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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金公行狀 公諱成燁 字汝中 金氏 金海人也人 我朝有諱錬 官至司馬郎 是爲中祖 三傳 有諱嗣先主簿 生諱克裕監察 生諱弘澤 生諱俊車有德行文名贈掌樂院正 卽公十世祖也 高祖諱京澤 曾祖諱鍚順 祖諱亨泰 考諱相喆有至行贈通政大夫 妣淑夫人密陽朴京三女 哲廟戊申九月九日 舉公于扶安縣山内面茅項里第 資質惇厚 於孝尤篤 躬耕養親 晨昏之禮 温凊之節 皆出於愛敬之誠 及遭内外艱 哀慽踰節 墓在家近 朝夕哭拜 風雨不廢 服闋之後 亦每日一省 當時章甫 以孝薦干道 治家以勤儉 御衆以寬嚴 凡言動多出於真率 而不爲矯餙 常以子姪學業未成爲憂 雖處貧約 裏糧擇師 敎導不倦 丙戌六月二十二日卒 享四年十 高宗庚寅 贈嘉善大夫 墓古阜郡聲浦面琴洞後麓負庚原 配貞夫人海州崔炳泰女 已酉生 丙申卒 墓扶安縣乾先面院洞前麓負已原 生三男一女 奎元 奎澤 奎三 男也 晉州姜素玄 壻也 奎元娶平山申仁均女 生男 允鎬 奎澤 娶綾城朱京一女 奎三 娶竹山安國汝女 曾玄以下 不盡記 噫 公以根天之孝 承襲詩禮 安於所行 又資師友輔益 蔚然爲鄕隣儀表 公可謂不待文王而興者也 胤子奎元 克承庭訓 生事死葬之節 誠心行之 多傾家貲 侈墓以石 將求其樹阡之文 抱家狀一 示余曰 尊丈 今有一言則 可爲後日立言君子之攸據 余不敢以不文辭 謹敍其事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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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淵柳公行狀 不侫有畏友 牟陽處士柳公 諱觀雨 號靑淵 即月窻公胤子也 天性惇厚 氣宇峭直 言動不苟合於時好 處貧約 好書籍 孝于親 友于弟 授生徒 盡已之所知 待賓客 稱家之有無 奉先祀務盡誠 潔理生事 尙勤儉 擇里而處 惟好仁風 擇地而蹈 不近城市 晚年構一亭于一源二流間 額之以雙流 此非惟蹈襲其祖先臨澗合澗之遺德也 亦能善繼善述其親志也 生癸丑 卒戊申 享年五十六 世錄詳見月窻公行狀 不復加疊 余過柳氏譜所 公之弟晉雨甫 對余泣言其伯氏之德之行曰 今剞劂告竣 而吾舍伯之實行 闕焉 是余之咎 幸吾子有一言則 庶乎不朽 而後死者之責 於是乎塞焉 余不敢以不文辭 畧敍其萬一 以俟日後立言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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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3월 26일 첩정(牒呈) 戊寅三月二十六日 牒呈 053 정포만호(井浦萬戶) 겸 삼도해운판관(兼三道海運判官) 정연(鄭?)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첩정(牒呈) : 조전사목(漕轉事目)에 조선(漕船)을 잘 호송할 것.무인년 4월 17일 도착.정포만호(井浦萬戶) 겸 삼도해운판관(兼三道海運判官) 정연(鄭?)이 호송하는 일 때문에 보냅니다."전라도 영산창(榮山倉)으로 빌려서 내려보낸 원래의 조선(漕船) 5척에, 영산창에 소속된 광주(光州) 등 5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균등하게 나누어 싣고, 오는 4월 2일에 조선을 출발시켜 한강(漢江)으로 올라갑니다. 조선이 경유하는 연로(沿路)의 각 고을과 진포(鎭浦)는 해당 조선을, 조전사목(漕轉事目)에 따라 수군(水軍)의 병선(兵船)을 정돈하여 각자 경내 바닷길의 상태가 변화하는 곳에서 차례차례 폐단 없이 호송하고, 도착 확인증을 받아 도(道)에 올려 조선이 침몰하는 사태가 없게 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귀도(貴道)에서도 똑같이 신칙하여 시행해주시기 바랍니다."무인년 3월 26일. 차사원(差使員) 정포만호(井浦萬戶).▶ 어휘 해설 ◀❶ 조선(漕船) :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를 바닷길로 운송할 때 사용하던 선박을 가리키며,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하였다. 전세는 11월 1일부터 거두기 시작해서 다음 해 1월까지 완료한 뒤 서울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는데, 전세를 운송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육로(陸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서울과의 거리가 가까운 경기와 강원도 일부는 전세를 육로로 운송하여 납부하였고, 서울과의 거리가 멀더리도 전세로 거둔 곡식을 운송하기 편리하도록 돈이나 베로 바꾸어준 경우에도 육로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다. 둘째는 수로(水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수로는 서울의 한강(漢江)으로 연결된 강원도와 충청도의 물길을 가리킨다. 이처럼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전세를 운반하기 위해 원주(原州)의 흥원창(興元倉), 춘천(春川)의 소양강창(昭陽江倉), 충주(忠州)의 가흥창(可興倉)이 설치되었고, 이곳 창고에서 참선(站船)에 전세를 실어 서울로 운송하였다. 셋째는 해로(海路)로 운송하는 방법이다. 육로나 수로로 전세를 운송할 수 없는 삼남(三南) 지역과 황해도가 이 방법을 이용하였는데, 이때 이용한 선박이 조선이었다. 조선으로 전세를 운송하기 위해 바닷가나 바다로 연결된 강가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였다.『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조전(漕轉)〉에 의하면, 충청도에는 아산(牙山)의 공세곶창[貢稅串倉], 전라도에는 함열(咸悅)의 덕성창(德城倉), 영광(靈光)의 법성포창(法聖浦倉), 나주(羅州)의 영산창(榮山倉), 황해도에는 배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을 설치하였다. 그뒤 나주의 영산창, 강음의 조읍포창,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은 폐지되고, 함열의 덕성창은 성당창(聖堂倉)으로 바뀌었으며, 옥구(沃溝)의 군산창(郡山倉)이 새로 설치되었다. 경상도는 지토선(地土船)으로 전세를 운송하다가 영조 36년(1760)에 조엄(趙曮)의 건의에 따라 창원(昌原)의 마산창(馬山倉), 진주(晉州)의 가산창(駕山倉), 밀양(密陽)의 삼랑창(三浪倉)을 설치하였다. 조창에는 일정한 수의 조선과 조군(漕軍)을 소속시켰다. 『속대전(續大典)』 「호전」 〈조전〉에 의하면, 아산의 공세곶창에는 조선 15척과 조군 720명, 함열의 성당창에는 조선 11척과 조군 528명, 영광의 법성포창에는 조선 28척과 조군 1344명, 옥구의 군산창에는 조선 17척과 조군 816명을 두었고, 『대전통편(大典通編)』 「호전」 〈조전〉에 의하면, 창원의 마산창에는 20척, 진주의 가산창에는 20척, 밀양의 삼랑창에는 15척의 조선을 각각 두었다.조창에서 전세를 실은 조선은 압령차사원(押領差使員) 또는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의 지휘를 받아 해로로 운항하였으며, 중간 지점인 충청도의 원산(元山)과 안흥(安興)에서 점고를 받은 뒤 서울의 한강 가에 설치된 광흥창(廣興倉) 등의 창고로 운송하여 납부하였다. 조선이 지나가는 바닷가 고을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에게는 조선의 호송 책임을 부여하여, 물길을 잘 아는 사람 두 세명씩을 각 조선마다 태워서 인도하게 하고 풀등이 있는 곳에는 표시를 하여 부딪치지 않게 하였다. 조선이 운항 중에 침몰되면 해당 지역의 수령은 즉시 직접 달려가서 건져냈고, 건져내지 못한 곡물은 해당 조선의 감관(監官), 색리(色吏), 사공(沙工), 격군(格軍)에게서 징수하였다.『경국대전』 「공전(工典)」 〈주거(舟車)〉에 의하면, 바다와 강으로 운항하는 선박을 각각 대선(大船), 중선(中船), 소선(小船)으로 나누고 5년 사용하면 수리하고 10년 사용하면 새로 제작하였다. 『속대전』 「호전」 〈조전〉에 의하면, 강으로 운항하는 수참선(水站船)은 7년이면 개삭하고 14년이면 새로 제작하였으며, 바다로 운항하는 조운선은 10년이면 개삭하고 20년이면 새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대전통편』 「호전」 〈조전〉에서는 조운선에 대한 규정을 『경국대전』 「공전」 〈주거〉에 따라 5년이면 개삭하고 10년이면 새로 제작한다고 하였다.❷ 조전사목(漕轉事目) :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를 조선(漕船)에 실어 서울로 운반하는 일과 관련된 세부 규정을 가리킨다. 조전(漕轉)은 각 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를 조선에 싣고서 바다와 서울의 한강을 거쳐 광흥창 등의 창고로 운반하는 것을 가리킨다. 조전을 위해 삼남의 각 도에는 조창을 설치하였다. 해운판관(海運判官) 또는 영운차사원 등이 조운선을 영솔하여 올라올 때에는 경유하는 지역의 수령과 변장이 조운선을 잘 인도하여 호송할 책임이 있었다. 사목(事目)은 특정 사안이나 제도에 대한 세부 규정을 가리키며, 절목(節目)과 혼용하였다.❸ 차사원(差使員) : 지방에서 서울로 물건을 가지고 올라가거나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차출된 관원을 가리킨다. 삼남의 전세를 운송하는 압령차사원 또는 영운차사원, 각 도마다 전문(箋文)을 모아서 가지고 올라가는 전문차사원(箋文差使員), 표류한 선박을 호송하기 위한 호송차사원(護送差使員), 국왕이 행차할 때 차출된 각무차사원(各務差使員) 등이 있다. 戊寅四月十七日到付.兼三道海運判官爲護送事."全羅道榮山倉借送元漕船五隻亦中, 倉屬光州等五邑田稅, 惠伊分載, 來四月初二日, 發船上江爲去乎. 所經沿路各官浦, 同漕船, 依事目, 軍兵船整齊, 各其境內變遷處, 次次無弊護送, 受到付上道, 俾無臭載之患事, 分付爲在果. 貴道以置, 亦爲一體申飭施行向事."戊寅三月二十六日. 差使員井浦萬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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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0월 13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十月十三日 關文 091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전문(箋文)은 5일 이전에 올려보내고, 동지(冬至)에 올릴 전문도 미리 준비하였다가 기일에 앞서 올려보낼 것.무인년 10월 19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오는 11월 7일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에 올리는 전문(箋文)을 5일에 봉진(封進)할 예정이니 일시에 보내기 위해서 그 이전에 위에 올려보내되, 11월 17일 동지(冬至)에 올릴 전문도 미리 준비하였다가 기일에 앞서 위에 올려보내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0월 13일. 戊寅十月十九日到付.兼巡察使爲知音事."來十一月初七日大殿誕日箋文乙, 初五日封進爲去乎, 一時輸送次, 以前上使爲乎矣, 十一月十七日冬至箋文乙良置, 豫爲措備, 前期上使向事."崇德三年十月十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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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11월 7일 전문(箋文) 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 箋文 09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전문(箋文): 인조의 탄신을 하례함.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 겸(兼) 교동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신(臣) 나덕헌(羅德憲)이153)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11월 7일 탄신(誕辰)을 맞아 삼가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 신 덕헌은154)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삼가 아룁니다. 양(陽)의 기운이 돌아오는 계절에 속하여155) 임금의 덕을 누리는 것에 부합하고, 탄생하신 날이 돌아와 새로운 책력(冊曆)을 반포하는 경사와 합치되니,156) 동물과 식물이 똑같이 기뻐하고 신하와 백성은 기쁨이 넘칩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홍색 찌지[紅籤]에 적었다.157)】 도덕(道德)이 있는 자손으로서 비교할 상대가 없는 무공(武功)을 세우시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세상을 구제하는 아름다운 시기를 만나 하늘을 본받아 복을 똑같이 누리시고, 광대하고 심원한 어진 소문을 드날려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합니다. 이에 탄생하신 계절에 이르러 창대한 상서로움을 뚜렷이 받으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이 재주 없는 사람으로서158) 경기의 진보(鎭堡)를 지키고 있는데, 영원히 귀감이 될 만한 글을 기록해서 바쳐야 하지만 당나라 신하와 같은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159) 참으로 만세를 부르며 송축하여 한(漢)나라 궁전에서 축원하던 마음을 멀리서나마 표현합니다.160) 신이 하늘 같은 성상을 바라보며 매우 감격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161) 삼가 전문을 올려 하례를 드립니다."숭덕 3년 11월 7일에 절충장군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 삼도통어사 신 나덕헌이162)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 恭遇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誕辰, 謹奉箋稱賀者. 臣德憲誠歡誠忭稽首稽首上言."伏以. 序屬雷復, 載符龍德之亨; 日回虹流, 聿叶鳳紀之慶, 歡均動植, 喜溢臣民. 恭惟主上殿下[紅籤], 有道湯孫, 無競武烈, 履開濟之嘉會, 憲天齊休; 騰廣淵之仁聲, 與民同樂. 爰屆誕彌之節, 顯膺昌熾之祥. 伏念臣猥以謏才, 叨守畿鎭, 錄千秋而獻鑑, 未效唐臣之藎忠; 信萬歲以呼嵩, 遙申漢殿之祈祝. 臣無任望天仰聖激切屛營之至. 謹奉箋稱賀以聞."崇德三年十一月初七日, 折衝將軍京畿水軍節度使兼喬桐都護府使三道統禦使臣羅德憲謹上箋.❶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❷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❸ 謏 : 저본에는 원문이 '謝'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❹ 激 : 저본에는 원문이 '謝'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 및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❺ 德憲 : 저본에는 원문이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別編)」 〈본조문자식(本朝文字式)〉 '진전식(進箋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양(陽)의 기운이 돌아오는 계절'은 동짓달인 11월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주역(周易)』의 괘(卦)를 12개월의 각 달과 연결시켰는데, 그중 동지가 든 11월은 복괘(復卦)에 해당하였다. 복괘는 상괘(上卦)가 곤괘(坤卦)이고 하괘(下卦)가 진괘(震卦)로, 6개의 효(爻) 중 맨 아래의 효만 양효(陽爻)이고 나머지 다섯 개의 효는 모두 음효(陰爻)이다. 복괘의 형상이 음(陰)의 기운이 극성한 가운데 양의 기운 하나가 아래에서 싹트는 것처럼 생겼으므로, 양의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짓달을 복괘로 표현했던 것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한 해의 시작을 12지 중 어느 달에 시작하느냐에 따라 3가지로 나뉘었다. 주(周)나라는 하늘을 상징하는 자월(子月 11월)에 시작하였고, 은(殷)나라는 땅을 상징하는 축월(丑月 12월)에 시작하였으며, 하(夏)나라는 사람을 상징하는 인월(寅月 1월)에 시작하였다. 공자(孔子)는 그중 사람을 위주로 하는 하나라의 책력(冊曆)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에는 양의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의 시작을 11월의 동짓날 자시 반(子時半)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동짓날에 책력을 만들어 바치면 국왕이 동문지보(同文之寶)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그 책력을 '동지력[冬至曆]'이라고 불렀다. 『論語』 「衛靈公」; 『諸家曆象集』 「曆法」 〈性理大全〉; 『星湖全集』 「答禹大來」 〈甲戌〉; 『東國歲時記』 「十一月」 〈冬至〉; 『海東竹枝』 「名節風俗」. 전문(箋文)의 문서 형식에 의하면 '주상전하(主上殿下)' 또는 '존호(尊號)+주상전하(主上殿下)'는 줄을 바꾸어서 적되, 홍색 찌지[紅籤]에 적어서 붙였다. 『典律通補』 「別編」 〈本朝文字式〉 '進箋式'; 이강욱, 『조선시대문서개론』 상-신민의 상달문서-, 은대사랑, 2021, 475~479쪽. 저본에는 원문 '謏' 1자가 '謝'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당(唐)나라의 재상 장구령(張九齡)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 고사에 따라 당(唐)나라의 신하들이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거울이 모든 사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임금도 충신과 간신을 잘 구분하라는 의미였다. 현종(玄宗) 때에도 천추절(千秋節)에 신하들이 모두 청동 거울을 바쳤으나, 당시의 재상 장구령만은 거울 대신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을 지어서 바쳤다. 『천추금감록』은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서 좋은 정치를 베풀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新唐書』 卷126 「張九齡列傳」.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무제가 화산(華山)에서 숭산(嵩山)에 이르러 제사를 지낼 때 이졸(吏卒)들이 모두 어디선가 세 차례 만세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호숭(呼嵩)'은 임금이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로 쓰였다. 『漢書』 卷6 「武帝紀」. 저본에는 원문 '激' 1자가 '謝'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 및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德憲' 2자가 '〇〇'으로 되어 있으나, 『전율통보』 「별편」 〈본조문자식〉 '진전식'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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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潭金公行狀 公諱鎭總 字允中 姓金 系出義城 鰲峰諱齊閔十一世孫 曾祖諱基益 祖諱鼎鉉 考諱璜載 性厚善慈惠 妣礪山宋祉锡女 有淑德懿範 以哲廟丙辰十一月九日 擧公于扶安禮洞里第 生而沉靜厚重 才十餘歲 言動多出眞率 而不爲矯餙 儼若成人 賦性至孝 善奉二親 丁内艱 不脫經帶 不入寢室 祭必前期 行素盡誠 先公夙嬰 難醫之疾數十年 公未嘗離側 左湯右丸 專心致之 常目醫書 竟得良劑 得復天和 終享康寧 後以老患 委席四五朔 公 晝宵侍湯 迎醫按脈 祭天祝齡 天年以終 搬擗哭踊 幾至沌絶 送終諸節 克遵家禮 旣葬 朝夕省掃 每及忌辰 號哭盡哀 終身思慕 平素無疾言遽色 務從純和 與二弟 極其友愛 不言人之過惡 不近人之鬪爭 見人之善則 若己有之而與之交密 見人之惡則 若將凂焉而漸與之疎遠 治家以勤儉 接人以和敬 敎子無傷恩 敦族無相猶 庚申九月二十八日終 享年六十五 葬于内禮洞後麓負艮之原 配扶寧金某女 生三男二女 噫 公少余五年 心志相爭 聲氣相合 幽堂忽閉 茫茫不見 顧此踽踽 孤影尤極 怊悵不忘其平生之言 日公之胤子日坤甫 來余曰 先考之德之行 鄉黨所知 不可無狀德之文 故求當世秉筆者之言則 不爲不少也 但其平日相知之深則 其在尊長乎 余曰 吾固與公誼重 不敢以不文辭 然但託非其人 恐誤大事 甫請尤勤 烏敢辭諸 余以姻誼識公也 五十餘年矣 甘旨温凊 極順其親 至於歿後 苟非其道 三年無改 如其道也 終身守之 如公之孝 正聖人所謂 吾無間言者也 若使後世之爲子弟者 知得公之懿行 庸爲柯則 勉勵修飾焉則 化安得不行 裕安得不美也哉 故撮其畧而書之 以竢夫立言君子更加栽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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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허국(許匊)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臘初二日 許匊 癸臘初二日 1933 許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3년 12월 2일에 허국(許匊)이 가천에 사는 수신자에게 안부를 전하고 말의 매매와 관련하여 답변한 간찰 1933년 12월 2일에 허국(許匊)이 가천(可川)에 사는 수신자가 보내준 간찰을 받고 쓴 답장이다. 수신자의 아버님을 비롯하여 집안이 두루 잘 지내고 있음을 알아 기쁜 마음을 전하고, 자신은 아들이 매번 가슴 통증으로 건강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하였다. 말은 상대방이 얘기한 대로 보내는데, 나이는 만 5살이고, 집에 훈련시킬 사람이 없어 본래의 재주가 개발되지 못하였고, 가격은 40원이라고 말하니 헤아려 처리해주고, 늦지 않게 답장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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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김재식(金宰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辰九月十五日 弟 金宰植 戊辰九月十五日 金宰植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8년 9월 15일에 김재식(金宰植)이 형의 본생당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며느리의 출산과 백모란에 대해 언급한 간찰(簡札) 근력이 무손하고 형의 안부와 형제들이 편안하시다니 위로가 되고 그립지만, 사람 마음이 천리(天理)를 판탕(板蕩)하게 하니 다만 소명(昭明)되면 하루도 못 되어 본생당의 병환은 회복될 것이지만 날마다 걱정이 된다. 자신은 며느리가 고통스러운 것이 차도가 있으나 당신의 편지를 보니 뿌리를 뽑지 않으면 생명에는 무관하지만 출산함에 큰 장애가 된다고 하니 매우 근심이 된다. 말씀하신 백모란을 일전에 몇 그루 나누어 심었는데 그 뿌리를 택해서 약을 해 며느리의 집에 들이고, 여러 해 산 것은 가는 것이 큰 것을 대신하는데 선택한 것이 부족하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편한 대로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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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행주기씨(幸州奇氏) 족보(族譜) 범례(凡例) 고문서-치부기록류-보첩류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행주기씨 족보(族譜) 편찬 과정에서 작성된 범례(凡例)와 수정을 요하는 부분에 대한 기록 범례와 병편재첩종(丙編再疊終)으로 구성되었으며, 범례는 모두 14조목이고, 족보의 연혁 및 기술 체계와 방식을 정리해 수록하였다. 그 다음에는 병편재첩종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족보 중 병편에 해당하는 책의 내용 중에서 수정을 요하는 부분을 적시한 것이다. 병편고(丙編考)는 제1판부터 2·3·15·16·18·20판의 수정 내용을 적었고, 계축신증(癸丑新增)은 제3·10·18판의 수정내용을 적었다. 예를 들어 병편 제15판의 경우에는 '세걸(世傑)은 봉사 서자이기 때문에 적녀의 위에 기록해야 한다. 무릇 여자는 서자의 아래에 있어 서녀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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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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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3년 김기중(金器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至月十九日 弟 金器中 可川 癸酉至月十九日 金器中 可川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106_001 1933년 11월 19일 김기중(金器中)이 혼례 일이 정해진 일에 하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답서 1933년 11월 19일 김기중(金器中)이 가천에 사는 성명 미상의 인물에게 궁벽한 곳에 서찰을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와 혼례 일이 정해진 일에 하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답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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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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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嘉慶十五年 庚午 十二月二十九日 金春白 前明文右明文放買〖賣〗事段 自己買得 累年耕〔耕〕是多如可 移賣此〖次〗 宝城文田面可川村前道里坪伏在外字畓四斗落只負數三作幷十七卜庫乙 價折錢文八十西二兩 依數捧上爲故〖遣〗 右人前 本文記幷 令令〖永永〗放賣爲去乎 日後子孫中 若有雜談是去乎 〔持〕以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幼學 金尙基 [着名]增〖證〗人 幼學 婿 安孝女 [着名]筆 幼學 婿 林日秀 [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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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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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乾隆四拾四年 己亥 元月十九日 金漢貴 前明文右明文放賣事段 矣身自起畓 累年耕食爲如可勢不得已 宝城積田面可川村前坪員水發破回伏在 外字畓三斗落只內中邊一斗落只捌夜味 川越邊麻田幷負數三束果 一斗落只負數六卜七束庫乙 價折錢文拾八兩以 依數捧上爲遣 右人前 本文記段 他田畓幷付 不得已許與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 如有雜談是去等 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宣到夏 [着名]訂人 林宗白 [着名]筆執 山人 □閑回 [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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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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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1년 박하천(朴夏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之六旬卄十八日 朴夏天 李敎成 辛之六旬卄十八日 朴夏天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1년 9월 18일에 생질 박하천(朴夏天)이 외삼촌 이교성에게 외조부 및 여러분의 안부와 아드님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물은 뒤, 의사를 소개해 주는 간찰(簡札) 1931년 9월 18일에 생질 박하천(朴夏天)이 외삼촌인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편지로, 외조부 및 여러분의 안부를 묻고, 아드님 병정(病情, 병세)을 치료하는 것이 어떠한지 물은 뒤, 정희원(鄭熙源)이라는 의사를 소개해 주는 내용이다. 광주읍(光州邑)에 사는 정희원이라는 의사가 침을 놓고 약을 쓰는 것이 뛰어난데, 비단 그의 공(功)을 외부에서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 공정(功程)을 보았기 때문에, 보성군에 살고 있는 외숙이 광주읍으로 와서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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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인순(李寅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正月初五日 李寅淳 乙丑正月初五日 李寅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5년 정월 5일에 이인순(李寅淳)이 서산 화판(花板)을 노원에서 정원으로 옮겨 봉안하는 일 등에 관한 내용으로 보낸 간찰 1925년 정월 5일에 족손 이인순(李寅淳)이 서산 화판(花板)을 노원에서 정원으로 옮겨 봉안하는 일은 가문의 계파와 관련된 사건이므로 문중의 족대부에게 재고를 요청하는 내용의 간찰이다. 새해에 여러분들이 잘 지내고 있고, 동네의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는지 묻고, 자신은 점점 노쇠한데 한 살 더 먹으니 오래 못 살겠지만, 다만 집안 식솔들에게 우환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서산사판(西山祀板)을 이행(移幸)하는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우리 파(派)가 불응하면 장차 기원(企原)에 이안(移安)할 것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더하여 노원이변(蘆原移邊)의 건, 백순(百淳)의 일, 분배금(分排金) 등 지금까지 상대방과 논의해 왔던 일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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