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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홍【기현】에게 보냄 與鄭致弘【琦鉉】 영랑(令郞)이 복을 마치고 저를 찾아오니 슬프고 위로하는 마음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상례를 마칠 때 나아가 위로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앉아서 방문을 받았으니 또한 마음이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삼가 묻건대 형께서는 체후가 안정되고 쾌적하며 중씨(仲氏) 또한 평안하신지요, 신이 화평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일찍이 재덕(才德)이 뛰어난 형제는 보았지만, 70의 노년을 맞아 긴 베개와 큰 이불로 저녁마다 평화롭고 화락하게 지내는 것은 옛날에 그런 말을 들었고 지금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물며 아래로 현명한 자제가 가르침을 받들고 잠자리 시중을 들며 시(詩)와 예(禮)를 물으니 만년의 넉넉한 복이 사람을 탄복하고 부러워하게 합니다. 아우는 형제도 없이 혼자라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지내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처지가 기구하여 여러 해에 걸쳐 객지를 떠도느라 가인(家人)들과 조금이라도 단란하게 지냈던 날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역시 제게는 간절한 한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의 세상 소식은 갈수록 더욱 좋지 못하니 끝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89)도 오히려 헐후어(歇後語)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관산(冠山)의 사우(士友)가 달 전에 정산(定山)으로 갔습니다. 노정(路程)을 계산해보면 며칠 사이에 이곳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요사이 일어난 소식을 이 사람에게 듣게 될 듯하니 열흘 사이에 한 번 왕림하실 수 있으신지요. 몹시 기원(祈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令郞闋服過我。悲慰之情。有難勝堪。向於終制時。未遂晉慰之計。而今乃坐得其顧。亦不無愧愧之私也。謹問兄體安重。仲氏亦平適。神相愷悌。固應如此。竊嘗見金昆玉季。七耋衰年。長枕大被。日夕湛樂。此是古聞其語。而今見其人矣。好事好事。況下有賢子弟。趍庭侍枕。問詩問禮。晩年餘祿。令人歎羨。弟終鮮窮獨。踽踽無賴。加以身事奇險。多年羈泊。未得與家人輩有多少團聚之日。若一朝溘然亦未爲非區區之恨也。時耗去益不佳。未知終作何狀。古人之萬山痛哭。猶是歇后語。柰何奈何。冠山士友月。前往定山計。其程道則數日間。當過此矣。時耗似於此便聞之。旬間或可一枉否。雖所深願。而安敢望也。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선생전집부록≫ 권2에 정철(鄭澈)이 하서를 그리며 지은 시에서 인용하였다. "동방에는 출처에 바른 인물 없건만 오직 담재옹이 있다네. 해마다 7월이 되면 일만 산중에서 통곡을 하네.【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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霜寒菊濃瞻耿憧憧謹審玆辰侍體動止連護保重區區仰慰實副所禱記下身數不幸間見穉子曁從侄慘毒一門酷禍人何以堪只自憤寃成狂頓覺苦海之支離也俯戒謹悉而誦于族人期圖一札計矣日間有官便當另上家書而緣他替呈似有未安故丹室邊某許通奇周旋爲好云故此札得呈苐爲勇赴若何若何本倅丈已爲攄得自本家又有另達似不落寞矣 惠物寒士從上可謂太侈也謹領情注而心甚不安耳上洛之期似在邇得捷後必期拜晤豫爲企望 餘留不備謝上乙丑九月卄一日 記下 安橓 拜拜(皮封)棠北 侍座回納觀峴謝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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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禮言千萬夢想之外先大人喪事驚怛之餘復夫何言伏惟暮春侍奠哀候連護支嗇溸仰區區不任憧憧永重衰病侵身之中妄作西哭之行又未免山外之嘆數也何哉所居秙左承凶且晩一書替唁亦後於人撫念疇昔情禮都虧汗愧且悚適因貴邑之科便略此替疏恕諒若何餘惟希節哀順變不備疏上庚午三月二十四日安永重疏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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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月阻候慕慮恒切卽伏承下札謹審新秋體事省餘萬護閤內均慶區區伏慰實愜叉禱記下侍事姑無大損而當暑自多些少憂故已極私悶而三夏所之院無勝接雖有如干所做而若無進益之意無異浪遊尤庸亦惰然餘在凉生後進拜不備上謝禮壬寅七月二十四日記下趙漢秉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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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은【택환】에게 답함 答安汝恩【澤煥】 지난달 그믐날에 보내신 편지를 이번 달 20일 저녁에 받았으니 벗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먼 곳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펼쳐 읽어 본 이래 정감(情感)이 배로 더하였습니다. 아우는 사는 곳이 외지고 누추하여 이전에 종유(從遊)하던 이들과 까마득히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외롭고 쓸쓸한 회포가 매번 마음에 절실합니다. 오직 노형(老兄)만이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매번 간절한 정의(情意)를 담아 권면과 일깨움을 아끼지 않으시니 제게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달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충고와 책임에 관한 말이 이전과 달랐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곧 감히 억지로 책문하지는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노형이 저를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지극하건만 말씀은 이처럼 지나치신지요. 우리 두 사람이 적막한 물가77)에서 상종(相從)하면서도 정을 다하지 못한다면 또 어떤 사람이 나의 실수를 책망하고 나의 잘못을 보완하여 새롭게 떨쳐 일어나는 단계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까. 대체로 교제는 얕으면서 말만 심오한 것은 군자에게 부끄러움입니다. 하물며 교제가 깊건만 말이 얄팍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노형께서 더욱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음양(陰陽)의 이치는 또한 사례를 가지고 본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음양의 동정(動靜)이 비록 체단(體段)과 유행(流行)은 다르더라도 그 이치가 어찌 일찍이 달랐겠습니까. '사(死)' 자를 '독(篤)' 자로 바꾸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독(篤)' 자는 '사(死)' 자에 비해 진심 진력(盡心盡力)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부족합니다. 또 주자(朱子)께서도 일찍이 '사공부(死功夫)' 3자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착정(着靜)과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자연히 아주 상세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정(主靜)은 체용(體用)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착정(着靜)은 학자가 존심(存心)하는 방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알지 못하는 초학자(初學者)가 성급하게 착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장하고 공허한 것을 붙잡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정(靜)'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보다는 '경(敬)'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여 치우침이 없습니다.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는 "주선생(周先生 주돈이(周敦頤))의 말씀은 물길이 사나워 배를 대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주자(周子 주돈이)는 주정(主靜)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정(靜)' 자는 동정(動靜)을 다 포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천지의 조화는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한곳으로 모일 수 없어 발생(發生)할 수 없고, 인심은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부착하는 곳이 없어 응용(應用 반응하여 작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사물 가운데 어찌 체(體)가 없는 용(用)이 있으며 뿌리가 없는 가지가 있겠습니까. 체(體)가 수립된 다음에야 용(用)이 작용할 수 있으며 뿌리가 단단한 다음에야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연평(延平 이동(李侗)) 등 여러 선생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 정좌(靜坐)를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자도 역시 "모름지기 정좌를 해야 비로소 수렴(收斂)할 수 있다. 또 정(靜)이 주(主)이고 동(動)은 객(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염옹(濂翁 주돈이)이 말하는 주정(主靜)도 이런 뜻이건만, 도리어 동(動)과 대비시키셨습니다. '정(靜)'은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이 아닙니다. 만약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을 말한다면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78)의 정(靜)과 무욕고정(無欲故靜)79)의 정(靜)이 그것입니다.끝에 덧붙인 종덕(種德)80)에 관한 견해는 매우 훌륭합니다. 농인(農人)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다음에야 비로소 밭을 갈고 수확하는 공을 이루게 되고 학자는 심지(心地)가 안정된 다음에야 무한한 도리(道理)를 궁구하고 무한한 사업(事業)을 할 수 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씀하신 주정(主靜)과 주경(主敬)의 학설은 사인(斯人)이 먼저 심지를 안정시키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은 지나친 듯합니다. 실심(實心)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하루가 지나면 저절로 하루의 효과를 볼 수 있고 한 달이 지나면 저절로 한 달의 효과를 볼 수 있으며, 한 해가 지나면 저절로 한 해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꼭 멀리 백세 이후를 기약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운 것을 하고 어려운 것을 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어찌하여 단지 이 때문이겠습니까. 무릇 사도(斯道)는 평담 순실(平淡純實)하여 사람의 이목을 잘못되게 만드는 성색 취미(聲色臭味)가 없으며 사람의 심술(心術)을 움직이는 성리 위세(聲利勢威)가 없으며 사람의 의지를 미혹시키는 신기 괴려(新奇怪麗)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일깨우고 형이 면려하여 입과 귀에 익숙한 것은 단지 문사(文辭)와 공리(功利)에 관한 방도일 뿐입니다. 비록 징험할 수 있는 성현(聖賢)의 말이 있더라도 저들이 평소에 존숭(尊崇)하고 향모(向慕)하던 것을 갑작스럽게 버리고 마음을 고쳐먹어 머리를 숙여 적막하고 먼지 가득한 서책에 마음과 힘을 다하려고 하겠습니까. 재질(才質)이 아름다운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평생토록 그럭저럭 한결같이 똑같은 길로 돌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통한스럽습니다.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정(靜) 안에도 동(動)의 뜻이 있다."라는 말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음양(陰陽)은 자리가 같지 않고 동정(動靜)은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것으로 말하자면 동정과 음양의 이치가 이미 그 안에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발(未發)했을 때 환하고 어둡지 않아 지각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음중(陰中)의 양(陽)이고 정중(靜中)의 동(動)이며, 이발(已發)했을 때 등급이 나뉘어 어긋나지 않고 각각 머무는 곳이 있는 것81)은 양중(陽中)의 음(陰)이고 동중(動中)의 정(靜)입니다. 今二十日夕。獲拜前月晦日書。可知朋友往復。亦非容易事。近者如是。況遠者乎。披閱以還。情感倍增。弟所居僻陋。前日從遊之人。寥然不相問聞。孤索之懷。每切于中。惟老兄不以爲鄙。每致慇懃於書墨往復之間。勸勉引讓。無所不至。爲幸顧何如哉。然月前往復。規責之語。異於前日。及讀來示。乃有不敢强責之敎。豈老兄愛我如是其至。而其言如是其過乎。吾兩人相從於寂寞之濱。而猶不盡其情。則更有何人。責吾失補吾過。使之納之於作新之地哉。夫交淺言深。君子恥之。況交深而言淺乎。願老兄加察焉。來喩以爲陰陽之理。亦以例看。此無可言。陰陽動靜。雖有體段流行之殊。其理則何嘗有異。死字改以篤字。固當然。篤字比死字。少盡心盡力抵死不已之意。且朱子嘗以此死功夫三字爲言矣。但前書着靜主靜之說。自有所未能消詳者。主靜以體用自然之理言。着靜以學者存心之方言。然若使初學不知者。遽欲着靜。則必有助長捉空之獘。故說靜字。不如說敬字之爲正當而無偏也。主靜之說。在初學。不如主敬。是以朱子曰。周先生語。急難湊泊。初學不如說主敬。未知如何周子曰主靜。此靜字非兼包動靜而言歟。天地之化。非至靜。則不能翕聚。而發生不得。人之心非至靜。則無所湊泊。而應用不得。凡天下之物。豈有無體之用。無根之枝哉。體立而後。用有以行。根固而後。枝有以達。此自然之理也。是故明道延平諸先生敎人。未嘗不以靜坐爲先。而朱子亦曰。須是靜坐。方能收斂又靜爲主。動爲客。然則濂翁所謂主靜。亦是此意。而乃與動對之。靜非包動靜之靜。若言包動靜之靜。則定而後能靜之靜。及無欲故靜之靜。是也尾附種德之說。甚佳。農人得田地然後。方有耕耘收獲之功。學者定心地然後。窮得無限道理。做得無限事業。先儒所謂主靜主敬之說。莫非爲斯人先定心地之要也。但來喩所謂。百世之下。必期其效。此語似涉過當。若能實心行之。則一日自可見一日之效。一月自可見一月之效。一歲自可見一歲之效。何必遠期百歲之下哉。人之爲其易而不爲其難者。亦豈但此故也。夫斯道也。平淡純實。無聲色臭味之可以誤人耳目。無聲利勢威之可以動人心術。無新奇怪麗之可以惑人志意。則父詔兄勉。熟口慣耳者。只是文辭功利之術也。雖有聖賢言語可以證嚮者。彼肯遽然捨其平生之所尊尙向慕者。而革心屈首。以從事於寥寥塵編之間哉。才良質美非不多矣。而悠悠百年。同歸一轍誠可痛恨。來喩靜中亦有動之意者。固當。自其著者而言。則陰陽不同位。動靜不同時自其微者而言。則動靜陰陽之理。已悉具於其中。方其未發。而瑩然不昧知覺都具者。陰中之陽靜中之動也。方其已發。而品節不差各有攸止者。陽中之陰動中之靜也。 적막한 물가 은자의 거처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답최입지서(答崔立之書)〉에 "만약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넓고 한적한 들판에서 밭을 갈고,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하면 된다.【若都不可得, 猶將耕於寬閒之野, 釣於寂寞之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에 "머물 곳을 안 뒤에야 안정을 취하게 되고, 안정을 취한 뒤에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야 외물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이 보인다. 무욕고정(無欲故靜) 주렴계(周濂溪)는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은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표준을 정(定)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을 세운다.【主靜立人極.】"라고 하고, 정(靜) 자 밑에 "욕심이 없으니 정하다.【無欲故靜.】"라고 자주(自註)하였다. 종덕(種德) 사람들에게 널리 은덕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위하려고 하자, 우가 말하기를 "저의 덕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귀의하지 않거니와, 고요는 힘써 행하여 덕을 펴서 덕이 마침내 아래로 백성들에게 내려져 백성들이 그리워하니, 황제께서는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미발(未發)했을 …… 것 《대학장구》 제1장의 소주에 있는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은 것은 '명'이고, 뭇 이치를 갖추고 있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덕'이다. 뭇 이치를 갖추고 있음은 덕의 전체로 발하지 않은 상태이고, 만사에 응함은 덕의 대용으로 이미 발한 상태이니, 만사에 응함은 바로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의 작용 행위이다. 발하지 않으면 밝아서 어둡지 않고, 이미 발하였으면 품절하여 어긋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명덕'이다.【虛靈不昧, 明也; 具衆理應萬事, 德也. 具衆理者, 德之全體未發者也; 應萬事者, 德之大用已發者也. 所以應萬事者, 卽其具衆理者之所爲也. 未發則炯然不昧, 已發則品節不差, 所謂明德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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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일【재철】에게 보냄 與文善一【載轍】 형과 아우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요한 곳에서 고삐를 나란히 하고 수레를 가까이 대고 얘기를 나누니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나에게 백붕(百朋)83)을 주니 마음으로 좋아하도다.'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인편을 통해 또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았으며 서폭(書幅)에 가득한 내용은 모두가 사람을 경계하고 성찰하게 하였습니다. 하신 말씀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아, 서로 알게 된 것이 조금 늦어서 젊은 날에 서로를 바로잡아 주어 공효를 거두는 바가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거나, 때를 놓치고 경계를 지나친 뒤라도 완전히 쇠하고 무너지기까지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또 어찌 알겠습니까? 형의 체후와 근래의 안부가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제가 듣고 싶었던 말에 더욱 부합합니다. 아우는 심란하기가 예전과 같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거사(蕖史)84)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의 동당(同黨)이 더욱 외롭습니다. 일전에 영남의 벗 3인이 저를 찾아와 며칠 동안 정겨운 담화를 나누었는데 우리 형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삼파기(三坡記)」는 문사(文詞)가 매우 뛰어나 참으로 한마디 말도 거들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형(老兄)께서 명을 하셨으니 어찌 감히 줄곧 휘겸(撝謙)85)만 하겠습니까. 이에 약간 점화(點化)86)를 하였으니 서자(西子 서시(西施))에게 환술(幻術)을 부려 모모(嫫母)87)가 되게 하지나 않았는지요? 애초에는 가까운 시일에 한 번 찾아뵙고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갖추려고 했으나 손님과 벗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 마을 이웃을 조문하는 일이 간간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우선 미루어두었습니다. 크게 꾸짖지 말기 바랍니다. 쌓인 회포가 많을 뿐만이 아니라서 얼굴을 뵙지 못하면 다하기가 어렵겠습니다. 伯兮叔兮。倂轡傾蓋於萍水涔寂之中。詩所謂錫我百朋。中心好之者。此也。便來又承心貺。滿幅張皇。無非警省人處。受言在心。誓不遺忘。嗚乎相知差晩。未得相規於少壯之日。而俾有所收也。然從此源源。又安知不有小小回光。不至全然頹却於失時過境之餘哉。仍審兄體近節安適。尤協願聞。弟憒憒如昨。無可奉道。蕖史云亡。吾黨益孤。日前嶺友三人來過。作數日之款。恨未與吾兄共之也。三坡記文詞甚偉。固不可贊一語。然老兄有命。豈敢一於撝謙而已哉。玆以略加點化。不其歸於幻西子爲嫫母耶。初欲從近一造。以修回謝之儀。賓朋送迎。鄕隣吊唁。間間沓至。故姑爲停之。幸勿厚嗔如何。積懷不啻多矣。而非面難究。 백붕(百朋) 고대(古代)에 패각(貝殼)을 화폐로 사용할 때 오패(五貝)를 일관(一串), 양관(兩串)을 일붕(一朋)이라고 했던 데서, 전하여 극히 많은 보화에 비유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쑥이, 저 구릉 가운데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고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것 같도다."라고 하였다. 거사(蕖史) 정석(鄭{氵+奭}, 1821~?)의 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주백(周伯)이며 기정진의 문인으로 창평(昌平)에서 거주하였다. 휘겸(撝謙) 《주역》 〈겸괘(謙卦) 육사(六四)〉에 "겸손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無不利, 撝謙.】"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휘(撝)는 펴는 상(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동식(動息)하고 진퇴(進退)함에 반드시 겸손(謙巽)함을 펴야 한다.【撝, 施布之象, 如人手之撝也. 動息進退, 必施其謙.】"라고 하였다. 점화(點化) 종래의 것을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전인(前人)의 시문(詩文)의 격식을 본떠 더 참신하게 변용하여 시문을 짓는 것을 말한다. 모모(嫫母)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로서 매우 못생겼으나 어진 덕(德)으로 알려졌다 하며, 추녀(醜女)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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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신묘년(1951) 선사455) 기일에 감회가 있어 일을 기록하다 7월 4일 辛卯先師諱辰感懷記事【七月四日】 광무 연간 경자년456) 光武歲庚子내 나이 열일곱 살이라 余年方十七학문하는 요령에 어두웠으니 所學昧蹊逕한갓 읽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네457) 可謂徒能讀듣건대 봉산 산중에서 聞說蓬山中선생이 남으로 와 강학한다 하니458) 臯比南來設유문이 바람에 쏠린 듯하였고 儒門風斯動사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士林雲似集월명사가 집에서 꽤 멀었는데 迢絶月明寺찾아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절했다오 往拜其間厠선비들은 앞다퉈 요의를 강하니 士爭講要義경전과 성례의 심오한 이치였네 經傳性禮賾나는 《춘추좌씨전》을 가지고 余將左氏傳한 장을 소리 내어 외우니 郞誦一章訖사람들은 보기 드물다고 하였고 人謂是罕見선생은 옥처럼 아껴주셨네 先生愛如玉마침내 말씀하시길 곽임종은 乃云郭林宗모용을 방문해 권면하여 덕을 이루게 했는데459) 訪茅勸成德천고에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千古傳美談내 어찌 훌륭한 자취를 따르지 않으랴 하셨네 我盍追芳躅하룻길 노정을 우회해 가서 迂回一日程우리 집에 왕림해 주셨는데 枉駕臨弊宅가친께 글을 써서 주기를 書贈家大人어진 아들은 집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셨네460) 賢子乃潤屋사람들이 사제의 분의를 정하라고 권하니 有人勸定師선생의 뜻도 그렇게 하고자 하셨지만 先生意亦欲막중한 사제의 분의를 莫重師生義너무 쉽게 정하는 건 성의가 부족하다 하셨네 坐定誠意薄이것은 가친의 말씀이었으니 是爲大人言의리가 더욱 참되고 절실하였네 義諦更眞切영산461)은 집에서 사백 리나 떨어졌는데 寧山四百里폐백을 갖추어 배알하라고 명하셨다오 具贄命之謁팔풍 –땅 이름이다.- 에는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었고 八風【地名】獰風吼쌍용 –고개 이름이다.- 에는 모진 눈이 쌓여 있었는데 雙龍【峙名】虐雪積어린 나이에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 弱齡不勝寒언 손을 호호 불며 구슬피 울었다오 呵手因作泣갖은 고생 끝에 금곡에 도착하니 十顚到金谷선생께서 깜짝 놀라며 기뻐하셨네 先生驚且悅이튿날 아침 집지의 예를 행하니 翌朝行贄禮주렴 앞에 상서로운 햇빛이 비추었네 簾前照瑞旭가르치는 말씀이 어찌 그리 온화한가 誨辭一何溫질박할 수 있도록 정성껏 면려하셨네 諄諄勉樸實《소학》 책을 가르쳐 주셨는데 授以小學書겨우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오 纔得經一朔내가 남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及見我南歸무엇을 잃은 듯이 서운해 하시고 悵然如有失전옹이 남긴 예설 부류를462) 全翁禮說類교정 편집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셨네 叮嚀託校輯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晩得俊髦士박복한 신세는 아님을 자축한다고 하셨으니 自賀不淺福이는 가친에게 답하신 편지 내용으로 是回大人書그 말씀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오 其言肺肝出신축년(1901) 늦봄에 重光暮春者다시 지팡이 짚고 천리 길을 갔는데 復杖千里策선생께서 군이 와서 몹시 기쁘니 君來我甚喜예설 편집을 어찌 그리 빨리 했는가 禮輯何敏速금강 물결이 쪽빛처럼 푸른데 錦江碧如藍그 위에 정자가 우뚝 서 있다네 其上亭子屹선비들이 풍영하는 모임을 가지니 多士風詠會군도 나와 함께 가보세 하셨네 君可同我適예를 행하는 자리에 일이 있는 날에는 禮席有事日가장 연소한 반열에서 나를 뽑으셨으니 選我最少列나의 솟아 흐르는 기를 돕고 流峙助我氣나의 좁은 견문을 넓혀주셨다오 聞見闊我狹눈 내린 달밤 봉서사463)에서 雪月鳳棲寺큰 강회가 다시 열렸는데 復開大講席사람은 늘 육칠 십 명이 모이고 人常六七十기간은 구십 일 정도가 되었네 日惟九旬浹문난함이 번다하고 소란스러웠지만 問難煩且擾나만은 직접 가르침 받음이 많았다오 余獨最親炙문리가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여 文理日驟進동배들이 미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셨으니 流輩所罕及이는 선생의 붓에서 나온 말씀으로 出自先生筆나의 가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라네 向我大人說인하여 권면하기를 몸소 인을 당해서는 因勸躬當仁자식에게도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네464) 讓子亦且勿한적한 전주의 여관에서 寂寂完南館세 사람이 제석을 보냈는데 三席經除夕자식에게 함께 수세하도록 하셨으니 令子同守歲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오 佳況此無若새해 정월 귀근하는 날에 開正歸覲日손수 쓰신 선생의 편지가 은근하였네 殷勤師手畢임인년(1902) 가을에 신전465)에 이르러 壬秋到薪田한 달 동안 다시 선생을 모셨다오466) 浹月復立雪유문에 바야흐로 일이 많아 儒門方多事기와 권이 서로 방휼처럼 다투었는데467) 奇權互蚌鷸선생께서 두 사람의 설을 절충하니 先生折其衷외람된 변론이 모두 환히 밝혀졌다오468) 猥辨儘昭晳중간에 심오한 이기설을 가지고 間將理氣奥나의 몽매함을 하나하나 일깨워주셨네 一一開我窒사방에 편지를 주고받으실 때 四方往復書때때로 대신 붓을 잡았다오 時亦代執筆계묘년(1903)에 가서 문안드릴 때 癸卯往候時연기에 마침 가시려고 하였는데 燕岐駕適發나는 번지469)처럼 수레를 몰아 余爲樊遲御이백 리 넘는 먼 길을 왕래하였네 往返七舍邈중도에 두 여관 안에서 中路兩館裡나에게 후창이란 편액을 써 주셨네470) 贈我後滄額이보다 앞서 편지 봉투에 前此書封皮창동(倉洞)을 창동(滄東)으로 바꿔 쓰셨네 倉洞滄東易창주471)의 도가 동쪽으로 온 지가 滄洲道東來지금에 이르러 팔백 년이 되었는데 至今年八百계승함은 후학에게 달려 있으니 繼之在後學중대한 임무이자 또 막중한 책임일세 大任又重責나의 형편없는 재주를 돌아보건대 顧以鹵劣材절하고 받았지만 감히 응낙하지 못하였네 拜受未敢諾남쪽으로 완산 길을 가리키시니 南指完山路다시 지난번처럼 수레를 몰았다오 御駕復如昨당시 난파의 상이 있었는데 時有蘭坡喪선생은 대공복을 입을 친척이니 師則大功慽상례와 장례로 수개월을 보내다가 喪葬經數月서늘한 기운 일자 마침내 북으로 돌아오셨네 凉生遂還北갑진년(1904)에 마침 원고를 필사하여 甲辰會寫稿초여름에 필사 일을 마쳤는데 首夏役旣卒선생께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시니 先生復南下난파의 연제가 가까운 시일에 있었네 蘭練在近隔방백이 강회를 설행하였는데 方伯設講會선생을 맞이하여 윗자리에 오르게 했네 邀之升上榻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人衆如山海나는 이날 일직을 맡았다오 我爲當日直연제를 지낸 다음 담양에 가서 旣練往潭陽삼은각을 구경하였네 爲觀三隱閣그 길이 우리 창동리를 경유하는데 路經我滄里가친께서 서재를 새로 지으시니 大人齋新築낙요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고 錫號以樂要명시까지 아울러 벽에 걸게 하셨네472) 銘詩幷揭壁객지에서 마침 더위에 지쳐 旅候適病暑영산(瀛山 고부)에 머물러 조섭하시니 瀛山留調攝천암은 구름과 숲이 좋고 天巖好雲林예천은 천석이 아름다웠네 禮川佳泉石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모여드니 濟濟縫掖趨글 읽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오 洋洋絃誦徹남고엔 일재의 유적이 남아 있고 南臯一齋墟옥천엔 하서의 자취가 전해지네473) 玉川河西蹟쌍계루는 어찌 그리 깨끗한가 溪樓何瀟灑필암은 또 엄숙하기도 하여라474) 筆巖又嚴肅경치 좋은 곳은 진실로 명성이 있고 勝地固有名장대한 광경은 또한 즐길 만하여라 壯觀亦可樂비로소 추성(秋城 담양)에 이르렀으니 始得達秋城선생의 이번 행차 목적지라네 師行是目的돌아오는 길에 풍패475)에 이르러 歸路到豐沛선생께 하직하니 뜰에 국화가 피어 있었네 拜退庭有菊대개 반년 동안에 蓋於半載間잠시도 슬하를 떠난 적이 없었네 未嘗暫離膝선생을 따르는 건 바로 나의 바람이니 從師顧我願우리 선생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오 舍我師不得노닐고 즐긴 게 일이 아님이 없었고 遊豫無非事보고 느낀 것도 모두 배움이라 하겠네 觀感亦云學을사년(1905)에 이르러 至于靑蛇年봄부터 가을까지 自春及秋日나는 예재의 객이 되었고 我爲禮齋旅선생은 목리의 서숙에 계셨네 師在木里塾찾아뵙고 문안드림이 어찌 쉽지 않으랴 面候豈不易편지로 문후한 것도 자주 하였다오 書問亦頻數선생께서 북으로 돌아가는 날에 函駕北歸日낙요재를 지나다 들르셨네 要齋爲經入그해 겨울에 섬오랑캐와 늑약이 이루어져 是冬虜約成종묘사직이 장차 무너지게 되니 杜稷將傾覆선생께서 충의가 끓어올라 先生奮忠義상소 올려 오적을 성토하셨네 呈疏討五賊병오년(1906) 정월에 丙午歲之正고산의 여막에서 문안드렸는데 高山候旅幕고산에서 부풍(扶風 부안)에 이르는 사이에 自高至扶風셋째 아들476)을 만나보도록 하셨네 是要三子覿간행은 비록 할 수 없다 해도 剞劂縱未可필사는 해 놓지 않을 수 없으니 鈔寫不得不백천재에서 가르침을 받들어 銜訓百千間지필묵을 마련하여 놓았네 備置紙筆墨불민한 내가 이 일을 주간하니 不敏爲幹務도합 서른여섯 책을 완성하였네477) 總成卅六冊선생을 모시고 초여름을 보내니 操几經初夏내장산에 있는 벽련암478)이었네 內藏菴蓮碧다시 영산에 도착하니 還到瀛山裏윤월 가운데 절반이 지나갔네 閏月中半迄이때에 면암옹이 是時勉菴老남쪽 지방에서 창의하였네 倡義于南服선생이 경하의 글을 지으시어 先生作賀狀소자가 그 편지를 받들고 小子奉書角진중에 가서 전하려 하였지만 往致于陣中군대가 이미 떠나 못 전달했다오479) 師發未得達이 뒤로 일 년이 지나도록 自後經一朞선생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받들지 못하였네 謦欬久未接정미년(1907) 장마와 무더위 날씨에 丁未潦炎天예산 골짝에서 찾아뵙고 따랐는데 跟拜禮山谷서쪽으로 백화산에 이르러 西至白華山석전에서 늦더위를 피하였네 石田避老熱이때 하늘이 감동한 바가 있어 于時天有感신령한 거북이 바닷가로 나왔네 靈龜出海曲선생의 불우함을 한탄하노라니 歎師不遇時눈물이 줄줄 흘러 가슴을 적셨다오 汪然涕沾臆바다에 들어가 세속의 더러움을 끊으려는 건 入海絶世汚오랫동안 간직한 선생의 뜻이었는데 師志久所蓄이번에 이 지역으로 가신 것은 今番此地行멀리 떠나 은거함을 도모하려 해서였네 經營遐擧跡무신년(1908)에 목리에 이르니 戊申到木里또한 바다가 지척에 있었네 亦爲海咫尺왕등도(暀登島)로 떠날 날이 다가와 暀島行有日날씨를 점쳐 바다를 건너려고 했다오 占天候利涉봉산과 영산 사이를 왕래할 때 往來蓬瀛間또한 우리 집에 오랫동안 머무셨는데 亦久留杖屐가친께서 이별 길에 임하여 大人臨別路시 읊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오 賦詩淚如酌선생과 가친의 사이는 先生於大人진심으로 서로 좋아하셨네 相好以心膈경자 신축 갑진 을사 무신에 庚辛甲乙戊해마다 찾아와 이틀을 묵으셨는데 每歲來信宿그 누가 알았으랴 이날 만남이 誰知此日見길이 천고의 이별이 될 줄을 永作千古別늦가을에 왕등도로 배 타고 갔는데 晩秋暀棹發기유년(1909) 정월에 가친께서 돌아가셨네 己正我親沒선생을 생각하면 정신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念師神欲往부친을 생각하면 마음을 칼로 에는 듯했다오 思親心如割섬에서 나의 만장에 화운하신 글이 島中和我章뒤늦게 빈소에 도착하였는데 追到苫塊室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읽으니 有淚無聲讀이내 심정을 어찌 차마 형용하랴 此情那忍曰위문하시는 글이 바닷가에서 오니 唁書自海出직접 와서 곡하는 것처럼 간절하였네 懇切同親哭초겨울에 안양서실480)에서 배알하고는 初冬拜安陽마침내 묘지명을 부탁드렸는데 乃以墓銘託연말에 비로소 답신이 오니 歲窮始有報명이 아니라 전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셨네481) 匪銘替傳述슬프게도 나는 집안을 맡은 고자인지라 哀此當室孤크고 작은 일을 모두 담당하였다오 大小俱擔著임자년(1912) 겨울에 계화도로 들어가시니482) 壬冬入繼華어느새 삼 년의 세월이 흘렀네 於焉歲三閱편지로 문안드림은 비록 끊어지지 않았지만 書候縱不絶감히 제자의 직분이라 할 수 있겠는가 敢云弟子職계축년(1913)과 갑인년에도 또 이와 같았으니 癸甲亦復爾글 읽는 일483)을 하다 말다 했다오 尋數作還輟을묘년(1915) 겨울에 비로소 오래 모셨는데 乙冬始久侍전수받아 정밀한 곳까지 들어갔네 傳受入精密병진년(1916)에 거듭 상을 당하니484) 丙辰荐遭艱묘소 곁을 외로이 지켰다오 煢然守墓側당시 예서를 읽는 여가에 時於讀禮暇선친의 유고를 두루 살펴보고는 大稿遍搜覓별도로 예설편을 완성하니 別成禮說編바로 선친과 문답한 것이라오 卽同親問答나의 선비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賢孝我先妣뭇사람의 칭송이 고을에 자자했는데 輿誦播鄕邑선생의 마음에 감회가 있어 先生心有感스스로 행록 발문을 지어주셨네485) 自述行錄跋무오년(1918) 가을에는 막내아우486)를 데리고 가 戊秋携季也집지의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使之行脩束선생께서 선군을 칭송하면서 先生稱先君좋은 가법을 전하였다고 하셨네 能傳好家法기미년(1919)에 월포로 거처를 옮기니 己未徙月浦화산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네 華山當眉睫저분이 완연히 저곳에 계시니 伊人宛在彼한 번 뛰면 건너갈 것만 같은데 一超若可涉중간에 깊고 험한 물이 있는지라 中有深險水바라보고 마음만 그지없이 슬펐다오487) 瞻望心忉怛이 때문에 봄바람 속에 앉아 있음이488) 所以坐春風도리어 많지 않음을 면치 못했네 不免反稀闊경신년(1920)에 창동리로 돌아왔는데 庚申返滄里이 년 동안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았다오 二載不家縶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의리는 性師心弟義심은 기질이 아니라 성에서 생기기 때문이네 生性非氣質명덕은 기의 분수에 속하고 明德屬氣分신명은 곧 태극이 아니라오489) 神明非卽極노사와 화서의 동이를 고찰하고490) 蘆華同異考매산 제문을 쓴 김씨의 폐습을 논척했는데491) 祭梅金悖習선생께 자주 나아가 질정하여 頻頻就而正의심나는 조목이 늘 많았다오 疑目每盈掬다행히 대부분 인가를 해주시고 幸多蒙印可게다가 정확한 설명까지 더해주셨네 加賜以精確홀로 나아가 후고492)를 편집했으니 專詣編後稿임술년(1922) 오월이었네 榴夏歲壬戌뜻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意外居無何계화도에서 급한 전보가 왔네 自華來電特캄캄한 밤에 허겁지겁 달려가니 顚倒抵夜黑선생께서 이미 병세가 위독하셨다오 先生已寢疾연빙의 가르침493)을 물을 길이 없었으니 淵氷問無路동자만 구석에서 촛불을 잡고 있었네 童子隅執燭이튿날 저녁에 후학들을 버리고 가시니 翌晡棄後學바로 칠월 사일이었네 七月四日曆사문의 일을 생각하면 言念斯文事큰 집에 대들보가 부러진 것과 같고 巨厦折樑木사적인 일로 말하더라도 言及私分事등불을 잃고 어두운 길 헤매는 신세가 되었네 失燭冥擿埴통곡한다는 건 오히려 예사말이니 痛哭猶例語상심한 나머지 미친 사람 같았다오 喪心狂可作평소에 문도와 함께 平日及門徒마땅히 마음과 힘을 합쳐서 端宜同心力선생의 유지를 잘 알게 하여 俾無昧遺旨한 줄기 학맥을 영원히 보존해야 하는데 永永保一脈어찌하여 하늘은 돌보지 않아 云胡天不眷큰 변고가 내부에서 생기게 하는가 大變生肘腋처음에는 공리심으로 말미암아 始因功利心스승을 무함하는 악을 앞다퉈 이루었네494) 競成誣師惡선생은 일찍이 유훈을 남기셨으니 師曾有遺訓인고는 단연코 욕되게 하는 것인데495) 認稿決是辱어찌하여 인의와 인교라는 말을 如何認意敎방자하게 터무니없이 날조했는가496) 肆然白地揑만약 참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如云眞箇有전후의 유훈은 두 갈림길이 된다네 前後爲二轍만일 인가 받음이 지당하다고 한다면 如云認至當앞의 유훈을 어찌 취소하지 않으셨겠는가 前訓盍收滅저들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彼言如可信선생은 절의가 없게 된다오 先生無義節소자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小子用是懼논척하기를 급급하게 했다오 辨討是汲汲저들이 만약 복죄한다면 彼如服其罪어찌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랴마는 豈不爲善物이처럼 하지 않고 왜정에 고소하니 不此訴倭庭사람을 음해하여 불측한 화에 빠뜨렸네 構人陷不測나를 단독 피고로 보고 視我爲獨隻나를 검찰국으로 압송하려 하였네497) 押我致檢局선인의 묘에 곡하고 하직하니 哭辭先人墓눈 덮인 달천의 산기슭일세 雪中達川麓왜에게 치욕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誓不受倭辱품속에 독약을 준비해 두었는데 懷中備毒藥다행히 성명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幸得保性命신령이 보우하신 덕택임을 알겠어라 認是冥祐澤저들이 끝내 인가 받아 출간하여 彼竟成認刊전국 팔도에 유고를 배포했는데 布之于八域개찬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改竄無難爲마음대로 첨삭할 뿐만이 아니었다오 非徒任添削만약 명백히 변론하지 않는다면 如不辨之明그 누가 다시 흑백을 가리리오 誰復知黑白소자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小子爲是懼〈고변록〉498)을 찬술하였다오 編成考辨錄저들이 또 선생의 연보를 간행했는데 彼又刊年譜진실로 오류와 착오가 많았으니 固多誤與錯마땅히 써야 하는 건 쓰지 않고 當書而不書써서는 안 되는 건 도리어 썼네 不當書反筆만약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如不改之正선생께서 오명을 덮어쓸 것이네 先生蒙累黷옛날에 정재공499)은 在昔靜齋公나에게 이 일을 끝내주기를 부탁했는데 屬我卒是役오늘날 연보 한 본을 완성하니 今日成一本마침내 저들의 병폐를 볼 수 있다오 乃見彼病關이 두세 가지 사안은 惟此數三款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니 俟聖可無惑선생의 사후의 일도 先生身後事거의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네 庶幾無愧怍태산이 무너진 지 삼십년이 지났는데 山頹三十年이날 밤이면 늘 애통하기 그지없다오 此夜每痛衋지금 비록 병든 몸이 장차 다할 테지만 今雖病將盡근심스런 마음에 눈을 감지 못하리라 耿耿未接目이렇게 혼란이 지극한 날을 만나 値此亂極日후진들이 모두 면모를 바꾸니 後進皆渝色당일에 훌륭한 그 연원을 當日好淵源그 누가 계승할 수 있을까 有誰能接續쌓인 한이 발하여 시가 되니 積恨發爲詩글자마다 눈물 자국 맺히누나 字字淚痕結일백 칠십사 운으로 지은 이 시를 百七十四韻외설에 가깝다고 말하지 마소 莫曰近猥瀆 光武歲庚子, 余年方十七.所學昧蹊逕, 可謂徒能讀.聞說蓬山中, 臯比南來設.儒門風斯動, 士林雲似集.迢絶月明寺, 往拜其間厠.士爭講要義, 經傳性禮賾.余將左氏傳, 郞誦一章訖.人謂是罕見, 先生愛如玉.乃云郭林宗, 訪茅勸成德.千古傳美談, 我盍追芳躅?迂回一日程, 枉駕臨弊宅.書贈家大人, 賢子乃潤屋.有人勸定師, 先生意亦欲.莫重師生義, 坐定誠意薄.是爲大人言, 義諦更眞切.寧山四百里, 具贄命之謁.八風【地名】獰風吼, 雙龍【峙名】虐雪積.弱齡不勝寒, 呵手因作泣.十顚到金谷, 先生驚且悅.翌朝行贄禮, 簾前照瑞旭.誨辭一何溫? 諄諄勉樸實.授以小學書, 纔得經一朔.及見我南歸, 悵然如有失.全翁禮說類, 叮嚀託校輯.晩得俊髦士, 自賀不淺福.是回大人書, 其言肺肝出.重光暮春者, 復杖千里策.君來我甚喜, 禮輯何敏速?錦江碧如藍, 其上亭子屹.多士風詠會, 君可同我適.禮席有事日, 選我最少列.流峙助我氣, 聞見闊我狹.雪月鳳棲寺, 復開大講席.人常六七十, 日惟九旬浹.問難煩且擾, 余獨最親炙.文理日驟進, 流輩所罕及.出自先生筆, 向我大人說.因勸躬當仁, 讓子亦且勿.寂寂完南館, 三席經除夕.令子同守歲, 佳況此無若.開正歸覲日, 殷勤師手畢.壬秋到薪田, 浹月復立雪.儒門方多事, 奇權互蚌鷸.先生折其衷, 猥辨儘昭晳.間將理氣奥, 一一開我窒.四方往復書, 時亦代執筆.癸卯往候時, 燕岐駕適發.余爲樊遲御, 往返七舍邈.中路兩館裡, 贈我後滄額.前此書封皮, 倉洞滄東易.滄洲道東來, 至今年八百.繼之在後學, 大任又重責.顧以鹵劣材, 拜受未敢諾.南指完山路, 御駕復如昨.時有蘭坡喪, 師則大功慽.喪葬經數月, 凉生遂還北.甲辰會寫稿, 首夏役旣卒.先生復南下, 蘭練在近隔.方伯設講會, 邀之升上榻.人衆如山海, 我爲當日直.旣練往潭陽, 爲觀三隱閣.路經我滄里, 大人齋新築.錫號以樂要, 銘詩幷揭壁.旅候適病暑, 瀛山留調攝.天巖好雲林, 禮川佳泉石.濟濟縫掖趨, 洋洋絃誦徹.南臯一齋墟, 玉川河西蹟.溪樓何瀟灑? 筆巖又嚴肅.勝地固有名, 壯觀亦可樂.始得達秋城, 師行是目的.歸路到豐沛, 拜退庭有菊.蓋於半載間, 未嘗暫離膝.從師顧我願, 舍我師不得.遊豫無非事, 觀感亦云學.至于靑蛇年, 自春及秋日.我爲禮齋旅, 師在木里塾.面侯豈不易, 書問亦頻數.函駕北歸日, 要齋爲經入.是冬虜約成, 杜稷將傾覆.先生奮忠義, 呈疏討五賊.丙午歲之正, 高山侯旅幕.自高至扶風, 是要三子覿.剞劂縱未可, 鈔寫不得不.銜訓百千間, 備置紙筆墨.不敏爲幹務, 總成卅六冊.操几經初夏, 內藏菴蓮碧.還到瀛山裏, 閏月中半迄.是時勉菴老, 倡義于南服.先生作賀狀, 小子奉書角.往致于陣中, 師發未得達.自後經一朞, 謦欬久未接.丁未潦炎天, 跟拜禮山谷.西至白華山, 石田避老熱.于時天有感, 靈龜出海曲.歎師不遇時, 汪然涕沾臆.入海絶世汚, 師志久所蓄.今番此地行, 經營遐擧跡.戊申到木里, 亦爲海咫尺.暀島行有日, 占天候利涉.往來蓬瀛間, 亦久留杖屐.大人臨別路, 賦詩淚如酌.先生於大人, 相好以心膈.庚辛甲乙戊, 每歲來信宿.誰知此日見, 永作千古別?晩秋暀棹發, 己正我親沒.念師神欲往, 思親心如割.島中和我章, 追到苫塊室.有淚無聲讀, 此情那忍曰?唁書自海出, 懇切同親哭.初冬拜安陽, 乃以墓銘託.歲窮始有報, 匪銘替傳述.哀此當室孤, 大小俱擔著.壬冬入繼華, 於焉歲三閱.書候縱不絶, 敢云弟子職?癸甲亦復爾, 尋數作還輟.乙冬始久侍, 傳受入精密.丙辰荐遭艱, 煢然守墓側.時於讀禮暇, 大稿遍搜覓.別成禮說編, 卽同親問答.賢孝我先妣, 輿誦播鄕邑.先生心有感, 自述行錄跋.戊秋携季也, 使之行脩束.先生稱先君, 能傳好家法.己未徒月浦, 華山當眉睫.伊人宛在彼, 一超若可涉.中有深險水, 瞻望心忉怛.所以坐春風, 不免反稀闊.庚申返滄里, 二載不家縶.性師心弟義, 生性非氣質.明德屬氣分, 神明非卽極.蘆華同異考, 祭梅金悖習.頻頻就而正, 疑目每盈掬.幸多蒙印可, 加賜以精確.專詣編後稿, 榴夏歲壬戌.意外居無何, 自華來電特.顚倒抵夜黑, 先生已寢疾.淵氷問無路, 童子隅執燭.翌晡棄後學, 七月四日曆.言念斯文事, 巨厦折樑木.言及私分事, 失燭冥擿埴.痛哭猶例語, 喪心狂可作.平日及門徒, 端宜同心力.俾無昧遺旨, 永永保一脈.云胡天不眷, 大變生肘腋?始因功利心, 競成誣師惡.師曾有遺訓, 認稿決是辱.如何認意敎, 肆然白地揑?如云眞箇有, 前後爲二轍.如云認至當, 前訓盍收滅?彼言如可信, 先生無義節.小子用是懼, 辨討是汲汲.彼如服其罪, 豈不爲善物?不此訴倭庭, 構人陷不測.視我爲獨隻, 押我致檢局.哭辭先人墓, 雪中達川麓.誓不受倭辱, 懷中備毒藥.幸得保性命, 認是冥祐澤.彼竟成認刊, 布之于八域.改竄無難爲, 非徒任添削.如不辨之明, 誰復知黑白?小子爲是懼, 編成考辨錄.彼又刊年譜, 固多誤與錯.當書而不書, 不當書反筆.如不改之正, 先生蒙累黷.在昔靜齋公, 屬我卒是役.今日成一本, 乃見彼病關.惟此數三款, 俟聖可無惑.先生身後事, 庶幾無愧怍.山頹三十年, 此夜每痛衋.今雖病將盡, 耿耿未接目.値此亂極日, 後進皆渝色.當日好淵源, 有誰能接續?積恨發爲詩, 字字淚痕結.百七十四韻, 莫曰近猥瀆. 선사(先師)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지칭한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광무(光武) 연간 경자년 광무 4년 1900년이다. 한갓……하겠네 원문의 도능독(徒能讀)은 책을 읽으면서 글의 뜻은 모른 채 그저 읽기만 한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신 인상여(藺相如)가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에 대해 "조괄은 한갓 자기 아버지의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할 줄을 모른다.〔藺相如曰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봉산(蓬山)……하니 봉산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당시 전우가 이 봉래산의 월명암(月明菴)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있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곽임종(郭林宗)은……했는데 곽임종은 후한의 명사(名士)인 곽태(郭泰)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모용(茅容)은 자가 계위(季偉)로, 40세가 될 때까지 농사만 지었으나 행실이 단정하고 절도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곽태가 일찍이 모용의 집에 방문하여 유숙하였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어진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하기를 권면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가친(家親)께……하셨네 당시 전우(田愚)가 후창의 집을 방문했다가 다음 날 떠날 때 자식을 잘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으로 '벽봉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 '지요막여교자(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을 써서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에게 주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영산(寧山) 충청도 천안(天安)의 옛 이름으로, 영주(寧州)라고도 한다. 당시 전우가 천안의 금곡(金谷)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옹(全翁)이……부류를 전옹은 전우(田愚)의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전재·고산(鼓山)·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와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에게 전수하였다. '예설(禮說) 부류'는 《전재선생예설(全齋先生禮說)》을 가리킨다. 봉서사(鳳棲寺)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西方山) 사이에 있는 절이다. 인하여……하셨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인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신전(薪田) 공주(公州)의 신전리(薪田里)로, 1902년 8월에 전우(田愚)가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을 모셨다오 원문의 '입설(立雪)'은 정문입설(程門立雪)의 고사를 이르는 것으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양시(楊時)가 일찍이 정이(程頤)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가 곁에 시립(侍立)한 채 떠나지 않았는데,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 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고 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기(奇)와……있었는데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권우인(權宇仁)이 이기설(理氣說)에 관해 많은 토론을 벌였으나 끝내 서로 합일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방휼(蚌鷸)은 큰 조개와 황새로, 큰 조개가 딱지를 벌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황새가 쪼아 먹으려다 조개 딱지가 닫히는 바람에 도리어 부리를 물려 서로 버티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서로 버티고 다투다가 제3자에게 이익을 빼앗김을 뜻한다. 선생께서……밝혀졌다오 기정진이 일찍이 이이(李珥)의 성리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외필(猥筆)〉이란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 임인년(1902)에 전우가 〈외필변(猥筆辨)〉을 저술하여 기정진의 이 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번지(樊遲) 공자(孔子)의 제자로, 늘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 《論語 爲政》 나에게……주셨네 스승인 전우가 김택술에게 '후창(後滄)'이란 호를 지어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호가 창주(滄洲)인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를 계승하라는 의미로 '후창'이라고 한 것이다. 후창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903년 20세에 전우가 '후창거사 창동처사(後滄居士滄東處士)' 8글자를 써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다. 창주(滄洲) 남송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희가 일찍이 무이산(武夷山)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창주'가 그의 별호가 되었다. 가친께서……하셨네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이 강학하는 서재를 새로 지었는데, 이때 전우가 '낙요재(樂要齋)'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아울러 〈낙요재명(樂要齋銘)〉을 지어 주었다.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艮齋集 前編續 卷5 樂要齋銘》 남고(南皐)엔……전해지네 일재(一齋)는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인데, 태인(泰仁)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서 이항을 제향하였다. 하서(河西)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인데, 순창(淳昌)에 김인후가 지은 강학당인 훈몽재(訓蒙齋)가 있다. 전우(田愚)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남고서원과 훈몽재에서 강회를 열었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쌍계루(雙溪樓)는……하여라 쌍계루(雙溪樓)는 전라남도 장성(長成)의 백양산(白羊山)에 있는 누대이다. 필암(筆巖)은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하서 김인후를 제향하기 위해 장성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백양산에 있는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雲門菴)에서 강회를 열고, 필원서원을 찾아갔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풍패(豐沛) 중국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이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므로 제왕(帝王)의 고향을 일컬어 풍패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관향인 전주(全州)를 이른다. 셋째 아들 전우의 삼남인 전화구(田華九)를 가리킨다. 간행은……완성하였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3월에 고부(古阜) 백천재(百千齋)에서 전우의 문고(文稿) 36책을 산정(刪定)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벽련암(碧蓮菴)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內藏山)에 있는 내장사(內藏寺)의 부속 사찰이다.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하였다. 이때에……못 전달했다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윤4월에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문인 김택술과 손자 전일건(田鎰健)을 시켜 위로하고 면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內藏寺로 보냈지만, 최익현이 이미 떠난 뒤에 도착하여 편지를 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안양서실(安陽書室) 전우가 기유년(1909)에 군산도(群山島) 신치동(臣癡洞)에 들어가 세운 서실이다. 명(銘)이……하셨네 전우가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을 위해 전(傳)을 써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전(傳)은 《간재집(艮齋集)》 전편속(前篇續) 권6에 〈김벽봉전(金碧峯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후창은 이 전을 부친의 문집인 《벽봉유고(碧峯遺稿)》의 서문으로 대용하였다. 임자년……들어가시니 전우가 이해 9월에 군산도(群山島)에서 계화도(繼華島) 장자동(壯子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글 읽는 일 원문의 심수(尋數)는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글 읽는 일을 이른다. 병진년에……당하니 후창이 모친상을 당한 것으로, 이해 3월 16일에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스스로……지어주셨네 전우의 이 글은 《간재집(艮齋集)》 후편속(後編續) 권6에 〈제최유인행록(題崔孺人行錄)〉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막내아우 후창의 셋째 아우이자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로, 자는 여안(汝安), 호는 연강(蓮岡) 또는 척재(拓齋)이다. 문집으로 《척재집(拓齋集)》이 있다. 저분이……슬펐다오 전우 선생을 만나고 싶으나 만날 수 없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시경》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이른바 저분이, 이 물가 한편에 있도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 따르려 해도, 길이 막히고 또 멀며, 물결을 따라 내려가 따르려 해도, 완연히 물의 중앙에 있도다.[所謂伊人, 在水一方. 溯洄從之, 道阻且長, 溯游從之, 宛在水中央.]"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였다. 봄바람……있음이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찾아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을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14》 성(性)은……아니라오 전우는 심본성설(心本性說)을 바탕으로 삼아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노사(蘆沙)와……고찰하고 후창이 저술한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두고 말한 것으로, 이 글은 노사 기정진(奇正鎭)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매산(梅山)……논척했는데 전우가 일찍이 〈논가김제매산선생문(論嘉金祭梅山先生文)〉을 지어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이 매산 홍직필(洪直弼)의 문인(門人)으로 자처하면서도 홍직필의 祭文에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밝혔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바탕으로 하여 김평묵의 폐습을 논척한 것이다. 후고(後稿) 전우가 저술한 글 가운데 1913년 이후에 지은 글을 가리킨다. 연빙(淵氷)의 가르침 임종 때 남기는 경계나 훈계를 이른다. 연빙은 증자(曾子)가 임종 전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서 자신이 평생 동안 몸가짐을 "깊은 물가에 임한 듯이, 엷은 얼음을 밟은 듯이 조심했다.[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 처음에는……이루었네 후창은 동문(同門)인 오진영(吳震泳)과 권순명(權純命) 등이 스승의 유훈을 날조하여 총독부의 인가(認可)를 받아 스승의 문집을 간행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선생은……것인데 유훈(遺訓)은 전우가 말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총독부에 인가(認可)를 받아 자신의 문집(文集)을 간행하지 말라는 훈계를 남긴 것을 이른다. 인고(認稿)는 총독부에 인가를 받아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것을 뜻한다. 어찌하여……날조했는가 인의(認意)는 전우가 일찍이 총독부에 인가를 받으려는 뜻이 있었다는 말이고, 인교(認敎)는 또한 전우가 일찍이 인가를 받으라는 하교를 내렸다는 말이다. 후창은 이런 말들을 동문인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날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하였네 1925년에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후창 등을 전우 유고의 출판을 방해한다는 죄목으로 일본의 검찰국에 고소하여 후창 등이 검찰국에 구인되어 곤욕을 치룬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고변록(考辨錄) 《후창집》 권15에 실려 있는 〈간재선생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先生私稿晉州本考辨錄)〉을 가리킨다. 정재공(靜齋公) 전우의 셋째 아들 전화구(田華九, 1866~1935)로, 정재는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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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은 채영 에 대한 만사 여섯 절구 挽姜蓮隱【采永】六絶 동갑이며 동지에 또 사돈을 맺으니501) 同庚同志又通家한 시대에 이보다 친한 사이 없었네 幷世相親無復加하늘이 이승의 지기인 벗을 데려갔으니 天奪此生知己友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비가를 부르노라 臨風灑淚發悲歌곧은 도로써 사악한 자들을 증오했으니 直道生憎詐僞家악을 미워하는 마음에 더할 것이 없었다오 心存惡惡外無加평소 말하기를 내가 만약 시문에 능했다면 雅言我若能文字구구절절 모두 〈항백〉의 노래일 것이라 하였네502) 句句皆爲巷伯歌사해를 모두 한 집안으로 보려 했으니 欲將四海視同家일신에 사욕을 조금도 가함이 없었다오 私利身無一點加만약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을 수 있다면 如使人人皆若此오현금의 남풍 노래503)에 함께 화답하리라 南風共和五絃歌그대가 지난해에 나의 집에 왕림했는데 高旆前年枉弊家박한 음식과 냉방으로 고초만 더했다오 薄餐冷突楚酸加서둘러 이별하느라 아무것도 못 주었으니 悤悤別路無攸贈문득 후회되어 휘파람 불며 노래 불렀다오 飜成後悔嘯而歌나는 지난겨울부터 병들어 집에 있었는데 我自前冬病在家그대 병세가 날로 심해진다는 말을 들었다오 已聞美愼日添加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대가 먼저 별세하니 遽然一曙君先逝저 모양에서 해로가가 처량하게 들리누나 悽彼牟陽薤露歌청산의 참된 집으로 나도 곧 들어갈 테니 靑山我亦入眞家옛 정의가 응당 조금도 가감이 없으리라 舊誼應無有減加혼령이 옥국504)에 따라 돌아가기 좋으니 精爽好隨歸玉局양계의 영근 노래505)를 서로 이어 부르겠지 載賡陽界郢斤歌 同庚同志又通家, 幷世相親無復加.天奪此生知己友, 臨風灑淚發悲歌.直道生憎詐僞家, 心存惡惡外無加.雅言我若能文字, 句句皆爲巷伯歌.欲將四海視同家, 私利身無一點加.如使人人皆若此, 南風共和五絃歌.高旆前年枉弊家, 薄餐冷突楚酸加.悤悤別路無攸贈, 飜成後悔嘯而歌.我自前冬病在家, 已聞美愼日添加.遽然一曙君先逝, 悽彼牟陽薤露歌.靑山我亦入眞家, 舊誼應無有減加.精爽好隨歸玉局, 載賡陽界郢斤歌. 사돈을 맺으니 후창의 넷째 아들 김형겸(金炯謙)이 강채영의 딸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혼인하였다. 구구절절……하였네 〈항백(巷伯)〉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소인(小人) 또는 악인(惡人)이 온갖 말을 꾸며 참소하는 것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뜻을 담고 있다. 《예기》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편의 노래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편의 노래처럼 해야 한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라고 하였다 오현금(五絃琴)의 남풍(南風) 노래 순(舜) 임금이 일찍이 오현금을 처음으로 만들어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부르면서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 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孔子家語 卷8 辨樂解》 옥국(玉局) 본래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도관(道觀)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듯하다. 양계(陽界)의 영근(郢斤) 노래 후창이 일찍이 강채영과 수창(酬唱)하였던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듯하다. 양계는 이승 세계를 뜻한다. 영근은 영(郢) 땅 사람의 자귀질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빼어난 시가를 의미한다. 옛날 춘추 시대 영(郢) 땅 사람이 백토(白土) 가루를 자기 코끝에 매미 날개처럼 엷게 바르고 장석(匠石)이라는 자귀질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큰 도끼를 휘둘러 백토를 깎아 냈지만 코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고 한다. 《莊子 徐无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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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형식537)에게 경계하여 주다 戒贈從子炯湜 네가 감옥에 있었던 날에 汝在福堂日내 마음은 칼로 베인 듯했는데 我心若刀割감히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不敢對人說홀로 앉아 눈물만 흘렸다 獨坐淚雙目죽고 사는 문제는 진실로 큰일이지만 死生固亦大선조의 덕을 욕되게 함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尤恐忝先德선조의 덕이 남은 은택을 베풀어 先德垂餘蔭네가 무사하게 나올 수 있었다 汝得無事出아침에 까치가 희소식을 전하니 朝來報喜鵲이내 마음이 비로소 쾌활해졌다 我心始快豁지난 일은 비록 이가 시린 듯이 괴롭지만 往事雖齒酸팔이 세 번 부러진 일538)로 삼을 수 있다 可作肱三折바라노니 이후로부터는 願言從玆後매사에 근졸함을 지킬지어다 每事守謹拙범의 꼬리를 밟은 듯이 두려워하고 愬愬虎尾蹈봄날 얼음 위를 걷는 듯이 조심하여라539) 兢兢春氷涉한갓 근졸함만 가지고는 되지 않나니 徒謹亦不濟또 의리와 이욕을 분별해야 한다 又須義利別분별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別之問何以바로 경전을 읽는 데 달려 있다 乃在經傳讀의리를 취하고 이욕을 버리기를 取義舍去利단칼로 두 동강 내듯이 해야 한다 一刀兩段截너의 품성은 민첩하고 선하니 汝性敏且善가문을 일으켜 세울 만하다 門戶可樹立무엇보다도 밝음과 삼감을 더해야 하니 最要加明愼절대로 거칠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 切勿作粗忽자기 몸을 이루는 때를 기다리면 待到成身時온 집안이 상서로움을 만나리라 一門逢祥吉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었으니 吾病入膏肓조만간에 눈을 감게 될 것이다 朝暮纊且屬백부가 장차 죽게 되어 남기는 말이니 世父將死言가슴에 새기고 또 뼈에 새길지어다 銘肝復刻骨 汝在福堂日, 我心若刀割.不敢對人說, 獨坐淚雙目.死生固亦大, 尤恐忝先德.先德垂餘蔭, 汝得無事出.朝來報喜鵲, 我心始快豁.往事雖齒酸, 可作肱三折.願言從玆後, 每事守謹拙.愬愬虎尾蹈, 兢兢春氷涉.徒謹亦不濟, 又須義利別.別之問何以? 乃在經傳讀.取義舍去利, 一刀兩段截.汝性敏且善, 門戶可樹立.最要加明愼, 切勿作粗忽.待到成身時, 一門逢祥吉.吾病入膏肓, 朝暮纊且屬.世父將死言, 銘肝復刻骨. 조카 형식(炯湜) 후창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의 장남이다. 팔이……일 세상일에 경험이 많음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3년 조에 "팔이 세 번 부러져 봐야만 훌륭한 의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여러 차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보아야만 그 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범의……조심하여라 《서경》 〈군아(君牙)〉에 "내 마음의 근심되고 위태로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은 듯,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心之憂危, 若蹈虎尾, 涉于春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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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강 이형 쾌열 에 대한 만사 4수 挽梅岡李兄【快烈○四首】 옛날 공의 집안에 장가들었을 때547) 尊門昔日委禽時금란지교를 좋이 맺고 조금도 어김이 없었네 好結金蘭不少違노년에 이르도록 마치 하루처럼 지냈는데 直到暮年如一日갑자기 길이 작별하니 이 무슨 일이런가 遽然永別是胡爲은암과 구암의 세 묘갈을 찬술했을 때548) 隱龜三碣撰成時문식으로 구하지 않음도 훌륭한 일이었네 不以文求亦一奇비록 재주 없어 일을 그르쳤던 게 부끄럽지만 縱愧不才曾誤事다시는 날 알아줄 이 없어 홀로 서글퍼한다오 更無知我獨悽其누추한 집에 왕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賁臨弊屋不多時오늘 흉한 소식이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此日凶聞那得知인세에서 죽고 사는 게 마치 꿈만 같으니 人世存亡如夢裡청산에서 통곡하며 탄식만 할 뿐이라오 靑山慟哭一歔欷무릎을 에워싼 손자와 증손이 있는 칠십 대에 繞膝孫曾七耋時세상 싫어 호연히 돌아간 공이 몹시 부럽다오 羡公厭世浩然歸아아 나는 오래 병을 앓고 근심도 많으니 嗟吾久病兼多患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산 자를 슬퍼하리라 死者有知生者悲 尊門昔日委禽時, 好結金蘭不少違.直到暮年如一日, 遽然永別是胡爲?隱龜三碣撰成時, 不以文求亦一奇.縱愧不才曾誤事, 更無知我獨悽其.賁臨弊屋不多時, 此日凶聞那得知?人世存亡如夢裡, 靑山慟哭一歔欷.繞膝孫曾七耋時, 羡公厭世浩然歸.嗟吾久病兼多患, 死者有知生者悲. 옛날……때 후창은 1898년(고종35) 15세에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은암(隱菴)……때 은암과 구암(龜菴)은 이쾌열의 선조인 이수일(李守一)과 이성익(李星益)을 가리킨다. 후창이 일찍이 이들의 묘갈명인 〈증가선대부호조참판 행조산대부내자시직장 은암이공묘갈명(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朝散大夫內資寺直長隱菴李公墓碣銘)〉과 〈성균진사 구암이공묘갈명(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을 찬술하였다. 《後滄集 卷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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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지명 孺人李氏墓誌銘 고(故) 귀암 처사(龜巖處士) 문군 송규(文君頌奎)는 나와 20년 동안 교유하였는데, 평소 매양 외삼촌인 양씨(梁氏) 어른 집안의 규문의 법도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10여 년 뒤에 양군 재해(梁君在海)가 그 선유인(先孺人) 이씨(李氏)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임시로 거처하는 천태산(天台山)으로 찾아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양재해는 바로 양씨 어른의 맏아들이다. 유인(孺人)의 어짊은 내가 실로 잘 알고 있다. 다만 부탁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재해의 간청에 대해서 어찌 차마 끝까지 거절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유인의 성은 이씨(李氏)인데, 그 선조는 광산(光山) 사람으로,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조부는 이사철(李師哲), 부친은 이용하(李龍河)이다. 모친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그 아버지가 김계(金啓)이다. 순묘(純廟) 을유년(1825, 순조25) 8월 17일에 태어났다. 18세에 양씨(梁氏)에게 시집가서 2남을 낳았으니, 재성(在成), 재해(在海)이다. 병술년(1886, 고종23) 9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2세이다. 남평(南平) 저포(猪浦)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화학산(華鶴山) 아래 무학동(舞鶴洞) 포만등(匏蔓嶝) 건좌(乾坐)에 이장하여 부군과 합장하였다.유인은 생래적으로 남다른 지조가 있어 계례(笄禮)31)하기 전에 이미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부모가 항상 귀여워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가문은 일어날 가망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섬기고 지아비를 받듦에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유인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수고스러운 일을 다 하였으나 스스로에 대한 보양은 매우 검소하였다. 이로부터 생계가 힘입는 바 가 있어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않고 부모님께 올렸으며,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정(冬溫夏凊)의 예절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조심하였다.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너그러웠기에 규방에서는 원망하거나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바른길로 인도하여 도가 있는 이를 가까이하게 하였다. 여항(閭巷)의 비루한 곳이나 시정의 광대놀이 하는 곳에는 금하여 가지 못하게 하였다. 매양 음식을 장만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번번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너의 외사촌 문송규(文頌奎)를 보지 못했느냐. 나는 너희들이 그를 본받았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아, 유인의 어짊은 옛날 열부(烈婦)나 숙원(淑媛)처럼 아름답고 훌륭하다 할 것이다.양재해는 지금 천 리 멀리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는 데에 매우 힘을 기울이니, 참으로 선조가 후손에게 물려준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후일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미미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잘하고 잘못함도 없는 것은 無非無儀여자의 떳떳한 도리일세. 女道之常유인이 있으니 孺人有焉규문의 법도가 날로 드러났네. 閫範日章자식이 잘 본받아 有子式穀그 모훈을 계승하였네. 思述厥謨아, 저 새로운 언덕에 吁彼新阡길이 보존하는 것 근심이 없네. 永保無虞 故龜巖處士文君頌奎。余二十年從遊也。平日每稱其舅氏梁丈家閫範之美。後十數年。梁君在海。奉其先孺人李氏狀。訪余於天台寓舍。以請幽室之銘。在海卽梁丈胤子也。孺人之賢。余固稔念。但以托非其人。牢辭久之。而在海之請。豈忍終拒也。謹按孺人姓李氏。其先先山人。淸心堂調元後。祖師哲。考龍河。妃金海金氏。父啓以純廟乙酉八月十七日生。十八歸梁氏。生二男曰在成在海。丙戌九月二十五日終。享年六十二。葬南平猪浦。移葬于綾州華鶴山下舞鶴洞匏蔓嶝乾坐合兆。孺人生有異橾。未笄時。已有至行。父母嘗愛之曰。汝若爲男子。則吾門庶有望焉。及適人。事舅故奉君子。極有婦道。家世素貧。孺人備經艱楚。殫服勤勞。而凡百自奉。極其儉約。自是生理有賴。而甘旨之供不匱。夙興夜處。定省溫情之節。必誠必謹。天性溫仁慈恕。閨房之間。未聞有怨慰愁苦之聲。敎養子孫。必以義方。當使親近有道。凡閭巷俚戱市井聲伎之地禁不得往來。每具粮饌。使之從師就塾。輒戒之曰。爾不見爾外弟文頌奎耶。吾欲汝曹效之。嗚呼。孺人之賢。可以與古之烈婦淑媛。倂美而匹休矣。在海今且千里從師求道甚力。信不負當。日垂裕之志。而爲他日立揚顯親之地者。豈淺淺哉。銘曰。無非無儀。女道之常。孺人有焉。閫範日章。有子式穀。思述厥謨。吁彼新阡。永保無虞。 계례(笄禮) 옛날에 여성에게 행해지던 성인례이다. 여자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자(字)를 지어 주었다. 여자가 혼인을 허락하면 혼인 전에 계례를 행한다. 하지만 15세가 되면 혼인의 약속이 없어도 계례를 하였다. 계례 당사자나 부모가 1년 이상의 복(服 상복을 입음)이 없어야 행할 수 있다. 절차는 관례의 절차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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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현감 박공 묘지명 海南縣監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장(世章), 자는 성재(聖哉)이니, 신라(新羅) 왕자 밀성군(密城君)이 비조(鼻祖)가 된다. 후세에 휘 울(蔚)이 있으니, 관직은 찰방(察訪)이고, 공에게 7대조가 된다. 증조는 휘 억천(億天)이니 감찰이고, 조부는 휘 지춘(枝春)이니 장악원 판사(掌樂院判事)이다. 부친은 휘 사돈(士敦)이니, 주부(主簿)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판관 김중수(金仲秀)의 따님이다. 인조(仁祖) 무인년(1638, 인조16)에 남평(南平) 박곡리(博谷里)에서 공을 낳았다.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뜻은 무리 짓지 않는 것을 숭상하였다. 글방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장성하여서 탄식하기를 "남아의 사업은 굳이 한 기예에 치우치고 한 기국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활을 잡고 말을 타며, 군진을 펼치고 행군하는 방법을 겸하여 익혔다. 젊어서 서울에서 유학하였는데 명성이 자자하였기에 당대 명사들이 모두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현종(顯宗) 경술년(1670, 현종11)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충무위 사정(忠武衛司正), 호분위 부사과(虎賁衛副司果)를 지냈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가리포 진관(加里浦鎭管), 고금도 첨절제사(古今島僉節制使),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다.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위엄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기에 현(縣)의 백성들이 비석에 공적을 새겨 칭송하였다.상국(相國) 민노봉(閔老峯) 및 그 아우 여양군(驪陽君)이 매양 원대한 기량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대해서 논의하여 확정한 것이 많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이궁(離宮)으로 물러나자 공이 초하루마다 찬품(饌品)을 봉진(封進)하였다. 일찍이 상국의 사신을 모시고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상이 인견하여 그곳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묻고는 매우 가상하게 여겨 노비 수십 명을 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살게 되자 노비를 풀어 준 다음 각자의 길로 가게 하였다. 평소 인륜에 돈독하고 후하게 베풀었으니,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그를 앞길을 밝히는 횃불처럼 대우하였다. 만년에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나누었는데 형제와 질서(姪婿), 인척과 친구 가운데 가난한 자에게는 또한 모두 미루어 넉넉하게 주었다.신묘년(1711, 숙종37)에 집에서 졸하였다. 남평(南平) 덕곡(德谷) 장등(長嶝)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부사과(副司果) 복(輻)의 따님이다. 모두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검(守儉), 치검(致儉), 자검(自儉)이고, 사위는 황태걸(黃泰傑), 양필장(梁必章)이다. 측실(側室)은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덕검(德儉), 신검(信儉), 중검(仲儉)이고, 사위는 나수경(羅守慶), 조시태(趙始泰)이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서울에서 먼 시골 구석의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스스로 발탁되어 크게 수립하였기에 당대에 이름을 떨쳐 대궐에까지 알려졌다. 공경들은 자문을 구하였고 동류들은 믿고 중시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자상하고 은혜로운 풍모가 있었고, 변방을 다스릴 적에는 제압하는 위엄이 있었으니, 내면에 보존한 것이 심후한 자가 아니면 시행하고 운용함에 어찌 이처럼 평탄하고 광대하겠는가. 후손이 한미하고 문헌이 부족하지만 의를 행한 풍모는 아마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공의 8세손 준삼(準三)이 그 족제(族弟) 준기(準基)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준기가 선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그 말이 근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향리의 원로들이 서로 자자하게 전하니, 그 가장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분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감히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덕곡의 언덕에 德谷之阿넉 자의 봉분이 우뚝하네. 四尺其崇이 누구의 무덤인가 伊誰云藏해남 박공이 묻혔네. 朴海南公조정을 빛낸 어진 보필이요 熙朝良輔세상을 맑게 한 훌륭한 사람일세. 淑世偉人선량한 이에게 복을 내려 후손이 번창하니 福善昌後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春 公諱世章。字聖哉。以新羅王子密城君爲鼻祖。後世有諱蔚。官察訪。於公爲七代。曾祖諱億天監察。祖諱枝春掌樂判事。考諱士敦主簿。妣慶州金氏判官仲秀女。以仁祖戊寅生公于南平博谷里。天姿秀爽。志尙不群。就塾受課。淹貫百家。及長慨然曰。男兒事業。不必偏於一藝局於一器。遂兼習操弓馳馬布陣行軍之法。少遊京師。聲聞藹蔚。一時名士。無不願交。顯宗庚戌登武科。歷龍驤衛副司果。訓鍊院主簿。忠武衛司正。虎賁衛副司果。出爲加里浦鎭管。古今島僉節制使。海南縣監。廉勤有威。所至有聲。縣民刻石頌之。閔相國老峯及其弟驪陽君。每以遠器稱之。軍國機務。多所論確。仁顯王后遜于離宮也。公每朔密封饌品以進。嘗陪上國使。入北京。及還。上引問經歷狀。甚嘉賞之。賜奴婢數十口。及退而鄕居。放其奴任其去住。平生篤於人倫。厚於施予。親戚隣里。待以擧火。晩年爲子孫析産。至於兄弟姪婿姻戚知舊之貧者。亦皆推以資給焉。辛卯卒于家。葬于南平德谷長嶝亥坐之原。配原州李氏副司果輻女。擧三男二女。守儉致儉自儉。黃泰傑梁必章。側室生三男二女。德儉信儉仲儉。羅守慶趙始泰。孫曾以下不能盡記。嗚呼。公生于鄕曲遐荒之地。家戶零替之餘。而早自援擢。能大樹立。蜚英一世。動光九陞。公卿待以咨訪。儕流視以倚重。牧民有慈惠之風。莅邊有折衝之威。非存乎內者深厚。其施用云爲。安能若是之坦易滂沛也。雲仍式微。文獻莫徵。而其行義風致。槪乎有不可掩者矣。公八世孫準三。以其族弟準基所撰家狀來。請隧道之銘。余知準基善人也信人也。其言不爲無稽。況鄕里故老相傳藉藉。有不待其家狀而知者耶。不敢以陋劣辭。銘曰。德谷之阿。四尺其崇。伊誰云藏。朴海南公。照朝良輔。淑世偉人。福善昌後。芬苾千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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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기공 묘지명 野隱奇公墓誌銘 선비로서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어진 벗을 만나 교유하며 훌륭한 산수를 차지하여 소요하는 것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가운데 때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을 고(故) 처사 야은(野隱) 기공(奇公)이 또한 그러한 사람이다. 기씨(奇氏)는 사문(斯文)의 명가가 되었으니, 남쪽 고을에서 으뜸이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자질로 선대에서 남긴 공렬을 이어받았고, 명성과 훤한 풍모로 젊은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령문(功令文)과 사장(詞章)은 부모님과 가문의 바람에서 나왔지만 청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끊고 산수간 천석 사이에 마음을 두어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강론하고 시를 수창함에 부지런하여 피곤한 줄 몰랐다. 그 참다운 생각과 고매한 흥취는 우뚝이 세정(世情)을 벗어난 것이었으니 비록 사람들이 말하는 때를 만난 것과는 다르지만 이것이 천지간에 세상에 없는 만남이 됨을 누가 알겠는가. 지금 공의 세대와는 100여 년 차이가 나지만 효도와 우애의 훈계는 자손을 실추시키지 않았고, 겸양하는 기풍은 여전히 향리에 전한다. 당시 수양한 바가 깊고 조우한 바가 두텁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탁월하지 않은가.공의 휘는 상호(商頀), 자는 성원(聖元),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정무공(貞武公) 휘 건(虔)이 중시조가 되니,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이름을 떨쳤다. 진필(震弼), 정상(挺祥), 재동(再動), 종태(宗泰)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모친은 순창 임씨(淳昌林氏)로, 임중형(林重馨)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한신(曺漢愼)의 따님인데, 온화하고 어질며 고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부인의 덕이 지극하였다.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사봉(師鳳), 사범(師範), 사룡(師龍), 사혁(師赫), 사은(師殷)이다. 두 딸은 최창화(崔昌燁), 임우재(任禹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영종(英宗) 경신년(1740, 영조16)에 태어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능주(綾州) 남쪽 상우봉(上牛峯) 가양평(加陽坪) 을좌(乙坐) 언덕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5대손 세진(世搢)이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송사는 유림의 학식이 깊은 원로 선배이니 그 말이 결코 친족에게 사사로이 아부하지 않을 것이기에 백세의 공필(公筆)이 될 수 있다. 생각건대 형편없는 내가 어찌 모름지기 그 사이에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사양하였지만 세진이 계속 간청하기에 삼가 묘표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금오산21) 기슭 金鰲之麓양자강22)의 물가. 楊子之濱운림에는 푸른빛 감돌고 雲林蒼翠바람 부는 때 깨끗하네. 風日鮮新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封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之藏자손에게 복 남겼으니 貽厥式穀남은 경사 영원하리. 餘慶長長 士之不遇於世久矣。得朋友之賢以從逐焉。占山水之勝以逍遙焉。此可謂不遇而遇者矣。吾鄕故處士野隱奇公。亦其人也。奇氏爲斯文名家。冠冕於南州。公以儁才異質。承襲餘烈。聲望風華。早年藉藉。功令詞章。出於父母門戶之望。而關節捷徑。有所不屑也。及遭大故。絶意進取。寄傲於水林泉石之間。與一時名碩。講劘酬唱。亹亹而不知倦。其眞想逸趣。亭亭物表。雖異乎人之所謂遇者。而誰知此爲天瓖間不世之遇也耶。今距公之世爲一百有餘年。而孝弟之訓。不墜於子孫。廉讓之風。猶傳於鄕里。可見其當日所養者深而所遇者厚也。曷不偉然。公諱商頀。字聖元。貫幸州。貞武公諱虔爲中祖。文學仕宦。奕世磊落。震弼。挺祥。再動。宗泰。高曾以下四世諱也。妣淳昌林氏重馨女。配昌寧曺氏漢愼女。溫仁柔嘉。極有婦德。擧五男。曰師鳳師範師龍師赫師殷。二女適崔昌燁任禹才。孫曾不記。公以英宗庚申生。享年四十八。葬于綾州南上牛峯加陽坪乙坐原雙兆。五代孫世搢。從余遊。一日以松沙奇宇萬所撰墓表來謁誌銘之文。竊忘松沙是儒林老宿。其言必不阿私族親。而足爲百世之公筆。顧蔑蔑無狀。何須加床於其間耶。辭之而世瑨之請不已。謹据表爲之說如是云爾。銘曰。金鰲之麓。楊子之濱。雲林蒼翠。風日鮮新。有封四尺。君子之藏。貽厥式穀。餘慶長長。 금오산(金鰲山) 전라도 장성현(長城縣)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양자강(楊子江) 능주천이 화순군 이양면 강서리 예성산 아래 송석정에 이르면 양자강 또는 용강(龍江)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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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의 천은 조공 묘지명 贈兵曹參議泉隱趙公墓誌銘 공의 휘는 서규(瑞奎), 자는 경천(擎天), 호는 천은(泉隱)이다. 조씨(趙氏)는 본래 함안(咸安) 사람이다. 휘 정(鼎)은 고려에서 벼슬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을 지냈는데, 그 시조이다. 휘 승숙(承肅)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불렀다. 휘 종례(終禮)는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휘 임(琳)은 관직이 대사성이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을 지냈는데, 동복(同福)에 우거(寓居)하였다. 고조는 휘 유보(惟寶)인데, 습독(習讀)을 지냈다. 증조는 휘 호(豪)인데,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기벽(奇璧)이다. 부친은 휘 옥생(玉生)으로, 호가 청계(淸溪)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다. 인묘(仁廟) 신사년(1641, 인조19) 3월 29일에 산음(山陰)의 우거하는 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나아감과 물러남, 묻고 대답하는 예절에 대해서 물 흐르는 듯이 받들고 순종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독서할 적에는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課程)을 따라 공부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통창하였다. 일찍이 동학에게 말하기를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은 비록 두 가지 길이지만 출사(出仕)하여 군주를 섬기며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수하(隨何)와 육가(陸賈)는 문학에 국한되고 강후(絳侯)와 관영(灌嬰)은 무략에 치우쳤으니,23) 그릇처럼 한 가지 쓰임새에 국한되지 않는 군자의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독서하는 여가에 《손오병법(孫吳兵法)》24) 같은 병서를 함께 익혀 대략 대의에 통달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여론은 모두 장차 당시에 쓰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우연히 고질병(痼疾病)에 걸려 마침내 천하사방을 평정하는 원대한 일은 접고 문을 닫은 채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평소 마음가짐은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행실은 겸손하였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중하고 꼼꼼하였다. 종족과 인척으로부터 교유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기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임신년(1692, 숙종18) 8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장수하고 귀하게 된 손자로 인하여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득영(鄭得英)의 따님이다. 화순(和順) 천운산(天雲山) 을좌(乙坐) 위아래로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징태(徵泰), 징휘(徵徽), 상겸(尙謙)이고, 딸은 낭주(朗州) 최구익(崔久翼)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영민한 재주로 태평성대에 출사(出仕)하여 마땅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지만, 병마가 농간을 부려 끝내 궁벽한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식자의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는데,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행실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孝悌之行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였네. 文武之才벼슬길에 나아갔다면 釋褐登籍훌륭한 일을 하였을 텐데. 庶乎有爲운명이 시대와 어긋나 命與時違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네. 沈淹林樊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고 積累不食후손들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 公諱瑞奎。字擎天。號泉隱。趙氏本咸安人。諱鼎。仕麗朝官平章事。其始祖也。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諱從禮。入我朝。官寶文閣直提學。諱琳。官大司成。皆顯祖也。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高祖諱惟寶。習讀。曾祖諱豪。內禁衛將。祖諱奇璧。考諱玉生。號淸溪。軍資監正。妣密陽朴氏永春女。仁廟辛巳三月二十九日。生公于山陰之寓舍。公幼有至行。孝友根天。進退唯喏。承順如流。就傳讀書。不待提督而遵循課程。文理日暢。嘗語同學曰。文武雖是兩途。而其爲出身事君。經世澤民。則一也。隨陸之局於文。絳灌之偏於武。非君子不器之道也。是以讀書之暇。兼習孫吳兵略。略通大儀。丙辰擢武科。物論無不擬之以將爲時用。旣而偶得貞疾。遂還四方之事。以杜門養病爲餘日計。平居持心謹慤。行已謙恭。接人和敬。處事愼密。自宗族姻戚至於知舊從遊。問訊周恤。源源不替。各得其心。壬申八月十三日卒。後以孫壽貴。贈兵曹參議。配河東鄭氏得英女。葬和順天雲山乙坐上下兆。生三男一女。男曰徵泰徵徽尙謙。女適朗州崔九翼。孫以下不錄。嗚呼。以若挺邁之才。出身照朝。宜若有所爲。而二竪作戲。竟不免沈淹於遐曲林樊之間。其爲謙者之恨。爲何如耶。後孫翼濟。以家狀請識玄石。辭不獲已。銘曰。孝悌之行。文武之才。釋褐登籍。庶乎有爲。命與時違。沈淹林樊。積累不食。垂裕後昆。 수하(隨何)와……치우쳤으니 《진서(晉書)》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에 "한(漢)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략이 없고, 강후 주발(周勃)과 관영에게는 문식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손오병법(孫吳兵法)》 중국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法)》의 합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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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 이공 묘지명 藥圃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영복(永複), 자는 계실(季實), 호는 약포(藥圃)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선제(先齊) 호 필문(篳門)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는데,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종덕(種德)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경(㯳)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조부는 휘 필광(必光)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언구(彦矩)이니,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성중(全聖中)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27) 5월 22일에 공을 화산리(華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굳세고 방정하였다. 집안에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겨 아우와 자식 된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여력이 있고 한가한 날이면 등불을 밝히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르러 문사(文詞)가 넉넉하여 시원스레 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끝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과거 공부는 접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여 애오라지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렸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뜻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믿고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흉년을 당했을 적에 수확한 벼가 논에 남아 있었는데, 밤에 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벼를 훔쳐서 가다가 공을 보고 이랑 사이에 숨겼다. 공이 그에게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니 그 사람이 사죄하고 돌아가서는 결국 착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상 군자(梁上君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간 군자(畝間君子)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장차 관아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달아나고자 하니, 공이 엄히 금하여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짓게 하고 독서하는 자는 독서하게 한 다음 공은 뜰을 쓸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관원을 맞이하자, 관원이 마음대로 침탈하는 바가 없어 마을이 마침내 편해졌다.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를 예법에 정한 것보다 더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감동하여 마침내 상위 관아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무자년(1768, 영조44) 1월 21일에 졸하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론(公論)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아 인재가 아래에서 흩어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와 같이 의(義)를 행하고 이와 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외진 곳에 서 은거하여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는 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되거나 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어떻다고 하겠는가. 바다에 빠뜨린 진주25)는 비록 열 겹으로 감싸서 광채를 숨기더라도 백세의 뒤에까지 절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배위(配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박성곤(朴聖坤)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광국(光國), 광렬(光烈), 광인(光寅), 광진(光震)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사욱(文思郁), 흥덕(興德) 장계인(張啓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한휘(漢徽), 덕휘(德徽)이고, 딸은 강욱(姜旭)에게 출가하였다. 차자의 아들은 만휘(萬徽), 주국(周國), 주장(周璋), 주진(周鎭)이고, 딸은 문영기(文永璣)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주국(周國)을 양자로 삼았다. 넷째의 아들은 숙휘(淑徽)이고, 장녀는 경주(慶州) 김일기(金馹基)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밀양(密陽) 박영호(朴英浩)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 태휴(泰休)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시례의 가문에 詩禮門庭효도와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네. 孝友式穀광채를 감추었으니 潛光含章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었네. 世莫我識선조가 공덕을 쌓고 누리지 않아 積累不食후손들이 복 받았네. 雲仍蒙福지동의 무덤에 池洞斧堂억만년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億 公諱永複。字季實。號藥圃。李氏系出光山。勝朝左僕射諱珣白爲鼻祖。至諱先齊。號篳門。官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薦至吏曹參議。皆其顯祖也。高祖諱種德。丙亂擧義。贈吏曹參議。曾祖諱㯳。贈僉中樞。祖諱必光。贈掌樂院正。考諱彦矩。同中樞。妣天安全氏聖中女。以英宗辛未五月二十二日生。公于華山里。公天稟溫厚剛方。八事父兄。出事長上。甚得弟子之職。餘力暇日。焚膏懸䯻。刻苦下功。年至成童。文詞贍暢。累捷鄕解。竟屈禮部。於是謝絶擧業。隱居求志。聊以自娛。平心率物。推己恕人。惻怛之情。孚實之意。交濟竝行。是以鄕里之間。老少上下。無不信服。嘗遇飢歲。稷禾棲畝。乘夜行視。有人竊禾以去。見公。匿於畝間。公爲陳義理。曉喩諄諄。其人服罪而去。卒爲善人。人曰。古有梁上君子。今爲畝間君子。村隣有殺人者。將告官。村人皆欲逃避。公嚴禁之。使耕者耕。讀者讀。公掃庭除。具衣冠。出迎官。官人無所肆其侵掠。村中遂晏如也。遭艱。哀毁踰節。廬墓三年。鄕里感賞。遂剡薦于上司。除童蒙敎官。戊子正月二十一日卒。葬池洞前麓午坐原。嗚呼。公論不行於上。而人才散逸於下久矣。以若行義。以若抱負。隱淪遐荒。世無知者。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謂何如耶。滄海遺珠。雖十襲鞱輝。而百世之下。自有不可得而掩者矣。配順天朴氏聖坤女。有四男二女。光國光烈光寅光震。女適南平文思郁。興德張啓仁。長房男漢徽德徽。女適姜旭。二房男萬徽周國周璋周鎭。女適文永璣。三房周國爲後。四房男淑徽。女長適慶州金馹基。次適密陽朴英浩。會孫以下不盡錄。玄孫泰休徵玄石之銘。不敢辭。銘曰。詩禮門庭。孝友式穀。潛光含章。世莫我識。積累不食。雲仍蒙福。池洞斧。堂芬苾千。億 바다에 빠뜨린 진주 보배를 모으는 사람이 바닷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여 빠뜨렸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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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동학 교수 이당 박공 묘지명 東學敎授梨堂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승수(承洙), 자는 석여(錫汝), 호는 이당(梨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가 신라(新羅)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에게서 나왔다. 후세에 여덟 명의 대군(大君)이 분봉(分封)하게 되었으니, 그 장자가 밀성군(密城君)으로, 바로 밀성 박씨로 계보가 나누어지게 된 선조이다. 후손 가운데 휘 현(鉉)이 있으니, 고려 때 사헌부 규정(司憲府紏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문유(文有)를 낳았는데,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사경(思敬)을 낳았는데,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심(忱)을 낳았는데, 본조에 들어와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으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강생(剛生)을 낳았는데,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절문(切問)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중손(仲孫)을 낳았는데, 호는 묵재(默齋)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미(楣)를 낳았는데, 호는 존성재(號存誠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광영(光榮)을 낳았는데,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합격하고 형조 참판을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난(蘭)을 낳았는데, 호가 오정(梧亭)이고,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평군(密平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인원(仁元)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전한(典翰)을 지냈다. 이분이 휘 준현(俊賢)을 낳았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종훈(扈從勳)에 책록(策錄)되었다. 이분이 안정(安檉)을 낳았는데, 참봉(參奉)을 지냈고,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모친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유현(金有鉉)의 따님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파주(坡州)의 덕현(德峴)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재성(才性)이 영특하여 문학을 일찍 성취하였다. 일찍 성균관에 들어가 동학 교수(東學敎授)에 제수되었다. 사우(師友)들과 교유하고 출중한 사람들과 사귀어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더욱더 확충하여 훌륭한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다. 공은 퇴우당(退憂堂) 휘 승종(承宗)과 더불어 종고조(從高祖) 형제가 된다. 퇴우당이 화를 당한 뒤에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얼마 되지 않아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공은 마침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전주(全州)의 봉서산(鳳棲山) 선영 아래에 이르러 거처하였다. 3년을 거처하였는데 도회지와 가까워 출세를 위해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한강(韓康)26)의 이름을 아는 자가 다만 한 여자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을 보고, 이에 남쪽 변방 산골 가장 깊은 곳을 찾다가 능주(綾州) 이목동(梨木洞)에 이르러 멈추었다. 숲속에 집을 짓고 고용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름이 문밖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발은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자를 숨기고 자취를 없애며 교유를 끊어 세상을 버린 백성으로 자처하여 스스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공이 어느 곳에서 떠돌아다니는지 몰랐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공이 귀족의 자제인 줄 몰랐다. 여유롭게 노닐면서 배운 것을 익히고 노닐면서 익히듯이 학문에 전념하여 뽕을 따는 자처럼 한가롭고,27) 대식(代食)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좋아하여28) 인간 세상에서 더이상 종경(鍾磬)과 옥백(玉帛)이 어떤 물건인지 몰랐다.정사년(1677, 숙종3)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 거처하던 곳 뒤쪽 산기슭 자좌(子坐)에 장사 지내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배위(配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참판 이무(李武)의 따님이다.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자희(自禧)이다. 손자는 일징(逸徵), 초징(楚徵)이다. 초징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이 성원(晟源)으로 장자의 후사가 되었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대대로 훌륭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태평성대의 명사(名士)로, 그 포부와 조예는 장차 이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가문의 운수가 떨치지 못하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내 천애(天涯)의 머나먼 변방에 초연히 은둔하여 폐인으로 자처하여 생을 마감하였으니, 탁월한 풍격은 먼 후대에 서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 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과 남은 향기가 파묻힌 채로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자손의 무궁한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9세손 학(鶴)이 와서 깊이 개탄하며 전해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수습하여 장차 묘도(墓道)에 새기려고 하면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번다함 사절하고 고요한 곳 찾아 謝繁就靜외진 물가에 이르렀네. 止于遐濱은거할 곳 마련하였는데 菟裘是卜이곳에 새로 무덤을 만들었네. 斧堂仍新두텁게 쌓으면 반드시 발현하고 厚積必發오래도록 막히면 반드시 펴지게 마련이네. 久屈必伸후손이 번창하리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시냇물처럼 이르리라. 餘慶川臻 公諱承洙。字錫汝。號梨堂。朴氏系出新羅始祖王赫居世。後世至八大君。分封其長曰密城君。卽密城繼別之祖也。後孫有諱鉉。䴡朝官司憲紏正。是生諱文有。慶州判官。是生諱思敬。典法判書。是生諱忱。入我朝。以開國原從勳。贈戶曹典書。是生諱剛生。號蘿山耕叟。集賢殿副提學。是生諱切問。文科正字。贈左贊成封密山君。是生諱仲孫。號默齋。文科都承旨。是生諱楣。號存誠齋。文科官承旨。是生諱光榮。中司馬文科官刑曹參判。封密城君。是生諱蘭。號梧亭。中司馬兩試。北評事。贈領議政封密平君。是生諱仁元。文科典翰。是生諱俊賢。中司馬。壬辰著扈從勳。是生諱安檉。參奉。卽公之考也。妣安東金氏有鉉女。歲丙辰生公于坡州之德峴。公才性穎異。文學夙就。早上庠。除東學敎授。遊從師友。交結英雋。琢磨淬礪。愈益展拓。蜚英馳譽。藉藉一時。公與退憂堂諱承宗。爲從高祖兄弟。退憂堂遘禍後。公退歸鄕第。杜門謝客。未幾又經丙子之亂。時事大變。公遂無意於世。挈家南下。至全州之鳳棲山先壟下居焉。居三年。見地近通都。夤緣漸繁。而知韓康之名者。不止爲一女子而已。於是行尋南荒山谷最深處。至綾州之梨木洞止焉。因樹爲屋。與同傭人。名不出門。足不出山。匿影滅跡。絶遊息交。自處以遺世之民。自謂以無名之人。洛中故舊。不知公之爲流落何處。洞裏居人。不知公之爲貴遊子弟也。優哉游哉。脩焉息焉。同桑者之閑閑。樂代食之維好。不知人間世復有鍾磬玉帛之爲何物也。丁巳十月十五日考終。葬所居後麓子坐合窆。配全義李氏參判武之女。擧一男曰自禍。孫男曰逸徵楚徵。楚徵有一男曰晟源。出後長房。玄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世家華胃。照朝名士。其抱負造詣。將以有爲於斯世。而家運不競時事多難。乃超然遐擧於天涯地角之遠。自分貞廢以終其世。其風韻之偉然。百世之下。令人斂袵。但年代浸遠。雲仍零替。使其遺風餘芬。鬱而不暢。豈不爲子孫無窮之恨耶。九世孫鶴來。深懷慨歎。收拾遺間。將以揭諸墓道。因請誌銘之文。余不忍以非其人辭。銘曰。謝繁就靜。止于遐濱。菟裘是卜。斧堂仍新。厚積必發。久屈必伸。螽斯椒聊。餘慶川臻。 한강(韓康)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가 백휴(伯休)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명산의 약초를 캐다가 장안(長安) 시장에서 늘 똑같은 값으로 팔아 왔는데, 어느 날 어떤 여자가 그와 흥정을 하다가 "당신이 한백휴라서 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 것을 탄식하며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숨었지냈다 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뽕을……한가롭고 《시경》〈위풍(魏風) 십묘지간(十畝之間)〉에 "십 묘의 사이에 뽕을 따는 자가 한가롭고 한가로우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돌아가리라.[十畝之間兮, 桑者閑閑兮, 行與子還兮.]"라고 하였다. 대식(代食)하는……좋아하여 대식은 농사짓는 소득으로 녹식(祿食)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대아(大雅) 상유(桑柔)〉에 "가색을 좋아하여, 농민과 함께 일하면서 대식하노니, 이는 가색을 보배로 여기고, 대식하는 것을 좋아함이로다.[好是稼穡, 力民代食. 稼穡維寶, 代食維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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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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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둔암 처사 고공 묘지명 遯庵處士高公墓誌銘 우리 고을에 옛날에 은사(隱士)가 있었으니, 둔암(遯庵) 고공(高公)인 휘 경리(景离), 자 광우(光宇)가 그 사람이다. 산에서 나물 캐고 강에서 낚시하여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올렸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경서를 읽었다. 함부로 교유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택하였으며, 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곳을 택하였다. 예에 맞지 않는 책은 보지도 않고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하고 받으며 얻고 주는 일에 이르러서는 합당한 의리가 아니고 합당한 도리가 아니면 만종(萬鍾)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조금도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관찰사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국사봉(國師峰) 아래에 집을 짓고 세 갈래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엔 책이 가득하였다. 소쇄하고 고즈넉하여 그 사이에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생활하였다. 때때로 은봉(隱峰)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경서를 강론하고 산수 간에 노닐며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는 흥취를 다하였으니, 〈천태유산록(天台遊山錄)〉과 같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이다. 휘 신전(臣傳)은 호조 참의를 지내고, 휘 열(悅)은 호조 참판를 지냈으며, 휘 상덕(尙德)은 지평을 지냈는데, 모두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휘 익심(益深)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고, 조부는 휘 명진(明進)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부친은 휘 현(鉉)으로 진사를 지냈다. 모친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첨추(僉樞) 언상(彦祥)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참봉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원건(元健)이고, 차자는 인건(仁健)이다. 손자는 태제(泰濟)이고, 증손은 가한(可漢)이며, 현손(玄孫)은 명림(命霖), 명주(命舟), 명좌(命佐)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묘소는 수동(壽洞) 선영(先塋) 좌측 자좌(子坐)에 있고 쌍분(雙墳)이다. 10세손 광무(光茂)가 대인(大人)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옷 속에 옥을 품고 손에 옥 지니고 懷瑾据瑜산림에 은거하였네. 枕山樓谷한가롭게 소요하며 婆娑徜徉즐거움 알리지 않기로 길이 맹세하였네. 永矢不告커다란 운치, 은둔한 자취는 偉韻逸躅저 언덕에 있네. 在彼阿陸선조가 복을 다 누리지 않아 碩果不食후손이 대대로 복을 누리네. 世世式穀 吾鄕古有隱士曰遯庵高公。諱景离。字光宇。其人也。採山釣水以供親旨。焚膏繼晷以讀古經。不妄交遊而必擇其人。不妄出入而必擇其地。目不觀非禮之書。口不道非法之言。至於辭受取予。非其義也。非其道也。萬鍾有所不屑。一毫有所不苟。州郡擧之而不起。侯伯邀之而不赴。結廬於國師峰下。三逕花竹。四壁圖書。瀟灑幽。閴寄敖其間。時從隱峰安先生。講討墳籍。登臨水石。以償風詠之趣。如天台遊山錄諸篇可見。高氏貫長興。諱臣傳。戶曹參議。諱悅。戶曹參判。諱尙德。持平。皆其中系顯祖也。曾祖諱益深。昌陵參奉。祖諱明進。通德郞。考諱鉉。進士。妣東萊鄭氏僉樞彦祥女。公娶昌寧曺氏參奉義修女。擧二男。長元健。次仁健。孫泰濟。曾孫可漢。玄孫命霖命舟命佐。以下不錄。公墓在壽洞先兆左傍子坐雙墳。十世孫光茂。奉大人命。以其家狀。謁誌墓之文。銘曰。懷瑾据瑜。枕山樓谷。婆娑徜徉。永矢不告。偉韻逸躅。在彼阿陸。碩果不食。世世式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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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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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호은 황공 묘지명 湖隱黃公墓誌銘 무성한 꽃과 잎을 보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연원(淵源)이 깊다는 것을 안다. 사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선인의 벗 황 이랑공(黃吏郎公)은 먼 지방에서 떨쳐 일어나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쳤으니, 성대하게 밝은 시대의 어진 신하가 되고 태평성대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자손들이 모두 법도를 준수하여 찬란하게 시례(詩禮)의 기풍이 있었으니, 다가올 복록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평소 흠모하여, 선조가 쌓기만 해놓고 누리지 않은 공덕이 필시 선대에 있었는데 아직 후손이 끌어오지 못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여름에 이랑공의 맏아들 작(稓)이 증왕고(曾王考) 호은공(湖隱公)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머무는 벽산(碧山)의 집으로 찾아와 묘도에 세울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양대에 걸쳐 50년 동안 집안끼리 서로 친하게 지낸 우의로 볼 때 어찌 차마 굳게 사양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상곤(象坤), 자는 후지(厚之), 호은(湖隱)은 그의 호이다. 국초의 명재상 익성공(翼成公) 휘 희(喜)의 후손이다. 부친은 휘 자중(字中)이다. 모친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 손덕삼(孫德三)의 따님인데,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에 장흥(長興)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났다. 과거 공부를 하여 문장이 넉넉하며 시원하였다. 이윽고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 수신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였으니, 대개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른길로 돌이킨 것이다. 문을 닫고 휘장을 친 채 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하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날마다 학습해야 할 과정을 두었다.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고, 하늘이 부여한 명(命)과 사람이 부여받은 성(性)29)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예학(禮學)에 더욱 심오하였는데 《상변통고(常變通攷)》와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대학(大學)》, 〈홍범(洪範)〉 등의 말을 가지고 분류하고 강목과 조목을 만들어 자리 오른쪽에 붙여두고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다. 매일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참배하였다. 대답하고 응대함에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고, 좌우에 있거나 출입할 적에는 매우 힘써 일하였다. 하늘에 빌어 역병을 물리쳐 아버지가 끝내 탈이 없었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자 어머니도 살아났다.상례를 거행할 적에 3일 동안 미음을 먹지 않았고, 묘소에서 곡하는 것은 눈보라가 쳐도 3년 동안 폐하지 않았다. 동생과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즐거워하는 기색이 말과 낯빛에 넘쳤다.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이 선을 행한 듯이 하였고, 남의 근심을 보면 자신의 근심처럼 여겼으며, 남의 불선함을 보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다. 정성스럽게 경계하고 신칙하여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교화된 사람이 많았다.인천 이씨(仁川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정기(李廷夔)의 따님인데, 부인의 덕을 지녀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갑인년(1794, 정조18) 5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9세이다. 어은동(魚隱洞) 연봉(鳶峯)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세 아들은 세진(世鎭), 유진(有鎭), 재진(再鎭)이다. 유진의 아들 기원(基源)이 바로 이조 정랑이다.세상에는 실로 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내면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데, 호은공(湖隱公)과 같은 분이 어찌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장담하겠는가. 내 지금 이후에 황씨(黃氏) 복록의 원대함이 유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선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린다30)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운명이 어찌 어긋났으며 命何不揚수명을 어찌 누리지 못하였는가. 壽何不長그 보답을 받지 않고 不食其報자손에게 남겨 주었네. 貽于孫子자손들에게 좋은 일 내려주니 孫子錫類음덕이 그치지 않으리라. 餘蔭未已 見花葉之茂而知根荄之固。見派流之長而知淵源之深。物猶然矣。矧伊人乎。先友黃吏郎公。崛起遐遠。早年騰颺。蔚然爲昭代之良輔。照朝之名士。子孫皆遵守規矩。彬彬有詩禮之風。其福祿之來。尙未艾也。尋常欽艶。意其積累不食之德。必有在於其先而未之叩焉。歲乙未夏。吏郎公胤子稓。以其曾王考湖隱公狀。行訪余於碧山止舍。請墓道誌銘之役。嗚呼。兩世通家五十年久要之誼。豈忍牢辭哉。謹按公諱象坤。字厚之。湖隱其號也。國初名相翼成公諱喜後。考諱字中。妣密陽孫氏德三女。以英宗丙子生公于長興闢新洞。幼有至性。孝友著稱。治擧子業。詞藻贍暢。旣而幡然改圖。從事爲己之學。盖天資之美。不待提諭而自爾反正也。杜門下帷。斂膝加趺。讀書窮理。日有課程。經史子集。淹貫該洽。天人性命。剖析情密。尤深於禮學。常變疑禮。無不旁通。以九容九思及大學洪範等語。彙分綱條。粘付座右。常自鏡考焉。每日早起。省親謁廟。唯諾應對。極其承順。左右出入。極其服勞。祈天驅疫而父竟無恙。割指注血而母亦回甦。執喪而水漿不入口者三日。哭墓而風雪不廢者三年。與弟友愛甚篤。怡悅之氣。溢於色辭。見人之善如己之善。見人之憂如己之憂。見人之不善如己之病。諄諄警勅。不露聲氣。而人多化之。娶仁川李氏廷夔女。婦德甚備。閫範無闕。公以甲寅五月十六日卽世。得年三十九。葬于魚隱洞鳶峯子坐原。三子世鎭有鎭再鎭。有鎭之子基源卽吏郎也。世固有潛修獨善含章內腴之人。而如湖隱公者。安知非其流耶。吾今而後。知黃氏福祿之遠有自來矣。天道福善。豈不信哉。銘曰。命何不揚。壽何不長。不食其報。貽于孫子。孫子錫類。餘蔭未已。 하늘이……성(性) 원문은 '천인성명(天人性命)'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매 각각 성과 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和氣)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본의(本義)》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물(物)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한……내린다 원문은 '天道福善'이다.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선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화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天道福善禍淫]"라고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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