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신미년(1931) 答李愼軒 辛未 학술의 오류는 그 지극한 폐단을 말하면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대해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12)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허무와 선학은 그 궁극에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어른의 편지에서 이른바 "다만 대의와 관계된 바가 아닌가?" 하신 것은 참으로 지당하니, 다만 그 실마리가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근세 리학(理學)의 근원처럼 견해 차이일 뿐 일반적으로 행패를 부리고 폐를 끼치는 등의 미워할 만한 점이 없다면 어찌 미리 그 사람을 대의로 판단하여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양주와 묵적의 오류를 정자가 오히려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노자의 청수(淸修)와 육상산의 독실함은 현인을 업신여긴 자와 같은 사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비교적 분명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른이 자신하는 데에 독실하여 현인을 업신여긴 자도 공경할 만하다고 말함에 이르렀으니, 지나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을 비난하는 자는 법도가 없다."13)했습니다. 현인은 성인의 형체를 미세하게 갖추고 있으니, 현인을 업신여기는 것은 또한 어찌 법도가 없는 것의 다음을 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헤아려보면 공경할 만하다는 의론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정론이 되지 못하고, 일반적인 예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도 또한 베푸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學術差繆, 言其極獘, 則孟子至謂楊墨爲無父無君, 虛無禪學, 其究也, 亦何所不至? 尊喩所謂"獨非大義所關乎"者, 誠爲至當, 但其端之始異也.只如近世理學源頭之差見而已, 未見有一般行悖貽獘之可惡也, 則惡得以預斷其人以大義而斥之乎? 楊墨之差, 程子尚謂過人之行, 況於老氏之清修, 象山之篤實也, 其不可與侮賢者同科也, 較明矣, 而丈篤於自信, 至發侮賢者亦可敬之言, 則過矣.孔子曰: "非聖者, 無法." 賢者, 聖之體微也, 侮賢者, 亦豈不得爲無法之次犯乎? 執此而揆之, 可敬之論, 固未爲不可易者, 而過從常禮, 亦未知施得其當也. 맹자가……없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니,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是禽獸也]"라고 하였다. 성인을……없다 《효경(孝經)》 〈오형장(五刑章)〉에 나오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보냄 기사년(1929) 與李愼軒 己巳 지난 20일 사이에 함재 어른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김처중이 김용승과 함께 산북에 있는 견암(堅菴 김태희(金泰熙))을 방문하여 견암이 이미 김용승과 옛날처럼 잘 지내기로 하고 자신이 절교를 고한 과실을 사과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 또한 갑자기 먼저 절교한 미진함을 사과하고 저들로 하여금 묘에 가서 고하여 죄를 자복한 연후에 옛날처럼 잘 지내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견암 일이 잘못이라는 것과 함재 어른의 뜻이 구차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장로(長老)는 후배들이 우러러 바라보아 법을 살피는 분인데 이제 의리를 보고 의리를 재단함이 이와 같으니, 세교(世敎)는 장차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김용승의 말에 "우리와의 절교를 주동하는 자는 김택술이고 나머지 늙고 귀 먹은 사람들은 그 바람에 취해 쓰러진 것이니 책망할 것도 못 된다." 했는데, 이 말은 이미 사실도 아니고 또한 제가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두 분의 장로가 이미 이전의 견해를 바꾸어 나머지 사람들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 말이 불행히도 들어맞게 되었습니다. 또 겉으로는 김용승과 절교하고 안으로는 음성 오진영 쪽과 친한 것이 호남을 성토하는 한 자루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이제 만약 그들이 죄의 자복을 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과실을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다면 음성 쪽의 이런 성토를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 사우(師友)로 대하니, 이미 배반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오기 전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온 뒤에 사우로 대한 것은 그 배반이 한층 더 깊어진 것입니다. 을축년(1925) 여름에 어른이 현암에서 김용승을 피해 오셔서 그가 회봉(晦峰 김봉환)과 한 말을 전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말에, "신해년 유서가 엄하기는 엄하나 경신년 유서의 '말하기 어려운 일은 감히 지묵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신 유훈8)은 너무나 모호하고, 임술년에 홀로 앉아 계실 때 명을 받았다는 것은 의당 분명 있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선사를 깊이 의심한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고 사람을 살핌에 정황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먼저 스스로 과오를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단 말입니까? 당일의 사실 같은 경우는 창암 어른(박민환)이 제창하여 말하기를, "김씨(김용승)와 절교하고 오씨(오진영)을 성토해야 한다." 하자, 여러 장로가 한 목소리로 동의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보다 먼저 이미 마땅히 절교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급기야 그들이 스승의 영령에 고하는 것을 보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으며 그들에게 묘 앞에 가서 고할 것을 권하였으나 또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우간'이라는 말을 발설하니, 다만 이전 편지의 의리만 쓸 뿐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 앉아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연서의 끝에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여러 장로들께서 이미 당시의 일을 주관하고 여러 장로들께서 먼저 당시의 의리를 무너뜨렸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去念間, 涵丈來言: "近金處中同金容承, 過堅菴於山北也, 堅菴已與容承續舊好, 而謝其告絶之過." 又言: "吾亦欲先謝遽絶之未盡, 而令彼告墓服罪, 然後續好如舊云." 故鄙爲言堅事之誤錯涵意之苟且矣.蓋長老者, 後輩之所仰望, 而觀法也.今其見理裁義, 乃如此, 世敎將何恃哉? 金言"主絶我者, 金澤述也, 餘老聵者, 醉偃其風, 不足責", 此言旣非其實, 亦非鄙所敢當.然自一二長老, 旣改前見, 而難保餘人, 則此言不幸而見中矣.且外絶金, 而內親陰邊討湖之一柄話欛也.今若不待其告服, 而謝過請好, 則陰邊此討, 安可逃乎? 蓋生前純師之, 死後師友之, 已不可不謂倍, 而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之者, 更深一層.記昔乙丑夏, 丈自玄巖避金而來, 傳其與晦峰言者有曰: "辛亥遺書, 嚴則嚴矣.庚申難言之訓, 已是模糊.壬戌獨命, 宜其有之." 此是深疑先師者.聽言觀人, 情狀躍如如此, 而尚可謂非倍師, 而先自謝請乎? 若當日事實, 則鬯丈倡言曰: "可絶金而討吳", 諸長老同聲然之.此漢則先是, 已投當絶之書, 及見其告靈, 而遭拳踢也, 勸其往告墓前, 又見其不聽, 而復發師友間之說, 則只當用前書之義, 而不必更提也.但以在同座之故, 參於聯書之末矣.自諸長老, 而旣主當日之事, 自諸長老, 而先壞當日之義, 竊所未曉也. 경신년……유훈 이 유서는 《사백록(俟百錄)》 권1 〈사무변명(師誣辨明)〉에 실려 있다. 원문의 '난언(難言)'은 의미가 다 드러나지 않아서 유서 내용의 "有難言之事 不敢形之於紙墨間者"를 참고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 기환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李愼軒起煥 ○乙丑 저는 통문의 본래 초안이 제 손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저들의 원수가 되어서 첫째는 스승의 명을 속여서 묘표를 고쳤다는 모함을 당했고, 둘째로는 거상(居喪)에서 무례하다는 무함을 당했으니 한 번 두 번 당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세 번째로 말을 지어냈다는 모함을 당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출인(出認)과 물인(勿認) 두 가지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말한 것으로 갑자년 3월 13일에 모현재(慕賢齊)7)에서 강의가 끝난 이후에 권순명과 함께 잘 때에 들은 것이 아닙니까? 또한 어른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여 공공연히 통문에 기록해 넣은 것이 아닙니까? 권순명이 자신들의 통문에는 본래 이런 말이 없는데 우리들에게 속았다고 하여 자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첫째는 간사한 소인이고, 둘째는 하늘이 그 혼백을 빼앗은 것이고, 셋째는 슬퍼할 만한 따름이다." 하였다. 아! 하늘에는 거울이 있고 오장(吾丈)에게는 또 귀가 있으며, 이 사람에게는 입이 있고 저들에게는 또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습니까? 저들이 어른에게 말하여 원수를 나로 삼은 것은 그들 마음이 이미 교묘한 것이고 5개월 동안에 일찍이 한 번도 질문이 없었는데 먼저 정운한 무리를 시켜 나라에 배포하게 하고 "권순명이 억울하게도 김택술에게 헤어짐을 당했다."라고 말하니 그 마음이 더욱 험악합니다. 저들에게서 나온 것이 저들에게 돌아간 꼴이 되었으니 옛말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모함을 꾸밀 때 '마음에 내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라고 했으니, 부끄러운데도 썼다면 이것은 이른바 간악한 소인이고 부끄럼이 없이 썼다면 이것은 하늘이 그 혼을 빼앗아간 것입니다. 다만 널리 배포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멀게 하는 것은 알되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은 슬픈 것일 뿐입니다.【'기위(其謂)' 이하는 도리어 권순명의 편지 가운데 말을 쓴 것이다.】 그들은 일찍이 함재 어른을 문서로 모함했으니 간사한 자들이고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서 말을 지어냈다 의심하니 이것은 참으로 간사한 소인배의 모습이니 크게 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 저들이 어른에게 분명히 말한 것을 감히 어른에게 묻지 않고 억지로 내가 조작한 말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어찌 참으로 슬프지 않겠습니까? 내가 한번 두 번 받은 모함은 단지 내 일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변론하든 변론하지 않던 깊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로 받은 모함은 나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출인과 물인이라는 말은 크게 선사와도 관련이 돼있으니 어른이 친히 그들의 말을 들은 것에 대하여 증명하여 분별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증명하여 분별하겠습니까? 이에 널리 배포해주기 바랍니다. 빨리 답장을 하여 그 증명을 확실히 하고 그 분별을 명확히 하여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澤述以通文本草之出自鄙手, 大爲彼之讐視, 一之而遭幻命改表之誣, 再之而遭居喪無禮之誣, 一遭再遭, 猶不可言, 而復三之而遭造言之誣乎? 出認勿認兩般看, 非丈所云, 甲子三月十三日, 慕賢齋講罷後, 與權純命, 同宿時所聞者乎? 而又非丈之言於衆中而公共記入通文者乎? 權乃謂渠本無此言, 而爲我所誣, 投書子貞曰: "一則奸譎小人, 二則天奪其魄, 三則可哀也已." 鳴呼! 上天有鑑, 吾丈又有耳.此漢有口, 彼亦有心, 其然, 豈其然乎? 彼之發言於丈, 而移讐於我者, 其心已巧, 五朔之間, 曾無一質, 而先使鄭雲翰輩, 布之國中曰: "權純命枉被金澤述之所手分." 其心更可陰也.出乎爾者, 反乎爾, 古語毫不爽矣.其謂"金澤述構誣之時, 得無內愧於心乎?", 愧而書之, 是所謂奸譎小人, 無愧而書之, 是天奪其魄也.徒知廣布之足以瞎人眼目, 而不知適所以自誣自陷, 可哀也已.【其謂以下, 反用權書中語.】彼曾是誣涵丈以文書, 作奸者, 以已己心度人心, 疑其造言, 此固奸細之情熊, 不足大怪.而今以彼之明言於丈者, 不敢問之於丈, 而強謂此漢之造言者, 絶不近人情, 則豈不眞可哀也哉? 蓋此漢一遭再遭之誣, 只關吾之一身, 辨不辨, 不須深究, 至於三遭之誣, 非惟關於此漢, 其出認勿認之云, 有大關先師者, 不於丈之親聞彼言者證之辨之, 將於何而證辨之? 茲以仰怖幸乞.亟賜回敎, 確其證明, 其辨有以落彼奸膽, 而鮮人眩惑也. 모현재(慕賢齊)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사우(祠宇)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광(李洸)이 향풍을 바로잡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직한 남산동백발회(南山洞白髮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식(李植)이 종조부인 이광의 백발계를 다시 조직하여 향풍을 길러 향약을 실천하였는데, 한동안 기능이 약화되었으나, 1862년(철종 13) 옛날 백발회 유지에 모현재를 창건하고, 동계(洞契)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또한 항일투쟁을 벌여 일본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구로회원(九老會員)이 있으며, 백발회비각과 구로회 비각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위재 병주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金危齋炳周 ○癸亥 부모가 돌아가심에 형제같다는 말씀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을 대단히 극진하게 말한 것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거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아! 한번 벗을 사귀는 도가 사라진 뒤로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1) 풍조를 볼만한 곳이 없게 되었는데, 오직 어른이 세태를 뛰어넘어 이처럼 진실하고 간절한 가르침을 주시니, 경건한 마음으로 공경히 받든 나머지 또한 이런 의리를 널리 전달하여 동문제자의 마음속에 골고루 전하고 싶습니다. 뛰어난 재주와 두터운 덕이라고 장려하신 것은 어찌하여 걸맞지 않음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만약 한두 가지 취할 만 점이 있는데 군자가 사람을 칭찬하여 시험해보려는 뜻에서 나와 곧바로 편지에 써서 드러내 칭찬한다면 어찌 오만한 마음을 열어주어 진덕수업(進德修業)2)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곧 형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만 혹여 세상의 풍조에 관계가 된다는 것을 어른께서는 혹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무릇 이런 일은 반드시 서로 도와서 강론하고 익힌 후에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학문은 반드시 강론한 이후에 밝아진다." 했고, 또 "벗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했으니, 하물며 이제 스승이 돌아가신 뒤이겠습니까? 이후로는 편지로든 만나서든 장점을 인정하지 말고 오직 단점을 책망하여 하나의 깨진 기물(器物)이 되지 않도록 해 주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저는 스승을 20년간 따랐지만 텅텅 비어 하나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강가에 집을 지었으나 목말라 죽는 처지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충분한 국량이라 일컬으며 발휘하는데 감히 참여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보살펴주시고 아껴주심을 입었으니, 가르침을 받을 때에 질정하고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감히 터득한 하나의 견해를 드려서 태양 아래의 등불 같은 미력이나마 돕지 않겠습니까? 親沒兄弟之喩, 說到天理人情十分盡頭, 令人感激, 幾乎淚下.噫, 一自友道之喪, 切偲之風, 無地可見.惟丈超出世習, 有此眞切之敎, 虔心祗奉之餘, 亦願廣將此義, 均播於同門諸子心田中也.才儁德厚之獎, 胡不稱之至此? 如使有一二可取, 而出於君子譽人有試之意, 直於書尺顯揚, 豈不啓侈心而妨進修乎? 只此便是不以兄弟視, 而或涉世風也.丈或未之思歟? 大抵此事, 必待麗澤講習而後就.故曰: "學必講而後明." 又曰: "未有不須友而成者." 而況今日山頹之後乎? 自後書面, 毋長之是與, 惟短之是攻, 俾不作一箇破器物, 至仰.澤述從師二十年, 空空無一得, 眞所謂家河而渴死者, 何充量之是稱, 而發揮之敢與哉? 雖然, 旣荷眷愛, 承誨之際, 有可質疑者, 敢不效一得之見而助日下之燈也? 절시(切偲)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간절하고 자상하며 화락하면 선비라 부를 만하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절절시시'를 줄인 말이다. '절절시시'는 붕우에게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 것을 말하고 '이이여야'는 형제에게 화락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진덕수업(進德修業) 《역경(易經)》의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덕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는다. 충신은 진덕하는 방법이요, 말을 닦아서 그 정성을 세움은 업에 거하는 방법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 書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6 卷之六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심 전장에게 보냄 與鋉心田丈 戊寅 무인년(1938)우리 어른께서 매번 말씀하시길, 제가 다른 사람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니, 규칙을 두어야 하고,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은 성인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른이 이것으로 저를 격려하는 것은 덕으로 사랑하는 뜻이 매우 두터움으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주자(朱子)가 양씨(楊氏)의 '본분 이외에 한 터럭의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201)는 말을 인용하여 '성인도 너무 심하지 않았다.'는 뜻을 해석했으니, 본분 이외에 더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분에 가함이 없는 것을 비난하면 비록 엄할지라도 그것을 너무 심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가함과 불가함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한 마땅히 성현의 말과 행동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 유비(孺悲)가 뵙기를 청함에 질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다시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 부름에 이르렀으니202)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진항(陳恒)이 임금을 시해하고 다른 나라에 있었는데, 목욕재계를 하고 토벌하자 청한 것203)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향원이라고204) 일컬어지는 사람은 마땅히 선한 사람이라 일컬을 수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서 들어가지도 않고 느끼는 것도 없었고, 또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 말하니,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양웅(揚雄)과 묵자(墨子)도 또한 인의를 배운 사람인데, 맹자가 부모도 무시하고 군주도 무시하는 금수라고 비난하기205)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한 듯합니다. 야인으로 호사자(好事者)의 말은 마땅히 물을 만한 것도 못되는데 힘을 써 변론하여 깨트려 크게 말하여서, "공자 같은 사람이 옹저(癰疽)와 내시 척환(瘠環)을 주인 삼았으면206), 어떻게 공자(孔子)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맹자가 중니(仲尼)를 일컬어서 너무 심하지 않다고 여겼으니, 스스로 그가 행한 것을 믿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유원성(劉元城: 유안세(劉安世))이 소인을 너무 강하게 공격하여 만 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원우(元祐)207) 때 제현들이 채(蔡)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해서 시구(詩句)로써 죄를 주기에 이르렀으니,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동한(東漢)의 당인들이 '무모하게 물을 건너다가 이마까지 빠졌으니'208),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자가 원우 때의 인물을 논함에, '유원성은 중도를 얻었다 하고 시구(詩句)로 채 씨를 죄를 준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나로 하여금 동한 시대에 살게 했다면, 반드시 범방(范滂)과 양구(陽球)209)와 같은 재앙에 빠졌을 것이라 하고, 당중우(唐仲友)를 탄핵함에 이르면, 항소를 여섯 번 올림에 조목을 40개 나열하고도 너무 심하다 여기지 아니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모두 일이 대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큰 죄를 범해서, 이와 같이 아니하면 천하의 의리를 밝힐 수 없고, 후세에 재앙과 근심을 막지 못함은 본분에 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눈이 헷갈려서 살펴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듣건대, 사생은 만법의 근원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의 윤리가 한 번 무너지면 만법(萬法)이 모두 무너지는 것은 형세 상 반드시 이르게 됩니다. 오늘의 일은 사생의 큰 윤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를 없애는 것은 큰 죄로, 공자·맹자·주자의 세 성현 때와 비교를 해봐도 큰일이지 작은 일이 아니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치를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고 기를 충실하게 기르지 못했으니, 불인(不仁)한 악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지 못하지만 본분에 대하여 흠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성현에게 받은 글로써 헤아려 보건대 본분에 터럭만큼을 가하여 되돌아오는 것이 너무 심하다 말한다면 진실로 깨우쳐 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나는 단지 있던 일에 근거하여 저들이 말과 일로 속이며 범한 큰 것으로 논했을 뿐입니다. 일찍이 다른 일까지 동시에 언급해서 미세한 것까지 다 거론하기를, 마치 채씨를 죄주고 당중우를 탄핵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의 일상적인 보통 감정의 견해로 헤아려 보더라도 마땅히 또한 너무 심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할 때 사람이 학문을 하는 까닭은 단지 간단히 옳은 것을 구하고 이치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치를 따르기를 구하고, 이치에 따라서 생과 사, 화와 복, 비난과 칭찬,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돌아본다면, 이것은 남쪽의 월나라를 가려하면서 말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들어가려 하는데 문을 닫는 것과 같아서, 끝내 이루어질 이치는 없습니다. 스스로 학문하는 처음의 마음을 버려서 일생을 그르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금년에 이런 이치를 얻어서 이 뜻을 철저히 지키다보니 마침내 거의 한 부를 얻어서 지하에서 선성과 선사를 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은 이런 말을 들으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어른이 저를 사랑한 것은 이처럼 두터운데 내가 보답할 바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고서 저버리는 것이니 내가 어찌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의 덕성과 온화하고 후덕함은 자못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니, 활달한 기운을 거두어 들여서 차마 공핍(空乏)하게 하리오! 이 학문을 한지 오십여 년이 되어, 널리 사랑하는 인(仁)이 아름답고, 장자(長者)의 기품과 큰 덕의 아름다움이 있고, 우뚝하니 군자의 지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리를 정교하게 하고 간절하게 함에 이르러서는 못을 끊듯 쇠를 자르듯 거처(去處)를 분명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힘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충 보아가면 시비의 근원이 어긋나는 것이 작지 않고, 학문을 쌓은 효과도 거두기 어렵습니다. 근래 의론 같은 경우, 당신의 견해가 이와 같아서, 돌아보면 생각하는 것이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논리에 따라 사실을 규명하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출입을 간단히 하고, 경전을 가까이 하기를 삼가 권하여 말년에 식견을 밝게 하고 행실을 높이해서 우뚝 세우는 효과가 있기를 바랐는데, 들어주질 아니하여 매우 속상했습니다. 지금 저의 병이 오래도록 낫질 않습니다. 나이는 비록 어른보다 적다하나 갑자기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전부 말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 어른은 선친의 친구라고, 다시 진진의 친함210)을 더 보탠 것이 아니지만, 평범한 다른 동문이라면 어찌 감히 이것으로써 진언하겠습니까. 이것을 잘 살피어 깊이 마음 쓰기를 바랍니다. 吾丈每謂, 澤述疾惡已甚, 有所規飭, 夫已甚者, 聖人之所不爲也.丈之以是勉之者, 出於以德之愛意甚厚矣, 豈不知感? 但朱子引楊氏'本分之外, 不加毫末之語', 以釋'不爲已甚'之義, 則加於本分之外者, 乃可謂之已甚, 其於本分無加者斥之, 雖嚴不可謂之已甚也, 明矣.然則加與不可, 何以知之? 亦當以聖賢之言與行知之.孔子於孺悲請見, 旣辭以疾, 至復取瑟而歌, 則似若已甚.陳恒弑君事, 在他國, 則至於沐浴請討者, 似若已甚.鄊里所稱謹愿之人, 宜若可謂善者, 而旣謂過門, 不入而不感, 又至謂德之賊也, 則似若已甚.楊墨亦學仁義者也, 而孟子至斥以無父無君之禽獸, 則似若已甚.野人好事者說, 宜若不足問者, 而亦用力辨破, 至於大言之, 曰: "若孔子主癰疽侍人, 何以爲孔子." 則似若已甚然.而孟子旣稱仲尼, 以不爲已甚, 則自信其所行者, 又可知矣.劉元城攻小人太強, 以至萬死之域, 可謂已甚.元祐, 諸賢, 憂蔡之難制, 至於罪之以詩句, 則可謂已甚.東漢之黨人, 是過涉之滅頂者, 可謂已甚.而朱子論元祐人物, '以元城爲中, 而罪蔡以詩句, 不以爲非.' 又至謂使我當東漢, 必陷於范滂陽球之禍, 至於按唐仲友則狀, 至六上條列四十, 而不自以爲已甚, 何哉? 凡此皆以事關大義.人犯大罪, 不如此, 不足以明義理於天下, 防禍患於後世, 而有所欠於本分, 故也.誠非夫夫淺腹眯眼之所能窺測也.蓋聞, 師生者, 萬法之源.然則師倫一斁, 萬法皆斁, 勢所必至.近日之事, 事關師生之大倫.人犯亡師道之大罪, 視孔孟朱三聖賢時, 事有大焉而非細者, 不其明乎? 澤述也, 見理未徹, 養氣未充, 其於不仁之惡, 實未知, 其無所欠於本分.然竊以所受乎三聖賢者揆之, 謂加乎本分而歸之已甚, 則誠不知其所喩也.且吾只據有事以來, 彼之言與事, 誣犯之大者, 而論之而已.未嘗有幷及他事, 悉擧纎細, 如罪蔡按唐之爲者.則雖度以夫, 夫常情之見, 宜亦不謂之已甚也, 審矣.自惟人之所以爲學, 只是欲斷斷然惟是之求.而惟理之從欲求, 從理而有一毫顧念於死生禍福毀譽利害之間, 則是猶適越而北轅, 欲入而閉門, 而卒無有成之理.自負爲學之初心, 而誤了一生, 豈不可哀? 此年以來, 見得此理, 徹底守得此志, 到頭庶有一副所得可籍手, 以見先聖先師於地下, 而無愧矣.未知吾丈聞此, 又以爲如何也.仍念丈之愛我者如此其厚, 而我不思所以報之, 則是受人恩而負之者, 我豈忍爲? 丈之德性和厚自是天禀, 而斂其豪豁之氣, 忍其空乏! 此學, 蓋五十年子茲矣, 雖其泛愛之仁, 休休然, 有長者之風, 大德之閑, 亭亭然, 有君子之操.然至於義理精切, 斬釘截鐵去處, 未甚致力, 竊恐如此放過則是非之源, 所差不細, 而積學之效, 難以收得也.至若近日議論, 合下所見如是, 非有所顧念, 而然循論究實, 亦爲之有是懼焉, 故已嘗奉勸以簡出入 親經傳, 管取晩年識明行高, 卓然有立之效, 而未見採聽, 甚所憫然.今則賊疾彌留, 竊恐年雖少丈, 溘然則先, 故敢畢言之, 噫非吾丈旣爲先人之友, 又忝秦晉之親, 而非凡他同門之地, 安敢以此進之也? 倘有以諒此深心焉. 본분지외(本分之外) 맹자께서 "중니는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으셨다'에 대한 주석으로 양씨 왈, '성인이 하는 바는 본분의 밖에는 털끝도 더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맹자가 참으로 공자를 알지 못했다면 능히 이렇게 칭하지 못했을 것이다.〔孟子曰: 仲尼不爲已甚者, 楊氏曰: 言聖人所爲, 本分之外, 不加毫末, 非孟子眞知孔子, 不能以是稱之〕'라고 주자가 양씨의 말을 인용하여 풀이하였다.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공자(孔子)께서……이르렀으니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유비(孺悲)가 공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는 병이 있다고 거절하시고, 명령을 전달하는 자가 문밖으로 나가자 거문고를 가져다 노래를 불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셨다.〔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라고 하였다. 거문고를 연주한 이유는 병 때문에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진항(陳恒)……청한 것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역(弑逆)하자, 공자가 목욕하고 조정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고(告)하기를,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죽였으니, 그 놈을 토벌하소서.〔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 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향원(鄕愿) 그 지방 인심에 영합하면서 가장 점잖은 체하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향원은 덕을 해치는 사람〔鄕愿德之賊〕"이라 하였다. 무부무군(無父無君) 임금과 어버이를 모두 부정한 극악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과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공자……삼았으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주자의 주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 사구를 하다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 대부인 사마상퇴(司馬向魋)가 공자를 죽이려 하므로 공자가 화를 피하려고 미복 차림으로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를 주인으로 정하신 것이다. 맹자의 말은 공자가 이렇게 곤액을 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인 삼을 사람을 가리셨는데, 하물며 제나라나 위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어찌 옹저(癰疽)나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정하는 일이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원우(元祐) 송나라 철종의 연호로 1086~1094까지 사용되었다. 무모하게……빠졌으니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 상육(上六)의 효사(爻辭)이다. '지나치게 건너 이마까지 빠져 흉하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過涉滅頂凶無咎〕. 범방과 양구 후한 때의 명사이다. 범방은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일어난 당고(黨錮)의 옥사 때 옥중에서 죽었고, 양구는 영제 광화(光和) 2년(179)에 위위(衛尉)로 있으면서 조절(曹節)과 장양(張讓) 등 환관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진진지호(秦晉之好) 춘추시대에 진(秦)과 진(晉) 두 나라가 대대로 혼인을 하니, 뒷 사람이 연인(連姻)을 들어 진진지호(秦晉之好)라 일컫게 되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형태에게 부침 갑자년(1924) 寄炯泰 甲子 네 자질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세가 막혀 끝내 그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고 그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게 하였구나. 아비로서의 도를 잃은 게 부끄러워 내 마음이 끊어지는 듯하다. 비록 그렇지만 천도(天道)를 이용하고 지리(地利)를 의지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공자가 내린 가르침이다. 산에서 땔나무를 하고 물에서 물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한공(韓公)이 칭송133)하였다. 네가 만약 이것을 할 수 있다면 백행의 근원이 효니, 곧 학문은 다른 데서 구할 게 없다. 하물며 하루 종일 밤새도록 책을 읽을 만한 작은 틈도 없겠느냐. 네가 만약 뜻이 있다면 예관(兒寬)이 책을 지니고 밭일을 하고134) 중봉(重峯)이 아궁이 불에 비추며 읽은 것135)도 넉넉히 할 수 있을 게다. 나는 비록 아비의 도를 잃었으나 너는 옛날 사람의 아름다운 자취를 바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하여 기억하도록 하여라. 汝之才質, 非不可爲者, 形格勢禁, 竟使蓬其首而胝其手.愧失父道, 我心若折.雖然, 用天因地, 以養父母, 孔聖垂訓.樵山漁水, 以供甘旨, 韓公有贊.汝若能此, 百行有源, 卽此是學, 不可他求.況非終晷通宵, 無片隙之可讀者乎? 汝若有志, 兒寬之帶經鋤田, 重峯之燎竈照讀, 可優爲也.吾則雖失父道, 望汝以古人懿蹟, 須深念記取也. 한공(韓公)이 칭송 당(唐)나라 때의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이 안풍(安豐)에 살았는데 그의 청렴함과 효행이 워낙 우뚝하여 문장가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란 노래를 지어 "딱하다, 동생이여! 아침에 나가 농사짓고, 밤에 돌아와 고인의 책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 못하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아, 부엌에서는 맛난 음식 차리고 당에 올라서는 부모의 안부 살피네. 부모는 근심이 없고, 처자식은 원망이 없네.[嗟哉, 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칭송하였다. 《小學 善行》 예관(兒寬)……하고 한(漢) 나라 예관(兒寬)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던[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 고사가 있다. 《漢書 兒寬傳》 중봉(重峯)……것 조헌(趙憲, 1544~1592)이다. 중봉은 밭갈이 하면서도 쉬는 사이에 글을 읽었고, 일을 나가면 먼저 책을 올려놓을 받침을 架設하였으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면 잿 속에서 불을 골라 빛을 밝혀 글을 읽다가 꺼진 다음에 그만두곤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형복에게 보냄 신유년(1921) 寄炯復 辛酉 일전에 부탁한 "책을 읽어라, 도량을 너그럽게 하라, 술을 경계하라."는 세 가지 일은 과연 생각해 보았느냐? 사람들은 "집안일을 주관하면 독서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나는 '집안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더욱 독서에 힘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대저 독서는 다른 게 아니라 이를 밑바탕으로 해서 용무에 응함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오로지 독서만을 일삼으면서 용무에 응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경우엔 오히려 조금 느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안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하루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의 일에 응대할 것을 잃고, 이틀 책을 읽지 않으면 이틀의 일에 응대할 것을 잃으니, 어찌 더욱 독서가 급한 것이 아니겠느냐.네가 가난한 집안 살림을 맡아 비록 바쁘다고는 해도, 몸소 낫이나 호미를 잡을 정도는 아니니 진실로 뜻만 있다면 어찌 겨를이 없는 걸 걱정하겠느냐. 다만 네가 근면하고 독실함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옛 사람 중에 넓고 큰 도량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스린 분은 더할 나위 없지만, 너그럽고 온화함에 힘쓰고 성급하고 경박한 것을 경계하여 한 집안을 태평하게 하는 것이 또한 불가능하겠느냐.대개 집안에 있어서 너그럽고 온화하지 않으면, 부모에게는 효를 잃게 되고 집안사람에게는 덕을 잃게 되어, 끝내 은혜로운 정의는 야박해지고 형제간은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좁은 도량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못지않다. 유관(劉寬)은 더럽혀진 옷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고128), 왕공(王公)은 검은 먼지를 싫어하지 않았다.129) 이것은 타고난 자질에 달려 있어 비록 여기에 미치기는 쉽지 않겠지만 동래(東萊)가 통렬하게 이전의 습관을 고쳤듯130) 본인이 만약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어려워 못하겠느냐. 네가 빨리 고치지 않으면 덕에 누가됨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될까 내 몹시 우려되는구나.술이라는 물건은 마시면 안 된다하면 너무 편협한 듯하고, 마셔도 된다하면 함부로 행동하기 쉬우니 당연히 기혈(氣血)의 허실과 심력(心力)의 강약을 살펴 대처해야 할 것이다. 만약 기운이 좋고 마음이 왕성하여 함부로 행동할 염려가 없다면 그뿐이지만, 만약 행여 그렇지 않은데도 좋아하면 이는 짐독(鴆毒)131)이다. 너는 몸이 약하여 기운이 충실하지 못하고 나이가 어려 뜻이 굳세지 못하다. 나는 네가 차라리 심히 편협하여 문제가 될지라도 행여 짐독을 가까이하지 않기를 바란다.아, 글을 읽지 않으면 만사(萬事)는 이치를 잃고 인도(人道)는 무너진다. 도량이 너그럽지 못하면 친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집안일은 엉망이 된다. 술을 경계하지 않으면 일신(一身)이 법도를 잃어 재화(災禍)는 예측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네가 마땅히 급선무에 두어야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열거하여 거듭 부탁하니, 부디 네 마음에 깊이 새기고 면려하여 소홀하지 않길 바란다. 日前所囑 "讀書、寬量、戒酒"三事, 果能動念否? 人言幹家務, 不暇讀書, 余謂'幹家務者, 尤當急於讀書也.' 何也? 夫讀書非爲他也, 欲資此而不失應務也.其專事誦讀, 而無應務之煩者, 猶可少緩.至於幹家者, 一日不讀, 則一日之務失其應;二日不讀, 則二日之務失其應, 豈非尤急者乎?汝之食貧幹蠱, 雖曰"滾沓.", 不至躬執鎌鋤, 苟有其志, 豈患無暇? 只在汝勤篤如何耳.古人之弘量大度, 安邦濟民者, 尙矣, 至於務寬和, 戒急遽, 以底一家泰平者, 亦不可能乎!蓋居家而不寬和, 則失孝於父母, 失德於家衆, 終至恩義衰薄, 骨肉乖異.其非狹量攸濟, 又不下爲國也.劉寬之不恚汚服, 王公之無嫌埃墨.係是天分, 縱難及之, 東萊之痛改前習, 我苟欲之, 何難而不爲? 汝不速改, 非惟累德不細, 亦恐有妨遐福, 吾深慮之.酒之爲物, 以爲不當飮則似太偏, 以爲當飮則易至亂, 當量其氣血虛實, 心力强弱而處之.若我氣實心强, 無慮乎亂則已, 苟或未然而嗜之, 是鴆毒也.汝淸弱而氣未實, 年少而志未堅.吾欲汝寧失太偏, 而無或近鴆毒也.噫, 書不讀, 則萬事失理, 而人道壞矣.量不寬, 則九族失和, 而家政戾矣.酒不戒, 則一身失度, 而禍不測矣.此三者, 汝當下之急務.故另擧申勖, 幸體若心, 勉旃毋忽. 유관(劉寬)은……않았고 유관(劉寬)은 후한(後漢)의 남양 태수(南陽太守)이다. 그가 화를 내는지 시험해 보려고 시비(侍婢)를 시켜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그의 조의(朝衣)에 엎지르게 하였을 때 안색을 변치 않고 "혹시 손을 데지나 않았느냐.[羹爛汝手]"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後漢書 卷55》 왕공(王公)은……않았다 동진(東晉) 때 사람인 왕도(王導)이다. 동진 성제(成帝)의 장인인 유량(庾亮)이 서쪽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도 조정의 권력을 주무르자, 왕도가 불쾌하게 생각하여 서풍이 불면 그때마다 부채를 들어 바람을 막으며 말하기를 "원규(元規 : 유량의 자)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히려 하는구나." 하였다. 《晉書 권86 王導傳》 동래(東萊)가……고쳤듯 여조겸(呂祖謙)의 호이다. 《심경부주》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에 주자(朱子)가 "지난번에 여백공을 만났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 그가 젊었을 적에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언짢게 여겨 집안의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곤 하였는데, 뒷날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 단지 《논어》 한 책을 가지고 조석으로 익히 보다가, '자기를 책망함은 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함은 적게 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마음속 생각이 한순간에 평온해짐을 깨달았으며,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분노를 폭발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向見呂伯恭說 少時性氣粗暴, 嫌飮食不如意, 便打破家事, 後日久病, 只將一冊《論語》, 早晩閑看, 至"躬自厚而薄責於人.", 忽然覺得意思一時平了, 遂終身無暴怒.此可爲變化氣質法.]"라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짐독(鴆毒) 집안에 액을 가져온다는 상징적인 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형복에게 보냄 寄炯復 네가 돌아간 지 이제 십일 남짓 되었구나. 몇 가지 허물을 고치고 몇 가지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듣기로 효자는 밝은 대낮이라 하여 절도(節度)를 펴고 어두운 밤길이라 하여 행실을 태만히 하지 않는다더구나. 네가 만약 내 곁을 떠났다고 그 행실을 태만히 한다면, 어찌 다만 효도를 하지 못할 뿐이겠느냐. 장차 패역한 자식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네가 바로 지금 마땅히 면려해야 할 것을 조목조목 적어 보내니, 이를 보고서 정성을 다하고 힘을 쏟아 병자가 낫기를 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노력하되, 배부른 이가 밥을 대하는 것같이 등한히 하지 말거라. 만약 이를 믿지 않는다면 평생을 그르치니 마땅히 깊이 염두에 두어라.첫째, 어머니를 공경하라. 자식이 부모를 섬길 적에 비록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다는 의(義)로써 아버지를 먼저 하고 어머니를 뒤로 하지만, 그 존경하는 마음은 어찌 차별을 두는 이치가 있겠는가. 내가 여염의 자식을 보건대, 아이가 젖 먹이 때부터 그 어머니에게 친압(親狎)하여 자라서도 이 버릇이 여전히 남아있어, 부름에 답하거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기 아버지에게 감히 이르지 못하는 것을 곧 자기 어머니 앞에서는 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점점 그 명을 어기고, 그 좋아하는 바를 거슬러 불효에 크게 빠진 뒤에야 그친다. 이는 다른 게 아니라 모범을 듣고 보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너는 비록 여항에서 자랐고 나이 또한 어리지만, 읽고 왼 것은 성현의 말씀이고 공경히 법식으로 삼은 것은 사우(師友)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가정에서 행하는 바가 혹시 여항의 자식이 하는 바를 면하지 못한다면, 이는 크게 경계할 만하다. 속담에 말하기를, "세 살 때 잘못된 버릇은 여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하였다. 어찌 일찍 도모하지 않겠느냐!둘째, 교유에 신중하라. 무릇 사람의 삶은 선과 악이 일정하지 않다. 선한 사람을 따라 사귀면 선으로 나아가고, 악한 사람을 따라 사귀면 악으로 나아간다. 비유하면 물건 중에서 흰 것이 붉은 데 물들면 붉어지고, 옻칠에 물들면 검어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맹자는 타고난 아성(亞聖)이었음에도 무덤과 저자 가까이에서 따라 노닐 때는 무덤 만들고 장사하는 허물을 면하지 못하다가, 학궁(學宮) 옆으로 이사한 뒤에야 읍양(揖讓)하는 모습을 익혔다.114) 자천(子賤)은 탁월한 자질이 아니었지만 노(魯) 나라의 군자에게서 선(善)을 취하였고,115) 호향(互鄕) 또한 인륜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나, 나쁜 것을 익혀 더불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해졌다.116) 이로 말미암아 보면 교유에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어린 나이라 교유가 넓지 않아 이로운 벗 세 사람과 해로운 벗 세 사람117)은 비록 다 갖추어 논하지 못하나, 또한 마을 또래 중에서 행실이 단정하고 배움이 기민한 이를 택하여 교유하여라. 만일 들뜨고 조급하며 방만한 이를 보거든 몸을 돌려 멀리하여라. 입으로 비속하고 외설스런 말을 하고 손으로 도박을 하는 이는 곧 잡된 부류와 패역한 무리이다. 만일 한 번 그 속에 발을 들이면 몸은 재앙을 만나고 집안은 패망할지니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만하다.셋째, 위의(威儀)를 중후하게 하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하셨다.118) 여형공(呂滎公)119)이 말하기를 "응대하는 말이나, 행동거지의 경중은 귀천(貴賤)과 수요(壽夭)가 이로부터 나누어진다."120)라고 하였다. 그러니 위의의 경중은 비단 이 학문 성패의 기틀일 뿐 아니라 또한 종신토록 길흉의 부적(符籍)이다. 너의 자질과 바탕이 섬약하여 이미 남에게 경시를 당하는데 하물며 거동마저 예로써 하지 않는 게 많다면, 학문을 성취하는 것과 스스로 길(吉)과 복(福)을 구하는 것은 나는 어려울 것이라 안다. 지금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다만 구용(九容)121)으로 자신의 계책으로 삼아라. 옛사람이 이르되, "구용이 근엄치 않으면 이는 몸이 없는 것이다."122)라고 하였으니, 훌륭하구나, 이 말이여!넷째, 도량을 넓혀라.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도량을 넓고 크게 해야 남의 선(善)을 수용하여 자기의 모자란 것을 보완하고, 남의 허물을 포용하여 자기의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거드름피우며 자기만 옳다 하고 강퍅하게 남을 거부하는 이는 비록 행하는 바가 다 옳아도 자신만 좋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물며 거드름 피우거나 강퍅한 것은 반드시 천리(天理)의 공정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움에 관련된 것임에랴!내가 너를 보건대, 또한 도량이 넓지 못한 사람 중 하나다. 남이 범함이 있으면 참으로 포용하려 들지 않고, 잘 인도하는 사람은 혹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덕을 나아가게 하는 데 해가 되기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만약 순임금이 남의 선을 취한 것,123) 중유(仲由)가 허물을 듣기를 잘한 것,124) 안연(顏淵)이 남이 자기에게 허물을 범한 데 대하여 따지지 않은 것,125) 맹자가 세 가지를 스스로 돌아본 것126)에 대해서 능히 마음을 두고 힘을 쓴다면 자기를 닦는 것과 남을 수용하는 것 두 가지 모두 그 이르는 경지가 지극할 것이고 덕의 나아감은 막지 못할 것이다.다섯째, 기억하고 외우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라. 기억하고 외우는 것을 덕행과 견주면 비록 말단이지만, 기억하고 외지 않으면 어떻게 옛사람의 지극한 가르침과 성법(成法)을 살펴 덕행을 향상시키는 밑천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기억하고 외는 것은 실로 뒤로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고 일생의 세월은 유한하다. 유한한 세월로 무궁한 의리를 궁구하는데 어찌 느슨한 마음과 느긋한 힘을 들여서 얻을 수 있겠느냐? 무릇 으뜸가는 성인인 주공(周公)도 아침에 글 백 편(篇)을 읽었고127), 나면서부터 안 공자도 가죽으로 엮은 《주역》이 세 번이나 끊어졌으니 달리 무슨 이야기를 더하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아주 절실한 심력을 써서 읽는 것과 외는 것을 날마다 일과를 세워 혹시라도 빠짐이 없게 하여라.아, 한마디 말이 때로 종신토록 행하는 데 밑천이 되기도 한다. 청춘에 배움을 잃으면 족히 백발 노년에 후회를 불러올 것이다. 근면과 태만 사이의 득실이 이와 같으니 염두에 두고 힘쓰라. 汝歸今十日餘矣.未知改得幾款過惡, 做得幾款工夫.吾聞孝子不以昭昭伸節, 不以冥行惰行.汝若以離吾側而惰其行, 豈惟不得爲孝, 而將不免悖子之歸矣.玆條錄汝當下所當勉者, 寄往.見此, 發精振力, 汲汲若病者之求瘳, 毋沁沁若飫者之對飯也.如不信此, 誤却生平, 宜深念之.其一:敬慈母.子事父母, 雖以家無二尊之義, 先父而後母, 然其尊敬之意, 則豈有間然之理? 余見閭巷人子, 自孩提乳哺時, 以親狎其母, 及乎稍長, 此習猶存.應對承奉, 大不若敬厥父, 所不敢告厥父之事, 乃敢恣行無憚於厥母前.駸駸至於方厥攸命、拂厥攸好, 大陷不孝而後已.此非他, 無聞見模範而致然也.汝雖生長閭巷而年且幼, 所誦讀者, 聖賢也;所矜式者, 師友也.而家庭所行, 乃或不免閭巷子所爲, 此大可戒也.諺云:"三歲悖習, 八耋猶在." 盍早圖之! 其二:愼交遊.夫人之生, 善惡非一定.從善人交, 則趨於善;從惡人交, 則趨於惡.譬如物之白者, 染於丹則赤, 染於漆則黑.是故孟子, 以天生之亞聖, 從遊墓、市之傍, 則不免於築埋、賈衒之失, 徙舍學宮之側, 然後乃習揖讓之容.子賤非卓越之資, 而取善於魯之君子.互鄕亦秉彝之人, 習非而致難言之惡.由此觀之, 交遊可不愼乎? 汝是童年, 交遊不廣, 三益三損, 雖未及備論, 亦於同閈儕類中, 擇端行敏學者, 交之.若見浮躁放慢者, 引身遠之也.至於口發鄙褻之言、手執睹2)技之戱者, 直是雜類悖徒.若一涉跡其間, 身其逢殃, 家用敗亡, 可畏可畏! 其三:重威儀.孔子曰: "不重則不威, 學則不固." 呂滎公曰:"辭令、容止之輕重, 貴賤、壽夭之所由分." 然則威儀之輕重, 非惟此學成敗之機, 亦終身吉凶之符也.汝質幹纖弱, 固已爲人所輕, 而況動之多不以禮, 其於成就學問、自求吉福, 吾知其難矣.今不要多談.只可把九容作家計.昔人云:"九容不謹, 是無身." 旨哉, 言乎! 其四:恢度量.人須弘大其量, 有以受人之善, 用補己闕;容人之過, 使化己善.若訑訑是己、悻悻拒人者, 雖所行皆是, 不過爲自好之人.況其訑訑、悻悻者, 未必出於天理之公, 而涉於一己之私乎! 以余觀汝, 亦一量不廣底人也.人之有犯, 固不肯容;善導之人, 或不肯受.吾以爲進德之害, 莫此爲甚.若能於大舜之取人善、仲由之喜聞過、顏淵之犯而不較、孟子之三自反, 留心而用力焉, 則修己、容物, 兩極其至, 而德之進也, 莫禦矣.其五:勤記誦.記誦視德行, 雖曰爲末.然非記誦, 何以考古人之至訓成法, 用資德行之進乎? 記誦實不可後也.天下之義理, 無窮;一生之歲月, 有限.以有限之歲月, 究無窮之義理, 豈容致緩心徐力而可得乎? 夫以周公之元聖, 朝讀百篇;孔子之生知, 韋編三絶, 他尙何說哉? 汝須煞用緊實心力, 所讀所記, 逐日立課, 罔或闕漏也.嗚呼! 一言之得, 或資終身之行.靑春之失學, 足以招白首之噬臍.勤慢之間, 得失如此.念哉勖哉! 맹자는……익혔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무덤 근처에 집을 정하자 맹자가 매장하는 놀이를 하고, 시장 가까이 집을 정하자 맹자가 장사하는 놀이를 했으므로 결국 학교 가까이로 이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자천(子賤)……취하였고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자천(子賤)을 두고 평하면서 "군자답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하였다. 호향(互鄕)……악해졌다 호향은 춘추(春秋) 시대의 한 고을 이름이다. 풍속이 나빠서 그 고을 사람과는 함께 선(善)을 논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고을 동자가 공자의 덕에 감화되어 찾아가자 공자가 그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論語 述而》 이로운……사람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것이 세 종류의 벗이고 손해되는 것이 세 종류의 벗이다. 정직한 벗, 성실한 벗, 견문이 많은 벗은 유익하고, 한 가지에만 익숙한 벗, 아첨을 잘하는 벗, 말을 잘하는 벗은 손해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矣.友便辟、友善柔、友便佞, 損矣.]"라고 하였다. 공자께서……하셨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여형공(呂滎公) 여형공은 송나라 학자인 여희철(呂希哲)의 봉호로, 자는 원명(原明)이고 여공저(呂公著)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손복(孫復)ㆍ호원(胡瑗) 등에게 종학하였고 나중에는 이정(二程)과 장재(張載)에게 수학하였다. 응대하는……나누어진다 《소학》 〈가언(嘉言)〉에 여형공이 말하기를 "후생으로 처음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기상을 알아야 한다. 기상이 좋을 때는 온갖 일이 마땅하다. 기상이란 응대하는 말과 용모와 거동의 가볍고 무거움, 빠르고 느긋함에서 족히 볼 수 있다. 군자와 소인만이 여기서 나누어질 뿐 아니라 귀하고 천함, 수명의 길고 짧음 또한 이를 말미암아 정해진다[後生初學, 且須理會氣象.氣象好時, 百事是當.氣象者, 辭令容止輕重疾徐, 足以見之矣.不惟君子小人, 於此焉分, 亦貴賤壽夭之所由定也.] 하였다. 구용(九容) 옛날 군자가 수신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바르게, 입은 신중하게, 말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똑바르게, 숨소리는 고르게, 설 때는 의젓하게, 낯빛은 단정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용이……것이다 김택술의 스승 전우(田愚)의 문집 《간재집ㆍ후편속집》 권4 〈정태수(鄭兌秀)에게 답하는 편지 을묘〉에 "유방채가 말하기를, '구용을 닦지 않으면, 이는 몸이 없는 것이다. 구사를 신중히 하지 않으면, 이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군자가 의용을 닦아서 인도를 세우고, 생각을 신중히 하여 천덕에 도달한다.' 하였다.[劉邦采曰:九容不修, 是無身也.九思不愼, 是無心也.君子修容, 以立人道, 愼思以達天德.]" 라는 구절이 보인다. 유방채(劉邦采, ? ~ ?)의 자는 군량(君亮), 호는 사천(師泉)으로 강서(江西) 안복(安福) 사람이며, 왕수인(王守仁)에게 수업하였고, 《역온(易蘊)》이라는 저술이 있다. 순임금이……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대순(大舜)은 이보다 더 위대한 점이 있었으니, 자기에게 훌륭한 면이 있으면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 타인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다.[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라는 말이 나온다. 중유(仲由)가……것 중유는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로(子路)이다. 이 내용은 《맹자》 〈공손추 상〉에 "자로는 남들이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말해주면 기뻐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라고 보인다. 안연(顏淵)이……것 이 구절은 《논어》 〈태백(泰伯)〉에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옛날에 나의 벗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는 증자의 말이 보인다. 《논어집주》의 '나의 벗'은 안자(顔子)를 가리킨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것 《맹자》 〈이루 하〉에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대하기를 난폭한 행동으로써 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인(仁)하지 못하며 내 반드시 예가 없는가 보다. 이러한 일이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한다. 그 스스로 돌이켜 인하였으며 스스로 돌이켜 예가 있었는데도,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한가 보다 한다. 스스로 돌이켜 성실하였으되, 그 난폭한 행동이 전과 같다면 군자는 말하기를 '이 또한 망인일 따름이다.'라 하나니 이와 같다면 금수와 어찌 구별하겠는가. 금수에게 또 무엇을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有人於此,其待我以橫逆,則君子必自反也,我必不仁也,必無禮也. 此物,奚宜至哉?其自反而仁矣,自反而有禮矣,其橫逆,由是也,君子必自反也,我必不忠,自反而忠矣,其橫逆,由是也,君子曰:此亦妄人也已矣,如此,則與禽獸奚擇哉?於禽獸,又何難焉?]"라고 하였다. 주공(周公)도……읽었고 《예문유취(藝文類聚)》 권55 〈독서〉 조에 "묵자(墨子)가 말하기를, '주공은 아침에 백 편의 글을 읽고, 저녁에 칠십 명의 선비를 만났다.'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睹 원문 "睹"는 '賭'의 오류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형복에게 보냄 병진년(1916) 寄炯復 丙辰 벼는 참새를 쫓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란다. 일을 맡아 대응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실지다. 이미 그 일에 대응할 적에는 그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다하는 것이 또한 학문에 실로 힘을 얻는 방법이다. 진대사(陳大士)는 농사를 지으며 시를 읊어110)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단다. 조문열공(趙文烈公)111)은 고기 잡고 나무 하며 글을 읽어 문묘에 배향되었지. 이것이 모두 옛사람의 뛰어난 심력(心力)이다. 너의 나약한 근간과 유약한 뜻으로 비록 여기까지 바라지는 못하겠다만, 그러나 늘 스스로 용기를 내어 고인의 발자취 중 만분의 일이라도 뒤따르기를 어찌 감히 잊겠느냐. 모름지기 일에 응하는 여가로 조금이라도 학업을 정하여 자세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읽으면서 손을 빌릴 곳이 있으면 네 아비에게 보이도록 하여라.네 아우 또한 조금이라도 일과(日課)를 주어 풀어놓은 돼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 현자가 이르길 "독서는 가문을 일으키는 근본이다."112)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그 말이여! 무릇 사람의 집안에 문자가 한 번 끊어지면, 비록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이고 자손이 벌떼처럼 흥하여도 그 적막하여 떨치지 못함은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니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한 집안에는 모름지기 다스리는 기강이 있어야 천지가 뒤집히는 데에 이르지 않는 법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너의 계부(季父)가 곧 한 집안의 주인이다. 남녀노소 모두 오직 그 지시를 따라야 하거늘 하물며 너는 어떻겠느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형제의 아들은 내 아들과 같이 본다."113)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형제 또한 당연히 자기 아버지와 같단다. 네가 집에 있는 날에는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에 있어 털끝만큼도 명을 어기지 말거라.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稻曰驅雀, 係不得已.當事而應, 自是學問實地.旣應其事, 則盡其應事之方, 又是學問實得力處也.陳大士服田而哦詩, 名聞天下;趙文烈漁樵而讀書, 升祀聖廡.此皆古人絶倫之心力.汝之弱幹脆志, 雖不敢以此爲望, 然常自賈勇追古人步武之萬一, 安敢忘也? 須於應事之暇, 少定課業, 靜思劇讀, 俾有藉手見乃父. 汝弟亦少授日課, 無至爲放豚, 可也.昔賢云:"讀書, 起家之本.", 旨哉, 言乎! 凡人門戶, 文字一絶, 雖金帛山積, 子姓蜂興, 其蕭索不振, 莫此爲甚, 可不寒心哉! 一家之內, 須有統紀, 不至天飜地覆.吾旣在此, 則汝之季父, 乃一家之主.內外少長, 惟其指使是從, 況在於汝乎? 禮曰:"兄弟之子, 視之若吾子." 此旣然矣, 則父之兄弟, 亦當視之猶吾父.汝於在家之日, 一言一事, 毫勿違命也.若不如此, 非所以敬汝父也. 진대사(陳大士) 명나라 진제태(陳際泰, 1567~1641)이다. 대사(大士)는 자이다. 호는 방성(方城)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아버지가 농사일을 시키면 책을 몸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 《明史》 卷288 列傳 第176 文苑4 조문열공(趙文烈公) 조헌(趙憲, 1544~1592)의 시호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경기도 김포 출생이다.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독서……근본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화순(和順)은 제가(齊家)의 근본이요, 근검(勤儉)은 치가(治家)의 근본이며, 독서(讀書)는 기가(起家)의 근본이요, 순리(順理)는 보가(保家)의 근본이다.[朱子曰:和順齊家之本, 勤儉治家之本, 讀書起家之本, 循理保家之本.]"라고 하였다. 형제의……본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상복에 있어서 형제의 아들 즉 조카에 대한 복을 내 아들과 같이 한 것은 대체로 끌어당겨 올린 것이고, 수숙의 사이에 복이 없는 것은 대체로 밀어내서 멀리 한 것이다.[喪服, 兄弟之子猶子也, 蓋引而進之也, 嫂叔之無服也, 蓋推而遠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삼종제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三從弟 丙子 옛날 말에 이르기를 "엎어진 둥지에는 온전한 알이 없다."104)고 하였다. 한 번 나라가 망하고부터 슬프게도 우리 백성이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이치와 형세가 그러하다. 비록 그렇다 해도 어려움을 먼저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오늘날 먼저 우리 가문부터 이산(離散)의 난을 당할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느냐? 봄에 네가 만주로 들어갈 때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전송하며 잊지 못하는 정 때문에 목이 메었단다.이제 만 리 밖에서 안부 편지를 받으니 희비가 엇갈려 뭐라 할 말이 없구나. 내가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살아, 남을 도울 힘이 없기에 가까운 친척의 이산을 앉아서 보고만 있자니 이미 견디기 어렵구나. 낯선 강산과 어렵고 힘든 생계에 생각이 미치면 너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그려 볼 수 있구나. 다만 땅이 넓고 비옥하여 풍요롭고 배부를 희망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구나.다만 또 생각건대, 옛사람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고자를 매달고 쑥대로 만든 화살을 쏘아, 뜻이 사방에 있음을 보였다.105) 그러니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넓은 하늘 아래에 삶에 어디인들 안 되겠는가. 이것으로 너그럽게 이해하면 회포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땅이 비옥하고 음식이 풍족한 즐거움으로 또한 족히 만나는 곳에 따라 편안한 것임에랴?그건 그렇다 치고 또 너의 정으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노친께서 집에 계시고, 밤낮으로 그리워하시니, 예(禮)에 부모가 살아계시면 멀리 나다니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거늘106) 하물며 처자를 거느리고서 멀리서 살 수 있겠는가? "차라리 건업(建業)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武昌)의 물고기를 먹지 않고,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다."107)는 것은 고향 땅을 몹시 그리워한 이의 말이다. 하물며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땅에 대해서이겠는가? 몇 년 동안 부지런히 일하여 약간의 재물을 얻으면 빨리 정리하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곤궁한 처지는 네가 이역에서 겪는 고생과 별반 차이가 없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다. 다만 문중의 여러 집안이 하나하나 두루 편안한 것이 다행이다. 멀리서 너무 염려치 말거라.《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체 없는 데서 본다."108)고 하였다. 이는 본시 먼저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부모의 목소리나 형체를 기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슬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는 더욱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한다.《논어》에 이르기를, "부모는 오직 그 병을 걱정한다."109)고 하였다. 대개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데가 없지만, 오직 그 질병을 늘 근심한다. 너는 다른 나라에서 충신(忠信)을 말하고, 독경(篤敬)을 행하는 것 이외에, 병이 있으면 부모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것을 가장 염두에 두어라. 행로가 위험할 때에는 방비를 단단히 하고, 풍토가 맞지 않으면 섭생에 신중을 기하여라. 비록 만 리 밖에 있지만, 부모의 목소리와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듣듯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장의 의무니 절대 소홀히 하지 말거라. 古語云:"覆巢, 無完卵." 一自國亡, 哀我民生, 死亡無日, 理勢然也.雖然, 難不欲先當, 人之情也, 豈意今者先自吾門, 當離散之難哉? 春間, 君之入滿也, 吾以淚眼送之, 不忘之情, 如物在喉.今得萬里外安信, 悲喜交集, 無以云喩.吾赤貧爲生, 無力及人, 坐見至親之離散, 旣所難堪.念及生面江山、間關營生, 則君之難堪, 又可想也.但地廣而肥沃, 豊飽有望云, 是可幸也.第又念之, 古之人, 男子生, 懸以桑弧, 射以蓬矢, 以示志在四方.然則人之生, 居廣天之下, 何所不可.以此寬譬, 可以忘懷.況土肥食豊之樂, 亦足以隨遇而安者乎? 此則然矣, 又論以君之情, 則有不然者.老親在堂, 日夜以思, 在禮, 父母存者, 遠遊尙不爲, 況率妻子遠居乎? "寧飮建業水, 不食武昌魚;寧還建業死, 不止武昌居.", 甚懷故土者之言.況於父母在之故土乎? 惟望數年勤勞, 略得物力, 亟捲而歸焉耳.吾之窮途狀況, 與君之殊方辛酸, 不甚遠, 無足言.惟以門內諸家一一均安爲幸.勿勞遠念也.《記》曰:"聽於無聲, 視於無形." 此本以先意承志, 不待父母之聲形者言.然遠離膝下者, 尤當深省也.《論語》曰:"父母唯其疾之憂." 蓋父母愛子之心, 無所不至, 惟以其疾病, 常以爲憂.君在他邦, 言忠信、行篤敬以外, 最以有疾貽親憂爲念.行路危驗之際, 極其防慮;水土不服之中, 極其愼攝.雖在萬里之外, 如視聽父母之聲形於目前, 是爲當下義務, 十分毋忽. 엎어진……없다 한(漢) 나라 공융(孔融)이 사형을 당할 때 8세와 9세 된 두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두 아들이 "부서진 둥지 아래 다시 온전한 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大人豈見覆巢之下, 復有完卵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옛사람은……보였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으로 쏘면서 장차 이처럼 웅비(雄飛)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나라의 임금이 세자를 낳으면 사인(射人)이 뽕나무로 만든 활로 쑥대로 만든 화살 여섯 개를 천지 사방으로 쏘았다.[國君世子生, 射人以桑弧蓬矢六, 射天地四方.]"는 구절이 보인다. 부모가……않거늘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가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서 노닐지 말 것이요, 나가서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처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차라리……않겠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손호(孫皓)가 도읍을 건업(建業)에서 무창으로 옮기자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원망이 높았다. 이에 육개(陸凱)가 "차라리 건업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의 물고기는 먹지 않겠네.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네.[寧飮建業水, 不食武昌魚 : 寧還建業死, 不止武昌居.]"라는 민간의 동요를 들어 상소한 일이 있다. 《三國志 卷61 吳書 陸凱傳》 소리……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더라도 부모의 의도를 먼저 헤아려 그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는……걱정한다 《논어》 〈위정(爲政)〉에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가 한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일사계안의 발문 一事契案跋 옛적에는 군주가 스승을 겸하였는데, 군주가 스승의 도리를 잃고부터 도리를 가르치는 이를 따로 스승이라 불렀다. 이리하여 난공자(欒共子)183)가 부모․스승․임금을 하나 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을 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언필칭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한 몸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대례(戴禮 禮記)》에 기록된 것에 준하여 스승이 봉양 받을 방도가 없으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다는 것은 후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이제 이따금 제자는 부유하고 스승은 가난하여 따뜻하고 추운 차이가 현저한 경우가 있으니, 이때는 어떤 예를 따를 것인가?우리 지역의 일우(一愚) 최공(崔公)의 문인은 여기에서 다른 점이 있다. 공은 암연히 스스로 수양하며 명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고, 곤궁함을 마다 않고 검약하게 사셨고, 그 문하에 들어온 사람들 또한 모두 호남의 청빈한 사람들이었다. 자력으로 생계를 공급할 수 없게 되자, 이윽고 사람들이 다 함께 돈을 내놓아 계를 맺고 그것으로 스승을 부양하는 방도로 삼았다. 그 이름을 '일사(一事)'라고 한 것이 이미 수 년 되었으니, 그 정성이 가히 지극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연장한다면,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스승을 어버이와 마찬가지로 모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공께서 사람을 가르치심에 도와 덕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공의 문하에는 훌륭한 문사와 덕행 있는 선비들이 많은데, 계의 일을 주관하는 이형규(李炯珪) ․ 최경열(崔璟烈) ․ 노찬성(盧燦晟)이 나에게 계문서의 뒤에 발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공의 덕행과 의리를 존경하는데다 또 여러 벗들의 성대한 일을 부러워하기에 사양하지 않고 글을 쓰며, 세상의 스승을 섬기는 사람들이 보고 느낄 줄을 알기를 희망한다. 古者, 師兼於君。 自君失師道, 以道敎人者別謂之師。 於是欒共子有生三事一之說, 而人必稱君師父一體。 然而準以戴禮所記, 就養無方, 同於事父, 則後世未有聞焉。 往往有弟富師貧而寒溫懸絶者, 是遵何禮? 若吾鄕一愚崔公之門人則異於是矣。 公闇然自修, 不求聞達, 而固窮處約, 故及門者亦皆湖上淸貧家。 旣自力不及焉, 則乃相與出金樹契爲就養之方, 而名之以一事者, 已有年所, 其勤可謂至矣。 推是心也, 豈其富焉而不能誠養同於事父者乎? 于以見公之敎人有道而德之深入也。 門下蓋彬彬多文行士, 而李炯珪、崔璟烈、盧燦晟幹契事, 屬余以跋案後。 余旣敬公德義, 復艶諸友盛事, 遂不辭而書之, 使世之事師者知所觀感云爾。 난공자(欒共子)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난성(欒成)으로, 시호가 공(共)이다. 진 애후(晉哀侯)를 죽인 곡옥무공(曲沃武公)이 상경(上卿) 벼슬을 제안하자 그는 말하기를 "사람은 세 가지 위에서 사니, 그 셋을 하나같이 섬겨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國語.晉語》]"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은 벗 박수경 채환의 글 뒤에 쓰다 【경진년(1940)】 題亡友朴受卿【彩煥】書後 【庚辰】 "나 박채환(朴彩煥)179)은 본디 경학(經學)을 할 자질이 아닌데 망령되이 큰 뜻을 품어 선비의 관과 옷을 입고 스승님[田愚]의 문하에 출입하였네.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만에 하나도 받지 못하여 몸이 천 길의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네. 무슨 면목으로 다시 사군자(士君子)의 뒤를 좇겠는가? 바라건대 스승님께 아뢰어 명부의 이름을 파내고 죄를 꾸짖고 내쳐서 지금과 이후로 나처럼 무지하고 망령된 자를 삼가고 경계하시기 바라네.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인데,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겠는가! 이미 지은 허물을 깊이 생각하여 부끄러워하며 죽어야 마땅하네. 다만 고명하신 자네가 나를 추천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멍해지며 고민스럽네. 그런데 귀산(龜山)의 밝은 눈으로도 육당(陸棠)180)을 잘못 본 실수가 있었으니, 고명한 자네의 이 실수가 어찌 깊이 부끄러워할 일이 되겠는가? 이로써 스스로 마음을 푸시기 바랄 뿐이네."아아, 이 놈은 세상에 살기를 삼십년 하고도 몇 년 더 살았네. 수레를 끌까, 활을 쏠까, 농사를 지을까, 장사를 할까? 평소 업으로 삼은 바는 오로지 책 뿐이었네. 그런데 이번 과오로 인하여 이젠 글을 등지게 되었으니, 비록 책을 읽고 싶어도 책 속의 성현 앞에 부끄러워 감히 마주할 수 없네. 마치 숲을 잃은 새와 물을 잃은 물고기처럼 정신이 아득하네. 온 세상을 돌아봐도 나아가 따를 사람이 없으니, 그저 슬피 탄식할 뿐이네. 고명한 자네는 이번 일을 거울 삼아 부디 애쓰고 힘쓰기 바라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것은 이를 말한 것이겠지. 나머지는 편지지 보는 마음이 서운하고 서글퍼서 긴 말씀 다 쓰지 못하겠네."아아! 이 편지는 죽은 벗 박수경(朴受卿)이 무신년(1908, 융희2) 그믐날 나에게 보내온 편지다. 그 해에 공이 배우자를 잃었고, 공의 부친이 팔십 살이 되었는데, 자기 생전에 공을 재혼(再婚)시키고자 서둘러 새 장가를 들도록 했다. 공은 예법의 뜻을 아뢰어 말하기를 "아내를 잃으면 실로 삼년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삼년이 지난 뒤에야만 후처를 얻습니다. 하물며 상복을 입는 기간 중에 해야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공의 부친이 진노하며 "내가 죽을 날이 아침 저녁에 달려 있는데, 네가 차마 내 뜻을 어기려느냐!" 하고는 며칠 동안 음식을 끊었다. 공은 어쩔 수 없이 부친의 뜻을 따르게 되었지만 예법의 죄인으로서 크게 한스러워 하였다. 편지에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하였다. 옛적에 오우(吳祐)181)는 말하기를 "아전이 부친으로 인하여 오명(汚名)을 쓰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는데, 나도 공에게 말하기를 "부친으로 인하여 예를 잃었다는 이름을 듣게 되었구나."하였다. 공은 순전히 자책을 하지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부친의 명을 따른 것이니, 참된 효자의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학자로서 자신을 반성하는 뜻이니, 이런 마음으로 공부를 해나간다면 그 성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편지 가운데 기운을 잃은 뜻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 때에 더욱 열심히 나아가라고 권면하며 답장하였으면, 그도 또한 참으로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가 오늘날까지 세상에 살아있었더라면, 우뚝히 한 사람의 대가가 되어 반드시 우리 당(黨)의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편지를 주고 받은지 일년 뒤에 세상을 떠나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아아, 애석하도다! 그런데 내가 거듭 근심하고 슬퍼하는 것이 있으니, 이 서신은 진실로 그가 스스로를 깊이 원망하고 후회해서 한 말인데, 한편으로는 또 당시 우리 스승께서 예교(禮敎)로써 사람을 가르치심이 매우 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기년복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애초에 그가 겪은 바와 같이 부친이 진노하여 음식을 끊는 일도 없었고, 털끝만큼도 난처해지지 않으면서 곧장 결혼하는 것을 다반사로 하였다. 삼년상을 무릅쓰고 혼사 하는 자들까지 있으니 종사(宗祀)를 맡고서도 악기를 두드리는 자들 같은 경우는 다시 논할 바가 없다. 그래도 모두들 아무 사문, 아무 선생이라 하면서 사림(士林)에 이름을 날렸다. 아아! 이런 무리들은 예법을 어긴 죄인과 선사를 어긴 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박수경의 죄인이다. 이런 무리와 이런 무리를 추앙하는 자들이 그의 이 글을 본다면 부끄럽고 두려워 할 줄을 알기 바란다.공은 내 종숙(從叔)의 사위이다. 처음 그가 장가 들었을 적에는 나이가 열다섯이었는데, 재주와 자질이 좀 무뎌보였고, 겨우 《소미통감(少微通鑑)》182) 첫머리 한 줄을 공부한 참이었다. 그 뒤 십년이 채 되지 않아서 나의 아버님이 그와 대화를 하다가 크게 놀라 "그대 글 공부의 성취가 이와 같다니!" 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내 아들을 금년 겨울에 그대를 따라 같이 배우게 하겠네." 하셨다. 나는 이윽고 명을 받들어 공과 함께 요곡(蓼谷) ․ 예천(禮川) 사이에서 힘들게 공부하였다. 이 때 내가 열여섯 살이고 공은 거기에 일곱 살이 많아서 명분은 비록 벗이었지만 실지로는 나의 선생이었고, 또 어린 동생처럼 아껴주셨다. 어느 날 내가 헛구역질을 하자 공은 "이는 위가 허하여 생긴 병이다."라고 하시며, 곧장 가서 댁에서 키우던 큰 수탉 한 마리를 잡아 오셔서는 몸소 잡아 삶아서 혼자 다 먹도록 하셨다. 그러자 병이 곧 나았다.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어제 일처럼 역력하다. 대개 나의 문리가 트인 것은 공에게서 얻은 은혜가 많으니 어찌 감히 잊겠는가?공의 사람됨은 용모가 장엄하고 말과 행동이 간결하고 중후하였다. 읽은 책은 적었지만 진실한 심지로 각고의 공부를 하였고, 그것이 오래 쌓여 총명이 특출해졌다. 그러자 본디 재사(才士)라고 불리던 자들도 모두 공에게 미치지는 못했다. 그 문장은 전아(典雅)하고 진실하여서 화려하고 부박(浮薄)한 기운이 없는 것이 마치 공의 사람됨과 같았으니, 이 또한 힘들게 애써서 얻었기 때문이다. 겨우 삼십년 하고도 삼년을 사셨기 때문에 저술한 바가 많지는 않다. 내가 일찍이 공의 종형(從兄)인 동계(東溪) 박제환(朴濟煥)께 유문(遺文)을 수습하기를 부탁하였지만 끝내 소식이 없다. 지금 듣건대 그 아들이 멀리 북쪽으로 이사 가면서 장서(藏書)가 다 흩어졌다 하니, 어찌된 일인지 알 만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옛 편지 묶음 가운데 이 편지를 보고서 옛 벗에 대한 감회를 이길 수 없어 그 왼쪽 곁에 이와 같이 붙여둘 뿐이다. 彩煥本非經學之質, 妄生大意, 服儒冠儒, 出入師門。 于今有年不能奉承敎誨之萬一, 而此身如落千仞之坑, 何面目復從士君子之後乎? 望須禀于師席, 刳去案名, 聲罪斥之, 以惕厲今與後之無知妄作如此漢者也。 自作之孼不可逭, 曷敢有怨尤之及天人哉! 當深念己過, 羞愧而死也。 但高明有薦進之累, 念念及此, 未嘗不惘然, 爲之代悶。 然以龜山之明鑑尙有陸棠之失, 高明此失何足爲深恥乎? 幸須以此自解爲也。 嗚呼! 此漢之生于世, 三十有餘年矣。 御乎, 射乎, 農乎, 商乎, 平日所業, 惟書而已。 今此過擧與書背馳, 雖欲讀書, 書中有聖賢, 愧不敢對, 茫然若鳥失林, 魚失水。 回首乾坤, 吾誰適從? 只切憐歎矣。 高明執此爲鑑車。 勉旃勉旃! 善惡皆吾師, 其此之謂乎! 餘臨楮忡悒, 未盡縷縷。 嗚呼! 此亡友朴公受卿戊申除日與余書也。 是歲公喪偶, 其大人時年八十, 急於生前爲之續絃定婚, 而使之娶。 公以禮意告曰: 妻喪實具三年之體, 故必三年而後娶, 況於服中乎? 大人怒曰: 吾死在朝夕, 汝忍違吾志! 因不食數日。 公無奈而從之, 然大恨以爲禮律罪人。 如不欲生, 書中所道者也。 昔吳祐謂椽以親故受汙辱之名, 余於公亦云: 以親故受失禮之名。 然而公則純是自責之, 辭無一字及於親命, 眞孝子愛親之心, 學者反躬之志, 以此心志去做工夫, 其成德何可量也? 但書中不無沮喪之意, 故余於是時勸以奮勵遷進而答之, 則公又深以爲然。 如使公今在於世, 蔚然成一大家, 吾黨有賴也, 必矣。 孰謂其書後一朞而沒焉? 嗚呼, 惜哉! 抑余重有所戚慨者, 此固公深自怨艾之辭, 然亦可見當時我師門以禮敎人之嚴也。 山頹未幾, 諸子之持朞服者, 元無親怒不食, 如公之遭, 幷不見有毫髮難處, 而輒行婚嫁若茶飯。 至有冒三年喪而行之者, 若其責宗擊鍾者, 則又不暇論。 然幷號之爲某斯文、某先生, 聲望傾士林。 嗚呼! 此輩人非惟禮律罪人、先師罪人, 亦公之罪人也。 安得使此輩及其推仰者, 見公此書, 而知所慙懼也哉? 公, 余從叔之壻也。 始公之委禽也, 時年十五, 見其才質頗鈍, 課少微通鑑首卷僅一行。 後未十年, 我先君與之語, 大驚曰: 君之文學進就乃如是乎! 指不肖曰: 吾兒今冬可隨君同課。 余乃承命, 與公攻苦於蓼谷、禮川之間。 時余十六, 公則加七歲, 名雖友而實則師也。 而又愛若穉弟, 日余病乾嘔, 公曰: 是祟胃虛, 卽往捉來家畜大雄鷄一首, 親宰烹俾全食, 病卽止。 至今四十餘年, 歷歷如昨日事。 蓋余文理開發, 得公之惠爲多, 何敢忘也? 公之爲人, 容貌莊嚴, 言動簡重。 少讀書, 以眞實心地, 用刻苦工夫, 及其積久, 聰明透出, 則雖素號才士者, 皆不及焉。 其文典實, 無浮華氣, 如其爲人, 亦由困而得故也。 壽僅三十有三, 故所著無多。 余嘗以收拾遺文責其從兄東溪【濟煥】, 而竟無報。 今聞其子遠徙北方, 書藏蕩然, 此事又可知矣。 今朝偶見此書於故紙中, 不勝感舊之懷, 題其左方如此云爾。 박채환(朴彩煥) 제22권의 제문 등에 의하면 박채환은 15세로 김택술의 종숙(從叔) 김낙준(金洛俊)의 사위로 장가들었고, 김택술(1884~1954)보다 칠팔 세 연상이었으며, 33세로 별세하였다. 귀산(龜山)의……육당(陸棠) 귀산은 송(宋) 나라 성리학자 양시(楊時)로서, 제자이자 사위인 육당(陸棠)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스승과 국가를 배반하였다고 한다. 오우(吳祐) 후한 시대 사람으로 자는 계영(季英)이다. 효렴(孝廉)으로 관직에 나아가 제상(齊相)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속관(屬官)이 백성의 돈으로 제 아버지에게 옷을 사드렸다가, 청렴한 상관을 어찌 속이느냐는 꾸짖음을 듣고 그에게 독직의 죄를 자수하자 효도하려다 죄를 지었다며 용서하였다 한다.《後漢書.吳祐列傳》 《소미통감(少微通鑑)》 송나라의 학자 소미선생(少微先生)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自治通鑑)》을 요약 정리한 책으로, 조선 초기부터 글방 초학자의 교재로 통용되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의 〈경서구옹어후〉 뒤에 삼가 쓰다 【계유년(1933)】 謹題先師敬書苟翁語後後 【癸酉】 나의 돌아가신 선생님께서는 김감역(金監役)162)이 임전재(任全齋)163) 어르신을 위해 쓴 제문(祭文)을 물리치셨다. 신구암(申苟菴)164)은 이에 크게 놀라워하며 말하기를, "호안국(胡安國)165)이 진회(秦檜)166)와 좋은 관계였던 것은 진회의 악행이 드러나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진회는 호안국(胡安國)을 한림원(翰林院)의 강연(講筵) 자리를 추천하였지만, 호 문정이 굳이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진회가 잘못 된 사람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시골 서생이 있는데 그의 스승이 별세하자,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제문을 쓰면서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를 한 겨울의 송백에 비유한 문구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골 서생이 크게 꾸짖기를 '어떻게 우리 스승님을 역적 진회(秦檜)에게 붙은 호안국(胡安國)에 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제문을 물리쳤습니다. 천하에 이와 같이 어긋나고 망령된 자가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선생님께서는 〈경서구옹어후(敬書苟翁語後)〉에 말씀하시기를 "구암 어른은 김 모(김평묵)가 '부귀한 부끄러움은 씻기 어려움,'167) '권력과 세태에 아첨함.'168) '국화와 푸른 대나무의 절기(節氣)',169) '연꽃 옷과 혜초 허리띠'170), '윤화정(尹和靖)171)이 정이천(程伊川)의 가르침을 굳게 지켰음', '덕을 절제하여 임금의 부름을 받음', '천지간에 홀연히 그 순수함이 사라졌음',172) '처음에는 공(임헌회)과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마침내는 문도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斯文)을 계승하였음' 등 갖가지 은어(隱語)173)로 칭찬인 듯 기롱인 듯 말을 한 사실을 듣지 못하셨다. 다만 호안국을 한겨울의 송백에 견준 것을 공격하는 문장만을 보셨다. 그런 까닭에 나더러 어긋나고 망령되다 꾸짖으신 것이니, 그 전후 사실과 곡절을 실답게 듣는다면 구암 어른 또한 응당 빙긋이 웃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맞는 말씀이다.또 말씀하시기를 "제문을 물리친 일은 정축년(1877, 고종14)과 무인년(1878)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그 후 수 십 년 동안 어른이 한 말씀도 질책 받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 때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174) 어른께서 일찍부터 나를 매우 아껴 주었는데, 제문을 물리친 일을 듣고서는 이성을 상실한 사람으로 여기셨다. 그 뒤에 김 아무개의 험한 말과 은밀한 자취를 모두 알게 되자 다시 원래대로 나를 대하셨다." 구암 어른의 일이 그랬듯이, 이 일도 또 그러하였다.선사께서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미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들처럼 구옹(苟翁)을 사모하였고, 구옹은 (나를) 아들처럼 보셨다."고 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어찌 다만 세속의 스승과 제자의 도의였을 뿐이리오?" 라고 하였다. 구암(苟菴)을 위해 지은 제문에서도 이르기를 "문하를 40년 간 왕래하였는데, 가르치고 아껴줌이 은근하고 정성스러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으셨다."고 하였으니, 정의(情誼)의 친밀함과 도의(道義)로 권면함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사께서 제문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구암은 그것이 망령된 패악인 줄을 알고 마음에 놀랐다면 응당 곧 급한 글을 달려보내 알렸어야 하고, 때가 늦었다면 응당 이후에 만나서 꾸짖으셨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신의 원고에 써서 크게 꾸짖으신 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그 후에 경당 서응순(絅堂徐應淳)의 경우처럼 의혹이 해소되었다면, 마땅히 서로 만나는 날에 어제의 의문과 오늘의 깨달음을 터놓고 다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 글을 전혀 산삭하지 않은 것은 또 어째서인가?선사께서는 "이 글은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에도 싣지 않았고, 재속(再續)․삼속(三續)․사속(四續)․오속(五續)에도 싣지 않았으며 아울러 별집(別集)에도 싣지 않았는데, 습유(拾遺) 원고에서 보였다면 그것은 구암 어른이 일찍이 이미 의심을 거두고서 내버려둔지 오래였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셨다. 이는 틀린 말씀이 아니다. 그렇지만, 구암의 정력이 늙을수록 강하고 총명하여 구십 이후에도 저술을 지속하여 백여 책이나 되고, 몸소 교감(校勘)하고 선사(繕寫)하면서 다수가 손수 서사한 것이어서 그 모두가 교정본(校訂本)에 나타났을 터인데, 어찌 거기에 눈길이 닿지 못해 산삭(刪削)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또 이 당시는 선사 또한 명성과 지위가 이미 현저한 상태여서 제문을 물리치신 것은 평생의 큰 일이었는데 문집 가운데 이것을 수록하셨다. 어쩌면 혹시 이것이 보통의 글 속에 묶여서 그 유무를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얼핏 교감을 빠뜨린 것이 아닐까? 이들 모두가 의문이다.선사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주자(朱子)가 오백풍(吳伯豊)175)이 한탁주(韓侂冑)176)에게 아부한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 황간(黃幹)177)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어찌 일찍이 안자(顔子)가 환사마(桓司馬)178)의 가신(家臣)이 되고자 하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한 것은, 뒤에 오백풍의 입지가 탁월한 것을 알고서, 도리어 탄상(歎賞)한 것이다. 이는 오공(吳公)에게 진실로 손해될 바가 없고, 주자에게서도 그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볼 수 있으니, 황간의 편지를 어째서 굳이 없애려고 하겠는가?"라고 하셨다.이는 선사께 손해될 바가 없고, 구암의 글을 삭제할 필요가 없다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다만 구암에게는 문집 가운데 끝내 도리어 탄상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기에 그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더욱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구암을 의심했다면 사안이 참으로 의아스러웠겠지만, 선사께서 구암에게 가르침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스승처럼 대하였다면, 어찌하여 제문을 물리친 일의 옳고 그름을 한 번 묻지 않은 것일까? 이는 사전에 의심할 바는 못 되었고, 제문을 보고 마음으로 헤아려 그것을 물리침이 당연함을 명확히 알았으니, 사후에 문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암의 말씀이 없어 서로 견해가 같은 것이라 생각하셨으니, 어떻게 문집의 글 속에서 크게 꾸짖고 있는 줄을 알아 질문하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선사께서 구암을 대하심에는 스스로를 믿듯 남을 믿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구암이 선사를 대함에는 스스로 처신하고 상대를 대우하는 모두가 아직 진정[誠]은 아니었다. 대저 의리(義理)의 공정함은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차이가 없고, 반드시 서울이라 밝고 시골이라 어두운 것은 아니다. 굳이 시골 서생이라 이름 붙여 비하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특히 의심스럽다." 라고 하였다.또 어떤 이는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그러면 안 된다. 선사께서 구암을 얼마나 존중하고 신뢰했는가? 또 이 일에 대해 앞서 이미 이와 같이 설명되었는데, 그대는 까마득한 후배로서 어찌 감히 다시 논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구암은 진실로 유림의 존장이다. 선사께서 매번 성리학의 충신으로 허여하셨는데, 그를 존중하고 신뢰함에 작은 틈도 없었던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이 한 가지 일은 본인 스스로에 관계된 일이니 단지 이와 같이 판단해 둘 수 밖에 없다. 가령 구암이 전재(全齋)를 처우함에 이와 같은 바가 있었다면, 그의 소견에도 반드시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릇 선사의 문인된 이들이 구암을 경앙하는 것을 두고는 당연히 그 속 사정에 짐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申苟菴以先師却金監役祭全翁文爲大駭而曰: 胡文定之與秦檜善, 在惡未露之前, 詞掖講筵, 檜之所薦, 而堅不欲就, 則已有見其不可矣。 今有一鄕生, 於其師之沒, 有引康侯大冬語, 以祭其師者。 鄕生大叱喝曰: 詎可以吾師比之於附賊檜之胡安國, 却其祭文? 天下固有如此悖妄者哉! 可駭也已! 先師書其後曰: 苟翁不及聞金某所爲貴恥難洗, 媚竈媚世, 黃花綠竹, 荷衣蕙帶, 和靖緊守伊川之說, 儉德被旌, 坤忽其純, 及始雖與公參差, 終得門徒爛漫, 允紹斯文等種種隱語似贊似譏之實, 而但見斥逐康侯大冬之文, 故以悖妄呵叱之矣。 若其實聞前後曲折, 則苟翁亦應莞爾而笑矣。 此固然矣。 又曰: 却文在丁戊間, 而厥後數十年, 翁無一言見責者。 彼時絅堂徐丈嘗甚愛愚, 及聞却文, 以爲喪心人。 其後悉知金之險詞陰跡, 還復如初。 苟翁之事亦然, 此亦然矣。 但先師此書之首, 旣云子之慕翁, 翁之視子。 世人皆曰: 奚但世俗師生之義已乎? 祭苟菴文亦云: 往來門屛四十年, 敎愛勤惓, 始終無二, 則其情誼之密、道義之勉, 宜其無所不至矣。 苟菴之聞先師却文也, 知其悖妄, 而駭之於心, 則當卽馳書喩之, 旣不及則應有面責於後。 不然而獨自書之己稿, 而大斥之者, 何也? 如其後之祛疑若徐絅堂, 則亦當道破昔疑今悟於相見之日, 不然而幷不刪其文, 又何也? 先師謂此文不載於元集、續集, 不載於再續、三續、四續、五續, 幷不載於別集, 而乃見於拾藁, 則苟翁之早已破疑, 而棄之久矣。 此非不然, 但苟菴精力老愈剛明, 九十以後修正著述爲百餘冊, 親自校勘繕寫多出於手筆者, 俱有見於校本, 豈有照管未到而不刪之理? 且是時先師亦名位已著, 而却文其生平大事, 集中此錄。 豈係尋常文字, 無關有無, 易致失勘者耶? 此皆可疑也。 先師又曰: 朱子誤聞吳伯豊附韓之說, 與勉齋書云: 曷嘗見顔子爲桓司馬家臣? 後知其立卓然, 還復歎賞。 此於吳公固無所損, 而朱子則益見其至公之心。 黃書何苦欲去之? 此爲無損於先師, 苟文不必刪之證則固矣。 但在苟菴, 則終不見還復歎賞語於集中, 益見其至公之心則恐未也。 有疑苟菴事誠可疑, 先師之於苟菴, 亦自認爲受敎, 而視之若師, 則何不以却文事當否一問而質之者? 此不足疑事前, 而見文度心, 明知其爲當却, 則不必問事後。 而苟菴無言, 則意其彼此同見, 何以知集中大斥而質問之? 吾故曰: 先師之於苟菴, 自信信人, 終始無他。 苟菴之於先師, 處己處人, 兩皆未誠也。 且義理之公無地方遠近之殊, 未必京明而鄕闇, 但論是非足矣。 其必目以鄕生而鄙夷之, 何也? 此尤可疑也。 又有謂余者曰: 子無以爲也, 先師之尊信苟菴爲何如? 且於此事已有解說若是, 子以眇然後輩, 何敢復有所論? 余曰: 苟菴固儒林碩匠也。 先師每以朱門忠臣許之。 其所以尊信無間者, 實在於是。 且此一著, 事關自己, 只得如此斷置。 若使苟菴處全翁有如此者, 其所見亦必有異也。 然則凡爲先師門人者之敬仰苟菴, 自當有斟酌於其間者矣。 김감역(金監役)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이다.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임전재(任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말한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성리학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전우(田愚)의 스승이다. 신구암(申苟菴) 신응조(申應朝, 1804~1899)를 말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구암(苟菴)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상현(常顯)의 아들이다. 유학자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호안국(胡安國) 북송 말기의 관료ㆍ학자이다. 1074~1138, 자는 강후(康侯), 호는 청산(靑山), 시호는 문정(文定)이며, 무이선생(武夷先生)ㆍ호문정공(胡文定公)으로 통칭된다. 성리학자 양시(楊時)의 제자이다. 진회(秦檜) 1090~1155, 자는 회지(會之)이다. 남송의 재상으로 여진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매국 간신의 상징인물이 되었으며, 그의 사후에 시호ㆍ작위의 수여와 박탈이 반복되었다. 부귀……어려움[貴恥難洗] "무도(無道)한 나라에서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고 한 《논어》〈태백(泰伯)〉편의 말을 응용하였다. 권력……아첨함[媚竈媚世] "아랫목 귀신[王]에게 애교떨기 보다는, 부엌 귀신[權臣]에게 아양떠는 것이 낫다[與其媚於奧, 寧媚於竈。〕"라는 한 《논어》의 말을 응용하였다. 국화……절기(節氣) 김평묵은 임헌회에게 "녹색의 대나무는 겨울 눈 속에 꼿꼿이 서있고, 노란 국화는 급한 찬바람을 견딘다.[綠竹挺寒雪, 黃花耐急風。]"는 구절을 담은 시를 증정하였었다. 연꽃……허리띠[荷衣蕙帶] 신선의 옷을 형용한 말로, 시끄러운 세속을 떠나온 은자를 가리킨다. 《초사(楚辭)》〈구가(九歌)〉편에 "연잎 옷에 혜초 띠 매고, 문득 왔다가 홀연히 가네.[荷衣兮蕙帶, 儵而來, 忽而逝。]"라는 구절이 있다. 윤화정(尹和靖) 북송 사람으로 이름은 돈(焞), 자는 언명(彦明), 호는 화정처사(和靖處士)이다. 성리학자 정이천(程伊川)의 문인이다. 덕을……사라지고 임헌회가 왕의 부름을 받았고 갑자기 별세한 일을 말한 것이다. 은어(隱語) 이상의 '연꽃 옷'에서부터 '계승하였음'까지의 말들은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任憲晦)를 위해 쓴 제문 〈제임전재헌회문(祭任全齋憲晦文)〉에 사용된 자구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서응순(徐應淳) 1824~1880,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심(汝心), 호는 경당(絅堂)이며,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후손이다. 간성군수 재임기간(1874~1878)에는 성긴 베옷을 입었고, 4월에는 보리밥으로 백성과 생활을 같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오백풍(吳伯豐) 오필대(吳必大, ?~1198)로서, 백풍은 그의 자이며, 남송 시대 주자의 고족(高足) 제자이다. 한탁주(韓侂冑) 1151~1207, 자는 절부(節夫)인 남송 시대의 권신(權臣)으로 국사를 전횡(專橫)하고 성리학을 위학(僞學)이라 공격하며 주자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황간(黃幹) 1152~1221,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斋)인 남송 시대 주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환사마(桓司馬) 사마향퇴(司馬向魋)를 말하는데, 춘추시대 송나라 경공(景公)의 총애를 받은 대부로서, 송나라를 방문한 공자를 죽이려하여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4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陽月念八日 李鐺 李敎燮 甲戌陽月念八日 李鐺 李敎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18_001 1934년 10월 28일에 재종질 이당이 주간하는 일의 자본 문제, 지남철 조각일, 혼처, 종약(腫藥) 등의 내용으로 이교섭에게 보낸 간찰 1934년 10월 28일에 대전역(大田驛) 앞 춘일정(春日町) 2정목(丁目) 이기세(李起世) 방에 사는 재종질 이당(李鐺)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장동리(長洞里)에 사는 이교섭(李敎燮)에게 보낸 간찰이다. 글씨가 탈색되어 매우 흐린 편이다. 두 달 동안 소식이 막혔던 중에 갑자기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삼가 감사하고 위로되는 마음 그지없으며 고요한 중에 체후가 편안함을 알았다는 등의 안부를 전하고, 재종질 자신은 더욱 수고로운 가운데 주간(主幹)하는 일이 자본이 적은 이유로 공비(公費)를 제공하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지남철(指南鐵)을 조각하는 일과 지남철의 품질을 가려 시가(時價)에 따라 2건을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는지 묻고, 혼처는 연산(連山) 김용기(金容基) 집안으로 일가의 반벌(班閥)이고 황강(黃岡) 이하 칠현을 배운 소몽조(所蒙祖)이며 규수는 나이 18세로 매우 아름답고 그 집안은 옛날 풍속을 지키는데 다만 소빈(素貧)하다고 하면서, 만약 300원을 보조하면 혹 잘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종약(腫藥)을 걸러서 보낸다는 내용도 있다. 피봉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5년 나수열(羅壽烈)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五月五日 羅壽烈 李敎成 乙亥五月五日 羅壽烈 李敎成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84_001 1935년 5월 5일에 외종질 나수열이 혼사에 관해 김길중의 서신을 살펴보고 논의할 것이며, 아내의 안질에 복용할 웅담의 동봉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5년 5월 5일에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수각리(水閣里)에 사는 외종질 나수열(羅壽烈)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지난번 보낸 편지는 받아 보았는지 묻고 근래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시는 체후와 집안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외종질 자신은 여전히 잘 지낸다고 하였다. 혼사(婚事)에 관해 김길중의 서신이 도착하여 동봉하니 살펴보고 헤아려주기 바란다고 하고, 8월 그믐초 사이에 김길중과 함께 댁으로 찾아간다고 약속하였으니 7, 8월 사이에 1차로 왕림하여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늙은 아내가 안질(眼疾)로 눈이 흐려지는 지경에 있으니 웅담(熊膽)이 있으면 조금 서찰 중에 동봉하여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며칠 동안 고창(高敞) 순화(順化) 집에 갔다가 얼굴을 보고 토론한 뒤에 다시 서찰을 올릴 것이니 우선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20년 당숙모 한글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경신팔월초삼일 당숙모 종질 경신팔월초삼일 堂叔母 從姪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8월 10일에 당숙모가 이전에 말하던 사람의 망칙한 살림과 곡식 상황, 비석 세우는 일 등의 내용으로 종질에게 보낸 한글간찰 1920년 8월 10일에 당숙모(堂叔母)가 종질에게 보낸 한글간찰이다. 너의 옥필을 받으니 기쁘고 반갑기 그지없다고 하고, 본래 갈 때에 많이 고민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빌었다. 노친은 다 안녕하신지 묻고, 복돌이 종중 서씨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매형은 사는 곳에서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16일에 보내고, 이왕에 말하던 사람이 6월 모이는 사이에 다시 내려왔으나 사람이 힘이 없고 속일 수 없다. 생각할수록 망칙한 살림이다. 아직 추수 전인데 곡식이 상할 모양이나 아직은 허다한 쭉정이라고 하였다. 7월 초에 개성에서 종댁네에 갔다가 며칠 전에 왔으며, 아무쪼록 비석을 세우더라도 영남놈들이 설치하는지 네가 다 주장하여 다시 와서 숙모의 생전에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