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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원【제보】에게 주다 與文世元【濟普】 세초(歲初)에 춘부장(春府丈)께서 왕림하여주시니 감사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침 몸에 병이 있고 아울러 손님으로 분주하여 조용히 말씀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레 인사를 나눈 이후 지금까지 매우 서글픔이 맺혀 있습니다. 달이 이미 바뀌었는데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는 정황은 편안하고 즐거우며, 체절(體節)100)도 더욱 다복하며, 여가에 닦은 학업은 해와 함께 모두 새로워져 재미가 진진하신지요? 경모하는 구구한 내 마음이 실로 애타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101) 저의 뜻은 세월과 함께 사그러들고 병세는 해와 함께 깊어만 가니 초라한 집에서 칩거하면서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끝없이 한탄하고 있습니다. 존당(尊堂)의 「겸와기(謙窩記)」는 서로 잘지내왔던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서 붓을 적셔 써서 보내드리니 살펴보시고 육정(六丁)102)에 부치시면 어떻겠습니까? 다만 시봉하며 학문하는 것을 더욱 힘써서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歲初。得春府丈枉駕。感不容喩。但身方有疾。兼以客撓未得穩承提喩。遽爾拜辭。悵耿迄今如結。月已改絃。未審侍奉歡婉。體節蔓吉。餘力居業。與歲俱新。趣味津津否。傾溯區區。實勞願言。義林意與歲去。病與年深。廢蟄窮廬。只切無窮之恨。尊堂謙窩記。難孤相厚之意。泚筆以呈。覽付六丁如何。只祈侍學加勉。以究遠大。 체절(體節)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경모하는 구구한 내 마음이 실로 애타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실노원언(實勞願言)'인데, 이는 《시경》 〈연연(燕燕)〉에, "바라보아도 미칠 수 없어 내 마음 실로 괴롭네.【瞻望弗及, 實勞我心.】"라는 구절과 〈백혜(伯兮)〉에, "그이가 그리워서 머리 아픈 것도 좋아라.【愿言思伯, 甘心首疾.】"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육정(六丁) 육정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정묘(丁卯),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상량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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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526) 愁城 세 겹으로 두른 수성은 백등527)과 같으니 三匝愁城似白登백방으로 깨뜨리려 해도 할 수 없어 괴롭네 百方解破苦未能새로 터득한 학문이 없어 마음이 꽉 막혔고528) 學無新得心茅塞선조가 전한 가업 실추해 흙 무너지는 형세네 業墜先傳勢土崩지금 세상에 누구와 함께 거궐529)이 되겠는가 今世同誰爲駏蟨소년 시절에는 망녕되이 곤붕530)에 견주었네 早年妄自擬鯤鵬모두 이치에 실어 보내는 게 기발한 계책이니 摠輸理遣爲奇計임거와 충거531)를 십 층으로 만들 필요도 없네 不用臨衝造十層 三匝愁城似白登, 百方解破苦未能.學無新得心茅塞, 業墜先傳勢土崩.今世同誰爲駏蟨? 早年妄自擬鯤鵬.摠輸理遣爲奇計, 不用臨衝造十層. 수성(愁城) 아주 풀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시름을 성벽(城壁)에 비유한 것으로, 유신(庾信)의 〈수부(愁賦)〉에 "허다한 수성은 공략해도 끝내 부서지지 않고, 허다한 수문은 흔들어도 끝내 열리지를 않네.〔攻許愁城終不破, 蕩許愁門終不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庾開府集箋註 卷1》 백등(白登)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는 산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7일간 이 산에서 포위를 당해 있었는데, 흉노의 선우 묵특(冒頓)이 포위망 한 쪽을 터주어 탈출하였고, 이후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고 한다. 《史記 卷93 韓信列傳》 마음이 꽉 막혔고 학문이나 수양을 중단하여 마음이 거칠어지고 막혀 버렸다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일찍이 고자(高子)에게 이르기를 "산중의 오솔길이 잠깐 사람이 이용하면 길이 되고, 한참 동안 이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나서 막아 버리나니, 지금 그대는 띠풀이 마음을 막아 버렸도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 今茅塞子之心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下》 거궐(駏蟨) '공공거허(蛩蛩駏驉)'라는 짐승과 '궐'이라는 짐승을 합칭한 말로, 서로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다. 궐이라는 짐승은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서 잘 달리지 못하므로, 항상 공공거허에게 감초(甘草)를 뜯어 먹여 주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그의 등에 업혀 도망쳐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淮南子 道應訓》 곤붕(鯤鵬) 《장자(莊子)》의 우화에 나오는 큰 물고기와 새의 이름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背〕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남쪽 바다로 갈 때 9만 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 하였다. 《莊子 逍遙遊》 임거(臨車)와 충거(衝車) 모두 성을 공격할 때에 쓰는 병거(兵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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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재욱 의 일을 듣고 시를 지어 그를 장하게 여기다 聞安義士【在旭】事, 詩以壯之 태산 아래의 안 의사는 泰山之下安義士곧은 기개로 상제에게 상달했네 直氣上達帝座筵한 소리 우레 같은 근래의 일을 一聲轟雷近日事내가 기쁘게 듣고 두 어깨 으쓱했네 我喜聞之聳雙肩어찌하여 운수가 백육471) 때를 만났나 夫何運値百六際금수의 자취472)가 온 나라에 두루했네 蹄跡交遍率土濱근래 머리 깎는 풍조가 곳곳에서 성하나 邇來削風在處競그야말로 선비가 변치 않아야 할 때이네 正是士子不變辰아, 그대가 당한 것은 실로 도리 없었으니 嗟君所遭眞無理경관의 협박이 화급하였네 警官脅迫火急然내 머리는 잘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我頭可斷髮不斷그들 꾸짖기를 상산의 안씨473)처럼 하였네 罵之有若常山顔한 몸으로 세 명의 장사를 대적해내니 一身敵過三健兒힘은 이미 지쳤으나 간담은 서늘했네 力旣疲兮心膽寒저들이 또 만 가지로 설득해 마지않았으나 彼又萬端說不已일이 끝내는 예사로운 사이에 있지 않았네 事竟不在尋常間공자는 인 이룸을 말하고 맹자는 의를 취했는데474) 孔曰成仁孟取義일찌감치 이를 갖추어 마음속에 새겨두었네 早已辦得銘心肝품속에 있던 칼로 두 번이나 목을 찔렀으니 懷中有刀再刺頸한 죽음에 어찌 다시 여생을 아까워했으랴 一死那復惜餘年좌중에는 일순간에 풍파가 일어났고 座中頃刻生風波흥건히 쏟아진 피는 색이 검고 누랬네 淋漓濺血色黃玄비록 저들의 위세가 폭염과 같았지만 雖以彼之威燄暴무심히 음식이 목에 넘어가듯 놀라고 겁 먹었네 驚㥘無心食下咽의약품을 써서 치료하여 완쾌되었지만 爲施醫藥療且完사례하노니 선생의 의는 얼마나 장한가 稱謝先生義何壯나는 알겠네 의사의 한 줌 피가 吾知義士一掬血사람들이 새 풍조에 흔들림을 그치게 할 줄 止得時人新潮盪문산의 독약과 동계의 칼날475)은 文山腦子桐溪刃일이 모두 천년토록 부끄러울 바가 아니네 事同千載非所恥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사와 같았다면 全邦人皆如義士애초에 의사가 한번 죽으려 하지 않았으리 初無義士辦一死나는 알겠네 의사의 한 줌 피가 吾知義士一掬血훗날에 반드시 하늘을 되돌릴 조짐임을 兆得他日必返天이로부터 우리들이 영광을 함께하니 從此吾輩與有光의사를 위해 친히 말고삐를 잡고 싶네 願爲義士親執鞭아, 의사가 능히 이와 같이 하였는데 嗚呼義士能如此세유476)가 어찌 각자 마음을 돌아보지 않으랴 世儒盍各顧心田 泰山之下安義士, 直氣上達帝座筵.一聲轟雷近日事, 我喜聞之聳雙肩.夫何運値百六際? 蹄跡交遍率土濱.邇來削風在處競, 正是士子不變辰.嗟君所遭眞無理, 警官脅迫火急然.我頭可斷髮不斷, 罵之有若常山顔.一身敵過三健兒, 力旣疲兮心膽寒.彼又萬端說不已, 事竟不在尋常間.孔曰成仁孟取義, 早已辦得銘心肝.懷中有刀再刺頸, 一死那復惜餘年?座中頃刻生風波, 淋漓濺血色黃玄.雖以彼之威燄暴, 驚㥘無心食下咽.爲施醫藥療且完, 稱謝先生義何壯?吾知義士一掬血, 止得時人新潮盪.文山腦子桐溪刃, 事同千載非所恥.全邦人皆如義士, 初無義士辦一死.吾知義士一掬血, 兆得他日必返天.從此吾輩與有光, 願爲義士親執鞭.嗚呼義士能如此, 世儒盍各顧心田? 백육(百六) 액운(厄運)을 말한다. 4천 5백 년인 1원(元) 중에 다섯 번의 양액(陽厄)과 네 번의 음액(陰厄)이 찾아오는데, 양액이 1백 6년마다 있게 되므로 백륙회(百六會)라 한다. 《漢書 律歷志上》 금수(禽獸)의 자취 금수는 오랑캐, 즉 청나라나 일본 등의 외세를 뜻한다. 송(宋)나라 구규(丘葵, 1244~1333)의 시에 "거북 규범, 말 그림 같은 상서가 모두 안 보이니, 짐승과 새 발자국만 참으로 분분하네.〔龜範馬圖俱寂寂, 獸蹄鳥跡正紛紛.〕"라고 하였다. 《釣磯詩集》 상산(常山)의 안씨(顔氏) 당나라 때 사람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상산군(常山郡)을 지키다가 순절한 안고경(顔杲卿)을 가리킨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고는 사사명(史思明)으로 하여금 상산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고경이 군사가 적어서 성이 함락되어 사사명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서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끝내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 顔杲卿》 공자(孔子)는……취했는데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지사와 인인은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는 일은 없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 일은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한 것과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삶도 내가 하고자 하고 의도 내가 하고자 하는데,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으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문산(文山)의……칼날 지조를 지키려 죽으려다가 실패한 일을 말한다. 문산은 송(宋) 말엽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호인데, 그는 원군(元軍)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다가 왕유청(王惟淸)에게 사로잡히자 뇌자(腦子 독약)를 먹었으나 죽지 않았다.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인데, 그는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세유(世儒) 속된 유자(儒者)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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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이 보내준 시에 화답하여 그 운을 넓혀 절구 10수를 짓다 和敬山見贈廣其韻, 成十絶 원래 우리 도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從來此道古猶今전수함에 애당초 두 가지 마음 없었네 傳受初無兩樣心어찌하여 끝내 서로 비슷한 곳 힐난해 爭柰終難相似處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침음하게 하나 令人却復費沈吟나중에 입문한 나는 지금까지 힘쓰나니 後乎滄叟勉而今외람되이 선사의 권장하는 마음 받았네 猥荷先師勸獎心들보 꺾이고483) 학문 황폐해 성취도 없어 樑折學荒無所就세 번 탄식하고 벗의 시 보기도 부끄럽네 三嘆羞見故人吟어제와 오늘 좋은 밤의 밝은 달이 皓月良宵昨復今백 리 떨어진 두 사람의 마음 비추네 照來百里兩人心그 가운데서 생각이 어떠냐고 묻노니 箇中問是如何想강한과 풍천484)을 읊은 것이 있으리라 江漢風泉有所吟천리가 지금처럼 어두운 적이 없으니 晦冥天理莫如今게다가 의관이 본래의 마음을 잃었네 亦復衣冠失本心괴담과 이단의 말을 어찌 차마 들으랴 怪說異言那忍聽흐느끼는 게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네 啾啾有似鬼號吟진경485)을 누가 지금은 볼 수 없다 하는가 秦鏡誰言不見今간사한 아첨을 비춰 마음을 피할 수 없네 照得奸佞莫逃心어떤 사람이 다시 영주의 홀기를 잡을까486) 何人更操寧州笏석로가 지은 명487)을 한 번 읊조려 보네 石老之銘爲一吟경산의 시는 지금 세상에 드무니 敬山詩律罕如今《시경》에서 이런 마음을 얻었네 三百篇中得此心벗을 그리워하는488) 진중한 뜻으로 伐木停雲珍重意때때로 나를 위로하는 시를 보내네 時時慰我寄高吟내 반백 남짓인 지금이 부끄러우니 愧吾半百有餘今일마다 이룬 것 없이 본심 저버렸네 事事無成負素心시도 힘을 다하지 않고 공연히 써서 詩亦謾題非致力목에 부딪는 불평한 시만 괜히 짓네 觸喉空作不平吟원컨대 함께 맹세하고 지금부터 결단해 願同立誓斷從今또 번잡함을 줄여 한 마음을 수렴하게 且省紛紜斂一心정미한 뜻은 찾기 어려워 실로 두렵고 精義難尋眞可懼어쩔 수 없는 성병489)에 또 시만 읊네 無聊聲病亦徒吟옛적엔 학문뿐이었으나 지금은 끊어졌으니 古惟是學絶當今어떻게 옆 사람 보내 마음을 깨닫게 할까 怎遣傍人識得心기린이 울었던 일을 당시에 공자가 기록했고 麟泣當年宣聖筆천 길을 날던 봉황이 노나라 광사 탄식했네490) 鳳翔千仞魯狂吟지금 이전을 보듯 훗날 지금을 보리니 今視于前後視今우러러 보며 옛사람의 마음을 알았네 仰觀同認古人心마음이 가을 강의 달처럼 깨끗하니 心如淨似秋江月백세토록 전하여 다투어 칭송하리 百世應傳爭誦吟 從來此道古猶今, 傳受初無兩樣心.爭柰終難相似處, 令人却復費沈吟?後乎滄叟勉而今, 猥荷先師勸獎心.樑折學荒無所就, 三嘆羞見故人吟.皓月良宵昨復今, 照來百里兩人心.箇中問是如何想, 江漢風泉有所吟.晦冥天理莫如今, 亦復衣冠失本心.怪說異言那忍聽? 啾啾有似鬼號吟.秦鏡誰言不見今? 照得奸佞莫逃心.何人更操寧州笏, 石老之銘爲一吟?敬山詩律罕如今, 《三百篇》中得此心.〈伐木〉〈停雲〉珍重意, 時時慰我寄高吟.愧吾半百有餘今, 事事無成負素心.詩亦謾題非致力, 觸喉空作不平吟.願同立誓斷從今, 且省紛紜斂一心.精義難尋眞可懼, 無聊聲病亦徒吟.古惟是學絶當今, 怎遣傍人識得心?麟泣當年宣聖筆, 鳳翔千仞魯狂吟.今視于前後視今, 仰觀同認古人心.心如淨似秋江月, 百世應傳爭誦吟. 들보 꺾이고 스승이나 철인(哲人)의 죽음을 의미한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별세할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樑木其壞乎! 哲人其萎乎!〕" 하였다. 《禮記 檀弓上》 강한(江漢)과 풍천(風泉) '강한'은 돌아간 스승의 크나큰 덕을 칭송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간재 전우를 가리킨다. 공자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스승의 도덕을 칭송하며 거부하기를 "안 된다.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나위가 없으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풍천'은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을 병기한 것인데, 이 두시는 모두 제후국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이므로 멸망한 왕조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진경(秦鏡) 남의 속마음이나 사정을 잘 감식하는 눈을 의미한다. 진 시황에게 신령한 거울이 있어 능히 사람들의 오장(五腸)을 비추어 보는데 여자가 사심이 있으면 곧 쓸개가 부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였다. 《西京雜記》 어떤……잡을까 백성들의 미신을 타파해 줄 관원이 나오길 바란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때 공도보(孔道輔)가 영주(寧州)의 좌막으로 있을 때 천경관(天慶觀)에 요사스러운 뱀이 나타났는데, 군(郡)의 자사(刺史)는 하루에 두 번 뱀을 찾아가 보았고, 온 고을 사람들은 용이라 생각하여 공손하게 뱀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자 공도보가 요사스러운 뱀이 백성을 속이고 풍속을 어지럽힌다고 하면서 홀로 뱀을 때려 죽여 주민들의 미신을 확연히 타파했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석로(石老)가 지은 명(銘) 《청음집(淸陰集)》권15에 실린 〈경갑명(鏡匣銘)〉을 말한다. 석로(石老)는 호가 석실산인(石室山人)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을 높여 이른 말이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이미 맑은 데다 또한 이미 밝아서 아름답고 추한 모습 다 드러나네. 부지런히 갈고 또한 깨끗이 털어 티끌이나 때가 끼지 못하게 하라.〔旣淸旣明, 莫遁姸醜. 磨之拂之, 勿受塵垢.〕" 벗을 그리워하는 〈벌목(伐木)〉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잔치를 베풀고 붕우를 초대하여 즐기는 것을 노래한 것이며, 〈정운(停雲)〉은 도연명(陶淵明)이 친우를 생각하며 지은 사언시인데, 자서(自序)에서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1》 성병(聲病) 시를 지을 때 평측(平仄)을 조합하여 구성하는데, 그 성조에 치우치는 병폐를 말한다. 그 구성이 일정한 규칙에 들어맞는 것을 성(聲)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병(病)이라 하기도 하는데, 흔히 성률(聲律)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천……탄식했네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으면서 노나라의 문인들이 뜻은 고원하지만 중도를 잃을 위험이 있는 광사(狂士)들이므로 노나라에 돌아가 이들을 바로잡아 이들을 통해 후세에 도(道)를 전하고자 한 일을 말한다. 《論語 公冶長》 원문의 '봉상천린(鳳翔千仞)'은 초야에 묻힌 인재가 세상을 관망한다는 말이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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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어른이 산북리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聞悅齋丈到山北里 열옹의 의기는 늙을수록 호방한데 悅翁意氣老猶豪게다가 문장 예봉도 예리한 칼과 같네 更有詞鋒若利刀시절은 자장521)이 남국 유람한 때 아니고 時匪子長翫南國생각은 원량이 동고에서 휘파람 불던 것과 같네522) 思同元亮嘯東皐유문의 본래 모습은 의관에 남아 있고 儒門本色餘冠服신선의 맑은 의표처럼 머리털이 하얗네 仙骨淸標皓鬢毛정토사에서 강론하자는 약속 있으니 淨土講論知有約육경은 성인의 찌꺼기523)라고 하지 마소 六經莫謂聖人糟 悅翁意氣老猶豪, 更有詞鋒若利刀.時匪子長翫南國, 思同元亮嘯東皐.儒門本色餘冠服, 仙骨淸標皓鬢毛.淨土講論知有約, 六經莫謂聖人糟. 자장(子長)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그는 20세 때부터 남쪽의 회계(會稽)와 우혈(禹穴)과 구의(九疑)로부터 북쪽의 문수(汶水)와 사수(泗水)에 이르기까지 중국 각지를 두루 유람하였다고 한다. 《史記 太史公自序》 생각은……같네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의 은둔하겠다는 의지가 도잠(陶潛)과 같았다는 말이다. 원량(元亮)은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진(晉)나라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라고 하였다. 육경(六經)은 성인의 찌꺼기 다만 문자에 의해서 전해진 성현의 말은 마치 술을 다 짜고 버린 찌꺼기와 같다는 것으로, 고인의 진면목을 추구하지 않고 껍데기만 익힘을 일컫는 말이다. 제 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바퀴 만드는 사람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而夫.〕"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莊子 天道》 '육경'은 유가(儒家)의 기본 경전인 《시경》ㆍ《서경》ㆍ《주역》ㆍ《춘추》ㆍ《예기》ㆍ《악경》을 이르는데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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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홍공 행장 竹溪洪公行狀 공의 휘는 정모(珽謨), 초휘(初諱)는 수정(壽挺), 자는 의범(懿範), 호는 죽계(竹溪)이다.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일송(一松) 휘 치(治)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 천규(天奎)로,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다. 증조의 휘는 이발(履潑)이고, 조부의 휘는 영구(永九)이며, 선고(先考)의 휘는 양우(亮禹)이다. 전비(前妣)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지옥(之玉)의 따님이고, 선비(先妣)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호(允鎬)의 따님이다. 인릉(仁陵 순조(純祖)의 능호) 정해년(1827, 순조27) 10월 6일에 우봉리(牛峯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무릇 출입하거나 장난칠 때 한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품속에 넣어 가서 어버이에게 드렸다. 집안이 늘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 자주 잇지 못하였으므로,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땔나무를 하고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곁에서 봉양하였다. 부모가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였고 가업이 그 덕분에 흥성하였다. 11세에 어버이의 병이 매우 심해지자 목 놓아 울면서 실신할 듯이 하였다. 한밤중에 홀로 의원을 찾아가는데 깊은 산 험준한 고개에서 맹수가 우는데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벽에 의가(醫家)에 이르렀다. 의원이 그에게 물어보고서 사정을 알고는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지극한 정성이 이러하니 어버이의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홍만(弘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김씨가 졸하고, 병오년(1846, 헌종12)에 밀양 박씨(密陽朴氏) 재호(在浩)의 따님을 맞아들였는데 평소에 서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하였다. 박씨 또한 온화하고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며 부도(婦道)를 잘 지켰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고, 갑자년(1864, 고종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심하고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는 도구와 상례를 거행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여 한결같이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을 따랐으니, 대개 살아 계실 때 섬기며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禮)로써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에게는 아우 하나가 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밤낮으로 단란하게 모여 다정하게 웃고 이야기하였으며, 음식과 의복 등 온갖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이를 미루어 확대하여 족친과 붕우, 이웃 마을과 향당에까지 미쳤으니, 자상하고 화락한 풍습이 두루 퍼졌다. 일찍이 성내는 말이나 화난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에 남들도 감히 바른 이치가 아닌 것을 가지고 간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젊었을 때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가숙(家塾)을 세우고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여 자식과 손자를 가르쳐 권면하고 힘쓰게 한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가문의 규범을 세워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강론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서 예의 바른 풍속으로 사귀는 법을 밝혀서 상서(庠序)와 교원(校院)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 계획하고 경영한 것이 그의 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침수정(枕漱亭)은 선조 팔우공(八愚公)이 지은 것인데 퇴락한 지 오래되었다. 공이 일찍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족질(族侄) 채주(埰周)와 함께 도모하여 중건하여 날마다 족친, 빈붕(賓朋)과 더불어 그 정자에서 소요하고 시를 수창하였으니, 그 풍모와 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앙모하게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 11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월 13일에 부춘동(富春洞) 굴등(窟嶝)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근의 사우들이 제문을 지어 와서 조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아들은 형주(馨周)·근주(垠周)·기주(基周)이고, 딸은 이진표(李晉杓)·구치모(具致模)에게 시집갔다. 형주의 아들은 우팔(祐八)·우경(祐璟)이고, 근주의 아들은 우열(祐烈)이며, 기주는 재종숙부(再從叔父) 각모(珏模)의 양자로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어려서나 장성해서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노년에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군자나 장자(長者)로 추중(推重)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홍우경(洪祐璟)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천태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후대에 남길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어 삼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珽謨。初諱壽挺。字懿範。號竹溪。系出豐山。一松諱治後。高祖諱天奎通德郞。曾祖諱履潑。祖諱永九。考諱亮禹。前妣慶州金氏之玉女。妣昌寧曺氏允鎬女。以仁陵丁亥十月六日。生公于牛峯里第。公性至孝。自幼凡出入嬉戱。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懷而供之。家素貧。菽水屢空。躬幹漁樵。親執滫瀡。左右就養。父母賴以安。家業賴以興。十一歲。親癠甚劇。號泣不能支。夜半獨行尋醫。深山峻嶺。虎豹叫嘷。公少不畏。曉頭至醫家。醫問知驚異曰。至誠如此。親疾必瘳。甲辰聘淸道金氏弘萬女。乙巳金氏卒。丙午聘密陽朴氏在浩女。平居相待如賓。朴氏亦溫仁柔嘉。克執婦道。歲壬子丁外艱。甲子丁內艱。哀傷慘怛。見者無不釀涕。送終之具。執喪之節。必誠必信。一遵情文。蓋其生事死葬。可謂終始以禮矣。公有一弟。友愛甚篤。日夕團聚。笑語款洽。飮食衣服。凡百資用。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隣里鄕黨。慈詳愷悌之風。浹洽周徧。未嘗以忿言戾色。加於人。人亦不敢以非理干之。嘗恨少貧失學。立家塾延賢師。敎子課孫。勸勉甚至。立門規講敦睦之義。修洞約。明禮俗之交。出以風議於庠序校院之間。其所以謀畫經紀。多其力焉。枕漱亭先祖八愚公所構。而頹廢久矣。公嘗懷慨歎。與族侄埰周。合謀重建。日與族親賓朋。逍遙酬唱於其中。其風儀趣想。令人可仰。歲己丑十一月七日。考終于正寢。以三月十三日。葬于富春洞窟嶝子坐原。遠近之友。操文來弔者甚衆。男馨周垠周基周。女適李晉杓具致模。馨周子祐八祐璟。垠周子祐烈。基周出爲再從叔父珏模後。餘皆幼。嗚呼。幼壯孝悌。老而好義。知不知。皆以君子長者推之而無異辭。辛卯春。祐璟抱家狀。訪余於天台寓舍。請不朽之託。余以無似。牢辭不得。謹次如右云爾。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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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덕림재 안공 행장 德林齋安公行狀 공의 휘는 수책(壽策), 자는 인직(寅直), 호는 덕림(德林)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의 후손이다. 회헌 선생의 증손 휘 원형(元衡)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죽성군의 증손 휘 을겸(乙謙)이 영암(靈巖)의 고을원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장흥(長興)에 살았다. 고조의 휘는 영룡(迎龍)이고, 증조의 휘는 한징(漢徵)이다. 조부의 휘는 택인(宅仁), 호는 해옹(海翁)으로, 장흥부의 동쪽 건산촌(乾山村)에 대대로 살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도움을 받아 생활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며 구걸하거나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면 문득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또 풀어 준 노비가 백여 구(口)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몽원(夢元), 선비(先妣)는 청주 김씨(淸州金氏) 판관(判官)을 지낸 용채(龍采)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부덕(婦德)까지 겸비하였다. 정묘(正廟) 정사년(1797, 정조21) 11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처럼 의젓하였으니, 비록 잠시 잠깐도 개구리 걸음걸이 하는 사이에도37) 어버이의 뜻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해옹공(海翁公)으로부터 대수가 내려오면서 가세가 기울어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심지어 농사짓고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며 품팔이하거나 장사하는 것까지 직접 하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비록 곤경에 처하여 떠돌아다니거나 온갖 세파 속에서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녀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번번이 책을 폈으니, 옛날에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거나38) 나뭇짐을 지고 독서한 자39)와 같았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어머니를 모실 적에 효심을 다해 봉양하여 어머니에게 질병이 있으면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숟갈 뜨면 자기도 한 숟갈 뜨고 어머니가 두 숟갈 뜨면 자기도 두 숟갈 떴다.40) 하루는 어머니가 옴이 올랐는데, 갑자기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비자(枇子)를 사용하면 낫는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니 이 과일을 파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자 과연 차도가 있었다. 또 어머니가 재차 학질에 걸려 몇 년 동안 낫지 않았다.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든 어버이가 계시는데 외출하였다가 들어가면서 드릴 맛있는 음식이 없구나.' 하였다. 마침 거위 무리가 강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 지팡이를 던져 거위 한 마리를 잡아서 마침내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올렸는데 학질이 곧 나았다. 김씨 부인이 언젠가 꿈속에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이것을 받으라."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공이 없어서 김씨 부인이 나가서 받으니, 바로 종이 뭉치 한 봉(封)이었다. 사람들이 "상천에서 복을 내렸으니 필시 전답 문권(文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가세가 날로 형통해졌다. 중년에 능주(綾州)의 칠송리(七松里)로 이사하여 우거하면서 대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채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였다. 한 방에 도서를 채우고 세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었으니, 유연히 석인(碩人)의 잊지 못하는 흥취41)가 있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반드시 삼가서 행하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와 가속들로부터 안팎의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이 엄정하여 조리가 있었다. 족친과 빈붕(賓朋)을 접대할 때면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들어 허물없이 터놓고 지냈다.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2월 9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간리촌(澗里村) 뒤 애운동(靄雲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 진방(震芳)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첫째 아들은 영({氵+穎}), 둘째 아들은 협(浹)이고, 딸은 서춘구(徐春球)에게 시집갔다. 영은 후사가 없고 세 딸을 두었으니, 문방호(文邦浩)·민정호(閔禎鎬)·이교일(李敎馹)에게 시집갔다. 협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국정(國禎)으로 장방(長旁)의 양자로 갔고, 딸은 양재선(梁在璇)에게 시집갔다. 국정(國禎)은 창섭(昌燮)·종섭(宗燮)·홍섭(弘燮)을 낳았다. 아, 국정은 선사(善士)이다. 독서하고 학문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가업을 실추하지 않고 성대하게 능양(綾陽)의 명문가가 되게 하였다. 창섭 형제는 모두 스무 살 안팎 무렵에 특출하다는 소문이 났고 삼가고 조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으니, 안씨(安氏)의 남은 복록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덕림공(德林公)께서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니, '선행을 쌓으면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훈계42)가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옛날에 선친의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들었다. 지금 국정이 기술한 가장(家狀) 1편을 얻어서 읽음에 당시 귀로 들은 것처럼 역력하니, 슬픈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다. 삼가 이처럼 서술한다. 公諱壽策。字寅直。號德林。勝朝文成公晦軒先生諱裕後。先生曾孫有諱元衡。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曾孫有諱乙謙。宰靈巖。因寓于長興。高祖諱迎龍。曾祖諱漢徵。祖諱宅仁號海翁。世居府東乾山村。愛人好施。賴活甚衆。行見寒乞僵路。輒解衣衣之。又白放奴婢百餘口。考諱夢元。妣淸州金氏判官龍采女。端淑貞靜。婦德備至。以正廟丁巳十一月某日生。公自幼不戲動不妄言。凝然如成人。雖造次蛙步之頃。未嘗一咈親意。自海翁公下世。家計無聊。公盡力就養。至於耕稼漁樵。行傭賃販。身親爲之。好讀書。雖在流離艱阻。世故萬端之中。而必以書自隨。少有間隙。輒披閱。如古之帶經而鋤。負薪而讀者。十九遭外艱。哀毁過禮。奉慈幃。盡孝養。有疾晝不離側。夜不就寢。一飯再飯。惟親是視。一日患疥瘡。忽夢有老人曰。用枇子可愈。夢訖。有鬻是果者。果見差愈。又患再瘧。積年彌留。一日自外歸家。自念病親下。出入無一味可以歸供。適見羣鵝滿江。因擧杖投之。中一鵝。遂持以供之。瘧疾乃差。金夫人嘗夢有仙人自天而下。呼之曰。孝子某受此。時公不在。金夫人出而受之。乃一封紙塊也。人以爲上天降福。必是土田文券也。自是家享漸息。中年移寓于綾州之七松里。杜門斂跡澹寂自養。一室圖書。三逕花竹。悠然有碩人不諼之趣。平日夙興夜寐。定省必謹。掃洗必淨。自子弟家衆。至內外婢僕。分職授事。嚴有條理。待族戚接賓朋。皆歡欣相得。絶其畦畛。以哲宗己未二月九日卒。得年六十三。葬于澗里村後靄雲洞亥坐原。配完山李氏震芳女。生二男一女。長氵+穎。次浹。女適徐春球。氵+穎無嗣。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浹一男一女。男國禎出后長旁。女適梁在璇。國禎生昌燮宗燮弘燮。嗚乎。國禎善士也。讀書學問。修身謹行。使家業不墜。蔚然爲綾陽名家者。昌燮兄弟。皆妙年騰異。謹勅從學。安氏餘祿。豈有量哉。此皆德林公積累不食之報。吾夫子積善餘慶之訓。豈不信然乎。公我先友也。昔者侍先人側。得聞公之行義。今得國禎所述家狀一編。讀之歷歷如當日耳聞。不勝悲感之私。謹述之如此云爾。 개구리……사이에도 개구리 걸음은 선 자리(脚下)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 경서를……하거나 전한(前漢)의 예관(兒寬)에 대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마다 독송하였다.[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8 兒寬傳》 나뭇짐을……자 육조(六朝) 시대 서진(西晉)의 문신이자 학자 유지(劉智)는 어릴 때 가난하여 나뭇짐을 지고 글을 읽었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어머니가……떴다 《소학(小學)》〈계고(稽古)〉에 "문왕이 병이 나자 무왕은 관과 띠를 벗지 않고 봉양하였다. 문왕이 한 숟갈 먹으면 무왕도 한 숟갈 먹고, 문왕이 두 숟갈 먹으면 무왕 또한 두 숟갈 먹었다.[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再飯, 亦再飯.]"라는 말이 나온다. 석인(碩人)이……흥취 석인은 어진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선행을……훈계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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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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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인재 기공 행장 忍齋奇公行狀 인재 기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先輩) 항렬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는 공의 현덕(賢德)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공의 후사(後嗣)인 기종섭(奇{土+宗}燮)과 벗이 되고 또 공의 손자인 기세진(奇世搢)과 서로 교류하면서 공의 전형(典型)에 대해서 개괄할 수 있었다. 또 그 후에는 집안에 보관된 글을 보고 공의 평소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 같은 고을이고 또 같은 시대였건만 백발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 속의 고인(古人)으로 대하였구나! 행장과 같은 글은 진실로 나처럼 보잘것없는 자가 손을 대면 안 되지만, 고금을 돌이켜 보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공은 휘가 동규(東奎)이고 자는 윤집(允集)이다. 기씨(奇氏)는 세계(世系)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지역의 옛 지명)에서 나와서 신라, 고려 시대부터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인 휘 건(虔)은 응교(應敎)를 지낸 휘 찬(襸)을 낳고 휘 찬은 호가 물재(勿齋)인 휘 진(進)을 낳았다. 물재는 아우인 복재(服齋)43)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화를 당하자 마침내 광주(光州)로 물러나 지냈다. 재랑(齋郎)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대림(大臨)을 낳았는데, 대림은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선생 기대승(奇大升)44)의 형으로 공에게는 11대 선조이다. 고조는 휘가 종태(宗泰)이고 증조부는 휘가 상호(商頀)이며 조부는 휘가 사봉(師鳳)이다. 고(考)는 휘가 하진(夏震)이며 비(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달권(達權)의 따님이다. 순종(純宗) 무자년(1828, 순조28)에 능주(綾州 전라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되어서는45) 응대 진퇴(應對進退)나 평소의 과정(課程)이 스승이 이끌어 주거나 깨우쳐 주지 않아도 법도를 따르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대학》에 더욱 정통하였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요결(要訣)로 삼았다. 이해하지 못하면 손에서 놓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정이 격앙되어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뜻을 이해하게 되면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기뻐하는 얼굴빛과 온순한 용모로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필요한 물품을 모두 넉넉하게 공급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이를 미루어 친족과 벗들에게 미치니 공경스러우며 즐겁고도 편안하여 원망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는 정성스럽게 알려주고 상세하게 일깨워 듣는 자가 자기도 모르게 성심을 다해 흠모하고 복종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시렁 위에 있던 책자(冊子)가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가져간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 간 것이 아니라 빌려 가면서 미처 주인에게 알리지 못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돌려주었다. 향리(鄕里)의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킨 뒤 마침내 원한이 쌓여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공만이 깨우치고 화해시켜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게 하였다. 공의 충직하고 순후한 마음이 만물에 미치고 정성과 신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경오년(1870, 고종7)에 중병에 걸렸다. 하루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부모를 섬기는 것이 보잘것없었다. 지금 또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니 불효한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구나. 너는 반드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섬겨서 네 아비가 땅속에서 품고 있을 한을 위로해다오." 하였다. 끝내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양평(加陽坪)의 선영 아래 을좌(乙坐)에 매장하였다가 뒤에 배위(配位) 염씨와 합장하였다. 배(配)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백우(柏佑)의 딸이다. 착하고 온순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덕(婦德)에 모자람이 없었다. 을유년(1825, 순조25) 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으며 이름은 종섭({土+宗}燮), 정섭(楨燮)이다. 손자는 세진(世搢), 세엽(世曄), 세만(世萬)이며 손녀는 선영기(宣永基)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은 장방인 종섭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물살이 도도하게 흐르듯 세상이 점차 쇠퇴하여 민간과 선비들의 풍습이 실로 한심스러워할 만하고 향당(鄕黨) 선배의 근후(勤厚)한 풍도는 끝내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이를 붙잡아 되돌려 놓는 것을 지금 세상의 책무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자손이 되어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할 방도만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진(世搢)이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사우(士友)들과 종유(從遊)하고 있으니 집안의 학업이 그에게 의뢰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忍齋奇公。吾鄕先輩行也。余小少聞其賢。而未及承顔。其後得與其遺胤琮燮友。又得其孫世搢相過從。而公之典刑。可以槪矣。又其後得家藏文字。而公之平生行義。可以詳矣。嗚乎。旣同鄕矣。又倂世矣。而至於白首之年。始對以卷中古人耶。狀行之文固非淺劣所可犯手。而撫念今古。不勝曠感。謹据家狀。公諱東奎。字允集。奇氏系出幸州。自羅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虔。諡貞武。生諱襸應敎。生諱進。號勿齋。弟服齋。遭己卯之禍。遂退居光州。除齋郞不就。贈左贊成。封德城君。生大臨。贈左承旨。高峰先生大升之兄也。於公爲十一世。高祖諱宗泰。曾祖諱商頀祖諱師鳳。考諱夏震。妣河東鄭氏達權女。以純宗戊子。生公于綾州牛峯里。幼而騰異。不類凡兒。及就傅。應對進退日用課程。不待提勅而循循不怠。尤邃於大學。以格致誠正爲一生受用之訣。不得不措。激昂憤悱。至有會意。輒怡然如也。性至孝。怡色婉容。左右服勤。志物之養。莫不畢給。推以至於族戚儕友。愷悌樂易。人無怨言。敎授生徒。指意懇到。開喩詳悉。使聽者不覺誠心向服。一日失架上冊子。傍人欲推尋。公曰。非竊去也。必是借去而姑未及告於主人耳。未幾。有人果謝而還之。鄕里有人與人忿爭。遂成嫌隙。積年不平。人無有能解者。公獨喩和之。使如平昔。蓋其忠厚之及物。誠信之感人。多此類也。歲庚午沈疾。一日語其子曰。吾平日事親無狀。今又嬰疾。勢將不起。不孝之罪。莫大於此。汝須善事二親。以慰乃父泉下之恨也。竟以十一月二十七日卒。葬于加陽坪先隴下乙坐合祔。配坡州廉氏柏佑女。和順勤儉。婦德無闕。乙酉生。後公十七年卒。擧二男。曰琮燮楨燮。孫世搢世曄世萬。孫女宣永基。長旁出也。餘皆幼。嗚乎。世級漸下。如水淊淊。民風士習。實可寒心。而鄕黨先輩長厚之風。終不可得以復見耶。縱不能把持挽迴以爲斯世之策。而爲人子孫者。獨不思所以繼述闕祖者乎。世搢有志學問。方從遊士友間。庶幾家庭之業。賴之而不墜於地。余有望焉。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의 호이다. 자는 자경(子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로 《복재집(服齋集)》,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8년(명종1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벼슬이 대사간ㆍ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스승에게……되어서는 10살 무렵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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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夜久不寢。咄歎旣往之失學。庶幾來者之可追。感作拙韻。因以自警。兼示文兄。 太極無聲臭。厥初賦與眞。陰陽有動靜。氣質或不均。凡聖皆貴學。不學不成人。琢玉方成器。磨鏡始祛塵。曰余安暴棄。空長七尺身。處世費衣食。摘埴徒逡巡。漸與先哲遠。轉於下愚親。謾催犬馬年。鬂髮蒼蒼新。一言無爲法。半武不足倫。屈指三十七。跳丸日日循。今夕是何夕。庚子正上旬。三陽方向燠。萬物欲回春。願學天行健。君子必體仁。吾兄曾有盟。無辭共霓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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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와 처사 문공 행장 竹窩處士文公行狀 공의 휘는 영수(永壽), 자는 극여(極汝), 호는 죽와(竹窩)이다. 세계(世系)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공의 상조(上祖)이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대대로 능성(綾城)에 살았으며 충효와 시(詩)ㆍ예(禮)를 세업(世業)으로 삼아 사림(士林)에 이름이 났다. 고(考)는 휘가 혁진(爀鎭)이고 호는 오재(鰲齋)이며,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영환(永桓)의 딸이다. 순조 신유년(1801, 순조1)에 우봉리(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홍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곰[熊]을 홍씨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잘 기르거라. 이 아이가 너희 집안의 천리마이다." 하였다. 공이 태어난 뒤 소자(小字)를 웅(熊)이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기와 국량이 남다르고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선량하였다. 아이들과 놀면서 한 번도 다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구하면 차마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지 못하고 반드시 가슴에 품고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갑술년(1814, 순조14)에 큰 흉년이 들어 쌀 동이가 텅 비게 되었다. 공은 겨우 10여 세였건만 항상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부모의 몸에 편하고 입맛에 맞는 물품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형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채소, 나물 따위일지라도 반드시 한 그릇에 담아 형과 함께 먹었다. 그해에 온 가족이 돌림병에 걸려 형이 죽고 양친이 모두 위태로웠다. 공은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양친이 복용할 약을 맛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때때로 형의 널을 어루만지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몇 달이 지나 양친이 모두 회복되자 향리(鄕里)에서 감탄하며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학업에 전력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자손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일에 더욱 간절하게 마음을 쏟았으며 의방(義方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오산(金鰲山)의 뛰어난 산수를 좋아하여 초가를 엮고 오솔길을 열어 도서(圖書)와 금(琴)과 술을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렸으며 빈객이나 붕우가 이따금 이르면 시를 창화(唱和)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자못 흥취를 다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7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배(配)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문길(文吉)의 딸로 성품이 부드럽고 온순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얌전하여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묘(墓)는 작약산(芍藥山) 아래 정좌(丁坐)에 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정휴(定休)는 백부의 후사가 되었고 효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둘째는 석휴(碩休)이다. 딸은 광산(光山)의 이선호(李瑄鎬), 강화(江華)의 최익교(崔益敎), 전주(全州)의 이문종(李文宗)에게 출가하였다. 정휴(定休)의 아들은 봉환(鳳煥), 석휴(碩休)의 후사가 된 용환(龍煥), 천휴(千休)의 후사가 된 기환(麒煥), 그리고 귀환(龜煥)이 있다. 아, 공은 곧 옛날의 유로(遺老)와 같은 인물이다.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이름이 났고 장성해서는 신의(信義)로 알려졌으며 늙어서는 염정(恬靜 물욕 없이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칭송을 받았다. 말을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일을 처리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서 고을에 이르고 친척에서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을 흠모하고 공경하면서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의림(義林)60)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때 공에 관한 얘기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주저하면서 실행하지 못하고 일도 많아서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이제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선인(先人)의 또래가 차례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 박아(博雅)하고 장자(長者)의 후덕한 풍모를 가진 향당(鄕黨)의 원로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봉환(鳳煥)이 공의 유장(遺狀)을 안고 와 나에게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청하였다. 나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진실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지만, 요행스럽게 혼자만 살아남은 인생이 머리가 흰 늙은이가 되어 향당 선배의 유언(遺言)과 유사(遺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통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永壽。字極汝。號竹窩。系出南平。江城君諱益漸。其上祖也。至中葉。世居綾城。以忠孝詩禮著爲世業聞于士林考諱。爀鎭。號鰲齋。妣豐山洪氏永桓女。以純廟辛酉。生公于牛峯里第。先是洪氏夢一老人持熊與之曰。善養之此其汝家千里駒也。旣生。小字曰熊。自幼志局不羣。天姿慈諒。與兒曺遊嬉。未嘗爭競。得一美味。不忍先入口。必懷而獻之。當甲戌大無。甁罌枵如。公方十餘歲。常漁採爲養。而便身適口之物。未嘗乏焉。與其兄友愛甚至。得蔬食菜咬。必共一器而食。是歲渾家犯疫。兄歿。兩庭俱危。公露禱嘗藥。夜不解帶。時時撫柩哀號。居數月。兩庭皆蘇。鄕里莫不歎賞。嘗以不得專力學業爲恨。敎子訓孫。尤惓惓致意。導以義方者。無所不至。愛金鰲水石之勝。結茅開逕。圖書琴酒。日夕嘯咏。賓朋時至。唱和酬酢。頗盡其趣。以乙丑七月二十七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五。配公州李氏文吉女。婉順貞靜。閫範無違。墓在芍藥山下丁坐合兆。二男三女。男定休。系伯父。以孝薦剡。碩休。女光山李瑄鎬江華崔益敎全州李文宗。定休男鳳煥龍煥系碩休后。麒煥系千休后。龜煥。嗚乎。公卽古之遺老也。幼以孝弟著長以信義聞。老以恬靜稱。出言而人無不信。處事而人無不服。自家庭至鄕閭。自親戚至朋友。皆愛慕欽欽。各得其心。義林幼侍先人側。得聞公久矣。而因循多故。未得一承顔範。今爲三十年間事耳。先人年行。次第奄歿。而鄕黨耆舊。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復見矣。鳳煥抱其遺狀。請予脩潤。以予無似。固不敢下手。而孤露餘生。至老白首。得見鄕黨先輩遺言遺事。其悲感爲何如也。玆不敢辭。 의림(義林) 본 행장의 지은이인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이다.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3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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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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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만회당 윤공 행장 贈嘉善大夫吏曹參判晩悔堂尹公行狀 공의 휘는 태행(泰行), 자는 낙행(樂行), 호는 만회당이다. 윤씨(尹氏)는 세계(世系)가 파평(坡平)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시조 휘 신달(莘達)61)은 태사(太師)를 지냈고, 휘 집형(執衡)62)은 시호가 문정(文靖)이고, 휘 관(瓘)63)은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휘 위(威)는 시호가 문헌(文獻)인데 남원(南原)에서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므로64) 자손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병화(兵火)를 당하자 능주(綾州)의 해망산(海望山) 산중에 우거(寓居)하면서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분이 공의 10대조이다. 5대조 휘 상석(商錫)은 기근을 겪은 해에 온 고을의 공세(公稅)를 대신 납부하여 현종조(顯宗朝)에 성은(聖恩)을 입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고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증조는 휘 창종(昌宗)이고 조부 휘 일주(壹周)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필중(必中)이고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완산(完山) 이인석(李寅錫)의 딸로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으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순조(純祖) 신미년(1811, 순조11) 9월 1일에 회덕리(懷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진솔하며 겉으로 꾸미지 않았고 성품은 온화하고 침착하였으며 교유하는 이들이 모두 선사(善士)였다. 어려서부터 지조(志操)를 지녀 말하고 웃는 것도 범상치 않았고 일찍이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언급한 적이 없으나 선악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거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절(儀節)은 추위가 혹독하고 덥거나 비가 내리더라도 조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8세에 서당 선생에게 나아가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배웠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정하고 읽고 사색하는 일을 밤낮으로 멈추지 않았다. 장로(長老)들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을 아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평범한 애들과 달라서 성취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하였다. 본래 집안이 곤궁하여 공은 물고기 잡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몸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는 기쁘게 하기에 힘썼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공경을 다 하였으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시(詩)와 예(禮)를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사촌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음식은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고 술도 혼자 마시는 일이 없어 화락한 기운이 일가에 넘쳐났다. 몸가짐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여 업신여기거나 예의 없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일 처리는 주도면밀하고 세심하여 망설이거나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정상이 마음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서로 왕래하는 빈객과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지만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친의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피를 마시게 하여 3일이면 끝날 수명이 늘어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상을 치를 때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전(奠)을 올리고 곡(哭)을 하는 의절(儀節)이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빈(殯)65)이 끝난 뒤에도 상복(喪服)의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았고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얼굴빛은 검어지고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 옛 효자에 뒤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아버지의 상을 치르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유서(遺書)를 남기며 이르기를, "내 죽음은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선(善)하지도 못하면서 오만하게 날뛰며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보다는 정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또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천도(天道)를 거스르면 화가 생겨나고 천도를 따르면 복이 이른다. 선(善)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惡)은 따라서는 안 된다. 겸허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검소함과 간략함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삼가고 조심하며 책을 읽어 집안의 선한 자손을 만드는 것이 내가 평생 바라던 일이다." 하였다. 하루는 장경일강(莊敬日强)66) 4자를 벽에 써놓고 아침저녁으로 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 윤리(倫理)를 소중히 여기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며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뒤쫓지 않아, 곤궁함을 고수(固守)하고 졸렬(拙劣)함을 편안히 여겼다. 좋은 계절을 만날 때마다 술을 빚고 안주를 장만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으로 마을의 오랜 친구들을 불러 술에 취해 소요하면서 하루를 즐겼으니 공은 풍류와 흥취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어떤 인물인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금상(今上) 신묘년(1891, 고종28) 9월 2일에 편안히 생을 마쳐 본리(本里) 안산(案山)의 오른쪽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일엽(日燁)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계배(繼配)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해인(海仁)의 딸로 1녀를 두었다. 아들 병임(秉臨)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여산(礪山)의 송두옥(宋斗玉)에게 출가한 딸은 선씨 소생이고 홍기모(洪基謨)에게 출가한 딸은 박씨 소생이다. 종질(從姪)인 병현(秉玹)을 후사로 삼았으며 병현은 광산(光山) 이주태(李周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정섭(定燮)을 낳았다. 정섭이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내게 가지고 와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행장을 적을 덕망과 문장을 지닌 인물이 못되지만, 병현이 나의 벗이니 참으로 그의 말이 징험할 만하기에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어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취사(取捨)를 기다린다. 公諱泰行。字樂行。號晩悔堂。尹氏系出坡平。爲東方大姓。始祖諱莘達太師。有諱執衡諡文靖。諱瓘諡文肅。諱威諡文獻。討賊南原。以功食菜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當兵火。寓綾之海望山中。隱德不仕。寔公十世。五世祖諱商錫。遇歲饑。替納一邑公稅。顯宗朝蒙恩贈參判。鄕人士立碑頌之。高祖諱弘道通政。曾祖諱昌宗。祖諱壹周贈通政。考諱必中贈參議。妣完山李寅錫女。婦德甚備。無違君子純廟辛未九月一日公生于懷德里體相峻茂眞率不爲表襮。和厚詳審。所交遊皆善士。幼有志操。言笑不凡。未嘗短長人。而淑慝甚嚴。天性至孝。定省之節。進退之儀。雖祈寒暑雨。少無闕焉。八歲就學塾師。授小學孝經等書。嚴立課程。俯讀仰思。晝宵不輟。長老奇而愛之曰。此兒異於凡。進就不可量也。家素貧窶。漁樵耕牧。無不躬幹。其養親也致其樂。其接人也致其敬。以承庭訓詩禮爲家法。與諸從弟。友愛甚篤。食必均味。酒無獨酌。怡怡之氣。洋溢家門。其持身也和而莊。侵侮好狎之意。不見於貌。其處事也。詳而密。依違苟且之狀。不介于心。過從之賓。遊賞之人。連絡不絶。接待款厚。無一人不歡。親疾甚劇。露禱灌血。得延三日之命。終以天年。擗踊之儀。奠哭之節。一遵禮制。旣殯不脫絰帶。寒不重衣。暑不揮扇。面墨行素。不下於古孝也。遭內艱。亦如前喪。一日遺書曰。吾死不過三年。匪類鴟張。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又戒子孫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以違。惡不可以從。持己以謙恭。處家以儉約。謹勅讀書。做人家好子孫。吾畢生所願也。一日以莊敬日强四字。書于壁右爲朝夕常目之資。平日愛好倫理。敦尙儒雅。不慕名利。不趨權勢。而固窮守拙。每遇佳節。釀酒備肴。邀鄕黨知舊。婆娑徜徉於山水奇絶處。以成終日之樂。風流興致。有異於人。此其非出塵之表。何以若此乎。令人可想。當宁辛卯九月二日考終。葬本里案山右艮坐原。配寶城宣氏日燁女。擧一男一女。繼配咸陽朴氏海仁女。擧一女男秉臨早死。無育。女礪山宋斗玉宣氏出。洪基謨朴氏出。以從姪秉玹爲后。娶光山李周泰女。生男定燮。定燮以大人之命。抱家狀。有一言之託。顧非其人。秉玹余友。信其言可徵。序次之如右。以竢立言君子裁擇焉。 시조 휘 신달(莘達) 윤신달(尹莘達, 893~973)으로 918년에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 벽상익찬 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휘 집형(執衡)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윤금강(尹金剛)의 아들이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아버지로, 검교 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냈으며,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휘 관(瓘) 윤관(尹瓘, ?~1111)으로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102년에 지공거를 맡았고 이어서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 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고 이후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자 조정의 결정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였다.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래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종(仁宗) 8년(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하면서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李氏)의 시호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역적을 …… 받았으므로 윤위(尹威)는 1200년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관찰사가 되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본관을 남원으로 하면서 파평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장경일강(莊敬日强)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군자는 장중하고 공경함으로 날마다 굳세어지고, 안일함과 방자함으로 날마다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정대부 행 능주군수 손공 행장 通政大夫行綾州郡守孫公行狀 공의 휘는 인용(麟鏞), 자는 익삼(益三), 호는 신암(愼庵)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휘 부(富), 사도(司徒)를 지낸 밀성군(密城君) 휘 윤(贇)은 모두 상계(上系)의 이름난 조상이다. 문과(文科)를 거쳐 목사(牧使)를 지낸 휘 책(策),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휘 비장(比長)67)은 모두 중엽(中葉)의 이름난 조상이다. 제학공(提學公)은 호가 입암(笠巖)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및 당시의 저명한 석학들과 더불어 15학사(學士)로 불리었으며, 금남공(錦南公) 최부(崔溥)와 임금의 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벼슬을 내려놓고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으로 물러났다. 고조인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증조인 휘 덕효(德孝)는 생원을 지냈다. 조부 휘 몽두(夢斗), 고(考) 휘 처상(處祥)은 모두 은덕(隱德)을 지녔다. 비(妣)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광인(光仁)의 딸로 품성이 인자하고 순후하며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잘 갖추었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5월 21일에 창평현(昌平縣) 외남면(外南面) 사봉리(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과 기질이 따듯하고 선량하며 외모가 뛰어나 사람들이 큰일을 담당할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3세가 되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땅을 뒹굴고 통곡하여 어린 나이에 끝없이 슬퍼하는 모습에 곁에서 보던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외롭고 어린 나이에 일가도 없이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처지를 말로 형용하기 어렵지만,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화평한 기색과 부드러운 말투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평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자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등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쓰지 않은 일이 없었고, 몸에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하여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애통해하여 몸이 야위었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도구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준비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기일(忌日)을 맞으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한 뒤 고기를 썰고 삶는 일을 몸소 하였고 제사에 임해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목소리와 용모를 직접 뵙는 듯이 하였다. 오랫동안 부지런히 애를 써서 중년에 이르러서는 집안의 재력이 넉넉해졌다. 그러자 가까운 조상을 위한 제전(祭田)과 먼 조상을 위한 묘제(墓祭)를 지낼 땅을 마련하고 또 가난한 대종가(大宗家)와 소종가(小宗家)를 도와주었다. 가난하여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모든 친족에게는 그때마다 곳간을 털어 도와주었다. 안채에서는 무당의 술책을 쓰지 않았고 사랑채에서도 장기나 바둑 따위의 유희를 즐기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의복을 걸치지 않았고 보고 즐기기 위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효성과 우애, 근면과 검약, 청렴과 조용함, 소박하고 진실함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궁극의 계책으로 삼았다. 악류(惡類)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친척과 마을 이웃들을 경계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따르는 무리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머리를 깎고 사느니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게 낫다. 너희들은 절대로 세상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라." 하였다. 을유년(1885, 고종22)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함종 부사(咸從府使)가 되었다. 임인년(1902, 광무6)에 능주 군수(綾州郡守)에 제수되었다. 비로소 부임하여 갑진년(1904) 여름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고을을 다스릴 때는 명성과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며 녹봉(祿俸) 수천을 덜어 고을 전체의 호역(戶役)에 응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석벽에 새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적어두었다. 고을에 최 충의공(崔忠毅公)68)의 정려(旌閭)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공이 물자를 대주어 수선하게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노사(蘆沙)69), 화서(華西)70) 두 선생은 실로 유문(儒門)의 정맥(正脈)이다. 문하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문인(門人) 가운데 면암(勉庵)71)과 송사(松沙)72) 같은 우러러볼 만한 여러 어른이 계시다. 너희는 이들을 뒤따라 학문을 익혀야 한다." 하였다. 공은 면암의 소장(疏章)을 볼 때마다 그의 직언(直言)과 당론(讜論)에 탄복하면서 면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하였다. 을사년(1905, 광무9) 여름에 병에 걸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았다. 11월이 되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궐연(蹶然)히 일어나 이르기를, "국가 대계(大計)의 망극(罔極)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고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위독해져 약을 넘기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여러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고치고 선행을 보면 반드시 이를 따르는 것이 수신(守身)과 보가(保家)의 첫 번째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기를, "부인(婦人)은 순종을 덕으로 삼고 목소리가 규방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집에 전권(錢券)이 있자 가져다 찢으며 말하기를, "단지 다툼의 단서만 일으킬 뿐이다. 내가 선행을 남기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화를 물려주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세수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자리로 나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니 곧 12월 15일이었다. 향리(鄕里)에서 모두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원근에서 서둘러 조문을 오는 이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주(州)의 가옥치(佳玉峙) 마을 위에 있는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계효(季孝)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영수(英壽)의 딸이며, 그 다음 계배(系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홍경(弘璟)의 딸로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영렬(永烈)은 선씨가 낳았고, 진사(進士)인 영하(永夏)와 조병상(曺秉相), 나영성(羅營成)에게 출가한 딸들은 백씨가 낳았다. 아들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과 유재홍(柳在弘)과 문제철(文濟哲)에게 출가한 딸은 문씨가 낳았다. 손자 이하는 모두 적지 않는다.내가 같은 고을에 살면서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입은 지가 오래이다. 매번 화락하면서도 신중하고 성실했던 공의 풍도(風度)를 볼 때마다 애호하는 마음이 한없이 일었다. 또 다섯 아들과 다섯 사위, 많은 손자가 뜨락에 가득하고 흰 머리와 붉은 슬갑(膝甲)73)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렸으니 이치가 잘못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아, 하늘이 원로(元老)를 남겨 두려고 하지 않아 공의 목소리와 풍채, 용모는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자손이 많고 남은 복이 끝나지 않았으니 어찌 공의 지업(志業)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영렬(永烈)이 자기 삼종제(三從弟)인 영모(永謨)를 내게 보내어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행장을 적기에 적합한 덕망과 문장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고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을 근거로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였을 뿐이다. 公諱麟鏞。字益三。號愼庵。孫氏系出密陽。吏部尙書淸城府院君諱富。司徒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文科牧使諱策。弘文館提學諱比長。皆中葉顯祖也。提學公號笠巖。與佔畢齋金先生宗直。及當時名碩。稱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同修國史。燕山朝退休扶安葛村。高祖諱興新贈副護軍。曾祖諱德孝生員。祖諱夢斗。考諱處祥。皆有隱德。妣高興柳氏光仁女。德性仁厚。閫範甚備。以純廟辛卯五月二十一日。生公于昌平縣外南面四峯里第。性氣溫良。體相峻茂。人知爲遠器。三歲而遭外艱。匍匐顚倒。孺哀罔極。傍人無不感涕。孤弱零鮮。生長外家。其情景難狀。而侍慈幃。以怡色婉辭。慰悅其志。家素貧甚無以爲養。漁樵耕牧。凡百事務。無不服勤殫力。使便身適口之物。畢給於前。其遭故也。擗踊毁瘠。送終凡具。必誠必信。俾無餘憾。遇忌諱之辰。沐浴操潔。裁割烹飪。躬親爲之。臨祭而悽愴怵惕。如見音容焉。積累勤苦。至中身而家溫力足。於是置近代祭田。及遠世墓祭之土。又補大小宗家之貧者。凡族親之貧而未能婚與葬者。輒傾囷助之家不用巫覡之術。庭不設博奕之戲。身不着華靡之服。手不持玩好之物。惟以孝友勤儉。廉靜澹泊。爲身家究竟計。非類之變。戒族戚隣里。俾勿浸染。薙令之行。語諸子曰。薙髮而生。不如存髮而死。汝輩愼勿爲世變所遷移也。乙酉除繕工監監役。壬辰咸從府使。壬寅拜綾州郡守。始赴任。甲辰夏解歸。其居官也。著有聲績。捐廩數千。以應一邑戶役。竪碑又磨崖。以識不忘。邑有崔忠毅公旌閭。歲久頹圮。公爲之出力以繕修。嘗語諸子曰。蘆沙華西兩先生。實儒門正脈。縱不能及其門。門人可仰如勉庵松沙諸丈在焉。此汝輩從遊之所也。公每得勉庵疏章。歎其直言讜論。雖不見用。而足以聳人觀聽云。乙巳夏屬疾。累朔沈綿。至十一月。聞有國變。蹶然起曰。國計罔極乃至是耶。歔欷不自勝。未幾疾添劇。藥餌不下。一日顧諸子曰。有過必改。見善必遷。此是守身保家第一事。戒諸婦女曰。婦人以順爲德。勿使聲出於閨旁之間也。家有錢券。取而折之曰。適以惹起爭端。吾雖不能貽之以善。乃反遺之以禍乎。有頃。盥洗着新。就席從容而逝。卽十二月十五日也。鄕里咸曰。善人逝矣。遠近奔弔者。相屬於道。翌年二月。葬于州之佳玉峙村上某坐之原。配寶城宣氏季孝女。系配水原白氏英壽女。系配南平文氏弘璟女。皆封淑夫人。男永烈。宣氏出。永夏進士。女曺秉相羅營成。白氏出。男永吉永鎭永實。女柳在弘文濟哲。文氏出。孫以下不盡錄。余在同鄕。爲公所辱知者久矣。每見其愷悌謹慤之風。令人有愛好無己之意。又見其五男五婿羣孫滿庭。白首朱紱。光榮炫耀。以爲福善禍淫。其理不忒。嗚乎。天不憖遺。而聲音儀容。已千古矣。螽斯詵詵。餘祿未艾。安知公之志業。不有能繼述者耶。永烈伻其三從弟永謨。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不敢承膺。而緬古感今。有不忍終辭者。謹据狀而爲之修潤焉爾。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笠巖),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세조 10년(146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였다 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9일 동안 싸우다 전사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이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침(外侵)에 대한 6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우고,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고,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6월 11일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그해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돌아왔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붉은 슬갑(膝甲) 관직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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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호 처사 이공 행장 醉湖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승호(承灝), 자는 도민(道敏), 호는 취호(醉湖)이다. 세계(世系)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고려조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이다. 진현관 학사(進賢館學士)를 지낸 휘 기밀(奇密),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휘 홍길(弘吉), 참판(參判)을 지낸 휘 일영(日映), 경창군(慶昌君) 휘 선제(先齊), 이조 참의를 지낸 휘 조원(調元),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 호선(好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휘 열(烈)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조들이다. 고조인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인기(仁基), 증조인 휘 응근(應根), 조부인 휘 광하(光夏), 고(考)인 휘 종진(宗震)은 대대로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신평 송씨(新平宋氏) 성묵(聖黙)의 딸이고, 계비(繼妣)는 진주 형씨(晉州邢氏) 효달(孝達)의 딸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9월 9일에 능주(綾州)의 단양리(丹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도 너그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곁에 머물면서 진퇴(進退)나 출입(出入)에 오직 부모의 명을 따르며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자 대인(大人)은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매번 공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다. 계모(繼母) 형씨(邢氏)를 섬기는 것도 한결같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 온화한 말투와 부드러운 기색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밖에서 돌아오면 그때마다 반드시 무언가를 갖다 드렸으며 생선 한 마리 과일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일지라도 빠트리는 경우가 없었다. 아우들을 보살피고 아꼈으며 은혜로운 정이 순박하고 두터워 집안에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힘차고 풍부하였으며 더욱이 시의 운율에 뛰어났다. 매번 붕우들과 시와 술을 펼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초고를 읊어도 주옥(珠玉)처럼 아름다웠으며 낭랑한 목소리는 시를 토할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시속의 기호를 따르지 않았고 과장(科場)에 나아가기는 했어도 몰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청탁을 넣지 않았다. 평소에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명예와 이익에 관계된 곳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오직 산속의 서재(書齋)와 마을의 서당 등 적막한 구석에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벗들과 모여 강론을 펼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여생의 마지막 계책으로 삼았다. 간혹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경관을 만나거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뜬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지으면서 표연히 속세를 벗어나는 의표가 있고 아득히 천지를 자유롭게 떠돌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마치 사람이 사는 세상의 성쇠(盛衰)나 득실(得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일찍이 서재에 취호(醉湖)라는 편액을 걸고 간혹 성명(姓名)을 적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면 그때마다 강호 취객(江湖醉客)이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만년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말이었던 듯하다. 병술년(1886, 고종23) 7월 12일에 거동(車洞)의 우사(寓舍)에서 생을 마쳤다. 묘는 여러 차례 천장(遷葬)을 거쳐 태봉리(台峯里) 반탁동(半坼洞)에 있는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영운(永運)의 딸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용휴(龍休)이고 차례대로 진휴(進休), 구휴(球休), 채휴(埰休)이며, 딸은 조병연(曺秉淵)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병순(炳純)과 병근(炳根)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과거(科擧)와 격식에 얽매어 걷잡을 수 없이 함께 휩쓸리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간간이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간혹 시사(時事)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풍치와 기상(氣象)이 종종 자질구레한 사람들보다 훨씬 우뚝하여 당시 사람들의 명망이 집중되는 자가 있다. 이들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공이라면 애초에 그런 인물이 아닐 리가 없다. 진휴(進休)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선고(先考)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25년이 되었습니다. 그사이에 세상의 변화가 예측하기 어려웠고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 당시의 저술이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불초한 이 자식은 애통하고 한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당시에 종유(從遊)했던 분들 가운데 선고와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는 오직 장인(丈人)만 살아계십니다. 원하건대 대략을 찬술하여 후손들에게 선고(先考)의 지행(志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교분이 있고 인척 관계가 더해져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이승과 저승으로 멀어졌으니 옛날과 지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미치지 못하는 한이 늘 절실하였기에 차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李。諱承灝。字道敏。號醉湖。系出光山。以麗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鼻祖。進賢館學士諱奇密。直提學諱弘吉。參判諱日映。慶昌君諱先齊。吏曹參議諱調元。大司成諱好善。同副承旨諱烈。皆顯祖也。高祖通德郞諱仁基。曾祖諱應根。祖諱光夏。考諱宗震。世著文行。妣新平宋氏聖黙女。繼妣晉州邢氏孝達女。憲宗丙申九月九日。生公于綾州丹陽里。公天性溫仁慈厚。自幼在父母側。進退出入惟命是從。未有違異。早喪慈幃。哀毁過節。其大人慮其傷生。每寬慰之。事繼母邢氏。一如所生。溫言柔色。務盡其歡。每自外還。必有所獻。雖一鱗一果之微。未有闕焉。撫愛諸弟。恩誼純篤。戶庭之間。無有間言。博涉諸家。文詞宏贍。而尤長於詩律。每値朋友文酒之席。信口呼草。如瓊琚珠玉。琅琅有聲。愈出愈奇。業於程文而不趨時好。赴於試圍而不用關節。平日不見要貴之人。不涉聲利之地。惟掩身斂迹於山齋村塾寂寞之濱。講聚朋徒。課授蒙率。以爲餘生究竟計。或遇山水幽賞之地。風月淸澹之夕。一觴一詠。飄然有出塵之標。邈然有獨往之意。若不知人間世有榮悴得失也。嘗題齋顔以醉湖。或有標識姓名處。輒稱江湖醉客。蓋其晩年寓意也。丙戌七月十二日。卒於車洞寓舍。墓累遷而安厝於台峯里半坼洞乙坐原。齊南平文氏永運女。擧四男一女。長龍休。次進休。次球休。次埰休。女適曺秉淵。孫炳純炳根。餘皆幼。嗚乎。世之儒者局束於功令程式之間。滔滔同流。漫不自振者多矣。間有英才美質。或不免黽勉於時。而其風韻氣象。往往拔出於區區常調之外。而偉然爲時望之所歸。此其天質之美。自然呈露。而有掩不得者如此。如公者。未始非其人也。進休一日過余。泣且語曰。先人之沒。今二十有五載矣。其間世變區測。室家流離。當日著述。隻字不遺。此不肖所以痛恨罔極也。在當日遊從之列而與先人最熟者。惟丈人在焉。願爲之撰述梗槪。使爲後嗣者。知厥考志行之有在也。嗚乎。余於公。以丱角舊交。又忝瓜葛之親。聲氣攸孚。期詡漸密。居未幾何。幽明遽隔。緬古感今。常切未逮之恨。有不忍多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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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처사 이공 행장 華庵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침(忱), 바꾼 휘는 윤제(崙齊), 자는 백규(葵伯),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국초(國初)에 휘 명덕(明德)은 목은(牧隱)의 뛰어난 제자로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공에게는 11대 선조가 된다. 공숙은 이조 참판 휘 효근(孝根)을 낳았고, 참판은 이조 참의 휘 림(琳)을 낳았고, 참의는 철산 부사(鐵山府使) 휘 공필(公弼)을 낳았고, 부사는 맹산 현감(孟山縣監) 휘 교(嶠)를 낳았고, 현감은 주부(主簿) 휘 시돈(時敦)을 낳았다. 주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추증된 휘 경운(慶雲)을 낳았고, 동지돈녕부사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영숙(靈肅)을 낳았고, 참의는 진사 휘 위(韡)를 낳았다. 휘 위는 호가 혁회재(衋悔齋)이며 은봉(隱峯) 안(安) 선생74)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혁회재는 진사 휘 동명(東鳴)을 낳았고, 진사는 휘 만휘(萬輝)와 만방(萬芳)을 낳았다. 공은 만방(萬芳)의 아들이었으나 백부인 만휘(萬輝)의 후사로 나갔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영장(營將) 오세장(吳世長)의 딸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말하고 웃고 장난하고 노는 모습조차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면서는 날마다 과정(課程)을 준수하였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공경으로 형과 어른을 섬겼으며 몸가짐이나 말하는 것이 다급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장해서는 지방의 상서(庠序)나 서울의 태학(太學), 원근에 있는 장덕(長德)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당시의 명사(名士)인 권한수(權寒水)75), 이한포(李寒圃)76), 조이우(趙二憂)77), 이도암(李陶庵)78), 민단암(閔丹巖)79), 섬촌(蟾村)80) 같은 이들이 모두 공의 사우(師友)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위아래가 뒤바뀌는 때를 만나고 게다가 사림(士林)의 당화(黨禍)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한층 격렬해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뒤섞여 오랫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공은 포의(布衣)의 서생(書生)으로 비록 세상에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탄식과 분노는 커다란 무지개와 겹겹이 쌓인 노을이 천 길 높이로 솟은 듯한 기상이 있어 종종 읊는 시나 주고받는 편지에 드러나곤 하였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부터 영조 무신년(1728, 영조4)까지 여러 선정(先正)이 무함을 당하자 도내의 유생들을 이끌고 소장을 올리고 대궐 앞에서 절규한 것이 4~5차례였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구중 대궐에 울리고 바람처럼 온 나라를 진동시켜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경중 고저(輕重高低)를 가름하는 데 힘을 보탰으니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10년 동안 과거를 중지하라는 하교가 내리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화학산(華鶴山) 아래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치고자 계획하고 자호(自號)를 화암(華庵)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는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한 뒤 새 자리를 깔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착용하고, 이어 여러 아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집안과 고을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경계하였다. 마지막에 주자(朱子)가 이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다.81)"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말이 끝나자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때는 계축년(1733, 영조9) 1월 14일이었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세희(世曦)의 딸로 지평 문홍헌(文弘獻)의 현손(玄孫)이다. 계배(繼配)는 강릉 유씨(江陵劉氏) 재창(再昌)의 딸로 산당(山堂) 유호인(劉好仁)의 5대손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정후(政厚), 인후(仁厚), 생후(生厚)이고 딸은 정지숭(鄭智嵩), 김명태(金命泰)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아득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가까이로는 한 고을의 선사(善士)들과 벗하고 멀리로는 한 나라의 선사들과 벗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인(仁)을 보충하여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사람과 짐승, 중화(中華)와 오랑캐, 군자와 소인의 분별과 관련된 시비(是非)와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 없이 큰소리로 주장을 펼쳐 스스로 시류(時流)의 분노를 일으키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이 공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흥을 일으키고 탄식할 것이다. 대절(大節)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82)을 스승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배웠다. 박장(朴丈)이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100년 전 관(官)에서 향유(鄕儒)를 맞이하여 향음례를 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당시 고을에 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한 사람으로 교관(敎官) 박헌가(朴獻可)와 화암(華庵) 이윤재(李崙齊) 2인이 있었지만, 교관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공(李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빈(賓)과 주(主), 개(介)와 준(僎)83)의 위치, 오르내리며 절하고 읍(揖)하는 의절(儀節)이 문채가 찬란하고 질서가 엄연하며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매우 조화로웠다. 관에서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곳이 예절과 법도를 갖춘 고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날 이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공을 흠모하던 뒤에 공의 5대손 병섭(秉燮)을 통하여 비로소 공의 유집(遺集)을 구해 읽어보고 전에 들었던 내용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삼가 차례대로 적어 병섭의 마음에 보답한다. 公姓李。諱忱。改諱崙齊。字葵伯。貫公州國初有諱明德以牧隱高弟官監司贈領議諡恭肅。於公爲十一代祖也。恭肅生吏曹參判諱孝根。參判生吏曹參議諱琳。參議生鐵山府使諱公弼府使生孟山縣監諱嶠。縣監生主簿諱時敦。主簿生諱慶雲贈同知敦寧府使。同知生諱靈肅贈吏曹參議。參議生進士諱韡號衋悔齋。學于安隱峯先生之門。衋悔生進士諱東鳴。進士生諱萬輝萬芳。公卽萬芳之子。而出爲萬輝后。生妣海州吳氏營將世長女。以肅宗壬戌。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見者奇之。自就傅。日遵課程。孝事父母。敬事兄長。持身出言造次不放及長出遊於庠序學校及遠近長德之門一時名勝。如權寒水李寒圃趙二憂李陶庵閔丹巖蟾村。皆其師友也。當天地翻覆。冠屨倒置之餘。加以士林黨禍。橫生層激。是非邪正。混久未定。公以布衣書生。雖不得用於世。而其感慨悲憤之意。蓋有長虹層霞。橫互千仞底氣象。而往往發於諷詠往復之間自肅宗甲午至英宗戊申。爲諸先正被誣。率道內儒生陳章叫閽者。爲四五度言雖不用。而其所以聲徹九閽。風動一國。而有力於邪正慝淑輕重低昂之間者。其功豈少補哉。及其有十年停擧之敎也。悵然歸鄕。築室於華鶴山下。爲躬耕終老之計。自號曰華庵。臨歿。沐浴操潔。設新席着深衣大帶因戒諸子以孝弟忠信居家處鄕之道。極其詳悉。末誦朱夫子所謂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直而已之語。語畢從容就逝。時癸丑正月十四日也。配南平文氏世曦女。持平弘獻玄孫。繼配江陵劉氏再昌女。山堂好仁五世孫生三男二女政厚仁厚生厚鄭智嵩金命泰也。嗚乎。公生於遐隅。慨然自拔。近而友一鄕之善士。遠而友一國之善士。攻闕輔仁以自展拓。至於是非義理。有關於人獸華夷君子小人之分者。無不明目張膽。高談大言。至於身觸時怒而不畏焉。使後之人。讀其言誦其行。不覺興感而咨嗟也。大節如此。其餘可槪也。余少師無邪齋朴丈。學鄕飮禮。朴丈因言吾鄕百年前。官邀鄕儒。將行此禮。不知所爲時。鄕有受學於李陶庵先生者。朴敎官獻可李華庵崙齊二人。而敎官已古。請李公爲相於是賓主介僎之位。升降拜揖之節。燦然有文。儼然有秩。不徐不疾。旣洽而止。官曰吾固知此爲文禮之鄕。而不圖今日至此之美也。贊歎不已云。欽慕之後。因公之五代孫秉燮。乃得其遺集而讀之。益信其前所聞者。謹序次以塞秉燮之意云爾。 은봉(隱峯) 안(安) 선생 은봉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으로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역임했다. 저서로 《은봉전서》가 있다. 권한수(權寒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이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이후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 등이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한포(李寒圃)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8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수찬, 교리, 응교, 대사간, 이조 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올랐다. 조이우(趙二憂)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86년(숙종12)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정언, 경연동지사, 호조ㆍ공조ㆍ이조의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남아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도암(李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이다.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02년 알성 문과에, 17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저서에 《도암집》과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ㆍ(→,)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민단암(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ㆍ세심(洗心)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로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 《연행록(燕行錄)》,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사원(士元), 호는 섬촌(蟾村)ㆍ정암(貞庵)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47년(영조23) 집의(執義)ㆍ대사헌ㆍ공조 참판ㆍ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천지가 …… 뿐이다 주희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병이 깊었는데도 제생(諸生)에게 강론하기를 "학문을 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옳음을 살펴 구하고 그름을 결단코 제거하는 데 있다. 오래도록 쌓아 가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서 저절로 발하는 바에 모두 사사로이 굽어짐이 없게 된다. 성인이 만사에 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 직일 뿐이다.[爲學之要, 惟在事事審求其是, 決去其非. 積累久之, 心與理一, 自然所發皆無私曲. 聖人應萬事, 天地生萬物, 直而已矣.]"라고 하였다. 《朱子年譜 卷4 七十一歲 三月》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ㆍ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주역(周易)》에 해박하고 정밀하였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介)와 준(僎)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행사를 도와 주선하는 자를 가리킨다. 주인을 돕는 자를 준(僎), 빈(賓)을 돕는 자를 개(介)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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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신재 이공 행장 懷愼齋李公行狀 우리 고을은 호좌(湖左 충청남도)에서 시(詩)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근고(近古) 시대에 이르러 경전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더욱 빈빈(彬彬)하였다. 회신재(懷愼齋) 처사(處士) 이공(李公) 휘 춘형(春馨) 또한 그런 인물이다. 공은 공산(公山)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국초의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이 중조(中祖)이다. 5대조 휘 위(韡), 호 혁회재(衋悔齋)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84)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효우(孝友)와 학문(學問)으로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고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이고 증조는 휘 만휘(萬輝)이다. 조부 휘 윤제(崙齊), 호 화암(華庵)은 도암(陶庵) 이 문정공(李文正公 이재(李縡))에게 학문을 익히고 상소(上疏)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을 구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고(考)는 휘가 정후(政厚)이고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재탁(再濯)의 딸이다. 영조 갑자년(1744, 영조20)에 능주(綾州)의 부춘방(富春坊)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애롭고 온화하며 근면하고 신중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부친의 병을 수발하면서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차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모친이 병들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고생을 이겨내면서 글을 읽어 문사(文詞)가 풍부하였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년에는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85)을 찾아뵙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만년에 칠송(七松)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헌무정(獻舞亭)으로 이주하여 두문불출하며 심신을 수양하였다. 손수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옮겨 적고 깊이 연구하고 본질을 완미(玩味)하여 그 기쁨에 자신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았건만 명성과 실제가 더욱 융성해져 마을과 향당(鄕黨)의 오랜 벗이나 생도(生徒)들이 공에게 의지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평소에 저속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사벽(邪僻)한 색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몸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선행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기고 악행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다. 《춘추(春秋)》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에 대해) 더욱 연구하여 밝히고 힘써 지켜나갔으며 대명유민(大明遺民) 4자를 크게 써서 앉는 자리에 걸어두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상사(上舍) 남익(南熤)과 이웃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학문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봄가을로 향리(鄕里)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간간이 나라 안의 장덕(長德)과 종유하며 더욱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아, 공은 고상하고 소탈한 운치(韻致)가 시나 말 등에서 매우 많이 드러날 뿐만이 아니다. 〈권학론(勸學論)〉, 〈신우기(新寓記)〉 등의 저작은 공이 어떤 인물인지 더욱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에서 공을 천거하는 문서가 앞뒤로 빈번하게 이어지고 공이 남긴 성덕(盛德)의 향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바다에 숨겨진 구슬이지만 반드시 훗날 외사씨(外史氏)의 기록에서 빠지지 않아 능양(陵陽)의 고사(故事)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배(配)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철한(澈漢)의 딸이며 아들은 문규(文圭)ㆍ문익(文翊)ㆍ문표(文{白+表})이다. 손자와 증손자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너무 많아 적지 않는다는 뜻인 듯합니다.) 묘(墓)는 지동촌(池洞村) 뒤의 입동(笠洞) 을좌(乙坐)에 합장하였다. 현손 장환(長煥)이 유집 1권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어 한마디 말로 공의 덕을 드러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공을 우러러 흠모하였기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吾鄕在湖左。以詩禮稱。至近古。經明行修之士。尤彬彬焉。懷愼齋處士李公諱春馨。亦其人也。公公山著族。以國初恭肅公諱明德爲中祖。五世祖諱韡號衋悔齋中進士。師事隱峯安文康公。孝友學問。爲士林儀表。高祖諱東鳴進士。曾祖諱萬輝。祖諱崙齊號華庵。受學于陶庵李文正公。疏救尤春兩先生。有遺稿。考諱政厚。妣濟州梁氏諱再濯女。以英宗甲子。生公于綾之富春坊。慈祥勤勅。事親無違。幼侍父病。血指見愈。母病又如之。刻苦讀書。詞藻贍富。爲親供擧。不以得失介意。中年謁性潭宋先生。得聞爲己之學。晩自七松。挈移獻舞亭。杜門養靜。手抄心經近思錄等書。沈潛玩素。怡然不知老之將至。潛光鏟輝。望實彌隆。閭里鄕黨知舊生徒。無不倚以爲重焉。平生口不出鄙俚之言。目不覩邪僻之色。足不妄行。身不妄動。見善若己有之。見惡若己凂之。於春秋尊攘之義。尤加講明而力守之。大書大明遺民四字。揭於座側以見志焉。與南上舍熤。結隣對床。講磨無闕。春秋會鄕里士子。講小學大學。間從國內長德。益自展拓焉。嗚乎。其高韻逸趣。見於吟哦咳唾之餘者。不啻多矣。而至若勸學論新寓記諸作。尤可以見公之爲公矣。況鄕道剡報。前後頻仍。而遺芬餘馨。藉藉人口者。足以爲百世不刊之證耶。滄海遺珠。必不見漏於後日外史之筆。而爲綾陽故事之一也。配濟州梁氏諱澈漢女。子文圭文翊文白+表。孫曾以下不能盡錄。墓池洞村後笠洞乙坐合祔。玄孫長煥。持遺集一卷示余。因請一言以狀其德。余以鄕里後生。慕仰有素。不敢以匪其人辭。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은봉전서》이 있다.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ㆍ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성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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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9 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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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下沙諸小年。賦蓮塘韻。 靜觀草木性。君子少如君。茂叔同歸趣。長庚去雕文。淡葩羞紫玉。嫩葉遜靑雲。安得氷霜味。沈痾去十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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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居無事。偶得十數句。以示文兄。 芙蓉殿南服。噫吁嚱危哉。高妙除人間。淸虛絶浮埃。我欲往從之。口呿先發款。攀梯梯欹側。策馬馬虺尵。經營問幾載。瞻忽益崔嵬。下得一小經。永菴向陽開。礲斲審面勢。間架集衆材。門巷甚方列。林薈亦裁培。雖云無佳景。心胸自足恢。由此日邁征。陟彼路有媒。出門望行客。不見一人來。或從發軔止。或逐半途回。招招印須友。趲程勿徘徊。歲月流水走。鬂髮石火催。日暮蒼山遠。努力一車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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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임생(任生)이 와서, 또한 보내주신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체후가 더욱 평안하다는 것을 알고서, 위로되고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는 권루(卷婁)12)하여 마음이 어수선하여, 도무지 말할 것이 못 됩니다.심(心)은 오직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영묘하지 못하여서 마른 나뭇가지나 불 꺼진 재【枯木死灰】13)와 같다면, 어찌 주재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능자자(能字者)'라는 글자는 심(心)을 말한 것입니다. 영묘한 바는 이(理)가 있기 때문이니, 이(理)가 아니면 어찌 이 영묘함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소자저(所字底)'라는 글자는 성(性)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깨닫게 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주재(主宰)하는 것은 심(心)이요, 주재하는 것의 근원은 성(性)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심성(心性)의 경계에 구분을 분명히 하여서, 부디 세 번 생각을 더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理) 위에 이가 있고, 이로써 이를 부린단 말입니까. 아마도 꼼꼼히 살피지 못하여서, 그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저 심(心)과 성(性)은 진실로 두 개로 나뉜 것이 아니니, 그 본체의 이름과 뜻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가르침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任生來。又承惠存。以審侍體增謐。慰浣無任。義林卷婁憒憒。無足云喩。心惟靈故能主宰。若不靈如枯木死灰則何有主宰之可言。此所以下能字者字而言心。然其所靈以有理故也。非理安有此靈。此所以下所字底字而言性。朱子曰。能覺者氣之靈。所覺者心之理。又曰。主宰者心。主宰底性。亦非此意耶。此於心性界至。截得分明。願加三思。如何理上有理。以理使理。恐偶未照管而說得到此耳。大抵心性固非二物。而其當體名義。有不可苟也。更示之爲望。 권루(卷婁)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말로, 외물을 좇아 자신의 심신을 고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고목사회(枯木死灰) 불교에서 흔히 쓰는 화두(話頭)로서, 사람이 욕심이 없거나 생기가 없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유학자가 불가(佛家)의 참선(參禪)을 비판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근사록집해》 권13 〈변이단(辨異端)〉에 정호(程顥)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의 근원이 안정되지 못하므로 마른 나무나 꺼진 재와 같아지려고 한다.【釋爲心源不定, 故要得如枯木死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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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앞에 보낸 편지와 뒤에 보낸 편지가 동시에 도착을 하여 열어 읽어보고는, 마음이 활짝 트여서 긴 여름날에 우울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그러졌습니다. 이로 인해 경전을 읽으며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한 것을 알고서, 간절히 바라는 바에 더욱 들어맞아 흐뭇하였습니다. 저는 어지럽고 못난 채로 시간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괴로울 뿐입니다. 심설(心說)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이끌어 깨우쳐준 그 가르침이 지극하여서, 모두 그 학문의 경지가 깊고 남을 위한 충직한 마음이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습니다. 주재자(主宰者)와 주재저(主宰底)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그렇다면 주재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영묘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재저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덕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性)은 무엇입니까. 이(理)가 심(心)에 가춰진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性)은 곧 이(理)이니, 성과 이를 어찌 구별한단 말입니까. 심의 영묘함이 진실로 이(理)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이가 행하는 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氣)가 아니면 영묘함을 발휘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영묘한 바가 없으니, 영묘하기 때문에 주재하는 것입니다. 영묘함을 버리고서는 아마도 별도로 주재처(主宰處)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이 목석과 같고서 능히 주재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삼가 그대와 경함(景涵)의 생각을 살펴보건대, 영묘함은 전적으로 기(氣)에 속해 있고, 주재함은 전적으로 이(理)에 속해 있다는 것은 각기 일정한 근거가 있고 각기 알맞은 때가 있는 듯하지만, 마음의 영묘함이 바로 신묘한 주재처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더욱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무릇 영묘함과 주재함에 대해 평탄하게 설명하면, 정밀하고 거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파고들어 말하면, 실로 피차의 구분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심(一心)의 사이에 어찌 영묘함이 있고 또 신묘함이 따로 있어서 대치하고 병립한단 말입니까. 그대가 '주재자(主宰者)'를 '이(理)'자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理)가 심(心)에 상대함이 있고, 이 위에 이가 있다는 등의 말들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재저리(主宰底理)'를 '주재성정(主宰性情)'이라고 간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의리(義理) 상에 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법(文法) 상에서도 부당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재자(主宰者)는 진실로 마음의 영묘함이니, 이를 주재(主宰)의 성정(性情)이라고 한다면, 이(理)가 주재(主宰)라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주자(朱子)께서 마땅히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요, 주재하는 바는 성정이다"라고 했을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소(所)와 소이(所以)에도 또한 그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주자께서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은 이(理)이고, 소당연(所當然)은 의(義)이다'라 한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저(底)'자는 또한 '소(所)'자나 '소이(所以)'자와는 그 뜻에 다름이 없었는데, 옛사람들의 글자를 배치한 뜻이 이와 같은 경우가 진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前書後書。一時倂至。開玩豁然。長夏紆鬱。不覺消釋。因審經體衛安。益協懇祝。義林憒劣捱遣。見無一狀可煩耳。心說娓娓提諭。極其緘悉。其造詣之深。謀忠之至。令人歎服夫主宰者。主宰底。煞有分別。主宰者何物。非指心之靈而言耶。主宰底何物。非指心之德而言耶。性是何物。非指理之具於心者而言耶。然則性卽理也。性與理有何分別乎。心之靈。固不可遽謂之理。而亦不可謂非理之所爲。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靈故主宰。舍靈則恐無別求主宰處。曷嘗見冥頑如木石而能主宰者乎。竊覵賢與景涵之意。以靈專屬之氣。以主宰專屬之理。似涉乎各有占據。各有時節。而殊不知心之靈。乃是神妙主宰處也。宜乎多言而愈不合也。夫靈與主宰。以平坦說去。則若有精粗之可言。而究而言之。則實無彼此之可見。一心之間。豈有靈又有神。對峙而倂立乎。賢以主宰者。作理字看。故有以理對心。理上有理等。多少說話也。且賢以主宰底理。看作主宰性情云爾。則非惟於義理有欠。亦恐文法不當如是也。主宰者。固是心之靈。而曰主宰性情云。則理爲主宰之義。顧安在耶。若如賢意。則朱子當曰。主宰者心。所主宰者性情云云。固不當如是而止也。所與所以。亦未見其有異。朱子所謂所以然理也。所當然義也。此亦可見矣。底字亦與所字所以字。其義無異。古人下字之義如此處。固非一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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