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병 열 폭의 그림 뒤에 삼가 쓰다 병서 ○신묘년(1951) 敬題祭屛十幅圖畵後【幷序 ○辛卯】 제병 열 폭에 선조(先祖)의 덕행을 열거해 쓰고 아울러 그림을 그려서 추모의 뜻을 부쳤다. '금강산(金剛山)의 충의[金剛忠義]'란 것은 원조(遠祖) 마의태자(麻衣太子)402)의 일이며, '영은사(靈隱寺)에 제영하다[靈隱題詠]'란 것은 24대조 복야공(僕射公)403)의 일이며, '불교를 배척하고 불경을 조소하다[斥佛嘲經]'란 것은 23대조 문정공(文貞公)404)의 일이며, '역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다[討賊安邦]'란 것은 15대조 첨지공(僉知公)405)의 일이며, '매죽과 짝할 만한 고고한 풍치[梅竹高致]'란 것은 13대조 생원공(生員公)406)의 일이며, '모당(慕堂)과 월사(月沙)와 도의(道義)로 사귀다[慕月道交]'란 것은 11대조 죽계공(竹溪公)407)의 일이며, '용성에서 창의하다[龍城倡義]'란 것은 10대조 참봉공(參奉公)408)의 일이며, '낙요당(樂要堂)409)에서 강학하다[要堂講學]'란 것은 선고(先考) 벽봉공(碧峰公)410)의 일이다. 각각 오언절구(五言絶句)로 그 행실을 대략 기록하였다. 신묘년 맹춘(孟春)에 택술이 삼가 쓰다.금강산이 사해에 이름난 건 金剛名四海참으로 까닭이 있으니 良有厥由而마의태자의 사적이 아니라면 不是麻衣蹟한갓 기이한 수석일 뿐이라네 徒然水石奇-금강산의 충의[金剛忠義]-바위틈 샘물은 밤낮으로 내리는 비요 石泉日夜雨소나무에 걸린 달은 고금의 등불일세 松月古今燈복야공이 영은암에서 시 읊으니 僕射靈菴詠천추의 풍아411)에 등재되었도다 千秋風雅登-영은사(靈隱寺)에 제영하다[靈隱題詠]-《원각경》에서 주장하는 이단의 설을 啾啾圓覺經일필휘지로 남김없이 쓸어버렸다오412) 一筆掃淸之아득히 멀리 창려413)의 뒤를 이으니 邈爾昌黎後사문에 공이 참으로 작지 않도다 斯文功不微-불교를 배척하고 불경을 조소하다[斥佛嘲經]-맑고 깨끗한 연적암414) 아래에 淸絶硯巖下몇 칸의 공자 사당이 있다오 數間夫子祠해동의 아름다운 추로 풍속415)이 海東鄒魯俗이곳을 뿌리 삼아 가지를 뻗었네 根此達其枝-문묘(文廟)를 창건하여 초상을 봉안하다[創廟奉像]416)-신복이 되지 않음은 태사의 절의이니417) 罔僕太師節그 풍모를 들었고 또 공을 보았네 聞風又見公당시에 덕을 함께한 벗으로는 當時同德友정문충공418) 같은 분이 계셨다오 有若鄭文忠-신복(臣僕)이 되지 않고 귀향하다[罔僕歸鄕]419)-북쪽 변방에 전란이 일어나니420) 北塞風塵起조정의 근심이 참으로 깊었네 朝廷憂正深문무의 재주를 모두 완비했으니 全材文武備산해의 요기를 말끔히 제거했다오 山海淨氛祲-역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다[討賊安邦]-대나무는 깨끗하여 속되지 않고 竹兮淸不俗매화도 정결하여 티끌 한 점 없다오 梅亦潔無塵담박하기 그지없는 선생의 풍취여 淡泊先生趣진실로 매죽과 짝할 만하여라 固亦與作隣-매죽과 짝할 만한 고고한 풍치[梅竹高致]-유문에는 모당옹421)이 있고 儒門慕堂老문원에는 월사옹422)이 있는데 文苑月沙翁같은 소리와 기운은 서로 찾는 법이니423) 聲氣相求處정신으로 교유해 한 몸과 같았다오 神交一體同-모당과 월사와 도의(道義)로 사귀다[慕月道交]-적현424)의 운수가 다하려 할 때 赤縣運將訖청구425)가 먼저 해를 입었다오 靑邱先受傷호남에 뜻있는 선비 많으니 湖南多志士의로운 군대426)가 명성을 길이 떨쳤도다 師直義聲長-용성에서 창의하다[龍城倡義]-초당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草堂何所事교재427)에 글 읽는 소리 울리누나 橋梓有書聲간옹의 글이 진중하기 그지없으니 珍重艮翁筆낙요명을 대대로 전하리라428) 世傳樂要銘-낙요당(樂要堂)에서 강학하다[要堂講學]- 祭屛十幅, 列書先德, 幷作圖畵, 以寓追慕.其曰'金剛忠義'者, 遠祖麻衣太子事也; 其曰'靈隱題詠'者, 二十四世祖僕射公事也; 其曰'斥佛嘲經'者, 二十三世祖文貞公事也; 其曰'討賊安邦'者, 十五世祖僉知公事也; 其曰'梅竹高致'者, 十三世祖生員公事也; 其曰'慕月道交'者, 十一世祖竹溪公事也; 其曰'龍城倡義'者, 十世祖參奉公事也; 其曰'要堂講學'者, 先考碧峰公事也.各以五言小絶, 略記其實.辛卯孟春, 澤述謹識.金剛名四海, 良有厥由而.不是麻衣蹟, 徒然水石奇.【金剛忠義】石泉日夜雨, 松月古今燈.僕射靈菴詠, 千秋風雅登.【靈隱題詠】啾啾圓覺經, 一筆掃淸之.邈爾昌黎後, 斯文功不微.【斥佛嘲經】淸絶硯巖下, 數間夫子祠.海東鄒魯俗, 根此達其枝.【創廟奉像】罔僕太師節, 聞風又見公.當時同德友, 有若鄭文忠.【罔僕歸鄕】北塞風塵起, 朝廷憂正深.全材文武備, 山海淨氛祲.【討賊安邦】竹兮淸不俗, 梅亦潔無塵.淡泊先生趣, 固亦與作隣.【梅竹高致】儒門慕堂老, 文苑月沙翁.聲氣相求處, 神交一體同.【慕月道交】赤縣運將訖, 靑邱先受傷.湖南多志士, 師直義聲長.【龍城倡義】草堂何所事? 橋梓有書聲.珍重艮翁筆, 世傳樂要銘.【要堂講學】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태자인 김일(金鎰)로, 마의(삼베옷)를 입고 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신흥 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어 항복하자, 태자가 이에 반대하여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복야공(僕射公) 고려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김의(金宜)이다. 다른 이름으로 정립(挺立) 또는 정립(鼎立)이 있다. 말년에 변산(邊山)의 영은사(靈隱寺)에 있었는데, 〈영은사〉 시 한 수가 전한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로, 자는 차산(次山), 초명은 백일(百鎰),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의 명현으로, 문장과 도덕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첨지공(僉知公) 세조(世祖) 때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보칠(金甫漆)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다. 지방관으로 16개 고을을 잘 다스렸다. 생원공(生員公) 김종(金宗, 1471~1538)으로, 자는 사앙(士仰),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과업(科業)을 폐하였다. 매죽(梅竹)을 심고 가꾸면서 청고(淸高)함으로 자신을 수양하였다. 죽계공(竹溪公) 김굉(金鋐)으로, 자는 여기(汝器), 호는 죽계이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학덕(學德)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등에 제수되었다. 참봉공(參奉公)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지낸 김정길(金鼎吉, 1576~1645)로, 자는 응구(應九)이다.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하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까지 진격하였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해산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 등에 실려 있다. 낙요당(樂要堂)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 1859~1909)이 강학(講學)했던 초당(草堂)이다. 벽봉공(碧峰公) 김낙진으로, 자는 치일(致一), 호는 벽봉이다. 약관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겸와(謙窩) 홍주후(洪疇厚)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풍아(風雅) 국풍(國風) 및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뜻하는 것으로, 《시경》을 가리킨다. 원각경에서……쓸어버렸다오 고려 고종(高宗) 때 권신 최항(崔沆)이 김구(金坵)에게 《원각경(圓覺經)》의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청하자, 김구는 바른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고 시(詩)를 지어 최항을 꾸짖으니, 최항이 이에 앙심을 품고 김구를 제주 통판(濟州通判)에 좌천시킨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이 고사를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正祖實錄 14年 2月 13日》 창려(昌黎) 당나라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호이다. 그는 〈원도(原道)〉, 〈논불골표(論佛骨表)〉 등을 지어서 유학을 옹호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연적암(硯滴巖) 강릉 향교 옆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바위를 말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4》 추로(鄒魯) 풍속 추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태어난 고향으로, 학문과 예악이 성대한 풍속을 이른다. 문묘(文廟)를……봉안하다 후창의 22대조 김여우(金汝盂)의 일을 읊은 것이다. 김여우의 다른 이름은 종우(宗盂),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원(元)나라로부터 문묘 제도를 도입하여 강릉(江陵)에 문묘를 처음 세웠다. 이 유문(儒門)의 공로로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다. 신복(臣僕)이……절의이니 원문의 망복(罔僕)은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의를 이른다. 태사(太師)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로 태사 벼슬을 지낸 기자(箕子)를 이른다. 은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주(周)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하였다. 《書經 微子》 정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이다. 고려조의 충신으로서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를 숙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신복(臣僕)이……귀향하다 후창의 17대조 김광서(金光敍)의 일을 읊은 것이다. 김광서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세 형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지키며 부안읍(扶安邑) 옹정(瓮井)에 살았다. 북쪽……일어나니 1467년(세조13)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북방 지역 사람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른바 '이시애의 난'을 두고 말한 것이다. 모당옹(慕堂翁) 홍이상(洪履祥, 1549~1615)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 호는 모당,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행촌(杏村) 민순(悶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양의 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월사옹(月沙翁) 이정귀(李廷龜, 1564~1635)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같은……법이니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뜻한다. 적현(赤縣)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중원(中原) 지방을 '신주적현(神州赤縣)'이라고 일컬은 데에서 유래하였다.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의로운 군대 원문의 사직(師直)은 군사의 명분이 바르다는 말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에 "군사의 명분이 바르면 사기가 왕성하고, 명분이 없으면 사기가 쇠한다.[師直爲壯, 曲爲老.]"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교재(橋梓) 교목(橋木)과 재목(梓木)으로, 아버지와 아들, 부도(父道)와 자도(子道)를 의미한다. 주(周)나라 백금(伯禽)이 아버지인 주공(周公)을 찾아갈 때마다 회초리를 맞고 돌아왔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현인(賢人)인 상자(商子)의 가르침을 듣고서, 남산의 양지에 의젓하게 있는 교목을 보고서 부도를 깨닫고, 음지에서 겸손하게 고개 숙인 재목을 보고서 자도를 깨달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說苑 建本》 간옹(艮翁)의……법이니 간옹은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낙요명(樂要銘)은 간재가 김낙진을 위해 지어준 〈낙요재명(樂要齋銘)〉을 이른다. 《艮齋集 前編續 卷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