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11월 계사삭 15일 정미에 문인 김택술, 최태일(崔泰鎰) 등은 손자 일중(鎰中)이 보름날 아침 첨배(瞻拜)하는 것을 말미암아 선사 간재 선생의 유상(遺像)에 고합니다."삼가 아룁니다. 사문(斯文)의 발전과 침체는 비록 기화(氣化)의 흥성과 쇠퇴에 말미암지만 또한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에 기인합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세상이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운 것이 참으로 일정한 햇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장의 마지막에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함에 스스로 힘쓴다272)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방비책에 힘입고 있습니다. 옛날 전재(全齋) 선생의 상(喪)에 가릉(嘉陵)273)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을 올렸는데, 겉으로는 칭송하는 듯하였지만 속으로 기롱하는 것을 간파한 이가 적었습니다. 문인 가운데 세력을 두려워하고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앞 다투어 무마시키려고 하였고 간혹 간파한 자들은 도리어 선생께서 그 제문을 내친 것을 지나치게 행동하여 사단을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선생께서는 시종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스승과 제자274)의 논의가 붙들어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지나 안정되었습니다. 이전에 만약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사문(斯文)이 어찌 그러한 은택을 받았겠습니까. 이 또한 선생께서 스스로 힘쓰신 효과이며 또한 뒤에 죽을 저희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지난번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275) 문인 오진영(吳震泳)이란 자가 선사께서 일찍이 문집 간행에 대해 인가하신 뜻을 두시고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앉아 계시다가 「일을 헤아려서 처리하라.」라 명하였다'고 속였습니다. 사방에서 책망이 이르는 것에 대해 변론할 때면 또한 백방으로 말을 교묘하게 하여 겉으로는 기피하면서 뒤로는 몰래 증거를 댑니다. 그러나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276)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실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가르침을 따랐다.'는 문장이 나왔으니, '인가하신 가르침'이란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남김없이 자백한 꼴이었습니다. 그런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하는 것을 지나친 행동이라고 여겨서 강한 자는 말로 드러내고 부드러운 자는 낯빛으로 드러내며 휩쓸려 따라가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옛날의 근심거리는 밖에 있어서 그 근심이 적었는데, 지금의 걱정거리는 안에 있어서 그 걱정이 더욱 큽니다. 자손과 문인이 바야흐로 그 후의 일을 잘 대응할 수 없어서 동동거리며 편안하지 못합니다.또한 김용승(金容承)277)이란 자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때에 사특한 말을 널리 퍼트리며 그 틈을 탔으니, 오호라! 불인(不仁)함이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사에게 끝도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서는 영혼에 고하는 문장278)은 너무나 패악스러우니, 문장을 구성하여 여닫는 수단은 가릉의 김평묵에 비하면 앞뒤로 똑같다고 할 수 있으며, 겉으로는 기피하고 뒤로는 증거를 대는 심술은 음성(陰城)의 오진영에 비하면 또한 피차간에 서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문장에 '사우(師友)가 사우가 되는 것은 춘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뜻 보면 병통이 없는 말인 듯하지만 이는 실로 '전날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였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의 문장에서 이른바 '저자 호랑이의 의심을 면치 못하여 그렇게 명목을 세운 것이다.'279)라고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당시 오진영의 무함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아직 선생의 유서280)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의심하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데, 유서가 이윽고 나와 오진영의 속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어도 오히려 다시 의심스럽다고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살아 있을 때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타계한 이후에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며, 무함을 알기 전에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무함을 안 뒤에는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한 것은 비록 스승을 배반함을 속이고자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버티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며 사사로이 가학을 전수한다는 둥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나열하였습니다. 오호라!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지는 운수는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바인데, 어지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이해지며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지니,281) '하늘이 그 사이에 음으로 이르게 한 것 같다.'라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오진영이 속인 것은 그 행동이 뜻밖이어서 사람들도 또한 괴이하게 여겼기에 그 말을 들을 때 곧이곧대로 여기지 않았는데, 김용승이 선사를 모독한 것은 그 일을 뒤따라 일어나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여 그 말의 그릇됨을 알아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비로소 성토하게 되었으니, 오진영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사람의 핑계거리가 되어 그의 거짓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승은 음성의 오진영과 가릉의 김평묵이 다만 스스로 외치고 스스로 화답한 것에 비하면 어떤 자이겠습니까.옛날 선생의 역량으로도 오히려 한 때에 벌어진 것도 급히 안정시키기 어려웠는데, 현재 저희들의 연약함으로 어찌 오랜 기간 벌어진 일을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한 가지 일도 오히려 어려웠는데, 더구나 두 가지 일이겠습니까.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참담하고 아픈 마음을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니, 참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힘쓸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기는 하니, 다만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 문장을 따져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한다는 뜻을 삼가 부치면서, 과연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선생의 햇빛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지조와 인으로 덮어주고 의로서 길러주는 덕이 다시 세상에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자들의 현재의 책임입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저승과 이승이 비록 다르지만 신리(神理)는 절로 통할 것이니, 외롭고 약한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때때로 강림하여 은밀하게 도와주심을 마땅히 멈추지 말아주십시오. 일이 만약 그르다면 비록 사람들의 한 때 비난에서 도망할 수는 있지만 훗날 신령이 처벌은 면키 어려울 것이니, 오히려 어찌 감히 어리석게 김용승의 번거로운 글에서 그의 허물을 본받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높으신 영령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에 이르소서." 維歲次十一月癸巳朔十五日丁未, 門人金澤述、崔泰鎰等, 孫鎰中因望朝瞻拜, 敢昭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伏以斯文隆替, 雖由氣化之盛衰, 而亦因人事之得失.是以孟子論一治一亂, 固有常數, 而卒自勉以距詖閑聖, 至今賴其彌縫矣.昔者, 全翁之喪, 嘉金之文, 鮮有識破其外贊內譏.門人之畏勢樂謟者, 爭相扳去, 其或識破者, 反以先生之斥逐爲過擧生事.惟先生始終堅確, 師生之論, 得有所扶, 久而乃定.向者若無先生, 今日之斯文, 寧有影響乎.此亦先生自勉之效, 而又以望於後死者也.越自山頹, 門人有吳震泳者, 誣先師以曾有認意, 謂'杏下獨命, 「料量爲之.」' 至其辨責四至, 則又百方巧辭, 陽諱而陰證之.及震與徐柄甲書,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文, 出而認敎之說, 自白無餘.人猶有以聲討厥罪爲過擧, 强者發於言, 柔者顯於色, 靡然不可止矣.蓋昔之患在外, 其患小, 今之憂在內, 其憂大.子孫門人, 方無以善其後, 憧憧不自安.又有金容承者, 乃以此時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平日自謂'受罔極之恩.' 而告文絶悖, 而其縱橫捭闔之手段, 視嘉金, 可謂前後一揆 ; 陽諱陰證之心術, 視陰吳, 亦可謂彼此同轍.其文有曰 : '師友之爲師友, 以其有春秋也.' 以外面觀之, 似乎無病之言, 而此實從其前日待先生以師友間之說而來, 其所以待先生以師友間者, 卽其文中所謂'不免市虎之疑而立'者也.當吳誣方張, 遺書未出, 疑之不爲大罪, 及夫遺書已出, 吳誣快明, 而猶復云爾者, 其用心之不美, 大可見矣.蓋其生前純師之, 沒後師友間之, 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間之者, 雖欲諱倍師之實, 得乎.然且抵賴, 欺人耳目, 私自傳授, 護法羅列, 嗚呼! 治亂之數, 固所難免, 而亂之愈往愈奇, 每下愈况, '天於其間若有以陰致之者.' 果有何說也? 震泳之誣, 創自意外, 人亦有怪, 其聽聞之, 不雅馴者.容承之瀆, 躡其事後, 人方藉稱, 認說之非, 虛金初討.吳終至畔師人之藉之, 有以成之.其視陰吳與嘉金之只屬自唱而自和者, 爲何如也.以在昔以先生之力量, 猶難遽定於一時者, 以當今以小子等之綿薄, 何能鎭定於餘日乎, 而一之猶難, 况其二者乎.俯仰慙痛, 天地莫容, 誠不自知其所以爲喩也.惟有一事, 可以自勉者, 只得揮其人辨其文, 而竊附距閑之義, 以待夫果能彌縫其人者, 得有所藉手, 而先生日光玉潔之操, 仁覆義育之德, 復明於世, 此小子等今日之責也.竊伏惟念, 幽明雖殊, 神理自通, 致悶孤弱, 時降陰隲, 當亦莫已之應也.事如其非, 縱逃人誅於一時, 不免神殛於來日, 尙何敢冒昧效尢於容承之瀆告乎.伏惟尊靈, 是聽是格." 맹자는……힘쓴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보이는 내용으로, 오백 년을 주기로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맹자는 "나는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행동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내쳐서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노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마지못해서이다. 능히 양주, 묵적의 도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가릉(嘉陵) 가평의 옛 지명이다. 중암 김평묵은 지도(智島)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가평읍과 가평 설악에서 강학을 하였다. 스승과 제자 여기서 스승은 전재 임헌회와 그 문도들을 가리킨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산퇴(山頹)'는 훌륭한 스승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옛날 공자(孔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哲人)이 죽겠구나.[奉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 하였는데, 그 후 곧 별세하였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스승의 죽음을 산퇴양최(山頹梁摧)라고 한다. 《禮記 檀弓上》 서병갑(徐柄甲) 자는 두익(斗益)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구계(龜谿) 서침(徐沈)의 후손이다. 보은에 거주하였다. 김용승(金容承) 자는 성선(聖先)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문원공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여주에 거주하였다. 간재선생을 배신했다고 한다. 영혼에 고하는 문장 김용승의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가리킨다. 저자 호랑이의……세운 것이다 김용승의 〈귀혜가(歸兮歌)〉에서 한 말이다. 김용승에 관하여 후창이 변론한 내용은 권15 〈김용승망고현천문변(金容承望告玄阡文辨)〉에 자세히 나온다. 선생의 유서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앞의 〈고선사유문(告先師墓文)〉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상황은……나빠지니 원래 '매하유황(每下愈况)'이란 말은 《장자》 〈지북유(知北遊)〉에서 나온 말이다. 즉 "돼지 잡는 정확(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을 때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아보는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