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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津后人崔鳴瑢拜時維季冬尊體百福僕之次子道澈年旣長成未有伉儷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 謹拜上狀庚午十二月初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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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陽后人禹漢鳳拜時維季春尊體百福僕之第次子八龍年旣長成未有伉儷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謹拜上狀癸丑三月二十六日(皮封)上狀金生員 下執事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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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二年壬辰二十日朴春實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如可要用所致故西十作悚字畓五斗落只所耕九負八束㐣折価錢文二十伍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本文記三丈幷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雜談是去㝳以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朴義仲[着名]證人 尹光弼[着名]茟 朴昌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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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부안 함양조씨(咸陽趙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咸豊七年 咸豊七年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57년에 작성된 부안의 부안김씨가의 며느리 함양조씨(咸陽趙氏)의 장사택일지. 1857년에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의 며느리 함양조씨(咸陽趙氏)의 장례를 위하여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화명(坤化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화명(坤化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이 문서에는 이례적으로 망자가 함양조씨(咸陽趙氏)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기묘생으로, 안장일은 함풍 7년(1857) 3월 12일이다. 상주는 아들 2명과 손자 5명 등 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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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리며 曬書 오백여 권의 책을 五百卷餘書창 앞에서 바람과 햇볕에 말렸네 牕前風日曝어떡하면 가슴 속에 저장하여 那藏方寸裏문득 학생의 배가 되어볼까350) 却作郝生腹 五百卷餘書, 牕前風日曝.那藏方寸裏, 却作郝生腹. 학생의 배가 되어볼까 많은 책을 읽어 가슴에 간직하고 싶다는 뜻이다. '학생(郝生)'은 진(晉)나라 때 남만 참군(南蠻參軍)을 지낸 학륭(郝隆)을 말한다. 그가 칠석날 밖으로 나가 대낮에 하늘을 향해 누워 있기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배 속에 가득 찬 서책을 포쇄하는 것이다.[我曝書]"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排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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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에서 가을을 느끼며 東谷 感秋 남녘의 한 해 저무니 南國年華晩서풍에 초목 시드네 西風草木傷귀밑머리 듬성듬성 짧아지는데 鬢毛種種短세상일은 유유하여 길기만하네 世事悠悠長친한 벗은 모두 노쇠하였고 親朋皆老大옛날 집은 반이 황량해졌네 舊宅半荒涼다시 대한 초강에 뜬 달은 更對楚江月여전히 맑은 거울 빛이로군 依然淸鏡光 南國年華晩, 西風草木傷.鬢毛種種短, 世事悠悠長.親朋皆老大, 舊宅半荒涼.更對楚江月, 依然淸鏡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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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만당 외형을 그리워하며 奉懷晩棠外兄 그리움에 날마다 흰머리만 늘어나는데 相思日日白添頭호북으로 가는 구름은 걷히려 하지 않네 湖北歸雲不肯收모두 곤궁한 길에 들어서 이별한 지 오래 總入窮途成契闊얼마나 고해를 지나며 절로 부침했던고 幾經苦海自沈浮눈 매화는 이미 피어서 창문이 환한데 雪梅已發明牕戶봄 기러기82) 소식 없어 물가가 적막하네 春鴈無聲寂渚洲대보름 맑은 달 아래서 홀로 걷노라니 獨步上元淸夜月좋은 절기 때마다 수심만 배로 생기네 每逢佳節倍生愁 相思日日白添頭, 湖北歸雲不肯收.總入窮途成契闊, 幾經苦海自沈浮.雪梅已發明牕戶, 春鴈無聲寂渚洲.獨步上元淸夜月, 每逢佳節倍生愁. 기러기 서신(書信)을 전해주는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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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의 소년을 한탄하며 歎人家少年 소년이 독서를 그치고 스승을 멀리 떠나 少年輟讀遠離師인간세상 거칠고 사나운 아이 되려하네 欲作人間傑驁兒불세출의 공명을 죽백231)에 기약하려고 不世功名期竹帛한 번 사는 목숨을 터럭처럼 여기누나 一生軀命視毫絲만리의 타지방으로 홀연히 달려가더니 忽奔萬里他方地천금의 가업232) 자산을 먼저 망쳤구나 先敗千金祖業資뜻이야 가상타 해도 계모가 졸렬하니 志則雖嘉謀則拙선을 부지런히 행하는 본원을 빠뜨렸네233) 本原闕却善孜孜 少年輟讀遠離師, 欲作人間傑驁兒.不世功名期竹帛, 一生軀命視毫絲.忽奔萬里他方地, 先敗千金祖業資.志則雖嘉謀則拙, 本原闕却善孜孜. 죽백(竹帛) 죽간(竹簡)과 포백(布帛)으로 역사책을 말한다. 가업 '조업(祖業)'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가업을 말한다. 선을……빠뜨렸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힘쓰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아니라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雞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雞鳴而起, 孶孶爲利者, 跖之徒也. 欲知舜與跖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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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윤의 자설 金德潤字說 김생(金生)이 이별하고 떠나간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하루는 관례를 치르고 찾아왔다. 내가 표덕(表德 자(字))을 무엇으로 했는지 묻자, "덕윤(德潤)입니다. 부친께서 명명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 "의미가 있구나. 명명함이여. 의로운 방도로 가르쳤다고 이를 만하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 몸이 항상 펴지고 느긋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성대한 기운이 몸에 가득하고, 산처럼 의연하게 서며, 얼굴이 옥빛처럼 아름답고,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쟁쟁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덕이 맑게 얼굴에 드러나며 등에 가득하여 사체(四體)가 말하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좌로 준승(準繩)이 되고 우로 규구(規矩)가 되어 거동과 용모가 예에 맞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진실로 존양성찰(存養省察)36)의 공부가 쌓여서 지극히 순수하고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공자가 말하기를, '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라고 하였는데, 대저 '덕' 한 글자를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드물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여기에 반드시 지극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모르겠네만 덕윤은 그 뜻을 알고 있는가? 부친께서 명명하신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내 자신이 이름으로 삼은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친구들이 부르는 것인데 실상도 없이 응답해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덕윤'의 실상이 있는 뒤에야 '덕윤'이라는 이름에 부응하고, 부친께서 명명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김생을 위해 두렵게 여기네." 金生別去有年。一日突弁而來。余問其表德云何。曰德潤。大人所命。余曰。有意哉命之也。可謂敎之以義方也。心無愧怍。體常敍泰者。德之潤身也。揚休山立。玉色金聲者。德之潤身也。粹面盎背。四體不言而喩者。德之潤身也。左準繩。右規矩。動容中禮者。德之潤身也。苟非存養省察積累純熟之至。何以及此。孔子曰。知德者鮮。夫德之一字。人孰不知而曰鮮何也。此必有至義存焉。未知德潤知之乎。大人所命。其可曰不知乎。吾身所名。其可曰不知乎。朋友所呼。其可曰無實而答之乎。必有德潤之實而後。可副德潤之名。而不負大人丈命之之意也。吾爲生懼焉。 존양성찰(存養省察) '존양'은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을 말하며, '성찰'은 자신의 사욕을 살펴 막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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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선경에게 주다 贈鄭君善敬 공자가 말하기를,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맹자가 이 말을 인용하여 칠편(七篇)37)의 끝에서 여러 성인이 도통을 전수한 말 앞에 써 놓았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는 뜻과 도를 전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르칠 만한 인재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정군(鄭君) 선경(善敬)은 자태와 국량이 진실로 일반 사람과 달랐으니, 호탕하고 씩씩하여 어디에 얽매이지 않았고, 불우한 상황에서도 짝할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며, 훤칠하니 수레를 뒤엎는 말과 같은 기상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혼잣말로, '이러한 사람은 애초부터 옛적에 일컬었던 광자와 같은 부류의 선비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귀의할 곳이 없어 홀로 쓸쓸히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닌 적이 없으니 어찌 함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점점 흘러 풍상(風霜)을 겪고 군의 나이가 이미 40을 넘게 되자 들뜬 생각이 사라지고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면서 슬픔과 회한이 더욱 절실해지고, 분발함이 더욱 지극해졌다. 이에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춘 채 《 대학(大學)》 한 책에 침잠하여 곱씹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아, 자애롭고 착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좋은 사람이 아닌 적이 없지만 나아가 성취하는 데에 힘이 없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취하지 않고 유독 광자와 견자를 취하신 이유이다. 김군은 이미 마음을 굽히고 머리를 수그리며 여기에 종사하고 있으니, 과감하게 나아가는 힘은 두려움 없이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며, 강인한 뜻은 만 명의 사내라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 말에 이르기를,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한 가운데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군은 힘쓰게나. 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狂者進取。狷者有所不爲。孟子引此語。而書之於七篇之終群聖傳統之前者。其旨遠矣哉。聖賢誨人之意。傳道之心。非不切至。而非有可敎之才。則將何以爲之。鄭君善敬姿相器局。固已異於人矣。而豪爽不羈。落拓不群。軒軒然有覂駕之氣。余嘗自語。以爲此未始非古所稱狂士之流亞。而踽踽不遇悠悠不歸者。豈不可借。旣而歲月侵尋。風霜荏苒。而君之年。已四十有餘矣。浮念銷歇。眞心呈露。悲悔轉切。奮發愈至於是社門斂迹。將大學一書。沈潛咀嚼。蓋已久矣。嗚乎。慈善溫柔的。未爲不是好人。而其於進就無力焉。此聖人所不取而獨取狂狷者也。今君旣已屈心低首。從事於斯。則其果敢之力。剛毅之志。必將有獨立不懼。萬夫莫奪者矣。古人語曰。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君其勉乎哉。 칠편(七篇) 《맹자》의 별칭으로, 본래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후한(後漢)의 학자 조기(趙岐, 108~201)가 환제(桓帝) 때에 처음으로 주석을 내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든 이후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맹자》는 모두 14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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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問原癸亥十一月 日行縣監趙[官印](皮封)單子 一道堂北中里金 碩士炳觀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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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城主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신축년에 김재상의 친산(親山)에 누군가가 투장(偸葬)을 하여 그 뒤 5년 동안 김재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장자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관에 소지를 올려 "투장자를 잡아오면 대변(對卞)하겠다"라는 제음(題音)을 받고, 사방으로 투장자를 찾았지만, 그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하여 김재상은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첩연(帖連)하여 다시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부디 관에서 투총을 파내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만일 관에서 묘를 파내는 일은 법에 저촉된다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는 그 전년, 즉 갑진년에 올린 소지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작성연대가 을사년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을사년은, 김재상이 여러 차례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들을 통해서 볼 때 1845년으로 추정된다. (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1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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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阻悵仰謹審此來冬令兄體萬旺閤度勻慶何等仰慰叶祝弟間以山訟事往在大田昨夜還捿幸免火刻耳第示意謹審而言念此事亦赬然無顔色吾輩之此世此等事每每如此憤歎奈何上告一節 兄須深諒爲之弟何有良策耶且不得同席以議亦不可以一筆斷言何以則好耶盧氏云云其侄尙無回答盧氏亦往釜山云出發已爲十餘日尙無消息甚爲訝鬱以似不可信用可歎世道之駭怪也餘在續后不備謹謝上十二月七日弟金永旭拜拜(皮封前面)全北益山郡朗山面石泉里宋淳轅 仁兄升啓(皮封後面)大邱府 明治町二丁目一五三 金永旭十二月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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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 조영하(趙榮夏) 존문단자(存問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十一月 日 行縣監趙 金炳觀 癸亥十一月 日 1863 行縣監 趙 金炳觀 전라북도 부안군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이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에 사는 김병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중리(堂北中里)에 사는 김병관(金炳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存問單子)이다. 존문이란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자는 행부안현감이 김병관의 집을 방문할 때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발급년대가 계해년으로만 되어 있는데, 김병관과 같은 부안에 살면서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던 김병헌(金炳憲)이 주로 1800년대 중반에 활동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위의 계해년은 186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단자를 보낸 부안현감 조 아무개가 바로 이 시기에 부안현감으로 봉직했던 조영하(趙榮夏)의 성씨와 일치된다는 점이다. 수령안(守令案)에 따르면, 조영하는 1863년 10월에 부안에 부임하여 이듬해 6월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조영하는 본관이 풍양(豐壤)으로 21세 때인 1850년(철종 1) 증광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861년(철종 12)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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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공암414)을 지나며 過公州孔巖 고청봉 아래의 서고청415)이여 孤靑山下徐孤靑천년토록 누가 다시 선생 같을까 千載誰復如先生만인이 다퉈 말하면 이적을 전하니 萬口爭說傳異蹟인걸에는 원래 땅의 영기가 모였네 人傑元來鍾地靈학문 쌓여 옥을 간듯 공부 정밀했고 學積精工如磨玉의리 엄정해 못을 끊듯 분수 지켰네 義嚴守分若斬釘만일 우뚝하게 수립한 것이 없었다면 苟無樹立卓然者어찌 해와 별처럼 경앙하게 되었겠나 那致敬仰如日星더구나 좁은 나라 상벌416)의 풍조에서였으니 矧在褊邦尙閥風선생이 공정한 평가 받았음을 더욱 믿겠네 益信先生得公評이곳 지나며 풍도 듣고도 흥기하지 않으면 過此如不聞風起인심이 영명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하겠나 其柰人心未靈明 孤靑山下徐孤靑, 千載誰復如先生?萬口爭說傳異蹟, 人傑元來鍾地靈.學積精工如磨玉, 義嚴守分若斬釘.苟無樹立卓然者, 那致敬仰如日星?矧在褊邦尙閥風, 益信先生得公評.過此如不聞風起, 其柰人心未靈明? 공암(孔巖)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 자락에 있는 지명이다. 서고청(徐孤靑) 고청은 서기(徐起, 1523~1591)의 호로, 계룡산(鷄龍山) 고청봉(孤靑峯) 아래 살았으므로 이렇게 자호(自號)한 것이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ㆍ구당(龜堂)ㆍ이와(頤窩),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서경덕(徐敬德)ㆍ이지함(李之菡) 등에게 사사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기술 이론에도 통달하였다. 출신이 미천하였으나 아는 것이 많고 문장에 능하여 배우는 이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공주(公州)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상벌(尙閥) 문벌을 숭상하는 것을 말한다. 《類選 卷3下 人事篇4 治道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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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일 계모임 날 밤에 벗들과 남아서 창수하다 2수 九月十日契會夜 留諸益唱酬【二首】 푸른 하늘에는 흰 달이 뜨고 靑天來素月뜨락의 국화 누굴 위해 피었나 庭菊爲誰開난세엔 글로 모이는 일 드문데 亂世稀文會일 년 중에 가장 좋은 때라네 一年最好時오늘 밤 내내 함께 하길 사양치 말게 莫辭永今夕만날 기약은 기필하기 어렵다네 難可必前期돌아가면 교분은 도로 그칠 것이니 歸去交還息문을 나가도 갈 곳이 없으리라 出門靡所之우리들이 모인 곳에 吾人會合處이별 아쉬워 일부러 더디 가네 惜別故遲遲늙고 쇠하여 예전의 모습 아니고 衰暮非前日위태한 시국에 이때를 만났네 危難適此時막다른 길에 완적 같은 이 많은데207) 窮途多阮籍옛 곡조에 누가 종자기208)일까 古調孰鍾期도리어 부럽도다 가을 하늘의 기러기 却羡秋天鴈높이 날아가고 싶은 데로 가나니 高飛任所之 靑天來素月, 庭菊爲誰開?亂世稀文會, 一年最好時.莫辭永今夕, 難可必前期.歸去交還息, 出門靡所之.吾人會合處, 惜別故遲遲.衰暮非前日, 危難適此時.窮途多阮籍, 古調孰鍾期?却羡秋天鴈, 高飛任所之. 막다른……하고 완적(阮籍)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음률에 밝아 비파를 잘 탔고 호방한 기상이 있었으며 노장(老莊)을 추숭하였다. 완적이 혼자서 수레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가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한바탕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종자기(鍾子期)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음률(音律)에 정통했다. 백아(伯牙)가 산수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탔는데, 종자기가 알아들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세상에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淮南子 修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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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한북으로 가는 양순집을 전송하는 서문 送梁順集往漢北序 호남(湖南)과 한북(漢北 한양(漢陽)의 북쪽)은 천 리나 떨어진 지역이고, 전쟁의 기운이 가득한 풍진 세파를 도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데도 우리 벗 순집(順集)은 사문(師門)과 종유(從遊)하여 일 년에 한 번씩 다녀오는 것을 너무 멀다는 이유로 꺼리지도 않고,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그만두지도 않았다. 진실로 도를 지향하는데 근면하고 뜻을 세움이 독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나는 약관(弱冠) 때부터 이미 이러한 행차에 뜻을 두었으나 전후로 30년 동안 끝내 이루지 못했고, 지금 순집이 가는 것을 보면서 또 천리마의 꼬리에 붙은 파리116)가 되지도 못했다. 아, 나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미치지 못함이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순집의 이 행차가 만약 벼슬살이를 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얻음과 잃음, 통달함과 막힘이 진실로 나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고, 만약 유람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즐거움과 괴로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또한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벼슬살이를 구한 것도 아니고, 또 유람하는 것도 아니니,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 오직 도의(道義)에 있지 않겠는가.도의(道義)는 하나이니, 간간(侃侃)하게 강직하고 은은(誾誾)하게 화락한 모습으로 봄바람 앞에 앉아 있는 듯하고 눈이 쌓이도록 서서 기다리는 것처럼 하면서117) 천하의 도(道)를 강론하고, 천하의 의(義)를 밝히는 것이 어찌 한 집안이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돌아와 돌이켜보고 나머지 파급될 만한 것들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대가 들은 것이 바로 내가 들은 것이고, 그대가 얻은 것이 또한 내가 얻은 것이 될 것이다.나는 늙은 몸이라 비록 억지로 행장을 꾸릴 수 없지만, 사우(師友)를 인연한 관계로 소문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대에게 기대를 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생각건대, 천 리 먼 길 사람을 전송함에 예의상 노자가 있어야 하는데, 서생의 집에 장물(長物)118)을 가진 것이 없기에 단지 졸렬한 말 몇 줄로 노자를 대신하고, 또 "누가 물고기를 요리하는가? 작은 가마솥과 큰 가마솥을 씻어 주리라. 누가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까? 좋은 목소리로 위로하리라."119)라는 한 문장을 노래하여 전송할 뿐이다. 湖南漢北。千里之地。干戈風埃道路抵搪。吾友順集。從遊師門。一年一行。不以絶遠而憚焉。不以多難而沮焉。苟非向道之勤。立志之篤烏能辦此也。余自弱冠。已有意此行。而前後三十年。竟未就矣。今見順集之行。又未作附驥之蠅。嗚呼。余獨何人。其所不及若是懸絶哉。雖然。順集此行。若出於干進。則其得失通塞。固無關於我矣。若出於遊觀。則其苦樂勞佚。亦無有於我矣。旣非干進。又非遊觀。而所以血心尋覓。獨不在於道義乎。道義一也。侃侃誾誾。坐春立雪。講天下之道。明天下之義者。豈一家一人之私哉。況歸而顧之。不吝餘波。則子之聞卽我之聞也。子之得。亦我之得也。吾老矣。縱不能强理鞭策。而所以夤緣師友。得聞所聞。未嘗不有望於子也。但念千里送人。禮合有贐。而書生門戶。無有長物。只用蕪詞數行。以替贐儀。又歌誰能烹魚。漑之釜鬵。誰將西歸。懷之好音。一章以送之。 천리마의……파리 선현이나 명사(名士)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정의림이 양순집을 따라가서 한북에서 사문과 종유하는 것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독실하게 학문을 닦았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었기 때문에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주(注)에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천리에 이르듯,[蒼蠅附驥尾而致千里] 안회(顔回)도 공자 덕분에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간간(侃侃)하게……하면서 원문의 "侃侃誾誾, 坐春立雪"을 국역한 것으로, "간간은은(侃侃誾誾)"은 《논어》 〈선진(先進)〉에 "민자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자로는 굳세었고, 염유와 자공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좌춘(坐春)"은 스승의 훈도와 덕화를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여남(汝南) 땅에서 뵙고 돌아와 "광정이 봄바람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입설(立雪)"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양시(楊時)가 처음 정이(程頤)를 찾아갔을 때 마침 정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므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서 기다렸는데, 정이가 눈을 떴을 때는 문밖에 내린 눈이 한 자가량이나 쌓여 있었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장물(長物) 여유 있는 물건이나 좋은 물건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공(王恭)이 숙부인 왕침(王忱)의 요청을 받고 단 하나밖에 없는 돗자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침이 미안하게 생각하자, "숙부께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저는 원래 장물(長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德行》 누가……위로하리라 《시경》 〈비풍(匪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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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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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경회와 김익부를 전송하는 소서 送鄭景晦金翼夫小序 을사년(1905) 겨울에 정군 경회(鄭君景晦)와 김군 익부(金君翼夫)가 영상(嶺上)으로부터 가천(佳川)의 아픈 나의 집을 방문하여 이틀 밤을 서로 마주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해박한 포부와 정밀하고 깊은 조예가 참으로 소년 중에서 뛰어났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한마디 해줄 것을 청하였다.무릇 그대들은 문명한 교령(嶠嶺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고, 높은 덕을 지닌 애산(艾山)120)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니, 학문의 절도(節度)에 대해 반드시 상세하게 들었을 것이고, 덕을 쌓고 공업을 닦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익히 배웠을 것인데, 이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무슨 들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스스로 생각건대, 천박하고 용렬한 내가 설령 조금 아는 것이 있어 멀리서 찾아온 뜻에 부응하고자 한들 구구하게 소나 말의 발굽 자리에 고인 물이 어찌 바다를 구경한 눈에 물로 보일 수 있겠는가.아, 온 세상이 기나긴 어둠에 잠기고 온 천하가 서양의 물결로 뒤덮이고 있는 때에 간혹 공맹(孔孟)의 책을 읽고 공맹의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또한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고 찢기어 온통 참됨에서 벗어나고 바름을 잃었는데, 연원을 지켜 순박하면서도 잡되지 않은 경우는 오직 존사문(尊師門)121) 뿐일 것이다.선비가 되어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문하에서 노니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기이한 만남이라 이를 만하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못된다. 만약 존사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한 가닥 바른 학맥이 더이상 붙어 있을 곳이 없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존사문이 말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대들이 과연 이것을 알고 힘쓸 수 있다면, 오늘날 석과(碩果)의 씨앗이 되는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추운 계절에 그대들을 전송하며 아득히 끝없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삼가 이 글을 써서 노자를 대신한다. 歲乙巳冬。鄭君景晦金君翼夫。自嶺上過佳川病廬。信宿相對。娓娓傾倒。其抱負之該洽。造詣之精深。信是少年翹楚。將行。請以一言之贈。夫君輩生於嶠嶺文明之邦。遊於艾山碩德之門。其學問節度。聞之必詳。進修蹊逕。講之必熟。外此而有何可聞於人者乎。自惟淺劣。設有一知半解。欲以塞遠來之意。而區區蹄涔。何足爲水於觀海之眼乎。嗚呼。大宇長夜四海懷襄。間或有讀孔孟之書。從孔孟之學。而亦且千分萬裂。擧不免離眞失正。若其淵源持守。醇而無雜。其惟尊師門乎。爲士而居此世遊此門者。可謂千載奇遇也。餘不足言。若使尊師門之學而有不傳焉。則一縷正脈。更無可寓。豈不可惜。此則尊師門所不言者也。君輩果能知此而勉焉。不失爲今日之碩果種子耶。歲寒相送。不勝悠悠無窮之感。謹書此而贐焉。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존사문(尊師門) 상대방의 스승에 대한 경칭으로,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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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吏曺爲差定事道光九年十二月十二日同副承旨臣朴熙顯次知口傳權知承文院副正字未差本養黙弋只進叱使內良如爲口傳施行爲有置有等以合何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帖下文科新及第承仕郞金養黙准此道光九年十二月 日差定判書 參判 參議[着押] 正郎 佐郞[官印](背面)吏吏 安致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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