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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외재 김공 묘갈명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畏齋金公墓碣銘 공의 휘는 예길(禮吉), 자는 성택(聖宅), 호는 외재(畏齋)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김해(金海)에서 나왔으니, 바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 훈벌(勳閥)이 찬란하였다. 휘 서(湑)란 분이 계셨으니, 우리 태종(太宗) 때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지고, 백동사(白洞祠)에 배향되었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준손(駿孫)은 아우 휘 기손(驥孫), 일손(馹孫)과 더불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김씨삼주(金氏三珠)'라고 불렸는데,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대유(大有)를 낳았으니, 호가 삼족당(三足堂)이다. 기묘년(1519, 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는데, 소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보고 물러나 운문(雲門)의 우연(愚淵)에 은거하였으니, 바로 공의 9대조이다. 증조는 삼휘(三徽)로, 호가 취상당(翠相堂)이다.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조부는 덕항(德恒)으로 호가 매곡(梅谷)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은 술회(述會)로, 호가 죽와(竹窩)이고,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추층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참봉 중화(仲華)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 1월 15일에 금릉(金陵)의 삼인리(三仁里)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재기(才氣)가 영특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견문은 넓고 시문은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상변(常變), 길흉(吉凶), 절문(節文), 도수(度數)에 대해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깊이 분변하여 훤히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근의 사우들이 예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가서 물은 다음 결정하였다. 양친을 효도로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며 뜻을 받드는 일과 물질로 봉양하는 일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매우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형제 다섯 사람 모두 문장과 덕행이 있었고, 함께 단란하게 지냈다. 형과 아우가 날로 매진하여(며) 조용히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 온화한 기운이 넘쳤다. 심지어 친척이나 벗을 대할 적에도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으므로 향리에 어떤 사람이 혹시 잘못을 하면 번번이 "아무 공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존중 받았다.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15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손자 재환(在煥)이 귀하게 되자 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암천방(唵川坊) 황곡리(黃谷里) 당산(堂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치일(劉致一)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은직(殷直), 취직(就直), 응직(應直), 자직(宇直)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인대(鄭仁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재영(在瑛), 재호(在瑚), 재련(在璉), 재순(在珣)은 장남의 소생이고, 재달(在達), 재방(在邦), 재홍(在洪)은 차남의 소생이며, 재업(在業), 재선(在善), 재흠(在歆), 재민(在敏)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고, 재환(在煥)은 관직이 예조 참판으로 넷째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찬석(璨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연천의 고가요 燕川古家삼족당의 어진 후손이네. 三足賢孫효우로 가업을 이었고 孝友箕裘시례는 연원이 있네. 詩禮淵源황곡리의 산기슭에 黃谷之麓넉 자의 무덤이 있네. 四尺斧堂자손들이 번성하여 螽斯兟兟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禮吉。字聖宅。號畏齋。金氏系出金海。卽駕洛國首露王之后也。至麗朝。勳閥煒燁。有諱湑。我太宗朝封盆陵君。享于白洞祠。三傳諱駿孫。與弟諱驥孫馹孫。俱登文科。稱金氏三珠。官弘文直提學。封燕川君。是生諱大有。號三足堂。已卯登賢良科。見群小用事。退隱於雲門之愚淵。卽公之九世祖也。曾祖三徽。號翠柏堂。行義著世。中司馬。祖德恒。號梅谷。有隱德不仕。考述曾。號竹窩。官守門將。贈嘉善。妣貞夫人義城金氏。參奉仲華女。英宗丙子正月十五日。生公于金陵之三仁里舊第。公天稟挺邁。才氣穎異。淹貫六經。涉躐諸家。聞見宏博。詞華斐蔚。尤邃於禮學。常變吉凶。節文度數。精思深辨。無不昭晣。是以遠近士友。禮有所疑。輒就公咨決焉。孝事二親。怡愉洞屬。志物俱至。執喪哀毁。一遵古禮。兄弟五人。皆有文行。對床連榻。爾征我邁。從容湛樂。和氣融融。以至待族戚接朋友。溫仁慈惠。各得其心。閭里間。人或有過。則輒曰。勿使某公知之。其見重如此。純廟癸未十二月十五日卒。後以孫在煥貴。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墓唵川坊黃谷里堂山丙坐原。配淑夫人江陵劉氏。同知致一女。婦德備至。生四男一女。男殷直。就直。應直。宇直。女適河東鄭仁大。孫男在瑛。在瑚。在璉。在珣。長房出。在達。在邦。在洪。二房出。在業。在善。在歆。在敏。三房出。在煥。官禮參。四房出。曾玄以下不錄。曾孫璨錫。奉家狀。請爲隧道表銘之文。辭不獲已。銘曰。燕川古家。三足賢孫。孝友箕裘。詩禮淵源。黃谷之麓四尺斧堂。螽斯兟兟。餘祿正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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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시웅(始雄), 자는 미경(美卿), 호는 죽음(竹陰)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기린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후손 가운데 구례마(俱禮馬)가 있었으니, 신라(新羅) 태조(太祖)를 도와 모량부(牟梁部) 대인(大人)이 되었다. 훌륭한 공적과 높은 작위는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고려(高麗) 때 휘 빈(贇)이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책(策)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계경(季敬)을 낳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씨(伯氏) 휘 검경(儉敬)이 망복(罔僕)의 의리202)로 보성군(寶城郡)에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함께 남하하다가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정착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과 더불어 85학사에 선발되었다. 금남(錦南) 최공 부(崔公溥)와 함께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에서 지냈다.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고조는 휘 근로(謹老)이고, 증조 휘 대남(大南)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일(逸)이니, 공조 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후일(宋厚日)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이룡(以龍)으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반명환(潘明煥)의 따님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22일에 정동(井洞)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본디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밭 갈고 가축을 길러 온갖 일을 모두 직접 하였으며, 이것으로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게다가 한가한 날에는 치웅(致雄)과 필웅(必雄) 두 아우와 함께 글방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낮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조제(調劑)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살아 있는 잉어가 여울에서 나오고 꿩이 뜰에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연달아 소생(所生 친부모)과 소후(所後 양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여 상례의 형식과 내용203)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을 거듭 경계하였다. 그 가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친과 화목하게 지내며, 제사를 받들고, 혼인을 가려서 하고, 학문과 문장에 힘쓰고, 농사를 힘써 짓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라는 뜻으로 상세히 입설(立說)한 것이 몹시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니, 그 좋은 계책과 훌륭한 가르침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죽수(竹樹)의 북쪽에 집을 짓고 죽음(竹陰)이라고 자호하였다. 자호와 연관된 시 한 편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비봉산 앞 대숲이 우거졌으니 飛鳳山前竹樹陰맑은 풍취는 백세 지나도록 변치 않네. 淸風百世不移心보배인 낭간204) 옥인 양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看來愛有琅玕寶아침 해 뜨길 기다려 덕음을 보네. 留待朝陽覽德音이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자리 오른쪽에 써서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평소 몸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향리(鄕里)에서 여러 번 그 효성을 상위 관사에 천거하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경신년(1740, 영조1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천(寒泉)의 모산(牟山) 뒤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사룡(趙士龍)의 따님이다.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4남을 낳았으니, 첫째는 명신(命新), 둘째는 흥신(興新), 셋째는 항신(恒新), 넷째는 극신(克新)으로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손자 원효(元孝)는 장자의 소생이다. 생원 덕효(德孝), 찬효(贊孝)는 둘째의 소생이다. 순효(淳孝)는 셋째의 소생이다. 광효(光孝), 필효(必孝), 욱효(郁孝)는 넷째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영렬(永烈)과 영모(永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충강 가 忠江之上주산의 남쪽. 珠山之陽우뚝한 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崇四尺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가훈 적은 책 한 권 家訓一書후손에게 남긴 계책 매우 창성하네. 貽謨孔彰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始雄。宇美卿。號竹陰。孫氏之先。在魯昭公出奔時。有曰承麟。浮海而東。至仇史居焉。後孫有曰俱禮馬。佐新羅太祖。爲牟梁剖大人。崇勳嵬爵。奕世不絶。至麗朝。有諱贇。封密城君。子孫乃貫焉。至諱策。文牧使。生諱季敬。入我朝。見其伯氏諱儉敬。以罔僕之義。謫寶城郡。公亦與之南下。止千扶安之葛村。三傳至諱比長。生員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八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世著文行。高祖諱謹老。曾祖諱大南。贈掌樂院正。祖諱遇節。贈戶曹參議。考諱逸。工曹參判。配貞夫人恩津宋氏厚日女。生考諱以龍。贈嘉善大夫。妣貞夫人南平潘氏明煥女。顯宗癸丑十月二十二日。生公于井洞第。公天稟醇謹。幼有至行。家素貧甚。漁樵耕牧。凡百事役。無不躬親爲之。以供甘旨之養。更於暇日。與二弟致雄必雄。入塾對案。不廢課程。親有劇疾。晝不就席。夜不就枕。迎醫合藥。誠力俱至。有生鯉出灘。投雉墮庭之異。人謂孝感致然。連漕所生所後喪。一遵禮制。易戚備至。嘗著家訓。申戒子孫。其訓以孝於父母。友於兄弟。正閨閫。睦宗族。奉祭祀。擇婚姻。務學文。力農業。勿近博奕。勿用巫覡之意。縷縷立說。極其懇惻。其嘉謨良規。皆可以爲有家者之柯則。築室竹樹之陰。自號竹陰。因有詩曰。飛鳳山前竹樹陰。淸風百世不移心。看來愛有琅玕寶。留待朝陽覽德音。此可以見其志矣。書九容九思於座右。常自鏡考。以小學大學爲平生律身之本。鄕道累薦其孝於上司。以壽陞嘉義。追榮三世。庚辰正月六日考終。葬寒泉之牟山後甲坐原。配貞夫人淳昌趙氏士龍女。閫儀無闕。生四男。長命新。次興新。次恒新。次克新。出系仲父后。孫元孝長房出。德孝生員。贊孝二房出。淳孝三房出。光孝。必孝。郁孝。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六世孫永烈永謨奉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忠江之上。珠山之陽。有崇四尺。孝子攸藏。家訓一書。貽謨孔彰。螽斯椒聊。餘祿正長。 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 상례의 형식과 내용 원문은 '易戚인데, 상례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낭간(琅玕)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로, 어두운 녹색이나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의 옥인데, 옛부터 장식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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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鏡城宗人禹範【昌均】 雉城何等地。相見卽同親。在昔南强士。如今北産人。磨雲難入夢。豆滿近殊鄰。此去三千路。秋風擾我神。君是邵城裔。同根百世親。圖南罵好客。還北作勞人。絶塞非宜土。淳鄕卽善隣。臨岐無所贈。努力保心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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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族侄舜根 落鄕凡幾世。淮橘絶靑雲。丹田極鹵莽。何日復耕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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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參奉奇丈【蘆沙】 摳衣烏次客。重踏去年程。未必愁寒沍。河南春已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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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邱珍先生【蘆沙】 至人秉元化。端居撫空腹。畸生作老饕。蠹魚入左毒。膏骨難治鵲。手腕未解蝮。偶得良醫卦。莧陵夬夬獨。竪子漸退舍。氛祲日碌碌。黃江一夜雨。蘇我瘡痍穀。雙鯉濕雲飛。落手心先恧。價重百硨磲。德洽千釜斛。誰能報難際。顧憐皤皤禿。何當拜門下。歸臥南山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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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朝天館安行五 南去滄溟萬里流。漢挐山色揷天頭。遙知別後相思夢。只在園林橘柚秋。十載尋源最上流。送君今日白波頭。靑天大道滄溟闢。政是男兒闊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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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茂山崔鍾衡 君從何處趼重重。探玉探珠此幸逢。載德歸程須努力。磨天嶺上更無峯。吾師謙德漸人深。雨盡瀛洲北不咸。百舍治任豈易得。感君鐵石始終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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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婿冕植 老鳳翩然止竹亭。懷中四子已飛庭。滿園叢綠春無盡。會見琅玕葉葉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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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범【권현】에게 답함 答任士範【德鉉】 병으로 궁벽한 움집에 칩거하고 세상에 버림받아 오랜 옛 친구가 안부를 묻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세상의 정취이니 감사하는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편지를 받고 여름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신명이 애처롭게 여겨 기거(起居)가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실로 축원하는 바에 합치합니다. 둘째 영랑(令郞)은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지각이 열려서 성취한 바가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온당하니 덕문(德門)이 아직 누리지 못한 복록과 남은 희망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의탁하는 마음도 소소하지 않습니다. 아우는 지난 몇 해 동안 병에 잘 걸려서 기혈(氣血)이 날로 손상되었으니 배우지 않으면 곧 쇠하는 것이 이치상 참으로 당연합니다. 무후(武侯)가 궁벽한 집에 살면서 탄식한 것100)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도 없건만 어찌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병입니다. 그러나 병이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는 것이지 스승이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후생 소자(後生小子)가 어디에서 도를 듣겠습니까. 형의 염려가 지나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일부(一副)의 좋은 약제(藥劑)는, 세간에는 본래 창공(倉公)이나 편작(扁鵲) 같은 명의(名醫)가 있으니 아우처럼 천석고황(泉石膏肓 산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계책을 내겠습니까. 듣자니 저도 모르게 이마에 흐르는 땀이 발바닥까지 적십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病蟄窮竇。見漏於世。只有知舊存訊一路。此爲陽界意況。感佩曷任。仍審維夏省歡神勞。起居珍勝。實協祈祝。二郞謹勅開悟。所就穩藉。德門不食。餘望可量。區區寄意。亦爲不淺。弟年來善病。氣血日敗。不學便衰。理固宜然。武侯窮廬之歎。不能以自遣耳。奈何好爲人師。此固病也。然病在於好爲。而不在於爲師。不然後生小子。何從而聞道乎。兄可謂過慮矣。一副良劑。世間自有倉扁大手。如弟之方困於膏肓者。安能爲人謀也。聞之不覺頂汗流跖。諒恕如何。 무후(武侯)가……것 무후는 중국 삼국 시대 촉(蜀)나라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그가 지은 〈계자서(戒子書)〉에 "나이는 시시각각으로 들어가고 뜻은 해가 갈수록 사라져 버려 마침내 고락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초라한 오두막에서 슬퍼하며 탄식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젊은 시절에 부지런히 자신의 본업에 힘쓰지 못하여 마침내 이런 신세가 된 것이 한스럽다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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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석【복기】에게 답함 答徐元陽【復基】 세시(歲時)의 왕래로 인하여 가까이 사는 벗들은 모두 소식을 들었지만, 영평(永平)의 고인(高人 수신인을 말함)께서는 어떤 상황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정감이 담긴 편지를 받으니 궁벽한 음지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곤궁한 재력(財力)으로 천애지각(天涯地角)에 살고 있으니 몸소 나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정담을 나누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곧 서신만이 서로 따르며 가깝게 지내는 방도입니다. 하물며 안부를 묻는 외에 또 강론과 사색에 관한 이러저러한 말들이 끊임없이 종이 폭을 채우니,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계발하도록 하는 방도로 볼 때 편지가 대면하는 것에 못미친다고 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여러 조항 운운한 것은 노형(老兄)의 말씀이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만물을 생(生)함과 사람의 마음이 인(仁)한 것은 본래 두 개의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현상은 만 가지로 달라도 근본은 하나【萬殊一本】이므로 본래 고정된 모습이 없습니다. '성(誠)' 자를 가지고 본다면 성(誠)이 하나의 근본【一本】이고 '경(敬)' 자를 가지고 본다면 경(敬)이 하나의 근본입니다. '인(仁)', '의(義)', '중(中)', '정(正)' 자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로 삼아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뿐입니다. 또 모든 현상에는 각각 갖추고 있는 하나의 근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효(孝)' 자나 '혜(惠)' 자 같은 부류가 그렇습니다. 나갈 때는 아뢰고 돌아와서는 고하며,101)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102) 등 시봉하는 모든 방법이 '효(孝)' 한 글자에서 나옵니다. 조존(操存)103)과 격물(格物)의 설에 대한 대답도 훌륭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104)은 분명히 미발의 때이고 사려(思慮)만 막 싹터 나오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모두가 어둡고 은미하여 남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것입니다. 계신공구(戒愼恐懼) 또한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숙하게 하며105), 생각하는 듯 엄숙한 자세를 가지고106) 감히 태만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하문하신 것은, 저처럼 과문한 소견으로는 일반적인 사례(士禮)에도 어두운데 하물며 제후의 예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후사로 나간 아들은 친생부(親生父)에 대해 살아계실 때는 감히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돌아가셔도 감히 예(禰 아버지의 사당))에 받들지 못하며 상복은 감히 3년을 입지 못합니다. 하물며 공자(公子)의 아들로서 입계(入繼)하여 왕통을 이은 경우야 말한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공조례(公朝禮)가 있고 가인례(家人禮)가 있습니다. 공조례는 공의(公議)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고 가인례는 사적인 은의(恩誼)를 펴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형(曺兄)이 말한 창업을 이룬 군주와 입계한 군주는 그 예가 다르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만, 입계한 군주도 가인으로서의 예가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因歲時往來。居近朋友。皆得聞信。而但未知永平高人作何狀。謂外情緘。不啻若窮陰之見陽也。吾儕俱以窮約事力。居在涯角。躬駕面穩。豈易事也。只是書尺一路。便是相從。況寒暄之外。又以講討思索多少語。娓娓盈幅。其所以令人資發。誰謂書不如面也。諸條云云。老兄之言得矣。然天地之生。人心之仁。本非兩項物事。大抵萬殊一本。本無定體。以誠字看之。誠爲一本。以敬字看之。敬爲一本。仁義中正字之類。莫不皆然。惟觀其所主而言者。如何耳。且事事物物上。有各具之一本。如孝字惠字之類。是也。出告反面。冬溫夏凊。凡百侍奉。皆是一箇孝字出來。操存格物說。所答亦善。不覩不聞。固是未發之時。獨是念慮初萌處。然凡幽暗隱微。人所不知而己所獨知者。皆是也。戒愼恐懼。亦非着意爲之。只是正衣冠。尊瞻視。儼若思。不敢慢之謂。俯詢云云。以若謏見寡聞。尋常士禮。猶且茫昧。況於諸侯之禮乎。然夫出後子之於所生。生不敢父。死不敢禰。服不敢三年。況以公子之子。而入承大統乎。是以有公朝禮。有家人禮。公朝禮者。所以正公義也。家人禮者。所以伸私恩也。曺兄所謂創業之君。入繼之君。其禮不同者。得之而但不知入繼之君。亦不無家人禮耳。更詳之如何。 나갈……고하며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집을 나갈 때 반드시 어버이에게 가는 곳을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인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겨울에는……해드리는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무릇 자식이 된 예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이다."라고 보인다. 조존(操存)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마음이라는 것은 잡아 두면 있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 1 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의관을……하며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五美〕'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면 그 모습이 엄숙해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외경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대목이 보인다. 《論語 堯曰》 생각하는……가지고 《예기》 〈곡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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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낙현【재성】에게 답함 答安樂賢【載性】 일전에 보내신 서신을 열어 본 이래로, 강습(講習)하는 즐거움이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저의 정성에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학습 과정이 정명(精明)하고 세밀하여 사람을 발전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기쁘고 다행스럽기가 실로 어떻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인하여 좁은 소견 한두 가지로 감히 다시 우러러 아뢰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학(下學) 운운한 것을, 노형(老兄)께서는 '상(上)', 하(下)' 2자를 도(道)와 기(器)로 인식하십니까, 아니면 도와 기의 경계를 이르는 것입니까? 만약 곧장 도와 기라고 말한다면 하(下)에는 정녕 형상(形象)과 방위(方位)가 있으며, 다만 도와 기의 경계라고만 한다면 상(上)에 이미 형상과 방위가 없는데 하(下)에만 형상과 방위가 있겠습니까. 성인은 이(理)와 기(氣)를 나눌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형이(形而)'107) 두 자를 쓰고 이와 기가 뒤섞일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상하(上下)' 두 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역(易)》에 처음 나타나고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108)108) 《논어(論語)》에서 반복되었으니: 《논어》 〈헌문(憲問)〉의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그 경계가 매우 정밀합니다. 학자들은 단지 일상적인 인사(人事)에 종사하면서 행해야 하는 의리를 다하는 데 힘써서 격물 궁리(格物窮理)의 깊은 뜻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렇게 지극히 비근(卑近)한 곳으로 나가지만 지극히 고원(高遠)한 곳이 생생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어찌 현묘한 곳에 나아가는 것을 미리 근심하여 도와 기의 경계를 어지럽히겠습니까. 부디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日前手存。披閱以還。不惟講習之樂。有以慰此期仰之誠。其盛課之精明詳密。有以開發人處。區區喜幸。實難名喩。因以一二菅見。敢復仰溷。幸見敎也。下學云云。老兄以上下二字。認爲道器耶。抑謂道器之界至耶。若是直說道器。則下固有形象方位。只是說道器界至。則上旣無形象方所。下獨有形象方所乎。聖人於理氣之不可分開處。下形而二語。於理氣之不可混雜處。下上下二字。始著於大易。反復於論語。此其界至極爲精密矣。學者但當從事於日用人事之間。務盡其當行之義。而不失其窮格之蘊。則卽此至近至卑而至高至遠者。躍如矣。豈有預憂玄妙之馳而亂道器之界至哉。千萬諒之。 형이(形而)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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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四月初四日 前手標右手標事右人親山定于下西吉音洞而右麓卽吾之禁養內哛喩吾之弟嫂山與子婦山在於南麓至近之地是如乎言無事結則不可輕先許給於右人定山麓上下一脉捧価貳十五兩爲遣永永許給用山後子孫與族人中如有雜談則以此標憑考事山地主 幼學 梁機[着名]證筆 喪人 賓相鴻[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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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兼五衛將者咸豐五年二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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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前奴回下覆尙此伏慰便過有日寒㬉不適伏悶靜中體事連衛萬安閤節亦安護病婦諸証其間或有動靜鄙藥試無減亦已久矣今何望掩地夬蘇空費藥料徒勞心神只望志少有起動而生還媤家不可謂大幸而已矣亦將何爲査下生親候近以感患歷日欠損情私急迫如何形達今逢權友益山果旣勘還衙云聞甚喜幸積月曠務之餘似可促裝而來際此往見固所然矣而適有少碍不得如意姑竢數日登途計耳餘姑留拜候不備上候禮丁未至月十日査下生趙膺鎬배면上候書奴回後更阻安候下懷悵慕伏不審至沍靜養體度萬安伏慕不任下誠室人日間更如何忽念令胤內合如漫擧云伏想悲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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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者上書伏想 下鑑矣伊來阻候踰月伏悵何常少弛伏未審間者氣體候萬旺閤內均安竝伏泰區區不任下誠再從孫省側粗安伏幸何達回便陳玄一丁得送矣領納將上京以後所用錢夥然而所出處少無忙何以爲之耶 貴邊或有錢兩一貫下借則不年間當報勿慮若何方今所促錢八九兩或可 下諒僕下壅塞之艱難之情否勿投此書而下送伏望耳餘不備上候書丁未四月二十日再從孫翼鉉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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阻仰有時勞摯便中伏拜惠狀謹審冬暄靜中動定連護萬重欣豁慰賀允叶勞祝第孫婦間以項病屢日委苦雖是輪行之證有妨於食欲亦至元氣之陷敗者豈勝慮矣聞廊珍更肆云尤用悶慮比近則姑無是患而未知其終竟如何也弟衰軀遇寒蟄伏頓沒陽意自憐奈何孫兒之病知是長遠離涉之証安可望願地譴却而脆弱之質逐直重經徒存形骸所見不勝愁憐孫婦新禮差退數朔豈難而但見渠之心一時爲愈無?之時屈指待日矣聞此尤覺悵然應?兒益故不□▢陳耳餘適撓姑▢不備伏惟▢▢▢謹謝狀上壬寅陽月卄四日 弟在儀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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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四年甲辰六月初一日幼學金載相前明文右明文事段以貧窮所致妻家山下墓田扶北中方里西十作惶字丁太三斗五升落只所耕六負五束庫果所付柴塲卄五同落只並以折価錢文五兩依數捧上是遣本文一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誰談是去䓁以此文告官卞正事田柴塲 主同知高春成[着名]訂筆 幼學 宋亨柱[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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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팔이하는 아이 賣暑兒 대보름에 아이들이 다투어 더위를 파는데 上元小兒爭賣暑기어코 더위를 팔려 하니 무엇 때문인가 期欲賣暑問何居내 더위 팔아버리면 비록 시원하더라도 賣去我暑雖則快다른 사람이 더워 죽으면 이를 어찌하나 他人爛死柰如之각자가 그 더위를 더위로 감당할지언정 寧可各自暑其暑차마 어찌 내 재액을 남에게 가하겠는가 忍將吾厄加彼爲여름 날 무더위는 본래 당연한 이치이니 夏天苦熱自常理이 물건은 원래 팔아 넘길 것이 아니라네 此物元非可賣移팔래야 팔 수 없어 더위는 도로 그대로라 賣之不得還自在우습네 아이들 마음 어찌 그리 어리석나 嗤渠童心一何癡저 허덕허덕 이익 좇는 무리를 돌아보라 睠彼逐逐營利輩세상에 더위 팔이 아이가 얼마나 많더냐 幾多世間賣暑兒남을 야위게 해 자기를 살지게 하니 참 통탄스럽고 瘠人肥己眞可痛천리를 어겨 분수를 범하니 한탄스럽구나 昧天犯分可嗟咨설령 지식이 없다 해도 이미 늙기도 했거늘 借曰未知亦已老도리어 어린 아이들 보다 낯가죽 두껍구나 還視小兒厚面皮 上元小兒爭賣暑, 期欲賣暑問何居.賣去我暑雖則快, 他人爛死柰如之.寧可各自暑其暑, 忍將吾厄加彼爲.夏天苦熱自常理, 此物元非可賣移.賣之不得還自在, 嗤渠童心一何癡.睠彼逐逐營利輩, 幾多世間賣暑兒.瘠人肥己眞可痛, 昧天犯分可嗟咨.借曰未知亦已老, 還視小兒厚面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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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램 願言 원하건대 날마다 많은228) 술을 마셔서 願言日飮酒千鍾취한 꿈속 깊이 몇 겹을 들어가리라 醉夢深深入幾重황하가 처음 발원한 곳까지 올라가고 窮遡黃河初發地홀로 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올랐네 獨登泰岳最高峯창힐229)이 만든 문자를 가서 찾아보고 行尋蒼頡造文字염황230)이 가르친 약농을 절하고 물었네 拜問炎皇敎藥農창밖에서 맑은 바람이 끝없이 불어와 牕外淸風噓不盡깨어나니 한바탕 시원히 흉금이 씻겼네 覺來一快滌衿胸 願言日飮酒千鍾, 醉夢深深入幾重.窮遡黃河初發地, 獨登泰岳最高峯.行尋蒼頡造文字, 拜問炎皇敎藥農.牕外淸風噓不盡, 覺來一快滌衿胸. 많은[千鍾] '종(鍾)'은 옛날 양기(量器)의 이름으로 곡(斛) 4두(斗)에 해당하는데 '천종(千鍾)'은 많은 양을 말한다. 창힐(蒼頡) '창힐(倉頡)'을 말한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안하여 그때까지 새끼의 매듭으로 기호를 만들어 문자 대신 쓰던 것을 문자로 고쳤다고 한다. 《說文解字序》 염황(炎皇)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로,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백 가지 초목(草木)을 맛본 후에 비로소 의약(醫藥)이 있게 되었다. 《史記 三皇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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