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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지난번에 황생(黃生)과 함께 논변한 바가 있었는데, 끝내 설득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지리멸렬하게 흐리기만 하여 그의 마음을 돌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오직 그대【東溪】14)의 힘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니 도리어 그대와 황생의 의견이 같았습니다. 이에 나의 비루한 견해가 과연 어긋나고 잘못되어 의견을 바꾸어 바로잡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나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와 황생은 신(神)자를 이(理)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을 야기시키는 듯합니다. 이 마음이 이미 쏠리는 바람에 창졸지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청컨대 주자(朱子)의 설로 질문을 하여도 괜찮겠습니까. 명덕(明德)장 주석에서 '허령(虛靈)'이라 하였고, 진심(盡心)장 주석에서는 '신명(神明)'이라 하였으며, 혹문(或問)에서 또한 '신명'이라 하고, 혹은 '허령'이라 말하고, 혹은 '신명'이라고 하였는데, 어째서입니까. 영(靈)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신(神)은 기(氣)의 신묘함이니, 영과 신은 서로 맞닿아 있고, 허와 명은 서로 응하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 말하여도 서로 차이가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신명(神明)을 이(理)로 여긴다면, 이(理)로 이(理)를 갖추고 이(理)로 이(理)를 신묘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옳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공자(孔子)께서 마땅히 '도(道)로써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라고 하였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자(張子)는 '성(性)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였지, '심(心)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본래 둘로 나뉜 것이 아니니, '구(具)․응(應)․묘(妙)․재(宰)'라고 한 것들이 모두 그 하는 바이니, 내가 이른바 "단지 이 영묘함뿐이니, 바로 이것으로 주재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주자(朱子)의 설과 반대되는 바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가 보기에 몹시 놀라서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지요. 주자께서 말하길 "허령(虛靈) 두 글자는 명덕(明德)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15)라고 하였으니, 덕(德)은 심(心)에 비하여 더욱 정밀한데, 오히려 '이미 충분하다【已足】'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심(心)의 본지(本旨)가 어찌 이보다 부족함이 있어서 단지 사물 자체만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무릇 영(靈)은 체(體)에 가깝고, 신(神)은 용(用)에 가까우며, 영은 비교적 실(實)에 해당하고, 신은 비교적 허(虛)에 해당하나, 그 형이하(形而下)가 됨은 하나입니다. 묘용(妙用)을 신(神)이라 여긴 것은, 아마도 신(神)이 바로 이(理)의 묘용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만 신(神)이 바로 이(理)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자께서 어찌 "신령(神靈)은 성(性)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겠으며, 또한 어찌 "신명(神明)은 물(物)이요, 이(理)가 아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신(神)은 천지(天地)의 묘용(妙用)이며 음양(陰陽)의 불측(不測)을 말한 것이니, 본래 무위지물(無爲之物)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무위(無爲)하면서 유위(有爲)의 주(主)가 된다고 하니, 어찌 무위함이 있으면서 신(神)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께서 말하길 "심(心)은 몸에서 주(主)가 되고, 성(性)은 심(心)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심(心)은 이기(理氣) 합일(合一)의 물(物)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능히 주재하는 자【能主宰者】는 영(靈)이요, 주재하는 대상【所主宰底】은 이(理)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주체자【能者】가 대상자(所者)를 부리는 것이 되고, 장수가 되는 것이니, 이 어찌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소이(所以)를 두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理)가 주(主)가 되는 것에는 신(神)자를 끌어다가 이(理)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연후에 이(理)가 비로소 주(主)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본령(本領)과 기(氣)를 이(理)로 착각하고 있다고 그대를 나무랐던 것은, 마땅히 남을 책망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모든 조항마다 모두 예를 들어서 열거하기 어려우나, 만약 '영(靈)이 기(氣)이고, 신(神)이 이(理)이며, 신(神)은 장수이고, 영(靈)은 병졸이며, 영(靈)은 신(神)이 아니면 영묘하지 못하고, 신(神)은 영(靈)이 아니면 신묘하지 못하다'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말들은 병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신(神)과 영(靈)을 나누어서 이(理)와 기(氣)에 배속하고서 논리를 세우는 데 어긋나지 아니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동계(東溪) 한 사람만의 견해가 아니니, 근래에 주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혹 많이들 이와 같이 합니다. 이는 심(心)이 주재(主宰)가 된다는 말을 보고서 기(氣)가 주인의 자리를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허령(虛靈)의 밖에 별도로 신(神)이라는 한 글자를 찾아서, 억지로 이름지어 이(理)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운용(運用)․작위(作爲)함은 모두 귀일되는 것이니, 만약 선유(先儒) 가운데 기질을 논하는 자가 온몸의 기질을 버리고서 희미하고 아득한 사이에서 별도로 심(心)의 기질을 찾는다면, 그 말류(末流)의 병폐됨이 어찌 주기론에만 그치겠습니까. 무릇 도리(道理)란 무형(無形)이라, 알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견해가 아직 명확하지 못한데 억지로 판별해내려고만 한다면, 이는 바람을 붙잡거나 그림자를 묶어놓는 격이니, 죽을 때까지 세월을 보낸다 한들 어찌 학문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리는 더욱 존양(存養)함에 몰두하고 정진하여서 갖가지 강학과 토론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니, 부디 늙은 나이【桑楡】16)라도 학문에 수확이 있기를 혹 희망해봅니다. 曩與黃生有所論辨。而終不回頭。顧惟滅裂。無力可回。所恃者。惟東溪之力可以助之。及讀來書。反與黃生之見同焉。可知愚陋之見。果是差謬而所當回頭者。未始非此漢也。然賢與黃生。錯認神字作理看了。是以生出無恨葛藤此意已熟。有非倉卒可解。請以朱子說質之可乎。明德註曰。虛靈云云。盡心註曰。神明云云。或問又曰。神明云云。或言虛靈。或言神明何耶。靈是氣之靈。神是氣之神。靈與神相貼。虛與明相應。故一例互言。而非有差殊也。如以神明爲理。則是以理具理。以理妙理可乎。如此則孔子當曰。道能弘道。不當曰人能弘道。張子當曰性能檢性。不當曰心能檢性也。虛靈神明。本非二物。而曰具曰應曰妙曰宰。皆其所爲則。愚所謂只此靈也。便能主宰云云。何嘗與朱子說。有所背馳。而賢者見之以爲大驚小怪耶。朱子云。虛靈二字。說明德意已足。德於心較精。而猶云已足。況心字本旨。有何不足於此。而只以當體爲言耶。夫靈近體。神近用。靈較實。神較虛。而其爲形而下者則一也。以妙用爲神者。蓋言神是理之妙用云爾。非直以神爲理也。不然朱子何以曰。神靈不可以言性。又何以曰。神明是物非理云耶。且神是天地妙用陰陽不測之謂。則本非無爲之物。今曰無爲而爲有爲之主。安有無爲而可以謂之神者耶。朱子曰心是主於身。而性是心之理也。以此言之。心是理氣合一之物也。愚故曰。能主宰者是靈。所主宰底是理。能者爲役所者爲帥。此安有所以之上復有所以之嫌耶。於此可見理之爲主。而不必引神字作理然後。理始爲主也。然則兩本領。及認氣爲理之譏。賢者恐當以責人者自責。庶乎可矣。諸條固難枚擧。而如云靈是氣。神是理。神爲帥。靈爲役靈非神不靈。神非靈不神。此等句語。無非病痛。安有分神靈屬理氣。而立論不差者乎。然此非東溪之獨見。近日主理之論。或多如此。蓋見心爲主宰之語。而恐氣之奪主也。遂於虛靈之外。別討一神字。强名之曰理。凡運用作爲。一切歸之。如先儒之論氣質者。舍周身氣質。而別求心之氣質於渺茫怳惚之間者也。其爲末流之獘。豈但主氣而已哉。夫道理無形。難知亦難言。況見之未明。而强辨不置。則如捕風繫影。卒歲窮年。寧有了期耶。此吾輩尤當汲汲存養沈索。以開種種講討之路。庶幾桑楡之收。或有望焉。 동계(東溪)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양회락(梁會洛, 1862~1935)로,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입니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허령(虛靈) …… 충분하다 주자(朱子)가 "허령불매 네 글자로【虛靈不昧四字】 명덕의 뜻을 이미 충분히 말하였다【說明德意已足】"고 하였다. 상유(桑榆) 늙은 나이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서쪽의 해가 지는 곳으로 저녁을 가리키는데, 당초에는 일이 잘못되었으나 마침내 성공하였음의 비유로 쓰인다. 마원(馬援)이 "처음에는 비록 회계에서 날개를 드리웠지만 마침내 민지에서 날개를 떨칠 수 있었으니,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 이를 만합니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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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현에 대한 제문 祭金伯顯文 오호라! 말세라 세상의 등급이 떨어져 순진함이 날로 삭막해져 온량(溫良) 개제(愷弟)하고 질실(質實) 근각(謹慤)하여 본분에 의지하고 도리를 가까이하여 세간의 갖가지 병통이 없는 것이 우리 백현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무거운 짐은 한 팔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찬 물결은 한 줌의 흙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비록 사속(絲粟)이나 모발(毛髮) 같은 사소한 어짊과 두공[欂櫨]이나 문턱[扂楔] 같은 사소한 재목이라도 많을수록 더욱 좋고 쌓일수록 더욱 기이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모두 받아서 함께 저축하여 서로 기뻐하고 뜻이 맞은 뒤에야 많은 세상일을 수습하고 많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을 줄 수 있네.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아침에 한 사람을 잃고 저녁에 한 사람을 잃어, 오직 많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줄어들고 오직 쌓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흩어지는가? 외롭고 쓸쓸하여 풍색이 좋지 못하니, 상구(上九)의 박(剝)175)이 아직 이렇게 다하지 않으니 크게 올 복괘(復卦)가 다시 어느 때에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들 약간의 사람이 궁벽한 산 적막한 물가에서 어렵게 상종하며 강사(講社)를 열고 강규(講規)를 세워 구구하게 남은 날을 위한 계획으로 삼은 것이 얼마나 부지런하였는데, 학산(䳽山)·오계(梧溪)176)·신암(愼庵)177)·근재(謹齋)178) 같은 이들이 차례로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으니 어떠하겠는가. 근래 또 송하(松下)179)를 잃었고, 또 이어서 군을 잃었으니, 남은 생애 쓸쓸하여 무료하고 의지할 곳 없어 세상만사는 따라서 장차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연히 나는 자나 깨나 탄식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오호라! 늙으신 부모님이 당에 계시고 둘째 아드님이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아 끝내지 못한 빚이 있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움이 되네. 그러나 고금의 인물들 가운데 어찌 일을 끝내고 돌아가신 분이 있었던가. 뒷사람에게 맡기면 눈을 감을 수 있고, 더구나 북풍이 불고 눈비가 내려 시상(時象)이 두려우니, 오늘 떠나는 것이 돌아가는 구름 속의 높이 나는 기러기와 속진에서 벗어난 맑은 매미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산(鰕山)의 풍월과 회촌(會村)의 수석에 남은 풍운(風韻)은 백세토록 불후할 것이네. 눈물 섞어 슬픔을 진술하여 이렇게 제사 올리니, 어둡지 않은 혼령 계실 것이니 혼령이여 흠향하소서. 嗚呼。叔季世降。淳眞日索。而溫良愷弟。質實謹慤。依本分近道理。無世間種種病痛如吾伯顯者。有幾人耶。重任非隻肘可運。奔波非捧土可塞。雖絲粟毛髮之賢。欂櫨扂楔之材。多多而益善。積積而愈奇。必須俱受倂蓄。交驩相得。然後可以收拾得多少世事。補裨得多少世敎。奈之何。近年以來。朝而失一人焉。暮而失一人焉。不惟不多而反以損之。不惟不積而反以散之。踽踽零零。風色不佳。未知上九之剝。尙爾未盡。而大來之復。更在何時耶。況吾儕若干人。間關相從於窮山寂寞之濱。開講社立講規。以爲區區餘日之計者。何等密勿。而如䳽山梧溪愼庵謹齋。次第凋謝者久矣。近又失松下。又繼而失君焉。餘生落落。無聊無賴。世上萬事。從之而可且休歇耶。慨我寤歎。淸血沾衿。嗚呼。老親在堂。次胤未冠。未了之債。此爲可憾。然古今人物。安有了事而就化者耶。付之後人。可以瞑目。況北風雨雪。時象可怕。則今日之行。安知不爲歸雲之冥鴻。蛻塵之淸蟬耶。鰕山風月。會村水石。遺風餘韻。百歲不朽。和淚述哀。奠此侑儀。不昧者存。靈其歆格。 상구(上九)의 박(剝)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를 말하는데,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있다. 음의 세력이 강해져 혼란스럽지만, 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은 상태를 말한다. 오계(梧溪) 문봉환(文鳳煥, 1849∼1890)의 호이다.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 1851~1907)의 호이다. 자는 성오(聖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다. 허전(許傳, 1797~1886)의 문인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7)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과 내부의 반란으로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와 형은 살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1902년 한때 조정의 관직을 맡은 적이 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다시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결국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윤병현(尹秉玹, 1857~?)의 호이다, 자는 치화(致化), 호는 신암(愼庵),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 지 정확하지 않다. 근재(謹齋) 김규원(金奎源, 1852∼?)의 호이다. 자는 문현(文見),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송하(松下) 안국정(安國禎, 1854∼1898)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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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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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 송병기에게 보냄 與宋外孫秉基 너를 보낸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구나. 서재를 청소하고 휘장을 내려 과연 내 말대로 집중하며 책을 읽고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마을 서당은 너무 시끄러운 것 같고 산당에서 책을 읽으면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다만 편리하고 조용한 것은 집안의 서재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일은 다만 내 뜻이 독실함에 달려 있으니, 뜻이 만약 독실하지 않고서 이전처럼 한가롭게 지내면서 한가로운 객을 대하여 한가로운 이야기나 나누거나 혹은 아침까지 자면서 늦게 일어나거나 혹은 대낮에 낮잠을 잔다면 한 해가 다 지나가더라도 어찌 성취할 수 있겠느냐. 옛날의 문장가나 현철한 이로 백 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자 가운데 그 누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지 않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느냐. 예를 들면 소강절은 10년 동안 밤에 잠을 자지 않았으며 면재 황간(黃幹)은 십년 동안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니, 모두 이에 해당한다. 천하의 좋은 일은 모두 어렵고 고생하는 가운데에서 나오니, 《주역》에서 말한 "거듭된 고난 속에서도 마음은 형통하다."201)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번 정성과 독실한 뜻은 부족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모습은 많은 너를 보는데, 이는 하찮은 병이 아니다. 평소 생활하면서 우선 모름지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용모를 단정히 하여 방만하게 하지 않은 이후에 이 마음이 안정하게 되어 산만함에 이르지 않는다. 깊이 경계로 삼아 이 좋은 시절을 잃지 말아야 한다.질문 : 《중용》에서 "중용은 지극하구나. 사람들[民]이 능한 이가 적은지 오래되었다."202)라 하였는데, '민(民)'은 일반 백성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천하 사람을 통틀어 말한 것입니까.답변 : 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통틀어 이른 것이다.질문 : 〈지인용장(知仁勇章)〉의 장하주(章下註)에서 "순은 지(知)이고, 안연은 인(仁)이고 자로는 용(勇)이니,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도에 나아가 덕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대로라면 순임금에게 있어서는 지이지만 인과 용은 없으며, 안연에게 있어서는 인하지만 지와 용은 없는 것입니까.답변 : 각각 한 가지를 들어서 말한 것이지, 순이 지하기만 하고 인과 용은 없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다.질문 : "나는 그 중에 하나도 잘하지 못한다.……"203)라 하였는데, 이는 겸손한 말입니까. 아니면 위의 문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성인도 능하지 못한 것이 있다."204)는 것을 이어서 말한 것입니까.답변 : 이는 참으로 성인의 겸손한 말인데, 그러나 그 지극함에 이르면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다.질문 : "《시경》에서 '신이 이르른 것'이라 하였다."205)라 하였습니다. 위에서는 귀(鬼)와 신(神)을 함께 들어 말하였는데,206) 여기서는 다만 '신(神)'자만 들어서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다만 '이르러서 펼친 것'207)을 위주로 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답변 : 이미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이르른 것은 '이르러서 펼친 것'이 아니더냐.질문 : "인은 사람이다."208)라고 하였는데, 《장구》에서 "인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209)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만을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사물의 신령함이 되면서 이 이치를 온전히 가진 것이 사람이다.질문 : "천하의 달도(達道)는 다섯 가지이다.……"210)라 하면서 군신을 먼저하고 부자를 뒤에 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애공을 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군신을 먼저 말하였다.질문 :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211)라 하였는데, 이 장은 공자가 애공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낮은 지위의 일을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학문은 한 가지이며 이치도 한 가지이다. 어찌 임금을 대하고 신하를 대하는 구별이 있겠느냐. 送別已有日矣。未知掃塾下帷。專精讀書。果能一如吾言否。洞齋近熟鬧。山堂曠職分。惟是穩便從容。莫如家塾耳然此事。只在於吾之篤志。志若不篤。而因循悠泛。對閑人客。打閒說話。或早寢晏起。或日中打睡。則窮歲窮年。安能有成。古之文章賢哲。流芳百世者。誰無十分刻苦功夫。而能如此耶。如邵康節十年夜不就枕。黃勉齋十年夜不解帶者。皆是也。天下好事。皆從艱難辛苦中出來。易所謂習坎心亨。是也。每見汝少誠篤之意。多悠泛之狀。此其不細之病也。日用之間。先須夙興夜寐。收歛儀形。俾不放慢。然後此心有所安頓。而不至於散漫。千萬戒之。勿失此好時節也。子曰。中庸其至矣乎。民鮮能久矣。民指庶民。抑統天下人否。人統謂之天民。知仁勇章云云。舜知也。顏淵仁也。子路勇也。三者廢其一。則無以造道而成德矣。以此言則在舜知而未仁勇。在顏淵仁而未知勇耶。各擧一事而言。非謂舜知而未仁未勇也。丘未能一云云。此盖謙辭歟。抑承上文及其至聖人有所不能而言歟。此固聖人之謙辭。而極其至。則亦有所未能焉。詩曰神之格思。上竝擧鬼神言。此獨擧神字言。何也。只主至而伸者言故耶。旣曰格。則格非至而伸者耶。仁者人也。章句仁者天地生物之心。獨言人者何也。爲物之靈。而全此理者。人也。天下之達道五云云。先君臣後父子。何也。對哀公言。故先君臣。在下位不獲乎上。此章孔子對哀公問。而言在下位之事。何耶。學一也。理一也。豈有對君對臣之別。 거듭된……형통하다 《주역》 〈감괘〉 괘사(卦辭)의 "습감은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만은 형통하니, 계속 나아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용은……오래되었다 《중용》 제3장에 보이는 말이다. 나는……못한다 《중용》 제13장에서 공자가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니,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군주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붕우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베풂을 능히 하지 못한다.[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先施之, 未能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그 지극함에……것이 있다 《중용》 제12장에 "군자가 추구하는 도는 그 용(用)이 광범위하다. 그래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어리석은 수준으로도 다 함께 알 수가 있지만, 그 도의 지극한 차원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할 면이 있다. 필부필부의 불초한 수준으로도 행할 수가 있지만, 그 도의 지극한 차원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면이 있다.〔君子之道 費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라 하였다. 《시경》에서……하였다 《중용장구》 제16장에서 "《시경》에 이르기를 '신(神)의 이르름을 예측할 수 없으니, 하물며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으니, 은미(隱微)한 것이 드러나니, 성(誠)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詩曰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夫微之顯 誠之不可揜如此夫〕"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위에서는……말하였는데 16장의 초입에서 공자는 "귀신의 덕이 됨은 성대하도다."라 하였다. 이르러서 펼친 것 주자는 16장 귀신이 덕이 성대하다는 구절의 주에서 "귀신을 한 기로써 말한다면 이르러서 펼친 것은 신(神)이 되고 돌이켜서 돌아가는 것은 귀(鬼)가 된다."라 하였다. 인은 사람이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인은 사람이니 어버이를 친히 함이 크고, 의는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임이 크다.[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라고 하였다. 인이란……마음이다 《중용》 20장의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다.〔爲政在人〕"의 주에 보이는 말이다. 천하의 달도(達道)는 다섯 가지이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니, 군신간과 부자간과 부부간과 형제간과 붕우간의 사귐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ㆍ인ㆍ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 학문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에 가깝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 天下之達道也; 知ㆍ仁ㆍ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라고 한 것을 말한다. 낮은……얻지 못한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어버이에게 순함이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할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함에는 길이 있으니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할 것이다.〔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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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심180)에 대한 제문 祭梁海心文 칠실(漆室)의 아녀자가 길쌈을 걱정하지 않은 것181)은 무슨 까닭이며, 왕동(汪童)을 상례(殤禮)로 치르지 않은 것182)은 무슨 의리인가? 천리(天理)가 인심(人心)에 뿌리를 둔 것은 부녀자나 어린 아이라고 해서 차이가 있지 않으니, 더구나 장부로 태어나 선비가 되어 선왕의 책을 읽고 선왕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거사(擧事)를 이루지 못하여 몸은 재앙의 그물에 빠져 감옥에 갇히고 먼 섬으로 유배당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가지 않았던가. 정확(鼎鑊)183)이 앞에 있고 도거(刀鉅)184)가 뒤에 있어도 정신으로 지켜 흔들리지 않고 말은 준엄하고 곧아 만 사람의 구경꾼 들을 용동시키고 천고의 의리를 밝힘이 있었던 것이 어떠하였던가. 일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성취한 것은 충(忠)이고, 몸은 비록 보존하지 못하였으나 보존한 것은 의(義)였으니, 군은 여기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네.의림(義林)은 한번 병든 것이 계속 이어져 문밖을 나가지 않은 것이 4,5년이 되어, 전에 감옥에 있을 때 능히 달려가 살피지 못하였고 뒤에 널[柩]이 돌아오던 날에 능히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 두터이 지내던 정의이겠는가. 슬픈 마음 엮어 제문을 지어 이에 영결을 고하네. 漆嫠之不緯何故。汪童之勿殤何義。天理之根於人心者。不以婦孺而有間。況生爲丈夫。身爲士子。而讀先王之書。服先王之敎者乎。擧事未就。而身陷禍罟。牢獄之囚。絶島之行。何所不至。鼎鑊在前。刀鉅在後。而神守不撓。言辭峻直。有以聳萬夫之觀瞻。明千古之義理者。爲何如耶。事雖未就而所就者忠。身雖不存而所存者義。君其於此庶乎無憾。義林一病沈綿。不出户庭。爲四五年。前未能趨省於置棘之時。後未能奔哭於返柩之日。此豈平昔相厚之誼耶。綴哀緘辭。玆以告訣。 양해심(梁海心)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을 말한다. 자는 해심, 호는 행사(杏史),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화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능주(綾州), 화순(和順)을 차례로 공격하여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점령하였다. 여세를 몰아 광주를 공격하려고 의병을 이끌고 행군하다가 판치(板峙, 현 너릿재) 전투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고,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8년에 다시 의거를 모색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어 단식 중에 절명하였다. 1990년에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칠실(漆室)의……것 이불휼위(嫠不恤緯)와 칠실지우(漆室之憂) 두 가지 고사(故事)를 합하여 말한 것으로, 자신의 일을 잊고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4년 기사에 이르기를 "과부가 베를 짜는 씨줄이 끊어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서 주나라가 망할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는 그 재앙이 자기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嫠不恤其緯, 而憂宗周之隕, 爲將及焉.]"라고 하였다. 그리고 노(魯)나라 칠실(漆室) 고을의 과년한 여자가 기둥에 기대어 울고 있기에 이웃 여인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노나라의 임금은 늙었고 태자는 어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웃 여인이 "그것은 경대부(卿大夫)가 근심할 일이다."라고 하니, 과년한 여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예전에 손님의 말이 달아나 내 남새밭을 밟아서 내가 한 해 동안 남새를 먹지 못하였다. 노나라에 환난이 있으면 군신·부자가 다 욕을 당할 것인데 어찌 여자만 피할 곳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魯漆室女傳》 《후한서(後漢書)》 〈노식전(盧植傳)〉에는 "식이 들으니, 과부가 길쌈을 걱정하지 않은 일이 있고, 칠실에 기둥에 기대어 걱정하는 슬픔이 있다.[植聞嫠有不恤緯之事, 漆室有倚楹之戚.]"라고 하였다. 왕동(汪童)을……것 왕동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동자(童子) 왕기(汪踦)이고, 상례(殤禮)는 미성년자의 죽음에 대한 상례(喪禮)이다. 왕기가 국란(國亂)에 나서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하고자 하여, 공자에게 "그에게 상례(殤禮)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미성년자라 할지라도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니 상례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답하였다. 《禮記 檀弓下》 정확(鼎鑊) 형벌의 도구로 사람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도거(刀鉅) 형구(形具)를 가리킨다. 도는 거세(去勢)하는 데 쓰는 칼이고, 거는 월형(刖刑)에 쓰는 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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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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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예조 참판 김공이 의를 베푼 것에 대한 추모불망비 嘉善大夫禮曹參判金公施義追慕不忘碑 옛날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의전(義田)을 마련하고 봉급을 나눔에 항상 종족에게 균등하게 하였으니,186) 그 의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유풍은 천년 뒤에서 생각해도 사모하고 탄상하는 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더구나 오늘날에 고인의 위대한 행실이 있음을 보게 됨에야 어떠하겠는가.고 예조 참판 김재환(金在煥) 공은 바로 삼족당(三足堂) 선생187) 휘 대유(大有)의 후손이고 증 호조 참판 휘 우직(宇直)188)의 아들이다. 젊어서 매우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자 드디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산림을 주관하여 집안의 재력이 자못 부유하게 되자 산 사람 섬김에 기쁨을 다하였고 죽은 이를 섬김에 예를 다하였고, 집을 지어 책을 쌓아서 독서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매번 흉년이나 혹 춘궁기를 만나면 구휼하여 공급하는 은혜가 고을의 가난한 이에게 두루 미쳤고, 족척(族戚)의 친한 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은의(恩意)를 다하여 기포(飢飽)와 한난(寒暖), 고락(苦樂)과 영췌(榮悴)에 한 몸처럼 서로 의지하여 애초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친소(親疎)에게 모두 마음을 얻었고, 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189) 되자 임금님의 포증이 융숭하고 무거워 지위가 참판[亞卿]에 이르렀고 장수하여 기로사(耆老社)에 올랐다. 임종에 미쳐서는 여러 종족들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니 능히 다시 서로 정을 지극히 할 수 없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전지(田地)를 나누어 하사함에 각각 차등을 두었다. 전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수십 여 집이었다.공을 이미 장사지내고 나서 여러 종족들이 모여서 도모하여 장차 비석을 세워 그 글을 적으려고 인하여 나에게 물었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베풀고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은 실로 공의 뜻이다. 그러나 남의 은혜를 받고 차마 잊지 못하는 것 또한 효자와 인인(仁人)의 마음이다. 더구나 지금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욕망의 물결이 하늘에 넘쳐 쌀알을 헤아려 밥을 짓고 섶을 저울질 하여 불을 때고,190) 와각(蝸角)의 만촉(蠻蜀)191) 같은 것이 도도하게 모두 이러하니, 공의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도는 어찌 금석에 새겨 사통팔달의 거리에 게시하여 천부(淺夫)와 소인[宵人]으로 하여금 취하여 법으로 삼을 바가 있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를 뒤에 망할 자로 여겼으니,192) 지금 공의 적선(積善)과 여록(餘祿)은 또한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감동하여 우러르던 끝에 삼가 그 대강을 서술할 뿐이다. 昔范文正公。置義田分俸祿。常均於宗族。其貴義輕財之風。追惟千載。不勝愛慕嗟賞之情。況在今日而見有古人之偉行乎。故禮曹參判金公在煥。卽三足堂先生諱大有後。贈戶曹參判諱字直子也。少貧甚。無以爲養。遂勤身幹家。以至家力頗溫。而生事盡歡。死事盡禮。築室儲書。以讀書行義爲究竟家計。每遇饑歲或窮春。賑給之惠。遍於鄕坊之貧者。至族戚之親。尤盡恩意。飢飽寒暖。苦樂榮悴。相須一體。未始有間。是以內外親疎。咸得其心。以至皐鶴聞天。天褒隆重。位至亞卿。壽隮耆老社。及其臨終也。招諸宗族謂曰。我今死矣。恐不能復相致情。遂分田地。賜各有差。其受田者。凡數十餘家。公旣葬。諸族聚而謀之。將伐石以識其書。因問於余。余曰。施而不德。此固公之意。然受人恩而不忍忘。亦孝子仁人之心也。況今世敎不明。慾浪漲天。數米秤薪。蠻蜀蝸角。滔滔皆是。若公之至行偉節。豈不可以刻之金石。揭之通衢。使淺夫宵人得有所取法乎。古人以鄭之罕宋之樂爲後亡者。今公之積善餘祿。亦豈有艾乎。感仰之餘。謹述其梗槩云爾。 범 문정공(范文正公)이……하였으니 범 문정공은 송(宋)나라 때 이름난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을 말한다. 자는 희문(希文)이고, 문정(文正)은 시호이다. 오현(吳縣) 출신이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귀하게 되었을 때,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오현의 종족이 매우 많아서 나에게 실로 친소가 있으나 조종께서 보신다면 모두 한 자손이니 실로 친소가 없다.……조종 이래로 덕을 쌓기를 백 년 남짓하여 비로소 나에게서 발복하여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니 만약 홀로 부귀를 누리고 종족의 기한(饑寒)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후일 어떻게 지하에서 조종을 볼 것이며, 지금 무슨 낯으로 가묘에 들어갈 것인가.[吾吳中宗族甚衆, 於吾固有親疎, 然吾祖宗視之, 則均是子孫, 固無親疎也.……自祖宗來, 積德百餘年, 而始發於吾, 得至大官, 若獨享富貴, 而不恤宗族, 異日何以見祖宗於地下, 今何顔入家廟乎?]"라고 하고, 오현의 일족을 위하여 자신의 봉급을 덜어 의전택(義田宅)을 설치하고 대소사에 그 경비를 충당하게 했던 일이 있는데, 이것을 의장(義庄)이라고 한다. 《小學 善行》 삼족당(三足堂) 선생 김대유(金大有, 1479~1551)를 말한다.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이다. 현량과(賢良科)로 나아가 호조 좌랑·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청도(淸道)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우직(宇直) 김우직(金宇直, 1797~1854)을 말한다. 자는 영윤(永允), 호는 지헌(止軒)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2 〈지헌 김공 묘갈명(止軒金公墓碣銘)〉에 보인다. 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쌀알을……때고 각박하여 까다롭게 따진다는 의미이다. 와각(蝸角)의 만촉(蠻蜀) 작은 것을 놓고 서로 아옹다옹하는 것을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촉(觸)나라와 오른쪽 뿔에 있는 만(蠻)이라는 나라가 영토를 다투느라 전쟁을 벌여 죽은 시체가 백만이나 되었다는 우화로,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실려 있다. 정(鄭)나라의……여겼으니 《춘추좌씨전》 노양공6(魯襄公六) 26년 조에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최후에 망할 것이니, 두 집안 모두 국정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민심이 모두 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고도 스스로 덕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악씨가 한씨보다 더 훌륭하다. 악씨는 아마도 송나라와 성쇠를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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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자후167)에 대한 제문 祭權子厚文 오호라! 자후가 어찌 여기에 그치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현인 지사(賢人志士)가 수를 얻지 못하고 중도에 요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만 지금 자후의 죽음은 가장 애석한 것이 있네.오호라! 한산(閒散)한 곳에 버려져 있다가 문득 쓸쓸한 지경에 이르고 끝내 영남의 한 포의로 마친 것은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고, 거적으로 만든 문에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소산(蕭散)하고 담박(淡泊)하여 죽은 뒤 식구들을 보호할 계책이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은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고, 맏아들이 장성하여 관례를 치렀으나 아내를 맞이하지 못하여 비록 서운할 것 같지만 짚신이나 갓끈 같은 물건도 반드시 짝이 있으니, 또한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네.오호라!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해와 별이 어두워졌으니 우리의 남은 생애 실로 족히 따질 것이 없지만 바라기는 덕 있고 명명 있는 다소의 사람들이 세간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아침에 한 사람을 인도하고 저녁에 한 사람을 깨우쳐 선한 사람이 많아지고 악한 사람이 적어지게 하여 조금이나마 회복을 도모할 날이 있기를 바랐는데,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잃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으며, 더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덜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마땅히 손을 잡고 발을 밟아168) 채찍을 나란히 하여 수레를 함께 타기를 마치 학린(涸鱗)169)이 서로 적셔주고 탕슬(湯蝨)170)이 서로 위로하는 것처럼 하여 살아서는 함께 도원(桃源)171)의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함께 소흥(紹興)172)의 선비가 되는 것, 이것이 평소 서로 기대했던 뜻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갑자기 이 세상과 우리들을 버림이 이와 같은가!고개(영남)의 구름은 막막하고 호수(호남)의 바람은 쓸쓸하네. 천고의 강개한 마음에 산은 참담해 하고 물은 오열하네. 천 리에서 제문 지어 슬픈 마음 깃들이네. 嗚呼。子厚何以止於斯。自古至今。賢人志士。未得其壽而中途夭逝者。何限。而今於子厚之逝。最有所痛惜者。嗚呼。投閒置散。淹到落莫。終之以嶠南一布衣。未足爲子厚惜也。席門磬室。蕭散淡泊。未見有身後庇眷之策。未足爲子厚惜也。胤子年壯。旣冠未室。雖若可憾。而葛屨冠緌。物必有耦。亦不足爲子厚惜也。嗚乎。天地飜覆。日星晦沈。吾輩殘生。固不足爲有無。而庶幾宿德雅望多少人。參錯在世間。使之朝牖一人。暮誨一人。至於爲善者多。爲惡者少。而冀有一分圖回之日。豈知不惟不得而反以失之。不惟不添而反以損之耶。天不悔禍。如無可爲。則當携手躡足。聯鞭同車。如涸鱗之相濡。湯蝨之相弔。生則俱爲桃源之民。死則共爲紹興之儒。此非平日相期之意耶。如何如何。遽棄斯世與吾儕若是耶。嶺雲漠漠。湖風瑟瑟。千古慷慨。山慘水咽。緘辭千里。以寓一哀。 권자후(權子厚) 권기덕(權基德, 1856~1898)을 말한다. 자는 자후,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발을 밟아 만류한다는 뜻이다. 한신(韓信)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사자를 보내자 한 고조(漢高祖)가 화를 내며 꾸짖었는데, 진평(陳平)이 고조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형세가 불리하니 왕으로 봉해주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학린(涸鱗)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 있는 물고기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말한다. 《장자》 〈외물(外物)〉에 수레바퀴 자국[涸轍]에 고인 얕은 물속에서 말라 들어가며 헐떡이는 붕어[鮒魚]가 약간의 물[斗升之水]만 부어 주면 살 수 있겠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있다. 탕슬(湯蝨) 벼룩과 이로, 서로 위로한다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목욕할 채비가 갖추어지면 벼룩과 이가 서로 애도한다.[湯沐具而蟣蝨相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원(桃源)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일컬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진(秦)나라 화를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 밖의 별천지이다. 소흥(紹興) 중국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두 번째 연호로, 1131~116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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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장에 대한 제문 祭李應長文 영남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추로(鄒魯)173)라 일컬어져 근세 이래로 노성하고 덕 있는 분들이 이어져 빛났으니, 군은 그들과 동일한 부류의 한 무리 사람이 아니겠는가.소년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기상이 우뚝해 범상치 않았고, 문로가 이미 발라 앞길이 바야흐로 펼쳐지게 되었네. 종산(鍾山)에 가을 비 내리고 영귀정에 봄바람 불면 천 리에서 서로 찾아와 정답게 창수하였고, 쌍계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난리를 만나 이루지 못하여 난리가 고요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끊임없이 왕래하기를 바랐는데, 조금 더 머물러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이렇게 돌아가실 줄 어찌 알았겠는가. 친구들은 돌아가시고 시국의 상황은 날로 심해지니 외로이 벗들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나는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옻칠은 벗겨지고 아교는 떨어지며, 거문고는 부서지고 줄은 끊어져174) 영남의 달과 호남의 구름이 천고에 아득해 졌네. 인하여 들어와 제사 드리며 감히 이것으로 영결을 고하네. 嶠南古稱東方鄒魯。而近世以來。老成宿德。繼以彬彬焉。君其非流亞一隊人耶。少年英才。磊落不群。門路旣正。步趨方張。鍾山秋雨。詠亭春風。千里相尋。唱酬款款。雙溪留約。遘亂未就。冀待風靜。復圖源源。豈知不少留待而遽爾大歸耶。知舊凋落。時象日甚。煢煢離索。誰與爲徒。漆分膠折。琴破絃斷。嶺月湖雲。千古茫茫。因人致侑。敢此告訣。 추로(鄒魯)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예교(禮敎)와 학문을 숭상하는 지방을 일컫게 되었다. 옻칠은……끊어져 교칠(膠漆)처럼 친밀한 사이와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교칠은 후한(後漢)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가 돈독한 우정을 발휘하자, 사람들이 "교칠이 굳다고 하지만, 진중과 뇌의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한 것이고, 백아절현은 춘추 시대의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거문고 소리를 잘 감상하였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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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 연정 이공 묘지명 忠義衛蓮汀李公墓碣銘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상후(相厚)193), 자는 성징(聖徵), 호는 연정(蓮汀)이다. 시호 양평공(襄平公) 휘 원계(元桂)인 완풍군(完豊君)의 후손이다. 양평공은 완산군(完山君)을 낳았으니, 시호는 양도공(襄度公), 휘는 천우(天祐)이다. 양도공은 여양군(驪陽君) 휘 굉(宏)을, 여양군은 월성군(月城君) 휘 명인(明仁)을, 월성군은 부사맹(副司猛) 휘 효상(孝常)을, 부사맹은 부사과(副司果) 휘 세원(世元)을, 부사과는 사마(司馬) 휘 학(鶴)을, 사마는 진사 휘 응종(應鍾)을, 진사는 휘 극조(克操)를, 극조는 충의위(忠義衛) 휘 전(腆)194)을 낳았다. 이분은 강수은 선생(姜睡隱先生)의 문인으로, 문학과 의로운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휘 형진(亨震)으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부친은 휘 옹(滃)195)이니, 충의위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부회(傅誨)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집(濈)이며, 생모는 영광 정씨(靈光丁氏) 도(燾)의 따님으로, 숙묘(肅廟) 을묘년(1675, 숙종1) 1월 11일에 영광(靈光) 묘장리(畝長里)에서 공을 낳았다.기우(氣宇)가 의젓하며 재능과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슬픔을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참배하고 삭망(朔望)에는 산소를 참배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든 춥든 덥든 폐한 적이 없었다. 해마다 기일이 되고 봄가을 우로(雨露)가 내리면 애통하고 서글픈 마음에 마치 부친이 살아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이나마 정성을 다해 봉양하여 기쁘게 해드렸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평소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용모를 반드시 삼갔는데 엄숙하고 숙연하여 보는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간이(簡易)하여 준엄하거나 기이한 행실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의 근원에 대해서는 또 주저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다. 여러 경서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박식하여 체득하고 실천하며 발휘하고 확충하였다. 세상의 변화와 시상(時象)에 대해서는 그윽하고 깊으며 은미하고 소홀한 곳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마치 모르는 듯이 항상 침묵을 지켰다.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말하기를 "한쪽으로 치우친 지각은 곤충도 오히려 잘할 수 있으니, 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성인은 먼저 아는 것을 지혜로 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관직은 충의위(忠義衛)를 지냈으니 이는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인한 것이다. 어느 해 12월 29일에 졸하였다. 능주(綾州)의 남쪽의 한 방리(坊里) 연화봉(蓮花峯) 부간좌(負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응상(應祥)의 따님이다. 묘소는 남평(南平) 철천(鐵川) 갑좌(甲坐)에 있다. 계비(繼妣)는 무송 유씨(茂松庾氏)로, 석량(碩良)의 따님이다. 묘소는 건위(乾位) 아래에 합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부제(從父弟) 상회(相檜)의 아들 일훈(一薰)196)을 양자로 삼았고, 딸은 풍산(豊山) 홍찬동(洪贊東)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은 왕실 계통의 훌륭한 가문으로 문망(門望)과 명성은 세상에 자랑할 만하고 문학과 재능은 당시에 주선(周旋)할 수 있었으니, 전국 시대의 공자 가운데 제(齊)나라의 전문(田文), 조(趙)나라 조승(趙勝)197)과 같다고 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도리어 남쪽 변방의 적막한 물가에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 온포(縕袍)로 패옥(珮玉)을 대신하고 단출한 음식을 진수성찬처럼 여겨 아득히 초야에 은둔하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 훌륭한 기품과 뛰어난 흥취는 먼 후대에도 옷깃을 여미게 할 것이다. 그 재주가 이처럼 높지만 덕으로써 거느리고, 그 지혜가 이처럼 밝지만 어리석음으로 지켰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고 먼저 아는 술수를 귀함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 바른 학문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단적인 참위(讖緯)나 술수(術數)에 분주하지만 스스로 터득한 자는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묘소에 오래도록 묘표가 없었는데, 6대손 이기백(李琪白)이 종친들과 도모하여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수를 열어 天啓煕運천명이 이어지네. 寶籙綿綿공의 아들과 손자 公子公孫후손이 많고 많네. 冑支兟兟묘장리에 은거하여 畝長菟裘세상 위한 도모 빛났네. 世猷赫然고상하게 멀리 떠났으니 高尙遐擧밝은 시대 일민이었네. 昭代逸民연화산이 어디인가 蓮花何山해마다 봄풀이 자라네. 春草年年아, 너희 초동, 목동들아 嗟爾樵牧베지도 자르지도 말라. 勿蒸勿薪 公姓李。諱相垕。字聖徵。號蓮汀。完豊君諡襄平公諱元桂之後也。襄平生完山君諡襄度公諱天祐。襄度生驪陽君諱宏。驪陽生月城君諱明仁。月城生副司猛諱孝常。司猛生副司果諱世元。司果生司馬諱鶴。司馬生進士諱應鍾。進士生諱克操。克操生忠義衛諱㙉。以姜睡隱先生門人。文學行義。爲世推重。卽公之曾祖也。祖諱亨震忠義衛。服襲庭訓。文行著聞。考諱滃忠義衛。妣長澤高氏傅誨女。生考諱濈。妣靈光丁氏燾女。以肅廟乙卯正月十一日生公于靈光畝長里。氣宇疑重。才性過人。早喪所怙。深懷靡逮之痛。晨夕謁廟。朔望展墳。風雨寒暑。未嘗廢弛。歲序諱日之臨。春秋雨露之濡。哀傷感惻以盡如在之誠。事母至孝。漁樵菽水。怡愉洞屬。平居冠服必勅。容色必謹。儼然肅然。瞻者起敬。及至接人。寬弘簡易。不見有峻絶阻異之行。然於義利是非之原。又未有依違假借也。淹貫群經。博洽諸子。體認踐履。發揮展拓。至於世變時象。幽深微忽。無不通曉。而恒居沈默。若無所知也。人有來問者。輒曰。一偏知覺。昆蟲猶有能之。此奚足貴乎。聖人不以先知爲知。而以務民之義爲知也。官忠義衛。蓋其世蔭也。以某年十二月九日卒。葬綾州南一坊蓮花峯負艮之原。配利川徐氏應祥女。墓南平鐵川甲坐。系配茂松庾氏碩良女。墓祔乾位下。無嗣。取從父弟相檜子一薰爲後。一女適豊山洪贊東。嗚呼。公以璿派華冑。門望聲猷。足以誇張於世。文學才華。足以周旋於時。如列國公子齊之文趙之勝。誰謂不可。而乃能潛光斂迹於南荒寂寞之濱。以縕袍代珮玉。箪瓢視列鼎。邈然遐擧。優遊卒歲。其偉韻逸趣。百世之下。可以斂衽。其才若是高矣。而將之以德。其知若是明矣。而守之以愚。以務民之義爲知。不以先知之術爲貴。其學問之正。不可誣矣。世之營營於讖緯術數之末。而自以爲得者。可以知戒矣。墓久無表。六代孫琪白謀諸宗。伐石樹隧。請其所以刻諸陰面者。余不敢以非其人辭。銘曰。天啓煕運。寶籙綿綿。公子公孫。冑支兟兟。畝長菟裘。世猷赫然。高尙遐擧。昭代逸民。蓮花何山。春草年年。嗟爾樵牧。勿蒸勿薪。 상후(相厚)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厚'가 '垕'로 되어 있다. 전(腆)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㙉'으로 되어 있다. 옹(滃)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潝'으로 되어 있다. 일훈(一薰)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一'이 '日'로 되어 있다. 제(齊)나라의……조승(趙勝)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이 모두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선비들을 좋아하여 문하에 식객 3천을 두었다. 《史記 孟嘗君列傳, 平原君虞卿列傳, 魏公子列傳, 春申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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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서【계】에게 답함 答黃國瑞【稽】 이별한 뒤 언제 만났는지 아득하여 돌이켜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이렇게 천한 목숨이 지난 몇 년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거나97) 후미진 구석을 떠돌거나 문을 닫고 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을 겪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사방의 벗들과 평소에 교유하던 곳과 비교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세상 소식과 막혀있는 듯합니다. 뜻하지 않게 노형(老兄)께서 그래도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버리지 않고 친필로 쓰신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장황하고 자세하여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편지를 펴놓고 여러 번 읽어보니 저도 모르게 고질병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다시 옛날에 모시고 뒤따르던 때의 기분이 완연합니다. 감격스럽기 그지없어 대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서신을 통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새해를 맞아 모든 복이 모인 것을 알았습니다. 신명이 덕을 지닌 군자를 도와주는 것이 이치상 응당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러러 축하드리며 실로 저의 간절한 마음에 부합합니다. 아우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 숨쉬기도 벅차고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져 애타는 심정을 달래면서 그저 빈궁한 집에서 비탄에 잠길 뿐입니다. 선대부장(先大夫丈)의 묘갈문(墓碣文)에 관한 일로 또 이미 중암 선생(重菴先生)98)을 찾아뵈었습니까? 어버이를 현창(顯彰)하는 정성이 사람을 감탄하여 우러러보게 합니다. 아우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이건만 선생께서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형들이 종유하는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곡진하게 말씀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듣자니 놀라워 얼굴이 붉어집니다. 一別會在何時。茫然不可追記矣。顧此賤命。年來經歷。無非雲雷水山。流離僻隅。杜門病廢。此於四方知舊平昔交遊之地。漠然若隔世消息。不謂老兄猶且不忘不遺。親賜手書。張皇覼縷。極其懇惻。披玩三復。不覺沈痾之祛身。而完然復是昔年陪從時氣味。感領萬萬。不知所以爲對。仍審侍省迓新。百福湊集。神相愷悌。理應如此。仰賀區區實副懇情。弟風樹殘喘。日益衰頹。撫念耿耿。只有窮廬悲歎而已。先大夫丈碣文。又已奉謁於重菴先生耶。顯親之誠。令人嘆仰。如弟何等蟻蝨。而先生何從而知之。此必兄輩。以從遊之私。而曲爲之說耶。聞之瞿然騂顔。 어려운……있거나 원문은 '운뢰수산(雲雷水山)'이다. '운(雲)'과 '뢰(雷)'로 이루어진 것이 둔괘(屯卦)이고 '수(水)'와 '산(山)'으로 이루어진 것이 건괘(蹇卦)로서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 곤고(困苦)한 처지에 놓인 것을 상징한다. 중암 선생(重菴先生) 중암은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의 호이다. 자는 치장(稚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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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지【재홍】에게 답함 答鄭敬之【在洪】 두보(杜甫)의 시(詩)에 "봄이 오면 오래도록 회포를 펼치리라고 생각했건만, 늙어가면서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 얼굴 보기 드물다."96)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궁벽한 골짜기에서 움츠리고 지내서 찾아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매번 이 노인의 시는 오로지 저를 위해서 마련하고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한번 읊조리고 한번 탄식하면서 그럭저럭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노형(老兄)께서 뭇사람이 버린 상황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고 글과 술로 저를 맞이하고 뛰어난 시로 저에게 넌지시 간하며 저에게 안부를 묻고 강론과 토의로 저를 면려하는 것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정겨움이 넘쳐났습니다. 그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그 뜻을 어찌 소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두보가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 내가 이룰 수 있으리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위로되는 마음 가득합니다. 보내신 서신에, "눈앞에 놓인 어지러운 시속(時俗)은 별달리 다스릴 방도가 없고 벗들과 의리를 강구하는 것처럼 급박한 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근심이 없는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선비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일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추구할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외부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고, 군자가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니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남은 생애가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뜨락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문을 걸고 담 구멍을 막아 세상과 서로를 잊으며 내 옷을 입고 내 음식을 먹으며 내 책을 읽어 늘그막에 조그마한 공을 거두는 것이 가장 좋은 요결(要訣)입니다. 형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杜子詩曰。春來準擬開懷久。老去親知見面稀。弟跧滯窮峽。過終絶罕。踽踽凉凉。無以爲懷。每疑此老詩偏爲此生準備而作也。一諷一歎。聊以自慰。幸有老兄不棄於衆棄之中。邀我以文酒。諷我以瓊律。訊我以寒暄。勉我以講討。不徐不疾。款款津津。其義何可忘。其義何可少耶。杜子所以準擬而未就者。安知至於今日而我得就之耶。滿心慰慰。來喩以爲目今俗擾。別無所營。從友講義。莫此爲急。此固然矣。然非惟今俗爲然。雖在昇平無虞之時。士之所當求者。此事而已。外此了無一事可求者。是以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然彼求無益於得。求在外故也。此求有益於得。求在我故也。況吾輩殘生。坐在今日世界。豈容一步於門庭之外耶。杜門塞竇。與世相忘。衣吾衣。食吾食。讀吾書。以收桑楡萬一之功。此是太上要訣。想兄已諒悉矣。 봄이……드물다 두보의 〈십이월일일삼수(十二月一日三首)〉 가운데 3수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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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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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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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敎旨金膺相爲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者咸豐五年二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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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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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3년 이병덕(李秉德)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三月日 李秉德 巡相閤下 癸卯三月日 李秉德 全羅道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使[着押] 7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903년 3월에 이병덕(李秉德)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소지(所志). 1903년 3월에 이병덕(李秉德)이 순찰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작년(1902) 11월에 이병덕은 태인현 남촌면(南村面) 고당산(古堂山)에 그의 처를 장사지냈는데, 태인에 사는 최영대(崔永大)가 치표(置標)해 둔 곳과는 백여 보 떨어진 곳이었다. 이병덕은 장사를 치를 때 돌 때문에 임시로 안치하고 돌아가 날이 풀리면 면례(緬禮)하려고 하였는데 봄이 되자 노모의 숙환이 심해져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자 최영대가 산재관(山在官)에게 이병덕을 무소(誣訴)하는 바람에 이병대는 잡혀가 독굴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이병덕은 골짜기 건너에서 앉으나 서나 보이지 않는 백보 이상 떨어진 곳의 치표 때문에 강제로 금장(禁葬)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아니며, 병환 중인 노친의 봉양을 위해서 이장할 기한을 넉넉히 달라고 정소(呈訴)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표와 무덤이 다르고 또 수백여 보 떨어진 곳은 강제로 굴이(掘移)를 할 수 없으니 갇혀 있는 자를 즉시 석방한 후 형지(形止)를 보고하라고 산재관(山在官)에게 제음(題音)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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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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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5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을 가선대부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護軍兼五衛將)에 임명(任命)하며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용양위(龍驤衛)는 오위(五衛) 중 하나로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의 병력을 관할(管轄) 하던 중앙의 군사조직이다. 그리고 호군(護軍)은 정4품직이고 오위장(五衛將)은 오위(五衛)의 군사를 통솔하던 정3품의 무관직(武官職)이다. 한편 호군에는 여러 등급이 있었다. 상호군(上護軍)은 정3품, 대호군(大護軍)은 종3품, 호군은 정4품, 부호군(副護軍)은 종4품이다. 따라서 김응상은 종2품의 품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정4품의 관직을 받은 셈이다. 이처럼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를 계고직비(階高職卑)라고 하였으며, 관직 앞에는 반드시 '행(行)'이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인 경우, 즉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높을 관직에 임명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수(守)라고 썼다. 이를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하였다. 한편 김응상의 오위장 임명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55년(철종 6) 2월 19일조에 "兵批 判書洪鍾應進 以洪在喆南獻敎爲知事 吳取善爲同知 趙然興·兪章煥爲副摠管 尹致膺爲僉知 尹義儉爲兼訓鍊都正 尹致勛·朴長晉·金膺相·安壽祿·王道林爲五衛將 趙秉協 李承游爲文兼, 李興洙爲部將 方禹龍爲守門將 柳光魯爲慶尙右兵使 金鎭浩爲高嶺僉使 黃基崙爲蝟島僉使 金玹基爲德津萬戶"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응상은 그해, 즉 1855년에 세 번의 고신을 추가로 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관직을 차례로 살펴보면,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行龍驤衛護軍),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 등이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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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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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칠월 오일 희숙과 문경이 방문했기에 함께 짓다 이 날은 선사의 제사 다음날이다. 七月五日 希淑文卿見訪 共賦【是日先師諱辰翼日】 열흘이나 병을 앓아 창동에 누었는데 浹旬吟病臥滄東은근히 늦더위에 꽃다운 걸음 해주었네 芳躅殷勤老熱中실지에 힘써 행하면 끝내 극처에 이르나 實地勉行終致極폭포 같은 문변은 모두 공으로 돌아가네 懸河文辯總歸空근심걱정으로 심화를 생기게 하지 말고 不將戚戚生心火유유한 세상사는 귓전의 바람에 부쳐야지 却把悠悠付耳風창망한 계화도가 멀리 눈에 들어오니 蒼茫華島遙入望자나깨나 그 때의 구산옹이 그립구나 寤寐當年臼山翁 浹旬吟病臥滄東, 芳躅殷勤老熟中.實地勉行終致極, 懸河文辯總歸空.不將戚戚生心火, 却把悠悠付耳風.蒼茫華島遙入望, 寤寐當年臼山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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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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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열재45) 소씨 어른이 더위를 무릅쓰고 왕림하여 悅齋蘇丈冒暑枉臨 미친 물결이 도도하지 않은 곳 없으니 滔滔無處不狂濤한 손 높이 들어 둘러막을 자 누구인가 回障誰歟隻手高청성은 어느 해에 북해에서 살았던가46) 淸聖何年居北海원량은 당시에 동고에서 휘파람을 불었지47) 元亮當日嘯東臯더위 무릅쓰고 찾아오기 참으로 쉽지 않거늘 冒炎委訪誠非易상사48)의 풍모와 정취 늙을수록 호탕하네 上舍風情老益豪앞으로 대사에 서로 권면하고 꾸짖어준다면 大事前頭交勉責어찌 세상의 일로 나의 붓을 움직이겠는가 肯將世故動吾毛 滔滔無處不狂濤, 回障誰歟隻手高?淸聖何年居北海? 元亮當日嘯東臯.冒炎委訪誠非易, 上舍風情老益豪.大事前頭交勉責, 肯將世故動吾毛?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호인데, 열재(說齋)로 많이 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화지(化知)이다. 1891년(고종2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간재 문인이다. 청성(淸聖)은……살았던가 청성은 백이(伯夷)를 가리키는데, 절개를 지켜 은둔하였음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伊尹)과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와 공자(孔子)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이윤은 성인 중에 천하를 구제하기로 자임한 자이고, 백이는 성인 중에 깨끗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인 중에 조화로운 자이고, 공자는 성인 중에 때에 알맞게 행한 자이다.[伯夷聖之淸者也, 伊尹聖之任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하였다. 또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백이가 주를 피해 북해의 물가에 거처하였는데,……[伯夷避紂, 居北海之濱,……]"라는 말이 나온다. 원량(元亮)은……불었지 원량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도잠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라는 말이 나온다. 상사(上舍) 소과인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원과 진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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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심 어른 희순 이 더위를 무릅쓰고 찾아왔기에 몹시 기뻐 함께 짓다 鍊心田丈【熙舜】冒暑來訪 喜甚 共賦 가뭄 걱정과 더위 병에 흰머리만 느는데 旱憂暑病白添頭적적한 숲 사이에는 한 방이 그윽하구나 寂寂林間一室幽반나절에 세속 벗어난 선비를 기쁘게 만나니 半日喜逢超俗士온갖 인연이 부질없는 시름임을 문득 깨닫네 萬緣方覺付閒愁오이 쪼개니 푸른 구슬 같은 맑은 서리 떨어지고 瓜分翠璧淸霜落술을 따르니 참 진주 같은 푸른 술개미497) 뜨네 酒滴眞珠綠蟻浮흥을 타면 곧바로 자주 들러 만나야지 乘興直須頻過訪지체하여 눈 속에 배 기다리지 마시라498) 差遲莫待雪天舟 旱憂暑病白添頭, 寂寂林間一室幽.半日喜逢超俗士, 萬緣方覺付閒愁.瓜分翠璧淸霜落, 酒滴眞珠綠蟻浮.乘興直須頻過訪, 差遲莫待雪天舟. 푸른 술개미 원문의 '녹의(綠蟻)'는 술 표면에 떠오른 개미 형상의 녹색의 거품으로, 술을 비유한 것이다. 흥을 …… 마시라 생각이 나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때, 폭설이 내렸다가 눈이 개어 달빛이 환한 밤에 홀로 술을 마시며 좌사(左思)의 〈초은(招隱)〉 시를 읽던 중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밤새도록 배를 타고 그 집 앞에까지 갔었는데, 대규를 만나보지 않고 문 앞에서 그냥 돌아오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애초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다. 대규를 만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 何必見戴?]"라고 한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徽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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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낙서【범환】에게 답함 答文洛瑞【範煥】 병이 쌓여 건강치 못한 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먼 곳까지 이 몸을 찾아오셨으니, 그 뜻은 건강한 사람이 평소에 서로를 따르는 것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이렇게 한번 왕림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몹시 마음이 편치 않았건만 올봄에 이르러서는 또 한 번 왕림하셨으나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또 서한을 받았건만 답장이 지체되었습니다. 모두 헛수고를 면치 못하셨는데 오늘 또 이렇게 서한으로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대체로 좌우(左右 상대방)는 마음 씀씀이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취에 구애받지도 않고 신분을 따지지도 않고 애틋한 정을 버리지 않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지극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이러한 정의를 베푼 것이 저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현자(賢者)를 좋아하고 의(義)를 즐기는 경지와 본령이 남들보다 한 등급만 높을 뿐만이 아닙니다. 고맙기 그지없어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자께서 관산(冠山)의 객이 되었다는 소식은 애초에 들었습니다. 여행 중의 조양(調養)과 근래의 안부는 어떠하십니까? 자상하고 온화하며 총명하고 준수하여 함께 학문을 익히고 함께 도에 나아갈 만했건만 공연히 뜻하지 않은 일에 괴로움을 겪고 세월만 허비하면서 지금껏 지체하고 있습니다. 뜻과 운수가 서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아직 나이가 젊고 앞길도 여전히 머니 오늘은 약간 위축되더라도 나중에 크게 뜻을 펼치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 어찌 좌우처럼 현명하건만 오래도록 이수자(二豎子)90)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건강을 잘 살피는 일에 관해서라면 모든 방도를 다하고 힘을 쏟아 점차 조화를 이루고 완전히 회복하여 갑작스럽게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以積瘁不健之身。訪人於風雪迂遠之地。其意與强健人平常時從逐。大故不同。只此一枉。已極不安。而至於今春又有一枉而見違焉。又有一書而見溯焉。皆不免虛費勤勞。而今日又有此書之存。大抵盛意所包。非夷所思。不拘形迹。不視皮毛。而眷眷不舍。愈久愈至。其旋之於無狀者。雖失照管。而好賢樂義田地本領。不啻加於人一等矣。感仰萬萬。不知爲謝。賢者之客於冠山。初聞消息也。於中調養。近節何狀。慈祥愷弟穎悟秀爽。可與共學。可與適道。而公然爲無妄所惱。曠歲曠年。彌留至此。志與數之不相及。豈若是耶。雖然年齡尙富。前程尙遠。安知今日小縮。不爲他日大伸之張本耶。其有賢如左右而久於二竪。子場中也。節宣攝理。隨方加力。以至浸和漸完。而勿遽自頹塌也。 이수자(二豎子) 병마(病魔)를 뜻한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이수자가 고황(膏肓 심장과 격막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고황에 병이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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