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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집【재해】에게 답함 答梁順集【在海】 외람되게도 하문(下問)해 주시니 고마움이 가슴 깊이 새겨집니다. 하물며 효자의 비통함은 엄연히 심상(心喪) 중이건만40) 오랜 벗으로서 때맞추어 위문하지 못하고 도리어 먼저 소식을 전하는 수고를 끼쳤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부끄럽고 고마움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서한을 통해 아버님의 안부가 강녕하시고 모시고 생활하는 안부가 더욱 복되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욱 기쁘고 후련합니다. 생업과 독서는 서로 방해가 된다는 말씀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주부자(朱夫子)는 이에 대해서 이르기를, "이것은 배를 움직이지 못해서 계곡이 굽은 것을 싫어하는 격이다.41) 만약 배를 다루는 기술을 안다면 계곡이 굽이치는 험난한 곳일지라도 어찌 내가 힘을 발휘하여 잘 건너갈 곳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부재모상(父在母喪)의 경우 25개월을 첫 번째 기일로 삼고 치립(緇笠)과 치대(緇帶)를 하면서 27개월의 상제(喪制)를 마칩니다.42) 대체로 27개월의 상【삼년상(三年喪)을 말함】은 사람의 자식이라면 늘이지도 못하고 줄이지도 못합니다. 남의 양자로 간 아들,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간 딸이더라도 역시 이것을 줄이지 못합니다. 또한 치립(緇笠)과 치대(緇帶)는 본래 상복에 규정되지 않은 복이고 단지 길복(吉服)에서 감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꾸고 줄이는 절차 없이 곧장 27개월에 이릅니다. 어리석은 의견은 이와 같습니다만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猥荷辱問。已極感鏤。矧伊孝子哀疚。儼然在心制中。爲知舊者。不能隨時相慰。而反有以獲其先施之勤哉。愧感罔喩。因審庭候康寧。侍旁增祉。尤庸欣豁。産業讀書相妨之喩。此固然矣。然朱夫子於此。有一言焉曰。此不能運船。嫌溪曲者也。苟解運船之術。雖溪曲之險。誰非吾施力利涉之地也。此言當深思之也。父在母喪。二十五月爲初忌。而緇笠緇帶。則然二十七月之制也。大抵二十七月爲人子者。加不得。減不得。雖出后之子。適人之女。亦減此不得也。且緇笠帶。木是非服之服。而只是殺於吉服者。故無變殺之節。而直至二十七月。瞽見如此。未知得否。 심상(心喪) 중이건만 부재 모상(父在母喪)의 경우, 아들이 상주가 아니고 남편이 상주이기 때문에 기년(朞年) 만에 복을 벗는 것이 예제(禮制)이다. 그러나 아들은 복을 벗은 뒤에도 남은 기간 어머니를 위해 슬퍼하며 복을 입었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삼년을 채워 근신한다. 이것은……겪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8권 〈총론위학지방(總論爲學之方)〉에 나오는 말이다. 뒤의 내용은 출전을 확인할 수 없다. 부재모상(父在母喪)의……마칩니다 원문에 따른 번역은 이와 같다. 부재모상(父在母喪)은 아버지가 생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경우에 자식은 아버지가 입는 복과 같은 기년복을 한다. 다만 11개월에 소상제(小祥祭)를 지내고 13개월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내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내 공식적인 상기(喪期)를 마치지만 이후 27개월이 될 때까지 심상(心喪)을 한다. 담제를 지내고 3년상의 기간이 끝나는 27개월까지, 즉 심상을 치르는 동안 조선에서는 관례적으로 치립과 치대를 한 듯하다. 이러한 사실에 따르면 본문의 '二十五月爲初忌 而緇笠緇帶'는 '十五月爲禫 而緇笠緇帶'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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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道面堂北下里化民金載相右謹言情由段世或有無據之人日▣▣爲豈有如本面中方里居朴啓三爲名者乎去甲午年▣中同啓三之兄基俊喪債備報與稅米辦納無路是如渠之柴場處欲爲放賣而民則親山同麓故以爲買得植其松楸是白加尼昨年十一月日風聞側同啓三貪其柴場處松楸還退樣呈訴云故往問其故於啓三則不示 題音而啓三言內日後如何是加隱喩姑爲置之云云而終無相訟之意是乎矣人謀難測故買得文券帖連仰訴爲去乎自 官同啓三捉來査問 敎是後嚴明 處分俾無殘民橫侵之弊千萬望良只爲行下向 敎是事城主 處分丁未正月 日官(署押)(題辭)査處得捉來事狀 卄六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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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庚戌十月 崔載信 城主 庚戌十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경술년 10월에 최재신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최석준의 아들이 늑탈해 간 가산과 산업을 돌려받기를 탄원하고, 또한 자신을 구타한 일을 고발한 내용이다. 경술년 10월에 효정리(孝井里)에 사는 최재신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崔載信)은 지난 무진년에 최석준(崔碩俊)과 이웃에 살면서 말업(末業, 상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서로 종종 돈을 빌리고 또 빌려주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신년 가을, 최석준이 매월 4변의 이자로 돈을 빌려가서 아직까지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돈을 받아야 한다며 그의 아들을 시켜 가대(家垈)와 산업(産業)을 늑탈해 갔다고 한다. 더욱이 한번은 최석준 아들 소손형제(素孫兄弟)가 이 일을 빌미로 시장에서 자신의 마구잡이로 구타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석준에게 받아야 할 6냥과 그의 아들 소손형제가 늑탈해 간 가대 값 25냥을 모두 추급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부안현감은 늑탈은 법을 어지럽히는 행위인 만큼 자세히 조사하고자 최효손(崔孝孫)을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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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居化民崔拱辰右謹言咸孟達名下蠲倉本錢三兩果利条六戔稱以私錢與受民前日呈訴是乎則城主分付內咸孟達身死則汝之擔當云故民哀其身死具本利畢納是遣又民之名下蠲倉本錢八兩五戔果又四兩五戔果利条二兩六戔歲前納上是遣本錢則今又畢納是乎乃同孟達名下蠲錢許多則日後之弊未可前知玆敢仰訴爲去乎洞燭敎是後同孟達名下蠲錢本利三兩六戔果又民之名下蠲錢本利十五兩六戔民旣爲畢納之事立旨成給以防日後之弊爲其爲行下 向敎是事城主 處分丙申二月 日官[着押](題辭)果如所訴則依所願立旨成給事初二日 告洪在二[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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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化民崔拱辰右謹言民之從弟乃集所負京債民艱辛徵報而來頭之患將不至何境此後則無論某該色上納錢與內集者其該色處徵出是遣京邸吏復與京債則更不橫徵於民而渠自失之之意敢玆仰訴伏乞參商敎是後立旨成給事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辛亥四月 日官[着押](題辭)官意亦如此立旨成給事初九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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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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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45년 유인양씨(孺人梁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孺人梁氏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孺人梁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45년(헌종11)에 왕이 김응상의 처 유인 양씨에게 내린 교지 1845년(헌종11) 1월 김응상(金膺相)의 처(妻) 유인(孺人) 양씨(梁氏)에게 내린 교지(敎旨)이다. 유인이었던 양씨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김응상의 부인 양씨에게 이러한 교지가 내려오게 된 이유는 그의 남편 김응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맨끝에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 依法典從夫職"라고 적혀 있는 기록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절충장군은 당상관(堂上官)에 해당하는 무신(武臣) 정3품의 품계(品階)로 그들의 아내는 종부직(從夫職)에 따라 숙부인으로 봉작(封爵)되었다. 한편 김응상의 또 다른 아내 유인 임씨(林氏)도 이때 숙부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김응상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양씨는 남편 김응상과는 19살 차이가 나며, 김응상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해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처(後妻)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했던 김양묵(金養默)은 양씨와는 10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김양묵은 전처(前妻) 임씨의 소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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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헌대부 호군 만은 백공 묘표 正憲大夫大護軍晩隱白公墓表 장흥(長興) 고읍면(古邑面) 하발촌(下鉢村) 뒤 곤좌간향(坤坤艮向)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정헌대부(正憲大夫) 대호군(大護軍) 백공(白公) 휘는 영필(永弼), 자는 경흥(敬興)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공은 순묘(純廟)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나 금상(今上) 갑오년(1894, 고종31) 12월 15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4세이다. 타고난 기질과 품성이 온후하고 질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였기에 부지런히 일하여 부모님을 봉양하였는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련하여 올렸다. 병간호할 적에는 집 밖에서 기도하고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았으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질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흘려 살렸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지나쳐서 몸을 상할 정도였으므로 이웃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비석을 세우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4대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오래 유지할 규정을 만들었다. 또 종가(宗家)를 도와주고 구휼하여 본업을 편안하게 영위하게 하였다.몇 칸의 가숙(家塾)을 지어 서적을 소장하고 곡식을 축적한 다음 원근의 명사를 널리 초빙하여 모여서 서로 강론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본받는 바가 있게 하였다. 친척과 벗들 가운데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옷을 마련해주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음식을 주었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조금도 인색한 적이 없었다. 흉년에는 번번이 인근의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몇인지 헤아려 달마다 일정하게 주고서 다음 해 보리를 수확할 때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는데, 그 비문에 대략 "100리 땅 안에 공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굶주리는 우리를 살렸으니 많은 사람에게 비석으로 전한다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빌렸다가 갚지 않은 돈이 수백 금이었는데 ,공의 아들이 관아에 보고하여 독촉하고자 하자, 공이 크게 꾸짖기를 "붕우 간에 재물을 융통하는 것은 의리이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것은 형편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리와 우의로 사귀다가 끝에 가서 다투어 송사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시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 버렸다.일찍이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시례(詩禮)는 선비가 늘 행하는 일상의 다반사이니, 이것을 버린다면 마음 쓸 곳이 없어진다. 우리 선대에서는 문학과 관직이 계속 끊이지 않아 향리에서 명문가가 되었다. 만약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서 대대로 전한 옛 가업을 하루아침에 실추하게 한다면 어찌 선조의 죄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제쳐두고 세상일도 물리친 다음 별장 한 칸을 짓고 만은(晩隱)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곳에서 날마다 친족 중의 기로(耆老)들, 향당의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유유자적하게 즐기며 애오라지 세월을 보내며 생을 마쳤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위로 3대의 선조에까지 추증되었다. 아들 4인 가운데 3인이 과적(科籍)에 올랐으니, 영광이 성대하게 빛났다.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다.백씨(白氏)는 관향이 수원(水原)이니, 고려 때 충숙공(忠肅公) 휘 장(莊)이 먼 선조이다. 해성군(海城君) 휘 맹하(孟夏), 정해군(貞海君) 휘 수장(壽長), 술고당(述故堂) 휘 민수(民秀)는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종택(宗澤)인데, 호조 좌랑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유(瑜)인데, 통덕랑(通德郞)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남현(南鉉)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이효(金利孝)의 따님이다. 공은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윤철(崔允喆)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어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종현(金宗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4남 1녀를 낳았다. 호인(灝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태인(泰寅)이 있고, 규인(珪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냈다. 우인(禹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딸은 청풍(淸風) 사람 김익천(金益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호인이 백발의 노년에 백리 길을 고생하며 찾아와서 묘석(墓石)에 기록할 문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실로 감히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부지런한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보태고 수정하여 짓는다. 長興古邑面下鉢村後坤艮原。有崇四尺。卽故正憲大夫大護軍白公諱永弼字敬興之衣履攸藏也。公生於純廟庚辰。卒於今上甲午十二月十五日。享年九十四。天稟溫厚質慤。自幼有至行。聞於人。家世貧甚。服勤就養。備盡甘胹。侍病露禱嘗藥。衣不解帶。疾革。血指得甦。執喪過毁。隣里感涕。葬而樹碣表阡。朔望展省。風雨不廢。營置四世祭田。定爲久遠之規。又助恤宗家。使之安業。立家塾數間。儲書籍蓄粮穀。廣延遠近名士。聚相講磨。使諸子諸孫。有所矜式。親戚知舊。寒者衣之。飢者食之。性好施予。未有少吝。遇飢歲。輒計鄰近村落飢戶眷口。月給有程。至明年麥登而已。所活甚衆。鄕人立碑誦之。其文略曰。地惟百里。公其一人。活我飢戶。萬口碑傳。有人負債未償者。爲數百金。公之子。欲聞官督之。公大責曰。朋友通財。義也。貧而無償勢也。始以義誼相交。終以爭訟相加耶。卽取其券焚之。嘗戒諸子曰。詩禮是士子日用茶飯。舍此則無所用心。我先世文學仕宦。綿延不絶。爲鄕里名家。若不謹其身。不勉其學。使世傳舊物。一朝墜地。則豈非先朝之罪人乎。及其晩年。掃斥家務。屛除外事。修別庄一室。題其顔曰晩隱。日與族戚者老。鄕黨故舊。賦詩行酒。談笑歌詠。優遊娛樂。聊以卒歲。壽陞祟品。上以追贈三世。子男四人。三陞科籍。光榮赫然。天之報施有德。果爲不虛矣。白氏貫水原。麗朝忠肅公諱莊。其遠祖也。海城君諱孟夏。貞海君諱壽長。述故堂諱民秀。皆中葉顯祖也。曾祖宗澤戶曹佐郎。贈司僕寺正。祖諱瑜通德郞。贈左承旨考諱南鉉。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利孝女。公娶全州崔氏允喆女。無育。繼娶金海金氏宗鉉女。生四男一女。曰灝寅武科五衛將。曰泰寅。曰珪寅武科監察。曰禹寅武科宣傳。女曰金益天淸風人。孫以下不錄。灝寅白首衰境。百里重硏。托以識墓之文。余以殘劣。固知不敢承膺。而難孤勤意。謹据狀而略加增裁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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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고공 묘표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高公墓表 선덕(先德)이 말하기를 "후덕(厚德)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리지만 복택(福澤)은 사악한 사람에게 내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세상에서 이른바 복을 누렸다는 집안을 살펴보건대 그 선대에서 공덕을 쌓은 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 고을 고(故) 지재(止齋) 고공(高公)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공은 빼어나고 영특한 자질로 경전에 힘쓰고 학문을 쌓았으며 마음을 세우고 몸을 삼갔으니, 그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신중하고 성실한 행실과 학문하고 시례(詩禮)를 익힌 풍모는 우뚝이 고을에서 명성이 있었다. 평상시 광채를 숨기고 자취를 감춘 채 시속을 따르지 않아, 득실과 이해에 대해서 아득히 알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 묵묵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오직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만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힘썼다.이 때문에 부모를 섬길 적에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형제를 대할 적에는 우애가 아주 넉넉하였으며, 친족을 대할 적에는 은덕과 정의가 두루 퍼졌으며, 벗을 사귈 적에는 신의가 뚜렷이 드러났으며, 생도를 가르칠 적에는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그리하여 안팎으로 원망이 없고 원근에서 한목소리로 서로 칭찬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후인이 계승하여 선생의 법도가 없어지지 않았고, 신명(神明)이 도와 복록이 끊기지 않았다. 이에 성대하게 한 고을의 모범적인 가문이 되었고 먼 후대에까지 복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후덕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린 바를 살펴보면 그 당시 쌓은 공덕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공의 휘는 인건(仁建), 자는 사영(士英), 지재(止齋)는 그의 호이다. 고씨(高氏)는 계보가 탐라(耽羅)에서 나왔다. 휘 복림(福林)에 이르러 장택군(長澤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휘 열(悅)은 태종 때 호조 참판을 지냈다. 휘 상덕(尙德)은 지평이고, 휘 자정(自貞)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본성(本省)을 순도(巡到)하였다. 휘 신긍(愼矜)은 충순위(忠順衛)로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 익심(益深)인데, 진사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이고, 증조는 휘 명진(明進)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조부는 휘 현(鉉)인데, 진사이다. 부친은 휘 경리(景离), 호 둔암(遯庵)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이다. 온후하고 인애하며 곧고 훌륭하였으며 부덕(婦德)을 갖추었다.공은 인묘(仁廟) 경오년(1630, 인조8)에 태어나 을묘년(1675, 숙종1) 9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나중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제민(金濟民)의 따님인데, 규중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묘소는 능주의 이지촌(鯉池村) 오른쪽 언덕 무좌(戌坐)에 있는데, 공과 상하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대기(大器), 차자는 태익(泰益)이다. 장방손(長房孫)은 진모(振謨)이고, 증손은 명복(命復)이다. 차방손(次房孫)은 응성(應星)이고, 증손은 명집(命集), 명윤(命允)이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진규(鎭圭)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해도 되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先德有言曰。厚德必享祿壽。而福澤不降於滛人。嘗以是說而觀世之所謂享福之家。未有不由其父祖積累之力。今於吾鄕故止齋高公。亦可以見矣。公以挺邁開悟之資。劬經積學。立心飭躬。其孝友謹慤之行。學問詩禮之風。偉然有譽於鄕邦間。平居晦光斂迹。不趨時華。於得失利害。漠然若不省也。於是非毁譽。默然若不聞也。惟於素其位而行其義者。勉勉焉如恐不及。是以事父母而愛敬備至。在兄弟而友悌隆洽。處族戚而恩誼流通。交朋友而信義著行。敎生徒而信從日衆。內外無怨。遠近相得。一口稱賞。無有間言。以至來許承襲而典刑不空。神明扶佑而福祿不替。蔚然爲一鄕法家。百年福宅。此非所謂厚德必享祿壽者耶。觀其所享。而當日之積累。盖可知也已。公諱仁建。字士英。止齋其號也。高氏系出耽羅。至諱福林封長澤君。子孫仍貫焉。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諱悅太宗朝戶曹參判。諱尙德持平。諱自貞文科。以敬差官巡到本省。諱愼矜忠順衛。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益深進士昌陵參奉。曾祖諱明進通德郞。祖諱鉉進士。考諱景离號遯庵。有隱德。妣昌寧曺氏義修女。溫仁貞嘉。婦德甚備。公以仁廟庚午生。乙卯九月十九日卒。享年四十六。後贈承政院左承旨。配光山金氏濟民女。閫儀無闕。有女士風。墓綾之鯉池村右岡戌坐上下封。有二男。長大器。次泰益。長房孫振謨。曾孫命復。次房孫應星。曾孫命集命允。玄孫以下不能盡錄。六世孫鎭圭。抱家狀。來請表墓之文。余以非其人。牢辭不獲。謹據狀而爲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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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칠설을 황경함에게 보여주다 四七說示黃景涵 칠정(七情)은 공자가 말한 것으로, 《예경(禮經 예기(禮記))》에 드러나 있다.43) 이것은 사람의 정에 이 일곱 가지가 있음을 통틀어 말한 것인데, 맹자는 어찌하여 공자가 이미 완성해서 말한 칠정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이처럼 사단(四端)이라는 이름을 따로 말한 것인가?대체로 칠정은 본디 모두 본성에서 발현되어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기제(機制)가 악으로 흐르기 쉬워 모두 반드시 선하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그것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때문에 칠정 중에 특별히 모든 사람이 똑같아서 선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을 취하여 실증한 것이니, 그 뜻이 지극하다. 이미 선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만을 취한 것이라면 성냄[忿懥]이나 기뻐함[好樂]처럼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이 그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무슨 해가 되겠는가. 선과 악을 겸하기 때문에 사단(四端)을 포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칠정은 본디 대번에 선과 악을 겸한다고 말할 수 없음에랴. 만약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사단이 칠정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오직 '측은(惻隱)' 두 글자만으로도 천하의 정을 포괄할 수 있다. 만약 그 자체로 나누어 말한다면 사단은 그대로 사단일 뿐이고, 칠정을 포괄할 수 없다. 예컨대, 인(仁)을 넓은 의미로 말하면 본디 사덕(四德 인의예지(仁義禮智))을 겸하지만, 만약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인은 그대로 인이고, 의는 그대로 의일 뿐이니, 어찌 서로 섞일 수 있겠는가.또 참조할 만한 말이 한 가지 있다. 《대학(大學)》의 사유소(四有所)44)와 같은 것도 애초에 사덕에서 발현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을 사단(四端)이라 말하더라도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특별히 '측은' 등의 사단을 말하였고, 《대학》에서는 특별히 '분치(忿懥)' 등의 사유소를 말하였으니, 이처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또 노사(蘆沙)선생이 사단을 근본으로 여긴다고 말한 것은 그것이 발현되어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욕에 의해 뒤섞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일 뿐, 우리 벗의 말처럼 칠정을 지엽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 벗의 말처럼 사단을 근본으로 여기고, 칠정을 지엽으로 여긴다면 이것이 무슨 의리이겠는가. 다시 더욱 생각해 보게나. 七情是孔子之說而著於禮經者也。是統言人之情有此七者。則孟子何不取孔子已成說底七情。而乃別說四端之名如是云耶。蓋七情固皆發於性而無不善者。但其機易流於惡。而不能皆保其必善。則引之不足爲人人性善之證案。故乃於七情之中。特取其人人所同然而不得不善之情以實之。其意至矣。旣取其情之不得不善者。則其情之易流於惡者。如忿懥好樂。謂不在其中。亦何害耶。非謂兼善惡之故而能包四端也。況七情本不可遽以兼善惡言之耶。若專言則不惟四端包七情。惟惻隱二字。足以包天下之情。若就當體上分言。則四端自四端。而不能包七情矣。如仁專言。固該四德。若偏言則仁自仁義自義。胡可相混耶。且有一語可旁照者。如大學四有所。亦未始不發於四德。則謂之四端。亦非過語也。然則孟子特言惻隱等四端。大學特言忿懥等四有所。而若是不同何耶。且蘆沙先生以四端爲根本說者。以其發而直遂。不被物欲混淆云耳。非以七情爲枝葉如吾友言也。若如吾友之言。以四端爲本根。以七情爲枝葉。此何義理也。更加思惟也。 칠정(七情)은……있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무엇을 칠정이라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니,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何謂七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 弗學而能.]"라는 구절이 보인다. 사유소(四有所)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네 가지 병통인 '분노[忿懥]', '두려움[恐懼]', '좋아함[好樂]', '근심[憂患]' 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장구》 전(傳) 7장에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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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덕의 자설 宋士德字說 《시경》에 이르기를, "많고 많은 선비들이 문왕의 덕을 잡았네."50)라고 하였으니, 덕이 무슨 물건이라고 잡을 수 있겠는가마는 보존하고 지켜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단속하고 성찰하여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게 하여 따라 매진하며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다.[純亦不已]51)"는 경지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한다면 이른바 "문왕이 나의 스승이다."52)라는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송씨(宋氏)의 자손 병기(秉基)가 삼가례(三加禮)53)를 마치고 사덕(士德)으로 자(字)를 삼았으니, 뜻을 취함이 크지 않는가. 아침저녁으로 힘써서 이 아름다운 자를 지어준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詩云。濟濟多士。秉文之德。德是何物而可以秉執。操存持守。勿使有須臾之離。提撕省察。勿使有毫忽之違。遵循征邁。馴致乎純亦不已之地。則所謂文王我師者。信不我欺矣。宋氏子秉基。三加告畢。字以士德。其所以取義者。不其大矣乎。夙夜勉勵。母負此錫嘉之意也。 많고……잡았네 《시경》 〈주송(周頌) 청묘(淸廟)〉에 나오는 시구(詩句)이다. 순수함이……않는다 《중용》 제26장의 "문왕이 문왕이 된 까닭은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文王之所以爲文王, 純亦不已.]"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문왕이……스승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공명의(公明儀)의 말로, 맹자가 이르기를, "공명의가 말하기를, '주공이 문왕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으니,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文王我師也, 周公豈欺我哉?]'라고 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삼가례(三加禮) 관례(冠禮)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으로, 초가(初加)ㆍ재가(再加)ㆍ삼가(三加)로 나뉜다. 《가례》 〈관례〉에 의하면, 초가에서 치포관(緇布冠)과 복건(幅巾)을 씌우면 관자(冠者)는 사계삼(四䙆衫)을 벗고 심의(深衣)로 갈아입은 다음 검은 신발[納履]을 신는다. 재가에서 모자(帽子)를 씌우면 관자는 심의를 벗고 조삼(皂衫)으로 갈아입은 다음 혁대(革帶)를 하고 가죽신[繫靴]을 신는다. 삼가에서 복두(幞頭)를 씌우면 관자는 관직이 있는 경우 공복(公服)과 혁대를 하고 가죽신[納靴]을 신고 홀(笏)을 들며 관직이 없는 경우 난삼(襴衫)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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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심에게 답함 答洪允深 세모(歲暮)에 그리움은 다른 날보다 배나 더한데, 은혜로운 편지를 받으니 감사하고 위로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시에 매우 바빠서 사의(謝儀)를 쓰지 못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모시고 살피는【侍省】 체절(體節)69)이 한결같이 높고 넉넉한지 거듭 여쭙니다.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피인(被因)'이라 하신 것은 듣건대 매우 염려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잘되어가는 것은 늘 적고 늘 역경(逆境)이 많습니다. 옛날의 성현(聖賢)도 혹 면하지 못한 바인데 하물며 이처럼 기나긴 밤과 같은 말세【衰叔】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처분을 들어야 할 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망령되이 스스로를 굽히겠습니까.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70)에 "사생(死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결한다면, 그 밖의 영욕(榮辱)은 알 수 있다네.【以至死生皆處了 自餘榮辱可知之】"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부분이니 어떠합니까? 존선장(尊先丈)의 문자(文字)는 저처럼 천열(淺劣)한 사람이 진실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맺은 정의(情誼)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감히 굳이 사양할 수는 없을 따름입니다.'일변(一變)'이라고 하신 것은 오직 쇠퇴한 풍속에 대해 탄식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정사를 하는 절도에 있어서 부자(夫子)를 담당하게 하였다면 또한 어찌 한 번 변화하여 점차 나아지는 것이 없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부자(夫子)께서 검소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로 답한 것은, 곧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나누어지는 지점입니다.'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安安而能遷】'71)라고 말한 조목 하나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현(聖賢)의 말씀에서 어느 것이 인의(仁義)를 겸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정(政)'은 대강을 말한 것이고 '사(事)'는 조리입니다. 무릇 조금씩 언급해 가는 것은 진실로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을 하거나, 또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歲暮懷想。有倍他日。際承惠函。感慰曷量。但時適悤劇。未修謝儀。一念耿耿。信餘有日。更詢侍省體節。一直崇裕。馳溯不任。示中被因云云。間甚代慮。世間萬事順境常少。逆境常多。古之聖賢。或有所不免。況此衰叔長夜之時乎。惟當盡其在我之道。而聽天處分而已。豈可恐懼憂惱。妄自隕穫也。康節詩曰。以至死生皆處了。自餘榮辱可知之。此是吾儕所當勉力處。如何如何。尊先文字。以若淺劣。固不當犯手。而但以契誼之重。有不敢牢讓故耳。一變云云。非惟發歎衰俗之意。而亦言其爲政節度處。則使夫子當之。亦豈無一變之漸耶。夫子答以不儉不禮者。卽王覇之所以分也。安安而能遷云云一條。固然。然聖賢之言。其孰非兼仁義者哉。政是大綱說。事是條理。凡因及之漸。固有自大而小者。亦有自小而大者。 체절(體節)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강절(康節)의 시 인용한 시는 〈수미음(首尾吟)〉 135수 중, 제22수의 함련(頷聯)이다. 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재물을 모으면서 흩어 베풀 줄 알며, 편안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옮길 줄 안다.【積而能散, 安安而能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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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후【유묵】에게 답함 答梁伯厚【維黙】 길이 멀고 인편이 드문데 이번 편지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깊이 돌보아주심을 삼가 알았으니 감사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오랜 객지 생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또 이번 봄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고향 동산과 친구들을 저버리는 뜻이 많습니다. 대저 이 몸이 이사【搬移】를 한 것은 비록 사계(私計)의 부득이함에서 나왔을 뿐이지만, 그대의 고을이 멀지 않으니 아침저녁으로 함께 종유하여 만년(晩年)에 의지할 곳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그치지 않아 한 조각 부평초와 같은 배가 아직도 이처럼 흔들리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그대의 형제가 몸을 닦고 힘써 공부하면서 이미 자숙(自淑)한 다음에 또 가끔씩 편지를 보내주시어 객지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나의 회포를 위로해주시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구구한 이 몸의 일은 비록 마침내 어떤 상황이 될는지 알 수가 없으나,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찾을 날이 있다면 마땅히 그대와 함께 오봉(五峯)의 물과 바위 사이를 소요하면서 서로 마주하고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낼 것입니다. 오직 백후(伯厚) 그대는 더욱 스스로를 경계하고 검칙(檢飭)하여 우리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사롭게 사귈 뿐은 아니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도리(道理)는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64)인데, 어찌 새로운 해석을 한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생각으로 특별한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문(傳文)은 증자(曾子)의 뜻을 그의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자의 말씀에 특별히 '증자왈(曾子曰)'이라고 쓴 것일 뿐입니다. 路迃便稀。此書何從而至。仰認傾眷。感佩沒量。久客不歸。又此送春。其所以負我鄕園知舊之意。多矣。大抵此身搬移。雖出於私計之不得而已。惟是仁里不遠。謂可以朝夕相從。爲晩暮毗倚之地。誰知風浪未定。而一片萍帆。尙此搖搖哉。但念我友昆季躬修力學。旣以自淑又能種種寄聲。慰此羈泊寂寥之懷。可憒可憒。區區身事。雖不知竟作何狀。而若有還山尋巢之日。則當與我友逍遙相對於五峯水石之間。尋行數墨。以遺餘日也。惟伯厚益目警勅。無使吾兩人爲終始閒追逐也。道理是天然自有底。何嘗有解新不解新之可言。但人之意思特地解新。傳文是曾子之意。而門人記之。故於曾子之言。則特以曾子曰識之耳。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 정자(程子; 정이(程頤))의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7에, "모든 사물에는 다 천연적으로 중(中)이 있어서 사람이 안배할 필요가 없다.【事事物物上皆天然有個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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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일에 大暑日 납량대 짓지 않은 걸 걱정하지 않으니 不愁未築納凉臺흉금이 절로 활짝 열리게 할 계책 있네 計在胸衿自暢開푸른 숲의 새 매미소리는 맑다가 거칠고 碧樹新蟬淸乍澀저문 산의 지친 새는 갔다가 다시 오네 暮山倦鳥去還來원생은 오래 고달팠으나 애초에 병들지 않았고480) 原生久憊初非病가부는 길이 탄식했는데481) 누가 인재라 했던가 賈傅長歎孰謂才아직도 생일에 거른 술을 남겨둔 게 있으니 尙有弧辰餘瀝酒그저 벽통배482) 대신으로 삼은 것을 과시하네 聊誇替作碧筒杯 不愁未築納凉臺, 計在胸衿自暢開.碧樹新蟬淸乍澀, 暮山倦鳥去還來.原生久憊初非病, 賈傅長歎孰謂才?尙有弧辰餘瀝酒, 聊誇替作碧筒杯. 원생(原生)은……않았고 원생은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 원헌(原憲)으로 자는 자사(子思)이다. 그는 공자가 죽은 후 궁벽한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위(衛)나라 재상 자공(子貢)이 찾아왔을 때 남루한 차림으로 나갔다. 이에 자공이 "혹시 병이 들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나는 들으니, 재물이 없는 자를 가난하다 말하고 도를 배우고서도 능히 행하지 못하는 자를 병들었다고 말한다 하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자, 자공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실언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가부(賈傅)는 길이 탄식했는데 가부는 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문제에게 올렸는데, 그 첫머리에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금의 사세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길이 한숨을 쉴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臣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하였다. 벽통배(碧筒杯) 연잎으로 만든 술잔을 가리킨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 때마다 사군림(使君林)에 가서 피서를 했는데, 항상 큰 연잎에 술 서 되를 담고 연의 잎과 줄기 사이를 비녀로 뚫어서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하고는 마치 코끼리 코처럼 구부린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셨던 데서 온 말인데, 이것을 벽통주(碧筒酒) 또는 벽통배라고도 한다. 《酉陽雜俎 酒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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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선사의 〈오서오경음〉에 차운하다 謹次先師《五書五經吟》 옛날에 사람 가르친 책이 진나라 재앙에 걸려 昔敎人書秦禍嬰세상에서 《소학》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네 世將小學視之輕어버이 사랑하고 어른 공경함이 근본이 되니 愛親敬長爲其本나라 다스리고 백성 편안케 함이 이로부터 이루어지네 治國安民自此成천년토록 회옹442)의 아름다운 은혜가 크니 千載晦翁嘉惠大여섯 편443)의 전집으로 법규가 밝아졌네 六篇全集法規明받아 읽고 옛 현인을 생각해야 하니 端宜受讀思前哲만년에 동자라고 칭한 사람도 있네444) 亦有稱童在晩齡이는 《소학》에 대해 읊은 것이다.《예기》 사십구 편에 섞여 묵혀졌으나 戴篇四九混歸陳이를 드러내 밝힌 건 낙민으로부터였네445) 表以明之自洛閩삼강령446)에는 종시의 도를 걸어 놓았고 三領揭來終始道팔조목447)은 성인과 현인의 극진한 곳이네 八條盡處聖賢人공부는 사물을 궁구하여 모든 이치에 통하길 구하고 功求格物通千理징험은 마음을 성실히 해 일신을 윤택하게 함에 있네 驗在誠心潤一身공자와 증자가 전수한 뜻 알고 싶다면 欲識孔曾傳受意후학을 인도하여 정신을 환기해야 하네 爲提後學喚精神이는 《대학》에 대해 읊은 것이다.춘추 시대 운수가 순곤448)에 들었으나 春秋世運入純坤홀로 햇빛과 같은 이십 편을 보았네 獨見陽光二十篇환퇴와 무숙의 침모는449) 안목이 없고 桓武侵侮無眼目안연과 증자의 덕행은 연원이 있네 顔曾德行有淵源허다하게 정사 논했으나 모두 처지 따랐고 幾多論政皆隨地각기 다르게 인을 말했으나 모두 한 하늘이었네 各異言仁總一天당시에 자상하게 가르친 예의 법도를 當日諄諄文禮敎청컨대 그대는 친히 들은 것으로 간주하게 請君看作耳聞親이는 《논어》에 대해 읊은 것이다.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길 항상 잊지 않았고 遏欲存天恒不忘오동 가꾸고 가시나무 없애길 채마밭 다스리듯 했네450) 培梧除棘若治場마음에 의리 기뻐하길 맛있는 추환처럼 하였고451) 悅心理義如芻美몸에 명예 베풀기를 휘황한 슬갑452)보다 낫게 여겼네 施體名譽勝芾煌왕도로 임금 권하니 괴이하게 여긴 사람 없었고 王道勸君人莫怪호연지기를 기른 큰 공을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大功養氣孰能當백리해가 진나라에 자신을 팔았다는 일453)도 밝게 분변했는데 秦奚自鬻猶明辨어찌하여 지금 선비들은 〈만장〉 편을 읽지 않는가 胡不今儒讀萬章이는 《맹자》에 대해 읊은 것이다.《중용》 책은 가장 읽기 어렵다고 하니 中庸書號最難讀완미한들 누가 즐기는 데 이를 수 있겠나 玩味誰能到悅娛육합454)과 한 마음은 이치의 창고가 되고 六合一心爲理府구경과 삼덕455)은 성실함의 요체에 있네 九經三德在誠樞장작 짊어진 당시에 중니 조부 계승하니456) 荷薪當日承尼祖순임금으로부터 천 년에 도통을 전했네 傳統千年自舜虞하학하여 끝내 현묘한 곳을 보게 되니457) 下學終看玄妙處하늘과 사람이 멀지만 서로 부합하리라 天人雖遠便相符이는 《중용》에 대해 읊은 것이다.삼백 편이 모두 어떻게 지어졌나 三百篇皆何以作성정에 근본하여 탄식을 발했네 本之情性發咨嗟말 밖에서 깊은 뜻 알아야 하니 要將言表知深意마음에서 망녕됨과 사특함을 끊었네 却向心中斷妄邪정치 성대할 적에는 존귀하게 썼으나 治盛曾爲尊貴用음악 없어진 지금은 등한한 노래로 보네 樂亡今做等閒歌그래도 근체시를 보면 유풍이 남았는데 猶看近體餘遺韻고루한 선비들 모두 겉치레만 하는구나 陋士幷歸外飾華이는 《시경》에 대해 읊은 것이다.당우삼대458) 시절에는 흉금이 컸으니 唐虞三代大胸衿후학은 지식이 넓고 깊기를 구해야 하네 後學當求識廣深전고와 훈모459)는 모두가 이 일이고 典誥訓謨皆厥事덕 어짊 성실 공경은 모두 이 마음이네 德仁誠敬總斯心글은 이제와 옛날의 때에 따라 지었으나460) 文雖今古因時作의리는 선위 정벌한 곳이 다름에서 찾을 수 있네461) 義可禪征異處尋이 책을 읽고도 정치할 줄을 모른다면 讀此不知爲政治책상에 놓고 조석으로 읊은들 무슨 소용이랴 尊丌何益暮朝吟이는 《서경》에 대해 읊은 것이다.삼백 삼천462)은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三百三千毋不敬하늘 이치를 사람 몸에 부쳐 드러냈네 將天理寓人身彰이미 경전 속에 공정한 마음 나타냈으나 旣經傳裏公心見간혹 주소 가운데 사사로운 뜻 담겼네 或註疏中私意藏나라와 향리에도 모두 절도가 있는데 邦國家鄕皆有節군신과 부자에 어찌 기강이 몰락하겠나 君臣父子豈淪綱한탄스럽게도 예의를 크게 잃은 지금은 堪歎大失如今日점차 짐승처럼 되는데도 상관하지 않네 轉入翔蹄認不妨이는 《예경(禮經)》에 대해 읊은 것이다.《주역》은 사람이 지었으나 오묘함은 하늘이 냈으니 作易由人妙自天제가의 주석과 설명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일까 諸家註說孰爲眞어찌 암말을 말하고 날아가는 새463)를 말했을까 胡言牝馬胡飛鳥혹 군대 동원이 이롭고 혹 큰물 건넘이 이롭네464) 或利行師或涉川부로465)는 말로 인해서 항상 이치에 부합하였고 涪老因辭常附理요부466)는 수를 미루어 신명에 통한 듯하였네 堯夫推數若通神회옹이 터득한 것을 모두 본의467)에 쏟았으니 總輸本義晦翁得읽는 자들은 여기에 나아가 연구해야 하네 讀者須宜就此硏이는 《역경(易經)》에 대해 읊은 것이다.부월의 주벌과 화곤의 포상468)을 만년토록 전하니 銊誅袞褒萬年垂난신적자가 몰래 엿보길 단념한 일이 많았으리라 亂賊應多斷竊窺대법469)은 밝게 빛나서 쉽게 볼 수 있지만 大法炳朗雖易見은미한 말은 심오하여 더욱 알기 어렵네 微言深奧更難知천착하여 사사로운 뜻을 쓸 필요가 없고 不須穿鑿用私意평순하게 본문의 내용에 의거하면 되네 且可順平依本辭무엇보다 지금 공자를 높이는 자들이 最是而今尊孔者이러한 뜻 경시하고 무얼 하려 하는가 弁髦此義欲何爲이는 《춘추》에 대해 읊은 것이다. 昔敎人書秦禍嬰, 世將《小學》視之輕.愛親敬長爲其本, 治國安民自此成.千載晦翁嘉惠大, 六篇全集法規明.端宜受讀思前哲, 亦有稱童在晩齡.【《小學》】戴篇四九混歸陳, 表以明之自洛閩.三領揭來終始道, 八條盡處聖賢人.功求格物通千理, 驗在誠心潤一身.欲識孔曾傳受意, 爲提後學喚精神.【《大學》】春秋世運入純坤, 獨見陽光二十篇.桓武侵侮無眼目, 顔曾德行有淵源.幾多論政皆隨地? 各異言仁總一天.當日諄諄文禮敎, 請君看作耳聞親.【《論語》】遏欲存天恒不忘, 培梧除棘若治場.悅心理義如芻美, 施體名譽勝芾煌.王道勸君人莫怪, 大功養氣孰能當?秦奚自鬻猶明辨, 胡不今儒讀《萬章》?【《孟子》】《中庸》書號最難讀, 玩味誰能到悅娛4)?六合一心爲理府, 九經三德在誠樞.荷薪當日承尼祖, 傳統千年自舜虞.下學終看玄妙處, 天人雖遠便相符.【《中庸》】三百篇皆何以作? 本之情性發咨嗟.要將言表知深意, 却向心中斷妄邪.治盛曾爲尊貴用, 樂亡今做等閒歌.猶看近體餘遺韻, 陋士幷歸外飾華.【《詩經》】唐虞三代大胸衿, 後學當求識廣深.典誥訓謨皆厥事, 德仁誠敬總斯心.文雖今古因時作, 義可禪征異處尋.讀此不知爲政治, 尊丌何益暮朝吟?【《書經》】三百三千毋不敬, 將天理寓人身彰.旣經傳裏公心見, 或註疏中私意藏.邦國家鄕皆有節, 君臣父子豈淪綱?堪歎大失如今日, 轉入翔蹄認不妨.【《禮經》】作《易》由人妙自天, 諸家註說孰爲眞?胡言牝馬胡飛鳥? 或利行師或涉川.涪老因辭常附理, 堯夫推數若通神.總輸本義晦翁得, 讀者須宜就此硏.【《易經》】銊誅袞褒萬年垂, 亂賊應多斷竊窺.大法炳朗雖易見, 微言深奧更難知.不須穿鑿用私意, 且可順平依本辭.最是而今尊孔者, 弁髦此義欲何爲?【《春秋》】 회옹(晦翁) 송나라 주희(朱熹)의 호인데, 흔히 다른 호인 회암(晦菴)을 존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섯 편 《소학》 내편(內篇)의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계고(稽古)〉과 외편(外篇)의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을 말한다. 만년에……있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그는 스승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으로부터 《소학》에서 학문을 시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평생 《소학》을 읽으며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예기……낙민(洛閩)으로부터였네 《예기》 49편 중 42번째에 들어있던 《대학》을 정자(程子)가 표장(表章)하고 주자(朱子)가 제가(諸家)의 설을 종합 절충하여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음으로써 유가 정통의 경전으로 위치를 굳힌 것을 말한다. '낙민'은 정주(程朱)와 같은 말이다. 낙(洛)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고, 민(閩)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삼강령(三綱領)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지선에 머무는 것[止於至善] 세 가지를 말한다. 팔조목(八條目) 삼강령(三綱領)에 따른 구체적 덕목인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 여덟 가지를 말한다. 순곤(純坤) 상하괘가 모두 곤(坤)으로 이루어진 괘로,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효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환퇴(桓魋)와 무숙(武叔)의 침모(侵侮)는 춘추 시대 송(宋)나라의 사마환퇴(司馬桓魋)가 나무를 베어 공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일과 노(魯)나라의 대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은 일을 말한다. 오동……했네 맹자가 중대한 자기의 심지(心志)를 잘 길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지금 원예사가 오동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값어치 없는 원예사가 되는 것이다.〔今有場師, 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라고 하였다. 마음에……하였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리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추환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한 것을 말한다. 추환(芻豢)은 초식동물인 소ㆍ양 따위와 곡식을 먹는 짐승인 개ㆍ돼지 따위로서,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을 뜻한다. 휘황한 슬갑 《시경》 〈사간(斯干)〉에 "붉은 슬갑이 휘황찬란하니 실가를 두고 군왕이 되리로다.〔朱芾斯皇, 室家君王.〕"라고 하였는데,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한다. 백리해(百里奚)가……일 《맹자》 〈만장 상(萬章上)〉의 제9장에 보인다. 육합(六合) 천지와 사방을 가리키는 말로, 거대한 우주를 의미한다. 구경(九經)과 삼덕(三德) 삼덕은 삼달덕(三達德)을 줄여서 쓴 것으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세 가지 덕을 가리키는바, 곧 지(智)ㆍ인(仁)ㆍ용(勇)을 이른다. 구경은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법칙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뭇 신하들을 내 몸처럼 여기는 것[體群臣],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子庶民], 백공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복종시키는 것[懷諸侯]이다. 《中庸章句 第20章》 장작……계승하니 자사자(子思子)가 할아버지인 공자의 가업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하신(荷薪)'은 장작을 등에 진다는 말로, 선업(先業)을 계승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에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 하였는데, 이를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 하학(下學)하여……되니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배우면서 오묘한 천리(天理)를 통달한다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을 표현한 것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한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라고 하였다. 당우삼대(唐虞三代)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 시대와 하(夏)나라ㆍ은(殷)나라ㆍ주(周)나라 시대의 태평성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전고(典誥)와 훈모(訓謨) 《서경》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의 전(典)과 〈탕고(湯誥)〉ㆍ〈강고(康誥)〉 등의 고(誥)와 〈이훈(伊訓)〉의 훈(訓)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의 모(謨)를 합칭한 말로 옛날 성현의 말씀, 즉 경전의 글을 뜻한다. 글은……지었으나 《서경》에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음을 말한다. 《금문상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진(秦)나라의 박사였던 복생(伏生)의 구술을 받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隷書)로 기록한 것이며, 《고문상서》는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된 원래의 《상서》로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벽 속에서 이를 찾아내었다. 의리는……있네 요(堯)가 순(舜)에게, 순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한 일과 탕(湯)임금이 걸왕(桀王)을,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죽인 일 등을 말한다. 삼백 삼천(三百三千) 예(禮)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다. 예에 있어서 대강(大綱)이 되는 것을 경례(經禮)라 하고, 그 대강을 실천하기 위하여 필요한 절차에 관한 것을 곡례(曲禮)라 한다. 암말을…새 원문의 '빈마(牝馬)'는 암말로 음(陰)을 뜻하는데, 암말이 유순하고 굳건히 걸어가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주역》 〈곤괘(坤卦)〉에 "곤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암말의 정(貞)함이다.〔坤, 元, 亨, 利, 牝馬之貞.〕"라고 하였다.소과(小過)의 초육(初六) 《주역》 〈소과괘(小過卦)〉에, "초육은 나는 새처럼 빠르니 흉하다.〔初六, 飛鳥以凶.〕"라고 하였는데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비조이흉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飛鳥以凶, 不可如何也.〕"라고 하였다. 군대……이롭네 《주역》 〈예괘(豫卦)〉에 "예는 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함이 이롭다.〔豫, 利建侯行師.〕"라고 하였으며, '큰물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利涉大川〕'라는 말은 《주역》의 괘사(卦辭)에 자주 나온다. 부로(涪老) 부주(涪州)라는 곳으로 유배를 갔던 송나라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그는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서도 돌아올 때는 수염과 모발이 그전과 같았으므로 모두 그 학문의 힘에 탄복했다고 한다. 《心經附註 卷2 正心章》 요부(堯夫) 북송(北宋)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자이다. 일생을 낙양(洛陽)에 숨어 살면서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와 교유하였다. 《주역》에 정통하였으며, 역전(易傳)에 근거하여 팔괘(八卦)를 해석하였고, 도가 사상을 참고하여 '상수학(象數學)'을 개창하였다. 저서로 《격양집(擊壤集)》과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이 있다. 본의(本義) 남송 때 주자(朱子)가 《주역》을 풀이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가리킨다. 부월(斧鉞)의……포상(褒賞) 중벌과 포상을 의미한다. 부월(斧鉞)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주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화곤(華衮)은 고대 왕공(王公)과 귀족의 복장으로 지극한 영예를 뜻하는 말인데, 진(晉)나라 범녕(范寧)의 〈춘추곡량전 서(春秋穀梁傳序)〉에 "《춘추》의 한 글자의 칭찬이 화곤을 받는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한 마디의 비판이 시장에서 맞는 회초리보다도 욕스럽다.〔一字之褒, 寵逾華袞之贈; 一言之貶, 辱過市朝之撻.〕"라는 말이 나온다. 대법(大法) 국가의 근본적인 법을 말한다. 娛 底本에는 "悞".《艮齋集》 卷6 〈五書五經吟〉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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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402)의 〈어떤 사람에게 주다〉 시에 화운403)하다 和百拙《贈人》韻 평탄한 길을 가는 건 사람이 그윽해서니404) 履行坦道是人幽구함이 없음도 구하는 것임을 누가 알랴 誰識無求也有求정세함은 세 가닥 줄을 나누는 것 같고 精細若分三合繩고명함은 백 층 누대에 오르는 것 같네 高明如上百層樓구학을 잊지 않아야405) 참된 선비 되는데 不忘溝壑爲眞士부끄럽게 향원406)이 되어 속류들과 섞였네 羞作鄕愿混俗流끊임없이 방문하겠다는 약속 진중하니 訪問源源珍重約다만 이 일을 가지고 아득한 데 이르네 直將此事到悠悠 履行坦道是人幽, 誰識無求也有求?精細若分三合繩, 高明如上百層樓.不忘溝壑爲眞士, 羞作鄕愿混俗流.訪問源源珍重約, 直將此事到悠悠. 백졸(百拙) 최태일(崔泰鎰, 1899~?)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중(汝重)이다. 전라북도 고부(高阜) 출생으로, 전우(田愚)와 김택술(金澤述)을 사사하여 학행으로 알려졌다. 저서에 《백졸사고(百拙私稿)》 5권 3책이 있다. 화운(和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써서 답시(答詩)를 짓는 것으로, 운부(韻部)는 같으나 글자가 다르다. 원시(原詩)와 운은 같으나 앞뒤의 순서를 달리하는 것을 용운(用韻), 운과 전후의 순서가 모두 같은 것을 보운(步韻)이라 한다. 탄탄한……그윽해서니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의 "바른 길을 밟으니 탄탄하다.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라야 바르고 곧으며 길하리라.〔履道坦坦, 幽人貞吉.〕"라는 말을 변용한 표현이다. 구학(溝壑)을 잊지 않아야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죽더라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 향원(鄕愿) 시골에서 후(厚)하고 틀림없는 듯이 행동하여, 남에게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실상을 알아보면 위선자에 불과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愿德之賊]"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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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407)를 보고 정축년(1937) 視新都【丁丑】 하늘이 만든 계룡산은 웅장하고도 기이해 天作鷄龍雄且奇사람들은 이곳이 제왕의 터전이라 말하네 人言此是帝王基예전에 태조가 도읍지를 살펴보던408) 날에 在昔太祖胥宇日먼저 이 산에 나아가서 시귀409)에게 물었네 先就玆山問蓍龜신도라는 명칭이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新都之稱傳至今주춧돌은 완연하여 어제와 같네 石礎宛然如昨時오래잖아 지운이 돌아온다고 다투어 말하니 爭道非久地運回사방에서 모여 들어서 뒤쳐질까 걱정하네 四方輻湊恐後遲양지쪽은 봄이 쉽게 이른다는 옛말 있기에 向陽易春古有語장수 재상으로 부귀 누리길 바라는 것이네 將相富貴是所希금전은 이미 얼마나 허비하였을까 金錢旣曾費多少전답 또한 척박함과 비옥함을 따지지 않네 田疇更不計瘠肥여러 종교가 분분하여 셀 수도 없고 衆敎紛紛不可數교당은 곳곳마다 있어 꿩이 나는410) 듯하네 敎室處處如彙飛묻노니 너희들 하나하나 마음 속의 일은 問爾箇箇心中事정녕 훗날에 제왕의 사부가 되는 것이리 定是他日王者師내 듣건대 풍운이 용호를 따른다411) 하니 我聞風雲從龍虎어찌 그루터기 지켜 토끼와 삵을 기다리랴412) 豈有守株待兔貍원래 하늘의 운수는 예측하기 어려운데 元來天數難預測누가 참위413)가 환히 알 수 있다고 하는가 誰云讖緯可明知지령에 대한 믿음과 운수의 빠름과 늦음은 地靈信否運早晩그 이치가 아득하여 모두 기약할 수 없네 厥理茫茫總未期슬프구나 무식하여 보잘것없는 부류여 哀哉無識庸庸流세상을 미혹하고 사기 치는 게 가증스럽네 又憎惑世挾詐欺영화 구해도 얻지 못하고 해가 이미 따르는데 求榮未得害已隨집안 망하고 가르침 흩어져도 굶주림 감수하네 家破敎散甘受飢다만 성현의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只緣未讀聖賢書분수 아닌 욕망을 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非分慾望一何痴 天作鷄龍雄且奇, 人言此是帝王基.在昔太祖胥宇日, 先就玆山問蓍龜.新都之稱傳至今, 石礎宛然如昨時.爭道非久地運回, 四方輻湊恐後遲.向陽易春古有語, 將相富貴是所希.金錢旣曾費多少? 田疇更不計瘠肥.衆敎紛紛不可數, 敎室處處如彙飛.問爾箇箇心中事, 定是他日王者師.我聞風雲從龍虎, 豈有守株待兔貍?元來天數難預測, 誰云讖緯可明知?地靈信否運早晩? 厥理茫茫總未期.哀哉無識庸庸流, 又憎惑世挾詐欺.求榮未得害已隨, 家破敎散甘受飢.只緣未讀聖賢書, 非分慾望一何痴? 신도(新都)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지역으로, 주초(柱礎)와 제방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계룡산(鷄龍山) 아래에 있다. 조선 태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결국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 하여 그만두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8 忠淸道 連山縣》 도읍지를 살펴보던 원문의 '서우(胥宇)'는 집터를 살펴보아 잡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도읍지를 살펴보아 정하는 뜻으로 쓰였다. 《시경》 〈면(綿)〉에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니 이에 강녀와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귀(蓍龜) 시(蓍)는 점을 칠 때에 쓰는 시초(蓍草)이고 귀(龜) 역시 점칠 때 사용하는 거북 껍데기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중대한 일을 잘 결단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제구양문충공문(祭歐陽文忠公文)〉에 구양수(歐陽脩)를 평하여 "공이 세상에 산 것이 66년인데 백성들은 부모가 있고 국가에는 시귀가 있었네.〔公之生於世, 六十有六年, 民有父母, 國有蓍龜.〕"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91》 꿩이 나는 대본의 '彙飛'를 '翬飛'의 오기(誤記)로 보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휘비(翬飛)'는 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추녀를 뜻하는데, 화려한 건축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사간(斯干)〉에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如翬斯飛〕"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에 "처마가 화려하고 높으며 날아갈 듯함은 꿩이 날아 날개를 펴는 것과 같다.〔其簷阿華采而軒翔, 如翬之飛而矯其翼也.〕"라고 하였다. 풍운(風雲)이 용호(龍虎)를 따른다 용호가 풍운을 만나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제회(際會)함을 이른 말이다. 그루터기……기다리랴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를 변용한 표현으로, 한 군데만 집착하고 변통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사람이 밭을 갈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을 보자,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기 바랐으나, 결국 다시 얻지 못하고 마침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韓非子 五蠹》 참위(讖緯)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조짐이나 그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 참(讖)은 도참(圖讖)이라고도 하며, 황당무계한 문자나 도상(圖像)을 이용한 은밀한 은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거나 길흉화복(吉凶禍福) 및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예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위(緯)는 주술적 이론을 사용하여 경전, 즉 유교경전을 해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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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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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군 운약에게 써 준 서문 贈鄭君雲躍序 지금까지 영남 내의 여러 군(君)들을 전별하며 말을 해준 것이 다소 없지 않지만, 유독 운약(雲躍)의 요청에 더욱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나와 운약은 지난봄에 뇌룡정(雷龍亭)127)에서 한 번 만나고, 지금 또 화엄사(華巖寺)에서 다시 만났으니, 교분이 오래되고 마음이 맞았다. 게다가 운약이 애산옹(艾山翁)128)의 종부제(從父弟)가 됨에랴. 그 교분과 정분으로 보면 구구하나마 한마디 말을 해주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뒤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발굽에 고인 물은 바다를 구경한 눈에는 물로 보이기 어렵고, 반딧불의 빛은 촛불을 마주한 자리에서 빛이 되기 어렵다. 나는 운약에게 발굽에 고인 물이나 반딧불이 되겠지만 사양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털끝만큼이나마 보탬이 되려함은 어째서인가? 말을 해주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고,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다.명(明)나라의 유학자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저명한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지만, 일반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비단 자손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친속(親屬 친족)의 경우도 그렇다. 선(善)은 크지 않으면 책무에 걸맞을 수 없고, 악은 비록 작더라도 오히려 조롱을 끼칠 수 있으니, 운약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내가 운약에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말을 해준다면 이 말보다 먼저 말해줄 것이 없으니, 운약은 힘쓰기 바란다. 今爲嶺中諸君之別。不無多少贈言。而獨於雲躍之請。尤有所不敢者何哉。吾與雲躍。去年春。一見於雷龍亭。今又再見於華巖寺。舊交矣心契矣。而又爲艾山翁從父弟乎。以其契誼。則區區一言之贈。必不在他人之後矣。然蹄涔之滴。難爲水於觀海之眼。螢爝之光。難爲照於對燭之筵。吾於雲躍。爲蹄涔螢爝。有所不辭。而其絲毫之補何。不欲無言者。爲艾翁之弟故也。不敢有言者。亦艾翁之弟故耳。明儒方遜志有言曰。人莫不喜爲名人子孫。而不知其尤難於衆人。非但子孫爲然。在親屬亦然。善不大。則不足以稱其責。惡雖小。而猶足以貽其譏。雲躍知之乎。吾於雲躍。不告則已。如告之。則無有先於此者。願雲躍勉之。 뇌룡정(雷龍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45세 때 모친의 상을 당하고 고향인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여묘를 마친 뒤에 이곳에 세운 정자로, 60세까지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애산옹(艾山翁)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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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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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四十四年辛亥三月初二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䖏塲故伏在一道面堂后里後坪鞠字十七号畓五斗落所耕十三負甲㐣価折錢文參佰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三張果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買爲去乎日後若有異言則持此文憑考事畓主 幼學 金洛坤[着名]證人 幼學 崔震煥[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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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拾㱏年辛卯四月初三日幼學金載相前明文右明文事段養父身死後如干稅米辦納無路故勢不得已西十作悚字丁陳荒䖏南長㱏百二十尺東光三十尺価折參十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某人中若有異言之獘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柴塲主 喪人 朴羣坪金[喪人]證人 朴良坤[着名]茟執 幼學 金相垕[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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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二十年乙亥九月初七日幼學金載相前明文右明文事傳來柴塲悚字陳荒䖏累年禁養矣右人親葬次定限界折價拾參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族屬中若有紛紜之端以此告 官卞正事限界東至朴成良田南至朴春興畓西至朴龍仁田北至趙哥塚柴塲主 幼學 朴乃伯[着名]訂人同姓侄 辰汝[喪人]筆同姓侄 光汝[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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