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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明水麗玉川陽降我地仙卽午堂延壽百年南極老積陰永世後昆昌一般風致胸襟月千首詞源牙顂香鸞鶴飄然何處去萬古靑山淚滿裳 丹城后人禹潤碩 謹再拜痛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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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北斗以南有一人 碧梧堂月爲隣百世文華鳴地閥平生仁性保天眞達者誰知三也足 贖兮難欲百其身泉臺千里令何處灑淚難堪永訣晨 安城后人李在雲謹再拜哭 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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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李成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성준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성준은 자신을 정하생(情下生)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정의가 두터운 사이에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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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6년 염상봉(廉相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 幼學田鎭斅 幼學廉相鳳 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 幼學田鎭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6년(헌종 2) 정월에 유학(幼學) 염상봉(廉相鳳)이 논을 사면서 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6년(헌종 2) 정월 보름에 유학(幼學) 염상봉(廉相鳳)이 부안현 선은동에 있는 논을 사면서 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학(幼學) 전진효(田鎭斅)는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선은동 전평(前坪)의 현자답(玄字畓) 4두락지를 30냥에 염상봉에게 팔았다. 결부(結負)로는 8부 2속이 되는 곳이었다. 뒷날 다른 말이 생기면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답주인 전진효가 자필로 명문을 작성하였으며, 유학 조갑환(趙甲環)이 증인으로 참여하여 답주와 함께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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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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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六年丙申正月望幼學廉相鳳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畓伏在扶東仙隱洞前坪玄字丁四斗落只所耕捌負貳束㐣価折錢文參拾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鬧端則持此告官卞正事畓主自筆 幼學田鎭斅[着名]證人 幼學趙甲環[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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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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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4년 이원익(李遠翊)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 臘月 十七日 遠翊 甲申 臘月 十七日 李遠翊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자신은 뜻밖에 지방관이 되어 부모 봉양을 하게 되었다며 오늘 어렵게 상대방이 있는 지역에 왔으나 종일 바람이 불어 만나러 가지 못하였으니 내일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원익은 이때 함경도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어 부임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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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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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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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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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道光十四年甲午三月初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歉年至有緊用處扶北二作邙字丁十四斗落只三庫並以所耕三十一卜二束㐣価折文一百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段中間閪失故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紛紜之弊則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自筆 李安遇[着名]訂保幼學 金吉[着名]訂保幼學 金光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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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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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2년 김광섭(金光燮)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元年陰七月四日 金光燮 大正元年陰七月四日 金光燮 전북 부안군 1.4*1.4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7월 4일에 김광섭(金光燮)이 집값으로 1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 1912년 음7월 4일에 김광섭(金光燮)가 집값으로 120원을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收證)이다. 김광섭은 친척 동생 봉준(奉俊)의 전토(田土)와 산판(山坂)을 파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봉준 대신 김광섭이 계약자(契約者)가 되어 대금(代金)을 받고 영수증을 대신 작성해 준 것이다. 추가로 문권(文券)과 함께 도본(圖本) 2장을 배달증명(配達證明)하고 음7월 초6일까지 위 금액을 준수하기로 계약하였다. 계약자는 김광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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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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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收證一金㱏佰貳拾円也右ᄂᆞᆫ 族弟奉俊田土山坂賣渡代金을正히領收홈再文券与配達証的圖本二張은限陰七月初六日로準數轉渡次로契約홈大正元年陰七月四日契約主 金光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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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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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2년 이맹삼(李孟三)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十月二十日 金奉俊 李孟三 大正元年十月二十日 金奉俊 전북 부안군 1*1 2개(적색, 정방형), 1.2*1.2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10월 20일에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이맹삼(李孟三)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10월 20일에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이맹삼(李孟三)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대금(賣買代金)은 모두 90원이다. 매도인(賣渡人)은 매매대금을 받고 토지소유권(土地所有權)을 매수인(買受人)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보증인(保證人)은 대정원년 10월 20일에 계약 사실을 확인하고 서명하였다. 이 거래에는 매도인(賣渡人)으로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2통 5호에 사는 김봉준과 부안군 상동면 신후리(新后里) 1통 6호에 사는 보증인 김광섭(金光燮), 그리고 매수인(買受人) 이맹삼이 참여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모두 네 곳이었다. 첫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97호에 있는 3야미(夜味), 4두락지(斗落只)로 부수로는 3부(負) 8속(束)인 곳이다. 두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99호에 있는 1야미, 1두락지로 1부 1속인 곳이다. 세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62호에 있는 2야미, 1두락지로 1부 5속인 곳이다. 네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신후리(新后里) 509호에 있는 1야미, 3두락지이며 3부 8속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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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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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7년 장한조(張漢朝)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虎谷 朴生員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수상한 날씨에 잘 갔는지 묻고 상대방의 아들이 간다고 하니 다시 슬퍼진다고 하였다. 새해를 맞아 복 많이 받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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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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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道光二十五年乙巳十一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段矣有要用處扶北八作樓字畓拾斗落只所耕二十卜五束㐣価折錢文玖拾兩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二丈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或有子孫中雜談之弊以此文記三丈告 官卞正事畓主鄭得完[着名]證人執筆吳禮敬[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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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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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正元年陰九月十日 前明文右明文事ᄂᆞᆫ自己賣得累年耕食이다가勢不得已伏在上東面卜星里坪乃字四九九号太田一片壹斗落結一負五束庫果同坪字四六二太田二片壹斗落結一負五束庫을倂折錢文壹佰兩依數捧上이고舊文은幷付他文券故로以新文一張으로右人前永永放賣ᄒᆞ거은日後에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太田主 上東面卜星里 金奉俊[印]證人 仝里 金光燮[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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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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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十五年己丑十一月二十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當此凶年王稅判出無路故伏在上東面福星里後坪潛字太田六斗落只所耕五負柒束㐣價折錢文㱏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告官卞政事太田主 幼學 吳道賢 喪不着證人 幼學 金元浩[着名]執筆 幼學 吳錫穆[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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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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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0년 오원칠(吳元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己丑二月二 吳元七 光緖十五年己丑二月二 吳元七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6) 11월 20일 오원칠(吳元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신후리(新后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9년(고종 26) 11월 20일 오원칠(吳元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신후리(新后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오원칠은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 밭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동면 신후리에 있는 잠자(潛字) 태전(太田)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4부(負) 9속(束)인 곳이며, 방매 가격은 85냥이다. 여기에서 태전은 콩밭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오원칠, 증인(證人)은 유학 김주성(金周成), 집필(執筆)은 유학 오도현(吳道賢)의 이름이 있다. 문서를 작성한 오도현은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태전주(太田主) 오원칠과 증인 김주성은 각각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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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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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7년 임병호(林秉鎬)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丁酉十一月初八日 宋心中 林秉鎬 丁酉十一月初八日 1897 宋心中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7년 11월 8일에 송심중(宋心中)이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집과 텃밭을 임병호(林秉鎬)에게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97년 11월 8일에 송심중(宋心中)이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집과 텃밭을 임병호(林秉鎬)에게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가대주인 유학 송심중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살았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초가 4칸과 텃밭 1마지기, 시장 100동락, 모시밭(苧田) 1마지기, 콩밭(太田) 11마지기, 촌전답(村前畓) 4마지기 등을 모두 350냥에 임병호에게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에 가대주(家垈主)인 송심중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김성술(金性述)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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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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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4년 최석룡(崔錫龍)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三年甲子正月二十三 田五豊 崔錫龍 同治三年甲子正月二十三 田五豊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4년(고종 1) 1월 23일에 부문장(副門長) 전오풍(田五豊)이 최석룡(崔錫龍)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4년(고종 1) 1월 23일에 부문장(副門長) 전오풍(田五豊)이 최석룡(崔錫龍)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문중(門中)의 논으로 매년 세(稅)를 받아오다가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 매도를 하게 되었다. 부북(扶北) 8작(作) 울자답(㭗字畓) 3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7부(負) 5속(束)인 곳이며, 방매(放賣) 가격은 2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전오풍은 문중의 부대표로 거래에 참여하며 구문기(舊文記) 2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 최석룡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부문장 전오풍과 증필(證筆) 이시백(李時白)이 참여하였다. 답주(畓主) 전오풍는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않았다. 이시백은 이름 아래에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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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신해년(辛亥年)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亥十月初三日 全州李氏家 辛亥十月初三日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0월 3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0월 3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장지의 형국과 좌향은 물론 이장에 이르는 각 단계의 시각과 방위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緖十四年戊子三月五日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故上東面內基里東麓松田五拾同落價折錢文㱏百陸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中間閪失故以新文㱏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告官卞政事松田主 幼學 尹守五[着名]證人 幼學 崔成甫[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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