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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형원(李馨源)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辰七月十二日 李馨源 李敎成 丙辰七月十二日 李馨源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7월 12일에 종제 이형원이 문열공 백화헌의 일과 형재선생 시집, 도은공 시집 관련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16년 7월 12일에 종제 이형원(李馨源)이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은 수신인이 전남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으로 되어 있고, 발신인은 해주군(海州郡) 고산면(高山面) 석담리(石潭里) 은병정사(隱屛精舍) 김익신(金益新)으로 되어있다. 그 내용은 지난달에 여러 날을 온화하게 정담을 나누었던 때를 회상하고 부모님을 모시는 중에 형제분들의 체후가 모두 편안한지 물었다. 자신은 여전히 잘 지내 위로가 되지만 주관하는 일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으며, 문열공(文烈公) 백화헌(百花軒)의 일은 중년에 그만두어 한탄스럽지만 지금 자세히 탐구하면 때에 맞을 것이고 매국당(梅菊堂)이 바라는 바에 위안이 될 것이며 후생(後生)에게도 큰 위로가 될 것이라 하였다. 형재(亨齋)선생 시집의 판본(板本)을 자세히 살펴보니 장각(藏閣)은 장(章)의 수효에 부합하는데, 그동안 약간 썩고 소멸된 곳이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고 연보(年譜)의 초본은 살펴볼 수 없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화재로 타버린 것인지 알 수 없어 더욱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도은공(陶隱公) 시집은 전에 이미 여러 번 보았으나 명확하지 못하여 자꾸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두루 살펴본 뒤에 신속하게 회답해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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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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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五月卄九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五月卄九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1_001 1935년 5월 29일에 동생 김택경이 괴산의 청천과 화양 등의 봉심, 정씨 집안의 선조문집 집성 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5월 29일에 강원도 강릉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별의 슬픔은 서로 같은데 갑자기 편지를 보내주어 마음이 확 트인다. 아드님의 공부와 혼사에 대해 묻고, 자신은 22일 집에 도착하였는데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번 남쪽 행차는 실로 우리 형에게 의지하여 나를 입혀주고 먹여주고 책을 빌려주어 읽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하고, 괴산의 청천(靑川)과 화양(華陽), 제천의 지수(泜水)와 장담(長潭)이 대의(大義)를 부식한 지역으로 선현들이 지팡이 짚고 찾아다닌 곳을 봉심(奉審)함에 오랫동안 품은 소원이 시원스레 보상되었으나 평소에 도모했던 명승지 계룡을 비로 인해 그냥 지나쳐 한스럽다고 하였다. 편사(編史) 이자(李子)의 글을 물어 본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제천에서 예사로 보고 지나쳐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중부 두 어른이 사문(師門)의 뜻을 받들어 행하였고 비록 존경하는 마음이 지극하더라도 곧바로 '자(子)'라고 말할 리가 없으니 율옹(栗翁, 이이)인 듯하다고 하고 이를 살펴달라고 하였다. 정씨(丁氏) 집안의 《주차집보(朱箚輯補)》는 전에 들었고 《삼십주가도화(三十朱家都華)》 1부와 주차(朱箚)는 집성(集成)하였지만 편질이 매우 많아 즉시 출간하지 못하였으며, 정씨가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구입하는 일로 제천에 도착하여 찾아보았으나 매우 드물어 구하기 어려우니 형이 만약 구입할 수 있다면 도모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값은 당판(唐板) 20책의 우편비용이 11원 가량이며, 물건은 배편으로 보낼 때 서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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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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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0년 박장수(朴長壽)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咸豐十年 庚申 十二月十六日 畓主 閑良 朴長壽 李生員 前明文 咸豐十年 庚申 十二月十六日 朴長壽 李生員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0년 12월 16일에 박장수(朴長壽)가 이생원에게 논 13부 9속을 11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60년 12월 16일에 박장수(朴長壽)가 이생원에게 여러 해 경작하다가 이매(移買)를 위해서 논 13부 9속을 11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풍(咸豐) 10년 경신 12월 16일 이생원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나에게 조상으로부터 전래한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이매(移買)를 위하여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교촌(校村) 앞들 탑동(塔洞)에 있는 부(婦) 자(字) 논 13부(卜) 9속(束) 3배미(夜味)를 110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구문기(舊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서로 어긋나는 단서가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한량 박장수(朴長壽)[착명]. 증인 한량 선선룡(宣善龍)[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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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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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3년 이인재(李仁才)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八年 癸丑 正月卄六日 畓主 李仁才 李正心 前明文 乾隆五十八年 癸丑 正月卄六日 李仁才 李正心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93년 정월 26일에 이인재(李仁才)가 이정심(李正心)에게 논 2두락을 56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793년 정월 26일에 이인재(李仁才)가 이정심(李正心)에게 스스로 매득한 논을 이매(移買) 위해서 2두락을 56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58년 계축 정월 26일 이정심(李正心) 앞 명문. 이 명문을 만드노니. 내 스스로 매득한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이매(移買)하기 위해서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앞들 부(夫) 자(字) 논 2두락(3부 8속)을 56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 앞으로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자손 중에서 만일 잡담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이인재(李仁才)[착명]. 증인 최일가(崔日可)[착명]. 작성자 선여득(宣呂得)[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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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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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7년 김철원(金喆元)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咸豐七年 丁巳 十一月二十五日 畓主 金喆元 朴景遇 前明文 咸豐七年 丁巳 十一月二十五日 金喆元 朴景遇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57년 11월 25일에 김철원(金喆元)이 박경우(朴景遇)에게 논 3두락을 9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57년 11월 25일에 김철원(金喆元)이 박경우(朴景遇)에게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어 수년간 경작하던 논 3두락을 9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다. '함풍(咸豐) 7년 정사 11월 25일 박경우(朴景遇)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논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환매(還賣)를 위하여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위 탑사동(塔寺洞)에 있는 부(婦) 자(字) 논 3두락(13부 9속)을 90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에게 구문기(舊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서로 어긋남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김철원(金喆元)[착명]. 증인 오원종(吳元宗)[착명]. 증인 선채원(宣采元)[착명]. 작성자 신연모(申延模)[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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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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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8년 양기영(梁紀永)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寅 至月 十一日 弟 梁紀永 拜拜 戊寅 至月 十一日 梁紀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8년 11월 21일 양기영(梁紀永)이 친구에게 늙어가는 소회와 함께 금강산 여행을 제안하는 간찰(簡札) 1938년 11월 21일 양기영(梁紀永)이 성명 미상의 친구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60이 얼마인가? 이 또한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나, 옛날에 연배를 논하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독 형과 나만 근력이 좋아서 먹고 마시는 기거가 좋아 희수의 나이도 바랄만하니 반드시 칠 팔십 늙은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위안됩니다. 산천이 비록 떨어져 있으나 정신은 매양 그리워합니다. 뜻밖에 그대의 아들이 방문하여 편지를 받고서 편지에 가득 재미있는 말을 하시니 머리를 붙들고 어깨를 부딪치며 부지런히 일할 때의 아름다운 풍경과 다르지 않아서 밥을 뿜어내고 포복절도하는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안부가 평안하심을 이로써 알았으니 이는 형의 복입니다. 저는 강건하지만,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렇게 백발이 되어 늙은이의 모습을 하는 것은 결코 늙은 사람의 뜻이 아닐 것이다. 다만 형께서 금슬의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니 내가 고독하게 잠자는 모습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집안에 층층이 쌓인 복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을 자랑하시는 말씀은 자기 밭의 싹이 큰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께서는 욕심이 많은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저는 과연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巴家] 부유함이 있어서 땔나무하는 소와 물 긷는 말, 곡식과 돈 그리고 다할 수 없는 풀밭을 널리 차지하여 산을 등지고 물에 임하여 있으니 어찌 유람을 다닐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갖추지 못했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저는 새봄에 형께서 빛나게 방문해주시기를 기다리니, 함께 지팡이를 짚고 손을 잡고서 서호의 장도를 구경하고 금강산의 절경을 소요하고 상량하면서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찌 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형께서 먹고사는 일에 고착되어 쾌연히 버리고 오지 못할까 염려되니 우습습니다. 보내주신 담배는 모두 친구의 정겨운 맛이니 보답할 물건이 없어 연초 이첩을 보내드리니 산야의 맛과는 다를 것입니다.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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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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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 榴月 晦日 査生 尹琪燮 拜手 長谷 靜棣座 辛 榴月 晦日 尹璂燮 長谷 靜棣座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6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사위와 함께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는 간찰(簡札) 1901년 6월 30일에 이호(伊湖) 사는 윤기섭(尹琪燮)이 장곡(長谷)에 사는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소식을 전하며 사위와 함께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돈이 된 후로 아직 편지를 한 번도 못 하여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편지에 민첩하지 못하였는데 요즈음에 그리움이 평소에 배가 됩니다. 삼가 묻건대 요즈음 체후가 만왕하시고 가족들도 모두 복되신지요? 우러러 그리운 마음으로 제 마음이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어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제 몸도 안 좋아서 어려운 상황이 안타깝고 염려가 되니 나머지는 어찌 번거롭게 말하겠습니까? 봄 사이에 왕림하라는 말씀을 끝내 져버려서 오히려 매우 슬픕니다. 사위는 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묘연하게 눈에 있어 우리들의 정이 모인 것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껄껄 웃을 뿐입니다. 서늘해질 때 눈을 돌려 사위를 데리고 왕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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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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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1년 종회소(宗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明治四十四年十二月卄六日 李鍾律 星州李氏 僉宗 明治四十四年十二月卄六日 李鍾律 星州李氏 僉宗 서울특별시 鍾律, 鍾廷, 鍾冕, 鍾寅, 鍾一, 鍾麟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12월 26일에 서울에 있는 이종률, 이종면, 이종일 등 3인이 보성 가천 성주이씨 종중에 위토의 유실과 회복 등에 관한 전말을 전하며 각 파의 배당금을 속히 거두어 보내 줄 것을 청하는 통문(通文) 1911년 12월 26일에 서울에 있는 이종률(李鍾律), 이종면(李鍾冕), 이종일(李鍾一) 등 3인이 보성 가천 성주이씨 종중에 위토의 유실과 회복 등에 관한 전말을 전하며 각 파의 배당금을 속히 거두어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통문이다. 각 종중에 배포해야 했기 때문에 신식연활자 판으로 인쇄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판윤공 위토를 완전히 추심한 일은 이미 두 통의 경고(敬告)를 통해 아셨을 것이지만 이 토지의 시말을 다시 조사하여 그 내용을 알린다고 하였다. 죽은 문용(汶容)씨 집은 경성에서 대대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차종(次宗)으로서 묘사를 주관하고 있었고, 토지의 소출 중에 2석의 조(租)는 집에서 사용했고, 대신 제수를 책임졌다는 것, 원래 토지의 소출은 1년에 10석이 못 되었지만 2석의 곡식이라도 족히 제수를 마련할 수 있었기에 그 지손(支孫) 된 사람들이 깊이 탐구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 문용 씨가 죽고 그 고아와 과부가 생활을 위해서 700금의 빚을 졌고, 중간에 묘지기가 작간(作奸)을 부려 이 토지가 없게 된 것을 부근의 여러 족인들도 세운(世運)이라 치부하고 마음을 쓰지 못하였고, 혹시 그 소식을 알더라도 바로잡기를 논하는 사람이 없어 세월을 보냈다는 것, 문묘(文廟) 영건(營建)을 위해 종중의 논의가 생겨났다는데 그 토지의 값이 채무에 비하여 배로 불어나 소송을 통해 본가 이외에 24원을 더 주고 완벽하게 돌려받기로 했었다는 것, 그를 위해 각 파에 돈을 배정했는데 아직 적어 금액을 맞추지 못해 바꿀 수 없었던 상황에 부득이 다시 해당 전답문서를 전당잡혀 돈을 갚았다는 것, 400환(圜)에 이르는 200여 평을 겉으로는 완전히 찾았지만 이는 고식지계라 특별히 규정을 만들어 제수(祭需)의 가짓수를 정하고, 묘지 영역에 식목과 사초를 하여 국유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다 보니 돈을 각 파에 배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배정된 돈이 모두 걷힌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나 돈이 걷히지 않으니 이자를 불리지도 못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자손 된 도리를 말하며 액수대로 돈을 거두어 선조에게 효를 다하고 여러 종족과 화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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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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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2년 본다증시(本多增市)의 토지매도증서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本多增市 李敎成 1922 本多增市 李敎成 ○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2년 4월 16일에 본다증시(本多增市[혼다 준이시])가 이교성(李敎成)에게 밭을 매도한 사실을 군수가 증명하는 토지매도증서 1922년 4월 16일에 본다증시(本多增市,[혼다 준이시])가 이교성(李敎成)에게 밭을 매도한 사실을 군수가 증명하는 토지매도증서이다. 이 문서는 부동산표시, 매매대금, 계약내용, 매도인, 매수인, 증명서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는 한문과 일본어를 혼용하였다. 부동산표시는 말미에 기재한다고 하고, 매매대금은 40원이다. 계약내용은 부동산매도를 신청처에 실증한다고 하고 이 부동산은 다른 고장(故障)이 없는데 하등의 고장이나 미혹의 발생 때 손해배상을 책임질 것을 서약하고 매매 체결한다고 하였다. 매도인은 본다증시(本多增市,[혼다 준이시])이며, 주소를 적고 날인을 하였다. 매수인은 주소와 이름(이교성)을 적었다. 이 매도 사실이 등기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는 대정11년 9월 16일 수부(受附) 제11235호이다. 가운데 상단에 '등기제(登記濟)'라는 도장을 찍고 그 아래에 직인을 찍었다. 뒷면 끝에는 대서인 박완근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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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七月念二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七月念二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1_001 1935년 7월 22일에 동생 김택경이 부탁한 서적과 《현가궤범》 송부, 마종 매입 등의 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7월 22일에 강원도 강릉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자신은 황내(黃嬭, 서책의 별칭) 한 가지 일뿐인데 부탁한 서적을 수탐(搜探)하였으나 율옹(栗翁, 이이)의 필찰(筆札)이 전혀 없고 부본(副本)도 없으며 사략(史略)도 매입할 수 없으며, 《현가궤범(絃歌軌範)》은 사우(士友)간에 베껴 쓴 책을 매입한 것이 있다. 이것을 빌려 보고 부칠 것이다. 귀하의 부근 시장에 모시고 살 곳이 있는지와 지금 계절에 많이 나는 물품의 한 근 갑이 얼마인지, 성포(成布) 1필(疋)은 몇 근인지 등을 묻고, 2필의 재료를 사서 보내주기 바라며 대금은 도착하는 대로 보내겠다. 지난번에 약속한 마종(麻種)의 사안은 잊지 않고 형이 말씀하신대로 영서(嶺西) 생산지에 자세히 찾아보았는데, 반드시 선금을 약속한 뒤에 원래의 가격으로 매입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늦가을에는 이미 중간에서 상인들이 선점하여 높은 가격을 부른다고 하며 작년에는 높은 가격 때문에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 미리 헤아려 보면 조금도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1말에 2원이라고 하니, 백 원에 한하여 그믐사이에 들여와 보내면 선후를 주선할 계획이다. 곡성(谷城)의 화종(華宗)이 일을 함께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이렇든 저렇든 간에 깊이 헤아려 회답해 주어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하고, 만약 송금하지 않으면 이삼백 원을 자신이 혼자 장만할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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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9년 이공우(李孔雨)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己卯蜡月七日 李孔雨 李敎永 己卯蜡月七日 李孔雨 李敎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9년 12월 7일 이공우(李孔雨)가 병중에 있는 자신의 감회와 다른 벗들에 대한 추억을 적은 간찰(簡札) 1939년 12월 7일 이공우(李孔雨)가 병중에 있는 자신의 감회와 다른 벗들에 대한 추억을 적은 간찰이다. 먼저 상대방이 상(喪) 중에서 두 번 소식을 준 것에 대해 보통의 정(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한 번 몸의 원기(眞元)을 잃고 나니, 소생하기 어려워 여전히 병석에서 전전(輾轉)하고 있다고 하고, 집에 안 좋은 빌미가 더해지고 몸은 중병에 걸리니, 온갖 생각이 하늘에 사무치게 고통스럽고, 불효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머리털이 모자란다고 하였다. 김우(金友)는 근래 가까운 곳에 있어서 일부러 심부름꾼을 보내고 서찰을 보내어 간절하게 한 번 얘기하고자 하나 오늘, 내일 계속 미루고 있으니 이것은 나의 성의가 얕아서 그런 것이고, 또 벗 이서유(李瑞裕)는 이번 10일에서 보름 사이 순천 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이 또한 김우(金友)를 만나서 의논한 뒤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별지로 추신을 쓰기를, 한 사람(김우가 잠깐 머무는 곳의 주인)이 오늘 아침에 와서 말하기를 김씨가 새벽에 길을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니, 그의 우울함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감회 등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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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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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62년 승려 관한(寬閑)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乾隆二十柒年 壬午 三月十八日 畓主 僧 寬閑 幼學 尹聖道 前明文 乾隆二十柒年 壬午 三月十八日 僧伽 寬閑 尹聖道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210_001 1762년 3월 18일에 승려 관한(寬閑)이 윤성도(尹聖道)에게 논 2두락을 2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762년 3월 18일에 승려 관한(寬閑)이 윤성도(尹聖道)에게 스스로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던 논 2두락을 2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27년 임오 3월 18일 유학 윤성도(尹聖道)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내가 스스로 매득해서 여러 해 갈아먹다가 요긴하게 쓰기 위하고 형세가 부득이 해서 보성(寶城) 적전면(積田面) 가천촌(柯川村) 앞들에 있는 부(夫) 자(字) 논 하변(下邊) 2두락 6배미(3부 8속)를 20냥으로 가격을 작정하여 바꾸면서 일정 수대로 받고, 위 사람 앞으로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승려들 중에서 만일 잡담의 폐단이 있거든 이 문기로서 관청에 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 답주(畓主) 승려 관한(寬閑)[착명]. 증인 승려 사일(思日)[착명]. 작성자 승려 윤환(允還)[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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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06년 안생원노(安生員奴) 보음쇠(甫音金)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嘉慶十一年 丙寅 十二月二十四日 畓主 安生員奴 甫音金 金應喆 前明文 嘉慶十一年 丙寅 十二月二十四日 甫音金 金應喆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06년 12월 24일에 안생원(安生員) 댁 노비 보음쇠(甫音金)가 김응철(金應喆)에게 논 3두락을 9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 1806년 12월 24일에 안생원(安生員) 댁 노비 보음쇠(甫音金)가 주인의 위임장인 패자(牌子)에 의거해서 김응철(金應喆)에게 논 3두락을 90냥으로 받고 팔면서 작성해 준 문서이고,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경(嘉慶) 11년 병인 12월 24일 김응철(金應喆) 앞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니. 내 상전댁에서 매득한 전답을 여러 해 갈아먹다가 요긴하게 쓸 일이 있어서 패자(牌子)에 의거해서 부득이 보성(寶城) 문전면(文田面) 가천촌(可川村) 위 탑사동(塔寺洞) 들에 있는 부(婦) 자(字) 논 금종(今種) 3두락(13부 9속)을 90냥으로 가격을 작정해서 그 수대로 받고, 위 사람 앞으로 내 상전의 패자(牌子)에 의거해서 본문기(本文記)와 함께 영영 방매(放賣)하니 이후로 만약 잡담을 도모함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고하여 증빙을 삼을 것이라. 답주(畓主) 안생원 노비 보음쇠(甫音金)[左寸]. 증인 및 작성자 노인(老人) 김세표(金世杓)[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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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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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14년 이교선(李敎先) 토지매도증서(土地賣渡證書)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大正三年 十月 十五日 賣渡人 李敎先 買受人 李敎成 殿 大正三年 十月 十五日 李敎先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4년 10월 15일에 이교선(李敎先)이 이교성(李敎成)에게 논을 매도한 사실을 군수가 증명하는 토지매도증서(土地賣渡證書) 부동산표시, 매매대금, 계약내용, 매도인, 매수인, 증명서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는 한문과 일본어를 혼용하였다. 부동산 표시는 말미에 기재한다고 하고, 매매대금은 40원이다. 계약 내용은 부동산매도를 신청서에 실증한다고 하고 이 부동산은 다른 고장(故障)이 없는데 하등의 고장이나 미혹의 발생 때 손해배상을 책임질 것을 서약하고 매매 체결한다고 하였다. 매도인은 이교선이며, 주소를 적고 날인을 하였다. 매수인은 주소와 이름(이교성)을 적었으며, 그 다음에 토지의 소재지와 면적, 금액 등을 적었다. 이 매도 사실에 대해 군수가 증명서를 발급했는데, 이는 대정3년 10월 21일 수부(受附) 제3382호이다. 가운데에 '증명제(證明濟)'라는 인쇄 글자가 있고 중앙에 직인을 찍었다. 증명 책임자는 전라남도 보성군 증명관리(證明官吏) 조선총독부군수 김동우(金東佑)이며 이름 아래에 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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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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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1년 윤기섭(尹琪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丑 五月 晦日 査生 尹琪燮 拜手 辛丑 五月 晦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1년 5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사돈에게 가뭄 중의 농사형편 등 제반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901년 5월 30일에 윤기섭(尹琪燮)이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들의 안부와 가뭄의 농사 상황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이 막히고 계절은 더욱 뜨거워지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이 바람에 임하여 점점 지극합니다. 삼가 요즘에 정양하는 체후가 때를 따라 좋으시고 사위도 부모 모시고 공부를 잘하며 형제들의 사이도 크게 왕성할 것으로 생각하니 그리움에 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어버이께서 여름을 당한 이후로 항시 편하지 못하고 저 또한 더운 계절에 먹지 못하는 증세가 날로 심합니다. 식구들은 큰 사고 없이 온전하니 작은 근심이 이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식은 잘 먹어서 다행입니다. 올여름 가뭄의 근심으로 최근까지 농사가 많이 늦어져 씨를 뿌릴 날도 고르지 못하니 진실로 앞으로 큰 염려가 될 것인데 존장의 농장 상황도 그러하신지요? 최근에 듣건대 한강 북쪽까지 들판이 텅 빈 언덕이 되었다고 하니 매우 두렵습니다. 나아가 뵙고 싶으나 이런 지경에 연유하여 불쌍히 여기지 못할 책임을 호소할 뿐입니다. 음력 7월에 서늘한 기운이 생기면 사위에게 이때 보낼 것을 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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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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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749년 이광사(李匡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己巳 九月 初吉 少弟 李匡師 拜手 己巳 九月 初吉 李匡師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49년 9월 1일에 이광사(李匡師)가 사돈에게 일상의 소식과 개인적 부탁 등을 당부하는 간찰(簡札) 1749년 9월 1일에 이광사(李匡師)가 성명 미상의 사돈에게 가족의 안부와 일상의 소식과 개인적 부탁 등을 당부하는 편지로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추위가 심한 이때 정사를 돌보시는 안부는 좋으시신지요? 매우 위안 되고 그립습니다. 지난번에 듣건대 사위가 왔다길래 곧바로 가서 만나 기거를 자세히 물으니 어제 과거 급제자의 방이 나왔는데 높은 점수로 합격하였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둘째 사위의 혼사가 동지 16일에 있고 연길 날짜도 좋으시다니 하례 드립니다. 저는 부모님 모시고 전과 같이 지내고 두 형의 병도 더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다행입니다. 이번에 가는 단유(檀宥)는 원수(元帥)의 후손입니다. 저의 집안일로 해마다 금성(錦城)에 갈 때 긴 여정에 양식의 비용을 집안의 힘으로 지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찾아뵙게 할 것이니 존형의 읍에서 금성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계산하여 양식의 비용을 넉넉하게 성첩(成帖)하여 주시기를 부디 바랍니다. 그로 하여금 돌아올 때 찾아뵙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이 사람의 부탁을 져버려서 월중(越中)의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 수 없으니 모쪼록 조용히 보존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혼사는 반드시 태수(太守)가 서울에서 받을 것이니 이 때문에 미리부터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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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이문용(李汶容)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十月 初四日 李汶容 仲季父主前 上白是 初四日 謹封 丙寅 十月 初四日 李汶容 仲季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6년 10월 4일에 이문용(李汶容)이 중(仲)·계부(季父)에게 자신의 근황과 강화도사건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866년 10월 4일에 이문용(李汶容)이 중(仲)·계부(季父)에게 자신의 근황과 강화도사건 소식을 전하는 간찰이다. 안부를 묻고, 종조카는 이런 어수선한 시절을 당하여 부득이 나가서 양주의 서산공의 묘소 아래에 붙어살다가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겠는가? 가장 긴급한 것은 먹을 것이 부족하고 적에게 해를 당할까 하는 것이다. 살아서 내려가고자 해도 노비(路費)가 백여 금을 내려가지 않고 또 빈손으로 진퇴할 수 없다. 근기(近畿)의 골짜기 마을로 깊이 들어가고자 하나 이것도 돈이 있은 후에야 경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배가 강화도에서 성을 쳐부순 후에 적의 소굴이 되어 조금도 동정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병사는 근 만 명이 포구의 가에 진치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전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소멸과 국가의 안정을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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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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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敬啓者判尹公祀土之有不可不推完者ᄂᆞᆫ 已悉於兩度函告어니와 再査此土之始末 則故汶容氏家之世居京城에 以其次宗으로 主管墓事이되 土之所出中年入二石租於自家ᄒᆞ고 代以精脯數挺으로 塞責享需而該土所出이 年不下十石者則雖剋入二石之租라도 足爲奠享之資故로 爲其支孫者之不欲深究矣러니 汶已棄世에 其孤兒寡婦之時値擾攘ᄒᆞ야 生活無路ᄒᆞ야 以七百金債款으로 媒成墓直之作奸ᄒᆞ야 至有無土之境인바 附近諸族도 亦關於世運而不遑念及ᄒᆞ고 縱或聞知而有論歸正者라도 自沮於交通之末由ᄒᆞ고 再緣於 文廟營建之役而不可疊議而因循度了矣러니 乃者宗議峻發ᄒᆞ야 杳得始末如右而謀及還土則錢主閔也 以其土價之比債數倍로 肆然呈出証明ᄒᆞ야 認爲已有而不欲還本 故로 或詰或訟에 終以本價外에 加給二十四圓而完璧爲定이나 各派排錢이 尙此零星 則勢不可待成數交換 故로 不得已更典該券ᄒᆞ야 以報閔債ᄒᆞ니 四百圜値 二千餘坪 先塋舊土를 外雖推完이나 實不過姑息者也라 然旣是敦事之地에 不可如前疏忽 故로 另立規程ᄒᆞ야 付之墓所ᄒᆞ야 使之永久遵施이되 待証明分交各派之時에 伴呈厥規爲計어니와 盖其槪目 則奠需ᄂᆞᆫ 指定各種ᄒᆞ야 使不得减焉ᄒᆞ고 草莎ᄂᆞᆫ 隨缺修補ᄒᆞ고 瑩域則全是沙磧이라 若不植木則將未免爲國有矣니 姑先水榛木米柳等을 隨其土宜ᄒᆞ야 始自 墓庭附近으로 每年二百本式栽植生養타가 土皮凝結後 更植良材之意로 受取墓直之誓約矣니 今也各派排錢이 如數入量則足可爲百世無虞之計者也라 然鄙等之函告 僉宗이 已經兩月에 非徒排金之無聞이라 多靳如何之回示ᄒᆞ고 有或送金者之减其排額ᄒᆞ니 原來排錢이式准支款ᄒᆞ고 少無濫數인바 屢月與人相持也에 於墓於郡於京之來往雜費也와 藉稱非其孫 而納迫者之亦多ᄒᆞ니 雖依定額入手라도 猶有不足之患이거늘 而况減數 則其所無麵者ᄂᆞᆫ 從何彌縫ᄒᆞ며 又或遷延收金則不無利子之增殖이니 此亦誰之塡充乎아 無麵者도 吾宗之擔當也오 增殖者도 吾宗之補完은 勢所難免也오 且若曰不爲其子孫也 不知其先墓也則已어니와 旣爲其孫而旣知其墓ᄒᆞ고 又知其如此狀况 則義不可邈視ᄂᆞᆫ 千里人情之所固有者之니 然則告厥成功ᄒᆞ야 永享厥祀者도 僉宗也오 不克其終ᄒᆞ야 廢棄 先墓者도 僉宗也니 幸須 僉宗은 勿嫌鄙等之覼縷煩瀆ᄒᆞ고 期於此文到日에 依定額備投ᄒᆞ야 勿虧一簣之功 則孝無大於 先祖也며 睦無大於宗族也며 慶無大於門中也며 譽無大於山下人民也니 伏願 仁人君子ᄂᆞᆫ 奮發齊力에 圖無後日之艱을 千萬爲盼繼頌時祺明治四十四年十二月卄六日在京 鍾律[印] 鍾廷[印]鍾冕[印] 鍾寅[印]鍾一[印] 鍾麟等[印]寶城 可川 星州李氏 僉宗 閣下(皮封_前面)寶城郡 可川 宗中 僉前(皮封_背面)京城宗會所 敬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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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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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1년 서산종회(西山宗會)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辛亥陰八月十五日 西山宗會 寶城佳川 宗中 辛亥陰八月十五日 西山宗會 寶城佳川 宗中 參判 鍾律, 議官 鍾一, 主事 鍾寅, 博士 鍾麟, 副尉 鵬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음력 8월 15일, 서산종회에서 판윤공 선조의 선산 추심과 묘정 수축을 위하여 배당금을 걷겠다는 내용으로 보성종중에 보낸 통문(通文) 1911년 음력 8월 15일에 서산종회(西山宗會)에서 판윤공(判尹公) 선조의 선산(先山) 추심(推尋)과 묘정 수축(修築)을 위하여 배당금을 걷겠다는 내용으로 보성(寶城) 가천(可川) 종중(宗中)에 보낸 통문이다. 신식연활자로 인쇄하고 구두점을 '。'로 표시해 놓았다. 요지는 판윤공(判尹公) 묘소의 수호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발급일자를 적고 발문(發文)자로서 서산종회의 석사 교진(敎璡)을 위시하여 주사(主事) 교선(敎善), 교섭(敎燮), 석사(碩士) 교원(敎元), 교항(敎恒), 참판 종률(鍾律), 의관(議官) 종일(鍾一), 주사 종인(鍾寅), 박사(博士) 종린(鍾麟), 석사 태순(台淳), 부위(鵬淳), 석사 영순(英淳)의 이름을 적어 보성 가천(佳川) 종중에서 받도록 적었다. 그 다음에 적힌 '위토(位土)의 사실(事實)'에는 판윤공 묘소가 전해 내려오다가 빚을 져 남에게 넘어가게 된 전말(顚末)을 적고 수금(收金)을 하게 된 이유를 6조항으로 적어 놓았다. 120원은 묘위답을 찾고, 60원은 사초 및 묘정을 수축하기 위해 총 200원을 모으기 위해 가천 문중에 배당한 돈은 10원이며 수금 기한은 1911년 음력 10월 1일(墓祀) 이전이고, 경성 중부 익동(益憧憧)의 의관(議官) 이종일(李鍾一) 가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각 종중에서 담당하는 금액은 부근 우편국에 가서 이종일씨에게도 보내도록 하라고 적혀 있다. 만약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아 유사(有司)가 파송되는 경우 유사의 여비(旅費)는 해당 종중에서 담당해야 한다는 조항이 함께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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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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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九月十五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九月十五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61_001 1935년 9월 15일에 동생 김택경이 마종에 관한 일, 《현가궤범》 속록(續錄), 화종노인 주소 불분명 등의 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9월 15일에 강원도 강릉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푸른 갈대에 마음이 동요되고 국화가 피는 요즈음 춘부장(春府丈) 등의 안부를 묻고, 친구 및 여러 어른들과 반년 넘게 나누었던 정을 한순간도 잊지 못한다고 하고, 마종(麻種)에 관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형이 말씀하신대로 대략 주선하였는데 송금이 지연되는 것은 무슨 층절(層節)이 있는지를 묻고, 그믐초 사이에 수합하여 출송할 계획에 대해 형의 회답을 보지 못하여 자못 암울하다고 하였다. 귀부의 농사형편은 마(麻)를 파종할 땅이 몇 고을이 되는지와 전의 시세의 높고 낮음에 다른 송금의 많고 적음을 상세히 헤아려 속히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생청(生淸)은 벌 농사가 잘 안되어 가격이 높고 귀하여 진품을 얻기 어렵다고 하고, 《현가궤범(絃歌軌範)》은 근래 등본 1책을 구하였는데 본주인이 50전으로 팔겠다고 하는데 형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가을 뒤에 속록(續錄)하라는 말씀은 부응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곡성(谷城)의 화종노인 인섭씨(寅燮氏)가 전에 마종을 부탁하였으나 주소가 상세하지 않은데 남섭씨(南燮氏)와 같은 마을인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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