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견에게 답함 임신년(1932) 答田士狷 壬申 유씨35)가 간행한 전재(全齋) 선생 연보는 저도 또한 근자에 잠깐 보았습니다. 그런데 연보에서 이르기를, 전재 임헌회 선생께서 문인 간재 전공에게 명하여 오선생의 수언(粹言)을 모아서 14권을 만들었다는 것은, 진실로 형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설인행(禮說印行) 조목에도 또한 이르기를 간재 전공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스승의 명령 아래에서 문인의 성명을 쓰지 않고 그 별호를 쓰고 높여서 공이라고 한 것은 도대체 어느 경전에 나오는 것입니까? 유씨 쪽에서 온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연보는 임참봉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선자인 임헌회의 문인인 간재를 지목하여 호를 이야기하고 공이라 말하는 것은, 이것이 예의 체면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이 출행했다는 연보의 조목을 보면 곧바로 유모 서모 종행했다고 말하고, 호를 쓰지 않고 연보에 부록한 문인의 제문 제목 아래에도 또한 그러한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은 한 쪽에서 의를 듣고도 복종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변명하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실수를 저지르기를 면치 못한 것입니다. 또 부록인 〈간재록(艮齋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선사 간옹께서 신미년 모월 삭(朔)일에 우리 선자를 모시면서 고하기를, '꿈을 꾸었는데 소자인 제 나이가 41세 된다고 말했습니다. 깨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아 목숨의 한계가 닥쳤구나, 그러나 참으로 한스러운 것은 학문에 소득이 없이 죽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자께서 곧바로 그 목소리에 응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후로 41년이 더해져서 82세가 된다는 것이니, 이것은 현자의 면학을 위해서 신명이 견고한 것이 아니겠는가, 덕과 학문을 닦아 수업할 날이 여전히 많으니 더욱 면진하여 성인과 철인을 기약하는 것이 노부의 바람이니라"라고 연보에서 말했습니다. 이것 또한 가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선사의 학문은 진실로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 나이가 부족한 것도 잊었고, 전옹께서도 사람을 가르칠 때 또한 다만 인(仁)을 제 소임으로 삼아 죽은 후에 그친다는 법문을 쓰시니, 반드시 알기 어려운 수단(修短)36)을 마음에 따져서 말씀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사께서 실제로 꿈을 아뢰는 일이 있고, 전옹께서 실지로 이러한 꿈을 해몽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불과 말할 때에 한번의 웃음거리가 됨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이 후인의 가칙(柯則)37)이 되는 보록에 기대어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말에 근거하여 추구해보면 파탄되고 불치되지 못함을 면치 못하여, 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 줄 볼 수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선사는 신축생(辛丑生)인즉, 신미년(辛未年)에는 나이가 31세입니다. 어찌 41세가 되어 명하니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 41세를 더하면 72가 되니 어떻게 10년을 덧붙여서 82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왕이 문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꿈을 꾸었더니 상제가 나에게 치아 9개를 주었습니다"라고 하자, 문왕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나이를 치아라고 하여, 내가 너에게 셋을 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왕은 97세에 붕어하였고, 무왕은 93세에 붕어하였습니다. 지금 간재에게 이러한 기록이 있는 것은, 선사의 82세 천수에 억지로 끌어다 합치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전옹의 선견의 지혜가 거의 문왕의 이 일과 같음을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예기(禮記)》의 이러한 설들은 대부분 후인들이 견강부회하여 나온 것으로, 이미 선유(先儒)의 논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으니 제가(諸家)의 기술 조목에 《조선사략(朝鮮史略)》38)과 《대동사강(大東史綱)》39) 두 서책 가운데에 전옹을 칭송하고 선양하는 말을 기대하였는데, 《사강》은 듣건대, 북도인(北道人)이 저술한 것으로 음성의 오진영이가 교감한 것이요, 의화군(義和君)이 서(序)를 단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조선사략》은 일제의 작위를 받은 대감 아무개의 저작이 아니겠습니까? 당당한 대한의 국자감을 지낸 선생께서 어찌 일제의 작위를 받은 모 대감의 소작(所作)의 무거움을 빌리고 그가 칭찬하는 말을 빌려서 기재한단 말입니까? 임참봉의 연보 발문에 '오진영과 유영선이 함께 일을 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오씨는 식견으로 스스로를 허여하고 그 오진영 문인의 무리가 선사보다 우월하다고 칭송하는 자인데, 그 교감한 바가 이에 이와 같으니 아아, 그 견식의 고루함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잠깐 열독하고 얻은 실착(失錯)도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밖에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형이 만약 다시 연보를 본다면, 모름지기 다시 상세하게 보여주시어, 하나하나 곧바로 변론하시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대개 전옹의 연보와 묘지는 오진영이가 가히 도울 일이 아닙니다. 비록 일이 정당하게 되었을지라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 하물며 병폐가 이와 같이 많을 경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공론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柳刊全齋先生年譜, 弟亦近得暫見.而其云先生命門人艮齋田公, 取五先生粹言爲十四卷, 誠如兄言.(禮說印行條亦云艮齋田公所編)師命之下, 不書門人姓名, 而書其別號, 尊之爲公者, 是出何典.自柳邊來者, 有云譜是任參奉作.故目其先子門人而曰號曰公此爲得體.然則其於先生出行條, 直言尹某徐某田某從行, 而不書號, 附錄門人祭文題目下, 亦然者皆何也.此不免爲一邊聞義不服, 强辯自是之失也.且附錄艮齋錄有云.先師艮翁辛未某月朔, 侍吾先子告曰, 夢一道士, 道小子年爲四十一云, 覺來思之, 命限至矣, 可恨者學無所得而死.先子卽應聲曰, 自今四十一加之於後, 爲八十二歲, 得不爲賢者勉學, 神明警告者乎.進修之日尙多, 彌加勉進, 期以聖哲, 是爲老夫之望.此又可疑者, 先師之於學, 固俛焉孜孜, 忘年數之不足.全翁敎人, 亦但以仁爲己任, 死而後己之法門, 必不以難知之修短,較於心而形於言.使先師而實有是告夢, 全翁而實有是解夢, 不過爲語次間一笑之資, 不宜載於柯則後人之譜錄.而况卽此而求之, 自不免破綻不合而未見實有是事者乎.先師是辛丑生, 則辛未之歲, 爲年三十一矣.安得爲四十一而命限至.自今更加四十一則爲七十二, 安得加十年而爲八十二乎.武王告文王曰, 夢帝與我九齡, 文王曰古者謂年爲齡, 我與爾三.文王九十七而崩, 武王九十三而崩.今艮齋之有是錄, 而牽合於先師八十二之天年者, 欲使人知全翁先見之知, 殆若文王此事也.然曾不知禮記此等說, 多出後人傅會者, 己有先儒所論也.又有一焉, 諸家記述條, 載朝鮮史略大東史綱二書中稱揚全翁語, 史綱聞是北道人所著, 陰吳所校, 義和君所序.未知著者爲何等人.吾不敢言.史略此非月爵大監某之所作乎.堂堂大韓之國子先生, 何所籍重於日爵大監之所作而引載其語乎.任參奉譜䟦, 有吳柳同役語, 吳以見識自許, 而其徒稱以優於先師者, 而其所校勘乃如是, 噫其見識之固陋.亦可知己.霎時閱見所得失錯, 已至於此.安知此外不有幾多謬舛乎.兄若再見, 須更詳示一一立辨, 如何.蓋全翁譜誌, 非吳之所可相役者.雖使事出精當, 猶爲未可, 况疵病之此多乎.然而世無公論, 柰如之何. 유씨 유영선 柳永善, 1893~ 1961)으로 호는 현곡(玄谷)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수단(修短) 목숨의 길고 짧음을 말한다. 가칙(柯則) 《시경(詩經)》 빈풍(豳風) 벌가(伐柯) 편에 유래하는 말로 표준, 전범(典範) 또는 귀감이라는 뜻이다. "도끼 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않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하였다. 조선사략(朝鮮史略) 1923년 김종한이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자 학술서이다. 대동사강(大東史綱) 1929년에 김광이 간행하여, 단군조선부터 대한제국 순종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