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7568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구산필독(臼山筆牘) 臼山筆牘 臼山筆牘 고서-집부-서간독류 개인-생활-서간 고서 원문 臼山筆牘 성책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정의재(精毅齋) 이기로(李驥魯) 선생이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으로부터 받은 간찰을 모은 것 정의재(精毅齋) 이기로(李驥魯) 선생이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으로부터 받은 간찰을 모은 것이다. 구산(臼山)은 간재 전우 선생이 쓰시던 여러 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40여 통 이상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기로 선생은 간재 선생의 제자로서 부안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문집으로는 정의재유고(精毅齋遺稿)를 남겼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경부

鄕飮酒禮笏記考證序 昔我 健廟嘗頒鄕飮儀節于郡縣俾相講擧于時縉紳縫腋奉行者頗衆至今耆舊往亡有道之者顧竆鄕晩生無由及覩盛際則未嘗不讀是書而愀然興喟也己亥春醇溪李公卸官閒居嘗訪吾親于黃檗山中約會同志諸公共習是禮于溪壇旣而折簡徵其節目一通余惟此書經文多簡疏家瓦見臨事攷擧常患難悉舊藏笏記頗多踈謬於是不揆僣越合取叅瓦而釆輯之其雜出錯見於士冠鄕射戴記諸篇者並皆旁證務從詳悉又逐條作圖以附其首合爲笏記攷證一篇旣訖或有問之者曰古禮之煩絮難行自晦菴夫子而已有是歎要當更加節畧使稍適時宜然後可行當奈何余曰古禮之行於今者上自王朝邦國下泊冠婚喪祭靡不叅酌時王之典折哀羣賢之手或洽或莗浸與古別惟玆飮射數篇獨全周公之舊卽是而觀之古人趍翔拜揖之數酬酌燕樂之節其位置森然曲折如畵使人如復見三代威儀若輕有增則易失本意泥斟酌之權非聖不能安敢議到哉盖嘗思之經禮三百威儀三千其條理名目亦已纖密矣而古人自記居動息日用飮食之間莫不由之故少而習老而安終身用之而不倦令也不然平日所以存養者固已鹵莽疎畧咸不逮古卽臨時遇事欲倅然團束於王帛鍾鼓之場宜其扜格不勝其勞苦之態矣見者不思反之而從又歸咎於世級之愈下精力之遞減殆過言也鳴呼習俗日下禮敎愈壇苟使此等禮俗講行者多難進易退之義明於上孝悌絜敬之風成於下則一種頑廉昌耻遺君後親之說惡能浸漬滋蔓蠱敗人心也哉於此益以見 先王憂患後世之意可謂深且切矣而在今後人對揚闡明之方尤不容少緩也旣以是對仍錄弁卷並以奉質于醇溪丈云新安李埈序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3년 김방식(金邦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元月十九日 弟 金邦植 癸酉元月十九日 金邦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3년 1월 19일에 김방식이 형의 자제가 요절한 것에 대해 위로하고자 보낸 간찰(簡札) 형의 자제가 요절한 것을 믿기 어려워 자신도 차마 무슨 말을 하겠으며, 몇 년 동안 쌓인 근심이 마침내 참화(慘禍)를 만나 유명(幽明)의 길에서 밤새도록 아이를 부르지만 돌아올 이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부모 된 자가 스스로 그칠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지나치게 상심하여 병이 생길까 걱정이라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9년 5월 30일 관문(關文) 崇德四年五月三十日 關文 119 호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후록(後錄)한 잡물(雜物)은 서둘러 마련하여 상납하고, 작년에 칙사(勅使)가 나왔을 때 준비했던 물품은 하유(下諭)하면 먼저 바칠 것.기묘년(1639, 인조 17) 6월 3일 도착.호조가 밤낮없이 서둘러 올려보내는 일 때문에 보낸다.246)"이번에 재가하신 본조(本曹)의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이번에 칙사(勅使)를 접대할 때 필요한 잡물(雜物)을 각 고을에 분담하여 배정하는 것은 정축년(1637, 인조 15)의 예에 따라 마련하되,247) 작년에 조사하는 일로 칙사가 나왔을 때 분담하여 배정하였던 것들은 하유(下諭)하여 재촉하라고 재가받았습니다.248) 이제 추가로 분담하여 배정한 수량을 열거하였는데, 정축년에 비해 참작하여 감한 것 중에는 조금만 감한 것도 있고 완전히 감한 것도 있기 때문에 모두 별도로 써서 들입니다. 재가받고 나면 즉시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서둘러 상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4년(1639, 인조 17) 5월 30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목성선(睦性善)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한 내용대로 잘 살펴서 시행하라. 칙사 3명이 6월 1일에 출발한다는 백패(白牌)가 도착하였으니, 10일 이후에서 보름 이전까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한다. 예로부터 이처럼 급박하게 나온 때가 없었으니 접대하는 일이 너무나 걱정이다. 후록(後錄)한 잡물을 밤낮없이 서둘러 두 배로 빠르게 운송하여 기일에 맞추어 상납하되, 조사하러 칙사가 나왔을 때 준비했던 물품은 하유하면 곧바로 반드시 먼저 바쳐서249)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말썽이 나는 사태가 없게 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라. 차사원(差使員) 및 분담하여 배정한 책자 등 거행하는데 필요한 절목(節目)은 본도(本道)가 처리하기에 달렸으므로 재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 4년 5월 30일. 성첩(成貼)함.후록(後錄) :초둔(草芚) 10번(番)을 다음과 같이 분배함.본영(本營) 2번.정포(井浦) 2번.덕포(德浦) 2번.철곶[鐵串] 2번.화량(花梁) 2번.영종(永宗)은 전선(戰船)을 제작하기 때문에 면제함.▶ 어휘 해설 ◀❶ 절목(節目) : 법령(法令)과는 별도로 작성된 세부 규정이나 시행 세칙을 가리키며, 사목(事目)이라고도 하였다. 절목 또는 사목은 국왕의 지시나 관사의 건의에 따라 문서로 작성하여 해당 관사에 비치하였으며, 추후에 지속적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 내용은 새로운 관사나 관직의 설치와 업무에 대한 규정, 특정 사안에 대한 처리 규정, 왕명을 봉행하는 관원의 사무 지침 등을 항목별로 열거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절목 또는 사목을 문서로 작성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을 때 사용하는 문서로는 별단(別單)이나 단자(單子)를 사용하였다. 己卯六月初三日到付.戶曹爲罔晝夜上送事."節啓下敎曹啓目, '今此勅使支待雜物, 分定各官, 依丁丑年磨鍊, 而上年査官時已分定者, 下諭催促事, 已爲啓下爲白有在果. 今以加分定之數, 開錄爲白乎矣, 比丁丑年斟酌裁減, 或有稍減者, 或有全減者, 故竝爲別書以入爲白乎旀. 啓下卽時, 移文各道, 催促上納, 何如?' 崇德四年五月三十日, 同副承旨臣睦性善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貌如, 奉審施行爲乎矣. 勅使三員, 六月初一日起馬白牌已到, 計於旬後望前入京. 自古未有如此急迫之時, 接待之事, 極爲渴悶. 後錄雜物, 罔晝夜兼程倍道, 及期上納爲乎矣, 査官時, 已措備之物, 下諭卽時, 必先呈是置, 俾無未及生事之患以貽後悔爲齊. 凡差使員及分定成冊等擧行節目, 在於本道處置, 不爲更申向事. 合行."崇德四年五月三十日. 成貼.後 :草芚十番.本營二番.井浦二番.德浦二番.鐵串二番.花梁二番.永宗, 造船以減.❶ 事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❷ 呈 : 저본에는 원문이 '程'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事'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인조 15년(1637) 겨울에, 한인(漢人)에게 돼지와 술을 대접한 철산(鐵山) 사람, 인삼(人蔘)을 캐려고 국경을 넘은 갑산(甲山) 사람, 청나라의 말을 사가지고 나온 영변(寧邊) 사람, 정주(定州)의 대진(大陣) 중에서 사로잡혀간 사람을 불러낸 안주병사(安州兵使)의 군관(軍官), 청나라 말 4필을 훔쳐온 철산 사람 등을 조사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나온 칙사들은 인조를 만나 5가지 사항을 요구하였다. 그 5가지란 첫째는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을 돌려보낼 것, 둘째는 한인을 잡아서 보낼 것, 셋째는 사로잡혀갔다가 도망온 사람을 잡아서 보낼 것, 청나라 말을 훔친 사람을 조사할 것, 무오년(1618, 광해군 10)과 정묘년(1627, 인조 5)에 사로잡혀간 사람 중 통사(通事)로 일을 하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을 잡아서 보낼 것 등이다. 그리고 별도로 재상(宰相)의 자녀를 청나라 사람과 혼인시킬 것 및 시녀(侍女)를 뽑아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1월 20·23일; 『인조실록』 15년 11월 22일(병술). 인조 15년 겨울에 나온 청나라의 칙사들이 재상(宰相)의 자녀를 청나라 사람과 혼인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비변사에서 우의정 신경진(申景禛), 전(前) 판서(判書) 이명(李溟),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시백(李時白), 전(前) 첨사(僉知) 이후근(李厚根), 전 판서 심기원((沈器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시영(李時英) 등 6명의 첩녀(妾女)나 양녀(養女)를 대상으로 선발하였다. 이듬해에 그 문제로 칙사가 다시 나왔다. 『인조실록』 15년 11월 22일(병술)·24일(무자)·26일(경인)·27일(신묘), 16년 1월 16일(경진);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6월 16일, 9월 16일, 10월 14일. 저본에는 원문 '呈' 1자가 '程'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9년 5월 30일 관문(關文) 崇德四年五月三十日 關文 120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이행원(李行遠)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작년에 칙사(勅使)가 나왔을 때 분담하여 배정하였던 잡물(雜物)을 서둘러 납부하고, 관사(館舍)의 수리와 임시 건물의 건설 등도 정축년의 예에 따라 거행할 것.기묘년(1639, 인조 17) 6월 3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공경히 수령한 유지(有旨)에 이르기를,'중전(中殿)의 책봉(冊封)을 위해 칙사(勅使) 3명이 파견된다는 백패(白牌)가 뜻하지 않게 나왔는데, 6월 1일에 회동관(會同館)에서 출발하여 5일이나 6일 사이에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기로 정하였다고 한다. 다급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을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고 접대할 물품들을 마련하는 일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지방에 지정한 물품은 정축년(1637, 인조 15)의 등록(謄錄)에 따라 마련해야겠으나, 작년에 조사하는 일 때문에 나온 칙사를 접대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분담하여 배정한 것이 절반 이상이니, 이것은 미리 준비해두어 명령이 내리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므로 우선 밤낮없이 서둘러 올려보내게 하고, 그 나머지 –원문 결락- 정축년의 예에 따라 헤아려서 감면하여 분배해서 정하였으니, 이것도 즉시 준비하여 올려보내며, –원문 결락- 물품도 나누어 운반하여 상납해야 궁색하거나 말썽이 날 사태가 없을 듯하다. 잡물(雜物)을 운송하여 납부하는 일은 차사원(差使員)을 별도로 정하여 올려보내라. 그리고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미리 서울로 올라와서 머무르며 감사(監司)에게 분부를 전달하여 도의 경계에 급히 나아가서 일에 따라 대응하도록 한 예전 규정이 본래 있다. 이번에는 더욱 긴급하니 선전관(宣傳官)이 표신(標信)을 가지고서 내려가면 작년에 조사하는 일 때문에 칙사가 나왔을 때 하유(下諭)했던 별록(別錄)을 경이 살펴보고서 시급히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유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유념하여 거행하라. 조사하는 일 때문에 칙사가 나왔을 때 분담하여 배정하였던 잡물을 다시 후록(後錄)하였으니, 차사원(差使員)인 양지현감(陽智縣監)에게 밤낮없이 서둘러 실어다가 납부하라. 관사(館舍)의 수리, 임시 건물의 건설, 도로와 교량의 설치, 식거(植炬 길 양쪽에 세우던 횃불)의 운송 등의 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관련된 일들도 모두 정축년의 예에 따라 시급히 거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4년(1639, 인조 17) 5월 30일.후록 :생합(生蛤) 150개를 시기가 되면 상납하기 위해 본영(本營)이 준비할 것.▶ 어휘 해설 ◀❶ 회동관(會同館) : 중국이 조선(朝鮮), 회회(回回), 유구(琉球), 안남(安南) 등 네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북경(北京)에 건립한 건물로,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고도 불렀다.❷ 표신(標信) : 국왕, 왕비, 왕대비(王大妃), 왕세자(王世子) 등의 명령이나 승인이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발급하던 증표로, 부신(符信)의 일종이다. 『대전통편(大典通編)』 「병전(兵典)」 〈부신(符信)〉에는 국왕이 발급하는 선전표신(宣傳標信)·문안표신(問安標信)·적간표신(摘奸標信), 세자가 발급하는 휘지표신(徽旨標信), 왕비가 발급하는 내지표신(內旨標信), 왕대비가 발급하는 자지표신(慈旨標信), 세자빈(世子嬪) 등이 발급하는 내령표신(內令標信), 왕세손(王世孫)이 발급하는 의지표신(懿旨標信)의 형태 및 용도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대전통편』 「병전」 〈문개폐(門開閉)〉에는 궁성문(宮城門)과 도성문(都城門)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는 개문표신(開門標信)과 폐문표신(閉門標信)의 형태와 용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그 외에 『은대편고(銀臺便攷)』 「병방고(兵房攷)」 〈부신(符信)〉과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등에도 표신의 용도 및 제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己卯六月初三日到付.兼巡察使爲相考事."節祗受有旨內, '中殿冊封勅使三員白牌, 不意出來, 六月初一日, 會同館起馬, 初五六月日間, 定爲越江云. 急遽之狀, 無以形言, 接待諸具, 措手莫及. 外方卜定之物, 當依丁丑謄錄磨鍊, 而上年査官接待次所用分定者過半, 此, 則豫爲措備, 可以朝令夕發, 使之爲先罔晝夜上送, 而其餘未備▣…▣丁丑年例, 量爲裁減分定, 亦卽措備上送, 而前▣…▣之物, 分運上納, 庶無窘迫生事之患矣. 雜物領納, 別定差使員上送. 而本道都事豫先上京留待, 分付監司馳進境上, 隨事責應, 自有前規. 今則尤爲緊急, 宣傳官持標信下去, 卿其上年査官時下諭別錄相考, 急急擧行.'事有旨是置有亦. 有旨內事意, 奉審惕念擧行爲乎矣. 査官時分定雜物, 更良後錄爲去乎, 差使員陽智縣監處, 罔晝夜輸納爲齊. 館舍修理、假家造作、道路·橋梁造排、運植炬等事是沙餘良, 凡干諸事, 一依丁丑年例急急擧行向事. 合行云云."崇德四年五月三十日.後 :生蛤壹百伍拾介, 臨時上納次, 本營以措備.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39년 6월 3일 관문(關文) 崇德四年六月初三日 關文 121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이행원(李行遠)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기묘년(1639, 인조 17) 6월 5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분담하여 배정하는 일 때문에 보낸다."칙사(勅使)가 나올 때 필요한 우구(雨具) 등을 분담하여 배정해서 후록(後錄)에 열거하였으니, 각 차사원(差使員)에게 신속히 실어다가 납부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4년(1639, 인조 17) 6월 3일.후록 :초석(草席 왕골이나 부들 따위로 엮어 만든 자리) 2닙(立)과 세겹줄바[三甲條所] 1거리(巨里)를 차사원인 철곶첨사[鐵串僉使]에게 실어다가 납부할 것. 己卯六月初五日到付.兼巡察使爲分定事."勅使時雨具等, 分定開後錄爲去乎, 各其差使員處, 急速輸納向事. 合行云云."崇德四年六月初三日.後 :草席二立、三甲條所一巨里, 差使員鐵串僉使處, 輸納次.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2년 이태식(李駘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寅 三月 卄八日 弟 李駿植 李敎成 壬寅 三月 卄八日 李駿植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2년 3월 26일에 동생 이태식(李駘植)이 말씀하신 일로 산중에 사는 노인에게 탐문한 내용으로 존형(尊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이별한 이후 더욱 강녕하리라 생각되며 말씀하신 일은 사적인 이유와 기후로 인하여 그저께야 갔었는데 마침 동료인 노인이 산중에 살고 있어 온다는 뜻을 말하였는데 자못 의아한 기색으로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창연히 돌아오려 하자 노인이 저지하고 이처럼 단치(斷置)할 수 없으니 석공(石工)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인데 외출중이니 하룻밤을 머물고 내일 아침에 자세히 탐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 말대로 다시 탐문하니 똑같은 말을 하여 발길을 돌려 마을 밖 1리를 나오니 쇠봉을 가진 한 장부가 석공 같았으므로 물어보니 같은 말이었다. 존형이 전날 견품한 출처와 지명이 혹 잘못 전달한 것인지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한번 찾아오면 자세히 여쭙겠다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양회수(梁會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一月十九日 弟 梁會水 李敎成 殿 一月十九日 1940 梁會水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월 19일 양회수(梁會水)가 이교성(李敎成)에게 쌀 거래대금과 가마니 등의 추가 비용을 전하는 간찰(簡札) 모년 1월 19일 보성에 사는 양회수(梁會水)가 정읍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서신이 왔을 때 자신이 출타 중이었던 상황과 쌀을 거래하는 대금에 가마니와 외인조 등의 추가 비용이 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709년 민진후(閔鎭厚)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己丑七月四日 閔鎭厚 己丑七月四日 閔鎭厚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09년(숙종35) 7월 4일에 민진후(閔鎭厚)가 아드님의 상에 경악하였고, 자신은 쇠병이 심하며, 주신 건량은 감사하고, 민어와 조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709년(숙종35) 7월 4일에 민진후(閔鎭厚)가 아드님의 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고, 자신은 쇠병이 심하여 신음하며 지내고, 주신 건량은 감사하며, 민어와 조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뜻밖에 편지를 받고 처음으로 아드님의 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으나, 다행인 것은 슬픔에 잠겨있는 가운데 체리(體履)가 그나마 편안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만 리를 오가던 나머지 쇠병(衰病)이 심하여 신음하며 지내니 서글픈 마음 어찌하겠는가. 주시는 건량[餉]은 잘 받아서 감사하며, 민어 한 마리 더 첨가한 것과 조기[石魚]는 아직 오직 않았다는 것과 먹 하나를 약소하나마 드린다는 추신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3년 척종(戚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三月旬七 戚從 癸酉三月旬七 戚從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3년 3월 17일 성명 미상의 척종(戚從)이 사촌에게 손주를 잃은 소식과 목재 매각을 요청하는 내용의 간찰(簡札) 1933년 3월 17일 성명 미상의 척종(戚從)이 성명 미상의 사촌에게 지난달 3세의 손주를 잃은 소식의 전달과 목재 구매자에게 나무를 적정 가격으로 대신 매각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의재유고(精毅齋遺稿) 精毅齋遺稿 精毅齋遺稿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고서 원문 精毅齋遺稿 성책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정의재(精毅齋) 이기로(李驥魯) 선생의 시문을 필사한 자료집 부안 출신의 근대 유학자였던 이기로(李驥魯) 선생의 시와 산문(散文)을 엮은 것이다. 이기로 선생의 자는 덕부(德夫)였으며, 본관은 영주(瀛州), 호는 정의재(精毅齋)였다. 부안군 건선면 목상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생 절조를 지키며 생애를 마감한 인물이다. 부안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이기로 선생의 자(字)는 덕부(德夫)였으며, 본관은 영주(瀛州)였다. 1851년(철종 2)에 전북 부안군(扶安郡) 건선면(乾先面) 목상리(木上里)에서 출생하였으며, 1927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평생을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세태의 혼탁한 흐름 속에서도 선비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단 한 번도 어기거나 소홀히 한 적이 없었던 꼿꼿한 분이셨다. 이기로의 학문과 인품에 대해서는 한말의 대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정의재라는 호를 직접 내려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재유고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부(賦), 가(歌), 시(詩), 서(書), 잡저(雜著), 서(序), 발(跋) 기유명(記遺命), 행록(行錄), 행장(行狀), (笏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유영선(柳永善)과 이희진(李喜璡)이 쓴 두 편의 서문과 고동시(高東是)가 쓴 발문이 있다. 한편 정의재유고에는 다른 사람들의 글도 일부 수록되어, 물론 모두 정의재 이기로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고동시의 정의재이처사실기(精毅齋李處士實記), 이희진(李喜璡)의 정의재기(精毅齋記), 김택술(金澤述)의 한후당기(寒後堂記) 등이 될 것이다. 한후당은 정의재의 당호(堂號)였다. 이 외에도 이기로 선생의 기일(忌日)을 맞아 이기로 선생의 제자나 후손들이 쓴 제문(祭文)들도 있다. 정의재유고의 서문에 의하면 본 정의재유고는 이기로 선생의 아들인 이시택(李時澤)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선친이 남긴 귀한 글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기로 선생 본인이 서문을 남기고 있는 점을 보면, 본 정의재유고에 수록된 글들은 기본적으로 이기로 선생이 직접 정리해 두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아들인 이시택이 서문과 발문 그리고 그 밖의 일부 글들을 추가하여 책을 묶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기로 선생이 정의재유고의 서문을 쓴 때를 보면 1926년 7월이었다. 숨을 거두시기 5달 전이셨는네, 스스로를 병부(病夫)라고 적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이기로 선생의 건강은 좋지 못하였던 듯하다. 한편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필사본 정의재유고는 이기로 선생이 생전에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이시택이 이기로 선생의 정리본에 유영선과 이희진의 서문 그리고 고동시의 발문 등을 추가하여 다시 만든 것이 분명한데, 그 일을 언제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희진이 서문을 쓴 시기가 1930년이요, 고동시의 발문이 쓰여진 때는 1932년이었다. 따라서 이시택이 정유재유고를 정리하는 데 최소 2년 이상은 걸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유영선이 서문을 쓴 때를 도유대연헌(屠維大淵獻)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도유대황락(屠維大荒落)의 오기라고 보아야 한다. 도유대연헌이라면 기해년(己亥年)인데, 기해년이라면 1899년(고종 36) 혹은 1959년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필사본 정의재유고는 이기로 선생의 아들인 이시택이 1932년에 완성한 것인데, 이시택이 정의재유고를 정리한 이유는 물론 책으로 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간행이 된다. 현 채 시중에 나와 있는 석판본 2책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필사본 정의재유고와 이 석판본 정의재유고를 비교해보면 석판본 정의재유고는 필사본 정의재유고를 저본으로 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필사본 정의재유고에 있는 글들이 모두 석판본 정의재유고에 수록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글들이 누락되었음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아울러 필사본 정의재유고에서 찾아지는 오자들이 석판본 정의재유고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이 점도 나중에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30년 권선환(權善煥) 차용증서(借用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權善煥 1930 權善煥 전북 정읍시 指章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권선환(權善煥)이 5원 70전을 빌리면서 채권자에게 작성해 준 차용증서(借用證書). 권선환(權善煥)이 5원 70전을 빌리면서 채권자에게 작성해 준 차용증서(借用證書)이다. 작성연대와 채권자의 이름은 문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자는 1원당 5전으로 하였으며, 1930년 10월 30일까지 지불하기로 약정하였다. 문서의 끝에 권선환이 서명 날인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桐塢遺稿序 自三百篇以降言者日多至于李唐極盛而唐又有盛晩之異自是言詩者惟知有唐而不知有三百篇故詩愈多而興於善者愈少金邵亭云風雅遞以降作家一何多誰能遍摩挲別欲立一幟今若有人立幟當取淳雅近古者雕鏤膩巧者必不與矣李君時澤編輯其曾祖處士桐塢公詩示不佞不佞之生差後於公不獲面承而其風韻之未泯者洋洋盈耳今又得是編而讀之知公更無餘蘊公之詩非雕鏤膩巧而殆淳雅近古者歟蘆沙撰公墓表云吟哢遺懷其悠然自得者人莫得窺其際又曰竊諷公吟詠幾首音者其任眞由衷不事雕鏤讀此詩者苟味得悠然自得任眞由衷之氣調以理其性情則可以興可以羣可以怨者或備其一端歟天地中和之氣人得以生故人之有言順其中和之性情則長短淸濁自然中節所謂五音依此而立今人作詩不察乎此而生以五聲爲標格矯其性情求合乎彼是倒其本末而不知先後所以古音之難復而世道之日究乎汙下也此篇所載但以辭語之巧拙韻致之高下論之則似遜乎世之能言者然順其自然之中和而不曾矯其性情以求合孚五聲之標格是先本而後末者也又當時輓公詩樂地春風閒意思晴天明月澹精神二句是實公之寫眞而其氣脈意味信乎超脫於塵累之外後之論公者於此有以黙會矣夫處士諱萬祿姓李而貫瀛州歲在庚戌春二月日全州李喜璡謹序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