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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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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0년 이교성(李敎成) 수신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庚申五月十八日 父 家兒 庚申五月十八日 李冕容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5월 18일에 부친이 비석의 설치와 종수의 상 등의 일로 아들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20년 5월 18일에 부친이 아들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두 차례 부친 편지는 오는 16일에 받아 보고서 무사히 입성(入城)하였음을 알았고 다만 구병(口病)으로 괴로움을 당했다니 답답한데 좋은 화제(和劑)를 보내니 복용해 보라고 하였다. 비석(碑石)은 작은 것이 제조에 알맞다고 하였는데 두께와 높이가 몇 치[寸] 몇 푼[分]인지를 묻고, 영남 종중에서 몇 글자가 작고 깊게 마모되었다고 한 말은 이치에 가깝지 않다고 하였다. 만약 석품(石品)이 조금 두꺼우면 이미 새긴 글자가 얕다고 하더라도 앞면은 마모되지 않았을 것이며, 뒷면 및 좌우가 다 마모되었으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선택하고 조각하는 사람을 불러 깊이 새겨서 세우면 도리에 해가 없을 듯하나 석품이 매우 얇으면 견디지 못하고 곧 마모될 것이니 일을 파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번 곡성(谷城) 종중에 의논해 보니 혹 다시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거나 가을을 기다려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신전소(薪田所) 또한 올려 보내어 수합하지 못하여 너에게 보낸다고 하니 모두 삼가고 미덥게 하여 실행하여 나가라고 하고, 돌이 두꺼우나 매우 얇지 않으면 마모되더라도 다시 새기고 전면의 글자 모양이 비록 좋지 않아도 우선 그대로 보존하며, 다만 마모된 뒷면 및 좌우 글자만 세밀하게 써서 세우고 후일을 기다려 의논하여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계획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금월 5일에 갑자기 종수(從嫂)의 상을 만나 슬프다는 내용도 있다. 추신이 있는데 서산(西山) 송추(松楸)를 방매하는 일은 가을을 기다려 거행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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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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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문경공(文景公) 위토 관련 별지(別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문경공(文景公) 위토를 환퇴(還退)한 토지의 소재지에 대한 별지목록과 별지 2통 문경공(文景公) 위토를 환퇴(還退)한 토지의 소재지에 대한 별지목록과 별지 2통이다. 별지목록은 토지소재지와 지번, 지목, 면적, 지가, 적요로 구성되어 있다.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이며, 모두 9곳이다. 끝에는 면적과 지계의 합계가 있다. 별지 2통은 간찰의 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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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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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용락 군에게 주다 贈金君庸洛 추억하노니 옛날 시냇가의 학297) 憶昔川上鶴탁연히 군계 사이에 서있었지 卓卓立鷄羣그 전형이 손자에게 남아 있어 典型在賢抱두각이 이미 우뚝 드러났도다 頭角已嶄然나를 따른 날이 얼마이던가 從余幾何日남산과 덕천298)에서 함께 했지 南山又德川덕기는 추위 뒤의 해와 같고299) 德氣寒後日문리는 바람 앞의 물결 같네300) 文理風前瀾명성있는 집안 요결을 실추하지 말고 不墜家聲訣그대는 그것을 큰 띠에 써야하리라301) 君應書諸紳집안에서 청년을 걱정하는데 人家靑年憂내가 어찌 의탁한 손자 저버리랴 我豈負託孫한 마디 말로 천년의 맹세하노니 一言千載誓두산은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았네 斗山矗靑天 憶昔川上鶴, 卓卓立鷄羣.典型在賢抱, 頭角己嶄然.從余幾何日, 南山又德川.德氣寒後日, 文理風前瀾.不墜家聲訣, 君應書諸紳.人家靑年憂, 我豈負託孫.一言千載誓, 斗山矗靑天. 학(鶴) '학(鶴)'은 《후창집》 권25 〈학천김공행장(鶴川金公行狀)〉을 보건대, 김용락의 조부인 학천(鶴川) 김형재(金衡載)를 가리킨다. 남산과 덕천 '남산(南山)'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산으로 고부면소재지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남산으로 불린다. '덕천(德川)'은 현 전라북도 정읍시 중서부에 있는 면이다. 덕기는 …… 같고 따듯한 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문리는 …… 같네 문장이 밋밋하지 않고 기복이 있어 다종다양하다는 뜻이다. 큰 띠에 써야하리라 집안의 요결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자장(子張)이 공자의 가르침을 듣고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큰 띠에 써서 기록하였다.[書諸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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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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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망제봉을 읊다 咏望帝峯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울창한 망제봉 우뚝 솟고 君不見望帝之峯鬱矗矗하늘에 꽂힌 부용봉 얼마나 푸른지를 揷天芙蓉何蒼蒼때때로 보니 상서로운 안개가 진면목279)을 가리고 時見瑞靄掩眞面어렴풋이 신선이 이곳에서 노니누나 隱約仙靈此徜徉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상쾌하여 좋고 絶頂眺望快一好정북쪽 삼천리가 평평한 당과 같네 直北三千平如堂그해에 좋은 이름을 누가 처음 내렸나 當年嘉號誰肇錫원인을 찾아보고자 많은 생각해보았네 欲究原因費商量추억하니 옛적 남한280)에 비바람 친 뒤 憶昔南漢風雨後동녘땅에 피 뿌린 충신들 얼마였던가 血灑東土幾忠良응당 고사들이 있어 이 산을 올랐고 應有高人躡此山아득한 신주281)는 하늘 한 쪽에 있네 渺渺神州天一方지척의 거리로 같은 마을에서 사십년 咫尺同鄕四十秋삼봉에서 내 죽장과 짚신 얼마나 닳았나 三峯幾弊我竹芒맑은 밤 장난삼아 북두성 그림자 붙잡고 淸宵戱攀星斗影가을 새벽 웃으며 달빛이슬 향기 마시네 秋晨笑吸月露香유유해라 슬픈 감흥도 원래 무상하나니 悠悠悲興元無常지금은 만사가 모두 상전벽해 되었도다 如今萬事都滄桑날 저문데 금릉 -금곡의 홍릉282)- 은 어디멘가 日暮金陵【金谷洪陵】何處是하늘은 텅비고 먼데 구름만 아득하구나 九天寥廓雲蒼茫 君不見望帝之峯鬱矗矗, 揷天芙蓉何蒼蒼.時見瑞靄掩眞面, 隱約仙靈此徜徉.絶頂眺望快一好, 直北三千平如堂.當年嘉號誰肇錫, 欲究原因費商量.憶昔南漢風雨後, 血灑東土幾忠良.應有高人躡此山, 渺渺神州天一方.咫尺同鄕四十秋, 三峯幾弊我竹芒.淸宵戱攀星斗影, 秋晨笑吸月露香.悠悠悲興元無常, 如今萬事都滄桑.日暮金陵【金谷洪陵】何處是, 九天寥廓雲蒼茫. 진면목 망제봉의 전체 모습을 말한다. 북송(北宋)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에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속에 있어라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는 시구가 있다. 남한(南漢)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항전하다 항복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신주(神州) 중국의 미칭(美稱)으로 '적현신주(赤縣神州)'의 줄임말이다. 《사기》 권74 〈맹자 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에 "중국 이름을 적현신주라 한다.[中國名曰赤縣神州.]"라고 하였다. 금곡(金谷)의 홍릉(洪陵)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능호이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다가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金谷)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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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원운 以承齋原韻 잔약한 가문이 여러 해 힘써서 건축을 하였는데 孱門營築費多年지금처럼 잘 갖추어진319) 건 하늘의 도움이네 苟完如今祐自天띠풀로 지붕 덮어서 청결과 검소함에 잘 어울리고 屋覆茅茨宜潔儉고향 땅에 세웠으니 공건한 마음 기탁할 수 있겠네 地占梓里寓恭虔봄이 오니 천태산 기슭에는 꽃이 장차 피려하고 春回台麓花將發밤이 되니 창강에는 달이 점차 둥그러지구나 夜入滄江月漸圓백세토록 정결히 함이 편액한 이름의 뜻이니320) 百世齊明扁號意더욱 성인을 지키고 추현을 배워야 하리라321) 更推閑聖學鄒賢 孱門營築費多年, 苟完如今祐自天.屋覆茅茨宜潔儉, 地占梓里寓恭虔.春回台麓花將發, 夜入滄江月漸圓.百世齊明扁號意, 更推閑聖學鄒賢. 잘 갖추어진 원문의 '구완(苟完)'은 이승재 건물이 그런대로 잘 지어졌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위(衛)나라 공자 형(公子荊)을 두고 이르기를 "그는 가정생활을 잘하는도다. 살림살이를 처음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모여졌다.' 하였고, 조금 더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갖추었다.' 하였고, 많이 가졌을 때는 '그런대로 아름답다.'고 하였다.[善居室, 始有曰苟合矣, 小有曰苟完矣, 富有曰苟美矣.]"라고 하였다. 《論語 子路》 정결히……뜻이니 '재명(齊明)'은 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이다. 《중용장구》 제16장에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정결히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는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이승재'의 뜻을 여기에서 취했다는 뜻이다. 성인을……하리 공자와 맹자의 학문에 힘쓰라는 뜻이다. '성인'은 공자를, '추현'은 맹자(孟子)를 가리킨다. 그의 출생지가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이기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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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이 변산에서 노닌 일을 생각하며 憶希淑遊邊山 작년 이맘 때 내가 동쪽으로 여행 갈 때304) 去年此時我東征어찌 금강의 약속 저버렸나 그대에게 물었지 問君何負金剛約이제는 그대가 표연히 변산으로 들어갔는데 君今飄然入邊山아 나는 세사에 골몰해 함께 즐기지 못하네 嗟余滾汨未同樂하늘의 절서는 해마다 도로 다시 같아지는데 天序年年還復同사람의 일은 총총하여 이미 어제가 아니로다 人事悤悤已非昨명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도 운수가 있는데 名山一遊亦有數부귀에 애면글면하는 건 진정 망녕된 거네 營營富貴眞妄錯쌍선봉305) 꼭대기에 달이 정말 밝을 때 雙仙峯頭月正明머리 들어 동쪽306) 보며 몇 번 탄식했나 矯首東望歎幾作내가 정양사307)에 있던 날에 應如我在正陽日그리운 그대 못 봐서 서운했던 내 마음과 같으리 思君不見懷緖惡사람들은 변산을 소금강이라 말하니 人言邊山小金剛기이한 절승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네 奇絶相比庶無怍내소사는 유점사308)와 유사하고 來蘇依俙楡岾寺월암각은 헐성각309)과 비슷하다네 月菴彷彿歇惺閣삼일포와 채석강310)은 난형난제요 三日采石誰伯仲구룡연과 직소폭포311)는 강약의 차이네 九淵直沼差强弱인물을 가지고서 고하를 품평한다면 如將人物品高下한 성인과 한 현인으로 비유해야 하리312) 一聖一賢宜假託내가 성인의 문313) 노닐었다 말하지 말게 莫說我遊聖人門단지 그 얼굴만 보고 두 다리 병들었네 只見其面病雙脚부럽다 그대 지척에 현사314)를 얻었으니 羡君咫尺得賢師배움에 근거가 있어 자세히 다보겠구나 學之有據盡詳略귀는 높이고 눈은 천시하는315) 게 결국 시속이고 貴耳賤目終是俗가까운 건 소홀하고 먼 데 힘쓰는 것도 병통이네 忽近騖遠亦云瘼남쪽 지방에는 원래 명승지가 많은지라 南服自多名勝地분분히 동쪽으로 나선 것도316) 한 번 웃음거리지 東出紛紛堪一噱산 구경과 학문을 함도 이치는 하나이니 看山爲學還一理사람은 말 밖에서 마땅히 헤아려야 하네 人於意表當忖度식견이 이런 이치에 이르러 견해가 같아지면 識到斯理同一見굳이 산 정상에 나란히 오를 필요는 없겠지 不須絶頂聯筇屩 去年此時我東征, 問君何負金剛約.君今飄然入邊山, 嗟余滾汨未同樂.天序年年還復同, 人事悤悤已非昨.名山一遊亦有數, 營營富貴眞妄錯.雙仙峯頭月正明, 矯首東望歎幾作.應如我在正陽日, 思君不見懷緖惡.人言邊山小金剛, 奇絶相比庶無怍.來蘇依俙楡岾寺, 月菴彷彿歇惺閣.三日采石誰伯仲, 九淵直沼嗟强弱.如將人物品高下, 一聖一賢宜假託.莫說我遊聖人門, 只見其面病雙脚.羡君咫尺得賢師, 學之有據盡詳略.貴耳賤目終是俗, 忽近鶩遠亦云瘼.南服自多名勝地, 東出紛紛堪一噱.看山爲學還一理, 人於意表當忖度.識到斯理同一見, 不須絶頂聯筇屩. 동쪽으로……때 후창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갈 때를 말한다. 쌍선봉(雙仙峰)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변산반도에 있다. 희숙이 유람을 간 곳을 가리킨다. 동쪽 후창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정양사 김택술이 유람했던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를 가리킨다. 내소사와 유점사 내소사(來蘇寺)는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이고, 유점사(楡岾寺)는 금강산에 있는 절이다. 월암각은 헐성각 월암각(月菴閣)은 변산에 있는 암자인 듯하나 미상이고, 헐성각은 금강산 정양사에 있는 헐성루(歇惺樓)를 가리킨다. 삼일포와 채석강 삼일포(三日浦)는 외금강에 있고, '채석(采石)'은 채석강(彩石江)으로, 변산반도에 있다. 구룡연과 직소폭포 원문의 '구연(九龍)'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인 듯하다. 직소폭포(直沼瀑布)는 변산반도에 있다. 한……하리 사람에 비하자면 금강산은 성인, 변산은 현인이라는 뜻이다. 성인의 문 금강산을 비유한 것이다. 현사 변산을 비유한 것이다. 귀는……천시하는 소문으로 들은 금강산만 높이고 눈으로 본 변산을 천시하지 말라는 비유이다. 원문의 '귀이천목(貴耳賤目)'은, 풍문으로 멀리 들은 것은 높이 치고, 자신이 가까이서 본 것은 천시하는 풍조를 말한 것이다. 동쪽으로 나선 것도 후창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갔던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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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운을 거듭 쓰다 疊前韻 공자께서 동산에 오른290) 날 언제였나 何日孔登東까마득하여 함께 하지 못해 한스럽네 遙遙恨未同마음은 삼고291)의 풍속에 노닐어 心遊三古俗꿈에도 이양292)의 풍조에 놀라네 夢愕二洋風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감이 참 사업이니 克復爲眞業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함이 어찌 큰 공인가 治安豈大功이 몸이 작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莫云此身小양간 가운데 참여하고 있다네293) 參在兩間中 何日孔登東, 遙遙恨未同.心遊三古俗, 夢愕二洋風.克復爲眞業, 治安豈大功.莫云此身小, 參在兩間中. 공자가 동산에 오른 천하를 굽어보는 큰 뜻을 비유하는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공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하였다. 삼고(三古)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합칭인데, 여기서는 고대의 이상적인 시대를 가리킨다. 이양(二洋) 동양의 오랑캐인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지칭한다. 양간……있다네 원문의 '양간(兩間)'은 하늘과 땅 사이로, 사람이 하늘과 땅과 나란히 서서 같은 지위를 이루어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용장구》 제22장에 "오직 천하에서 지극히 진실한 사람이라야 자신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 자신의 성을 다하면 다른 사람의 성도 극진히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을 극진히 하면 물의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며, 물의 성을 극진히 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나란히 삼재(三才)에 참여할 수 있다.[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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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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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87년 유인 윤씨(孺人尹氏) 숙인(淑人)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三年 四月 日 孺人 尹氏 光緖十三年 四月 日 高宗 孺人 尹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7년 4월에 유인 윤씨를 숙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7년 4월에 유인 윤씨를 숙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윤씨는 이기두의 증조비(曾祖妣)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증손자가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증조부모는 추증의 대상이 된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 추봉된 작위가 숙인이다. 숙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3품 당하의 위호이다. 숙인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추봉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증손자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증조비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의 세주에서 '부모는 자기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기 1등씩 낮추어서 준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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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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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5년 문철행(文哲行)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巳至月壹日 文哲行 乙巳至月壹日 文哲行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5년 11월 1일 문철행이 병으로 약물 치료를 하는 일과 부탁한 담배를 잊지 않고 신경 써 주어 감사하다는 간찰 1905년 11월 1일 문철행(文哲行)이 병으로 약물 치료를 하는 일과 부탁한 담배를 잊지 않고 신경 써 주어 감사하다는 편지이다. 간찰의 오른쪽 일부가 잘려져 나가 관련 내용이 미상이다. 장시간 약물 치료를 하면서 스스고 돌아보며 슬프지만 오직 다행인 것은 맥박이 제비가 노래하고 참새가 폴짝거리듯 맥박이 빨라졌다. 부탁한 담배[南靈]를 잊지 않고 마음을 써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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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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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1년 하윤옥(河潤玉)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咸豐元年己未 正月 二十三日 河潤玉 李生員 咸豐元年己未 正月 二十三日 河潤玉 李生員 전라남도 보성군 河潤玉 외 1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51년(철종 2) 정월 23일에 하윤옥이 이생원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51년(철종 2) 정월 23일에 하윤옥이 이생원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답주 하윤옥은 이 땅을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갈아먹어왔는데, 이를 팔게 된 것은 다른 땅을 사기 위해서이다. 매수자는 이생원이며, 이름은 미상이다. 토지 소재지는 문전면 용복평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해 있는 면명이다. 토지 크기는 3두락지이며, 부수로는 15복6속이다. 매매가격은 전문 110냥이다. 증인은 유학 공유복이다. 답주와 증인의 이름 아래에는 수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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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86년 유인 윤씨(孺人尹氏) 숙인(淑人)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孺人 尹氏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孺人 尹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유인 윤씨를 숙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유인 윤씨를 숙인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윤씨는 이기두의 증조비(曾祖妣)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증손자가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증조부모는 추증의 대상이 된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 추봉된 작위가 숙인이다. 숙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3품 당하의 위호이다. 숙인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추봉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증손자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증조비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의 세주에서 '부모는 자기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기 1등씩 낮추어서 준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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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926년 고소인 이종채(李鍾采) 등 고소장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大正十五年 八月 十五日 李鍾采 寶城警察署長 大正十五年 八月 十五日 李鍾采 寶城警察署長 전라남도 보성군 李鍾采, 李洪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98_001 1926년 8월 대리인 겸 고소인 이종채(李鍾采) 등이 피고소인 이형순(李亨淳) 등은 형법을 범한 자로서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성경찰서장에게 제출한다는 고소장 1926년 8월 대리인 겸 고소인 이종채(李鍾采) 등이 피고소인 이형순(李亨淳) 등은 형법을 범한 자로서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성경찰서장에게 제출한다는 고소장이다. 내용은 고소인 명단과 고소사실, 부속서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04번의 문서와 동일하다. 고소인은 이교숙(李敎琡) 등 31명이며, 피고소인은 이형순 등 2명이다. 고소인은 모두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와 운곡리, 복내면 시천리 등에 거주하는 5대 조손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며, 연령을 아울러 기재하였다. 고소인은 고소사실을 9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1926년 고소인 이종채(李鍾采) 등 고소장 2와 글씨체는 다르나 동일한 내용의 문서이며 수정한 흔적이 있어 제출 원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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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상중인 아우가 수신자의 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말을 타게 하라고 권유하는 간찰 모년 상중인 아우가 수신자 아무개에게 수신자의 아들에 대해 말한 편지이다.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뒤에 상중인 자신은 질긴 목숨을 구차히 늘이고 있다고 하고, 수신자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드님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장차 맹렬히 공부하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잘할 것이다. 커가는 아이는 옥보다 귀하니 부득이 가마를 버리고 말을 대신 타게 하는 것도 상관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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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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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최금재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崔欽齋 丙辰 지난번 조문을 오셔서 제가 거듭 재앙을 만나 정신과 혼백이 나가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때문에 학업을 느슨히 할 것을 염려하여 임창계(林滄溪 임영)가 김농암(金農巖 김창협)을 면려한 고사를 인용하여 위로하고 풀어주셨는데, 계속하여 두 통의 편지를 보내주어 지나치게 몸을 훼손하지 말라는 말과 능하지 못한 것을 더 노력하여 옥과 같은 훌륭함을 이루라는 말로 가르침을 주시니 제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어찌 감격하여 울면서 저를 사랑하는 은혜에 보답하려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하니, 저는 어렸을 때 《효경》의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한다"44)는 말을 읽고 문득 기뻐하여 펄쩍 뛰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식의 일이니 힘쓸만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본 것은 단지 이른바 입신양명이라는 것이 학문이 넉넉하여 조정에 올라가 뜻이 군주와 부합하고 은택이 천하에 미쳐서 좋은 음식과 넉넉한 생활을 누리고 높은 벼슬자리를 갖는 영광이 부모에게 미치면 충분하다는 것만 알았으니, 바라며 힘쓴 것이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나이가 17살이 되었을 때 선친이 저를 가르쳐 말하기를, "학문에는 도학과 문학의 다름이 있으니 도학의 학문은 근본이고 문학의 학문은 말단이다. 선비가 학문을 할 때에는 마땅히 근본을 먼저 하고 말단을 뒤로 해야 한다. 내가 간재 전우 선생이 당대의 도학의 스승이라는 것을 들었으니 너는 가서 인사를 드려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가 선친의 명을 받들어 명함을 들고 봉래산의 월명암에서 간옹을 뵈었는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선생이 가르칠만하다 하시고,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45)를 인용하시고 외람되게도 저의 집을 방문하여 입도의 방법을 알려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선친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간옹이 태산북두와 같은 명망과 상서로운 봉황과 같은 의용으로 네가 조금 문자를 안다 해서 누추한 곳을 왕림해주셨으니 그 영광됨은 네가 과거에 급제한 것보다 낫다. 이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니, 네가 만약 몸을 깨끗이 하여 덕을 이루고 후세에 이름을 세워서 아름다운 호칭이 너를 낳아준 나에게 미친다면 다시 어떠하겠는가?" 하시고 마침내 폐백을 갖추어 영산으로 보내셨습니다. 제가 비로소 부귀영달 외에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내는 진체(眞諦)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선친을 섬기고 선친은 이것으로 저를 격려하여 거의 하늘이 돌봐 주고 보호해 주어 우리의 바람을 이룰 것 같았습니다. 집안의 운수가 쇠락하고 박하여 26세에 갑자기 부친을 잃으니 재앙은 뜻밖이어서 억장이 무너지고 원망스러움과 슬픔 속에서 홀연히 삼년이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날렵하게 전진하려 한 기개는 일시에 사라지고 눈앞에 빚 문서는 벗어날 길이 없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선친이 평소에 불초에게 바란 것은 몸을 이루는 한 가지인데 불초의 학업은 진전이 없고 선인의 타고난 수명은 기다려 주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하루에 백번 천번 사력을 다하여 이룬들 어찌 구천에 계신 선친을 일어나게 하여 친히 보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일은 한때 억지로 힘쓴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랴! 오직 제사를 받듦과 후손을 부탁한 것은 참으로 조종이 서로 전한 큰 계획이니 마땅히 보수하고 유지할 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또한 노인 봉양을 잘 마치지 못한 한스러움은 선친이 지하에서도 잊지 못해 걱정하시는 일로 불초에게 맡기셨으나 맛있는 음식은 떨어지고 가볍고 따뜻한 옷은 항상 부족하니, 이것은 선친의 뜻을 잘 잇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는, 이에 책 읽는 공부를 줄여 농사에 힘을 써서 노심초사하여 손과 발이 부르텄으니, 제 생각에, 이것은 노인을 봉양하고 집안을 보전하는 도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했지만 수십 년 동안 기근의 재앙이 거듭 이르고 질병의 재앙도 끊이지 않아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쓰러지고 망가져서 물이 더욱 깊어져 구할 수 없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으니, 이것을 구하는 것은 얻는 데에 유익함이 있으니, 내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에 도가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으니, 이것을 구하는 것은 얻는 데에 무익하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마침내 빈부는 하늘에 정해져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도의는 내 몸에서 구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하늘에 달려있는 것을 구하는 데에 급히 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는 데에 천천히 하였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젊은 시절의 실수를 후회하고 늙어서나마 공효를 거둘 것을 맹세하여 마음에 새기고 뜻을 떨쳐 공부를 통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정력이 다시 옛날만 못함을 느꼈고 명리(名理)를 파고들어 연구할 때는 암흑처럼 깜깜하여 통달하기 어려웠으니, 이것이 진실로 가련한 일입니다. 일에 임하여 의리의 득실이 있는 데에 이르면 이미 실수하여 고통 받는 것46)에 깊이 징계가 되고 나서야 조금은 취사하는데 힘이 덜 들었습니다. 십 수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아무 일 없이 이 일에 전심하도록 해준다면 거의 사도(斯道)에 거칠게나마 터득함이 있을지 알 수는 없습니다. 죄악이 쌓여서 하늘이 용서하지 않아 거듭 큰 재앙을 내리니 오관은 그 기능을 못하고 온몸은 일을 할 수 없어서 고통과 독함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게다가 안으로 가난하고 밖으로 금지 당함이 일시에 몰려들어 장황스럽고 구차스러워서 예모를 갖추지 못하니 거듭 끝없이 한스럽습니다. 살아계실 때 섬기는 일이 막막하고 것은 산 사람의 근심이고 배고픔과 추위로 나뒹구는 것은 진실로 존자께서 염려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죽어서 시신이 구학에 나뒹굴게 될 것을 잊지 말라'는 교훈47)에 뜻을 두어 백 번 꺾여도 뜻을 바꾸지 않기를 맹세하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자 하니, 이런 것들이 흉중을 어지럽히는 것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슬픈 것은 상위(喪威)를 겪은 이래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근골이 마비되어 사색의 구멍이 전부 닫히고 떨쳐 일어날 힘이 완전히 끊어졌으니, 비유하자면 서리를 맞은 약한 풀이 쓸쓸히 생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이 몸은 젊었을 때는 노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중년에는 세상사에 뜻을 빼앗겨 허다한 세월을 먹어버렸습니다. 5, 6년만 지날 것 같으면 옛사람이 덕을 이룬 나이에 꽉 차게 되건만 돌이켜보면 흉중이 텅텅 비어 하나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쓰러지고 무너지게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절대 스스로를 강하게 하여 끝을 잘 마칠 희망은 없습니다. 줄곧 휩쓸려 가는 세속 속에서 보잘 것 없이 지내다가 아무 이름도 없이 죽어 부친과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고 천고의 죄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昔蒙枉吊, 見澤述之荐罹喪禍隕神遞魄, 慮因此而廢弛學業, 引林滄溪勉金農巖故事, 慰釋之.繼投兩函, 以勿過毀損, 增益玉成見敎, 鄙雖無似, 豈不感泣圖副愛我之恩乎? 仍念澤述幼時, 讀《孝經》"立身揚名以顯父母"之語, 輒欣躍曰: "此眞人子事, 可勉之矣." 然當日所見, 但知所謂立揚者, 學優而登于王庭, 志孚君上, 澤被天下, 鼎茵之享, 爵秩之榮, 及於親則足矣.希慕勉力者, 惟此而已.年十七, 先人訓不肖曰: "夫學有道學文學之異, 道學之學本也, 文學之學末也.士之於學, 宜先本而後末.吾聞艮齋田先生, 當今道學之師也, 汝往拜之." 不肖銜先人之命納刺, 謁艮翁於蓬山僧寺, 何幸先生以爲可敎.至引郭林宗訪茅容故事, 枉屈獘廬, 告以入道之方, 先人喜甚曰: "艮翁山斗之望, 瑞鳳之儀, 因汝稍觧文字, 光臨陋地, 其爲榮耀, 勝汝捷得巍科比, 猶可喜.汝若淑身成德, 名立後世, 稱美及於所生, 倘復如何哉?" 遂具贄送于寧山.不肖始知榮貴外, 自有立揚顯親之眞諦也.不肖以是事先人, 先人以是勖不肖, 庶冀天眷, 獲遂吾願矣.門祚衰薄, 弱冠有六, 奄棄先人, 禍出不意, 崩心塞臆, 寃酷痛悼, 倏經三霜.前日銳進之氣, 一時銷鑠, 目下之債帳, 無計可脫, 乃自語於心曰: "先人平日, 所望於不肖者, 成身一事是也, 而不肖之學業未進, 先人之天年不待, 今雖一日百千盡死力而成之, 安得起先人於九原而親見之? 況此事固非一時強力之所至者乎? 惟是祭祀之奉, 後昆之託, 實祖宗來相傳大計, 宜思所以保守維持之道, 且養老未終之恨, 是先人之耿結泉下, 而委諸不肖者, 而甘旨告罄, 輕煖恒闕, 此非所以善繼志也." 於是分功於簡冊, 用力於稼穡, 焦思勞心, 胼手胝足, 意謂"此在奉老保家之道, 不獲已也." 如是者數年, 饑饉之災荐至, 疢疾之厄不絶, 世顚之顛頓, 如水益深而不可拯也.因憬然大悟曰: " 《孟子》有云: '求則得之, 舍則失之.是求, 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 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 乃知貧富一定於天而不易者, 道義求之於身而可得者, 急於求其在天者, 緩於求其在已者也, 豈不誤哉?" 乃悔東隅之失, 誓桑榆之收, 欲刻意奮志, 痛加工夫, 則已覺精力非復舊日, 鑽研名理之際, 窣窣乎其難通, 時固可憫.至於臨事而有義理之得失, 則深懲旣折之肱, 而稍易力於取舍之間也.假之以十數年, 無事得以專心此事, 則庶有粗聞於斯道, 未可知也.罪惡攸積, 天不見容, 荐降大禍, 五官離其職, 百軆無所措, 痛苦荼毒, 已不忍言, 加以內窶外禁, 一時湊洽, 蒼黃苟簡, 不成禮貌, 重爲罔涯之恨也.若乃生事之廓落, 是生者之憂, 飢寒顚連, 誠有如尊慮者.然竊有志於不忘溝壑之訓, 誓百折而不回, 欲九死而靡悔, 此不足爲胸中氷炭.但所可悲者, 自經喪威以來, 精魄迷奪, 筋骨痿薾, 思索之實全閉, 振發之力頓絶, 譬如受霜之弱草, 索然無生意.自念此身少而嬉戯浪度, 中爲世故所奪, 喫得許多歲月.若過五六年, 恰滿古人成德之期, 反顧胸中空空無一得.今被靡頹墮, 又如此, 絶無自強克終之望, 深恐一向碌碌于流俗中, 而沒身無名, 辜負父師之望, 而成千古之罪也.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한다 《효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나오는 말로, 효의 완성을 말한다. 곽림종(郭林宗)이……고사 임종은 곽태(郭泰)의 자이다.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실수하여 고통 받는 것 원문의 '절지굉(折之肱)'은 팔이 부러진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13년에 "팔뚝을 세 차례쯤 부러뜨린 다음에야 그 방면의 명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극복하는 힘이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죽어서……교훈 뜻을 세운 선비가 가난 때문에 지조를 굽히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있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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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재병심에게 답함 을묘년(1915) 答崔欽齋秉心 ○乙卯 《논어》와 《역경》에서 인(仁)과 지(知)의 뜻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이렇게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셨으니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어찌 그치겠습니까? 《논어》에서 "지는 움직이고 인은 고요하다.[知動仁靜]"41) 한 것은 참으로 마땅히 체단(體段)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주에 지자(知者)에 대해서 "사리를 통달하여 두루 흘러 막힘이 없다." 하고, 인자(仁者)에 대해서 "의리에 편안하여 후중해서 옮기지 않는다." 한 것은 그 모범과 의사를 형용한 것에 불과하고 본체가 아니니, 이것은 마땅히 인과 지가 발현되어 작용한 것으로 봐야만 《역경》의 "인은 양이고 지는 음이다.[仁陽知陰]" 한 것이 참으로 마땅히 발현되어 작용한 것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 지에 대한 이견은 기품이 편중됨으로 인하여 단지 한쪽만 본 것에 불과하니, 그 본 것이 어찌 도의 전체 중의 한 귀퉁이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본다면 피차 막힘이 없어서 완비될듯합니다.주자가 "적연부동은 뭇사람이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되 감이수통에 이르러선 오직 성인이 능히 하고 뭇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한다."42)라고 말했으니 이천(정이)의 이른바 '적연부동(寂然不動), 감이수통(感而遂通)'은 마음의 체용을 범론한 것으로 성인과 범인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오직 성인이 그렇게 할 수 있고 중인은 아마도 참여할 수 없는데 주자가 이르기를 "적연부동은 보통사람이 모두 이 마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의심스럽습니다. 이 말이 만약 보통사람이 잠시 미발한 상태를 가지고 말했다면 보통사람의 한 가지 일이 중절(中節) 〈절도에 맞는〉한 것을 어찌 감이수통이라 말할 수 없겠습니까?천(天)의 성정은 굳셈[乾]이고 화(火)의 성정은 뜨거움[熱]이고 수(水)의 성정은 차가움[寒]입니다. 그렇다면 인(人)의 성정은 무슨 글자를 놓고, 물(物)의 성정은 무슨 글자를 놓아야 딱 맞겠습니까? 아니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물(人物)의 성정은 반드시 한 글자로 개괄할 필요 없이 다만 마땅히 나누어서 남자의 성정은 강(剛)하고 여자의 성정은 부드럽고[柔] 말의 성정은 달리고[走] 소의 성정은 밭가는[耕] 것이고 말하면 맞겠습니까? 주자가 "건(健)의 본체는 천의 성(性)이고 건(健)의 작용은 천의 정(情)이다."43)라고 말했습니다. 의심해보건대 정자의 "굳세어 쉼이 없는 것은 작용이고 정이며, 굳세어 쉼이 없게 하는 이치는 본체이고 성이다."라는 말입니까? 또한 차가움, 뜨거움, 강함, 부드러움의 발현되어 작용하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작용이고 정이며, 차가움, 뜨거움, 강함, 부드러움의 이치는 본체이고 성인 것과 같습니까? 이와 같이 보면 어떠하겠습니까? 《論語》·《易經》, 仁知之異, 荷此發蒙, 感幸何已? 蓋《論語》之知動仁靜, 固當以體段言.然其曰: "達於事理, 周流無滯, 安於義理, 厚重不遷", 不過形容其模範意思, 非本體, 則此當於仁知者之發用處看取, 乃可見《易經》之仁陽知陰, 固當以發用言.然其仁知之異見, 不過因氣稟偏重而只見一隅, 則其所見者, 豈非道之全體中一隅乎? 如此看, 則彼此無礙, 恐爲完備.朱子曰: "寂然不動, 衆人皆有是心, 而至感而遂通, 惟聖人能之, 衆人却不然." 蓋伊川所謂"寂然不動, 感而遂通", 是泛論心之體用, 不及聖凡也.然能致寂然感通者, 惟聖人爲然, 衆人恐不能與也, 而朱子乃謂 "寂然不動, 衆人皆有是心, 可疑", 此若以衆人雯時未發言之, 則衆人一事中節, 獨不可言感通耶?天之性情是乾, 火之性情是熱, 水之性情是寒, 人之性情下得何字, 物之性情下得何字, 乃爲襯貼乎? 抑未知人物之性情, 不必一槩說, 只當分說.男之性情剛, 女之性情柔, 馬之性情走, 牛之性情耕, 亦得耶? 朱子曰: "健之體, 天之性, 健之用, 天之情." 竊疑, 程子以健而無息者, 是用也情也, 健而無息之理, 是體也性也耶? 且如寒熱剛柔之就發用上可見者, 是用也情也, 寒熱剛柔之理, 是體也性也.如此看如何? 지는……고요하다 원문의 '지동인정(知動仁靜)'은《논어(論語)》〈옹야(雍也)〉의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니,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고요하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연부동은……못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은 생각도 없고 하는 것도 없어서,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느끼게 되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하나니, 천하의 지극한 신령스러움이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라는 말이 나온다. 건(健)의……정(情)이다 《근사록(近思錄)》 제1권 〈도체(道體)〉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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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보냄 병자년(1936) 與李愼軒 丙子 제가 백면서생으로 어른과 동문으로 사십년 동안 오래 했고 게다가 오진영의 속임수를 함께 성토하며 대의를 지킨 것이 또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토의 의론을 먼저 말함에 변론의 문장이 많고 엄함은 어른이 실로 다 써서 저는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스스로 오늘 세상에서 아는 사람으로 친히 하여 믿으며 경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은 근래에 점점 옛 덕을 바꾸어 마침내 전철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오진영당을 방문하여 오진영당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오진영당을 다스린 이전의 의리는 버리고 조금 지나서는 '한 사람만 제거하면 된다.'는 설을 제창하여 중도로 자처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까? 끝내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오진영이 오는 날에 한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론을 반대하고 계화도 제사의 주축이 되도록 하고 반대로 제가 제사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죄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친히 하여 믿기 어렵고 경복하기 어려운 것은 또한 어른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전 날 나를 사랑하여 나를 부축해주고 내가 성취하도록 해준 사람은 어른 같은 사람이 없었고 이제 저를 버리고 저를 쓰러뜨리고 저를 멸망시키는 사람 또한 어른 같은 사람이 없으니 《수호전》에 나오는 "은혜와 원망이 서로 이어지고 변방의 화복이 무상하다."는 말을 끝내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의 이 일로 알 수 있습니다. 동중서가 "인자(仁者)는 그 의를 바로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로를 따지지 않는다."39)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본원을 끝까지 궁구한 의론입니다. 인자한 사람은 곧 최고의 성인입니다. 어른은 마음속으로 반드시 '나는 진실로 성인이 아니다. 만약 성취한 큰 공이 있다면 옛날 사람이라도 조금 도의를 어김으로써 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고집을 피운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비록 자리를 얻어 다스려 태평한 공업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사림을 이끌어 유문의 공을 세울 수 없겠는가? 나는 지금 늙었다. 이런 일을 지체할 수 없으니 빨리 조금 오진영을 성토하는 의리를 어겨서 이를 통해 그 당과 화친하여 함께 스승의 사당을 창건할 따름이다.'라고 말할 것이니 이것이 지금 어른의 심사(心思)가 아닙니까? 비록 스스로 의리를 조금 어긴다고 말하더라도 끝내는 큰 죄에 빠짐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이 때문에 어른이 사당을 세우는 데 힘을 쓰는 것은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지 일의 공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와 같음을 알았다면 저는 마땅히 다시 충고를 일삼아서 한갓 실언을 했다는 비웃음을 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봄에 일을 들은 이후부터는 5개월이 지나도록 절대로 편지 한통이라도 보내 진언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연심(전희순) 어른이 왕림했을 때 이 일을 들어 논하고 제가 하는 말을 듣고서 "오호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신헌이 사당을 세우는 것은 결단코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이다."말했으니 저 또한 연심(전희순) 어른이 어른과 함께 기거하며 음식을 먹어서 날마다 서로 접함에 어른의 근래의 심사를 아는 것이 어쩌면 저보다 더 자세하다 여겼으니 어찌 감히 그 말을 믿고 어른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과실과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스승을 존중하는 경중과 대소 사이에서 나란히 비교하여 어김으로부터 바르게 고치는 것이 가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끝내 다시 한마디 하여 가부를 기다림으로써 깊이 살펴주시기 바랐습니다. 그윽이 생각할 때 성현의 학문은 지인용(智仁勇) 세 가지가 이것일 뿐입니다. 이른바 성현을 배운다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배우는 것이니 배우는 것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리를 보면 즉시 함으로써 용을 하고 선(善)을 선택하여 꼭 잡음으로써 인(仁)을 하며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고침으로써 지(知)를 하니 이 세 가지를 버린다면 배운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선비라 일컬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른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전에 속임수를 만들어 스승을 해치는 자를 보면 송골매가 참새를 좇아가듯이 꾸짖었으니 이것은 의리를 보면 즉시 하는 용기였고 이 의리를 지켜서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선을 택하여 끝까지 잡는 인입니다. 이제 옛것을 버리고 음성의 오진영과 내통하여 화친했으니 이것은 과실의 큰 것으로 마땅히 고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또한 그윽이 생각할 때 학자는 진실로 과실과 잘못이 많으니 과실 고치는 한 가지 일은 의리를 하여 선을 잡는 것에 비하여 더욱 급한 일이고 긴요한 도입니다. 그러므로 정자(정이)가 "학문의 도는 그 잘못을 알았다면 마땅히 빨리 고쳐 선을 따르는 것뿐이다."라고 말했으니 정자(정이)의 말이 비록 과실을 고치기 위해 말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지인용 세 가지가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 불선을 아는 것이 지이고 선을 따르는 것이 인이고 빨리 고치는 것이 용입니다. 이를 통해 말한다면 과실을 고치는 한 가지 일은 또 지인용의 총회처라고 말하더라도 불가한 것은 아닙니다. 어른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학문을 한 것이 60년이나 되어 늙어 장차 죽으려 해도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지인용을 이루는 군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여기에 대하여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사당을 세우는 것이 스승을 존중하는 큰 것이라면 형세 상 마땅히 오진영에게 통보한 연후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의리는 돌아볼 겨를도 없었으니 어른이 고윤거(고재붕)에게 답장한 편지에서 "만약 선사로 하여금 오욕의 이름을 받게 한다면 제사가 풍성하고 비석이 크며 당사가 헌창하더라도 어찌 귀할 것인가."라는 말은 이미 둘 사이의 대소경중을 분명하게 분별한 것이니 또한 오늘에 나란히 비교함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와 같을 것인데 다시 그 사이에 말할 것이 있다 한다면 비록 피해 달아나는 말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믿겠습니까? 어른이 앞뒤로 다르게 처신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의 행동에서 나온 것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은 비상한 큰 변란에 어찌 한마디 말로 반드시 고칠 것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누누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연심 어른이 스승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믿을만하다 여겨서 뿐만 아니라 또한 어른이 일찍이 제 충고를 받음으로써 오진영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만둔 것이 오히려 과실을 기꺼이 듣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거늘 이제는 섬에 들어가 오진영을 피하지 않고 함께 제사를 지내니 오히려 꺼림직 한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큰 병이 든 사람이라도 오히려 한 줄기 생맥이 있어서 잘 기르면 회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진언하여 잘 보양할 수 있는 약재로 삼아야 하는데, 입에 쓰게 만들지 말라 한다면 시험 삼아 복용하더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용렬한 짓을 하지 말라. 휘어진 나무를 바로잡은 것은 습기를 만나면 바로 굽어지니 신헌은 원래 오진영당의 사람인데 도중에 일절은 비록 좋을지라도 오늘의 변심은 바로 그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른바 세 번 의지를 바꾼 사람(三截人)이 이것일 뿐이다. 그대는 용렬한 짓을 하지 말라."하여 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무가 줄곧 먹줄을 받아 곧게 되면 중간의 일절은 비록 구불어졌다 하더라도 집을 만드는 용도가 될 수 있으니 신헌의 처음 일은 오진영의 죄가 나타나지 않은 날에 있었고 또 그를 오진영의 당이라 이른다면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땅히 쫓아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신헌의 일은 마땅히 속임수를 성토한 것으로 시작을 삼아야 하니 오늘의 변신은 중간의 일이라 봅니다. 만약 다시 마음을 고쳐 바른 데로 돌아온다면 이것은 삼절이 바름을 얻고 줄곧 먹줄로 인하여 바르게 된 자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주자는 대현으로 경서를 해석하는데 으뜸이었습니다. 중화의 설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고친 이후에 바름을 얻었고 《대학》의 그침을 아는 것은 일정함이 있다는 것과 《중용》의 "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는 말은 이미 고쳐서 구설을 따랐습니다. 대현이 경을 해석하는 것도 오히려 이와 같다면 학자의 처사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다만 도가 있는 곳을 얻었다면 삼절(三截)은 말할 것이 없으니 비록 십절(十截)이라도 자주 반복되는 것으로 꺼리기는 했지만 끝내 바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선배들이 비웃은 삼절인(三截人)은 그가 끝까지 바름을 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헌을 위한 계획은 저쪽의 바르지 않은 삼절인이 되지 말고 이쪽의 바름을 얻은 삼절인이 된다면 허다한 허물은 조금도 없고 저절로 무한하게 좋은 일만 있을 것입니다. 어른은 제가 한 말에 대하여 이치를 깨달은 명언이라 여겨 긴요하게 살펴 취할 것인지 아니면 조소하면서 나를 업신여긴 사람이라 주벌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세력이 비록 두려울지라도 천년의 공론은 더욱 두려우니 틈을 엿보아 일어나는 사적인 생각은 비록 제거하기 어려울지라도 지극히 밝은 본심은 더욱 속이기 어렵습니다. 옛날에 조조가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다가 끝내 한나라를 찬탈함에 이르렀습니다. 천하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쏠리듯이 따르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른바 일세의 명사라도 모두 똑같이 달려가서 그를 위해 지모와 생각을 내어 천하를 앉아서 안정을 시켰으니 당시에 적(賊)이라고 성토하고 힘을 다해 막은 자는 오직 소열 유비가 애썼습니다. 파촉(巴蜀)은 형세로 봤을 때 그 존재가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의 사관들은 모두 조조를 존중하여 위무제(魏武帝)라 하고 그 통치를 무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송나라 군자 온국공(사마광)에 이르러서도 그러했는데 최후에 주자의 《자치강목》이 출연한 이후에 촉나라가 주인이 되고 조조가 도적이 되어 의리가 밝아지고 포상과 주벌이 행해지니, 명사들로서 조조에게 아부한 자들은 모두 적당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문하의 일은 이것을 가지고 비교하여 비유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어른이 정말로 이 점을 살필 수 있어서 맑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돌이켜 반성한다면 본심이 드러나고 의리가 밝게 나타나서 혹 그 번복함을 자책하고 혹 그 망령됨을 스스로 후회하고 혹 그 비겁함을 스스로 비웃고서 맹렬하게 깨달아서 번연히 고치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후일의 공론을 기다릴 것 없이 곧 존장이 오진영을 성토한 문장에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는 등의 말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이에 털끝도 용납하지 않는 엄한 말'로써 도리어 존장의 죄를 다스린다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엄한 말로 뭇사람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무릇 이전의 사소한 일은 나는 이미 모두 버렸노라. 장차 그것을 겁화(劫火)40) 속에 태우고 오진영 문하에 가서 사과하겠노라."한다면 어른은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듣고 싶습니다. 아! 전주와 진주에서 검찰에 고소한 재앙이 있은 뒤로부터 태도를 바꾸고 반론을 하는 자들이 굉장히 많은데 오직 어른에게 연연하며 그만두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른이 몸소 일찍이 성토를 제창한 사람이 되어서 뭇사람 마음의 향배와 스승을 속인 것을 분별하는 여부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하는 것은 어른뿐만 아니라 동지 전체의 수치이며 동지 전체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스승을 속인 것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집니다. 어른이여, 어찌 조금도 생각지 않으십니까? 일신의 명예와 절개는 비록 돌아볼 것이 못된다하더라도 전체의 수치는 어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전체의 수치는 비록 돌아볼 것이 못된다하더라도 스승을 속인 것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어찌 생각지 않습니까? 어른이여, 어찌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대는 용렬한 짓을 하지 말라. 듣자하니 신헌이 벽에다 걸어놓고 맹세하기를 '사문의 일로 편지를 보내오면 일체 답장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그가 요즘 오진영이 주관하는 뒤에서 사당의 일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사당에 돈 모으는 일로 온 편지에 대하여는 분명 답장을 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인데 오히려 즉시 맹세를 했다 하니 이것은 반드시 오진영과 화답하는 편지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조짐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대는 용렬한 짓을 하지 말라."하여, 내가 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신헌이 사당을 세움에 만약 일의 공적을 위해 시작한 것이 나의 견해와 같다면 즉시 맹세한 뜻은 진실로 그대 말과 같지만 연심이 이른바 결단코 스승을 존중하기 위하여 시작했다는 말을 나는 감히 믿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어찌 반드시 오진영과 화친할 조짐이 이미 드러났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쓰면서도 반복적으로 생각하여 감히 문득 반드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른의 마음을 알지 못함으로써 반대로 원수 됨이 깊어진 것입니다. 그만둬 버리면 사후에 큰 윤리에 대하여 다소 분수를 다하지 못한 점이 있을 것 같아 홀로 앉아 눈을 반쯤 감고 붓을 세 번 잡았다 세 번 던지고 끝내 연심의 말을 믿고 이 편지를 썼으니 만약에 편지에 답장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혹자의 설과 같다면 저는 진실로 답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답장을 해도 또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연심이 말한 것과 같다면 답장하여 이 미혹함을 풀어주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김종희가 "호남 사람은 이미 과실을 고쳤다."말하니 이것은 연심이 전한 말입니다. 어른이 이미 이 말을 들었는데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으니 오호라! 그 끝내 오진영을 위해 과실을 고치는 것을 편하게 여기고 선사를 위해서는 과실을 고치지 않는 것입니까? 어른은 깊이 살펴주십시오. 澤述白生之於尊爲同門, 四十年之久, 重以同討震誣, 同守大義者, 又爲十年之久矣.而討議之先發, 辨文之多且嚴, 丈實有之, 而非生之可及者.故每自以爲并世所知, 可親信敬服者, 無有加於愼丈矣.夫何丈於近年以來, 漸改舊德, 竟反前轍, 始而訪問震黨中, 而同祀震黨, 旣棄治黨之前義, 旋唱單除一人之說, 似若自處以中道矣? 終又隱避不見, 於震來之日, 并反除一人之論, 而致其爲華祀之主祝, 反以生之不同祠事爲罪.然則難於親信, 難於敬服, 又無如丈矣.蓋前日之愛我扶我, 成就我者, 莫如丈, 今日之棄我顛我, 敗滅我者, 亦莫如丈, 《水滸》之"恩怨相尋, 塞上之禍福無常", 竟惡乎定? 丈之此事, 其可知也.董子曰: "仁人者,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此極本竆源之論.此仁人者, 卽無上之聖人也.丈之心必曰, '我固非聖人矣.苟有大功可就, 則古之人, 亦有不以少達道義而不爲者, 我何以固執爲哉? 我生斯世, 雖不得位以成治平之業, 顧不可以倡率士林建儒門之功乎? 我今老矣.事不容遟, 亟宜少達討震之義, 因以和同其黨, 共剏師祠爾.' 此非丈今日心事乎? 蓋其雖自謂少違於義, 而不知其終陷於大罪也.吾故曰丈之宣力立祠, 非爲尊師起見, 只爲事功起見也.旣知其如此, 則不宜復事忠告, 從取失言之譏.故自聞今春事後, 迄茲五朔, 絶無一書之陳矣.向見鋉心丈委訪, 提論此事, 及聞生言曰: "惡! 是何言也? 愼軒之立祠, 斷然爲尊師起見." 生又念鍊心之於丈起居飲食, 日相接也, 則知丈近日心事, 容有加悉於生者, 何敢不信其言而疑丈之心乎? 雖有過錯, 誠出於尊師之心, 則自應比并較量於尊師輕重大小之間, 知所從違而改正, 亦有可望.是故卒復一言, 以俟可否, 幸深察焉.竊惟聖賢之學, 知仁勇三者是已.所謂學聖賢者, 學此三者, 學之當如何? 見義卽爲以爲勇, 擇善固執以爲仁, 有過必改以爲知, 捨此三者, 不可謂之學, 亦不可稱之以士矣.若以丈言之, 前日之見造誣害師者, 斥之若鷹鸇之逐烏雀者, 是爲見義卽爲之勇, 守此義而終身不變, 則是爲擇善固執之仁也.今日之棄其舊, 而通和陰震, 則是過之大, 而當改而爲知者也.生又竊念, 學者固多過錯, 改過一事, 比爲義執善, 尤爲急務要道.故程子曰: "學問之道, 知其不善, 則當速改而從善而已." 程子之言, 雖爲改過而發, 實則知仁勇三者, 皆在其中.知其不善知也, 從善仁也, 速改勇也.由此言之, 改過一事, 又謂之知仁勇總會處, 亦無不可矣.丈生此世, 又此輟學六十年, 老將死而不輟者, 豈非欲成得知仁勇之君子人乎? 旣然矣, 而猶於此不以爲然, 則吾不可得以知之.如曰立祠尊師之大者, 勢當通震, 然後可成.故前日之義, 有不暇顧, 則丈答高允擧書"若使先師受汙辱之名, 則豊祭大碑, 堂舍軒敞, 奚貴之"說, 早已明辨二者之大小輕重, 而亦不待比并較量於今日也如此, 而更有可說於其間者云, 則雖曰非遁辭, 人誰信諸? 蓋丈之前後二轍, 若不出一人之爲者, 似此非常大變, 何可以一言期其必改? 而吾所以縷縷若此者, 非惟以鍊心尊師起見之說爲可信, 亦以丈之曾得鄙告, 罷止書震之, 猶爲喜聞過, 今不入島避震, 同祀之, 猶有所忌憚者.譬如大病之人, 猶有一線生脈, 善養可以回春.故茲進逆耳之言, 以當善養之劑, 勿以爲苦口, 試服而收效否? 有謂生者曰: "子母庸爲也.夫木矯楺而直者, 遇濕而復枉, 愼軒本是震黨, 中間一節雖好, 今日之變, 正所以返其本.所謂三截人者是已.子毋庸爲也." 生曰: "否, 不然." 夫木始終繩直, 則中間一節雖枉, 亦可爲作室之用, 軒初事在震罪未著日, 且謂之其黨則非實也.此不當追論.吾則以爲愼軒之事, 當以討誣爲始, 今日之變, 爲中間事.若復改而歸正, 則是爲三截得正, 而始終繩直者, 又何害焉? 朱子答大賢而聖於釋經者也.於中和之說, 屢改而後得正, 《大學》知止有定, 《中庸》誠者自成, 旣改而還從舊說.大賢之釋經, 猶如此, 則學者之處事, 何獨不然? 故吾則以爲但得道在, 莫說三截, 雖十截, 不可以頻復爲嫌, 而不思終正也, 審矣.前輩所譏三截人, 以其終之不得其正故也.今爲愼軒計, 勿爲彼邊不正之三截人, 而爲此中得正之三截人, 則都無許多累戾, 而自有無限好事矣.未知丈於此, 爲理到名言, 而喫緊省取乎, 抑以爲弄出譏嘲, 而誅侮慢乎.夫當世之勢力, 雖可畏, 千載之公論, 更可懼, 闖發之私念, 雖難除, 至明之本心, 更難欺.昔曹操之, 挾天子以令諸侯, 而終至篡漢也.天下畏其威勢, 莫不靡然從之, 所謂一世之名士, 亦皆齊進彙征, 爲之出謀發慮, 以致坐定天下, 當時討之以賊, 盡力拒之者, 惟昭烈之區區.巴蜀以勢觀之, 雖謂之無有焉可也.故歷代史官, 皆尊操爲魏武帝, 而無有奪其統者.以至宋朝君子溫國公, 而亦然, 最後乃得朱子《網目》之書出, 然後蜀爲主, 而操爲賊, 義理以明, 褒誅以行, 凡其名士之附操者, 皆爲賊黨.生以爲今日吾門之事, 擧此比準, 可以相喩也.丈誠能見到于此, 而清夜無寐之時, 反以自省, 則本心呈露, 義理昭著, 或自責其反覆, 或自悔其私妄, 或自笑其㤼懦猛然悟, 而幡然改之不暇也.如曰不然, 亦不待後日公論, 卽以丈討震文, 有震泳無先師等八字打開間, 不容髪之嚴辭, 還治丈罪, 無辭可供矣.凡此等嚴辭, 其將呼於衆曰: "凡前日之薄物細故, 吾旣捐之矣乎.其將焚之於劫火之中, 負荊於震門乎." 未知丈於此何以處之.願一聞之也.噫! 一自全晉訴禍之後, 改度反論者, 不啻多矣, 而獨於丈眷眷不置者, 何也? 以丈之身曾作倡討之人, 而衆心向背師誣辨否之所係也.今之云者, 非獨爲丈, 乃爲同志全體羞耻也, 非獨爲同志之羞恥, 乃爲師誣之, 因此益深也.丈乎丈乎, 盍少思之? 一身之名節, 雖不足顧, 全體之羞恥, 獨不念乎? 全體之羞恥, 雖不足顧, 師誣之益深, 寧獨不念? 丈乎丈乎, 盍少思之? 有謂生者曰: "子毋庸爲也.聞愼揭誓于壁曰, '凡以師門事來書, 一切不答', 愼方勤務祠事於震主之後, 則其以祠金事來者, 必無不答, 而猶且立誓, 是必但指貴其和震書者.蓋其水已堅矣, 子毋庸爲也." 生又曰: "否, 不然.愼軒立祠, 若爲事功起見, 如吾之見, 則立誓之意, 誠如子言, 鍊心所謂斷然爲尊師起見者, 吾不敢不信, 則豈可必謂氷已堅於和震乎? 噫! 其然乎? 否乎?" 生於此書之作, 蓋反覆思量, 未敢遽定欲爲之乎, 則丈之心有不可知, 恐見仇之反深矣.欲已之乎, 則於師友之大倫, 恐有多少不盡分, 獨坐半目, 三操筆而三投之, 終於只信鍊心之言而爲之, 如使誓不答書, 如或者之說, 則吾固知其無答, 而答亦不願見也.如其不然, 而誠有如鍊心所道者, 則幸賜回敎俾鮮此惑千萬.金鐘熙言, "湖南人, 已改過", 此鍊心所傳也.丈已聞此, 而不以爲異, 鳴呼! 其終安於爲震改過, 而不爲先師改過也耶? 惟丈深諒之. 동중서가……않는다 《소학(小學)》 권5 〈가언(嘉言)〉에 "동중서가 말하였다. 인자(仁者)는 그 의를 바로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로를 따지지 않는다.[董仲舒曰:仁人者,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라고 하였다. 겁화(劫火) 불가(佛家)의 용어로, 재앙을 뜻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가 일어나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검은 재가 나오자,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하였다. 《고승전(高僧傳)》 권1 〈한낙양백마사축법난(漢洛陽白馬寺竺法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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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병자년(1936) 答李愼軒 丙子 용동본35)의 고이(考異)에 대한 것은 저 또한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겨를이 없었는데, 우리 어른이 먼저 제 마음을 알았습니다. 용동본의 전고(前稿)36)는 원본에 의거하여 발간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후고는 조금도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여 다시 원본의 모습이 아닌 것은 당일에 일을 함께 한 전정재(田靜齋 전화구), 임자경(林子敬 임장우), 이경순(李敬循 이인구)도 모두 숨기지 않고 공공연히 말한 사실이라고 들었으니, 이에 그 내용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후고로 사용한 것이 어떤 본인지 모르겠으나 정재가 화도수정본 한질을 가지고 갔고 또 입석(立石)37)이 베낀 현동본을 빌려갔으니 이것이 용동본에서 사용한 것입니까? 또 들으니 전순형(田舜衡 전기진)이 진주본을 많이 답습하여 광주에 보내 발간했다 하니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박진호가 백천재(百千齋)38)에서 김용승을 맞이하여 20년 강학을 기대했다 하니 어른은 이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의 말에 "간재 문하의 제공들이 이전에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함은 얼마나 엄했습니까? 이제 제공 중에서 음성의 오진영과 내통하여 서원의 일을 같이 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나는 그 전후의 내막을 모르겠습니다.【이것은 연재와 말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김 진사는 분명히 간재 문하를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나간 것은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질문하여 곧 대답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보면 그 뜻을 탐색할 수 있고 그 견해를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 이 말을 들음에 또한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박인규 등의 연명서(聯名書)와 전사견의 논변이 있어 모두 적어서 보시도록 드리니 후에 가까운 사람과 김복교 등 여러 공에게 주어 어떤 말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龍本考異, 鄙亦尋常有意而未暇, 今丈先獲我心矣.蓋聞龍洞前稿, 可謂依本面刊出, 而後稿則都不成樣, 非復本面者.當日同事, 如田靜齋·林子敬·李敬循, 亦皆不諱而公言, 則此可以槩悉其內容矣.但其後稿所用, 未知何本, 而靜齋持去華本一匣, 又借去立石所鈔玄洞本, 此爲其所用耶? 又聞田舜衡多襲晉本, 送刊光州, 未知是否.朴震鎬之迎金容承于百千齋, 期以二十年講學, 丈已聞之否? 其言曰: "艮門諸公, 前日之討陰震, 何其嚴也? 今諸公中, 多有通陰而同院事者, 吾不知其前後裡許.【此與鍊心言者.】" 又曰: "金進士分明是出去艮門, 有人質之以出去非倍師乎? 則不答." 聽其言, 觀其爲, 則可以探其意, 而知其見矣.丈聞此言, 又未知何以爲心.此有朴仁圭等聯名書, 及田士狷置辨者, 俱錄呈覽, 後轉及於貴近與金復交諸公, 看有何語, 如何? 용동본 1927년경 논산(論山) 용동(龍洞)의 봉양정사(鳳陽精舍)에서 간행된 목판본을 가리킨다. 용동본의 전고(前稿) 전우가 고부(古阜) 백천재(百千齋)에 머무르던 1906년 3월에 김준영(金駿榮)으로 하여금 초고(草稿)를 수습하게 하여 문고(文稿) 36책(冊)으로 산정(刪定)해 두었고, 1912년 11월에는 1906년에 산정해 두었던 문고(文稿) 36책에, 성기운(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글을 합하여 성기운,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등이 편집하고 전우가 직접 25책으로 산정한 것으로 '전고(前稿)'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용동본의 전고는 이것을 가리킨다. 입석(立石) 지명인데, 취오(聚五) 김석규(金錫奎)가 살았던 곳으로, 간재가 김석규에게 지어준 〈우석잠(友石箴)〉이 《간재집(艮齋集)》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석규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백천재(百千齋) 전라북도 고부(지금의 정읍)에 있었던 학습장소를 가리킨다. 《간재집(艮齋集)》 해제에 보면 1906년(66세)에 "3월, 古阜 百千齋에서 文稿 36冊을 刪定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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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을해년(1935) 答李愼軒 乙亥 자사는 "자세히 묻고 밝게 분별한다."17) 하였고, 맹자는 "상세히 말하는 것은 돌이켜 요점을 말하고자 해서이다."18)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논한다면 편지를 빈번하게 주고받는 것은 자세히 묻고 상세히 말하는 것이며, 한마디 말로 결단하는 것은 밝게 분별하고 돌이켜 요약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뒤로 누누이 말한 것은 어른의 '음성의 오진영과 통해야 한다'는 견해를 바꾸는 것을 끝내 순조롭게 이루기 위함인데, 멋대로 생각한 결단하는 말을 하여 지금 마침내 "요컨대 한마디 말로 결단할 수 있어서 반드시 편지왕복을 빈번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시니, 열매를 먹으며 뿌리를 보지 않고 효험을 말하며 약을 알지 못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공자는 "벗이 곧고 신실하면 유익하다."19) 하였고, 맹자는 "도가 바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20) 하였습니다. 제가 곧고 신실함에 있어서는 많이 사양하지 않는 만큼 어른께서 견해를 바꾼다면 도가 드러나는 유익함이 될 것입니다. 다만 이른바 바꾸는 것을 다 바꾸지 못하고 드러나는 것이 다 드러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곧고 신실함이 지극하지 못하고 편지왕복을 다하지 못해서이겠지요? 청컨대 다시 충고를 진술하겠습니다. 이제 "오진영의 무리와 서로 화합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다만 처치를 마땅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한다면, 맹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에 자기 몸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았다가 이제 궁실과 처첩과 알고 있는 자의 고마워함을 위해서는 받으니, 이를 또한 그만둘 수 없는가? 이것을 두고 본심을 잃었다고 한다."21) 하였습니다. 어른이 전에 음성 오진영의 재앙이 치성하여 일망타진할 때에는 오히려 떨치고 일어나 몸을 돌아보지 않고 입을 크게 열어서 그 당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 것【을축년 통문】은 어찌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변척하지 않을 수 없고 원고를 고친 것을 꾸짖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서 스스로 생선요리를 버리고 곰발바닥요리를 취하는 의리22)에 붙이신 것이 아니십니까? 이제 마침내 거두지 않을 수 없는 푼돈과 받지 않을 수 없는 뙈기밭 때문에 갑자기 이전의 처치를 마땅하게 한다는 생각을 뒤집어 바꾸었습니다. 본심을 잃었다는 것을 비록 감히 어른에게 문득 비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아 저들과 서로 화합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아마도 텅 비고 밝은 마음의 본체가 그 기능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군자가 돌이켜 구하고 내면으로 반성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어른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고 도리어 저들의 과오를 공격하는데 있으니 어찌 이리도 전도되었단 말입니까? 난적이니 적당이니 하는 글자를 일찍이 어른과 함께 지어 연명한 을축년의 통문 안에 넣어 전국에 배포한 것을 지금 마치 제 글에서 처음 본 것처럼 하여 "지나치다[過當]" 하시니, 어른의 정신없음이 어찌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주자가 "자신의 사적인 뜻을 제거하는 어려움이 중원의 오랑캐를 쫓는 것보다 어렵다."23) 했습니다. 어른이 비록 현명하더라도 또한 사적인 뜻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공을 위한다는 사심이 그대로 유소(有所)의 병통24)을 이루어 마음이 있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른께서 가리고 막힌다고 겸손히 하신 말25)은 비록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가리고 막히는 것이 만약 있다면 저는 감히 그것이 타고난 바탕이 아니라 바로 사적인 뜻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적인 뜻을 제거하면 이에 통명하게 될 것이니, 오직 어른은 힘쓰십시오. "인을 해치는 것을 적이라 한다.", "향원(鄕原)은 덕을 해치는 것이다.",26) "하나를 고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도를 해치기 때문이다.",27) "믿음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해치게 된다.",28)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 바로 해치는 것이다."29) 하였으니, 이와 같은 부류는 다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오진영이 하고 있는 짓은 이러한 것들과 나란할 뿐만이 아니니, 만약 그 죄를 바르게 이름 짓는다면, 맹자는 '우리 군주는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도 오히려 해치는 것30)이라고 말했으니,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여 의리가 없는 것을 해친다고 말할 수 없단 말입니까? 우옹(尤翁 송시열)이, 스스로 집주를 지어 선현이 정해 놓은 뜻을 따르지 않는 것도 오히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말했으니, 오진영이 스스로 자기의 뜻으로 선사의 본문을 고친 것을 난적이라고 말할 수 없단 말입니까? 또한 어른은 갑자년 여름에 홀로 만든 통문 안에 "선사가 있으면 오진영이 없고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라고 하신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세상에 어찌 스승을 무시한 죄를 범하고도 난적이란 이름을 면하는 자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원고를 고치고 선비들에게 재앙을 끼치기 이전에 이미 스승을 무시한 것으로 그를 성토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 가지 큰 죄가 모두 드러난 뒤에 마침내 그를 위해서 난적의 이름이 억울함을 다투어주고, 그의 무리로 오진영과 줄곧 함께 하여 몸은 다르나 한 마음인 자들도 적당(賊黨)이라고 명명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오호라,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끝까지 제대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31)라고 한 말이 옛날에도 있었거니와 어찌 어른께서 오늘날 하시는 일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분명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어른께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선사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영남 수백 사람에 대하여 마땅히 그 이름을 다 잘라내지는 않을 것이니 선사의 뜻이 이미 이와 같았다." 하신 말은 어른의 뜻에서 나왔으나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편지에서 "어디에서 이와 같음을 보고 선사의 뜻이 이미 이와 같다고 하는가?" 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어른의 말이 무함하는 말이 되는 까닭입니다. "선사께서 다시 살아나시면 오진영의 무리 수백 사람에 대해 한결같이 죄를 이루실 것이니, 자신을 해친 것은 묻지도 않으실 것이다. 사문에 끼친 재앙이 크니, 어찌 수가 많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다 베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제가 정자의 "천하의 적을 죽이는데 살육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해롭겠는가?"라는 말을 근거한 것인 만큼 "사문의 적을 성토함에 있어 베어내고 끊어버리는 것이 비록 많을지라도 또한 어찌 해롭겠는가?"라고 말하겠습니다. 성인이 서로 전수한 것은 동일한 심법이니, 정자가 전한 '살육이 많다'는 심법은 즉 선사가 받은 '베고 끊는 것이 많다'는 심법이니, 제가 근거로 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무함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결단코 사군자가 이치를 논하고 의리를 강하는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장사치와 골목아이들이 보복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말이 되려 해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족히 들을 것도 못 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의리는 정해져 있지만 사람의 견해는 같지 않으니, 제가 또한 어찌 감히 매사에 자기 견해만 옳다고 여겨서 반드시 다른 사람도 같아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날에 맹자의 '막을 것을 말하는 의리'32)에 근거하여 뜻 있는 선비들의 동의하는 견해를 모아 막아 물리치는 데에 마음을 다하고 처치하는 데에 마땅함을 얻는 것일 뿐입니다. 어른은 1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에 그가 원고를 고친 것이 더욱 많다는 것과 사림에 재앙을 가한 사실과 스승의 손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다 아신 뒤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길을 고쳐서 당초 스스로 성토하는 의론을 제창하고 스스로 통문을 지어 "오진영이 있으면 스승이 없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러 엄절함을 극도로 해서 오진영의 이른바 두려워할만한 사람으로서 번복하여 그를 위해 난적과 적당이라는 호칭을 벗게 해주며, 말이 오진영의 죄에 미치면 "권하여 허물을 사죄하게 하고자 한다." 하고, 말이 그 무리를 성토함에 미치면 "한 번 제재하고 억제하였다." 하여 대충 말하고 가볍게 처리해서 오직 그가 중하게 다칠까를 염려하시니, 어른의 뜻이 있는 곳을 진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니 또한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며 의리가 더욱 정밀하고 인이 더욱 익어서 남들이 미쳐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 혈기는 쇠하고 마음은 나약한데 세상은 또 더욱 혼란하니, 평일에 곧고 올발랐던 기개가 가라앉고 사그라드는 데다 아울러 군자의 세 가지 경계 가운데 마지막 경계33)를 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중에 반드시 해당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이에 대한 의론은 우리들이 종신토록 크게 완수해야할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사문의 영원한 후세에 공신이 되느냐 죄인이 되느냐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쪽의 시비는 자연 정론이 있어서 그 사이에 사적인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로 어른의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비록 갑자기 하나로 귀결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편지를 자주 왕복하여 모두 거두어 써놓아 후세의 공정한 눈과 바른 견해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일입니다. 반드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의 일반 학자들처럼 질문이 있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서 남이 대들어도 따지지 않는34) 성덕인 냥 자처하는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子思子曰: "審問之, 明辨之." 孟子曰: "詳說之, 所以反說約也." 以今日事論之, 往復頻煩, 審問詳說也, 一言斷之, 明辨反約也.所以鄙之前後縷縷, 終得馴致丈之改通陰之見, 而爲妄想之斷辭, 今乃曰: "要可一言而斷之, 不須往復頻煩", 無乃近於食實而不見其根, 奏效而不知其藥者乎? 孔子曰: "友直諒, 益矣." 孟子曰: "道不直, 則不見." 區區竊不多讓於直諒, 而丈之改見, 爲道見之益也.但所謂改者, 不盡改, 見者, 不盡見.意者, 直諒之有未至, 而往復之有未盡者乎? 請得以更陳忠告.今曰: "與陰徒相合, 於我何有? 但欲其處置得宜." 孟子不云乎? "向爲身, 死而不受, 今爲宮室妻妾所識而受之, 是亦不可以已乎? 此之謂失其本心." 丈於向日陰禍方熾一網打盡之際, 猶能奮不顧其身, 大開口說, 其黨當先治【乙丑通文者】, 豈非以認誣不可不辨, 改稿不可不斥, 而自附於舍魚取熊之義乎? 今乃爲零金些錢之不可不收, 畸田片土之不可不受, 而忽翻前日處置得宜之案, 而變易之, 失其本心, 雖不敢遽擬於丈, 然可已不已, 而不自知其與彼相合者, 何爲而然, 則恐虛明之軆, 有不能守其官也.此君子所以貴反求內省也.丈之所當兢兢者, 不在於此, 而反在於攻彼之或過, 何其顛也? 亂賊賊黨等字, 早已加之於丈之同製聯名乙丑通文中, 而布之全國者, 今若創見於鄙文者然, 而謂之過當, 未知丈之昏忘, 何若是也? 朱子謂"一己私意之難除, 甚於逐中原之戎虜." 丈雖賢矣, 亦不免有意, 爲公之私, 因致有所之病, 而心之不在歟? 然則丈之自道以蔽塞者, 雖不可謂有, 是如有之, 區區敢曰: "非其質也, 乃其意也." 去其意, 則斯通明矣, 惟丈勉之, "害仁者謂之賊", "鄕原德之賊", "所惡執一者, 爲其賊道",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老而不死, 是爲賊", 諸如此類, 不可悉擧.今震之所爲, 非但此等比而已.若正名其罪, 則孟子以吾君不能者, 猶謂之賊, 震之誣先師以無義者, 不可謂之賊乎? 尤翁以自作集註, 不遵先賢所定者, 猶謂之賊, 震之自以己意改先師本文者, 不可謂之賊乎? 且丈不記甲子夏獨製通文中"有先師無震泳, 有震泳無先師"之語乎? 世豈有犯無師之罪, 而免夫賊名者乎? 此在改稿禍士之前, 旣討之以無師.今於三大罪俱著之後, 乃爲之訟冤亂賊之名, 其從之諸與震始終異身一心者, 亦謂不可名以賊黨, 鳴呼! "靡不有初, 鮮克有終", 古亦有之, 豈至如丈今日之爲者乎? 是必有其故矣, 惟丈思之."先師復起, 其於嶺黨數百人, 不應盡割其名, 先師之意, 旣如是"云者, 出自尊意, 而無所憑據.故鄙書曰: "何處得見其如是, 而先師之意, 旣如是也?"云矣.此丈之言所以爲誣說也."先師復起, 而震黨數百人, 一向遂罪, 則勿問害己, 其貽斯文之禍爲大, 豈可以多數而不盡割其名云者?" 鄙據程子"誅天下之賊, 殺戮雖多, 亦何害"之說, 而曰: "討斯文之賊, 割絶雖多, 亦何害?" 蓋聖人之相傳受, 同一心法, 程子所傳殺戮多之心法, 卽先師所受割絶多之心法, 吾之所據者, 此也.謂"此爲誣說", 則非惟決非士君子論理講義之言, 欲爲賈豎巷童報復聲口, 而亦不可得, 豈非不足聽聞者乎? 蓋義理有定, 人見不同, 吾亦何敢每事自是己見而必人之同也? 但於陰震誣師之日, 據孟子言距之義, 集多士同然之見, 盡心於閑闢, 而得當於處置者.丈乃於十年之久, 知其改稿益多, 加以禍士林, 押師孫之後, 忽然改度易轍, 以當初自倡討議, 自製通文, 至有'有震無師'之語, 而極其嚴截, 震所謂可畏之人, 反復爲之免脫亂賊賊黨之稱, 語及震罪, 則曰: "欲勸謝過", 語及討黨, 則曰: "一番裁抑", 略略說去, 輕輕勘來, 惟恐其重傷, 尊意所在, 誠不可測.其亦年高德邵, 義益精仁益熟, 而人不及知歟? 抑亦血衰心弱, 世且愈亂, 平日直方之氣, 潛銷暗鑠, 并不免君子三戒之末, 而不自覺知歟? 二者, 必有所處矣.惟此議論, 不但爲吾輩之終身大致, 實關師門之百世功罪.二者是非, 自有定論, 不可得以容私於其間者, 誠如尊喩.然則今雖未得遽然歸一, 亦當往往復復, 俱收并書, 以俟後世之公眼正見, 亦是一事.定不可學, 今世一般學者, 有問無答, 而自處以不校之盛德也, 如何如何? 자세히……분별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에 나오는 말이다. 상세히……해서이다 《맹자(孟子)》〈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벗이……유익하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의 "유익한 벗이 셋이고 해로운 벗이 셋이다.[益者三友, 損者三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도가…… 않는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전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말이다. 궁실은 좋은 집을 말하고 처첩은 처첩의 봉양을 말한다. 원문의 '소식(所識)'은 '소식궁핍자득아(所識窮乏者得我)를 줄여 쓴 것으로, 알고 있는 궁핍한 자가 나의 은덕을 입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생선요리……의리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더 좋고 가치 있는 것을 취한다는 요지로, 사는 것과 의를 둘 다 취할 수 없을 때에는 의리를 취함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의……어렵다 이 말은 《주자대전(朱子大全)》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오는 글이다. 본래 문장은 "중원의 오랑캐를 쫓아내는 것은 쉽지만, 자신의 사적인 뜻은 제거하기 어렵다.[中原之戎虜, 易逐 而一己之私意, 難除也]"이다. 유소(有所)의 병통 《대학장구(大學章句)》 전7장에 나오는 네 가지 마음의 병통인 사유소(四有所)로,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것을 말한다. 겸손히 하신 말 원문의 '자도(自道)는《논어(論語)》〈헌문(憲問)〉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군자의 도 세 가지인 인자불우(仁者不憂), 지자불혹(知者不惑), 용자불구(勇者不懼)를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자공이 "선생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다.[夫子自道也]" 하였는데, 주에 "자도는 겸손히 한 말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自道 猶云謙辭]" 하였다. 향원(鄕原)은……것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향원(鄕原)'은 동네(鄕)에서 신실하다(愿=原)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덕과 비슷하지만 덕이 아니므로 덕의 적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를……때문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말이다. 믿음을……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늙어서도……것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것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우리 임금은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 하는 것을 해친다고 한다.[吾君不能謂之賊]"라고 한 것을 말한다. 시작이……드물다 《시경(詩經)》 〈탕(蕩)〉에 나오는 말이다. 막을……의리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양묵을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군자의……경계 《논어(論語)》〈계씨(季氏)〉에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으니, 젊을 때에는 혈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경계함이 여색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강성하게 되므로 경계함이 다툼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므로 경계함이 얻음에 있다.[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라고 한 것의 마지막 경계인 늙어서 얻는 것에 치중함을 말한다. 남이……않는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안연(顔淵)을 묘사한 말 중에 하나인 '범이불교(犯而不校)'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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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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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李愼軒 甲戌 앞서 올린 편지는, 비록 스스로 실로 마음을 다해 고하고 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다고 여기지만 귀에 거슬리는 말과 마음에 어긋나는 말을 듣기 좋아하며 즐거이 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게 여깁니다. 이런 까닭으로 마음에 전전긍긍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번에 어른께서 노기를 내리고 마음을 평정시켜 기꺼이 그 의론을 서서히 살펴 반복하시고 편지를 보내주셨으며 또 충심어린 가르침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이것은 비록 어른에게 바라는 바였으나 크게 기쁨이 넘쳐서 뜻밖의 보물을 얻은 것 같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의 의리가 비록 정미하여 보기 어렵고 피차의 소견이 비록 어긋나서 합치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규명하지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자축하며 실로 한줄기 양맥이 많은 음속에서 발현된 것이라 여겼습니다. 더욱 마땅히 서로 십분 힘을 쓰고 실효를 거두기를 기약해야지 그럭저럭 범범하게 흘려보내 이미 드러난 양광으로 하여금 장차 식어서 얼마 후에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감히 다시 진술하니 삼가 재가해주기를 바랍니다.호서에서 시행된 단발의 변고를 듣고 온 천지가 그물망에 걸릴 것을 생각하여 통곡하고 상심하였으니, 이것은 단발의 변고에 격분되어 온 천지가 그물망에 걸린 것을 상심해 통곡하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실정에 지나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미 통곡하고 상심하였습니다. 영남은, 가까우면 직접 가고 멀면 편지로 물어서 영당의 건립에 힘을 얻기를 바라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그 위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시험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처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보존한 것이 이미 은미하고 일을 시행한 것도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재 속의 뱀과 그림 속의 용이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눈동자를 찍지 않으면 또한 스스로 그러한 줄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는데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간파되는 자가 많으니, 이것이 맹자가 본심을 잃었다고 논한 까닭입니다. 제발 유념하여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애초부터 마음이 중립인 자는 진실로 논할 것이 없으나 권순명·유영선·김용승 세 사람에 이르러서는 서로 절교할 의리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에 이미 두루 방문하셨으니 어찌 오늘날에 와서 이상하겠습니까? 어찌 적을 다스림에 먼저 그 당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권순명·유영선·김용승은 바로 조조의 순욱 같은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을축년 11월의 통문은 오진영의 지휘와 사주를 받아서 전후로 분주히 뛰어다닌 자들입니다. 어찌 먼저 다스려야 할 난적의 당으로 어른께서 함께 지어 연명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비록 방문한 일이 있으나 지금 분명한 글을 드러내 밝히시니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립하는 자들은 말해도 고치지 않으니 치지도외하면 되지만 반드시 그들과 더불어 서로 좇으며 사이가 없고자 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모두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분명하게 입언할 수 있는 자이겠습니까?오진영을 위하는 자는 오진영의 당이 아닙니까? 어찌 그들을 한결같이 서로 절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큰 과실 작은 과실을 운운하는 것은 주제를 잃었으니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절교당한 자가 과실을 고쳤다고 말하니 과실이 있다고 어찌 절교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절교를 했다면 반드시 그 과실에 고치지 못하여 죄가 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다면 그 죄를 자복한 이후에 비로소 다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무리들도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모두 자복하지 않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미 다시 용서하고 한편으로는 편지를 통하고자 하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합니까? 을축년에 스스로 지은 통문의 내용과 상반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선사의 뜻은 영남당 수백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그 이름을 다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진작부터 이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무함하는 말이니 놀라울 뿐입니다. 내 뜻은 선사가 만약 다시 일어나면 오진영의 당 수백 명을 한결같이 죄를 줄 것이니 해로움은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문의 화가 컸으니 어찌 숫자가 많다 하여 그 이름을 다 삭제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자가 "천하의 적도를 주벌함에 살육이 비록 많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저 또한 "사문의 적도를 성토함에 이름을 삭제하고 절교하는 것이 비록 많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겠습니다."비위를 맞춘다"16) 운운 하신 것은, 조목에서 논한 것이 본문의 뜻과 서로 너무 차이가 나니, 다시 자세히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나와 그대가 도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은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도모할 뿐입니다. 그러나 도모가 행해지지 않으면 비록 억지로 같게 하려 해도 분명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과연 믿음이 미쳐서 서로 뜻이 맞은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진영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 이른바 "인가를 내면서 선사에게 미뤄 핑계를 댔다."는 것과 "원고를 교정하여 문자를 변개했다."는 두 가지 일을 보고 어른께서는 용서할 만한 죄라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전날의 성토가 있었습니까? 이미 성토했으니 힘써 주벌할 수 있으면 주벌하고 주벌할 수 없으면 마땅히 삼가 오진영을 피하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어찌 편지를 보내 서로 통하여 도리어 오진영의 적도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단 말입니까? 우습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오히려 구제하여 그칠 수 있으니,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발 다시 생각하고 다시 힘써 경계하기 바랍니다. 前書之呈, 雖自謂"實出忠告, 而愛人以德之意", 然逆耳之言, 拂心之辭, 喜聞而樂取者, 古今以爲難.是以不免有兢兢於心.乃者丈降氣平心, 肯與徐審反覆其論, 而賜之書, 且謂"忠誨", 此雖所望於丈者, 然喜溢之極, 如獲望外之寶.苟如是也, 天下義理, 雖曰精微而難見, 彼此所見, 雖曰參差而難合, 豈有終不得究終不得一之理? 心竊自賀, 以爲"此實一線陽脈之發見於群陰之中者".更宜十分著力, 期收實效, 不可悠悠泛泛, 使已見之陽光, 將息而旋消也, 明矣.敢復陳之, 伏惟取裁.聞湖西薙變, 而想及天羅地網, 而痛哭傷心, 則是激觸於薙變, 而傷心於網羅, 至於痛哭, 而不覺情之過越者也, 何謂初無云耶? 旣已痛哭矣傷心矣.嶺, 欲近則躳往, 遠則書問, 以冀得力於影堂之建, 則此非不自安其位而欲有所試而何? 凡於此等去處, 存心旣微, 行事未著, 有同灰蛇畫龍, 非迫視点睛, 亦不自知其然.所以有見牛未見羊之故, 而不自覺知, 反爲他人忖度者多, 此孟子所以有失其本心之論者也.千萬留念而致詳焉.從初之心中立者, 固勿論, 至權柳金三人, 思之無相絶之義, 故未有此事.前已有歷訪, 何怪於今日乎? 豈不聞治賊先治其黨與? 權柳金, 乃曹操之彧群也.何況乙丑復月通文, 承震指嗾, 奔走先後者, 詎不爲亂賊之黨先治, 丈之同製聯名者乎? 前雖有訪, 今露明文, 安得不怪也? 其中立者, 喩之不改, 置之度外則可, 必欲與之相從而無間, 則吾亦與之俱化矣, 此豈可以明明立言者乎?爲吳者, 非吳黨乎? 何可謂之不可一向相絶也? 大過小過之云, 失題矣, 不須論.絶者, 改過之云, 過, 豈有絶之之理? 絶之, 則必其過有不可改而成罪者矣.旣罪矣, 則服罪而後, 始可復容矣.其黨亦然.今皆不服, 而一則已爲復容, 一則欲爲書通, 何所據而然耶? 其柰與乙丑自製通文中語相反何?先師之意, 其於嶺黨數百人, 必不盡割其名, 何處得見其如是, 而曰旣如是也.此又一誣說, 可駭也.吾意使先師復起, 而震黨數百人, 一向遂罪, 則勿問害已.其始斯文之禍爲大, 豈可以多數, 而不盡割其名乎? 程子曰: "誅天下之賊, 殺戮雖多, 亦何害?" 吾亦曰: "討斯文之賊, 割絶雖多, 亦何害?"承望風旨云云條所論, 與本文之意, 相燕越, 更爲看詳, 如何?吾與子無不同之道, 固所望也.是以有謀耳, 謀之不行, 雖欲強同, 必不可得矣.第未知果能信及而脗然相合矣乎? 觀其擬與吳書中, 所謂"出認而推托先師", "校稿而變改文字", 兩件事, 丈以爲可容之罪乎? 則何以有前日之討也? 旣討矣, 則力能誅之則誅, 不能誅則亦當謹避震也, 亦能云爾.今何與書相通, 反貽震賊所竊笑也? 可笑又可恨也.及今猶可捄止, 則幸莫大矣.千萬更思, 復厲之戒焉. 비위를 맞춘다 원문의 '승망풍지(承望風旨)'는 풍지를 승망한다는 뜻으로, '승망'은 의중을 살피고 엿본다는 뜻이고, '풍지'는 풍도(風度)와 지의(旨意)로 상대방의 표정과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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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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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李愼軒 甲戌 천지의 그물망이 참으로 오늘의 형세이니 통곡하며 상심하는 것 또한 피차 똑같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인정이 크게 상심한 뒤라도 반드시 할 일이 있으니 만약 크게 하지 않으면 또한 반드시 크게 패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격동되어 지나친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한다면 크게 뒤흔들고 은밀히 박해할 근심이 생겨서 형세 상 반드시 멋대로 잡아 던진 뒤에 통쾌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칠정이 발동하는 것은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옛날에 가의가 입언하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 마침내는 크게 실망하여 목숨을 해침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비록 큰 실패는 아니더라도 또한 실패입니다. 이것 외에 다시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천지의 그물망을 다시 벗어날 수 없더라도 스스로 그 자리에 편안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 실험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크게 멀리하더라도 형세 상 반드시 이르는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기분은 이미 반절 정도 좋지 않습니다. 아래 문장을 보면 편당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러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 한 구절에서 더욱 절반 이상 기쁘지 않고 영남은 가까우니 몸소 가고 먼 곳은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일찍이 스스로 오래도록 한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른 때문만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첨에 대하여 묻지만 내가 어찌 사악한 덕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불행히도 이와 같으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영당의 일은 작은 것이고 스승을 속인 일은 큰 것이니 갑자기 이전에 성토를 제창한 일을 잊고 도둑놈에게 손해 볼 일을 열었으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당신은 큰일을 했다고 여깁니까? 큰 실패를 했다고 여깁니까? 이것은 지난 일일 뿐입니다. 앞으로의 낭패를 또한 어찌 이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과연 또 듣건대, 음성의 괴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화친을 강화하자고 청하였다고 하니, 또한 한 사람만 제거한다는 설과 다르거늘 반복하여 변설하여 불쌍함을 구걸하여 항복을 한 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뜻을 받들어서 올바른 사람들을 죽이고 적으로 삼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니 당신 자신이 결단코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자가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15)라고 말하였으니 또한 각각 자신의 뜻을 행할 뿐입니다. 이제 누누이 말한 것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무언가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자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나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아직도 다소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있습니다. 그대와 나는 참으로 음성 사람들에게 똑같이 그물에 잡히는 재앙이 있었으니 비록 부자의 성스러움으로도 오히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나를 따를 자를 생각하는 것을 그칠 수 없었으니 중인의 정으로 어찌 난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간절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당신의 진퇴는 참으로 사문의 영욕과 관련되어 있으니 평소의 한 마디 말이 합치하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바로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하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다하여 피하지 않았으니 장차 해로움으로 여기겠습니까? 이 말을 따르기를 청합니다. 아니면 또 생각할 만한 단서로 여기겠습니까? 원컨대 밝은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라니 침묵만 해서는 안 될 따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天羅地網, 固今日之形勢, 而痛哭傷心, 亦彼此之同情.然凡人之情, 大傷之餘, 必有事在, 若不大做, 亦必大敗, 何者? 激觸過越之情, 不自按住, 則震擾陰剝之之患生, 勢必縱橫挐擲, 而後快是知.凡厥七情之越發者, 必當加察也.昔賈生痛苦流涕於立談之間, 遂見卒至失望而戕生, 此雖不大敗, 而亦敗者也.外復何論? 蓋天羅地網, 則無復可脫矣, 而不能自安其位, 欲有所試, 則大做遠矣, 勢之所必至, 不言可知矣.吾意已自五分不佳.及觀下文, 有未知偏於黨而然歟.一節更覺七分不悅, 至有曰嶺欲近則躳往, 遠則書間, 不欲再看, 而未嘗不自歎久之, 非爲丈也.古人有言曰: "向來某問佞於我, 我豈有邪德耶?" 今日之事, 不幸近之, 眞可痛哭而傷心者.蓋影堂小, 誣師大, 遽忘前日之倡討, 遂開損盜之門, 事之至此, 丈自以爲大做歟? 以爲大敗歟? 此乃過往一事耳.前塗良貝, 又何可勝數? 果然又聞, 欲致書陰魁, 請與媾和, 則又異於除一人之說, 反覆變舌, 乞憐納降, 乃其常事, 承望風肯戕賊正類, 亦是次第事, 不可謂我決不爲此也.孔子曰: "道不同, 不相謀." 亦各行其志也.今此縷縷, 自他人觀之, 其不謂我何求者, 蓋將鮮矣.由我論之, 尚有多少不盡分之憾.蓋丈之與我, 實有同遭網打之禍於陰人者, 雖以夫子之聖焉, 猶思從我於陳蔡者, 不能已已, 中人之情, 安得不惓惓於同難之地乎? 且也丈之進退, 實關師門之榮辱, 又不可以尋常一言之不合而便可相忘也.故不避過度之嫌, 茲盡言不諱, 將以爲害已耶? 請從此辭矣.抑以爲亦有可思之端? 願賜明敎, 不可但於默默而已也.如何如何? 도가……않는다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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