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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3년 이정순(李正淳) 계약서 2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大正拾貳年陰四月壹日 李正淳 李敎成 大正拾貳年陰四月壹日 李正淳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92_001 1923년 음력 4월 2일 이정순이 작성한 참판공 상‧하대 위토의 명의 이전수속에 대한 계약서 1923년 음력 4월 2일 이정순(李正淳)이 작성한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참판공 상‧하대(上下代)의 묘위토(墓位土)에 대한 명의 이전수속 계약서의 1면이다. 계약서 내용에는 '대지‧전답 19필지(1만3천558평, 토지가격 1,719엔(円))가 문장의 명의로 되어있었는데, 문중의 의론에 따라 공동소유로 이전 정리한다. 토지의 이전에 대하여 참판공 후손이 곡성파·가천파·시천파 합 3파인데, 종손은 시천파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전 문권에는 곡성파 10인, 가천파 10인만 기재되고 시천파 한 사람도 기재하지 않은 것은 대리인이 불민했던 것이므로. 다시 시천파 10인을 첨부하여 신청 정리한다. 이 10인을 더하여 신청정리에 드는 비용은 얼마인지를 묻지 않고, 앞에 기재한 곡성파 10인과 가천파 10인 개인 돈으로 쓰고 문중에는 요구하지 못한다. 앞에 기재한 곡성파 10인과 가천파 10인 중에 이 사항에 반대가 있을 때는 앞의 토지 13,558평을 옥척(沃瘠)을 3등분하여 2분은 참판공 위토, 일분은 시천공 등의 위토로 인정한다' 하는 등 여러 조항이 있다. 계약인은 곡성군 보성군 성주이씨 문중대표자 이정순(李正淳)으로 되어 있고, 이교성(李敎聲)‧이교재(李敎在) 앞(典)으로 되어 있다. 집필(執筆) 1인과 증인 2인의 서명이 있다. 글자체는 한문과 한글을 혼용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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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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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5년 이대순(李大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九月念八 李大淳 乙丑九月念八 李大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9월 28일에 이대순(李大淳)이 종중 사람들에게 새로 간행된 족보와 '백순의 글'을 보낸다는 간찰(簡札) 1925년 9월 28일에 이대순(李大淳)이 종중 사람들에게 새로 간행된 족보와 '백순의 글'을 보낸다는 내용의 간찰이다. 면섭(冕燮)을 통해서 본 여러분들의 글이 우리 문중의 정수리의 침이 된다고 하면서, 이로 인해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묘답(墓畓)을 옮기는 일, 문경공 상홀(文景公象笏)의 일, 노원(蘆原)의 일 등은 매번 치열했는데, 지금 족보를 간행하는 일을 보면 '들불(燒原)'이 되지 못하고, 다만 차가운 불일 뿐이라고 하면서 '백순의 글(百淳書)'과 족보를 함께 보낸다는 내용 등이 있다. '백순의 글'은 백순의 입장에서 쓴 글로, 세 사람이 위탁한 일에서 종현(鍾現)과 같이 하여, 백순이 하나도 혼자 비용을 쓴 일이 없고, 서로 헤어질 때도 결산서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 이후 비용의 처리 등에 대한 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끝에서는 비록 백척간두에 있으나 의롭지 않은 종중 재산은 결코 탐하지 않았음을 단언하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하고, 백순은 그간 본 몇백의 손해는 놔두고도, 잘못 없이 종중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아 신분이 땅구덩이로 추락했으니 통탄하나, 이미 응송(應訟)하고 있으니 믿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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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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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35년 한남서림(翰南書林) 증서(証書) 1 고문서-증빙류-증서 昭和九年 陰九月十五日, 10.2.2 翰南書林 李敎成 昭和九年 陰九月十五日, 10.2.2 翰南書林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光化門 10.2.2 后4-8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음력 9월 15일, 전남 보성군의 이교성씨가 한남서림의 백두용씨에게 『역대계통도』, 『석봉서첩』을 가져가면서 대금을 보내기로 약정한 내용의 증서 1935년 음력 9월 15일에 전남 보성군의 이교성(李敎成)씨가 한남서림(翰南書林)의 백두용(白斗鏞)씨로부터 『역대계통도』, 『석봉서첩』을 가져가면서 대금을 보내기로 약정한 내용의 증서이다. 『역대계통도(歷代系統圖)』 2책의 금액은 대금 13엔, 『석봉서첩(石峰書帖)』 3책의 금액은 대금 5엔이라고 게시한 후 두 책자를 가져간다는 것, 9월 말일까지 대금을 보내기로 약속한다는 것, 만약 살 생각이 없을 경우 책자를 반송하기로 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증서의 서약자 이교성(李敎成)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살며, 증서의 수취자는 한남서림(翰南書林)의 백두용(白斗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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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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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0년 청인(淸仁)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伍十五年庚戌三月初二日 淸仁 三奉 乾隆伍十五年庚戌三月初二日 淸仁 三奉 전라남도 보성군 淸仁[着名], 廣粲[着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37_001 1790년 3월 2일에 산인 청인이 삼봉에게 문전면 석동평원 소재 토지를 매매하는 명문 건륭(乾隆) 55년 1790년 3월 2일에 답주(畓主)인 산인(山人) 청인(淸仁)이 삼봉(三奉)에게 토지를 매매하는 명문(明文)이다. 자기가 매입한 논을 여러 해 동안 갈아 먹다가 상좌(上佐)인 찬호(粲好)의 봉인사(鳳印寺)가 빚이 매우 많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전면(文田面) 석동평원(席洞坪員)에 있는 훈자답(訓字畓) 1두락지 2배미[夜味] 부수 2부6속인 곳을 전문(錢文) 10냥으로 값을 매겨 숫자대로 받고 위의 사람에게 본 문기(文記)를 3장을 아울러 영구히 방매하며, 이 뒤로 상좌 중에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변정(卞正)할 일이라는 내용이다. 그 아래 부분에는 논의 주인인 산인 청인(淸仁)의 서명이 있고, 필집(筆執)은 산인 광찬(廣粲)이며 서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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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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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1년 이교승(李敎升)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巳至月二日 李敎升 辛巳至月二日 李敎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41년 11월 2일에 이교승(李敎升)이 혼사, 문안(門案)의 의리, 새해 달력 등에 관한 내용으로 보낸 간찰 1941년 11월 2일에 이교승(李敎升)이 보낸 간찰이다. 수신자는 미상이다. 한 해가 가려고 하는 이때에 형제분의 체후는 강녕히 잘 보중하고 각 집안 식구들이 모두 평안한지 묻고 삼가 사모하는 마음 지극하다고 인사하였다. 자신은 막내 아이 혼사가 보성 당촌(堂村)에서 행할 날이 가까워져서 오는 13일인데 모든 일이 갖추어졌다. 회옹(晦翁)의 이른바 '가취(嫁娶)'라는 말은 음미할 만한 가르침이라 하고, 부탁하신 문안(門案)을 기록하는 일은 돈목(敦睦)의 의리라서 졸렬함을 잊고 지어 올리니 다시 고견(高見)으로 질정해 달라고 하였다. 각 댁에서 가져온 명첩(名牒)이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하고 이번에 가는 언찰(諺札)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시천어첩(詩川御牒)은 이미 모두 인쇄되었다고 하였다. 별도로 첨부한 쪽지에는 새해 달력은 조각한 것이 용렬하여 어른어른한 눈에 합당하지 않으니 여러 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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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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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2년 김기석(金箕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申二月四日 金箕錫 李順九 壬申二月四日 金箕錫 李順九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74_001 1932년 2월 4일에 김기석이 자식을 가르치고 경계해야 할 것, 영애의 혼처 소개 등의 내용으로 이순구에게 보낸 간찰 1932년 2월 4일에 전남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옥정리(玉井里)에 사는 동생 김기석(金箕錫)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순구(李順九)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먼저 안부를 묻고,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랑한다면 그를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사랑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뜻으로 새벽과 저녁으로 경계하고 깨우쳐 그로 하여금 굳건하게 뜻을 세우게 해야 한다. 분명치 못하게 반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자식을 가르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없는 자가 경계를 삼지 못하는 얕은 성품으로 세장물정에 어둡고 친척과 고을의 뜻과 맞지 않아 따르는 사람이 없다. 형과 내가 정의를 맺고 5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궁금한데, 대군자(大君子)의 넓은 도량과 훌륭한 덕이 법도에 맞고 엄격한 것은 천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주(瀛洲)에서 어제야 집으로 돌아와 떨쳐 일어나기가 어렵다. 영애(令愛)의 혼처로 합당한 사람을 구한다면 자신의 고을 북쪽 아래의 회촌(晦村) 평리(坪里)에 사는 친척 한수(漢洙)의 막내 동생 집에 나이가 17세인 총각이 있다. 소학교에서 배우고 책문(策文)을 읽었으며 모습이 단정하다. 집안의 재력은 없으나 집안의 법규가 화순하여 넉넉한 집에 버금가는 혼처이니, 형이 만약 뜻이 있으면 자세히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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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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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56년 이세필(李世弼) 숙모(叔母) 김씨(金氏)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貳拾壹年 丙 子十二月卄二日 畓主 叔母 金氏 侄李世弼 處明文 乾隆貳拾壹年 丙 子十二月卄二日 叔母 金氏 李世弼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56년 12월 22일에 숙모(叔母) 김씨(金氏)가 조카인 이세필(李世弼)에게 논 12두락을 2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756년 12월 22일에 숙모(叔母) 김씨(金氏)가 생활이 어려워 조카인 이세필(李世弼)에게 논 12두락을 2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문서의 특징으로 매도자 숙모 김씨는 평민이나 천민, 해당 신분의 여성이 서명하는 방법으로 우장(右掌) 즉 오른손 바닥을 그려 넣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21년 병자년 12월 22일 조카 이세필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하는 것이라. 제위답(祭位畓)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생시에 이처럼 살아나갈 방법이 어려워지니 부득이하게 문전면(文田面) 갈본질원(乫本叱員)에 있는 수(受) 자(字) 논 1두락(3부 3속)을 22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교환해서 받고, 매입자인 조카에게 본문기(本文記) 2장과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잡담이 생기는 폐단이 있으면 장차 이 문서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숙모 김씨(金氏)[우장(右掌)]. 작성자 유학 이춘방(李春芳)[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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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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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9년 김인동(金仁同) 노비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노비매매명문 己亥 八月二十二日 上典 金仁同 己亥 八月二十二日 金仁同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60_001 1899년(기해) 8월 22일에 김인동(金仁同)이 아무개에게 여자 종을 25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99년(기해) 8월 22일에 김인동(金仁同)이 아무개에게 여자종을 25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문서에는 '기해(己亥)'라고만 되어 있는데 '1899년 황참봉(黃參奉) 노비매매명문(奴婢賣買明文)'이 같은 해 같은 달에 작성한 문서여서 1899년임을 알 수 있다. 이 문기는 전통적인 문서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기본적 사항만 적고는 노비주와 증인 및 작성자가 착명(着名)을 해서 발급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해년 8월 22일. 이 문기를 작성함. 이번 가을 매득한 여비(女婢) 복율(卜栗)을 본디 가격 250냥으로 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아울러 전래한 신·구문기(新·舊文記)를 주겠으니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로 증빙할 일이다. 상전(上典) 김인동(金仁同)[착명]. 증인 및 작성자 장윤환(張允煥)[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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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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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27년 권천봉(權千奉)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雍正伍年 丁未 三月初五日 畓主 權千奉 林愛善 處明文 雍正伍年 丁未 三月初五日 權千奉 林愛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27년 3월 초5일에 권천봉(權千奉)이 임애선(林愛善)에게 논 5부(負) 7속(束)을 18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727년 3월 초5일에 권천봉(權千奉)이 임애선(林愛善)에게 여러 해 경작하던 논 5부(負) 7속(束)을 18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옹정(雍正) 5년 정미 3월 초5일 임애선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하는 것이라. 내가 조상에게 몫으로 얻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연이어 흉년을 만나서 살아나갈 방법이 어려워지기에 부득이하게 적전면(積田面) 가천동(可川洞) 용보원(龍洑員)에 있는 수(受) 자(字) 논 시종(時種) 2두 5승락 내에 하변(下邊) 1두 5승락 결부수로 11부(負) 3속(束) 내에 5부 7속을 18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만일 잡담이 있으면 이 문서를 살펴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권천봉(權千奉)[착명]. 작성자 이성(異姓) 오촌 조카 이세기(李世起)[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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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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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0년 이병용(李秉容) 입후(立後) 청원서(請願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光武四年十月日 李秉容 掌禮院 光武四年十月日 李秉容 掌禮院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0년(광무 4) 10월에 이병용(李秉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 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 1900(광무 4) 10월에 이병용(李秉容)이 입후(立後)를 허락해 줄 것을 장례원(掌禮院)에 신청한 청원서(請願書)으로 먼저 청원인의 주소와 직역, 성명을 밝히고서 청원 내용을 기록하였다. 청원인은 전남 보성군에 사는 진사 이병용이다. 본인의 종제(從弟) 면용(冕容)이 나이 늙도록 아직 자식 하나도 없다. 종중회의에서 동의하여 그의 아우 우용의 아들 교성이 봉양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사(禮斜)가 장례원 관할에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앙청하니 살핀 후에 예사를 특별히 발급을 허락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예사는 예조나 장례원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주는 글을 가리킨다. 신청기관은 장례원이다. 이 청원에 대한 장례원에서의 결정사항이 왼쪽 하단에 초서로 쓰여 있는데, 이 뎨김에는 아뢰어 허락을 받은 후에 예사를 발급하겠다고 하였다. 붉은색 직인이 3군데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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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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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74년 이생원댁 노(奴) 수백(水白)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三十九年 甲午 十一月二十二日 畓主 寶城 李生員宅奴 水白 李生員奴 三順 前明文 乾隆三十九年 甲午 十一月二十二日 水白 三順 ○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74년 11월 22일에 답주 이생원댁 노(奴) 수백(水白)이 이생원댁 노(奴) 삼순(三順)에게 토지를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74년 11월 22일에 답주 이생원댁 노(奴) 수백(水白)이 이생원댁 노(奴) 삼순(三順)에게 토지를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긴요하게 쓸 일로 전래해오던 전답 안산 초산면 물항동 환사외(還沙隈)의 담자(淡字) 697분답 1두5승락지 3복5속과 동자답(同字畓) 698답 1두5승락지 1복8속, 동자전(田) 춘모(春牟) 4두락지 689 2복5속을 위 사람에게 전문 50냥을 받고 교역하니 상전댁에 바치고 문기를 만들어 영영 방매한다고 하였다. 답주는 이생원댁 노 수백이며, 증인은 사노(私奴) 신귀쇠(申貴金)이고, 보(保)는 반노(班奴) 신오순(申五順)이고, 필집은 업유(業儒) 오수백(吳壽伯)이다. 이름 아래에 수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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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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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0년 교천(敎川)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庚申 九月 二十四日 族侄 敎川 二拜 上書 庚申 九月 二十四日 敎川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9월 24일에 교천(敎川)이 숙부에게 곡성 문중의 묘지에 관한 내용을 전하는 간찰(簡札) 1920년 9월 24일에 교천(敎川)이 자신의 숙부에게 문중의 묘지에 관한 일과 소식을 전하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편지를 받고서 늦가을에 정양하시는 기력이 한결같이 좋으심을 알았으니 위안되는 마음이 저의 바람대로였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체후는 편안하시니 삼가 다행입니다. 말씀하신 묘지의 일은 얼마나 중대하니 범범하게 들을 수 있는 말과 비유할 수 없습니다. 14일 날 편지로 말씀하신 것을 받고서 16일 날 두곡(斗谷)에 이 뜻을 말씀드리니 도리어 변란의 유래가 된 옛 규칙으로서 무사한 데서 일을 만들어 낸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게다가 새로 산지기를 바꾸는 일로 책망하여 말씀하기를 지난 산지기를 체직(遞職)하여 내보내서 제사 때의 모든 예절을 잇지 못했다고 꾸짖었습니다. 지금 이미 산지기를 새로 선택하였지만, 오히려 일을 맡기지 못한단 말입니까? 이러한 뜻으로 이미 편지를 써서 곡성 문중에 기별하였다고 했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와 응당 나아가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 제가 박처럼 메어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니 삼가 살펴 주십시오. 기와는 이미 종래(琮來)와 함께 허락을 받았는데, 지금 존문(存問) 해주신 편지를 받아보니 토굴 속의 기와가 없으므로 장차 다시 굽는 가마를 기다린다면 올해 안에 들여보낼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짐꾼은 교촌의 덕서(德西) 형제가 지고 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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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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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종탁(李鍾鐸) 등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陰二月 十二日 李鍾鐸 丙寅 陰二月 十二日 鍾鐸 鍾浹 相元 相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음력 2월 12일에 이종탁(李鍾鐸) 등이 족보와 채무 관계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 1926년 음력 2월 12일에 이종탁(李鍾鐸) 등이 족보와 채무 관계의 일로 보낸 간찰(簡札)이다. 족보 간행의 일이 완공을 고할 듯하다. 같은 파가 한데 모인 날을 돌아보면 오직 귀 문중이 아직도 늦어져서 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수단도 끝내고 필사도 마쳐야 하는 지금 몹시 서운함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서산(西山)의 종중의 일은 귀 문중에서 헌토(獻土)하는 정성을 다했으나 아직도 보완되지 않았다. 당시 채무는 원금과 이자의 액수가 도리어 새 토지를 환매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평순(平淳)이 10원을 영수하기로 허락했으니 받아서 드리고 통찰한 후에 귀 문중에서 헌토 가액 및 수년 동안의 도조(賭租) 내에서 이 10원을 제하고 나머지 액수를 즉시 보내는 것이 맞겠다. 대종(大宗)의 제반 묵은 부채를 타결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신인은 이종탁 외에, 종협(鍾浹)·상원(相元)·상형(相衡) 등 4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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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4년 이종일(李鍾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 陰十月 二十五日(간찰)/陰十月 二十六日(피봉) 李鍾一 李冕容 甲子 陰十月 二十五日(간찰)/陰十月 二十六日(피봉) 李鍾一 李冕容 경성부 죽첨정 131번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4년 10월 25일 족손 이종일이 이면용에게 족보 편찬사업 관련내용으로 보낸 간찰 1924년 10월 25일 족손(族孫) 이종일(李鍾一)이 가천 이면용(李冕容)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집안 어른의 안부를 묻고, 족보편찬 일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홍순(洪淳)을 통해 안부를 들었고, 또 공의 의론(議論)으로 우리 문경공파(文景公派)의 족보를 기일에 맞춰 완성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며, 통찰해 주심에 칭송하는 마음에 끝이 없다고 하였다. 10월에 수운(壽韻)의 건강이 계절에 따라 좋은지, 집안이 모두 편안한지 묻고 자신은 그런대로 지낸다고 하였다. 보의(譜儀)는 두 번의 통유(通諭)에서 잘 알았으나, 그 파(派)에서 각자 작업하는 것은 오히려 산만하고 계통이 없으니, 경기에서부터 먼저 창도해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족대부(族大父)께서 감독하고 살펴주어서 이미 시작한 이 일을 완성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피봉 앞면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이면용씨 정좌하(李冕容氏 靜坐下)라 하였고, 뒷면에는 경성부 죽첨정(竹添町) 131번지 이종일, 음력 10월 26일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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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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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음(所願吟)〉 등의 시 초고(草稿)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519_001 〈홍백란〉, 《지비자집》의 〈경협골〉, 〈박인규에게 고하다〉, 〈소원음〉 등의 시 초고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수정한 초고이다. 작성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며, 모두 15편이다. 〈홍백란(紅白亂)〉 2수, 〈발문(發㦖)〉 2수, 〈증야죽박우(贈埜竹朴友)〉 3수, 《지비자집》의 〈경협골(勁脥骨)〉 5수,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 〈박인규(朴仁奎)에게 고하다〉, 〈소원음(所願吟)〉 등의 시가 있다. 〈경협골〉의 제목 밑에는 '주자(朱子)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자가 이 3자를 써주었다.'는 세주가 있어, 이 시를 쓴 배경을 설명하였다. 〈소원음〉은 칠언율시로 '공자를 배우고자 하면 이자(李子)로부터,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송자(宋子)로부터. 이자는 우리나라에서 공자를 잇고, 송자는 우리나라에서 주자를 이었네. 심산(心山)은 두 부자(夫子) 모두 배우기를 원하네.'라는 내용이며, 이 시의 밑에는 "석담(石潭, 율곡 이이)의 근원은 수사에서 나왔고, 화양(華陽, 우암 송시열)의 맥은 무이(武夷)를 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라는 시는 아래의 관련문서 마지막에 있는 〈있고 없음을 읇다[有無吟]〉, 〈장서실에서 쓰다[書于藏書室]〉와 같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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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종형(李鍾瀅)·이종석(李鍾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戌陰三月二十日 李鍾瀅 李敎成 壬戌陰三月二十日 李鍾瀅 李敎成 경기도 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음력 3월 20일, 종하 이종형·이종석 등이 이교성씨에게 선조 문경공 위토를 잃어버린 일과 관련하여 종중회의를 하기 위해 인천부 이철순가로 왕림해 줄 것을 청한 간찰(簡札) 1922년 음력 3월 20일, 종하(宗下) 이종형(李鍾瀅), 이종석(李鍾錫) 등이 선조 문경공 위토를 잃어버린 일과 관련하여 종중회의를 하기 위해 인천부 이철순가(李哲淳家)로 왕림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 씨에게 보낸 간찰이다. 선조 문경공 위토 견실사(見失事)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것이라며 별묘(別廟)터를 귀정(歸正)하던지, 위토(位土) 사건을 환퇴(還退)하는 방침을 연구하던지 결정하기 위하여 본년 4월 25일에 인천부(仁川府) 우각리(牛角里) 제1호 12번지 이철순의 집에서 방침을 규정할 수 있도록 왕림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그 곳에 왕림하는데에 들어가는 여비는 각기 종중에서 부담하도록 할 일이라고 추기해 놓았다. 간찰과 동봉되어 있는 별지(別紙)에는 피고(被告) 적자(賊子) 3인 중에 학순(學淳)은 이미 죽었고, 종팔(鍾八)은 현재 서대문 감옥에 있고, 만종(万鍾)은 지금 수색 중이라는 정보를 적어 놓았다. 국한문 혼용 문체를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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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백두용(白斗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七月一日, (昭和)10.7.30 翰南書林 李敎成 乙七月一日, (昭和)10.7.30 翰南書林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光化門 10.7.30 后4-8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7월 1일, 한남서림 백두용이 이교성에게 상대가 돌려준 책을 잘 받았으며, 원하는 책을 만들어 보내면 받을 것인지 묻고, 판매하고 있는 책의 가격을 전한 간찰(簡札) 1935년 7월 1일, 한남서림(翰南書林) 백두용(白斗鏞)이 돌려준 책을 잘 받았으며 상대가 원하는 책을 만들어 보내면 받을 것인지 묻고 판매하는 책 가격을 전한 내용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마와 더위가 성한 이때의 수해를 언급하며 안부를 묻고, 상대가 보내온 답장 편지를 여러 차례 읽으며 기뻤다고 인사하고 자신은 더위를 먹었고, 가족들은 별 탈이 없다고 인사했다. 상대가 보내온 『화동강목(華東綱目)』, 『서오경(書烏經)』, 『이락연원(伊洛淵源)』을 잘 돌려받았다고 전하고, 『매월당집(梅月堂集)』을 만들어 보낸다면 받으시겠냐고 물었다. 『율곡전서(栗谷全書)』가 현재 한 질 있는데 지본(紙本)은 경천연지(京川連紙)로 1권을 베껴서 채워 놓았으며, 총 책수는 24책으로 가격은 45엔이라고 적었다. 당시의 책 가격과 판매방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백두용(白斗鏞,1872~1935)은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의 설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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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성주 봉산재(鳳山齋) 종회의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大正十五年乙丑十一月二十日 星州鳳山齋宗會 李龍淳 大正十五年乙丑十一月二十日 星州鳳山齋宗會 李龍淳 경상북도 성주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11월 20일에 성주 봉산재(鳳山齋) 종회에서 영정 모사 관련 비용 건으로 이용순(李龍淳) 문중에 보낸 통문(通文) 1926년 11월 20일에 성주 봉산재(鳳山齋) 종회에서 영정 모사 관련 비용 건으로 이용순(李龍淳) 문중에 보낸 통문이다. 안산사(安山祠) 영정의 변고에 대해 7개월간 수색하였는데, 농서공·도은공·경무공 3위의 영정이 대구에 사는 일본인 도본신신(稻本新臣)에게서 나오고, 참지공과 판윤공 2위의 영정은 경성에 사는 일본인 천지무태랑(天池茂太郞)에게서 발견되었다. 이를 본래의 장소에 도로 봉안하고, 변을 당한 5위의 영정과 은암공의 영정을 모사하고, 12위의 영정은 가장(加裝)하고 있다. 저간에 영정 수색 비용과 3차 종회비, 제반 비용 등 도합 천여백 원인데, 각 도군(道郡)의 각 문중에 분배하여 마련하기로 하였으니, 각 문중에 배정된 금액을 보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유사 이교달(李敎達) 등의 연명이 있다. 끝에는 배정된 금액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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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김기석(金箕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冬至後七日 金箕錫 李舜九 冬至後七日 金箕錫 李舜九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74_001 1931년 김기석이 최우(崔友)의 행실과 우리 형의 용서하는 마음, 2차로 약을 지어 보낸다는 등의 내용으로 보낸 간찰 1931년 동지(冬至)가 지난 뒤 7일(음력 11월 22일)에 김기석(金箕錫)이 보낸 간찰이다. 먼저 안부를 묻고 특별히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평정을 유지하며 마음을 안정시켜 응집되고 만년에 통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우리 형의 효(孝)가 자애롭게 마음을 환하게만 하고 근심을 펴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봄에 마음에 민망하여 스스로 정신과 마음이 괴롭고 근심스럽지 않겠는가마는, 굽으면 반드시 펴지는 것이 천도(天道)의 법이라고 하였다. 지난번 최우(崔友)의 행실은 실로 여러 날을 생각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며, 샛길과 굽은 길로 불경(不經)한 작은 술법으로 구제하고자 한 것은 우리 형의 측달(惻怛)함에 차이가 없음을 헤아려 곡진히 용서하였으나 또한 옆 사람들이 얼굴에 침 뱉는 것을 면하기 어려워 매번 밤에 일어나 앉아 몸을 돌아보고 스스로 탄식한다. 비유하자면 높은 산에 오르는 자가 산세가 기험(崎險)하여 천만 번 돌아가야 하는데 산에 오를 때 만약 먹줄처럼 곧고 대패처럼 평평하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중도에 수레를 돌리려고 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세상에 도(道) 밖의 도가 많고 리(理) 밖의 리가 있어 바람을 타고 번개를 채찍질하며 이름 지어 형용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최우는 그 사이에 한두 번 도를 헤아렸을 것인데 이 벗은 사방에 뜻이 있어 선장(仙庄)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다만 2차로 약을 지어 우편으로 보낸다. 전두에 몸을 일으켜 나아감은 오로지 우리 형의 신용에 달려 있으며 세상만사가 미리 정하기 어려우니 각각 그 마음을 다할 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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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復月念九日, (大正)13.11.29 李鐺 李敎燮 甲子復月念九日, (大正)13.11.29 李鐺 李敎燮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18_001 1924년 10월 29일에 재종질 이당이 부평초처럼 외로운 자신의 근황과 혼사의 여러 사안을 이교섭에게 전하는 간찰 1924년 10월 29일에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장전리(長田里)에 머무르는 재종질 이당(李鐺)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숙부 이교섭(李敎燮)에게 보낸 간찰이다. 삼가 진흙이 질퍽거리는 행차는 화평하게 돌아왔는지, 재종조부(再從祖父)의 기력이 강건하시고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상대방의 체후와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도 모두 편안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재종질 자신은 지금 겨우 길을 출발하여 부평초처럼 외로운 자취를 알 수 없으니 신세가 백 가지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고, 혼사 소식을 전하였다. 혼사는 삼천(三川) 한 곳을 다시 생각해 보니 부자를 선택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규수가 있으면 받아들이라고 하고, 사랑(沙郞) 한 곳은 박사(博士) 형과 의논해 보니 처지가 비슷하고 덕도 비슷해서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하다는 것과 저 집안의 사세가 진실로 가난하면 필시 안으로 도와도 부족하니 편지로 원용(元用) 형에게 의논하여 허락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의 인심이 가난하면 부유함을 택하니 이에 따라 부유함을 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자신의 의견도 전하고 있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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