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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작변무문 節酌辨誣文 도리(道理)는 무궁하지만, 시세(時世)는 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성현의 말은 시세와 인정에 따라 혹 같지 않을 수 있다. 전대의 성인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후대의 현인이 밝혀 확충하거나 전대의 학설이 미진했던 점을 후대의 유학자가 변론하여 밝히는 것이 어찌 새로운 학설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전대의 현인보다 뛰어남을 추구하고자 해서이겠는가. 도리어 도리를 밝혀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장자(張子)가 "좋지 않은 점을 함께 고치는 것이 바로 후학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주자가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일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학자가 선대 현인들에 대해 선대 현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써 혹시라도 선대의 현인들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이나 미쳐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또한 감히 내버려둔 채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도리를 십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과입실(操戈入室)1)이 옛사람들이 학문에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선사이신 노사(蘆沙) 선생은, 율곡(栗谷) 선생이 원래 가학(家學)이 유래한 연원이 되기에 일생 동안 독실하게 믿으면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대체로 율곡이 이치를 강론한 말은 그 전체를 총괄하면  "이(理)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氣)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와 "기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현하는 바가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고, 그 단서를 정확히 가리켜보면 "온갖 정은 모두 이에서 발현된다."와 "사단과 칠정은 별개의 정이 아니다.", "이와 기는 호발함이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다. 선사께서는 매번 그 말이 정확하고 완전하여 만세토록 바뀌지 않을 정론(定論)이고, 더욱이 오늘날 주기(主氣)의 증상에 맞는 진정한 약제라며 감탄하였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그 기제(機制)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 조금 이치에 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매번 융통성 있게 보고자 하면서 이 말은 단지 유행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속의 유학자들이 정론과 종지(宗旨)를 잘못 알고 내버려둔 채 강구(講究)하지 않으면서 오직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일단의 말에만 집착하여 주기(主氣)의 증안(證案)으로 여김으로써 율곡의 은미한 뜻이 막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선사께서 마침내 〈사의(私議)〉2) 등의 글을 지어 "이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라는 말의 뜻을 밝혔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또 〈외필(猥筆)〉3)을 지어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조금 타당하지 못한 것이 전전하다가 잘못된 뜻에 이르게 되었음을 논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전대의 현인이 이것을 밝힌 것이 너무나 명쾌하여 훗날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대 현인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친 이유이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외필"이라 하였고, 오히려 감히 스스로 독단하지 않고 "참으로 질정을 드리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감히 스스로 옳다 여기지 않고 "내가 의심한 것이 망령된 것이라면 유문(儒門)의 다행이다."라고 하였으니, 말이 더욱 간절하고 예의가 더욱 공손하여 이른바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여 밝힌다."라는 것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근래에 영남 사람 최동민(崔東敏)과 권봉희(權鳳熙) 무리들이 〈외필〉 가운데 한두 구절의 말을 지적하며 선사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 서로 연이어 통지문을 보내며 방자하게 헐뜯었다.아, 선사께서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가? 본령이 둘이다라고 말한 것과 천명이 멈추었다고 말한 것, 헛된 명칭이 있다고 말한 것들은 "이는 장수이고, 기는 역졸이다[理氣帥役]"라는 말의 뜻을 설명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피음사둔(詖淫邪遁)4)이라 말한 것과 전도되어 창피스럽다고 말한 것은 주기(主氣)에 대한 후세 사람의 폐단을 말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뭇사람을 선동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퇴계와 우암을 조롱한 것이라고 하였고, 단지 이것만으로 그 죄를 무겁게 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주자(朱子)를 침범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고 헐뜯을 때면 성현을 앞세우고 경전의 뜻을 빙자함으로써 간악함과 속임수, 시기와 거짓의 계책을 팔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가 본디 이와 같다.무릇 의리는 천하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동생이 형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후대의 현인이 전대의 현인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다. 온공(溫公)이 《의맹(疑孟)》편을 지었지만5) 그의 아들 강(康)은 맹자를 가장 순수하게 여겨 경연에서 진강(進講)하였고, 명도(明道)가 《대학(大學)》의 편차(編次)를 정했지만 이천(伊川)이 그것을 개정하였으며6), 오봉(五峰)의 잘못된 논의를 남헌(南軒)이 논변한 것이 많았고7), 고정(考亭)이 정립한 학설을 면재(勉齋)가 간혹 어기기도 하였다8). 주자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이 장자(莊子)나 노자(老子)와 같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은 황노(黃老)의 유풍이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장자(張子 장재(張載))에 대해 직접적으로 "석씨(釋氏)에 가깝다."라고 하였고, 또 "《정몽(正蒙)》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라고 하였다.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회재(晦齋)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개정하였고9), 율곡이 퇴계(退溪)의 사칠의론(四七議論)을 변별하였으며10), 퇴계의 차의(箚疑)를 우암(尤庵)이 개정한 것이 많았고, 우암의 차의를 농암(農巖)이 간혹 논변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이것을 가지고서 아버지를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형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며, 스승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전대의 현인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아, 선사는 율곡을 정신으로 융회(融會)하고 마음으로 전수받아 깊이 좋아하고 독실하게 믿었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 마음이 일상적인 글 사이에 드러나서 낱낱이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인데, 우선 한 편에서 논한 것을 말해 보겠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하환성재(河喚惺齋)가 율곡을 신구(伸救)한 상소12)를 논하면서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 된다."13)라고 하였고, 또 "이 상소에는 천지 뒤의 떳떳한 법이 있다."14)라고 하였으며, 또 "하늘이 이 옹(翁)을 낸 것은 바로 만세에 비태(否泰)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다."15)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율곡을 아는 자가 선사만한 사람이 없고, 율곡을 존경하는 자 또한 선사만한 사람이 없으니, 일찍이 한 구절의 말을 해석한 것으로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이르는 것이 사리에 옳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고 만인의 눈을 가려 속이고자 하니, 매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터무니없는 말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단 말인가?우리나라가 분당(分黨)한 지 수백 년 동안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헐뜯었던 여러 선생의 말이 문자에 드러난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지만, 어느 한 마디도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말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유독 노사 선생께서 이치를 밝히고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했던 지극히 공정한 말에 대해서만은 사납게 성내고 심하게 배척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 비유하자면 이는 한 우매한 사람에 대해 그와 길을 함께 걷는 치욕은 달게 받으면서도 그와 방을 함께 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경계와 같은 것이니, 아, 서글프구나.중암(重庵) 김 선생(김평묵(金平默)이 일찍이 〈외필〉을 구하여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화서(華西) 선생(이항로(李恒老))의 말과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기정진과 이항로 두 선생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선사를 안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아, 도(道)는 굽혀지기도 하고 펼쳐지기고 하며, 때는 소멸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한때 굽혀졌지만 마침내 만세토록 펼쳐졌다. 오늘날 시끄럽게 떠드는 저들도 또한 이규(李槼)ㆍ유직(柳稷)16)과 같은 부류일 뿐이니, 어찌 그들과 잡다한 말로 논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집마다 그 글을 보관하고 그 말을 욀 수 없으니, 열 번 치는 나무와 세 번 전해지는 호랑이17)가 어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입을 잘 놀리는 사람들에 의해 먹혀들지 않을 바가 될 줄 보장하겠는가. 이에 감히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여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선비들에게 고한다. 道理無窮。而時世有異。是以聖賢之言。因時世人情而容有不同焉。前聖所未發。後賢發而擴之。前說所未盡。後儒辨而明之。是豈欲創立新說。求多於前人哉。乃所以明道理而捄時弊者。不得已也。張子曰。其未善者。共改之。正所望於後學。朱子曰。尊畏先輩。講明義理。竝行而不悖者。其非此意耶。然則學者之於先賢。當以先賢之心爲心。講明義理。十分盡底。而或有偶失照管者。未及細思者。則亦不敢放過。是乃十分尊畏之道。此操戈入室。古人之所以善學也。先師蘆沙先生於栗谷先生。原來是家學淵源之所自也。一生篤信而尊慕之。蓋栗谷論理之說。其總括全體。則曰理通氣局。及非氣不能發。非理無所發等語是也。其的指端緖。則曰萬般之情。皆發於理。及四七非兩情。理氣無互發等語是也。先師每歎其的確渾全。爲萬世不易之定論。而尤爲今日主氣之對證眞劑也。但於陰靜陽動。其機自爾。非有使之之語。有少未契。而每欲活看以通之。以爲此特流行邊說話矣。及見世儒之錯認。定論宗旨。遺而不講而專執陰靜陽動一段語。以爲主氣之證案。使栗谷微旨。鬱而不彰。先師遂著私議等說。以明理通之義。極其詳悉。又著猥筆。以辨陰靜云云之句。有些下語之未妥。以至輾轉差謬之意。因曰。前賢於此發之太快。而後弊之至此。容有未之思也。此所以發明前賢之意。而矯捄今日之弊者也。然猶不敢自安而曰。猥筆。猶不敢自專而曰。實有奉質之願。猶不敢自是而曰吾之所疑者妄。則儒門之幸也。言愈切而禮愈恭。所謂尊畏講明者。可以倂行而不悖矣。不意邇者。有嶺人崔東敏。權鳳熙輩。指摘猥筆中一二句語。謂先師攻斥栗谷。相繼投通。肆其詆毁。噫。先師之攻斥栗谷。果何事耶。曰雙本嶺。曰天命息。曰有虛名等語。是說理氣帥役之義。而彼曰攻斥栗谷。曰詖淫邪遁。曰顚倒倡披。是說後人主氣之弊。而彼曰攻斥栗谷。只此恐不足以動其衆。則曰譏切退尤。只此恐不足以重其罪。則曰犯斥朱子。自古小人誣陷君子者。未嘗不頭戴聖賢憑藉經訓以售其奸譎猜險之計者類固如此。夫義理天下之公物也。子不得以私其父。弟不得以私其兄。弟子不得以私其師。後賢不得以私其前賢。溫公作疑孟篇。而其子康以爲孟子最醇而進講於經筵。明道定大學編次。而伊川改定之。五峯差處。南軒多辨之。考亭定說。勉齋或違焉。朱子於周子直曰。其言似莊老。於程子直曰。其言不免有黃老之風。於張子直曰。近釋氏。又曰。正蒙多差處。至於我東。則晦齋改定朱子大學章句。栗谷辨別退溪四七議論。退溪之箚疑。尤庵多改之。尤庵之箚疑。農巖或辨焉。然未聞有一人以此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者也。噫。先師之於栗谷。所以神會心授。而悅之深信之篤者。可謂至矣。其發於尋常文字之間者。不可枚擧。而姑以一篇所論言之。先師嘗論河喚惺齋伸捄栗谷疏有曰。參天地關盛衰。又曰。此疏有天地後經法。又曰。天生此翁。乃爲萬世傳否泰消息。詳味此意。知栗谷者。莫如先師。尊栗谷者。亦莫如先師。曾以一句語解而謂攻斥者。於事理可乎不可乎。此不足以瞞三尺之童。而乃欲以熒惑一世。欺蔽萬目。其不思甚矣。人之無據。一至於此乎。我東分黨數百年。詆毁先正諸先生之言。著於文字者。不啻多矣。而無一言攻斥。獨於蘆沙先生明理捄敝至公至正之言。怒之暴。斥之甚。而使不相容。抑何曲折歟。比如一昏愚之人。甘受行路之辱。而不忍同室之戒者也。吁可哀也。重庵金先生嘗得猥筆。讀之歎曰。此與我華西先生之言。不約而合。又曰。尊栗谷者。莫如奇李二先生。此可謂知先師矣。嗚呼。道有屈伸。時有消長。自古聖賢。未嘗無一時之屈。而竟伸於萬世。今日彼輩之嘵嘵。亦一李槼柳稷之流耳。何足與之多辨。但不能家蓄其書。戶誦其說。而十伐之木。三傳之虎。安保其不爲巧言利口之所入乎。玆敢略述梗槪。以告于吾黨遊從之士云。 조과입실(操戈入室) 자기의 창으로 자기 집을 공격하여 쳐들어온다는 말로, 배운 학문으로 가르쳐 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이른다. 청출어람(靑出於藍)과 같은 말이다.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며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쥐고서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탄식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鄭玄列傳》 사의(私議)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말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46세 때에 남암(南庵)으로 피서(避暑)를 가서 처음 초고를 짓고 죽기 직전까지 교정한 것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기정진은 이 글에서,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자들이 이일(理一)과 분수(分殊)에 대하여 모르는 까닭에 이일을 형기(形氣)에서 떨어진 것으로 한정하고, 분수를 형기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한정시켰으며, 그 결과 이일과 분수가 별개의 것이 되고 성과 명(命)이 제멋대로 결정되어 성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었다."라고 전제한 뒤에 이일원적(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전개하고 있다. 외필(猥筆) 81세 때에 지어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세상에 내놓았던 글로, 율곡이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나온 뒤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논박하며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말의 네 가지 병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의 준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방탕한 말에서 그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에서 그 마음이 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온공(溫公)이……지었지만 온공(溫公)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1019~1086)을 말하고, 《의맹(疑孟)》은 사마광이 《맹자(孟子)》의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여 맹자를 비판한 저술로 모두 11편이며 《온국문정사마공문집(溫國文正司馬公文集)》 권73에 실려 있다. 명도(明道)가……개정하였으며 명도(明道)는 북송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의 호이고, 이천(伊川)는 정이(程頤)의 호이다. 이들은 형제 사이로 이정(二程)이라 일컬어졌다. 오봉(五峰)의……많았고 오봉(五峯)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호이고, 남헌(南軒)은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다. 이들은 사제관계로, 장식이 호굉에게 사사하였다. 고정(考亭)이……하였다 고정(考亭)은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의 별칭이다. 면재(勉齋)는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의 호로, 주희의 제자이자 셋째 사위이다. 회재(晦齋)가……개정하였고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일부 구절의 차례를 옮기거나 바꾸어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편집하였다. 율곡이……변별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희(朱熹)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학설에 근거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여기에 타는 것이다.'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氣)가 발하면 이(理)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였다. 퇴계의……하였다 이황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해를 위해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를 저술하였고, 송시열이 《주자서절요기의》를 재정리ㆍ보완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라 하고서 권상하(權尙夏)에게 주며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마무리를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김창협은 노론 학인들과 토론하며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였다. 하환성재(河喚惺齋)가……상소 하환성재(河喚惺齋)는 하락(河洛, 1530~1592)으로, 환성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도원(道源)이다. 진주(晉州) 출신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가르쳤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상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등의 무고를 구제하였다. 천지에……된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있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하늘이……위해서이다 비태(否泰)는 《주역》의 〈비괘(否卦)〉와 〈태괘(泰卦)〉를 말하는데, 〈비괘〉는 건괘(乾卦 ☰)가 위에 있고 곤괘(坤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지 않아 막히는 상이고, 〈태괘〉는 이와 반대로 건괘가 아래에 있고 곤괘가 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여 통하는 상으로, 세도의 비색(否塞)함과 태평(泰平)함을 뜻한다. 이 말은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규(李槼)ㆍ유직(柳稷) 1650년(효종1)에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다시 주장하자, 이이에 대해서는 "천륜을 끊고 불가로 도망하여 숨었다."라고 비난하고, 성혼에 대해서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도 임금이 파천(播遷)하던 날 달려오지 않았다."라고 비난하며 반대 상소를 올린 900여 명 중 대표 인물들이다. 《孝宗實錄 1年 2月 22日》 세……호랑이 세 사람이 저자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다는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자꾸 말하면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다.《淮南子 說山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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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6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庚寅 庚寅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화명(乾化命)'에 이어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와 여자, 즉 정해생의 남편과 경진생의 아내이다. 상주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2명 등이다. 안장일은 경인년 12월 14일로 되어 있다. 이장(移葬)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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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김채상(金彩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賓有寬 金彩相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賓有寬 金彩相 [着名]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6년(헌종 12)에 빈유관이 서도질 관인제 아래에 있는 논을 김채상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 1846년(헌종 12)에 빈유관(賓有寬)이 서도질(西道秩) 관인제(灌仁堤) 아래에 있는 논을 김채상(金彩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빈유관은 이 논을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거래된 토지는 서도질 관인제 아래에 있는 황자답(惶字畓) 3두락지이며, 부수로는 6부(負)가 되는 곳으로 거래가격은 30냥이다. 서노질 관인제가 어느 지역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채상의 거주지가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였으며, 그가 1856년에 매입한 산지(山地)가 부안현 하서면 지역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때의 거래에 빈씨(賓氏) 가문의 일원이 보인(保人)으로 기재된 점을 고려하면 부안현에 속한 논을 김채상이 매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관련문서를 통해서 볼 때 이 논을 거래할 당시의 김채상은 73세의 노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인 빈유관(賓有寬)과 증인 박유엽(朴有燁), 필집(筆執) 송성주(宋聖周)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김채상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1856년에는 산소를 쓰기 위하여 산지를 매입하기도 하였으며, 산송(山訟)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부안현에 소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효자로도 널리 알려져서 누군가가 관에 그를 표창해달라고 청하면서 작성한 소지의 초안이 남아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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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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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金彩相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勢不得已西道秩灌仁堤下惶字畓參斗落只所耕六負庫叱乙價折錢文參拾兩依數交易捧上是遣日後若有異端之弊則持此憑考事畓主 賓有寬[着名]證人 朴有燁[着名]筆執 宋聖周[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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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자동 여묘의 옛 터를 보고 느낀 바 있어서 見匏子洞廬墓舊址 有感 풍수지탄하던86) 해 옛날 언제던가 風樹昔何年이 땅에 여묘를 지었지 此地築墓廬그해에 손수 심었던 소나무는 當日手植松숲 이루어 그림자도 무성해라 成林影扶疏대숲은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叢竹無人護형태만 남았으니 몇 가지인가 刑餘問幾條채소 밭엔 띠풀 가시 어지럽고 菜畦錯茅棘우물 벽돌엔 개구리 두꺼비 뛰네 井甃躍蛙蜍사물의 변화가 이미 이러하니 物變已若此내 귀밑머리 또한 희어졌구나 我鬢亦皤如비록 다시 여묘를 지으려해도 縱欲復築廬이제는 누구를 위할 것인가 今焉爲誰歟부앙하며 온갖 감회 이는데 俯仰生百感저녁 찬 바람이 옷을 스치네 夕風冷拂裾 風樹昔何年, 此地築墓廬.當日手植松, 成林影扶疏.叢竹無人護, 刑餘問幾條.菜畦錯茅棘, 井甃躍蛙蜍.物變已若此, 我鬢亦皤如.縱欲復築廬, 今焉爲誰歟.俯仰生百感, 夕風冷拂裾. 풍수지탄하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풍수(風樹)'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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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눈보라 初冬 風雪 바다 하늘 눈보라가 겨울 들어 심해지니 海天風雪入冬深무슨 일로 처량하게 객의 마음 흔드나 何事悽悽攪客心무너진 몇 집에는 국화꽃이 시들고 摧敗幾家殘菊朶쓸쓸한 일천 산엔 단풍 숲 저무네 飄零千峀晩楓林들집의 가난한 농부는 곡식 수확 바쁘고 忙收野舍貧農稼산촌의 게으른 아낙 다듬이질 재촉하네 催起山村懶婦砧다시 밤이 와서 사람이 오지 않으니 還可夜來人不到형제와 같은 방에서 옛글을 찾네 棣蘭同室古文尋 海天風雪入冬深, 何事悽悽攪客心.摧敗幾家殘菊朶, 飄零千峀晩楓林.忙收野舍貧農稼, 催起山村懶婦砧.還可夜來人不到, 棣蘭同室古文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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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설립한 날에 제군과 함께 읊다 設社日 共諸君吟 고색 창연한 벽절산에 古色蒼蒼碧節山선비들이 빽빽이 달빛 아래 돌아오네 林林冠珮月中還초겨울 밤에 갓 씌운 등에 향그런 책상 있고 篝燈芸榻初冬夜백 리 길에 쑥대 신에 버들 지팡이 이어지네 蓬屐筽筇百里間지극히 가까운 이것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으니583) 至近如能從此進한참 높아 끝내 오르기 어렵다 말하지 말라 彌高莫道竟難攀스승과 벗이 서로 필요한 뜻을 알려하면 欲知師友相須意단지 마음에 있지 얼굴584)에 있지 않다네 只在心肝不在顔 古色蒼蒼碧節山, 林林冠珮月中還.篝燈藝榻初冬夜, 蓬屐筽筇百里間.至近如能從此進, 彌高莫道竟難攀.欲知師友相須意, 只在心肝不在顔. 지극히 …… 있으니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부터 학문을 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얼굴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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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육일 삼가 선사의 〈구일 등고〉 시에 차운하다 기사년. 아래도 같다. 九月旣望 謹次先師九日登高韻【己巳下同】 늦가을 서실엔 티끌도 끊겼는데 晩秋書屋絶纖塵바로 노란 국화와 흰 달 만났네 正値黃花素月辰공자 성인 문하1)의 초학자는 孔聖門墻初學士대한제국 천지의 옛 백성이네 大韓天地舊民人자기 그림자 돌아보며 깊이 회포 논하고 回看自影論深抱이전 공부에 나아가 점차 새로움 깨닫네 却就前工漸覺新경계를 마주해2) 서성이며 잠 못 드는데 對境徜徉還不寐하늘 가득 서리 이슬이 의관을 적시누나 滿天霜露濕衣巾 晩秋書屋絶纖塵, 正値黃花素月辰.孔聖門墻初學士, 大韓天地舊民人.回看自影論深抱, 却就前工漸覺新.對境徜徉還不寐, 滿天霜露濕衣巾. 공자 성인 문하 '공성(孔聖)'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문장(門墻)'은 문과 담장이라는 뜻으로, 스승의 문하를 비유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선생님의 담장은 수 장이나 된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많음을 볼 수가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는 내용이 보인다 경계를 마주해 원문의 '대경(對境)'은 불교어로 진경(塵境)을 대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국화나 달 등의 가을의 경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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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5) 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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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회락】1)에게 주다 與梁處中【會洛】 상단(上段)에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한 구절은, 품부받은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이로부터 나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단(下段)에 "악함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한 구절은, 유행(流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과함과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근본이 모두 성(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풀이하신 "품부받은 기질에는 반드시 선과 악의 차별이 있는 까닭도 또한 성의 이이다【所稟之氣, 所以必有善惡之殊者, 亦性之理】"라는 말은, 바로 '이에도 성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애초부터 이가 아님이 없다【以爲氣有淸濁粹駁, 而爲善惡之分者, 亦未始非理】'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칫 그 '이(理)'라는 글자가 '실리(實理)'의 '이'로 간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말하기를 "여기서 '이'는 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理當如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또한 하단을 해석한 부분에서 바로 '유행(流行)' 및 '과함【過】과 모자람【不及】' 등의 용어에 대해 말한 것은 볼 만합니다. '미발(未發)'은 본시 마음【心】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품부받은 기질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래 '미발(未發)'이라는 글자가 상단과 하단에 나뉘어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본래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경우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材料)이니, 때에 따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때【未發時】의 경우에는, 다만 전고의 인용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가 일찍이 '이치상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구절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시절이며, 다만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만을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것【未發】보다 어질다고 하는 것은, 품부받은 기질에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이 오로지 이 마음을 일으켜서 유행한 후의 사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아 보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논의한 여러 조목이 혹 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은 때에는 기질에 청탁(淸濁)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하였고, 또한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지만 악이 본디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선과 악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잘못 이해하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말한 뜻이 아닙니다. 기질이 일에 쓰이지 않으면 담연하고 허정(虛靜)하여서, 진실로 청탁(淸濁)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하물며 선악이 있다고 말할 만하겠습니까. 다만 그 품부받은 기질의 본질은 아주 잠깐의 미발(未發)로 갑자기 성인(聖人)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설을 멀리서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다만 그대【高明】가 알려준 '맑고 깨끗한 기질【澄淸之氣】은 성인(聖人)이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것이나, 뭇 사람들은 홀연히 그것을 잃는다'라고 한 말을 그대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홀연히 그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자기의 품부받은 기질이 같지 않은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지 않은 구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인가【臨發而排定耶】'란 것에 대해서는, 만약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이면, 정자(程子)는 마땅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이 동요하여 선악이 있게 된다'라고 하지, '이(理)에 선악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理)가 비록 선하거나 악하더라도 그 이는 아직 형질을 갖추지 않는다면, 청탁(淸濁)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악(善惡)이 상대적이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가만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면, 그 더러움이 발동하지 않으나, 그 맑은 것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이 설명에 어찌 조금의 의심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극념(克念)과 망념(罔念), 공(公)과 사(私), 향(向)과 배(背)로써 구별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기질(氣質)의 선악으로 갑자기 성인이 되고, 갑자기 광인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안자(顔子)의 홍로지설(洪爐之雪)2)이나 시우지화(時雨之化)3)와 같다면, 한 번 맑아져서 곧바로 변화하여서 성인(聖人)의 기질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큰 근본도 또한 어찌 보면 기질을 떠나서 세운 것이니, 다만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맑고 고요함은, 이 큰 근본이 서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설은, 내가 일찍이 미발(未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단에서 유행(流行)을 설명한 곳과 비교하여서 단락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바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이에 "곧바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봐주길 바랍니다. 변별한 것은 많으나, 구별한 것은 단지 한 곳밖에 없으니, 한 곳이 합당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기불용사(氣不用事)' 네 글자를 상세하게 보아서 알아차린다면, 마땅히 막히고 통하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보여주십시오. 上段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有淸濁粹駁。而爲善爲惡。於此分焉之謂也。下段惡亦不可不謂之性是就流行上有過不及之差者。其本皆出於性之謂也。朱子解之曰。所稟之氣。所以必有善惡之殊者。亦性之理。此是解理有善惡一句。以爲氣有淸濁粹駁。而爲善惡之分者。亦未始非理云爾。然怕人將此理字。作實理看。故旋又曰。此不是說實理。猶云理當如此。又於解下段處。卽以流行及過不及等語。言之此可見矣。未發。本是心上說。不當於氣稟上。下未發字。分上下段。作未發已發。亦本非愚意也。淸濁粹駁。此是氣稟之本色材料。不可以隨時有無。而於未發時。則但不用事焉耳。況愚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節。而特以氣稟上本色材料言之耶。賢於未發。謂無氣稟善惡則可矣。而若以淸濁粹駁。專作此心流行後物事看。恐不然矣。更詳之如何。所論諸條。或不無不諒鄙意處。有曰。未發時。氣有淸濁駁混。又曰。氣不用事。而惡自在。又曰善惡相對云云。鄙說若果如此則誠誤矣。然此非愚之言也。氣不用事。澹然虛靜。固無淸濁之可言。況有善惡之可說乎。但其氣稟本質。有不可以霎刻未發。而遽變如聖人。今不必遠引他說。只以高明所諭澄淸之氣。聖人常久而不失。衆人忽然而失之之言。言之。其常久而不失。其故何在。忽然而失之。其故何在。其故不在別處。不在別人。而在於自己氣質所稟之不同。然則其不同之分。自來已然耶。至於臨發而排定耶。若臨發而排定。則程子當曰。人生氣稟。動有善惡。不當曰理有善惡。理雖善惡。而其理未形。則不可謂淸濁混。亦不可謂善惡對矣。水雖在濁器。而止而不動。則濁不用事。而其淸與在淨器者。無異。此說何須疑也。作聖作狂。以克念罔念。公私向背言之。何嘗以氣質善惡。忽然而聖。忽然而狂耶。如顔子洪爐之雪。時雨之化。則一澄淸便渾化。却與聖人氣質無異矣。大本亦何嘗離氣質而立。但氣不用事而湛一虛靜。此大本所以立也。人生氣質理有善惡之說。愚未嘗認作未發看。但比下段說流行處。不能無段落耳。如此看。恐爲正當。而乃曰迂回耶。更詳之爲望。所辨雖多。而所分只在一處。一處合則無不合矣。大抵氣不用事四字。詳細看取。宜無許多窒礙矣。如何如何。更示至當之歸也。 양회락(梁會洛, 1862~1935)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홍로지설(洪爐之雪)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顏淵)이 인을 지키다가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마치 큰 화로 속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어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우지화(時雨之化) 초목이 철 맞게 내린 비에 잘 자라듯이 교화가 미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가르침이 다섯 가지인데, 때맞게 감화하듯 한 것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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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직접 찾아와 준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섣달 추위에 덕을 함양하면서 신명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의 생활도 평안하신지요?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그저 궁벽한 시골집에 칩거하면서 나날이 더욱 쇠약해져만 갑니다. 단지 절절하게 그리워하며 만나 뵙지 못하는 아쉬움만 더할 뿐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러운 이 시기에 실심(實心)으로 이 일을 대하는 이는 오직 그대【高明】 한 사람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애초부터 가졌던 구구한 소원이 아님이 없었지만, 험하고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나아갈 만한 여력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보여주신 문목(問目)은 조목마다 응답해 나아갔으니, 다시 상세하고 확실하게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음양(陰陽)·강유(剛柔)·인의(仁義)에는 삼재(三才)의 도(道)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섞이지 않은 본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陰陽)·강유(剛柔)는 진실로 도(道)가 아니며, 체용이 떨어지지 않은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과 강유는 '도가 아니다【非道】'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理)가 이(理)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세심하게 살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말하길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장자(張子)는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도의 체용(體用)은 음양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 모두를 참고할 만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한데, 어째서 선한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성악설(性惡說)을 논파할 만한 때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先德)께서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설명하여서, 성선설(性善說)을 보완하고 성악설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인(後人)들은 이(理)가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기고, 나아가 미발(未發)도 또한 기질지성이며, 요순(堯舜)도 또한 기질지성이라 여깁니다. 오호라, 선덕(先德)들이 논리를 세워서 장차 성악설을 배척하려고 하였는데, 후인들이 이 세 글자를 가지고 도리어 성악설을 증명하는 말로 사용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긴다면, 천하의 어떤 이(理)인들 기(氣)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공허한 의론에 묶이고 얽매일 것이니, 우뚝 홀로 선 연후에야 본연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이(理)의 묘처(妙處)를 신(神)이라고 하는데, '묘(妙)' 자와 '신(神)' 자를 만약 기(氣)에 속해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理)는 완전히 공허하여 하나라도 쓸 데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용(用)의 측면에서 신(神)이라고 한 상단과 하단의 글들은 태극(太極)의 참다운 면목을 말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중단(中段)의 '신(神)' 한 글자에 대해서만 홀로 기(氣)에 대해 말한 것이겠습니까. 칠정(七情)은 사람의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니, 사단(四端)은 특히 이 칠정 중에 나아가, 그 선한 것만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칠정과 사단은 본래 양단으로 나뉜 것이 아니니, 어찌 내외로 구별을 두었겠습니까.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4) 또한 불가한 것이니, 다만 사단(四端)과 상대되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委枉何等感荷。未審臘寒養德有相。動止珍休。馳仰不任。義林跧伏窮廬。衰索日甚。只切悠悠靡逮之恨而已。缺界滔滔。實心此事者。惟高明其人也。昕宵遊從。未始非區區之願。而崎嶇險釁。無力可就。奈何奈何。所示問目。逐條塡去。更加詳確如何。陰陽剛柔仁義。三才之道備矣。以不雜者言之。陰陽剛柔固非道也。而以不離者言之。陰陽剛柔不可謂非道也。理之爲理。正在於此。惟細心看之可得。是故孔子曰一陰一陽之謂道。張子曰。由氣化有道之名。朱子曰。道之體用。不外乎陰陽。此皆可攷也。人性本善而何故而有不善只此不善二字。若不區處。則性惡之說。無時可破。是故。先德說氣質性三字。以補性善之說。以斥性惡之論。後人以理之具於氣者。統謂之氣質之性。至以爲未發亦有氣質之性。堯舜亦有氣質之性。嗚乎。先德立論。將以斥性惡之論。豈知後人將此三字。反以爲性惡之證佐耶。若以具於氣者。統謂氣質之性。則天下何理有不具於氣者。必懸空係虛。兀然獨立然後。爲本然之性耶。理之妙處謂之神。妙字神字。若屬氣邊看。則理是空空一殼無用之長物矣。況其用則謂之神上下文段。無非太極眞面說。豈於中段神一字。獨言氣乎。七情統言人之情。四端特就七情中剔出其善者矣。七情四端。本非兩端。則何嘗有內外之別也。謂之旁榮側秀亦不可。但與四端對言云然耳。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 《심경부주》 권2 〈성의장〉에 조치도(趙致道)가 주자에게 질문한 것으로 "혹 옆에서 나와 꽃이 피고 곁에서 빼어나 기생하는 겨우살이나 사마귀와 혹과 같은 것은 이것도 비록 성이 동한 것이기는 하나 인심의 발현이요 사욕의 유행이니, 이른바 악이라는 것입니다.【其或旁榮側秀, 若寄生疣贅者, 此雖亦誠之動, 則人心之發見, 私欲之流行, 所謂惡也.】"라고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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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3월 6일에 보내온 편지를 4월 보름에 이르러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상하게 다 알려주시어,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어찌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까. 주자(朱子)께서 성(性)을 논한 것에 대해, 어떤 이가 말하길 "비유컨대 약성(藥性)을 논하면, 오한과 발열도 또한 형상을 논한 곳이 없는데, 단지 복용을 완료한 후에야 열이 떨어지기도 하고, 열이 오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라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왕왕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성(性)이라고 여기니, 이는 단지 심(心)에 대해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무릇 오한과 발열은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약을 복용한 후에 곧바로 열이 내리거나 오르는 것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인성(人性)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는 것을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이(理)가 있어서 곧바로 허다한 일에서 나오게 되어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과 같은 것이 바로 신(神)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께서 신(神)자에 대해 기(氣)로 말한 경우가 있고, 이(理)로 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령(神靈)을 성(性)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신(神)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이(理)의 발용(發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이(理)가 아니라고 말하고, 혹은 기(氣)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신(神)이 바로 이(理)입니다.'라고 하면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謂神卽是理, 却恐未然.】"라고 하고, 뒤이어 "신(神)을 완전히 기(氣)로 간주하여 보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將神全作氣看, 則又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들을 관찰해보면, 신(神)의 뜻을 분명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전날에 있었던 한 편의 말은 이(理)로 인정하고, 다른 한 편의 말은 기(氣)로 인정한 것은, 어찌 치우친 의논이 아니겠으며, 왜곡된 견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부터 그것을 삼가 지킬 것을 생각해봐야 하니, 그대도 또한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힘써 귀착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단의 절반과 하단의 절반에서 기(氣)의 신(神)과 이(理)의 신(神) 등에 대한 설명도 또한 옳지 못하니, 신(神)은 두루하여 정해진 방소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상단과 하단의 절반에 옳은 말이 있겠습니까. 신(神)은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 이(理)와 기(氣)가 각각 그 신(神)과 하나가 된다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명(神明)' 두 글자는 끝내 다 합쳐지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 또한 상세하게 연구해보면, 저절로 바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주서(朱書)에 신명(神明)은 바로 물(物)이라는 논설이 분명히 있는데, 다시 그것을 운운한단 말입니까. 저의 논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주서(朱書)의 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지난번에 〈경함에게 보내는 편지【與景涵書】〉5)가 있었는데, 아울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月六日書。四月望間始得見矣。縷縷纖悉。警發多矣。曷不知感。朱子論性有曰。比如論藥性寒熱。亦無討形象處。但服了後。做得寒做得熱。便是性。今人往往指有知覺者。爲性。只說得箇心。夫寒熱固不可以言神。然服了後。便做得寒熱。便是神。人性之有仁義禮智。固不可以言神。然旣有此理。便有許多事出來。如惻隱羞惡辭讓是非。便是神。是以朱子之於神字。有或以氣言。或以理言。如曰神靈不可以言性。及神者理之發用之說是也。有或言非理。或言非氣。如曰謂神卽是理。却恐未然。及以神專作氣看。又誤之說是也。觀是數說。神之爲義。若可領了矣。前日之一邊之言。認以爲理。一邊之言。認以爲氣者。豈非偏論曲見耶。區區於此。不覺瞿然自失。思以爲從此謹守之計。賢亦深思之。而勉爲歸宿也。若其上一半下一半。及氣之神理之神等說。又恐不然。神周而無方者也。豈有上下一半之可言。神一而不二者也。豈有理氣各一其神之可名。且神明二字。終有未盡合處。此亦細細詳究。自有結案之日矣。朱書明有神明是物之論。而乃復有所云爾耶。鄙說固不足道。而朱書說亦將何以區處乎。向有與景涵書。倂以照及如何。 경함(景涵)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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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세월은 자꾸 흘러서 거의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한 번 서로 만나 토론하는 것을 여태까지 빠뜨리고 하지 못하였으니, 가슴 속에 쌓인 슬프고 아쉬운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쪽을 바라보며 그리운 벗【停雲】6)을 떠올리니, 아침저녁으로 그리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 보내온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하시다는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트이는 것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義林】는 그저 빈집에 틀어박혀서 그럭저럭 간신히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남은 시간을 보낼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온전히 그것을 위해 보내고 있지 못하여서, 매번 개탄할 뿐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구구절절하신 말씀은 재차 제기해보고서 저의 미천한 식견을 알 수 있었으니, 전날의 말들은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층이층(一層二層), 미발이발(未發已發)'이라고 한 것은, 그 말의 뜻이 고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미발이발(未發已發)'은 바로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기질(氣質)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질은 태어남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니, 진실로 때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의 성품이 혼연하여 도리(道理)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 청탁(淸濁)과 미악(美惡)의 다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기질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본(大本)에 저해가 되며, 어찌 성선(性善)에 해가 되어서, 반드시 이 기질이 발현되지 않는 일층과 이층의 설을 그렇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청컨대 미발(未發) 시에 '성인의 성품이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 '성인의 기질은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 다시금 더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남당집(南塘集)》7)을 보았는데, 이 가운데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부분을 '정(靜)에 속할 수 없다'고 하며, 또한 '비은(費隱)'이라고 한 부분은 '동정(動靜)으로 나누어 배속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이 말부터 「경함의 편지【景涵書】」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비은(費隱)을 동정(動靜)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진실로 옳으나,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말이 정(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조금 더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이에 대해 답변하여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歲華荏苒。洽已半年矣。而一番握討。尙此闕如。懷緖悵恨。謂何如耶。南望停雲。日夕難任。謂外承備審侍省之餘體節佳適。慰豁不可言。義林係蟄空齋。粗聊捱過。而至於尋溫舊業。以爲多少餘日之計。則全未有之。每用慨然。示喩縷縷。復此提起。可見愚陋前日之言。有未瑩也。但所謂一層二層。未發已發。不惟語意不雅。而求之於心。亦未見其可也。大抵未發已發。此是心上說。非氣質上說也。氣質與生具生。固不可以隨時有無。然在此心未發時。一性渾然。道理全俱。而不見其淸濁美惡之異者。以其氣不用事故也。此何害於大本。何害於性善。而必爲此氣未發一二層之說乃爾耶。且請未發之時。謂聖人之性與凡人同乎。謂聖人之氣質與凡人同乎。試於此而更加思省。如何。向見南塘集謂。沖漠無眹。不可便屬於靜。又謂費隱不可分屬動靜。未知此說如何。向以此語及於景涵書中矣。愚意費隱之不分動靜。固然。而至於沖漠無眹之非靜。恐有可商量者。幸爲之示及。如何。 정운(停雲) 하늘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그리운 벗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정운(停雲)〉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한 벗을 생각해서 지은 시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남당집(南塘集) 조선 영조(英祖) 때 문인 한원진(韓元震)의 시문집으로, 44권 22책으로 되어 있다. 잡저(雜著)에 심성론(心性論)에 관한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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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與梁處中 봄부터 멍하니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한 번 만나 뵐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서 한 해가 이미 저물어 갑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절절하여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과 함께 논설한 바가 있었는데, 그대가 경함에게 보내온 편지도 또한 얻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또한 경함의 편지에 답하였으니, 대략 말하자면,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8)라고 하였는데,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마땅히 '일의 이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요, '마음의 이치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생(生生)하기 때문에 영(靈)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각(覺)하는 것이니, 상채(上蔡)9)가 말하길 "마음에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智)는 마음의 정(貞)이요, 지(知)의 이치이며, 사덕(四德 : 仁義禮智)의 근본이고, 만 가지 이치의 창고이니, 이것이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先師 : 奇正鎭)께서 이른바 '이치를 싣고 있는 것이 체(體)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靈)이 아니면 능히 깨닫지 못하며, 이(理)가 아니면 깨달을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의 주체【能覺】'라는 한 구절이 없이 다만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말한다면, 진실로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게 되는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주체【能覺】와 깨달음의 대상【所覺】을 상대적으로 들어서 말하였으니, 또한 어찌 이러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혹 어떤 사람이 선사(先師)께 단지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들어서 지각(知覺)하는 것을 이치라고 여기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답하여 말하길 '어찌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깨닫는 행위 주체가 바로 영(靈)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면(下面)에서 '이치를 싣는 것이 체이다【載理爲體】'라는 한 단락의 말을 들어 채운 것입니다. 무릇 선현(先賢)의 말씀은 상대방이 묻는 것에 따라 답을 하는 것이니, 비록 그 답이 똑같이 않더라도 그 지향하는 바는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주재하는 바【所以主宰】'라는 말이 싫은 나머지 이를 두 주재함의 혐의가 있다고 여기고, 또 지각을 주재한다고 여기니, 이는 곧 소이연(所以然)입니다.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어떤 소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논변한 바가 있으나, 바빠서 미처 편지로 써서 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디 그대가 다시 한 마디 일깨움을 주는 말【一轉語】10)을 적어서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스스로의 집착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의 병이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것을 만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自春以來。無日不佇待一穩。而荏苒侵尋。歲已暮矣。憧憧懷思。曷有己已。近與景涵有所論說。而賢所抵景涵書。亦得以見之矣。日前又答景涵書。略曰。朱子曰。能覺者心之靈。所覺者。心之理。若賢意。則當曰事之理。不當曰心之理。生生故靈。生生故覺。上蔡云。心有知覺之謂仁。卽此意也。此非所覺者心之理乎。智者心之貞。知之理。四德之本。萬理之藏。此非所覺者心之理乎。先師所謂載理爲體。卽此也。非靈不能覺。非理無所覺。若無能覺一句。而只說所覺。則固有以理覺理之嫌。今以能覺所覺對擧言之。又安有此嫌耶。或人之問於先師。只擧所覺。而認知覺爲理。故先師答云。安有以理覺理之理乎。此言能覺者。是靈故也。是以其下面。擧載理爲體一段語以足之。夫先賢之言。隨問隨答。雖若不同。而其致則一也。云云。且駁所以主宰之語。以爲有兩主宰之嫌。又以爲主宰知覺。卽所以然。而所以之上。復有何所以云云。未知此說何如耶。愚已有所論辨。而忙未書呈耳。願賢更下一轉語以示之。如何。自執太固。固此人之病。而不知其喜新立異至於此也。 《주자어류》 권5에 "지각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질의 영(靈)입니다.【所覺者心之理, 能覺者氣之靈.】"라고 한 말이 있다. 상채(上蔡) 중국 북송 때 성리학자 사량좌(射良佐, 1050〜1130)의 호입니다. 정호(程顥)의 주요한 제자로, 여대림(呂大臨)․양시(陽時) 등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리며, 뒷날 육구연(陸九淵)의 상산학(象山學)에 영향을 주었다. 일전어(一轉語)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 마디의 번뜩이는 선어(禪語)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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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동지【南至】11)가 장차 가까워져서 양덕(陽德)이 상승하려고 하는 시기에,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부모의 병환은 시절과 더불어 모두 회복되었는지요. 매번 치달리듯 그리워하는 마음 지극하고 절절합니다. 보내 준 편지에 구구절절한 말들은 경계시키고 계발시켜 주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대략 그 내용을 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주재(主宰)를 말하고 나서, 다시 주재(主宰)하는 바를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과 태극(太極)의 주재(主宰)의 묘(妙)로서 말한 것이니, 진실로 당연하고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그대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알고 있는 것이고, 나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위(無爲)이고, 사람은 유위(有爲)이니, 무위이기 때문에 이(理)가 주가 되고, 유위이기 때문에 심(心)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심(心)은 오로지 이(理)라고 부를 수도 없고, 기(氣)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理)와 기(氣)가 묘하게 합하여서 있는 것입니다. 묘하게 합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묘함【靈】'인 것입니다.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지각할 수 있고,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고 한 것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마음은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心能檢性】'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능히 넓힐 수 있는 능력과 능히 검속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재(主宰)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능력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용하는 바가 있게 됩니다. 만약 능력을 가지고 주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능소(能所)' 두 글자는 하나만 유지하고 하나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도리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니, 이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면, 모든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경함(景涵)이 이른바 '영묘함은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靈不主宰】'라고 한 것과 '넓게 보면 영묘함은 주재(主宰)가 되고, 상세히 보면 신묘함이 주재(主宰)가 된다'라고 한 말들이 모두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자네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잘 다스려서 다시금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합하게 되면, 이른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는 조목마다 따라가면서 낱낱이 들어서 말하지 말 것이니, 말단에서 위를 범하는 내용을 읽고 나서 놀랐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가 되면, 능소(能所)의 분단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그 능(能)을 보존하고자 그 소(所)를 폐한다면, 위를 범하는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한단 말입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에 내가 말한 '마음에는 지각이 있다【心有知覺】'와 '지혜는 지각하는 것의 이치이다【智是知之理】'라는 주장을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지각(知覺)하는 까닭의 이치라고 한다면, 지각하는 것은 심(心)의 영역이 아니라, 성(性)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되므로, 이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지각하는 까닭의 이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평소 지리멸렬한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정신까지 흐리멍덩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을 갈고 닦는 의리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부디 나의 말을 배척하지 마시고 끝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南至將近。陽德方升。未審生處愼候。與時俱復。每切馳慕之至。示喩縷縷。警發多矣。但於鄙意或不能無疑請略陳之旣言主宰。不當復言所主宰。此以天命本然太極主宰之妙言之。固當固當。非但賢知之。愚亦知之。非但愚知之。人皆知之。但天無爲。人有爲。無爲故理爲之主。有爲故心爲之主。此心不可專喚做理。不可專喚做氣。必是理與氣妙合而有者也。妙合是何物。曰靈而已矣。靈故能知覺。靈故能主宰。孔子所謂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是也能弘之能。能檢之能。其非主宰之謂耶。旣有其能則必有其所。若以能謂非主宰則已。不然。能所二字。不可存一而廢一。不其明矣乎。此是道理大頭臚於此錯。則無不錯矣。景涵所謂靈不主宰。及泛看靈爲主宰。細看神爲主宰之說。皆不以此耶。願高明平心易氣。更加三思也。苟能有合於此。則所謂諸般說話。皆有下落處矣。玆不復逐條枚擧也。末段犯上之云。讀之瞿然。然心旣爲主。則能所之分。斷不可無。若欲存其能而廢其所。則犯上之患。正在於此。如何如何。但來喩以愚所云心有知覺。及智是知之理之說。謂不然。而曰若以仁義禮智之性。爲所以知覺之理。則知覺非心也乃性也云云一條。最不可曉。仁義禮智之性。非所以知覺之理而何。可試思之也。素以滅裂之學。加以昏忘。何足以上下於此等議論乎。但講磨之義。不容無言。幸勿揮斥。終以見喩也。 남지(南至) 24절기의 하나인 동지(冬至)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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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유고》 서문 竹林遺稿序 글이 세상에 전해진 경우 중, 한 가지는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 가지는 경륜(經綸)을 펼쳐서 이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고, 달빛이나 이슬 등 아름답게 꾸며대는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비록 많다 한들 또한 무엇 하겠는가. 이 때문에 최고의 글은 천하에서 시행되어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경전이고, 그 다음의 글은 한 나라에서 시행되는 것이고, 또 그다음의 글은 한 집안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한 집안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한 나라에서 시행하고, 한 나라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천하에서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협소하다고 여겨 시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오직 시행한 곳이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무릇 자식은 어버이에 대해 어버이의 손때가 책에 남아 있으면 차마 손상시키지 못하고, 침이 땅에 떨어져 있더라도 오히려 반드시 거두는 법인데, 하물며 유언(遺言)과 유고(遺稿)는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평생토록 행한 일이 실려 있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지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 혹 천하나 한 나라에서 시행될 수 없는 글이라면 한 집안에 보관하여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 가지셨던 뜻과 행하셨던 일을 알게 해야 한다. 또 이것이 일찍이 조상을 추모하고 사모하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죽림(竹林) 황공(黃公)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공무로 분주하였다. 이 때문에 전해진 저술이 많지 않았는데, 맏아들 작(稓)이 상자에 남아 있는 글을 찾아 살펴보고 약간 편의 글을 모을 수 있게 되자 이를 간행하여 집안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겸손한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널리 배포하지 못해서였다.삼가 살펴보건대 편질(編秩)이 협소한데다 언사가 간결하고 질박하여 구구하게 꾸며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혹 세속의 안목에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요컨대 의리의 문장과 경륜의 방책이 되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건대 단지 한 집안의 글이 될 뿐만이 아닌 듯하니, 지금 비록 세상에서 시행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뜻이 있는 자가 취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文之傳於世也。一則發明義理。可以羽翼乎斯文。一則敷陳經綸。可以裨補乎斯世。非是二者。而出於月露組繪之口。則雖多亦奚爲也。是以上焉者。行於天下。而爲萬古不刊之典。次焉者。行於一邦。又次焉者。行於一家。以一家之文而行於一邦。以一邦之文而行於天下。則人必少之以爲不足行。此非文之過也。惟行之非其所也。夫子之於親。手澤在書。不忍傷焉。口液落地。猶必收之。況其遺言遺稿。爲精神心術之所寓。平生行事之所載者。可不思所以謹守哉。其言或不得爲天下及一邦之文。則當藏之一家。傳之子孫。使知乃祖乃父當日之志行。又未嘗不是追遠思成之一助也。竹林黃公早年釋褐。奔走靡監。是以所傳著述爲不多也。胤子稓搜閱巾衍。裒稡得若干篇。付剞劂氏。將欲行之於家。蓋其謙謙畏忌。有不敢廣布於人也。竊覸其編秩狹少。言辭簡訥。不見有區區組繪之態。此所以或不無寡諧於時眼。而其旨意去處。要不失爲義理之文經綸之策也。吾恐不止爲一家之文而已。今雖不欲行之於世。而安知有志於斯世者。不之取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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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계하다 自警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은 모두 구구하니 世間可欲總區區한평생 하찮게 여겨질까 스스로 경계하네 自警平生視若無여색 연모해 호전의 절개 바뀐 것 부끄럽고66) 戀色堪羞胡節改금을 본들 어찌 관녕의 마음을 변하게 하랴67) 見金怎使管心渝벌거벗은 너 또한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68) 裸裎爾亦焉能浼함정 속 사람은 다 스스로 몰아넣은 것이네 罟穽人皆竟自驅이러한 관문을 뚫고 지나간 훗날에야 透得此關然後日천 사람을 뛰어넘는 호걸이라 일컬으리 方稱豪傑出千夫 世間可欲總區區, 自警平生視若無.戀色堪羞胡節改, 見金怎使管心渝?裸裎1)爾亦焉能浼? 罟穽人皆竟自驅.透得此關然後日, 方稱豪傑出千夫. 여색……부끄럽고 여색에 빠져 절조를 바꾸는 일이 없도록 경계한다는 말이다. 송나라 호전(胡銓, 1102~1180)이 해외에 귀양 갔다가 돌아와 상담 호씨원(湘潭胡氏園)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를 모시고 있던 기생 여천(黎蒨)을 위해 시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시를 지어 호전이 나라를 위해 죽을 만한 절개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의 욕심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조롱하였다. 금을……하랴 황금 보기를 하찮은 돌멩이 보듯이 하겠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관녕(管寧)이 친구 화흠(華歆)과 함께 채전(菜田)을 일구던 중 한 조각의 황금이 나왔다. 그러자 관녕은 기와 조각이나 다름없이 여겨 호미질을 계속했고, 화흠은 일어나서 황금을 집어 멀리 던졌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유하혜(柳下惠)의 풍모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비록 어깨를 드러내고 옷 벗은 채 내 옆에 누워있다 한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尔爲尔 我爲我 虽袒裼裸裎于我側 尔焉能浼我哉〕"라고 했다. 裎 底本에는 "程". 《孟子》 〈公孫丑上〉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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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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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말복날에 정토사에서 놀다 2수 末庚日, 遊淨土寺【二首】 절에서 청아하게 놀며 말복 달임을 하니 淸遊蕭寺煮終庚백발노인은 옛날의 정회를 잊기 어렵네 白首難忘舊日情우사가 한발31)을 몰아낸 것이 기쁘니 堪喜雨師驅旱魃주국에서 수성을 깨뜨리는 걸 보겠네 卽看酒國破愁城천년토록 황하가 흐려 몹시 괴로우니 千年正苦黃河濁긴 밤에 누가 붉은 촛불 가지고 밝히랴 長夜誰持炳燭紅날이 저물어갈 때 시 읊으며 돌아오니 風詠歸來天欲暮옆 사람은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마소 傍人莫道不平聲가뭄 끝에 가랑비가 삼복더위 씻어내니 旱餘小雨洗炎庚풍경 대하여 옷깃 젖힘에 시원함 느끼네 對景披衿覺爽淸어진 주인 오늘의 북해32)를 반갑게 만났으나 賢主喜逢今北海졸렬한 시를 옛 장성에서 짓기가 어렵네 拙詩難作古長城온 산의 푸른 나무는 가을철에 시들지만 千山碧樹當秋病별원의 그윽한 꽃은 여름을 지나 피었네 別院幽葩過夏明세상 밖의 한 구역이 깨끗한 땅이라 物外一區乾淨土풍진에도 여기에 오면 아무 소리가 없네 風塵到此寂無聲 淸遊蕭寺煮終庚, 白首難忘舊日情.堪喜雨師驅旱魃, 卽看酒國破愁城.千年正苦黃河濁, 長夜誰持炳燭紅?風詠歸來天欲暮, 傍人莫道不平聲.旱餘小雨洗炎庚, 對景披衿覺爽淸.賢主喜逢今北海, 拙詩難作古長城.千山碧樹當秋病, 別院幽葩過夏明.物外一區乾淨土, 風塵到此寂無聲. 한발(旱魃) 가뭄을 일으키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한발이 사나워 속이 타는 듯하며 불을 놓은 듯하도다.〔旱魃爲虐, 如惔如焚.〕" 하였다. 북해(北海) 후한(後漢) 때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 153~208)을 말한다. 그는 선비를 좋아하고 후진들을 교도(敎導)하기 좋아해서 빈객이 항상 그의 집에 가득했다. 그래서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동이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근심이 없겠다.〔坐上客恒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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