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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는 즐거움(樂莫樂)〉 등의 시 8수(首) 초고와 하서 김인후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칠언절구 8수의 시 초고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절의 등을 논한 글 이 문서는 칠언절구 8수의 시 초고와 하서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 등 2종이 앞뒷면에 수록되어 있다. 앞면은 〈더없는 즐거움(樂莫樂)〉과 〈두려움 없는 두려움(畏莫畏)〉에 대해 읊은 시 칠언절구 8수(首)이다. 지우고 고친 곳이 많은 초고(草稿)이다. 〈더없는 즐거움〉에는 성인(聖人)과 같은 즐거움, 천명(天命)의 즐거움, 대인(大人)의 즐거움, 의론이 바른(論正) 즐거움, 바름을 지키는(守正) 즐거움 등을 들고 있다. 〈두려움 없는 두려움〉은 부박(浮薄)을 두려워함, 순순히 하지 않음(不順)을 두려워함, 멋대로 함을 두려워함 등을 읊었다.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큰 화가 내려질 것이라는 등의 교훈적인 내용을 담았다. 뒷면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선생의 절의(節義) 등을 논한 글이다. 안우산(安牛山, 안방준)이 중봉(重峰)에 대해 찬한 글에, "도덕‧절의(節義)‧문장을 겸비한 자는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언뜻 보면 그럴듯하나 자세히 살피면 그렇지 않다. 무릇 절의가 있는 사람은 도덕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서, 천하에 절의가 없는 도덕은 없기 때문에 어폐가 있고, 문자를 쓰는 법이 아니다.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자'라고만 하면 선생을 칭하는 자리가 거기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중하며 수양한 것도 또한 출처(出處)를 온전히 한 것이지만 해마다 통곡할 뿐이라고도 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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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한남서림(翰南書林)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昭和)9.12.5 翰南書林 白斗鏞 李敎成 (昭和)9.12.5 翰南書林 白斗鏞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5 后4-12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4년 음력 10월 27일, 한남서림 백두용이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이교성씨에게 책 가격을 전달하며 책을 사지 않을 경우 돌려 줄 것을 청한 간찰 1934년 음력 10월 27일, 생(生) 한남서림(翰南書林) 백두용(白斗鏞)이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이교성씨에게 책 가격을 전달하며 책을 사지 않을 경우 돌려줄 것을 청한 간찰이다. 지난번에 견본품으로 온 두 종(種)의 책자는 상대가 생각한대로 34원의 가격이니 보내주시면 된다고 하고, 그러나 그중에 낙질이 있다면 베껴서라도 보완해 줄 것, 대·소권으로 권이 가지런하지 않다면 휴지가 되고 마니 완전하게 받들도록 흠결 없이 해주면 돈을 보내드릴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발송해 드렸던 자신의 2종(種) 책자는 이 가격으로는 안 되니 돌려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한남서림에서 이교성 씨가 소유하고 있는 책 중 팔고 싶어 했던 책자에 대해 매입 가능함을 언급한 후, 한남서림에서 가져간 2종의 책자에 대하여 가격을 흥정하며 되돌려 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한남서림(翰南書林)은 1900년경에 백두용(白斗鏞,1872~1935)이 문을 연 최초의 근대적 고서점이다. 고서를 매입하여 파는 헌책방의 개념에, 간행사업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을 1932년에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였다. 한남서림에서 편찬·간행한 책자를 살펴보면, 1917년 유금(柳琴)이 4가의 시 가운데서 초록한 것을 박제경이 주를 달고 백두용이 교정한 『전주사가시(箋註四家詩)』(활자본, 4권 1책), 어록과 이두를 모아서 설명한 『주해어록총람(註解語錄總覽)』(목판본, 1권 2책, 1919), 중국 속어사전(俗語辭典)인 『어록해(語錄解)』, 『詳密註解 옥추보경(玉樞寶經)』(1923), 『해동역대 명가필보(名家筆寶)』(1926), 작자미상의 조선후기 한문 희곡인 동상기를 모아 활자본으로 간행한 『동상기찬(東床記纂)』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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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백윤한(白潤翰)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敎成 1935 白潤翰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629_001 1935년 한남서림 백두용의 아들 백윤한이 아버지 사후 장부를 정리하면서 『역대도』의 값을 수수하기 위하여 이교성씨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5년 한남서림 백두용의 아들 백윤한이 아버지 사후 장부를 정리하면서 『역대도(歷代圖)』의 값을 수수하기 위하여 이교성(李敎成)씨에게 보낸 간찰이다. 상대가 말씀한 것은 잘 알겠다고 인사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다소간의 거래가 있던 책자에 대하여 장적(帳籍)과 대조해 본 결과 조금도 차이는 없지만 역대도(歷代圖) 2책이 13원의 값으로 상대가 가지고 있다는 증서(証書)가 있어 상대에게 증서를 보내니 살펴봐 줄 것을 청했다.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은 만큼 서점의 사정이 전날과 다르다며 우리 서점 장부에 있는 상대의 돈이 17원이고 상대가 잠시 가지고 있는 책값의 증서에는 13원으로 적혀 있고, 장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3원을 감하여 10원으로 결정하였으니 남은 액인 7원과 증서를 함께 보낸다고 적었다. 만약 『역대도』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도로 돌려주어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책을 도로 보내준다면 10원을 돌려 드리겠다고 전했다. 백두용(白斗鏞,1872~1935)은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설립한 인물이다. 편지에 작성일자와 작성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백두용의 사망시기로 보아 1935년으로 보이며, 백두용의 글씨와 비슷한 서체로 보아 그 후손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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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至月卄九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至月卄九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1_001 1935년 11월 29일에 동생 김택경이 꿀과 서적의 송부, 《현가궤범》의 터득, 마종 시세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11월 29일에 강릉군 성산면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8일에 꿀[蜂蜜]과 서적을 부쳤는데 받았는지 몇십일에 이르렀는데 회답이 없어 몹시 아울(訝鬱)하고 어제 소의편(昭義編)을 근래에 되풀이하여 보았는데 고명(高明)께서 평소에 어떻게 보았는지 묻고 이것은 뛰어난 작품이니 억지로 매입할 수 없기 때문에 가격이 조금 높을 듯하다고 하고, 《현가궤범(絃歌軌範)》을 반드시 금공(琴工)이 두루 헤아린 뒤에야 터득할 것이라는 내용과 마종(麻種)은 시세가 근래 어떻게 되는지, 오는 10일 사이에 얼마간을 부치되 그 가격은 적게는 1말이며 부비(浮費)와 아울러 1원 50전가량으로 헤아려서 살펴 회답해 주시고 황양목(黃楊木)도 아울러 부칠계획이라는 말과 말미에는 동지의 추위에 춘부장의 기체후가 만강하신지 잡안도 평안하신지 자신은 여전히 잘 지낸다는 안부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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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최숙(崔橚)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三月十七日 金澤卿 李敎成 丙子三月十七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8_001 1928년 1월 4일에 최숙이 옛날 일의 진전 소식과 전 해의 스승 원고의 장황(粧黃), 뒤의 원고의 인출 계획, 선향에서 볼 수 있는 유생 통지 등의 내용으로 이순구에게 보낸 간찰 1928년 1월 4일에 전남 담양군 대덕면(大德面) 용대리(龍坮里)에 사는 최숙(崔橚)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순구(李舜九)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해가 바뀌었는데 춘부장께서는 잘 계신지 등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인출(印出)에 있어 옛날 일에 대한 소식이 조금 진전이 있는 듯하여 다행이다. 스승의 원고는 전 해에 장황(粧黃)하였으나, 그 뒤의 원고는 다만 돈이 없어 아직도 인출하지 못하고 있다. 봄 사이에는 인출할 생각이다. 선향(仙鄕)에서 혹 볼 수 있는 유생은 부디 통지해 달라고 하였다. 나머지 많은 일들은 대면하여 아뢰고 이만 줄이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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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四月七日 金澤卿 李正汝 丙子四月七日 金澤卿 李正汝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8_001 1936년 4월 7일에 김택경이 족숙 성교의 형편을 묻고, 마종과 양목의 수응 및 저포와 남철의 청구에 회답이 없는 일, 선향 방문 계획 등의 내용으로 이정여에게 보낸 간찰 1936년 4월 7일에 강원도 강릉군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정여(李正汝)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반년을 모시고 정담을 나누었는데 천리를 떨어져 있으니 슬프고 그립다고 하고, 왕성한 여름에 정양하시는 체후와 형제분들과 화종(華宗)들도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여전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하고 족숙(族叔) 성교(敎成) 형의 형편은 어떠한지 물었다. 마종(麻種)과 양목(陽木)을 수응(酬應)한 것과 저포(苧布)와 남철(南鐵)을 청구(請求)한 것은 1월쯤에 1차로 서찰을 받은 뒤에 몇 차례 구하고자 하였는데 서너 달이 되어도 어떠한 회답도 없으니 형의 평소 신의로는 이러할 리가 없어 염려되고 암울하다고 하였다. 존좌(尊座)께서 같은 문중에서 상종하는 일에 있었으면 그 사정을 알 것이니 부디 소외시키지 말고 자세히 알려주어 의혹을 풀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선향(仙鄕)의 산수(山水)가 오래도록 안중에 있어 다시 찾아보기를 원하며, 금년 5월경에 경북으로 가는 길에 귀부(貴府)에 나아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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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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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2년 최신준(崔愼俊)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七年 壬子 二月初二日 畓主 幼學 崔愼俊 幼學 金尙基 前明文 乾隆五十七年 壬子 二月初二日 崔愼俊 金尙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92년 2월 초3일에 최신준(崔愼俊)이 김상기(金尙基)에게 논 2승락을 4냥 5전을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792년 2월 초3일에 최신준(崔愼俊)이 김상기(金尙基)에게 여러 해 갈아먹던 논 2승락을 4냥 5전을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57년 임자년 2월 2일 김상기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형세가 부득이해서 가천촌(可川村) 앞들에 있는 외(外) 자(字) 논 2승락(1부 6속)을 4냥 5전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바꾸어서 받고, 본문기(本文記)는 중간에 잃어버려서 신문기(新文記)로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만약 잡담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유학 최신준(崔愼俊)[착명]. 작성자 유학 김석규(金錫圭)[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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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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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8년 임영(任韺) 가사매매명문(家舍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道光貳拾八年 戊申 八月十二日 家垈主 幼學 任韺 幼學 李基文 前明文 道光貳拾八年 戊申 八月十二日 任韺 李箕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48년 8월 12일에 임영(任韺)이 이기문(李基文)에게 가옥 한 채와 집터 등을 1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48년 8월 12일에 임영(任韺)이 이기문(李基文)에게 가옥 한 채와 집터, 거기에 딸린 토지를 1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28년 무신년 8월 12일 유학 이기문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한 가대(家垈)를 여러 해 사용하다가 이매(移賣)를 위해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동변(東邊)에 있는 부(夫) 자(字) 대전(垈田) 콩밭(太種) 8승락, 초가 3칸, 감나무 1주(1부 5속)를 12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放賣)하며 구문기(舊文記)는 다른 전답에 붙어 있어서 줄 수가 없고 신문기(新文記) 한 장을 주니 이후로 고증할 것이라. 가대주(家垈主) 유학 임영(任韺)[상중으로 착명하지 않음]. 증인 유학 양상원(梁相源)[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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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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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5년 장봉춘(張鳳春)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十年 庚午 三月十三日 畓主 張鳳春 宣采寬 前明文 嘉慶十年 庚午 三月十三日 張鳳春 宣釆寛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05년 3월 13일에 장봉춘(張鳳春)이 선채관(宣采寬)에게 논 7승락을 1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05년 3월 13일에 장봉춘(張鳳春)이 선채관(宣采寬)에게 흉년을 당하여 논 7승락을 1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0년 경오년 3월 13일 선채관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대단히 심한 흉년을 당하여 살아갈 길이 어려워지면서 부득이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밖 갈하평(乫下坪)에 있는 외(受) 자(字) 논 7승락(2부)을 12냥으로 가격을 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간에 만약 서로 다투는 폐단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장보춘(張鳳春)[착명]. 증인 및 작성자 선성인(宣聖仁)[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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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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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14년 이교선(李敎先) 토지소유권 보존 증명 신청서(土地所有權保存證明申請書)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大正參年 拾月 卄壹日 全羅南道寶城郡證明官吏 朝鮮總督府郡守 金東佑 李敎成 大正參年 拾月 卄壹日 全羅南道寶城郡證明官吏 朝鮮總督府郡守 金東佑 李敎成 ○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4년 7월 29일에 이교선(李敎先)이 토지의 존재를 증명하여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해 군청에 신청한 토지소유권 보존 증명 신청서(土地所有權保存證明申請書) 부동산표시, 증명 목적, 부동산가격, 등록세, 첨부서류, 신청 내용, 증명서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동산표시는 말미에 기재한다고 하고, 증명 목적은 소유권보존이다. 부동산가격은 40원이며, 등록세는 12전이다. 첨부서류는 결수연명부(結數連名簿) 등사본 1통 등 3종이다. 증명 원인을 명기하고 신청서와 부본을 첨부하여 이 증명을 신청한다고 하였다. 신청인은 이교선(李敎先)이며, 주소를 적고 날인하였다. 이 신청서 관할기관은 보성군청이며, 끝에 부동산표시를 하였다. 소재지와 논의 면적, 가격 등이다. 증명서는 대정3년 7월 29일 수부(受附) 제2332호이다. 가운데에 '증명제(證明濟)'라는 인쇄 글자가 있고 중앙에 직인을 찍었다. 증명 책임자는 전라남도 보성군 증명관리(證明官吏) 조선총독부군수 김동우(金東佑)이며 이름 아래에 날인하였다. 그 뒤의 별지는 수부연월일과 수부번호, 증명권리자와 원인·목적 등을 기재하고 이를 증명한다는 군수의 서명과 날인이 있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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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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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89년 유광철(柳光輟)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伍十五〖四〗年 己酉 十一月十四日 畓主 自筆 柳光輟 李生員宅奴 福才 處明文 乾隆伍十五〖四〗年 己酉 十一月十四日 柳光輟 福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89년 11월 14일에 유광철(柳光輟)이 이생원(李生員) 댁 노비 복재(福才)에게 논 6두락을 6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문서(土地買賣明文) 1789년 11월 14일에 유광철(柳光輟)이 이생원(李生員) 댁의 대리인 노비 복재(福才)에게 논 6두락을 62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다. 앞부분 건륭 55년은 건륭 54년의 오기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54년 기유 11월 14일 이생원댁 노비 복재(福才)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내 계중(契中)에서 몫으로 취득해서 갈아먹다가 이매(移買)을 위하여 본군(本郡) 문전면(文田面) 석동(席洞) 들에 있는 훈(訓) 자(字) 논 6두락(28부)을 62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 행여나 잡담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유광철(柳光輟)[상중으로 착명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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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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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14년 김명환(金鳴環)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拾九年 甲戌 五月初九日 田主 金鳴環 李生員奴再得 處明文 嘉慶拾九年 甲戌 五月初九日 金嗚環 再得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14년 5월 초9일에 김명환(金鳴環)이 이생원댁 노비에게 밭 4두락 등을 2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14년 5월 초9일에 김명환(金鳴環)이 이생원댁 노비에게 밭 4두락과 진전(陳田) 8부(負) 4속(束)을 2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9년 갑술 5월 초9일 이생원 노비 재득(再得)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으로 방매하는 것이라. 스스로 매득한 콩밭 4두락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형세가 부득이하여 요긴하게 쓸 목적으로 하(下) 자(字) 2작(作) 콩밭 4두락(4부 1속)과 묵은 땅 8부(負) 4속(束), 문전면(文田面) 장동촌(長洞村) 아래 가마들에 있는 땅 두 곳을 20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 앞으로 본문기(本文記) 두 장과 아울러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잡담이 있거든 이 문기로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전주(田主) 김명환(金鳴環)[착명]. 증인 및 작성자 유학 공달문(孔達文)[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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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1897년 이교영(李敎永) 제문(祭文) 1 고문서-시문류-제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527_001 1897년 10월 20일 이교영(李敎永)이 5대조 할머니 증숙인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 1897년 10월 20일 이교영(李敎永)이 5세부터는 친진(親盡)으로 1년에 한 번 묘제를 지내게 된 5대조 할머니 증(贈) 숙인(淑人)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의 초고이다. 친진은 성현이 정한 예(禮)이고, 즉 이(理)이고 또 정(情)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1880년 자신이 정읍 두승산(斗升山) 아래 안영리로 이사한 뒤 1881년에 처음 세향(歲享)을 시작했는데, 난리로 혹은 형세로 제사에 참례(參禮)하지 못한 것이 이미 16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금년 봄 제사에 대해 들었으나 서로 다른 언덕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하나의 지방(紙榜)으로 오세조 고비(考妣) 묘 옆에 합쳤다고 하니, 세향은 반드시 묘소에서 하는 것인데 이같이 하면 어찌 묘제의 이름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것이 연례(年例)가 되어 여전히 묘향(墓享)을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은 시천(詩川)의 한 종인(宗人)에게서 나온 것이고 편리함으로 집안사람들을 선동하였다고 하였다. 그간 제사에 참예하지 못한 죄는 뒤미처 후회해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자신이 잔약한 바탕으로 가난하고 이룬 것이 없으나 또한 한줄기 선조의 기운을 이은 사람이라, 삼가 대강을 논하여 바로잡겠다고 하는 내용의 제문이다. 이 제문은 아래의 관련문서 중 〈1897년 이교성(李敎成) 제문(祭文)〉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글씨체가 다르고 수정 흔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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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21년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李仁敏)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辛酉四月 李商永 辛酉四月 李商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1년 4월 16일 이상영이 쓴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의 묘갈명과 서문 1921년 4월 16일, 통훈대부 행(行)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낸 이상영(李商永)이 쓴 고려밀직대제학 이인민(李仁敏)의 묘갈명과 서문이다. 이인민(1330~1392)은 할아버지가 이조년(李兆年)이며, 백형이 이인복(李仁復), 중형이 이인임(李仁任)인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그러나 이상영은 이 묘갈명의 서두에서, 공은 국정이 어지러움을 보고 하루아침에 관직을 버리고 경산으로 돌아갔으니 이른바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不俟終日者)이었다고 하였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기미를 보고 떠나가서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見幾而作 不俟終日)"고 하였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 선생이 그에게 준 시에서 "돌아가도 되는데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한산(韓山) 옹이고, 머물러도 되는데 머물지 않는 사람은 제학(提學) 공"이라고 한 것과, "선생의 대의(大義)는 군신(群臣)을 움직였다."고 하고 또 "출처(出處)는 다만 대의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며, 공의 고상함은 헛되이 고상한 것이 아니라, 의(義)가 있으면서 고상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영은 1905년 11월 2일 을사오적인 박제순 등 역적들에게 국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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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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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4년 이종상(李鍾祥)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子 陰十月 二十六日 李鍾祥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生員 南原宅 侍史開坼 甲子 陰十月 二十六日 李鍾祥 李生員 南原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4년 음력 10월 26일에 이종상(李鍾祥)이 족보의 일로 이생원 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 1924년 음력 10월 26일에 이종상(李鍾祥)이 족보의 일로 이생원 남원댁에 보낸 간찰(簡札)이다. 지난 1922년 여름에 족손 이종상이 영남에서 대동보의 일을 맡았는데, 호남의 남북도에 종중의 임무로 차례로 찾아다니다가 처음 족대부의 병풍궤 아래에 옷자락을 들어 올려 경의를 표하였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하면서 안부를 묻고, 족손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문경공 파보의 일은 처음에 대동보의 역사와 함께 말들이 있었으나, 대동보는 이미 완성되었고 균형을 잡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본파이다. 본파 안에 신구의 보승(譜乘)이 없지 않으나 근래의 사실들이 소루하기가 매우 심하고 상세함과 소략함이 같지 않다. 계통의 단절과 후손과의 관계가 어긋난 것이 많다. 본파의 대동을 위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사람과 재물을 얻는 것은 고기를 잡는 사람의 공이니 이를 통찰해 달라고 하였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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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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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22년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의 고문(告文)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壬戌二月十一日 李冕容 雲谷 石洞 詩川 宗中 壬戌二月十一日 李冕容 雲谷 石洞 詩川 宗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2월 11일에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이 운곡(雲谷) 등의 종중에 위토 불법방매 등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이를 해결할 방도를 구하고자 보낸 고문(告文) 1922년 2월 11일에 이면용(李冕容) 등 11인이 운곡(雲谷) 등의 종중에 위토 불법방매 등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이를 해결할 방도를 구하고자 보낸 고문(告文)이다. 사건은 종팔(鍾八) 등이 서산 위토를 방매(放賣)하고 종일(鍾一) 등이 문경공 선조부군 부자의 영정과 상홀(象笏)을 고물상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을 곡성 신전(薪田) 종중에 보내 대책을 의논하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이 문제를 잘 실행해 나가려면 모든 종인이 이를 헤아려서 잘 조처할 만한 방도를 제시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 고문을 보낸 종중은 운곡과 석동(石洞), 시천(詩川) 등 3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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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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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종현(李鍾現)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鍾現 李鍾采 李鍾現 李鍾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문중의 유사 이종현이 이종채에게 근래의 문중 일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낸 간찰과 피봉 모년에 문중의 유사(有司) 이종현(李鍾現)이 가천의 이종채(李鍾采)에게, 근래의 문중의 여러 일에 대해 혹자의 말을 빌어 문제를 조목조목 제기하고, 자신 의견을 쓴 장문(長文)의 간찰이다. 날짜는 미상이다. 혹자가 말한 것에는, '귀 종중 일은 어찌 이처럼 창피한가. 문중 토지를 이전하는데 20인 명의의 공동소유로 하기로 하면서 시천파는 사람이 없어 1명이 참가하였다고 하고, 여기에 면 직원인 정순(正淳)이 마음대로 인감을 처리하여, 문장(門長)의 아들 교성(敎聲)이 이를 말하니, 정순이 종손이 어디에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의 문중은 무종손(無宗孫) 무문장(無門長) 무유사(無有司)라 이를 수 있다. 지난해 묘사(墓祀) 때 시천에서 한 사람도 헌관(獻官)을 맡을 만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종손이다. 지난해 목사(木寺)‧가천 두 파는 일하는 인원이 상경(上京)할 때 마음대로 쓴 경비가 5‧600원이었는데, 문장이 전혀 몰랐다고 하니, 무문장이 아닌가?' 하는 등의 내용이 있다. 발신인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 내용에는, '참판 공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止慈), 시촌(詩村) 공의 효우(孝友), 승지공·판서공·종사랑공의 그 형을 사랑하고 그 집안을 존중하여 천륜이 돈독함으로, 종서(宗庶)에 질서가 있고, 장자와 지차의 차례가 있었다. 비록 세대가 점점 멀어져 무복(無服)에 이르면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나, 우리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같은 자손이다. 그 자손 된 자가 만에 하나 어찌 우리 조상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겠는가. 선조의 자애와 효도‧우애의 윤리를 어기는 것은 즉 참판공 및 시촌공 4형제에 대한 죄인이다. 비록 저승의 선조라도 하늘에 영령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영령이 있다면, 이러한 자손은 마땅히 보이지 않게 죄줄 것이다. 남원 영광의 종족과 여러 장유(長幼)에게도 이를 고하여 이 일에 대해 알리기를 바란다.'는 등이 있다. 피봉 앞면에는 수신자 이종채(李鍾采)의 이름과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라는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종현의 주소지인 순천군 황전면 죽내리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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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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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九月二日 金澤卿 李敎成 丙子九月二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8_001 1936년 9월 2일에 김택경이 재앙이 많고 수재(水災)가 참혹한 현재의 상황, 선향에 가는 일, 여러 일의 회답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6년 9월 2일에 강원도 강릉군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대형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여름 사이에 몇 차례 안부를 물었으나 회신이 없어 암울하다. 올해는 재앙이 많고 흉사가 심한 중에 수재(水災)가 더욱 참혹하여 생명이 엄몰(淹沒)되고 토지가 파손된 것을 형용하여 말할 수 없으니 큰 재난이라 말할 만하다. 귀하가 계신 곳은 피해가 어떠한지, 화종(華宗)의 여러 댁들은 혹 심하게 피폐해지지 않았는지 묻고, 자신이 사는 곳은 집안이 파괴되고 토지가 손상되어 모두 함께 근심하고 있으나 생명의 피해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선향(仙鄕)에 다시 가는 것은 마음에 절실하나 재해가 이와 같아 물정이 흉흉하고 두려워서 어느 겨를에 가서 만나기를 도모하겠느냐고 하였다. 가을 추위에 집안의 안부를 묻고, 봄 사이에 말한 여러 종류의 일들은 잘 헤아렸는지 부디 회답으로 한 번 말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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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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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二月六日 金澤卿 李敎成 丙子二月六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8_001 1936년 2월 6일에 김택경이 딸아이의 혼사, 마종의 발매, 남철과 저포의 구매, 원지 가격의 회답, 율옹의 필찰, 《명사보유》와 《시보》의 검토, 《매월당집》 등의 매입 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6년 2월 6일에 강원도 강릉군(江陵郡)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1월에 서찰이 와서 답장을 썼는데 서로 간에 각 항의 물품을 조처한 뒤에 통신(通信)할 계획이다. 혼사는 과연 수락한 곳이 있는지 묻고, 딸아이의 혼사가 삼척(三陟) 심씨(沈氏)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우리 고을은 다른 고을보다 혼기를 지난 규수가 많으니 형이 있는 지역을 차치하고 이곳을 염두에 두면 반드시 청혼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종(麻種)은 근래에 통지한 것이 도착하였는지 묻고, 형이 1표(俵)만 보내라는 말씀이 있어 어떤 사람에게 매입하기로 약속하였다. 새해가 되기 전에 예사로 가격을 짐작하고 새해가 된 뒤에 매매하여 파종하기 전에 도착하면 3표로 물건을 발매할 수 있을 것이다. 양목(陽木)은 1표로 매입하지 못하니 이렇든 저렇든 형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미안하다. 남철(南鐵)과 저포(苧布)는 시세에 따른 가격으로 사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원지(原紙) 가격이 1축(軸)에 5원이라고 하고 반드시 얼마간의 우편 비용이 있을 것이니 헤아려서 회답해달라고 하고, 원지는 근처에서 구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율옹(栗翁, 이미)의 필찰이 조금 먼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에게 부탁하여 마련하였는데 아직 일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귀하의 선조의 필첩(筆帖) 《명사보유(明史補遺)》와 《시보(諡譜)》를 자세히 검토할 것이니 특별히 생각하여 반드시 베풀어주고, 《매월당집(梅月堂集)》은 형이 매입한 것을 《연원록(淵源錄)》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진실로 시원스러운 일이며 《매월당집》은 예전에 판각한 것인데 누가 편찬한 것이며 시문(詩文)도 갖추어 있는지를 물었다. 이곳은 새로 간행한 6책이 상세한데 가격이 현격하게 다르다. 《소의신편(昭義新編)》은 몇 번을 되풀이하여 보았는데 의체(義諦)를 알았는지 묻고, 이는 곡성(谷城) 정오재(丁梧齋)의 부탁으로 겨우 사우에게 구한 것이나 지난 가을에 서찰로 알렸는데도 오래도록 답장이 없다. 형이 마침 매입하여 보내라는 말씀이 있어 지레 먼저 보낸다. 올 1월초에 비로소 정씨가 서찰로 《소의신편》을 보내라 하니 형이 만약 뜻이 없으면 중요한 곳을 뽑아내어 갖추고서 곧바로 정씨에게 보내주는 것이 좋을 듯하며 많은 일들에 대해 가부간에 속히 알려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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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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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5년 선채각(宣采恪) 가사매매명문(家舍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同治四年 乙丑 十一月二十五日 家垈主 幼學 宣采恪 李生員奴 處明文 同治四年 乙丑 十一月二十五日 宣釆恪 李生員 奴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5년 11월 25일에 선채각(宣采恪)이 이생원댁(李生員宅)에 가대(家垈)를 17냥 5전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매매문서. 1865년 11월 25일에 선채각(宣采恪)이 이사할 목적으로 이생원댁(李生員宅)에 가대(家垈)를 17냥 5전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준 문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치(同治) 4년 을축년 11월 25일 이생원댁 노비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라. 내가 스스로 매득(買得)한 가대를 여러 해 사용하다가 이사를 가기 때문에 본군(本郡) 관할의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에 있는 부(夫) 자(字) 가대(家垈) 결부(結負) 수(數)로 1부 5속인 곳을 17냥 5전에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구문기(舊文記)와 함께 이 댁 앞으로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서로 어긋나는 단서가 있거든 이 문기로 관청에 가서 바로잡을 것이라. 가대주(家垈主) 유학 선채각(宣采恪)[착명]. 증인 한량(閒良) 황재인(黃再仁)[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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