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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 이예(李芮)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 李芮 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 1451 李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451년(문종 1)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 최덕지를 송별하며 이예가 작성한 시서. 1451년(문종 1) 겨울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를 송별하며 이예(李芮, 1419-1480)가 작성한 시서(詩序)이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 동료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송별시에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고 이예가 쓴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이예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군기시(軍器寺) 직장(直長),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 등을 거쳐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서(醫書)와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사헌, 개성유수,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박학(博學) 다문(多聞)으로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이 글은 후대에 누군가가 원문에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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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진사(進土) 최안손(崔顔孫)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丁酉仲春 全義李炳殷撰 丁酉仲春 李炳殷 崔顔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이 작성한 최안손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李炳殷)이 진사공 최안손(崔顔孫)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안손(崔顔孫)의 자는 술성(述聖)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안손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강직하고 명민하였으며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남에게 굴종하지 않았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한 뒤에 학문에 매진하면서 당대의 석학인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0)과 돈독히 교류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 그가 사망하자 사림(士林) 모두 큰 건물의 대들보와 거목이 부러졌다고 탄식하였다. 최씨의 시조는 문성공(文成公) 아(阿)이며, 그의 선조 최심(崔深), 최구지(崔久之), 최석견(崔石堅) 등 3세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진사공의 부인은 예안김씨(禮安李氏)이며, 부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한두(漢斗)이고, 사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손자는 최천일(崔千一), 증손으로달효(達孝) 증효(曾孝) 창효(昌孝) 대효(大孝) 민효(民孝) 등 5명이다. 진사공의 묘는 완산의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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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在丁酉正月 日旁裔斗洪謹撰)進士崔公諱顔孫墓碣銘 並序 ■■■■■■(中郎將五大孫)成均進士全州崔公諱顔孫字述聖出入寒暄金先生門德學著于時其沒殆四百餘禩而尙未圖顯刻於墓而今焉姑樹之後孫銓木等問序于大耋如炳殷者余何爲哉請益■〔固〕按狀叙次而曰公生于睿宗甲子氣質剛明操守狷介早遊塲屋生進俱中晩入師門於致知力行用功特甚日夕乾惕靜存動察志節冬嶺雪松衿懷秋水寒月晩而喜易凡理氣象数盛衰消長無微不顕時稱易學愽士從遊者當時名碩如奇服齋遵金冲菴凈最相厚而會必談經禮別精微渙然消釋乃已服齋常曰某之深造實得無出其右實我師表觀此槪其人矣成宗癸亥卒士林嗟嘆曰大廈樑折喬木風摧崔氏始祖文成公 阿■朝有諱深大司諫諱久之直提學諱石堅叅議三世俱文科而公之曾祖■■也妣淑夫人達城徐氏配禮安金氏甚有婦德男漢斗進士學行薦叅奉不就孫千一叅奉曾孫達孝曾孝昌孝大孝閔孝二婿南陽洪倜順興安大壽公之墓在完之西■〔道〕吐洞壬坐之原雙兆系以銘曰生長世德之家親灸道學之門趨向旣正愽識多聞推以及人啓発群蒙晩好易象理氣精通至若名利太虛浮雲貞珉不朽於千萬年丁酉仲春上澣全義李炳殷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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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溪公諱連孫墓碣銘幷序噫我崔氏出自淸河來此東土卜居全州自高麗至本 朝科甲連出簪纓相繼湖南人物誌云完山崔李壯元郎又云叅議崔霮之父子諸人淸顯無比爲州人之所景慕則完山謂之客山者良以此也門閥之源來久矣中始祖侍中諡文成公諱阿生中郎將諱龍鳳中郎將生司醞直長諱乙仁直長生檢校戶曺叅議集賢殿直提學諱霮是生藝文舘直提學號烟村諱德之是生護軍諱淍是生長興庫副使諱岱是公之考妣陽城李氏吏曺叅判季茂之女生公公諱連孫字子胤號巖溪成廟庚子爲生員壯元己酉登文科仕宦至都承旨判决事以淸白著世江陵有去思碑公自少至老孝於親恭於兄怡聲下氣而養之旣和且湛而事之動靜爲一鄕之矜式言行爲四方之歎服而且於經傳之蘊奧河洛之玄■〔微〕旁通而曲暢雖傳道承統之老師先輩庶乎其優與而深獎之矣公有存養之祖山堂之叔則其淵源之力薰灸之效豈云少哉配全州崔氏兵馬節度使湔之女大提學晩六先生瀁之曾孫也生二男一女男長曰潤祖通德郞次曰渰祖文科監察女適佐郞鄭期壽潤祖娶淳昌薛氏忠蘭之女生一男曰琬將仕郞渰祖娶南原梁氏生一男一女男曰秉忠女適金世圭命龍爲旁孫聞公行業習且詳矣今於請銘之日豈可以文之不足辭乎銘曰操何淸白文及菽栗孝斯父母信厥朋友性成薰陶業慕程朱南州夫子東國善士天慳吉地欝彼乳峙慶及雲仍庶期千春旁孫 命龍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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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參奉) 최경성(崔竟成)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宋秉珣謹撰,從九世孫鼎錫謹識 宋秉珣 崔鼎錫 崔竟成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신해년 음력 8월에 송병순과 후손 최정석이 작성한 참봉 최경성의 묘갈명 병서와 행적의 초안○ 내용 신해년 음력 8월에 송병순(宋秉珣)과 후손 최정석(崔鼎錫)이 참봉 최경성(崔竟成)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와 행적(行蹟)의 초안(草案)이다. 신해년에 송병순(宋秉珣)과 후손 최정석(崔鼎錫)이 참봉 최경성(崔竟成)의 묘비에 사적(事蹟)이나 덕행(德行)을 후세에 알릴 목적으로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와 행적(行蹟)의 초안(草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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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최방렬(崔邦烈) 십이대조고조비축문(十二代祖考祖妣祝文) 고문서-시문류-축문 종교/풍속-관혼상제-축문 庚戌九月癸丑朔十五日丁卯 邦烈 庚戌九月癸丑朔十五日丁卯 崔邦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최방렬이 1970년에 지은 십이대조고조비축문 최방렬이 1970년에 지은 제문이다. 본인의 십이대조고(十二代祖考)와 십이대조비(十二代祖妣)의 것으로, 제삿날인 9월 15일에 읽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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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손병규(孫炳奎) 죽사재기(竹沙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癸亥冬十月上澣 孫炳奎 癸亥冬十月上澣 1923 孫炳奎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10월 상순에 손병규가 작성한 죽사재의 기문. 1923년 10월 상순에 손병규(孫炳奎)가 작성한 죽사재(竹沙齋)의 기문(記文)이다. 승주군(昇州郡) 관아 동쪽 앵무산(鸚鵡山) 정석봉 아래 죽동(竹洞) 초배리(抄培里)에는 완산최씨(完山崔氏)가 오랫동안 세거하였다. 죽사거사(竹沙居士) 최낙윤(崔洛崙)은 이곳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유학을 선도하고자 하였으며, 조부의 기풍을 사모하여 산 아래 나무가 우거진 곳에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죽사(竹沙)라고 이름을 지었다. 선조들이 묻혀 있는 이곳 세장지(世葬地)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 있었다. 죽동에는 죽사재말고도 영창당(永昌堂)이 또 있는데, 이곳은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가 처음 지었고, 그 뒤 정축년에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이 중수(重修)했다. 기문의 작성자 손병규는 1832년생으로, 1865년(고종 2)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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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沙齋記夫君子有存本之志小人有懷土之心是故本立而道生安土而重遷此皆存心養性爲仁之本也嗚呼惟此完山崔氏以羅麗之閥閱世襲文武名賢儒林相繼爲我東豪右之族也洎乎中葉搬寓於昇平治之東鸚鵡山正石峰下以爲衣履巾笥之所雲仍因居焉盖洞號竹洞里名抄培崔公竹沙居士洛崙以文獻▣▣(文獻)故家必有奇志專力於爲己之工夫倡導斯文之業言念乃祖之風仍築精舍於山下岑蔚之處題其弁曰竹沙不忘其世庄之地而然也顧名思義節行也如猗猗之孤秀籌略也如??之細鋪臨難毋苟免臨事處安詳遊神於精微之域立志於堅確之地縱處於猾夏之日少不動念於邪詖之境而固從吾之所好保一線之陽而開竹牖運萬變之籌而搏細沙觀物理推人情敎訓家庭稱譽鄕黨思子猷之問主溯靈均之懷沙惟知其忠孝之爲源而能與世和老同塵可謂善於剛柔抑揚者矣豈不善美哉余於萍水歸路幸接芳隣留連者已矣不有側微之思要余以屬辭以無狀不獲欲藉水母之勢畧具其權輿云爾癸亥冬十月上澣密陽孫炳奎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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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樹興學稧序夫稧也者稧其可稧之稧而稧之稧者也未嘗不有古今修稧之多而自有異焉香山靑衿九老之一盛會也繁臺白石三豪之一奇事也至若此稧惟我氏族繼出完山自麗以後散居八域其數不爲不多至于扶安派計其代數則十三代計其年記則四百年冠員不過數百當此搶攘之世屢經大荒之年事力不贍文憲零滯余其不已者慨歎故辛丑十一月初十日門會之餘䦨商此意選其可與者二十七員也始刱此設盖欲興其學而名其稧也每年講信則春以麥秋秋以小春以作花樹之會欲成杏樹之風豈不美哉豈不休哉大抵學也者繼往聖開來學之學字也廢有其時興有其時興之則其廢也易廢之則其興也難以若子思之聖去聖遠而異端起也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推本堯舜質以父師以詔後學之生如此孤陋之所見雖是蔑學豈無開學之道乎每年春秋講會時講則以自願一經詩則以四律一章一以叙百代至親之誼一以勸不倦不厭之道百世春風渾成杏樹杏樹之下作花樹之會花樹之下作杏樹之風嗟我東邦更作鄒魯之世日月回明山川有彩三百六十州二千萬生靈盡在春風和氣中矣魯誦之猶聞不獨稱矣漢橋之圜聽罔專美矣今以香社之樂繁臺之美言之哉勉之焉勉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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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계서(興學稧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들이 조직한 흥학계 취지서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들이 친목도모를 위하여 조직한 흥학계에 관한 글이다. 흥학계를 만들게 된 시기와 취지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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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이우면(李愚冕) 춘곡서(春谷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己巳冬十一月旣望 李愚冕 己巳冬十一月旣望 1929 李愚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9년에 이우면이 최병우의 호 춘곡에 대하여 작성한 서. 1929년 11월에 이우면(李愚冕)이 최병우(崔秉禹)의 호(號) 춘곡(春谷)에 대하여 작성한 서(序)다. 자신이 비록 늙고 병들어 붓을 놓은 지 오래되어 다른 사람의 호(號)에 대하여 감히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친구 정인소(鄭寅韶)의 얘기를 들어보니 최병우야말로 참다운 군자(君子)이니 사양할 수 없다면서 춘곡(春谷)이라는 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봄(春)은 그 기운이 조화롭고 골(谷)은 그 땅이 깊고 깊어서, 골이 봄을 만나면 곧 만물이 발생하는 시작이 되니 그 나머지는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병우가 호남의 뛰어난 명사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은 늙고 아첨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시를 지어 서를 쓴다고 하였다. 이우면은 이 시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盤谷)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인용하면서 최병우가 은거지에서 군자의 생활을 보내면서 출유천교(出幽遷喬), 즉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듯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우면은 1881년(고종 1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홍문관 부수찬, 교리,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1885년 공조참의, 대사간, 형조참의를 지냈고, 1886년 이조참의, 호조참의,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 우승지 등을 거쳐 1890년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지냈고, 1891년 한성부 우윤, 예조참판, 1892년 한성부 좌윤,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비서원승(秘書院丞), 1898년 회계원경(會計院卿), 1902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임시서리 궁내부대신사무, 비서감경(秘書監卿)이 되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 비서감경, 홍문관학사, 장례원경 등을 지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기사년으로 밝히고 있어서 이를 1929년으로 추정했으나, 이미 조선이 망한 뒤에 장례원경 홍문관학사라는 관직명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간지를 잘못 쓴 것으로도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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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암(竹菴) 최규동(崔圭東)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安東金魯東 撰 金魯東 崔圭東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김노동이 작성한 죽암공 최규동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모년에 김노동(金魯東)이 죽암공 최규동(崔圭東)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규동(崔圭東)은 자는 재숙(在淑), 호는 죽암(竹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씨의 시조는 고려문하시중 아(阿)이며, 연촌선생(烟村先生)에 이르러 선덕이 드러나고 벼슬로는 최성원(崔成元), 학행으로 이름이 난 자는 최광립(崔光岦), 효로 이름이 난 자는 증조 최한풍(崔翰豊)이다. 조는 최이(崔禰), 부는 한팔(翰八), 모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이다. 죽암은 태어나 자라면서 준수하고 점잖아 무게가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섬기고 상중(喪中)에는 예를 다하여 허물이 없게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사람들을 믿음과 어진 마음으로 대하여 모든 이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가난한 사람을 보면 형편에 따라서 두루 구휼하였다. 나라에 국난(國難)이 일어나자 의사 이석용(李錫庸)과 더불어 꾸민 일이 발각되어 추궁당하며 갖은 곤욕을 치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주암(舟巖)은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가 만년에 머물던 곳으로 오랫동안 대대로 내려온 세천지(世阡地)였는데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서 그동안 백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죽암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최씨 문중의 소유로 회복되었다. 죽암은 무인년에 그가 태어난 곳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용호(龍鎬)와 재호(在鎬), 사위는 소재륜(蘇在倫), 박찬기(朴燦琦), 박홍양(朴洪陽) 등이 있으며, 그리고 4명의 손자 낙현(洛賢), 양현(洋賢), 생현(泩賢), 정현(涏賢) 등이 있다. 죽암공의 묘는 남원 몽촌(夢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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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행곡(杏谷) 최태환(崔泰煥)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丙寅蜡月吉日 嘉善大夫前香山守波澄尹寗求撰 丙寅蜡月吉日 尹寗求 崔泰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6년 음력 12월에 윤영구가 작성한 행곡공 최태환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내용 1926년 음력 12월에 윤영구(尹甯求)가 행곡공 최태환(崔泰煥)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병인년에 윤영구(尹甯求)가 행곡공 최태환(崔泰煥)의 묘비에 사적(事蹟)이나 덕행(德行)을 후세에 알릴 목적으로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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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谷公諱泰煥墓碣銘幷序崔叅奉在洪狀其先大人杏谷公行敻途跋涉請不侫銘隧道按公諱泰煥字泰甫其先全州人上祖高麗侍中文成公諱阿厥後世襲圭組爲東方大族入我 朝諱霮號月塘文科戶曺叅議集賢殿提學學行邃古世稱月塘先生生諱匡之克紹詩禮文科集賢殿提學是生諱生明生員殿直學趾先美享〔立祠〕甕井■(院)生諱秀孫號固窮堂生五男序居五諱竟成生員以遺逸薦授叅奉生諱濱叅奉生諱大立判官甲子靖社功臣於公九世祖■■(高祖)■■■■■■(通德郞)曾祖諱鎭億 贈通訓大夫祖諱翼信 贈秘書承生諱光重配淸州韓氏得采女卽公之妣〔考〕 ■■(高宗)丙申十一月十一日生生而性至孝家素貧菽水之供踰人甘毳日親有不安節忍思鳧肉時天寒非城市不可倉卒買得乃號泣于川野有雙鳧自來獻身供之卽瘳鄊里莫不稱至誠攸感士林齊籲至登道薦己亥四月二十四日歾壽六十四移葬于扶安郡保安〔舟山〕面■■■■■■■■■■〔士山前麓先考墓北未坐原〕配保安張在孝女東萊鄭榮弼女生一男卽在洪三女光山金叅奉先澤士人扶寜金炯介古阜李鍾乙秉哲秉南秉基三孫公以名賢之裔有卓異之行誼其登庸于 朝聞達于邦而命與時舛不得展布其百一惜哉然在洪在斤斤乎隧途之銘公之名足以不朽詩云君子有孝子吾云孝子有孝子銘曰崔於我韓大姓之一公於崔氏名又副實孝之卓異無愧古賢矧乎肖子賁厥隴阡松栝蒼蒼斧斤莫侵鬣封何藏孝子之心丙寅蜡月吉日嘉善大夫前香山守波澄尹寗求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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叅奉公諱竟成墓碣銘幷序崔之望完山者爲湖南名族盖其氏葉肇系於高麗侍中文成公諱阿屢傳至集賢殿提學諱霮號月塘家聲益著顯自後聞達名碩代不乏盡至若烟村先生伯氏提學公之子殿直公諱生明號甕菴正學高節致仕講道有子固窮堂諱秀孫嘗受學于寒暄金先生深被稱詡修善厚蔭殆同古之王晉公手植五槐於庭除曰吾子孫之顯達者必懸鼓於此後果有驗其子五人皆登大小科咸稱以難兄難弟其季曰竟成早中司馬以遺逸薦授禮賓寺叅奉不就兄弟五人同居一室共宿大被沉潛經傳講究性理無意於名利韜光鏟彩不以貧賤爲慽慽不以富貴爲汲汲以沒世墓在扶安席洞山先兆下癸坐原端人慶州金氏生二男二女男長曰濱叅奉次曰淇女適丁淵金彦璧濱男大立女適金起文大立有五男長震男次應男察訪次奇男升男益男次致道武司果淇男弘立弘立生二男長曰巘武主簿次曰峻奉事丁酉亂叅功臣錄券次屹武兵叅丁酉亂原從功臣察訪男處中早登武科至營將 萬曆戊午虜犯上國天朝請救公應募與遼東伯金應河同往劉都督綎敗績公爲賊所擒■〔脅〕使促降公罵而不屈賊曳於蘆田三十里公激憤益勵罵不絶口賊乃縛樹下椎背吐血而死 皇上特書萬古忠臣崔處中七字出送本國曰忠貫日月節抗霜雪卽今之文天祥云 朝家嘉之命旌錄勳 贈兵曺叅判招魂而葬有二男長良弼武通政節制使次曰仁弼餘不盡錄噫公之積善藝德亦可以驗信於雲仍之功烈顯爀嘉言善行宜有以垂範於來世者中経欝攸灰燼之慘家無遺傳只有邑覽所記者甚寂寥故公之生平履歷及生卒年月亦不詳載是可慨也十一代孫昌煥畧記先系與後承事行編成狀草來示不侫請以墓銘顧余匪其人無其文而難孤其勤意搦筆如此庶幾無劉乂諛墓之譏乎時重光大淵獻仲秋旬三德殷宋秉珣謹撰叅奉公諱竟成行蹟公諱竟成全州人固竆堂諱秀孫第五子也當 中明兩朝伯仲司成公檢閱公俱以生進登文科歷敭淸顯宦遊京師仲叔處士公處庵公又以生進隱德修行特蒙 旌褒配食賢祠公以父兄子弟序居第五亦以生員薦授叅奉則固竆公五鼓亭種德之符若是契合而繼以門蔭之趾美棣華連芳亦可謂難兄而難弟矣墓在席洞先塋下配慶州金氏生二男長濱叅奉次淇濱子大立生五男長震男次應男察訪次奇男次升男次益男次子致道武司果淇子弘立生二男長巘次峻次子屹皆武科有一等功臣錄券察訪一男處中早登武科至營將萬曆戊午虜犯上國 天朝請救公應募與遼東伯金應河同往劉都督綎敗績公爲賊所擒脅使促降公罵而不屈賊曳公於蘆田三十里公激憤益勵罵不絶口賊乃縛樹下椎背吐舌而死 皇上特書萬古忠臣崔處中七字出送本 國曰忠貫日月節抗霜雪卽今之文天祥云 朝家嘉之旌閭錄勳 贈兵曺叅判招魂而葬有二男長良弼武營將次仁弼營將四男長以濟次以珩次以瑜次以球武營將次子以璇察訪噫公之平生行治卽其薦剡而觀之可想當時公議之不泯而有足以垂範後世者然中経鬱攸之■■衍之舊沒入於灰燼之中無得以徵焉者則可勝慨恨哉玆敢略掇其子孫錄以識之從九世孫鼎錫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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