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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유재 소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昌裕齋蘇公墓碣銘【幷序】 옛날 간재 선사께서 완산에서 도를 강학하실 때 만재(晩齋) 소휘식(蘇輝植) 공이 있었는데, 선사께서 매우 즐겁게 그와 벗할 때 그 아들 열재(悅齋) 학규(學奎)가 따라왔었다. 만재공은 일찍이 진사에 장원하였으며 문장과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열재도 또한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지만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명성이 드높았다. 후에 다시 간옹을 스승으로 정하여 우리 유림의 큰 기대를 받았다. 내가 생각건대, 아들이 부친의 덕을 이어받아58) 남쪽 지방의 명문가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아마도 그 선대에 은덕과 인을 쌓아서 그 토대가 되는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근래 열재의 조부인 창유재 공의 가장을 얻어서 읽은 뒤에 감탄하면서 "그 원인이 있었도다! 이 분이 그것을 열어주었구나."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성술(星述) 자는 군삼(君三)으로, 순조 갑자년(1804) 7월 14일이 태어난 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충후(忠厚)하여 순수한 덕과 훌륭한 행실은 천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면 예절에 맞게 슬퍼하였다. 기일에는 스스로 희생과 반찬을 장만하면서 좋은 제수를 바쳐59) 제사를 돕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선조를 받든 것을 살펴보면, 고조 이하의 제전(祭田)과 묘소의 의물(儀物) 등을 홀로 수고하여60) 마련하였으며, 친척들의 힘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애하는 것을 보면, 담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거처하면서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나눴다. 과부가 된 누이를 위하여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그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하였다.친족 간에 화목한 것을 보면, 나이가 장성하여 가난한 자를 시집보내고 장가들였으며, 곤궁하여 재산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나눠주면서 살게 하였다. 흉년에 종친을 위한 진대(賑貸)를 만들어서 널리 진휼하였다. 벗을 대하는 것을 살펴보면, 베풀기를 좋아하여 인색하지 않았으며, 초상과 장례에 반드시 두텁게 부의하였다. 좋은 때 화창한 날이 되면 술을 차려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후진을 가르친 것을 살펴보면, 집의 살림을 다스릴 때부터 좋은 밭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경적(經籍)을 구해 보관하여 자손들의 학업에 대비하였다. 마을의 자제 가운데 가르칠 만한 자가 있으면 학비를 도와주고 권장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일흔여섯의 수를 누리다가 기묘년(1879) 8월 2일 돌아가시니, 전주 봉서산 아래 용흥리 북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오호라! 여러 가지 선이 공에게 갖추어졌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효도이다. 사림들은 공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61)을 지녔다고 하여 그 내용을 지방의 감영과 부(府)에 올렸으며, 상국 정범조(鄭範朝)가 도백으로 있을 때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행실이 삼가고 조심스럽다고 특별히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공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대저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근원이 있으면 흐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것 이외에 선조를 받들고 우애하고 화목한 것에서 벗을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까지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서 재물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요컨대 이러한 것은 모두 인후(仁厚)의 실제로 귀결되게 한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대개 공은 충효로 바탕을 삼았으니, 그러므로 실용에 드러난 것도 또한 두텁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두터우니, 그러므로 미루어서 행하는 것이 두텁지 않은 것이 없다. 《주역》에서 "곤의 두터움이 만물을 실음은 건의 끝없는 덕에 합한다."62)라 하였는데, 다만 땅이 두텁기 때문에 만물을 실으니, 사람이 두터우면 그 후손이 번창한 것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손이 양 대에 걸쳐 지금과 후대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마땅하며, 공의 어짊도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개 당시의 여론은 공이 능히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고63) 후손들에게 넉넉한 덕을 끼쳤다64)고 하였으니, 이에 자신의 집을 창유(昌裕)라고 호칭하는 것은 또한 공자가 말한 '기리는 바가 있으면 일찍이 시험하여 보았기 때문이다.'65)는 뜻을 얻은 것이다.소씨는 진주에서 나왔다. 고려 상호군 희철(希哲)이 시조가 된다. 소윤 천(遷)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만육(晩六) 최양(崔瀁)과 더불어 전주에서 자정(自靖)하였다. 대사간 곤암(困菴) 세량(世良)과 대제학 문정공(文靖公) 양곡(陽谷) 세양(世讓) 형제는 조선에서 현달하였다. 군수 련(連)은 을사사화 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주부 호선(好善), 도사 여형(汝衡)은 광해조 때 쫓겨났다. 이분들이 곤암의 아들, 손자, 증손이며, 공의 7대조 윗분들이다. 증조 덕소(德邵)는 효도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 원대(元大)는 학문이 뛰어났다. 부친 수광(洙廣)는 호가 담묵재(淡默齋)인데, 경학으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전주 이씨 경삼(景三)의 따님이다. 공의 어짊은 또한 먼 조상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있고 가까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교육 받은 것이 있으니 영지는 참으로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부인은 문화 유씨 기원(基源)의 따님으로, 단정하며 온순하고 매우 부지런하여 능히 남편을 도왔다. 무덤은 공의 묘소 서쪽 산록 골짜기 뒤에 있다. 아들로 장남은 휘식(輝植), 차남과 셋째는 휘정(輝楨), 휘백(輝栢)이다. 딸은 전의 이석관과 전주 최광욱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학규(學奎), 명규(命奎), 상규(祥奎), 승규(承奎), 장규(章奎)가 있는데, 명규는 출계(出系)하였다. 차남의 아들로 택규(宅奎)가 있다. 셋째의 아들로 명규가 후사로 들어왔다. 손녀와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나는 공에 대해 선대 인척(姻戚)의 정의(情誼)가 있다. 열재가 이 때문에 '일이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글을 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서 나에게 공의 묘소의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그 요구는 문장으로서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서 한 것이기에 감히 사양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능히 창대한다는 것은 《시경》의 말이고 克昌云詩후손에게 덕을 드리운 다는 건 《서경》의 말이네 垂裕稱書옛날 은나라와 주나라는 在昔殷周선이 쌓여 경사가 후손에 전해졌도다 善積慶餘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아 公得美質행실에 뭇 선을 갖추었으니 行備衆善정성으로 효도와 우애하여 孝友以誠억지로 힘쓰지 않았어라 不待强勉친척에게 화목하고 구휼하며 睦恤宗黨후진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니 獎學後輩그 전체를 총괄하자면 總厥全體오직 두터움[厚] 한 글자로다 惟厚一字이로써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함에 用此修齊옛날부터 이것을 법으로 삼았으니 古先是法집과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家國雖殊한 이치로 부합하기에 一理符合그 창성하고 넉넉함이 마땅하니 宜其昌裕《시경》, 《서경》의 말과 같도다 若詩書言만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如謂不信자손의 어짊을 보시라 視子孫賢아 세상 사람들아 嗟世之人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랴 胡不鑑玆빗돌에 새겨서 刻之貞珉후손에게 알리노라 庸詔有來 昔我艮翁先師, 講道完山也, 有晩齋蘇公輝植, 先師與之友甚歡, 曁其子悅齋學奎, 從焉.晩齋公, 曾魁進士, 以文章學識著當世.悅齋, 亦早年上庠而學益勤, 蔚有聲譽.後復定師艮翁, 爲吾林碩望.余惟父子濟美, 爲南服名家者, 夫豈偶然.意其先有積功累仁, 以爲基本者, 比得悅齋祖考昌裕齋公家狀讀之, 嘆曰 : "有以哉, 此其啓之." 公諱星述字君三, 純祖甲子七月十四日, 其生也.生而禀質忠厚, 淳德懿行, 蓋出天性.孝親, 則自幼愛敬, 長而忠養.有癠, 嘗糞祝天.遭艱, 哀毁如制.夫日, 自備牲羞, 獻賢助祭, 以爲常.奉先, 則高祖以下, 祭田墓儀, 獨賢勞營備, 不待族親之力.友于, 則隔墻聯居, 與同飢飽.爲寡姊築室居之, 撫其子如己出.睦族, 則年壯而貧者, 嫁娶之, 窮無資者, 分田爲其生.歉歲, 設宗賑而廣賙.待知舊, 則喜施不吝, 喪葬必厚賻.良辰佳日, 置酒會集, 和氣藹然.敎後進, 則自治家時, 不謀良田, 先求經籍藏之, 備子孫學業.鄕黨子弟可敎者, 亦資學費獎勸, 多成就者.壽七十六而卒于己卯八月二日, 葬于全州鳳棲山下龍興里北麓壬坐原.嗚呼! 衆善備於公, 而大焉者孝也.士林以公有終身慕, 幷呈于營府, 鄭相國範朝, 道伯時, 以孝友卓異, 操行謹飭, 別薦于朝, 益信公之行之孚人深也.夫孝, 爲百行之源.有源則有流, 固也.孝親以外, 如奉先友睦, 以至待友敎人, 盡己之心, 而樂用物力, 要皆歸於仁厚之實而後已.蓋公以忠孝爲質, 故其見諸用者, 亦厚也.事親者厚, 故推而無所不厚也.《易》曰 : "坤厚載物, 德合旡疆." 惟地厚焉, 故萬物載, 人之厚者, 其後昌, 亦類是爾, 宜乎公之子孫, 兩世幷著令聞於今與後, 而公之賢愈顯也.蓋當時輿論, 以公克昌門戶, 垂裕後昆, 號其齋以昌裕者, 其亦得聖人所譽有試之意矣.蘇氏, 出晉州.高麗上護軍希哲, 爲始祖.少尹遷, 師事圃隱鄭先生, 與晩六崔公瀁, 自靖于全州.至大司諫困菴世良、大提學文靖公陽谷世讓兄弟, 顯于本朝.郡守連, 乙巳禍罷退.主簿好善、都事汝衡, 光海朝見黜, 困菴子孫曾, 而公之七世以上也.曾祖德邵, 以孝著.祖元大, 有文學.考洙廣, 號淡默齋, 以經學聞.妣, 全州李氏景三女.公之賢, 又遠有所自, 近有擩染, 靈芝信有根矣.配, 文化柳氏基源女, 端順克勤, 克助君子, 葬在公墓西鹿洞後.男, 長輝植, 次輝楨、輝栢.女, 適全義李錫寬、全州崔光旭.長房男, 學奎、命奎出, 祥奎、承奎、章奎.次房男, 宅奎.三房系男, 命奎.孫女及曾玄以下, 不盡錄.余於公, 有先戚誼.悅齋以是, 謂'事同一家, 不必求他人文.' 俾余銘公墓.其求也, 不以文而以誼, 不敢辭.銘曰 : "克昌云詩, 垂裕稱書.在昔殷、周, 善積慶餘.公得美質, 行備衆善.孝友以誠, 不待强勉.睦恤宗黨, 獎學後輩.總厥全體, 惟厚一字.用此修齊, 古先是法.家國雖殊, 一理符合.宜其昌裕, 若詩書言.如謂不信, 視子孫賢.嗟世之人, 胡不鑑玆.刻之貞珉, 庸詔有來." 아들이……이어받아 '제미(世濟美)'는 원래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아들인 열재가 부친인 만재의 덕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좋은 제수를 바쳐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홀로 수고하여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홀로 제전과 묘의를 담당하였다는 의미이다.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 《맹자》 〈만장상(萬章上)〉에서 맹자는 "진정한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사모했던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 하였다. 《주역》에서……합한다 〈곤괘(坤卦)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능히…… 만들고 《시경(詩經)》 〈주송(周頌) 옹(雝)〉에서 "위로는 하늘을 편안케 하시고, 아래로는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셨다.〔燕及皇天, 克昌厥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후손을 가문으로 바꿔 사용하였다. 후손들에게……끼쳤다 후손에게 덕행을 많이 남겨 준다는 뜻으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보았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내가 남에 대해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송하겠는가. 만약 칭송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어서이다. 이 백성들은 삼대 시대에 정직한 도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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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松隱金公墓碣銘【幷序】 지난 80년 전 을축년(1865)에 부안 유생 백홍진(白洪鎭) 등 39명의 사람들이 현감에게 효자 김공 휘 서각(瑞珏)의 행실을 기록하여 추천하였다. 그 글에서 "이와 같은 지극한 행실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을해년(1965)에 전라도 유생 권우헌(權宇憲) 등 44명의 사람들이 또다시 도순사에게 천거하면서 '대단히 가상(嘉尙)하다'는 말을 하였다. 당시는 홍릉(洪陵, 고종)이 막 즉위하던 때라 공의(公議)가 아직까지는 존재하였으니, 유생들이 추천했던 문서와 글은 충분히 그 내용을 믿을 수 있다. 대개 공자가 대효(大孝)를 칭할 때 반드시 '덕은 성인'이라는 말66)로 본다면 이보다 아래인 효를 논할 때는 또한 마땅히 그 덕의 성취한 바를 따라 고하(高下)를 정하게 된다. 문서에서 기록한 바 '부모의 뜻과 존체를 봉양하고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지냈다.'는 것 이외에 또한 '《소학》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사물(四勿)과 삼성(三省)67)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는 말에 의거하여 그가 성취한 것을 따져보면, 어찌 충분히 학문을 한 군자가 되지 않겠는가. 이로서 논하자면, 공은 한 가지 선에만 치우친 효가 아니라 이에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68)라고 하겠다.공의 자는 인서(寅瑞) 호는 송은(松隱)으로, 계보는 고려 평장사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휘 구(坵)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고려 말 충신 고부군사 휘 광서(光敘)의 13대손이며, 조선 유일(遺逸)로 참봉에 뽑힌 죽계(竹溪) 선생 휘 굉(鋐)의 7대손이다.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된 휘 참(墋)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휘 시련(始鍊)과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휘 안택(安澤)이 그의 바로 위 삼대(三代)이다. 모친은 정부인에 추증된 동래 정씨 상철(相喆)의 따님이다.공은 정조 경신년(1800) 8월 5일에 태어나 여든의 수를 누려 통정의 직급이 더해졌으며 후에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승급되었으며 위로 삼대에 벼슬이 추증되었다. 홍릉(洪陵, 고종) 정축년(1877) 10월 17일에 돌아가셔서 명당리 왼쪽 산기슭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내는 정부인으로, 덕수 이씨 노직(魯直)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태석(泰錫)은 수를 누려 통정대부가 되었다. 홍석(泓錫)은 호가 송암(松菴)으로, 수를 누려 통정대부 좌승지가 되었다. 막내는 용석(庸錫)이다. 딸은 세 명인데, 해주 오윤방과 청주 한광섭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네 명으로, 영기(永基)는 큰 아들에서 나왔고, 영철(永喆)은 둘째 아들에서 나왔으며, 영규(永奎)와 영풍(永豊)은 셋째 아들에서 나왔다. 외손은 여섯 명으로, 종노(鐘魯), 화녀(和汝), 영숙(和淑), 종손(鐘遜)은 오 서방에서 나왔고, 규석(圭錫)과 규룡(圭龍)은 한 서방에서 나왔다. 증손을 들어보면, 낙요(洛堯), 낙순(洛舜), 낙우(洛禹)는 영기에서 나왔다. 낙종(洛鍾), 낙성(洛成), 낙호(洛鎬), 낙준(洛俊), 낙진(洛辰)은 영철에서 나왔다. 낙춘(洛春), 낙무(洛武), 낙상(洛祥)은 영규에서 나왔다. 낙인(洛仁), 낙철(洛哲), 낙근(洛根)은 영풍에서 나왔다.낙성과 낙춘이 나에게 비석에 새겨서 드러낼 묘도 문자를 부탁하였다. 공은 나의 고조와는 6촌 아우가 된다. 이미 공에 대해 익히 들었으며, 정의(情誼)상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하기에 마침내 명을 짓는다.태어나 남다른 자질을 지녔으니 生有異質참된 효가 하늘에서 내려졌구나 誠孝根天《소학》 한 책으로 小學一書평생 몸가짐을 하였으며 生平律身사물과 삼성으로 四勿三省증자와 안자를 자나 깨나 잊지 않고서 寤寐曾顔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부모를 섬길 때 事親生死오직 예를 따랐도다 惟禮是循집안에 아름다운 범절이 전해지니 家垂懿範조심하여 선조를 욕보이지 말라 戒勿辱先목이 마르듯 곤궁한 이를 구휼하니 周窮如渴인을 넓혀 타인에게 미쳤으며 推仁及人우아한 행동은 세상에 뛰어나 行誼超世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누나 人無間言이에 많은 선비들이 是爲多士공정하게 글을 지어 올렸으니 公正狀文빗돌에 옮겨 새겨서 移鑱于石천년토록 길이 고하노라 用詔千春 往在八十年前乙丑, 扶安儒生白洪鎭等三十九人, 狀薦孝子金公諱瑞珏于縣監.其題曰 : "似此至行, 可謂出類拔萃." 後十年乙亥, 全羅道儒生權宇憲等四十四人, 又薦于都巡使, 亦得極爲嘉尙之題.時在洪陵初服, 公議猶在, 是狀是題, 足爲信筆.蓋觀乎孔子稱大孝, 必以德爲聖人, 則下此而論孝, 亦當隨其德之所就而定高下也.據狀所書, '志體之養, 葬祭以禮'之外, 有'《小學》律己四勿三省爲己任'之語, 究其所就, 豈不足爲學問中君子人乎.以是論之, 公非一善之偏孝, 乃成身之全孝也.公字寅瑞號松隱, 系出高麗平章事文貞公止浦先生諱坵之後, 麗末忠臣古阜郡事諱光敘之十三世孫, 本朝逸選叅奉竹溪先生諱鋐之七世孫.贈通訓大夫司僕寺正諱墋,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諱始鍊, 贈嘉善大夫戶曹參判諱安澤, 其三世也.妣, 贈貞夫人, 東萊鄭氏相喆女.公, 生以正廟庚申八月五日, 壽八十, 加通政階, 後陞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追贈三世, 卒于洪陵丁丑十月十七日, 葬于明堂里左麓卯坐原.配, 貞夫人, 德水李氏魯直女.男三人, 泰錫壽通政.泓錫號松菴壽通政左承旨.庸錫.女三人, 海州吳潤邦、淸州韓光變.孫四人, 永基長房出, 永喆次房出, 永奎、永豊三房出.外孫六人, 鐘魯、和汝、和淑、鐘遜, 吳出.圭錫、圭龍, 韓出.曾孫, 洛堯、洛舜、洛禹, 永基出.洛鍾、洛成、洛鎬、洛俊、洛辰, 永喆出.洛春、洛武、洛祥, 永奎出.洛仁、洛哲、洛根, 永豊出.洛成、洛春, 屬澤述以墓道顯刻之文.公於我高祖, 爲六從弟行, 旣稔聞, 誼當爲役, 遂爲之銘曰 : "生有異質, 誠孝根天.《小學》一書, 生平律身.四勿三省, 寤寐曾顔.事親生死, 惟禮是循.家垂懿範, 戒勿辱先.周窮如渴, 推仁及人.行誼超世, 人無間言.是爲多士, 公正狀文.移鑱于石, 用詔千春." 공자가……말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공자가 이르기를 "순은 위대한 효자이셨도다. 덕은 성인이시고, 존귀함은 천자이시고, 부유하기로는 사해 안을 다 소유하시어, 오래도록 종묘의 향사를 받으시고, 자손이 오래도록 보호를 받게 되었느니라.[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라 하였다. 사물(四勿)과 삼성(三省) 사물(四勿)은 안자(顔子)의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지 말라는 것을 가리키고, 삼성(三省)은 증자가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실되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벗과 사귀는데 믿음이 없지는 않았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등을 가리킨다.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 《공자가어》에서 공자가 애공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인인(仁人)은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고 효자는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인인이 어버이를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게 하며 하늘을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게 합니다. 이 때문에 효자는 자기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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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고 한 말에서의 성은 기질지성(氣質之性)입니다. 기질지성이 비록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 것은 바로 그 기질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따라 그러한 것이니 이 또한 기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장의 주(註)에서는 단지 기질만을 말하고 '성(性)' 자는 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80)고 한 것입니다.율곡(栗谷)이 만약 당초에 품수한 기질만 말했을 뿐이라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지금 기질지성이 발용(發用)하는 데 나타난 것을 가지고 품수할 때를 기준으로 앞서 말한다면 진실로 처리할 수 없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마도 율옹(栗翁)의 뜻은 각기 다른 성은 본래 발용한 뒤의 일이고 각기 다르게 된 까닭은 당초에 이러한 기질을 품수하였으므로 발용함에 미쳐서 이러한 기질지성이 된 때문인 것인 듯합니다. 이는 '당초에 품수한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다'라고 할 때의 성과 같고, 당초에 하늘에서 품수한 기질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품수한 것은 단지 기질일 뿐이라는 뜻이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약 이처럼 융통성 있게 보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기품(氣稟)이 달라 서로 다른 성을 품수하였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사람과 동물이 품수하여 성이 된 것은 바로 하늘의 명(命)이고 천명(天命)은 하나의 근본인데 지금 사람마다 다른 성을 받고, 동물마다 다른 성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천명이라는 것은 장차 본령(本領)이 천만 개로 나뉘어 자잘하기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태극(太極)의 용(用)은 원래 다름이 있어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서로 다르게 되는 근본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태극이라는 것은 본래 진실(眞實)하여 거짓이 없고 체(體)와 용(用)이 하나의 근원인지라 만물의 뿌리가 되는 것인데 지금 그 용(用)이 갖가지로 달라 기질지성이 다르게 되는 근본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 이미 치우친 태극(偏太極)과 온전한 태극(全太極), 아름다운 태극(美太極)과 추악한 태극(惡太極)이 있는 것이니 이러한 태극이 어찌 족히 만물의 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性相近之性, 是氣質性. 氣質性雖曰不外乎本然性, 然其人人而自爲一性者, 乃隨其氣質之剛柔緩急而然也, 是亦氣質而已. 故下章註, 只言氣質而不著'性'字, 此正張子所謂'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也.栗谷若只言當初禀受氣質而已, 則夫孰敢疑之? 今以氣質性之見於發用者, 早言於禀受時, 誠有區處不得之慮矣. 然竊恐栗翁之意, 以各異之性, 固發用以後事, 而其所以各異者, 以其當初稟如此之氣質, 故及其發用而爲如此之氣質性也. 此如曰隨當初稟受氣質, 而自爲一性之性也, 非謂氣質之性, 當初禀受於天也. 然則其當初禀受者, 只氣質而已之意, 瞭然在其中矣.若不如此活絡看, 而以爲人物異氣稟, 受異性, 則人物之所受而爲性者, 卽在天之命也. 天命者一本也, 今曰人人而受異性, 物物而受異性, 所謂天命者, 將千萬本領, 而不勝細碎矣. 又以爲太極之用, 元自有殊而爲人物氣質性異之本, 則太極者, 眞實無妄而體用一源, 所以爲萬物之根柢也, 今曰其用萬殊, 而爲氣質性異之本, 是在天已有偏太極全太極美太極惡太極, 烏足爲萬物之根柢乎? 장자(張子)가……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가 있게 된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2 〈위학(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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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선비(先妣)의 가장(家狀)에 제발(題跋)을 지어 주신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제 목숨을 다하여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선비(先妣)의 아름다운 행실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선생님의 성대한 덕이 남의 선행을 즐겨 말하셔서일 것입니다. 아! 저의 어버이는 효경(孝敬)과 인선(仁善)의 덕이 있으셨지만 불행히도 장수와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하고 궁핍한 삶에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말씀과 아름다운 행적이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의 글을 얻어 영원토록 불후하게 되었으니 비록 한이 없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이 있고 없는 사이에서 저는 장차 어떤 마음을 품어야겠는지요? 오직 도를 밝히고 몸을 깨끗이 하여, 안으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실질을 갖추고 밖으로는 성현(聖賢)의 학문을 계승한다면 어찌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이제 이후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더욱 궁구하고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힘써서 도가 밝아지고 몸이 깨끗해지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감히 태만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이 때문에 근년 들어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사무칠수록 구렁에 시체로 뒹굴겠다는 조수(操守)는 더욱 굳건해지고 분서갱유(焚書坑儒) 같은 재앙이 박두할수록 머리를 잃겠다는 지조(志操)는 더욱 굳세집니다.81) 이는 감히 말만 잘하여 선생님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차마 더없이 소중한 유체(遺體 어버이가 남긴 몸)를 더럽고 욕된 지경에 빠뜨리지 못해서입니다. 이런 의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만날 일을 기다렸다가 대처할 뿐입니다. 다만 일상에서 말하고 행할 때에 마땅히 강구(講究)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눈만 뜨면 바로 잘못 보고 걸음만 옮기면 번번이 발을 헛디뎌서 심중(心中)에 위태롭고 불안한 생각이 많고 안정되고 여유로운 의취(意趣)가 적음을 느낍니다. 무릇 이렇게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의 엉성한 일들조차도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천하의 위대한 사업(事業)을 세우겠습니까?아! 만약 이 일에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더욱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면서도 더욱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심력(心力)을 열심히 써서 분비(憤悱)82)를 이기지 못하는데 끝내 스승을 받들고 어버이를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스승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로 여겨 살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긴요하지 않은 외람된 말로 여겨 버리시겠습니까? 선비(先妣)의 행록에 '집안의 부녀(婦女)를 가르친다[敎內眷]'는 교훈이 있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이에 언해(諺解)를 올립니다만, 말이 비속(卑俗)하고 전아(典雅)하지 않아 부끄럽고 송구할 뿐입니다. 先妣家狀蒙賜題跋, 恩出不圖, 隕首莫報. 此蓋先妣之懿行, 有以感夫人心, 而先生之盛德, 有以樂道人善也. 鳴呼! 小子之二親有孝敬仁善之德, 不幸而不壽祿, 窮約困瘁而終, 此固可恨矣. 然嘉言美蹟, 幸而得先生筆, 而不朽千載, 雖謂之無恨, 可也. 然則有恨無恨之間, 小子將何以爲心? 惟有明道淑身, 內有立揚之實, 外紹賢聖之學, 豈非少報師親之恩者乎? 從玆以往, 益究其所未知, 益勉其所未能, 誓到明淑之地, 而不敢怠也. 是故比年來凍餓切膚, 而溝壑之操愈堅, 焚坑迫頭而喪元之志愈勵, 非敢能言以欺先生. 實不忍以莫重之遺體, 置諸汙辱之地也. 此箇義諦, 旣已知之, 第俟前頭所值而處之. 但日間云爲之際, 所當講究而踐行者, 開眼便錯見, 擧步輒失足, 覺得心中杌楻不安之意多, 妥帖自在之趣少. 凡此日用粗跡易知易行者, 尙如此, 將何以窮天下之至理, 建天下之大業乎? 噫! 苟無志於此事則已, 其欲益加意, 而益不能者, 何也? 小子以此, 煞用心力, 而不勝憤悱, 懼終無以承師而顯親, 敢以不隱乎皐比之下, 不審先生以爲由中之出而察之乎? 抑以爲不緊猥言而棄之乎? 先妣行錄, 至有'敎內眷'之訓, 尤切感激, 茲諺翻呈上, 而但詞語俚俗不雅是爲愧悚. 추위와……굳세집니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자가 이르기를 '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분비(憤悱) 분(憤)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통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고, 비(悱)는 입으로 말을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논어(論語)》〈술이(述而)〉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입으로 말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거니와,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로써 세 귀퉁이를 유추해서 알지 못하면 다시 더 말해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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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요즘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근래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바다 가운데는 추위가 더욱 심한데 잠자리와 음식 및 제반의 일들은 손실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계화도를 바라 볼 때 마다 마치 책상을 대하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종기로 인한 고통과 저의 혹독한 재앙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진흙을 바른 조그만 여막집에 칩거하면서 하는 일은 없는데 다만 몸이 상중에 있어 실상이 없을까 두려워 항상 마음속으로 반성하면서 "네가 슬픔이 마르고 격식이 모자라서 예(禮)가 부족한 것인가? 이것은 부친을 생각하는 마음에 태만한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큰 것에 해당합니다. 네가 진정을 숨기고 형식을 갖추어 명예를 구하는가? 이것은 부친을 속이는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더욱 큰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니, 다소 득력처(得力處)가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거상(居喪)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 마음을 보존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분을 따르고 욕심에 이끌려서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위천(違天)이라 부르고, 구차하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명예를 구하는 것은 기천(欺天)이라고 부르니, 위천과 기천의 죄는 모두 이 몸을 성실히 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단지 하나의 성(誠)을 세울 수 있다면, 어렵지 않고 우활(迂闊)하지 않은 길이 눈앞에 있어 따라갈 수 있고, 마음 편히 날마다 쉴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대학》에서 말한 성의(誠意)이고,《맹자》가 말한 사성(思誠)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익혀서 암송한 것이지만, 일찍이 하루도 여기에 대해 실제로 힘을 쓴 적이 없어서 구체적인 일로써 행동하는 공력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후로는 성(誠)이라는 한 글자를 공부하는 칼자루로 삼고서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에 따라서 노력한다면 거의 위천과 기천으로 귀착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가 선생께서 제가 마음을 보존하고 행실을 다스리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 어긋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통렬하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근래에 《주례(周禮)》한 부(部)를 읽다가 그 육관(六官)의 소속 직책들이 〈주관(周官)〉의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83)의 관장(管掌)으로 기준해 보면 대부분 혼란스러워 차서(次序)를 잃어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선유(先儒)들이 혹 주공(周公)의 경(經)이 아니라고 의심하거나 혹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책이라고 여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손지(方遜志)가 이른바 제후들이 자신들에게 해가 됨을 미워하여 그 전적을 없애버리고 난 나머지에서 나와 한대(漢代)의 유자(儒者)가 보충한 데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의론인 듯합니다. 그가 편차(編次)를 고증한 목록은〈주관(周官)〉에 증험해 보면 딱딱 맞아서 믿을 만합니다. 다만 서문(序文)에서 그 대략만 논했을 뿐 미처 모든 직책을 다 열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분직(分職)하고 분류한 것에도 간혹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간에 제가 그 범례를 신중히 따라 육관(六官)의 모든 직책을 다 들어 다시 편차를 고증하여 한 두 가지 의심스러운 것을 고쳐 이미 편목(篇目)을 완성하였기에 고친 차례의 편목에 의거하여 한 본을 필사하고 다시 그 뒤에 논설(論說)을 붙여 동지들에게 질정(質正)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천박한 견해와 망령된 의론이 한갓 경서를 어지럽혔다는 비난만 받을까 두려운 데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比天大雪, 近年所無. 海中寒冱益劇, 不審寢膳諸節無或見損否. 每陟廬後小堆, 遙望華嶹, 若對案然. 念先生之癃疾, 痛小子之酷禍, 時有泣下而不覺也. 蟄伏堊廬, 無所猷業, 但身在執喪, 懼其無實, 常自省于中曰: "爾有歇哀缺文, 以闕禮矣乎? 是則怠親也, 不誠之大者也爾. 有矯情飾文, 以要名矣乎? 是則欺親也, 不誠之尤者也." 以此二者自勉, 庶求無愧於心, 覺有多少得力處. 因思非但居憂一事爲然也, 凡吾人之日間, 存心處事, 任氣牽欲, 不循義理者, 其名曰違天, 苟難悅人, 以干名譽者, 其名曰欺天, 違天欺天之罪, 均在不誠其身. 但能立得一箇誠, 則自有不艱不迂之途在前可由, 而見心逸日休之效, 此則大學之誠意, 孟子之思誠是也. 是固前日之所講誦, 而未嘗一日實用力於此者, 以未曾有因事省發之功也. 竊欲從茲以往, 將一誠字作用工之欛柄, 若其識所未逮者, 固無如之何, 而但於已知處, 隨事努力, 庶免違天欺天之歸也. 伏乞先生細察於宅心制行之間, 指摘其慝, 而痛加糾正也.近讀《周禮》一部, 而見其六官諸屬之職, 凖之以〈周官〉治敎禮政禁土之掌, 多紛紜失序. 先儒之或疑非周公之經, 或以爲未成之書, 良以是也. 而方遜志所謂'出於諸侯惡去之餘, 而成於漢儒之所補'者, 恐確論也. 其所考次目錄, 證之〈周官〉, 鑿鑿可信. 但論其大略於序文, 而未及悉擧諸職. 且分職從類之閒, 猶或有可疑者. 故間嘗謹遵其例, 悉擧六官諸職, 更爲考次, 而改動其一二可疑者, 已成篇目, 欲依更次篇目, 寫去一本, 復着論說於其後, 以質同志. 但恐陋見妄論, 徒取亂經之譏, 且非目下之急務, 故不敢率爾耳.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 《주례(周禮)》의 여러 주석서를 보면 '금(禁)·토(土)'는 '형(刑)·사(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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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보낸 편지에서 성은 기의 성이요, 기는 성의 기라는 두 구절에 대해서 저는 아마 선생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기질이 갖추고 있는 성리이고, 기라는 것은 성리를 싣고 있는 기질입니다. 이와 같다면 리에 장애가 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리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도 말이 더욱 절실할 것이니, 어찌 감히 이전의 현인이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천(정이)의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한 구를 전적으로 성의 기를 말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마도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생지위성을 풀이한 것입니다. 생지위성과 천명지위성을 대비해보면 생지위성은 기질지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품부 받았다는 것은 또 아래 문장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성의 기라고 운운하였으니, 이는 다만 아직 병통에 이르지 않은 이 성이 실려 있는 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병통이 없는 성의 기로써 가지런하지 않은 품수를 해석한다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사람의 성(性)은 순수(純粹)하고 지선(至善)하여 애초에 한 점의 하자도 없습니다. 기질(氣質)이 구속하고 물욕이 가리우게 되면 이 성은 이로 인하여 함몰되고 손상됩니다. 그러나 그 함몰되고 손상된 것은 기욕(氣欲)이지 성이 아닙니다. 다만 기욕에 가로막혀 순선한 본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함몰되고 손상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지극히 밝은 해와 지극히 맑은 물이 구름과 안개에 가리고 모래와 진흙에 뒤섞여 밝고 맑은 체(體)가 이 때문에 혼탁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혼탁해진 것은 구름과 진흙이지 해와 물이 아닙니다. 다만 구름과 진흙에 구애되어 밝고 맑은 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탁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54) 함몰되고 손상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선한 리는 끝내 기욕이 더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함몰되고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그 본체(本體)는 본래 그대로 있습니다. 下示性者, 氣之性, 氣者, 性之氣二句, 竊恐先生之意. 蓋曰性者, 氣質所具之性理也, 氣者, 性理所載之氣質也. 如此則不惟無礙於理也, 其於理氣不相離之妙, 說得尤切, 豈敢以前賢之不言有所疑貳也. 但以伊川止訓所禀受一句, 專說性之氣, 則恐合更商. 蓋止訓所禀受, 是正釋生之謂性者. 而生之謂性與天命之性對擧, 則其以氣質性言者, 可知也. 然則其所禀受者, 又非下文剛柔緩急之謂乎? 今此性之氣之云, 是但謂此性所載之氣未及乎病痛者也. 以無病之性之氣, 釋不齊之所禀受, 似不相稱, 未知如何?人之性, 純粹至善, 初無一點之疵. 及其氣質拘之, 物欲蔽之, 此性以之汨亂鑿喪矣. 然其所汨鑿者, 氣欲也, 非性也. 特爲氣欲之障, 而不見純善之體. 故謂之汨鑿也. 譬如至明之日, 至淸之水, 爲雲霧之掩, 沙泥之混, 明淸之體, 以之昏濁矣. 然其所昏濁者, 雲泥也, 非日水也. 特爲雲泥之礙, 而不見明淸之體, 故謂之昏濁也. 蓋性不能制氣欲, 而使之聽命. 故有汨鑿之累. 然其純善之理, 終非氣欲之所可汙衊者. 故雖曰汨鑿, 而其本體固自若也. 성은……때문에 주자의 성리학에서 性과 理는 철저하게 無爲의 실체이며 원리이다. 간재는 주자의 이러한 성리의 특성을 계승하여 리는 無爲하고 기는 有爲하다고 한다. 주자와 간재에 있어 성과 리는 역동성과 활동성이 없는 원리와 실체일 뿐이다. 性과 理는 心이라는 지각작용과 格物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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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저는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길을 힘들게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옛 병이 아직 사라지지 않던 차에 새로운 근심이 함께 일어납니다. 노인은 병상에 누워 있고 어린 자식들은 괴로이 울어대어 온 집안에 근심이 밀려들어 아득히 끝이 없습니다. 이에 더하여 사나운 호랑이는 밖에서 잡아먹으려 하고, 궁핍한 귀신은 안에서 멋대로 구니, 우환(憂患)이 극에 달해 유소(有所)의 병55)이 날 지경입니다. 늘 기쁜 정신을 기르고 즐거운 곳을 홀로 찾는다는 말[常養喜神, 獨尋樂處]56)을 외울 때마다 기를 만한 때가 없고, 찾을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그저 스스로 마음속으로 번뇌하였습니다. 이에 한 걸음 내딛어 천천히 생각하고서야 비로소 명수(命數)는 피할 수 없고 겪는 일을 편안히 여길 것과 밖에서 온 것이 매우 가볍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심지(心地)가 청정해지고 일이 없어 유소의 병이 족히 근심거리가 되지 않아서 기쁜 정신을 비로소 기를 수 있고, 즐거운 곳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요사이 힘쓰면서 터득한 것이기 때문에 공손히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제가 스스로 이룩한 것이겠습니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예전부터 줄곧 문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니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율곡(이이) 선생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중에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57)이라는 두 구절의 말은 정확한 의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암선생의 사단칠정(四端七情說) 논변은 의심이 드는 곳이 있어 논해보았지만, 진실로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기품에는 비록 청탁의 같지 않음이 있지만, 그 근본은 본래 맑았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천지는 음양이라는 두 기의 순환이니, 처음에는 약간의 혼탁함도 있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기가 분란해지자 어둠과 밝음이 일정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이 이 떠도는 기(氣)를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품수 받은 기도 청탁이 같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떠도는 기의 본원은 음양이라는 두 기의 지극히 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기의 처음엔 맑은 것만 있고 흐린 것은 없다는 질문을 인정했습니다.《맹자혹문》에서 또 "사람이 저녁에 휴식을 하면 그 기가 다시 청명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추론해보면, 사람의 기질은 본디 맑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맑았다고 할지라도 구르고 막히며 뒤집어지게 되어 운행이 뒤섞여 버리면 청탁이 발하는 것이 각각 다르게 되어 선과 악의 구분이 생기게 됩니다.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리(理)를 따라서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리(理)를 따르지 않고 발한 것입니다. 성인의 기(氣)는 지극히 맑아 탁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발한 것이 모두 선하여 처음부터 한 터럭의 악한 것도 없습니다. 중인(中人) 이상의 기(氣)는 맑은 것이 많고 탁한 것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많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적습니다. 중인 이하의 기는 탁기가 많고 청기가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적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많습니다. 매우 완고한 자는 간혹 한 점의 선정을 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지극히 탁한 기운도 삽시간에 맑아져서 본원을 회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58)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은 저 탁한 것을 바꾸어 저 맑은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을 한결같이 선에 두고서 악함을 없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곡의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보통사람이라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없으니, 청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천리(天理)가 성(性)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느낌에 따라 바로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완고한 사람이라도 남이 자기 아버지를 해치는 것을 보면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데, 이때 탁기가 가득 차게 되지만 이는 천성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이 발출되면, 탁기가 발한 것이라도 또한 선정이 있다고 말합니다.59) 그렇다면 비록 발한 기가 탁하다고 할지라도 타고 있는 리는 곧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걸어가고 있는 말이 갑자기 달린다고 하더라도 타고 있는 사람은 홀로 편안하게 앉자 있을 수 있습니다. 천하(天下)의 리(理)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건대, 농암은 다만 선악의 정을 모두 기에 돌리고서 리의 실체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리가 공허히 주재함이 없는 적이 없고, 기(氣) 또한 리(理)에게 명을 듣는다는 등의 설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혹 확대되어 크게 잘못된 학설이 후대에 한 번 전해져 리가 참으로 주재할 수 있고 리가 그 기를 관섭(管攝 관할하고 통섭함) 할 수 있다는 설이 있게 되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60) 율옹(이이)은 "정(情)의 선한 것은 청명의 기를 타서 천리를 따라 곧바로 나왔고, 정(情)의 악한 것은 비록 또한 리에 근본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럽고 혼탁한 기에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농암처럼 악의 정을 리에 두지 않고 모두 기에 돌리는 것입니까?농암(農巖)은 북계(北溪) 진순(陳淳)의 능연(能然), 필연(必然), 당연(當然), 자연(自然)의 말을 인용하여 리(理)가 주재(主宰)함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61) 그러나 '필(必)' 자, '당(當)' 자, '자(自)' 자에는 애초에 주재한다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능(能)' 자가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데, 그 본문에 '안에 이 리(理)가 있은 뒤에 밖으로 드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다'62)는 말을 살펴보면 '능' 자는 마땅히 구체적인 일에 소속시켜야 할 듯합니다.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各一其性]'는 말은 다만 천지의 조화(造化)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도구와 오행(五行)의 순선(純善)한 성(性)을 말한 것일 뿐이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자는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答徐子融書]〉에서 도리어 이 설을 인용하여 사람과 동물은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을 이루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정씨(鄭氏 정세영)와 박씨(朴氏 박창현) 등의 사람들이 인용하여 그들의 증거로 삼는 일을 초래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삼가 제가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의 본뜻을 살펴보니, 서자융은 동물에는 단지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은 없다고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지만 이렇게 같지 않은 점은 바로 본연지성이 그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이 된 것이지 본연지성 밖에 별도로 기질지성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대개 이 기질지성은 아마도 물은 차갑고 불은 뜨거우며,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부드러우며, 말은 달리고 소는 밭을 가는 것이 본연(本然)을 해치지 않음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지 돌연히 사람의 혼명(昏明)과 동물의 순악(馴惡)을 언급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주자(周子)의 이 설을 인용하여 단지 '각일(各一)'의 뜻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읽는 자들은 글을 가지고 본뜻을 곡해(曲解)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小子風天雪程, 閒關歸家, 而舊患未消, 新憂幷興. 老人委牀, 稚子呌苦, 滿室澒洞, 渺無際涯. 加之以猛虎食其外, 窮鬼肆乎內, 憂患之極, 幾成有所之病. 每誦'常養喜神, 獨尋樂處'之語, 歎其無時可養, 無處可尋, 徒自懊惱乎方寸也. 於是放下一步, 緩緩地思量, 乃知命數之莫逃, 而所過之可安, 外至者之甚輕, 而固有者之甚重, 便覺心地淸淨無事, 有所之病, 不足爲慮, 而喜神於是乎可養, 樂處於是乎可尋矣. 此小子近日用力而有得者, 故拜上逹. 然此豈小子之所自致者哉? 原其所自, 莫非向來親炙門下之力也, 何感何幸?栗谷先生, 人心道心說中, 善者淸氣之發, 惡者濁氣之發二句, 竊以爲的確之論. 農嚴四七辨, 不免疑而論之, 誠所未喻也. 人之氣禀, 雖有淸濁之不一, 卽其本淸而已. 何以知其然也? 天地二氣之循環, 初未嘗有一半分濁. 及其游氣之紛擾也, 乃有晦明之不常, 而人得是游氣而生, 故所禀之氣, 亦有淸濁之不齊. 然游氣之本, 又是二氣之至淸者也. 故朱子旣許氣之始有淸無濁之問. 孟子或問, 又曰: "人暮夜休息, 則其氣復淸明." 以此推之, 人之氣質, 本淸可知也. 雖然滾汨騰倒, 運行交錯, 則淸濁之發, 各殊而善惡之分生焉. 善者淸氣之循理而發者也, 惡者濁氣之不循理而發者也. 聖人之氣, 至淸無濁, 故其發皆善, 而初無一毫之惡. 中人以上之氣, 多淸少濁.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多,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少. 中人以下之氣, 多濁少淸.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少,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多. 至於冥頑之甚者, 或有一點善情之發者. 其至濁之氣, 亦霎時淸而復其本也. 是故人之爲學, 所以易其濁而反其淸. 使吾心之發一於善而無惡. 是所謂變化氣質也. 此乃栗翁之意然也. 若曰常人之見孺子入井, 無不惻隱之際, 不待淸氣, 而天理根性者, 隨感辄發. 冥頑之人見人害其親, 思欲仇之之時, 濁氣充塞而天性最重故. 眞心發出則是濁氣之發, 亦有善情之謂也. 然則雖謂之所發之氣, 雖濁而所乗之理, 直出可也. 雖謂之所行之馬雖逸, 而所乗之人, 獨安亦可也. 天下之理, 安有如此哉? 竊念農巖之意, 直恐以善惡之情, 一歸之氣, 而無以見理之實體. 故乃以理未嘗漫無主宰, 氣亦聽命於理等說, 到底發明. 然若或推之, 大過一傳, 而有理能眞有主宰, 理能管攝其氣之說, 則如之奈何? 且栗翁固亦曰: "情之善者, 乘淸明之氣, 循天理而直出, 情之惡者雖亦本乎理, 而爲汙濁之氣所掩." 此何嘗以善惡之情, 不本之理, 而一歸之氣, 如農巖之所慮乎?農巖引陳北溪能然必然當然自然之語, 爲理有主宰之語. 然'必'字'當'字'自'字, 初未見有主宰底意. 惟'能'字最難區處, 而詳其本文'中有是理然後, 能形諸外, 爲是事'之語, 則'能'字似當屬事上看.周子'各一其性', 只言造化發育之具五行純善之性, 未及乎人物氣質之性. 朱子〈答徐子融書〉, 乃引此說, 以爲人物隨氣質而自爲一性之證. 此所以來鄭朴諸人之引爲渠援也. 然竊詳徐書本意, 子融方以物只有氣質性, 而無本然性爲疑. 故朱子答謂人物氣質之性, 雖有不同, 然此不同者, 卽本然性之隨其氣質, 而自爲一性者, 非外本然之性而別爲氣質之性也. 蓋此氣質性, 恐只指如水寒火熱․男剛女柔․馬馳牛耕之不害本然者言, 不遽及於人之昏明․物之馴惡也. 故借引周子此說, 只證其各一之義也. 讀者不以辭害意可也. 未知如何? 유소(有所)의 병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7장에 "마음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마음에 분치(忿懥), 공구(恐懼), 호요(好樂), 우환(憂患)이 있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늘……말 《명유학안(明儒學案)》 권61 〈동림학안(東林學案)4〉에서 명나라 말엽 오종만(吳鍾巒)이 망국의 선비가 지닐 처세에 대해 답하면서 한 말이다. 율곡……발한 것 이이는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이나 그 근본은 다만 천리일 뿐이다〔善者, 淸氣之發也, 惡者, 濁氣之發也, 其本則只天理而已〕"라고 말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4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지극히……있습니다 기질이 아무리 탁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념 간에 경책하면 선한 기질의 본원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완고한……있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타인에게 해를 입을 때 부모를 위하여 복수심이 드는데, 이때 비록 그 기는 매우 탁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善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가 참으로……이를 어찌하겠습나까 율곡의 기호학에서는 理無爲(性無爲)를 주장하기 때문에 理(性)의 능동성을 긍정할 수 없다. 북계(北溪)……했습니다 《농암속집(農巖續集)》 권하(卷下)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나온다. 안에……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7 〈답진안경(答陳安卿)〉에서 북계 진순이 주자에게 올린 문목(問目)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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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已未 기미년(1919)삼가 선생께서 창암(蒼巖, 김낙규)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난 뒤, 〈면암연보(勉菴年譜)〉중에서 면암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께 편지를 보내 일을 함께하자 했는데 선생께서 응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직한 기풍을 지닌 면옹(勉翁)이 죽은 지 10년이 채 안 되어 실상과 어긋나는 문장이 돌연 그의 문하에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면암 어른이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당시에 임씨가 그것을 막고 좨주(祭酒)를 도모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상래(李相來)가 직접 들은 것과 송정용(宋楨鏞), 김교윤(金教潤)이 전한 말이 뚜렷하여 차이가 없으니 참으로 창암이 편지에서 한 말과 같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전일건(田鎰健)과 저(김택술(金澤述)를 보내 진중(陣中)에 있는 면암 어른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했던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 중에 "면암 대감이 나이 80세에 군대를 이끌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죽으려고 하니, 내가 비록 그 일을 함께할 재주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머문 것을 보고도 편지 한 장 써서 위문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대단히 편치 못할 것입니다."1)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요. 창의소(倡義所)에 갔는데 만약 《명의록(名義錄)》에 이름을 올린다면, 저는 조부모님도 살아 계시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전일건은 허락하지 않았겠습니까.정말로 면암 어른이 먼저 편지를 보냈다면 선생의 답서에서 어찌 한 글자도 물음에 답하는 말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손자로 하여금 《명의록》에 이름을 올리게 하였다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한 얼마나 깊을까요. 면암 편지의 존재 여부와 선생의 마음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께서 실제로 면암의 편지를 보고도 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응하지 않은 것은 또한 재주와 형세를 헤아렸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지키는 의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2)이 전적으로 그른 것이 아닙니다.처음부터 자신에 호응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지적하여 나의 스승만이 홀로 어진 것을 드러낸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애당초 선생에게 일을 함께 하자는 편지도 보낸 적이 없으니, 어찌 응답한 여부에 대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인데 반드시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하며 거짓된 것을 사실이라고 우겨서 후대에 공적으로 전하려고 한다면 매우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伏見先生抵蒼巖書, 知〈勉菴年譜〉中, 有起義時, 貽書先生共事不應之語.不圖斯翁忠直之風, 不待身後十年而爽實之文, 遽出於其門下也.當日勉丈之欲作書也, 林氏之沮之以方圖祭酒之說, 李相來之親聞, 宋楨鏞金教潤之所傳, 歷歷不差, 信有如蒼書中所云者.且先生不記送鎰健與澤述致書勉丈陣中時訓辭乎? 豈不曰"勉台八耋, 從戎以死報國, 吾雖才之不能共事, 見留近地, 拜闕一書相問, 心甚未安"? 往至義所, 若使參名義錄, 則澤述有重堂在, 不可擅爲, 鎰健則許之也乎? 果勉丈有先施者, 書中胡無一句辭答之語乎? 而必令愛孫而參名, 則其欽祝冀成之意, 又何如也? 勉書有無先生心事, 此可知矣.借使先生實見勉書而不應, 其不應者, 亦各有所度之材勢, 又不無所守之義理, 未必舉義之專美, 守義之全非.初不宜表出別人之不應, 用彰吾師之獨賢, 况於先生初無共事之書, 又何應不應之可論也? 乃必欲以無有爲, 馮虛作實, 公傳道之於後世, 不亦異乎? 면암 대감이……것입니다 《추담별집(秋潭別集)》 권1 〈여최면암(與崔勉菴)〉의 편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 여기서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과 상대되는 의미로 거병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리를 지킨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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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 최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德溪崔公墓碣銘【幷序】 옛날 나는 덕계(德溪) 최공의 문집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증손 규정(圭貞)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공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다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하네. 스스로 생각하건대, 글을 잘 짓지 못하니 존선(尊先)의 실덕을 드러내지 못한다. 한 차례도 오히려 두려운데 하물며 두 번이나 글을 지으랴."라 하니, 최군이 말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글을 잘한다는 자들은 타인의 묘도 문자에 실상과 판이하게 기술한 경우가 많으니 제 마음에 매우 들지 않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의 실덕을 꼭 맞게 그려낼 사람으로 끝내 문하만한 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거듭 요청하는 것이니, 글을 잘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또한 어찌 감당하리오. 그러나 이미 글을 잘해서만 맡긴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구함과 다르다69)는 것이니, 어찌 끝내 사양하리오."라 하였다.공은 우리 고을에서 백 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로 최효자라고 일컬어지는 분으로, 휘는 찬수(燦秀) 자는 내겸(乃兼)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란 분이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판관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된 휘 희정(希汀)은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공의 10대조이다. 조부의 휘는 응성(應性), 부친의 휘는 영운(永雲)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 종찬(鍾燦)의 따님이다.공은 순조 신사년(1821)에 고부 두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본성이 지극하여 밤에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새벽에 문안드리면서 따뜻하고 시원한가를 살폈으니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였다. 부드러운 낯빛으로 뜻을 받들고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할 것 같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다. 종일토록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명을 받아야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수고로운 일을 부모 대신 맡아 봉양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빠트리지 않고 올렸다. 이렇게 행하고 남은 힘으로 책에 힘써서 그 뜻을 길렀다. 부모님의 훈계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품속에 적어 놓았다. 부모가 병이 나면 온 마음으로 약을 조제하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 곡하면 가슴을 치다가 자주 기절하였으며, 장례와 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예절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묘소 곁에 집을 지어놓고 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70) 이외에는 한 번도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무릎이 닿은 곳은 움푹 파였으며, 눈물이 닿은 풀은 시들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워하는 슬픔에 듣는 이들은 눈물을 뿌렸다. 남쪽으로 온 벼슬아치들은 여막을 지나면서 공경을 표하였고, 마을의 선비들이 관찰사71)나 현의 관리에게 서로 추천하니, 공이 듣고 만류하기를 "나의 불효를 덧보태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상이 대략적인 공의 행적이다.대개 후대에서 효도를 칭할 때는 반드시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거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 일72)이 있어야 기이한 일이라고 놀란 이후에 이에 세상에 널리 전한다. 지금 공의 효도는 〈곡례〉와 《소학》을 넘지 않고서 일반적인 도리와 소략한 예절을 다하였는데도 여론은 공을 칭송하였다. 공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붙이지 않고 단지 "효자"라고 하였으며, 공이 마을을 일컬을 때에는 마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향, 효자리"라고 하였으며, 공이 친척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의 아무개 친척"이라고 하였으니,73) 이는 어째서 그런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살아계실 때나 죽어서 장사지낼 때나 제사 지낼 때 예로써 하면, 효이다."74)라 하였으며, 증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또한 그 뜻과 존체를 봉양하면서 기이한 일이 없었다. 대저 효도를 공자와 증자 같이 한다면 지극하다고 이를 수 있다.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75)고 하였는데, 공의 효도는 또한 공자와 증자를 뒤따랐으니, 신명은 비록 통할 것을 기필하기 어렵지만, 어찌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통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여론이 공을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니, 어찌 반드시 죽순이나 잉어의 기이한 일처럼 한 때 우연한 일 들을 말해야 하는가. 대저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대성인에게 '효성스럽구나.'라는 칭송을 받았으니,76)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이 말하는 것에 남들이 딴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공은 고종 정해년(1887) 6월 21일에 돌아가셔서 두지리 뒤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안동 권씨 석영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효도로 모셨고 남편을 공경으로 대하였으니, 또한 공이 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77)을 볼 수 있다. 아들은 병식(秉湜)이며, 딸은 김요경(金堯儆)에게 시집갔다. 손자로 첫째 경열(暻烈)은 남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둘째는 인열(寅烈)이다. 사위 김 서방의 아들은 영중(靈中)이다. 증손으로 규원(圭元)은 일찍 죽었는데, 아내 김씨가 수절하면서 시아버지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다. 그 외 규형(圭享), 규리(圭利), 규정(圭貞)이 있다.오호라! 공은 참으로 지극히 효성스러운 사람이다. 효성이 이미 원천이 되었으니,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다 갖추었다. 덕스런 기운은 안색과 말에 드러나고 위의는 행동거지에 나타났다.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 충효와 자상(慈祥)을 힘썼으며, 자신을 수양함에 인의와 예양(禮讓)을 따랐다. 저술한 글은 대부분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의미78)를 담은 것과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의리를 독실하게 하는 말로 사람의 선함을 감발시키고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될 만 하였으니, 효 한 가지로만 명성을 이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에 명을 짓는다.저 두지의 서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睠彼斗池西麓이는 지극한 효자의 무덤이로다 是爲純孝眞宅살아서 은혜로운 명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生無恩命자신에게 양귀와 천작이 있나니79) 自有良貴天爵정려와 포양이 모두 빠졌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幷闕旌褒많은 사람들이 풍비80)에 비각을 세웠으니 萬口豊碑綽楔천추 만년의 뒷날에 有來千秋萬齡과객이 몸을 굽혀 절을 올리리라 過者其躬必鞠 昔余序德溪崔公遺文矣, 今其曾孫圭貞, 示以松沙奇公宇萬所撰狀文, 復請余墓銘.余曰 : "辭.自惟不文, 無以闡尊先實德.一之猶懼, 矧再之." 崔君曰 : "竊觀今世能文者, 多浮實於人家牲石, 甚不滿人意.念可以得中於吾祖實德, 竟無如門下者, 此所以重求之, 非以文也." 余曰 : "是又何敢當.然旣不以文, 是所謂'異乎人之求'者, 其何能終辭." 公, 吾鄕百年以來, 一辭所稱崔孝子也, 諱燦秀, 字乃兼, 貫全州.高麗文成公諱阿, 其始祖.本朝判官贈兵曹參判諱希汀, 學受靜菴, 忠在國朝, 其十世也.祖諱應性, 考諱永雲, 幷有行誼.妣, 礪山宋氏鍾燦女.以純廟辛巳, 生於古阜斗池里.幼有至性, 定省溫凊, 不敎而能.愉婉洞屬, 言若不出, 身若不勝.終日親側, 進退惟命.服勞奉養, 甘旨無闕.餘力劬書, 以養其志.父母有訓, 終身不忘, 爲懷中簡.親癠, 合藥禱天乞代之外, 無他事.丁憂, 哭擗屢絶, 初終葬祭, 情文俱至.築室墓側, 朔望祭奠之外, 一不下山.當膝成坎, 淚著草枯.朝夕哀慕, 聞者揮涕.搢紳之南來者, 過廬而致敬.鄕人士, 交薦于道繡縣官, 公聞而止之曰 : "毋重吾不孝." 此公之大致也.蓋後世之稱孝, 必有雪笋氷鯉, 可驚奇事而後, 乃喧傳于世.今公之孝, 則不踰乎〈曲禮〉《小學》, 常道疏節之是盡, 而輿論公誦之.稱公, 不以姓名而曰孝子 ; 稱公之鄕里, 不以名號而曰孝子鄕孝子里 ; 稱公族黨, 不以姓名而曰孝子某親, 此何以也.孔子有言曰 : "生死葬祭以禮, 孝矣." 曾子之事親也, 亦養志體而無異事.夫孝如孔、曾, 可謂至矣.孝悌通於神明, 公之孝, 亦惟孔、曾是追, 則神雖難必, 豈不可以感通於人乎.宜乎得夫人之輿誦也.奚必笋鯉奇事, 一時適然者之是道哉.夫以不間於父母昆弟之言, 得孝哉之稱於大聖, 則人不間於公共僉同之言者, 何獨不然也.公卒以高宗丁亥六月二十一日, 葬斗池後酉原.夫人, 安東權氏錫榮女, 孝舅姑敬君子, 亦見刑于攸及也.男秉湜, 女適金堯儆.孫長暻烈出后, 次寅烈.金壻男靈中.曾孫圭元早歿, 妻金氏守義, 孝養其舅.圭享、圭利、圭貞.嗚乎! 公, 固純孝人也.孝旣爲源, 衆善畢備.德氣達於色辭, 威儀著乎動止.與人言, 忠孝慈祥是勉 ; 行於己, 仁義禮讓是遵.所著文字, 又多蓼莪風樹之意, 正倫篤義之語, 足以感發人善, 補益世敎者, 其不可斷以一孝成名也, 又審矣.是不可以不知也.爲之銘曰 : "睠彼斗池西麓, 是爲純孝眞宅.莫曰生無恩命, 自有良貴天爵.莫曰幷闕旌褒, 萬口豊碑綽楔.有來千秋萬齡, 過者其躬必鞠." 다른……다르다 《논어》 〈학이(學而)〉의 "부자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여 얻는 것이니, 부자가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공자의 구함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상대방의 부탁이 여타 다른 사람의 그것과 차원이 다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 삭망전(朔望奠)을 가리킨다. 상중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관찰사 '도수(道繡)'는 원래 암행어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암행어사에게 추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여기서는 도백(道伯), 즉 관찰사로 보인다. 눈 속에서……일 맹종(孟宗)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하며,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니, 모두 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五倫行實圖 孝子》 공을 일컬을……하였으니 이 구절은 《소학》 권6 〈선행(善行)〉에 보이는 호원(胡瑗의 내용을 변용하였다. 호원이 호주(湖州)의 교수(敎授)로 있을 때,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학생들의 행동거지도 반듯하여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며, 배우는 자들이 이야기하며 선생이라고 말하면 묻지 않아도 호공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라고 하였다. 공자가……효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효(孝)에 대해 대답하면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섬기기를 예로써 하고, 돌아가시면 장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 지낼 때에도 예로써 하는 것이다.〔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축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 정이(程頤)가 찬술한 정호(程顥)의 행장에서 "충성은 금석을 꿸 만하였고 효제는 신명에 통할 만하였다.〔忠誠貫於金石 孝悌通於神明〕"라 하였다. 《二程文集 卷12 明道先生行狀》 그의……받았으니 《논어》 〈선진(先進)〉에서 "에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도다.[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고 하였다. 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 《시경》 〈사제(思齊)〉에서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그 덕이 미쳐서,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하였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잘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를 말한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효자가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을 읊은 시이며, 풍수는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신에게……있나니 《맹자》 〈고자 상〉에 "귀하고자 함은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니,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함이 있건마는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다.[欲貴者, 人之同心也. 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人之所貴者, 非良貴也.]" 그 주에서 주자는 "나에게 있는 귀함은 천작이다.[貴於己者天爵]"라 하였다. '천작(天爵)'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 하였다. 풍비(豊碑) 공적을 기록한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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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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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암 전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松菴田公墓碣銘【幷序】 호남의 남쪽 부안현에 풍부한 재주로 박명하여 크게 성취하지 못한 채 향년 32세로 고종 계유년(1873)에 타계한 사람이 있으니 담양 전공 송암(松菴)이 바로 그 분이다. 남쪽의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애석하게 여긴다.공의 휘는 제풍(濟豊), 자는 (浩然)이다. 자질이 총명하여 막 학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수업을 받으면 곧바로 외워버렸다. 큰형이 《주역》과 《중용》을 읽는 것을 보고 옆에서 해설하였는데,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장성하여 공령문에 뛰어나 공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 어사가 백성들의 고통을 조사하기 위해 고을의 선비들에게 묻자, 선비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서로 쳐다 보기만하고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이 홀로 소리 높여 외치면서 조목별로 대답하면서 숨김없이 전부 아뢴 덕에 마침내 백성들이 은택을 받게 되었다.큰형이 돌아가시자 매우 애통하면서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다만 두 분 부모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위안하는 데 힘썼다. 두 분 부모가 병이 나서 여러 해를 끌자 공은 하루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마치 자신이 낳은 것처럼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할 때는 매우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내게 될 때는 젓가락과 밭81)을 쪼개 팔아서 비용을 장만하였다. 고관인 이만직(李萬稙)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아전을 보내 부조하고 장사의 진행에 대해 물었다. 이것이 공의 재주와 행실의 대략이다. 상을 마치고 몇 해 지나 설날에 묘에서 곡을 하다가 슬픔이 극에 달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실려서 돌아와 위독해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정학을 앞장서서 창도한 경은(耕隱) 문원공(文元公) 조생(祖生)과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은 회정(晦亭) 자수(子壽), 임란 때 순절한 장사랑 경란(慶蘭)이 공의 선조이며, 간재 전 선생이 행실을 기렸던 은군(隱君) 복수(福秀)가 공의 부친이니, 참으로 집안 대대로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어진 부인은 부안 김씨로, 또한 간재 선생이 칭송하였으니 이 분을 배필로 삼았다. 유문(儒門)에 마음을 다하여 덕으로 이름이 난 희순(熙舜)이 아들이다. 집안에 조력하는 이가 있고 슬하에 계승하는 이가 있으니, 공의 어짊을 더욱 알 수 있다. 손자에 병교(炳敎), 병학(炳學), 병철(炳喆)이 있고, 손자의 아들에 동배(東培), 갑배(甲培), 춘배(春培), 형배(享培), 신배(信培), 인배(仁培), 석배(錫培)가 있으니, 또한 번성하였도다.대개 당시에 효제로 덕선(德善)으로 행검(行檢)으로 공을 칭송하여 그 말이 한결같지 않았는데, 김상만 공은 "'명괘언론(明快言論)' 네 글자는 사람이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어사의 질문에 조목별로 대답한 것에서 공의 일면을 볼 수 있다.82) 대저 의리를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곧바로 행하는 것을 쾌(快)라고 한다. 만일 공에게 나이를 더 빌려주어 학문을 이루게 하였다면 그 류(類)를 채워서 극에 이르렀을 것이다.83) 이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공변됨은 두었을 것이며, 남에게 대해서는 반드시 옳은 이를 인정하고 그른 이를 나무랐을 것이며, 조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사악한 이들을 내쳤을 것이며, 세상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인의 학문을 보호하고 이단을 물리쳤을 것이니, 위대하도다! 명쾌함이여. 이런 까닭으로 정자는 명쾌에 대해 일컬으면서 성인에게 이 말을 덧붙였으니,84) 오호라! 이것이 어려운 바가 되는 까닭일 것이다.■■■■의 모좌 언덕이 모신 곳이다. 사자(嗣子)가 김씨의 묘를 옮겨 합부(合祔)하면서 장차 비갈을 세우려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비명은 다음과 같다.오직 명쾌한 惟明快그 자질을 지녔네 有其質뭇 선행이 衆善行이에서 나왔건만 由此出슬프다 운수가 막힘이여 嗟數局꽃은 피었지만 열매 맺지 못하도다 秀不實살아서 보답 받지 못하지만 生不報후손들이 번창하였구나 後蕃殖오직 자손들은 惟子姓그 덕을 기억하리라 念厥德 湖之南扶安縣, 有豊材嗇命, 不克大就, 年三十有三而卒于高宗癸酉者, 潬陽田公松菴, 其人也.南士, 至今惜之.公諱濟豊, 字浩然, 生而聰明, 才上學, 受輒成誦.見伯氏讀《易經》《中庸》, 從傍解說, 出人意表.及長, 長功令文, 人莫敢先.御史覈民瘼, 問縣中士, 士皆畏憚, 顧瞻莫敢言.公獨抗聲, 條對備陳無隱, 民卒蒙惠.伯氏沒, 慟甚無世况, 只事寬慰二親.二親病且積年, 不一日離側.撫孤姪若己出.荐丁二憂, 哀戚甚, 及葬, 斥析箸田供用.李侯萬稙, 感其誠, 遣吏賻, 問董役, 此爲公才行大致.免喪有年, 因正朝哭墓, 悲極不省事, 舁歸沈重, 竟不起.公以首倡正學之耕隱文元公祖生, 麗亡罔僕之晦亭子壽, 壬亂殉節之將仕郞慶蘭, 爲祖.艮齋田先生贊行之隱君福秀爲父, 是固有世類.賢媛, 扶安金氏, 亦有艮齋贊者爲配.從事儒門, 以有德聞者, 熙舜爲子.內有助, 下有繼, 尢可以見其賢矣.孫, 有炳敎、炳學、炳喆.孫之子, 有東培、甲培、春培、享培、信培、仁培、錫培, 亦庶矣哉.蓋當時稱公以孝悌以德善以行檢, 不一其辭, 而惟金公相萬, 明快言論四字, 爲人所難能者, 若條對御史之問, 一斑也.夫見義之謂明, 卽行之謂快.如得公假年成學, 充類而盡之, 由此而在己, 必去私存公 ; 在人, 必與是奪非 ; 在朝, 必進賢退邪 ; 在世, 必閑聖闢異, 大哉明快也.以故程子至於稱此而加諸聖人.嗚呼! 斯其所以爲難者歟.■■■■ 坐原, 其藏也.嗣子遷金氏墓合祔, 將竪碣也, 請余銘.銘曰 : "惟明快, 有其質.衆善行, 由此出.嗟數局, 秀不實.生不報, 後蕃殖.惟子姓, 念厥德." 젓가락과 밭 재산을 뜻한다. 공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진서(晉書)》 권80 〈왕헌지열전(王獻之列傳)〉에 "대롱을 통해 표범을 보기 때문에, 때로 표범의 무늬만을 본다.〔管中窺豹 時見一班〕"라는 말이 나온다. 그 류를……것이다 맹자가 만장(萬章)에게 "자네가 생각하기에 왕자(王者)가 나온다면 장차 지금의 제후들을 모조리 몰아서 죽이겠는가? 아니면 가르쳐도 고치지 않은 뒤에야 죽이겠는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둑이라 이르는 것은 종류를 채워서 의(義)의 지극함에 이른 것이네.[充類至義之盡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孟子 萬章下》 정자는……덧붙였으니 《근사록》 권14에 "공자는 참으로 명쾌한 분이고, 안자는 참으로 화락하였으며, 맹자는 참으로 웅변이었다.〔孔子儘是明快人 顔子儘豈弟 孟子儘雄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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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최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孝子崔公墓碣銘【幷序】 근래 남쪽 지방에서 효자를 일컬을 때 덕계(德溪) 최공 휘 찬수(燦秀)를 으뜸으로 치는데 다른 의견이 없다. 이런 덕계를 형으로 삼아 나란히 훌륭하고 똑같이 어진 것이 마치 진씨의 두 형제85)와 같은 자가 휘 대수(大秀) 자 원겸(元兼)이란 인물이다. 사람들이 덕계를 칭송하여 송나라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과 같다고 하였지만 대수 공을 아는 자는 드물었으니, 그들의 행위가 비록 드러나지 않고 드러난 차이는 있을지라도 실상이 서로 다른 것과는 관계가 없다.대저 공의 효성은 하늘에서 받아 성(性)에서 이뤄진 것으로, 사람이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온화한 낯빛으로 뜻을 받들며 저녁에 이부자리를 봐드리고 새벽에 문안을 드리면서 한 마음으로 부모를 향하여 조금도 명을 어기지 않았다. 공을 보거나 공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자들은 효성스런 아이라고 불렀는데, 이미 이를 갈 7~8세 때부터 그러하였다. 31살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슬픔에 건강을 해치고 몸이 뼈만 남아 거의 죽을 뻔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여묘살이를 하려고 하였는데 부친이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5살에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어 삼일 간 목숨을 유지하였다. 초상에 갑자기 기절하였다가 깨어나기도 하였다. 운구가 떠날 때 호랑이가 어둠을 타고 앞을 가로막자 공이 앞으로 나가서 호랑이를 달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고서 물러났다.이윽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덕계공이 묘에서 여막 생활을 하였고 공은 집에서 제전(祭奠)을 받들었으니, 집안일을 부탁 받았기에 형세상 함께 여묘살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삼 일마다 묘소를 찾아뵙고 서로 곡하며 슬퍼하니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여막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그러나 사십 리를 삼 일마다 한 번 찾아뵈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 하였다.상을 마치자 큰형이 집안의 재산을 나눠주자 공은 재산을 사사로이 지닐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또다시 전토를 나눠서 식량을 마련하게 하자, 굳게 사양하였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자 마침내 선고와 선비의 제전(祭田)으로 삼았다. 재삿날에는 직접 희생과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처음 돌아가시는 날86)처럼 슬퍼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할 때는 반드시 계절 음식을 올렸으며, 그렇게 앞에 차려놓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이것이 공이 행한 효성의 대략이다.큰형을 매우 공경스럽게 섬겨 크고 작은 일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고한 뒤에 행하였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비록 채소라도 반드시 형에게 올린 뒤에 먹었으니, 이는 효를 공손함으로 미뤄 행한 것이다.공은 전주 사람으로, 고려 문하시중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다. 집현전 제학 월당(月塘) 담(霮)은 조선 초기에 현달하였다. 아들 전농소윤 득지(得之)는 그 아우 연촌(烟村) 덕지(德之)와 더불어 문종에서 단종으로 넘어갈 즈음에 기미를 보고 함께 은둔하였다. 그 아들 현감 자목(自睦)이 처음으로 고부에 거주하였다. 3대가 지나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종성 판관으로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서산사에 배향되었다. 이 분이 공의 10대조이다. 조부 응성(應性)은 의를 행하였다. 부친은 영운(永雲)이고, 모친은 여산 송씨 종찬(鍾燦)의 따님으로 부덕을 매우 갖추었다.순조 무자년(1828) 4월 17일에 공은 태어났으며, 고종 정유년(1897) 8월 12일에 돌아가셨다. 공은 일찍이 먼 친척의 여식 가운데 어려서 부모를 여읜 자를 데려다가 기르고 가르쳤으며, 살림살이를 갖추고 단장시켜서 시집보냈다. 재종질의 처가 과부가 되어 살고 있었는데, 모시밭을 나눠 주어 길쌈질하며 살게 하였다. 갑오년에 동비(東匪)들이 사람을 얽어매고 마을에 들어와서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여 많은 사람들을 욕보이고 범하였는데, 공은 끝내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배척하였다. 항상 자질(子姪)들에게 훈계하며 말하기를 "선조를 정성으로 받들며 사람을 두터움으로 대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평생 담박하고 고요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이름이 나고 현달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은혜와 의리를 돈독하게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하여 많은 선을 갖추었으니, 다만 효도 한 가지만 뛰어났다고 부를 수 없다.부인은 전주 이씨 시발의 따님으로,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후손이다. 친족 아우인 관수(灌秀)의 둘째 아들 병권(秉權)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윤병의(尹秉懿), 김달원(金達源)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민렬(敏烈), 종렬(宗烈), 일섭(一燮)이 있다. 외손은 윤광섭(尹光燮), 김동현(金東鉉)이다.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87)고 하였는데, 공은 이미 효성과 공손이 지극하니 근본은 곧 섰다고 하겠다. 비록 일찍이 도를 깨우친 자에게 나아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궁구하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을 깨끗이 하고 친족간에 화목하며 타인들에 은혜를 베푼 덕은 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학문한다고 이름이 났지만 근본이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대개 '백성이 능한 이가 적다.'88)는 탄식은 공자 시절부터 이미 그러하였거니와 여덟 선비가 역대로 훌륭하였으니 한 집안에 어진 이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취를 증거할 수 없고, 다만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처럼 거상을 잘 하였다만 칭송을 받으니89) 덕계와 공 같이 두 형제간의 효성을 백세토록 그 누가 짝하겠는가. 지금 민렬과 일섭이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니, 공의 유택이 사라지지 않음90)을 믿을 수 있으며, 원방과 계방처럼 난형난제가 되어 장차 최씨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이다.정읍군 칠보산 아래 우탄리 경좌(庚坐)에 무덤이 합부(合祔)되어 있는 언덕이 바로 공을 모신 곳이다. 사자(嗣子)가 장차 생석(牲石)을 세우려 하면서 민렬에게 명하여 행장을 갖추고 와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요구하였다. 나는 공에 대해 선조 때부터 대대로 우의를 맺은 집안의 후생이기에 윗대를 자세하게 논할 수 있는 자로 나만한 사람이 없다. 감히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요와 순의 효도와 공손함은 堯舜孝悌성인 맹자의 종지라네 孟聖宗旨나는 반드시 학문을 하였다고 한 말을 吾必謂學또한 복씨에게 들었어라91) 亦聞卜氏성인은 참으로 하늘과 같은데 聖固如天공은 그 토대를 쌓았고 公則築址배워서 윤리 밝힘을 구하였는데 學求明倫공은 이것을 몸에 지녔도다 公則有是더구나 공은 매우 어질어서 矧公惟賢두 형제92)가 나란히 꽃을 피웠네 雙棣聯芳소련, 대련과 같았고 少大之連원방, 계방 같았어라 元季之方칠보산의 기슭에 七寶之麓묘소가 엄숙하노니 有肅斧堂과객은 반드시 예를 표하라 過者必式효자를 모신 곳이라네 孝子之藏 近世南服之稱孝子, 首德溪崔公諱燦秀, 無異辭.以德溪爲伯, 而聯美齊賢, 若陳氏二方者, 有諱大秀字元兼, 而人誦德溪, 殆同宋朝君實, 而知公者鮮, 行雖有潛著之殊, 而非關情實之異也.夫公之孝, 得之天而成乎性, 非由人敎致然也.愉惋定省, 一心向親, 毫無違命.見聞之及, 名以孝童, 已自齠齔時矣.三十一丁母憂, 毁瘠幾滅性.葬而欲廬墓, 父不許未遂.三十五父疾革, 裂指注血, 延三日命.及喪, 頓絶方甦, 發引而行, 有虎乘暮遮前, 公挺身諭虎, 虎搖尾而退.旣葬, 德溪公廬于墓, 公則奉奠于家, 以家事受託, 勢不得同廬也.然必三日省墓, 相哭哀, 動山谷.人謂'守廬固難, 而四十里三日一省, 亦尢難.' 喪畢, 伯氏以分家貲, 公辭以不私財, 又分田土資食, 苦讓不得, 則遂以爲考妣祭田.忌辰, 親具牲羞, 哀如袒括.朔望省掃, 必以時物薦, 未前不食, 此其大致也.事伯氏篤敬, 事無巨細, 必告而行.有異味, 雖菜品, 必獻之而後食, 是孝推之悌也.公, 全州人.高麗門下侍中文成公阿后.集賢殿提學月塘霮, 顯國初.子典農少尹得之與其弟烟村德之, 文、端之際, 見幾同遯.子縣監自睦, 始居古阜.三傳至德村希汀, 從靜菴趙先生學, 以鍾城判官, 征北虜有功, 贈兵曹參判, 享書山祠, 是爲公十世祖.祖應性, 有行義.考, 永雲.妣, 礪山宋氏鍾燦女, 婦德克備.純廟戊子四月十七日, 公之生也 ; 高宗丁酉八月十二日, 其卒也.公嘗取疎族之女幼喪父母者, 爲之養敎, 備資裝嫁之.再從姪婦寡居者, 分給苧田, 資其紡績.甲午, 東匪勒人入黨, 威脅萬端, 人多汙犯, 公則終不撓而又斥之.每訓子姪曰 : "奉先以誠, 接人以厚." 平生澹靜自守, 不求聞達.其篤恩義正倫理, 衆善之備, 非但可以一節名也.配, 全州李氏始鏺女, 敬寧君裶后.取族弟灌秀次子秉權爲嗣, 女適尹秉懿、金達源.孫敏烈、宗烈、一燮.外孫尹光燮、金東鉉也.有子有言 :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公旣孝且悌, 本則立矣.雖未嘗就有道而究格致誠正之學, 其潔己睦族惠物之德, 非自本而生者歟.足以恥夫學名而無本者矣. 蓋民鮮之嘆, 自孔子時已然, 八士之列盛, 一家之多賢也, 而其蹟無徵, 惟少連、大連, 稱善居喪, 雙孝百世, 若德溪與公, 其玆人之儔乎.今敏烈、一燮, 飭躳志學, 信公遺澤之不斬, 而元、季之難, 其將濟崔氏之世美乎.井邑郡七寶山下牛呑里庚坐合兆原, 公之藏也.嗣子將備牲石, 命敏烈具狀, 徵余文.余於公, 爲通家後生, 尙論之詳, 或莫如余也.不敢以不文辭.銘曰 : "堯、舜孝悌, 孟聖宗旨.吾必謂學, 亦聞卜氏.聖固如天, 公則築址.學求明倫, 公則有是.矧公惟賢, 雙棣聯芳.少、大之連, 元、季之方.七寶之麓, 有肅斧堂.過者必式, 孝子之藏." 진씨의 두 형제 진씨는 진식(陳寔)을 가리키고 '이방(二方)'은 자가 원방(元方)인 진기(陳紀))와 계방(季方)인 진심(陳諶) 형제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아 사람들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칭하였다. 또 이들 형제들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고 기절하였는데, 예주 자사(豫州刺史)가 그 상황을 상부에 아뢰면서 그림을 그려 올리자, 여러 고을에 그 그림을 걸어 놓고서 풍속을 교화하였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처음 돌아가시는 날 '단괄(袒括)'은 초상을 당해 슬픔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단은 윗옷을 벗어 왼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고, 괄발은 머리카락을 풀어 묶는 것이다. 여기서는 초상 때처럼 슬퍼하였다는 의미이다. 유자가……생겨난다 공자(孔子)의 제자 유약(有若)이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긴다. 효도와 공경은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백성이 능한 이가 적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께서 '중용의 덕이 지극하도다. 사람들이 소유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子曰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 久矣.]"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3장에 "공자께서 '중용은 그 지극할 것이다.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子曰中庸其至矣乎! 民鮮能, 久矣.]"라고 하였다. 소련과……받으니 《예기》 〈잡기(雜記)〉에서 공자가 소련과 대련을 칭찬하면서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했다. 3일 동안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을 해이하게 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을 슬퍼하였고, 3년 동안을 초췌하게 지내었다."라 하였다.[雜記 孔子曰 小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유택이 사라지지 않음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이라 하였다. 민렬과 일섭은 공의 손자이므로 아직 그 유택이 남아 전한다는 말이다. 나는……들었네 복씨는 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자하의 이름이 복상(卜商)이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 하였다. 형제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하여, 체는 형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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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기산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箕山黃公墓碣銘【幷序】 호남 지방의 문헌 세가를 헤아린다면 흥성(興盛, 고창) 구동의 황씨를 손에 꼽을 수 있다. 익위사 익찬 이재(頤齋) 선생은 학문이 높고 덕이 넉넉하여 명성이 나라 안에 널리 전해졌으니, 앞에서 가문을 선도한 공이 있었다. 비록 지금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였지만 후손의 면모를 접하면 순수한 기운이 있고 그 집에 들어가면 예다운 습속이 있어서 고가(故家)의 여운을 잃지 않았다. 또한 황씨 가운데 이름이 드러난 자가 있으니, 근래의 고(故) 경기전참봉 기산공(箕山公)으로 몸을 닦고 의를 행하여 이재의 후대에 가문을 수성한 인물이다.공의 휘는 종윤(鍾允), 자는 여집(汝執)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계보는 고려 참찬 의정부사 휘 숙경(淑卿)에서 시작되었으니, 이 분이 휘 길원(吉源)을 낳아 본조에 들어와 선공감정을 지냈다. 5대가 지나서 부호군 뉴(紐)가 춘천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또 7대가 지나 휘 윤석이 태어났으니, 이분이 바로 이재 선생이다. 이재 선생의 위로 3대를 보면, 취은(醉隱) 휘 세기(世基), 산촌(山村) 휘 재만(載萬), 만은(晩隱) 휘 전(㙻)이 어진 덕으로 그 앞을 열었다. 이재 아래로 수촌(壽村) 휘 일한(一漢), 단옹(檀翁) 휘 수경(秀瓊), 시와(晦窩) 휘 중섭(中燮), 국포(菊圃) 휘 재렴(在濂) 및 그 아우 한천(寒泉) 휘 재학(在學) 등 4대가 문과 행으로 그 뒤를 이었다.공은 국포공의 아들로 모친은 유인 장흥 고씨 학진(鶴鎭)의 따님과 남원 윤씨 우현(禹鉉의 따님이다. 한천공과 연일 정씨 생원 계량의 따님인 한천공의 부인이 바로 공의 생부모이다. 공은 자질이 정성스럽고 성실하며 그릇이 넓고 두터웠다. 자신을 다스릴 땐 겸손하고 남을 대할 땐 온화, 공경하였다. 일찍이 말을 다급하게 하거나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 난처한 일을 만나도 마음만은 편안하여 두렵거나 꺼리는 빛이 없었으며 천천히 이치로 다스려 마침내 합당한 방법을 획득하였다. 언행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꾸미지 않았고 학문에 대해서도 입과 귀로 얻는 것93)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필획은 단정하여 비록 급한 상황이라도 초서로 휘갈겨 쓰지 않았다. 문을 닫아걸고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일은 구차하게 이루지 않았고 사람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행실의 대략이다.계사년(1893)에 국포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한천공의 명을 받들어 그 후사를 이었다. 그 이듬해 갑오년에 동비(東匪)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피하고 숨으면서 공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였다. 하지만 공은 "나는 괜찮으니, 내가 궤연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라 하면서 여막을 굳건히 지켜 떠나지 않았으니 슬프게 곡하며 우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동비들도 또한 공경하고 존모하여 침범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경자년(1900)에 한천공이 병을 앓았는데 공은 얼굴에 근심스런 기색을 띠고서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잠자지 않으면서 지극 정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끝내 돌아가시게 되자 예에 맞게 상복을 입었다.병인(1926), 무진년(1928)에 정 유인과 윤 유인이 서로 연이어 돌아가셨는데, 공은 나이가 이미 칠십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젊은 날처럼 예를 행할 때면 절도를 다하였으며, 제사에는 힘써서 정갈하고 깨끗함을 다하여 비록 노복이라도 옷을 빨아 입지 않으면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재계하고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었으며 촛불을 밝게 켜고 밤을 지새웠는데, 강신제가 되면 더욱 공경을 다하였다. 살아 계실 때 즐기던 음식을 구하여 올렸는데, 만일 시기가 빠르거나 늦어서 구할 수 없게 되면 오랫동안 죄송한 마음을 지녔다. 집안 식구 중에 누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책망하기를 "이러한 때 깊이 잠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더냐."라고 하였다. 여러 대의 묘소 석물(石物)을 전부 다 갖춰 빠트림이 없었는데, 오히려 대단히 좋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무신년(1908)에 단발령이 내려졌는데, 본 고을 수령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탐문하기 위해 편지로 공에게 물었다.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는 뜻으로 답하니, 본 고을 수령이 그의 굳건한 절조에 경탄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안정되고 차분함으로 스스로를 닦고 형세와 이익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 좋아하였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 있으면 뽑아 기록하여 앉은 자리에 내걸어 아침저녁으로 보고 자신을 돌이켰으며 아울러 아들과 손자에게 보여주었다. 아들과 손자가 허물이 있으면 고금의 사적을 끌어와 보여주며 차분하게 깨우쳤으니, 비록 매질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다시 범하지 않아 집안이 항상 엄숙하였다. 이웃 마을에 사교(邪敎)의 교주 소굴이 있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미혹되어 돈과 비단을 전부다 갖다 바치니 집안 살림을 박살낸 자까지 있게 되었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그 이치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고 마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도록 하였다. 본성이 어질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니, 곤궁하게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혼자 힘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음식과 용변을 공이 직접 거들고 치웠으며 백방으로 침을 놓고 약으로 치료하여 오랜 뒤에 병이 나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은덕으로 여겼다.기유년(1909)에 불이 온 마을을 덮쳤는데, 공은 화염을 무릅쓰고 선대의 신주와 《이재집(頤齋集)》의 목판을 꺼내왔지만 《세고(世稿)》와 서적은 모두 재로 변해버려 공이 대단히 애통해하였다. 남아 있는 것도 또한 보존하기 어려울까 두려워 경술년에 《이수신편(理數新編)》을 정사(淨寫)하여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만은공을 용계사에 추향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미 조정의 명령으로 사원이 훼철되었으니, 사원에 제단을 쌓는 것도 오히려 불가하거늘 더구나 다시 만들어서 추향을 한단 말인가. 어른의 신령이 계신다면 어찌 기꺼이 흠향하겠는가."라 하였다. 병인년(1926)에 순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탄식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다시 희망이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인산(因山)의 곡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슬픈 감회를 풀어내었다. 대개 경술년 이후로 풍천의 감회94)를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을 뒤 높은 산등성이에 기산정을 지어서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의탁하였다. 항상 금옹(錦翁) 김원중, 회봉(晦峰) 고제규(高濟奎) 등 여러 벗과 진솔회를 만들어 간혹 산에 오르고 강가를 노닐거나 혹은 기산정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울적한 기분을 풀어내었으니, 지금 《기산고(箕山稿)》를 살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갑술년(1934) 3월 29일에 집에서 수를 누리다가 편안히 돌아가시니 위로 태어난 철종 무오년 10월 11일부터 향년 77세이며, 왕륜산(王輪山) 아래 치동(雉洞)의 선영 안 ■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병사 원의(瑗儀)의 따님으로 올해 88세인데도 아직 병이 없고 건강하다. 다섯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으니, 아들은 효익(孝翼), 내익(來翼), 진익(璡翼), 용익(龍翼), 오익(五翼)이고 사위는 고령 신재휴(申宰休)이다. 효익의 아들은 서구(瑞九), 욱(旭), 진익의 후사로 출계한 현구(鉉九), 언구(彦九), 성구(聖九)이고 사위는 풍천 노병(盧秉), 울산 김귀수(金龜洙), 함평 이용근(李龍根)이다. 내익의 아들로 헌구(憲九)와 봉구(鳳九)가 있고 사위는 성주 이희영(李喜榮)이다. 진익의 후사로 들어온 이는 현구이다. 용익의 아들은 연구(演九)와 항구(杭九)이며, 사위는 김해 김학규(金鶴奎)이다. 오익의 아들은 황(熀)과 일구(鎰九)이며, 사위는 행주 기세인(奇世寅)이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은 타고난 자품이 아름다운데다가 어진 조상들의 가르침에 무젖었다. 그러므로 비록 정신을 몰두하여 공부하거나 사우간에 강마하지 않아도 용모와 말투에서 드러나는 것은 절로 덕을 갖춘 기상이 있었으며, 평생 한 바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 적었기에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어 사람들이 모두 모범으로 삼았다. 집안을 바르게 하는 방법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믿었으며 엄하지 않아도 외복(畏服)하게 됨을 몸으로 가르쳤다. 그러므로 오늘날에서 여전히 유풍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랴. 죽음을 맹세하고 머리카락을 지킨다는 답서와 고을의 사원에 선조의 제향을 허락하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중화의 대의를 지키고 선조를 받드는 대의가 세상의 논의보다 월등하며 후대에 떳떳이 할 말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더욱 존경하고 탄복하게 된다.사손(嗣孫) 서구가 나에게 〈행록(行錄)〉 한 통을 보여주고 빗돌에 새겨 세상에 드러낼 글을 요청하면서 '이것은 여러 숙부들의 의견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이 더욱 간절하였다. 내가 일찍이 한번 공에게 인사를 올린 때를 생각해보매 그 외모를 보고 곧바로 그 내면을 알았었는데, 지금 이 〈행록〉을 통해 더욱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공을 존경하기에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드디어 글을 살펴보고 서술하면서 명을 붙인다.혁혁한 이옹이여 赫赫頣翁공은 대대로 전해 온 것을 계승하였네. 公承世傳아! 아름다운 자질이여 猗嗟美質이미 공경하고 또 온화하도다. 旣敬且溫평소 덕을 삼가하며 庸德之愼실질을 숭상하여 꾸미지 않았어라. 伊實匪文집안은 교화되고 위엄은 길하며 家化威吉고을에 원망하는 말이 없었노라. 鄕無怨言두 일의 높은 견해를 二事高見말하면 듣기에 흡족하도다.95) 言足聽聞실제 학문이 여기에 있나니 學實在玆어찌 한 가지만 잘한다고 기필하리오. 豈必專門치동의 산기슭에 雉洞之麓그 봉분이 높으니, 有崇其墳내가 빗돌에 새겨 我銘于石후대 천 년에 알리노라. 用詔千春 維湖以南, 數文獻家, 指屈於興城龜壽之黃氏者. 以翊衛司翊贊頣齋先生, 學崇業富, 名達邦國, 有以創之於前, 雖今之世, 風潮大變, 然接其貌有淳氣 ; 入其家有禮俗, 不失故家餘韻. 亦惟黃氏見焉者, 以近故慶基殿參奉箕山公, 有以躳修行義, 而守成於後也. 公諱鍾允字汝執平海人. 譜自高麗參贊議政府事諱淑卿始, 是生諱吉源, 入本朝繕工監正. 五傳而副護軍諱紐, 自春川而南. 又七傳而有諱胤錫, 則是爲頣齋先生. 上三世, 有醉隱諱世基、山村諱載萬、晩隱諱㙻之賢德而啓之. 下有壽村諱一漢、檀翁諱秀瓊、晦窩諱中燮、菊圃諱在濂及其弟寒泉諱在學, 四世之文行而繼之. 公, 菊圃公之子, 其妣孺人長興高氏鶴鎭女、南原尹氏禹鉉女. 寒泉公及孺人延日鄭氏生員季良女, 其本生也. 公禀質慤實, 器宇寬厚, 處己謙遜, 接人和敬, 未嘗有疾言遽色, 遇事難處, 意度晏閒, 無畏憚色, 徐以理裁, 竟得其當. 言行尙質而不以文, 於文字亦不屑口耳得. 筆畫端正, 雖急遽不潦草. 杜門飭躳, 事不苟就, 人不苟合, 此其槩也. 癸巳, 菊圃公卒, 公奉寒泉公命, 繼其後. 翌年甲午, 東匪暴掠閭里, 人爭避匿而勸公偕去, 則曰 : "人則可也, 吾舍几筵, 將安之." 堅不離廬. 哭泣之哀, 有足動人, 匪類亦敬慕, 相戒勿侵. 庚子, 寒泉公有疾, 憂形于色, 晝不息夜不寐, 至誠祈天, 竟無幸, 持服如禮. 丙寅戊辰, 鄭孺人、尹孺人相繼而喪, 則公年已七十, 猶以筋力爲禮盡節如少日, 祭祀務盡蠲潔, 雖婢僕不著澣衣者, 不許入門. 齋沐易服, 明燭達夜, 及灌而益致敬. 求薦生時所嗜物, 如時期早晩而未然, 則久抱缺憾. 家衆或不叅祀, 責之曰 : "此時熟睡, 於汝心安乎." 累世墓儀, 誠備無闕, 猶以未盡善爲恨. 戊申, 剃髮之令, 本倅欲探物議, 書問於公, 公以誓死髮不可斷之意答之, 本倅對人敬嘆其固執. 平居恬靜自修, 不以勢利經心. 好看書, 有切要處, 拈出揭座, 朝夕觀省, 幷示子孫. 子孫有過, 引古證今, 諄諄諭誨, 雖不加榎楚而皆畏服不復犯, 門庭常肅然. 隣里有邪敎主窟, 愚民風靡迷惑, 銷盡金帛, 至有傾家者. 公招里人, 斥其非理, 使勿入里中. 晏然性仁惠, 有窮旅病不能坐臥者, 其飮食便尿, 公親自扶護, 百方針藥, 久而後瘳, 其人終身德之. 己酉, 火燒一里, 公冒炎奉出先主、《頣齋集》板, 《世稿》與書籍, 盡入灰燼, 公深痛之, 恐存者亦難保, 庚戌繕寫《理藪新編》營刋, 而力綿未果. 人有以追享晩隱公於龍溪祠爲言者, 公曰 : "旣以朝令撤院, 則壇祠猶不可爲, 况復設而追享乎. 先子有靈, 豈肯享之." 丙寅, 聞純宗昇遐之報, 痛哭而嘆曰 : "今焉而後, 更無望矣." 卽上京叅因山哭班. 因入金剛山, 以洩悲懷. 蓋自庚戌以後, 不勝風泉之感, 築箕山亭於里後高岡, 以寓倚斗之情. 每與金錦翁源中、高晦峰濟奎諸友, 爲眞率會, 或登山臨水, 或引酒賦詩於亭上, 以吐壹鬱之氣, 今觀乎《箕山稿》, 可知矣. 以甲戌三月二十九日, 考終于家, 上距其生哲宗戊午十月十一日, 壽爲七十七, 葬于王輪山下雉洞先塋內■坐原. 夫人全州李氏兵使瑗儀女, 今年八十八而尙無恙. 擧五男一女, 男孝翼、來翼、璡翼、龍翼、五翼, 高靈申宰休, 壻也. 孝翼男, 瑞九、旭、鉉九, 出爲璡翼后, 彦九、聖九, 壻, 豊川盧秉、蔚山金龜洙、咸平李龍根. 來翼男, 憲九、鳳九, 壻, 星州李喜榮. 璡翼系男, 鉉九. 龍翼男, 演九、杭九, 壻, 金海金鶴奎. 五翼男, 熀、鎰九, 壻, 幸州奇世寅. 曾孫以下, 多不盡錄. 嗚呼! 公得天姿之美 ; 染賢祖之澤, 故雖不極意問學, 講劘師友, 然見於容貌辭氣者, 自有有德之象, 而一生所爲, 不合道理者, 蓋寡矣, 故孚及于人, 人皆矜式. 其正家之方, 則又自有不言而信, 不嚴而畏之身敎, 故致得尙有遺風於如今之日, 詎不偉哉. 至於誓死保髮之答書, 祀祖鄕祠之不許, 則見得守華之大義 ; 尊先之正禮, 卓出世論, 而有辭來許者, 尢可敬服也. 嗣孫瑞九示余行錄一通, 請以顯刻之文, 而謂'是諸父意,' 余辭非其人, 則其請愈勤. 念余亦曾一拜公, 見其外, 已知其中, 而今因是錄而益信矣. 其在景仰, 不能終辭, 遂按而叙之, 系之以銘曰 : "赫赫頣翁, 公承世傳. 猗嗟美質, 旣敬且溫. 庸德之愼, 伊實匪文. 家化威吉, 鄕無怨言. 二事高見, 言足聽聞. 學實在玆, 豈必專門. 雉洞之麓, 有崇其墳. 我銘于石, 用詔千春." 입과 귀로 얻는 것 구이지학(口耳之學)을 가리킨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라고 하였으니, 그저 도청도설(道聽途說)하는 것 같은 천박한 학문을 가리킨다. 풍천의 감회 '풍천(風泉)의 감회'는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이른다.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인데, 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말하면 듣기에 흡족하도다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더구나 우리 탕왕(湯王)의 덕(德)이, 말하면 사람들의 들음에 흡족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矧予之德, 言足聽聞.]"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삼우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三友堂姜公墓碣銘【幷序】 고창군 갑평리의 강씨 문중에 형제 세 사람이 있는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함이 뛰어난 자들로 큰 형의 이름은 철흠(喆欽)이며, 둘째의 이름은 상흠(尙欽)이며, 막내의 이름은 윤흠(潤欽)이다. 품평하는 이96)들이 서로 칭송하였으며, 그 당(堂)을 편액하고 실상을 기록하기를 큰 형은 '삼우(三友)'라 하였고 둘째는 '효우(孝友)'라 하였고 막내는 '우우(友于)'라고 하였다. 어릴 때 엿을 조금 사서 형제들이 서로 양보하여 먹지 않다가 마침내 다 녹고 말았으니, 마을에서 미담으로 전한다. 조금 자라서는 날마다 서로 모여 화락하게 지냈으며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각자 부인을 맞이하여 다른 집에서 거처할 때도 내 것 네 것의 재산이 없었으며 형이 거름을 내면 아우는 밭을 갈고 아우가 김을 매면 아우가 파종하였다. 여러 자매들도 또한 이처럼 하였으니, 이런 경우는 거의 없거나 겨우 한두 예가 있을 뿐이다.삼우공이 가장 마지막으로 돌아가셨는데 묘소 주변의 나무가 12년이 되어 한 아름으로 자랐다. 사자(嗣子)인 채영이 친척 아우인 호영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문을 요청하니, 나는 통가(通家)의 정의(情誼)를 지녀 덕을 상세히 알고 있으니 사양할 수 없었다.공의 자는 사길이며 본관은 진산(晉山, 진주)으로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대단히 현달한 가문이다. 고려 말에 대제학 휘 회중(淮仲)은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절개를 지켜 포은, 목은과 이름이 나란하였다. 3대가 지나 휘 징(澂)은 연산군 때 부제학이었는데 직간으로 쫓겨났다가 중종 반정 이후에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두 차례 명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풍의(風儀)와 문장이 중국 선비들의 찬탄을 자아내었다. 아들 휘 억(億)은 한림지제교를 지냈다. 다시 2대를 지나 청계일인 휘 순(恂)은 병자년의 난리 뒤에 남쪽으로 은거하여 고창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공의 8대조이다.부친의 휘는 달중(達重)이며, 모친은 평택 임씨 문환(文煥)의 따님이다. 공은 철종 을묘년(1855) 7월 10일에 태어났다. 6살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집에서 자랐다. 외삼촌이 일찍이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혔는데, 공의 나이 겨우 7~8세인데도 한겨울에 눈이 내려도 날마다 두 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식사를 전달하니 서리들이 기특하다고 감탄하였다. 병자년(1876)에 모친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짓고 땔나무하며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어느 해 크게 흉년이 들어 때때로 밥을 짓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공사간의 구휼을 조금도 받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염결하다고 칭송하였다. 두 아우와 약속하기를 "우리 집은 하늘이 돕지 않아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니 편히 봉양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식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에 서로 힘쓰고 대단히 노력하니 점차로 가세가 펴져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아 모친이 편안하게 지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무덤을 쌓고 석물과 제전의 마련에 온 정성을 기울여서 제향을 길이 지내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그전에 재계하고 목욕하며 여러 제구(祭具)를 전부 직접 점검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는 제사 지낼 수 없다."라 하였다.기해년(1899)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며 장사를 지내는 예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상제에 맞게 하였으니 옛날 거상(居喪)을 잘하는 자와 같이 하였다.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재물을 마련하여 상례와 장사를 치렀으며 남긴 혈육을 거두 키우고 밭과 집을 마련하여 주었다. 막내아우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간호하고 위로하면서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신의 자식보다 두텁게 대하였다. 둘째 아우의 상을 당하여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고 비처럼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 팔십이 이미 지났는데도 지극한 정이 돈독함은 이와 같았다. 자손들로 하여금 나쁜 것을 제거하고 널리 배우게 하여 사류들 사이에 이름을 날리게 하였으니, 이것은 자손들을 잘 인도함97)이 진실로 지극한 것이다.병자년(1936)에 회혼례의 잔치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풍수의 감회98)가 얼굴과 말에서 넘쳐나니, 벗인 육봉(六峰) 이종택(李鍾宅)이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향년 86세로 경진년 정월 28일 돌아가시니, 하갑리(下甲里) 앞 산기슭 모좌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평산 신씨 윤성(允成)의 따님으로, 시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공경하였으며,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며 동서를 대하고 비복을 부리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 때 말을 급히 하거나 낯빛을 바꾸지 않았으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쓰는 물건은 박하였으며 타인에게는 두텁게 베풀었으니, 친족의 부녀자들이 공정하게 칭송하면서 자신들은 그에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대개 공의 어짊은 내조 덕분이었다. 신사년 11월 8일에 돌아가시니 태어난 정사년에서 향년 85세로, 두 봉분으로 묘소를 만들었다. 한 아들은 채영(采永)이며, 네 손자는 성원(聖元), 도원(道元), 기원(琦元), 희원(希元)이며, 두 손서는 고학주(高鶴柱)와 김형겸(金炯謙)이다. 성원은 3남 2녀를 두었고, 도원은 2남 3녀를 두었고, 기원 1남 2녀를 두었고, 희원은 1남을 두었고, 학주는 2남을 두었고, 형겸은 1남을 두었으니, 난초와 옥이 바야흐로 무성하니 음덕이 다 하지 않았다.삼가 생각하건대 《서경》에서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한다."99)라 하였으며, 《시경》에서 "마음에 따라 우애한다."100)라 하였으니, 효도와 우애는 실로 사람 마음속의 본성이다. 그러나 부자는 하나로 통하는 친함이 있지만 형제는 각자 나뉘는 사사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효도는 오히려 쉽지만 우애는 어려우니, 효도하면서 우애가 지극하지 못한 경우는 있기는 하지만, 우애하면서 효도하지 않는 자는 없다. 공이 우애로 이름이 났는데 효도 또한 더 보탤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증험할 수 있다. 대개 공의 심력은 견고하며 덕성은 온화하고 두터우며 흉금은 우아하고 도량은 넓었다. 평생 행한 것이 효성과 우애 이외에도 또한 타인보다 뛰어난 것이 있는데, 기록할 만한 것으로는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려 중년 이후로 자못 부유하였음에도 자신이 쓰는 물건은 덧보태지 않았기에 자손들이 지나치게 아끼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눈물을 쏟으면서 "내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는데 모친에게 이바지하는 것도 넉넉하지 못하여 종신토록 한이 되었다. 이것도 넘치는 것인데, 차마 더 보태겠느냐."라 하였다. 다만 손님을 접대할 때 음식을 풍부하게 차리니 집안에 신발이 항상 가득 찼으며, 비록 대단히 가난한 자라도 똑같이 대하였다.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여 붕우들이 빚을 내가거든 때가 되어도 갚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친구가 늙었는데 봉양하는 이가 없으면 그 문권을 찢어버렸다. 말세의 습속은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인데,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를 갉아먹는 것은 소작인들에게 더욱 심하였다. 공의 밭을 소작 낸 자들은 이 도조가 저렴하여 쌀을 조금 바쳤는데도 간혹 해를 연이어 도조를 내지 못하는 자들이 있어도 그 밭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넘겨보고서 도모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치로 타일러서 말하기를 "저들은 도조까지 다 먹어도 오히려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는데 지금 만약 거둬들인다면 이는 구덩이에 밀쳐서 빠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젊었을 때 타인으로 인해 화재를 당하여 집안 재산과 기물들이 모두 재로 변하고 말았다. 공이 밖에서 돌아와서 천천히 이르기를 "내가 받은 운명이 기구하여 남은 재앙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실로 한 일이라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느냐. 더욱더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는다면 지금의 재앙이 훗날의 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겠는가."라 하니,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감복하였다.만년에 집안의 손자가 타인의 말을 잘못 듣고서 토지를 거의 다 잃게 되었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서 손자를 불러다가 깨우치기를 "내가 재물을 잃은 것에 마음 아파하겠느냐. 재산을 불렸으나 모친을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도리어 너희들이 뜻을 잃고 허물을 더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다. 물건은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이것은 아까울 것이 없다. 스스로 힘을 쏟아서 다 해야 할 것은 효도와 우애, 그리고 학문인데, 빈천과 근심 걱정은 너를 옥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로 인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힘쓸 바를 더욱 힘쓴다면 그 득실은 대단히 차이가 날 것이다. 깊이 유념하라."라고 하였다. 이치를 분명하게 보고 정대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은 비록 옛날의 어진 군자라도 어찌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공은 신체가 약하고 작아서 옷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자못 담력과 지략이 있어서 태산이 무너져도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는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모친의 병에 약을 구하러 밤에 장령을 넘었는데,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공이 기르는 개처럼 꾸짖으니 호랑이가 머리를 낮추고 엄숙하게 듣는 것 같았으며, 길을 호위하여 집에까지 오니, 사람들이 동물들도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말과 웃음은 화락하였으며 온화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그러나 일찍이 경기도의 묘사에 참여하였을 때 종회에 벌열임을 믿고서 거칠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이치를 들어 꾸짖는데 엄준한 말로 거세게 지척하니 그 사람이 두려워하며 복종한지라 좌중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공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온화함과 엄격함을 아울러 지님이 또한 이와 같았다. 만일 지위를 얻어 큰일을 맡았다면 넉넉하게 처리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총괄하건대, 말세에 쉽게 얻지 못할 인물이라 하겠다. 명은 다음과 같다.삼우당이 있으니 三友有堂갑평리라네. 于甲之村노래는 〈상체〉101)에 오르고 歌登常棣경계는 〈사간〉102)에 있어라. 戒存斯干형제가 화락하고 즐거우면 和樂且湛부모는 마음이 편안하도다. 父母順安자사가 가르침을 두었으니 思聖有敎효도하며 우애하라 하였어라.103) 歸友于孝근본이 이미 섰으니 本旣立矣어찌 도가 생기지 않으랴. 何道不生관을 쓴 이후로 팔순이 넘어서도 自冠踰耋많은 선을 다 갖췄어라. 衆善畢能가난할 때 청렴하고 貧而廉潔부자 되어 교만하지 않누나. 富不驕盈공문에 부끄럽지 않나니 不愧孔門자공의 마음이어라.104) 端木之情재물의 얻고 잃음은 마음에 담지 않나니 忘懷得喪손자에게 학문을 권했노라. 勉孫學問주자와 뜻과 암합하니105) 暗合晦翁필생의 소원이었도다. 究竟之願사나운 호랑이를 꾸짖어 순하게 하니 叱馴猛虎호연한 기운이 발한 것이라. 浩氣之發공에 대한 말은 듣기에 흡족하니 言足聽聞내가 그 전체를 모았도다. 我撮本末아! 지금과 이후에 嗟今與後지나는 자는 예를 표할 것이라. 過者其式 維高敞郡甲坪之里, 姜氏之門, 有兄弟三人, 友悌特異者, 長諱喆欽、仲諱尙欽、季諱潤欽. 月朝家交口稱美, 扁其堂而記其實, 長曰三友、仲曰孝友、季曰友于. 幼時買糖若干, 兄弟相讓不食, 竟至消盡, 里傳美談. 稍長, 日聚湛樂, 非甚不得已, 須臾不相舍. 及各娶婦居異室, 物無爾我, 兄糞弟田, 弟耘兄苗, 諸娣姒亦如之, 蓋絶無而僅有也. 三友公最後沒, 而且一紀墓木拱矣, 嗣子釆永以族弟浩永撰狀, 屬余碣銘, 余誼在通家, 知德者詳, 不可辭. 公字士吉, 其先晉山人, 在羅、麗顯甚. 麗末, 大提學諱淮仲守罔僕節, 圃、牧齊名. 三傳而諱澂, 燕山時, 副提學, 以直見黜, 中宗反正, 拜禮曹參判, 再使明朝, 風儀詞藻, 華士嘆賞. 子諱億, 翰林知製敎. 二傳而淸溪逸人諱恂, 丙子難後, 南遯爲高敞人, 是爲公八世. 考諱達重, 妣, 平澤林氏文煥女. 公以哲宗乙卯七月十日生. 六歲而孤, 鞠於母家, 舅氏嘗以事逮獄, 公年僅齠齔, 隆冬雨雪, 日再傳飯不違時, 胥隷嗟異. 丙子, 奉母還鄕, 耕樵供旨. 歲大侵, 有時絶火, 公私周賑, 一無所受, 人稱廉潔. 約二弟曰 : "吾家不天早孤, 而老慈在, 不思所以便養, 是不子." 胥勖勤苦, 漸得紓力, 甘脆不匱, 母夫人安之. 痛早背嚴顔, 盡心封塋儀物祭田, 以永苾芬, 夫日, 先期齋沐, 諸具悉躳檢曰 : "不如此如, 不祭." 己亥, 丁內憂, 頓絶方蘇, 送終無憾, 泣血盡制, 如古之善居喪者. 舅氏沒, 辦備喪葬, 收成遺孫, 資以田宅. 季弟嬰奇疾, 調護慰藉, 靡不用極. 及其不救, 撫成子女, 厚於己出. 遭仲弟喪, 數日不食, 淚如雨下, 時則大耋已過, 而至情彌篤如此. 敎子孫割害縱學, 使知名士流間, 此其式穀誠至也. 丙子, 不許回巹飾喜, 風樹之感, 溢於色辭, 執友李六峰鍾宅, 作詩慰之. 享年八十六, 以庚辰正月二十八日卒, 葬下甲里前麓■坐. 配, 平山申氏允成女, 孝於姑, 敬於夫, 承祀接賓, 處妯娌御婢僕, 人無間言. 平居, 無疾言遽色, 不以貧富爲欣戚, 奉身薄而施人厚, 族親婦女, 公誦以爲不可及, 蓋公之賢, 內助爲多. 辛巳十一月八日卒, 距生丁巳, 爲八十五歲, 墓雙封. 一子, 釆永, 四孫, 聖元、道元、琦元、希元, 二孫婿, 高鶴柱、金炯謙. 聖元三男二女, 道元二男三女, 琦元一男二女, 希元一男, 鶴柱二男, 炯謙一男, 蘭玉方茁, 福蔭未艾也. 竊惟《書》云 : "惟孝, 友于兄弟." 《詩》曰 : "因心則友." 孝友, 實人心之秉彛. 然父子爲一統之親, 兄弟有各分之私. 故孝猶易, 而友則難, 孝而友未至者, 容有之, 未有能友而不能孝者, 觀公之以友著名, 而孝亦蔑加焉, 可驗矣. 蓋公心力堅固, 德性和厚, 襟量雅曠, 平生行治, 孝友以外, 亦可過人, 而可書者勤儉理家, 中身頗饒, 然自奉無加, 子孫請勿過薄, 則泫然曰 : "吾早孤, 而供母亦未充, 終身茹恨. 此而濫矣, 忍益之乎." 惟於待客豊腆, 戶屨常滿, 雖極貧者, 一視之. 輕財好義, 朋舊稱貸, 及期不責報. 親老無養者, 折其券. 末俗貪饕, 富之剝貧, 於佃人尢甚, 而佃公田者, 稅廉斗低, 或有連年逋稅者, 而不收其田. 人有窺而圖之者, 則理諭之曰 : "彼幷稅全食, 猶不免飢, 今若收奪, 是非推納溝中乎." 少時因人被火灾, 家産什物盡化灰燼, 公自外來, 徐曰 : "吾賦命嶮巇, 餘孼未盡, 天實爲之, 伊誰怨尢. 動忍增益, 今日之厄, 安知不爲後日之福乎." 人服其雅量. 晩年家孫, 誤聽人言, 損土殆盡, 公不以介意, 引孫勉諭曰 : "吾病於傷哉. 畧營産業, 而恨不逮養, 反慮汝曹之損志益過, 今果然矣. 物無常主, 此不足惜. 所自盡者, 孝友文學, 貧賤憂戚, 所以玉汝. 因是警惕, 益勉其所當勉, 則得失相萬, 念之." 其見理明達 ; 垂訓正大, 雖古之賢君子, 何以加此. 公體幹弱小, 若不勝衣, 然頗有膽畧, 有泰山崩而色不變底氣像. 嘗慈癠問藥, 夜踰長嶺, 有虎遮路, 公叱之如畜犬, 虎低頭若肅聽, 護行至家, 人謂異感. 言笑樂易, 和氣流動, 然嘗至畿甸墓祀, 宗會有藉其閥閱, 加以悖慢者, 公據理執咎, 嚴辭峻斥, 其人畏服, 一座肅穆. 公之剛柔兼全, 和厲幷至, 又如此. 如使得地而當大事, 則亦所優爲, 可知矣. 總之, 爲衰世不易得之人物也. 銘曰 : "三友有堂, 于甲之村. 歌登〈常棣〉, 戒存〈斯干〉. 和樂且湛, 父母順安. 思聖有敎, 歸友于孝. 本旣立矣, 何道不生. 自冠踰耋, 衆善畢能. 貧而廉潔, 富不驕盈. 不愧孔門, 端木之情. 忘懷得喪, 勉孫學問. 暗合晦翁, 究竟之願. 叱馴猛虎, 折服悖人. 浩氣之發, 言足聽聞. 我撮本末, 俾鑱阡石. 嗟今與後, 過者其式. 품평하는 이 '월조(月朝)'는 인물평을 이른다. 후한 영제(靈帝) 때 여남(汝南)의 허소(許劭)가 그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향당(鄕黨)의 인물을 품평하기 좋아하여 매달마다 그 품제(品題)를 고쳤던 것을 가리킨다. 어느 날 조조(曹操)가 허소를 찾아가 자신에 대해 품평해보라고 강요하자, 허소는 "그대는 치세에는 유능한 신하이고,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 될 것이다.〔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라고 하였는데, 조조가 이 말을 듣더니 기뻐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後漢書 卷98 許劭列傳》 《資治通鑑 卷58 靈皇帝中》 자손들을 잘 인도함 식곡은 《시경》 〈소완(小宛)〉에 "너의 아들을 가르쳐서 선(善)을 하는 것을 본받게 하라.〔教誨爾子 式穀似之〕"라는 말에서 나왔다. 풍수의 감회 자식이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공자가 길에서 구오자(丘吾子)를 만났을 때, 구오자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 하면서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서 풍수지탄(風樹之歎)이란 성어가 나왔다. 《孔子家語 卷8 致思》 오직……우애한다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에 보인다. 마음에 따라 우애한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에 따라 우애하사 그 형과 우애하여 그 경사를 두터이 하시어 영광을 형에게 주셨다.[維此王季, 因心則友, 則友其兄, 則篤其慶, 載錫之光.]" 하였다. 〈상체〉 형제의 우애를 읊은 시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들어 있다. 〈사간〉 집안이 화평하기를 축원하는 시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들어 있다. 자사가……하였어라 앞의 《서경》 〈군진〉의 말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인용하였다. 자사의 가르침이란 말은 미상이다. 자공의 마음이어라 단목은 단목사(端木賜)인 자공(子貢)을 가리킨다. 자공의 마음은, 자공이 공자(孔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라고 묻자, 공자는 "좋기는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기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라고 대답한 것을 가리킨다. 《論語 學而》 주자의 뜻과 암합하니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서 "집이 혹시 가난하더라도 가난 때문에 배우는 것을 버리지 말 것이요, 집이 만약 부유하더라도 부유한 것을 믿고 학문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라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위재공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危齋金公墓碣銘【幷序】 옛날 우리 선사 구산 전 선생의 문하에는 국중에서 배우러 온 선비들이 무려 천으로 그 수를 헤아렸는데, 다들 순수하고 진실되며 성실하고 근면하다는 똑같은 말로 위재 김공을 칭송하였다. 선생께서도 또한 일찍이 "문백(文伯)은 대단히 정성스럽다."라고 하였으며, 또다시 "문백은 이치를 공변되고 올바르게 보아 마음 씀이 진실되니 여러 제자들에게서 찾아보아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으니, 이 말에서 공을 알 수 있다.공의 휘는 병주(炳周)로, 문백은 자이다. 경주 김씨는 고려 말 충신 판서 충한(沖漢)이 현달한 조상이다. 본조에 들어와서 순절하여 참판에 추증된 효남(孝男)이 공의 10대조이다. 증조는 치태(致泰)인데, 효성으로 교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홍두(洪斗)이다. 부친은 석환(錫桓)이며, 모친은 벽진 이씨 의준의 따님이다. 고종 기사년(1869) 11월 20일에 임실현 도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정성스럽고 독실하게 부모를 섬겨 뜻과 존체를 잘 받들어 봉양하였다. 계사년(1893)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대단히 슬퍼하면서도 예절에 맞게 하였다. 10년이 지나 부친상을 당하여서도 또한 그러하였는데 슬픔은 더욱 심하여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새었다. 서른 살에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실제 학문에 종사하였다.신축년(1901)에 처음으로 전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살림이 대단히 어려워 농사를 지으면서 책 읽기를 3년 하였는데 더욱 분발하고 감내하니, 선생이 가상하게 여겨 그 집을 위재(危齋)라고 명명하고 〈위설〉106)을 지어 주었다. 그 내용은 인심(人心)은 지극히 위태로우니 항상 위태롭게 여기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일찍이 선생이 묻기를 '야기(夜氣)는 무엇인가.'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기질로 본래 청수한 기입니다."라 하니, 선생이 그렇다고 하였다. 인하여 기를 밝히는 것이 이치를 밝히는 뜻에 대하여 말하면서 권면하니, 공이 깊이 체득하고 힘써 행하였다. 선생이 평소 말한 소심(小心)으로 성(性)을 받든다든 것과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말 등 수 백 마디를 기록하여 《문사록(聞斯錄)》이라고 명명하고 때때로 보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스승 섬기기를 부모님 섬기는 것처럼 하였으니, 정미년(1907) 겨울에는 10사(舍, 30리) 거리인 공산까지 쌀을 짊어지고 날랐으며, 기유년과 경술년에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절해의 고도에서 선생을 모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으며, 설날에는 신위를 차려놓고 곡하였다.스승 원고의 간행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영남에 모였는데, 마침 호남에 인가를 받아 간행할 수 없다는 논의가 일어나니, 공은 기꺼이 호남 쪽의 편을 들었다. 동문에 오진영이란 자가 있었는데, 영남의 주장을 주도하여 인가설(認可說)을 내어서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인가를 받을 뜻이 있었다."라 하였으며 "헤아려서 하라고 하셨다."는 말을 날조하여서 선생이 그렇게 하였다고 속였다. 공이 변론하기를 "선사가 남긴 편지에 분명하게 말하기를 '간행하여 배포함을 요청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보이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그 의리가 해와 별처럼 밝은데, 어찌 아주 조금이라도 인가를 받을 뜻이 있었겠는가. 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이기려고 마음을 세우려 한다면 마땅히 '선사께서 원래 인가를 받을 뜻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의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인가를 받아 간행해야 한다.'라고 해야 하니, 이는 선사에게 스스로 죄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이에 선사를 끌어다 무함하고서 선사를 절조를 잃은 구덩이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사슴을 쫓다가 태산을 보지 못한 것'107)에 해당한다."라 하고서 마침내 동지들과 성토하였다. 일찍이 증조부의 묘도 문자를 오진영에게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 물리치면서 "스승을 속인 자의 글을 어찌 쓰겠는가."라 하였다.공의 모든 동정(動靜)은 학문에서 힘을 얻었기에 규모가 정연하고 엄정하여 일찍이 거칠거나 어긋나지 않았으니, 술을 비록 많이 먹었더라도 조금도 실수하지 않았고, 관례와 혼례에 반드시 삼가(三加)108)와 친영을 하였다. 여러 차례 참척(慘戚)109)을 만났지만 이치로 자신을 다스려 마음을 누그러뜨렸으며, 집안이 항상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다. 선조의 제삿날에는 비록 고단하여도 반드시 재계하고 목욕한 뒤에 제사를 지냈다. 여러 사촌들과 재산을 내고 애를 써서 10대로부터 부모의 묘소까지 모두 묘갈문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유명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고을의 길흉과 경조사에 반드시 부조를 보냈다. 벗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 끼 정도 먹지 않았으며 매우 친한 경우에는 3일 동안 거친 밥을 먹었다. 마을에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대드는 자가 있어서 집안의 자제들이 화를 내면서 따지려고 하니, 공이 만류하였다. 친지 가운데 세력에 붙따르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자신을 더럽히는 듯 여겨서 그 집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았었다.어떤 이가 '저들의 은사금을 받을 것입니까.'라 물으니, 공은 시로써 답하였다.이익이 비록 이롭지만 또한 해도 되니 利雖爲利亦爲害분별없이 으레 껏 받을 수 없도다. 不可無分一例收아주 조금이라도 염치를 손상하면 오히려 부끄러운데 毫髮傷廉猶有恥더욱이 오랑캐보다 더 심한 원수임에랴. 况乎夷狄更深讐마을에 돈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가 살았을 때 절을 하지 않았으며 죽었을 때 곡을 하지 않았다. 동향에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 체포되었는데, 왜놈 경찰서에서 공이 함께 모의했다고 의심하여 엄하게 심문하여도 공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서명유(徐明儒)란 자는 수의지본실(守義之本實)110)인데, 그 자 또한 경복하였다.강당을 고덕산(高德山) 선영 아래에 지었는데 전 선생이 종율재(宗栗齋)라고 명명하였으니, 율곡을 종사로 삼으라는 뜻이다.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많았는데, 반드시 법복을 입고서 예를 익히고 의를 강론하였다. 두어 고을의 동지들과 존양계를 만들어 스승이 전한 가르침을 미뤄 밝혔으며 사문을 진작시켰다. 매번 달이 밝고 바람이 시원하며 꽃과 새가 난만할 때면 원림에서 노닐면 흉금이 상쾌하고 맑으며 정신이 밝고 환하여졌다. 제자들을 불러 줄지어 앉아 각각 한 편의 논설이나 의의(義意)를 외면 그 즐거움이 흘러 넘쳐 절로 만족스러웠으니, 상상해보면 맑은 경치, 온화한 기운과 서로 흘러 통하는 것이 있었을 것인데, 보고 듣는 이들이 열복하였을 것이다.만년에 풍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는데, 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여 슬퍼하지 않았다. 병자년(1936) 11월 13일 돌아가셔서 고덕산(高德山)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헌영(憲榮)의 따님이다. 아들은 학중(學重), 성중(性重), 일중(一重), 길중(吉重)이며, 딸은 안동 권이호(權彛鎬)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용희(鏞希), 용준(鏞峻), 용기(鏞琪)이다.공의 행동은 관대하고 본성은 솔직하고 올발라서 말을 듣고 행위를 보면 덕기(德氣)가 절로 드러난다. 대개 '순수함과 참됨, 정성과 부지런함[淳眞誠勤]' 네 글자는 학자들이 덕을 쌓는 기반이다. 공의 기반은 참으로 산을 만들어 집을 짓는 것과 같았으니 어디 간들 성취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대체(大體)를 세울 만하며 작은 행동도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하였다. 동문들이 앞자리를 양보하고 선생이 인정하였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내가 공을 살펴보건대 외면으로는 혼후하고 온화하며 내면으로는 총명하고 굳세고 엄하니, 이것은 순수함과 참됨, 정성과 부지런함이 밖에 드러난 공으로 여겨진다.옛날 내가 공의 사랑을 받은 터라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편지에서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형제만 남았다.'라는 말씀하니, 그 지극한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지금 만약 공이 살아계신다면 마땅히 서로 더욱 깊이 알고 은혜를 크게 받았을 것인데, 그렇지 못해 한스럽다.학중이 예순이 넘은 나이로 멀리서 찾아와서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빗돌에 새겨 드러낼 글을 요청하였다. 나는 사안이 중요한데 사람이 미천하다고 사양하였는데, 그 요청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면서 모두 네 번이나 나를 찾아와 요청을 그치지 않으니 어찌 끝내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 서술하고 논하면서 평소 존경했던 마음을 부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머리 회전 빠르고 약아 빠진 무리들은 便儇皎厲도에서 멀어졌어라. 去道遠而공은 이와 반대로라 公反乎此너그럽고 듬직하며 온화하고 평온하도다. 厚重和夷화려한 꽃만 따다 쓰니 掇英摘華비루하도다, 그 문장이여. 陋矣文詞공은 그렇지 않아서 公則不然뿌리를 북돋아 가지가 번창하였도다. 培根達枝곧 도에 가까우니 則近乎道오직 공의 자품이 그러하였고, 惟公天資이치가 뛰어나 글을 이루니 理勝章成또한 공의 문사로다. 亦公之辭임실현이라 任實有縣실제 학문과 부합하고, 實學符玆고덕산이라 高德有山덕이 그처럼 높으니, 德高如之천년 뒤에도 有來千祀이 비명을 볼 지어다. 視此銘詩 昔我先師臼山田先生之門, 國中從學之士, 無慮千數, 而其淳眞誠勤一辭, 稱危齋金公. 先生亦嘗曰 : "文伯悃愊." 又曰 : "文伯見理公正, 用意眞實, 求之諸子, 不多見." 斯可以識公矣. 公諱炳周, 文伯其字也. 慶州金氏以麗末忠臣判書冲漢爲顯祖. 本朝殉節, 贈參判孝男, 其十世. 曾祖致泰孝, 贈敎官. 祖洪斗. 考錫桓, 妣, 碧珍李氏義峻女. 高宗己巳十一月二十日, 生于任實縣道仁洞. 自幼謹篤事親, 志體備養. 癸巳, 丁內艱, 情文俱至, 後十年, 外憂日亦然, 而哀愈甚, 鬚髮爲白. 三十廢擧, 從事實學. 辛丑, 始謁田先生, 生事剝落, 耕且讀三年, 益奮勵忍耐, 先生嘉之, 名其室曰危齋, 贈以危說, 言人心至危, 無時不用危之之功也. 嘗問'夜氣何如.' 公對曰 : "氣質本淸之氣." 先生然之. 因言明氣所以明理之義而勉之, 公深體力行. 記先生雅言小心奉性、尊華攘夷數百言, 名曰《聞斯錄》, 時自省之. 事師如事親, 丁未冬, 躬負米十舍於公山, 己酉庚戌, 間關陪護於絶海諸島. 其沒也, 心喪三年, 元朝設位而哭. 師稿刋議之發, 衆初會嶺南, 適湖南有不認可刋之階, 公右湖而樂之. 同門有吳震泳者, 主嶺出認而曰 : "先師曾有認意", 造出"料量爲之"等語, 以誣先生. 公辨之曰 : "先師遺書明明言, '請願刋布, 決是自辱' 其義炳如日星, 安有毫髮認意. 彼必欲立好勝之私, 則當曰 : '先師元無認意, 在我勢不得不認刋.' 是自得罪於先師也. 不此之爲, 乃援誣先師, 使陷於失節坑塹, 所謂逐鹿而不見泰山者." 遂與同志聲討. 嘗得曾祖墓文於吳, 至是退斥曰 : "焉用誣師者文乎." 公之一動一靜, 皆得力於學問, 故規模井井, 未嘗荒錯. 酒戶雖寬, 靡或有失. 冠昏, 必行三加親迎. 累遭慘戚, 以理自寬, 門戶嘗和而肅. 先忌雖憊, 必齊沐行祭. 與羣從捐財拮据, 自十世至親墓, 幷有碣文, 皆出名人. 鄕黨吉凶慶吊, 必遺以物. 聞友之喪, 一時不食, 親厚者, 三日行素. 里人有加以非理者, 門子弟恚欲辨之, 公禁之. 親知有趨時者, 若將浼焉, 過門不入. 或問'以彼恩金受否.' 公以詩答曰 : "利雖爲利亦爲害, 不可無分一例收. 毫髮傷廉猶有恥, 况乎夷狄更深讐." 里中有受金者, 公生不拜, 死不哭. 同鄕有李靜齋錫庸, 被逮, 自彼署疑公同謀嚴詰之, 公神色不變. 徐明儒者, 守義之本實, 彼亦敬服. 築講舍于高德山先塋下, 田先生命名宗票齋, 言宗師栗谷也. 遠近來學者衆, 必使著法服, 習禮講義. 與數郡同志, 設尊陽契, 推明師傳, 振起斯文. 每値月朗風淸, 花鳥爛漫, 逍遙於園林, 胸次灑落, 神精昭曠, 引從者列坐, 各誦一篇論說義意, 其樂融融自得意, 想有與淑景和氣, 若相流通者, 觀聽悅服. 晩以風痺積苦, 安命不慽, 丙子十一月十三日卒, 葬高德山艮原. 配, 全州李氏憲榮女. 男, 學重、性重、一重、吉重. 女, 適安東權彝鎬. 孫, 鏞希、鏞峻、鏞琪. 公儀形寬大, 性度坦直, 聽言觀儀, 德氣自著. 蓋淳眞誠勤四字, 學者積德之基也. 公之基本, 固爲山築室, 安往不成. 宜樹立之大致, 細行足爲柯則也. 同門讓頭, 函席與之, 豈無其以. 以余觀公, 外而渾厚和柔 ; 內則精明剛嚴, 斯爲淳眞誠勤之顯功也歟. 昔余荷公親愛, 山頹後書, 有'親沒兄弟之喩', 其至意感涕. 今公而在者, 當相知益深, 受惠滋大, 恨其未也. 學重耆年遠顧, 示崔欽齋撰狀, 而請顯刻文. 余以事重人微辭, 則其請愈勤, 凡四踵門而未已, 何敢終辭. 謹按狀敘論, 寓平日景仰之意. 爲之銘曰 : "便儇皎厲, 去道遠而. 公反乎此, 厚重和夷. 掇英摘華, 陋矣文詞. 公則不然, 培根達枝. 則近乎道, 惟公天資. 理勝章成, 亦公之辭. 任實有縣, 實學符玆. 高德有山, 德高如之. 有來千祀, 視此銘詩. 〈위설〉 《간재집》 권14 〈잡저〉에 있다. 사슴을……것 이는 작은 욕심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의미로, 불가의 책인 〈허당록(虛堂錄)〉에 보이는 말이다. 삼가 관례 때 치르는 초가, 재가, 삼가의 절차를 이른다. 참척 아들 딸이나 손자 손녀가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이른다. 수의지본실 미상. 일본식의 이름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긍재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兢齋金公墓碣銘【幷序】 우리 부녕(扶寧, 부안) 김씨는 고려 시대에는 문정공(文正公, 金坵)이 간신을 물리치고 올바른 도를 붙들어 잡았으며, 충선공(忠宣公, 金汝盂)이 공자묘를 설립하였으며, 군사공(郡事公, 金光敍)이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고 자정(自靖)하였다. 이로부터 대대로 바른 학문과 올바른 의리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111)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많았다. 가까운 옛날에 이르러서도 또한 학문과 행의로 이름이 드러난 자들이 그치지 않았는데, 긍재거사 휘 방술(邦述), 자 양선(良善)이 그 한 사람이다.공은 군사공의 증손인 휘 직손(直孫)은 조선에서 현달하였는데, 문과에 합격하여 첨정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추존되었으며, 율곡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기묘명현인 옹천(甕泉) 휘 석홍(錫弘), 문과에 합격하여 사인을 지낸 청수재(淸修齋) 휘 서성(瑞星), 판결사를 지낸 휘 의복(義福), 장사랑을 지낸 휘 양(壤)은 승지공 아래의 4대이며 공의 10대조 이상이다. 부친의 휘는 낙진(洛鎭)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 예운(禮運)의 따님이다.공은 고종 정묘년(1867) 8월 16일에 부안의 조촌(棗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남은 힘으로 학문에 열중하여 성심으로 깨우쳤다. 갑오년(1894)에 변산에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서 내려올 때 동비(東匪)들이 창궐하여 그 세력이 대단히 두려울 정도였는데, 공은 의연하게 올바름을 지켰으며 또한 엄히 배척하니,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물들지 않았다. 경자년(1900)에 부친의 명을 받고 간재(艮齋) 전 선생에게 폐백을 올리고 배알하니 선생이 그릇으로 여겨 아끼면서 뜻을 세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알려주었다. 이에 공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인을 배워서 이를 수 있다.'라 생각하고 글을 숙독하고 깊이 생각하였으며, 스승에게 의심난 것을 물어서 깨우치지 않으면 관두지 않았다. 족형인 성암(成菴) 김연술(金淵述), 중당(中堂) 박수(朴銖)와 함께 서로 학문의 도움을 주며 발전하였는데, 강론한 것은 대부분 심성, 이기(理氣)의 오묘함과 수기치인의 방법이었다.선생이 공의 학문이 깨우친 것이 있음을 알고서 편지로 묻기를 "《중용》 첫머리의 첫 글자인 '천(天)'을 사람에게 있어서 마땅히 성(性)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마땅히 심의 주재로 보아야 하는가."라 하니, 공이 답서를 올려서 "이 천(天)자는 마땅히 상제(上帝)로 보아야 하니, 하늘의 주재자를 제(帝)라고 하니, 제는 바로 하늘의 신입니다. 위로 리(理)에서 근본하고 아래로 기(氣)를 운용하여 형체를 만드는 자로,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군(心君)과 같은 위분(位分)인데, 지극히 신묘하고 지극히 허령하여 뭇 이치를 오묘하게 운용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를 위주로 한다고 여긴다면 괜찮지만 곧바로 리라고 여긴다면 옳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선생이 이에 "논한 바가 매우 좋다."라 하였다. 이에서 공의 조예가 깊음을 알 수 있으며 선생에게 인정을 받은 한 가지 예임을 볼 수 있다.임술년(1922)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의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오진영이란 자가 선생이 일찍이 왜놈에게 인가를 받아 원고를 간행하라는 말씀을 하였다고 거짓을 둘러대니, 공과 많은 선비들이 오진영의 죄를 성토하고 스승의 의리를 밝혔다. 이로 인해 오진영의 무리에게 원수처럼 대우받았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이윽고 세상의 풍조가 더욱 변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투박한 것을 보고 크건 작건 세상의 모든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문을 닫아걸고 손님을 사절하며 자신을 깨끗이 하고 의리를 지켜 문밖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10년이 되었다. 만년에 손수 《사례의절(四禮儀節)》을 정하여 자질(子姪)들에게 주면서 "현재는 갓과 신발의 자리가 뒤집어지고 예의가 땅을 쓴 듯 사라져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였다. 내가 병을 무릅쓰고 이것을 뽑아내었는데, 그 의도가 어찌 쓸데없이 그렇게 했겠느냐. 너희들은 그 뜻을 잘 알아야 한다."라 하였다.임신년(1932) 11월 24일에 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는데, 임종할 때 붙잡아 일으키라고 명하고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누웠으니 평소 올바르게 수양함을 알 수 있다. 상서면 남성동의 선영 아래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 참봉 석환의 따님이다. 외아들을 두었으니, 형직(炯直)이다. 세 딸은 전주 최수홍(崔秀洪), 고부 이병용(李炳湧), 장지평(張志評)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호(禎虎), 정룡(禎龍), 봉철(鳳喆)이다. 손녀는 전의 이명호(李明鎬)에게 시집갔다. 외손은 최병학(崔秉學), 이 아무개이다.공은 충후함으로 본성을 삼고 온자하고 너그러움으로 자질을 이뤄 가난함에도 부모가 그의 효성을 편안히 여기고 늙어서는 거상함에 매우 슬퍼하였다. 형을 섬길 때 사랑과 존경을 모두 갖추어 늙어서도 더욱 지극하였다. 친척을 한결같이 성의로써 상대하여 말하기 전에 이미 신뢰가 있었다. 후진들을 이끌어서 차근차근 자신에게 절실하고 가까운 말로 깨우쳐서 쉽게 이해하고 즐겨 따르게 하니 성취한 자들이 많았다. 성정이 탄이(坦夷)하여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낯빛을 갑자기 바꾸지 않았으며, 또한 득실을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밤에 솥과 그릇, 취사하는 도구 등을 잃어버렸는데 다음날 아침 가족이 공에게 고하기를 "아시는 것이라곤 강학을 그치지 않는 것으로, 평생 염개(廉介)를 절로 드시니 타인에게 돈을 빌리지 않겠습니다."라 하자, "지금 없어졌다고 해도 후에 어찌 반드시 보답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겠느냐. 굶주림과 추위를 참는 것이 더 나음만 못하다."라 하였다. 대개 공의 평생을 살펴보면 대단히 명석하고 염결하며 용단이 있는 군자라고 하겠다. 비록 그 자질이 아름다워 참으로 그러한 것이 있지만 이기(理氣)의 변석은 원두까지 보았고 송백의 절조는 만년의 절개가 더욱 매서웠으니, 삼십년 학문의 공을 속일 수 없다. 오호라! 이러한 내용은 모두 기록할 만하니, 묘 옆 비석에 새겨서 형직의 요청에 부응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부안의 고을에 維扶之鄕대대로 군자라 칭한 가문 있었네. 世稱君子공의 어짊은 維公之賢실로 그 아름다움에 부합하여라. 實副厥美안자는 자주 굶주렸으며 維顔屢空증자는 실천하였는데, 維曾實履오직 공은 그것을 배웠나니 維公學之이에 어질게 되었도다. 斯其賢爾남성의 골짜기는 維洞南星군자를 모신 곳이라. 君子藏只후대 사람들은 維後之人반드시 이곳에서 예를 취하리라. 必式于此 吾扶寧之金, 在麗, 文貞公斥邪扶正, 忠宣公創設聖廟, 郡事公罔僕自靖. 自是以後, 世以正學高義, 繩武濟美, 多聞人焉. 至于近故, 亦以學問行義著名者, 蓋不乏人, 兢齋居士諱邦述字良善, 其一也. 郡事公曾孫, 諱直孫, 顯于本朝, 文科僉正, 贈都承旨. 栗谷先生撰神道碑. 己卯名賢甕泉諱錫弘, 文科舍人淸修齋諱瑞星, 判決事諱義福, 將仕郞諱壤, 承旨公以下四世, 而公之十世以上也. 考諱洛鎭, 妣義城金氏禮運女. 公以高宗丁卯八月十六日, 生于扶安之棗村. 家甚貧, 漁樵以供甘旨, 餘力學文, 以誠得之. 甲午, 敎授學者於邊山, 下時, 東邪猖獗, 勢甚可畏, 公毅然守正而又嚴斥, 人多賴而不染. 庚子, 奉親命, 贄謁艮齋田先生, 先生器重之, 告以立志治心之要, 公自承師敎, 謂'聖人可學而至', 熟讀潛思, 質疑師門, 不得不措. 與族兄成菴淵述、朴中堂銖, 麗澤相長, 所講皆心性理氣之奧, 修己治人之術也. 先生知公學有所得, 以書問之曰 : "《中庸》開首第一字, 在人則當以性看耶, 抑當以心之主宰看耶." 公上答曰 : "此天字, 當以上帝看, 而天之主宰曰帝, 則帝乃天之神也. 上以本於理, 下以運氣而成形者, 此與在人之心君, 同一位分, 則至神至靈, 妙衆理宰萬物者也. 故謂是理爲主則可, 直以爲理則未可也." 先生曰 : "所論甚善." 此爲公造詣之深, 而見許師門之一端也. 壬戌, 先生沒, 行心喪三年. 有吳震泳者, 誣先生以曾有出認刋稿之敎, 公與多士, 討震罪明師義, 以此見讐於震黨而靡悔. 旣而見世風益變, 人心益渝, 知世間一切事, 若大若小, 皆不可爲, 則杜門謝客, 潔身守義, 足不出戶外者, 爲十年矣. 晩年手定《四禮儀節》, 授子姪曰 : "見今冠屨倒置, 禮義掃地, 人化爲獸. 吾之力疾抄此, 其意豈徒然哉. 汝等識之." 以壬申十一月二十四日考終, 屬纊時命扶起, 盥櫛衣冠而臥, 可見平日養正也. 葬于上西面南星洞先塋下酉坐原. 配, 全州李氏叅奉碩煥女. 生一男, 烔直. 三女, 適全州崔秀洪、古阜李炳湧、張志評. 孫, 禎虎、禎龍、鳳喆. 女, 適全義李明鎬. 外孫, 崔秉學、李■■也. 公忠厚爲性, 慈諒成質, 貧窮而親安其孝 ; 耆艾而居喪甚慽. 事兄愛敬俱備, 老而愈至. 處宗族一以誠意, 信在言前. 引接後進, 諄諄諭以切近之言, 使之易入而樂從, 故多所成就. 胸懷坦夷, 曾無疾言遽色, 亦不以得失介意. 嘗夜失食鼎器皿爨具, 明朝家人以告公曰 : "知之講學不輟, 平生廉介自食, 不請債於人." 曰 : "今旣無有, 後安可必報. 不如忍飢耐寒之爲愈." 蓋跡公始終, 可謂善明廉斷君子人也. 雖其資質之美, 固有然者, 而其理氣之辨, 有見於源頭 ; 松柏之操, 彌厲乎晩節. 則三十年學問之力, 有不可誣者矣. 嗚呼! 是皆可書也. 俾刻于墓道, 以副烔直之請. 銘曰 : "維扶之鄕, 世稱君子. 維公之賢, 實副厥美. 維顔屢空, 維曾實履. 維公學之, 斯其賢爾. 維洞南星, 君子藏只. 維後之人, 必式于此.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승무(繩武)와 '제미(濟美)'는 모두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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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惺軒金公墓碣銘【幷序】 성헌처사 김공의 휘는 영우(榮禹), 자는 경범(敬範)으로, 신사년(1941) 12월 2일 남원 백파방 내기리의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태어난 고종 신미년(1871) 5월 7일에서 향년 71세로, 본리 오현의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후에 마을 앞 산기슭 인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6년이 지나 사자(嗣子) 만철(萬喆)이 염와(念窩) 안공이 지은 행장을 들고서 7사(舍, 30리)의 거리를 달려와 나에게 묘갈명을 요청하였다. 나는 실로 글을 잘 짓지 못하니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공에게 화수계의 친함이 있으니 금란 같은 사귐112)이기 때문에 명을 짓는 것이지 글을 잘해서가 아니니 그렇다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삼가 생각건대 부녕(扶寧, 부안) 김씨는 실로 신라 경순왕의 태자인 일(鎰)에서 나왔는데, 위로 역사를 논하는 자들은 '동경의 의열이며 북지의 영풍'113)이라고 태자를 칭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평장사 문정공(文正公)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불교를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붙들어 세웠으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군주를 높였다. 고려가 망할 때 군사 휘 광서(光敘)는 새나라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절개를 지켜 관향인 부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문과에 합격하여 군수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충경공(忠景公) 휘 익복(益福)은 임금의 일에 목숨을 바쳤다. 대개 윗대의 조상 이래로 한 줄기 정기가 공에게 전해졌으니, 본성은 강직하고 자질은 곧아서 나약하고 유순하여 남에게 굽히는 모습이 없었으며, 어깨를 웅크리며 아첨하는 것을 보면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고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자 하였는데 참으로 행장에서 말한 것처럼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 어진 이는 집안 가문의 전통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론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충경공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낸 휘 지성(之聲)은, 진사로 교관에 추증된 휘 연(沇)의 아들이며, 백부로 인해 교관에 추증된 휘 유(瀏)의 후손인데, 이 분이 공의 10대조이다. 휘 구감(九鑑), 한석(漢奭), 경상(璟相), 형술(瀅述)이 공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으로, 모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모친은 성산 이씨, 흥성 장씨인데, 공은 장씨 소생이다. 어려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꾸미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사람들이 특출하다고 여겼다. 장성하여 부모를 모실 때 그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드렸고 아우를 사랑함에 그 화락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병든 여동생을 불쌍히 여겨 의식을 절약하여 밭과 집을 주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며, 간혹 음식이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집안 식구들도 또한 기쁘게 맞이하였다. 마을 일을 바르게 처리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곤욕을 겪다가 살 곳을 잃은 자가 있게 되자, 여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극력 구제하였다.정유년(1897)에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세 선생을 찾아뵈니, 연재가 이름과 자를 지어주면서 권면하였다. 계묘년(1903)에 보리농사가 흉년이 들어 큰 빚을 지게 되자 몸소 곡식을 사왔으니, 한 마을이 그에 힘입어 소생하게 되었다. 갑진년(1904)과 정미년에 연달아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과 예절을 모두 지극히 하여 거상(居喪)을 잘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기유년(1909)에 진사 고광수(高光洙)가 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일은 실패하여 숨어 다녔는데, 일본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집을 불 질러 버리는 등 그 재앙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와서 몸을 맡기자 공이 받아주니,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 병인년(1926)에 여러 친족들과 풍곡(風谷)의 충경공(忠景公) 재실을 중수하여 자못 웅장하였는데, 실제로는 공이 홀로 애써서 완성한 것이다.임신년(1932)에 금산 단향소(壇享所)의 여러 사람들이 단을 헐어버리고 사원을 건립하려 하였는데, 갹출한 돈이 흘러넘쳐 일이 너저분하고 더럽게 되었다. 공이 편지를 보내 그만두게 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이에 금산으로 가서 충경공의 위패를 가지고 돌아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원이 철폐되니 사람들이 공의 밝은 식견과 정밀한 의리에 감복하였다. 병자년(1936)에 돈암서원(遯巖書院)의 향사에 헌관이 되었는데, 제사를 마치자 여러 사람들이 휴정서원(休亭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을 중건하자는 의논이 매우 강하게 일어나서 일이 곧 시작하게 되었는데, 공이 정색하면서 "서원을 철폐한 것은 이미 임금의 명이 있었는데, 서원을 설립하는 것은 다만 임금의 명이 없이도 행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으면 신도 또한 흠향하지 않으니, 그 이치는 참으로 그렇습니다."라 하였으며, 끝맺으면서 '태산이 임방만 못하는가.'114)라는 말을 거론하니, 일이 마침내 수그러들었다.정축년(1937)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태자의 묘가 비로봉 아래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성묘하고 돌아왔다. 제전(祭田)을 두어 길이 제사지내 후손의 정성을 다하자는 뜻으로 부안의 종중에 가서 상의하였는데, 의논이 통일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년 이후로 때때로 유명한 산과 아름다운 강, 큰 도회지를 유람하며 가슴속의 답답함과 강개함을 풀어내니 티끌세상 너머로 날아오르는 생각이 일었다. 비록 본성이 빈객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동도주(東道主)115)라 칭하였지만, 그러나 널리 대중을 사랑해도 어진 이를 더 가까이 했으니, 권탁(權度), 약와(約窩) 정순만(鄭淳萬), 염와(念窩) 안치수(安致洙), 조재(操齋) 양기묵(梁箕默) 등이 막역한 벗이다.부인은 함안 조씨 감역 인규(仁奎)의 따님으로, 어계(漁溪) 려(旅)의 후손이다. 아들은 만철(萬喆)과 백철(百喆)이며, 딸은 창원 정해수(丁海洙), 전주 이기종(李起宗), 전주 이기돈(李起墩)에게 시집갔다. 만철의 아들은 종수(鍾秀)이며, 딸은 풍천 노상우(盧相佑), 죽산 박환주(朴煥柱), 양천 허즙(許楫)에게 시집갔다. 백철의 아들은 종옥(鍾玉), 종숙(鍾淑), 종우(鍾宇), 종욱(鍾旭)이다. 해수의 아들은 상렬(相烈), 상섭(相燮), 상종(相鍾)이다. 기종의 아들은 강원(康垣), 강훈(康勳), 강현(康鉉)이다. 기돈의 아들은 강화(康化)이다.오호라! 공은 사람의 사특함을 미워하여 장차 자신을 더럽히는 듯 하며, 사람의 어려움을 급히 도와 화복에 동요되지 않았다. 강포한 이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붙들어 주었으며 억울한 이를 펴주고 원통함을 펼쳐주었으니, 공의 소문을 듣는 자는 유사에게 올바름을 하소연하려 하지 않았다. 공은 돈암서원에서 주장을 제기하여 두 서원의 중수를 저지하였으며, 금산에서 홀로 깨끗하여 선조의 위패를 받들어 돌아왔다. 대개 정직하고 공평하며 정밀하고 확고하니, 총결하건대 공은 의를 숭상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어진 이를 좋아하여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으며 선현을 존모하여 아주 먼 세대까지 추급하였고, 대중을 구원하려 가뭄에 몸소 곡식을 사왔으며 손님을 대접함에 자주 쌀독이 비어도 기쁜 마음을 다하였으니, 또한 어찌 그리 마음이 따뜻하고 어진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그러므로 "한갓 강직하고 굳센 자질만 알고 마음 씀씀이의 어짊을 알지 못하는 자는 공을 깊이 아는 자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에 명을 짓는다.오현의 소나무 어찌 그리 우뚝한가 烏峴之松何亭亭군자의 곧음과 견고함이 함께 하고, 君子貞固與幷백파의 대나무 어찌 그리 무성한가 白坡之竹何猗猗군자의 덕과 선이 그와 같아라. 君子德善如之내가 비석의 시를 짓나니 我述銘詩흥이면서 비로다. 興而比而천백 년 뒤에도 有來千百과객은 반드시 예를 표하리라. 過者必式 惺軒處士金公諱榮禹字敬範, 以辛巳十二月二日歿于南原之白坡坊內基里舍, 距其生高宗辛未五月七日, 壽七十一, 葬于本里烏峴之艮原.【後移窆于村前麓寅坐之原】 越六年, 嗣子萬喆, 抱念窩安公撰狀, 走七舍, 謁墓銘于余. 余實不文, 其何敢焉. 然於公親惟花樹契, 則金蘭以是爲銘, 而不以文, 則可無愧. 窃惟扶寧之金, 寔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尙論者以東京義烈北地英風稱太子矣. 在麗, 平章事文貞公諱坵, 文章道學冠世, 而斥佛扶正, 劾胡尊主. 麗之亡也, 郡事諱光敘, 守罔僕大節, 歸隱貫鄕. 本朝龍蛇之亂, 文郡守贈吏判, 忠景公諱益福, 死王事. 蓋自上祖以來, 一脉正氣, 傳至于公, 則性剛質直, 而無巽軟骩骳之熊, 見人阿好脅肩, 不忍正視, 欲唾其面者, 誠有如狀文所稱, 而賢者不係世類, 吾不信其爲定論也. 忠景公孫, 文郡守諱之聲, 以進士贈敎官諱沇子, 爲伯父贈敎官諱瀏後, 是爲公十世. 諱九鑑、漢奭、璟相、瀅述, 其高、曾、祖、禰, 俱有文行. 妣, 星山李氏、興城張氏, 公, 張氏出. 幼不嬉戲, 恥冶飾, 人異之. 及長事親, 盡怡愉, 愛弟極湛樂, 矜恤病妹, 縮衣食以給田宅. 知舊來者, 戶屨常滿, 或至匱乏, 家衆亦欣然. 鄕里中, 有事直而勢屈, 及困頓失所者, 以言論風力所及, 極救之. 丁酉, 謁宋立齋、淵齋、心石三先生, 淵翁賜名與字而勖之. 癸卯, 麥凶, 負鉅債, 躬行貿穀, 一里賴活. 甲辰丁未, 連遭內外艱, 情文備至, 有善居喪之稱. 己酉, 高進士光洙赴義旅, 事敗隱避, 日兵大索焚家舍, 禍不測. 其全家來投, 公受之, 人爲之大慴而終不動, 竟無事. 丙寅, 與諸族重修風谷忠景公丙舍, 頗傑構也, 而實賢勞而成之. 壬申秋, 錦山壇享所諸人, 毁壇建祠, 醵金狼藉, 事甚慢瀆. 公以書止之, 不從, 乃往錦山, 奉忠景公位牌而還. 未久, 廢享, 人服公見明義精. 丙子, 爲遯巖院祀獻官, 祀畢, 諸人以休亭、忠谷兩院, 重建議甚壯, 而事將就, 公正色曰 : "撤院, 旣有君命, 則建院, 獨不有君命而行之乎. 旣不安人心, 則神亦不享, 其理固然." 終擧'泰山不如林放'之言, 事遂寢. 丁丑, 遊金剛山, 聞太子墓在毘盧峰下, 具酒果展省而歸. 以置田永祭盡裔孫誠力之意, 往商于扶安宗中, 議不一未成. 自中身後, 時遊名山韻水, 通都大邑, 敘胸中之牢騷慷慨, 飄然有塵表想. 雖性好賓客, 人稱東道主, 然泛愛親仁, 亦有權度、鄭約窩淳萬、安念窩致洙、梁操齋箕默, 其莫逆也. 配, 咸安趙氏監役仁奎女, 漁溪旅后. 男萬喆、百喆. 女, 昌原丁海洙、全州李起宗、全州李起墩. 萬喆男, 鍾秀, 女, 豊川盧相佑、竹山朴煥柱、陽川許楫. 百喆男, 鍾玉、鍾淑、鍾宇、鍾旭. 海洙男, 相烈、相燮、相鍾. 起宗男, 康垣、康勳、康鉉. 起墩男, 康化. 嗚呼! 公疾人之邪而若將浼焉 ; 急人之難而不動禍福, 抑强扶弱 ; 直枉伸屈, 聞其風者, 不欲就直于有司. 倡言於遯巖而折兩院之復設 ; 獨淸於錦山而奉還先牌, 蓋其正直公平精確, 總之爲尙義人也. 至於好賢而不遠千里 ; 慕先而追及遙世, 恤衆而親貿穀於大無 ; 待賓而盡歡情於屢空者, 又何其溫然仁人也. 余故曰 : "徒知天賦之剛毅, 而不知用心之惻怛者, 非深悉公者也." 乃爲之銘曰 : "烏峴之松何亭亭, 君子貞固與幷. 白坡之竹何猗猗, 君子德善如之. 我述銘詩, 興而比而. 有來千百, 過者必式." 금란 같은 사귐 '금란(金蘭)'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준말로, 지극히 친밀한 교분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계사(繫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날카로움은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한 말이 그 향기가 난초 같구나." 하였다. 동경의……영풍 이전 금강산 유기를 보면 바위에 이 글이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많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동경은 경주를 말하면 북지는 금강산을 가리킨다. 태산이 임방만 못하는가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참람하게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내려 하는데도 그의 가신인, 공자의 제자 염유(冉有)가 말리지 못하자 공자는 "일찍이 태산이 임방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가?〔曾謂泰山不如林放乎〕"라고 하면서 염유를 나무랐는데, 임방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동도주(東道主)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곳으로 다니는 길손을 대접하여 묵게 하는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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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後松金公墓碣銘【幷序】 공의 휘는 낙성(洛成), 자는 공선(孔善), 후송은 호이다. 부녕(扶寧, 부안) 김씨는 계통이 신라 경순왕의 태자 휘 일(鎰)에서 나왔는데, 그는 나라를 왕건에게 양보하는 것에 대해 부왕에게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니, 그 영풍(英風)과 의열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고려에 들어와서 문정공 휘 구(坵)는 사특함을 배척하고 정도를 붙들어 세웠으니, 그 공이 천추에 남아 있다. 충선공 휘 여우(汝盂)는 나라에 공훈을 세워 단권(丹券, 공신록)을 하사받았으며, 원나라에 들어가 공자 사당의 제도를 그려서 가지고 와 아우인 승인에게 강릉에 사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고려가 망할 때 군사공 휘 광서(光敘)는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관향인 부안으로 돌아왔다. 포은, 목은과 그 절개가 같았으니, 그 일이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이 분이 휘 취(王就)를 낳으셨는데, 조선에서 직장을 지냈다. 3대가 지나 생원 매죽당 휘 종(宗)은 기묘사화에 문을 닫아걸고 수양에 정진하였다. 다시 2대가 지나 휘 굉(鋐)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 2등하였으니,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침랑에 추천되었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공과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사림들이 사원을 세워 제향을 모셨으니, 이분이 죽계 선생이다. 이상이 공의 10대 이상이다. 고조는 안택(安澤)으로 가선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서각(瑞珏) 호는 송은(松隱)으로, 장수를 누려 숭정대부에 제수되었다. 효행이 탁월하여 조정에 추천되었으며 《삼강록》에 실렸다. 내가 일찍이 묘갈명을 지었다. 조부의 휘는 홍석(泓錫) 호는 송암(松菴)으로, 우아한 행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장수를 누려 통정대부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부친의 휘는 영철(永喆) 호는 명와(明窩)로,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개결하며 강직하고 올발랐다. 열재(悅齋) 소공(蘇公)이 묘지명을 지었으며, 나 또한 그 행장을 지었다. 모친은 전주 최씨 흠상의 따님과 나주 나씨 성창의 따님인데, 공은 나씨 소생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단정하고 영민하였으며 천부적으로 효성이 깊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다고 여겼다. 조금 장성하여 족형인 노가암(老可菴) 낙필(洛弼)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각고의 노력으로 글을 익히면서도 평소 살림을 꾸려갔다. 부모를 섬기면서 뜻을 받들었고 형제간에 화락하였다. 근검으로 몸가짐을 하였고 신의와 겸손으로 사람을 상대하였다. 비록 급박한 상황에도 말을 빨리하거나 낯빛을 변하지 않았고 거칠거나 오만한 기운이 없었으니, 이 모두 젊었을 때의 일이다.갑자년(1924)에 흉년이 들어 묘사(墓祀)를 거의 지낼 수 없게 되었는데, 공이 온 힘을 기울여 주선하여 제향이 멈추지 않았다. 송학(松鶴)에 재실을 지을 때 제반 계획을 공이 홀로 맡아 고생하였으며, 경지재(敬止齋), 취성재(聚星齋), 분재(粉齋) 등의 책임을 맡은 것이 두세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전념으로 부지런히 주관하여 선조를 위한 일에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니, 비록 천성이 그렇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고을에서 모두 공을 끊임없이 칭송하였다. 병자년(1936)에 유인 나씨의 상을 당하고 무인년(1938)에 명와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슬픔과 예절을 지극히 하여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거상을 잘한다고 칭송하였다.성격이 매우 급한 맏형을 섬기면서 곡진한 뜻으로 받들었으며, 셋째와 막내 두 아우가 자주 가산을 탕진하였는데 그 때마다 다시 재물을 주어 살게 하였다. 조카들에게는 더욱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끝까지 우애의 정을 잃지 않았다. 형제 다섯 사람이 나란히 집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모여 지내며 정의(情意)가 흘러넘치며 부인 간에도 화목하여 조금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당시 비록 나라를 앗겨 영달의 길에 뜻을 끊어버렸지만, 다만 책을 읽고 농사를 지으면서 선조를 계승하고 후대에 넉넉함을 드리우는 것을 필생의 큰일로 삼았다. 해마다 스승을 맞이하여 자질(子姪)과 이웃 마을 후생 가운데 돈이 없는 자들을 가르쳤으니, 은택을 사람들에게 끼침이 또한 이와 같았다.일찍이 친족 몇 사람과 향산(香山)의 고사116)를 본받아서 계를 만들고 문서를 작성하여 매번 화창한 봄날이나 시원한 가을이면 유명한 산과 운치 있는 강으로 술을 들고 찾아가 감회를 풀었으니, 아득히 세속을 벗어나는 생각이 일었다. 공은 조용하고 과묵하였으나, 사람과 말을 나눌 때면 온후하여 정성스러웠다. 일은 논할 때는 크게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지 않았지만, 의리와 이욕의 관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 뜻을 빼앗을 자가 없었다.간재(艮齋) 전 선생에 대해 지극한 마음으로 따랐으며, 그 문인으로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 공, 견암(堅菴) 김태희(金泰熙) 공, 친족 어른인 나재(懶齋) 익용(益容) 등과 교유하여 그 분들을 존경하였다. 소공에 대해서는 대대로 사이가 좋아 더욱 존모하여 따랐는데, 부고를 듣고서 달려가 만사를 지어 곡하면서 "문장과 치덕이 몸에 갖춰져, 남쪽 지방의 유림 중 으뜸이라. 평소 받은 은혜 어찌 잊으랴, 공사간의 애통함에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라 하였으니, 이에서 지극히 어진 이를 좋아하고 덕을 숭상함을 알 수 있다.계사년(1953) 6월 문정공의 묘소에 참배하고 경지재에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우연히 감기에 걸려 실려서 집에 돌아왔다. 마침내 7월 14일 사시에 명당리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태어난 홍릉(洪陵, 고종) 무자년(1888) 2월 13일부터 향년 66세이다. 사우(士友)들이 모두 선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서 조문하였다. 임시로 명당리 뒷산 구장동 자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여산 송씨 휘순(彙純)의 따님이며 정가공(正嘉公) 서(瑞)의 후손으로, 부덕(婦德)을 지녔다. 두 아들은 관술(寬述)과 동주(東柱)이며, 외동딸은 언양 김병운에게 시집갔다. 형조(炯朝)와 형륜(炯錀)은 큰 아들 소생이고, 형수(炯壽)는 작은 아들 소생이다. 하녕, 송녕, 철녕은 사위 김병운의 소생이다.오호라! 공의 효성과 공손함은 집안에서 이뤄졌고 올바른 행실은 고을에 알려졌으며, 순수하고 검소한 덕과 질박하고 곧은 견해를 지녔으니, 총괄하면 말세에 얻기 어려운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더욱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나는 공을 오랫동안 존경하여 40년을 왕래하며 우의를 나눴으니 다만 친척의 정의(情誼)에 그칠 뿐 아니라 실로 지기의 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끝나버렸다. 저승에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더욱 애통한 한스러움만 간절할 따름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늙고 병들어 죽음이 드리웠지만 그러나 그 아들 관술이 묘갈명을 요청함에 어찌 거절하랴. 마침내 병든 몸을 이끌고 힘을 내어 행장을 살펴 서술한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마음을 세움이 곧고 立心直안의 행실은 돈독하며 內行篤부화함을 끊어버리고 浮華絶다만 옛 것을 본받았도다 維古則빗돌에 새겨 鐫之石백 대 후세에 보이나니 示來百군자의 묘소라 君子宅어찌 예를 차리지 않으랴 曷不式 公諱洛成字孔善, 後松號也. 扶寧之金, 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諫父王讓國不聽, 入皆骨山, 英風義烈振天下. 在麗, 文貞公諱坵, 斥邪扶正, 功存千秋. 忠宣公諱汝盂, 有國勳勞, 賜丹券, 入元摹來聖廟制度, 使弟承印, 創建於江陵. 麗之亡也, 郡事公諱光敘, 志存罔僕, 大歸貫鄕, 與圃、牧同其節, 事載《忠烈錄》. 生諱[王+就], 本朝直長. 三傳而生員梅竹堂諱宗, 己卯之禍, 杜門自修. 再傳而諱鋐, 進壯生二, 學問純篤, 薦爲寢郞, 慕堂洪公, 道義相交, 士林立祠而俎豆之, 是爲竹溪先生, 公之十世以上也. 高祖曰安澤, 贈嘉善戶叅. 曾祖曰瑞珏號松隱, 壽崇政, 孝行卓異, 登剡薦, 載《三綱錄》, 余嘗銘其墓. 祖曰泓錫號松菴, 行誼著世, 壽通政左承旨. 考曰永喆號明窩, 克服庭訓, 端潔剛正. 悅齋蘇公銘其墓, 余亦狀其行. 妣, 全州崔氏欽詳女、羅州羅氏性暢女, 公羅氏出也. 自幼姿性端敏, 孝愛根天, 人皆異之. 稍長受業於族兄老可菴洛弼, 刻苦攻文, 以備日用. 事親承順 ; 兄弟湛樂, 持身以勤儉 ; 接物以信謙, 雖倉卒無疾言遽色乖戾悖慢之氣, 此皆年少時事也. 甲子, 歉荒, 墓祀幾闕, 公極力周旋, 香火不替. 建齋松鶴也, 諸般規劃, 獨賢勞之, 敬止、聚星、粉齋之任不止再三, 而一意勤幹, 爲先至誠, 雖謂之根性可也, 鄕黨咸稱之未已. 丙子, 丁羅孺人憂, 戊寅, 遭明窩公喪, 情文備至, 不以衰病少懈, 人稱善居喪. 事長公偏急之性, 曲意承奉, 叔季二弟, 累敗産業, 輒復資生. 於其姪子, 尢加恩愛, 終不失友于之情. 兄弟五人, 屋宇相連, 朝夕聚待, 情意藹藹, 閨門雍穆, 一無間言. 時雖懷襄, 絶意榮途, 惟以讀書明農, 承先裕後, 爲畢生大事. 課年延師, 敎導子姪幷及隣里後生之無資者, 惠澤之及人, 又如此. 嘗與宗族數人, 倣香山故事, 而樹契成案, 每春和秋凉, 携酒叙懷於名山韻水之間, 悠然有出塵之表. 公恬靜寡默, 然與人言, 溫厚款款. 論事無甚可否, 至義利關頭, 截然分析, 有不可奪者. 於艮齋田先生, 極加心服, 其門人如悅齋蘇公學奎、堅菴金公泰熙、懶齋宗老益容, 遊從而尊敬之. 於蘇公, 則以世好而尢折服之, 聞其訃也, 往哭以挽曰 : "文章齒德備於身, 南國儒林第一人. 平日受恩何敢忘, 公私之通淚盈巾." 此可以見好賢尙德之至也. 癸巳六月, 省文貞公墓, 留敬止齋旬日, 偶得寒疾, 羿而歸, 竟以七月十四日巳時, 考終于明堂里舍, 距其生洪陵戊子二月十三日, 享年六十有六. 士友宗族, 咸以善人云亡相吊, 權葬于明堂後麓龜藏洞子坐原. 配, 礪山宋氏彙純女, 正嘉公瑞後, 有婦德. 二男, 寬述、東柱, 一女, 彦陽金昞雲. 烔朝、烔錀, 長房出. 烔壽, 次房出. 河寧、松寧、喆寧, 金壻. 嗚呼! 公孝悌成於家 ; 行誼聞于鄕, 淳儉之德 ; 質直之見, 總之爲衰世難得人也. 余尢有所嘆惜者, 與公久而敬之, 往來交好四十年, 非但族親之誼, 而實有知己之感也, 則今焉已矣. 九原難作, 疇與相依, 益切痛恨而已. 顧雖老病垂死, 然其子寬述之請墓碣也, 何忍辭諸. 遂力疾按狀而敘之, 銘曰 : "立心直, 內行篤. 浮華絶, 維古則. 鐫之石, 示來百. 君子宅, 曷不式." 향산의 고사 향산은 당나라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로, 백거이가 만년에 향산에서 시승(詩僧)인 여만 선사(如滿禪師)에게 법을 받은 뒤에 여만과 더불어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는 구로회(九老會)라고 명명하고 서로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즐겼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린 편지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저 택술(澤述)은 죄악이 너무 커서 거듭 부모상을 당했으니 무릇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물리치고 용납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선생께서는 거듭 조문하는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말씀이 간곡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니 어느 날인들 감히 잊겠습니까? 여막(廬幕)에 칩거하면서 사문(師門)에 발길을 끊은 것은 감히 상례(喪禮)를 행하느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화(喪禍)로 인하여 부모를 여의고 남은 생이 실로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을 보기가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삼가 모르겠습니다만, 날씨가 점점 뜨거워지는 시절에 선생님의 근력은 도(道)를 호위하며 만강하십니까? 저는 지금 이후로 문득 부모 잃은 외로운 사람이 되어 사일(事一)의 정성63)은 오직 선생께만 올릴 수 있으니 섬길 날이 부족함을 애석해하는 간절히 마음이 어찌 단지 부모님만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오호라! 사람이면 누군들 부친을 잃지 않겠는가마는 누가 저만큼 원통하겠습니까? 또한 사람이면 누군들 세상을 떠나지 않겠는가마는 누가 저의 모친만큼 박절하겠습니까? 모친께서 효로써 시어머니를 봉양한 일은 참으로 친족들과 마을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 대강은 이미 선친(先親)의 행장에 대략 기술하였으니 다 살펴보시기도 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저의 모친은 평생 동안 엄한 시어머니의 뜻에 한결같이 순종하고 백발이 될 때까지 음식 봉양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하루도 자식들의 봉양을 앉아 누리신 적이 없으셨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또 갑자기 뒤따라 돌아가셨습니다. 비록 모친께서는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살아서는 인간세상에서 마음을 다하고 죽어서도 지하에서 끝까지 봉양을 하시겠지만, 저의 애통하고 절박한 심정에 있어서는 하늘에 닿고 땅에 사무친들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 생의 이 한을 호소할 곳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외람되이 말씀드렸는데 곧이어 몹시 죄송스러운 마음이 깊어졌습니다.제가 여묘살이를 하는 것은 감히 구차하게 어려운 일을 행하여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친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늘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려서 선친의 상례(喪禮)를 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평생의 한이다. 모친이 오래 사시고 돌아가신 뒤에 묘 아래에 여묘살이하면서 주자(朱子)의 한천(寒泉)의 규범64)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불행히도 정성을 품은 채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승중(承重)하는 날에 마땅히 선친이 미처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해야 하는데 더구나 소자가 거듭 망극한 변고(모친상)를 당했으니, 조금이나마 어버이께 보답하는 길은 오직 집상(執喪)이라는 한 절목에 있을 뿐입니다. 예경(禮經)에서 말한 (상중(喪中)의) 네 가지 경계할 일 가운데 치아를 드러내 웃지 않는 일이 가장 쉽지 않은데, 사람 만나는 것을 줄이지 않으면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에 이렇게 예방하여 범하지 않으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두 분의 묘가 같은 언덕에 있기 때문입니다.요경(腰經)을 풀고 꼬는 일은 진실로 영구(靈柩)가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구분에 달려 있으니 장사가 끝난 뒤에는 마땅히 그 끝을 꼬아야 합니다.《가례편람》에는 졸곡(卒哭)한 뒤에 꼬아야 한다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하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보내온 편지의 말이 맞다."삼년복(三年服)을 입고 있는데 다시 조모(祖母)의 기년복(期年服)을 입는 자는 조모의 제사를 지낼 때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기년복을 벗은 뒤엔 평량자(平凉子)65)와 포직령(布直領)66)을 착용하고 지냅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보내온 편지의 말이 맞다."《가례》에 궤전(饋奠)과 고증(告贈) 등을 할 때에는 재배(再拜)하고 곡하여 슬픔을 다하거나 곡하여 슬픔을 다 하고 재배한다고 했으니, 이것들이 모두 각각 정밀한 뜻이 있습니까? 성묘하는 경우에는 절과 곡 가운데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합니까?○ 선생이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가례》의 글은 그 뜻이 성묘하는 데 있는 듯하니 절을 먼저 해야 한다. 왕부(王裒)가 성묘할 때 역시 절하고서 무릎을 꿇었다67)고 하니, 이것이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겠다."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은 "연제(練祭) 때 요질(腰絰)은 하얀 칡베를 구하기 어려우면 숙마(熟麻)로 대신한다."라고 하였고, 이소산(李素山 이응진(李應辰))은 "요질을 마(麻)로 만들 때는 두 가닥을 서로 합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견해로는 숙마(熟麻)로 이미 칡베를 대신했다면 또한 마땅히 세 겹으로 꼬는 제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비록 숙마를 사용하더라도 역시 세 겹으로 꼬아야 한다."칡으로 만든 대를 세 겹으로 꼬는 것에 대하여 선현들은 길제(吉祭)를 향하여 조금씩 꾸미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의 요질(腰絰)이든 부인의 수질(首絰)이든 그 예가 같습니다. 부인의 수질의 경우 역시 칡베를 쓰면서도 세 겹으로 꼬는 제도를 쓰지 않는 정밀한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알 수 없다."담제(禫祭)68) 때의 곡(哭)에 대하여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는 평상시의 곡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고,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는 평상시의 곡하는 식과 상중(喪中)의 곡하는 식 둘 다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로는 담제뿐만 아니라 비록 기일(期日)일지라도 또한 상중의 곡하는 식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애통(哀痛)한 마음의 지극한 소리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니 어찌 가릴 겨를이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맞다."출가(出嫁)한 여자가 조모와 모친의 상을 함께 당하여 궤연(几筵)69)에 와서 곡할 때 지극한 정의 애통함은 모친이 중하지만 존비의 구분은 조모가 우선이니, 이때 누구를 먼저 하고 누구를 뒤에 해야 합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모친의 상을 먼저 해야 한다."부친이 먼저 돌아가시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祥)70) 전에 선대(先代)의 신주(神主)를 뒤미쳐 만들어 놓고 제주(題主)하여 봉안하는 것은 길제(吉祭)71)까지 기다려야만 합니까? 이것은 개제(改題)72)와 체천(遞遷)73)이 아닌지라 자기의 속칭(屬稱)74)으로 제주해야 하니, 대상 전이라도 행할 수 있습니까? 만약 길제를 기다린다면 모친상의 대상 이후에 신주를 부위(祔位)할 곳이 없으니 이것이 매우 불편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비록 대상 이전이라도 행하지 않을 수 없다."저의 선친(先親)의 생일은 2월이고, 선비(先妣)의 생일은 9월입니다. 선친의 생일에 사대(四代)의 시제(時祭)75)를 행하고 선비의 생일에 예제(禰祭)76)를 행하고자 하는데, 이는 정(情)이 지나쳐 윗사람을 끌어오는 혐의77)가 없지는 않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윗사람을 끌어오는 혐의는 없다."부친이 먼저 돌아가시고 모친상 중에 선대(先代)의 신주를 뒤미쳐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이미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만 부제(祔祭)78)를 뒤미쳐 행할 때 세 번 술잔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중에 선조를 제사 지내며 세 번 술잔을 올리는 것이 비록 편치 않은 점이 있더라도 선조의 신주에 부제를 지내는 데 중점이 있으니 혐의할 것이 없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상중에 선대의 신주를 뒤미쳐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부제를 지내며 세 번 술잔 올리는 것을 혐의로 여겨서는 안 될 듯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정론(定論)이 없으므로 감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요약하자면 길제까지 기다리는 것도 괜찮다."《가례》에는 오직 조문을 받고 폐백을 줄[受吊贈幣] 때에만 이마를 조아린다고 기록하였으니 이 밖에는 어떤 일이 있든 궤연에 절을 하고 이마를 조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증(贈)하는 것은 큰 절차이니 이마를 조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문을 받는 것은 손님께 절하는 것이니 손님이 어찌 궤연보다 높아서 궤연에서 행하지 않는 중한 예를 행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반드시 정밀한 뜻이 있을 것이니 듣고 싶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조문을 받을 때 이마를 조아리는 것은 손님이 궤연보다 높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조문을 왔기 때문에 스스로 애통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궤연에서 이마를 조아리지 않는 것은 늘 모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군모(君母)79)의 뒤를 이은 자는 군모가 죽으면 군모의 친족을 위하여 상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서자(庶子)가 이미 적자의 지위를 이어받았다면 군모는 바로 친모(親母)이고 낳아준 부모는 서모(庶母)이니 어찌 친모가 죽었는데 그 친족을 위해 상복을 입지 않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치로 말한다면 분명히 이와 같은데 이것은《예기》의〈상복소기(喪服小記)〉의 본문으로 주소(註疏)에 비할 것이 아니니, 또한 쉽게 논파(論破)하기 어렵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시남(市南 유계(兪棨))도〈상복소기(喪服小記)〉의 이 설을 따랐다. 그러나 〈상복소기(喪服小記)〉의 문장은 끝내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에 매옹(梅翁)이 〈조완진(趙完鎭)에게 답한 편지〉에서 시남의 이 설을 정론(定論)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 凙述罪重惡極, 荐遭大禍. 凡在師友之閒, 宜其擯絶不容, 而先生再施唁狀, 辭意懇惻, 感勒骨髓, 何日敢忘? 蟄伏廬次, 絶蹤師門者, 非敢爲執禮而然. 衹緣喪禍, 餘生實愧, 擧頭見人也. 伏不審榴炎漸熾, 先生筋力衛道萬康? 小子今而後, 遽作弧露之人, 事一之誠, 惟在於先生, 則愛日之切, 豈獨爲親地也? 鳴呼! 人孰不喪親, 孰若小子之冤? 抑人孰不違世, 孰若先慈之迫切? 先慈之孝養皇姑, 實族戚鄕黨之無異辭者也. 其槩曾已略述於先人狀, 想或鑑悉於尊覽. 而但恨先慈平生一順嚴姑之志, 甘毳之役白首未懈, 未嘗一日坐享諸子之奉, 姑歿之後, 又遽從而歸, 雖先慈誠孝極至, 生旣盡心於人世, 沒又終養於地下, 然其在小子慟迫之情, 窮天極地, 而豈有盡哉? 此生此恨, 無處控訴, 不覺猥逹至此, 旋切罪悚之至.小子之廬墓, 非敢行苟難而異人也. 特以先人在世時, 常語小子曰: "吾幼未執禮於先考之喪, 是爲終身恨. 母氏百歲後, 廬于墓下, 用遵朱子寒泉之規." 不幸齎誠而先歸. 今在小子承重之日, 宜繼先人未遂之志, 而况小子重遭罔極之變, 則報親之萬一, 惟在執喪一節. 禮經四戒中, 不啓齒一事, 最爲不易, 而非罕接人事, 難乎免矣. 故乃爲此豫防不犯之計, 蓋以兩位墓, 在同岡故也.腰經散絞, 誠在尸柩見不見之分, 則報葬後當絞之. 而《便覽》旣著卒哭後絞之之文, 則當從之乎?○ 先生答書曰: "來示得之."持三年服, 而又有祖母期服者, 參祖母祭奠, 當服期服, 而期服除後, 以平凉子布直領參之耶?○ 先生答書曰: "來示得之."《家禮》饋奠․告贈等時, 或再拜哭盡哀, 或哭盡哀再拜, 此皆各有精義耶? 至於上墓, 則拜哭當何先何後?○ 先生答書曰: "《家禮》立文, 似有義在上墓, 當先拜. 王裒上墓, 亦拜跪云云, 此可爲一據耶!"遂菴曰練時, 腰絰葛白難辦, 熟麻代之, 李素山謂腰絰治麻兩股相合. 然淺見熟麻旣是代葛者, 則亦當用三重之制.○ 先生答書曰: "雖用熟麻, 亦當三重."葛帶三重, 先賢以爲向吉彌飾之意. 男子腰絰, 婦人首絰, 其例一也. 婦人首絰, 亦用葛而其不用三重之制者, 精義何居?○ 先生答書曰: "未詳."禫時哭, 近齋謂當以常時哭, 老洲則常時哭․喪中哭, 兩可之. 然淺見非惟禫時, 雖忌日亦當用喪中哭, 哀痛之至聲, 出自然, 何暇擇之?○ 先生答書曰: "是."出嫁女, 遭祖母與母偕喪, 來哭几筵時, 至情哀痛, 母爲重, 尊卑之分, 祖母爲先, 當何先何後?○ 先生答書曰: "當先母喪."父先亡母喪, 大祥前, 追造先世神主, 而題主奉安, 當待吉祭耶? 此非改題遞遷, 當以自己屬稱題主, 大祥前亦可行之耶? 若待吉祭, 則母喪祥後, 神主無所祔處, 此甚難便.○ 先生答書曰: "雖大祥前, 不得不行."小子先考生日在二月, 先妣生日在九月, 欲以先考生日, 行四代時祭, 先妣生日, 行禰祭, 不無情勝援尊之嫌耶?○ 先生答書曰: "無援尊之嫌."父先亡母喪中, 追立先世神主, 曾已聞命矣. 但追行祔祭時, 不得不三獻, 喪中祭先三獻, 雖所未安, 重在祔先主, 無所嫌耶?○ 先生答書曰: "喪中追造先主, 似不可以祔祭三獻爲嫌. 然此無先賢定論, 不敢質言. 要之, 待吉祭亦可."《家禮》惟受吊贈幣, 特著稽顙, 外此, 凡有事几筵拜, 不稽顙, 可知也. 贈是大節, 稽顙固也. 受吊是拜賓, 賓豈尊於几筵, 而行几筵所不行之重禮耶? 此必有精義, 願聞焉.○ 先生答書曰: "受吊稽顙, 非賓尊於几筵而然, 蓋因其來吊而自致其哀也. 几筵之不稽顙, 以其常侍故歟!"爲君母後者, 君母卒, 則不爲君母之黨服, 此〈喪服小記〉文. 然庶子旣已承嫡, 則君母卽親母也, 所生母卽庶母也, 焉有以親母卒, 而不服其黨之理乎? 以理言之, 則分明如是, 而此係〈小記〉本文 非注疏之比, 則亦難容易辨破也.○ 先生答書曰: "市南亦從〈小記〉此說. 然〈小記〉文, 終是有疑, 故梅翁〈答趙完鎭書〉, 以市南此說, 爲未定論." 사일(事一)의 정성 부모ㆍ스승ㆍ임금을 한결같이 섬기는 정성으로, 부모를 잃고 임금도 없어 스승만 남았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말하기를, "백성은 부모ㆍ스승ㆍ임금 밑에서 사는지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주자(朱子)의 한천(寒泉)의 규범 주희는 40세 무렵에 모친인 축 부인(祝夫人)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치른 뒤에 무덤 가까이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그 이름을 한천정사(寒泉精舍)라 하고는 이곳에 머물면서 《가례(嘉禮)》를 편찬한 일이 있다. 평량자(平凉子) 패랭이. 즉 댓개비로 엮어 만든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상제가 쓰던 갓이다. 유사어로 평량립(平凉笠)이 있다. 포직령(布直領) 상복의 일종이다. 왕부(王裒)가……꿇었다 진(晉)나라의 왕부(王裒)는 부친 왕의(王儀)가 죄 없이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음을 당하자, 은거하면서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과 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절하고 무릎 꿇은 채 측백나무를 부여잡고 슬피 울부짖었다고 한다. 《진서(晉書)》 권88 〈효우열전(孝友列傳)〉 담제(禫祭) 3년의 상기(喪期)가 끝난 뒤 상주가 평상으로 되돌아감을 고하는 제례의식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상일 경우 대상(大祥) 후 3개월째, 즉 상 후 27개월이 되는 달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에 지낸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지내는 담제는 상 후 15개월 만에 지내는데, 즉 소상(小祥) 후 2개월째가 된다. 궤연(几筵) 죽은 사람의 혼백이나 신주를 놓는 의자나 상과 그에 딸린 물건들 또는 그것들을 갖추어 차려 놓는 곳으로 영실(靈室)을 말한다. 대상(大祥) '대상'은 부모의 상(喪) 및 삼년상 등을 치를 때 그 대상이 죽은 후 만 2년 만에 탈상을 하며 지내는 제사이다. 길제(吉祭) '길제'는 상례(喪禮)의 단계를 뜻한다. 우제(虞祭)를 지낸 뒤, 졸곡(卒哭)을 하며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 단계부터 지내는 제사를 '길제'라고 부른다. 상(喪)은 흉사(凶事)에 해당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슬픔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흉제(凶祭) 또는 상제(喪祭)라고 부르며, 이 단계부터는 평상시처럼 길(吉)한 때로 접어들기 때문에 '길제'라고 부른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편에는 "是月也, 以虞易奠, 卒哭曰成事. 是日也, 以吉祭易喪祭."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년상을 마치게 되면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안치하고 길례(吉禮)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러한 제사를 '길제'라고 부른다. 또한 평상시 정규적으로 지내는 제사를 '길제'라고도 부른다. 개제(改題)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는 것을 개제주(改題主)라고 한다. 모든 상례 절차를 마치고 돌아간 이의 신주를 사당에 모실 때, 5대조가 넘어가는 조상의 신주는 묻고,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는데 이를 개제주(改題主)라고 한다. 이 때에 개제주고사를 지낸다. 체천(遞遷) 제사를 맡아 지낼 자손이 끊긴 조상의 신주를 4대 이내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이 대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자기집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속칭(屬稱) 선조에 대한 호칭을 뜻하는 말로, 속은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 따위를 말하고, 칭은 벼슬이나 호ㆍ항렬로서, 처사(處士), 수재(秀才), 몇째 낭(郞), 몇째 공(公) 따위를 말한다. 《이정문집(二程文集)》 권11 〈작주식(作主式)〉 시제(時祭) 한식 또는 10월에 5대조 이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관행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식 또는 10월에 정기적으로 묘제를 지낸다고 하여 시사(時祀) 혹은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 이는 5대 이상의 조상을 모시는 묘제(墓祭)를 가리키며, 4대친(四代親)에 대한 묘제를 사산제(私山祭)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래서 묘사(墓祀), 묘전제사(墓前祭祀)라고 하며,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모신다고 하여 세일제(歲一祭), 세일사(歲一祀)라고도 한다. 예제(禰祭) 9월 중의 어느 날을 택일하여 부모에게 올리는 제사. '예(禰)'는 부묘(父廟)를 뜻하며, 한편으로는 '가깝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의 관행에서는 이행되지 않고, 예서에만 나타나는 제례의 한 종류이다. 윗사람을……혐의 《예기(禮記)》 〈잡기(雜記)〉에 "남자가 조부에게 부제할 때에는 조모를 함께 제사하지만, 여자가 조모에게 부제할 때에는 함께 제사하지 않는다.〔男子附於王父則配 女子附於王母則不配〕"라고 하였고, 그것에 대한 주(注)에 "높은 사람에게 일이 있으면 낮은 사람에게까지 미치지만, 낮은 사람에게 일이 있으면 감히 높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한다.〔有事於尊者 可以及卑 有事於卑者 不敢援尊也〕"라고 하였다. 이것에 의거하면, 선고(先考)의 제사 때에는 선비(先妣)를 함께 제사할 수 있지만, 선비의 제사 때에는 선고를 함께 제사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제(祔祭) '부(祔)'는 조상의 사당에 새 신주를 모시는 것이다. 또한, 부제는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마땅히 다른 사당으로 옮길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자에게는 이 사당에 들인다"고 하는 뜻이다. 졸곡 다음 부제를 지내고 새로운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 혹은 궤연(几筵)으로 되돌려 보낸 뒤, 삼년상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사당에 봉안한다. 군모(君母) 부친의 嫡妻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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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무오년(1918) 上艮齋先生 戊午 일전에 올린 〈노화동이고(蘆華同異考)〉는 간간이 보셨는지요? 대체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 두 어른이 이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데 두 문하의 문인들이 반드시 억지로 모아다 같게 하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이후로 도체(道體)는 형체(形體)가 없고 작위(作爲)가 없으며 리(理)는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없다는 취지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밝혀져 학문(學問)하는 사람들의 다반사로 하는 상담(常談) 같이 되었습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일상적인 것은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남쪽(기정진)에서는 리(理)에는 조종(操縱)과 적막(適莫)84)이 있다는 의론이 나왔고, 북쪽(이항로)에서는 태극(太極), 성정(性情), 공효(功效)의 설이 나와 당시 세상의 새로운 것을 찾는 이들의 이목을 자극시켰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쪽으로 휩쓸려 기뻐 따르면서 두 어른이 성학이 전해오지 않던 비밀을 터득하여 남현(南賢 기정진)과 북현(北賢 이항로)이 천 리나 떨어져 있어도 그 논조(論調)가 똑같다고 하면서 두 어른의 명덕(明德), 심성(心性) 등에 관한 설이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의 거리만큼 서로 어긋나 있음을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어른의 평소의 의론을 총괄하여 논해 보면, 노사의 이른바 리와 태극이라는 것은 외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잃지는 않았지만 리가 기의 주재가 된다고 보는 것이 너무 심하여 〈외필(猥筆)〉85)의 실수를 빚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서의 이른바 리와 태극이라는 것은 실로 심(心)이고 기(氣)이지 다시는 본래면목이 아닙니다. 대개 노사의 재주는 화서보다 뛰어나지만 공부는 화서에 미치지 못하고 화서의 의론은 노사보다 자세하지만 그 견해는 노사에 미치지 못합니다. 노사가 호도(糊塗)함은 얕아서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가 적고 화서가 호도함은 깊어서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가 크니 높고 낮음(高下), 크고 작음(大小), 얕고 깊음(淺深) 사이에서 또 두 어른을 알 수 있습니다. 망령된 의론이 이에 이르니 참으로 세인(世人)들에게 꺼려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선생님 앞에 드러내 고하여 질정(質正)받지 않을 수 없으니 부디 헤아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日前所上〈蘆華同異攷〉, 間垂下覧否? 大抵二丈之相異, 有如此者, 而兩門門徒, 必欲牽合而同之者, 何也? 是必有其故也. 栗尤以降, 道體無形無爲, 理無情意造作之旨, 大明於我東. 有同學問家茶飯常談. 夫人之情, 常則厭之, 而思其新者矣. 迨是時也, 南有理有操縱適莫之論, 北有太極性情功效之說, 以砭起一世思新之耳目. 於是衆皆靡然喜而從之, 以爲二丈得聖學不傳之秘, 而南賢北賢, 相距千里, 其揆一也, 而不及細察其明德心性等說, 燕越相左也. 雖然, 總括二丈平生議論而論之, 蘆沙之所謂理與太極者, 却不失本來面目, 但看得理爲氣主太重, 而至有〈猥筆〉之失. 華西之所謂理與太極者, 實心也氣也, 而非復本來面目矣. 蓋蘆沙之才, 過於華西, 而用功不及華西, 華西之論, 詳於蘆沙, 而其見不及蘆沙. 蘆沙之惑淺, 而害之被人者小, 華西之惑深, 而害之被人者大, 高下大小淺深之間, 又可以知二丈矣. 妄論及此, 固知爲世所諱. 然先生之前, 不容不暴白取正, 幸賜裁敎. 적막(適莫) 적(適)은 어느 사물에 열중하는 것을 말하고 막(莫)은 그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논어(論語)》〈이인(里仁)〉에 다음과 같은 말이 수록되어 있다. "군자는 반드시 하려고 하는 것도 없고, 반드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합리적인 것만을 따를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외필(猥筆)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한 기정진의 글로,《노사집(蘆沙集)》卷16〈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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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무오년(1918) 上艮齋先生 戊午 리(理)는 무위(無爲)의 물(物)이고 기(氣)는 유위(有爲)의 물이니, 유위와 무위의 사이에서 하나는 취산(聚散)이 있고 하나는 취산이 없음86)을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대개 리기(理氣)를 하나의 물(物)이라고 하는 것은 리와 기 두 가지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묘함 때문이지만 그 본색(本色)과 능소(能所)87)의 구분은 끝내 뒤섞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논하면, 문청(文淸 설선(薛瑄)이 이른바 '기는 취산이 있지만 리는 취산이 없다[氣有聚散 理無聚散]'라고 한 것88)은 본색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리기가 서로 떨어지는 병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암(整菴 나흠순(羅欽順))이 이른바 '기의 모임은 바로 모임의 리이고, 기의 흩어짐은 바로 흩어짐의 리이다[氣之聚便是聚之理 氣之散便是散之理]'라고 한 것89)은 도리어 도(道)와 기(器)의 분별에 있어 뒤섞이고 흐리멍텅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만약 기가 모일 수 있고 흩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소이(所以)로서의 리가 있기 때문에 기의 취산이 곧 리의 취산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바로 근원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곧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태극(太極)의 동정(動靜)과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리(理)는 동정(動靜)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주장을 세운다면 아마도 이치를 해치지는 않을 듯한데, 삼가 헤아려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理者無爲之物, 氣者有爲之物也, 有爲無爲之閒, 聚散之一有一無, 可知已矣. 蓋理氣一物云者, 以其二者不相離之妙也, 其本色能所之分, 終有不可得而混之者也. 以此論之, 文淸所謂'氣有聚散, 理無聚散'者, 是從本色上說, 而不爲理氣相離之病. 整菴所謂'氣之聚便是聚之理, 氣之散便是散之理'者, 反不免混淪儱侗於道器之辨也. 若曰氣之能聚能散者, 以其有所以聚, 所以散之理也, 故曰氣之聚散, 便是理之聚散, 則此乃從源頭上說, 而卽濂溪之太極動靜, 晦翁之理有動靜之意也. 如此立言, 則恐不害理, 伏惟裁敎. 하나는……없음 취산이 있는 것은 기(氣)이고 취산이 없는 것은 리(理)라는 말이다. 《회암집(晦菴集)》 권45 〈답요자회서(答廖子晦書)〉에서, 주희가 생사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며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논한 대목에 "성은 단지 리일 뿐이니,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모이면 태어났다가 흩어지면 죽는 것은 기일 뿐이니, 이른바 정신과 혼백에 아는 것이 있고 느끼는 것이 있는 것은 모두 기의 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면 있게 되고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지만, 리의 경우는 당초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 따라서 있게 되고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性只是理 不可以聚散言, 其聚而生, 散而死者, 氣而已矣. 所謂精神魂魄有知有覺者, 皆氣之所爲也. 故聚則有, 散則無, 若理則初不爲聚散而有無也〕"라고 하였고,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 권하(卷下)에서,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讀書錄)》에 '리기는 틈이 없으므로 기(器) 역시 도(道)이고 도 역시 기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하지만, 기는 취산이 있고 리는 취산이 없다는 설을 반복하여 증명한 일로 말하자면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무릇 하나는 취산이 있고 하나는 취산이 없으면 매우 틈이 있는 것이니 어찌 기 역시 도이고 도 역시 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문청(文淸)이 리기에 대하여 또한 시종 두 물(物)로 인식하였으므로 그 말이 때때로 막힘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錄中有云理氣無縫隙故曰器亦道道亦器, 其言當矣. 至於反復證明, 氣有聚散, 理無聚散之說, 愚則不能無疑. 夫一有一無, 其爲罅縫也大矣. 安得謂之器亦道道亦器耶? 蓋文清之於理氣, 亦始終認為二物, 故其言未免時有窒礙也〕"라고 하였다. 능(能)과 소(所) 能과 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원래 能은 주체를 의미하고, 所는 객체를 의미한다. 理氣論에서는 能과 所를 구별하여 말하기 어렵지만, 심성론에서는 心과 性을 能과 所로 구별할 수 있다. 즉 心은 性理를 알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能이고, 性理는 心에 인식당하기 때문에 所인 것이다. 心은 氣에 속하기 때문에 氣 역시 能이고, 理는 性이기 때문에 역시 所인 것이다. 문청(文淸)이……것 설선(薛瑄)은 그의 《독서록(讀書錄)》에서 리를 달에 비유하고 기를 물에 비유하며, 리를 햇빛[日光]에 비유하고 기를 나는 새[飛鳥]에 비유하며, 리를 온열량한(温熱凉寒)하는 소이(所以)에 비유하고 기를 온열량한(温熱凉寒)에 비유하는 것을 통해 기는 취산이 있지만 리는 취산이 없음을 증명하였다. 정암(整菴)……것 《곤지기(困知記)》 〈권하(卷下)〉에서 기는 취산이 있고 리는 취산이 없다는 설선(薛瑄)의 설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흠순(羅欽順) 주장한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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