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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서【병섭】에게 답함 答李鳳瑞【秉燮】 뜻하지 않게 안부 편지를 받아 펼쳐서 완미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벽산(碧山)에서 예를 익히고 송정(松亭)에서 시문(詩文)을 주고받고 침정(枕亭)에서 시가를 읊조리는 일이 덧없는 인생의 고상한 취미라는 것은 과연 형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도리를 추구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24)은 설령 성급하게 논의하지 못하더라도 흥국(興國)25)과 아호(鵝湖)26)의 유람은 기풍과 자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면서 한가로이 날을 보낼 뿐이라면 불행스럽게도 진(晉)나라 때의 청담(淸談)이 여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들의 행위가 후자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전자에 전일(專一)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당연히 반성하여 뒷날의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오늘부터 결단코 한 번 출입하고 한 번 안부를 묻더라도 실질에 충분히 힘을 쏟아 약간의 효과를 거두어 헛된 명성에 귀착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눈앞에 닥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2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학자들이 마음을 세우는 근본적인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외물로 향하고 명예를 추구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이 됩니다. 料外承訊。披玩感感。碧山禮遊。松亭唱酬。枕亭風詠。此是浮生勝致者。果如兄敎。然求其十分道理。則末矣。沂雩之樂。縱未遽議。而興國鵝湖之遊。風蹟可考。若以一觴一詠。優遊度日而已。則晉室淸曠.不幸近之矣。向日吾輩之爲。雖不可謂出於彼。而亦未見其專於此。則亦當反省。為。後日鑑戒處也。大抵吾輩斷自今日。雖一出入。一寒喧。十分務實。俾有多少效益。而不爲虛聲所歸。豈非目下計耶。傳曰衣錦尙褧。此是學者立心地本也。纔有向外近名底意。便是僞也。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 기우(沂雩)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로 산수간에 노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흥국(興國)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 북쪽에 있는 절의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이다.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와 함께 흥국사에서 종일 강론하고서 "옛날에도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서 이런 강론을 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아호(鵝湖) 아호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으로,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주희와 육구령(陸九齡),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이 산의 아호사(鵝湖寺)에 모여 논쟁을 펼친 바 있다. 비단……덧입는다 《중용장구》 제 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겉에 홑옷을 걸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서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시경》은 위풍(衛風) 석인(碩人)과 정풍(鄭風) 봉(丰)을 말하며 모두 '의금경의(衣錦褧衣)'로 되어 있는데, 뜻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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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林氏贈淑夫人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依法典從夫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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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十五年六月十九日 憲宗 金養黙 道光十五年六月十九日 憲宗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35년(헌종1) 6월에 국왕이 김양묵을 통훈대부 행자여도찰방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35년(헌종1) 6월 19일에 왕이 김양묵(金養黙)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자여도찰방(行自如道察訪)으로 임명(任命)하면서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으로 문관의 품계이다. 찰방(察訪)은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관직으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을 적었다. 행수법(行守法)은 품계가 높고 관직이 낮으면 '행'을 썼고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관직이 높으면 '수(守)'를 적었다. 이를 계고직비(階高職卑), 그 반대는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였다. 자여도(自如道)는 창원을 중심으로 동쪽의 김해, 서쪽의 함안, 남쪽의 웅천, 북쪽의 칠원에 걸쳐있던 조선 시대의 교통로였다. 중심역인 자여역(自如驛)에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소재하였으나 뒤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다. 김양묵의 자여도찰방 임명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35년(헌종1) 6월 19일조에 "吏批 再政 以崔拱辰爲德陵直長 李是鍊爲開城經歷 金養默爲自如察訪 判敦寧單金逌根 知敦寧單鄭尙愚 行左承旨單嚴燾"라고 실려 있는 기록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을 보면 '이〃(吏〃) 김정호(金貞浩) '라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이조(吏曹)의 서리(胥吏)를 지칭하는데,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도 불렸다. 즉 김양묵의 고신을 작성해 준 사람이 김정호였다. 1829년(순조 2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김양묵은 김응상(金膺相)의 아들로,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아들 김양묵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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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숙부인(淑夫人) 임씨(林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淑夫人 林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林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에 왕이 김응상의 처 숙부인 임씨에게 내린 고신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처(妻) 숙부인(淑夫人) 임씨(林氏)에게 내린 고신(告身)이다. 김응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되면서 김응상의 처숙부인 임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다. 이 문서의 맨 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 依法典從夫職"라고 적힌 내용이 그 사실을 의미한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로 그 아내는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從夫職)"는 규정에 따라, 임씨는 정부인으로 봉작되었다. 한편 김응상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번에 정부인으로 봉작된 숙부인 임씨와 또 다른 부인 숙부인 양씨(梁氏)도 이때 정부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김응상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양씨는 남편 김응상과는 19살 차이가 나며, 김응상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해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처(後妻)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했던 김양묵(金養默)은 양씨와는 10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김양묵은 전처(前妻) 임씨의 소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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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 察訪梅谷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광(銧),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매곡(梅谷),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甫相) 흔(昕)이 그 시조이다. 휘 지몽(知夢)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는데,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난계(蘭溪)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상덕재(尙德齋)로, 교리를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결(潔)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조부는 휘 경남(慶男)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부친은 휘 정민(廷敏)인데,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경우(閔敬雨)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3일에 장흥(長興) 와리(瓦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량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나가서는 어른을 섬겼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고 몸가짐은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명경(明經)으로 과거 공부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 낙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시상(時象)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은거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달아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접고자 하니, 친척이 권유하여 말하기를 "비록 기쁘게 해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업무를 본 지 한 해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에서 능주(綾州)의 가옥치(佳玉峙)로 이사하였다. 이는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지낼 계책이었으니, 옛 벗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교유하였다.기유년(1669, 현종10)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능주의 서쪽 오리동(五利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후장(金厚璋)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순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동망(東望), 차자는 동로(東老), 삼남은 동효(東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문룡(鄭門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아름다운 광채를 간직하였고,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찰방 한 직임을 받고 그쳤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것이 어찌 공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은 마땅히 누리는 때가 있을 것이니, 최씨 후손은 힘쓸지어다.8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에 달렸고 遇不遇天얻고 얻지 못함은 명에 달렸네. 得不得命이 때문에 군자는 是以君子천명을 즐거워하고 명을 편안하게 여기네. 樂天而安命 公姓崔。諱銧。字重伯。號梅谷。貫朗州。新羅元輔昕。其始祖也。至諱知夢。事麗太祖。封東萊侯。諡敏休。至諱安雨。入我朝。軍器寺小監。六傳而諱湫號蘭溪。官參判。再傳而諱致湖號尙德齋。校理。於公爲高祖。曾祖諱潔。典牲署參奉。祖諱慶男。禦侮將軍。考諱廷敏。訓鍊奉事。妣驪興閔氏敬雨女。以萬曆己丑正月十三日。生公于長興之瓦里。氣宇秀爽。性度溫良。入事父母。出事長上。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性勤讀書。手不釋卷。嘗念家貧親老無以爲養。遂業明經爲供歡計。累擧鄕解。輒屈禮部。當光海時。見時象不佳。遂隱不赴試。繼而連遭內外艱。服闋。年己耆艾。因欲廢擧。親戚强之曰。雖無獻悅之地。獨不爲門戶計耶。己丑擢第。例授奉常寺直長。癸巳除栗峯道察訪。視職歲餘。以老謝歸。自長興移寓于綾州之住玉峙。盖爲就靜養閒計也。與知舊士友。文酒相從。己酉六月十日卒。得年八十一。葬于綾之西五利洞前麓酉坐原。配金海金氏厚璋女。婦德純至。擧三男一女。長東望次東老次東曉。女適河東鄭文龍。孫以下不錄。嗚呼。公積若累艱。蓄章儲輝。至於行年七十。而始得攻駒一職而止。位不稱德。豈有如公者乎。然不食之報。當有享受之日。崔氏其勉乎哉。八世孫昌柱南杓奉家狀。來謁誌銘之文。銘曰。遇不遇天。得不得命。是以君子。樂天而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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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 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진오(鎭俉), 자는 성순(聖巡), 호는 성재(惺齋)이니,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보는 장흥(長興)에서 나왔는데, 신라와 고려 사이에 대대로 작위와 공훈으로 이름이 났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휘 가한(可漢)에 이르렀는데, 호가 봉강(鳳岡)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명림(命霖),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의 휘는 산택(山宅)이니,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은 휘 세은(世殷), 호가 담암(澹庵)인데, 효우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은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영(李榮)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2월 5일에 공이 이지촌(鯉池村)에서 태어났다.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부지런히 일하고 봉양하여 몸에 편안 것은 다 바쳤고, 평소 모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숙사(塾舍)에 있을 때면 날마다 반드시 세 번 문안을 드렸다. 모친에게 병환이 있으면 몹시 근심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모친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반드시 성실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다. 중년에 개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논어》, 《맹자》,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의 책들을 가지고 주야(晝夜)로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48)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니,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 붙여 놓고서 늘 보았다. 규문을 정돈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화평하면서도 은혜로웠으며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의 자손 가운데 고아가 되어 혼인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주어 혼인할 시기를 놓치거나 배우는 때를 놓치는 탄식이 없게 하였다. 흉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무진년(1868, 고종5) 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지(鯉池) 왼쪽 산기슭 원봉(圓峯)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동일(李東一)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제문(濟文), 제옥(濟玉), 제식(濟植)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남호(李南鎬), 광산(光山) 이치호(李致鎬), 이천(利川) 서학규(徐學奎), 남평(南平) 문영욱(文永郁)에게 출가하였다. 장방(長房)은 2남이니, 황(榥)과 모(模)이다. 이방(二房)은 3남이니, 용주(容柱), 헌주(憲柱), 만주(萬柱)이다. 삼방(三房)은 1남이니 기주(麒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광무(光茂)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늘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惺惺維何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 것일세. 戒愼恐懼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大本旣立온갖 선이 갖추어지네. 萬善斯具멀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婆娑遐隅세상과 서로 잊었네. 與世相忘넉 자의 무덤이 있으니 圓峯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維藏 公姓高。諱鎭俉。字聖巡。號惺齋。壽階通政。系出長興。羅麗間。世著爵勳。至諱臣傳。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司憲府持平。至諱可漢號鳳岡。卽公之高祖也。曾祖諱命霖號敬齋。文行著世。祖諱山宅。有隱德。考諱世殷號澹庵。孝友見稱。妣光山李氏榮女。正宗戊午二月五日。公生于鯉池村。早失所怙。以未得逮養爲終身恨。事母夫人。服勤就養。便身畢給。平居未嘗離側。若在塾舍。則日必三省。有疾極其憂。不就寢席。不御酒肉。舍置餘事。惟以迎合爲急。遭故。哀毁罔極。絶而復蘇。送終凡具。必誠無憾。早業功令。文詞夙就。中年慨然有志乎爲已之學。將論孟心經近思錄及性理諸書。晝夜硏究。嘗曰。恐懼不睹。戒愼不聞。此是端本第一法。不可斯須而忽忘。書諸座側以常目焉。修整閨門。敎誨子孫。和而有恩。嚴而有法。親戚知舊。有孤而未婚貧而未學者。爲之助力。俾無失時失業之歎。遇饑歲。待以擧火者爲不少。戊辰正月十一日卒于正寢。葬鯉池左麓圓峯下子坐原。配全州李氏東一女。有三男四女。濟文濟玉濟植。女適光山李南鎬光山李致鎬利川徐學奎南平文永郁。長房二男榥模。二房三男容柱憲柱萬柱。三房一男麒柱。以下不錄。曾孫光茂以家狀。謁誌銘之文。銘曰。惺惺維何。戒愼恐懼。大本旣立。萬善斯具。婆娑遐隅。與世相忘。圓峯四尺。君子維藏。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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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 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추(湫), 자는 양호(養浩), 호는 난계(蘭溪),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휘 지몽(知夢)이 있는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1천(千) 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이분이 족보에 기록된 선조가 된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고,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두 이름난 선조이다. 고조는 휘 사경(思敬)인데,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지냈다. 증조는 휘 홍의(弘毅)인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조부는 휘 득초(得超)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자혁(自赫)인데,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이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현감 김시(金時)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 12월 3일에 공이 서울 남부(南部)에서 태어났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에 따랐으며, 별도로 풀이하지 않아도 글 뜻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암송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물이 솟아나는 듯이 산이 우뚝 솟은 듯이 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전의 성현이 저술하고 이론을 내세운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후인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것은 또한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문(科文)이나 문장을 꾸미는 습속을 버리고 경서를 배우고 여러 책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몸으로 익혀 실천함과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음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언(格言)과 중요한 가르침이 있으면 반드시 자리 곁에 기록해 두었다.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는 명(銘)이나 잠(箴)을 새겨 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성종(成宗)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476)에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다. 기해년(1479)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경자년(1480)에 외직으로 나가 고창 군수(高敞郡守)가 되었다.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윤리를 밝히고 풍교를 순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규약을 엄히 하고 권선징악의 뜻을 보이며 상벌을 미덥게 하니, 시행한 지 몇 년 안 되어 간사하고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폐단의 근원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은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 경내에 학문하고 효제(孝悌)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물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어느 날 백성 중에 자기 자식이 불효하다고 말하며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공이 마침내 불효하는 사람을 잡아다 효자의 집안에 잡아 보낸 뒤 한 달 남짓 만에 풀어주니,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결같이 그 효자처럼 부모를 섬겼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능성(綾城縣監)으로 관직을 옮겨 다스렸고, 무신년(1488)에 장성(長城)으로 관직을 옮겼으며, 기유년(1489)에 광양(光陽)에 부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공의 공적을 찬양해 기록한 풍비(豐碑)는 만인이 칭송하였다. 임자년(1492)에 군을 잘 다스린 치적을 높이 평가받아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에 효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기미년(1499)에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였다.정묘년(1507, 중종2) 7월 26일에 사제에서 졸하였다. 와리(瓦里) 뒤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근지(近池)는 사성(司成)이다. 딸은 황보손(皇甫孫), 김석중(金碩中), 조승안(曺承安), 설등산(薜登山), 고상겸(高尙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셋이니, 치함(致涵)은 참봉이고, 치담(致淡)은 부위(副尉)이고, 치호(致湖)는 승지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후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대구(對句) 맞추어서 문장 아름답게 꾸며 抽黃對白성취하는 바가 무슨 일이랴. 所就何事돌이켜 요약하고 근원을 궁구하며 反約窮源착실하고 자신에 절실하게 공부해야 하네. 近裏著己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니 厚積薄發하늘에서 떨어짐이 있네. 有隕自天출사하여 조정에 나아가 釋褐登廷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자임하였네. 致澤經綸무성에서 소 잡는 칼을 어디에 쓰리오 武城牛刀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33) 絃誦有聲진원은 처벌하지 않았으니 陳元不罪난봉이 상서로움을 드러내네.34) 鸞鳳著祥고을을 두루 다스려 공적 드러났으니 歷典著績포상이 융숭하였네. 褒賞隆重나이 많아 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갔으니 引年歸山그 풍모와 운치 숭상할 만하네. 風韻可仰 公姓崔。諱湫。字養浩。號蘭溪。貫朗州。有諱知夢。仕麗朝。封東萊侯。食邑千戶。是爲登譜之祖。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皆其名祖也。高祖諱思敬。知龍州事。曾祖諱弘毅。司憲府監察。祖諱得超。掌樂院正。考諱自赫。司醞寺直長。妣靈光金氏縣監時女。正統丙辰十二月三日。公生于京之南部。幼有異質。英邁過人。就傳上學。不煩提督而遵循課程。不常訓釋而曉解文義。及長博涉諸家。成誦無遺。綴文點句。水湧山出。旣而自語曰。前聖所以著書立言者。其意欲何爲。後人所以讀書學問者。亦其意欲何爲。遂廢功令組繪之習。將經學念書。沈潛硏究。體察涵養。夜以繼日。造次不懈。有格言要誨。必書之座側。至於盤孟几杖。有銘有箴。常常寓目以自警焉。成宗壬辰擢文科。授奉常寺直長。尋遷司僕寺正。丙申赴江原都事。己亥入爲吏曹佐郎。庚子出宰高敞。爲政一以明倫理厚風敎爲主。嚴規約示勸懲信賞罰。行之有年。奸猾斂迹。弊瘼滌源。吏服其威。民懷其德。境內有學問孝悌者。必訪問之。厚加賞賜。一日民有來言其子不孝。請爲之懲治。公乃押送不孝之人於一孝子之家。月餘放之。其人歸家。事父母一如孝子人。甲辰移宰綾城。戊申遷長城。己酉赴光陽。所至皆有治績。豐碑萬口。壬子以治郡高第。入爲禮曹參議。丁巳陞戶曹參判。已未告老還鄕。丁卯七月二十六日卒于居第。葬瓦里後麓負甲原。贈戶曹判書。配杞溪俞氏贈貞敬夫人。生一男五女。男近池司成。女適皇甫孫金碩中曺承安薜登山高尙謙。孫三男致涵參奉。致淡副尉。致湖承旨。曾孫以下不錄。後孫昌柱南杓抱家狀。奉謁誌銘。銘曰。抽黃對白。所就何事。反約窮源。近裏著已。厚積薄發。有隕自天。釋褐登廷。致澤經綸。武城牛刀。絃誦有聲。陳元不罪。臠鳳著祥。歷典著積。褒賞隆中。引年歸山。風韻可仰。 무성(武城)에서……들리네 지방을 다스릴 때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 고을에 갔는데,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하였다. 《논어 양화(陽貨)》 진원(陳元)은……드러내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주부(主簿) 구람(仇覽)에게 "주부가 진원(陳元)의 과실을 듣고서도 처벌하는 대신에 교화하였는데, 새매의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힐책하자, 구람이 "나는 새매가 난새나 봉황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循吏列傳 仇覽》 여기서는 최추가 덕으로 교화한 것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경재 고공 묘지명 敬齋高公墓誌銘 공의 휘는 명림(命霖), 자는 내여(乃汝), 호는 경재(敬齋)이다. 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인데,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저명한 석학이 있었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지평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경리(景离)이고, 호가 둔암(遯庵)이다. 증조는 휘 원건(元健)이고, 조부는 휘 태제(泰濟)로 참봉을 지냈다. 부친은 휘 가한((可漢)이고, 호가 봉강(鳳岡)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만웅(文萬雄)의 따님이다. 숙묘(肅廟) 경인년(1710, 숙종36) 2월 3일에 이지촌(鯉池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체격이 단아하고 재능이 특출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서 부모의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고 대답함에 잘 받들어서 어김이 없었다. 7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어린아이가 행할 모든 예법을 일일이 준행하였다. 10세에 《논어》와 《맹자》를 배워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되었다. 관례를 함에 미쳐서는 포부가 크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다. 의리(義理)를 변론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선배와 숙유(宿儒 학식이 많은 선비)가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늘리는 데에는 구사(九思)보다 절실 중요한 것이 없고,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데에는 구용(九容)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35) 인(仁)의 체단(體段)을 구하는 데에는 〈서명(西銘)〉36)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학문하는 규모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보다 잘 구비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서 걸어두고 스스로 경계하였다.한 마을에 같이 사는 시공(緦功)의 친척37)이 30여 가구였는데,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여 은의(恩誼)가 있고 화목하였다. 수십 년이 되었지만 흠잡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가문의 규약을 지어 매월 초하루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고해주었다. 그 규약에 "첫째, 부모를 잘 섬기고, 형장을 잘 섬긴다.[善事父, 母 善事兄長.] 둘째, 학문을 권장하고 농사에 힘쓴다.[勤文學, 力農桑.] 셋째, 부세를 잘 납부하고 요역을 회피하지 않는다.[先賦稅, 趁徭役.] 넷째, 주색을 가까이하지 말고, 놀음을 배우지 말라.[勿近酒色, 勿學賭博.] 다섯째, 혼사와 상사에는 서로 돕고, 흉년에는 서로 구휼한다.[婚喪相扶, 饑饉相恤.] 여섯째, 쟁송을 경계하고 미신을 멀리 하라.[戒爭訟, 遠巫覡.]"라고 하였다. 집안의 후생(後生)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특출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한 글방에 모아놓고 스승을 잘 선택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매달 직접 시험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는지 게으름을 피우는지를 살폈다. 늘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인생 사업은 다만 사(士)와 농(農) 두 가지만 있을 따름이다.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는 자는 실로 마땅히 공부에 전념해야 하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동소남(董邵南)38)처럼 주경야독(晝耕夜讀)해야 한다. 이것이 선비의 본분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무술년(1778, 정조2) 7월 9일에 졸하니, 천년동(千年洞) 당산등(堂山嶝)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선정기(宣廷夔)의 따님인데, 아들 둘을 낳았다. 계배(系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진휘(李震輝)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산각(山珏), 산중(山重), 산택(山宅), 산언(山彦)이다. 7세손 광무(光茂)가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이미 그 몸 깨끗하게 하여 旣淑其身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39) 以閑有家미루어 확대하여 실행하였으니 推以行之가문의 법도가 또한 드러났네. 門規亦嘉곤륜산의 옥은 광채 숨기고40) 昆玉潛光못 속의 구슬은 광휘 감추었네.41) 淵珠藏輝자손들이 가법을 받들었으니 子孫承式명성과 업적 작지 않네. 聲猷不微 公諱命霖。字乃汝。號敬齋。高氏貫長興。自羅至麗。世有名碩。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持平。皆冥顯祖也。高祖諱景离。號遯庵。曾祖諱元健。祖諱泰濟參奉。考諱可漢。號鳳岡。妣南平文氏萬雄女。以肅廟庚寅二月三日生公于鯉池村。體容端雅。才氣挺邁。自幼有至性。侍父母側。應對唯諾。承順無違。七歲受小學書。凡百幼儀。一一遵循。十歲受論孟。文理日就。及官抱負贍富。造詣精深。至於辨論義理處。先進宿儒。皆自以爲不及。嘗曰。進學益智。莫切於九思。收斂身心。莫切於九容。求仁體段。莫先於西銘。爲學規模。莫備於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五者。書揭座側以自警焉。緦功之親同住一巷者。爲三十餘家。問訊周恤。恩誼雍睦。積數十年。未有間言。著門規。每於月朔。聚而告之。其規有曰。一善事父母。善事兄長。二勤文學力農桑。三先賦稅趁徭役。四物近酒色。勿學賭慱。五婚喪相扶。饑饉相恤。六戒爭訟遠巫覡。門內後生。有儀形端正。才性穎悟。必聚之一塾。擇師敎之。每朔躬親試之。以考其勤慢。常戒子孫曰。人生事業。只有士農兩件而已。事力可及者。固當專業於文字。如其不然。則如蕫邵南晝耕夜讀可也。此是士子本分。勉之勉之。以戊戌七月九日卒。葬于千年洞堂山嶝乙坐原。配寶城宣氏廷夔女。生二男。系配全州李氏震輝女。生四男。山珏山重山宅山彦。七世孫光茂謁余文以誌陰石。銘曰。旣淑其身。以閑有家。推以行之。門規亦嘉。昆玉潛光。淵珠藏輝。子孫承式。聲猷不微。 학문을……없고 구사와 구용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라는 뜻으로, 《예기》 〈옥조(玉藻)〉와 《논어》 〈季氏〉에 나온다. 서명(西銘) 송나라 장재(張載)가 지은 글로, 천지가 나의 부모이고 만물이 나의 동포라는 이치를 담고 있다. 《張載全書》 시공(緦功)의 친척 시공은 상복(喪服) 제도에서 가장 가벼운 3개월 동안 입는 시마복(緦麻服)과 5개월 동안 입는 소공복(小功服)의 친척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豐)에 은거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유(韓愈)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嗟哉董生行》 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 《주역》〈가인괘(家人卦) 초구(初九)〉에 "집에서 예법으로 막으면 뉘우침이 없어지리라.[閑有家, 悔亡.]" 하였으니,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법도로 막으면 은혜를 손상하지 않고 의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집안에서 처하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곤륜산의……숨기고 《서경》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을 태워 버리면 그 속에 있던 옥과 돌도 함께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 玉石俱焚.]" 하였다. 못……감추었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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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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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운곡 최공 묘지명 雲谷崔公墓誌銘 내가 일찍이 민치환(閔致煥) 어른과 교유한 적이 있어 운곡(雲谷) 최공(崔公)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그 말 가운데 "공은 한천(寒泉) 산중에 은거하여 발걸음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에 뛰어나고 의를 행하는 데 돈독하였다. 규문을 정돈함에 화평하면서도 예가 있었으며,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은 바로 민씨(閔氏) 어른과 혼인한 집안의 벗이고, 민씨 어른은 바로 나의 장인이니, 그 말은 실로 믿을 만하여 낱낱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증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과연 민씨 어른의 말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장에서 말한 것이 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맑고 고아하여 신선과 도인의 풍모(風貌)처럼 속기(俗氣)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그와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루함이 사라질 정도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여, 마음에 온축하여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물과 같이 깊고 깊어서 다함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 바탕을 삼고, 《대학(大學)》으로 규모를 세우고, 《논어(論)》와 《맹자(孟子)》로 맥락을 바로잡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으로 진취하였으니, 과정과 절도에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 행하고서 남에게 미쳤기에 애초에 다른 것이 없었다.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 계시는 부모님을 섬기고, 몸이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선조를 추모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의관은 반드시 단정하게 하고, 얼굴빛은 반드시 위엄 있게 하였다. 집안사람을 다스릴 적에는 히히거리며 가볍게 웃는 실수가 없게 하였고,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습속이 없게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검소함은 자신을 단속하는 부절(符節)이고,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평하고 온순함은 남을 대하는 요체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이를 자리 곁에 써서 놓아두고 늘 귀감으로 삼았다. 분수를 지키고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겼으며 광채를 마음속에 온축하고 있어 편안하고 여유롭게 지냈다. 애오라지 생을 마칠 때 일찍이 시를 지어 "봄 새싹 돋자 남쪽 이랑에 김을 매고, 가을 국화 피자 동쪽 울타리에서 따네. 세상을 경영하는 것 나의 일이 아니니, 은거하는 것 평소 기약한 것이라네.[春苗鋤南畝, 秋菊採東籬. 經濟非吾事, 隱淪是素期.]"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볼 수 있다.경술년(1910, 순종4) 11월 7일에 졸하였고, 기유년(1849, 헌종15)에 태어났으니, 향년 62세이다. 산음(山陰) 뒤쪽 산기슭 부간(負艮)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의 휘는 진후(鎭厚), 자는 윤옥(允沃), 낭주(朗州) 사람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輔相) 휘 흔(昕)이 시조이다. 아들 지몽(知夢)은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는 호가 죽계(竹溪)이고,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의 아들 휘 자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현감을 지냈다.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냈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선(銑)은 호가 매곡(梅谷)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동로(東老)이고, 증조는 휘 태항(泰恒)이다. 조부는 휘가 인수(仁受)이고,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부친은 휘 성각(聖覺)이고, 호가 눌암(訥庵)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조하량(曺夏良)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의한(義漢), 차자는 의택(義澤)이다. 딸은 각각 공주(公州) 이일무(李日茂)와 여흥(驪興) 민장호(閔章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내가 태어나 아무것도 모를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삼성(參星)과 진성(軫星)은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공의 풍모와 기품을 추념하여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스러움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에 오늘 묘지명을 써달라는 간청에 대해서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명과 시운이 어긋나 命與時違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네. 世莫我知산림에 은거하여 枕山樓谷광채를 숨겼네. 潛光蘊輝성동엔 수죽이 푸르고 城東水竹산음엔 눈과 달빛 비치네. 山陰雪月먼 후대에 남은 자취를 百歲遺躅뒤미쳐 상상할 수 있네. 追想髣髴 余嘗從閔丈致煥。得聞雲谷崔公之賢久矣。其言。曰公隱於寒泉山中。足不出門。名不出世。而優於文學。篤於行義。修整閨門。和而有禮。敎授生徒。嚴而有法。盖公卽閔丈之婚友。而閔丈卽余之婦翁也。其言固爲可信。而歷歷不忘於心。後五十餘年。公曾孫昌柱南杓以家狀。來謁誌行之文。謹按其狀。果知閔丈之言爲有據。而家狀之云又非誣也。公容儀端潔。襟懷淸高。如仙風道骨。無一點塵氛。人爲其容接者。不覺鄙吝自消。博涉經史。該貫古今。有以蘊畜於中而施應於外者。如有源之水。深深而不渴也。以小學爲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正路脈。以詩書展步趨。課程節度。秩然有章。由己及人。未始有異。怡愉洞屬以事其生。擗踊毁瘠以送其終。悽愴怵愓以追其遠。平居冠服必整。容色必莊。御家衆無嘻嘻之失。敎子弟去靡靡之習。常曰。勤謹淸儉。持身之符。溫恭和順。接人之要因。書之座右以常鏡考焉。守分安遇。潛光蘊輝。優哉游哉。聊以卒歲嘗有詩曰。春苗鋤南畝。秋菊採東籬。經濟非吾事。隱淪是素期。此可以見其志也。庚戌十一月七日卒。距寅降已酉得年爲六十二。葬山陰後麓負艮原。公諱鎭厚。字允沃。朗州人。以新羅元輔諱昕爲始祖。子知夢。事麗祖封東萊侯。諡敏休諱安雨號竹溪。軍器寺小監。子雲號德庵縣監。五傳諱湫號蘭溪。文科參判。再傳諱致湖。號尙德齋。文科承旨。四傳諱銑號梅谷。文科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東老。曾祖諱泰恒。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樞。考諱聖覺號訥庵。妣長澤高氏命復女。公娶昌寧曺氏夏良女。生二男二女。男義漢次義澤。女適公州李曰茂驪興閔章鎬。孫以下不錄。嗚呼。余生未省事。而公已謝世矣。參軫不相對。燕鴻不相値。追惟風韻。只切靡逮之恨。玆於今日之請不敢牢辭云。銘曰。命與時違。世莫我知。枕山樓谷。潛光蘊輝。城東水竹。山陰雪月。百歲遺躅。追想髣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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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용감 첨정 약포 조공 묘지명 濟用監僉正樂圃曺公墓誌銘 우리 고을의 선덕(先德)으로서 치사(致仕)하고 물러나 절개를 지켜 우러러 볼 만한 분이 십 수인데, 낙포(樂圃) 조공(曺公)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국병(國柄), 자는 신경(愼卿)이다. 명종(明宗) 때 벼슬하여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지냈다. 이윽고 물러나 능성(綾城)의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은거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시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 와서 밭을 개간하고, 북쪽으로 바라봄에 은하수 높네. 비봉산 아래 맑은 바람 부니, 밤에 《이소경》을 읽네.[南來田疇闢, 北望河漢高. 淸風鳳岡下, 夜讀楚離騷.]"라고 하였다. 세대가 멀어 문고(文稿)가 전해지지 않고, 전하는 것이라고는 단지 초라하게 이 절구 한 수뿐이다. 그러나 상상하고 시를 음미해보면 그 충후하고 측달한 뜻과 울분에 차고 감개한 뜻은 먼 후대에서 마음이 통하고,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생각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저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만을 읊어 시문이 쌓여 있은들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다면 세상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이를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대대로 서울에 살아 선조의 무덤이 인천(仁川)에 많았다. 임시로 살고 있는 곳에서 외롭고 쓸쓸하면 매양 뿌리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집 뒷동산에다 작은 누대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올라서 고향을 바라보았으니, 세상에서는 망향대(望鄕臺)라고 전해진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명리(名利)를 멀리하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경전을 연구하고 이치를 찾으며 생도를 가르치는 것을 노년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향인(鄕人)의 자제 가운데 성취한 자가 많았다.조씨(曺氏)의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신라(新羅) 태사(太師)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을 시조이다. 휘 서(庶)에 이르렀는데, 호가 청윤(淸潤)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낸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는 휘 홍단(弘袒)인데, 오위장(五衛將)이고, 조부는 휘 숙문(淑文)이니, 계공랑(啓功郎)이다. 부친은 휘 정윤(貞允)인데, 지사(知事)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구원성(具遠成)의 따님이다. 공의 생몰 연대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배위(配位) 숙인(淑人)은 진양 신씨(晉陽辛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묘소는 고을 서쪽 내동(內洞) 왼쪽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니, 쌍분이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진사 대수(大秀), 진사 대현(大玄), 그리고 대서(大緖)이다. 장방(長房)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정희(廷禧)를 낳고, 봉사는 중일(仲逸)을 낳고, 중일은 부호군(副護軍) 순효(舜孝)를 낳고, 부호군은 한징(漢徵)을 낳고, 한징은 통정대부 봉의(鳳儀)와 진사 봉인(鳳人)을 낳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병홍(秉泓)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루가 지나지 않아 돌과 같이 不日介石홀연히 잘못을 뉘우쳤네.49) 幡然回轍고반이 언덕에 있고50) 考槃在阿도서가 집에 가득하였네. 圖書滿室편안고 여유롭게 노니니 優哉遊哉풍모와 운치 더욱 영원하리. 風韻彌長우뚝한 넉 자의 봉분 有崇四尺비봉산 남쪽에 있네. 飛鳳之陽 吾鄕先德。有致仕退休風節可仰者。爲十數人。樂圃曺公亦其人也。公諱國柄。字愼卿。仕明宗朝。濟用監僉正。旣而退營菟裘於綾城之飛鳳山下。因有詩曰。南來田疇闢。北望河漢高。淸風鳳岡下。夜讀楚離騷世代曠遠。文稿不傳。而所傳只此寂廖一絶詩而已。然而想象諷詠。其忠厚惻怛之意。憂憤感慨之志。可謂千載合席。曠世同轍彼風雲月露連編累牘果何用哉。然則世之欲知公者。觀於此足矣。世居京洛。墳墓多在仁川地。僑寓踽凉。每不勝懷本戀舊之意。就家後山頂。築小臺。朝夕登臨以瞻望焉。世傳爲望鄕臺。杜門屛跡。恬澹無爲。而以劬經硏理。訓迪生徒。爲從老計。鄕人子弟。多有成就者。曺氏貫昌寧。以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爲始祖。至諱庶號淸澗。入我朝。寶文閣直提學。卽公之六世祖也。曾祖諱弘袒。五衛將。祖諱淑文。啟功郎。考諱貞允。知事。妣淑人綾城具氏遠成女。公生卒年紀。逸而無傳。配淑人晉陽辛氏有婦德。墓州西內洞左麓酉坐雙兆。三男大秀進士。大玄進士。大緖長房生諱廷禧。訓鍊院奉事。奉事生諱仲逸。仲逸生諱舜孝。副護軍。護軍生諱漢徵。漢徵生諱鳳儀。通政。鳳人進士。以下不盡錄。十二代孫秉泓。奉其家狀。以徵幽竁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不日介石。幡然回撤。考槪在阿。圖書滿室。優哉遊哉。風韻彌長。有崇四尺。飛鳳之陽。 하루가……뉘우쳤네 《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견고함이 돌과 같아서, 과거의 잘못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제거해 버리나니, 정하고 길하니라.[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다. 고반(考槃)이 언덕에 있고 고반은 원래 《시경》〈위풍(衛風)〉의 편명으로, 은거하여 유유자적하게 도를 즐기고 덕을 이룸을 뜻하는데, 은자의 거처를 두루 이르는 말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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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와 정공 묘지명 黙窩鄭公墓誌銘 정군 재한(鄭君在翰)과 이군 승우(李君承愚)는 모두 우리 고을의 선사(善士)이다. 두 사람은 대대로 한마을에 살면서 노년까지 서로 지켜 주며 의연히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어느 날 정군이 그 선대인(先大人) 묵와공(黙窩公)의 유사(遺事)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가장은 바로 이군이 지은 것이다. 이군은 선대부터 교분이 있던 집안의 자제로 배종(陪從)하며 출입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이 아니니, 묵와(黙窩)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군만 한 이가 없다. 게다가 이군은 현명하여 필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가장의 말은 실로 믿을 만할 텐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 있겠는가. 그렇지만 교분으로 말하면 모두 벗이니, 이군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내가 어찌 유독 사양하겠는가.살피건대, 공의 휘는 백환(百煥), 자는 익서(益瑞), 호는 묵화(黙窩)이다.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이었다. 조선에는 휘 여해(汝諧)가 있는데, 경학과 문장,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하였다. 고조는 휘가 인채(仁采), 호가 덕곡(德谷)인데,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증조는 휘가 석(錫), 호가 반산(盤山)이다. 조부는 휘가 양무(陽武)이고, 부친은 휘가 의상(義相)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기묘년(1819, 순조19) 7월 7일은 바로 공이 태어난 날이다.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비는 성격이 까탈스러워 어울리기 어려웠지만 공은 정성을 다해 잘 받들었으니, 비록 소 밑을 청소하는 일51)과 회초리를 맞는 고통도 마음에 담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인(大人)이 매양 계비가 자애롭지 않은 것을 우려하였는데, 공이 울면서 간하기를 "자식이 만약 효도한다면 어머니가 어찌 자애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한 것은 자식의 잘못입니다."라고 하니, 대인이 가련하게 여겨서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계비가 감동하여 마침 기뻐함에 이르자 친척과 이웃들이 모두 감탄하여 왕상(王祥)의 효성에 견주었다.계비가 세상을 떠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계비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주환(周煥)이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는데, 함께 잠자며 한 이불을 덮을 정도였고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공의 외삼촌이 매우 가난하여 공에게 와서 의탁하였는데, 낳아 주신 부모처럼 섬겨 무엇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갖가지로 도와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재산을 털어 장사 지내주고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형제라곤 오직 외삼촌만 계셨는데,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평상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예가 아닌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였으며,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탄복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1월 4일에 졸하였다. 광대동(光大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오씨(寶城吳氏) 오용상(吳龍祥)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재한(在翰)이고, 손자는 영현(榮鉉), 장현(章鉉)이고, 딸은 평택(平澤) 임노열(林路烈)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머니는 매우 수고하셨으니 母氏劬勞나를 낳고 길러 주셨네. 生我育我어린 자식 두고 어머니 떠나셨으니 子幼母違외로운 몸 누구를 의지할까. 煢煢何恃민자건은 갈대꽃 넣은 옷 입었고52) 閔被蘆絮왕상은 모진 고초 겪었네.53) 祥遭楚虐곡진하게 받들어 따랐고 委曲承順말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네. 不見辭色끝내 기뻐함에 이르렀으니 終焉底豫근심스럽게 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았네. 不戚不咨큰 강령 이미 확립되니 大綱旣立온갖 사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네. 萬目可推 鄭君在翰李君承愚。皆吾鄕善士。二人世居一巷。到老相守。毅然爲道義之交。一日鄭君以其先大人黙窩公遺事狀。來謁誌銘之文。狀卽李君所撰也。李君以世交子弟。陪從出入。不啻久矣。則詳黙窩之行宜。莫如李君。且以李君之賢。必不爲阿私。則其言固可證信。何待乎余言。以契分則均是友也。李君之所不辭。余豈獨辭之哉。按公諱百煥。字益瑞。號黙窩。河東之鄭。自羅至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汝諧。經學文行。著稱於世。世云遯齋先生。高祖諱仁采。號德谷。官知中樞。曾祖諱錫。號盤山。祖諱陽武。考諱義相。非淸道金氏相俊女。繼妣金海金氏某女。純廟己卯七月七日。卽公之寅降也。幼喪所恃。繼妣性峻難諧。公克意承順。雖牛下之役。夏楚之苦。不作於意。不見於色。其大人每恐其不慈。公泣而諫曰。子若孝焉。則母豈不慈。母之不慈。子之罪也。大人憐而止之。久之。繼妣感之而竟底豫焉。親戚鄰里。莫不嗟賞。以王祥之孝擬之。繼妣歿。哀毁過禮。繼妣有一男曰周煥。公撫愛甚篤。同寢同被。至老不替。公舅氏至貧。來依於公。事之如所生。凡百周恤。無所不至。其歿也。傾家財以營葬。因語人曰。吾早而失母。母之同氣。惟舅氏在。今皆失之。語了涕下沾衿。平居非其力不食。非其人不友。目不接非禮之色。耳不聽非禮之言。勅身正家。平心率物。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己卯正月四日卒。葬光大洞酉坐原。配寶城吳氏龍祥女。有婦德。男在翰。孫榮鉉章鉉。女適平澤林路烈。銘曰。母氏劬勞。生我育我。子幼母違。煢煢何恃。閔被蘆絮。祥遭楚虐。委曲承順。不見辭色終焉底豫。不戚不咨。大綱旣立。萬目可推。 소 밑을 청소하는 일 진(晉)나라의 이름난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를 차용한 일화인 듯하다. 《진서(晉書)》〈왕상열전(王祥列傳)〉에, 왕상(王祥)의 계모 주씨(朱氏)가 아버지에게 왕상을 모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왕상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 매양 소 밑을 청소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민자건(閔子騫)은……입었고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19 〈효자전(孝子傳)〉에, "민자건이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겨울에 솜을 넣은 옷 대신 갈대꽃을 넣은 옷을 입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뒤에 그 사실을 알고서 계모를 내보내려고 하자 민자건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한 아들만 얇은 겨울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추위에 떨게 됩니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왕상은……겪었네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五倫行實圖 孝子》여기서는 정백환(鄭百煥)이 계모에게 고생한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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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강씨 묘지명 淑夫人姜氏墓誌銘 기군 동익(奇君東翼)은 내 고향의 옛 벗인데, 중년 이후로는 나의 집과 매우 가까운 데 살았다. 이 때문에 그 대부인(大夫人)의 훌륭한 규문의 법도를 들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한두 가지뿐만이 아니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동익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전에 들은 것이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 가장에 기록된 내용은 또한 과언이 아니다.부인이 시집왔을 초기에 남편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부인이 친히 부지런히 일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집안 형편이 펴져 변변찮은 음식이라도 봉양할 수 있었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하고 즐거운 기색(氣色)으로 물 흐르듯이 응대하였다. 시부모가 늙고 병이 많아 항상 병석에 있었는데, 음식이 입에 맞는지 약 처방이 잘 되었는지 반드시 살펴보고 맛을 본 뒤에 올렸다. 전후로 당한 상에 매우 슬퍼하였고, 장사 지낼 때 쓰는 여러 기물도 일일이 스스로 마련하였으니,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장자에게 수고로움을 양보하지 않았다. 남편을 섬길 적에는 매우 온순하였으니,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물어본 뒤에 행하여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규방(閨房)에서는 온화하고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였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천한 노복에 이르기까지 혼사에는 부조하고 상사에는 부의하였다. 평상시 옷은 사치스럽게 입지 않았고 음식은 소박하게 차렸다. 집안에서는 무당을 쓰지 않고 문안으로 광대를 들이지 않고 오직 부지런함으로 스스로 단속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 길렀다. 만년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고 집안이 평온하였으며, 장수와 복을 누렸다.부인의 관향은 진주(晉州)이니, 신라(新羅) 병부 상서(兵部尙書) 휘 민첨(民瞻)이 시조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훈벌의 가문으로 이름났다. 중엽에 이르러 휘 덕룡(德龍)이란 분이 계셨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으니, 바로 부인의 7대조이다. 증조는 휘 우하(遇河)이고, 조부는 휘 택주(宅周)이다. 부친은 휘 진오(鎭五)이니, 통정대부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종언(全宗彦)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5월 26일에 태어났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기공 하운(奇公夏雲)에게 출가하였고, 남편의 관직에 따라 숙부인에 봉해졌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동익(東翼)이고, 딸은 문재항(文載頊)에게 출가하였다. 동익은 4녀를 낳았는데, 고석주(高錫柱), 윤상의(尹相義), 민영제(閔泳悌), 윤봉혁(尹鳳赫)에게 출가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3일에 졸하였다. 도장면(道莊面) 옥동촌(玉洞村) 뒤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나라의 흥망 邦之隆替집안의 성쇠. 家之盛衰실로 내조에 달렸으니 實係內助예부터 그러하였네. 自昔然而처음엔 가난하다가 만년에 넉넉해졌고 早嗇晩豊먼저는 곤궁하고 나중엔 창대하였네. 先困後昌향리에 드러나 빛났으니 著耀鄕里남은 복록 다함이 없네. 餘祿無疆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問何因爾부인의 현숙함 때문일세. 夫人賢淑백세토록 향기로운 재물을 올리니 百世芬苾옥동의 산기슭일세. 玉洞之麓 奇君東翼。余鄕井舊要也。中年以來。敞寓尤密邇焉。是以得聞其大夫人閫範之美。爲人所稱道者。非止一二。夫人沒後九年。東翼抱其家狀。請幽竁之誌。前所聞。果非虛傳。而今所狀者。亦非過語也。夫人于歸之初。天家貧甚。無以爲計。夫人親服勤勞。夙夜不懈。自是而生理有賴。菽水不罄。事舅姑。氣和色愉。應對如流。舅姑老而多病。恒在床褥。其飮饍之宜。藥餌之方。必審視而嘗進之。遭前後喪。哀戚殊甚。喪具凡百。一一自備。不以次房而遜於長房。事君子。極其婉順家事巨細。咨而行之。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內。雍容靜暇。若無人聲。自內外族戚以至婢僕之賤。婚嫁有助。死喪有賻。平居衣不華奢。食不甘美。家不用巫覡。門不納玩戱。惟以勤勞自持。儉約自養。至於晩歲。身安家溫。備享壽祿。夫人貫晉州。以新羅兵部尙書諱民瞻爲始祖。自是世著勳閥。至中葉有諱德龍。壬辰倡義。除咸昌縣監。卽夫人七世祖也。曾祖諱遇河。祖諱宅周。考諱鎭五。官通政。妣淑人天安全氏宗彦女。純廟癸未五月二十六日生。適延日縣監奇公諱夏雲。從夫職封淑夫人。擧一男一女。男卽東翼。女適文載頊。東翼生四女。曰高錫柱尹相義閔泳悌尹鳳赫。以丙申二月二十三日卒。葬道莊面玉洞村後乙坐原。銘曰。邦之隆替。家之盛衰。實係內助。自昔然而。早嗇晩豊。先困後昌。著耀鄕里。餘祿無疆。問何因爾。夫人賢淑。百世芬苾。玉洞之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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酬長田李上舍樂裕【最善】韻 逢君秋雨裏。句在無言梅。老驥空愁櫪。摶鵬冷笑盃。今宵邀月賞。那處掃雲開。別後東平樂。江南聽雁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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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생 청계 최군 묘지명 故學生淸溪崔君墓誌銘 군의 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창렬(昶烈), 자는 성규(性圭), 본관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초에 휘 지몽(知夢)이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식읍(食邑) 1천 호(戶)를 받았으니,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선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안우(安雨)는 조선에서 벼슬하여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장성(長城), 능성(綾城), 고창(高敞), 광양(光陽)의 수령을 지냈다. 휘 치호(致湖)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휘 광(銧)은 호가 매곡(梅谷)인데,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가 인수(仁受),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중추(僉中樞)에 올랐다. 증조는 휘가 성각(聖覺)이고, 조부는 휘가 진후(鎭厚), 호가 운곡(雲谷)으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부친은 휘 의한(義漢)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시중(梁時仲)의 따님이다. 을묘년(1855, 철종6) 6월 23일 산음리(山陰里)에서 군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였으니, 어려서 독서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고 외워서 전할 수 있었다. 스승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하였다. 성동(成童)에 이르러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여러 번 송독하여 매우 익숙하였기에 글을 지음에 문채(文彩)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나의 이전 공부는 다만 쓸데없이 마음과 힘을 허비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였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만약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않으면 말로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장구(章句)나 찾고 대구(對句)나 맞추면서 글을 지어 겉만 꾸미는 것이 어찌 학문이겠는가. 이는 다만 사람의 허황되고 부화한 습속을 자라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이로부터 지엽적인 것을 제거하고 근본을 배양하였으니, 〈사물잠(四勿箴)〉, 삼성(三省),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서 자리 곁에 붙여 놓고 늘 보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같은 여러 현인(賢人)의 격언과 요결(要訣) 수십 조(條)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읊조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강절(康節 소옹(邵雍)) 선생이 수년 동안 백원산(百源山)에서 독서하며 밤에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학문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오(吳), 초(楚), 제(齊), 노(魯), 양(梁), 진(晉)나라 사이에서 유람하면서 천하의 선비와 두루 교유하고 천하의 풍속을 두루 관찰하였으니, 이 일이 매우 좋다. 늘 마음에서 잊지 않고 배운 것이 진보하기를 기다려 또한 장차 이 노인처럼 사방을 유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무자년(1888, 공종25) 6월 11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죄와 한(恨)이 한가지씩 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이고, 강절 선생처럼 유람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외신산(外薪山) 중턱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치장(閔致章)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주(昌柱)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순학(鄭淳鶴)에게 출가하였다.아, 군은 영특한 자질로 일찍 스스로 깨달았으니, 근본을 두터이 하고 실질에 나아가 향상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천명을 누리지도 못하고 품은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이처럼 급하게 중도에서 요절할 줄 누가 알았으랴. 창주는 철들기 전에 부친을 여의어 그 모습과 음성, 치적과 행적을 아득히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 선인(先人)의 벗 난계옹(蘭溪翁)을 모시고 그 유사(遺事)를 기록한 다음 그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비록 선인의 음성과 용모를 대하지 못했지만 직접 본 것 같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원하건대 한마디 은혜로운 말을 보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난 어버이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한 집안에 자손이 끊어지지 않을 소식이다. 그 당시 펴지 못한 뜻이 이로 인하여 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秀而不實일은 실로 편안하기 어렵네. 不食有報뜰의 난초는 날마다 자라네. 庭蘭向榮 君姓崔。諱昶烈。字性圭。系出朗州。麗初有諱知夢。事麗祖封東萊侯。食邑千戶。其登譜之祖也。至中系有諱安雨。仕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諱湫。號蘭溪。文科。歷宰長城綾城高敞光陽。諱致湖。文科承旨。諱銧。號梅谷。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中樞。曾祖諱聖覺。祖諱鎭厚。號雲谷。有文行。考諱義漢。妣濟州梁氏時仲女。以乙卯六月二十三日。生君于山陰里。姿稟穎悟。幼而在讀書。側聞其聲而能誦傳之。及就傳。文理日就。至成童。小大學論孟詩書。誦數甚熟。綴文緝句。詞義斐然。一日忽語于心曰。我前日之功。只是枉費心力。枉費光陰。先哲有言曰。若不存養。只是說話。今尋章摘句。抽黃對白。以爲粧撰皮毛者。此何學也。適足以長人虛夸浮靡之習而已。自此刊落枝葉。培養本源。書四勿三省九容九思及夙興夜寐箴。貼之座側。以爲常目警省之地。又書濂洛群賢格言要誨數十條。晨夕諷誦。嘗曰。康節先生。讀書百源山中。夜不就枕。數年。學旣有成。乃出遊於吳楚齊魯梁晉之間。遍交天下之士。遍觀天下之俗。此事甚好。尋常不忘於心。俟所學有進。亦將出遊四方如此老也。戊子六月十一日。以疾終于家。臨歿言曰。吾有一罪一恨。先父母而歸。一罪也。未遂康節之志。一恨也。葬外薪山中山下酉坐原。配驪興閔氏致章女。擧一男一女。男昌柱。女適河東鄭淳鶴。嗚呼。君以穎悟之姿。早自覺悟。敦本就實。方進不已。誰知命道不媚。齎志未伸。而中途夭折。若是遽遞耶。昌柱未及省事而失所怙。儀容聲音。行治事爲。漠然不記。以是爲平生恨。從其先友蘭溪翁。得記其遺事。以其狀過余而言曰。雖未及見先人之音容。而可以寓如見之情者。惟在於此。願爲之加惠一言也。余曰。賢以妙齡。思欲不忘其己沒之親。至於如此。此是人家子孫碩果消息。當日未伸之志。安知不因此而有伸也。哀其意而不忍辭。銘曰。秀而不實。事固難平。不食有報。庭蘭向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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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정 처사 문공 묘지명 退亭處士文公墓誌銘 선비가 삼대(三代)에 태어나지 않아 이미 고요(皐陶)와 기(夔), 원개(元凱)54)의 부류와 더불어 태평성대에 제제(濟濟)하게 서로 사양하는 지경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면, 아래 시대로 내려와 말세에 태어나 당대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과 함께 교유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을 것이다. 고(故) 처사 퇴정(退亭) 문공(文公)은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을 스승으로 섬기고, 선원(仙源) 김 문충공(金文忠公),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노봉(老峯) 민 문충공(閔文忠公),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을 벗하여 우리나라의 태평 시절에 교제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서로 연마하였으니, 그 성대한 만남과 고고한 기상은 먼 후대에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아, 공의 현명함이여!공의 휘는 존도(存道), 자는 성기(聖器)로, 남평(南平) 사람이다. 고려 말기 삼우당(三憂堂) 휘 익점(益漸)이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우창(佑昌)은 통정대부이고, 증조 민(敏)은 생원이며, 조부 언관(彦寬)은 선전관(宣傳官)이고, 선고 운룡(雲龍)은 부호군인데, 대대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배위(配位)는 익산 소씨(益山蘇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순전히 갖추었다. 만력(萬曆) 임인년(1606, 손조35) 9월 19일에 보성(寶城) 도개리(道開里)에서 공이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으니 동배(同輩)에서 특출하였다. 8세에 호군공(護軍公)이 운자(韻字)를 부르니, 공이 부르는 즉시 대답하기를 "창밖에 눈과 달빛 희니, 깨끗함에서 인심을 보겠네. 눈과 달빛 나의 곡조를 일으키니, 오늘 밤 누가 나를 알아주랴.[窓外雪月白, 潔潔見人心. 二白唱我曲, 今宵誰知音?]"라고 하였으니, 그 기상이 어릴 적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모부인(母夫人)이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고 매우 근심하며 방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고 북두성에 빌고 하늘에 빌었는데 한 달여 만에 병이 나았다. 그날 저녁 호군공의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처가 나은 것은 그대 아들의 효성 때문이다. 내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 수명을 90세까지 연장하였다."라고 하였다. 독서에 매우 힘써서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되니, 과거 시험의 각 문체에 영민하고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마침내 은봉(隱峯) 안 선생(安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이 그 영특함을 아껴 매우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사장(詞章)의 기습을 떨쳐 버리고 요체를 파악하고 근원을 찾는 곳에서 힘쓰고 착실하게 연마하기를 비로소 그만두지 않았다.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이 강도(江都)에 행행(幸行)하니 조정과 민간(재야(在野)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당시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완산(完山)에서 군사를 독려하였는데, 공은 평소 그와 서로 잘 알고 지냈기에 즉시 달려가서 난을 평정할 계책을 아뢰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상하였다.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머물고 세자는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안팎으로 연락이 끊겨 군신 상하가 매우 놀랐다. 공이 의병 30여 명을 규합하여 은봉(隱峯)의 막하에 나아갔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는데, 지나는 곳의 여러 고을에서 즉각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군사를 점검하면서 지은 시에 "당대의 남아 칼을 차고 노래 부르니, 사방 적의 형세 어떠한가? 군사 점검하는 이 밤 영웅호걸들 승전고 울릴 내일 아침 의기가 충만하리라.[一代男兒杖釰歌, 四邊賊勢問如何? 點軍此夕英豪士, 乘勝明朝意氣多.]"라고 하였다. 각 도에 격문을 띄워 함께 군사를 일으키는 의리를 깨우치고, 또 순찰(巡察) 이시방(李時昉)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전쟁에서의 기무(機務)를 진달하였다. 다음 날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도(江都)는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은 포위가 풀렸다는 보고를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을 파하였다. 공이 그 삼종형(三從兄) 재도(載道)가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며 여러 날 추위에 떨며 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서 만나 보았다. 이어서 난리 끝에 서울이 피폐하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보고 비분강개함을 견디지 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고관대작의 저택 도리(桃李)는 절로 열매 맺었지만, 강도엔 다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네.[朱門桃李自成實, 盡落江都渺渺流.]" 하였다. 2월에 집으로 돌아오자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이처럼 치욕을 당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차마 말할 바이겠는가. 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하여 이러한 상황을 만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이보다 앞서 도개리(道開里)에서 원봉리(元峯里)로 이사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는 형세라 경치가 감상할 만하였다. 인지당(仁智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에 이르러 퇴정(退亭)이라고 편액을 고쳐 그 뜻을 붙였다. 날마다 편복(便服)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부앙하며 풍월을 읊조리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 득실과 부침에 대해서 담담하였다. 서울 친구 가운데 공을 추천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굳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나의 선친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하나의 명성도 없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청음(淸陰) 선생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55)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56)은 수감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이 노인은 수감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지만 그 큰 기상과 큰 절개는 생사를 가지고 다르게 보아선 안 된다. 아, 이 노인은 바로 오늘날의 문산이거니와, 나는 그의 벗으로 당일(당시) 강직한 신하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노봉(老峯) 민공(閔公)이 일찍이 본성(本省)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은거하는 곳의 단장이 소산하고 담박한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남주(南州)의 고상한 선비이다."라고 하고, 그 집의 편액을 원봉(元峯)이라고 하였다. 또 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 "바쁘게 행장을 꾸려 저물녘에 찾으니 청산의 구름 걸린 높은 나무 고인의 마음이로다.……[草草行裝簿暮尋, 靑山雲樹故人心. 云云.]" 하였다. 여러 책과 경전을 돌아가며 익숙히 반복하여 읽어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환하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논어(論語)》 한 책에 대해서는 더욱 많이 공부하여 일상 생활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기유년(1669, 현종10)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락동(加樂洞) 가정(柯亭)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안진(安震)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진(時振)이다. 손자는 일화(日華)이고, 증손은 홍덕(弘德), 취덕(就德), 명덕(命德), 윤덕(潤德), 응덕(應德)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은 외진 고을의 일개 선비로 이름은 사적(仕籍)에 있지 않고, 몸은 조정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매양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아감에 한결같아 그칠 줄 몰랐다.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당겨도 일어나지 않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교유를 끊고 한가롭고 한적하게 지냈으니, 처하는 데 한결같아 나아감을 알지 못하였다. 어찌 전후의 출처가 이처럼 훌륭한 것인가. 대개 그가 주장한 바는 의리에 한결같은 것일 따름이다. 일개 부인이지만 칠실(漆室)의 근심이 있었고 일개 동자이지만 왕기(汪錡)에게는 상(殤)의 예를 적용하지 않았는데,57) 더구나 공은 홍유(鴻儒) 숙덕(宿德)으로 한 지방의 기대를 받는 자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담암(澹庵)이 소조정(小朝廷)의 수치가 된다는 것58)을 생각하고 첩산(疊山)이 한가로운 백성이 된 것59)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공이 만년의 절조를 가다듬은 바로서, 한겨울의 송백(松柏)과 같은 것이다. 아, 공경할 만하다.7세손 형(炯)이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청하였다. 유장을 살피니 바로 우리 무사재(無邪齋) 박 선생(朴先生)이 지은 것이었다. 어루만지며 훑어보니 더 한층 감격스러웠다. 그 말에 "비록 처한 상황이 다르고 수립한 바가 각각 다르더라도 그 뜻은 선원(仙源), 청음(淸陰)과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행적에 걸맞고 합당하여 먼 후대에도 바뀌지 않을 의론이니, 소자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다른 말을 첨언하겠는가. 삼가 유장의 말에 근거하여 그 청에 부응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孝親忠君현명한 이를 섬기고 어진 이 벗하네. 事賢友仁사문의 훌륭한 선비요 斯文偉儒밝은 시대의 은일자로다. 昭代逸民시사가 크게 변하자 時事一變돌아와 동강에 은거하였네. 歸臥東岡고상한 풍모와 정취, 큰 절개 高韻大節백세 뒤에 더욱 빛나리라. 百世彌彰 士不生三代上。旣不得與皐夔元凱之類。濟濟相讓於亭午照皞之域。則降而生於叔季之世。得一時賢德與之遊從。斯亦可矣。故處士退亭文公。以隱峯安文康公爲師。以仙源金文忠公。淸陰金文正公。老峯閔文忠公。月沙李文忠公。梧里李文忠公爲友。往復切磋於大東昇平之日。其會遇之盛。氣象之高。百世之下。足令人起敬。嗚呼。公其賢乎哉。公諱存道。字聖器。南平人。麗季三憂堂諱益漸其中系顯祖也。高祖佑昌通政。曾祖敏生員。祖彦寬宣傳。考雲龍副護軍。世有文行。配益山蘇氏某女。閫範純備。萬曆任寅九月十九日。公生于寶城道開里。天資秀爽。出於等夷。八歲護軍公拈韻呼之。公應口而對曰。窓外雪月白。潔潔見人心。二白唱我曲。今宵誰知音。其氣趣自幼己如此。母夫人有疾。致誠致憂。不離房側。每夕齋沐。祈斗祝天。月餘病愈。其夕護軍公夢有一老人來言曰。君妻之愈。以其子之孝也。吾感其孝。延其壽九十云。讀書刻苦。文詞日就。功令各體。無不敏贍。弱冠遂就學于隱峯安先生之門。先生愛其開悟。深寄意焉。自是刊落詞章之習。而於反約窮源處。勉勉循循。未始有已。丁卯之亂。車駕幸江都。朝野洶洶。時李相國元翼。在完山視師。公素與相善。卽馳詣爲陳剿亂之策。未幾。見賊退而還。壬申遭外艱。居廬三年。哀毁過節。丙子之亂。車駕駐南漢。世子入江都。內外阻絶。上下震駭。公糾合議旅三年餘人。赴隱峯幕。丁丑正月行到完山。所過列邑。響應影從。中夜點軍有詩曰。一代男兒杖釰歌。四邊賊勢問如何。點軍此夕英豪士。乘勝明朝意氣多。傳檄各道。喩以同仇之義。又馳書於李巡察時昉。以陳機務。明日至礪山。聞江都失守南漢解圍之報。北向痛哭而罷。公聞其三從兄載道。扈從南漢。累日觸寒。因以忿憤成疾。卽馳往見之。因見亂離之餘。京都凋殘。舊知零散。不勝悲慨有詩曰。朱門桃李自成實。盡落江都渺渺流。二月還家。族戚皆會。公歎曰。國家羞辱如此。此豈臣子所忍言。只恨吾死不早。見此爻象耳。先是自道開移寓元峯里。負山臨水。景致可賞。題其顔曰仁智堂。至是改題以退亭。以寓其意。日以便服。偃仰其間嘯詠咏風月。沈潛書籍。於得失陞沈淡如也。洛中舊遊。有擬公剡薦者。公固拒之曰。吾志己定。決不可回。但吾先人。文學著世。而未有一名。是可恨也。一日聞淸陰先生自瀋陽還。歎曰。文文山被囚而殺死。此老被囚而還。其宏綱大節。不可以生死而差殊觀也。嗚呼。此老卽今日之文山。而余以一友生。未得爲當日之張一鶚。可恨。老峯閔公嘗按廉本省。因來訪之。見薖軸粧黙點。蕭散淡泊。歎曰。子眞南州高士。題其室曰元峯。且留詩曰。草草行裝簿暮尋。靑山雲樹故人心云云。群書群經。循環熟複。微辭奧義。無不昭晣。而於論語一書。尤加功焉出入起居。手不釋卷。己酉十月十七日考終。葬加樂洞柯亭坐壬之原。配竹山安氏震女。生一男曰時振。孫日華。曾孫弘德就德命德潤德應德。玄孫以下不錄。公以窮鄕一布衣。名不在仕籍。身不參朝班。而每有警急。忘身殉國。一於出而不知止。及其謝歸鄕里也。挽之而不起。呼之而不應。絶遊息交。投閒置散。一於處而不知進。何前後出處若是遼絶耶。盖其所主者。一於義而已。一婦人也而。漆室有憂。一童子也而汪齮勿殤。則況以公鴻儒宿德而負一方之望者乎。懷澹庵小朝之恥。慕疊山閒民之爲。此公之所以砥礪晩節。如大冬之松柏也。吁可敬也。七世孫炯奉遺狀。來謁誌銘之文。按狀卽我無邪齋朴先生所撰也。摩挲繙閱。尤增一層感慨也。其言曰。雖所遇不齊。樹立各異。而其意則仙源淸陰同一歸也。此可爲稱停的當。百世不易之論。小子後生。何敢復容他說哉謹據狀說以塞其請。銘曰。孝親忠君。事寶友仁。斯文偉儒。昭代逸民。時事一變。歸臥東岡。高韻大節。百世彌彰。 원개(元凱)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합친 말로, '원(元)'은 선(善)을 '개(凱)'는 화(和)를 뜻한다.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온화한 사람[八凱]과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八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舜)이 요(堯) 임금의 신하가 된 뒤에 등용되어 백사를 주관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청음……돌아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인조 18년(1640) 12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6년이 지난 23년(1645) 2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仁祖實錄 18年 12月 8日, 23年 2月 23日》 문문산(文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이자 시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저서로는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왕기(汪錡)……않았는데 노 나라 동자 왕기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어려서 죽은 사람에게는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 지내지 않는 예법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왕기는 동자이지만 무기를 잡고 국가를 수호하였으니 성인의 예를 써도 된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1年》 담암(澹庵)이……것 호전(胡銓)은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澹庵)이다. 금(金)나라가 쳐들어왔을 적에 "만약 화의(和議)를 하면 소 조정(小朝廷)이 될 것이니, 소 조정에서 구차히 살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화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宋史 胡銓列傳》 첩산(疊山)이……것 첩산은 남송(南宋)의 학자 사방득(謝枋得)의 호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는데, 원(元)나라 사람이 강제로 북행(北行)하게 하자 곡기를 끊고 죽었다. 《宋史 謝枋得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문산재 박군 묘지명 通訓大夫司憲府監察文山齋朴君墓誌銘 군의 성은 박씨(朴氏), 휘는 세진(世鎭), 자는 달지(達之), 호는 문산재(文山齋)이다. 밀양(密陽) 사람인데,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가 그 시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울(蔚)이 있는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분이 맹성(孟誠)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는데,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는데,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지수(枝樹)를 낳았는데, 호가 모봉(茅峰)이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사직(社稷)을 위해 순절(殉節)한 공훈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천주(天柱)를 낳았는데, 호는 회재(悔齋)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노씨(魯氏)인데, 열부(烈婦)의 행실이 있었서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분이 휘 이소(以素)를 낳았는데, 호가 태암(台庵)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태형(泰馨)을 낳았는데, 호가 월산(月山)이다. 이분이 휘 상욱(尙郁)을 낳았는데, 호가 송계(松溪)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필사(必思)를 낳았는데, 호가 도은(道隱)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군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경표(慶杓)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풍환(豊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재원(在源)인데, 호가 쌍순재(雙筍齋)이고,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진주 형씨(晉州邢氏)인데, 형석찬(邢錫贊)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찬영(李贊英)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11월 19일에 주(州)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군을 낳았다.군은 천성이 온후하고 자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군이 곁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출입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 드리고, 구체(口體)의 봉양을 알맞게 하여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병환이 나자 근심스러운 마음과 염려하는 기색으로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으로 흘려 넣었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평상시 자신이 사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었고, 재물도 사적으로 축적하지 않았다. 평소 출입할 때에는 오직 어버이가 명하신 대로 따랐으며, 크고 작은 일을 경영할 때는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행하였다. 자신의 직분을 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독서하여 과정에 따라 차근차근 해 나갔고, 이를 폐하거나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서 절기마다 안부를 묻고 경조사를 챙기고 위급할 때 도와주는 것은 각각 그 실정에 알맞게 하고 각각 그 마음에 흡족하게 하였다. 비루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화나는 기색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경박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언행을 삼가고 경계하기를 50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성을 칭찬하여 장차 관아에 아뢰고자 하였는데, 군이 듣고서 즉시 그 문서를 빼앗아 불 속에 던지고 말하기를 "나에게 불효를 거듭 짓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숙병(宿病)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어느 날 그 아들 문채(文采)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늙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누가 대신 봉양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힘써 구천에 있는 네 아비의 무한한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임종하였으니, 바로 무신년(1908, 순종2) 6월 20일이다. 동방(同坊) 작약산(芍藥山) 아래 반기동(半圻洞)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재헌(鄭在憲)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지극히 갖추었다. 부군보다 18년 먼저 졸하였다. 살던 마을 뒤쪽 소강산(小康山) 아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준룡(準龍)으로 일찍 죽었고, 차자는 문채(文采)이다. 손자 이하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아, 옛날에도 오히려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한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충신한 자'60)와 맹자(孟子)가 말한 '한 고을의 선한 선비'61)는 또한 만나 보기 어려울 것이다. 군은 순후한 자질을 타고났고 효도하고 삼가는 행실이 있었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은 응보가 있어야 하지만 침체되어 드날리지 못하고 수명도 누리지 못하였으니, 친구의 애석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문채(文采)가 상복을 입고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부탁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작약산에 새로 묘도를 내어 芍藥新阡봉긋하게 봉분 만들었네. 若斧若堂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 坐乙向辛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 것 天佑神勞효자라야 그러하네. 惟孝爲然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으니 孝子不匱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年 君姓朴氏諱世鎭。字達之。號文山齋。密陽人。新羅王赫居世是其始祖也。至中系。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參。是生諱億瑞通政。是生諱枝樹號茅峰監察。壬辰之亂。殉社著勳。贈左承旨。又贈戶曹參判。是生諱天柱號悔齋主簿。有孝行。妣盧氏有烈行。俱蒙褒旌。是生諱以素號台庵通政。是生諱泰馨號月山。是生諱尙郁號松溪通政。是生諱必思號道隱。贈司僕寺正。於君爲高祖也。贈祖諱慶杓。贈左承旨。祖諱豊煥。贈戶曹參判。父在源號雙筍齋。壽同中樞。妣贈貞夫人。晉州邢氏錫贊女。系妣贈貞夫人。完山李氏贊英女。有婦德。哲宗己未十一月十九日。生君于州之淨泉里。君天稟溫厚慈詳。自幼以至行聞於人。家素貧甚。君左右拮据出入竭蹶。有以樂其心志適其口體者。無不備至。親有疾。心憂色沮。夜不解帶。斫指汪血。祝天冀代。平居身不私有。財不私蓄。尋常出入。惟命是聽。巨細營爲。必稟而行。行有餘力。入塾看書。循循課程。未嘗廢闕。推而至於宗族鄕黨時節寒暄之問。吉凶慶弔之禮。急難周恤之風。各稱其情。各得其心。俚雜之言。不出於口。忿戾之氣。不形於色。足不到奔競之地。身不接浮浪之人。隱居養親。勤身勅行。五十年如一日。鄕里擧其孝。將聞于官司。君聞之。卽奪其狀投之于火曰。母重吾不孝爲也。有宿疾。久而不瘳。一日招其子文采曰。余必不起矣。老親在堂。誰其替養。汝宜勉力。以慰乃父九泉無窮之恨也。言訖而終。卽戊申六月二十日也。葬同坊芍藥山下半圻洞乙坐原。齊淑人河東鄭氏在憲女。閨範備至。先君子十八年卒。葬所居村後小康山下庚坐原。有二男。長準龍早逝。次文采。孫以下幼不錄。嗚呼。才難之歎。在古猶然。況今衰叔之世乎。孔子所謂十室之忠。孟子所謂一鄕之善。亦難得以見之矣。君稟醇厚之質。服孝謹之行。宜其有積累之應。而沈淹不揚。壽又不遐。知舊慨惜之心爲何如耶。文辨采曳衰抱狀。託以誌銘之文。嗚呼。豈忍辭諸。銘曰。芍藥新阡。若斧若堂。坐乙向辛。孝子攸藏。天佑神勞。惟孝爲然。孝子不匱。芬苾千年。 공자(孔子)가……자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하였다. 맹자(孟子)가……선비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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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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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 정공 묘지명 敬庵鄭公墓誌銘 이릉(爾陵)은 옛날에 문명이 있는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근고(近古)에 이르러 학문을 탐구하고 도의를 행하는 선비가 여전히 훌륭하게 있었으니 경암(敬庵) 정공(鄭公)과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 유풍과 남긴 자취는 백여 년이 지났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자못 기억하는 자가 있다. 다만 그 유고(遺稿)는 제 때에 수습하지 못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전하는 것이라곤 남 상사(南上舍)가 지은 추천장 한 통뿐이었다. 그 추천장을 살펴보니 "세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야박해져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입에 넣는 것을 효라고 하고, 병든 어버이를 위해 다릿살을 베어 먹이는 것을 효라고 하며, 물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왕상(王祥)의 잉어62)라고 하고, 죽순 하나를 얻으면 맹종(孟宗)의 죽순63)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의 행실과 하나의 일에 나타난 것을 뽑아내고, 창졸간의 다급한 상황에서 분별해낸 것을 성대하게 효라고 하는 자는 평소 어버이를 봉양한 것을 돌아보면 과연 유감이 없겠는가. 오직 정흠(鄭欽)이 어버이를 섬긴 것이야말로 실로 이른바 평소에 유감이 없다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 부모의 나이가 93세이고, 정흠의 나이도 60세에 이르렀다. 어버이를 섬긴 이후로 다른 곳에서 유숙한 적이 없고,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적에는 한 발짝도 부모 곁을 감히 떠나지 않았다. 무릇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과 봉양하는 일에 있어 즐거워하는 표정과 온순한 모습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하루같이 하였다."라고 하였다.아, 남공(南公)은 우리 고을의 이름난 진사(進士)이니, 그 말은 믿을 수 있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큰 솥에 끓인 국은 고기 한 점만 맛보아도 그 전체의 맛을 다 알 수 있으니, 유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한스럽겠는가.또 그 현손 재우(在禹)가 지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거기에 "공이 항상 말하기를 '공경하면 온갖 선이 확립되고, 게으르면 온갖 선이 폐해진다. 옛 성인이 사람에게 보인 요체는 '경(敬)'만 한 것이 없고, 후학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호 또한 '경'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경암(敬庵)'이란 글자를 써서 재실의 편액으로 걸고 늘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이 한 조목은 비록 당시 추천장에 실린 내용이 아니지만, 그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조는 '경(敬)'이 아니면 어찌 행할 수 있으랴. 이름을 흠(欽)이라고 하고 자를 경심(敬心)이라 하고 호를 경암(敬庵)이라고 한 것에서 더욱 이 '경(敬)'을 항상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은 '경'을 위주로 하고 다스림은 '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여기에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정씨(鄭氏)는 계보가 하동(河東)에서 나왔다.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휘 국룡(國龍)이 중시조이다. 7세대 뒤 휘 여해(汝諧)는 호가 둔재(遯齋)이고, 지평(持平)을 지냈으니, 공에게는 7대조가 된다. 고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천경(天經)이고, 증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침(忱)이고, 조부는 참판에 추증된 휘 문원(文黿)이다. 부친은 판서를 지낸 휘 인채(仁采)이다. 모친은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윤임(尹任)의 따님이다.공은 경종(景宗) 신축년(1721, 경종1)에 태어나 정종(正宗) 병오년(1786, 정조10) 7월 28일에 졸하였다. 화산(華山) 대방동(大榜洞) 술좌(戌坐)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配位)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합장하였다. 김씨는 김명구(金命九)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 석(錫)의 아들 양문(陽文)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각각 문혁룡(文赫龍), 김중신(金重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고 孝爲仁本공경은 몸의 기틀일세. 敬者身基효도와 공경 曰孝曰敬간직하니 서로 바탕이 되네. 夾持交資두봉에서 노닐었고 頭峰杖屢대방동에 무덤 있네. 榜洞斧堂뒤미쳐 여운을 생각하매 追想餘韻지나는 사람 배회하네. 過者彷徨 爾陵古稱文明之鄕。至近古。而問學行誼之士。尙彬彬焉。若敬庵鄭公亦其人也。其遺韻餘躅。至百餘年之久。而頗有能記之者。但其遺稿。收不以時。歸於烏有。而所傳只是南上舍所撰剡薦狀一通而已。按狀有曰。世降俗渝。以一指之斷爲孝。以一股之割爲孝。得一魚則謂之王祥之鯉。得一菜則謂之孟宗之筍。摘其一行一事之立辨於倉卒急遽之間而藉藉爲孝者。顧其平日之養親。果無所憾者乎。惟鄭欽之事親。眞所謂無憾於平日者也。其親年九十有三。欽年又至六十矣。親老之後。未嘗經宿於他所。親病之日。不敢離側於跬步。凡諸扶奉之誠。供養之勤。愉色婉容。殫心竭力。自始至終。恒若一日云。嗚呼。南公是吾鄕名進士也。其言足可徵信。而爲不朽於來世矣。全鼎一臠。未爲不知其味。則遺稿散逸。亦何恨焉。又按其玄孫在禹所撰家狀。有曰。公常言敬則萬善立。怠則萬善廢。前聖示人旨訣。莫如敬。後學入德門庭。亦莫如敬。乃書敬庵字。揭于齋顔以常目焉。此一條。雖非當日薦狀中所載者。然其至行偉節。非敬安能做得來耶。名之以欽。字之以敬心。號之以敬庵。尤可見其眷眷於此而不忘也。學問則敬以爲主。行治則孝以爲本。公之爲公。於斯可槪矣。鄭氏系出河東。高麗密直諱國龍。其中祖也。七傳諱汝詣號遯齋官持平。於公爲七世。高祖贈參議諱天經。曾祖贈參議諱忱。祖贈參判諱文黿。考判書諱仁采。妣漆原尹氏任之女。公以景宗辛丑生。正宗丙午七月二十八日卒。葬華山大傍洞戌坐。齊光山金氏祔焉。金氏諱命九女。有婦德。無男。取次弟錫子陽文爲嗣。二女文赫龍金重臣。銘曰。孝爲仁本。敬者身墓。曰孝曰敬。夾持交資。頭峰杖屢。榜洞斧堂。追想餘韻。過者彷徨。 왕상(王祥)의 잉어 왕상이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맹종(孟宗)의 죽순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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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日諸益同會。各述其懷。 量鑿方施衲。佩帚須戒弦。風波憂白地。軒輊聽靑天。心茆鋤還塞。鬂絲鑷更懸。歸哉各努力。餘日掛西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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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일【흥묵】에게 답함 答裴正一【興黙】 지난번에 답신을 계원(啓元) 편에 부쳤습니다. 지난달 그믐 무렵에 계원의 집에 갔다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응당 조만간 전해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으로 또 혜서(惠書)를 받들었으니 매우 고맙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는 상황이 한결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겠습니까.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고(無故)하여 족하(足下)께서는 이미 하늘로부터 즐거움 하나를 얻었으니 자신에게 달린 두 가지 즐거움40) 또한 힘을 쏟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시절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효를 행하고 싶어도 미치지 못하고 학문을 닦는 것도 때가 지났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저 애석한 마음만 절실할 뿐입니다. 족하께서는 저를 전철(前轍)로 삼으십시오. 《주역(周易)》 공부는 지금 몇 권에 이르렀습니까? 읽고 난 뒤 다시 《논어》, 《맹자》 등의 책을 받아서 평이하고 천근한 일에서 착실하게 체인(體認)하여 일대본령(一大本領)을 갖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는 단지 도(道)와 기(器)의 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실로 상하가 대치하듯 하는 것을 이르지 않습니다. 경(敬)은 정(靜)만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경은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므로 《예기(禮記)》 〈곡례(曲禮)〉에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음과 양이 서로 뿌리가 되고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41)라고 하였습니다. 획이 없는 역(易)이 바로 태극이지 어찌 일찍이 별도의 획이 없는 역이 태극보다 먼저【先】 있었겠습니까. 이 '선(先)' 자는 소위 '미발 이전'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건괘(乾卦) 구이(九二)에서는 성(誠)을 말하고, 곤괘(坤卦) 육이(六二)에서는 경(敬)을 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논어》 중궁문인장(仲弓問仁章) 아래의 주석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건도(乾道)이고 주경행서(主敬行恕)는 곤도(坤道)이다."라고 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는 박괘(剝卦)와 복괘(復卦)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박괘(剝卦)의 상효(上爻)에서 이미 사라진 양(陽)이 아래에 복괘(復卦)의 초효에서 생겨나는 양이 되어42) 초목의 꽃과 열매가 시들어 떨어진 뒤에 양기(陽氣)가 다시 뿌리에서 생기듯 하겠습니까. 向者答書。付送啓元便。前月晦間。過啓元家。見尙爾留滯當早晏傳達也。謂外又泰惠諭。感感多矣。仍審省做如一。何等願聞。父母俱存。兄弟無故。足下旣得其一樂於天。則其二樂之在我者。亦將勉而可得矣。好時節。豈不可惜。義林欲孝靡及。爲學過時。向誰尤爲。只切痛惜。惟足下視爲前車也。羲經之課。今至幾卷耶。讀了後。更授如論孟等書。就平易切近。着實體認。辦得一大本領。如何。形而上下。特以道器界至言。非實有上下如對待之云也。敬非主於靜而已。是貫乎動靜。故禮曰無不敬。陰陽互根。動靜交資。故曰知者樂水。仁者樂山。無畵之易。便是太極。何嘗別有無畵之易。在於太極之先耶。此先字。當看如所謂未發之前。乾九二言。誠坤六二言敬云云。論語仲弓問仁章下註曰。克己復禮。乾道也。主敬行恕。坤道也。推此可見。消長之理。當觀於剝復之間云云。豈剝上旣消之陽。下爲復初方生之陽也。如一草木之花實雕落。而陽氣復生于根。 두 가지 즐거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지혜로운……좋아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박괘(剝卦)의……되어 《주역》 64괘의 순서상 복괘(復卦)는 박괘(剝卦) 뒤에 온다. 박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위에 하나의 양효(陽爻)가 있는 형상으로, 음이 극성하여 양기가 모두 소멸될 위기에 처한 괘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다섯 음효의 아래 하나의 양효가 생성되는 복괘로 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괘전(序卦傳)〉에서는 "물건은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박이 위에서 다하면 아래로 돌아오기 마련이므로 복으로 받았다.【物不可以終盡, 剝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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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지에게 답함 答吳永之 댁의 당함(堂咸 당질)이 와서 혜서(惠書)를 받들었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하시고 여력으로 닦는 공부가 거듭되어 의심스럽고 난해한 문제들이 편지 폭에 가득함을 알았으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과단성이 있어야 나중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43)"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천하의 일은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벗께서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단(四端)은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마음이고 사체(四體 사지(四肢))는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사물입니다. 쉽게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보기 어려운 이치를 증명하여44) 사람들에게 반드시 지니고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발(已發)과 서로 유사하지만 미발(未發)과 유사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미발은 비록 혼연(渾然)한 전체이지만 혼연한 가운데 찬연(粲然)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입니다. 이것을 구한다면 미발을 모호하고 애매하다고 여겨 두서도 없고 체계도 없이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근세에 이(理)를 위주로 논하는 이들의 커다란 병통입니다. 경계하십시오. 예악(禮樂)은 잠시라도 몸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것이 형체가 없는 예(禮)이고 소리가 없는 악(樂)입니다.45) 이미 공경과 사손(辭遜)이 예의 근본임을 알았다면 유독 관대함과 공평함, 조화와 순리가 악의 근본임을 모르겠습니까. 令堂咸來。承惠緘。因審省節康寧。餘力尋溫。疑難滿幅。不任欣仰。書曰。惟克果斷。乃罔後艱。朱子曰。天下事。非燕閒暇豫之可得。願吾友勉之。四端人所必有之心。四體人所必有之物。以易見之形。證難見之理。使人知必有而不可無。然安有已發相似。而未發不相似之理。未發雖曰渾然全體。而渾然之中。有粲然者存。所謂仁義禮智是也。求之無乃以未發爲儱侗昆侖無頭脚無間架看耶。此是近世論理家大病。戒之戒之。禮樂不可斯須去身。此是無體之禮。無聲之樂。旣知恭敬辭遜爲禮之本。則獨不知寬平和順爲樂之本耶。 과단성이……않는다 성왕(成王)이 관리들에게 훈계한 내용 중 하나로, "너희 경사들에게 경계하노니 공이 높음은 뜻 때문이요, 업이 넓음은 부지런함 때문이니, 능히 과단해야 뒤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戒爾卿士, 功崇惟志, 業廣惟勤, 惟克果斷, 乃罔後艱.】"라고 하였다. 《書經 周官》 쉽게……증명하여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형체가……악(樂)입니다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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