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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김영완(金永完)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昭和)9.12.7, 十一月一日 金永完 李敎成 (昭和)9.12.7, 十一月一日 金永完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9.12.7 前8-12,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9.12.6后□…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40_001 1934년 11월 1일, 생 김영완이 이교성에게 상대가 편지로 말한 서책들에 대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보낸 간찰(簡札) 1934년 11월 1일, 생(生) 김영완(金永完)이 보성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상대가 편지로 말한 서책들에 대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쓴 답장 편지이다. 이전에 보낸 안부편지를 받았을 것이라며 최근의 상대의 안부와 좋아하는 서적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자신은 한 결 같이 못난 모습으로 지내어 드릴 말씀이 없다는 것,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중들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많다며 회수된 책들은 판(板)과 종이 값 측면에서 그 수를 채우기 어려울듯하다는 것, 『정종(正宗)』은 우선 나온 것이 없으니 찾는 대로 말씀드리겠다는 것, 세 종류의 낙질(落秩)은 말씀대로 있게 되면 부쳐 올리겠다는 것, 『차의(箚疑)』는 조만간 입수될 것 같으니 그때 함께 올리겠다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은 우선 두고, 『여사(麗史)』와 『무경(武經)』의 첫 권과 끝 권을 얻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 『대전(大全)』을 서로 바꾸는 일은 잘 도모해 보심이 어떠하냐는 물음, 이처럼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 얼마간에 좋은 물건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말 등을 전한 내용이다. 이교성이 서책의 구비를 위하여 거래했던 모습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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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김영완(金永完)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昭和)9.12.17, 至旬有一日 金永完 李敎成 (昭和)9.12.17, 至旬有一日 金永完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光化門 9.12.17 ▣…,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13 后4-12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40_001 1934년 11월 11일, 생 김영완이 상대가 원하는 책의 구입 정보를 전달하는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4년 11월 11일, 생(生) 김영완(金永完)이 상대가 원하는 책의 구입 정보를 전달하는 내용으로 보성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편지이다. 부모님을 모시며 공부하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간단히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상대가 말한 뜻은 잘 알았다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경향판(京鄕板)을 따지지 않고 몇 질이 있지만 내 외 집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것을 아직 정리하지 못하였으니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바꾸는 문제는 『여사(麗史)』는 아니고, 지난번 편지에서 송자대전 2질이 있다며 주자대전으로 바꾸는 일을 말씀하셨는데 자기 쪽에 있는 『주서(朱書)』로 바꾸는 것을 간청한다고 하였다. 『여사(麗史)』와 『무경(무경(武經)』, 『사선(史選)』을 25엔으로 팔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니 견본을 부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외에 팔고 있는 물건이 있으면 기회를 보아서 알려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송서(宋書)』의 낙질본은 마땅히 찾아볼 것이지만 이 것 또한 후편을 기다려 달라는 것, 『문장(文章)』, 『정종(正宗)』은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으니 간행한 책을 들여와야 할듯하니 후편을 기다려 달라는 것, 『주차(朱箚)』는 잘 도착했느냐는 물음 등의 내용을 적었다. 이교성이 김영완에게 책을 구하는 일 뿐 아니라 자신 집의 소장본과 바꾸거나 팔고자 하는 거래이기도 함을 확인할 수 있다. 발신일자 란에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편일부인(郵便日附印)을 통해 1934년(소화 9)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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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五月十二日 金澤卿 李敎成 丙子五月十二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8_001 1936년 5월 12일에 김택경이 저포를 속히 부쳐달라는 부탁, 마종 값, 길을 떠날 계획, 《소의신편》 전달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6년 5월 12일에 강원도 강릉군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형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지난번에 부친 서찰을 받아 보았는지, 근래 춘부장(春府丈)님의 기력은 강건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저포(苧布)는 매우 급하니 만약 2필을 얻기 어려우면 1필이라도 속히 부쳐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마종(麻種) 값은 근래 들여왔는지를 묻고 이곳은 들여오는 원래 금액이 33원이라고 하였다. 지난번에 말한 개화(開花)는 아직 보지 못하였고 영서(嶺西)를 찾아보니 또한 이 종자가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본래 10일에 길을 떠나려고 하였으나 비가 와서 마침내 눌러 앉았고 여름에는 더위와 장마로 나아가기 어려워 가을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에는 근래 비와 가뭄이 물러났는지를 묻고서 이곳은 조금 비가 왔으나 흡족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물품은 보냈는지 회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소의신편(昭義新編)》을 정오제(丁梧齋)에게 전해 주었는지 회답해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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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申臘月念六日 金澤卿 李敎成 丙申臘月念六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96년 12월 26일에 김택경이 형의 택지, 대관령 남쪽으로의 이주, 친산(親山) 택정 등의 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896년 12월 26일에 강원도 명주군(溟州郡) 성산면(城山面) 금산리(琹山里)에 사는 김택경(金澤卿)이 전북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 안영리(安永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봄철에 보내주신 서찰을 받고 10년 동안 격조한 뒤에 뵌 듯하였는데, 현합(賢閤, 부인)과 따님의 상에 매우 놀랍고 슬펐다. 아직도 이렇게 좌하(座下)에 조위하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다. 문중의 족보를 만드는 일은 읍저(邑邸)의 일이 바빠 겨를이 없다. 형의 체후 등 두루 편안한가? 형의 택지(擇地)는 본래 오랜 계획인데 고향을 떠나는 마음이 어찌 그저 지나가는 일이겠는가. 자신은 근근이 예전처럼 지내지만 천 가락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말씀하신 피란(避亂) 같은 일은 없지만 경인년(1890) 3월에 이미 대관령(大關嶺)의 남쪽으로 옮겼다. 구점(舊店) 금산(金山)에서 수십 리 길이며, 한 조각 땅을 버리는데 지나지 않지만 신수(薪水)의 즐거움은 초목(草木)과 함께 썩기를 기약할 뿐이다. 공이 보관하는 서적은 혹 손상된 것이 없는지, 장판(帳板)도 보존되어 있는지를 묻고, 지난해에 자신의 고을에 사는 화종(華宗)의 일로 청한 것을 보내 온 것은 계씨에게 다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형이 청오(풍수지리학)의 방법으로 유명하다고 얼핏 들었는데, 친산(親山)이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으니 내년 봄 아늑하고 따뜻한 때를 기다려 왕림해서 두루 살펴달라고 하고, 혈자리 하나를 점하고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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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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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3년 이종열(李鍾悅) 토지상환명문(土地相換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癸丑 九月十五日 畓主 再從侄 鍾悅 再從叔 前明文 癸丑 九月十五日 1913 李鍾悅 再從叔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3년 3월 초1일에 이종열(李鍾悅)이 재종숙과 가천촌(可川村)에 있는 각각의 토지를 교환하면서 작성한 상환명문 1913년 3월 초1일에 이종열(李鍾悅)이 재종숙과 가천촌 고성평(古城坪)과 마사평(馬山坪)에 있는 각각의 두 토지 2두락을 교환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가까운 친척이라서 문서에서 성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이들이 찍은 도장을 통해 이씨(李氏)임을 알 수 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축년 9월 15일 재종숙 앞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 스스로 간직해온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서로 교환하기 위해서 보성군(寶城郡)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 고성평(古城坪) 천(千) 자(字) 논 2두락(6부)을 재종숙이 간직해온 마산평(馬山坪) 현(縣) 자(字) 논 2두락(10부 5속)과 서로 바꾸고, 이와 같이 문서를 작성하여 이후로 만약 서로 어긋나는 단서가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할 것이라. (이중 구문기 또한 상환하여 이후로 증명하기로 하고 이와 같이 씀). 답주(畓主) 재종질 종열(鍾悅)[印]. 증인 재종질 종철(鍾澈)[印]. 겸무(兼務) 이장(里長) 이정(李鉦)[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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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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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60년 임이장(林爾章) 허여문기(許與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二十五年 庚辰 二月二十九日 畓主 幼學 林爾章 大原寺佛饗〔糧食〕 前明文 乾隆二十五年 庚辰 二月二十九日 林爾章 大原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3_001 1760년 2월 29일에 임이장(林爾章)이 논 1두 2승락을 대원사에 불양답(佛糧畓)으로 허여하면서 작성해준 문서. 1760년 2월 29일에 임이장(林爾章)이 논 1두 2승락을 대원사(大原寺)에 돌아가신 처가 부모를 위해서 불양답(佛糧畓)으로 허여(許與)하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25년 갑진년 2월 29일 대원사 불량답으로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허여하는 것이라. 내 처가(妻家) 양부모 정충효(鄭忠孝)와 박씨(朴氏) 두 분이 자식 없이 돌아가셨기에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일생을 의탁할 데 없이 지냈으니, 내 처는 독녀(獨女)로서 어찌 그리 안타깝던가! 정으로서 곡절히 가련하기로 내가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던 문전면 가천촌(可川村) 앞들에 있는 부(夫) 자(字) 논 1두 2승락(5부)을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이 사찰의 불량답으로 영영 허락해 주니 이후로 자손 중에 만일 잡담을 도모한다면 장차 이 문서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유학 임이장(林爾章)[착명]. 증인 동생제(同生弟) 하장(夏章)[착명]. 작성자 유학 김상인(金尙仁)[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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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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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1년 최만천(崔萬千) 자매명문(自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자매명문 咸豐元年 辛亥 四月二十六日 䜳德父 崔萬千 李生員宅 前明文 咸豐元年 辛亥 四月二十六日 崔萬千 李生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51년 4월 26일에 최만천(崔萬千)이 이생원(李生員) 댁에 자신의 딸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자매(自賣) 명문(明文) 1851년 4월 26일에 최만천(崔萬千)이 이생원(李生員) 댁에 자신의 7세 딸 둘덕(㐙德)을 15냥으로 받고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다. 통상 자매명문은 자신이 스스로 매도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매도하는 경우에도 자매 문서로 분류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풍 원년 신해년 4월 26일 이생원 댁에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니. 내 몸이 흉년을 만나 생활할 길이 없어 거의 아사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형세가 부득이해서 나의 소생 딸 둘덕(㐙德)이 7세 아이를 위 댁 앞으로 드려서 영영 노비로 삼게 하면서 15냥을 받고, 이후로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바로잡을 것이라. 둘덕부(㐙德父) 최만년(崔萬千)[착명]. 증인 및 작성자 박광이(朴光伊)[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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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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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丑 八月 四日 査生 尹琪燮 拜手 辛丑 八月 四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8월 4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안부와 사위가 방문하였다가 돌아간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01년 8월 4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들의 안부와 사위의 방문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 되어 사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사위가 찾아와서 거듭 편지를 받고서 한 자 되는 구슬을 당기는 것 같아 매우 감사합니다. 삼가 정양하시는 체후가 때를 따라 좋으시고 식구들도 고루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위안이 되는 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의 어버이의 체후는 다행히 손상됨이 없으시니, 이는 제 분수에 기쁩니다. 딸 아이도 탈이 없으니 이는 기특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그날에 나아갔다가 이미 길이 어긋나서 비록 사소한 장애가 있기는 하였지만, 어찌 한가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날짜를 바꾸겠습니까? 마땅히 그날로 행할 계획이니 헤아려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사위는 겨우 이틀을 머물고 홀연히 간다고 하여 매우 서운합니다. 만류하지 못한 것은 당질 형과 당질의 동생이 함께 간다고 했기 때문이니 먼 길의 근심이 조금은 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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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 九月 八日 査生 尹琪燮 拜手 辛 九月 八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9월 8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안부와 사위가 방문하였다가 돌아간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01년 9월 8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들의 안부와 사위의 방문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의 기세가 참으로 높은 이때 사모하는 마음 더욱 깊습니다. 국화 피는 계절에 정양하시는 체후가 매우 좋으시고 사위는 부모 모시고 편안히 독서 하며 가족들도 두루 편안하신지요? 그립고 송축하는 마음으로 멀리 있는 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어버이는 그런대로 평안하시고 가족들도 모두 경계할 것이 없으니 이는 분수에 다행이니 나머지는 어찌 긴말이 있겠습니까? 딸아이가 나이는 어리고 질박한 데다 교훈까지 없으니 어찌 부모가 되어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다행히 돌보아주고 사랑해주시는 은택과 방법을 가르쳐 주심을 입어서 그 재주를 이룬다면 응당 어떠한 덕으로 갚아야 하겠습니까? 노친의 근력으로 이런 등의 어떠한 역(役)을 할 때가 아니라면 존장의 댁에 한 번 찾아간 것이 이미 십수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찾아뵙지 못하고 있는데, 영공께서 이렇게 겸하여 나가고자 하시니 매우 민망합니다. 사위는 추위가 오기 전에 한 번 방문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지난번에 형옥 형에게 산저(山苧)를 부탁했는데 이렇게 사서 드립니다. 물품은 쓸 만할 듯하고 사립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부응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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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김한익(金漢翼)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八月 十八日 査弟 金漢翼 拜謝上 長洞 棣座下 丙寅 八月 十八日 金漢翼 長洞 棣座下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8월 18일에 김한익(金漢翼)이 사돈에게 늙음에 대한 회포와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는 간찰(簡札) 1926년 8월 18일 신호(莘湖)에 사는 김한익(金漢翼)이 장동(長洞)에 사는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안부와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상으로 애통한 나머지에 다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궁벽한 산골의 누추한 집에 백수(白首)가 서로 찾아와도 희년(稀年)이 된 자가 적으니 늙음을 피하는 것의 증거들인데, 서늘한 달밤 아름다운 저녁에 오뚝이 홀로 앉아 온갖 생각에 잠겨있습니다. 형께서 청헌(淸軒)에 계시는 때에 편지를 받고서 매우 감사합니다. 비록 무릎을 당겨 마주 본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물며 형제들의 우애가 좋고 여러 가족들의 안부도 고루 평안하시다니 더욱 매우 위안됩니다. 다만 저의 어머니의 안부는 그런대로 편안해서 다행입니다. 제 모습은 예전 같고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리운 탄식이 진실로 비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움이 어느 날인들 잊겠습니까? 이 인편을 통해서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만날 것이니 어찌 굳이 만나서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빈번하든 빈번하지 않든 마음에 차지 않고 모자랄 것입니다. 지금 아이가 돈암서원에 무리의 일원으로 참석하는데 출발에 앞서 대신 쓰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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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余之曾王考隱庵府君 明於譜法 且兼愽雅 司評李竣氏及牧使李尹孫所錄 擧皆披覓 參以已之見聞 粤在肅廟丁卯(1687)刊行三卷譜 距萬曆癸丑(1613)李芝江承宣公所刊單卷譜 餘七十有年 所其後六十有五年 歲在英廟辛未(1751)李參判應協氏又出七卷譜 至今爲四十餘年 則派流漸遠支裔益繁 舍弟澤鎭又爲謀 所以及時重刊 繩我祖武敦我族義 廣攷書籍詳密參證 當宁丙午(1786)以芸閣活字代剞劂之功印出者幾至數卷 合爲五百餘板 力綿事巨 際有喪慽聯綿 以故積年編摩未及脫藁 身又就世者 已過三霜有一年 嗚呼人世之事 不如意者 十常居八九 齎志未遂 大孫家望余用是懼 幸貫鄕宗侍武■甫諸人 惟我 先祖享食之所聚 列邑宗中諸君子幹事該識者幾員裒輯 我舍季未了之蹟 且慮其活字不可以久傳 以名錢數千餘金 貿梓刻出 期以一年之內 其志槩與力量非人人之所可及者 吾宗之有功 亦可謂大矣 大抵族譜 卽私家史筆也 其在尊祖敦宗之道 不可一日無者 而餘百歲以前 則雖薦紳之家 鮮克存譜 譜法不行 則派流無以懲矣 派流無懲 則吾宗族散在八路者 將未免爲路人矣 求其本則 始祖一人 而以一人之身 散而爲百千乃人 以我 始祖之心 觀之則寧不慽然而悲也 近來文拘大備憲章昭著 至及閭巷 莫不肖孝悌之心 油然生焉 今此修譜之擧 亦是敦睦之義也凡吾同宗毋論親近疎逖 雖千百歲之下 溯源尋派 可以開卷瞭然 豈非盛且美哉 原本追遠之道 收族厚風之義 其在斯歟 自譜廳馳書告余曰 子之先曾王考尙書公有勳勞於吾宗信史如三卷之譜 至今行于世 藏板于 影堂 百有餘年 尙有遺風 善頌子於今日重刊之譜 可無弁首之文乎 請之甚固 余以文拙 不敢辭其勤托之意 又爲家庭紹述之道 表余區區之忱 以竢後之具眼者云爾 崇禎紀元後丁巳(1797)仲夏 后孫漢鎭 謹書歲丙午(1786)春澤鎭氏設是譜於京中 幾盡收單 而不幸中道故片紙系錄 將作喪家之休紙 遠邇諸族咨嗟者久 昨年春 影堂昇號之餘 將營講堂 而武說氏顯曾氏及存培甫 以爲不於 影堂本所 無以成此譜 不與幷講堂之役 無以該譜事 迺於四月初輸來京中收單 初卷校正則從澤鎭氏所輯 以下世系則承三舊譜所錄收得 略干名錢而募刻手 李進澤繡之於板付 齋僧萬學俾任支供 至是年十月之乃訖 噫二年之間 而 影堂修理講堂成造 族譜刊役 次第成就 終始事役 不亦甚題且盛乎 大抵是譜非澤鎭氏 無以始非某某氏 無以成而武說氏又就世於今年八月前後主事二人 不得見成譜 譜旣成 曷勝悵然而悲乎 是年(1797)陽月旣望 佑震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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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이홍순(李洪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秋夕後三日 丙子秋夕後三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6년 8월 18일 이홍순이 성주이씨 가천문중 여러분에게 항의서로 작성한 간찰(簡札) 1936년 8월 18일, 이홍순(李洪淳)이 성주이씨 가천문중(可川門中) 여러분에게 올린 항의서(抗議書)이다. 봉투 안의 문장 형식은 통문(通文)이고, 문서의 맨 앞에 항의서(抗議書)라는 제목을 달았다. 내용을 보면 우선 문회(門會)를 재작일에 개최한 것에 대해 매우 감명스러웠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후정공(候正公)의 향화(香火)에 대하여 건의한 것은 좀 늦었지만 또한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 문중의 큰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전 해에 종술(鍾述) 씨 및 문중이 석구산(石舊山)을 2분하여 소유하기로 한 약속이 허사로 돌아가고, 가천문중이 천천(千川) 문중과 대립하여 소송한 일에 대해서는 모골이 송연하다고 하였다. 거짓으로 두 문중이 화해를 보았던 것은 특파원이 한 일이며, 화해금 1천원 중 500원은 양회산(梁會散) 부자(父子)가 담당하는 돈이고, 20원은 박중근(朴重根)의 보관증에 관계된 돈이며 나머지 480원 현금 중에 200원은 김(金) 변호사에게 사례금으로 지불하고, 10원은 석씨(石氏)를 위로하기 위해 요리집에서 지불했으며, 270원 수입이 났는데, 그것을 또 이리저리 처리하고 남은 잔금이 107원인데 누가 횡령을 했다는 말이냐고 따졌다. 또 안산(案山) 묘소 이외의 4개소 임야를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이상의 일을 총합하여 살펴보면 여러분이 각자 양심이 가르치는 것이 있을 것이라며 후정(候正) 선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청원했다. 이홍순은 후정(候正公)의 후손으로 선조의 향화(香火)와 관련한 변명과 요청을 들어 줄 것을 가천문중에 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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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평순(李平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戌陰十二月三日 李平淳 可川 僉宗 壬戌陰十二月三日 李平淳 可川 僉宗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음력 12월 3일, 족종 이평순이 선조 위토의 환퇴를 위한 배당금을 거둬들이는 내용으로 보성군 문덕면 가천에 거주하는 첨종에게 보낸 간찰(簡札) 1922년 음력 12월 3일, 족종(族從) 이평순(李平淳)이 선조 위토의 환퇴를 위한 배당금을 거둬들이는 내용으로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可川里)에 거주하는 첨종(僉宗)에게 보낸 간찰이다. 12월 날씨에 상대 여러분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상대 종족 여러 집의 덕택으로 반천리의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번 종사(宗事)는 현종(賢從)들과 상의하여 지난번 회소(回甦)에서 언급하였다며 성의를 보여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더 배당한 금액은 규정상 그러한 것이라며 귀 파(派)와 곡성(谷城) 양 종중에도 배당금을 더하게 되었다며 잘 걷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위토(位土) 환퇴를 위한 금액에 관하여 간략히 보고하고 오는 1월 28일 공(公)의 배위(配位) 기신(忌辰) 일에 모두 참석하시기를 바란다는 것, 이날 각 곳의 종인(宗人)이 모두 모일 뜻으로 이미 왕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자와 발급자를 적은 뒤에는 3처(處)에 배당된 금액을 기록하고 오는 1월에 참석할 때 가져 오실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기사(忌祀) 전에 연락할 수 있다면 족종의 원주소(原住所)인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갑관리(甲貫里)로 송부해 줄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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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교숙(李敎琡)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戌二月十七 李敎琡 壬戌二月十七 李敎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59_001 1922년 2월 17일, 종질 이교숙이 서산 묘의 이안을 건의하고 이를 위해 종중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보성 종중에 보낸 간찰(簡札) 1922년 2월 17일, 종질(從侄) 이교숙(李敎琡)이 서산(西山) 묘(墓)의 이안(移安)을 건의하고 이를 위해 종중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보성 종중에 보낸 간찰이다. 상중에 있는 상대 및 촌내의 큰 집, 작은 집 등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13일에 서울에 올라와 우선 무탈하다고 했다. 다음날 서산(西山)에 가서 묘를 배알하였는데 영홀(影笏)이 아직 존재하여 기뻤다고 했다. 위토 19두락 밭과 10여두락이 벽순, 학순, 종팔, 만종 등에게 들어갔고 땅을 팔거나 이작(移作)이 되는 등 제사가 끊어지고 산지기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며 통분하였다. 중요한 부조묘의 제사가 이렇게 됨에 이르러 자손 된 자로서 그대로 둘 수 없다며 곡성(谷城)에 이안(移安)해야겠다고 했다. 이를 의논하기 위하여 이달 24일에 서산(西山) 정사손(定嗣孫)에서 회의를 열고, 곡성과 보성 양 쪽 중에 이안(移安)을 할 것이라는 것, 하게 되면 보성은 영광댁(靈光宅), 곡성은 시천댁(詩川宅)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는데 이는 종중에서 상의하여 답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자신이 그동안 며칠을 머물면서 생겨난 비용이 많지만 기일을 더 늦출 수 없어 기어이 조치를 취한 뒤에 내려갈 계획이라며 양해해 달라고 말하고 나머지는 다시 고하겠다고 전했다. 추기에는 수다동(水多洞)의 땅 내력을 자세히 적어 보내며 추심할 생각이라고 적었다. 또 기순(起淳)이 소나무 값 44냥을 추심(推尋)하는 일로 지금 성순(聖淳)과 재판중이고 어제 평리원에서 대질을 하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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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정순(李正淳)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庚申六月十日 李正淳 李百榮 庚申六月十日 李正淳 李百榮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6월 10일에 이정순(李正淳) 등이 형재(亨齋) 선생의 묘표를 새로 만드는 일에 관한 내용으로 이백영(李百榮)에게 보낸 간찰 1920년 6월 10일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운곡리(雲谷里)에 사는 이교천(李敎川), 이정순(李正淳), 이용순(李龍淳) 공동 명의로 경남 창원군 북면(北面) 고암리(高岩里)에 사는 이백영(李百榮)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형재(亨齋) 선생의 묘표(墓表)를 새로 만드는 일은 실로 수백 년 동안 행하지 못했던 성대한 일인데 여러 종씨(宗氏)가 유독 힘써 노력함에 지극히 흠탄(歆歎)하며, 자손 중에 누구인들 우러러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마는 그중 한둘은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은 이러한 일을 스스로 헤아릴 수 없어 교성(敎成)에게 전송하였다. 여러 종중에서 합의(合議)하여 자손들이 한없이 봉양하게 해야 한다. 자신들의 성품은 고아하고 반듯하여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더럽혀질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남과 부합되는 일이 적었다. 의론한 것이 어긋나는 일이 반을 넘지 않으나 준공(竣功)에 이르러 결함이 아닌 결함과 결함이 있는 결함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이번 우천 관계로 도로가 위험하고 끊어져 소식이 이와 같이 지체하게 되었으며, 문중에 안배하여 부칠 것이니 받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상세하게 회답해 달라고 하였다. 교천과 정순은 이름 아래에 날인하였다. 형재 선생은 성주이씨 이조년의 증손자 이직(李稷, 1362~1431)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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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이상호(李祥鎬)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卯五月念日 李祥鎬 李敎成 丁卯五月念日 李祥鎬 李敎成 경상북도 안동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00_001 1927년 5월 20일에 이상호가 인역(印役)이 늦어지는 것에 양해를 구하고 남은 책권도 곧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간찰 1927년 5월 20일에 이상호(李祥鎬)가 보낸 간찰이다. 류한(榴旱, 음력 5월의 가뭄)에 부모님을 모시며 생활하는 체후가 평안하고 집안 식구들도 모두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위안이 되고 또 하례 드린다고 인사하고, 자신은 처리할 일이 많아 고요하게 붙어 있는 날이 없어 잠시도 온전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고 하였다. 곧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 일은 이렇게 늦어져 기한이 없었지만 중간에 일이 많았으며 인역(印役)도 한없이 많고 공인(工人)의 한 손을 겸하고 있어 생병(生病)이 심하게 들었다면서, 일 년 이상이 걸렸으니 먼 밖에서 어찌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하지 않겠는가 하고 위로하고 있다. 이를 알고는 있지만 비록 대대로 교분이 두터운 벗이 부탁하여 올린 것인데 후회해도 소용없고 천금과 같은 언약을 스스로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이 나이니 이왕 기다린 것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현재 인출(印出)하여 책자로 만들고 남은 책권도 차례대로 손수 같이 한다면 오래지 않아 받을 듯하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이러한 뜻을 그곳의 여러분들에게 말해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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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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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0년 임병관(林昺寬)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五年 庚申 三月二十六日 畓主 閑良 林昺寬 幼學 李正赫 前明文 嘉慶五年 庚申 三月二十六日 林昺寬 李正赫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3_001 1800년 3월 26일에 임병관(林昺寬)이 이정혁(李正赫)에게 논 1두 2승락을 3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00년 3월 26일에 임병관(林昺寬)이 이정혁(李正赫)에게 대원사(大原寺)로부터 돌려받은 논 1두 2승락을 3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5년 경신년 3월 26일 유학 이정혁에게 주는 명문. 이 문서로 방매하는 것이라. 나의 부친께서 생시에 자기가 경신년에 매득한 논을 대원사에 불양답(佛糧沓)으로 허여했는데 그 대원사에서 타인에게 사적으로 방매(放賣)한다는 말이 있어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려받아서 갈아먹다가 절실하게 유용한 곳이 있어서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 당산원(堂山員)에 있는 부(夫) 자(字) 논 1두 2승락(5부)을 30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자손 간에 잡담을 모의하는 일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고증할 것이라. 답주(畓主) 한량(閑良) 최병관(林昺寬)[착명]. 증인 한량 최창욱(崔昌郁)[착명]. 작성자 한량 김세표(金世杓)[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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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조진구(趙鎭九) 가옥매매명문(家屋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七年戊辰八月初七日 趙鎭九 㪲德 同治七年戊辰八月初七日 趙鎭九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8년 8월 7일에 조진구(趙鎭九)가 이생원에게 집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가옥매매명문(家屋賣買明文) 동치 7년에 집주인인 조진구가 집을 이생원에게 매매할 때 발급한 일종의 계약서이다. 내 8촌이 흉년이 들어 밥을 먹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는 중에 전염병으로 부처(夫妻)가 모두 죽고 집안에는 한 점 혈육도 남아있지 않다. 자신은 군정(軍丁)을 중시해 다른 지방에 계속 가 있어서 치상(治喪)은 고사하고 군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또 8촌은 나가고 단지 8세 여자아이만이 부모도 없이 생활해 나갈 도리가 없으니, 지금과 같은 흉년에서랴. 지금 그 아이 한 몸으로 살아가기가 극히 어려워 이 아이의 구명(救命)을 위해서라도 이 집을 팔고 또 군정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하여 전문 3백 냥을 받고 그 아버지의 군역에 쓰고자 한다고 하였다. 끝에는 주인과 증인의 성명과 관계를 쓰고 이름 아래에 수결이 되어 있다. 주인은 8촌 조진구이며, 증인은 9촌 고모부 최유월김(崔六月金)이다. 매득자는 이생원을 대신한 노(奴) 둑덕(㪲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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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임성렬(林成烈)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光緖拾六年 庚寅 十一月十二日 畓主 林成烈 李始瑞 前明文 光緖拾六年 庚寅 十一月十二日 林成烈 李始瑞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90년 11월 12일에 임성렬(林成烈)이 이시서(李始瑞)에게 논 7두락을 14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90년 11월 12일에 임성렬(林成烈)이 이시서(李始瑞)에게 본인이 매득하여 갈아먹던 논 7승락을 14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서(光緖) 16년 경인 11월 12일 이시서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본인이 스스로 매득하여 여러 해 갈아먹다가 형세가 부득이하여 요긴하게 쓸 일로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교촌(校村) 앞들 수(隨) 자(字) 논 7승락(2부)을 14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신문기(新文記) 한 장과 함께 위 사람 앞으로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서로 어긋나는 단서가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유학 임성렬(林成烈)[착명]. 증인 유학 황창석(黃昌錫)[착명]. 작성자 유학 김현국(金顯國)[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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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丑 尹琪燮 二拜 辛丑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10월 27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안부와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01년 9월 8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들의 안부와 사돈의 건강에 대한 위로를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모가 바야흐로 깊은데 사모하는 마음이 매우 깊습니다. 삼가 편지를 받고서 이미 감사하고 또 하례 드립니다. 정양하시는 체후가 좋으심을 알게 되었으나 종기가 점점 심하여 어찌 이다지도 길어지는지 염려되고 안타깝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평안하고 사위 내외는 부모 모시고 평안하다니 실로 막혔던 소식이 제 마음에 부응이 됩니다. 다만 항상 만날 수 있는 바가 아니어서 매우 염려됩니다. 세상의 길이 험한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탄식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숲속에 숨어있으면서도 오직 깊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이렇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오직 마땅히 스스로 수행할 뿐입니다. 부디 모쪼록 기회를 따라서 잘 도모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저는 부모님 모시고 근근이 손상됨은 없으나 세모에 기쁘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깨달아집니다. 백부께서는 해소의 근심이 추위를 당하여 편안하지 못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방문해 달라는 말씀에 감히 급히 나가지 못하고 길이 멀고 날씨가 추워서 거듭 쓸데없는 근심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서 물러나 새봄을 기다렸다가 한번 도모할 것입니다. 사위는 신정에 일찍 보내도록 명 해주시길 바랍니다. 서로 소식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는데, 혹 사람의 정이 어찌 이렇게 가을의 근심 속에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존장 또한 나와 같이 속(俗) 됨이 심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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