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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청일【재덕】에게 답함 答梁淸一【在德】 인편으로 매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를 물으시는데 거리가 멀수록 편지는 더욱 정성스럽고 교제가 오랠수록 정의(情誼)는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어리석고 국량이 좁은 사람은 1전(錢)의 가치도 없는 처지이니 어떻게 고명(高明 상대방)에게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겠습니까. 고마운 마음은 크지만 조금이라도 고명의 뜻에 부응할 방도가 없으니 죄송스럽습니다. 학문에 관해 하문하신 뜻이 간절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웠지만 이처럼 분별없는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벗 사이에 강습(講習)하는 도리는 절대로 의심을 쌓아두고 단점을 비호하여 지극히 합당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면 안 됩니다. 다시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대체로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이고 만사(萬事)의 본령(本領)입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몸에 주재가 없고 만사에 근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도는 풀어진 마음을 수습하는 것【收放心】을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고 풀어진 마음을 수습하는 도리는 반드시 경(敬)을 첫 번째로 삼았습니다. '경(敬)' 자의 뜻을 정자(程子)는 일찍이 정제 엄숙(整齊嚴肅)84)이라고 하였고 또 주일 무적(主一無適)85)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여 엄숙한 태도로 항상 상제(上帝)의 뜻을 받들어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책을 읽기만 하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기만 하여 두 가지 일을 하지도 않고 세 가지 일을 하지도 않으며 동쪽으로 가지도 않고 서쪽으로 가지도 않는다면 정신은 자연스럽게 안정되고 도리는 자연스럽게 모여듭니다. 또 모름지기 오늘 하나의 이치를 바로잡고 내일 하나의 이치를 바로잡으며,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과정(課程)을 엄정하게 세우고 목숨을 바쳐 앞으로 나아간다면 쌓인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저절로 초탈하여 구속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점은 입지(立志)가 단단하지 못하고 입심(立心)이 미덥지 못하여 꼼꼼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없이 늑장을 부리다가 일정함이 없이 중간에 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해가 다 지나가도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의림(義林)은 일찍이 사우(師友)를 따랐기 때문에 대략 이와 같은 것을 알았지만 지금도 오하아몽(吳下阿蒙)86)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때를 놓치고 안타까워하는 탄식은 죽더라도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좌하(座下)의 총명함과 독실함으로 반드시 이 점에 대해서 소릉(昭陵)을 보듯 했으리라고87) 생각되니 달빛 아래 촛불을 밝히고 시주(詩酒)를 즐기는 것이 어찌 제가 하고자 하는 바이겠습니까. 단지 고루한 견해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고 또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便頭每得死生之問。地愈遠而書愈勤。交愈久而誼愈篤。顧此愚劣褊淺。不直一錢漢。何以得於高明如此。爲感則厚。而無以副其萬一之意爲可罪也。下問爲學之意。非不懇惻。而奈此倥倥何。然朋友講習之道。切不可蓄疑護短。以昧至當之歸。幸復回敎也。夫心者一身之主宰。萬事之本領也。心有不存。則一身無主。萬事無本。是以從古聖賢敎人之法。無不以收放心爲先。收放心之道。必以敬爲第一義。敬字之義。程子嘗以整齊嚴肅言之。又以主一無適言之。必須整衣冠。尊瞻視。儼然肅然。常若對越上帝。而讀書時只讀書。着衣時只着衣。不二不三不東不西。則精神自然凝定。道里自然湊泊。又須今日格一理。明日格一理。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嚴立課程。舍死向前。則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最怕立志不牢。立心不實。而悠悠泛泛。間斷無常。則卒歲窮年。豈有所成就也。義林早從師友之後。粗知如此。而尙今吳下阿蒙者。亦爲是故也。無念失時之歎。有死莫追。以座下明睿篤實。想必於此有昭陵之見。則月下擧燭。愚豈所欲也。但固陋之見。不可不正。又以塞不鄙萬一之意。 정제 엄숙(整齊嚴肅)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 〈입관어록(入關語錄)〉에 "다만 외면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면 마음이 곧 전일해지니, 전일해지면 저절로 사악함이 침범하는 일이 없게 된다.【只整齊嚴肅 則心便一, 一則自無非辟之干.】"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일 무적(主一無適)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주일을 경이라 이르니, 안을 곧게 한다는 것은 바로 주일의 뜻이다.【主一之謂敬, 直內乃是主一之義.】"라고 하고, 또 "마음은 지키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출입하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 방향을 알 수 없으니, 다시 어떻게 마음을 붙여 둘 곳을 찾겠는가. 그저 마음을 지킬 뿐이니, 마음을 지키는 방도는 경을 하여 안을 곧게 하는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更怎生尋與寓? 只是操而已. 操之之道, 敬以直內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오하아몽(吳下阿蒙) 학식이 없는 사람을 기롱하는 말이다. 오하아몽은 삼국(三國) 시대 오(吳)나라 장수 여몽(呂蒙)을 가리키는데, 손권(孫權)이 여몽과 장흠(蔣欽)에게 학문을 하여 깨우치라고 하자 여몽이 독실하게 공부를 하였다. 그 뒤 노숙(魯肅)이 주유(周瑜)를 대신하여 도독(都督)이 되어 여몽에게 들렀는데 그가 괄목상대할 만큼 학문의 진전을 이룬 것을 보고 여몽의 등을 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무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박학하고 영준한 것을 보니 더이상 오하아몽이 아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傳 注》 소릉(昭陵)을……했으리라고 수많은 학설을 모두 독파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황후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이다. 태종이 황후를 장사 지낸 뒤 후원(後苑)에 망대(望臺)를 만들어 놓고 늘 올라가 바라보다가 한번은 위징과 함께 올라갔었는데, 위징은 당 태종이 소릉을 가리키는데도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뗐다. 위징의 본의도 모르고 당 태종이 저것이 아니냐고 답답한 듯이 말하자 위징이 비로소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진작부터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헌릉은 태종 어머니의 능이니, 이것은 태종이 어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부인만 생각한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리하여 태종은 울면서 그 망대를 헐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唐書 魏徵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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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청일에게 답함 答梁淸一 뜻밖의 인편으로 또 이렇게 서신을 주고받아 잇달아 위로를 받으니 고마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성성설(惺惺說)88)을 다시 이렇게 언급하시니 간절히 묻고 가까운 일부터 생각하며 날마다 나아가고 멈추지 않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경(敬)'은 윤익법(輪翼法)89)이니 본래 판연하게 앞뒤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학(小學)》의 서문으로 말하자면 '경(敬)'이 우선이고 《대학(大學)》의 서문으로 말하자면 '지(知)'가 우선입니다. 대체로 초학자가 공부를 시작할 때는 정제엄숙(整齊嚴肅)에 의거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또 정제엄숙만 할 뿐이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단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제엄숙이라는 것은 단지 사람을 어리벙벙하게 헤매어 목석처럼 우매하게 만들뿐이니 어찌 천하의 으뜸가는 근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자(朱子)는 "각자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경(敬)의 천심(淺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청일(淸一)의 공부도 모름지기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사색(思索)에 번갈아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예전에 익힌 《소학》의 공을 뒤미쳐 보완할 수 있고 지금 《대학》을 공부하는 터전도 아울러 누실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謂外便頭。又有此往復。續續披慰。感不容喩。惺惺說復此提起。其切問近思日就不己之意。可以領略。夫敬是輪翼法。固不可以判然先後言之。然以小學之序言。則敬爲先。以大學之序言。則知爲先。夫初學下手。莫若整齊嚴肅之爲可據。而又只整齊嚴肅而已。而不求其格物致知之端。則所謂整齊嚴肅者。只是黑窣窣地。如木石冥頑曷足爲天下之大本哉。然則朱子所言各隨其人之地分。而敬有淺深故也。惟吾淸一今日之功。正須存養思索。交致其力然後。可以追補前日小學之功。而爲今日大學之地。可以兼擧而無漏矣。如何。 성성설(惺惺說) 《심경부주(心經附註)》에 있는 상채 사씨(上蔡謝氏), 즉 사양좌(謝良佐)의 "경은 항상 마음이 깨어 있게 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는 말을 가리킨다. 윤익법(輪翼法)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에서 "모름지기 이치를 궁구하되 함양과 궁색 두 가지는 하나라도 폐할 수 없으니,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亦須窮理, 涵養窮索二者, 不可廢一, 如車兩輪, 如鳥兩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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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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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3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閏七月日 金載相 城主 癸卯閏七月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6.8*6.8(정방형) 적색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3년(헌종 9)에 김재상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한 사람을 잡아달라며 부안현감에게 올린 소지. 1843년(헌종 9)에 김재상(金載相)이 자신의 선산(先山)에 투장(偸葬)한 사람을 잡아달라며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김재상은 2년 전인 신축년에 누군가가 선산에 투장을 하자 관에 소를 올려 투장한 사람을 잡아와서 대변하라는 제사(題辭)를 관으로부터 받았다. 그 뒤 밤낮으로 수색했으나 형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투장자가 제발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무덤 주위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놓았다. 그 뒤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나 바로 수일 전에 누군가가 울타리를 부수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투장을 한 자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하며, 송사에서 질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을 보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라는게 김재상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김재상은 투총 옆에 도랑을 판다면 투장자가 제발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올리니 처분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기일을 정하여 투장자를 찾으라는 제사를 내렸다. 김재상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관에 산송(山訟) 관련 소지를 올렸으나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다. 이 문서 역시 작성연대가 계묘년으로만 되어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가 도광(道光) 24년, 즉 1844년(헌종 10)에 시장(柴場)을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 계묘년을 1843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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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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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5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卯 辛卯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화명(乾化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정해생으로, 안장일은 신묘년 12월 13일로 되어 있다. 상주는 맏며느리와 둘째아들, 둘째아들며느리, 손자, 장손, 장손며느리, 둘째 손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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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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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즉흥으로 읊다 卽事 초겨울 객을 맞아 누대도 오르지 못하고 迎客初冬不上臺하늘에 가득 비바람 치니 또 근심하누나 也愁風雨滿天來고요한 밤에 타는 등불의 심지 돋우고236) 且挑靜夜燃藜燭중양절에 국화 띠웠던 술잔을 회상하네 回憶重陽泛菊杯살아선 세태에 어두워 빈 손만 가졌다가 生昧炎涼持赤手죽어선 구렁에 돌아가 푸른 이끼에 묻히리 死歸溝壑瘞蒼苔봉산에서의 학업은 얼마나 근실한가 蓬山學業何勤實수재들을 얻었으니 초옥에 빛이 나구나 草屋生光得秀才 迎客初冬不上臺, 也愁風雨滿天來.且挑靜夜燃藜燭, 回憶重陽泛菊杯.生昧炎涼持赤手, 死歸溝壑瘞蒼苔.蓬山學業何勤實, 草屋生光得秀才. 등불의 심지 돋우고 원문의 '여촉(藜燭)'은 본래 청려장(靑藜杖) 끝을 태운 등불인데, 불을 밝히고 독서하는 것을 비유한다. 한 성제(漢成帝) 때 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의 교서(校書)로 있으면서 매일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어느 날 밤 태을지정(太乙之精)을 자처하는 황의 노인이 나타나 청려장(靑藜杖) 지팡이 끝에 불을 붙여 방 안을 환히 밝힌 다음 《홍범오행(洪範五行)》 등 고대의 글을 전수해 주고 사라졌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拾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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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회 회문체351)를 쓰다 感秋用回文體 푸르른 나무 보니 이른 가을이라 碧樹看秋早차가운 창에 나그네는 꿈을 깨네 寒牕客夢驚온갖 벌레는 이슬 젖은 풀에서 울고 百蟲吟草露외로운 새는 맑은 하늘에서 내려오네 孤鳥下天晴흰 해는 새로운 색을 더하고 白日新添色푸른 산은 옛 모습을 바꾸네 靑山變舊形시구 찾아 맑은 경치 대하며 覓詩淸景對일평생을 탄식한다네 感歎一平生 碧樹看秋早, 寒牕客夢驚.百蟲吟草露, 孤鳥下天晴.白日新添色, 靑山變舊形.覓詩淸景對, 感歎一平生. 회문체(回文體) 한시체(漢詩體)의 한 종류로, 거꾸로 읽어도 뜻이 통하게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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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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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달을 보며 秋夕看月 어느 밤인들 이런 달 없으리오만 何宵無此月오늘 밤의 달을 가장 사랑한다네 最愛今宵月묻노니 너는 어찌 그리 교교한가 問渠何皎皎이는 중추의 달이기 때문이라네 爲是仲秋月공경히 생각하니 옛 성인 마음은 恭惟古聖心찬 물에 비친 가을 달이로다 寒水照秋月나의 마음은 어떠한고 如何我方寸침침한 구름 속의 달이네 沈沈雲裏月탄식하며 잠 못 이루니 歎息不能寐누대에 올라 공연히 달을 대하네 登樓空對月 何宵無此月, 最愛今宵月.問渠何皎皎, 爲是仲秋月.恭惟古聖心, 寒水照秋月.如何我方寸, 沈沈雲裏月.歎息不能寐, 登樓空對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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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전별하며 餞春 봄이 왔다 감은 절로 하늘에 달렸는데 春到春歸自在天나는 무슨 일로 강변에서 전별하는가 問余何事餞江邊평생토록 끊임없이 물과 함께 흘러가는데 百年滾滾同流水몇몇 곳에서 어지러이 신선 되길 원했나 幾處紛紛願作仙좋은 경치는 온화한 절기에 다시 얻기 어렵고 佳景難再和煦節늙은이 회포는 흔들리는 배와 흡사하다네 老懷定似蕩颺船일을 이루고 떠나는 것이 원래 이와 같으니 成功者去元如此온갖 법은 예로부터 하나의 이치로 전했지 萬法從來一理傳 春到春歸自在天, 問余何事餞江邊?百年滾滾同流水, 幾處紛紛願作仙?佳景難再和煦節, 老懷定似蕩颺船.成功者去元如此, 萬法從來一理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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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회부 중기 에게 써서 주다 書贈李君晦夫【中基】 내가 일찍이 서울에 갔을 때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수천 리 쯤를 동행하면서 보니, 그의 몸은 매우 구부정하고, 그의 발은 매우 둔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짧은 걸음을 여러 번 내딛어야 겨우 한 걸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비웃으며 그 사람처럼 느리게 함께 걷다가 앞서 가버렸다. 이 때문에 항상 홀로 걸었고 함께 가는 사람이 없었다. 십 여일 뒤 서울에 들어가서 그 노인을 만났는데, 이미 먼저 남대문 아래에 와 있었다. 이는 대체로 그의 걸음걸이가 비록 느릴지언정 종일 길을 걸으면서 잠시 잠깐도 멈추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학문하는 방법을 알고서 몰래 스스로 힘쓰면서도 오히려 잘할 수 없을까 근심하였는데, 끝내 '간단(間斷)' 두 글자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었다. 아, 어찌 나만 그렇겠는가. 세상의 학자들이 끝내 성취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보건대, 회부(晦夫)는 지금 한창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하며, 앞길이 만리이니, 모름지기 안장과 고삐를 다스리고 정돈하여 혹시라도 그치거나 멈추지 말고 끝내 한만(汗漫)과 서로 기약한 곳62)에 이르러서 나처럼 이 노인에게 비웃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을 지금 회부를 위해 말하니, 회부는 힘쓰기 바란다. 余嘗之京師。道遇一老人。同行數里許。見其體甚傴。其足甚鈍。視他人數步頃。僅運一步。路人莫不笑之。同行若其遲而先去之。是以常獨行而無伴。後十數日。入京見老人。已先來在南門下矣。蓋其運步雖遲。而終日在道。無霎刻停息故也。余於此知爲學方法。竊自勉之而猶患不能。竟以間斷二字。枉過一生矣。嗚呼。豈獨余也。世之學者。不能終有所爲者。職此之由也。見晦夫方年富力强。前程萬里。須理鞍正轡。母或間斷停輟。終至於汗漫相期之地。勿爲此老人所笑如義林也。平日所蘊蓄。今爲晦夫發之。願晦夫勉之。 한만(汗漫)과……곳 한만(汗漫)은 세상 밖에서 노니는 신선, 즉 세상 밖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광대무변한 학문의 경지를 말한다. 옛날에 도인(道人) 노오(盧敖)가 일찍이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몽곡(蒙穀) 위에 이르러 약사(若士)라는 선인(仙人)을 만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서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子殆可與敖爲友乎?]"라고 하자, 약사가 웃으며 이르기를 "나는 저 한만과 더불어 구해의 밖에서 노닐기로 기약했으니, 내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吾與汗漫期于九垓之外, 吾不可以久駐.]"라고 하고 바로 떠나 버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淮南子 道應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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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중의 자설 洪希中字說 권도(權道)가 중도가 되는 것은 중도가 사리에 지극히 합당하고 학문의 지극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학(共學) 네 조목에서 권도가 가장 중요하고, 〈이괘(履卦)〉와 〈겸괘(謙卦)〉 등 아홉 괘에서 권도가 마지막에 처한 것이다.59)홍생(洪生) 권희(權憙)가 희중(希中)을 표덕(表德 자(字))으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반드시 제1등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는 데에 뜻을 둔 것이니, 젊은 나이의 진취를 어찌 높이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먼저 택중(擇中)과 치중(致中)의 공부가 있는 다음에 그 영역에 이를 수 있으니, 택중은 《대학》에서 이른바 치지격물(致知格物)60)이고, 치중은 《中庸》에서 이른바 계신공구(戒愼恐懼)61)이다. 이는 바퀴와 날개처럼 서로 나아가는 법이니, 바라건대 군은 더욱 체득하여 아름다운 자를 지어준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權所以爲中。中者事理之至當。學問之極功。是以共學四條。權最爲重。履謙九卦。權居其終。洪生權憙。表德希中。此其志必不以第一等讓與別人。妙年步趨。豈不可䙡。然必先有擇中致中之功。然後可造其域。擇中卽大學所謂致知格物。致中卽中庸所謂戒愼恐懼。此是輪翼交進法。顧君克加體認。勿負所以錫嘉之意。 공학(共學)……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함께 배우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도에 나가는 것은 불가하며 함께 도에 나가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서는 것은 불가하며 함께 서는 것은 가하더라도 함께 권도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고 했는데,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이 대목에 대한 홍씨(洪氏)의 말을 인용하기를, "《주역》의 아홉 괘가  '손괘(巽卦)의 덕으로 권도를 행한다.'에서 끝났으니, 권도는 성인의 큰 작용이다. 능히 서지도 못하면서 권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능히 서지도 못하면서 걸어가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쓰러지지 않을 이가 드물다.[易九卦, 終於巽以行權, 權者聖人之大用.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鮮不仆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참고로 아홉 괘는 이괘(履卦), 겸(謙卦), 복(復卦), 항(恒卦), 손(損卦), 익(益卦), 곤(困卦), 정(井卦), 손(巽卦)를 말한다. 《周易 繫辭傳下》 치지격물(致知格物) 앎에 이르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는 뜻으로, 《대학장구》 경(經) 1장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조목이다. 계신공구(戒愼恐懼)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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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이태수(李泰壽) 수표(手標) 2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辛未十一月二十六日 李泰壽 宋鎭澤 辛未十一月二十六日 李泰壽 宋鎭澤 전라북도 태인군 [着名] 1개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41_01_A00003_001 1871년(고종 8) 11월 26일에 이태수(李泰壽)가 송진택(宋鎭澤)에게 작성해 준 수표로. 송진택 친산 근처에 쓴 무덤을 내년 2월 그믐날까지 이장하겠다는 내용. 1871년(고종 8) 11월 26일에 만경(萬頃)에 사는 이태수(李泰壽)가 전주(全州)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에게 작성해 준 수표이다. 연결문서를 살펴보면, 이태수는 태인군 남면 반룡촌(泰仁郡 南面 盘龍村) 전록(前麓)에 무덤을 썼는데 이곳은 송진택 친산(親山)의 백호(白虎) 지역이었다. 그러자 지난 7월 20일에 송진택은 이태수를 관에 고발하였고 이에 이태수는 10월 그믐날까지 이장하겠다는 뜻으로 수표를 작성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약속을 이행하기 않았기 때문에 다시 송진택에게 고발당할 처지에 이르자, 내년 봄 2월 그믐날까지 이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반룡촌은 당시 태인군 감산면 반룡리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현재는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에 편입되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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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標右標事親葬用於宋鎭澤親山咫尺之地而右人累次起訟然自知理屈落課不爲就卞是遣以今年九月晦內移葬之意成手標意■■今年限葬不合山運故更爲恳乞右人以明年二月晦內移葬之意成手標以給爲去乎若過此限不移則右人雖私掘無所告 官矣甲子十月初七日手記主喪人 金堯欽[着名]舜欽 [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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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標右標事親葬用於宋鎭澤親山咫尺之地而右人屢次起訟然自知理屈落課故不爲就卞是遣以今年九月晦內移葬▣▣▣手標以給爲去乎若過限不移則持此手記告 官督掘事甲子二月十八日手記主喪人金▣▣[着名]舜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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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 김영공 영궤에 곡하다 哭韋觀金令公靈几 오산은 우뚝우뚝 흰구름은 깊은 데 烏山矗矗白雲深천고의 높은 풍도는 어디서 찾을까 千古高風何處尋세속 벗어난 문장은 가을 물의 기운이요291) 絶俗文章秋水氣추위 능멸한 절조는 늙은 솔의 마음이네292) 凌寒節操老松心세상 길은 백 갈래라 근심 끝이 없었는데 世程百轍憂無極평생 돌봐준 정에 한을 금하지 못한다오 情眷平生恨不禁다만 원컨대 돌아가 천제를 모시는 날엔 但願歸陪天帝日우레 도끼로 모진 음기를 시원히 깨소서 快將雷斧破頑陰 烏山矗矗白雲深, 千古高風何處尋.絶俗文章秋水氣, 凌寒節操老松心.世程百轍憂無極, 情眷平生恨不禁.但願歸陪天帝日, 快將雷斧破頑陰. 가을 물의 기운이요 맑은 기운을 말한 것이다. 늙은 솔의 마음이네 변치 않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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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로 가는 길에 짓다 湖西路中作 위관293)은 이미 세상 떠났고294) 韋觀已觀化지산295) 또한 산에 묻혔구나 志山又山埋호서로 가는 천리길을 湖西千里路헛되이 갔다 헛되이 오네 虛往而虛來 韋觀己觀化, 志山又山埋.湖西千里路, 虛往而虛來. 위관(韋觀) 《후창집》 권26의 〈차위관김장【상덕】견증운(次韋觀金丈【商悳】見贈韻)〉을 참고할 때, 김상덕(金商悳)이다. 세상 떠났고 원문의 '관화(觀化)'는 죽고 사는 것을 마치 변화를 보는 것처럼 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죽고 사는 것은 주야가 바뀌는 것과 같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이 눈으로 막 보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다.[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 而化及我.]"라고 하였다. 지산(志山) 《후창집》 권3의 〈지산 김 어른【복한】께 올림[上志山金丈【福漢】]〉을 참고할 때, 김복한(金福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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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20)에서 감회가 일어 月明菴有感 이곳에 이르러 느낀 바가 무엇인가 到玆何所感옛날 스승에게 절했을 때가 생각나네 憶昔拜師時모용과 곽태21)는 은혜와 정이 깊었으나 茅郭恩情重《춘추》를 강론할 때는 말이 명백했네 春秋講話淸대들보 꺾이고 태산이 무너진22) 지 몇 해인가 樑山經幾載후파와 이한23)은 평소의 뜻을 저버렸네 芭漢負平生높은 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北望登高處화산24)에 석양이 밝구나 華岑夕日明-경자년(1900, 광무4) 가을에 내가 이 절에서 처음 선사(先師)에게 인사를 드리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강론하였는데 선사께서 매우 기뻐하였다. 또 "곽태(郭泰)가 모용(茅容)의 집에 이르러 학문을 권하여 덕을 이루게 하였다. 내가 이러한 의리를 인용하여 그대의 집을 방문할 것이다." 하였다.- 到玆何所感? 憶昔拜師時.茅、郭恩情重, 《春秋》講話淸.樑山經幾載? 芭、漢負平生.北望登高處, 華岑夕日明.【庚子秋, 余初拜先師於此寺講《春秋左氏傳》, 先師喜甚.且曰?郭泰至茅容家, 勸學成德.吾引此義往訪君家?.】 월명암(月明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 있는 암자이다. 모용(茅容)과……깊었고 모용은 후한(後漢) 때 효자이며, 곽태는 후한(後漢) 때 명사(名士)이다. 당시 곽태(郭泰)가 모용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대들보……무너진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니, 여기서는 저자 김택술의 스승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세상을 떠났음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후파(侯芭)와 이한(李漢) 후파는 양웅(揚雄)의 제자이고 이한은 한퇴지(韓退之)의 제자이자 사위인데, 여기서는 후창 김택술이 간재의 제자로서 자신을 가리킨다. 화산(華山) 스승 간재가 강학하던 계화도(繼華島)의 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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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제 송사(松沙)29) 어른의 편지를 받아보고서 근래에 상황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 월고(趙月皐)30) 어른이 봉산(凰山)에 이르러 선생의 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이어 우리 고향에 들를 것이라고 하였는데, 단가(丹嘉)의 여러 곳에 보낼 안부 편지 및 조장(弔狀)을 일일이 써놓고 미리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문목(問目)에 저의 대답은, "성정(性情)을 말하자면 심(心)은 그 안에 내포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응하는 마음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주자(朱子)의 편지를 보았는데, 제 말에서 크게 옳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자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성(性)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발(已發)의 상태에서 등급에 따른 절도가 어긋나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정(情)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31)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심(心)은 동정(動靜)을 꿰뚫으며 상하를 관통하는데, 말할 수 있는 방소(方所)가 없다면 곧 진실로 성정(性情)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성정(性情)을 말하면서 심(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주로 생각하는 부분이 없고 붙어 있을 지점도 없는 것이니, 반드시 공허하고 흩어져버리는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학자로 하여금 손을 쓸 곳과 발을 디딜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경립(景立)은 빨리 돌이켜 통렬히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돌아보건대 이러한 논의에 대해 우열을 가려보아도, 한두 가지의 적확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여러 벗들과 감히 논변한 것이, 매번 이러한 부류가 잘못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스스로 오류에 빠졌고 다른 사람도 잘못하게 하였으니 매우 송구합니다. 昨得松沙丈書。知近節無故。月皐趙丈到凰山。致祭先生墓。因過吾鄕云。丹嘉諸處書問及弔狀。一一修裁。預爲等待如何。向日問目。鄙所答有曰。言性情則心包在其中。有何可對之心。後看朱子書。知此說有大不是處。朱子曰未發而知覺不昧者。豈非心之主乎性者乎。已發而品節不差者。豈非心之主乎情者乎云云。夫心者。貫動靜。通上下。而無方所之可言。則固不可與性情爲對。然若曰。言性情而心在其中。則是無主腦無着落。必至於空虛漫渙之歸。而使學者。無下手着脚處。願景立亟反而痛省之也。顧此愚劣。無一二的見。而猥與諸友敢爲論辨者。安知每每非此類也。自誤誤人。極爲悚然。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8.17.~1916.10.28.)을 가리킨다. 한말의 의병장으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 월고(趙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를 가리킨다.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스승은 기정진(奇正鎭)이고 저서로 《월고문집(月皋文集)》이 있다. 미발의 상태에서 …… 아니겠는가 해당 발언은, 주자가 호광중의 편지에 답한 「답호광중서(答胡廣仲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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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버이의 병을 돌보는 상황이 아직 현저히 좋아지는 효과가 없는지요? 밤낮으로 모시고 지키느라 자고 먹을 겨를도 없을 것이니 그 애태우고 고생하는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속담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긴 병에도 효자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하루 이틀의 병이라면 누군들 정성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쌓여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난 이후에는 그 효도와 불효의 참된 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 수가 있고,27) 난세(亂世)에 충신(忠信)이 드러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평생 동안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기를 위하여 큰 사업과 큰 의리에 쓰기 위함이니 이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으면, 끝내 생전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한이 될 것이니, 부디 힘쓰시기 바랍니다. 다음 달 초 열흘께 포천(抱川)의 인편이 있을 듯한데 소식을 들었는지요? 자인(子仁)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초지(草枝)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혹시 운람(雲藍)에게 나아간 것인지요? 장마가 그치지 않아 분명히 많이 지체될 터인데 걱정이 많습니다. 의림(義林)은 앞으로 봄이 오면 묵계(墨溪)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음강(陰江)28) 가에서 벗들을 만나 하루 동안 시원하게 회포를 풀 것입니다만, 경립과 함께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화암(華巖)에서의 약속이 멀지 않으니 경립은 며칠 동안 함께 바람을 쐴 계획을 함께할 수 없겠는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책을 보는 노력 또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다소의 의리(義理)를 쌓아두어 그때 질정(質正)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湯候尙無顯減之效否。晝夜扶衛。寢食無暇。其焦勞之狀。何以言喩。里言曰。長病無孝子。余謂長病有孝子。若一日二日之病。孰不致誠盡力。至於積月積年而後。其孝不孝之眞情可見。如疾風之勁草。亂世之忠信也。況平生讀書正爲此時用。大事業大義理。此外何有。一有未安。終爲生前難追之恨。勉之勉之。來月旬間。似有抱川便。聞之否。子仁諸人。自草枝尙未還。或爲前進於雲藍所耶。雨潦不止必多見滯。爲慮悶悶。義林向自當春到墨溪。回路會朋友于陰江之上。作一日暢須。恨景立不與也。華巖之約不遠。景立未可共爲數日溯風計耶。然則前此看書之功。亦不可少緩。須蓄積多少義理。爲其時就正之資也。 맹렬히 불어오는 …… 알 수가 있고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는 표현이 있다. 《舊唐書 卷63 蕭瑀列傳》 음강(陰江):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앞을 흐르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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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 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정(鄭)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피(子皮)는 한 가구당 1종(鍾)의 곡식으로 구휼하였고,198) 송(宋)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한(子罕)이 시행하였지만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199) 군자가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옛날 선민(先民)이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던 기풍이 먼 후대에 늠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네.우리 고장에 근고(近古)에 살았던 경신암(敬愼庵) 오공(吳公), 휘 만상(萬祥), 자 회일(會一)은 바로 또한 한씨(罕氏)와 악씨(樂氏)에 버금갈 것이다. 큰 흉년을 만나 곳간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구휼하였으니, 이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다. 지금까지도 향리 사이에서 미담으로 자자하게 전해진다. 자손이 번성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니, 이른바 마지막에 망한다는 말이 어찌 오직 고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평소 부모를 시봉(侍奉)함에 지물(志物)의 봉양200)에 빠뜨림이 없었다. 하루는 밖에서 취하여 돌아오자 그 부친이 매우 꾸짖었는데, 이후로는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생장하였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관이 한사(寒士)와 같이 수수하였다.병자년(1876, 고종13) 9월 13일에 졸하니, 탄생한 해인 병신년(1836, 헌종2)으로부터 41년이 된다. 묘는 고을의 품평(品坪) 앞 몰니등(沒泥嶝) 병좌(丙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오씨(吳氏)는 관향이 보성(寶城)이니,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연총(延寵)이 그 시조이다. 위대한 공훈과 높은 관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중엽에 이르러 휘 방한(邦翰)이 있었으니,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조부 휘 태유(泰有)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석규(錫圭)는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정후(政厚)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광엽(光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순하고 얌전하여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남(壽南)과 수극(壽極)이다. 장자의 아들은 응조(應祚)이고, 차자의 아들은 경조(庚祚), 병조(秉祚)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재홍(在鴻)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느 날 그 조카 창호(昌鎬)를 시켜 지은 가장(家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으로 삼았고 儉以持己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미쳤네. 惠以及人남은 명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니 遺芳萬口남은 경사 천추에 영원하리라. 餘慶千春 鄭饑而子皮賙粟戶一鍾。宋饑而子罕施而不書。君子曰鄭之罕。宋之樂。其後亡者乎。噫。古昔先民。貴義輕財之風。百世之下。凜凜然令人興歎。吾鄕近古敬愼庵具公。諱萬祥。字會一。卽亦罕氏樂氏之流亞也。遭歲大無。傾囷恤匱。賴活甚衆。至今藉藉爲鄕里間美談。後嗣蕃衍。文學蔚然。所謂後亡者。豈惟古人爲然。公性孝。平居侍奉。志物無闕。一日自外醉歸。其大人切責之。自後勺飮不入口。生長富饒。不喜華靡。冠服蕭然如寒士。丙子九月十三日卒。距丙申懸弧爲四十一。墓移窆州之品坪前沒泥嶝丙坐原。吳氏貫寶城。麗朝平章事延寵。其鼻祖也。偉勳嵬爵。奕世相望。至中葉。有諱邦翰。壬辰立憧。贈兵曹參判。曾祖世觀。贈戶曹參判。祖泰有。贈司僕寺正。考錫圭。贈左承旨。妣公州李氏政垕女。公娶昌寧曺氏。光葉其考也。柔婉靜嘉。閫範無闕。擧二男曰壽南壽極。長房男應祚。次房男庚祚秉祚。曾玄以下不盡錄。曾孫在鴻。余竹馬舊交世。一日伻其從子昌鎬。以所著家狀。來請碣銘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儉以持已。惠以及人。遺芳萬口。餘慶千春。 정(鄭)나라에……구휼하였고 정(鄭)나라 자전(子展)이 죽고 아들 자피(子皮)가 부친을 이어 상경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나라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직 보리가 익기 전이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피는 자전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가구당 1종(鐘)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한씨(罕氏)는 국정을 장악하여 늘 상경으로 있었다. 《春秋左氏傳 壤公29年》 송(宋)나라에……않았으니 송(宋)나라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자피(子皮)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백성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도 기근이 들자 자한은 평공에게 공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모든 대부에게 곡식을 빌려주게 하였다. 사성씨는 곡식을 빌려준 뒤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돌려받을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이 말을 듣고 "정나라의 한씨와 송나라의 악씨는 아마도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壤公 29年》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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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 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공의 휘는 영환(永桓)이고, 자는 무경(武卿)이며, 경헌(敬軒)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고려조(高麗朝)의 직학사(直學士) 경(慶)의 후손이다. 중엽에 휘 치(治)란 분이 있었으니,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일송(一松)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는 경고(景古)로, 덕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침수정(枕潄亭)이고,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천규(天奎)이다. 부친은 이수(履洙)로,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로, 두평(斗平)의 따님이다. 후비(後妣)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최(鄭最)의 따님인데,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 3월 2일에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순후하고 소박하며 신중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몸소 농사지으면서도 온화한 얼굴빛과 부드러운 용모를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직접 하였다. 세 아우와 낮에는 다정하게 마주 보며 밤에는 함께 잠을 잤다. 조용히 화락하게 지내며 일찍이 한마디 말에도 온화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함께 지내고 먹었으며 분가(分家)하지 못하게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경(敬)' 한 글자는 배우는 자의 시작이자 끝이니, 잠시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재실(齋室)에 편액을 걸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을 입신하는 터전으로 삼고 사서(四書)를 학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까지도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 가운데에서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미루어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집에서나 고을에서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만날 적에 성대하게 자세하고 화평한 풍모가 있었다. 평생 깊이 스스로 명성을 감추고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으며 산림에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최상의 경지에서 덕을 수립하고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닌 것의 풍치와 격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정종(正宗) 계축년(1793, 정조17) 9월 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해하봉(海鰕峯)의 선영 오른쪽 언덕 사좌(已坐)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증손 홍필주(洪弼周)의 장수와 귀함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으며, 명신(命新)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별세한 18년 뒤에 생을 마감하였다. 우봉촌(牛峯村) 뒤 남산(南山)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희찬(羲纘), 낙해(樂海), 백우(百禹)이고, 딸은 문혁진(文爀鎭)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현손 우방(祐邦)이 장차 제묘(題墓)201)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그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미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실로 감당할 수 없지만, 교분이 소중하여 굳게 사양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 이 넉 자의 봉분은 吁此四尺길한 분 묻힌 곳이네. 吉人之藏해하봉에 영령이 내려오니 鰕山降靈대대로 번창하리라. 永世厥昌 公諱永桓。字武卿。敬軒其號也。糸出豊山。麗朝直學士之慶後。中葉有諱治。以學行除齋郞。世稱一松先生。曾祖景古。隱德不仕。號枕潄亭。贈刑曹參判。祖天奎。考履洙。以孝著名。妣咸豊李氏斗平女。後妣晉州鄭氏通德郞最女。英廟已酉三月二日。生公于牛峯里。淳厚簡童。天稟甚粹。家貧養親。躬幹耕稼。怡色惋容。造次無違。及遭艱。泣血過毁。啜粥三年。遇忌日。極其致散。漑濯烹熟之節。必親爲之。與弟三人。晝則對床。夜則聯枕。從容湛樂。未嘗有一言失和。至老白首。一室同爨。不令析箸。嘗曰。敬之一字。是學者之成始成終。不可斯須去身。遂揭題齋顔。以爲警省之資。以小學爲立身田地。以四子爲進學蹊徑。至於程朱諸書。無不沈索硏究。體之於涵養之中。推之於踐履之際。是以其居家處鄕。應事接物。蔚然有慈詳豈弟之風。平生深自鞱晦。未嘗衒鬻於入。而婆娑邱林。聊以卒歲。其所以立於太上之門而遊於至樂之界者。風韻標致。槩可想也。正宗癸丑九月四日終。葬海鰕峯先隴右岡已坐。後以曾孫弼周壽貴。贈司僕寺正。配淸州韓氏贈淑人。命新女。有婦德。後公十八年而終。葬牛峯村後南山負乙之原。有三男一女。男羲纘。樂海。百禹。女文爀鎭。孫曾以下不盡錄。公玄孫祐邦。以將有題墓之役。請余誌其後。顧膚淺藐末。固不可以承當。而事契之重。有難牢讓。銘曰。吁此四尺。吉人之藏。鰕山降靈。永世厥昌。 제묘(題墓)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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