縱橫捭闔之手段, 視嘉金, 可謂前後一揆 ; 陽諱陰證之心術, 視陰吳, 亦可謂彼此同轍.其文有曰 : '師友之爲師友, 以其有春秋也.' 以外面觀之, 似乎無病之言, 而此實從其前日待先生以師友間之說而來, 其所以待先生以師友間者, 卽其文中所謂'不免市虎之疑而立'者也.當吳誣方張, 遺書未出, 疑之不爲大罪, 及夫遺書已出, 吳誣快明, 而猶復云爾者, 其用心之不美, 大可見矣.蓋其生前純師之, 沒後師友間之, 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間之者, 雖欲諱倍師之實, 得乎.然且抵賴, 欺人耳目, 私自傳授, 護法羅列, 嗚呼! 治亂之數, 固所難免, 而亂之愈往愈奇, 每下愈况, '天於其間若有以陰致之者.' 果有何說也? 震泳之誣, 創自意外, 人亦有怪, 其聽聞之, 不雅馴者.容承之瀆, 躡其事後, 人方藉稱, 認說之非, 虛金初討.吳終至畔師人之藉之, 有以成之.其視陰吳與嘉金之只屬自唱而自和者, 爲何如也.以在昔以先生之力量, 猶難遽定於一時者, 以當今以小子等之綿薄, 何能鎭定於餘日乎, 而一之猶難, 况其二者乎.俯仰慙痛, 天地莫容, 誠不自知其所以爲喩也.惟有一事, 可以自勉者, 只得揮其人辨其文, 而竊附距閑之義, 以待夫果能彌縫其人者, 得有所藉手, 而先生日光玉潔之操, 仁覆義育之德, 復明於世, 此小子等今日之責也.竊伏惟念, 幽明雖殊, 神理自通, 致悶孤弱, 時降陰隲, 當亦莫已之應也.事如其非, 縱逃人誅於一時, 不免神殛於來日, 尙何敢冒昧效尢於容承之瀆告乎.伏惟尊靈, 是聽是格." 맹자는……힘쓴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보이는 내용으로, 오백 년을 주기로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맹자는 "나는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행동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내쳐서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노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마지못해서이다. 능히 양주, 묵적의 도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가릉(嘉陵) 가평의 옛 지명이다. 중암 김평묵은 지도(智島)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가평읍과 가평 설악에서 강학을 하였다. 스승과 제자 여기서 스승은 전재 임헌회와 그 문도들을 가리킨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산퇴(山頹)'는 훌륭한 스승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옛날 공자(孔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哲人)이 죽겠구나.[奉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 하였는데, 그 후 곧 별세하였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스승의 죽음을 산퇴양최(山頹梁摧)라고 한다. 《禮記 檀弓上》 서병갑(徐柄甲) 자는 두익(斗益)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구계(龜谿) 서침(徐沈)의 후손이다. 보은에 거주하였다. 김용승(金容承) 자는 성선(聖先)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문원공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여주에 거주하였다. 간재선생을 배신했다고 한다. 영혼에 고하는 문장 김용승의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가리킨다. 저자 호랑이의……세운 것이다 김용승의 〈귀혜가(歸兮歌)〉에서 한 말이다. 김용승에 관하여 후창이 변론한 내용은 권15 〈김용승망고현천문변(金容承望告玄阡文辨)〉에 자세히 나온다. 선생의 유서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앞의 〈고선사유문(告先師墓文)〉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상황은……나빠지니 원래 '매하유황(每下愈况)'이란 말은 《장자》 〈지북유(知北遊)〉에서 나온 말이다. 즉 "돼지 잡는 정확(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을 때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아보는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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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달밤에 3수 初冬月夜【三首】 삼경의 눈달에 한 창문이 차가워라 三更雪月一牕寒뜰 나무가지는 비고 국화도 시들었네 庭樹枝空菊亦殘물결 고요한 강가엔 물고기 평온히 꿈꾸고 波靜江干魚夢穩이엉 얹은 산집엔 새가 편안히 깃들었네 茅添山屋鳥棲安푸른 등 사방에는 모두 훌륭한 선비인데 靑燈四座皆佳士천 가닥 흰 머리에 홀로 옛 관 썼구나 白髮千莖獨古冠즐거운 마음으로 보면 순경이 많나니 樂意看來多順境세상이 촉도처럼 험난해도237) 근심 않네 未愁人世蜀途難맑은 밤은 서재에 오르기 가장 좋아 淸宵最可上書欄푸른 하늘에 달빛을 볼 수 있어서지 爲有靑天月色看눈 가운데 솔의 마음은 전체가 굳고 雪裏松心全體固가을 끝의 산색은 십분 단정하구나 秋餘山色十分端세상의 정은 때로 무단히 나옴을 느끼나니 世情時覺無中發늙은이 회포는 즐거운 곳238)에서 느긋하네 老抱還從樂處寬당부컨대 청년아 나를 저버리지 말라 寄語靑年莫負我서로 기약한 건 한 때의 기쁨 만은 아니네239) 相期不但一時歡초가집이 소쇄하고 청산에 가까우니 茅齋瀟灑近靑山도리어 거동240)이 세상을 벗어났구나 却是行藏出世間식량을 싸온 서생이 가을 지난 뒤 모이고 裹糗書生秋後集약속을 지킨 시객은 한 낮에 돌아오네 證期詩客日中還초심을 쉽게 저버리고 어찌 몸을 마치랴 初心易負寧終己늘그막 학문 더욱 공들여 잠시도 등한하지 않으리 老學加功暫不閒청진을 말하려다 곧바로 잊었으니 欲說淸眞旋已忘망연히 스스로 기쁜 얼굴 지을 뿐 嗒然只可自怡顔 三更雪月一牕寒, 庭樹枝空菊亦殘.波靜江干魚夢穩, 茅添山屋鳥棲安.靑燈四座皆佳士, 白髮千莖獨古冠.樂意看來多順境, 未愁人世蜀途難.淸宵最可上書欄, 爲有靑天月色看.雪裏松心全體固, 秋餘山色十分端.世情時覺無中發, 老抱還從樂處寬.寄語靑年莫負我, 相期不但一時歡.茅齋瀟灑近靑山, 却是行藏出世間.裏糗書生秋後集, 證期詩客日中還.初心易負寧終己, 老學加功暫不閒.欲說淸眞旋已忘, 嗒然只可自怡顔.. 촉도처럼 험난해도 '촉도난(蜀途難)'는 '촉도난(蜀道難)'을 말한다. 촉도(蜀道)는 중국 사천성(泗川省)인 촉 땅으로 가는 길인데, 매우 험준한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세로(世路)의 험난함을 촉도에 비유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아아 험하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噫吁嚱,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했다. 즐거운 곳 안빈낙도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가 누항(陋巷)에 지내며 도를 즐거워한 것을 두고 공자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있는 것을 남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 하였다. 《論語 雍也》 서로……아니네 일생 동안 공부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자는 뜻이다. 거동[行藏] 행동거지를 말한 것이다. 본래 '행(行)'은 세상에 나와 도를 행하는 것이며, '장(藏)'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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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광과 함께 산에 오르다 2수 同玄狂登高【二首】 한가롭게 부질없이 노는 사람 되지 않으려 閑來不作謾遊人운자 뽑아 자주 산에 오르지만 싫지 않다네 拈韻登高未厭頻풍진은 안정되기 어려워 때로 또 일어나고 難定風塵時復起세월이 흘러가듯 절기는 다시 새로워지네 若流歲月序還新그대는 무슨 일이 많아 작별하려 하는가 君胡多故將爲別나 또한 무능하여 마음만 서글플 뿐이네 我亦無能但悵神청전449) 마련해 술을 산 건 취하려는 게 아니라 沽酒辦靑非取醉호탕한 흥취 일으킬 인연이 없을 것 같아서지 只嫌豪興却無因몇몇 사람과 더불어 내 마음을 풀었는데 少人可與暢吾心매양 현광과 한바탕 읊조리곤 하였지 每得玄狂爲一吟난리가 극도에 달할 땐 운세 회복을 생각하고 亂到極時思運復선비가 곤궁에 처할 때 사귐의 깊이를 보네 士當窮處見交深일찍이 걱정 가난이 그대를 옥으로 만든다450) 들었고 曾聞玉汝憂貧語또 금인의 경계하고 신중하라는 잠언451) 읽었네 且讀金人戒愼箴해 저물자 다시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았는데 向晩更登高處坐산새가 흥겹게 지저귀며 나를 위로해주네 山禽慰我好懷音 閑來不作謾遊人, 拈韻登高未厭頻.難定風塵時復起, 若流歲月序還新.君胡多故將爲別? 我亦無能但悵神.沽酒辦靑非取醉, 只嫌豪興却無因.少人可與暢吾心, 每得玄狂爲一吟.亂到極時思運復, 士當窮處見交深.曾間玉女憂貧語, 且讀金人戒愼箴.向晩更登高處坐, 山禽慰我好懷音. 청전(靑錢) 청동으로 만든 엽전을 말한다. 걱정……만든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가난과 비천과 걱정과 근심은 하늘이 장차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 해서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는 말이 나온다. 금인(金人)의……잠언(箴言) 쇠로 만든 사람으로, 말을 삼가는 상징으로 쓰인다. 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는데 오른쪽 섬돌 앞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 금인이 서 있고 그 등에는 "옛날에 말을 신중히 했던 사람이다."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卷3 觀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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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광438)에게 화답하다 和玄狂 기인439)은 본디 스스로 기인을 좋아하니 畸人本自好畸人무슨 뜻으로 날마다 자주 찾아오는가 底意相尋日日頻몸소 이르러 격의 없으니 예의 생략하나 親到無間除禮節만날 때에 이견 있어 진리를 찾는다네 見時有異覓詮眞온갖 지략은 헛된 일이 되었고 萬般志略歸虛事반평생 계책은 자문하지 않은 걸 썼네440) 半世生謀用弗詢유연히 한번 웃다가 그대로 좌망441)하니 一笑悠然因坐忘산중엔 나도 모르게 이미 늦은 봄이네 山中不覺已殘春 畸人本自好畸人, 底意相尋日日頻?親到無間除禮節, 見時有異覓詮眞.萬般志略歸虛事, 半世生謀用弗詢.一笑悠然因坐忘, 山中不覺已殘春. 현광(玄狂) 田鎰中(1891~1936)의 호이다. 전북 부안 출신이며, 간재(艮齋) 문인이다. 저서에 《현광유고(玄狂遺稿)》가 있다. 기인(畸人)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자공이 묻기를 '감히 기인(畸人)에 대해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기인이란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도 하늘과는 서로 짝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인이 인간에 있어서는 군자이고, 인간의 군자가 하늘에 있어서는 소인이 되는 것이다.'[子貢曰:敢問畸人. 曰:畸人者畸於人而侔於天, 故曰天之小人, 人之君子. 人之君子, 天之小人也.]"라고 보인다. 계책은……썼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옛날의 역사에서 상고해 보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고, 여러 사람에게 자문해 보지 않은 계책은 쓰지도 말라.〔無稽之言, 勿聽, 弗詢之謀, 勿庸.〕"라고 한 순(舜) 임금의 말이 나온다. 좌망(坐忘) 도가(道家) 용어로, 주객(主客), 물아(物我), 선악, 시비의 차별상을 모두 잊고 자연의 대도(大道)와 합치하는 정신세계를 말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자신의 사지(四肢)의 존재를 잊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물리쳐 형체가 있는 육신을 벗어나고 마음의 지각(知覺)을 버리고 대도(大道)와 동화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한다.[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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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삼일 큰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에 우박이 내리다 九月十三日 大雷電風雨雹 때는 입동 오일 전 時維立冬前五日천기가 평상과 어찌 이리 다른가 天氣一何變厥常그제부터 비가 처음 내리더니 自從大昨雨初下저녁에 바람과 우박 섞여 기세가 더 심해지네 晩雜風雹勢更長큰 천둥과 큰 번개 순식간에 일어나서 大雷大電頃刻起번쩍번쩍 콰당콰당 팔방을 울리네 爗爗轟轟震八方농가는 수확 일로 날로 바빠지는데 田家穡事日以忙응당 수많은 곡식 상자를 손해보리라 應見損却百千箱옛날 주나라의 시월지교 시에 在昔周詩十月交불안하고 불길하며 또 좋지 않다 했네208) 不令不寧幷不臧지금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 是時民生陷塗炭하늘이 재앙을 내려 군왕을 경고한다네 天將災譴警君王이렇게 청구209)에 임금 없는 날을 만나고 遭此靑邱無君日남아난 백성도 없으니210) 내 마음 상하네 靡有孑遺我心傷모르겠네 이 경고는 끝내 누구를 위함인가 不知此警竟爲誰무단히 옥황상제를 노엽게 한 게 아닌가 無乃徒然怒玉皇아니면 또 곧장 신의 도끼와 칼날을 잡고 抑亦直把神斧刃흉한 괴수 한 번 쳐서 골수를 베려함인가 一擊兇酋劈腦漿탁한 세상 굽어보며 티끌을 말끔히 씻고 俯鑑濁世淸塵埃좋은 곡식 가려 취하고 쭉정이 날려야지 選取嘉穀揚粃糠선택은 상제 마음에 달려 감히 말 못하나 簡在帝心未敢言하토의 천한 선비는 진실로 두렵구나 下土賤士誠恐惶 時維立冬前五日, 天氣一何變厥常.自從大昨雨初下, 晩雜風雹勢更長.大雷大電頃刻起, 爆爆轟轟震八方.田家穡事日以忙, 應見損却百千箱.在昔周詩十月交, 不令不寧幷不臧.是時民生陷塗炭, 天將災譴警君王.遭此靑邱無君日, 靡有孑遺我心傷.不知此警竟爲誰, 無乃徒然怒玉皇.抑亦直把神斧刃, 一擊兇酋劈腦漿.俯鑑濁世淸塵埃, 選取嘉穀揚粃糠.簡在帝心未敢言, 下土賤士誠恐惶. 옛날……했네 천둥 번개의 기상 이변은 좋지 않은 징조로 임금이 경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저 월식이야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 일식이야말로 어찌 이리 좋지 않은고.[彼月而食, 則維其常, 此日而食, 于何不臧.]"라고 일식의 변고를 말하고, 이어 "번쩍번쩍 우레와 번개 불안하고 불길하도다. 백천이 비등하고 산마루 높은 곳이 무너지도다.[爗爗震電, 不寧不令, 百川沸騰, 山冢崒崩.]"라고 하였다.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이칭으로 청구(靑邱)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남아난 백성도 없으니 재해로 백성들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가뭄이 너무 심하여 밀쳐낼 수 없네.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벼락처럼 여기고 천둥처럼 여기네. 주나라의 백성이 남은 이가 없거늘, 호천상제가 나를 남겨 두지 않으리라.[旱旣大甚, 則不可推. 兢兢業業, 如霆如雷. 周餘黎民, 靡有孑遺. 昊天上帝, 則不我遺.]"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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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일에 천태산에 올라서 선사의 〈등계화산〉 시에 차운하다 2수 重陽日 上天台山,次先師登繼華山韻【二首】 달빛을 띠고 산을 올라 세속을 벗어나니 帶月登臨出俗塵이날을 어겨 좋은 절기 못 즐길까 걱정했네 恐違此日賞佳辰곱디고운 국화 늘어져 중양절 맞았는데 姸姸菊朶重陽節슬금슬금 세월 흘러 반백의 나이되었네 鼎鼎年光半百人강호에서 실의한 옛 친구들 몇이던가 落魄江湖幾朋舊길에서 보는 것마다 모두 새로움 생기네 觸眸道路盡生新나는 용산음202) 흉내내기 부끄러워서 吾流愧學龍山飮서풍에 떨어지는 두건203) 기다리지 않네 不待西風落帽巾관산을 멀리 보니 비린내 먼지로 어둑하고 關山極目暗腥塵무슨 일로 좋은 절기에 난세를 탄식하는가 底事佳辰歎不辰중구일의 바람 서리는 노년을 재촉하는데 重九風霜催晩歲삼천리 강토에는 오래도록 사람도 없구나 三千疆土久無人수백 년의 옛 의관을 어찌 바꾸리오만 百年那變衣冠舊온 세상이 날로 달로 새로움을 다투어 자랑하네 擧世爭誇日月新국화는 피고 시도 지었는데 술은 누가 보내주나 菊發詩成誰送酒모름지기 가벼운 두건을 씻어 술을 걸러야지204) 且須漉用洗輕巾 帶月登臨出俗塵, 恐違此日賞佳辰.姸姸菊朶重陽節, 鼎鼎年光半百人.落魄江湖幾朋舊, 觸眸道路盡生新.吾流愧學龍山飮, 不待西風落帽巾.關山極目暗腥塵, 底事佳辰歎不辰.重九風霜催晩歲, 三千疆土久無人.百年那變衣冠舊, 擧世爭誇日月新.菊發詩成誰送酒, 且須漉用洗輕巾. 용산음 이백의 시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을 가리킨다. 그 시에 "중양절날 용산에서 술을 마시니, 국화가 쫓겨난 신하 비웃네. 바람결에 떨어지는 모자 취하여 바라보고, 사람을 붙잡는 달빛 춤추며 사랑하노라.[九日龍山飮, 黃花笑逐臣. 醉看風落帽, 舞愛月留人.]" 하였다. 떨어지는 두건 진(晉)나라 때 맹가(孟嘉)가 일찍이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한번은 환온이 9월 9일에 용산(龍山)에서 잔치를 열어 막료들이 모여 즐겁게 놀았는데,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맹가의 모자가 날아갔는데도 맹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풍류를 마음껏 즐겼다. 이에 환온이 손성(孫盛)에게 글을 지어 맹가를 조롱하게 하자 맹가가 곧바로 화답하였는데, 그 글이 매우 아름다워 모두들 찬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후에 이 고사로 인하여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겨났다고 한다. 《晉書 卷98 孟嘉列傳》 두건을……걸러야지 도연명(陶淵明)은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쓰고 있던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나서 다시 머리에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宋書 隱逸列傳 陶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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