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승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金允升 甲子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듯 천하의 마음과 천하의 문장도 하나로 똑같습니다. 이 마음으로 이 문장을 보고 이 이치를 궁구하여 똑같이 극치로 돌아간다면 마침내 서로 합치하지 못할 이치가 어찌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을 뿐이기 때문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힘을 헤아려 하라", "구애받지 말라"는 것과 형세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서찰 중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이며, 음성(陰城)의 죄를 감단한 것이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하여 끝까지 남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 답장에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고 답해주셨습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것은 천 명이 그렇게 여기고 만 명이 그렇게 여기어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진영(吳震泳)을 두터이 엄호하는 형의 입장으로는 당연히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하거나, 설령 조금 평가를 바꾼다 해도 또한 마땅히 "아마 혹 그럴 것 같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 명쾌하게 결단함이 한결같이 이런 수준에 이르러 이전 편지에 "선사를 무함한 죄를 억지로 자복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것과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을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이에 천하의 이치와 문장이 동일하고 시비의 공평함이 사람들 마음속의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지 않으면 절로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말이 사리에 맞는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여기서 그칠 수 있었는데, 마침내 다시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한다.",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굴레를 씌울 수 없다."는 등의 설로 화사첨족(畫蛇添足)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기서 또한 편사(偏私)를 극복하기 어려움과 앞서의 소견을 버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성을 엄호한다.'는 '호음(護陰)' 두 글자가 우리 형의 평생 고질병이 되어 곳곳에서 기회를 타고 일어남을 적이 한탄하는 바입니다.대저 말은 심성(心聲)이고, 글씨는 심획(心畫)입니다. 그러므로 고금 사람들의 성광(聖狂)과 선악(善惡)을 보고자 할 때는 오직 말과 글씨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만약 말과 글씨가 이와 같지만 마음은 이와 같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을 들어보면 사람이 어떻게 숨기리오."35)라는 가르침이 그릇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책에서 나타나고 조물주의 솜씨는 만물에 나타난다."는 설은 망령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는 것은 음성(陰城)의 글이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음성의 마음은 이미 궁구하여 말할 수 없으니, 우선 비록 마음을 따져서 죄를 용서하자고 말하더라도 혹 무의식인 잘못이었다고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가 있었다." 하였고, 두 번째로 송병진(宋秉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가 일찍이 인의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세 번째로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내게 명하여 힘을 헤아려 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네 번째로 자승(子乘 이병은(李炳殷))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매우 간절히 바른 말로 꾸짖고 정성으로 회유하여 그로 하여금 빨리 잘못을 고쳐 속히 돌아오도록 네 번이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오만하게 높은 자세로 앉아서 혹은 듣지 못한 척하며 한 해가 다하도록 답을 하지 않았고, 혹은 경쟁하는 습관이 있다고 꾸짖었으며, 혹은 내시의 불알이니 중의 상투니 하는 말로 조소하였고, 혹은 광천(狂泉)36)을 여럿이 마셨다고 욕을 해대었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설을 거듭 반복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에 더욱 힘을 썼으니, 천하의 고의적인 일이 끝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음성을 죄주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억지로 죄를 자복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음성을 엄호하는 고질병이 될 뿐만 아니라 혹 선사를 잊어버리는 큰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한 것에 대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왜의 달력을 함부로 비웃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발언을 너무 명쾌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형의 식견과 언론이 한때의 잘못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것이 그 유래가 매우 깊이니, 또한 괴이하게 여깁니다.근래에 조충현(趙忠顯)37)이 글을 지어 뭇사람들에게 호소하기를 "석농(石農)의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없다고 할 수 없고, 정재(靜齋)의 '유서(遺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여론의 분통과 공의(公議)의 성토를 받고 있습니다.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조충현의 "감히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비록 의심과 결론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멋대로 지어낸 것으로 성토하는 중론에 반대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형의 편지가 먼저 나왔고 조충현의 글이 뒤에 나왔다면, 혼자 앉아있었을 때에 명했다는 것은 진실이고 유서는 거짓이라는 흉악한 설을 우리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계도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장차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매 이미 두렵습니다.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 것은, 말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지만 말투 속에 억양이 너무 지나친 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랑캐의 정삭(正朔)을 사용한 김수홍(金壽弘)38)에 대해 꾸짖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족의 정을 끊게 한 것은 우암(尤菴)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수홍이 우암을 기롱하여 "남이 오랑캐의 정삭을 쓰는 것에 대해 조심하여 함부로 경멸하지 말라."고 했는데, 김수홍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자가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다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매 또한 놀라게 됩니다.대체로 보내준 편지의 전말을 모두 들어서 반복해 살펴보면,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한 구절 이외에는 모두 영남을 돕고 음성을 엄호한 것으로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의리를 상실하고 무함을 사실화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장본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에 "당인(黨人)을 논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우두머리가 어떠하고 쟁단의 일어나게 된 이유가 어떠한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과 "음성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고, 순재(舜在 성기운(成璣運))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고,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은 암암리에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우선 놔두고서 다만 무함 여부만 논했던 것은 문도와 관련된 것이냐 선사와 관련된 것이냐는 차이가 있고, 그만둘 수 있느냐 그만둘 수 없느냐는 같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형이 호남은 그르고 영남은 옳다 하여 무함한 죄까지 아울러 묻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감히 대략 사실을 진술하여 고명(高明)의 취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대저 처음에 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가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청간(清刊)하는 곳에서 인가를 힐난하였고, 세 번째는 음성을 성토하는 일에 의리를 제창했으니, 그 의리가 맑고 맑으며 말이 정당하고 정당한 자는 함재(涵齋) 김장(金丈)이니 진실로 호남 의론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경존(敬存)과 같은 자는 호남의 침묵으로 인하여 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온 자에 불과하니, 진실로 문망(文望)의 우열을 가지고 그 수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쟁단이 일어나게 된 이유 같은 것은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음성이 저에게 답한 편지에 상빈(傷貧)의 마음이 첫째이고, 뇌비(賂碑)의 유감이 둘째라고 하였는데, 형이 지적한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책을 간행하는 곳은 돈이 생겨나는 숲이 아니고, 정재(靜齋)도 평소 탐욕하다고 칭해지는 자가 아니니,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간행 장소를 다퉜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경존(敬存)이 뇌물을 주어 비문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뇌물을 받고서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입니까? 앞서 제창한 자가 있자 다시 이에 화답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이 글은 마땅히 삭제하고 다만 비(碑)를 강등하여 갈(碣)을 하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를 통해 최경존을 성토한 것이 아니라 실로 백대 뒤에도 우리 선사의 씻기 어려운 허물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문하의 제자가 감히 할 것이겠습니까? 스승의 문장을 돌아가신 뒤에 고치는 것은 변괴 중에 큰 것인데, 고칠 수 있고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법에 그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법을 미처 보지 못하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고쳤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선사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문하의 제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뇌비와 관련한 두 번째 유감은 최경존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유감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사에게 허물을 끼치고 선사를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경존의 잘못은 갈(碣)로 고치는 것을 경솔하게 허락한 날에 있었고, 예전의 비(碑)로 회복하고자 한 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동(玄洞)에서 발간한 것에 대해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시행한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호남의 침묵은 경존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현동에서 발간하는 일도 경존이 혼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청(完廳)의 해각(亥角)39)과 온 도의 동문들이 어찌 모두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암암리에 취하도록 해주었겠습니까? 만약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쟁단을 일으키는 혐의를 피하였다면, 외부의 방애가 없는 현동에서 발간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인가를 구걸한 영남의 일은 스승을 의리로 섬기며 허물을 고치는데 기탄이 없는 도리가 결단코 아니었으니, 큰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한 것은 원래 영남에 있었습니다. 3000원짜리 집을 주겠다는 감언에 원고가 갑자기 영남으로 넘어갔고, 600원 발간 비용을 마련한 의록(義錄)은 그 재물을 관장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일곱 성인은 모두 길을 잃었고40) 일만 대중은 눈이 없어서 스스로 여기기를 '병졸이 사적인 이익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장수의 원대한 계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원고를 출판하도록 유혹했다는 힐난이 전사인(田士仁)의 영남 편지에서 나왔고, 장재(掌財)를 가짜로 꾸몄다는 것이 탄로 나서 김정호(金楨鎬)가 그 액(厄)을 대신하였습니다. 처음에 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툼의 보루가 선명하게 솟아오른 것이니, 형세로 볼 때 반드시 닥치게 될 일이었습니다.완청(完廳)의 해각(亥角)은 "우리 인본(印本)만 유독 없겠는가. 인본이 없다면 경성에는 어찌 끝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라는 것은 오진영의 글에서 확고하게 말하였고, "하공(荷公 민영휘(閔泳徽))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성기운(成璣運)의 편지에서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꼭두각시의 본모습이 가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침묵해서 허락할 수 없었다."고 송병휘(宋秉徽)의 편지에서 드러나자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는 말은 깨짐을 면치 못하였고, "민장은 말이 없었다."고 조충현(趙忠顯)의 글이 나오자 "하공은 침묵하였다."는 것은 날조한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우리 형께서 "석농(石農)의 마음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다.'고 한 것은 과연 맑은 하늘의 백일과 같은 것이었으며, "순재(舜在)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다."고 한 것은 과연 빽빽한 그물을 사방에 둘러친 것이었으니, 정확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이 이에 대해 오히려 다시 말하기를 "다툼의 실마리는 호남에 있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성토하는 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라고 했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나는 우선 할 말이 없네만 인가와 침묵은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허(認許)'에 대해 '묵허(黙許)'라고 한 것은 저쪽에서 지어낸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하는데 저들은 알고서도 금지하지 않았으니, 나의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다만 침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실로 인가와 침묵을 동일하게 허락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청의 유무와 왜(倭)의 달력을 썼는지 여부는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찌 오십보백보로 개괄할 수 있겠습니까?당일에 허물의 있고 없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선사의 장례를 지낼 때에 그의 성모(誠慕)와 우리의 청초(淸楚)함에 대해서는 이미 들을 만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원고를 인쇄하는 것은 곧 전날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고, 지금의 도지사(道知事)는 곧 전날의 성모했던 해각(亥角)입니다. 그러니 장례를 지낼 때 방애가 없는 것과 함께 똑같이 일례로 삼아서 일찍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또한 임술년(1922) 겨울에 몸소 완청에 질문했던 자는 영백씨가 아니었습니까? 과연 하자가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영백씨가 먼저 알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금지하여 당일에 쓰지 말라고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형이 마침내 오늘에 뒤미처 비판을 한단 말입니까? 또한 하나의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형의 형제는 세상에서 원방(元方)과 계방(季方)41)처럼 우열을 다투기 어렵다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힘써서 첫 번째 의리로 삼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형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아우가 반드시 감히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뜻을 강행하여 어진 아우가 정성을 다해 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형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대저 선사를 무함한 것과 김용승(金容承)을 당(黨)으로 여긴 것은 그 죄에 경중이 있습니다. 만약 함장(涵丈)에게 진실로 김용승을 당으로 여긴 자취가 있다면 의당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살펴서는 안 되며, 하물며 김용승을 따라서 사우(師友)간으로 선사를 대하던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였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것은 7월 4일 대상(大喪)을 지낸 이후입니다. 날짜가 분명하고 마음의 자취도 선명한데, 영백씨는 어찌하여 선사를 무함한 음성 사람을 모두가 곡진하고 맹렬히 성토할 때 마음을 허여한단 말입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함재가 머리가 새하얗게 센 백수(白首)의 나이로 30살이나 아래인 정운한(鄭雲翰)의 부장(副將)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형이 영백씨게 고한 것에 정성을 다함이 있지 않아서입니까? 성토한 김모(金某) 무리의 중제(中弟)도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비록 스스로 말한 혐의가 있지만 의견을 다 펴서 말하지 않으면 도가 드러나지 않는 자리인지라 또한 감히 침묵하면서 도외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언급했을 뿐입니다. 天下之理一也,天下之心,天下之文,亦一同也.以此心見此文究此理,通歸于極致也,豈有終不相合之理乎? 惟其如是也,故請願自辱、料量不拘之勢不兩立,惡札中最緊節眼,而所以勘斷陰罪者,可謂斬釘截鐵,到頭無餘.而今承盛教,乃以"夫誰曰不然"答之."夫誰曰不然"者,豈非千人然之,萬人然之,無人不然之謂乎? 以兄護震之厚,宜其曰"未知其必然",雖使稍改品藻,且應曰"似或然矣".孰圖其明快斷決,一至於此,與前教"不可強服誣師之罪"者,若不出一人之口哉? 於是益信天下之理與文之一同,是非之公不外乎人心之所同然,而不如此自不得也.言之中倫,旣已若此,則斯可以止矣.乃復以"其心保無他意"、"不可勒以誣師"等說,添畫蛇之足,何哉? 於是又以知偏私之難克,已見之難舍,有如是矣.竊歎夫護陰二字,爲吾兄平生貞祟,而隨處闖發也.夫言者心聲也,筆者心畫也.故欲觀古今人之聖狂善惡,惟言與書是準.茍曰言書之如此,而心之不如此,"聽其言也,人焉廋哉"之訓謬矣,"人心著書,化工著物"之說妄矣.然則有罪者陰書而無他者,陰心旣是究說不得,且雖曰原心而恕罪,其或出於眚災也則哿矣.陰也則不然,一之而對靜齋言: "先師曾有認意." 再之而對宋氏秉眞言: "吾師曾有認意." 三之而答涵齋曰: "先師獨命料量爲之." 四之而答子乘曰: "先師嘗教不必深拘." 及夫正責誠喻,恳恳切切,俾改之速遄復者,累牘之四至也.則終是傲然高坐,或如不聞而終歲不答,或喝之以兢爭之習,或嘲之以宦睾僧髻,或罵之以狂泉衆飲.據其誣說之重複,自是之愈力,天下之怙,終未有加於此者.如此而謂罪陰者謂勒,則非獨爲護陰之貞祟,無或近於忘師之大故乎? 至以杏下之獨命,謂有無之未可知; 愼勿妄罵倭朔,謂勿發得太快.又怪夫兄之見識言論,非一時之差,其狐惑蠱食,所由來者深矣.近日趙忠顯爲文,呼於衆曰: "石農之獨命,不敢指以爲無; 靜齋之遺書者,不敢指以爲有." 方被輿情之駭痛,公議之討駁矣.兄之不知有無,趙之不敢謂無,雖有疑決之有間,其爲反對乎討以撰造之衆論,則一也.若使不幸而兄書先而趙文後,眞獨命僞遺書之凶說,謂非吾兄不知有無之語有以啟之,人將不信.念之到此,旣爲之凜然."發得太快"者,豈非言不悖理,而詞氣之間,抑揚太過之謂乎? 用虜朔之金壽弘,不但罵之,而教人滅親者,尤翁也.使壽弘而譏尤翁曰"愼勿妄滅人之虜朔",而恕壽弘者謂之"發得太快",則其果成說乎? 言之至此,又爲之駭然.蓋統舉來書首末而反覆之,"夫誰曰不然"一句外,無非右嶺護陰,而駸駸不覺喪義而實誣,此必有狐惑蠱食之本也.盛喻所謂"論黨人,先言其爲首者如何,爭端之所由起如何"及"陰城無所偏主,舜在周羅事機,敬存陰濟其私"者,果非此耶? 弟之姑閣湖嶺是非,但論其誣不誣者,以關門從關先師之有異,可已不可已之不同也.今見兄之非湖是嶺,而并與誣罪而不問,則安敢不略與陳質而俟明者之采棄乎?夫初不參於認議之席,再詰認於清刊之所,三倡義於討陰之役,其義之清乎清,其辭之正乎正者,涵齋金丈是已,實爲湖論之首也.如敬存者,不過因湖黙而不遠復者也,固不可以文望之優劣而易其首席.若爭端之所由起,則未知其何事.然陰城答鄙人書,傷貧之心一也,賂碑之憾二也,兄之所指,想亦不外乎此也.然刊所非生金之藪,靜丈非素號貪饕者,則欲求富而爭刊所,尺童之非可信,更不須說.至於謂敬存爲納賂而得文,則其受賂而作文者,誰也? 旣有唱之者,復有和之者,乃曰: "此文當拔,而但降碑爲碣." 此非以討崔,實所以證成先師難洗之累於百世也.是豈門弟之敢爲乎? 改師文於身後,變之大者,可改而不爲罪者,爲其證於國典也.國典未及目覩,而擅改無難,是豈有一分尊畏之心乎? 此又門弟之所不敢也.賂碑二憾,非獨崔之一人,乃千百人之所同然者,憾者何爲? 其累師輕師也.敬存之失,在於輕許改碣之日,不在欲復碑舊之日也.乃以玄刊,謂陰濟其私而設,湖之黙非出敬存之掌中,玄之刊非敬存之所獨也.完廳之亥角,一省之同門,豈皆陰濟敬存之私者歟? 若使敬存避濟私起爭之嫌,自外無礙之玄刊,同心乞認之嶺役,決非事師以義、改過勿憚之道也,有不爲罪之大者乎? 乃若潛釀爭端之根,元在乎嶺.三千圓家庄之甘言,稿忽踰嶺; 六百圓刊費之義錄,掌財有人.于斯時也,七聖皆迷,萬衆無目,自以爲兵不厭私將家之長算也.孰料其居無何,誑誘出稿之詰,出於田士仁之嶺書,假粧掌財之綻露,金楨鎬代其厄? 惟其始之潛釀爭根,故終之顯峙爭壘,勢所必至爾.完之亥角我印獨無! 印則未有,京豈終無? "分明是黙",據確於吳筆: "荷公(閔泳徽)擔黙",光增於成書.終無奈傀儡之本狀難掩.黙許不得,著於宋秉徽之書,而"分明是黙"不免見破; 閔丈無言,出於趙忠顯之筆,而"荷公擔默"歸於白撰.信乎吾兄所云"石農之心無偏主",果青天之白日也; "舜在之周羅事機",果密網之四匝也.吾兄於此尚復云"爭端之在湖,并不韙其討誣." 則亦復何哉? "我且忘言, 認與黙, 百步五十步之間",此又未然.對認許而曰黙許,自彼之所命名也.吾爲吾事而彼知之不禁,則自我言之,但可謂之黙,固不可謂認與黙同一許也.且申請之有無,彼朔之書否,不可同日而語也.烏得以百步五十步槩之哉? 若其當日瑕累之有無,雖不可知,然弟則以爲襄禮之時,彼之誠慕, 吾之清楚,旣有言足聽聞者.則今日之印稿,即前日之襄奉也; 今日之知事,即前日誠慕之亥角也.宜其與襄奉之無礙,同爲一例,而曾不致疑矣.且壬冬之躳質完廳者,非令伯氏乎? 果有瑕累乎? 則令伯氏當先知之,胡無一言禁止,使勿用於當日,而兄乃追譏於今日乎? 亦一可訝也.吾兄兄弟,世所稱元季方之難爲者.所自勉以爲第一義者,不以盡誠告其兄, 弟必不敢也; 硬行已志, 不聽賢弟盡誠之言,兄亦不爲也.夫誣師與黨金,罪有輕重,使涵丈實有黨金之跡,固不當舍重而察輕,况其從金師友處師未著之日也.絕金, 七月四日行祥之後也.月日斑斑,心跡昭昭,柰之何令伯氏之許心於誣師之陰人爾我相繾綣猛討? 夫絕金之涵齋, 以皓然白首, 不憚爲三十年少鄭雲翰之副將,無乃兄之所以告之者有未盡誠者歟? 所討金某輩中弟亦其一也.雖有自鳴之嫌, 不直不見之地,亦不敢隱黙而自外, 故此一及耳. 그 말을……숨기리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 上)〉에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고 눈동자를 살펴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기겠는가.[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광천(狂泉) 옛날 어느 나라에 광천(狂泉)이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미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남사(南史)》 조충현(趙忠顯) 자는 경서(景恕), 고종 병인년(1866)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양으로 주사를 지냈으며 평간공의 조견의 후손이며 청양에 거주하였다. 김수홍(金壽弘) 1601~1681. 자의 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와 청나라와 명나라 연호 사용 문제로 송시열과 반목하였다. 해각(亥角) 일본인 해각중장(亥角仲藏)으로, 1921년 8월 5일 ~ 1925년 8월 11일까지 2대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일곱……잃었고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의 "양성의 들판에 이르자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至於襄城之野, 七聖皆迷]"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길을 잃어 갈 곳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원방(元方)과 계방(季方) 진원방(陳元方)과 진계방(陳季方)은 형제인데, 둘 다 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원방은 형 노릇 하기가 어렵고, 계방도 동생 노릇 하기에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는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 난형난제(難兄難弟)는 누가 더 낫고 못함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를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