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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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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8년 남씨댁(南氏宅)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三年 戊午 正月十六日 畓主 南 喪人着署 張鳳春 處明文 嘉慶三年 戊午 正月十六日 南○○ 喪人 張鳳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98년 정월 16일에 남 아무개가 장봉춘(張鳳春)에게 논 7승락을 14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798년 정월 16일에 남 아무개가 장봉춘(張鳳春)에게 부모 초상에 드는 비용 때문에 논 7승락을 14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특징적으로 답주(畓主)가 상중에는 통상 이름 뒤에 '상불착(喪不着)'이라고 쓰는데 여기서는 이름은 생략하고 '상인착서(喪人着署)'라고 기재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3년 무오년 정월 16일 장봉춘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초상에 드는 비용을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득이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 갈본원(乫本員)에 있는 외(受) 자(字) 논 7승락(2부 5속)을 14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교역해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잡담을 도모하는 일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남씨 상인착서(喪人着署). 증인 장가어동(張加於同)[착명]. 작성자 문귀갑(文貴甲)[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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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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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8년 임사윤(任思潤) 가사매매명문(家舍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同治柒年 戊辰 五月二十日 家垈主 自筆 表侄 任思潤 外叔主 前明文 同治柒年 戊辰 五月二十日 任思潤 外叔主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8년 5월 20일에 임사윤(任思潤)이 외숙주(外叔主)에게 초가(草家)와 가대(家垈) 2속(束)을 1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68년 5월 20일에 임사윤(任思潤)이 이사를 가기 위해서 외숙주(外叔主)에게 초가(草家)와 가대(家垈) 2속(束)을 17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치(同治) 7년 무진년 5월 20일 외숙주님께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전래되어온 가대(家垈)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아오다가 부득이 이사를 하게 되어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에 있는 부(夫) 자(字) 초가 및 가대(家垈) 결부(結負) 수(數)로 2속인 곳을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放賣)하기 위해 17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이후로 만약 갈등의 폐단이 있거든 이 문기로 고증할 것이라. 가대주(家垈主) 자필(自筆) 표질(表侄) 임사윤(任思潤)[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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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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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84년 이복원(李馥源)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四十九年 甲辰 十二月初五日 畓主 自筆 李馥源 僧戒岑 戒元 宇寬 處明文 乾隆四十九年 甲辰 十二月初五日 李馥原 僧侶 戒岑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84년 12월 초5일에 이복원(李馥源)이 승려들에게 논 6두락을 8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784년 12월 초5일에 이복원(李馥源)이 승려 세 사람에게 처가에서 물려받은 논 6두락을 8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다. '건륭(乾隆) 49년 갑진 12월 초5일 승려 계잠(戒岑), 계원(戒元), 우관(宇寬)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放賣)하는 것이라. 처가에서 몫으로 얻은 훈(訓) 자(字) 논 6두락(28부)이 문전면(文田面) 석동평(席洞坪)에 있는데 바로 이매(移買)하기 위해서 위 승려들에게 85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본문기(本文記) 및 패자(牌子) 한 장과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혹여 잡담을 도모하는 폐단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증빙할 것이라. 답주(畓主) 자필 이복원(李馥源)[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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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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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6년 이서용(李瑞容) 전당명문(典當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 丙戌 十二月初四日 畓主 幼學 李瑞容 前明文 光緖十二年 丙戌 十二月初四日 李瑞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86년 12월 초4일에 이서용(李瑞容)이 아무개에게 돈 100냥을 빌리면서 자신이 소유한 논 13두락을 맡기고 작성해준 전당문서 1886년 12월 초4일에 이서용(李瑞容)이 아무개에게 돈 100냥을 빌리면서 조상으로부터 전래한 논 13두락을 맡기고 작성해준 문서이다. 이러한 문서는 통상 수표(手標)로 작성하는데 이 경우에는 명문(明文)의 형태로 만들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서(光緖) 12년 병술 12월 초4일 아무개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논을 여러 해 소작을 주다가 요긴하게 쓸 목적으로 돈 100냥을 4리의 이자로 정해서 빌리고, 논 13두락을 신구문기(新舊文記)와 아울러서 이와 같이 전당(典當)한다. 이듬해 11월 초10일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이 기한이 지나면 영영 차지할 뜻으로 이와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 답주(畓主) 유학 이서용(李瑞容)[착명]. 증인 및 작성자 유학 이용(李容)[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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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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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이교성(李敎成), 이종후(李鍾厚) 토지사정부(土地査定簿)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李敎成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보성군 대덕면 용암리의 이교성(李敎成)과 이종후(李鍾厚)의 소유 토지에 대한 토지사정부(土地査定簿)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공문서 용지를 사용하였고, 군면리로 구분하여 작성하도록 되어 있으며, 또 소유자별로 나누었다. 문서의 항목은 큰 항목이 토지조사부, 결수연명부(結數連名簿), 적요 등이며, 토지조사부에는 토지소재, 지번, 가지번(假地番), 지목, 지적, 신고 또는 통지 연월일 등으로 구분하였다. 결수연명부는 자번(字番), 두락(斗落), 결수로 나누었다. 이 문서는 보성군 대덕면 용암리의 토지소유자 이교성의 소유 토지 조사 결과를 기재해 놓은 장부이다. 토지소재지는 32곳인데, 대부분 용암리이고 덕치리와 봉갑리에도 일부 소재해 있다. 대부분이 전답이며, 대지가 두 군데에 있다. 각 항목에는 해당 사항이 기재되었으며, 적요에는 소재지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장부 뒤에는 지적도(地籍圖)가 수록되었다. 또 용암리의 토지소유자 이종후의 소유 토지 장부가 있다. 토지소재지는 모두 10곳이며, 용암리가 대부분이고 덕치리에 한 곳이 있다. 기재사항은 앞서와 같으며, 역시 뒤에 지적도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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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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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종협(李鍾浹)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鍾采 氏 座下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1월 17일 족종 이종협과 종탁(鍾鐸)‧철협(喆協) 3명이 이종채에게 족보 간행사업에 관한 용건을 적어 보낸 간찰 1926년 1월 17일 족종(族從) 이종협(李鍾浹)‧종탁(鍾鐸)‧철협(喆協)이 가천의 이종채(李鍾采)에게 보낸 간찰로, 족보 간행사업의 진행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3년 뒤에 훌륭한 보책(譜冊)이 나오면 감격이라 하면 감격이고, 또한 가문에 새로운 광채를 더할 것이나, 족보간행 사업을 시작하고 여러 해가 되었고, 우리 본파는 인력을 투입하고 간행을 도와 완성을 고하고자 하는데, 귀 문중은 무엇을 찾느라 늦어지는가 하고 물었다. 족보의 규칙은 시대를 따라야 한다. 적서(嫡庶) 등을 말하지만, 분별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편집의 규칙에서도 층(層)에 10자, 높이는 9자 등으로 정해져 있는데, 귀 파(派)에서 따로 의견을 제시하니, 만약 누락되는 것이 없으면 미루지 말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속히 부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 고치고 내일 또 고쳐서 세월을 보내어 비용이 늘어나니 감당하기 어렵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보내는 날짜 위에는 발신인의 종파의 직인이 찍혀있다. 피봉 앞면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이종채(李鍾采)씨 좌하(座下)라 하였고, 뒷면에는 경성부 성주이씨보소(星州李氏譜所)에서 이종협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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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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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한시(漢詩) 초고(草稿)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지은 "삼산정사운"이라는 칠언율시와 "내팔경음"이라는 칠언절구 17수의 한시 초고 삼산정사(三山精舍) 7언율시와, 내팔경음(內八景吟)이라는 제목아래 7언절구 17수가 있다. 내팔경음에는 절구마다 각각 제목이 붙어 있는데, 방장청풍(方丈淸風), 영주조돈(瀛洲朝暾, 영주의 아침햇살), 봉래낙조(蓬萊落照), 화서천인(華瑞千仞), 수강벽립(壽崗壁立), 소요숙운(逍遙宿雲), 입암산성(笠岩山城), 명금초가(鳴金樵歌), 동림춘수(東林春水), 옥녀추월(玉女秋月), 갈령동송(葛嶺冬松), 조치훤성(鳥峙喧聲), 웅포환화(熊浦渙火), 만경연야(萬頃連埜), 칠보광명(七寶光明), 내장효종(內藏曉鍾) 등이다. 그러므로 내팔경은 전라도의 여덟 지역을 읊은 것이며, 지우고 수정한 곳이 여러 곳 있는 초고(草稿)이다. 이 시에서 삼산정사는 전남 곡성군의 "죽곡면(竹谷面) 삼태리(三台里)에 있는 강학소이다. 본관이 문화(文化)인 유태영(柳台永)이 종인(宗人) 동기(東基)과 친구 조은규(趙殷奎) 및 뜻이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건립하여 강학하던 곳이 있으나 여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방장산은 전북 정읍시와 고창, 전남 장성의 경계에 솟아 있으며, 영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부안의 변산(邊山)을 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고 하였다. 입암산성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이다. 옥녀추월의 옥녀봉은 전북 무주군 부남면(富南面)에 있다. 갈령은 전남 장흥군 장평면 녹양리 서남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웅포는 익산에 있는 지명이며, 만경은 만경의 넓게 이어진 들판이라는 뜻으로, 김제지역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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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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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5년 이종탁(李鍾鐸)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 陰六月 二十五日 李鍾鐸 李敎成 乙丑 陰六月 二十五日 李鍾鐸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음력 6월 25일에 이종탁(李鍾鐸)이 족보 발간의 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簡札) 1925년 음력 6월 25일에 이종탁(李鍾鐸)이 족보 발간의 일로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성주이씨보소(星州李氏譜所)에서 보낸 것으로 보아 종사(宗事)에 관한 용건인 것으로 보인다. 천륜은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종사와 보역(譜役)을 번거롭더라도 모두 살피는 것이다. 우리 문경공(文景公) 파보는 지난해 경성에서 시작하였다가 형편에 따라 여기로 옮겼다. 우리 파도 대동보에 빠질 수 없어 독려하고 있으며 단자를 올려 보낼 날이 아직 있다. 보소에는 현재 단자를 제출한 곳이 70여 가문이며 인원수는 3천5백여 명이다. 각각 백여 질의 보안(譜案)이 승낙되었는데, 쓸데없는 말들이 있다. 지체되지 않게 문중에 비용을 독촉해 단합해서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 외에 교정건과 대부님의 건강, 노원의 소송 등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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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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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3년 이정순(李正淳) 계약서 1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大正拾貳年陰三月貳拾九日 李正淳 李大容 大正拾貳年陰三月貳拾九日 李正淳 李大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92_001 1923년 음력 3월 29일 이정순이 작성한 참판공 상‧하대 위토의 도벼 사용에 대한 계약서 1923년 음력 3월 29일 작성한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 소재 참판공 상‧하대(上下代)의 위토 도벼(賭租)에 대한 계약서 첫 면이다. 계약서의 내용은 곡성군 석곡면 비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참판공의 아래 윗대의 위토(位土) 도벼 중에서 지용(支用)하는 제사에는 다음 사항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매년 도벼 수입 몇 십 섬(石) 중에서 지정(指定)은 6섬으로 하며, 6섬 중에서 4섬은 참판공 제사에 2섬은 시천공 등의 제사에 쓰되 예전대로 준용한다고 하는 것 등이다. 곡성‧보성 양 읍의 성주이씨 문중 대표자로, 보성군 문덕면 계약인 이정순(李正淳) 등 2인과 증인 2명, 그리고 성주이씨 문장 이대용(李大容), 동 종손 이교재(李敎在) 등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교성(李敎成) 등 연명인 21인의 이름을 기록한 연명록이다. 모두 이씨(李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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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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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형순(李亨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五月十八日 李亨淳 李 生員 南原宅 丙寅五月十八日 李亨淳 李 生員 南原宅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5월 18일, 족손 이형순이 자신의 7대조비 분묘 이장건으로 보성군 이생원댁(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 1926년 5월 18일, 족손(族孫) 이형순(李亨淳)이 자신의 7대조비 묘소의 이장에 대하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일로 보성군 이(李) 생원댁(남원댁)에 보낸 간찰이다. 상대와 한 촌내의 여러 집이 모두 평안한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객지에서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번에 올라 온 것은 안산(安山) 묘소를 살피기 위해 온 것이라며 성묘를 하고 보니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한편으로는 감탄하였다고 했다. 7대조비(代祖妣)의 산소에 사초(莎草)가 전무한 것을 보고 걱정하고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석동리(石洞里)로 옮겨 합장함이 좋겠다고 하였다. 무덤을 깨는 날은 이달 19일로 정하였고 합장일자는 21일 오전 8시가 될 것이라며 문중의 부형(父兄)들게 말씀드리고 시제에 참고하시며, 합장일자를 내려가서 다시 택하여 정하겠다고 하였다. 국한문 혼용체로 토(吐)를 한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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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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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3년 허성환(許聖煥)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七月二十二日 許性煥 李敎成 癸酉七月二十二日 許性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87_001 1933년 7월 22일에 허성환이 이교성에게 정형과 경언 등의 소식, 이참봉 조의 추심에 대한 생각 등을 적어 보낸 간찰 1933년 7월 22일에 허성환(許聖煥)이 이교성(李敎成)에게 정형(鄭兄)과 경언(京彦) 등의 소식, 이참봉 조(租)의 추심에 대한 생각 등을 적어 보낸 간찰이다. 돌아온 뒤에 마음이 항상 당신에게 있었던 것은 여름 3개월 동안 같은 곳에서 가르침 받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부모님 모시는 형제들의 안부를 묻는데, 그 우울한 상황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몽재(蒙齋) 형은 자신을 전송하는데 10리까지 나와준 것에 대한 감사하다고 하고, 천규(千圭)의 조제약방은 두세 번 말을 해서 써 보냈는데 그간 시험해본바 효과가 있었는지 물었다. 광주에는 사람이 많지만 지음(知音)은 적어 담양 가산에 며물렀다가 여름감기를 앓아 2·3일만에 돌아왔다는 것과, 경언(京彦)과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적고, 이참봉(李參奉) 조에 4원(圓)을 추심(推尋)했는데 1원을 보낸 것에 대해서는 횡설수설(橫說竪說)했지만 터놓고 얘기하자면 만나야 하는데 이번에 출발하면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아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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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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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至月初九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至月初九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1_001 1935년 11월 9일에 김택경이 마종(麻種)의 요구에 부응할 계획, 생청 송부, 《소의편》 등의 정가, 《화안시보》의 인물들을 살펴봐줄 것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11월 9일에 강원도 강릉군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세 번의 서찰을 차례대로 받았는데 물품의 많은 것들을 결정짓지 못하여 이렇게 사례를 지체하다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죄송스럽다. 겨울인 이즈음에 춘부장(春府丈)님의 몸과 마음은 편안하며 형제분도 건강한지, 아드님도 학문에 열중하는지, 멀리서 그리워하는 마음 그지없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근근이 지난날의 졸렬함을 지키며 살고 있다. 부탁한 마종(麻種)은 형이 선금을 보내지 않았지만 얼마간을 부응할 계획인데 보따리상들이 발호(跋扈)하는 이유로 아직 장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오는 그믐 안에 꾀하여 얻을 희망이 있을 듯하다. 생청(生淸)은 양봉(養蜂)하는 일이 잘 안되어 구하기 어려워서 다만 2되를 보내니 시험 삼아 약용하라고 하고, 《소의편(昭義編)》은 5권에 정가 5원이고, 《현가궤범(絃歌軌範)》은 1권에 50전이라고 하였다. 율옹(이이)의 필찰이 한 곳에 몇 폭(幅) 있다고 하여 도모하여 얻을 계획이다. 《화안시보(華案諡譜)》에 문충공(文忠公) 박순문(朴純), 문목공(文穆公) 박원계(朴元桂), 충경공(忠景公) 박지계(朴之桂), 문공공(文恭公) 심언광(沈彦光), 문양공(文襄公) 최연(崔演)이 있는지 살펴 달라. 형이 자식에게 바른 도리로 가르치는 뜻을 여러 번 요청하였는데 정성스런 뜻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고, 집안에 선기(先忌)가 겨울철에 많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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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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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22년 선채관(宣采寬)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道光二年 壬午 十二月初十日 畓主 童蒙 宣采寬 黃一衿 前明文 道光二年 壬午 十二月初十日 宣采寬 黃一衿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22년 12월 10일에 선채관(宣采寬)이 황일금(黃一衿)에게 논 7승락을 1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22년 12월 10일에 선채관(宣采寬)이 황일금(黃一衿)에게 집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논 7승락을 1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2년 임오년 12월 10일 황일금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조상으로부터 전래받은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연이어 결딴이 나면서 손쓸 방법이 없기에 부득이 본군의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아래 엄을저평(嚴乙底坪)에 있는 외(受) 자(字) 논 7승락(2부)을 15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본문기(本文記)는 중간에 유실되어서 위 사람에게 신문기(新文記) 한 장을 작성해서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서로 어긋나는 폐단이 생기면 장차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고증할 것이라. 답주(畓主) 선채관(宣采寬)[착명]. 증인 동성(同姓) 오촌 성린(聖鱗)[착명]. 작성자 한량(閑良) 황재인(黃再仁)[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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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32년 황덕룡(黃德龍)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道光十三〖二〗年 壬辰 十一月十五日 畓主 閒良 黃德龍 李奴 順天 處明文 道光十三〖二〗年 壬辰 十一月十五日 黃德龍 順天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32년 11월 15일에 황덕룡(黃德龍)이 이씨댁(李氏宅)에 논 7승락을 1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32년 11월 15일에 황덕룡(黃德龍)이 이씨댁(李氏宅) 노비 순천(順天)에게 논 7승락을 15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맨 앞에 '도광(道光) 13년'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도광 12년'의 오기이다. 매수자인 노비 순천은 주인을 대리하여 거래한 인물이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12년 임진년 11월 15일 이씨댁 노비 순천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한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다른 논을 구입할 목적으로 문전면(文田面) 가하평(加下坪)에 있는 수(受) 자(字) 논 7승락(2부)을 15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본문기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서로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한량(閒良) 황덕룡(黃德龍)[착명]. 증인 및 작성자 유학 박채현(朴采炫)[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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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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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28년 고시욱(高時旭)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道光捌年 戊子 二月十五日 畓主 自筆 幼學 高時旭 幼學 李元亨 前明文 道光捌年 戊子 二月十五日 高時旭 李元亨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28년 2월 15일에 고시욱(高時旭)이 이원형(李元亨)에 논 6두락에 대해 11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28년 2월 15일에 고시욱(高時旭)이 이원형(李元亨)에게 논 6두락에 대해 110냥을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8년 무자년 2월 15일 유학 이원형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한 논을 형세가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문전면(文田面) 가천(可川) 앞 돌미평(乭彌坪)에 있는 수(受) 자(字) 논 외변(外邊) 3두락과 내변(內邊) 3두락(19부 4속)을 110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잡담이 생기면 이 문서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자필(自筆) 유학 고시욱(高時旭)[착명]. 증인 김억만(金億萬)[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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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이교선(李敎先)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大正三年 甲寅 二月二十二日 畓主 再從兄 敎先 再從弟 敎成 殿 大正三年 甲寅 二月二十二日 李敎先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4년 2월 22일에 답주 이교선(李敎先)이 이교성(李敎成)에게 토지를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4년 2월 22일에 답주 이교선(李敎先)이 이교성(李敎成)에게 토지를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 문서는 1914년에 논주인 이교선이 논을 이교성에게 매매할 때 발급한 일종의 계약서이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다. 자기가 농사지어 여러 해 동안 갈아먹다가 부득이하게 긴요한 일로 본군 문전면 가천리 수반평의 손자(孫字) 부수 7복(卜)6속(束)을 전문 610냥에 영영 방매한다고 하였다. 답주는 재종형 이교선이며, 재종제 이교성에게 매매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많은 곳에 추기하거나 수정한 내용이 있으며, 그 위에 날인을 하였다. 추기사항을 살펴보면, 도조(賭租)가 풍흉 관계없이 백미 21두이며, 이후 팔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본전을 돌려준다고 하였다. 또 자손이 타인에게 이매(移買)하고자 환퇴(還退)할 경우의 관련 내용도 명기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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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이기해(李箕海)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五年 丙寅 十二月初三日 畓主 李箕海 前明文 同治五年 丙寅 十二月初三日 李箕海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6년 12월 초3일에 이기해(李箕海)가 아무개에게 논 2두락을 10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66년 12월 초3일에 이기해(李箕海)가 아무개에게 스스로 매득하여 어려 해 경작하던 논 2두락을 10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다. 답주, 증인 및 작성자의 착명(着名)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제 거래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치(同治) 5년 병인 12월 초3일 아무개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스스로 매득한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이매하기 위해서 복내(福內) 하도(下道) 시천(詩川) 후동(後洞) 들에 있는 논 2두락을 100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구문기(舊文記)는 읽어버려서 신문기(新文記) 한 장으로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일 서로 어긋나는 일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할 것이라. 답주(畓主) 이기해(李箕海). 증인 및 작성자 이기찬(李基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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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위토 사용 변경 건 납고(納考)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大正五年 陰十一月十四日 山所看守人 李度淳 李氏門長 冕容 前 大正五年 陰十一月十四日 李度淳 李冕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음력 11월 14일에 위토 사용 변경건의 근거자료로 작성한 납고(納考) 1916년 음력 11월 14일에 위토 사용 변경건의 근거자료로 작성한 납고(納考)이다. 이 납고는 시제의 위토에 대한 사용 변경건을 문중에서 빙고할 근거로 작성한 증서이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다. 그동안 시흥군 수암면 물항리 소재 보성댁 산소 2위에 대해 답 5두락지와 대지(垈地)의 화곡(禾穀) 15두를 아울러서 시제(時祭)에 바쳤다. 금번에 사초의 행원(行員)이 올라와 사초 후에 5두의 답으로 3위의 시제에 바치고 대지는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가 3년 동안 받은 도조(賭租)를 기준으로 한 후에 도로 시제에 부치겠다고 하고, 그 증서를 발급하여 증서를 받고 본인도 증서를 출급하여 자신의 문중에서 빙고(憑考)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끝에는 관계자들의 성명이 적혀있고 날인을 하였다. 산소 간수인은 이도순(李度淳)과 재종제 이규순(李圭淳)이다. 행원은 이교인(李敎仁) 등 2인이다. 수신자는 보성군 가천 석동 신운리의 이씨문장(李氏門長) 이면용(李冕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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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집발간 통문(通文)과 제사(祭事)에 관한 초고(草稿)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庚午三月十九日 澹對軒儒會所 庚午三月十九日 澹對軒儒會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0년 3월 19일 담대헌 유회소에서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집발간을 위해 발문한 통문과 제사에 관하여 논한 초고 1930년 3월 19일 담대헌 유회소(澹對軒儒會所)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의 문집발간을 위해 발문한 통문이다. "우리의 도(道)를 전승하는 것은,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에게 달려있고, 사람이 죽으면 책에 달려있다. 우리 성사 선생이 우리를 두고 떠나가신지 이미 15년"이라고 하면서 송사선생 문집 발간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유회소의 도청과 도유사, 부유사, 사서, 도감, 감동 등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도청은 민치량(閔致亮)이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며, 조부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1896년 일본 세력을 구축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담대헌은 기정진(奇正鎭) 선생이 장성군 진원면 사무소 뒤편 고산 마을에다 1878년에 지은 정사(精舍)로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1931년 ?송사집?이 발간되었다. 이 통문의 뒷면에는 기일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함께 제사지내는 문제, 장지(葬地)에서의 산신제, 묘제 등 제례에 대해 논한 내용이 필사되어 있다. 작성한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다. 글의 첫머리에 "기일에는 옛날에 제사가 없었는데, 정자(程子)‧한위공(韓魏公)‧사마온공에 이르러 제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考妣)를 함께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묻자, 정자가 대답하기를 '한 분의 신위에만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朱子)도 가례(家禮)에서 한 분의 신위만 설치한다고 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 신위를 함께 설치하니, 마침내 나라의 풍속이 되었는데, ?오례의?라는 책은 개국 초기에 잘못 편찬된 두찬(杜撰)이다."라고 하면서 퇴계도 '어머니의 기일에 아버지 제사를 올리는 것은 존자(尊者)를 끌어들인다는 혐의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장사지낼 때의 산신제(山神祭)와 묘제(墓祭)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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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가짜 비문[贗碑文]'에 대한 간찰(簡札) 초안(草案)과 시문(詩文) 초안(草案)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가짜 비문[贗碑文]'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 간찰 초안과 주자가 황중본의 〈붕우설〉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이를 모방하여 지은 시 5수 '가짜 비문[贗碑文]'과 관련한 상대방의 문제 제기에 대해, 발신자가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 간찰이다. 발신하려고 한 간찰의 초안이거나 수신한 간찰의 일부로 보인다. 발신자명, 수신자명, 연기(年紀)가 모두 없다. 저희 집안인 곡성군의 면섭(冕燮)으로부터 나의 이름을 거론하고, '완지(莞誌) 간행소에 안비문(贗碑文)을 싣지 말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으로 안비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당초 임승모(任承模)의 변문(辨文)이 나오자, 안씨(安氏)는 사문난적(斯文亂賊) 등으로 원수처럼 성토하였으나, 필암서원(筆巖書院)에서는 '하서(河西) 비문을 모방했을 뿐 아니라 하서보다 낫다.'고 하였다는 등의 의견을 소개하고, 우암 송시열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호)의 말, 영송 김재홍(嶺松 金宰弘)과의 토론, 옛글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과 관련한 주자(朱子) 등의 말, 우암(尤庵)이 포은(圃隱)·정암(靜庵)·율곡(栗谷)·사계(沙溪)·하서(河西) 등을 평가한 말 등을 들어 이들 5명이 공자와 주자의 도통을 이었다고 하는 등의 의견을 진술했다. 안비(贋碑)에서 한 말인 '하늘이 사문(斯文)을 열었으니, 당세에 도를 행할 수 없으나 만세에 능히 전할 수 있다.'는 글의 취지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뒷면의 맨 처음에는 주자가 황중본(黃仲本)의 〈붕우설(朋友說)〉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이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밝혔다. 시는 '심산은 시 짓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心山非是愛吟詩]'로 시작하며, 내용에 천속(天屬)이 포함된 시 5수의 초고와 메모가 있는 초안이다. 시 5수의 첫구는 모두 '심산은 시 짓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심산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천속지합(天屬之合)인 부자‧형제 관계, 천속으로 말미암아 이어진 부부관계, 천속에 힘입어 온전한 군신관계, 천속에 힘입어 바른 붕우관계 등에 대한 시 5수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맹자(孟子)》 의 글 등을 적었다. 주자의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1의 〈발황중본붕우설(跋黃仲本朋友說)〉이다.(星州李氏譜所)에서 이종협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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