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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二年丁巳二月初十日李恒瑞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爲如可適有所用䖏故西十作是在悚字畓五斗落只所耕九負八束㐣価錢文二十五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二丈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或有同生子孫中爭詰之獘是去㝳以持此文告官卞正事畓主自筆趙介賛[着名]訂人 金壽文[着名]訂保 朴今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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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9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乙亥 乙亥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선명(乾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무인생으로, 안장일은 을해년 9월 15일로 되어 있다. 상주는 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문서의 맨 끝에 정유생과 정묘생은 하관(下棺) 시 잠시 피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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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탄 無薯歎 대지의 백성 식량은 날로 어려우나 大地民食日以艱나는 구학125)의 근심을 먼저 끊었네 吾人先切溝壑憂벼 조 기장 피는 원래 분수 아니고 稻梁黍稷元非分밀 보리 팥 콩도 도모하기 어렵네 來牟豆菽猶難謀고구마만이 내 식량으로 적당하니 惟有甘薯宜吾食곡물에 비해서 거두기가 용이하네 比諸穀物容易收봄에 싹 터 여름에 심고 가을에 캐니 春苗夏種秋而採팔뚝만큼 큰 뿌리가 내 집에 가득하네 根大如腕盈我屋생으로 먹든 익혀 먹든 불가함이 없고 生食熟食無不可술 밥 떡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네 酒飯與餠惟所欲줄기는 나물로 잎으로는 국을 만들고 莖爲菜兮葉爲羹넝쿨도 땔감으로 만들려면 말려야 하네 蔓亦爲薪須乾曝청성126)이 이 물건 있는 줄 일찍 알았다면 淸聖早知有此物수양산 기슭에서 고사리 캘 필요 없었으리 不必采薇首陽麓나에게 황무지를 새로 개간한 밭이 있으니 我有荒地墾新田이걸 심으면 풍족한 생활 되기에 넉넉하리 種此優作餘生活그 가운데에 말만큼 커다란 초가집을 짓고 中置草廬如斗大담서실이란 세 글자로 편액을 달았네 扁以三字啖薯室여기서 담소하고 여기에서 먹고 휴식하며 爰是言笑爰食息게로기 먹었던 채옹127)과 짝이 되고 싶었네 蔡翁啖薺擬作匹어찌하여 금년엔 날씨가 너무나 가물었나 夫何今年天亢旱봄에 난 싹이 일찌감치 쑥쑥 자라지 못했네 春苗早已未長茁심은 것이 많지 않은데다가 말라 죽었으니 種不多兮更枯死백지128)에는 부질없이 잡초만 무성해졌네 白地空自草桀桀아, 하늘이 우리들에게 嗚呼皇天於我輩이런 곤궁함을 내리니 얼마나 큰 액운인가 降此窮困一何厄걱정 번뇌가 옥처럼 이룬다129)고 말하지 말라 莫云憂戚庸玉成건어물 가게에서 찾을 신세130)를 어찌하겠나 其如薧魚肆中索요절과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을131) 뿐 아니라 除非夭壽無貳心하늘의 처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네 俟天處分靜屛息다행히도 그날그날 견디며 살아가다 보면 如幸得過且過也내년에는 그래도 다시 고구마를 먹게 되리 明年猶復此薯食 大地民食日以艱, 吾人先切溝壑憂.稻梁黍稷元非分, 來牟豆菽猶難謀.惟有甘薯宜吾食, 比諸穀物容易收.春苗夏種秋而採, 根大如腕盈我屋.生食熟食無不可, 酒飯與餠惟所欲.莖爲菜兮葉爲羹, 蔓亦爲薪須乾曝.淸聖早知有此物, 不必采薇首陽麓.我有荒地墾新田, 種此優作餘生活.中置草廬如斗大, 扁以三字啖薯室.爰是言笑爰食息, 蔡翁啖薺擬作匹.夫何今年天亢旱? 春苗早已未長茁.種不多兮更枯死, 白地空自草桀桀.嗚呼皇天於我輩, 降此窮困一何厄?莫云憂戚庸玉成, 其如薧魚肆中索.除非夭壽無貳心, 俟天處分靜屛息.如幸得過且過也, 明年猶復此薯食. 구학(溝壑) 시궁창과 산골짜기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청성(淸聖) 깨끗한 성인(聖人)이라는 뜻으로,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伊尹)ㆍ백이(伯夷)ㆍ유하혜(柳下惠)ㆍ공자(孔子)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이윤은 성인 중에 천하를 구제하기로 자임한 자이고, 백이는 성인 중에 깨끗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중에 때에 알맞게 행한 자이다.〔伊尹聖之任者也, 伯夷聖之淸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하였다. 게로기 먹었던 채옹(蔡翁) 송(宋)나라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이 서산(西山)에서 공부할 적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게로기를 캐어 먹었던 일을 말한다. '제(薺)'는 제니(薺苨) 혹은 게로기라고도 하는데, 사삼(沙蔘)과 비슷한 다년생 식물이다. 《송사(宋史)》 〈채원정열전(蔡元定列傳)〉에 "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배고픔을 참고 게로기를 캐어 먹으며 글을 읽다가, 주희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였다. 주희가 그의 학문 실력을 시험해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이 사람은 나의 오래된 벗이라고 할 것이니, 제자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登西山絶頂, 忍饑啖薺讀書, 聞朱熹名, 往師之. 熹扣其學, 大驚曰: 此吾老友, 不當在弟子列.〕"라는 기록이 나온다. 백지(白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거두어들일 것이 없게 된 땅을 말한다. 걱정……이룬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사람이 옥처럼 훌륭하게 완성된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 하였다. 건어물……신세 현재의 곤경을 해결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붕어 한 마리가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으면서 길 가는 장주(莊周)에게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자신을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므로, 장주가 장차 오월(吳越) 지방으로 가서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 대주겠다고 하자, 그 붕어가 화를 내며 "나는 지금 당장 한 말이나 한 되쯤의 물만 얻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하니 일찌감치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는 것이 낫겠다.〔吾得斗升之水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요절과……않을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이는 말로, "마음을 보존하여 성(性)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고,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의혹을 품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천명을 세우는 일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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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의사155)를 기리며 3수 설진영(薛鎭永)이 순창에서 거주하였는데 성씨를 바꾸는 변고가 생기자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贊薛義士【鎭永2)居淳昌, 改姓之變, 投井而死.○三首】 공과 같은 높은 절개는 세상에 없었으니 高節如公世所無의리 취해 저버리지 않은 선유를 배웠네 取熊不負學先儒성명을 보전하여 돌아가 조상을 모시니 保全名姓歸陪祖그 하늘만을 보았지 몸을 보지 않았네 但見其天不見軀큰 것을 잃고 작은 살갗 기를 줄만 아니156) 失大惟知養小膚분분한 속인들은 눈썹 수염에도 부끄러우리 紛紛俗輩愧眉須청컨대 우뚝 선 동전자157)를 보라 請看卓立銅田子너무 차이가 나 품성이 다른가 의심스럽네 懸絶還疑稟性殊공을 조문하여 공연히 탄식할 필요 없으니 吊公不用謾歎吁우리 유림에 장부 있음을 스스로 축하하네 自賀吾林有丈夫멀리서 서풍 아래 세 번 술을 따라 올리니 遙酹西風三酌酒긴 무지개가 저녁에 해산 모퉁이에 일어나네 長虹暮作海山隅 高節如公世所無, 取熊不負學先儒.保全名姓歸陪祖, 但見其天不見軀.失大惟知養小膚, 紛紛俗輩愧眉須.請看卓立銅田子, 懸絶還疑稟性殊.吊公不用謾歎吁, 自賀吾林有丈夫.遙酹西風三酌酒, 長虹暮作海山隅. 설 의사(薛義士)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을 말한다.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1895년(고종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큰……아니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먹고 마시기만 하는 사람은 남이 천하게 여기니, 작은 것을 길러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飲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라고 한 대목을 말한다. 동전자(銅田子) 설진영(薛鎭永)을 가리킨다. 순창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등에 가계가 이어져 동전리의 지명을 본 따 동전 설씨(銅田薛氏)로도 불린다. 永 底本에는 "泳".《淳昌薛氏族譜》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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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신연 과 이별하며 5수 別黃致實【信淵○五首】 천리 길을 왕래하는데 往來千里路아쉽게 설날160)에 이별하네 怊悵三朝別어찌하여 너무나 바쁜가 胡爾太悤悤슬프게도 궁귀161)가 빼앗네 傷哉窮鬼奪술도 없이 즐겁게 노닐다가 無酒以遨遊죽을 끓여 마주 앉아 마시네 煮饘相對歠누가 예절이 엉성하다 말하랴 誰言禮節疎친의가 친밀하기 때문이었네 爲是親誼密선군 생각하라는 말로 그대 권면하니162) 勖子先君思수없이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게 不回經百折그저 증별의 말로 대신하였으니 聊將當贈言아무쪼록 오늘을 잊지는 말게나 愼勿忘此日구당163)은 지금 세상의 길이요 瞿塘今世程구렁텅이는 내 집안의 방이네 溝壑吾家室훗날의 만남이 있을까 없을까 後會有乎不근심하는 마음만 괜히 산란하네 憂心空惙惙행색이 차츰차츰 멀어지니 行色看看遙무엇을 잃은 듯 멍해지네 茫然如有失눈이 희미해져 머리 돌리니 眼迷方首回나도 모르게 눈물 쏟아지네 不覺淚河決 往來千里路, 怊悵三朝別.胡爾太悤悤? 傷哉窮鬼奪.無酒以遨遊, 煮饘相對歠.誰言禮節疎? 爲是親誼密.勖子先君思, 不回經百折.聊將當贈言, 愼勿忘此日.瞿塘今世程, 溝壑吾家室.後會有乎不? 憂心空惙惙.行色看看遙, 茫然如有失.眼迷方首回, 不覺淚河決. 설날 원문의 '삼조(三朝)'는 세(歲)ㆍ월(月)ㆍ일(日)의 아침으로,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이다. 궁귀(窮鬼) 항상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그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일찍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쫓아 버리겠다는 뜻으로 〈송궁문(送窮文)〉을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선군……권면하니 《시경》 〈연연(燕燕)〉에 "선군(先君)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先君之思, 以勖寡人.〕"라고 한 표현을 끌어온 것이다. 구당(瞿塘) 중국 사천성(泗川省) 삼협(三峽)의 하나인 구당협(瞿唐峽)을 말한다. 이곳은 강 양쪽 언덕이 가파르게 높이 치솟은데다가 골짜기 어귀의 강 가운데 염여(灎澦)라는 큰 바위가 서 있어 물살이 몹시 사납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전복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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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居民宋寅玉右謹言冤抑情由罪民曾祖母山在於治下南村面盤龍村前麓而不知何許人乘夜偸葬於至近之地已掘處而塚主尙不搜覓掘漑之意 嚴題敎千萬望良只爲行下向敎是事泰仁城主 處分丙申四月 日山在官[題辭]掘漑法外塚主期於搜覓後來告事初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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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村面進士民崔永大右謹言情由事近來偸葬之習間或有之豈有甚於興德七星洞李致大者乎去戊戌正月良南村面姑當山盤龍村西麓山地給價一千三百兩買得於全州宋柱埰處民之慈親葬用山矣世稱山運不合云故果然以他移葬後置標如前定山直守護矣千萬意外上項李致大偸葬於置標之上如是無據兇獰之者乎不勝憤寃玆以仰訴 洞燭敎是後所謂李致大發校捉上杖囚督掘以雪偸葬之習千萬伏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癸卯二月 日行官[着押][題辭]當照會捉致嚴査督掘向事卄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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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問邇來春和仕體萬重閤節均禧仰祝區區弟自初旬前窮卒以感祟彌留尙未見君悶人悶人耳就悚月玄里李春明卽弟親山守護之誼貴旣稔燭者而今因形便將欲移居龍積里矣其小作驛屯土必有運動者卽望須勿爲聽施必以月玄里梁鍾根變更報郡無至先機之歎千萬切仰切仰李旣移他故守護之節付托於梁氏矣以此另諒勿泛若何若何卽當面敍而無暇小隙玆以替仰耳餘爲此不備候上庚元月卄二日弟辛圭錫拜拜卽希賜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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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昨邂逅旋爲相先虞勝悵缺所示謹悉而昨者出勤時忘未袖矣今日因家事缺勤明日當手續以來爲計以此下諒如何如何餘姑不備更希仕安卽弟辛圭錫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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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詢葭露懷人仕候萬祉公務不甚惱勞仰溯仰溯弟狀省與役依遣而已耳就悚此呈松枝伐採願另飭担任寮使之添付調書卽爲提出切仰切仰耳餘擾不備候上九月十一日 弟辛圭錫拜拜圖面以不必要雖無之無妨云故近日此願提出者只以願書一枚提出而自郡依此受理矣諒之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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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拜承審淸夏仕體候萬重慰溸且祝弟侍依役俾幸於分已耳示事謹悉而郡事之見敗亦是數奇所關也非戰之罪也在於令從叔丈其肯許此實情而深恕於兄我郡甚悶且歎出資金卽爲還推爲計而有當人印章持參後出給云此意轉告于令從叔丈使卽入往郡廳卽爲還推之地如何如何餘擾不備候謝五月六日弟辛圭錫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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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七月二十日 前手標右手標事當此窮節數多眷屬生活無路故右宅前陸拾兩每朔五分例得用爲遣限來四月晦內依數備報之意如是成標以此憑考事標主 林元汝[着名][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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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正月晦日 前手標右手標事切有緊用處右人前錢文二十兩每朔五分例得用累年矣定限來十二月二十日俱本利備報之意如是成標爲去乎日後若過限則以此手標憑考事手標主 朴德裕[着名]證筆 姜正心[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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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九月二十八日 前手標右手標事段切有急用處故右人前錢文㱏百貳拾十兩以每朔五分例得用是矣定限明年五月晦內幷本利沒數備報之意如是成標爲去乎日後若有過限是去等以此標憑考事標主 林在根 喪人證人 金希聖[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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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김주백 종락 에 대한 만사 挽金友周伯【宗洛】 어려서부터 사귀어 늙을수록 친해졌는데 小少爲交老益親열흘 동안 달려도 천리마를 따라잡기 어려웠네528) 難將十駕躡行塵두 대양의 격류 속에 우뚝한 지주와 같았고 二洋頹浪亭亭柱스승을 가까이 모시며529) 강직한 인품을 지녔다오 三席春風侃侃人백옥루에 틀림없이 기문이 지어졌겠거니와530) 白玉樓應文有記선비들은 학문하는 이웃이 없음을 어이하리오 靑衿士柰學無隣아아 내 오래 앓고 있지만 저승사자가 더디 오는데 嗟吾積病遲符到그 누가 다시 때때로 이내 몸을 돌아볼까 誰復時時顧此身 小少爲交老益親, 難將十駕躡行塵.二洋頹浪亭亭柱, 三席春風侃侃人.白玉樓應文有記, 靑衿士柰學無隣?嗟吾積病遲符到, 誰復時時顧此身? 열흘……어려웠네 《순자(荀子)》 〈수신(修身)〉에 "무릇 준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데,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고 하였는데, 자신은 노둔한 말에 상대는 천리마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스승을 가까이 모시며 원문의 삼석(三席)은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춘풍(春風)은 좌상춘풍(座上春風)의 줄임말로,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을 의미한다. 《近思錄 卷14》 백옥루(白玉樓)에……지어졌겠거니와 백옥루는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의 누각을 말한다. 당(唐)나라 이상은(李商殷)이 지은 이하(李賀)의 전기(傳記)에, 하루는 이하의 꿈속에 붉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옥황상제가 백옥루를 완성하고 당장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꿈을 꾸고 나서 그가 곧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원용한 것이다. 《李賀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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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꿈에서 조비 및 선고와 선비를 뵙지 못하다 不復夢見祖妣先考先妣 나는 기유년부터 余自屠維歲늘 꿈에서 벽봉옹을 뵈었고531) 每夢碧峰翁거듭 화를 당한 뒤의 꿈에서는 荐禍以後夢조비와 선비까지 함께 뵈었다오532) 祖妣先妣同평소의 그리움이 꿈이 되어 平生思爲夢밤마다 헛된 적이 없었는데 夜夜殆無空중풍의 병에 걸린 뒤로는 自嬰中風疾마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니 心官職失供그리움이 지극하지 못한지라 惟其思不至이 때문에 꿈에서 만나지 못한다오 所以夢不逢마치 옛날 공중니께서 有若孔仲尼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못 보셨던 것과 같다오533) 不復夢周公아아 너 소자는 嗟嗟汝小子나의 말을 귀담아들을지어다 我言留汝聰도를 행하려는 뜻은 늙으면 진실로 쇠하거니와 行道老固衰네가 어버이를 잊는 건 어찌 용납될 수 있으랴 汝親忘豈容너의 불효를 말하지 않고 不言汝不孝옛일을 끌어와 교묘히 둘러대는구나 引古巧彌縫이 말씀을 듣고 아무 대답도 못 드린 채 聞言無以答눈물만 줄줄 흘리며 실의에 빠졌다오 有淚徒龍鍾 余自屠維歲, 每夢碧峰翁.荐禍以後夢, 祖妣先妣同.平生思爲夢, 夜夜殆無空.自嬰中風疾, 心官職失供.惟其思不至, 所以夢不逢.有若孔仲尼, 不復夢周公.嗟嗟汝小子, 我言留汝聰.行道老固衰, 汝親忘豈容?不言汝不孝, 引古巧彌縫.聞言無以答, 有淚徒龍鍾. 나는……뵈었고 기유년(1909)년 1월 21일에 후창의 부친인 벽봉공(碧峰公) 김낙진(金洛進)이 별세하였다. 거듭……뵈었다오 병진년(1916)년 3월 13일에 후창의 조모인 영광 김씨(靈光金氏)가 별세하고, 3일 후인 16일에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별세하였다. 마치……같다오 중니(仲尼)는 공자(孔子)의 자이다.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도다. 내 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였다.[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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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장의 자에 대한 설 朴德璋字說 돌은 지극히 거칠고 옥은 지극히 아름답다. 이 둘을 비교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옥을 귀하게 여기고 돌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고, 집어 주면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돌을 버리고 옥을 품지 않는 아이가 없다. 아, 옥과 돌은 외물(外物)이지만 귀천(貴賤)과 취사(取舍)의 분별을 살펴보자면 이처럼 뚜렷하다. 몸에 지닌 아름다움과 거침이 어찌 옥과 돌에 견줄 뿐이겠는가.그러나 여전히 거취(去取)를 몰라 광명보장(光明寶藏)117)을 산기슭이나 물가에 빠트려 사라지게 하고 거두어 간직하는 것은 모두 기와장이나 조약돌 같은 쓸모없는 물건이다. 어찌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 외물을 사랑하는 것만도 못한가. 어찌하여 저것에는 밝으면서 이것에는 어두운가.우리 벗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버리지 말기 바란다. 구하기를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지키기를 잃을 듯이 하며 숫돌로 갈고 돌가루로 광을 내어 둥글게 다듬어 규(圭)를 만들고 잘라서 장(璋)을 만들며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의 덕을 함양하고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의 능력을 갖춘다면, 쌓아놓고 드러내지 않으며 감춰두고 팔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보물, 석상(席上)의 진보(珍寶)118)가 되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 어찌 좋은 옥을 파는 변화(卞和)119) 같은 훌륭한 장사꾼이 그대를 위해 종묘(宗廟)에서 회동(會同)할 때나 하늘에 제사하고 상제에게 흠양할 때 특달(特達 특별히 통지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石至鹿。玉至美。比而較之。雖愚人莫不貴玉而賤石。持而與之。雖孩兒莫不投石而懷玉。嗚呼。玉石外物也。而審其貴賤取舍之分。若是昭昭。至若美鹿之存乎身者。則奚但玉石之比而已。然而猶且不識去取。使光明寶藏。淪沒於山之崖水之濱。而所以收拾而弆藏者。擧皆瓦礫無用之物也。豈愛身不如外物乎。何其明於彼而暗於此耶。願我友勿以衆好而取之。勿以衆惡而棄之。求之如不及。守之如將失。治之以礛。洗之以磢。圓而爲圭。折而爲璋。涵仁義忠信之德。具禮樂文章之用。則雖蘊而不露。藏而不衒。不害爲天下之寶。席上之珍。又安知無良玉善賈如下和者。爲之特達於宗廟會同祀天饗帝之間耶。 광명보장(光明寶藏) 광명은 불지혜(佛智惠)를, 보장은 귀하게 간직한 보물을 뜻한다. 주자는 이를 차용하여 "학자는 공부할 때 반드시 분발하여 물건을 잃은 사람이 도로 찾기 전에는 안타까워하며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자신이 소유한 하나의 커다란 광명보장(光明寶藏)을 남에게 도둑맞았다면 마음에서 그냥 버려두고 말겠는가. 반드시 훔친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만다.[學道做工夫, 須是奮厲警發, 悵然如有所失, 不尋得則不休. 如自家有一大光明寳藏被人偷將去, 此心還肯放捨否? 定是去追捕尋捉得了方休.]"라고 하였다. 이후에 본성을 뜻하게 되었다. 《朱子語類 卷121 訓門人7》 석상(席上)의 진보(珍寶)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자리 위에 진귀한 보배를 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변화(卞和)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산중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가 좌우의 발목을 모두 잘리고 원통해서 울었다는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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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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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사헌부 감찰 강공 묘지명 司憲府監察姜公墓誌銘 공의 성은 강씨(姜氏), 휘는 필영(弼永), 자는 찬서(贊瑞)이다. 세계(世系)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국자 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의 후손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전해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중엽에 이르러 봉람(鳳覽)이 있으니, 호는 석포(石浦)로, 도승지(都承旨)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고조 택보(澤輔)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증조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태형(泰衡)으로, 호는 도능암(道能庵)이다.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휘복(彙稪)이다. 부친은 호조 참판에 추증된 학조(鶴照)이다. 모친은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윤규하(尹奎夏)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3월 30일에 부(府)의 유치리(有治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유복자로, 차츰 자라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기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길러 주신 것을 생각하여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심력(心力)을 다 기울였다. 8세때 땔나무를 팔아 등에 쌀을 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만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으면 시냇가의 나물을 캐고 쌀뜨물을 구걸하여 국을 끓여 올렸다. 이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슬프게 소리내어 우니 이웃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 매양 쌀독이 비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가 명하면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순종하였고, 어머니에게 병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지극히 성실하고 측달한 마음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여 행위에 드러났다.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많았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혀를 차며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훗날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밀양 박씨(密陽朴氏) 홍준(弘俊)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박씨는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년에 이르러 집안 살림이 조금 넉넉해졌다. 모친상을 당해 온갖 의례와 절차는 예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하나하나 의례와 절차에 따라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한번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태복(稅服)11)을 입고자 하다가 선유(先儒)의 설을 보고 마침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래도 기일이 되면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소복(素服)을 입고 소식(素食)을 함으로써 종신토록 상을 치른다는 뜻을 부쳤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 매우 독실하여 글방을 짓고 서책을 소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고, 스승을 엄선하고 벗을 가려 사귀게 하여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무도한 무리 들이 난을 일으키자12) 자손을 경계하여 신신당부하고 엄히 신칙하여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소모사(召募使)가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정문(旌門)을 세워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서 문에 '의문(義門)'이라고 썼다.공은 기개가 높고 타고난 성품은 낙천적이었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원근의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은덕을 베풀었으니, 차마 실정이 아닌 것으로 속이지 않았고 감히 의롭지 못한 짓을 하지 않았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아들은 인형(仁馨), 예형(禮馨), 의형(義馨), 지형(智馨)이고, 손자는 진섭(晉燮), 병섭(井燮), 봉섭(鳳燮)이다. 이외의 손자들은 어리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6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7세이다. 유치리(有治里) 예상등(禮尙嶝) 오좌(午坐)에 장사 지냈다.아, 진섭은 나와 교유한 지 몇 년 되었다. 그는 영특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공이 살아 계실 때 큰 사랑을 받았는데, 공이 별세하고 상례를 마치기 전에 또 이렇게 요절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의형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니,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니 怡愉洞屬효성스러운 사람이라네. 孝子之人질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니 質實勤儉선배의 자격을 갖춘 부류일세. 先進之倫가르침에는 오로지 경전을 중시하였으니 敎重一經훌륭한 자제들 참신하도다. 蘭玉鮮新예상의 산기슭에 禮尙之麓천추에 향기로운 제물을 올리네. 芬苾千春 公姓姜。諱弼永。字贊瑞。系出晉州。高麗博士啓庸后。文學仕宦。世傳煒燁。爲東方巨族。至中葉。有鳳覽。號石浦。都承旨弘文提學。丙子亂。倡義旅。高祖澤輔。文章名世。曾祖贈司僕寺正。泰衡。號道能庵。祖贈左承旨彙稪。考贈戶曹參判鶴熙。妣海南尹氏奎夏女。以純廟庚寅三月三十日。生公于府之有治里。公以遺腹孤孩。稍長而痛嚴顔之未逮。念慈育之劬勞。艱難拮据。備極心力。八歲賣薪負米。以供親旨。如有未繼。則采溪澗之毛。乞浙米之汁。作羹以進。因不勝悲泣成聲。隣理憐之。每邁空匱。多有助之者。親有命。如恐不及。親有疾。涕泣不離。側其至誠惻怛。根於天性而著於施爲。多有出人之行。聞者無不嘖嘖歎賞曰。此兒其必有後。委禽密陽朴氏弘俊女。朴氏孝養厥姑。夙夜靡懈。至中身。家力稍饒。遭內艱。凡百儀節。問于識禮處。一一遵循。俾無遺憾。嘗以早違嚴庭爲至恨。欲稅其服。見先儒說。而遂不果行。遇忌辰。至誠哀痛。素服素食。以寓終身之喪。敎子孫甚篤。結塾儲書以資其修息。擇師取友以正其趨向。甲午匪類之亂。戒子孫。申申嚴勅。俾不染跡。召募使聞而嘉之。旌門稱賞。因書門扉曰義門。公氣宇軒昂。天性樂易。自內外族戚至遠近朋知。皆歡然有恩。不忍以非情欺之。不敢以非義加之。戊子除司憲府監察。又陞嘉善。男仁馨禮馨義馨智馨。孫晉燮井燮鳳燮。餘幼。丙申二月二十六日終。享年六十七。葬有治禮尙嶝午坐。嗚呼。晉燮從余遊有年矣。其穎悟謹勅甚爲公當日之鍾愛。誰知公歿未終喪。而又此夭逝耶。義馨持家狀。屬余以誌諸幽道者。嗚呼。豈忍辭。銘曰。怡愉洞屬。孝子之人。質寶勤儉。先進之倫。敎重一經。蘭玉鮮新。禮尙之麓。芬苾千春。 태복(稅服) 세월이 이미 지난 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추후에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공(大功) 이상의 복은 태복을 하고 소공(小功)은 가벼운 복이라 하여 태복을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上》 갑오년……일으키자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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