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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8년 장지량(張智良) 허급문기(許給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拾三年 戊辰 十月晦日 畓主 自筆 張智良 甥侄 幼學 表匡鎭 衿得許給 明文 嘉慶拾三年 戊辰 十月晦日 張智良 表匡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0_001 1808년 10월 그믐날에 장지량(張智良)이 생질 표광진(表匡鎭)에게 논 6두락을 물려주면서 작성해준 명문. 1808년 10월 그믐날에 장지량(張智良)이 생질 표광진(表匡鎭)에게 이사하면서 팔 수 있도록 논 6두락을 물려주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3년 무진년 10월 그믐날에 생질 유학 표광진에게 본인 몫으로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한 논을 매부(妹夫)가 살았을 적에 허급하면서 문서를 만들지 못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생질이 이사 가면서 이매(移買)해야겠기에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 돌미평(乭弥坪) 수(受) 자(字) 논 내외변(內外邊) 6두락(19부 4속)을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허급(許給)해주니 이후로 자손 족속 중에 만일 잡담이 있으면 이 문서로서 증빙을 삼을 것이라. 답주(畓主) 자필(自筆) 장지량(張智良)[착명]. 증인 남막동(南莫東)[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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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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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2년 성주이씨 종회 배정금(排定金)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壬戌 十二月 四日 星州李氏宗會 代表者 李大淳 可川里宗中 壬戌 十二月 四日 李大淳 可川里宗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12월 4일에 성주이씨 종회에서 배정금(排定金)에 대해 보낸 통문(通文) 성주이씨 종회에서 문경공의 위토 소유권과 배정금에 대해 보성군 종회에 통보하는 통문이다. 선조 문경공의 사패위토(賜牌位土)가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에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땅이 답(畓) 1석락 4475평, 전(田) 4일경(日耕) 5125평, 재실 터가 44평이다. 그런데 세대가 거듭되어 오면서 사패 문적(文籍)이 산망(散亡)되어 남아있지 않다. 각처의 후손은 물론 우리들도 그 전말을 알지 못한다. 작년과 올해 기내(畿內)의 종인(宗人)들을 접촉해보니, 토지소유권을 증명하고자 고양군에 사는 참판 종률씨가 자손 몇 사람을 시켜 측량하고 자기 명의로 증명하였다. 그 후 소유권 문제 발생과 소출 현황, 외향 종인의 배정금(排定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발신인은 성주이씨 종회 대표자 이대순(李大淳)이며 수신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종중이다. 배정금은 150원이며, 가배금(加排金)이 1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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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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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8년 표광진(表匡鎭)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拾參年 戊辰 十一月初七日 畓主 幼學 自筆 表匡鎭 幼學 趙鎭基 前明文 嘉慶拾參年 戊辰 十一月初七日 表匡鎭 趙鎭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0_001 1808년 11월 초7일에 표광진(表匡鎭)이 조진기(趙鎭基)에게 논 6두락을 18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08년 11월 초7일에 표광진(表匡鎭)이 조진기(趙鎭基)에게 외숙에게 물려받은 논 6두락을 18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답주(畓主) 표광진은 한 달 전 10월에 외숙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이사 가게 되면서 타인에게 매도하게된 것이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3년 무진년 11월 초7일 유학 조진기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외가에서 별급 받은 산전(山田)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이매(移買, 이사 가면서 팔고 삼)를 위해 문전면(文田面) 가천(可川) 앞 돌미평(乭弥坪)에 있는 수(受) 자(字) 논 외변(外邊) 3두락(11부 8속)과 내변(內邊) 3두락(8부 9속)을 180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잡담이 있으면 장차 이 문서로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유학 자필 표광진(表匡鎭)[착명]. 보증인 본답주(本畓主) 외숙 장지량(張智良)[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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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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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7년 이교순(李敎舜)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丑 三月 念八 外從 李敎舜 拜 丁丑 三月 念八 李敎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7년 3월 18일에 이교순(李敎舜)이 외종사촌에게 부탁한 물품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간찰(簡札) 1937년 3월 18일에 이교순(李敎舜)이 가천(可川)의 외종사촌에게 안부와 부탁한 물품 등의 구매 내용을 전하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뜻밖에 인편이 도착해서 비록 편지를 받지는 못했으나 소식을 두루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숙부님의 기력이 다행히 요사이에 조섭(調攝)에 손상됨을 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모님의 앓던 종기는 지금까지 남아 완쾌되지 않았다 하니 매우 걱정입니다. 부모 모시고 형제들의 안부는 편안하시고 아드님은 탈 없이 건강하고 모두 만복 하신 지 간절히 그리는 마음 지극합니다. 외종질은 부모님의 안부가 그런대로 편안하고 식구들도 드러나 탈이 없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저는 마을이 깨끗하지 못하여 대치댁(大峙宅) 사촌 동생 삼 형제가 그 증세(돌림병)로 여러 날 고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완쾌되었고 월율댁(月栗宅) 은아(殷兒)가 중병을 앓고 나서 큰 탈이 없어 다행입니다. 지난해 마포 일필과 백목 일필의 대금을 끝내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귀하의 인편이 와서 보내드리니 받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부탁하신 생강은 시장 날이 어긋나서 사 보내지 못하니 한탄스럽습니다. 만약 후편이 있으면 사서 보낼 계획입니다. 내달 10일에 일이 없으면 한번 나아가 찾아뵙고 돌아올 계획입니다. 어떻게 하면 만나서 쌓인 회포를 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흉년에 범사에 근심이 많아 한번 뵙지 못하니 한탄스럽습니다. 부탁하신 유기(鍮器)는 합당한 그릇이 없어서 사두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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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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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4년 이명진(李溟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午 六月 卄二日 査下 李溟鎭 拜 李生員 下執事 甲午 六月 卄二日 査下 李溟鎭 李生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340_001 1894년 6월 22일에 이명진(李溟鎭)이 사돈인 이 생원에게 사위가 처가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는 간찰(簡札) 1894년 6월 22일에 이명진(李溟鎭)이 사돈인 이 생원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마 더위가 평소에 어긋나는 이때 체후가 좋으심을 알았으니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부친의 안부는 항상 편치 않을 때가 많아 애타는 가운데 소소한 근심 때문에 층층이 쌓인 근심을 씻지 못하니 고민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사위는 탈 없이 공부 잘하고 있는지요? 전의 인편이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후의 기약이 절로 있어서 매일(날마다) 공경하지만, 아직도 외롭게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그러합니까? 마음이 심히 조울해서 지금 마땅히 문후를 여쭐 겨를이 없고 아드님이 장마에 매어 지금 이렇게 종을 보내니 부끄럽고 탄식스럽습니다. 이편에 명해서 보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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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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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4년 이종원(李鍾元) 등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 陰七月 二十日 李鍾元 甲子 陰七月 二十日 族從 鐘元 奎淳 黙齋公 嗣孫 聖淳健淳相璣 相龍等 再拜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4년 음력 7월 20일에 이종원(李鍾元) 등이 족보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 1924년 음력 7월 20일에 이종원(李鍾元) 등이 족보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이다. 우리 경공(京公)의 제향이 흩어지고 족보도 없어진지 오래되었지만, 근래 각 파의 족보는 가승(家乘)의 규모에 불과하여 각 파가 같지 않고 조각나서 계통이 없기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자에 경성에서 본파를 일체 합한 족보의 일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는 우리 가문의 효제와 친목상에 당연한 도리이나, 우리 족속은 저 대동보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두 통의 통지한 말과 같아 각 군의 모든 족속 내에서 향응하고자 하였다. 서울의 여러 곳에서는 각 단자가 다 이르렀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단자를 정비하고 8월 기신제에 참여하였다. 바라건대, 귀 파의 모든 어르신은 같은 파이고 더욱 친하니 같은 목소리로 서로 응하여 종사가 완결되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발신인은 이종원 외에 규순(奎淳), 묵재공(黙齋公) 사손(嗣孫) 성순(聖淳), 건순(健淳), 상기(相璣), 상룡(相龍) 등이다. 별지가 있는데, 주변 각처에 이 뜻을 다 알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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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97년 이교성(李敎成)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成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527_001 1897년 10월 20일 이교성이 5대조 할머니 증숙인 해평윤씨의 묘소에 올리는 제문 1897년 10월 20일 이교성(李敎成)이 5세부터는 친진(親盡)으로 1년에 한 번 묘제를 지내게 된 5대조 할머니 증(贈) 숙인(淑人)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이다. 1880년 자신이 정읍 두승산(斗升山) 아래 안영리로 이사한 뒤 1881년에 처음 세향(歲享)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혹은 난리로 혹은 형세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이미 16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금년 봄 비로소 제사를 들었으나 서로 다른 언덕을 바라보며 미치지 못하다가 하나의 지방(紙榜)으로 오세조 고비(考妣) 묘소 옆에 합쳤다고 하니, 세향은 반드시 묘소에서 하는 것인데 이같이 하면 어찌 묘제의 이름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마침내 이것이 연례(年例)가 되어 여전히 묘향(墓享)을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은 시천(詩川)의 한 종인(宗人)에게서 나왔고 편리함으로 집안사람들을 선동하였다고 하였다. 자신이 잔약한 바탕으로 가난하고 이룬 것이 없으나 또한 한줄기 선조의 기운을 이은 사람이라, 어렵고 먼 길을 이제 돌아왔으니, 삼가 대강을 논하여 바로잡겠다고 하는 내용으로 올린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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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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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무○년 김방식(金邦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之暮春九日 金邦植 可川 戊之暮春九日 金邦植 可川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무○년 3월 9일에 제 김방식이 상대의 집에서 돌아온 후로부터 약 2달간에 있었던 자신의 안부와 그리운 마음을 전한 안부 편지 무○년 3월 9일에 신호(莘湖)에 사는 제(弟) 김방식(金邦植)이 가천(可川)에 사는 이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형이 옛 것을 좋아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1월에 헤어진 후 어느덧 봄이 다 가게 되었다며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여 한탄스럽다고 했다. 상대와 상대의 종자부(從子婦)가 잘 있는지, 상대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생부(生父) 어른은 환후를 잘 조리하고 계신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상대가 있던 곳에서 돌아온 지 채 2일도 되지 않아 자신의 본래 병증이 일어나 먹을 것을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 사지에 마비가 와서 누웠다 일어났다 함에 사람을 대령한지 한 달이 넘었다가 겨우 집 뜰을 걷고, 현재는 거의 완치 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조카아이의 말로 듣기를 바란다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추신에는 형이 이 쪽으로 혹시 지나가게 되어도 너무 많은 물자를 주어 자신이 감사인사를 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하고 동생은 10리쯤 떨어진 곳에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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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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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4년 김영완(金永完)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陽月小晦 金永完 李敎成 甲戌陽月小晦 金永完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6 后4-12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40_001 1934년 10월 30일, 생 김영완이 『주차』가 아직 회수되지 않아 부치지 못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4년 10월 30일, 생(生) 김영완(金永完)이 보성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상대가 요청한 책(冊)의 전송과 관련하여 현 상황을 전한 간찰이다. 헤어진 뒤로 그리워하다가 이달에 상대의 편지를 차례로 받았다며 최근 상대의 안부가 어떠한지 물었다. 자신은 못난 여전하다고 하고 상대방이 한 말은 잘 알았다고 했다. 『주차(朱箚)』가 아직 회수되지 않아 죄송하다고 했다. 비록 띄엄띄엄 편지가 왕래되고는 있지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다며 이쪽 거간(居間)하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 항상 이와 같다며 탄식했다. 기한에 맞추어 우편으로 받아보실 수 있을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제시한 강(綱)의 가격은 의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대전(大全)』과 바꾸는 일은 다음 기회에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 두 가지의 낙권(落卷)은 『주차(朱箚)』를 부칠 때에 함께 보낼 계획이니 양해해 달라고 하였다. 추신으로는 그 외에 원하는 것이 있다는 충심을 다하여 도모할 것이니 알려주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발신자 김영완은 경성(京城) 익선동(益善洞) 120번지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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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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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4년 김영완(金永完)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十一月五日 金永完 李敎成 甲戌十一月五日 金永完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12 后4-12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40_001 1934년 11월 5일, 생 김영완이 상대가 구입하기를 원하는 책의 재고상황, 가격 등을 전하고 상대가 가져간 책을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성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4년 11월 5일, 생(生) 김영완(金永完)이 보성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상대가 원하는 책들에 대해 현재의 책 입고 상태, 가격 등을 전하고 상대가 가져간 책 등에 대해 주고받는 문제 등을 언급한 편지이다. 어제 보낸 편지를 아직 읽지 못한 것에 대해 우편도 잃어버리는 일이 있고 지체되어 전달되기도 한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못난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고 인사했다. 『주차(朱箚)』를 이제 겨우 회수했다는 것, 『사류(事類)』 2책을 함께 올린다는 것, 『사평(史評)』은 찾는 대로 추후에 부치겠다는 것, 『명사강목(明史綱目)』 은 좋은 책은 있지만 흠이 있는 것은 없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 지난번에 물었던 『주자대전(朱子大全)』은 다른 사람 차지가 되었다는 것, 좋은 것은 65책으로 50엔 이내로는 안 된다는 것, 조금 좋지 않은 것은 40엔인데 대충 둘러대는 말이 아니니 양해해 달라는 것, 『여사(麗史)』와 『무경(武經)』의 수말(首末)을 우체국에 보냈는지에 대한 물음, 만약 부쳤다면 즉시 우편국에 보내기를 바란다는 것,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바꾸는 일은 어찌 할 것인지 2질을 모두 하기 어렵다면 한 질만 하는 것은 어떠한지에 대한 물음, 다른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 도모할 것이니 알려달라는 것, 『율곡전서(栗谷全書)』와 『퇴계집(退溪集)』은 사려는 곳이 있는지, 『목은집(牧隱集)』과 다른 것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추기한 글에서는 당신 쪽에서 사기를 희망하는 것이 나올 때마다 자신 쪽에 상세히 말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 전에 말씀하신 것은 정신이모호해서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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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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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1년 이교달(李敎達)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酉九月卄四日 李敎達 李敎成 辛酉九月卄四日 李敎達 李敎成 경상북도 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1년 9월 24일에 이교달이 《안우산문집》 중에 조남명에 대한 각 정보와 공교분회소 개회식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21년 9월 24일에 경북 금천군(金泉郡) 조마면(助馬面) 백화동(百花洞) 공교분회소(孔敎分會所)의 이교달(李敎達)이 전남 보성군 문전면(文田面) 가천리(可川洞)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안부를 묻고 항상 누각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먼저 몇 해 전에 존형(尊兄)의 책상 위에 쌓여있는 《안우산문집(安牛山文集)》 중에 조남명(曺南溟)은 한 때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평하였는데, 조남명은 조식(曺植, 1501~1572)을 가리킨다. 본관이 창녕(昌寧), 자가 건중(楗中)이며, 남명이 호이다. 지금 도통사(道統祠) 공교분회소에서 크게 일어난 토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오직 우리 동방에서는 조남명 선생이 성리학(性理學)의 시조인데 우산(牛山)의 천박(淺薄)한 토호(土豪)의 일로 돌아가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선비가 이 말을 듣고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다."는 언론이 분분하여 한 가지 묻고자 하니 이른바 《안우산문집》에 실려 있는 이 말은 몇 권 몇 장에 있는지와 우산의 이름, 자호(字號), 관직을 알려주고 각판(刻板)인지 활판(活版)인지 상세히 알아서 회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산집이 이미 발간되어 각 집에 퍼져 있으나 종씨(宗氏)에게는 혐의가 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다음 달 4일 공교분회소에 개회식이 있으니 회답하여 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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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至月旬九日 李鐺 伊彦宅 丙寅至月旬九日 李鐺 伊彦宅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18_001 1926년 11월 19일에 재종질 이당이 진보하지 못하는 자신의 근황과 《소학》 〈가언편〉을 본 소감 등을 내용으로 이언 댁에 보낸 간찰 1926년 11월 19일에 재종질인 이당(李鐺)이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언(伊彦) 댁에 보낸 간찰이다. 삼가 진흙이 질퍽거리는 때에 행차는 화평하게 돌아왔는지, 재종조부(再從祖父)의 기력이 강건하시고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체후와 집안의 여러 일들도 모두 편안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재종질 자신은 눈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만한데 남은 핵심은 안에 있으며 빛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아 가을빛이 떨어짐을 탄식하고, 맡은 일은 평소에 이끌어 나아가는 기술이 없어 진보하여 중요한 뜻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럽고 두렵다고 하였다. 사람이 질병이 있는데도 약을 잘 먹지 않으면 가장 나쁜 증상이 되고 백 가지가 이미 고질이 되면 받아들이지도 던져버리지도 못해 명현(瞑眩)해지니 합당한 사람에게 치료를 받지 않으면 창편(倉扁, 편작)이 살아있더라도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근래 《소학》 〈가언편(嘉言篇)〉을 보았는데 구절마다 매우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한갓 동몽(童蒙)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강습하는 사람도 친숙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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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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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10년 조진기(趙鎭基)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拾五年 庚午 三月十一日 自筆 畓主 幼學 趙鎭基 幼學 高時旭 前明文 嘉慶拾五年 庚午 三月十一日 趙鎭基 高時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0_001 1810년 3월 11일에 조진기(趙鎭基)가 고시욱(高時旭)에게 논 6두락을 12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10년 3월 11일에 조진기(趙鎭基)가 고시욱(高時旭)에게 다른 땅을 매입하기 위해 논 6두락을 12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2년 전인 1808년에 표광진(表匡鎭)에게 산 땅을 다시 팔게 된 것이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5년 경오년 3월 11일 유학 고시욱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한 논을 이매(移買, 이사 가면서 팔고 삼)를 위해 문전면(文田面) 가천(可川) 앞 돌미평(乭彌坪)에 있는 수(受) 자(字) 논 외변(外邊) 3두락(11부 8속)과 내변(內邊) 3두락(8부 9속)을 125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와 함께 영영 방매하니 이후로 잡담이 있으면 장차 이 문서를 살펴서 바로잡을 것이라. 자필(自筆) 답주(畓主) 유학 조진기(趙鎭基)[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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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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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7년 박창혁(朴昌赫)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道光十七年 丁酉 三月初一日 畓主 自筆 幼學 朴昌赫 幼學 朴祥文 處明文 道光十七年 丁酉 三月初一日 朴昌赫 朴祥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37년 3월 초1일에 박창혁(朴昌赫)이 박상문(朴祥文)에게 논 1두 5승락을 4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37년 3월 초1일에 박창혁(朴昌赫)이 박상문(朴祥文)에게 이매(移買)하기 위해서 논 1두 5승락을 4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17년 정유 3월 초1일 유학 박상문(朴祥文)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하는 것이라. 내가 스스로 매득하여 여러 해 갈아먹다가 이매(移買)하기 위해서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장동(長洞) 아래들에 있는 화(和) 자(字) 논 1두 5승락(5부 9속)을 47냥에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분에게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서로 어긋나는 폐단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할 것이라. 답주(畓主) 유학 박창혁(朴昌赫)[상중으로 착명하지 않음]. 증인 유학 이만손(李萬孫)[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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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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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54년 이시백(李時白) 처(妻) 장씨부인(張氏夫人)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拾玖年 甲戌 四月初四日 畓主 故李時白妻 張氏 [右掌] 林爾章 處明文 乾隆拾玖年 甲戌 四月初四日 故 李時白妻 張氏 林爾章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43_001 1754년 4월 초4일에 이시백(李時白) 처(妻) 장씨부인(張氏夫人)이 임이장(林爾章)에게 논 1두 2승락을 2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754년 4월 초4일에 이시백(李時白) 처(妻) 장씨부인(張氏夫人)이 생활이 어려운 연유로 임이장(林爾章)에게 논 1두 2승락을 2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19년 갑술년 4월 초4일 임이장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하는 것이라. 내 부부의 제위답(祭位畓)이 있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생활이 어려운 연유로 형세가 부득이해서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 임내평(林內坪)에 있는 부(夫) 자(字) 논 1두 9승락 내에 하변(下邊) 1두 2승락(5부)을 27냥에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하되 본문기는 다른 전답에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며 이후로 잡담이 있으면 장차 이 문서를 살펴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고(故) 이시백(李時白) 처 장씨(張氏)[우장(右掌)]. 작성자 동성(同姓) 오촌 유학 이시화(李時華)[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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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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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0년 이우용(李瑀容) 입후(立後) 청원서(請願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光武四年十月日 李瑀容 掌禮院 光武四年十月日 李瑀容 掌禮院 ○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0년(광무 4) 10월에 이우용(李瑀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 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 1900년(광무 4) 10월에 이우용(李瑀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 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로, 청원인의 주소와 직역, 성명을 밝히고서 청원 내용을 기록하였다. 청원인은 전남 보성에 사는 사인(士人) 이우용이다. 본인의 백형 면용이 나이 늙도록 자식이 없다. 부모의 사판(祠板)을 맡기는 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에, 아들 교성을 계후하고자 한다. 예사(禮斜)가 장례원 관할에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앙청하니 살핀 후에 예사를 허급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예사는 관할기관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주는 글을 가리킨다. 신청기관은 장례원이다. 이 청원에 대한 장례원에서의 결정사항이 왼쪽 하단에 초서로 쓰여 있는데, 이 뎨김에는 아뢰어 허락을 받은 후에 예사를 발급하겠다고 하였다. 붉은색 직인이 3군데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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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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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0년 이면용(李冕容) 입후(立後) 청원서(請願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光武四年十月日 李冕容 掌禮院 光武四年十月日 李冕容 掌禮院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0년(광무 4) 10월에 이면용(李冕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 1900년(광무 4) 10월에 이면용(李冕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으로 청원인의 주소와 직역, 성명을 밝히고서 청원 내용을 기록하였다. 청원인은 전남 보성군에 사는 사인(士人) 이면용이다. 본인은 나이 늙도록 자식이 없다. 집의 아우 우용의 아들 교성이 봉양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사(禮斜)가 장례원 관할에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앙청하니 살핀 후에 예사를 특별히 허락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예사는 관할기관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주는 글을 가리킨다. 신청기관은 장례원이다. 이 청원에 대한 장례원에서의 결정사항이 왼쪽 하단에 초서로 쓰여 있는데, 이 뎨김에는 아뢰어 허락을 받은 후에 예사를 발급하겠다고 하였다. 붉은색 직인이 3군데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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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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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6년 윤상은(尹相殷)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申 三月 四日 査弟 尹相殷 拜謝 丙申 三月 四日 尹相殷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96년 3월 4일에 윤상은(尹相殷)이 사돈에게 사위인 자신의 아이를 잘 지도해달라는 내용의 간찰(簡札) 1896년 3월 4일에 윤상은(尹相殷)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의 안부와 함께 자신의 아이에 대한 당부를 담은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야흐로 그리워하던 차에 편지를 받고서 열어보니 지난번보다 앞서 위로가 됩니다. 삼가 그리움을 깨닫습니다. 요즈음 존형의 안부가 병을 조섭하고 있으시다 하니 염려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가족들의 안부는 모두 좋고 또한 며느리도 잘 있으니 위안되고 하례 드리는 마음 지극합니다. 저는 한결같이 옛 모습 그대로이고 권속들도 별 탈 없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은 저의 아이를 말씀하신 대로 보냈는데, 다만 나이가 어리고 처음 관을 쓰는 어린아이입니다. 다른 고을로 출입하는 것도 또한 처음 하는 일이어서 생각건대 실수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잘 가르치고 인도해서 오래도록 머물지 않게 하시고 조속히 보내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이른바 나가서 남평(南平)에서 만난 것은 더욱 시간을 많이 허비한다고 하니,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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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3년 이남수(李南洙)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陰四月十七日 李南洙 李斯文敎成 癸酉陰四月十七日 李南洙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16_001 1933년 음력 4월 17일, 족질 남수가 족숙 이교성씨에게 혼처를 소개하며 신랑 될 자를 소개하고 그를 이달 말 내로 봐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보낸 간찰(簡札) 1933년 음력 4월 17일, 족질(族侄) 남수(南洙)가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씨에게 혼처를 주선하며 이달 말 이내로 신랑을 만나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이다. 지난달에 이별했던 것이 아직 꿈같다며 최근 푸른 나뭇잎이 그늘을 만드는 요즈음에 어른 모시고 계신 형제분들의 안부를 물었다. 조카인 자신은 상중에 겨우 생활을 보존하고 있다고 인사한 후 전에 부탁했던 혼인에 관한 일에 대해 언급했다. 개평(介坪) 승지(承旨) 정승현(鄭承鉉)씨가 혼인을 저울질하는데, 나이 16세이고 피차 적당하기에 속히 통기하니 편지를 보는 대로 다음날에 자신의 집으로 왕림하여서 서로 상의하시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신랑 될 사람이 위양(渭陽)과 남원(南原)의 윤(尹) 모(某) 가(家)라고 하니 족숙께서 연원을 참고하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라며 이달 말 내로 좌우간에 신랑을 만나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묻고 편지를 마쳤다. 추기(追記)에는 만약 연기를 한다면 이곳에서는 절망할 것이니 기한 내로 왕림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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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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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797년 성주이씨 족보간행(族譜刊行) 발(跋) 초(草) 고문서-시문류-발 崇禎紀元後丁巳仲夏 李漢鎭 崇禎紀元後丁巳仲夏 李漢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97년(정조 21) 성주이씨 족보를 간행하면서 기념하여 작성한 발문의 초본 1797년(정조 21)에 성주이씨 족보를 개수(改修) 간행하면서 작성한 발문(跋文)의 초본(草本)이다. 두 발문은 훗날 따로 베껴 놓은 것으로 보이며 1797년 5월에 후손 이한진(李漢鎭)이 작성한 발문과 같은 해 10월 16일, 이우진(李佑震)이 작성한 발문이 함께 등서되어 있다. 이한진의 발문 내용은 1687년(숙종 13)에 은암공(隱庵公) 이광적(李光迪)이 목판으로 3권의 족보를 만들고 1751년(영조 27) 학암공(鶴庵公) 이응협(李應協)이 7권으로 활자 인쇄하여 간행한 족보를 언급하고 이후 40년이 흘렀으므로 새로이 족보를 간행하여야 한다는 당위와, 1786년에 운각(芸閣) 활자를 이용하여 새긴 것이 여러 권이고 지금까지 500여 판에 이르렀지만 중도에 상척(喪慽)이 이어지는 통에 탈고를 하지 못하고, 자신도 세상에 나아가 4년간 일을 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등의 경위와 족보 간행의 의의 등을 서술한 내용이다. 이우진의 발문 내용은 1786년에 택진(澤鎭) 씨가 서울에 보소를 설치한 이래로 거의 수단(收單)을 했으나 중도에 잘못되게 된 것을 1796년 봄에 서울에서 영당(影堂)으로 수단을 실어 내려와 초권(初卷)을 교정하고, 택진 씨가 수집한 이하의 세계를 싣고 약간의 명전(名錢)을 마련하여 각수를 모으고 판을 꾸며 재승(齋僧) 만학(萬學)에게 시켜 10월에 마치게 된 일을 서술하며 2년 동안 영당을 수리하고 강당을 짓고 족보를 간행한 사적을 기록하였다. 이한진(李漢鎭, 1732~?)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중운(仲雲), 호는 경산(京山)으로 감역(監役)을 지냈다. 전학(篆學)에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통하여 그의 퉁소는 홍대용(洪大容)의 거문고와 함께 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재주로 당시의 명사였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성대중(成大中)·홍원섭(洪元燮) 등과 교유하였다. 글씨는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소전(小篆)을 따랐는데, 『서청(書鯖)』에서는 그의 전서가 이름은 났으나 근골(筋骨)이 적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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