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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0년 이득래(李得來)의 위장(慰狀) 고문서-서간통고류-위장 庚辰十月十日 李得來 李敎成 庚辰十月十日 李得來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40년 10월 10일에 이득래(李得來)가 선부군의 상을 당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위장(慰狀) 1940년 10월 10일에 이득래(李得來)가 선부군의 상을 당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위장(慰狀)이다. 뜻밖에 부친의 부음을 받았으나 온몸에 질병의 고통으로 달려가 조위하지 못하고 위장을 보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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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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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생 여성의 장사택일기(葬事擇日記)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己巳 己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임신생 여성의 장사택일기(葬事擇日記) 임신생 여성의 장사택일기(葬事擇日記)이다. 지관이 장사지낼 날짜와 방향, 길흉 등을 적어준 문서이다. 곤화명(坤化命)이라 하여 임신생인 김씨 여성의 장례이다. 상주는 증손인 종수(鍾收) 등 3명의 이름이 있다. 고운(庫運), 산운(山運), 명운(命運), 안장(安葬) 그리고 호충(呼沖)과 사과(四課)까지 점친 내용이 기록되었다. 피봉에는 한 면에 택일장(擇日狀), 다른 면에 '보성묘소택지 동지공'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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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움 可憎 봄이 오면 또 반드시 가을 겨울이 있으니 春生亦必有秋冬잡초 없애고 새싹 살피면 독실한 농사 보리라 去莠存苗見篤農의리를 철석처럼 지킴에는 진퇴가 없어야 하니 義理鐵閑無進退시비를 조금만 잘못해도 배신과 순종에 어둡네 是非毫失昧違從원래 한나라와 역적은 나란히 설 수 없으니276) 元來漢賊不幷立이우277)가 오로지 서로 치는 것과 어찌 같으랴 豈似李牛專互攻성벽위에서 수없이 초나라 싸움을 방관하고서278) 壁上幾多觀楚戰스스로 중도를 지켰다고 자랑하니 가증스럽네 可憎自詑執中儂 春生亦必有秋冬, 去莠存苖見篤農.義理鐵閑無進退, 是非毫失昧違從.元來漢賊不幷立, 豈似李牛專互攻.壁上幾多觀楚戰, 可憎自詑執中儂. 한나라와 …… 없으니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漢)'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를 가리키고 '적(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선제(先帝)는 한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라고 하였다. 이우(李牛) 흔히 '우이(牛李)'로 일컬어지는데, 대립했던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당파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목종(穆宗)에서 무종(武宗)까지 우승유와 이덕유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우승유와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이길보(李吉甫)와 이덕유 부자(父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당시 이를 일러 '우이의 당[牛李之黨]'이라 하였다. 《新唐書 卷180 李德裕列傳》 성벽위에서 …… 방관하고서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 것이다. '초나라 전쟁'은 간재의 유고를 발간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제자들간의 다툼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거록성을 구원하러 온 제후들의 군사가 10여 성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감히 군사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모두 성벽 위에 서서 바라보니, 초나라의 전사들은 모두 일당십의 전사들이었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에 바라보던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덜덜 떨었다.[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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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이 있어서 有憂 현동 묘소의 봄 풀은 몇 번이나 푸르렀나 玄阡春草幾回靑재앙이 사문에서 나오니 배반자271)가 있네 禍出門墻有不庭음설272)이 장황하니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陰說張皇人盡醉여문273)이 현란하니 누가 능히 깨어나리오 驪文眩爍孰能醒한 세상에 거친 주먹질한 추성274)이 없고 麤拳一世無鄒聖당대에 큰 붓 휘두른 고정275)을 생각하네 大筆當年憶考亭잔약한 제자와 후손이 비록 힘을 다한들 弱弟孱孫縱盡力세운 공 어찌 충분히 알려질 수 있을까 建功那得足聞聽 玄阡春草幾回靑, 禍出門墻有不庭.陰說張皇人盡醉, 驪文眩爍孰能醒.麤拳一世無鄒聖, 大筆當年憶考亭.弱弟孱孫縱盡力, 建功那得足聞聽. 배반자 원문의 '부정(不庭)'은 왕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곧 배반을 뜻한다. 《시경》 〈한혁(韓奕)〉에 "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음설(陰說) 음성(陰城)에서 사는 오진영(吳震泳)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거친 주먹질한 추성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맹자를 말한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분이 아니며, 맹자가 어찌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고정(考亭) 주희(朱熹)를 지칭한다. 고정은 주희가 만년에 거처하던 곳으로, 1192년 이곳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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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을 보내며 送士狷 비를 빚는 봄 하늘에 석양이 가까워지니 春天釀雨近斜陽객 보낸 강 정자엔 뜻이 더욱 유장하네 送客江亭意更長노택의 창고는 어디에서 얻을까 魯宅囷倉何處得수양산 고사리만 공연히 향기롭네 首山薇蕨亦徒香전신은 원래 당시를 슬퍼했던 의론이니286) 錢神元是傷時論명교가 따라서 낙지의 고향임을 알리라287) 名敎從知樂地鄕제 힘으로 먹고산 고풍은 서자의 일인데288) 食力高風徐子事그대를 위해 만금의 방술로 가져다 주노라 爲君持贈萬金方 春天釀雨近斜陽, 送客江亭意更長.魯宅囷倉何處得, 首山薇蕨亦徒香.錢神元是傷時論, 名敎從知樂地鄕.食力高風徐子事, 爲君持贈萬金方. 전신은……의론이니 진(晉)나라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당시 금전만능의 세태를 풍자한 것을 말한다. '전신(錢神)'은 금전을 비유한 것이다. 〈전신론〉에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더구나 사람에 있어서랴.[有錢可使鬼, 而況于人乎.]"라고 하였다. 명교가……알리라 '명교(名敎)'는 유교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왕징(王澄), 호무보지(胡毋輔之) 등은 모두 제멋대로 하는 것을 통달한 것으로 여겨서 그중에는 벌거벗고 다니는 자도 있었다. 악광(樂廣)이 그를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명교 안에 본래 낙토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名敎中自有樂地, 何爲乃爾也.]" 하였다. 《晉書 卷43 樂廣列傳》 제……일인데 서치(徐穉)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서치는 동한(東漢)의 고사(高士)로 학문이 깊고 지조가 높아 남주 고사(南州高士)라 일컬어졌다. 가난하였는데 '항상 스스로 농사를 지어 자기 힘으로 번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常自耕稼, 非其力不食]', 자주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後漢書 徐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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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백 규삼 을 애도하다 挽崔明伯【圭三】 아 군은 속된 무리가 아닌지라 嗟君非俗輩오늘에 살면서 옛날에 뜻을 두고 生今志古昔상심하여 추격258)을 미워하고 傷心憎鶖鴂분발하여 봉액259)을 따르네 挺身追縫腋나는 실로 오랜 벗260)이었으니 而我實久要맺은 교분은 금석처럼 견고했네 結交堅金石선조를 위해 얼마나 성근졌던가 爲先何誠勤땅을 처분하여 묘역을 구할 때 斥土求塋域내가 운수에 매였다고 말하면 我謂係數運그대는 마음과 힘에 달렸다 했지 君言在心力비록 중도에는 조금 지나치다 해도 縱云些過中효도 생각에는 원래 끝이 없다네 孝思元靡極어찌 생각했으리 천 척의 솔이 豈意千尺松바람도 없는데 하루 저녁에 꺾일 줄 不風摧一夕꿈인가 참인가 도무지 가릴 수 없어 夢眞俱不辨푸른 하늘 쳐다보며 넋을 잃은 듯하네 仰蒼如失魄더는 무슨 말을 다시 하리오 尙何復爲言중당261)께서 백발로 계신다오 重堂垂髮白귀신이 참으로 어질지 못하고 鬼神眞不仁천리도 진실로 예측키 어렵네 天理誠難測보시라 뜰아래 빼어난 자제들을 請看庭下秀푸르고 푸른 네 포기 난초262) 자라네 靑靑四蘭植그 전형263)이 여기에 남아 있으니 典型留在玆집안의 명성은 응당 적막하지 않으리 家聲應不寂그대 돌아간들 또한 무슨 유감 있겠나 君歸亦何憾이것이 황천의 넋을 족히 위로하기를 此足慰窀穸 嗟君非俗輩, 生今志古昔.傷心憎鶖鴂, 挺身追縫腋.而我實久要, 結交堅金石.爲先何誠勤, 斥土求塋域.我謂係數運, 君言在心力.縱云些過中, 孝思元靡極.豈意千尺松, 不風摧一夕.夢眞俱不辨, 仰蒼如失魄.尙何復爲言, 重堂垂髮白.鬼神眞不仁, 天理誠難測.請看庭下秀, 靑靑四蘭植.典型留在玆, 家聲應不寂.君歸亦何憾, 此足慰窀穸. 추격(鶖鴂) '추(鶖)'와 '격(鴂)'은 모두 새인데 악인이나 이단의 무리를 비유한 것이다. 《시경》 〈백화(白華)〉에 "무수리는 어량에 있는데, 학은 숲속에 있도다.[有鶖在梁, 有鶴在林.]"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무수리와 학은 모두 물고기를 먹이로 하나, 학은 무수리에 비하면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다. 지금 무수리는 어량에 있고 학은 숲속에 있으니, 무수리는 배부르고 학은 굶주린 것이다." 하였다. '격(鴂)'은 때까치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지금 남만의 때까치 소리를 하는 사람의 말이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자의 주에 "소리가 나쁜 새이다."라고 하여 이단의 무리를 비유하였다. 봉액(縫掖) 소매가 넓은 옷으로 공자가 봉액한 옷을 입었다 하여 유복(儒服)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학을 비유한 것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입은 복장이 유자의 복장이냐고 공자에게 묻자 "나는 노나라에 살 때에는 소매가 너른 옷을 입었습니다.[丘少居魯, 衣逢掖之衣.]"라고 하였다. 《禮記‧儒行》 오랜 벗 원문의 '구요(久要)'는 오래된 약속을 말하는데 곧 오랜 친구의 뜻으로 쓰였다.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이익 앞에서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며, 오래된 약속일지라도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라고 하였다. 주자의 주에 "구요(舊要)는 오래된 약속이다.[久要, 舊約也.]" 하였다. 《論語 憲問》 중당(重堂) 조부모를 가리킨다. 네 포기 난초 네 명의 자손을 비유한 것이다. 난초는 귀한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말한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섬돌 앞 뜰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전형(典型) 자손이나 제자의 모양과 행동이 그 조상이나 스승을 닮은 틀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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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재 어른 형재 를 애도하다 挽謙齋金丈【亨載】 옛날 공과 나의 부친은 昔公與吾親교분이 얼마나 친밀했던가 交契一何密형제처럼 모친을 찾아뵙고249) 拜母若弟兄교칠250)처럼 마음을 허여했네 許心若膠漆내가 부친을 잃은251) 뒤부터는 小子自失怙공을 사모함이 배나 간절했지 慕公一倍切때로 와서 책상 아래에 절하고 時來拜床下정성스런 가르침 자세히 받들었네 款誨承纖悉공 또한 우리 집을 들르셨으니 公亦過弊廬존망의 이별은 생각지도 않았네 不以存亡別내 부친보다 다섯 살 많았으나 五歲長吾親건강하여 질환도 없으셨다네 健康無諐疾내 부친을 어디서 보려나 吾親何處見생각하니 마음이 꺾이는구나 念之寸心折칠십 살은 세상에 드문 바라 七十世所稀부친의 벗들 차례로 졸하셨네 先友次第沒공이 홀로 장수를 하여 公獨躋遐齡우러르면 영광전252)처럼 우뚝했지 仰若靈光屹오호라 공 또한 떠나시다니 嗚呼公且逝우리 마을이 빈 집 같구나 吾鄕若虛室공이 옛날 내 부친을 곡할 때 公昔哭吾親시신에 다가가 몹시 슬퍼했네 臨尸以悲絶지금 내가 선친 기일을 만난 터라 今我値先忌빈을 한 후일에야 비로소 달려갔네 始赴殯後日저승과 이승이 어제 오늘 사이라 幽明今昔間굽어보고 쳐다보며 마음 비통하네 俯仰心慟怛세상의 도가 날로 더럽고 떨어져 世道日汚下고을의 순박한 풍속도 사라졌구나 鄕黨淳風滅공의 효우의 행실을 생각하니 思公孝友行가정은 항상 화락하고 기뻐했지 家庭常和悅종족들은 그 규범을 따랐으니 宗族遵規範일자를 그은 듯이 분명했었네 較然如畵一일을 논할 땐 이치가 상세했고 論事理詳明남을 위할 땐 계모가 충실했네 爲人謀忠實이 덕을 다시 볼 수 없으니 此德不復覩시절을 아파하며 거듭 근심하네 傷時重惙惙다만 구원의 넋 위로할 것 있으니 但有慰九原후손이 계승할 수 있어서네253) 箕裘能繼述후중한 언동은 사람들이 높이고 言動推厚重문장은 더욱 간결하다네 藻翰更簡潔서로 돕고 권면하길254) 기약하니 庶期相輔責세교를 길이 잃지 않으리라 世交永不失 昔公與吾親, 交契一何密.拜母若弟兄, 許心若膠漆.小子自失怙, 慕公一倍切.時來拜床下, 款誨承纖悉.公亦過弊廬, 不以存亡別.五歲長吾親, 健康無諐疾.吾親何處見, 念之寸心折.七十世所稀, 先友次第沒.公獨躋遐齡, 仰若靈光屹.嗚呼公且逝, 吾鄕若虛室.公昔哭吾親, 臨尸以悲絶.今我値先忌, 始赴殯後日.幽明今昔間, 俯仰心慟怛.世道日汚下, 鄕黨淳風滅.思公孝友行, 家庭常和悅.宗族遵規範, 較然如畵一.論事理詳明, 爲人謀忠實.此德不復覩, 傷時重惙惙.但有慰九原, 箕裘能繼述.言動推厚重, 藻翰更簡潔.庶期相輔責, 世交永不失. 모친을 찾아뵙고[拜母] 가까운 벗 사이를 비유한 것이다. 한(漢)나라 범식(范式)과 장소(張劭)가 친하게 지내다가 각자 향리로 돌아갈 때, 2년 뒤에 범식이 장소의 모친을 찾아가 뵙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마침 그날이 돌아오자 과연 범식이 찾아와서 마루에 올라 모친에게 절을 한[升堂拜母] 뒤에 즐겁게 술을 마시고 떠나갔던 고사를 말한다.에게 인사를 올리고 즐겁게 회포를 푼 뒤 이별했다 한다. 《後漢書 獨行列傳 范式》 교칠(膠漆) 아교와 옻칠인데, 아교로 붙이면 떨어지지 않고 옻으로 칠을 하면 역시 떨어지지 않으므로 굳은 우정을 비유한다. 후한(後漢)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가 돈독한 우정을 발휘하자, 사람들이 "교칠이 굳다고 하지만, 진중과 뇌의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칭찬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獨行列傳 雷義》 부친을 잃은 원문의 '실호(失怙)'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까.[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였다. 본래 호(怙)와 시(恃)는 모두 '믿는다'는 뜻이나, 후세에서 이 시구를 근거하여 부친을 여읜 것을 실호(失怙), 모친을 잃은 것을 실시(失恃)라고 한다. 영광전 원문의 '영광(靈光)'은 영광전(靈光殿)으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나 인물을 상징한다. 영광전은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산동성 곡부(曲阜)에 건립했는데,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가 지은 〈노영광전부서(魯靈光殿賦序)〉에 "서경(西京)의 미앙(未央)과 건장(建章)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靈光巋然獨存]"라고 하였다. 후손히……있어서네 훌륭한 후손이 돌아가신 공을 이으리라는 뜻이다. 원문의 '기구(箕裘)'는 키와 갖옷으로 후손이 선대의 세업(世業)을 잇는 것인데 여기서는 후손을 비유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야공(冶工)의 자식은 반드시 배워서 갖옷을 만들 줄 알고, 훌륭한 궁인(弓人)의 자식은 반드시 배워서 키를 만들 줄 안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하였다. 서로 돕고 권면하길[相輔責] 두 집안의 자제들이 벗으로서 '보인(輔仁)'과 '책선(責善)'을 하겠다는 것이다. 《논어》〈안연(顔淵)〉에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하였고,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선행을 권하는 것은 벗의 도리이다.[責善, 朋友之道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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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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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흐른 세월 居然 어느덧 사십 칠의 나이에 맞는 봄 居然四十七年春단지 깨닫나니 성성한 백발 새롭네 但覺星星白髮新창동리244)에 견문이 고루한 몸인데 孤陋見聞滄洞里구문245)의 이웃에 명성만 허황되네 浮虛聲望臼門隣청조의 선비 건학246)을 몹시 미워하고 絶憎乾學淸朝士진대의 백성 연명247)을 몰래 사모하네 竊慕淵明晉代民창가의 눈이 분분해 울타리 국화 시드는데 牕雪紛紛籬菊老근심스레 무슨 일로 맑은 새벽에 앉아있나 悄然何事坐淸晨 居然四十七年春, 但覺星星白髮新.孤陋見聞滄洞里, 浮虛聲望臼門隣.絶憎乾學淸朝士, 竊慕淵明晉代民.牕雪紛紛籬菊老, 悄然何事坐淸晨. 창동리(滄洞里) 전북 정읍시 이평면(梨坪面) 창동리(滄東里)로 김택술의 고향이다. 구문(臼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를 가리킨다. 김택술의 스승인 전우의 호가 구산(臼山)이다. 건학 서건학(徐乾學)으로 청(淸)나라 강희제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벼슬이 형부 상서(刑部尚書)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여 경학은 물론 사학(史學), 여지(輿地), 예제(禮制) 등에 정통했으나 자주 뇌물을 받고 사익을 추구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학문에 있어서는 정주학(程朱學)을 존숭하였다. 연명 도연명(陶淵明)으로 진(晉)나라 은사(隱士)이다. 동진(東晉)이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작품에 연호를 쓸 때는 여전히 '영화'를 사용하여 진나라에 대한 충정을 드러냈다.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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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추노문서(推奴文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문중의 비적(婢籍)에서 벗어난 여자종에 대해 하소연하면서 찾아서 추봉하고 추급하라는 추노문서 문중에 탈비(脫婢)한 여비에 대하여 하소연하면서 찾아서 추봉(推捧)하고 추급(推給)하라는 문서이다. 8대조(八代祖)부터 조고(祖考)까지 투매(偸賣)의 폐단이 있어 남은 것은 다만 11두락(斗落)뿐이어서 수십 년 지내던 봉향(奉享)도 못할 정도로 염려가 되고 있다면서 그동안의 쇠락하게 된 과정을 기술하였다. 가뭄으로 산지기의 결역(結役)도 못주어 결국 다른 마을로 가버릴 때에, 선산 묘지의 결복(結卜)에 선공후사의 의리를 발휘하여 문중의 전답을 헐값에 팔아 납부하였고, 여자종들이 환퇴하였을 경우에 시천(詩川)‧가천(可川)‧목사동(木寺洞)은 각각 50냥씩 할당하였다. 그런데 제동(齊洞)의 이학삼(李學三)이 이를 몰래 막고 희롱하는 것을 조종하였다. 게다가 가세가 탕패(蕩敗)하는 것을 문중에서 억눌렀는데 여자종 네 명의 모녀가 이백 냥을 2명의 여자종에게 부탁하여 보성(寶城)의 땅을 차례로 빌려서 비적(婢籍)에서 빼려는 마음으로 투매를 하였다. 목사동(木寺洞) 이인순(李仁淳) 집에서는 아이 때부터 이십여 년 된 문노가 4, 5대 유래한 노비이건만 자신의 호적의 끝자락과 대명률(大明律) 전답(田畓) 문기(文記)에 함께 기록된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어서 찾지 못하니 억울하다고 하였다. 이에 이학삼 쪽의 100냥과 이자 1백 40냥과 이인순 쪽의 매비 200냥과 이자 1천 8백 냥을 일일이 추급(推給)하여 주고 잡아서 엄히 징치하며 본전의 이자를 일일이 추봉하여 공연히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도록 할 일이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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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후태 군에게 주다 贈徐君厚泰 내가 서씨의 아들을 사랑하는데 我愛徐氏子맑고 온화해 정말 좋아할 만하니 淸溫眞可欲필력은 용과 뱀이 움직이는 듯하고 筆力龍蛇動문장의 물결은 강물을 쏟은 듯하네 文瀾江河沃또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을 두고 復志爲己學나의 창동 서당을 찾아왔으나 訪我滄東屋돌아보건대 난 적임자가 아니었기에 顧余非其人기꺼이 빈 골짜기로 달아났었지 喜在逃空谷그대는 활 쏘는 법469)을 아는가 君知射法否온 마음으로 정곡을 가리켜야 하니470) 一心指正鵠누구나 하면 또한 이처럼 되거늘471) 有爲亦若是어찌 순임금과 문왕만 그렇겠는가 舜文彼何獨밝고 강함은 오교472)를 다스리며 明强總五敎성의와 격물은 팔조목의 요건인데473) 誠格要八目어떤 것으로 철두철미할 수 있는가 何物徹頭尾또 하나의 경이 있으면 충분하리라 又有一敬足세상에는 끝맺음을 잘한 이 드문데474) 世人鮮克終시장에서 매 맞는475) 치욕 왜 생각지 않는가 盍思撻476)市辱도의 명맥이 철류477)처럼 위태로우니 道脈危綴旒오싹하여 몸에 소름이 돋는다네 凜然身生粟이처럼 인재가 부족할 때를 만나 當此乏材日선비는 절로 금과 옥이 될 수 있으니 士可自金玉힘써 아홉 길 산을 이루려478) 하면 勉成九仞山이전의 공적 쌓은 것을 버리지 말게 毋棄前功築통달하면 조양에서 우는 봉황479) 되고 達爲朝陽鳳곤궁하면 흉년에 곡식이 되리라 窮作荒年穀서재 창문에 가을이 또 돌아왔으니 書牕秋又至그댈 위해 깊이 마음으로 부탁하네 爲君深心屬 我愛徐氏子, 淸溫眞可欲.筆力龍蛇動, 文瀾江河沃.復志爲己學, 訪我滄東屋.顧余非其人, 喜在逃空谷.君知射法否? 一心指正鵠.有爲亦若是, 舜、文彼何獨?明强總五敎, 誠格要八目.何物徹頭尾? 又有一敬足.世人鮮克終, 盍思撻3)市辱?道脈危綴旒, 凜然身生粟.當此乏材日, 士可自金玉.勉成九仞山, 毋棄前功築.達爲朝陽鳳, 窮作荒年穀.書牕秋又至, 爲君深心屬. 활 쏘는 법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인한 자는 활쏘기 하는 것과 같으니, 활을 쏘는 자는 자신을 바로잡은 뒤에야 발사하여 발사한 것이 맞지 않더라도 자신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신에게서 찾을 뿐이다.〔仁者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정곡(正鵠)을 가리켜야 하니 《중용장구》 제14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활쏘기는 군자다운 데가 있으니, 정곡을 맞히지 못했거든 자기 몸에 반성하는 것이니라.[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라고 하였다. 누구나……되거늘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 임금과 같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말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오교(五敎)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의하면, 아버지는 의롭고[父義], 어머니는 자애롭고[母慈], 형은 우애하고[兄友], 아우는 공손하고[弟恭], 자식은 효도하는[子孝] 다섯 가지를 말한다. 성의(誠意)와……요건인데 《대학》 삼강령(三綱領)의 구체적 덕목을 말한 것이다. 팔조목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을 이른다. 끝맺음을……드문데 《시경》의 〈대아 탕(蕩)〉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命)이 믿을 수 없음은 처음에는 선(善)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선으로 마치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는 말이 나온다. 시장에서 매 맞는 원문의 '달시(撻市)'는 사람이 많은 저잣거리에서 매를 맞는 것으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뜻한다. 이윤이 "내가 나의 군주를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되게 하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부끄럽기가 마치 저잣거리에 매를 맞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書經 說命下》 撻 底本에는 "橽". 문맥을 살펴 수정. 철류(綴旒) 유(旒)는 깃술이고 철(綴)은 매단다는 말이다. 곧 깃술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임금이 권위를 잃고 신하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국가의 위태로움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아홉……이루었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가 되어,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온다. 조양(朝陽)에서 우는 봉황 인품이 출중하고 정직하며 감히 간언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 자라네 저 산의 동쪽에서〔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했다. 撻 底本에는 "橽". 문맥을 살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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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당463)공의 순효비를 석동464)으로 옮겨 세울 때 차운한 시 晩休堂公純孝碑移建席洞時次韻 큰 절개를 지닌 만휴 어르신 大節晩休翁많은 사람이 외어서 전하네 誦傳萬口公지극한 정성은 왕맹465)의 자취와 같고 至誠王孟蹟곧은 도는 급주466)의 풍도와 같았네 直道汲朱風억울함을 당한 사정을 차마 말하리오 忍說遭冤屈효성과 충성을 더욱 표창하였네 彌彰襃孝忠정려문과 비석을 이곳으로 옮기니 旌碑移此地관리의 책임을 종중에서 져야 하리 課責在宗中 大節晩休翁, 誦傳萬口公.至誠王孟蹟, 直道汲朱風.忍說遭冤屈, 彌彰襃孝忠.旌碑移此地, 課責在宗中. 만휴당(晩休堂) 김억일(金億鎰, 1544~1604)의 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중임(重任)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이며,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서 태어났다. 석동(席洞) 전북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석동을 말한다. 왕맹(王孟) 효자로 유명한 삼국 시대 진(晉)나라 왕상(王祥)과 오나라 맹종(孟宗)을 가리킨다. 왕상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고,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 《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孫晧》 《晉書 王祥列傳》 급주(汲朱) 급암과 주운(朱雲)을 가리킨다. 급암은 전한 무제 때의 간신(諫臣)으로 직간을 했으나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회양 태수로 있다가 죽었다. 《史記 汲黯列傳》 주운은 전한 성제 때 사람으로 간사한 자인 장우(張禹)를 처형하기를 황제에게 청하자 황제가 노하여 주운을 끌어내게 하였는데 그가 어전의 난간을 잡고 버티니 난간이 부러졌다. 《漢書 朱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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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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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5년 연재 송병선(宋秉璿)의 두 번째 상소 사본 고문서-소차계장류-상소 宋秉璿 1905 宋秉璿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5년 11월에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을사조약을 반대하고 역적을 토죄할 것을 청하는 두 번째 상소의 사본 1905년 11월에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을사조약을 반대하고 역적을 토죄할 것을 청하는 두 번째 상소이다. 『淵齋先生文集』 권4, 疏, 請討凶逆疏[再疏] 11월 20일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비답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록』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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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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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생일218) 朱子生日 사문을 없애지 않아219) 운이 다시 새로워지니 不喪斯文運復新회옹이 태어나신220) 게 마침 이 날이었네 晦翁岳降適玆辰공자와 맹자221) 이후 둘도 없는 선비이고 尼輿以後無雙士하늘과 땅 사이에 운수가 매여있는 몸이네 天地之間有數身해가 밝고 구름 트이 듯 큰 도를 알았고 日朗雲開知道大털끝 나누고 실도 쪼개 듯 참 공부 보았네 毫分縷析見工眞천년만에 탄신일222)이 거듭 돌아왔으니 重回千載懸弧日후인에게 남긴 풍성한 공을 감히 잊으랴 敢忘豊功在後人 不喪斯文運復新, 晦翁岳降適玆辰.尼輿以後無雙士, 天地之間有數身.日朗雲開知道大, 毫分縷析見工眞.重回千載懸弧日, 敢忘豊功在後人. 주자의 생일 주희(朱熹)는 중국 남송 고종 건염 4년(1130) 경술년 9월 갑인일(음력 15일)에 태어났다. 사문을 없애지 않아 '사문(斯文)'은 유학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광(匡) 땅에서 곤궁에 처했을 때,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 바에야,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회옹이 태어나신 '회옹(晦翁)'은 주자의 호가 회암(晦菴)이므로 높여 칭한 것이다. '악강(岳降)'은 '유악강신(維岳降神)'의 준말로, 산의 신령함을 받고 태어났다 뜻이다. 《시경》 〈숭고(嵩高)〉에 "태산이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후를 내셨도다.[維岳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 원문의 '니여(尼輿)'는 공자의 자인 중니(仲尼)와 맹자의 자인 자여(子輿)를 합칭한 것이다. 탄신일 원문의 '현호(懸弧)'는 남자의 생일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內則)〉에 "자식을 낳음에 남자일 경우는 문 왼쪽에 뽕나무 활을 걸고, 여자일 경우는 문 오른쪽에 수건을 건다.[子生, 男子設弧於門左, 女子設帨於門右.]"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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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생신날에 느낀 바 있어서 先妣生日有感 늦가을 구월 십사일을 맞으니 晩秋値小望홀연 어머님 생각211)에 슬프구나 忽忽悲蓼蓼너에게 묻노니 느낀 바 무엇인가 問爾何所感우리 어머니 이 날에 태어나셨네 我毋降此日정사년212)에 나셨으니 그로부터 上距丁巳歲사년에 칠십을 더한 세월이구나 四齡加七十가령 올해에 살아계셨어도 如令在今歲오히려 크게 늙은 나이213) 아니네 尙不至大耋비록 현달한 영예는 받들지 못해도 縱無奉顯榮기쁨을 드리기를 기약했었다네 庶期致歡悅자식들은 밭 갈면서 글을 읽고 諸子兼耕讀손자와 증손은 난옥214)으로 자라네 孫曾長蘭玉애통하다 풍수215)의 변고여 痛哉風樹變어느덧 십오년이 흘렀구나 遽然十五曆음성과 용모는 어제 새벽 같은데 音容如昨晨이 생에 어찌 다시 뵈리오 此生寧復覿불효의 죄를 추궁하자면 追究不孝罪낱낱이 세는데 머리카락 다 뽑아야하리 枚數可擢髮풍흉간에 좋은 밥과 고기를 못 올렸고 豊歉闕梁肉동하간에 서늘하고 따듯하게 못 해드렸네216) 冬夏違涼燠일념으로 부인의 도리를 행하시고 一念執婦道조심하는 마음으로217) 백발 되셨네 惴惴到頭白이 때문에 육순을 사시면서 所以生六旬잠시도 쉬실 때가 없으셨지 曾無片時息끝내 하늘로 돌아가신 날은 竟至歸天日시어머니보다 겨우 삼일 뒤였네 後姑僅三夕사람들은 효성의 감응이라 하나 人言孝感致나의 한스럼움은 끝이 없다네 我恨罔有極서쪽으로 연곡의 묘도 바라보나 西望蓮谷阡무덤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네 九原不可作눈물이 가을비와 함께 섞여서 淚和秋天雨종일토록 한없이 떨어진다오 盡日長滴滴 晩秋値小望, 忽忽悲蓼蓼.問爾何所感, 我毋降此日.上距丁巳歲, 四齡加七十.如令在今歲, 尙不至大耋.縱無奉顯榮, 庶期致歡悅.諸子兼耕讀, 孫曾長蘭玉.痛哉風樹變, 遽然十五曆.音容如昨晨, 此生寧復覿.追究不孝罪, 枚數可擢髮.豊歉闕梁肉, 冬夏違涼燠.一念執婦道, 惴惴到頭白.所以生六旬, 曾無片時息.竟至歸天日, 後姑僅三夕.人言孝感致, 我恨罔有極.西望蓮谷阡, 九原不可作.淚和秋天雨, 盡日長滴滴. 어머님 생각 원문의 '육륙(蓼蓼)'은 《시경》 〈육아(蓼莪)〉의 시를 가리킨 것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그 시에 "길고 긴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저 나쁜 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하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정사년 1857년(철종8)이다. 크게 늙은 나이 원문의 '대질(大耋)'은 연로함을 지칭하는데, 여기서는 80세를 가리킨다. 난옥(蘭玉) 귀한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말한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비유하자면 지란 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힌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謝玄》 풍수(風樹)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서늘하고……해드렸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모든 자식이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조심하는 마음으로 원문의 '최최(惴惴)'로, 《시경》 〈소완(小宛)〉의 "두려워하여 조심함은 깊은 골짜기 굽어보듯, 전전긍긍함은 얇은 얼음 밟는 듯.[惴惴小心, 如臨于谷, 戰戰兢兢, 如履薄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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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신미년(1931) 答李愼軒 辛未 인용하신 농옹(農翁 김창협)이 누원(樓院 박세당)을 방문한 일9)은 저도 항상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10)면 어찌 다만 '도가 같지 않다[道不同]'는 세 글자로 멀리할 뿐이겠습니까? 공자와 주자 두 부자(夫子)를 인용하여 근거로 삼은 것은 마땅히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합니다. 노자와 육씨(陸氏 육상산)는 비록 허무와 선학의 수종(首宗)으로 그 깊은 학문과 높은 행위는 또한 당세 사람들의 추대와 인정을 받았지만 따질 만한 점도 있고 공경할 만한 점도 있는 것은 다만 그 견식과 언론이 처음에 잘못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끝내 수종이 되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노자와 육씨가 요임금, 순임금, 공자, 맹자를 업신여겼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 부자가 오히려 또한 예를 묻고 강론을 주도11)했겠습니까? 어른의 근래의 일은 아마도 농옹의 활달한 도량을 심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만 농옹을 사모하여 본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所引農翁訪樓院事, 澤述所尋常蓄疑者.旣云慢侮前賢, 則豈可但以道不同三字豁略之? 其所引孔朱二夫子爲據者, 正合更商也.老子陸氏, 雖爲虛無禪學之首宗, 其邃學高行, 亦自爲當世推服, 而有可問可敬者.特以其見識言論, 差於其始, 被人尊尚, 而作首宗於其終爾.如使老子陸氏, 謾侮堯舜孔孟, 未知二夫子猶且問禮主講耶? 尊之近事, 恐難服農翁豁量, 而慕效之, 如何如何? 농옴……일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에 "제 아우에게 보내신 편지에 제가 누원(樓院 박세당(朴世堂))에 대하여 노숙함을 존경하고 명망을 사모하여 30리를 달려가 찾아뵈어 존경하는 정성을 나타냈으며 조금도 배척하는 언사가 없다가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의 문집이 출간된 이후로는 노여움을 품고 그 부친까지 미워하면서 이런 보복을 하였다고 하셨는데, 이는 더더욱 우습습니다……누원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물러나 곤궁한 처지를 굳게 지켰으니 이는 말세에 찾아보기 어려운 절조입니다. 저는 이 점을 진정 높이 받들었던 것이고 그분의 연세가 또 아버님과 동갑이셨으니 어찌 존경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다만 그분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所與舍弟書, 謂姪於樓院, 尊其老慕其名, 委拜一舍之地, 以展尊仰之誠, 略無排斥之辭, 及士元文集出後, 有所慍怒, 而移及其父, 爲此報復, 尤極可笑.……樓院之恬退固窮, 誠末世之所難得. 姪於此固嘗推挹, 而其年又先人同甲也, 豈不可尊. 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 김창협은 "다만 그분(박세당)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말하였다.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 두 부자가……주도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고 주자가 육상산과 도에 대하여 강론한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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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 전장에게 보냄 與鍊心田丈 乙亥 을해년(1935)요새 들으니, 상중에 있는 박현암(朴玄岩)이 김용승(金容承)을 초치하여 자기 조고의 묘갈문을 받는다고 하니 사문의 일이 날마다 그릇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이미 음성의 적도 골수당과 화합하고, 이 박현암이 또 스승을 배반한 사람에게 묘갈문을 받으니, 의리(義理)와 시비(是非)가 혼란하여 뒤집힌 것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일전에 사견(士狷)과 함께 백천재(百千齋)에 며칠간 머무를 때, 편지를 써서 박현암에게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창암(蒼岩) 어른이 선사에게 열복(悅服)200)하여 성심으로 섬긴 것은 실로 문인들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처럼 스승을 존경한 덕이 있는 분의 행적을 스승을 배반한 자로 하여금 쓰게 한다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하고 말이 쓰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 일은 반드시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열어준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 공들이 앞에서는 무함을 성토하고 뒤에서는 일을 같이 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어찌 여러 공들이 어제는 그르나 오늘은 옳다고 여겨 간옹이 조금은 그럴 뜻이 있었나 의심하고 이것이 김용승이 물러나와 스스로를 결백하게 한 것이라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박현암이 우리 어른과 변론할 때, 옆에서 자세히 들었는데, 이런 뜻이 있는 듯했습니다. 일이 만약 이렇게 나간다면 창암 어른이 죽은 뒤의 일만 낭패일 뿐만 아니라,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도 어찌 가일층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今聞玄岩朴哀, 延致金容承, 受其祖考墓文云, 師門之事, 可謂日益非矣.扶北諸公, 旣和同陰賊之骨黨, 此哀又謁文於陪師之人, 義理是非之混倒, 一至於此乎? 日前, 與士狷留百千齋數日, 爲喩此哀, 止此事爾.蓋蒼岩丈之悅服先師而誠事之, 實門人之不及, 以若尊師之德, 令倍師者狀之, 則豈不誤乎? 而誠不見孚, 言不見用, 以至於此, 夫何言哉? 雖然此事未必非扶北諸公啟之也, 何也? 諸公前討誣而後同事, 人之見此, 豈不以諸公爲昨非今是, 而疑艮翁之不免些意, 是容承之退出自潔也乎? 向此哀與吾丈辨論時, 從傍細聽, 似有此意矣.事若出此, 非但蒼丈身後事之狼狽, 爲先師辨誣者, 豈不一層加難矣乎? 痛矣痛矣. 창암(蒼岩)이 선사에게 열복(悅服)하여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오고, 또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이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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