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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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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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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4월 11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十一日 關文 055 의정부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직언(直言)을 구하는 전지(傳旨)를 잘 살펴서 시행하고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할 것.무인년 4월 18일 도착.의정부가 직언(直言)을 구하는 일 때문에 보낸다."주상께서 이르기를,'직언을 구하는 교서(敎書)는,「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역대 임금이 물려주신 큰 기업을 외람되게 지키고 있으므로 이를 감당할 수 없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종일토록 애를 써서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나100) 나의 정성이 하늘의 신뢰를 받지 못하여 하늘의 분노가101) 그치지 않았으며,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백성을 다친 사람이나 자식처럼 여겼으나102) 나의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났다. 재이(災異) 현상이 계속 나타나고 비통해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내가 측은하게 여기고 상심하여 자신을 반성해보니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워서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이제 봄과 여름이 교차하고 곡물을 파종하는 시기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고 비가 내리지 않아, 양맥(兩麥 보리와 밀)은 메말라서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고 전답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서 농부들이 쟁기를 팽개쳐두었다. 봄철의 밭갈이를 이미 망쳤으니 가을의 수확을 어찌 바라겠는가! 가엾은 나의 백성만 거의 죽게 되었으니, 아!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다.103) 여기까지 말을 하고 보니 마구 눈물이 쏟아진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더구나 이처럼 큰 난리를 겪고 난 끝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바로 발생하여 고아와 과부가 의지할 수 없으며, 칙사(勅使)가 다녀가자마자 가난한 백성은 양식마저 다 떨어졌다. 굶주리고 목마른 다급한 상황조차도 구제하기 어려울까 걱정인데, 이렇게까지 재해가 닥치니 나는 감히 이유를 모르겠다. 나와 걱정을 분담하는 수령들이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백성이 몹시 착취를 당하고 있어서인가? 지방에 파견된 장수가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군병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있어서인가? 궁궐이 엄중하지 않아 부정한 통로가 열려 있거나, 관직 제수가 공정하지 않아 뇌물이 횡행하고 있어서인가? 형정(刑政)이 문란하여 옥사(獄事 형사 사건)와 송사(訟事 민사 사건)가 지체되거나, 상벌(賞罰)이 어긋나서 권장과 징계가 막혀서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아서 나의 과실을 듣지 못하거나, 선악(善惡)을 구별하지 않아서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이 뒤섞여 나아와서인가? 붕당(朋黨)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공정한 여론도 소통이 막혀 있어서인가? 사치스러운 풍조가 아직도 여전하여 몸소 실행하는 진심이 신뢰를 받지 못하거나, 명령에 모순이 있어서 솔선수범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음기(陰氣)는 성대하고 양기(陽氣)는 미약하여 내외(內外)의 구분이 일반적인 법칙을 상실해서 그런 것인가?길흉(吉凶)은104) 들어오는 문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일 뿐이고,105) 하늘은 모두 우리 백성을 통해 보고 들으니,106) 어찌 아득히 먼 하늘에다가 책임을 떠넘기고 나에게 있는 도리를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은(殷)나라 탕왕(湯王)과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전례를 행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하늘의 경고에 호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로 삼아야 한다.107) 그래서 이미 침전(寢殿)을 피하여 스스로 신칙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는 등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에 최선을 다하였다. 나의 조정에 있는 신하와 초야에 있는 선비 중에는 틀림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잘못된 정치와 과실 중에서 어떤 일은 백성을 상하게 할만한 일이고 어떤 일은 재이를 불러들일 만한 일인지를 각각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하라. 말이 정도에 지나치더라도 내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아! 하늘이 높아도 낮은 곳으로부터 민심을 듣고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말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천 리에 걸쳐 큰 비가 내리기도 하니, 하늘이 감동하는 것은 마치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빠르다. 이것이 내가 허둥지둥 서둘러서 재이를 구할 직언을 기어이 들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한 해의 정무(政務)에 힘쓰고 있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깨달으라.」라고 전국에 포고하도록 의정부에 내려주라.'라고 하였다.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11일에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이무(李楘)가 공경히 받든 전지(傳旨)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도내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하라."4월 일.▶ 어휘 해설 ◀❶ 교서(敎書) : 국왕이 백성에게 널리 알려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어 다중(多衆)에게 반포하기 위해 발급하거나 특정한 사안과 관련하여 개인에게 발급하던 문서이다. 따라서 교서는 수취자가 다중이냐 개인이냐에 따라 다중에게 반포하는 교서와 개인에게 발급하는 교서로 나눌 수 있다. 다중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국왕이 즉위할 때 전국의 신민에게 반포하던 즉위교서(卽位敎書), 국왕이 왕위를 세자(世子)에게 물려주면서 반포하던 전위교서(傳位敎書), 국왕이 세자나 세손(世孫) 등의 동궁(東宮)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킬 때 내리던 청정교서(聽政敎書), 세자, 세손, 왕비, 세자빈(世子嬪), 세손빈(世孫嬪) 등을 책봉할 때 내리던 책봉교서(冊封敎書), 국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전국에 반포하던 상호교서(上號敎書), 국왕이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할 때 내리던 구언교서(求言敎書), 역적을 토벌한 뒤 전국에 반포하던 토역교서(討逆敎書), 나라에 경사가 있어 사면령(赦免令)을 내릴 때 반포하던 사면교서(赦免敎書) 등이 있었다. 개인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개국(開國), 토역(討逆), 반정(反正), 전란(戰亂) 등 국가적인 사건이 있을 때 공로를 세운 녹훈공신(錄勳功臣)에게 내리던 녹훈공신교서(錄勳功臣敎書), 각 왕의 재위 기간에 공로가 많았던 신하로 선발되어 종묘(宗廟)의 해당 국왕 신실(神室)에 배향(配享)된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에게 내리던 종묘배향공신교서(宗廟配享功臣敎書), 유학(儒學)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적 수양이 뛰어난 선비로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문묘종사공신(文廟從祀功臣)에게 내리던 문묘종사공신교서(文廟從祀功臣敎書), 관찰사(觀察使), 유수(留守), 절도사(節度使), 지방 군영(軍營)의 사(使) 등에 제수된 사람에게 발급하던 제수교서(除授敎書),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 발급하던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 국왕이 가례(嘉禮)를 행할 때 왕비의 집에 발급하던 가례교서(嘉禮敎書) 등이 있었다.❷ 전지(傳旨) : 국왕의 명령을 실행할 관사에 전달하기 위해 승정원이 작성한 문서를 가리킨다. 전지는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유음전지(流音傳旨)와 하음전지(下音傳旨)로 분류할 수 있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시상전지(施賞傳旨)와 징벌전지(懲罰傳旨)로 분류할 수 있다. 유음전지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요약 정리하여 주서(注書)에게 주면 주서가 작은 글씨로 작성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던 전지이고, 하음전지는 국왕의 재가를 받은 전지를 주서가 베끼고 관인(官印)을 찍으며 승지가 장함(長銜)을 적고 서명하여 담당 관사에 내려주던 전지이다. 시상전지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가자(加資), 승진시켜 임용하는 승서(陞敍), 임금의 이름으로 물품을 하사하는 사급(賜給) 등에 관한 전지이고, 징벌전지는 관원의 추고(推考), 파직(罷職), 삭직(削職), 탈고신(奪告身), 금추(禁推), 나추(拿推), 나문(拿問), 나국(拿鞫) 등에 관한 전지이다. 戊寅四月十八日到付議政府爲求言事."'「王若曰. 予以否德, 叨守祖宗丕基, 常恐不克負荷. 乾乾夕惕寅畏乎天, 而誠不上孚, 天怒未已; 凜凜如傷子視乎民, 而澤不下究, 民怨日滋. 災異畓至, 愁痛載路, 予用惻然疚懷, 反躬自省, 忸怩顔厚, 無樂爲君矣. 今者春夏之交, 播穀之節, 久旱不雨, 兩麥枯損, 無計收獲, 田疇龜拆, 耕夫釋耒. 旣失東作, 何望西成! 哀我赤子, 大命近止, 噫! 人之類滅矣. 興言及此, 流涕無從. 究厥所由, 皆予不辟之致, 尙誰怨尤! 況此大亂之餘, 瘡痍甫起, 孤寡靡依, 西使纔過, 蔀屋如罄. 飢渴之急, 亦患難救, 而災害此極, 予不敢知. 分憂之官, 不體予意, 而民有膏血之浚歟? 閫外之將, 不體予意, 而兵有離散之患歟? 宮闈不肅, 而有徑曲之開; 除拜不公, 而有苞苴之行歟? 刑政紊而獄訟滯, 賞罰舛而勸懲沮歟? 言路不開, 而過失罔聞; 薰蕕無別, 而賢邪雜進歟? 朋黨猶有所未祛, 公議亦有所雍閼歟? 奢侈猶夫前, 而躬行之實未孚; 號令有所乖, 而草偃之效未著歟? 抑或陰盛陽微, 內外之分, 失其常道而然歟? 夫休咎無門, 惟人所召, 天之視聽, 皆自我民, 則其可諉之於茫茫杳杳而不反在我之道乎! 予當以成湯之禱、魯昭之祈爲責躬應天之實. 旣已避殿自飭減膳禁酒, 其於弭災之道, 靡所不用其極. 凡我在朝臣僚、草野士庶, 必有中心所懷而欲言之者矣. 予之庇政闕失, 某事足以傷民、某事足以召災者, 其各盡言無隱, 匡救不逮, 以答天譴. 言雖過中, 予不爲罪. 噫! 天高聽卑, 至誠感神, 一言未竟, 大雨千里, 天之感動, 如響赴聲. 此予之所以遑遑汲汲必欲聞救災之言也. 勖歲政旨, 體予至意.」 布告中外爲只爲, 下議政府爲良如.' 崇德三年四月十一日, 行都承旨臣李楘敬奉傳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道內各浦良中, 知委向事."四月日.❶ 怒 : 저본에는 원문이 '恕'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滅 : 저본에는 원문이 '感'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❸ 休 : 저본에는 원문이 '咻'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효사(爻辭)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애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無咎']라고 한 말과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일(無逸)〉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덕을 칭찬하면서 '엄숙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였다.[嚴恭寅畏]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怒' 1자가 '恕'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여기셨다.[文王視民如傷]'라고 한 말과 『서경』 「주서」 〈강고(康誥)〉에 '백성을 갓난아이 보호하듯이 하면 백성들이 편안히 다스려질 것이다.[若保赤子惟民其康乂]'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滅' 1자가 '感'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休'가 '咻' 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서경』 「주서」 〈홍범〉에서는 '왕자(王者)의 잘잘못은 한 해를 기준으로 증명하고, 경사(卿士)의 잘잘못은 한 달을 기준으로 증명하며, 사윤(師尹)의 잘잘못은 하루를 기준으로 증명한다. 비옴[雨]·볕남[暘]·따뜻함[燠]·추움[寒]·바람[風] 등 다섯 가지의 길흉[休咎]은 한 해의 이해(利害)와 관계되고 한 달의 이해와 관계되며 하루의 이해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서경』 「주서」 〈태서(泰誓)〉에서는 '하늘이 볼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들을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라고 하였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하(夏)나라 걸(桀)을 정벌한 뒤로 7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고 비를 빌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탕왕 자신이 희생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재계(齋戒)하고 모발과 손톱을 자르고 소거(素車)에 백마(白馬)를 타고서 자신의 몸을 흰 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고 상림(桑林)의 들에 가서 세 발 달린 정(鼎)을 놓고 산천에 기도하면서 자책하니,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큰비가 내렸다. 노(魯)나라 소공(昭公)은 25년 7월의 상순과 하순의 각 신일(辛日)에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事文類聚前集』 「天道部」 〈禱雨〉; 『春秋左氏傳』 昭公 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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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4월 7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初七日 關文 056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양성(陽城)과 진위(振威)의 자모수군(自募水軍) 등이 잃어버린 군기(軍器)를 비변사의 관문에 따라 회수하지 말고 감면해줄 것.무인년 5월 11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화량첨사(花梁僉事)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본진(本鎭)에 소속된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등 고을에 사는 자모수군(自募水軍) 명의로 바친 의송(議送)에 의거하면,「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었던 활과 화살을 턱없이 징수하는 것은 너무나 애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송에 대한 제사(題辭)에 이르기를,「병조가 보낸 공문에 이르기를,〈난리를 겪고 난 뒤에, 각 도(道) 각 진(陣)의 군병 등에게 주었던 군기(軍器)를 전투에 나아갔을 때 잃어버렸으면 감해주어야 하지만, 흩어져 도망한 군졸로서 받았던 군기이면 거두어들여서 회록(會錄)하라.〉라고 하였으니, 본영(本營)이 멋대로 경감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서로 싸우다가 잃어버린 군기이면 감해주어야 할 대상에 포함되지만, 도피한 산골짜기에서 잃어버린 것이라면108) 병조가 회부(會付)한 군기를 틀림없이 감해주지 않을 것이다. 본진(本鎭)이 사실대로 조사한 뒤 원문서를 첨부하여 공문을 보낼 수 있도록 2건의 첩정(牒呈)을 올려 보고하라.」라고 제사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는데, 저의 임기 중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상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대체로 군기를 주었던 수군들도 같은 해 12월 27일에 남양(南陽)에 나아갔고, 남양부에서 군인들을 위로하던 중에 청나라의 마병(馬兵)이 뜻하지 않게 남양부에 들이닥쳤는데, 남양부사(南陽府使)가 살해될 때에 그들을 영솔하던 초관(哨官)과 군병들도 일부는109)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본진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증언하였으므로 이러한 연유를 원문서를 첨부하여 첩정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적지 않은 군기를 본조(本曹)에서 멋대로 감해주기는 어려우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지시해주소서.'라고 낱낱이 거론하여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번에 도착한 비변사의 관문에 이르기를,'난리 중에 잃어버린 군기를 징수하는 것은 원통할 것 같으니, 분간하여 감해주라.'라고 하였다. 그러니 살펴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7일.▶ 어휘 해설 ◀❶ 자모수군(自募水軍) :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수군(水軍)을 가리킨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이 있을 때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군병을 자모군(自募軍)이라고 불렀다.❷ 의송(議送) : 백성이 관찰사(觀察使)나 절도사(節度使) 등에게 억울한 사정 등을 호소할 때 올리던 청원서이다. 문서 형식은 소지(所志)와 유사하나, 당사자가 거주하던 고을의 수령에게 바치지 않고 그보다 상급 기관에 바치던 문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❸ 회록(會錄)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부(會付)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회록한다는 것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회록(會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회록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때의 회록은 군포(軍布) 2필을 1필로 감해주면서 생긴 재정 손실을 메꾸는 방안의 하나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의 여유 자금, 비변사의 군작미(軍作米), 호남(湖南)의 검영미(檢營米) 등에서 일부를 떼어 원금을 마련한 뒤 이를 환곡(還穀)으로 운영하여 받은 모곡(耗穀)의 전부 또는 일부를 회계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가리킨다. 균역법의 시행에 따라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었으나 기존에 지출하던 비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포의 감면에 따라 부족해진 지출 비용을 국가가 마련해서 대주는 것을 급대(給代)라고 하였는데, 회록에 의해서 마련된 자금도 급대할 비용에 보탰다.❹ 회부(會付)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록(會錄)이라고도 하였다. 戊寅五月十一日到付.兵曹爲相考事."節到付花梁僉事牒呈內, '本鎭屬陽城、振威等官居自募水軍名呈議送據, 「兵亂時所授弓箭乙, 生徵, 天下曖昧.」是如呈議送題音內, 「〈經亂之後, 各道各陣軍兵等所授軍器乙, 赴戰時閪失, 則應減, 散亡餘卒以授軍器, 則收捧會錄.〉事, 兵曹行移已到, 非本營擅自蠲減是置. 汝矣等, 若陣上相戰所失軍器, 則在於應減之中, 若失於逃避山谷者, 則兵曹會付軍器乙, 必不減下. 本鎭從實査覈, 粘移次, 兩件牒報向事.」題送是置有亦. 相考爲乎矣, 非僉使等內之事以, 未能詳知是在果. 「大槪軍器所授水軍等亦, 同年十二月二十七日, 進到南陽, 府良中, 犒軍爲如可, 馬兵不意突入同府, 府使被殺時, 所領哨官及軍兵段置, 除除良亦爲被殺.」是如, 鎭下餘存人等, 如出一口爲乎等以, 如此緣由粘牒.'是置有亦. '不小軍器, 自本曹擅減爲難, 處置指揮.'事, 枚擧報備邊司爲有如乎. 節到付備邊司關內, '亂中散失軍物徵納, 似寃, 分揀減下向事.'關是置有良旀. 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四月初七日.❶ 失 : 저본에는 원문이 '背'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除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失' 1자가 '背'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除'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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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表 艮齋田先生 身任世道 講明性學 於是四方從師者 無慮千百 而31)彬彬多文學之士 惟精毅齋李公 以簡質老成 見稱焉 公歿之四年 其子時澤 謁余以墓文 余平生 不肯作此等文者 懼其爽實 而如公之德則 又何須牢辭也 公諱驥魯 字德夫 瀛州人也 生而岐嶷 莊重寡默 書籍之外 無佗嗜好 孝友之性 出於天植 嘗以歉歲 喪斂未盡情 爲終身憾 間日省基 老亦不弛 族隣之來學者 至誠敎導 不以勞倦 素性眞率 不餙邊幅 人無親疎 接以和顔 然有不正者 疏斥之 有語及時政闕失人事毁短則 不答焉 家貧屢空 亦不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無寧守吾本分而死 自世變以來 王綱陵夷 邪說譸張 公以寒後 扁其堂 蓋自期以歲寒松柏也 乙巳 贄謁艮翁 得精毅之錫號 退而集合洙泗言仁諸說 使讀者 參究源委 蓋憂仁說多歧而成編也 座揭聖賢要言 以寓警省 庭列花卉羣芳 以資怡養 其爲學 專用心於内 故不事著作 而其發於吟咏者 多出於愛君憂國忠憤惻恒焉 壬戌 遭師喪 守心制如禮 有爭事功違師訓而 以認稿爲時義者 公與諸友累會 我議事於玄洞齋 且居首於聲討之章 以明師門大義 公可謂不負寒後精毅之號矣 鳴呼 夫君父師 無所逃於天地之閒 而報生以死 人之道也 公旣有孝親憂國之實 而又辨師誣 以嚴衛闢 其視貪利悖義怙終稔惡者 豈可同日而語哉 公之生卒及先系孫錄 已有狀碣之詳 故特擧其本末大體 俾表墓左如此云上章敦牂臨月除夕 完山崔秉心撰 "而"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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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章 精毅平生實踐形 古家文獻不虛名百年歸後多餘慶 應使蕞蘭萬世榮高興 柳挺一萬疊逢壺毓氣靈 碩人存沒摠由靈可憐石佛一坏土 不埯先生精毅靈高興 柳興善惟一惟精强且毅 心常顧諟篤言行木里間雲高士處 不求聞達自含章光山 金永憲溫溫德性是天眞 行蹟何斯孝且仁手澤存書難讀子 心懷著筆易知人百世高風山水綠 一生固節柏松新曾年落在塵間士 去作今朝上帝臣瑞興 金在鉉人間行樂七旬餘 絃絶琴床淚滿裾風尙寬和公自若 躬修恭儉孰能如裕後克戒文學業 奉先僻置義田廬天堂或問平生事 世債了來莫過余竹山 安鳳輝伎心炳德老於是 晩歲令交上友疇慕得前賢能賦恕 受藏遺訓幸齊修年將大耋云阿攞 行聞一鄕合佼婁忍挩白箋臨紫界 薤歌疎雨暮山陬平康 蔡東夏惟公單訣毅而精 鑽仰臼山期畢生老且嗜書因體泰 貧猶樂道卽心平混中誰識全瑜美 寒後方看古栢貞當日補仁吾敢負 不辭執弗引前程然無憾歸仙路白 雲歸今成乎古歸同門後學 平康 蔡東建40)天步艱難道理窮41) 又喪南國毅齋翁閑聖淑民功未就 遽然齎志黃壤中同門後學 耽羅 高東是師生重誼可相同42) 聞訃當時恨不窮處世無關榮辱事 居家有遺學行風非徒德業傳孫後 自是衣冠守我東一曲哀詞先痛哭 蒼凉遠樹夕暉紅金海 金鍾炳憶昔追陪杖屨遊 鷄山空自白雲留飄然仙敍歸公道 痛矣遐齡感海篈蘭禧蕙情蒙蔭地 金昆玉或繼箕裘靈輀旣駕薤歌訣 往跡悽凉落月秋43)全州 李起胤十室從容穆尙村 鄕隣宗族吊靈魂庭學應無墻面立 家齊曾以道心存壽過古稀仁可必 躬行今是德何論吾東儒業誰能繼 愁雲慘月寂斯門驪陽 陳榮錫齋高精穀隱名聲 訓誥淳淳每有情仁壽延長天定數 道源遠達世眞淸悲雲散合牛眼處 爽魄降昇鶴駕城追憶從師如昨日 輀歌一曲各幽明金海 金秉斗賢士吾鄕有一人 終無好惡善持身簡寬處世宜惇族 誠敬根天克孝親年至八旬仁必壽 心存三樂德爲隣薤露南山松柏下 風悲雲慘淚沾巾族姪 廷基非仁莫壽壽應仁 今日乃知享福人蹤跡疑隨蓬海棹 靈魂必伴赤松隣誘掖盡心誠敦族 送終竭力克思親一幅丹旌歸去路 後生孰不淚盈巾族姪 彩基精毅先生毓海東 獨存今日儒家風心靈常守公明上 事業不離道理中衆孫克肖能承祖 三子惟賢了債翁疑難問答從何受 却使後生泣不窮族姪 碩基蓬海神靈降此仁 生來率性自天眞持心堅固成儒業 處世安間種德隣凄音切切寒琴曲 和氣瀜瀜寶樹春邈矣儀容今永訣 斜陽故路淚沾巾族叔 東述自天降矣亦順天 遐福尤稱八耋年胎厥嘉猷安素履 受其遺訓保靑氈龜頭靈跡雲林下 鶴背仙緣玉宇邊寶樹香蘭永訣路 護從孰不轉澘然族姪 順基忽聞音訃覺斯眞 八十光陰玉洞春明訓家庭書月郞 處仁鄕里士風新功名可惜靑年日 公道其何白髮辰蒼翠森松先壠下 輀歌數曲淚沾巾族姪 坤基精毅攸齋有是賢 安知虎逝遇今年賓筵讓揖儀文備 丈席据衣道鉢傳茁蘭庭下長留馥 鳴瑟堂中持拂絃後生從比誰承誨 感望泉臺淚自漣族姪 賢基白髮平安八十翁 終身不在是非中繞院菊松君子趣 滿庭詩禮古家風萬死常存心穀直 一生何患運窮通爲公今日誰無涕 雲不靈東出祖東族姪 灒基堂堂事業學先賢 德冠鄕隣性本天頂針敎訓終難繼 薤露斜陽涕淚漣族弟 炳梓先生文與德 曾聞海中州宦榮已斷絶 經術老無休能繼先人跡 不懈後學求一夕謦咳遠 木中春色幽千里承訃晩 入門餘恨悠族孫 邦宇公之在世七十七歲 其受氣也 固是厚 其持養 亦不苟 中身以後 親有道存乎中者可謂醇 如著於外者 亦見燦然 此所以壽躋隆耋 又爲鄕黨之所稱頌 天以淸貧 享其一生 而庸玉其成 又錫以嘉子秀孫 不匱其後 玄宰之厚 於公異乎人者 遠矣 嗚呼 吾於公 非特族誼之親 其受薰炙 亦多 敢述數行 以勖引紼族孫 鍾貴可惜文章一代師 忽聞襄禮使人悲孤魂瀛海雲歸處 往跡禴齋月上時子姪滿堂傳後事 圖書掛壁遠前期丹旌遙指泉臺路 涕淚漣漣日影遲族孫 鍾澤憶昔先生尙德仁 應知仙窟降情神寬心鍾地能敦族 眞性率天克孝親餘壽終敎賢閤享 遺訓盡屬渾家陳如斯處世如斯逝 寶樹庭前萬歲春靑松 沈宜奎天奪毅翁道益窮 殆如昏夜老須逢身任繼開功未遂 空齎遺恨九原中族孫 仁洙聞道平生性率眞 艮門高足乃如人精徵經旨須深頤 毅訥文辭庶近仁床瑟偕嗚期百年 庭蘭交翠帶三春村閭敎訓鄕黨譽 追慕當年若見親耽津 安東觀純古匪今精毅翁 惟中執得一心公仁從實地開安宅 孝是根天養美風胡爾奪斯君子速 飄然遊彼帝鄕同後生何處尋紗帳 哀淚春阡恨未窮同門後學 商山 金秉植 이 만사의 내용에도 수정 흔적이 많다. 추가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정서본을 보면 "難"과 "道" 사이에 "吾"를 넣으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면 글자의 수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文脈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서본을 보면 "師生重誼可"에 대해 "刪"이라는 표식이 있다. 지우라는 의미일텐데 그러면 글자 수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지우지 않았다. 이 만사에 대해 "刪"이라는 표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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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精毅齋遺稿 有感 漢植嘗謂 爲詩與爲文 皆在知要而務實 何如矣 今讀精毅齋李先生遺稿 誠所謂知要而務實者也 先生以忠厚慷慨之資 濟仁義道德之學 發於詩 著於文者 多愛國憂道之語 若使後之人讀此稿而有所感發與起焉則 有功於斯文 世敎者 豈尠少也哉 於是乎 書以寓景仰之思云爾同門後學 全州 崔漢植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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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記 精毅齋李處士實記44)洛婺遠而吾道東 栗翁 講明性理之學 尤翁 闡明麟經大義 艮齋田先生 繼栗尤講學明義於旺嶝繼華之間 從學之士 千百其多 而飮河之腹 各充洪鍾之鳴 隨叩其充足 大叩者 處士李公精毅齋 其一也 余方爲世矢的 抱經待盡於扶風山下 公胤時澤 過余曰 先考講修之德之行 莫不散在於族姪 陽山鍾坤所撰行錄45) 後滄金友澤述所撰行狀 而遠齋李公爲之46)撰碣銘 欽齋崔丈撰墓表 晦峯高公述墓誌 然余素乏記性 且才經喪威 十忘八九 不得盡載 便作千古之恨吾言之予記之 作實記一通 俾後裔冀有參考 余辭以不敢 督之不已 烏敢終辭 公諱驥魯 字德夫 其先瀛州47)人 以勝國文憲公諱敬祖爲始祖 本朝執義諱伯瞻 光廟改玉 棄官自靖48) 諱克守號小心齋 師事尤翁 學識著名 是中葉顯祖 諱崇 諱鎭燁 高與曾祖 諱萬綠 號桐塢 以孝命旌 考諱東益 號直齋 有至行著于世 妣扶寧金奉珏女 有四德譽 哲廟辛亥五月三日 擧公于扶安郡乾先面木上里 生而顔如白玉 聲若洪鍾 脩幹豊額 眼爍背直 端重雅飭 異凡兒 稍長 就三從叔山塢公東顯學 深寬寡黙 書籍之外 舞他嗜好 公深許之 復就山塢胤南岡公泰魯學 公素愛質美性敏 誘掖 激勵不已 文義日就 辭章富瞻 有欲罷不能之微義49) 性孝根天 事無大小 必先意承順 有不安節 煎藥煉粥 必身親任 彈力竭誠 而不委婢僕 沐浴拜廟 以祈永年 與二兄 友悌篤至 凡有異味 不進則雖小50) 不先入口 非有外事 日侍坐子舍 或講磨道理 或討論古今家國興亡俗尙美惡 或誦諷經子書數篇 以與起向善懲惡之心 丙寅 遭內艱 躃踊哭泣 襲歛51)饋奠 一遵禮制 三年食素 柴毁骨立 過祥廬墓 終不服闇 戊子 丁外憂時 値大無 勢且艱難 哀慼雖有餘 送終之禮 未免儉略 而以是爲終身恨 至老衰 鮮御酒肉 凡當忌辰 沐浴遷坐 必致如在之誠 考妣墓 曾在百里之地 恐他日省埽之不虔 移于先塋下 日必52)拜省 不以雨雪老衰廢 設私塾 敎族子鄕秀 不問敏鈍 因其村而誠心導率 以爲己任而不憚勞苦 乙已 艮翁痛宗國淪喪 華夏改顔 將乘桴入西 溟駕暫住蓬萊山下 遂具摯贄53) 納拜以爲依歸 且正所學 先生憂厚善有餘 而明健不足 僅守氣質之偏而未能進於義理之正也 以精毅 名其講學之室 蓋人纔有一毫鹿疏之心 便察理未明 故要精密 纔有一毫懦弱底心便守道未確 故要剛毅 是乃嚴師敎人之過慮也 公以爲余 自早年不知有爲己之學 荏苒蹉過 晩而從學 恐心鹿力懦 不能硏幾而致極 擔重而致遠 遂劂精毅 揭壁上 日坐其下 時時舊勵曰 聖賢敎人 雖千言萬語 其用功54) 必自明 善誠身始而其要在精毅 余雖老昏 刻若做去 可入聖門 又曰 吾年多精短 不宜涉躐群書 只宜從切要處下手 而切要者 其論語乎 遂將論語一部 尊閣丌上 日常愛讀首尾二十篇 如誦己言 而惟於仁說 益致意焉 蓋伊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故耳 於是集合孔孟言仁諸說 合爲一篇 名曰 洙泗言仁錄 使讀者知所自究而不事紛爭 蓋倣南軒舊轍而仍以爲名者也 或疑聖賢言仁處 固是仁 而其餘許多說話 莫非仁則 今此之錄 不其近於擧一而廢百耶 曰子之疑 誠然然 仁有體用而做工當自 切要處 始顧此 老昏與其泛及餘說而無得 不若專究切要處有得之爲愈也 故有是錄 然使學者 求仁止於此而已 而不復致博於其餘則 未免擧一廢百之累 而非吾所集之意也 自宗國運否 外夷憑陵 揭寒後扁其堂 以寓微意 卽夫子所謂 歲寒後凋之義 而寒松老栢 未嘗摧折於大冬酷雪者 有似乎 君子之不變 素履55)於患亂顚沛之中 故取之列書聖賢格言至論 附于座右 以爲警省之資 作砌庭除 列植群芳 以爲玩意適情之資 卽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 嫉世俗謀利之刻酷 憫殘民保生之艱難 每對老少 擧仁義道德之說 反覆曉諭 卽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 常戒諸子曰 人之處世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當躋古賢堂室 家甚貧窶 不許家人借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不若守吾本分而死 衣服飮食 先須節儉 量入以爲出 或絶火至屢 頓堅坐看書 人不見其飢容 性賦眞率 不事邊幅 平居喜怒不形56) 無疾言遽色 不問親疎貴賤 接之以和顔有語 及時政得失人物長短者 嘿無酬答 至若尊攘衛闢之辨 必一刀兩殷 而少不容貸 且其學問思辨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小 而文則不加藻餙 精簡雅直 有上古之味 詩則 隨其感觸而發者 皆愛國憂道忠憤惻恒之辭 而或慘而爲悲風凄雨 或舒而爲春花秋月 有離騷之味 其亦衰世之意歟 丙寅臘月 示憊 翌年正月望 潻祟命 辨喪具 念五日夜半 呼家人 問曰 今日 何日 曰 二十五日戌時 曰 吾命 休矣 屛婦人 去舊衣 著新衣 進藥水悠然而逝 距其生七十有七 葬于本郡下西面書堂洞先塋面癸57)原 從遺命也 前配義城金璜載女 早卒無育 繼配高興柳容58)奎女 克配君子 育三男三女 時澤 時寬 時{金+憲} 過房男也 適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 延安李東寧 女也 鍾珍 鍾熺 元鍾 長房出 鍾奎 平康蔡奎鎬 水原金絅達妻 次房男女 鍾培 鍾玹 祥 鍾黙 嫁善山金東吉者 過房男女 升59)洛 臻洛 宗60)洛 金婿出啓錄 薜婿出 嗚呼 公以淳古淸厚之資 有外柔內剛之質 以闇然自修之工 兼到老彌篤之誠 本之以孝悌 補之以經史 淳古而淸厚 故每日淸晨 盥櫛衣冠 歛容端坐 對書潛玩 威儀棣棣 望之自有可近 不可犯之思 外柔而內剛 故接人以和顔 而無疾言遽色 然至若闢異端攘夷狄斥邪 說明辨痛 絶不遺餘力 闇然自修 故一部論語 如誦己言 而辨論文義 如河決竹破 而無餘蘊然 至若著述 不屑屑於發揮 至老而彌篤 故早襲庭訓 晩師艮翁 以誠正修治 迢凡做聖爲自期 而不知老之衰焉 本之以61)孝悌 故養生以敬 而定省溫凊 靡不用極 而志體俱養 敬如嚴父 保如幼兒 而怡怡如也 補之以經史 故學而助其行 行而驗其學 行合體經言 輒證書而著於咳唾之餘者 有數十篇 其論敬義 兩進曰 內而立心 正而直之 然後外而制事 敏而方之 此所謂敬以直內義 以方外也 是乃終身事業 非一朝一夕而可到 論仁曰 仁 是人心之全德 純然天理 而無一毫人欲之雜者也 爲仁而至無一息間斷 無一物不存兼該 萬善而眼前道理 無非這氣 脈則聖矣 言本然性曰 性是天命 而卽心之理仁義禮智信是也 言氣質性曰 性本純粹至善而未嘗有惡 然但爲氣稟所拘 物欲所蔽則 有時而不善 然惟其本體之善 亦不改頭幻面 故君子學問思辨 明其固有之善 而變革其氣稟物欲則 可復其初 釋心曰 心卽天之所以與我而者 我得以具衆理應萬事者也 又曰 心之爲物 最虛最靈 神明不測 而常爲一身之主 提撕萬事之綱 不可頃刻而不存 然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殼之外則 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眄之間 自不覺其身之所在 故孟子有操存求放之訓 學者 必以敬爲主 講究主一無適 整齊嚴肅之義 收歛放失惺惺昏昩之要 革舊染 去拘蔽則 其心 庶幾至善 論時義出處曰 夫子曰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而篤信好學 守死善道 若吾輩者 只是一介讀書士 而至於撥亂救世 非惟才力不足 亦勢無所乘 只有忍痛舍寃 抱經林下 以身殉道而已 詩多於文 而令人讀之向善懲惡之義 油然而生 自不覺消融其汙濁之念 脫却其塵累之態 入於間靜淸高之域 君子不屑屑之敎 其如斯夫 艮翁所許 父子讀書 書聲盈屋 世務不到 自有眞趣 不覺神往 遠齋李公62)所謂 襟懷淡間 志尙邃古 資以經籍 而繹其實際 晩師艮翁 而正其趨向 菀然爲儒門宿德 淡淡乎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晦養見畸於世 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 自戢淵冰之趣 非淺劣者 所測 晦峯高公所謂 身任經籍心不解63) 開蒙峨冠博帶 實古人之風儀 簡言質行 非世人之儔擬 欽齋崔丈所謂 素性眞率 不飾邊幅 人無親疎 接以和顔 然有不正者 疎斥之不容 金後滄所謂 淳古淸厚 外柔內剛 有闇然自修 到老罙篤之工 李陽山所謂 志尙高邁 講學有序 律己有法 出言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有補於斯文 世道大矣者 皆實際語而不阿其所私也 故並書之序次如右 使其64)子孫門人 知希賢希聖 必自公言行 始焉歲閼逢涒灘重坤興龍節 耽羅 高東是 謹撰 이 실기는 원래 精毅齋遺稿의 정서본에 있던 글이 아니었다. 별도로 있던 것을, 정의재유고의 정서본이 완성된 후 이를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실기는 당연히 정의재유고에 들어와야 했다. 또 당초에는 그럴 계획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정서 과정에서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이를 알고 추가로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家狀"으로 썼다가 이를 "行錄"으로 고친 흔적이 있다. "之"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원래는 "高阜"로 썼지만 정서본이 완성된 후 "瀛州"로 고친 흔적이 있다. "棄官"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義"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雖小"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歛"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必"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贄"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功"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不形"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子"로 썼다가 지운 후 다시 쓴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癸"와 "子"가 모두 나오고 있는 셈이다. "煥"으로 썼던 것을 정서본이 완성된 후에 고친 것이다. "鼎"을 고쳐 쓴 것이다. "元"을 고쳐 쓴 것이다. "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李公"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經籍心不解"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其"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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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十九日庚辰 同門李憙璡 謹以脯果 告于精毅齋李公靈筵 嗚呼 公之聲音絶於耳 儀形邈乎目 歲倏忽其一周 日月若是其疾促 余寄在于斯世 誰與談討 誰與遊息 竊惟公淡淡乎不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益密晦養 見踦於世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自戢 淵冰之趣味 非淺劣者所測 今旣與形而俱化 何處覿其彷彿 公雖無意於塵寰 其奈世道之岌岌 悶余獨抱殷憂 助玄宰急此陽復 告此衷丹 靈其昭格 嗚呼 尙饗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二十四日乙酉 族孫鍾坤 敢昭告于精毅齋處士象生之靈筵曰 嗚呼 人之生也 有爲邦國之棟樑者 有爲士林之領袖者 有爲一門之矜式者 隨其成就之高下 有稱道之優劣焉 故人之死也 有邦國之不幸者 有士林之愛惜者 有一門之慟歎者 嗟 吾先生 德行學識 能承六世之文獻 其於承先裕後之功 實爲一門之矜式 就正有道 守死善道 其於衛正闢邪之功 實有辭於士林 假使試用於世則 其於樹風立俗之功 或有補於邦國矣 然士之用行舍藏 有時焉 有命焉 豈以爵祿之不及 有損益於先生哉 况且享年八耋 是其壽 仁之一驗 而爵祿 蓋非亂邦之所安也則 今於先生之歿 復有何憾 然在後生 不無遺憾 鍾坤受學于門下者 十餘年矣 一無笞楚之施 亦無叱怒之責 諄諄然敎導 惓惓然開導 以若樗櫟之不材 不能成器 是爲入髓之所恨 以家學之不墜 丁寧囑託 至於臨終 猶不已 而以若滅裂之淺見 不能繼業 亦爲刻骨之攸憾 屬纊如昨 祥朞在明 聲容永隔 幽明乃分 是爲臨時之所感 謹具酒果 敢告衷情 庶幾格思 鑑此衷情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二十三日戊申 族孫鍾坤 謹以酒果 再拜 哭告于精毅齋先生之靈筵曰 嗚呼 養子而後 知父母劬勞之恩 敎人而後 知師傅敎導之功 小子 以十策一步之質 九歲始受訓于門下 至于十年之久 諄諄然眷眷然敎誘 未嘗有笞楚之嚴叱咤之誚 於今 始覺涵養之有素 敎導之有術也 小子 雖不能盡弟子之職 堪承敎導之萬一 然於其化導之妙 陶鑄之恩 敢不服膺而慕仰乎 吾家 以小心齋以來 世襲文獻 爲人稱藉 而先生常恨其不能繼 然以若先生之學而有此者 以其謙虛自處而然也 以賤見思之 先生志尙之高邁 講學之有序 律己之有法 出言之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其有功於斯文 有補於世道者 豈可謂承先業而已哉 實有辭於後日矣 但先生歿後 靑氈舊業 有誰而復能紹述耶 平日屢託於不肖 然志不尙而和於流俗 學不進而畫於刻圈 况賤齒五旬 百病交侵 未知亦將以模樣度了一生 而受他日泉臺之責否 是爲小子區區之恨 庶其黙佑 使此賤疾 快爲蘚完 使之永年 則學之進不進 業之繼不繼 惟在小子 是爲區區之望 庶幾遂願否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九日甲午 同門晩生平康蔡東建 謹具薄醪 蕪詞哭告于精毅齋李公象設之筵曰 嗚呼 愷悌君子 淳古處士 近仁流亞 致道淸髓 天性厚善 師門稱美65) 精毅命扁 深厥意旨66) 精爲見道 毅是進德 慥慥白首 老而好學67) 遠老接隣 輔益親切 不知年數 已到八耋 頤養有素 需用愈密68) 考經依傳 會萃仁說69) 意在精耗 惟從要約 又觀居庭 孝友爲律70) 蒔花培草 趣味雅潔 痛彼戎世71) 綱常斁絶72) 寒後揭隅 特勵士節73) 信乎我公 允和不流 後人考德 由斯可求 如我顓蒙74) 猶知好賢 况在同門 遊從多年 謬被德愛75) 規箴殷宣 風潮浪裏 庶幾保全76) 或誦曩哲 又示言志 顧甚顓蒙 豈無勉圖 心期千載 脚立遠途 公今厭世77) 翛然乘雲 拜師淸都 可續誾誾78) 吾門紛競79) 冥佑是勤80) 我惟失誨 悵私罔云 誠通神明 靈或冥相 又望龥帝 挽回道喪 駒光不留 奄周二朞 撤象靡遐81) 悵私岡云82) 數文登哭 庶格玆尊83) 意雖無窮 辭不能施 嗚呼哀哉 尙饗 "師稱珍重"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夙夜祗奉"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常悔晩學"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體康用適"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編稡仁說"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孝友家法"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痛彼世亂"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綱墜怪作"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特勵堅節"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如我傝{宂+辱}"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幸蒙見愛"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規箴"부터 "보전"까지는 원 문장을 지우고 새로 쓴 흔적이 있다. "公厭濁世"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相樂無垠"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門戶紛競"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亦論慇懃"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撤床靡遐"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悲復何涯"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厄"을 "尊"을 고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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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문경공(文景公) 단갈(短碣) 설립 금전내역서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庚申 四月 日 庚申 四月 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0년 4월에 문경공(文景公)의 단갈(短碣)을 세우는데 소요되는 예산을 분배한 금전내역서 문경공(文景公)은 본관이 성주이며,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1361~1431)을 가리킨다. 문경공의 묘소 아래의 옛 표석이 박락되고 부식된 것을 다시 세우는데 문중의 종인에게 분배된 금전의 액수를 성명과 함께 기록하였다. 비석은 묘소 앞에 세우는 작은 비갈로 보인다. 이 내역에는 이교섭(李敎燮)을 비롯하여 모두 48명의 성명이 적혀있으며, 성명 아래에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금액이 기재되어 있다. 종길 아래에는 3명의 이름과 액수가 추기되었고, 두 사람의 이름 아래에는 돈 대신에 주식가(酒食價), 돈을 받아간 사실이 적혀있다. 끝에는 총액이 기재되어 있는데, 곧 65원 20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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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김방식(金邦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庚午三月二十日 弟 金邦植 庚午三月二十日 金邦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0년 3월 20일에 김방식(金邦植)이 질부가 난산을 하여 아이를 잃었다는 것과 동생이 직접 보려고 출발했다는 내용으로 보낸 간찰(簡札) 1930년 3월 20일에 제(弟) 김방식(金邦植)이 수당(壽堂)의 기력과 형제들과 아드님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큰 상설(霜雪)과 큰 전쟁이 두렵다고 하였다. 질부가 난산을 하여 아이를 잃었지만 산모가 출산 당일 그 광경을 보지 않아 다행인데, 걱정되고 가엾은 마음 그지없다. 인간은 참으로 고해(苦海)를 산다. 다른 아이는 또 종기로 괴로워하니, 자신의 집에 3월에 재앙이 다 모였다. 동생이 직접 가서 보려고 할 즈음에 차도가 있고 염려가 없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재명일에 마침내 출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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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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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 김창집(金昌集)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卯十月十二日 金昌集 乙卯十月十二日 金昌集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675년(숙종1) 10월 12일에 김창집(金昌集)이 상척(喪戚)을 거듭 만난 것에 놀라워하고, 자신도 초상으로 애통해하며 질병을 앓고 있으며, 선조의 허장사(虛葬事)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675년(숙종1) 10월 12일에 기복인(朞服人) 김창집(金昌集)이 수신자가 상척(喪戚)을 거듭 만났다는 것을 알고 놀랍기 그지없다고 하고, 자신도 초상으로 애통해하며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하고, 선조의 허장사(虛葬事, 시신 대신 유물로 장사를 치름)를 시작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자신도 겨우 몸을 보존하나 질병이 낫지 않고 이어져 오래도록 걱정스럽고 복잡함을 일삼고 있으니 어찌 하느냐고 하고, 모든 병의 곡절이 상참 가운데서 생겨 이로써 염려됨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마침 선조의 허장사는 올라왔다가 수일 후에 돌아와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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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이한남(李漢南)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七日 李漢南 再拜 李敎永 癸…七日 李漢南 李敎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40년 10월 7일에 이한남(李漢南)이 이교영(李敎永)에게 족대부의 상에 위로의 말과 함께 안장할 장소의 논의 내용을 전하는 간찰(簡札) 1940년 10월 7일에 나주에 사는 이한남(李漢南)이 정읍에 사는 족숙 이교영(李敎永)에게 보내는 답서로, 족대부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의 말과 안장할 장소에 대해 논의된 상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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