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년(1951) 선사455) 기일에 감회가 있어 일을 기록하다 7월 4일 辛卯先師諱辰感懷記事【七月四日】 광무 연간 경자년456) 光武歲庚子내 나이 열일곱 살이라 余年方十七학문하는 요령에 어두웠으니 所學昧蹊逕한갓 읽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네457) 可謂徒能讀듣건대 봉산 산중에서 聞說蓬山中선생이 남으로 와 강학한다 하니458) 臯比南來設유문이 바람에 쏠린 듯하였고 儒門風斯動사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士林雲似集월명사가 집에서 꽤 멀었는데 迢絶月明寺찾아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절했다오 往拜其間厠선비들은 앞다퉈 요의를 강하니 士爭講要義경전과 성례의 심오한 이치였네 經傳性禮賾나는 《춘추좌씨전》을 가지고 余將左氏傳한 장을 소리 내어 외우니 郞誦一章訖사람들은 보기 드물다고 하였고 人謂是罕見선생은 옥처럼 아껴주셨네 先生愛如玉마침내 말씀하시길 곽임종은 乃云郭林宗모용을 방문해 권면하여 덕을 이루게 했는데459) 訪茅勸成德천고에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千古傳美談내 어찌 훌륭한 자취를 따르지 않으랴 하셨네 我盍追芳躅하룻길 노정을 우회해 가서 迂回一日程우리 집에 왕림해 주셨는데 枉駕臨弊宅가친께 글을 써서 주기를 書贈家大人어진 아들은 집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셨네460) 賢子乃潤屋사람들이 사제의 분의를 정하라고 권하니 有人勸定師선생의 뜻도 그렇게 하고자 하셨지만 先生意亦欲막중한 사제의 분의를 莫重師生義너무 쉽게 정하는 건 성의가 부족하다 하셨네 坐定誠意薄이것은 가친의 말씀이었으니 是爲大人言의리가 더욱 참되고 절실하였네 義諦更眞切영산461)은 집에서 사백 리나 떨어졌는데 寧山四百里폐백을 갖추어 배알하라고 명하셨다오 具贄命之謁팔풍 –땅 이름이다.- 에는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었고 八風【地名】獰風吼쌍용 –고개 이름이다.- 에는 모진 눈이 쌓여 있었는데 雙龍【峙名】虐雪積어린 나이에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 弱齡不勝寒언 손을 호호 불며 구슬피 울었다오 呵手因作泣갖은 고생 끝에 금곡에 도착하니 十顚到金谷선생께서 깜짝 놀라며 기뻐하셨네 先生驚且悅이튿날 아침 집지의 예를 행하니 翌朝行贄禮주렴 앞에 상서로운 햇빛이 비추었네 簾前照瑞旭가르치는 말씀이 어찌 그리 온화한가 誨辭一何溫질박할 수 있도록 정성껏 면려하셨네 諄諄勉樸實《소학》 책을 가르쳐 주셨는데 授以小學書겨우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오 纔得經一朔내가 남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及見我南歸무엇을 잃은 듯이 서운해 하시고 悵然如有失전옹이 남긴 예설 부류를462) 全翁禮說類교정 편집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셨네 叮嚀託校輯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晩得俊髦士박복한 신세는 아님을 자축한다고 하셨으니 自賀不淺福이는 가친에게 답하신 편지 내용으로 是回大人書그 말씀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오 其言肺肝出신축년(1901) 늦봄에 重光暮春者다시 지팡이 짚고 천리 길을 갔는데 復杖千里策선생께서 군이 와서 몹시 기쁘니 君來我甚喜예설 편집을 어찌 그리 빨리 했는가 禮輯何敏速금강 물결이 쪽빛처럼 푸른데 錦江碧如藍그 위에 정자가 우뚝 서 있다네 其上亭子屹선비들이 풍영하는 모임을 가지니 多士風詠會군도 나와 함께 가보세 하셨네 君可同我適예를 행하는 자리에 일이 있는 날에는 禮席有事日가장 연소한 반열에서 나를 뽑으셨으니 選我最少列나의 솟아 흐르는 기를 돕고 流峙助我氣나의 좁은 견문을 넓혀주셨다오 聞見闊我狹눈 내린 달밤 봉서사463)에서 雪月鳳棲寺큰 강회가 다시 열렸는데 復開大講席사람은 늘 육칠 십 명이 모이고 人常六七十기간은 구십 일 정도가 되었네 日惟九旬浹문난함이 번다하고 소란스러웠지만 問難煩且擾나만은 직접 가르침 받음이 많았다오 余獨最親炙문리가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여 文理日驟進동배들이 미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셨으니 流輩所罕及이는 선생의 붓에서 나온 말씀으로 出自先生筆나의 가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라네 向我大人說인하여 권면하기를 몸소 인을 당해서는 因勸躬當仁자식에게도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네464) 讓子亦且勿한적한 전주의 여관에서 寂寂完南館세 사람이 제석을 보냈는데 三席經除夕자식에게 함께 수세하도록 하셨으니 令子同守歲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오 佳況此無若새해 정월 귀근하는 날에 開正歸覲日손수 쓰신 선생의 편지가 은근하였네 殷勤師手畢임인년(1902) 가을에 신전465)에 이르러 壬秋到薪田한 달 동안 다시 선생을 모셨다오466) 浹月復立雪유문에 바야흐로 일이 많아 儒門方多事기와 권이 서로 방휼처럼 다투었는데467) 奇權互蚌鷸선생께서 두 사람의 설을 절충하니 先生折其衷외람된 변론이 모두 환히 밝혀졌다오468) 猥辨儘昭晳중간에 심오한 이기설을 가지고 間將理氣奥나의 몽매함을 하나하나 일깨워주셨네 一一開我窒사방에 편지를 주고받으실 때 四方往復書때때로 대신 붓을 잡았다오 時亦代執筆계묘년(1903)에 가서 문안드릴 때 癸卯往候時연기에 마침 가시려고 하였는데 燕岐駕適發나는 번지469)처럼 수레를 몰아 余爲樊遲御이백 리 넘는 먼 길을 왕래하였네 往返七舍邈중도에 두 여관 안에서 中路兩館裡나에게 후창이란 편액을 써 주셨네470) 贈我後滄額이보다 앞서 편지 봉투에 前此書封皮창동(倉洞)을 창동(滄東)으로 바꿔 쓰셨네 倉洞滄東易창주471)의 도가 동쪽으로 온 지가 滄洲道東來지금에 이르러 팔백 년이 되었는데 至今年八百계승함은 후학에게 달려 있으니 繼之在後學중대한 임무이자 또 막중한 책임일세 大任又重責나의 형편없는 재주를 돌아보건대 顧以鹵劣材절하고 받았지만 감히 응낙하지 못하였네 拜受未敢諾남쪽으로 완산 길을 가리키시니 南指完山路다시 지난번처럼 수레를 몰았다오 御駕復如昨당시 난파의 상이 있었는데 時有蘭坡喪선생은 대공복을 입을 친척이니 師則大功慽상례와 장례로 수개월을 보내다가 喪葬經數月서늘한 기운 일자 마침내 북으로 돌아오셨네 凉生遂還北갑진년(1904)에 마침 원고를 필사하여 甲辰會寫稿초여름에 필사 일을 마쳤는데 首夏役旣卒선생께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시니 先生復南下난파의 연제가 가까운 시일에 있었네 蘭練在近隔방백이 강회를 설행하였는데 方伯設講會선생을 맞이하여 윗자리에 오르게 했네 邀之升上榻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人衆如山海나는 이날 일직을 맡았다오 我爲當日直연제를 지낸 다음 담양에 가서 旣練往潭陽삼은각을 구경하였네 爲觀三隱閣그 길이 우리 창동리를 경유하는데 路經我滄里가친께서 서재를 새로 지으시니 大人齋新築낙요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고 錫號以樂要명시까지 아울러 벽에 걸게 하셨네472) 銘詩幷揭壁객지에서 마침 더위에 지쳐 旅候適病暑영산(瀛山 고부)에 머물러 조섭하시니 瀛山留調攝천암은 구름과 숲이 좋고 天巖好雲林예천은 천석이 아름다웠네 禮川佳泉石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모여드니 濟濟縫掖趨글 읽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오 洋洋絃誦徹남고엔 일재의 유적이 남아 있고 南臯一齋墟옥천엔 하서의 자취가 전해지네473) 玉川河西蹟쌍계루는 어찌 그리 깨끗한가 溪樓何瀟灑필암은 또 엄숙하기도 하여라474) 筆巖又嚴肅경치 좋은 곳은 진실로 명성이 있고 勝地固有名장대한 광경은 또한 즐길 만하여라 壯觀亦可樂비로소 추성(秋城 담양)에 이르렀으니 始得達秋城선생의 이번 행차 목적지라네 師行是目的돌아오는 길에 풍패475)에 이르러 歸路到豐沛선생께 하직하니 뜰에 국화가 피어 있었네 拜退庭有菊대개 반년 동안에 蓋於半載間잠시도 슬하를 떠난 적이 없었네 未嘗暫離膝선생을 따르는 건 바로 나의 바람이니 從師顧我願우리 선생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오 舍我師不得노닐고 즐긴 게 일이 아님이 없었고 遊豫無非事보고 느낀 것도 모두 배움이라 하겠네 觀感亦云學을사년(1905)에 이르러 至于靑蛇年봄부터 가을까지 自春及秋日나는 예재의 객이 되었고 我爲禮齋旅선생은 목리의 서숙에 계셨네 師在木里塾찾아뵙고 문안드림이 어찌 쉽지 않으랴 面候豈不易편지로 문후한 것도 자주 하였다오 書問亦頻數선생께서 북으로 돌아가는 날에 函駕北歸日낙요재를 지나다 들르셨네 要齋爲經入그해 겨울에 섬오랑캐와 늑약이 이루어져 是冬虜約成종묘사직이 장차 무너지게 되니 杜稷將傾覆선생께서 충의가 끓어올라 先生奮忠義상소 올려 오적을 성토하셨네 呈疏討五賊병오년(1906) 정월에 丙午歲之正고산의 여막에서 문안드렸는데 高山候旅幕고산에서 부풍(扶風 부안)에 이르는 사이에 自高至扶風셋째 아들476)을 만나보도록 하셨네 是要三子覿간행은 비록 할 수 없다 해도 剞劂縱未可필사는 해 놓지 않을 수 없으니 鈔寫不得不백천재에서 가르침을 받들어 銜訓百千間지필묵을 마련하여 놓았네 備置紙筆墨불민한 내가 이 일을 주간하니 不敏爲幹務도합 서른여섯 책을 완성하였네477) 總成卅六冊선생을 모시고 초여름을 보내니 操几經初夏내장산에 있는 벽련암478)이었네 內藏菴蓮碧다시 영산에 도착하니 還到瀛山裏윤월 가운데 절반이 지나갔네 閏月中半迄이때에 면암옹이 是時勉菴老남쪽 지방에서 창의하였네 倡義于南服선생이 경하의 글을 지으시어 先生作賀狀소자가 그 편지를 받들고 小子奉書角진중에 가서 전하려 하였지만 往致于陣中군대가 이미 떠나 못 전달했다오479) 師發未得達이 뒤로 일 년이 지나도록 自後經一朞선생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받들지 못하였네 謦欬久未接정미년(1907) 장마와 무더위 날씨에 丁未潦炎天예산 골짝에서 찾아뵙고 따랐는데 跟拜禮山谷서쪽으로 백화산에 이르러 西至白華山석전에서 늦더위를 피하였네 石田避老熱이때 하늘이 감동한 바가 있어 于時天有感신령한 거북이 바닷가로 나왔네 靈龜出海曲선생의 불우함을 한탄하노라니 歎師不遇時눈물이 줄줄 흘러 가슴을 적셨다오 汪然涕沾臆바다에 들어가 세속의 더러움을 끊으려는 건 入海絶世汚오랫동안 간직한 선생의 뜻이었는데 師志久所蓄이번에 이 지역으로 가신 것은 今番此地行멀리 떠나 은거함을 도모하려 해서였네 經營遐擧跡무신년(1908)에 목리에 이르니 戊申到木里또한 바다가 지척에 있었네 亦爲海咫尺왕등도(暀登島)로 떠날 날이 다가와 暀島行有日날씨를 점쳐 바다를 건너려고 했다오 占天候利涉봉산과 영산 사이를 왕래할 때 往來蓬瀛間또한 우리 집에 오랫동안 머무셨는데 亦久留杖屐가친께서 이별 길에 임하여 大人臨別路시 읊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오 賦詩淚如酌선생과 가친의 사이는 先生於大人진심으로 서로 좋아하셨네 相好以心膈경자 신축 갑진 을사 무신에 庚辛甲乙戊해마다 찾아와 이틀을 묵으셨는데 每歲來信宿그 누가 알았으랴 이날 만남이 誰知此日見길이 천고의 이별이 될 줄을 永作千古別늦가을에 왕등도로 배 타고 갔는데 晩秋暀棹發기유년(1909) 정월에 가친께서 돌아가셨네 己正我親沒선생을 생각하면 정신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念師神欲往부친을 생각하면 마음을 칼로 에는 듯했다오 思親心如割섬에서 나의 만장에 화운하신 글이 島中和我章뒤늦게 빈소에 도착하였는데 追到苫塊室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읽으니 有淚無聲讀이내 심정을 어찌 차마 형용하랴 此情那忍曰위문하시는 글이 바닷가에서 오니 唁書自海出직접 와서 곡하는 것처럼 간절하였네 懇切同親哭초겨울에 안양서실480)에서 배알하고는 初冬拜安陽마침내 묘지명을 부탁드렸는데 乃以墓銘託연말에 비로소 답신이 오니 歲窮始有報명이 아니라 전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셨네481) 匪銘替傳述슬프게도 나는 집안을 맡은 고자인지라 哀此當室孤크고 작은 일을 모두 담당하였다오 大小俱擔著임자년(1912) 겨울에 계화도로 들어가시니482) 壬冬入繼華어느새 삼 년의 세월이 흘렀네 於焉歲三閱편지로 문안드림은 비록 끊어지지 않았지만 書候縱不絶감히 제자의 직분이라 할 수 있겠는가 敢云弟子職계축년(1913)과 갑인년에도 또 이와 같았으니 癸甲亦復爾글 읽는 일483)을 하다 말다 했다오 尋數作還輟을묘년(1915) 겨울에 비로소 오래 모셨는데 乙冬始久侍전수받아 정밀한 곳까지 들어갔네 傳受入精密병진년(1916)에 거듭 상을 당하니484) 丙辰荐遭艱묘소 곁을 외로이 지켰다오 煢然守墓側당시 예서를 읽는 여가에 時於讀禮暇선친의 유고를 두루 살펴보고는 大稿遍搜覓별도로 예설편을 완성하니 別成禮說編바로 선친과 문답한 것이라오 卽同親問答나의 선비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賢孝我先妣뭇사람의 칭송이 고을에 자자했는데 輿誦播鄕邑선생의 마음에 감회가 있어 先生心有感스스로 행록 발문을 지어주셨네485) 自述行錄跋무오년(1918) 가을에는 막내아우486)를 데리고 가 戊秋携季也집지의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使之行脩束선생께서 선군을 칭송하면서 先生稱先君좋은 가법을 전하였다고 하셨네 能傳好家法기미년(1919)에 월포로 거처를 옮기니 己未徙月浦화산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네 華山當眉睫저분이 완연히 저곳에 계시니 伊人宛在彼한 번 뛰면 건너갈 것만 같은데 一超若可涉중간에 깊고 험한 물이 있는지라 中有深險水바라보고 마음만 그지없이 슬펐다오487) 瞻望心忉怛이 때문에 봄바람 속에 앉아 있음이488) 所以坐春風도리어 많지 않음을 면치 못했네 不免反稀闊경신년(1920)에 창동리로 돌아왔는데 庚申返滄里이 년 동안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았다오 二載不家縶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의리는 性師心弟義심은 기질이 아니라 성에서 생기기 때문이네 生性非氣質명덕은 기의 분수에 속하고 明德屬氣分신명은 곧 태극이 아니라오489) 神明非卽極노사와 화서의 동이를 고찰하고490) 蘆華同異考매산 제문을 쓴 김씨의 폐습을 논척했는데491) 祭梅金悖習선생께 자주 나아가 질정하여 頻頻就而正의심나는 조목이 늘 많았다오 疑目每盈掬다행히 대부분 인가를 해주시고 幸多蒙印可게다가 정확한 설명까지 더해주셨네 加賜以精確홀로 나아가 후고492)를 편집했으니 專詣編後稿임술년(1922) 오월이었네 榴夏歲壬戌뜻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意外居無何계화도에서 급한 전보가 왔네 自華來電特캄캄한 밤에 허겁지겁 달려가니 顚倒抵夜黑선생께서 이미 병세가 위독하셨다오 先生已寢疾연빙의 가르침493)을 물을 길이 없었으니 淵氷問無路동자만 구석에서 촛불을 잡고 있었네 童子隅執燭이튿날 저녁에 후학들을 버리고 가시니 翌晡棄後學바로 칠월 사일이었네 七月四日曆사문의 일을 생각하면 言念斯文事큰 집에 대들보가 부러진 것과 같고 巨厦折樑木사적인 일로 말하더라도 言及私分事등불을 잃고 어두운 길 헤매는 신세가 되었네 失燭冥擿埴통곡한다는 건 오히려 예사말이니 痛哭猶例語상심한 나머지 미친 사람 같았다오 喪心狂可作평소에 문도와 함께 平日及門徒마땅히 마음과 힘을 합쳐서 端宜同心力선생의 유지를 잘 알게 하여 俾無昧遺旨한 줄기 학맥을 영원히 보존해야 하는데 永永保一脈어찌하여 하늘은 돌보지 않아 云胡天不眷큰 변고가 내부에서 생기게 하는가 大變生肘腋처음에는 공리심으로 말미암아 始因功利心스승을 무함하는 악을 앞다퉈 이루었네494) 競成誣師惡선생은 일찍이 유훈을 남기셨으니 師曾有遺訓인고는 단연코 욕되게 하는 것인데495) 認稿決是辱어찌하여 인의와 인교라는 말을 如何認意敎방자하게 터무니없이 날조했는가496) 肆然白地揑만약 참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如云眞箇有전후의 유훈은 두 갈림길이 된다네 前後爲二轍만일 인가 받음이 지당하다고 한다면 如云認至當앞의 유훈을 어찌 취소하지 않으셨겠는가 前訓盍收滅저들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彼言如可信선생은 절의가 없게 된다오 先生無義節소자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小子用是懼논척하기를 급급하게 했다오 辨討是汲汲저들이 만약 복죄한다면 彼如服其罪어찌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랴마는 豈不爲善物이처럼 하지 않고 왜정에 고소하니 不此訴倭庭사람을 음해하여 불측한 화에 빠뜨렸네 構人陷不測나를 단독 피고로 보고 視我爲獨隻나를 검찰국으로 압송하려 하였네497) 押我致檢局선인의 묘에 곡하고 하직하니 哭辭先人墓눈 덮인 달천의 산기슭일세 雪中達川麓왜에게 치욕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誓不受倭辱품속에 독약을 준비해 두었는데 懷中備毒藥다행히 성명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幸得保性命신령이 보우하신 덕택임을 알겠어라 認是冥祐澤저들이 끝내 인가 받아 출간하여 彼竟成認刊전국 팔도에 유고를 배포했는데 布之于八域개찬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改竄無難爲마음대로 첨삭할 뿐만이 아니었다오 非徒任添削만약 명백히 변론하지 않는다면 如不辨之明그 누가 다시 흑백을 가리리오 誰復知黑白소자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小子爲是懼〈고변록〉498)을 찬술하였다오 編成考辨錄저들이 또 선생의 연보를 간행했는데 彼又刊年譜진실로 오류와 착오가 많았으니 固多誤與錯마땅히 써야 하는 건 쓰지 않고 當書而不書써서는 안 되는 건 도리어 썼네 不當書反筆만약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如不改之正선생께서 오명을 덮어쓸 것이네 先生蒙累黷옛날에 정재공499)은 在昔靜齋公나에게 이 일을 끝내주기를 부탁했는데 屬我卒是役오늘날 연보 한 본을 완성하니 今日成一本마침내 저들의 병폐를 볼 수 있다오 乃見彼病關이 두세 가지 사안은 惟此數三款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니 俟聖可無惑선생의 사후의 일도 先生身後事거의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네 庶幾無愧怍태산이 무너진 지 삼십년이 지났는데 山頹三十年이날 밤이면 늘 애통하기 그지없다오 此夜每痛衋지금 비록 병든 몸이 장차 다할 테지만 今雖病將盡근심스런 마음에 눈을 감지 못하리라 耿耿未接目이렇게 혼란이 지극한 날을 만나 値此亂極日후진들이 모두 면모를 바꾸니 後進皆渝色당일에 훌륭한 그 연원을 當日好淵源그 누가 계승할 수 있을까 有誰能接續쌓인 한이 발하여 시가 되니 積恨發爲詩글자마다 눈물 자국 맺히누나 字字淚痕結일백 칠십사 운으로 지은 이 시를 百七十四韻외설에 가깝다고 말하지 마소 莫曰近猥瀆 光武歲庚子, 余年方十七.所學昧蹊逕, 可謂徒能讀.聞說蓬山中, 臯比南來設.儒門風斯動, 士林雲似集.迢絶月明寺, 往拜其間厠.士爭講要義, 經傳性禮賾.余將左氏傳, 郞誦一章訖.人謂是罕見, 先生愛如玉.乃云郭林宗, 訪茅勸成德.千古傳美談, 我盍追芳躅?迂回一日程, 枉駕臨弊宅.書贈家大人, 賢子乃潤屋.有人勸定師, 先生意亦欲.莫重師生義, 坐定誠意薄.是爲大人言, 義諦更眞切.寧山四百里, 具贄命之謁.八風【地名】獰風吼, 雙龍【峙名】虐雪積.弱齡不勝寒, 呵手因作泣.十顚到金谷, 先生驚且悅.翌朝行贄禮, 簾前照瑞旭.誨辭一何溫? 諄諄勉樸實.授以小學書, 纔得經一朔.及見我南歸, 悵然如有失.全翁禮說類, 叮嚀託校輯.晩得俊髦士, 自賀不淺福.是回大人書, 其言肺肝出.重光暮春者, 復杖千里策.君來我甚喜, 禮輯何敏速?錦江碧如藍, 其上亭子屹.多士風詠會, 君可同我適.禮席有事日, 選我最少列.流峙助我氣, 聞見闊我狹.雪月鳳棲寺, 復開大講席.人常六七十, 日惟九旬浹.問難煩且擾, 余獨最親炙.文理日驟進, 流輩所罕及.出自先生筆, 向我大人說.因勸躬當仁, 讓子亦且勿.寂寂完南館, 三席經除夕.令子同守歲, 佳況此無若.開正歸覲日, 殷勤師手畢.壬秋到薪田, 浹月復立雪.儒門方多事, 奇權互蚌鷸.先生折其衷, 猥辨儘昭晳.間將理氣奥, 一一開我窒.四方往復書, 時亦代執筆.癸卯往候時, 燕岐駕適發.余爲樊遲御, 往返七舍邈.中路兩館裡, 贈我後滄額.前此書封皮, 倉洞滄東易.滄洲道東來, 至今年八百.繼之在後學, 大任又重責.顧以鹵劣材, 拜受未敢諾.南指完山路, 御駕復如昨.時有蘭坡喪, 師則大功慽.喪葬經數月, 凉生遂還北.甲辰會寫稿, 首夏役旣卒.先生復南下, 蘭練在近隔.方伯設講會, 邀之升上榻.人衆如山海, 我爲當日直.旣練往潭陽, 爲觀三隱閣.路經我滄里, 大人齋新築.錫號以樂要, 銘詩幷揭壁.旅候適病暑, 瀛山留調攝.天巖好雲林, 禮川佳泉石.濟濟縫掖趨, 洋洋絃誦徹.南臯一齋墟, 玉川河西蹟.溪樓何瀟灑? 筆巖又嚴肅.勝地固有名, 壯觀亦可樂.始得達秋城, 師行是目的.歸路到豐沛, 拜退庭有菊.蓋於半載間, 未嘗暫離膝.從師顧我願, 舍我師不得.遊豫無非事, 觀感亦云學.至于靑蛇年, 自春及秋日.我爲禮齋旅, 師在木里塾.面侯豈不易, 書問亦頻數.函駕北歸日, 要齋爲經入.是冬虜約成, 杜稷將傾覆.先生奮忠義, 呈疏討五賊.丙午歲之正, 高山侯旅幕.自高至扶風, 是要三子覿.剞劂縱未可, 鈔寫不得不.銜訓百千間, 備置紙筆墨.不敏爲幹務, 總成卅六冊.操几經初夏, 內藏菴蓮碧.還到瀛山裏, 閏月中半迄.是時勉菴老, 倡義于南服.先生作賀狀, 小子奉書角.往致于陣中, 師發未得達.自後經一朞, 謦欬久未接.丁未潦炎天, 跟拜禮山谷.西至白華山, 石田避老熱.于時天有感, 靈龜出海曲.歎師不遇時, 汪然涕沾臆.入海絶世汚, 師志久所蓄.今番此地行, 經營遐擧跡.戊申到木里, 亦爲海咫尺.暀島行有日, 占天候利涉.往來蓬瀛間, 亦久留杖屐.大人臨別路, 賦詩淚如酌.先生於大人, 相好以心膈.庚辛甲乙戊, 每歲來信宿.誰知此日見, 永作千古別?晩秋暀棹發, 己正我親沒.念師神欲往, 思親心如割.島中和我章, 追到苫塊室.有淚無聲讀, 此情那忍曰?唁書自海出, 懇切同親哭.初冬拜安陽, 乃以墓銘託.歲窮始有報, 匪銘替傳述.哀此當室孤, 大小俱擔著.壬冬入繼華, 於焉歲三閱.書候縱不絶, 敢云弟子職?癸甲亦復爾, 尋數作還輟.乙冬始久侍, 傳受入精密.丙辰荐遭艱, 煢然守墓側.時於讀禮暇, 大稿遍搜覓.別成禮說編, 卽同親問答.賢孝我先妣, 輿誦播鄕邑.先生心有感, 自述行錄跋.戊秋携季也, 使之行脩束.先生稱先君, 能傳好家法.己未徒月浦, 華山當眉睫.伊人宛在彼, 一超若可涉.中有深險水, 瞻望心忉怛.所以坐春風, 不免反稀闊.庚申返滄里, 二載不家縶.性師心弟義, 生性非氣質.明德屬氣分, 神明非卽極.蘆華同異考, 祭梅金悖習.頻頻就而正, 疑目每盈掬.幸多蒙印可, 加賜以精確.專詣編後稿, 榴夏歲壬戌.意外居無何, 自華來電特.顚倒抵夜黑, 先生已寢疾.淵氷問無路, 童子隅執燭.翌晡棄後學, 七月四日曆.言念斯文事, 巨厦折樑木.言及私分事, 失燭冥擿埴.痛哭猶例語, 喪心狂可作.平日及門徒, 端宜同心力.俾無昧遺旨, 永永保一脈.云胡天不眷, 大變生肘腋?始因功利心, 競成誣師惡.師曾有遺訓, 認稿決是辱.如何認意敎, 肆然白地揑?如云眞箇有, 前後爲二轍.如云認至當, 前訓盍收滅?彼言如可信, 先生無義節.小子用是懼, 辨討是汲汲.彼如服其罪, 豈不爲善物?不此訴倭庭, 構人陷不測.視我爲獨隻, 押我致檢局.哭辭先人墓, 雪中達川麓.誓不受倭辱, 懷中備毒藥.幸得保性命, 認是冥祐澤.彼竟成認刊, 布之于八域.改竄無難爲, 非徒任添削.如不辨之明, 誰復知黑白?小子爲是懼, 編成考辨錄.彼又刊年譜, 固多誤與錯.當書而不書, 不當書反筆.如不改之正, 先生蒙累黷.在昔靜齋公, 屬我卒是役.今日成一本, 乃見彼病關.惟此數三款, 俟聖可無惑.先生身後事, 庶幾無愧怍.山頹三十年, 此夜每痛衋.今雖病將盡, 耿耿未接目.値此亂極日, 後進皆渝色.當日好淵源, 有誰能接續?積恨發爲詩, 字字淚痕結.百七十四韻, 莫曰近猥瀆. 선사(先師)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지칭한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광무(光武) 연간 경자년 광무 4년 1900년이다. 한갓……하겠네 원문의 도능독(徒能讀)은 책을 읽으면서 글의 뜻은 모른 채 그저 읽기만 한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신 인상여(藺相如)가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에 대해 "조괄은 한갓 자기 아버지의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할 줄을 모른다.〔藺相如曰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봉산(蓬山)……하니 봉산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당시 전우가 이 봉래산의 월명암(月明菴)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있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곽임종(郭林宗)은……했는데 곽임종은 후한의 명사(名士)인 곽태(郭泰)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모용(茅容)은 자가 계위(季偉)로, 40세가 될 때까지 농사만 지었으나 행실이 단정하고 절도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곽태가 일찍이 모용의 집에 방문하여 유숙하였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어진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하기를 권면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가친(家親)께……하셨네 당시 전우(田愚)가 후창의 집을 방문했다가 다음 날 떠날 때 자식을 잘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으로 '벽봉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 '지요막여교자(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을 써서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에게 주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영산(寧山) 충청도 천안(天安)의 옛 이름으로, 영주(寧州)라고도 한다. 당시 전우가 천안의 금곡(金谷)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옹(全翁)이……부류를 전옹은 전우(田愚)의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전재·고산(鼓山)·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와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에게 전수하였다. '예설(禮說) 부류'는 《전재선생예설(全齋先生禮說)》을 가리킨다. 봉서사(鳳棲寺)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西方山) 사이에 있는 절이다. 인하여……하셨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인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신전(薪田) 공주(公州)의 신전리(薪田里)로, 1902년 8월에 전우(田愚)가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을 모셨다오 원문의 '입설(立雪)'은 정문입설(程門立雪)의 고사를 이르는 것으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양시(楊時)가 일찍이 정이(程頤)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가 곁에 시립(侍立)한 채 떠나지 않았는데,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 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고 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기(奇)와……있었는데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권우인(權宇仁)이 이기설(理氣說)에 관해 많은 토론을 벌였으나 끝내 서로 합일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방휼(蚌鷸)은 큰 조개와 황새로, 큰 조개가 딱지를 벌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황새가 쪼아 먹으려다 조개 딱지가 닫히는 바람에 도리어 부리를 물려 서로 버티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서로 버티고 다투다가 제3자에게 이익을 빼앗김을 뜻한다. 선생께서……밝혀졌다오 기정진이 일찍이 이이(李珥)의 성리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외필(猥筆)〉이란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 임인년(1902)에 전우가 〈외필변(猥筆辨)〉을 저술하여 기정진의 이 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번지(樊遲) 공자(孔子)의 제자로, 늘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 《論語 爲政》 나에게……주셨네 스승인 전우가 김택술에게 '후창(後滄)'이란 호를 지어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호가 창주(滄洲)인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를 계승하라는 의미로 '후창'이라고 한 것이다. 후창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903년 20세에 전우가 '후창거사 창동처사(後滄居士滄東處士)' 8글자를 써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다. 창주(滄洲) 남송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희가 일찍이 무이산(武夷山)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창주'가 그의 별호가 되었다. 가친께서……하셨네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이 강학하는 서재를 새로 지었는데, 이때 전우가 '낙요재(樂要齋)'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아울러 〈낙요재명(樂要齋銘)〉을 지어 주었다.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艮齋集 前編續 卷5 樂要齋銘》 남고(南皐)엔……전해지네 일재(一齋)는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인데, 태인(泰仁)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서 이항을 제향하였다. 하서(河西)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인데, 순창(淳昌)에 김인후가 지은 강학당인 훈몽재(訓蒙齋)가 있다. 전우(田愚)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남고서원과 훈몽재에서 강회를 열었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쌍계루(雙溪樓)는……하여라 쌍계루(雙溪樓)는 전라남도 장성(長成)의 백양산(白羊山)에 있는 누대이다. 필암(筆巖)은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하서 김인후를 제향하기 위해 장성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백양산에 있는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雲門菴)에서 강회를 열고, 필원서원을 찾아갔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풍패(豐沛) 중국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이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므로 제왕(帝王)의 고향을 일컬어 풍패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관향인 전주(全州)를 이른다. 셋째 아들 전우의 삼남인 전화구(田華九)를 가리킨다. 간행은……완성하였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3월에 고부(古阜) 백천재(百千齋)에서 전우의 문고(文稿) 36책을 산정(刪定)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벽련암(碧蓮菴)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內藏山)에 있는 내장사(內藏寺)의 부속 사찰이다.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하였다. 이때에……못 전달했다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윤4월에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문인 김택술과 손자 전일건(田鎰健)을 시켜 위로하고 면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內藏寺로 보냈지만, 최익현이 이미 떠난 뒤에 도착하여 편지를 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안양서실(安陽書室) 전우가 기유년(1909)에 군산도(群山島) 신치동(臣癡洞)에 들어가 세운 서실이다. 명(銘)이……하셨네 전우가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을 위해 전(傳)을 써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전(傳)은 《간재집(艮齋集)》 전편속(前篇續) 권6에 〈김벽봉전(金碧峯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후창은 이 전을 부친의 문집인 《벽봉유고(碧峯遺稿)》의 서문으로 대용하였다. 임자년……들어가시니 전우가 이해 9월에 군산도(群山島)에서 계화도(繼華島) 장자동(壯子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글 읽는 일 원문의 심수(尋數)는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글 읽는 일을 이른다. 병진년에……당하니 후창이 모친상을 당한 것으로, 이해 3월 16일에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스스로……지어주셨네 전우의 이 글은 《간재집(艮齋集)》 후편속(後編續) 권6에 〈제최유인행록(題崔孺人行錄)〉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막내아우 후창의 셋째 아우이자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로, 자는 여안(汝安), 호는 연강(蓮岡) 또는 척재(拓齋)이다. 문집으로 《척재집(拓齋集)》이 있다. 저분이……슬펐다오 전우 선생을 만나고 싶으나 만날 수 없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시경》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이른바 저분이, 이 물가 한편에 있도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 따르려 해도, 길이 막히고 또 멀며, 물결을 따라 내려가 따르려 해도, 완연히 물의 중앙에 있도다.[所謂伊人, 在水一方. 溯洄從之, 道阻且長, 溯游從之, 宛在水中央.]"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였다. 봄바람……있음이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찾아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을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14》 성(性)은……아니라오 전우는 심본성설(心本性說)을 바탕으로 삼아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노사(蘆沙)와……고찰하고 후창이 저술한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두고 말한 것으로, 이 글은 노사 기정진(奇正鎭)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매산(梅山)……논척했는데 전우가 일찍이 〈논가김제매산선생문(論嘉金祭梅山先生文)〉을 지어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이 매산 홍직필(洪直弼)의 문인(門人)으로 자처하면서도 홍직필의 祭文에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밝혔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바탕으로 하여 김평묵의 폐습을 논척한 것이다. 후고(後稿) 전우가 저술한 글 가운데 1913년 이후에 지은 글을 가리킨다. 연빙(淵氷)의 가르침 임종 때 남기는 경계나 훈계를 이른다. 연빙은 증자(曾子)가 임종 전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서 자신이 평생 동안 몸가짐을 "깊은 물가에 임한 듯이, 엷은 얼음을 밟은 듯이 조심했다.[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 처음에는……이루었네 후창은 동문(同門)인 오진영(吳震泳)과 권순명(權純命) 등이 스승의 유훈을 날조하여 총독부의 인가(認可)를 받아 스승의 문집을 간행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선생은……것인데 유훈(遺訓)은 전우가 말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총독부에 인가(認可)를 받아 자신의 문집(文集)을 간행하지 말라는 훈계를 남긴 것을 이른다. 인고(認稿)는 총독부에 인가를 받아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것을 뜻한다. 어찌하여……날조했는가 인의(認意)는 전우가 일찍이 총독부에 인가를 받으려는 뜻이 있었다는 말이고, 인교(認敎)는 또한 전우가 일찍이 인가를 받으라는 하교를 내렸다는 말이다. 후창은 이런 말들을 동문인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날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하였네 1925년에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후창 등을 전우 유고의 출판을 방해한다는 죄목으로 일본의 검찰국에 고소하여 후창 등이 검찰국에 구인되어 곤욕을 치룬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고변록(考辨錄) 《후창집》 권15에 실려 있는 〈간재선생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先生私稿晉州本考辨錄)〉을 가리킨다. 정재공(靜齋公) 전우의 셋째 아들 전화구(田華九, 1866~1935)로, 정재는 그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