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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1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十二年七月 日 純祖 金養默 道光十二年七月 日 純祖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32년 김양묵에게 내려 준 교첩 1832년(순조 32) 7월 이조(吏曹)에서 왕의 명령을 받들어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김양묵(金養默)을 통덕랑(通德郞) 승문원박사 겸 봉상시직장(承文院博士兼奉常寺直長)으로 임명하면서 내린 교첩(敎牒)이다. 교첩이란 5품 이하의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임명장을 말한다. 승문원저작은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 등에서 근무하던 정8품직 관리를 말하며, 통덕랑(通德郞)은 정5품 문산계이다. 그리고 승문원박사는 정7품직이다. 따라서 김양묵은 정8품직에서 정7품직으로 승진한 셈이다. 김양묵은 1829년(순조 2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을 보면 '이〃(吏〃) 김정호(金貞浩) '라는 기록이 있다. '이이(吏吏)'는, 이조(吏曹)의 서리(胥吏)를 지칭하는데,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도 불렸다. 즉 김양묵의 고신을 작성해 준 사람이 김정호였다. 김양묵은 김응상(金膺相)의 아들로,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아들 김양묵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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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曹道光十二年七月二十八日奉敎承文院著作金養默爲通德郞承文院博士兼奉常寺直長者道光十二年七月 日 [施命之寶]正郎判書 參判 參議佐郞(背面)吏〃 金貞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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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김양묵(金養默) 차첩(差帖) 고문서-교령류-차첩 정치/행정-임면-차첩 乙丑七月 日 兼任行縣令爲差定事 前掌令金養黙 乙丑七月 日 扶安縣監 金養默 전라북도 부안군 6.7*6.7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65년(고종 2) 7월에 겸임(兼任) 행현령(行縣令)이 전(前) 장령(掌令) 김양묵(金養黙)을 석전제초헌관(釋奠祭初獻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차첩(差帖) 1865년(고종 2) 7월에 겸임(兼任) 행현령(行縣令)이 전(前) 장령(掌令) 김양묵(金養黙)을 다음 달 초5일에 있을 석전제(釋奠祭)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차첩(差帖)이다. 이때의 석전제는 문묘(文廟)가 아니라 향교(鄕校)에서 공자(孔子) 등 선성(先聖), 선사(先師)들에게 행해지는 제사를 가리킨다. 초헌관은 제례에서 삼헌(三獻)을 할 때 처음으로 술잔을 신위(神位)에 올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현령이 어느 곳의 현령인지 이 문서로는 확인할 없고, 향교 또한 어느 곳의 향교인지 알 수 없다. 김양묵이 부안(扶安) 출신이지만, 부안은 현령이 아닌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이었기 때문에 이곳이 부안일 수는 없다. 아마도 부안 인근의 고을에서 퇴직한 원로였을 61세의 김양묵을 석전제의 초헌관으로 초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령이 다스렸던 만경(萬頃), 용담(龍潭), 임피(臨陂) 가운데 어느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김양묵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1829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받았던 고신(告身)들이 그의 후손 가에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문과 응시 당시 작성했던 시권(試券)과 급제하여 받았던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고신 16점, 차첩 2점 등 20점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할머니, 고조와 고조할머니 등이 받았던 고신 20점이 전하고 있는데 대부분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이 추증교지는 김응상이 고신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받았던 것들이다. 고신 외에 김응상이 1819년부터 1855년까지 작성했던 호구단자(戶口單子) 7점도 전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응상은 생전에 부안현 남하면 돈계리에 내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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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더위 酷熱 겹겹의 더운 구름 자욱하여 걷히지 않고 疊疊炎雲鬱未開축융121)의 엄한 명으로 중복이 돌아왔네 祝融酷令再回庚때때로 두보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으니122) 有時欲發少陵叫어디서 하삭의 술잔123) 기울일 수 있을까 何處能傾河朔杯돌은 벌겋게 달아올라 부술 수 있을 듯하고 石見爍紅疑可碎산은 까맣게 타서 장차 무너질 것만 같네 山經焦黑若將頹만백성을 말끔히 소생시킬 일 머지않았으니 淸蘇萬姓前期在옥우124)에서 하룻밤에 가을바람 재촉하리라 玉宇金風一夕催 疊疊炎雲鬱未開, 祝融酷令再回庚.有時欲發少陵叫, 何處能傾河朔杯?石見爍紅疑可碎, 山經焦黑若將頹.淸蘇萬姓前期在, 玉宇金風一夕催. 축융(祝融) 고대 화신(火神)의 이름이자, 남방(南方) 또는 남해(南海)를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관자(管子)》 〈오행(五行)〉에, "사룡을 얻어 동방을 다스리고, 축융을 얻어 남방을 다스렸다.〔得奢龍而辯於東方, 得祝融而辯於南方.〕"라고 하였다. 두보(杜甫)처럼……싶으니 너무나 더워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말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초가을 무더위에 시달리는데 문서가 계속 쌓이네[早秋苦熱堆案相仍]〉에 "관복 띠를 매니 더워 미칠 듯 크게 소리 지르고자 하는데, 문서는 어찌 급하게 서로 이어서 쌓이는가?〔束帶發狂欲大叫, 簿書何急來相仍?〕"라는 구절이 있다. '소릉(少陵)'은 두보의 호이다. 하삭(河朔)의 술잔 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와 하삭에서 삼복(三伏) 무렵에 술자리를 벌이고 밤낮으로 정신없이 마셔댄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옥우(玉宇) 옥우경루(玉宇瓊樓)라 하여 달 속에 있는 궁궐을 말하는데, 천제(天帝)가 있는 하늘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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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정 윤섭 의 별장에서 崔春汀【潤燮】庄上 덕산 남쪽에서 문을 닫고 높이 누으니 閉門高臥德山陽세상 길 평탄치 않아 온통 태항산98)이네 世路難平盡太行접역99)의 의관에는 전범이 남아 있고 鰈域衣冠餘典範이정100)의 시례는 명성과 영광 이었네 鯉庭詩禮繼聲光책 속의 풍아101)는 모두 세속 초월했고 卷中風雅皆超俗정원의 난초 매화는 색다른 향기 있네 園裏蘭梅別有香만년에야 비로소 함께 시를 주고받으니 始共唱酬遲暮日부생이 무슨 일로 오래도록 겨를 없었나 浮生緣底久無遑 閉門高臥德山陽, 世路難平盡太行.鰈域衣冠餘典範, 鯉庭詩禮繼聲光.卷中風雅皆超俗, 園裏蘭梅別有香.始共唱酬遲暮日, 浮生緣底久無遑. 태항산(太行山)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인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시 〈고한행(苦寒行)〉에 "북쪽으로 태항산을 오르니, 길도 험하여라 어쩌면 이리 높은가.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길에, 수레바퀴가 부서지누나.〔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라는 구절이 보인다. 접역(鰈域) 가자미 모양으로 생긴 지역 또는 가자미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이다. 이정(鯉庭) 집안에서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그의 아들 이(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불러 세우고는 시(詩)와 예(禮)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論語 季氏》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를 말하는데, 전하여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의 비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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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 기환 을 애도하다 悼李愼軒【起煥】 부여 북쪽은 선비 많다고 이름났는데 扶北號多士차례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있다오 次第皆凋零어찌하여 노나라의 영광전392)까지 云胡魯靈光지금 아울러 무너졌단 말인가 今焉幷頹傾절개를 지킴은 맑고도 신중하며 操執淸且愼타고난 자질은 소탈하고 정밀하였네 稟質簡而精서로 종유한 지 오십 년 되었으니 相從五十載참으로 예사로운 정분이 아니로세 不是尋常情중간에 스승을 보위했을 때 中間衛師日한마음으로 변론을 일삼았네 同心事辨明때때로 논의가 다르긴 했지만 有時論雖異혈기로 쟁론한 것은 아니었네 非出血氣爭요컨대 우리 사림들 가운데 要之吾林中우리 공과 같은 분을 어찌 찾기 쉬우리오 吾公豈易能집안에서의 행실은 진실로 독실하며 內行固淳篤효성스러운 마음은 선영에 있었다오 孝思在先塋한 석물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無一闕石儀노년에도 설경393)을 하였도다 衰齡爲舌耕아아 영영 떠나가신 날에도 嗟哉永逝日혹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네 或爲寒餓嬰부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니 遺言勿通訃눈물이 절로 흐르게 하는구나 令人淚自橫그런 뒤에 마침내 공을 보니 然後乃見公한평생 옥처럼 깨끗이 사셨도다 玉潔一平生 扶北號多士, 次第皆凋零.云胡魯靈光, 今焉幷頹傾?操執淸且愼, 稟質簡而精.相從五十載, 不是尋常情.中間衛師日, 同心事辨明.有時論雖異, 非出血氣爭.要之吾林中, 吾公豈易能?內行固淳篤, 孝思在先塋.無一闕石儀, 衰齡爲舌耕.嗟哉永逝日, 或爲寒餓嬰.遺言勿通訃, 令人淚自橫.然後乃見公, 玉潔一平生. 영광전(靈光殿)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노 공왕(魯恭王)이 세운 궁전으로,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 동쪽에 있었는데, 한나라 중기에 도적 떼에 의하여 수도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과 건장궁(建章宮) 등은 다 불탔으나 영광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전하여 홀로 남은 원로(元老)나 석학(碩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기환을 비유하였다. 《文選 卷11 魯靈光殿賦》 설경(舌耕) 혀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으로, 학문을 가르쳐 주고 생활을 영위함을 이른다. 후한(後漢) 가규(賈逵)의 집에는 문도들이 멀리서 배우러 찾아왔는데, 그들에게 경문(經文)을 가르쳐 주자 그들이 바친 곡식이 창고에 그득하였으므로, 세인들이 이를 두고 설경(舌耕)이라 하였다. 《拾遺記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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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파 양호 의 〈초당〉 시에 차운하다 次林南坡【讓鎬】草堂韻 하늘이 이 초당에 명산을 주었으니 天以名山錫此堂그 뒤로 부소산383)을 마주한 봉산384)이 우뚝하구나 背惟蓬岳面蘇岡옛 유적이 아득하니 당나라 먼지385)가 깨끗해지고 蒼茫古蹟唐塵淨신선 인연에 가까우니 한나라 단약386)이 향기롭네 庶幾仙緣漢藥香근역387)이 새로워지니 마침 부락을 이루고 槿域維新適成落파옹이 비록 늙었으나 술 마시며 시 읊조리네 坡翁雖老亦吟觴인간 세상에 부절처럼 똑같은 곳388)을 진정 알겠으니 定知人境同符處서로 전해온 송설을 감히 잊지 못하노라 誦說相傳未敢忘 天以名山錫此堂, 背惟蓬岳面蘇岡.蒼茫古蹟唐塵淨, 庶幾仙緣漢藥香.槿域維新適成落, 坡翁雖老亦吟觴.定知人境同符處, 誦說相傳未敢忘. 부소산(扶蘇山) 백제의 도읍인 충남 부여의 진산이다. 봉산(蓬山)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먼지 먼지는 전장에서 일어나는 먼지로, 전란을 의미한다. 삼국 시대에 당나라가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침략하여 멸망시킨 전란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단약(丹藥) 신선이 만든다고 하는 장생불사의 약을 이른다. 한나라 때 신선술(神仙術)이 유행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근역(槿域) 무궁화(無窮花)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부절처럼 똑같은 곳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백록동부(白鹿洞賦)〉에 "산은 푸르게 집을 둘러싸고, 물은 콸콸 섬돌을 따라 흐르네. 옛사람 이를 즐겼음을 믿겠나니, 세대는 다르지만 즐거움은 부절처럼 똑같구나.[山蔥瓏而遶舍, 水汨㶁而循除. 諒昔人之樂此, 羌異世而同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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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도암450)의 일을 기억하고 스스로 탄식하다 病中記陶菴事自歎 내 듣건대 삼주451)는 세상에 드문 현자로 我聞三洲罕世賢문장과 도학이 모두 탁월하다고 하였네 文章道學幷卓然인물의 성이 같다 하자 낙론이 옳게 되고452) 人物性同洛語是《편람》 453)책이 완성되자 사례가 온전해졌네 便覽書成四禮全질병이 오는 것은 성인도 면치 못하나니 疾病之來聖不免만년에 중풍에 걸려 말하기가 어려웠다오 晩歲嬰風語音艱다행히 문하에 이행상454)이란 자가 있어 幸有門下李行祥뭇사람들은 못 알아들었으나 홀로 잘 알아들었네 衆皆莫辨獨詳聞언론과 문자를 잘 전달할 수 있었으니 言論文字能譯傳크게 고생하지 않고 십년을 보내셨다오 不甚見苦經十年아 나는 비록 선생과 같은 덕은 없지만 嗟我縱無先生德선생과 같은 병은 외려 몸에 얽혀 있네 先生之病却纏身슬하에 이공 같은 사람이 없으니 膝下無如李公者병중의 복은 또한 서로 현격하다오 病中之福亦相懸비교하고 따지는 건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니 比幷較量皆閒想사생과 고락은 전부 천명을 기다려야 한다네 死生苦樂總俟天 我聞三洲罕世賢, 文章道學幷卓然.人物性同洛語是, 便覽書成四禮全.疾病之來聖不免, 晩歲嬰風語音艱.幸有門下李行祥, 衆皆莫辨獨詳聞.言論文字能譯傳, 不甚見苦經十年.嗟我縱無先生德, 先生之病却纏身.膝下無如李公者, 病中之福亦相懸.比幷較量皆閒想, 死生苦樂總俟天.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 또는 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 1651~1708)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여기서는 김창협이 이재의 스승이 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인물(人物)의……되고 이재(李縡)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洛論)의 입장에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호론(湖論)의 영수인 한원진(韓元震)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함으로써 낙론을 이론을 뒷받침하였는데, 이를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편람(便覽) 이재가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四禮)에 관하여 편찬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을 가리킨다. 이행상(李行祥) 1725~180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陶菴)의 문하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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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사일에 감회가 있어 九月十四日有感 구십오 년 전 이 날은 九十五年前此日바로 나의 선비께서 태어나신 때라네506) 是我先妣懸帨辰불초한 육남매를 기르셨는데 育養不肖六子女졸년이 꼭 육순을 채웠다오 卒年恰滿六旬春찬찬히 보건대 환갑이 일 년이 모자랐는데 周甲看看爭一歲지연된 계책이 외려 상생507)의 궤연에 미쳤네 延計猶逮象生筵수박을 심어 크기가 항아리만 했는데 種得西瓜大如甕입동 전에 겉은 푸르고 속은 붉었다오 外碧內丹立冬前쪼개어 올리자 탁자에 향이 가득했으니 剖破獻上香滿卓마치 제철 과일처럼 단맛이 온전하였네 宛若時物甘味全호사가들이 앞다퉈 말하기를 好事之人爭有言이런 때 이런 과일이 어찌 우연이랴 하였네 此時此菓豈偶然이를 듣고 슬프고 부끄러워 자책하였으니 聞之悲愧內自訟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말한 것만 같았네 若道此漢孝感天생전에 천년도508)를 얻을 수 있다면 生前應得千年桃사후에 어찌 환생초가 없으리오 死後詎無還生草선비가 돌아가신 뒤로 삼십여 년이 지났으니 風樹以來經三紀소자도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오 小子皤皤亦已老새삼 절절한 감회가 발하여 시가 되었는데 追切感懷發爲詩병자의 말과 절반 섞여 속마음을 다 토로하였네 半雜病話寫傾倒 九十五年前此日, 是我先妣懸帨辰.育養不肖六子女, 卒年恰滿六旬春.周甲看看爭一歲, 延計猶逮象生筵.種得西瓜大如甕, 外碧內丹立冬前.剖破獻上香滿卓, 宛若時物甘味全.好事之人爭有言, 此時此菓豈偶然?聞之悲愧內自訟, 若道此漢孝感天.生前應得千年桃, 死後詎無還生草?風樹以來經三紀, 小子皤皤亦已老.追切感懷發爲詩, 半雜病話寫傾倒. 구십오……때라네 후창의 선비(先妣)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정사년(1857, 철종8) 9월 14일에 태어나 병진년(1916) 3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60세였다. 상생(象生) 죽은 사람을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여겨 궤연(几筵)을 설치하고 의복과 기물 및 의식 절차를 살아 있을 때에 준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천년도(千年桃) 반도(蟠桃)를 가리킨다. 서왕모(西王母)가 심은 복숭아로, 3000년에 한 번 꽃이 피고 3000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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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의 자에 대한 설 朴景立字說 사람이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집을 짓는 일과 서로 비슷하다. 용마루는 태극(太極)에 대비되고 귀퉁이를 마주하고 떠받치는 것은 사덕(四德)86)에 대비되고 서까래와 문설주가 종횡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3천 곡례(曲禮)87)에 대비된다. 먹줄, 수평기, 자는 용모와 행동거지를 점검 단속하는 것이고 벽에 회칠하고 무늬를 넣는 것은 문장(文章)이 드러나는 것이고 당(堂)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는 것은 도(道)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기에 모이는 것은 거처의 편안함이고, 종묘(宗廟)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은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88) 천하의 빈한한 선비를 크게 감싸주는 것은 은혜를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89)이다.그러나 먼저 알맞은 터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면 많은 사물이 모두 똑바로 설 곳이 없게 되니 언제 눈앞에 높이 솟은 이 모습을 보겠는가. 반드시 탁 트이게 하여 막히거나 장애가 되는 우환을 없게 하고 다지고 쌓아서 기울거나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늘에서 비를 내리기 전에 계획을 하고 집을 지으며 길옆에 지나면서 전해주는 다른 말을 끊어 버리고 자신의 부친이 이미 다다른 법도를 생각한다면 넓은 집에 머무르고 바른 자리에 서게 되니90) 아득한 팔황(八荒 온세상)이 모두 내 문지방 안에 놓이게 된다.아, 기초가 있어도 서지 못하는 자가 많다. 하물며 기초도 없이 스스로 수립할 수 있겠는가. 학자가 만약 큰 뜻을 확정하여 성신(聖神)91)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천지를 동체(同體)로 여기지 않는다면 허다한 공부를 장차 어디에서 수립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학문은 반드시 먼저 기초를 갖추어야 하고 기초가 갖추어진 뒤에는 반드시 수립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초를 갖추고 수립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도에 가깝지 않겠는가.나의 벗 박준기(朴準基)가 자(字)를 경립(景立)이라고 하였으니 취한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人之爲學。與建屋子相似。屋脊方太極。對隅支柱方四德。榱櫨居楔縱橫塡補方曲禮三千。繩墨準尺者。容儀之檢束也。塗墍繪畵者。文章之著見也。升堂入室者。入道之等位也。歌於斯聚於斯。居之安也。宗廟百官之美。資之深也。大庇天下寒士。博施濟衆也。然不先有以辨得其基。則許多物事。都無立定處。而何時眼前見此突兀哉。必須展之拓之。使無阻礙之患。杵之築之。使無傾頹之慮。然後迨天未雨。經之營之。絶道傍携貳之言。念闕考已底之法。則居廣居立正位。而茫茫入荒。皆在我闥矣。嗚呼。有基而不能立者多矣。況無基而能自樹立乎。學者苟不確定大志。以聖神爲已任。以天地爲同體。則多少大功夫。將何自而能樹立哉。要爲學必。先有其基。旣有其基。必要有其立。有基有立。其亦庶幾乎。吾友朴準基字以景立。其取義固在此矣。 사덕(四德) 원래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천지자연의 네 가지 덕, 즉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이르는데, 주자는 이를 사람 마음에 적용시켜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성(性)의 사덕이라 하였다. 《朱子語類 卷6 四端義》 3천 곡례(曲禮) 《예기(禮記)》 〈예기(禮器)〉의 "경례가 3백 가지이고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에서 유래하였다.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 맹자가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함은 자득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처하는 것이 편안하고 처하는 것이 편안하면 자뢰(資賴)함이 깊고 자뢰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쓰는 데에서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孟子 離婁下》 은혜를……것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내용이다. 넓은……되니 넓은 집은 인(仁)을, 바른 자리는 예(禮)를 비유하는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는 대장부를 말하면서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그 도를 행하며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해서, 부귀로도 흔들 수 없으며 빈천해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로도 굽히게 할 수 없는, 이런 사람을 두고 대장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성신(聖神)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크면서도 그 큼을 볼 수 없게 화할 수 있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이르고, 지극히 신묘한 그 성스러움을 측량할 수 없는 사람을 '신인(神人)'이라 이른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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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92)에게 써 보이다 書示黃景涵 성(性)은 도(道)의 형체(形體)이고 심(心)은 성(性)의 부곽(郛郭 성곽(城郭))이며 신(身)은 심(心)의 구우(區宇 구역(區域))이고 물(物)은 신(身)의 주거(舟車)이다.93) 이것은 형기(形氣)와 신리(神理)를 가지고 정밀함으로부터 조악함으로 나아가 말한 것이며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이른 "기(氣)는 신(神)의 집이고 체(體)는 기(氣)의 집이다."94)라는 것이다. 이(理)는 형체가 없지만 성(性)이 감싸고 있으므로 형체(形體)라고 하고, 심(心)은 성(性)을 담고 있으므로 부곽이라고 하고, 신(身)은 심(心)을 담고 있으므로 구우라고 하고, 신(身)은 물(物)을 이용하여 물(物)을 움직일 수 있으므로 주거(舟車)라고 한다.그렇다면 부곽은 기(氣)의 정령(精靈)으로 말하는 것이고 구우는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 그 정조(精粗)와 선후(先後)가 뚜렷하지 않겠는가. 주자(朱子)가 언급한 주재(主宰)와 부곽(郛郭)은 각각 별개의 설이니 연관 지어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노사 선사(蘆沙先師)의 기질설(氣質說)도 본래 이것 때문에 펼친 것이 아니다. 선사께서는 두 개의 기질이 잘못됨을 변별한 것이지, 어찌 일찍이 기질은 있지만 정령은 없다고 하셨는가. 부곽(郛郭)은 부곽일 뿐이지 어찌 부곽이 주재(主宰)와 묘용(妙用)의 뜻을 지녔겠는가. 부곽을 주재(主宰)로 여긴다면 저 세 번 신칙하고 다섯 번 명령하거나95), 잡았다 풀어주면서 기미에 따라 처리하는 사람은 또 주재자의 주재이겠는가. 만 리나 되는 성도 성이 스스로 굳건하지 못하고 7리짜리 곽(郭 외성(外城))도 곽(郭)이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주재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끝내 조리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처중(處中)96)과 논의하라. 절충한 논의를 듣고자 한다. 性者道之形體。心者性之郛郭。身者心之區宇。物者身之舟車。此以形氣神理。而由精趨粗說。如康節所謂氣者神之宅。體者氣之宅也。理無形而性爲結窠故曰形體。心具性故曰郛郭。身具心故曰區宇。身藉於物而能運物故曰舟車。然則郛郭以氣之精爽而言。區宇以人之軀殼而言。其精粗先後。不其瞭然乎。朱子主宰及郛郭。各是一說。不可連累看。且蘆沙先師氣質說。本非爲此而發也。先師辨兩箇氣質之非。何嘗言有氣質而無精爽乎。郛郭只是郛郭安有以郛郭而有主宰妙用之義。若以郛郭爲主宰。則彼三申五令操縱合變之人。是又主宰之主宰乎。萬里之城。城不能自固。七里之郭。郭不能自守。則烏在其主宰之義乎。思之思之。終是不倫。未知以爲如何。且與處中講質焉。願聞折中之論。 황경함(黃景涵) 경함은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의 자이다.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외필변변(猥筆辨辨)〉‧〈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이 있다. 성(性)은……수레이다 소옹(邵雍)의 《격양집(擊壤集)》 〈자서(自序)〉에 나오는 말이다. 기(氣)는……집이다 소옹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나오는 말이다. 세 번……명령하거나 손자(孫子)가 오왕(吳王) 합려(闔閭) 앞에서 여자들을 부하로 삼아 시범을 보일 적에 "일단 약속을 정하여 선포한 다음에 부월을 설치해 놓고는 곧바로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신칙하였다.[約束旣布, 乃設鈇鉞, 卽三令五申之.]"라는 말이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온다. 처중(處中) 양회락(梁會洛, 1862∼1935)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다.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과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납량 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 등을 마음속으로 터득하고, 주리론(主理論)을 발휘하고 천명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사 심제설(性師心弟說)을 통렬히 반박하였다. 문집에 《동계당 유고(東溪堂遺稿)》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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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주에게 써 주다 書贈吳汝周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하려고 하는 것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의 다툼일 뿐이다."97)라고 하였다. 대체로 기품(氣稟)이 편벽되어 기호(嗜好)가 다르고 견문(見聞)에 얽매어서 추향(趨向)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평생토록 독서를 해도 읽는 내용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교유(交遊)하는 이들 사이에서 말이 간혹 여기에 이르면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굴거나 반드시 멍하니 반성하지 못하여 인가하고 승낙하는 자가 대체로 적었다.병술년(1910, 순종4) 봄, 내가 오봉(五峯)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오군 여주(吳君汝周)가 날마다 나를 찾아와 함께 어울렸다. 또한 "게으름을 피우다가 학문의 기회를 놓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간절히 이 일에 마음을 두고자 하니 경계가 되는 한 말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자네가 이미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내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중(輕重)의 권도(權道)가 내면에 명확하지 않고 취사(取捨)의 분별이 외부에서 결정되지 않으면 길을 나섰다가 전도 착란(轉倒錯亂)되어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것을 여주(汝周)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무릇 부귀와 빈천은 사람의 일생에서 미리 정해진 분수이고 도덕과 인의(仁義)는 사람의 마음에 고유(固有)한 성(性)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벼운가? 무엇이 추구할 수 있고 무엇이 추구할 수 없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가? 입각(立脚)98) 초기에 팔자타개처(八字打開處)99)를 헤아려 변별해야 한다. 이 단계를 지나서 나아가면 또 하나의 험난한 관문이 나타나 눈에 힘을 주어야 할 곳이 있으니 위기(爲己)와 위인(爲人)100)이 그것이다.일찍이 생각해보니, 하늘이 명하고 사람이 받은 모든 이치와 모든 법칙은 저절로 해야 하는 일인가, 외부의 사물을 쫓아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인가? 일상생활에서 이르는 곳마다 성찰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본령(本領)이 수립된다. 이로 말미암아 정밀하고 투철하며 숙련되고 정통한 단계에 이르는 것은 곧 부지런히 힘쓰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맹자(孟子)가 "천하의 넓은 집[인(仁)]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예(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의(義)]를 행하고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으며 빈천(貧賤)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한다."101)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비로소 남아 대장부의 일이다. 바라건대 여주(汝周)는 힘쓰거라! 朱子曰。人之爲學。只爭箇肯與不肯。蓋氣稟所偏。嗜好不同。見聞所拘。趨向不一。是以終身讀書。而不知是所讀爲何事者多。交遊之間語或及此。則非悍然不顧。必茫然不省。其印可而肯諾者蓋少矣。丙戌春。余客於五峯吳君汝周。日來相從。且曰。因循失學久矣。自今切欲留心此事。願賜一言警砭也。予曰子旣有肯可之意。何須於我言。然輕重之權。不明於內。取舍之分。不決於外。則未有不臨途顚錯半上落下者。此則不可不爲汝周告之。夫富貴貧賤。人生素定之分也。道德仁義。人心固有之性也。然則何者爲重。何者爲輕。何者可求。何者不可求。何者當求。何者不當求。立脚之初。所當商量辨別八字打開處。過此以往。又有一層重關猛着眼目處。如爲己爲人是也。試思天命人受。萬理萬法。是自然合做底事耶。是徇外自私底物耶。日用之間。隨處省察。不容放過。則本領立矣。由此而至於精透純熟。則在乎勉焉爾。孟子曰。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貧賤不能移。如此方是男兒事。願汝周勉之。 사람이……뿐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 〈독해학법(讀大學法)〉에 나오는 내용이다. 입각(立脚)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을 의연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팔자타개처(八字打開處) 팔자 모양의 형태로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가려져 있던 앞산을 보여 주었다는 뜻으로, 조금도 숨김없이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희의 편지에 "요즈음 《대학》을 보다가 이러한 뜻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성현이 이미 '팔(八)' 자가 벌어지듯 활짝 펼쳐 주었건만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 오히려 밖으로 미친 듯이 치달리고 있다.[近日因看大學, 見得此意甚分明, 聖賢已是八字打開了. 但人自不領會, 却向外狂走耳.]"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35 與劉子澄》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천하의……못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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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배의 자에 대한 설 吳景拜字說 사문(斯文) 오창호(吳昌鎬)가 관례(冠禮)를 치른 지 이미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자(字)가 여주(汝周)였는데 나중에 송사(松沙) 기장(奇丈)102)께서 경배(景拜)로 고쳤다. 대체로 《서경(書經)》의 "우(禹)가 고요(皐陶)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을 하였다."103)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시험삼아 한번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징험해 보니,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며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여 잘못되고 그릇된 일을 문식(文飾)한 뒤에야 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분을 참으면서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용납하지 않다. 이것은 모두가 성실하게 선(善)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미친 사람에게도 가려서 들을 만한 말이 있고 나무꾼에게도 물을 수 있다. 하물며 강직하게 간언(諫言)하고 보필(輔弼)하는 것이 마치 정문(頂門)에 침을 놓고 등에 채찍을 가하는 것과 같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사랑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공경해야 하고 공경스러움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절을 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뜻을 낮추고 온 마을에서 하는 말을 아울러 받아들이면 마을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온 나라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나라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천하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천하의 훌륭한 선비가 된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백 번 절을 한 다음에 한마디 말을 듣고자 하고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 하나를 구했던 까닭이다.아, 대우(大禹)는 성인이었건만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원하건대 경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한다.'라는 부적(符籍)을 학문 세계에 진입하는 나침판으로 삼아 부지런히 노력하고 착실히 법도를 지켜나가 천하의 선(善)이 모이고 빠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찌 송사 장(松沙丈)께서 진중하게 이름을 정한 뜻이 아니겠는가. 吳斯文昌鎬。冠已久矣。表德初以汝周。後松沙奇丈改以景拜。蓋取書經禹拜昌言之義也。嘗驗之於人。聞有一言逆耳。無不勃然而怒。嘵嘵然。文其過餙其非而後已。不然則强意忍忿。外若容受而內實氷炭矣。此皆無誠實爲善之心故也。如有誠實爲善之心。則狂夫可擇。蒭蕘可詢。況强諫直輔。若針頂鞭肯之爲耶。愛之無已。固當敬之敬之無已。固當拜之。虛心遜志。兼受一鄕之言。則爲一鄕之善士。受一國之言。則爲一國之善士。受天下之言。則爲天下之善士。此古人所以乞一言於百拜之餘。求一敎於千里之遠者也。嗚呼。大禹聖人。猶拜昌言。況其下者乎。願景拜以拜昌言三字符。爲入學指南。勉勉循循。以至於集天下之善而無闕焉。則豈非松沙丈珍重命名之意耶。 송사(松沙) 기장(奇丈)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우(禹)가……하였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우가 고요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하며 옳다고 하였다."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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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未正月 日 金載相 城主 丁未正月 日 1847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6.8*6.8(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이에 따르면, 지난 갑오년, 즉 13년 전인 1834년(순조 34)에 일도면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박계삼(朴啓三)이라는 자의 형 박기준(朴基俊)이 밀린 상채(喪債)에다 세미(稅米)까지 납부할 방법이 없자 자기 소유의 시장(柴場)을 팔려고 했다. 때마침 그곳에 친산(親山)이 있던 김재상은 그 시장을 매입하여 송추(松楸)를 심어놓았다. 그런데 그 시장의 송추에 욕심이 있었던 박계삼은 그 송추를 환퇴(還退)하겠다면서 관에 소지를 올렸다. 이에 김재상이 박계삼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물어보니, 소지를 올려 관으로부터 받았던 제사(題辭)는 보여주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두고 후일을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말하면서 전혀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던 김재상은 자신이 시장을 매입하면서 받았던 명문을 함께 첩련(帖連)하여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위 박계삼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엄히 다스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조사할 터이니 잡아오라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정미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재상이 위의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정미년을 1847년으로 추정하였다.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참조) 이 명문에는 박기준이 상채를 갚기 위하여 위의 시장을 7냥에 방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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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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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등장(等狀)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全羅道道內儒生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1864 全羅道道內儒生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조정에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등장의 초안.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부안현(扶安縣)의 유생 김채상(金彩相)과 그의 동생 김우상(金祐相)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열(孝烈)을 기려 그들에게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조정에 올릴 예정으로 작성한 등장(等狀)의 초안이다. 문서의 첫 머리에 으레 나오기 마련인 소두(疏頭)의 이름도 비어 있으며, 끝에 나오는 연명인(聯名人)들도 적혀 있지 않다. 본문 또한 수정하고 첨삭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소장을 작성하면서 상당한 고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채상은 부안김씨(扶安金氏)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2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례(古禮)를 철저하게 지키며 상장례를 치뤘다. 그 뒤 혼자된 어머니가 위독하였을 때 오도조(五桃鳥)가 아니면 병이 낫기 어렵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백방으로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때마침 꿈에서 한 늙은이가 나타나 변산 입암 아래를 찾아가면 새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털이 얼룩달룩한 새 한 마리가 바위 아래 떨어져 있었다. 이를 구하여 약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었다. 나이 5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몸을 해칠 정도로 호곡하였으며, 매 삭망마다 눈비를 무릅쓰고 성묘를 했으며, 80세가 다되도록 성묘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묘에 성묘하기 위하여 다녔던 길은 효자성묘로(孝子省墓路)로 불리웠다. 김채상의 동생 김우상의 처 밀양박씨 또한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았다. 28세 때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이 마시게 하여 3일이나 목숨을 연장하였다. 남편이 죽자 곧바로 따라서 죽으려고 했으나 아무 곳도 의지할 데 없는 시어머니가 만류하자 마음을 바꿔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 시어머니가 죽자 3년을 하루같이 여묘살이를 하였다. 때마침 가뭄이 들었으나 박씨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듯 여묘 아래 한 자도 못되는 곳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사람들은 이 샘을 효열천(孝烈泉)이라고 불렀다. 박씨는 시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뒤 남편의 기일에 이르러 어린 조카를 선대의 제사를 받드는 후사(後嗣)로 정한 뒤에 마침내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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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대보탕446)을 준 가석에게 이천의 시를 차운하여 사례하다 謝可石贈大補湯用伊川韻 약을 주어 내 정신을 보양해준 그댈 흠모하며 感君投藥補吾神행여 삼려447)를 세상 처신의 법도로 삼으려 하네 儻擬三閭度世身배불리 먹으면 외려 은거 소원 이루기 어렵나니 飽喫猶難成晦願서산에서 먼저 은나라 백성이 굶주려 죽었다지448) 西山先作餓殷民 感君投藥補吾神, 儻擬三閭度世身.飽喫猶難成晦願, 西山先作餓殷民. 대보탕(大補湯) 마음과 몸의 활동력을 돕는 약을 말하는데, 숙지황(熟地黃)ㆍ백작약(白芍藥)ㆍ천궁(川芎)ㆍ당귀(當歸)ㆍ인삼ㆍ백출(白朮)ㆍ백복령(白茯笭)ㆍ감초ㆍ황기(黃芪)ㆍ육계(肉桂)를 넣어 만든다. 삼려(三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屈原)을 말한다.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호에 노닐며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고 하였다. 《詳說古文眞寶大全 後集 卷1》 서산(西山)에서……죽었다지 은(殷)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를 말한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는,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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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이십구일에 暮春小晦 종일토록 거센 바람 불어 너무도 무정한데 狂風盡日太無情남은 꽃마저 떨어져 한바탕 깨끗이 쓸어버렸네 飄落殘花一掃淸수심은 외로이 살게 되면 쉽사리 몰려들고 愁待索居容易集시는 참된 경지를 어기면 억지로 이루기 어렵네 詩違眞境强難成귀밑머리 성성하니 반백의 나이가 되었고 霜鬢星星年半白초당은 적막하고 밤은 깊어 삼경이로세 草堂寂寂夜三更천금도 도리어 좋은 날의 빚 갚기엔 적은데 千金還少良辰債또 돌아가는 봄날이 내일 아침으로 잡혔구나 又是春歸在翌朝 狂風盡日太無情, 飄落殘花一掃淸.愁待索居容易集, 詩違眞境强難成.霜鬢星星年半白, 草堂寂寂夜三更.千金還少良辰債, 又是春歸在翌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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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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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뜻을 보이다 示志 원래 머리털은 부모가 남겨 준 것이나 元來頭髮是親遺분명히 중국의 제도가 또 여기에 있네 華制分明更在斯천하의 대방296)은 감히 어길 수 없으나 天下大防無敢越정수리의 한 움큼297)이 어찌 미미한 것이랴 頂中一撮豈其微백운고사298)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白雲高士今何處화망건 선생299)은 함께 돌아갈 수 있으리라 畫網300)先生可與歸가을 달이 오랫동안 마음과 함께 비춰주니 秋月長時心共照외로운 넋은 백세토록 슬퍼할 필요 없겠네 孤魂百歲不須悲 元來頭髮是親遺, 華制分明更在斯.天下大防無敢越, 頂中一撮豈其微?白雲高士今何處? 畵綱先生可與歸.秋月長時心共照, 孤魂百歲不須悲. 대방(大防) 흘러넘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큰 제방(堤防)이라는 뜻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예법(禮法)을 일컫는다. 정수리의 한 움큼 상투를 말한다. 백운고사(白雲高士) 당(唐)나라 때 도사(道士)인 사마승정(司馬承禎)으로, 백운거사는 그의 호이다. 음양술수학에 심취했으며, 연단술을 익혔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전서를 잘 썼다고 한다. 진자앙(陳子昻), 이백(李白), 맹호연(孟浩然) 등과 교유하였다. 〈좌망론(坐忘論)〉 등을 지어 자신의 노장 철학을 피력하였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있어 '도선합일(道禪合一)'의 독특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노자도덕경》의 정본을 만들었고, 저술로 《좌망론(坐忘論)》이 있다. 《唐書 卷196 司馬承禎列傳》 화망건 선생(畫網巾先生) 청(淸)나라 때 문학가인 대명세(戴名世)가 지은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에 의하면 선생의 이름과 작위는 알 수 없으며 민족지사이다. 새로운 영(令)으로 치발(薙髮)하고 의관을 바꾸니, 망건(網巾)이 없어지자 머리에 망건을 그리고서 갓[冠]을 썼기에 사람들이 화망건이라 불렀다고 한다. 網 底本에는 "綱". 필사의 오류로 보아 수정. 아래도 이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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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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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上西面多會里居化民崔載信右謹言淨塘里崔俊甫田一斗五升落定賭稅太二斗五升麥二斗五升耕食是乎所其子載龍處曾有債本錢五兩于今八年而這間利錢中流伊所捧菫爲二兩錢故昨秋賭稅太二斗五升相計次不爲酬給矣上項俊甫率其子同田刈麥一百四十四束盡數奪去者是可忍乎緣由仰訴參商敎是後同錢五兩計年并利推給敎是去乃麥一百四十四束推給敎是去乃兩端間 處分事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己酉閏四月 日官 [着押](題辭)二斗太何當於百束麥乎以麥計太零數即給以救濱死人向事卄九日告郭民{糸+奐}[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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