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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유【재업】에게 답함 答廉敬儒【在業】 뜻하지 않게 서찰로 하신 말씀이 이처럼 간절하니 돌이켜 생각해도 감격스러워 대답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보이신 뜻에 답이 없을 수는 없기에 매번 바로잡을 방도를 덧붙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체로 회심(會心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과 상구(上口 입에 올려 외우는 것)는 본래 칼로 자르듯이 앞뒤로 나뉘지 않습니다. 오늘 상구를 하면 내일 회심이 이루어집니다. 또 음식을 한꺼번에 씹는 것처럼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형세도 아닙니다. 언사(言辭)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면 읽는 것이 정밀하지 않을 수 없고 외우는 것이 능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한가한 낮에 단서를 끌어내고 청정(淸靜)한 밤에 침잠해야 그 의미를 터득할 수 있으니 또한 전혀 깨닫지 못하고서 상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상구와 회심의 근본은 '정(靜)' 자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정(靜)하면 심지(心地)가 맑고 깨끗해지며 정신이 막힘없이 통하게 되어 회심과 상구에 대해 모두 힘을 기울이기 쉽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주장은 선유(先儒)의 논의가 진실로 한둘이 아닙니다. 저는 일찍이 망령되게도 인(人)과 물(物)에 대해서 이(理)는 같아도 성(性)은 다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서(朱書)》를 보았더니 또한 여기에 관한 주장이 있어 "물에는 오성(五性)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 내용을 장석(丈席)에서 물었더니 답하시기를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자(智者)가 보면 지(智)라 한다. 단지 이러한 사물일 뿐이니 사람의 인을 가지고 저 물(物)에게 요구하는 이치는 없다."55)라고 하셨습니다. 오상(五常)은 본래 오성(五性)에 하나하나 분속(分屬)되는 것이 아니고 부부(夫婦)와 장유(長幼)는 모두 예(禮)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분속하고자 한다면 예에는 질서의 의미가 있고 지(智)에는 분별의 의미가 있으니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예(禮)에 귀속돼야 할 듯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지(智)에 귀속돼야 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謂外翰命。若是繾綣撫念感戢。不知爲對。示義不能無言。而輒付就正之計。以爲如何。大抵會心上口。本非有截然先後。如今日上口。明日會心也。且非一擧竝嚼。混無相資之勢也。得於辭而能通其義。則讀之不可不精。誦之不可不熟然後。紬繹於日間休閒之時。沈潛於夜間淸靜之際。而可以得其義矣。亦非全然不覺而能上口也。且上口會心之本。在於靜之一字。靜則心地虛明。精神流通。其於會心上口。皆易爲力。未知如何。人物性同異之說。先儒之論固不一。愚嘗妄謂人物理同而性異矣。及見朱書。亦有此說。物有五性云云。愚嘗以此問于丈席。答曰。仁者見之謂之仁。智者見之謂之智。只是此箇物事。若以人之仁。去責那物。則無是理矣。五常本非五性之逐位分屬者。而夫婦長幼。皆當屬禮。然必欲分屬。則禮有序秩底意。智有分別。底意。長幼有序。似當屬禮。夫婦有別。似當屬智。未知如何。 인자(仁者)가……없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권12 〈답정계방(答鄭季方)〉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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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문【인석】에게 답함 答趙景文【寅錫】 칩거를 자신의 분수로 삼아 서신만이 오랜 벗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노쇠함이 더욱 심해져 이마저 종종 걸렀으니 사우(士友)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좌하(座下)께서 특별히 잘못을 따지지 않는 의리52)를 진념하여 이렇게 먼저 은혜를 내리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을 뒤이어 곧바로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명령(榠欞) 나무53)가 늙지 않듯 양친께서 모두 평안하시고 화기애애하며 공경이 넘쳐 길상(吉祥)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운이 순조롭고 신이 좋은 복을 내려 주었으니, 천도(天道)는 인자(仁者)를 돕지 않는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창가에 놓인 책상이 고요하고 연구는 날로 깊어지며 광채가 은은히 드러나 명성이 성대하니 여풍(餘風)을 바라보면 사람이 마음을 기울이게 합니다. 의림(義林)의 천한 운명은 외롭고 고달프기만 하니 처지가 가련합니다. 이전부터 해왔던 보잘것없는 학업도 흩어지고 사라져버려 선천(先天)의 그림자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득한 것과 같을 뿐입니다. 지리멸렬한 결과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다만 벗들이 서신을 왕래하면서 이따금 저를 독서인(讀書人)으로 기대하시고 후생(後生)의 젊은이 한둘이 간혹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 듯함을 보니, 이것이 어찌 꿈에서라도 저에게 견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스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좌하(座下)의 성실하고 충직한 풍도는 이미 익히 탄복하는 바이건만, 도리어 오늘의 서한에서는 이렇게 실정에 맞지 않고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십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어지러운 세상은 대국이 끝나가는 바둑판 같아서 정세를 예측하기 어렵고, 평소의 옛 벗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호남의 귀퉁이와 영남의 구석에서 보잘것없는 처지로 지내면서 눈앞의 시용(時用)에 절실한 모든 환락과 근심, 크고 작은 의리를 일체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 채 제쳐 두고 도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궁벽하게 살면서 길게 탄식할 때마다 끝없는 비통함만 절실할 뿐입니다. 존당(尊堂)의 수진운(壽辰韻 회갑 축하시)은 과연 잊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문득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벗 사이에 서로를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체로 이 몸은 본래 자질이 아둔하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기험(崎險)이 겹겹이 닥쳐 온갖 어지러운 일이 밖에서 공격하고 갖은 근심이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 일상을 겪으면서 열에서 여덟, 아홉을 잊고 있다가 먼 지방에 있는 어진 덕행을 지닌 친구의 소중한 부탁도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별지(別紙)는, 이같이 어리석은 식견으로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만 이택(麗澤)의 의리54)로 볼 때 강론과 연마의 방도가 없을 수 없기에 이에 감히 조목마다 채워 보냅니다. 회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自分貞蟄。惟是書墨一路。爲知舊相面。而年歲以來。衰索轉甚。亦不免種種廢闕。而得罪於士友者。多矣。豈謂座下特軫不較之義。而有此先施之惠哉。感感之餘。旋愧其不足承當也。因審春幃具慶。榠欞不老。怡愉洞屬吉祥湊臻。好氣數好福力。孰謂天道之不祐仁也。窓几涔寂。硏究日深。潛昭闇章。聲光藉藉。瞻言餘風。令人馳神。義林窮獨賤命。情景可憐。至於平昔之所謂區區爲業者。亦且渙散頹落。如先天影子之茫然有無耳。滅裂之報。固其所也。而但見知舊往復。種種以讀書人期待之。後生少年。或不無一二過從有若請敎者。然此豈夢寐可況者乎。竊欲引身避却而不可得也竊惟座下直諒忠慤之風。已所稔服。而乃於今日之書。亦爲此浮實過當之語乃爾耶。愧汗悚悚。不知攸答。嗚呼。缺界殘枰風色叵測。而所可聊賴者。惟是平素知舊人而已。然而零零落落於湖之隅嶺之角。凡百歡戚。大小義理。有切於目前時用者。一切置之而不問。捨之而不講。每窮居長吁。只切不盡之悲而已。尊堂壽辰韻。果忘之矣。因仍推待之頃。不知不覺。遽至於此。此豈友朋相向之道耶。大抵此身。素以鈍溯之質。至於近歲奇險層至。而百撓攻其外千慮盪其中。日用經過。十忘八九以。至遠外賢朋珍重之托。亦不免尋常遺却。愧死愧死。別紙以若謏見。何敢容喙。而麗澤之義。不容無講磨之方。玆以逐條塡去。幸回敎之爲望。 잘못을……의리 《논어》 〈태백(泰伯)〉에서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사람에게 묻고, 풍부하면서 풍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물으며, 가졌는데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차 있는데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지난날 내 친구가 실천한 바 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較,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한 증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명령(榠欞) 나무 명령(冥靈)이라고도 한다. 오래 산다는 남국(南國)의 나무 이름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고 하였다. 이택(麗澤)의 의리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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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3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화명(乾化命)'에 이어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와 여자, 즉 갑인생의 남편과 을묘생의 아내이다. 상주는 며느리와 손자며느리, 손녀, 증손녀 등이다. 안장일은 정월 24일로 되어 있다. 이장(移葬)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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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2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기묘년생으로, 상주는 3명이지만 생년간지만 갑인(甲寅), 정사(丁巳), 경신(庚申) 등으로 적혀 있어 망자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안장일은 그해 9월 19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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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을 격려하며 勉諸生 큰 바다 동쪽이 얼마나 많이 요란한가 幾多擾攘大洋東괴이타 영웅 남아가 세상에 비었는가 却怪英男世界空원컨대 참 실력을 갖춘 청년들 얻어서 願得靑年眞實力순박한 삼대581)의 기풍을 만회하려네 挽回三代朴淳風굳센 국화처럼 서리 능멸하다 꺾일지언정 寧同勁菊凌霜折시든 단풍 되어 비친 해에 붉지 않으리라 不作殘楓照日紅경물을 보고 시절을 느끼니 무엇을 줄꼬 觸物感時何以贈푸른 산 중의 이 밤을 잊지 말아야하리 莫忘此夜碧山中 幾多擾攘大洋東, 却怪英男世界空.願得靑年眞實力, 挽回三代朴淳風.寧同勁菊凌霜折, 不作殘楓照日紅.觸物感時何以贈, 莫忘此夜碧山中. 삼대(三代) 고대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이르는 말로, 정치와 교육이 가장 융성했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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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濟州安行五【達三】 此逢眞有數。年貌倍生顔。別後相思月。漢挐萬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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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만종서사에 자정이 방문하다 翼日 萬宗書社 子貞見訪 북창의 맑은 바람이 율리의 뜰 같아서 牕北淸風似栗園때로 꿈에 헌원의 세상에 온 듯하다네239) 時將一夢到軒轅짙푸른 천 봉우리 색 유독 사랑스러운데 蒼蒼獨愛千峯色시끄럽게 떠드는 온갖 새들 가증스럽네 喙喙生憎百鳥喧흥을 타고 영해의 달 아래 서로 만나니 乘興相逢瀛海月어제 초강에 술 붓던 일로 마음 상하네 傷心昨酹楚江樽육주에 비릿한 비240)가 얼마나 내렸는가 六洲腥雨知多少이 누각에서는 그 비 흔적도 걷혔구나 也向斯樓却斂痕 牕北淸風似栗園, 時將一夢到軒轅.蒼蒼獨愛千峯色, 喙喙生憎百鳥喧.乘興相逢瀛海月, 傷心昨酹楚江樽.六洲腥雨知多少, 也向斯樓却斂痕. 북창의 …… 듯하다네 만종서사를 율리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율리(栗里)'는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연명(陶淵明)의 고향이다. 도연명이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서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잠시 불면, 스스로 희황 시대 이전의 사람이라 여기곤 한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하였다. '헌원(軒轅)'은 삼황(三皇)으로 불리는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를 말한다. 육주에 비릿한 비 '육주(六洲)'는 세계의 육대주(六大洲)로 온 세상을 의미한다. 비릿한 비는 오랑캐들이 몰려든 것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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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에서 제군에게 작별하며 주다 以承齋 贈別諸君 간밤에 내리던 강가의 빗소리 막 그쳤는데 江上初收宿雨聲서생들이 먼 길을 돌아가니 홀연 놀란다네 忽驚書客遠歸程어젯밤 밝은 달이 마음을 함께 비추었는데 前宵明月心同照남국의 가을 바람은 또 한을 생기게 하네 南國秋風恨又生배움은 반드시 탁마해야 진보함을 깨닫고 學必琢磨應覺進뜻이 법도에 부끄러우면 평안할 수 없네 志慙模範未能平흰 구름을 애오라지 가져다 줄만하니400) 白雲聊可相持贈무심한 듯해도 더욱 정이 있어서라네 也是無心更有情 江上初收宿雨聲, 忽驚書客遠歸程.前宵明月心同照, 南國秋風恨又生.學必琢磨應覺進, 志慙模範未能平.白雲聊可相持贈, 也是無心更有情. 흰 …… 줄만하니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의 시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에 "산중에는 무엇이 있는가, 봉우리 위에 흰 구름이 많다네. 하지만 나 혼자만 즐길 수 있을 뿐, 임금님께는 부칠 길이 없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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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 다음날 밤에 重陽翌夜 교교한 달이 하얀 비단 같고 皎皎月如素곱디고운 국화는 황금 같네 姸姸菊似金느긋하여 일 하나도 없으니 悠然無一事맑은 감상에 내 마음 흐뭇해 淸賞愜吾心 皎皎月如素, 姸姸菊似金.悠然無一事, 淸賞愜吾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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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윤【국조】에게 답함 答安景允【國祚】 편지를 통해 한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또한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에 버금하니, 그 위로되고 속시원함을 무엇에 비유하겠습니까. 이어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지내는 것이 즐겁고 화목하며 정황이 더욱 다복해짐을 알았습니다. 열흘 동안 강학을 위해 모였으니 학업에 날로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일상적인 보통의 마음과 힘으로 의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환안(還安)96)'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안(移安)했을 때에도 일찍이 알린 바가 없었으니 지금도 역시 고하는 말이 있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미 간략하게 하는 쪽을 따랐으므로 그대로 하는 것이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97)라고 하셨는데 반드시 법복을 먼저 말하고 다음으로 법언(法言)을 말한 뒤에 덕행을 말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그 법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법언을 말한 뒤에야 덕행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복을 입지 않고 법언을 말하지 않고서 그저 선왕의 덕행만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른바 덕행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리(事理)의 순서와 언어의 맥락이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만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을 말하면서 몸에 간직한 바【所藏乎身】를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몸이 나라와 천하의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구(章句)에, '몸이 닦여지면 집을 가르칠 수 있다.【身修則家可敎矣】'는 것의 '신(身)'자는, 또한 원문(原文)의 '몸에 간직한 것【所藏乎身】'의 '신(身)' 자에 근본합니다. 書中一面。亦對面之亞也。慰豁何喩。仍審侍旁怡愉。候節增祉。結旬講聚。居業日就。此豈尋常心力所可議到哉。還安云云。以鄙意則移安時。曾無所告。則今亦不必有告辭。蓋旣以從簡。則因以如之。似乎可矣。非先王之法服云云。必先言法服。次言法言而後。言德行何。蓋服其法服。言其法言然後。德行可見。若不服法服。不言法言。而徒然欲行先王之德行。則所謂德行者。果何物耶。是其事理次第。言語脈絡。有不得不然。未知得否。是。言治國而言所藏乎身。便見身爲國天下之本也。章句身修則家可敎矣之身字。亦本於原文所藏乎身之身字也。然。 환안(還安)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던 신주를 제자리로 도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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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지46)에게 답함 答吳永之 이전 편지에서 보내주신 문목(問目)은 참으로 천열(淺劣)한 제가 감히 입을 놀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만, 이택(麗澤)의 뜻47)에 있어서는 각각 자신의 견해를 말씀드려서 바른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략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보내오신 편지를 읽어보니 도리어 용납하여주시고 논박하면서 바로잡는 말씀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비설(鄙說)48)에 특별히 잘못된 부분이 없었던 것인지요? 비록 있더라도 차마 직언(直言)으로 공격하고 배척하지 못한 것인지요? 지금 하문하신 여러 조목(條目) 역시 감히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으니 부디 전일처럼 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제1단은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49)라고 하였으니, 대략적인 뜻이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의(義)와 도(道)에 짝한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을 모두 들어서 말한 것이고 의(義)를 모은다는 것은 단지 공력을 들여야 할 부분【用功處】으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용(用)은 공부할 부분이 있고 체(體)는 공부할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어의(語意)가 두루 온전하지 못하고 공부에 누설되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체(體)와 용(用)에 비록 틈이 있더라도 어떻게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공부할 것이 없는 것이 공부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또 의(義)가 주가 되고 기(氣)가 주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의(義)를 모으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의(義)이고, 의(義)에 짝하는 것은 주가 되는 점으로 말하자면 기(氣)입니다. 어떻습니까? 제2단의 '물망(勿忘)'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라.【必有事焉而勿正】'50)라고 했는데 대체로 규모와 의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心勿忘勿助長】'는 것은 친절(親切)하게 공부할 부분입니다. 이 1단은 본래 의(義)를 모으기 위해 말한 것인데 또한 이 마음의 존주처(存主處)로서 매우 절실하고 긴요합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는,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魚躍】'는 것과 같은 뜻이다. 더욱 체인(體認)하고 궁행(躬行)한 뒤에야 그 말의 뜻이 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삼아 한 그루의 꽃나무를 보면, 생리(生理)가 두루 흐르고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을 마음속으로 잊지 않는 것【勿忘】이라고 합니다. 털끝만 한 급박함과 억지스러움, 그리고 인위(人爲)를 받아들임도 없는 것을 억지로 조장하지 않는 것【勿助】이라고 합니다. 성인(聖人)이 덕(德)으로 들어가는 신묘함을 열어서 보여준 것이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말의 병통과 마음의 잃음을【言之病心之失】 보내주신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간(肝)에 속하고 귀는 콩팥【腎】에 속하는데 간과 신장이 조화를 잃으면 귀와 눈에 병이 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50묘(畝)의 땅에는 공전(公田)이 5묘이고, 70묘의 땅에는 공전이 7묘이며 100묘에는 공전이 10묘가 됩니다. 그리고 다만 여사(廬舍)에는 10묘, 14묘, 20묘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10의 세금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부자는 어질지 않다는 것은,51) 대략 세운 뜻의 방향성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부자들이 모두 어질지 않고, 어진 자들은 전부 부자가 아니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규전(圭田)52) 역시 공전(公田)으로 백성들 사이에 있는 것인데 경(卿)․대부(大夫)의 제사에 쓰이는 경비를 대기 위해서 어떻게 세금을 다시 거둘 수 있겠습니까? 여부(餘夫)의 밭은 자력(自力)으로 경작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세금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진 사람이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포괄하는 직책이 매우 넓은 것이고, 갑병(甲兵)과 전곡(錢穀)처럼 각각 하나의 직책이 있는 것과는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위와 직책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지, 지위가 있으면 반드시 직책이 없어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만 축내는 것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어진 자는 반드시 능력이 있지만, 능력 있는 자가 반드시 어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맹공작(孟公綽)53)과 같은 자는 어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리(義理)의 성(性)은 좋은 도리(道理)이고 기질(氣質)의 성은 좋지 않은 도리라고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미 태어난 것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성(性)으로 부를 수 있으며, 이미 태어나면 어떠한 선(善)이 갖추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성선(性善) 두 글자는 1서 7편(一書七篇)54)의 강령(綱領)이니 어찌 다만 지언(知言), 양기(養氣)55)만을 일컫는 것이겠습니까? 계선(繼善)56)이라는 것은 비록 공자의 학설이지만 그저 조화(造化)가 발육(發育)하는 측면을 가지고 말하였기 때문에 성선(性善)의 설은 맹자(孟子)에게서 처음으로 나와 밝히지 못했던 의리를 확장하였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 조목의【條】 중요한 핵심에 대해서는 저같이 우매한 자가 감히 논할 바가 아니나, 저의 억측으로 논변하였으니 어찌 오류가 없음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더욱 깊이 생각하여 사실에 부합하는 논의를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前書問目。固知非淺劣所敢容喙。而其在麗澤之義。不可不各陳已見。俾歸於正。故略有云云。今讀來書。倒蒙領可而無一言駁正處。未知鄙說別無差失歟。雖有之而不忍直言攻斥耶。今於俯詢諸條。又不敢緘黙如此。幸加一一訂砭。勿似前日之爲。如何。第一段配義集義之云。大意固然。然配義與道。是統擧體用而言。集義特以用功處而言。若曰用則有做工夫處。體則無做工夫處。則語意不圓全。功夫有滲漏矣。體與用雖有間。而豈可謂專無工夫耶。所謂無工夫處是工夫者。此也。且云義爲主。氣爲主者。亦未安。當曰集義是所主而言者。義也。配義是所主而言者。氣也。如何。第二段勿忘云云。亦然。必有事焉而勿正。是大體規模。意思當如此。心勿忘勿助長。是親切下功夫處也。此一段本爲集義語。而亦於此心存主處。極爲要切。是故程子曰。勿忘勿助。與鳶飛魚躍底意同。更加體認躬行然後。方知斯言之有味也。試以一株花木觀之。生理周流。無少停息者。是勿忘也。無一毫急迫强排容其人爲者。是勿助也。此是聖人開示入德之妙。莫切於此矣。言之病。心之失。來示得矣。比如目屬肝。耳屬腎。肝腎失和。則耳目受病也。五十畝則公田爲五畝。七十畝則公田爲七畝。百畝則公田爲十畝。而但廬舍有十畝十四畝二十畝之分。故合於十一之稅耳。爲仁不富。爲富不仁。槪以立心向背言之。豈有富皆不仁。仁皆不富之理耶。圭田亦是公田之在民間者。以供鄕大夫祭祀之用。有何更征耶。餘夫之田。以其自力耕作者。則其有征必矣。賢者在位。能者在職。如三公論道經邦所包甚廣。非如甲兵錢穀。各有一職之比也。故以位與職分言之。非謂位必無職而尸位素餐也。賢必有能。能不必有賢。然如孟公綽者。可謂賢而不可謂能也。義理之性。是好底道理。氣質之性。是不好底道理。此言誠是。若以未生已生分言之。則不可未生何性之可名。而已生何善之不具。性善二字。此是一書七篇之綱領。豈特知言養氣之謂歟。繼善雖是孔子之說。而只就造化發育處言。故謂以性善爲始出於孟子。而擴所未發耳。諸條肯綮。有非愚昧昕敢上下者。而臆說取辨。安知保無疪纇。更加細思。以示稱停之論。如何。 오영지(吳永之) 오영지의 이름은 장섭(長燮)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집에 오장섭에게 답하는 편지가 남아있어 이들 사이의 교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택(麗澤)의 뜻 이택(麗澤)은 친구 사이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한다는 의미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것으로 붕우 사이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 비설(鄙說) 자신의 학설에 대한 겸칭이다. 의(義)와 짝하여 의(義)를 모은다【配義集義】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속성을 말한 부분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의 속성은 의(義)와 도(道)에 짝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난다. 의는 어느 날 갑자기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허전함이 있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則餒矣.】"라고 하였다. 반드시……기대하지 말라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온 구절로,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일로 삼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는 내용이 있다. 어진 자는 …… 않다는 것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부자는 어질지 않고, 어진 자는 부자가 되지 못한다.【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라는 말이 양호(陽虎)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규전(圭田) 고대에 국가에서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가 제사를 지내는 데 소요되는 경비에 쓰도록 나누어 준 전지(田地)를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경(卿) 이하는 반드시 규전(圭田)이 있는데, 규전의 면적은 50무(畝)이다."라고 하였는데, 조기(趙岐)의 주에 "고대에 경으로부터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규전 50무를 받았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경비를 제공하는 것이다. 규(圭)는 정결하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맹공작(孟公綽)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이다. 청렴하고 욕심이 적었지만 재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공자가 "맹공작이 조씨와 위씨의 가신(家臣)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지만 등나라와 설나라의 대부가 될 수는 없다.【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라고 하였다. 1서 7편(一書七篇)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원래 7편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한(後漢)의 조기(趙岐)가 주석을 달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들었다. 지언(知言), 양기(養氣) 모두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언(知言)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진의를 잘 파악하는 것이다. 양기(養氣)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양기(養氣)로써, 밖으로부터 의가 들어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행실을 쌓아 자신의 마음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는 충만함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계선(繼善)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일음일양(一陰一陽)을 계속하여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것이 선이고, 사물이 생겨나면서 갖추고 있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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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영에게 답함 答洪文寧 아득히 헤어져 만나지 못한지 얼마인가요. 애타는 심정이 너무나 간절하여 잠깐의 틈도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시성(侍省)하는 상황은 절서마다【連序】 왕성하신지요? 가르치는 데 몸이 매여 있더라도 또한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이익을 취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 뵙고자 하지만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몸이【鼎器】84) 망가져서 한가지를 얻으면 그대로 잃어버려서 전혀 바뀌지 않는 데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슬픔이 밀려와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신 권경(權經)에 대한 설은 철저하게 연구한 정밀함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권(權)과 경(經)은 단지 하나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程子)의 말씀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둘로 보고 하나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자(朱子)의 말씀이 아니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라고만 보고, 둘이라고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두 설(說)이 서로 연관되어 그 뜻이 갖추어지게 되니 정자의 설이 잘못되었고 주자의 설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자는 경(經)을 이미 정해진 권(權)이라고 하였고, 권(權)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經)이라고 하였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다시 평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릇 권(權)과 경(經)은 진실로 분수(分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경이어야 할 때는 경이고, 마땅히 권이어야 할 때는 권인 것입니다. 또 일찍이 경이 아님이 없는 것이고, 또한 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對)로 말하자면 권은 스스로 권이고, 경은 스스로 권입니다. 단언(單言)하면 권은 경이 되기도 하고 경은 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의 두 가지 설을 문득 그 사이에서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경은 일정하게 획정한 것이고 권은 대상의 경중을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두가지 사물로 보신 것입니까? 자세히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蒼莽葦刀。貽阻幾時。耿耿懷逞。無間晷刻。未審侍省候節。連序茂謐。絆身斅學。亦不無相長取益之方。爲之瞻溯。不在願聞。義林昇器敝漏。隨得隨失。其爲不移之歸決矣。撫念悲悼曷以云喩俯詢權經之說足見硏窮之密然愚意以爲權與經。只是一而二而一者也。非程子之言。則人見其爲二。而不見其爲一。非朱子之言。則人見其爲一。而不見其爲二。二說相須。其義乃備。不可以程子之說爲失。而朱子之說爲得也。朱子所謂經是已定之權。權是未定之經者。已是十分明白。無容更評夫權與經。固有分數。然當經而經。當權而權。亦未嘗不是經。又不可不謂之權也。是故。對言則權自權。經自經。單言則權便是經。經便是權。不當將程朱兩說。而輒可取舍於其間也。且來諭以爲經是一定畵定。權是稱物輕重。則此果二物乎。細思之如何。 몸이【鼎器】 원문의 '정기(鼎器)'는 원래 단약(丹藥)을 고아내는 솥인데, 여기서는 육신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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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501)의 〈야귀재〉 시에 차운하다 次吳極卿《夜歸齋》韻 일만 솔 깊은 곳에 초가집 하나 있으니 萬松深處一茅堂자나 깨나 안풍502)을 누가 감히 잊으랴 寤寐安豊詎敢忘물 맑은 밭고랑엔 싹이 크는 걸 보겠고 水白田間看苗碩등불 푸른 책상에는 운초503)의 향기 있네 燈靑案上有芸芳문을 나섬에 어디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出門何地堪投足도를 걱정해 애가 끊이지 않은 적 없었네 憂道無時不斷腸썰렁한 지금의 사업일랑 얘기하지 말게나 泠淡休言今事業훗날 태괘의 양이 자라는504) 좋은 기반이니 好基他日泰陽長 萬松深處一茅堂, 寤寐安豊詎敢忘?水白田間看苗碩, 燈靑案上有芸芳.出門何地堪投足? 憂道無時不斷腸.泠淡休言今事業, 好基他日泰陽長. 오극경(吳極卿) 극경은 오병수(吳秉壽, 1883~1961)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수산(壽山)이다. 사호(沙湖) 오익창(吳益昌)의 후손으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출생하여 종숙 호산(壺山) 오죽하(吳竹下)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에 《수산집》 5권 3책이 있다. 안풍(安豐)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에 은거한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병수를 가리킨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이란 노래를 지어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운초(芸草) 향내 나는 풀로 책이 좀먹는 것을 방지한다. 태괘(泰卦)의 양(陽)이 자라는 1월에 해당하는 태괘는 양(陽)인 군자가 안에 있고 음(陰)인 소인이 바깥에 있으니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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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군이 멀리서 찾아왔다가 이별할 때에 최여중의 집에 함께 가서 세 사람이 회포를 펴다 무인년(1938) 黃君致實遠訪別時, 同至崔汝重家, 三人敍懷【戊寅】 세 벗505)의 난초 같은 말에 한 방이 향긋하나 三益蘭言一室芳문을 나서면 풍상이 들이치지 않는 곳이 없네 出門無處不風霜진나라 피할 망상에 복사꽃 뜬 물506)을 찾으나 避秦妄想尋桃水공자를 배우는 단방507)은 주자를 본받는 것이네 學孔單方法紫陽북리의 두터운 정에 돌아보는 마음 많았는데 北里厚情多眷眷서원의 높은 의기 또한 당당하네 西原高義亦堂堂하룻밤 옛사람의 글을 읽는 것보다 나으나 一宵勝讀前人語나는 무지하여 부끄럽고 감사하기 그지없네 而我空空愧感長 三益蘭言一室芳, 出門無處不風霜.避秦妄想尋桃水, 學孔單方法紫陽.北里厚情多眷眷, 西原高義亦堂堂.一宵勝讀前人語, 而我空空愧感長. 세 벗 원문의 '삼익(三益)'으로, 세 사람의 유익한 벗이라는 말이다.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는 말이 나온다. 복사꽃 뜬 물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 또는 이상향을 비유한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진(秦)나라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단방(單方) 원래는 민간에서 전래되는 약방문으로, 한두 가지 약재를 쓰지만 신통하게 효력이 잘 나타나는 약을 말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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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회안》 서문 興學會案序 완도군(莞島郡)은 남해(南海)의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 있고, 서울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어 문물(文物)과 예교(禮敎), 의장(儀章)의 등위(等威)가 내륙 지역의 여러 군(郡)들보다 조금 손색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해의 운세가 양구(陽九)139)를 침범하고, 구야(九野)140)가 막혀 이단의 학설과 가르침이 날로 치성하고 달로 확장하면서 바람에 휩쓸리고 파도에 진탕되어 마르고 깨끗한 땅이 없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완도의 선비들이 먼저 부자묘(夫子廟)를 세우고, 그 다음에 학문을 진흥시키는 규례를 갖추어서 학교에 모여 시서(詩書)의 학업을 강습하고, 제물을 진설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익히는 것이 성대하게 바람이 불 듯 유행하여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이는 내륙 지역의 여러 군에는 없는 것이니, 어찌 기수(氣數)가 순환하여 드러나고 감추어짐에 때가 있어서 그렇겠는가. 어쩌면 하늘이 사문(斯文)을 다 잃지 않고자 하여 한 줄기 양맥(陽脈)을 한 모퉁이 지역에 모아 두게 함으로써 훗날 크게 올 장본(張本 일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것인가?무성(武城)에서 소 잡는 칼을 사용했다고 한 것은 대체로 자유(子游)가 홀로 실행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서인데141), 하물며 오늘날 같은 세상에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며 시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랴. 만약 부자(夫子 공자)가 살아계셨다면 어찌 빙그레 웃을 뿐이겠는가.민중(閩中)142)은 예로부터 먼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일컬어졌는데, 치산(廌山)과 구산(龜山)143) 두 선생을 얻고 나서 마침내 천하의 문명한 고을이 되었으니, 지금의 완도군이 다만 당시의 민중이 되지 않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완도군의 선비들은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 계(契)는 김군(金君) 석욱(錫旭)이 창도하였는데, 그의 벗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김군(金君) 영엽(泳燁)을 통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莞之爲郡在南海窮漠之濱。去京師千餘里。文物禮敎。儀章等威。不能無少遜於內地諸郡久矣。歲侵陽九。九野閉塞。異說異敎。日熾月張。風靡波盪。無地乾淨。然而莞之士。先立夫子廟。次設興學之規。講聚乎庠塾詩書之業。遊習乎樽俎揖讓之節。蔚然風行。俗以丕變。此是內地諸郡所未有也。豈氣數循環。而顯晦有時者然耶。抑天不欲盡喪斯文。而使一縷陽脈。收斂翕聚於一隅之地。以爲他日大來之張本耶。武城牛刀。蓋善子游之獨行。況在今日域中。而得聞其一隊絃誦之聲於窮漠之濱。若使夫子而在焉。則豈惟莞笑而已哉。閩中古稱蠻荒之區。而得廌山龜山兩先生。遂爲天下文明之鄕。安知今日之莞。獨不爲當日之閩耶。惟莞之士。勉之勉之。是契也。金君錫旭倡之。因其友冠山金君泳燁。問序於余云。 양구(陽九)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4천 5백년 되는 1원(元) 중에 다섯 번 발생하는 양액(陽厄)과 네 번 발생하는 음액(陰厄)을 합한 말로, 극에 달한 재액(災厄)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대한제국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을 비유한다. 구야(九野) 하늘의 팔방과 중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성(武城)에서……여겨서인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陽貨》 민중(閩中) 지금의 복건성(福建省)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며 성리학을 대성하였다. 치산(廌山)과 구산(龜山) 치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유초(游酢, 1053~1123)의 호로, 당시 지부구현(知扶溝縣)이었던 정호(程顥)의 부름을 받아 학사(學事)를 맡고 그때부터 정호 형제를 사사하였다. 구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로, 정호 형제를 사사한 뒤 이정자(二程子)의 도학을 발전시켜 낙학(洛學)의 대종이 되었고,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장식(張栻)ㆍ여조겸(呂祖謙) 등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은 여대림(呂大臨)ㆍ사량좌(謝良佐)와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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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노인수연시집》의 서문 禮洞老人壽筵詩輯序 인생 육십을 옛사람은 하수(下壽)라 하였으나, 세대가 내려오면서 운수(運數)가 모질어져 백성들이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요행히 이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병들어 쇠약하고 곤궁하여 외롭게 지내며 삭막하게 세상사는 재미가 없게 되었다. 대체로 사람 중에 하수를 얻은 자가 열에 둘이 되지 않고, 하수까지 살면서 운수에 별 탈이 없는 자가 또 다섯에 하나가 되지 않으니, 이른바 "양(陽)은 획[━]이 하나이고, 음(陰)은 획[╍]이 둘이기에 길함은 적고, 흉함은 많다."라는 것이 바로 이치와 형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내가 듣건대 예동(禮洞) 하군(河君)의 구갑(舊甲 환갑(還甲))이 되는 생일이 올봄에 있어서 여러 날 동안 장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집안사람은 온화하고 자신은 건강하여 안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밖으로는 별 탈이 없으며, 아래로는 여러 자제들이 난초의 뿌리처럼 함께 자라고, 손자들이 난초의 잎처럼 서로 비추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복의 풍성함이 오늘날 같은 말세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었다. 모르겠지만, 어떻게 수양(修養)했기에 향유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인가? 듣건대, 맏아들 해수(海秀)가 부지런히 일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여 효성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의복과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휼해 주었다고 하니, 상서로움을 가져오고 복을 받는 것이 또한 여기에서 한 단서를 증험해 볼 수 있다.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축하고, 벗들이 모여 축하하며 시를 읊어 주고받은 것이 책을 이룰 만큼 쌓이자, 그해 가을에 손주를 안은 성욱(性煜)이 초라한 내 집으로 찾아와 그 일에 대한 서문을 지어 첫 부분을 장식해주길 요청하였다.아, 나도 올해 또한 회갑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미 병으로 피폐한데다 또 홀로 곤궁하게 지내고 있으니, 덕과 복이 있는 집안사람과 비교하면 그 운수가 미치지 못함이 어찌 30리 뿐이겠으며, 옥돌 잔에 들어있는 술과 질항아리에 담긴 평범한 음식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어 부럽게 여기는 뜻을 담아 보내고, 또 같은 세상을 함께한 동경(同庚 동갑(同甲))으로 인생의 막바지에 만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칠 따름이다. 人生六十。古人謂之下壽。然世降氣促。民多夭折。幸而至於此者。又多衰癃窮獨。索然無聊。蓋於人而得下壽者。未爲十之二。下壽焉而氣數無恙者。又未爲五之一所謂陽一而陰二。吉少而凶多者。乃理勢之使然也。余聞禮洞河君舊甲晬日。在於今春。而行壽老之宴者。有日矣。家溫身康。內而偕老。外而無故。下而羣蘭倂茁。孫葉交映。其天餉之豊。在今衰叔而鮮見其比。未知何修而所享若是。聞其胤子海秀。服勤致養。以孝著聞。縮衣節食。以賙貧乏。其所以致祥受福。亦可卽此而驗其一端矣。鄕閭相慶。朋友聚賀。歌詠酬唱。積爲卷軸。其年秋。抱孫性煜過敝廬。請序其事以弁其端。嗚呼。余於今年。亦爲回甲人矣。而旣病廢矣。又窮獨矣回視德門福家。其氣數之不相及。奚啻三十里哉。瑟瓚黃流。瓦缶褻味。蓋不可易也。玆敢力疾行墨。以酬歆艶之意。又以寄倂世同庚戀戀覯降之思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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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구씨 행장 淑夫人具氏行狀 부인은 성이 구씨이고 세계(世系)는 능성(綾城)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민첨(民瞻)이 상세(上世)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고조인 휘 삼익(三益)은 진사(進士)였고 증조인 휘 채(埰)도 진사였으며 조부인 휘 찬원(贊源)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 상윤(相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비(妣)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석윤(錫淵)의 딸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 12월 14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어려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첨지중추부사공이 언문(諺文)으로 《소학(小學)》을 적어 부인을 가르쳤다. 또 "남자는 요순(堯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여자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46)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고, 인하여 학임(學任)으로 이름을 짓고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르자 희임(希任)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부인은 교도(敎導)와 훈계(訓戒)를 따르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18세에 처사공(處士公) 이지호(李贄鎬)에게 출가하였다. 공경과 순종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섬겼으며 동서들에게도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게 지내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나이도 많고 병환이 위중하여 항상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한 번도 편안히 쉬지를 않아 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소박하고 초라한 의복과 음식으로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이웃의 아녀자가 조롱하며 비웃는 말을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배부르기를 기약하지만,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굶주릴 것을 각오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소 살림살이는 매우 검약하였지만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은 어떻게든 주선하고 장만하여 기어코 풍성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자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고 피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롭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아녀자의 행실은 순종이 으뜸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훈계나 명이 규중(閨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가풍(家風)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집안이 어렵고 궁핍해져 여러 아들이 이를 걱정하자 부인이 책망하기를,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너희들이 학문을 그만두어 집안의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행동거지가 침착하여 태만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은 온화하면서도 절도있게 대하고 동복(僮僕)은 은혜로우면서도 엄하게 다스려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면서 흡족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갑진년(1904, 고종41)에 숙부인에 봉해졌는데, 이는 추증(追贈)된 남편을 따라 봉호(封號)를 받은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2) 1월 4일에 생을 마쳐 비사등(飛沙嶝) 선영의 오른쪽 산등성이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고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지남옹(芝南翁)47)과 종유(從遊)하고 또 그의 윤자(胤子)와 앞뒤로 수십 년간 교유하면서 숙부인이 집안에서 보인 품행이 훌륭하고 자애로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익히 들었다. 지금 그 집안의 가장(家狀)을 보니 전에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으니 부모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더욱 힘을 쏟아 학문을 그만두지 않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당시 숙부인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도리일 것이다. 夫人姓具氏。系出綾城。麗朝平章事諱民瞻。其上系顯祖也。高祖諱三益進士。曾祖諱埰進士。祖諱贊源贈戶曹參判。考諱相允僉樞。妣固城李氏錫淵女。以純祖癸巳十二月十四日生。夫人幼而能言。僉樞公以諺文。書小學以敎之。且曰。男子當以堯舜爲法。女子當以任姒爲法。因名之以學任。及笄字之以希任。夫人遵循敎戒。無敢違越。十八歸于處士李公贄鎬。奉舅姑事君子。克敬克順。與娣姒溫恭和洽。未有間言。其姑朴氏年高沈疾。常在床褥。晝夜侍供。殫誠竭力。雖勞苦之極。未嘗就便。見者一辭稱賞。家貧甚。縕袍麤糲。處之裕如。隣家婦女。有譏笑之言。夫人曰。業農之家。其妻必飽。業儒之家。其妻必飢。此是常事。何足怪也。日用調度。極其儉約。而至於奉祭祀接賓客。周旋營辨。期於豐潔。夙興夜寐。血力拮据。以至事力稍紓。嘗戒諸婦曰。女子之行。以順爲上是故敎令不出於閨中言語不聞於門外。其家風爲何如也。晩年家力艱乏。諸子以爲憂。夫人責之曰。貧者士之常。不足爲憂。而但恐汝輩失學以墜家聲也。性度溫仁。動止安詳。怠慢之氣。不形於色。華麗之物。不近於身。待宗族和而節。御僮僕惠而嚴。至於比近隣里。無不懽然稱愜焉。甲辰封淑夫人。蓋從其君子追贈也。戊申正月四日卒。葬飛沙嶝先壟右岡午坐原。生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孫男女皆幼。嗚乎。余從芝南翁遊。又與其胤子遊。前後數十年。其內行之備。慈誨之美。稔聞久矣。今見其家狀。與前所聞者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更惟勉力。無失其學。無墜家聲如當日之敎也。此實立揚顯親之道。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어진 후비(后妃)였다. 지남옹(芝南翁) 남편인 이지호(李贄鎬, 1836∼1892)의 자호(自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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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오공 행장 松庵吳公行狀 송암 오공의 휘는 수화(壽華), 자는 태중(泰仲)이다. 고려조의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48)이 공의 시조(始祖)이다. 4대를 내려와 휘 현필(賢弼)에 이르러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지고 이로 인하여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대대로 작위와 공훈이 드러났다. 휘 충을(忠乙)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현손(玄孫)인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 보성으로부터 능주(綾州)의 대곡(大谷)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인하여 무덤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부터 오씨는 능주에 살게 되었다. 증손인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절제사(節制使)로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여 조정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공의 8대조이다. 고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후유(厚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이다. 고(考)는 휘가 치상(致祥)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경우(警禹)의 딸로 일송(一松) 홍치(洪治)49)의 후손이다. 헌종 을미년(1835, 헌종1) 11월 무자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스스로 말하고 먹을 줄 알게 되자 응대와 대답에 어김이 없이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8세 때 대인(大人)이 몸소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서 대인을 대접하려고 하자, 주막 아낙이 공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안주까지 갖추어 주고서 값을 말하지 않았다. 맏형과 뜻을 같이하고 경서를 물려받아 쓰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가 되자 맏형에게 이르기를,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셨으니 우리 형제는 형편상 함께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맡아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 또 형님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대인(大人)의 성품이 준엄하여 노기를 띨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온화한 말로 넌지시 간하여 대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대인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둘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저절로 풀어진다."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매우 위독해지자 여러 날에 걸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바쳤으며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몸이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대인이 연로한 나이에 배필을 잃은 것을 보고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까운 옛친구들을 초빙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분가(分家)를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집안일은 반드시 부친의 일을 먼저 처리한 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형제 5인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각각 성가(成家)를 하여 차례차례 분가(分家)하게 되자 살림을 차리는 데 필요한 온갖 것에 대하여 공이 반드시 물자를 대어주어 형 집에서 나누어 내는 비용이 없도록 하였다. 얼마 뒤 여러 아우에게 이르기를, "아버님의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공양하는 의절은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찌 오로지 큰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한 달 중에서 15일 치 양식은 내가 드릴 것이니 나머지 15일은 너희 세 명이 각각 5일 치씩 드리거라."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번갈아 양식을 대어 매우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 노쇠했다는 이유로 애통함을 누그러트리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큰형을 섬기는 것도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하여 크고 작은 집안일을 반드시 여쭌 다음 거행하였다. 큰형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설사를 하면 그때마다 자기 손으로 치웠다. 형의 자식을 보살피는 일도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여 갖가지 보살피는 일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와 여러 제부(弟婦)도 역시 서로 친애하여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나누었다.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까지 미치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도중에 그 사람이 병에 걸리자 함께 오던 이들은 모두 먼저 떠났지만, 공은 행낭 안의 물건을 팔아 그를 치료해주고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왔다. 이웃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집을 짓도록 물자를 대주어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고 열읍(列邑)의 선비들이 글방을 마련하려고 하자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알아보아 일이 진척되도록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마련하여 종족(宗族)을 화목하게 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빈궁한 교우(交友)나 가난한 친족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그때마다 진휼(賑恤)하였고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사망(死亡)과 상사(喪事)에 문안하거나 물품을 보내는 일을 그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비적(匪賊) 무리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공은 자제(子弟)들과 친척을 모아놓고 잘못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평소에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선(善)을 즐겨 행하며 의(義)를 좋아하였고 화려한 명성이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별서(別墅)를 짓고 작은 길을 내어 오가며 시를 읊조리고 빈객이나 벗이 이르면 그때마다 곧바로 잔을 돌려 술에 취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소 행실이 쌓이자 명망이 암암리에 드러나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의 유림이 조정에 천거하고 아뢰어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표창을 받았다. 여러 아들이 정문을 세우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건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 하늘을 속인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굳이 물리쳤다. 이 때문에 여러 아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봄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자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효(孝)로 선조를 받들고 의(義)로 자식을 가르치며 선한 자가 아니면 사귀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선대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보화(寶貨)는 써버리면 다 사라지지만 충효는 누려도 끝이 없다. 학식을 쌓자면 반드시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삼자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하거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세상을 떠나니 곧 3월 27일이었다. 향리(鄕里) 인사(人士)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칠송(七松)의 가락동(嘉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곧 전배(前配) 고씨(高氏) 묘의 왼쪽이었다. 고씨는 본적이 장택(長澤)이고 시우(時祐)의 딸이며 참의를 지낸 신부(臣傅)의 후손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계배(系配)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석우(錫祐)의 딸이며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장섭(長燮), 덕섭(德燮)이고 딸은 이승정(李承正)에게 출가하였다. 장섭은 재동(在東), 재남(在南), 재경(在慶)을 낳았고 덕섭은 재원(在元)을 낳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로웠으며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었다. 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함에 가까웠으며, 처신은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자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일 처리는 공평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사람이나 외부인이나 공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공을 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화락함을 누리고 집안은 이로써 평안하였으며 훌륭한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시경》 〈벌목(伐木)〉에서 노래한 '신이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하게 되리라.'는 것이 공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어 앞뒤로 20년에 걸쳐 논의를 반복하며 깨우침을 얻었고 출입하며 의지하였으니 그 힘이 적지 않았다. 어찌 공이 조금 더 머물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버릴 줄 알았겠는가. 장섭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행장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대인과 서로 잘 알던 분으로 말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한 몸이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을 약술하여 돌려 보낸다. 松庵吳公諱壽華。字泰仲。勝朝文襄公諱延寵。其鼻祖。四傳至諱賢弼。封寶城君。因以貫焉。世著爵勳。至諱忠乙。入我朝。官贊成。玄孫諱益孫。以學行除寢郞。自寶城葬其親於綾州大谷。因寓墓下。綾之有吳始此。至曾孫諱邦翰。壬辰之亂。以節制使殉節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世觀贈戶曹參判。曾祖諱厚有。僉樞。祖諱錫永號竹湖。考諱致祥號溪隱。孝友著聞。妣豐山洪氏警禹女。一松治后。以憲宗乙未十一月戊子。生公于七松里。自能言能食。應對唯諾。承順無違。父母有疾。涕泣廢食。八歲見大人躬耕。心甚悶然。竊往店幕。將沽酒餉之。酒媼嘉其意。具與肴饌而不言其直。與伯氏共方連業。晝夜不懈。至成童。謂伯氏曰。家貧親老。吾兄弟勢難倂學。吾當幹家。安養老親。又使兄專業。不亦可乎。躬服勤勞。家力稍舒。大人性峻。每有怒色。家人莫出一語。公溫言幾諫。輒廻其意。大人嘗語人曰。吾與二兒言。不覺怒氣自解。母夫人有病甚劇。血指延數日。遭故。毁瘠過甚。哀動傍人。見大人年高喪耦。慮有窮寂之懷。日夕不離側。招致故舊所善以悅其意。中年以親命析箸。而晨昏不廢。家務必先幹父而後及於私。兄弟五人。友愛甚篤。及各有室。次第析箸。而其設産凡百。公必資給。使兄家無分損之費。旣而謂諸弟曰。親年極隆。供養之節。不可歇后。豈可專委於伯氏耶。一月之內。十五日之養。我當供之。餘十五日。君三人各供五日也。自是迭相進供。備極其養。執喪哀戚。不以衰老自恕。遇諱辰。致齋散齋。極其誠敬。事伯氏如嚴父。家事巨細。必稟而行。有疾。晝夜扶持。泄痢輒掬而除之。撫愛兄子恩意甚至。種種周恤。無所吝。諸弟諸婦。亦相親愛。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各得其心。嘗自京還。同行一人。中路遘疾。諸伴皆先去。公賣行槖什物。爲之調治。俟其愈而同歸。隣有火患。出力營構。使之安堵。列邑多士。將營講舍公嘉其意。爲之血力周章。俾就其緖。設門憲以睦宗族。立洞規以和鄕井。遇飢歲。窮交貧族。有難存活。輒加賑恤。吉凶死喪。存訊贈遺。隨時不替。甲午匪徒大熾。公會子弟族戚。戒勿犯。平日愛好人倫。樂善嗜義。於聲華利達泊如也。築室開逕。嘯詠其中。賓朋至。輒行酒酣暢。極其歡洽。平生積累。聲譽闇章。鄕道儒林。薦報於朝。除寢郞。蒙旌褒諸子將營棹楔。公曰。無一善狀而至有此擧是欺天也。人而欺天。於心安乎。固却之。是以諸子不果。乙未春。遘疾幾危。會家衆戒之曰。奉先以孝。敎子以義。非善不交。非禮不行。可以不失先業也。寶貨用之有盡。忠孝享之無窮。績學必要其成。業農必盡其力。爾輩識之。言終而逝。卽三月二十七日也。鄕里人士知不知。莫不痛惜。葬七松之嘉樂洞午坐原。卽前配高氏墓左也。高氏籍長澤。時祐女。參議臣傅后。早逝無育。系配金海金氏錫祐女。鶴城君完后。生二男一女。長燮德燮。李承正也。長燮生在東在南在慶。德燮生在元。嗚乎。公孝於父母。友於兄弟。睦於宗族。信於朋友用心近厚。行己周愼。接物慈惠。處事公平。是以內外懷之。上下安之。身享和樂。家用平康。令聞令望。藉藉人口所謂神之聽之。終和且平者。非公之謂耶。猥受知遇。前後二十年之間。所以往復規警出入倚仗者。其力爲不少矣。豈知公不少留而遽棄乃爾耶。長燮持家狀示余曰。狀行。非平素相熟不可。與大人相熟。匪公伊誰。余以淺陋。固知其有難承膺。而撫念事契。有不忍終辭者。略舒梗槪以還之。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윤관(尹瓘)과 여진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홍치(洪治) 1441~1513.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저서로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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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 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공의 휘는 장근(章根), 자는 진초(震初)이고 묵계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진원(珍原)에서 나왔으며 직제학을 지낸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0)이 공의 중조(中祖)이다. 세자사부(世子師傅) 증 이조 판서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51)이 공의 7대조이다. 죽천(竹川)은 휘 근효(根孝)를 낳았다. 근효는 호가 만포(晩圃)이고 관직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훈(功勳)으로 이름이 났다. 군자감 정은 휘 춘수(春秀)를 낳았다. 춘수는 호가 아수(我誰)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병자년(1636, 인조14)에 의병을 일으켰다. 직장은 휘 몽형(蒙亨)을 낳았다. 몽형은 호가 농은(農隱)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보성(寶城)에서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살았으며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만리(萬履)는 참봉을 지냈고 조부 휘 무석(武錫)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고(考)인 휘 수원(守遠)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진주 소씨(晉州蘇氏) 식(植)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유중(維重)의 딸로 부덕(婦德)으로 칭송을 받았고 영조(英祖) 계유년(1753, 영조29) 10월 9일에 장흥부의 녹동리(鹿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장난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부모님 곁을 지키며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스승에게 나아가52) 공부하게 되자 송독하여 익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금 자라서는 직접 집안일을 처리하여 집 안팎을 드나들며 온 힘을 다하였고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끝나고 여력이 있으면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고 책을 읽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문장의 이치와 문사(文詞)의 화려함이 찬연하게 날로 성취를 이루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를 위한 공부는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또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하였다. 늘 경전의 주지(主旨)에 몰두하고 예설(禮說)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존심치기(存心治己)의 근본으로 삼았다. 집안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반드시 의절(儀節)을 강구(講求)하여 하나하나 예를 따랐으며 일찍이 임시방편으로 시속(時俗)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 공을 본받아 행하였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다투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을 당했을 때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애통함에 몸이 무척 수척하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봄, 가을이 되면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슬퍼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는 듯이 하였고 삭망(朔望)이 되면 분영(墳塋)에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함께 자는 일을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재숙(齋塾)을 세워 서적을 비치하고 사우(師友)를 맞이하며 자손의 과정(課程)을 점검하였는데 분명하여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이 병이 들거나 죽어서 상례를 치르거나 굶주리거나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진휼하면서도 집안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선영 아래에 집 한 칸을 짓고 영모(永慕)라고 편액을 걸었다. 매번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이 오면 친족을 불러 모아 정겨운 담화를 펼치고 벗들을 모아서 그윽한 정취를 드러내고 자제와 향리(鄕里)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강서(講書) 규정이나 독법에 대한 의절을 거행하였다. 평소에 공경과 근신(謹愼)으로 자신을 지키고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여 소문이 미치는 곳에서는 애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군자다운 어른으로 추앙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 6월 4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83세였으며 살던 동네인 시근등(柿根嶝)의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정환(廷煥)이 수직(壽職)53)을 받아 귀하게 되면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 세준(世浚)의 딸로 3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재무(載茂), 재충(載忠), 재철(載喆)이다. 계배(繼配)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진계(震啓)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계환(桂煥), 정환(廷煥)이며 정환은 수직(壽職)으로 대호군(大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손자는 중흥(重興), 중회(重會)54), 중운(重運)55),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56),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57)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준수하고 특출한 자질로 시(詩)와 예(禮), 문헌을 갖춘 집안에 태어나서 가풍의 영향을 받고 학문과 덕행을 갈고닦아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하였다. 마땅히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한 시대에 쓰여야 했건만 동강(東岡)58)을 굳게 지키고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공에게는 진실로 유감이 없겠지만 사세(斯世)의 아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계윤(季胤)59) 중순(重淳)이 아들 기현(琦鉉)을 보내 공의 덕을 서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근방에 사는 후생(後生)으로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삼가 공을 우러러 흠모한 지 진실로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약간의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보태었다. 公諱章根。字震初。黙溪其號也。系出珍原。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其中祖也。世子師傅贈吏曹判書竹川先生諱光前。其七世祖也。竹川生諱根孝。號晩圃。官軍資監正。壬辰著勳。監正生諱春秀。號我誰。中司馬。官直長。丙子擧義。直長生諱蒙亨。號農隱。通德卽。自寶城移寓長興府。是公之高祖也。曾祖諱萬履。參奉祖諱武錫。贈司僕寺正。考諱守遠。贈左承旨。妣晉州蘇氏植女。無育。繼妣寶城宣氏維重女。以婦德稱。以英廟癸酉十月九日。生公于府之鹿洞里。幼而岐嶷。不好戱遊。日侍親側。唯諾唯謹。就傅上學。誦習不放。家貧甚。稍長。躬幹家務。出入竭蹶。備極忠養。行有餘力。輒侍側讀書。以悅親志。文理詞華。斐然日就。嘗曰。功令非爲己之學。居今之世。雖不可廢。而亦不可以專力於此也。每潛沈經旨。紬繹禮說。以爲存心治己之本。家有冠婚喪祭。必講求儀節。一一從禮。未嘗苟且循俗。是以親戚知舊。效而行之。有未瑩處。爭來取決焉。遭前後喪。一遵家禮。哀毁備至。杖而後起。春秋霜露。悽愴如見。朔望墳塋。展省無闕。與兄弟友愛甚篤。長枕大被。老而不替。立齋塾儲書籍。邀師友課子孫。無不的有成規。族戚隣里。有疾病死喪及飢饉匱乏。輒存訊之賙恤之。不知家力之不贍也。晩構一室於先壟下。題其顔曰永慕。每以佳辰良節。會族親以舒情話。聚朋舊以暢幽情。招子弟及鄕里少年。行講規讀法之儀。平居以恭謹持己。以忠慤接物。風聲攸曁。無不愛慕欣欣。以君子長者推之。乙未六月四日考終。享年八十三。葬于所居坊柿根嶝巳坐原。以子廷煥壽貴。贈戶曹參判。配興德張氏世浚女。擧三男。曰載茂載忠載喆。繼配仁川李氏震啓女。擧二男。曰桂煥廷煥。壽陞大護軍。孫曰重興重會重運重玟重萬重龍。重淳官通政。重熙重憲。曾孫以下不盡錄。嗚乎。公以秀爽雋異之資。生於詩禮文獻之家擩染濯磨偉然植立如此宜其有展布蘊藉。以需一時之用。而固守東岡。優遊卒歲。在公固無憾焉。而爲斯世之缺望爲何如耶。公季胤重淳。伻其子琦鉉來謁狀德之文。余以傍近後生。雖靡倂世。而嘗竊慕仰。固已久矣。玆不敢以匪其人牢辭。謹据家狀。略加修潤焉。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 1368?∼1446?. 초명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 1526∼1597.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헌릉 참봉(獻陵參奉), 왕자의 사부(師傅),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이 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중흥(重興), 중회(重會) 《송사집》에 실린 〈증호조참판박공묘지명(贈戶曹參判朴公墓誌銘)〉에 따르면, 첫째인 재무(載茂)의 아들이다. 중운(重運) 둘째인 재충(載忠)의 아들이다.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 넷째인 계환(桂煥)의 아들이다.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 다섯째인 정환(廷煥)의 아들이다. 동강(東岡)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는 곳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래로 국가에 대한 공훈과 임금의 은총이 대를 이어 왔는데 그대만 어찌하여 동강의 언덕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勳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는 구절이 있다. 계윤(季胤) 막내아들의 맏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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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東面席洞山金邦濟等山地立案咸豊十年庚申十二月 日 下東面席洞山金邦濟等山地立案右立案爲永久遵行事凡訟係寃屈則終有必伸之日事固理直則乃有歸正之時是如乎本縣民金邦濟等卽少尹本孫也少尹墓山地松楸見奪於外孫崔家爲其本孫者爲先之心切骨之寃去益深矣乃於千里裹足鳴寃於京兆旣有關文訴寃於 營門至承 甘飭幷其狀題而到付故曰金曰崔幷待山下親審形便則盖此山在縣南五里許名以席洞界限自在松楸蓊蔚而當初崔家之借葬於此山者不過二塚而已其後崔之子孫世世入葬自下至上殆無閒土甚至於少尹墓龍尾上壓葬者爲六塚階砌下逼葬者爲一塚以其外孫是加忍乎今於親審之場端緖畢露曲直立判崔民之勒奪外先山期欲凐滅前後所爲節節可駭其在警俗不可仍置同崔家四民等一倂嚴勘而少尹墓門卽日開拓山地四標尺量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四尺西至畓頭爲一百二十尺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幷與其松楸而推給本主金民永爲守護是在果夫此訟旣有京營關甘又有議狀 題敎寃已得伸事仍歸正而本事之顚末京營關甘山處形便備載於原報中不必疊床故同原報草謄列于左以備後考從今以往崔民段只塚其塚而已此山四標內雖一草一木更無得侵犯之意成立案以給爲去乎依此永久遵行爲宜者此亦中一件邑上一件出給金家--原報草爲牒報事卽到 使甘結內粘連漢城府關辭及狀題相考勒奪禁養之崔民一倂嚴勘松楸與山地卽地推給形止報來宜當者 甘結敎是乎旀粘連漢城府關內卽接道內扶安縣幼學金邦濟等所訴則假葬於外先山者恩猶感戴而倒戈反嚙期使外先墓凌夷倡造僞券使人眩惑者罪固罔赦而其時訟官旣已勘處則姑置毋論爲遣且渠衿給之說尤爲乖戾矣田宅奴婢何所不可而豈以先山墳墓於給於外裔自歸於無主之塚者是可近理之說乎崔民之奸計綻露無餘果是無論無法則罪亦不可容貸一倂嚴勘是遣山地及松楸卽地推給永使金民守護無至呼寃爲旀且其墳傍連抱之木圍逼擁蔽聞極駭悖在渠崔民亦是少尹外孫則忍爲肆毒於外先墓乎前後罪狀節節痛惡而況又漢城少尹旣是宰列之墓則 朝家亦爲守護之典載在而今其蔭木所翳莎草不附者尤極矜憐玆以發關爲去乎到卽嚴飭該邑不日內斫伐墳傍蔽木遂開墓門以示 朝典爲遣形止卽爲報來宜當向事 敎是乎旀本縣金邦濟等呈議送 題敎內旣有京兆完文狀辭又如此査實後無至更侵宜當向事山在官是齊原狀內節該矣等十三世祖少尹公諱世英弟郡事公諱光敍大歸本縣時先占壽藏之地於本縣席洞山而少尹公墓在於右岡郡事公墓在於左麓子孫世居世守而世葬焉一洞之地一草一木莫非矣等之禁養矣其後崔益坰先祖生明爲郡事公孫婿而生明之孫繼成爲少尹公之玄孫婿矣生明繼成之死借葬於少尹公郡事公墓所兩麓之間而只借一壙之至則局內禁養崔家初不干涉只護其兩塚而已矣中年以來少尹公子孫微弱散居各處崔後裔世居山下鱗次繼葬遂奪一麓幷取松楸而壑慾漸長將欲奪少尹公之墓麓全局往在再在去戊申崔鎭夏崔光璧等暗生凌夷少尹公墳墓之計斲刓碑文開經於龍尾渠亦少尹公之外孫則血脈遺傳而乃敢造凶是加忍爲乎其時訟官蔽於崔家之構誣竟不歸正故矣等之祖以其時門長不勝痛寃將欲擊錚沒於中路矣等之極痛益切末來則諸崔臆說此山麓衿得於外家云然田宅奴婢或有於衿給之例而以山麓衿給於外孫古所未聞者也自此以後崔之凶計愈往愈甚少尹公墓麓全局永爲奪取使此微弱之本孫不得禁代墳上前後左右松楸蔭翳土皮盡脫殆同無主之塚苟究崔家所爲天理人情到此掃盡矣具由粘連仰訴行 關該邑同崔益坰崔煥國等悖理滅倫之罪別般嚴繩是遣右山全局卽爲推給於本孫俾雪幽明之寃事原狀 題敎及 甘結粘關是置有亦京營關甘若是申嚴山處形便必當先審故金崔兩民使之待令於山下縣監卽爲馳往詳細摘奸是乎則少尹墓前後左右連抱之木密密圍立體碑銘碣巋然相對以若宰列之墓尙未開拓實爲寒心盖此山名曰席洞在縣南五里許有起峯峯之南稍平處有東西兩麓中有一巷分水西麓卽少尹墓也東麓卽少尹弟郡事墓也少尹墓麓東邊相連處有一平岡形如幅之長同岡下邊有少尹從孫婿玄孫婿兩崔塚自少尹墳傍俯視則皆在階外稍遠之地果以外孫有此許葬是加隱喩當初崔家之始葬於此者卽此二塚也其後崔之子孫世世倒葬上至峯下殆無閒土甚至於少尹墓龍尾上壓葬者爲亦塚階砌下逼葬者爲一塚密探輿論參以躬審端緖已露曲直立判是如乎崔民之爲金家外孫渠亦不諱席洞之爲金家先山人皆質言當初借葬女婿寔出舐犢之愛末內見奪山地反爲養虎之患夫崔家本以來贅之蹤借得葬骨之地事固感戴恩猶難忘是去乙不思報德之義反生嚙趾之心暗釀蠶食之謀乃有鵲巢之奪而況又旣奪之後稱以渠之禁養無難壓葬不拓墓門致使百年宰列之墓使作一坏無主之塚夫何肆毒至此可謂其疾甚矣大抵人皆有外祖外孫則噫彼崔家之金氏祖母魂若有知其可曰余有孫乎以情以法崔民所爲節節可駭情跡旣露所當幷與借葬塚而一時掘移是乎矣事在年久恐合參恕而至若少尹墓龍尾上及階砌下追後逼葬之崔民七塚係是當掘故卽爲掘去之意分付於崔民爲乎旀山地四標尺量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尺西至畓頭爲一百二十尺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幷與其松楸而推給本主金民自本縣仍成立案以給爲乎旀墓門爲先卽日開拓同崔謙錫崔煥國崔鳳坰崔鳳煥等依甘辭嚴勘後仍爲牢囚而崔益坰段姓名旣載於議狀固當一例奉行是乎矣渠旣今前出他故姑不得嚴勘是乎乙在果勒奪外先山期欲湮滅前後駭悖旣至此極其在警俗決不可仍置上項崔民等依律勘處同壓逼塚卽令掘移事竝只處分行下敎是乎旀山體圖畵粘上以備便覽原關還上使緣由幷以牒報爲臥乎事報 巡營營題卽見報辭崔民之前後所爲極甚駭悖山地旣已推給崔塚中年久者不必擧論是遣見囚諸崔倂懲礪放送向事庚申十二月十八日本官題敎稱曰外孫能以外先祖墓理不當而天理滅矣査實決處次崔門中知事人與狀內所訴諸人待令於山下更爲來訴向事庚申十二月十二日本官決案題敎稱以外孫借葬於外先祖局內於崔可謂難忘之恩是去乙渠等孤負外氏家厚義亦不念人倫之所關壑慾廣售於松楸奸狀於漸大於沮戱使本孫不得守護全山禁養奪付渠之局內非但汝矣之寃抑亦是一邑之所共忿矣今因京兆與巡營門甘飭之截嚴親審之日一一推給於本孫日後崔門中營邑間更有起鬧此題與立案憑考是遣立案段二件成出一則爲邑件一則出給汝矣身而壓逼七崔塚非不欲掘給是矣事係營門不可擅施向事 庚申十二月二十日--巡營門完文扶安金邦濟等山地完文爲完文成給事扶安金邦濟等先祖少尹公山所在於席洞山而其後孫許葬其外孫於禁養內是加喩其外孫之孫崔鎭夏崔光璧崔益坰等前後相繼暗釀凶計僞造文券勒奪少尹公墓全麓仍作渠之禁養同山地與松楸推給事漢城府飭關山在官査報崔民之背恩圖占非理勒奪綻露無餘自歸落科自今以後使崔益坰等四標內更無敢侵犯事完文成給爲去乎永久遵行宜當向事此亦中山在官段完文內辭緣相考施行次庚申十二月 日兼使[署押]--庚申十二月 日 金邦濟等山地完文卽到付 巡營門成給完文內扶安金邦濟等先祖少尹公山所在於席洞山而其後孫許葬其外孫於禁養內是加喩其外孫之孫崔鎭夏崔光璧崔益坰等前後相繼暗釀凶計僞造文券勒奪少尹公墓全麓仍作渠之禁養同山地與松楸推給事漢城府飭關山在官査報崔民之背恩圖占非理勒奪綻露無餘自歸落科自今以後使崔益坰等四標內更無敢侵犯事完文成給爲去乎永久遵行宜當向事此亦中山在官段完文內辭緣相考施行亦爲有置前因京營關甘墳傍及墓門卽爲開拓山地與松楸追給金民四標尺量自本孫案成給後形止亦夷修報矣今到營完文又如是截嚴故枚擧辭緣本邑完文更爲成給爲去乎自今以後崔民則塚其塚而已後錄四標內雖一草一木更無敢侵犯事依營邑完文立案永久施行宜當者此亦中完文二件成出一件邑上一件出給金家官[署押]後錄四標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尺西至畓頭爲一百二十尺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卞誣原情 幼學金邦濟金性豊金鼎奎金相翼等[以下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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