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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송기면(宋基冕)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5년 송기면이 지은 단비중건기 1955년 송기면(宋基冕)이 지은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소자(小字)와 대자(大字)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에 새기기 위한 목적에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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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崔先生家錄後跋昔我先君子題叙烟村崔先生家錄後四十餘年先生八世孫世榮夢與氏與其大胤邦彦就舊錄正其舛譌而重刊之尤齋宋先生續題跋語其末有曰諸序跋中澤老最詳而其所稱引者亦甚重矣只以知幾云者爲小而似若不足以稱先生者然然則易何以曰知幾其神也耶澤老必有深意幸夢與問於其胤子夢與氏以是命余且索一言噫不肖幼無知識未嘗以此義奉質於家庭今於長者之問以何辭奉對也然朱夫子解易知幾之義只以言行中節纔過些子便不是知幾爲訓而臨川吳氏乃以穆生劉柳於去就之際能見幾與否爲說未知果合於易之本義而朱子又釋詩明哲保身之義曰明哲只是曉天下事理順理而行自然灾害不及其身今人以邪心讀詩謂明哲是見幾知微先占便宜如楊雄說以此而觀先生且觀先君子所以發明先生心事者世雖稱先生炳幾保身然先生之退在景泰辛未 顯陵賓天之促 魯山遜位之遽皆天數也非明哲所可推測惟天道虧盈益謙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難云者正與朱夫子易詩兩說相符然則先君子深意其在斯歟且念先君子示兒代筆有曰中庸聖賢相傳明道之書也下位傳述兼明士君子處世處變之義如素位而行明哲保身等語皆有感於所遭之世因以著訓垂戒於此跋又以正學稱先生盖其揭樓扁以存養者以中庸戒懼爲第一義殆是有聞於聖賢相傳之道而處世處變自中其節非若見幾知微先占便宜者然此先生之所以爲高而先君子之所以發明者有異於世人之見也歟小子愚矇不敢自信敢以是復於長者仍書其說以塞夢與氏之請云歲舍甲子孟秋上澣德水後人李端夏敬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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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 박팽년(朴彭年)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이 연촌 최덕지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朴彭年)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조정의 많은 사대부들이 연촌을 추모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들을 작성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이미 40여편이 넘었다.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는 박팽년에게 시는 이미 지어서 책을 만들었으니 발문이나 적으라고 권유하였다. 높은 벼슬에 올라 축하시를 구하여 책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려고 하여도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는 연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시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연촌의 높은 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박팽년은 이 발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고, 회덕(懷德) 출신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세종 때 신숙주,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경학을 연마하면서 명망을 얻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박팽년을 포함하여 사육신이 사면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2백여년이 훨씬 지난뒤 1691년(숙종 17)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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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先生)遺[退]休時送別詩跋人有功名富貴能動一世而不可以得匹夫匹婦之心者又有卑巽謙退若不自勝而有足以負天下後世之望者是豈非人心不可以勢服而公議自有所在也耶今完山崔先生上書乞歸士林相稱道知與不知莫不欽慕夫使先生在朝其名聲爵位當不止此而人之欽慕者宜於是乎在今也退休田里已不與世相關而萬口咨嗟稱頌不已者何耶其所以感人心而負物望者有不在彼而在此也余於是局從先生有年日接談論固已服其高義頃者牢於職事阻濶數年矣今還舊局也則先生已告歸離別之情詎可言歟方欲賦詩以叙其意而泛翁氏謂余曰諸公有作卷已成矣子當跋其尾余開卷奉讀詩凡四十餘篇道先生出處之高斯文眷戀之意甚詳一一皆可傳於後也盖世之人有拜大官而求賀詩以傳後者請之勤而或累年不過數篇先生一朝罷官還鄕求以自晦而人自榮之爭先歌頌其夛乃至如是其感乎人心者可知余於是益信公議之不可誣也諸公之詩已足余不作可也遂書卷端云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知製 敎 經筵侍讀官兼春秋館記注官平陽後人朴彭年仁叟跋号醉琴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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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차한벽당운(次寒碧堂韻)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李顧齋 李炳殷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고재 이병은의 한벽당 차운시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이 지은 한벽당차운시(寒碧堂次韻詩)이다. 7언으로 한벽당에 올라 풍경을 읊은 것이다. '학사(學士)의 청풍(淸風)은 백세에 울리고 옥당(玉塘)의 흰 달은 천년을 비추네'라고 하였다. 이병은(1877~1960)은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승(子乘), 호는 고재(顧齋). 전북 완주(完州) 출생이다. 1892년(고종 29)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조희제(趙熙濟)의 『염제야록(念齋野錄)』에 발문을 써준 일로 임실경찰서에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1949년 향교위패매안(鄕校位牌埋安) 사건이 일어나자 전주향교의 위패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하였다. 전주의 남양사(南陽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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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寒碧堂韻逐水而東路盡頭一堂孤立鎭雄州橕楹無地登常怕繞檻皆山生更幽學士淸風鳴百世玉塘素月影千秋南來壯觀復何處黙數湖山多小樓李顧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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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송기면(宋基冕)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檀紀四千二百八十八年乙亥三月 宋基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5년 송기면이 지은 단비중건기 1955년 송기면(宋基冕)이 지은 단비중건기(壇碑重建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소자(小字)와 대자(大字)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에 새기기 위한 목적에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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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최병조(崔秉照) 경양재기(敬養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酉九月九日 秉照 丁酉九月九日 崔秉照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유년에 최병조가 지은 경양재의 기문. 정유년에 최병조(崔秉照)가 지은 경양재(敬養齋)의 기문(記文)이다. 최병조는 이 기문에서 선조 연촌선생(烟村先生) 최덕지(崔德之)가 전주에서 영암(靈岩)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 여러 대에 걸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조부인 성암공(誠菴公) 최상기(崔相琦)가 부안군으로 이사를 왔으며, 그 동편의 망기산(望旗山)에는 증조부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연암의 후손들이 그 망기산 아래에 재사(齋舍)를 짓고 모두가 연암의 아름다운 사적을 생각하고 후대에 길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서로 공경함을 합치고(合敬),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르고자(存養) 하였으니, 바로 이 '合敬存養'에서 '敬養'이라는 재실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기문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자(劉子)가 말하는 '敬在養神'의 의미와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최병조는 끝으로, 선덕(先德)을 더럽히지 않고 잘 받들어 계승하여 후손들이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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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養齋記昔我先祖烟村先生自全州徙居靈岩累世遺蹟多在靈西若合敬存養乃其尤也王考誠菴公又來寓于扶安郡東望旗山卽曾王考與王考墓所也頃就山下營築齋舍圖所以各者竊念烟翁懿蹟百世所不敢忘而神人攸同也謹取合敬存養揭以敬養旣以寓慕亦合於柳(劉)子所謂敬在養神之義神之享否在人之敬不敬且農翁所稱存養之功密則取舍之分益明者何以三隅於齊戒也夫聚精凝神以願如在銜恩慕烈不虧先德可不謹存養而能之乎凡我後人盍相勖哉 丁酉九月九日後孫▣▣(幼學)秉照盥手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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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당선생제공찬시(月塘先生諸公讚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월당선생을 찬미한 시에 대한 글 월당선생제공찬시(月塘先生諸公讚詩)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본 글은, 월당 공을 찬미한 여러 사람들의 시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 시들을 하나로 모아 책으로 묶고, 본 글을 그 책의 서문으로 넣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당선생(月塘先生)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최담(崔霮)을 말한다. 전주 한벽당을 지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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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十四世孫銓宇 崔銓宇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최전우가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최전우(崔銓宇)가 전북 전주 토정리 명학동에 지은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이곳은 지금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재실 주덕재(周德齋)도 이곳에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 최전우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선조들의 깊은 뜻을 살펴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한 것을 후손들은 깊이 새겨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재실의 이름 '염수(念修)'가 나왔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 이 기문의 내용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지만, 문서의 작성자인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은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역시 류절재 소장 문서의 하나인 또다른 염수재기에 따르면 간지가 '辛'자인 해에 염수재를 건설한 것으로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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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전북 전주 주덕산에 있는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전북 전주 주덕산(周德山)에 있는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작성연대와 작성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염수재를 지은 시기를 '辛'자인 해로 밝히고 있는데, 유절재 소장문서 중에는 같은 염수재를 대상으로 지은 기문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를 통해서 볼 때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이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전주최씨의 재실 주덕재(周德齋)가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출처(出處)를 돌아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용기를 내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이것은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라서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데 우리 후손들은 이같은 선조의 덕행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덕을 닦고 실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선조를 잊어버리고 도덕을 땅에 떨어뜨린 후손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가정을 다스릴 때 나라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염수(念修)'라는 편액명은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에서 나왔다.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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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운(寒碧堂韻)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崔再榮 전라북도 전주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한벽당에 대해 지은 시.○ 내용 한벽당(寒碧堂)에 대해 지은 시(詩)로, 전주최씨(全州崔氏)15세손 최재영(崔再榮)을 비롯하여, 16세손~20세손까지 후손들의 시가 실려 있다. 한벽당(寒碧堂)에 대해 지은 시(詩)로, 전주최씨(全州崔氏) 15세손 최재영(崔再榮)을 비롯하여, 16세손~20세손까지 후손들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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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최전우(崔銓宇) 주덕재기(周德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檀紀四千二百九十一年 再榮 檀紀四千二百九十一年 崔再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8년 최전우가 지은 주덕재기의 전사본 1958년 최전우(崔銓宇)가 지은 주덕재기(周德齋記)를 누군가 옮겨 적은 것이다. 주덕재의 건립 시기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주덕재는 전주에 있던 전주최씨(全州崔氏) 재실(齋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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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石愚序昔張南軒有言曰有所爲而爲者利也無所爲而爲者義也朱夫子贊之以擴前聖所未發大抵凡人臨事也預揣其得喪利鈍然後做將去此常情之所不能免矣自國變來士大夫之仗節循義思復君父讐者不無其人焉而如報私讐者盖鮮矣噫余自甲午以來連罹世禍仍蹈不測之淵而吾族石愚翁不我時諱以遐棄曰目今 宗社垂墟 二聖蒙塵吾輩雖老且病不可一日偃臥之秋也思所以圖報涓埃者遂與之周旋血誠戮力無所不究而甚至以廣訪乎智勇之士或入山誓天雖鱷浪豹窟隆寒酷暑沐雨踏白憊矣䟡矣形容焦然當少壯者難當底事財匱力殫則傾家刮橐尙患不贍飢焉啖松渴焉飮澗如是行色間關乎十餘載進退周章必先於我而翁不自居亦不求人知雖家人莫知盡瘁向所謂無所爲而爲之而如報私讐者非斯人而誰余適再被虜於畿海之永宗島時則戊午春也翁之遠訪於千里孤島者豈徒爲我私必有深意矣而奈彼奴移乙之虐何由是而挽不得數日暇僅一夕而熲熲歸袖翩然儻無怊悵底色以余之怊悵於翁知翁之怊悵於余也於其臨別贈此數語而贐之云戊午春三月 日族從崔銓九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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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권홍수(權鴻洙) 영창당기(永昌堂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歲上章攝提格淸和節 權鴻洙 歲上章攝提格淸和節 1950 權鴻洙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0년에 권홍수가 작성한 영창당의 기문. 1950년에 권홍수(權鴻洙)가 작성한 영창당(永昌堂)의 기문(記文)이다. 영창당은 승주군(昇州郡) 해룡방(海龍坊) 앵무산(鸚鵡山) 남쪽 죽동(竹洞)에 있는데,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세장지(世葬地)이다. 예전에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가 처음 지었고, 그 뒤 정축년에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이 중수(重修)했다. 원문에는 또한 그 죽천의 아버지 귀산(龜山)이 성우산(成愚山)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였다. 한편 기문의 저자 권홍수(1882-1972)는 자가 한거(漢擧), 호는 석하(石荷)이며, 일찍이 형 지촌(芝村) 권봉수(權鳳洙)와 함께 매천(梅天) 황현(黃玹)에게 사사하였다. 권홍수는 매천사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창이라는 현판의 이름은 우리 성씨가 영원히 더욱 창성하리라(吾姓永世彌昌之道)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권홍수는 전주최씨의 후손 최학림(崔學林)이 자신을 조상의 문적을 가지고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자 선대의 아름다운 사적을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이곳 전주최씨들이 조상이 쌓은 업적을 이어받아 힘써 도를 닦고 실천하여 그들이 더욱 창성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최학림이 이 기문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최씨가의 현조들을 살펴 보면,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를 필두로 하여,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연촌의 증손 이조참판 암계공(巖溪公) 최연손(崔連孫), 암계의 8대손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 사포의 아들 삼성헌(三省軒) 최영필(崔英弼), 삼성헌의 아들 송재(松齋) 최중우(崔重佑), 송재의 아들 동정(桐亭) 최익문(崔翼文), 익문의 아들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 남산의 아들 청계(聽溪) 최광현(崔光顯), 청계의 아들 성암(誠菴) 최상기(崔相琦), 성암의 아들 농은(農隱) 최규선(崔圭善), 농은의 아들 귀산(龜山) 최춘호(崔春鎬), 귀산의 아들 죽천(竹泉) 최낙형(崔洛珩) 등이다. 이들의 자와 호, 활동상황이 적혀 있어서 승주에 살았던 전주최씨의 현조들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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