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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문씨 묘표 孺人文氏墓表 유인(孺人)의 성은 문씨(文氏),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중대에 휘 자수(自修), 호 면수재(勉修齋)란 분이 계셨다. 고조는 휘 복영(福榮)이고, 증조는 휘 종진(宗鎭)이며, 조부는 휘 영학(永學)이다. 부친은 휘 필휴(弼休)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시오(金時五)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8월 20일에 유인(孺人)을 능주(綾州)의 화곡리(花谷里) 사제에서 낳았다.유인(孺人)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단정하고 자상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소학(小學)》, 《열녀전(列女傳)》을 읽고 대략 대의를 깨달았다. 나이 18세에 사인(士人) 오장섭(吳長燮)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 매우 조심하였으니, 닭이 울 때 침소에서 문안하고 물 흐르듯 응대하였다. 시집올 때 치장(治裝)하여 보낸 옷과 기물이 매우 많았는데, 수시로 부족할 때마다 시어머니에게 바치고 자신이 입은 것이라곤 다만 시집올 때 입었고 이젠 다 해진 옷뿐이었다. 치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려하게 꾸미는 습속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며 길쌈하는 것을 오직 부지런히 하였다.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집에서 술을 빚었는데, 유인은 반드시 별도로 간수 해 두었다가 적절한 때 올렸고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서지간에 서로 아껴서 한솥밥을 먹은 지 10년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분가할 적에 재산이나 자질구레한 용품은 있든 없든 고루 나누었다. 종족과 이웃 사람을 대할 적에는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친익척의 상사와 혼사에 부족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시부모에게 여쭌 뒤에 적절하게 구휼해 주었다. 시부모가 병이 들자 남은 일을 제쳐두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너무나 슬퍼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였고, 온갖 의절(儀節)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삼가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선조를 추모하는 예절은 매우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여 나물 등 온갖 음식을 미리 마련해 두어 부족한 것이 있지 않았다.신축년(1901, 고종38) 겨울에 병들어 낫지 않자, 하루는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위로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계시는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였으니 사람을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며느리를 불러 연로하신 시어머님을 잘 봉양하라고 부탁하였다. 말을 마치고 별세하였으니, 때는 11월 24일이다. 단양면(丹陽面) 회활리(會活里) 안산(案山) 도리봉(道理峯) 정좌(丁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동(在東), 재남(在南)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용휴(李龍休), 조갑성(曺甲成), 정돈철(鄭燉哲)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어리다. 재동(在東)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용호(龍鎬), 봉호(鳳鎬), 인호(麟鎬)이다. 내가 가까운 고을에 살아 유인이 어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 재동이 글을 지어 달라고 간청한 것에 대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孺人姓文氏。本南平。中系有諱自修號勉修齋。高祖諱福榮。曾祖諱宗鎭。祖諱永學。考諱弼休。妣淸道金氏時五女。哲宗己未八月二十日。生孺人于綾之花谷里第。溫仁端詳。幼有至行。讀小學列女傳。略曉大義。年十八。歸于士人吳長燮。事舅姑甚謹。雞鳴問寢。應對如流。于歸時。裳送衣物甚多。而隨時隨乏。獻之於姑。自身所着。只是慶敞而巳。不屑膏沐之飾。不喜華靡之習。夙興夜寐紡績惟勤。其舅愛酒。家有釀。孺人必別蓄而藏之。待時以進。未嘗乏絶。焍姒相愛。共爨十年。庭無間言。及其析箸。財産什物。有無共之。待宗族鄰里。各得其心。有喪戚昏姻。貧乏災患。必稟於舅姑。隨時周恤。舅姑有疾。捨置餘事。專力調養。其遭故也。致哀過禮。凡百儀節。必誠必愼。俾無遺憾。至於奉先追遠之節。豊潔兩至。蔬菜几羞。宿戒預蓄。未有見乏。辛丑冬。屬疾彌留一日曰。我死必矣。上有老姑。未克終養。人理缺矣。因呼子婦。託以善養老姑。言訖而終。時十一月二十四日也。葬丹陽面會活里案山道理峯丁坐原。擧二男四女。男在東在南。女適光山李龍休曺甲成鄭燉哲次幼。在東生三男。曰龍鎬鳳鎬麟鎬。余在鄕隣之近。聞孺人之賢久矣。今於在東一言之懇。有不忍牢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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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둔재 안공 묘표 孝子遯齋安公墓表 공의 성은 안씨(安氏), 휘는 달득(達得), 자는 내성(乃成), 호는 둔재(遯齋)로, 순흥(順興)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 초기에 형조 판서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으로 이사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증조는 휘 수린(壽麟), 조부는 휘 영(泳)이다. 부친은 휘가 종복(宗福), 호가 죽림재(竹林齋)이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채경(金彩敬)의 따님인데, 정종(正宗) 정사년(1797, 정조21)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효성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왕왕 지극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일찍이 어버이가 병을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고 이어서 집 정원에서 신약(神藥)을 얻어 이를 달여 올리니 과연 차도가 있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매우 심하였기에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낸 다음 묘소의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배곡(拜哭)하되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나무를 베고 돌을 파내어 그가 왕래하는 길을 닦아 주었다.공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포부가 원대하고 문사는 성대한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다.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 가운데 그와 교유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만년에 봉악산(鳳嶽山) 아래에 초당을 짓고 한가롭게 노닐며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기둥에 바람이 불고 창엔 달빛 비치며, 수죽(水竹)이 뜰에 가득하여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며 유연(悠然)히 속진(俗塵)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갑술년(1874, 고종11) 1월 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죽곡면(竹谷面) 팔룡동(八龍洞) 봉악산(鳳嶽山) 동쪽 산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도경(朴道敬)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평일(平一), 차자는 평길(平吉)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효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니, 큰 근본이 확립되면 만인에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다. 공은 효순(孝順)한 덕에 보은을 받아 장수하는 복을 받았는데, 안으로는 자제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종친들이 그 은혜에 감동하였으며, 밖으로는 벗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고 향리 사람들이 그 기풍을 칭송하였으니, 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후손이 그 뜻을 계승하기를 생각하고 선조를 더럽히지 않는 터전으로 삼는 것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원하건대 안씨(安氏)는 힘쓸지어다.증손 동식(東稙)이 나에게 묘도(墓道)에 기록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삼가 전하는 유적(遺蹟)에 근거하여 글을 첨삭하여 다듬었을 따름이다. 公姓安氏。諱達得。字乃成。號遯齋。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中系顯祖也。至諱瑗。當我朝初。以刑曹判書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移寓于南平縣。子孫因居焉。曾祖諱壽麟。祖諱泳。考諱宗福號竹林齋。贈左承旨。妣光山金氏彩敬女。以正宗丁巳生公。公性孝根天。自幼往往以至行聞於人。嘗有親癠。久而彌留一夕感異夢因得神藥於家園供而進之果見差愈。執喪哀毁過甚。見者釀涕。及葬。廬于墓側。晨昏拜哭。三年如一日。里人感之。爲之伐木鑿石。以修其來往之路。公涉獵百家。抱負贍富。文詞聲華。擅望於時。一時知名之士。無不與之結交。晩營邁軸於鳳獄山下。爲養閒終老計。風楹月戶。水竹滿庭。婆娑嘯詠。悠然有出塵之標。壽陞同中樞。甲戌正月二日卒。葬竹谷面八龍洞鳳嶽山東麓庚坐原。配密陽朴氏道敬女。生二男。長平一。次平吉。孫以下不盡錄。嗚呼。孝者百行之本。萬善之長。大本旣立。萬目可推。公服孝順之德。膺難老之福。內而子弟遵其敎。宗族感其恩。外而朋友服其義。鄕里頌其風。此豈無所自而然哉。然則今日後嗣之所以思述其志而爲無忝之地者。亦豈有以外於此者乎。願安氏勉之哉。曾孫東稙。謁余文以表墓道。余謹据所傳遺蹟爲修潤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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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구공 묘표 學生具公墓表 공의 휘는 택현(宅鉉), 자는 규여(揆汝)이다.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에 힘쓰며,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성대하게 우리 고장 선진(先進)의 반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은거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를 동소남(董召南)68)과 같이 하고, 규문을 정돈하기를 목예공(繆豫公)69)과 같이 하니, 향리에서 믿고 복종하기를 왕언방(王彦方)70)처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 위의와 동작은 모두 하늘에서 본받은 것이다. 하나라도 지극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부귀와 빈천에 구애되어 그 지조를 바꾸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대장부(大丈夫)가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많으면 뜻을 손상하고 허물을 보태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륜(經綸)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풍족함을 구하지 않아서 남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이를 가져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아, 한마디 말과 하나의 행동이 모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수 있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인데, 평장사 민첨(民瞻)이 중시조이다. 대대로 훌륭한 덕이 있었다. 조부는 삼락(三樂)이고, 부친은 훈(壎)이다. 모친은 아무 관향의 아무 성씨인데, 생몰 연대는 알지 못한다. 공은 능주(綾州)의 교촌(校村)에서 태어났고, 모년 모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옥치(加玉峙) 안산(案山)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로, 장만주(張萬柱)의 따님이고, 계배(系配)는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김창석(金昌錫)의 따님인데, 모두 부덕(婦德)이 있었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원(潤源), 익원(翼源), 인원(仁源), 복원(福源)이고, 딸은 최봉문(崔鳳文)에게 출가하였다.묘소에 오랫동안 묘표가 없었기에 현손 혁모(赫謨)가 지사(志士)라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힘썼지만 성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에 가문에서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혁모의 형 익모(翼謨)가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公諱宅鉉。字揆汝。窮經力學。飭躬謹行。蔚有聲稱于吾鄕先進之列。隱居養親似菫召南。閏閫齊整似繆豫公。鄕閭信服似王彦方。嘗曰。人爲萬物之靈。而其威儀動作。莫非天則也。一有不至。便不成人。又曰。人不以富貴貧賤而易其操。然後方可爲大丈夫。又曰。財者人之所須。而多則未有不損志而盆過。是以經紀調度。不求贏餘。有餘輒推以周諸貧乏。嗚呼。一言一行。皆可以爲法。曷不偉歟。具氏貫綾城。平章事民瞻。其中祖也。世有令德。祖三樂。考壎。妣某貫某氏。年號干支公生于綾之校村。某年月日終。葬于加玉峙案山亥坐原。配興德張氏萬柱女。系配靈光金氏昌錫女。皆有婦德。四男一女。男潤源翼源仁源福源。女崔鳳文。墓久無表。玄孫赫謨志士也。血力拮据。未就而歿。後二年。一門踵而成之。赫謨兄翼謨。以其家狀。俾余爲文云。 동소남(董召南) 당나라 때 안풍(安豐) 사람으로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내용을 읊었다.《小學 善行》 목예공(繆豫公) 예공은 한(漢)나라 목융(繆肜)의 자(字)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명이 재산과 가업을 함께하였는데, 각각 아내를 맞이한 뒤로 아내들이 마침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목융이 깊이 분노하여 문을 닫고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목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서 성인(聖人)의 법을 배움은 장차 풍속을 정돈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그 집안도 바로잡지 못하느냐."라고 하자, 여러 아우와 그 아내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마침내 고마음을 바꾸어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後漢書 獨行列傳》 왕언방(王彦方) 언방은 후한(後漢) 때 학자인 왕렬(王烈)의 자(字)이다. 의로운 처신으로 부근에 이름이 나서 고을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왕열에게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王烈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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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8 卷之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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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七月。金士亮【瀏】訪余下沙參奉家。病席因贈五言近體。 丙丁那可說。此地更逢君。床對鰲山飯。窓看鱣席文。吳洲弦素月。楚塞帚頑雲。含蓼辛勤誼。臨行莫惜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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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岐山李友益瑞韻 久客人情熟。屛山落盡梅。不勞顔氏帖。頻借士行盃。歲去忘恩怨。壽來任闔開。淸詩歸袖重。欲別更低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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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沙座上贈朝天館安行五 瀛洲鰲之柱。支撑銀潢津。盤根大洋中。五岳少比倫。瑰奇淸淑氣。往往鍾於人。忽逢安秀才。如得滄海珍。詩書藏其腹。禮義治其身。累及下沙門。心醉覿德辰。從古豪傑士。負笈尋師眞。言遊東吳客。澡浴沂泗濱。陳良南楚産。振刷喬木春。吾道無南北。勖哉前修遵。我竊仁者號。贈言愧傾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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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여【규홍】에게 답함 答金允汝【奎洪】 친구의 소식이 새로운 봄과 함께 이르니 감사함과 위로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체도(體度)의 절선(節宣)75)이 더욱 태평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저의 기대하는 마음에 더욱 흡족합니다. 저는 흰 머리에다 정신도 몽롱한데 또 나이를 한 살 먹게 되었으니 그저 간절히 옛 사람처럼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76)할 뿐입니다. 영랑(令郞)77)의 지난 겨울 공부는 기대와 바람을 만에 하나라도 만족시키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으신지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다만 그 박실(朴實)하고 영오(穎悟)한 자질은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망이 일찍이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빨리 변화하기를 바라지 말고 조금씩 부지런히 이끌어준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시상(時象)78)에 대한 탄식은 같은 배를 탔는데 바람은 만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명을 들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편안히 지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居易俟命】'는 말은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바라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보내니 그저 간절히 슬퍼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故人音信。與新春俱至。感豁慰沃。曷以勝喩。矧審體度節宣。復泰增重。尤叶企仰。義林白首懵懵。又添一齒。只切古人窮廬之歎而已。令郞前冬功夫。可以稱塞其期望萬一之意否。切愧無以資助。而遽且落落也。但其朴實之質。穎悟之姿。未嘗無前頭長進之望。勿求速化。勤勤提勑如何。示中時象之歎。可謂同舟遇風。奈何奈何。惟盡其在我者。而聽天所命而已。古人所謂居易俟命。非此之謂耶。相望送情。只切悲悒。 절선(節宣) 계절에 따라 몸을 잘 조섭하는 것을 말한다.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 원문은 '포류궁려지탄(蒲柳窮廬之歎)'으로, 유약한 자질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학업에 힘을 쏟지 못하고 또 세상에 포부도 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지레 늙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시상(時象) 시대 또는 시국의 상황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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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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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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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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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필【상량】에게 답함 答魏殷弼【祥良】 작별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맑은 목소리와 우아한 모습은 일찍이 단 하루도 마음과 눈앞에서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남애(南厓)와 북각(北角)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앉지 않는다고 했겠습니까. 하물며 어버이를 모시고 살피는【侍省】 상황이 순조롭고 일상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실로 듣고 싶던 소식과 부합하였습니다. 이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괴로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고궁(固窮)72)으로도 면하지 못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힘과 여유가 허락하는 대로 예전의 학업을 익히고 정리한다면 오히려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 것보다 편함이 백 배 이상일 것입니다. 하물며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73)은 장횡거(張橫渠)74) 선생이 말한 것이 아닙니까? 힘쓰고 힘쓰십시오. 저는 쇠한 몰골과 병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이는 학문을 닦지 않은 소치입니다. 뒤따라 보충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세상 길의 위험함을 어찌 이야기하겠습니까. 오직 독서(讀書)하고 궁리(窮理)하여 더욱 굳은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할 뿐입니다. 주자(朱子)의 시에, '삼군(三軍)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아홉 번 죽어도 장사(壯士)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네.【三軍莫奪匹夫志, 九殞難嶊壯士腸.】'라고 하였습니다. 읽어보면 사람을 개연(慨然)하게 만듭니다. 奉別三載。淸韻雅儀。未嘗一日不往來於心目間。誰謂南厓北角。非同堂合席耶。矧審侍省怡愉。起居珍勝。實副願聞。承知有絆己之苦。此固固窮所不免。然隨力隨暇。溫理舊業。猶有便於負薪汲水。不啻百倍。況四益之說。其非張先生所云乎。勉之勉之。義林衰相病情。日甚一日。此是不學之致。追補無計。奈何奈何。世路之危險。夫何言哉。惟宜讀書窮理。益加堅心之功而已。朱子詩三軍莫奪匹夫志。九殞難嶊壯士腸。讀之令人慨然。 고궁(固窮) 도의(道義)를 고수하면서 빈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유익함을 말한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으니, 자신을 얽어매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남에게 자주 가르쳐 주다 보면 자신도 글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어린이를 대할 적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의젓하게 갖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기로 인해서 남의 재주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걱정하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니 네 번째의 유익함이다.【敎小童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必正衣冠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人之才爲憂則不敢惰, 四益也.】"라고 하였다.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이다. 정씨 형제의 삼촌뻘이며 그들과의 많은 대화와 논쟁을 통해 북송 도학의 탄생을 예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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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2수 蟬【二首】 본 모습 벗어버리고 두 날개가 자라니 脫去本形雙翅長속인이 신선 방술을 배우는 것과 같네 有如俗子學仙方잘 우는 게 천직이라 힘들일 일이 없고 善鳴天職無勞力멀리 나는 맑은 의표는 절로 서늘케 하네 遐擧淸標自致凉세상 얘기 대하기 싫어 입을 굳게 다물고 厭對世談深閉口더러운 물건 삼킬까봐 창자를 모두 비웠네 恐呑穢物盡空腸너는 눈을 번쩍 뜨고 지기를 만나리니 爾應醒目逢知己구양수의 부492)가 아직도 취향493)에 남아있네 歐賦猶然在醉鄕위는 맑게 우는 매미[淸蟬]를 읊은 것이다.무슨 한이 길어 먹지도 않고 슬피 우나 不食悲鳴底恨長오늘밤 머물며 자는 곳은 또 어디일까 今宵止宿又何方비 온 뒤의 정원에는 석양이 저물고 雨過園落斜陽晩가을이 온 누대에는 푸른 숲 서늘하네 秋入樓臺碧樹凉지사는 듣고 세상 상심한 눈물 더하고 志士聞添傷世淚길손은 듣고 집 생각하는 애가 끊어지네 旅人聽斷憶家腸평생에 본디 요란함 없던 사물이었으니494) 平生自是無啁物호향과 같은 사마귀495)가 가증스럽네 可惡螳螂卽互鄕위는 슬피 우는 매미[哀蟬]를 읊은 것이다. 脫去本形雙翅長, 有如俗子學仙方.善鳴天職無勞力, 遐擧淸標自致凉.厭對世談深閉口, 恐呑穢物盡空腸.爾應醒目逢知己, 歐賦猶然在醉鄕.【右淸蟬】不食悲鳴底恨長? 今宵止宿又何方?雨過園落斜陽晩, 秋入樓臺碧樹凉.志士聞添傷世淚, 旅人聽斷憶家腸.平生自是無啁物, 可惡螳螂卽互鄕.【右哀蟬】 구양수(歐陽脩)의 부 〈명선부(鳴蟬賦)〉를 말한다. 이 시는 구양수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1056년에 예천궁(醴泉宮)에서 날씨가 개기를 기원할 때 지은 것이다. 취향(醉鄕) 술에 취했을 때 온갖 걱정을 잊는 별천지의 경계를 말한다. 당(唐)나라 왕적(王績)의 〈취향기(醉鄕記)〉에 보인다. 평생에……사물이었으니 대체로 매미가 7년 동안 애벌레로 땅속에서 살다가 성충 매미가 되어서는 겨우 두 주일 가량 살고 죽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호향(互鄕)과 같은 사마귀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뒤에 올 재화(災禍)를 알지 못하는 대상을 비유한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느라 뒤에서 참새가 머리를 들고 자신을 쪼려는 줄을 모르고, 참새는 사마귀를 쪼아 먹을 욕심에 나무 아래서 꼬마 아이가 새총을 자신에게 겨누는 줄을 모른다." 하였다. '호향'은 풍속이 좋지 않아 함께 선(善)을 말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고을 이름이다. 《論語 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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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의 〈증과암〉 시에 보운(步韻)497)하다 2수 步敬山《贈果菴》韻【二首】 예로부터 한 뜻이 삼군보다 나았으니498) 從來一志勝三軍이해에 대해 언제 무게를 따졌던가 利害何曾較兩斤모두 가르침 받들고 스승 높일 책임 있으니 奉訓尊師均有責원컨대 힘을 합쳐 음산한 구름을 쓸어내세 願言同力掃陰雲인은 곡식 씨앗 같고499) 씨앗엔 뿌리 있으니 仁爲穀種種有根가을 열매가 끝내 익는 것도 봄에 시작되네 秋實終成厥始春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그대는 어진 사람이니500) 好惡知君仁者是향리에서는 드물게 그 후손을 번창케 하리라 必昌其後罕鄕隣 從來一志勝三軍, 利害何曾較兩斤?奉訓尊師均有責, 願言同力掃陰雲.仁爲穀種種有根, 秋實終成厥始春.好惡知君仁者是, 必昌其後罕鄕隣. 보운(步韻) 두 수 이상으로 된 다른 사람의 연작시 운을 따라서 차례대로 차운(次韻)하여 시를 짓는 것을 이른다. 화답시 중에 뜻은 문답하는 것 같으나 다른 운부(韻部)를 사용하는 것을 '화시(和詩)'라고 이르며, 운부는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을 '화운(和韻)', 글자는 같으나 순서가 다른 것을 '용운(用韻)', 순서까지 모두 같은 것을 '보운(步韻)'이라고 한다. 한……나았으니 《논어》 〈자한(子罕)〉에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將帥)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인(仁)은……같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인은 인심이다.〔仁, 人心也.〕"라고 말한 것에 대해, 주희가 주석에서 "정자가 말한 '마음은 곡식의 씨와 같고 인은 생생의 이치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程子所謂心如穀種, 仁則其生之性是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능히……사람이니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제대로 좋아하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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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유고》129) 서문 雲巖遺稿序 《주역》에 이르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한지라 하루를 마치지 않고 떠나가니, 정하고 길하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자(夫子 공자)가 이 말을 찬미하여 말하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하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바로 결단함을 알 수 있다. 군자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 유순함을 알고 강함을 아니,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본다."131)라고 하였다. 송자(宋子 송시열)가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소중옹(疏仲翁)132)을 안타깝게 여겨 대서특필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운암옹(雲巖翁)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대직(臺職)133)을 역임하고, 명성과 덕망이 드높아 융중한 자리에 의망(擬望)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빛나게 하고 만종(萬鍾)의 봉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들이 앞날에 차례대로 있을 일로 기약되었다. 그러나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호연(浩然)하게 〈귀거래사(歸去來辭)〉134)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구름이 걸쳐 있는 적막한 숲속에서 화락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며 노닐었다. 아,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며, 얻을 줄만 알고 잃을 줄 몰라 승두(升斗)만한 조그마한 이익에 턱을 늘어뜨린 채 부유한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며 주는 음식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이러한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평소에 지었던 문고(文稿)는 산실되어 수습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주워 모은 것들 사이에서 얻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의 붓을 잡는 사람들이 송자(宋子)가 소중옹(疏仲翁)을 가엾게 여긴 것처럼 반드시 그를 대서특필하여 백세토록 썩지 않게 할 것이니, 보잘 것 없는 문고가 있든 없든 또는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자손의 마음에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삼가 모아서 약간을 엮었을 따름이다. 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夫子贊之曰。介如石。焉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宋子哀疏仲翁所以見與於春秋綱目之書。而大書特書者。其不以是耶。雲巖翁少年釋褐。歷踐臺職。聲望藹蔚。期擬隆重。專城之榮。萬鍾之養。此其前頭次第事耳。然而見幾勇決。浩然賦歸。囂囂徜徉於雲林寂寞之中。嗚呼。知進而不知退。知得而不知喪。朶頤於升斗之利。垂涎於輕肥之憐者。曷足以知此等義諦耶。平日文稿散逸不收。而得於晩後掇拾之間者。亦無幾焉。然世之秉春秋綱目之筆者。必將大書特書。使之不朽於百世。如宋子哀疏仲翁。何待於區區文稿之有無與多寡哉。但子孫之心。不欲其泯然。謹輯之爲若干編云耳。 운암유고 대한제국 때 장흥(長興) 출신의 문신 정두흠(鄭斗欽, 1832~1901)의 문집인 《雲巖集》을 말하는 것으로, 1918년에 아들 제하(濟夏)가 편집ㆍ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4권2책이며, 목활자본이다. 운암은 정두흠의 호이고, 자는 응칠(應七)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처음 최상관(崔相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였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을 올렸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개가……길하다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보인다. 절개가……우러러본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보인다. 소중옹(疏仲翁) 벼슬길에서 한창 득의(得意)했을 때 미련 없이 물러나 초야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던 옛 인물이다. 대직(臺職) 대간(臺諫)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말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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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경에게 써 준 서문 贈曺彛卿序 조군 이경(曺君彛卿)은 선정신(先正臣)의 후예이며 법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있고, 현철한 사우(師友)가 있어서 시례(詩禮)135)와 학문의 가르침에 종사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고,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136)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다.아, 서계(書契)137)가 만들어진 이후로 책 읽는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으며, 십실(十室)138)이 형성된 이후로 충신(忠信)의 자질을 지닌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 도를 듣고 천하 후세에 법을 드리운 사람은 얼마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라건대 이경은 이것을 돌이켜 구하여 통렬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사람으로 말하면 성인을 표준으로 삼고, 학문으로 말하면 도를 표준으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극하지 못하거든 우리의 일에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연히 이치를 가까이 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훗날 호남 고을에서 도를 창도한 기풍이 동남쪽 사이에서 크게 떨쳐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이경의 한 무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曺君彛卿。以先正裔孫。法家子弟。有姿質之美。有師友之賢。而從事於詩禮學問之敎。眞所謂可與共學。可與適道者也。嗚呼。書契以後。讀書者何限。十室以往。忠信之質何限。然而聞其道而垂法於天下後世者。無幾焉。其故何居。願彛卿於此。反求而痛省之。言人則以聖爲準。言學則以道爲準。以爲一毫未至。便是吾事有闕。則自然切實近理。自住不得矣。他日湖鄕。若聞有倡道之風。大振於東南之間。則吾以爲出於彛卿一隊人也。 시례(詩禮) 가정에서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뜰에 혼자 서 있을 때에 아들 이(鯉)가 지나가자 그에게 시(詩)와 예(禮)를 배웠는가 물어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일러 주며 공부하라고 훈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더불어……있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더불어 학문을 함께 할 수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십실(十室) 조그마한 고을을 비유하는 말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말하기를 "10여 가구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나[丘]처럼 충신한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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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 존문단자(存問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치/행정-보고-보고서 己巳八月 日 行縣監李 金炳憲 己巳八月 日 1869 行縣監 李 金炳憲 전라북도 부안군 6.8*6.8(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9년(고종 6) 8월에 행부안현감이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에 사는 김병헌에게 발급한 존문단자. 1869년(고종 6) 8월에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중리(堂北中里)에 사는 김병헌(金炳憲)에게 발급한 존문단자(存問單子)이다. 존문이란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자는 행부안현감이 김병헌의 집을 방문할 때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발급년대가 기사년으로만 되어 있는데, 김병헌이 동치(同治) 9년, 즉 1870년(고종 7)에 논을 팔면서 작성한 문서를 통해서 볼 때, 1869년으로 추정된다.(1870년 김병헌(金炳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참조) 따라서 이 단자에 부안현감으로 적혀 있는 이(李) 아무개는 1869년 8월 당시의 부안현감 이재영(李載英)임이 분명하다. 수령안(守令案)에 따르면, 그는 1869년 7월에 부안에 부임하여 이듬해 3월 임지에서 갑자기 죽었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이재영(李載英)'이 1869년에 41세의 나이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것으로 나오는데, 뒤에 교리(校理)와 수찬(修撰)을 지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위의 부안현감과는 동명이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헌은 22년 전인 1847년(헌종 13)에도 부안현감의 존문단자를 발급받았다. 그가 부안의 유력한 사족의 한 사람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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稽首南天靡時不耿耿荐承 惠函感佩沒量也更謹詢餞春隔日靜體萬旺閤覃勻謐仰溸且祝昨歲連疊慘景聞不勝驚歎而苦海人生孰無風波豈有如是之重荷然比是日時惡緣所致去者非吾有也幸須十分寬抑無至傷心如何一兄自昨秋以來以慈癠連爲慮悶度了尙未夬复私悶私悶豚兒之課工未勉浪擲歲月今始入學於學校成功遙遠可歎可歎耳舍叔間果搬移否凡百之漸不如前誠庸悶然也滿腔情緖何能盡敍於一隔紙也故此姑閣謝禮三月念八日一兄金敎彬第大宗敎近者大爲發展敎堂移定于桂洞百一番地將有大希望不勝欣幸也賢棣亦送天穀代金實行義務至希至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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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頗阻候霜威逼人際此慕仰恒切勤摯伏問靜養體度連護萬重子婦亦穩勝否種種仰溸且念不任卑悃下生親節當寒添損已極煎熬而迷豚瘇証逐直重痛譴例無期眞元隨以澌脫厭食忒甚而藥餌食補俱失其宜只自愁惱而已子婦于禮欲以仲秋卽行者些少憂故連綿不絶實無暇及矣今則憂擾得帶數霽而九十兩朔適無可堪用之日子不得已以至月十三日擇定果無相碍之端耶顧此家身本自淸素至於行禮凡百一無所備只以相面一字爲目前之幸所愧之歎於斯切焉預用嫌歎且其初行値寒爲慮不淺餘爲此付時正朔都留不備上候禮壬寅陽月十一日下生趙膺鎬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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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場巖靜坐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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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式隔年阻候信息莫憑無昻絶域者常悵慕易有其極卽伏審春暮侍中體候萬安何等伏慰之至外孫家門不幸歲前遭季父喪事悲痛情私已無可言而初月已過山地未卜不得已以權厝過行於今十三爲定耳慈候每多愆節慮悶中身亦以無何之求恒時不健緣此工課未免抛却悶憐奈何乳兒之夭逝聞極慘切而拘於人馬之無暇未能一面而永訣所愧爲人父尤切慘愕也鄭雅來留多日伏想嘉悅無比矣仰慰萬萬而抽身未得奉唔無期悵如之何木花歲前貿置三十斤而無信便今始送上而買都今則可謂非時不得如意價本玆以還完耳餘姑留不備伏惟下察上謝書戊子三月初三日外孫朞服人趙膺植再拜(皮封)外翁主前上謝書省式拜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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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천태산에 오르다 2수 偶上天台山【二首】 유유한 내 그리움은 강물처럼 길어 悠悠我思漢河長아득한 하늘 한쪽을 멀리 바라보네 極目杳然天一方무슨 생각으로 숲에서 앉고 눕는가 底意林間聊坐臥무단히 바위 위에서 혼자 방황하네 無端石上獨彷徨다정한 이웃 떡으로 배고픔 달래고 多情隣餠療飢腹사리 아는 아이의 술로 갈증을 푸네 解事兒樽沾渴腸가슴속 번뇌를 씻어내는 게 상쾌하나 滌過胸煩雖一快읊으며 돌아온 증광164)을 배우려 할까 詠歸詎擬學曾狂오래 세상 구경하며 길이 해를 보내고 싶어 久觀我欲度年長세상 밖으로 벽곡165)의 방법을 찾아 나섰네 物外行尋辟穀方유럽 아시아의 풍조에 질병의 고통이 생겨 歐亞風潮生疾痛영주산 천태산의 산천에서 혼자 방황하네 瀛台泉石獨彷徨어찌 성현이 남긴 가르침을 생각지 않는가 盍思聖哲曾垂訓한스럽게 선비의 무리도 마음을 바꾸었네 可恨儒流亦變腸아무리 따져 봐도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니 算去算來皆謾想무하향166)에서 술에 취해 광인이 되리라 無何鄕裏醉成狂 悠悠我思漢河長, 極目杳然天一方.底意林間聊坐臥? 無端石上獨彷徨.多情隣餠療飢腹, 解事兒樽沾渴腸.滌過胸煩雖一快, 詠歸詎擬學曾狂?久觀我欲度年長, 物外行尋辟穀方.歐亞風潮生疾痛, 瀛台泉石獨彷徨.盍思聖哲曾垂訓? 可恨儒流亦變腸.算去算來皆謾想, 無何鄕裏醉成狂. 증광(曾狂) 광(狂)은 뜻만 크고 행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데, 광이란 호칭을 받았으므로 증광이라 한 것이다. 《論語 先進》 벽곡(辟穀) 화식(火食)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을 말한다. 무하향(無何鄕)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흔히 이상향(理想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 논변하면서 말하기를 "현재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판에다가 심어 놓고서,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는가?〔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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