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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3 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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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재 김공 묘지명 栗齋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종국(鍾國), 자는 성일(聖一), 호는 율재(栗齋)이다. 김씨(金氏)는 계보가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휘 충한(沖漢)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수은(樹隱)이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본조에 들어와 휘 영전(傳號)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필암(蓽庵)이고, 참봉을 지냈다. 여러 대를 전해 내려와 휘 대기(大器)에 이르렀는데, 호는 경재(警齋)이고 진사를 지냈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에게 수학하였다. 이분이 휘 명철(命哲)을 낳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횡(鑅)을 낳았는데, 호가 태암(泰巖)이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운정(運鼎)인데, 감찰을 지냈고, 증조는 휘 희학(希學)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지형(之炯)인데, 장악원 정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 홍기(鴻基)인데, 호가 농와(聾窩)이다. 모친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정영(鄭爃)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2월 28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였으니, 곡학(曲學)하는 선비의 기습(氣習)이나 구차한 유학자의 기습이 없었다. 처음에 시서(詩書)를 공부하다가 활쏘기와 말타기를 함께 익혔는데, 버들잎을 꿰뚫을 정도로 기예가 정밀하고 심오하였으며 용병술(用兵術)이나 기율(紀律)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술을 마신 뒤에는 《시경》〈진풍(秦風) 무의(無衣)〉 몇 곡조를 읊조렸으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 장량(張良)이 진(秦)나라를 격파하였다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무릎을 치며 북받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중년 이후로는 변고를 겪은 것이 점점 깊어지고 세상일을 겪은 것이 점점 많아져, 젊었을 때의 풍도는 규각(圭角)42)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게 수렴하여 날로 노성(老成)한 법도를 이루었다. 또 무사재(無邪齋) 박씨 어른과 만년에 이웃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교유하여 깨달은 것이 많았다. 병인년(1866, 고종3) 강도(江都)의 난43)에 그 족숙(族叔) 산남공(山南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약속이 이미 정해져 출발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득 난이 평정되어 그만두었다.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에게는 우애 있으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규문을 잘 다스리고 정돈하여 조화로우면서도 예법이 있었고, 자손을 가르침에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으니, 아름다운 명성과 훌륭한 명예가 향리에 자자하였다.기유년(1909, 순종3) 4월 7일에 졸하였는데, 신산(薪山) 오른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김욱해(金郁海)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만원(萬源), 두원(斗源)이고, 딸은 흥덕(興德) 장대규(張大奎)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권주(權柱)이고, 손녀는 정재우(鄭在禹)에게 출가하였다. 차방손(次房孫)은 권율(權律), 권하(權夏), 권권택(權澤), 권권후(權厚), 권권신(權信)이고, 손녀는 구교열(具敎烈)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의 평생을 살펴보건대, 풍진세상에서 불우하였지만 뇌락(磊落)하고 강개(慷慨)함은 먼 후대에도 오히려 족히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같은 세상 같은 고을에 살면서 직접 인사드리지 못했으니,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권하(權夏)가 그 대인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옛날엔 광견44)이지만 古之狂狷오늘날은 강개한 기상일세. 今之慷慨이로 인해 분별하여 因是裁之성취할 수 있었네. 可以有造만년에 좋은 이웃을 만나 晩接芳隣순박함을 회복하였네. 于以回淳신산의 기슭에 薪山之麓넉 자의 봉분이 있네. 四尺其崇봄가을로 향기로운 제물 올리니 春秋芬苾자손이 번성하리라. 子孫繩繩 公諱鍾國。字聖一。號栗齋。金氏系出慶州。有諱沖漢號樹隱。仕麗。官禮儀判書。入我朝。有諱永傳號蓽庵。參奉。累傳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學於重峯趙先生。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從牛山安先生擧義。皆其顯祖也。高祖諱運鼎監察。曾祖諱希學。贈戶曹參議。祖諱之炯。贈掌樂院正。考諱鴻基號聾窩妣晉州鄭氏爃女公以純廟丁丑二月二十八日生于薪山里。天稟豪爽。無曲士拘儒之氣。初業詩書。兼習弓馬。穿楊碎柳。技藝精深。用兵紀律。無不曉解。酒後歌無衣詩數闋。讀史至魯連蹈海張良椎秦等處。廢書擊節。不勝其慷慨。中身以後。閱世漸深。更事漸多。少年風韻。不露圭角。而帖然收斂。日就孚老成規矩。又與無邪齋朴丈。晩而接隣。日夕遊從。多所契悟焉。丙寅江都之亂。從其族叔山南公。倡起義旅。約束己定。啓行有日。旋以亂平而止。孝於父母。友於兄弟。信於朋友。修整閨門。和而有禮。敎訓子孫。嚴而有法。令聞令譽。藉藉鄕里。己酉四月七日卒。葬薪山右麓子坐原。齊商山金氏郁海女。二男一女。男萬源斗源。女適興德張大奎。長房孫權柱。女鄭在禹。次房孫權律權夏權澤權厚權信。女具敎烈。嗚呼。迹公平生。其落拓風塵而磊落慷慨。百世之下。猶足相感。況在倂世同鄕而未得拜床。其恨爲何如也。權夏以其大人命。奉家狀。謁誌銘。銘曰。古之狂狷。今之慷慨。因是裁之。可以有造。晩接芳隣。干以回淳。薪山之麓。四尺其崇。春秋芬苾。子孫繩繩。 규각(圭角) 위가 뾰족하고 밑이 네모난 벽옥(璧玉 둥근옥)이 규(圭)이고, 이 벽옥의 뾰족한 모서리가 규각이다. 언행이 모가 나서 남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규각나다'라고 한다. 병인년 강도(江都)의 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이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천주교도 탄압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광견(狂狷) 《논어》〈자로(子路)〉에 공자가 "중도(中道)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광견한 사람과 함께 하겠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뜻이 크고 지조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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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정공 묘지명 莘齋鄭公墓誌銘 공의 휘는 의상(義相), 자는 사균(士均), 호는 신재(莘齋)이다. 정씨(鄭氏)는 본래 하동(河東) 사람이다. 고려 때 밀직 부사(密直副使) 국룡(國龍)이 그 비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지영(之英)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여해(汝諧)를 낳았으니 지평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휘 기령(箕齡)은 호가 양심재(養心齋)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문원(文黿)인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인채(仁采)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조부는 휘 석(錫)인데, 호가 반산(盤山)이다. 부친은 휘 양무(陽武)인데, 니, 문장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났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기유년(1789, 정조13) 7월 28일에 능주(綾州)의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평범한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나아가고 물러남과 응대하는 예절이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며 자상하고 민첩함이 어른과 같았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을 올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공은 집안일을 잘 주간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몸에 맞거나 입에 맞게 하여 어버이가 충분히 기뻐하시도록 힘썼다.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은혜로웠다. 전처와 후처가 모두 자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온 고을에 두루 거처하였으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시공지친(緦功之親)45)하는 자가 수십 호였다. 사람이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위문하였으며, 흉년에 구휼하여 상황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고 은의(恩意)가 두루 미쳤다.공은 몸가짐[容儀]이 매우 위엄이 있어, 보는 자가 자연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마치 술을 마시고 스스로 취한 듯하였다. 세상일을 잘 알고 물정에 해박하였으며, 말을 하는 데 장점이 있었고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났다. 이 때문에 공이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일을 할 때면 모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향리에서 언쟁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과 복잡하게 뒤얽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비록 완강하여 교화하기 어렵고 완악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도 공의 말을 들으면 어느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화합하게 한 훈계46)를 모방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고을에서 거처하던 위의47)를 따랐다. 선조인 둔재(遯齋) 선생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편집한 다음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불러 효도하고 우애 있게 하라고 경계하고, 친족들을 불러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계하였다. 또 가까이 사는 붕우를 맞이하여 사람마다 영결을 고하였다. 이윽고 자리에 나아가 별세하였으니, 바로 갑자년(1864, 고종1) 11월 24일이다. 이곡(耳谷)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풍류치(風流峙)에 있는 선영의 부건(負乾) 언덕으로 이장하였다.배위(配位)는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백환(百煥), 차자는 주환(周煥), 딸은 양달환(梁達煥)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재한(在翰), 차방(次房)은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 명환(明煥)의 아들 재수(在洙)를 양자로 삼았다.아, 공은 우리 고을 선진(先進)이며 숙유(宿儒)이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우레 같은 높은 풍의(風義)를 익숙히 들었으나 가난과 병마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뒤에 재한(在翰)과 교유하게 되고, 지금 또 유장(遺狀)을 얻어서 읽어 보니, 더욱 당시에 듣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금 아득히 세상이 바뀌어 옛 것은 다 사라졌지만 오직 이 어른의 발걸음이 닿았던 촌락의 풍속은 순후하고 예스러워 현송(絃誦)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당시에 그분이 창도(唱導)한 힘이 아니겠는가. 아, 공경할 만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둔재 선생의 고가요 遯齋古家능주의 명문가일세. 綾陽名門선조 뜻 계승해 헛되지 않으니 繼述不空전형이 보존되었네. 典刑斯存전야에서 광채를 숨겼고 潛光畎畝산속에서 한가로이 지냈네. 養閒林樊그 유풍과 여운 遺風餘韻사랑스러워 할 만하네. 俾也可愛 公諱義相。字士均。號莘齋。鄭氏本河東人。勝朝密直副使諱國龍。其鼻祖也。入我朝。有諱之英。官縣監。生諱汝諧持平。受學于佔畢齋金先生。與一蠹寒暄爲道義交。世稱遯齋先生。諱箕齡號養心齋。中進士。皆其顯祖也。高祖諱文黿。贈參議曾祖諱仁采。壽陞正憲。祖諱錫號盤山。考諱陽武。以文行著世。妣長澤高氏命復女。以正宗己酉七月二十八日。生公于綾之華山里。幼而岐嶷。不類凡常。進退唯諾。出入孝弟。委曲敏贍。一如成人。家素貧。菽水戛戛。公極幹家務以就其養。便身適口。務盡其歡。御家衆。嚴而有恩。前後室皆有子女。而內外斬斬。無有間言。宗族甚繁。遍於一鄕。而緦功之親。同住一巷者。數十戶。生死問唁。飢饉賙恤。隨時無闕。恩意浹洽。公容儀甚嚴。見之者自然畏憚然接人酬語。溫溫諄諄。如飮醇自醉。諳於世故。該於物情。長於言辭。優於幹理。是以語人無不服。作事無不集。鄕里間。有爭辨而未平者。有盤錯而未解者。無不待公咨決。雖强梗難化頑忍無恥者。聽公言。不覺赧然愧屈。立門規。做程子合族之訓。說洞約。遵呂氏居鄕之儀。先朝遯齋先生遺稿。蒐輯編摩。刊行於世。臨終招二子。戒以孝友。招諸族戒以敦睦。又邀居近朋友。面面告訣。已而就枕而逝。卽甲子十一月二十四日也。葬耳谷。後移于風流峙先壟負乾原。配淸道金氏相俊女。系配金海金氏某女。有二男一女。長百煥次周煥。女適梁達煥。長房孫在翰。次房無嗣。以從兄明煥子在洙爲後。嗚呼。公吾鄕先進宿儒也。余在弱冠。艶聞風義。如雷灌耳。但貧病苟活。未得一就拜床。而因循之頃。公已千古矣。後得與在翰遊從。今又得其遺狀而請之。益聞當日之所未聞。方今桑海茫茫。舊物掃地。而惟是杖屨所經。村俗淳古。絃誦不絶。此非當日倡遵之力耶。吁可敬也。銘曰。遯齋古家。綾陽名門。繼述不空。典刑斯存。潛光畝畝。養閒林樊。遺風餘韻。俾也可諼。 시공지친(緦功之親) 시마친(緦麻親)과 대공친(大功親), 소공친(小功親)을 이른다. 정자(程子)가……훈계 정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하였다. 《近思錄》 여씨(呂氏)가……위의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를 여씨향약(呂氏鄕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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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경에게 써서 주다 書贈曺泰卿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立志]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도 뜻이 세워지지 않으면 성취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커다란 공부와 커다란 사업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천지를 위해서 마음을 세우고[立心] 생민(生民)을 위해서 도를 세우고[立道] 옛 성현을 위해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萬世)를 위해서 태평 성세를 여는 것159), 이것이 사군자(士君子)가 세우는 뜻이다.그러나 일시적인 입지(立志)는 누구인들 없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뜻을 지키고 잃지 않아야만 큰일을 할 수 있다.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삼가고 두려워함160),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의 두려움과 공경스러움161), 공자(孔子)가 말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하는 것162), 자사(子思)가 이른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163)이 그것이다. 이것이 성인과 성인이 주고받은 첫 번째 요결(要訣)이며 치지(致知)와 독행(篤行) 등의 각종 공부가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다. 천하에 어찌 근원 없는 물줄기, 기초 없는 건물이 있겠는가. 이에 뜻을 세우고 뜻을 지키는 데 관한 말로 태경(泰卿)을 면려한다. 學莫先於立志。夫日用小事。未有志不立而能有所就。況大工夫大事業乎。爲天地立心。爲生民立道。爲往聖繼絶學。爲萬世開太平。此士君子所立之志也。然一時立志。誰曰無之。必須持其志而不失。可以有爲。持之如何。堯舜之兢兢業業。湯文之栗栗肅肅。孔子所謂正衣冠尊瞻視。子思所謂戒愼恐懼是也。此是聖聖授受第一要訣。而致知篤行種種工夫。皆從此出。天下安有無源之流。無基之築哉。玆以立志持志之說。爲泰卿勉焉。 천지를……여는 것 《근사록》 〈위학(爲學)〉에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정립하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정립하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야 한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라고 하였다. 요(堯)임금과……두려워함 《서경》 〈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 보이는 말이다. 탕왕(湯王)과……공경스러움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을 찬양하면서 "궁중(宮中)에 계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종묘(宗廟)에 계실 때에는 공경스러웠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항상 임재(臨在)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기셨고, 싫증내어 나태하지 않은 때에도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보전하셨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공자(孔子)가……하는 것 《논어》 〈요왈(堯曰)〉에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한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자사(子思)가……두려워하는 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는 때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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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오의 자에 대한 설 文敬五字說 사문(斯文) 문재희(文載熙)가 처음에는 경오(敬於)를 자(字)로 삼았는데, 대체로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169)에서 취하였는데, 어느날 내가 '오(於)'를 '오(五)'로 고치기를 권하여 곧 경오(敬五)가 되었다. 경오(敬五)가 말하기를, "자(字)에 설(說)이 있는 것은 옛 법도입니다. 저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그 뜻을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경오는 내 고향의 선사(善士)170)이다. 평소에 아끼고 우러렀기에 굳이 사양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망녕되이 고친 것이 있건만 감히 고치게 된 뜻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는가. 무릇 학문의 도는 단지 지선(至善)의 소재를 밝히고 지선(至善)의 경지에 머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선의 소재를 밝히는 방도는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반드시 거듭 쌓이고 계속된 다음에야 그 공을 알 수 있으며, 지선의 경지에 머무는 방도는 막혀 있는 채로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르지 않고 반드시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기른 다음에야 힘을 쏟을 수 있다. 이것은 집희경지(緝熙敬止) 이 네 자에 이미 남김없이 전부 담겨있다.그러나 선후 완급(先後緩急)의 순서에 적합하지 못하면 이른바 '밝힌다[明]'라는 것은 바람을 움켜잡고 물에서 달을 건지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른바 '머문다[止]'라는 것은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는171) 우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집희경지(緝熙敬止)의 아래 문구에 '임금이 되어서는[爲人君]' 이하 다섯 가지의 세목172)이 있게 된 까닭이다. 이 다섯 가지는 바로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으로 손을 대고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약여(躍如)173)하지 않겠는가.'희(熙)' 자로 이름을 짓고 '경오(敬五)'를 자로 정하였으니 그 뜻이 서로 의지하고 그 공부가 번갈아 갖추어져 체(體)가 있으면 용(用)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수 있다. 경오는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하기 바란다. 이른바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지만 도가 거기에 있다."174)라는 말도 또한 처음부터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文斯文載熙。表德初以敬於。蓋取於緝熙敬止之語也。一日余勸其改於以五。卽敬五也。敬五曰。字之有說古也。願爲之敷衍其義也。夫敬五吾鄕善士也。尋常愛仰。有難牢讓。況妄有所改。而敢不輸道其改之之意耶。夫學問之道。只是明夫至善之所在。而求止乎至善之地。明之之道。非一日頓悟之謂。必積累繼續而後。可見其功止之之方。非膠滯不顧之謂。必莊敬持養而後。可以爲力。此緝熙敬止四字。已說盡無餘蘊矣。然非有以適於先後緩急之序。則所謂明者。有捕風撈月之想。所謂止者。有揠苗助長之患。此緝熙敬止下文。所以有爲人君以下五者之目也。五者是人生日用平常切近之地。而所以示人下手發足之方。其不躍如乎。名之以熙。字之以敬五。其義相須。其功交備。可以有體而有用有始而有卒矣。願敬五顧名思義勉勉循循。則所謂不下帶而道存。亦未始非此耳。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 《시경》 〈문왕(文王)〉에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고 하여 문왕의 덕을 칭송한 말이다.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善士), 즉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고을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한 나라의 선사일 경우에는 한 나라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일 경우에는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또 옛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싹을……돕는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이……세목 《대학》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목목한 문왕이여, 아! 계속하여 밝혀 공경하여 머무르셨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무르시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무르시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르시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머무르시고, 나라 사람과 사귈 때는 믿음에 머무르셨다."라고 하였다. 약여(躍如)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군자는 활을 당기고 쏘지 않으나, 약여하여 중도에 서 있거든 능한 자가 따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표현이다. 시선이……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말은 평이하면서도 뜻은 심원한 것이 좋은 말이고, 지키기는 간단해도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 좋은 도이니, 군자의 말은 눈앞의 일상을 얘기하지만 거기에 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에 "옛사람들은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리띠 위는 바로 눈앞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지극히 가까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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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여에게 답함 答李寬汝 10월이 다하려 하고 추위의 위세가 맹렬한데 가르치고 배우면서 지내는 안부가 계절에 맞추어 편안하신지 그리운 마음 늘 지극합니다. 계원(啓元)은 결국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총명함과 깨달음이 실로 비통하기만 합니다. 지난날 병환이 위독할 때 편지를 보내 작별 인사를 청하기에 마침내 경립(景立) 등 여러 벗과 찾아갔습니다.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귀공명은 정해진 명이 있으니 추구하지 못하였고 평생에 걸친 포부와 소망이 궁리(窮理)와 수신(修身)이었습니다. 천지 사이에 헛되이 왔다 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제 병세가 이와 같으니 분명히 이 세상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장(吾丈)께서는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자기 선인(先人)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는데, 저는 병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물러나 즉시 행장을 지어 이달 14일에 비로소 부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생사가 위급하고 정신과 기력이 다한 시각에도 오직 학문에 관한 일만은 간절히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품었던 마음을 살펴보자니 매우 비통합니다. 바라건대 오당(吾黨)의 익우(益友)들은 이렇게 한가하고 탈이 없는 때를 맞아 더욱 힘을 쏟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벗이 죽음을 맞으면서까지 간절하게 잊지 못했던 정의(情意)를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익중(翊中)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벗께서 먼저 논의를 꺼내어 병 중에 있을 때는 먹을 것을 도와주고 죽은 뒤에는 모여서 조문하는 의절을 마련하셨다니, 가까이 교제했던 사이에 서로를 돌보는 후의(厚意)에 감복(感服)하였습니다. 일전에 보낸 익중의 편지는 혹시 보셨습니까? 기근이 비록 심하더라도 제힘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필 이렇게까지 근심을 끼치겠습니까. 다시 여러 형과 의논하여 거둔 물품을 다시 나누어 돌려주십시오. 간절히 바랍니다. 陽月垂盡。寒威漸緊。卽惟斅學節宣。以時勝適。溯仰每至。啓元竟作泉臺人。其聰明開悟。實可痛傷。何日病劇時。走書請訣。遂與景立諸友往之。握手語曰。富貴功名。有命不可求。平生志願。是窮理修身。庶不爲天地間虛來底人。今病勢如此。其不得爲陽界人決矣。惟吾丈益加勉勵也。且以其先人行狀托之。余見病勢甚危。退卽構之。今十四日始付去。而此人乘化。在十五日。其入覽與否。未可知也。嗚乎。雖在死生危急神氣耗奪之時。而惓惓不忘。惟在於學問一事。究其情曲。極可悲也。願吾黨諸益。迨此閒暇無故之時。益可勉焉。又以慰此友臨歿惓惓不忘之意也。昨得翊中書。自吾友發論。病時有饌物之助。歿後有會哭之節。無非親契間相厚之義。感服感服。日前所與翊中書。或見之耶。飢饉雖甚。而私力可支。何必貽慮至此也。更與僉兄議之。所收之物。更爲散還也。企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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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에게 보냄 與李德哉 서한에서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근래 형세가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무릇 일본(一本)과 대본(大本)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분하자면 일본은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대본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만수(萬殊 만물의 다양함)와 대가 되고35) 대본은 달도(達道)와 대가 됩니다.36) 또 일본과 만수는 본래 나뉘는 경계가 없습니다. 일본을 말하면 만수가 이미 갖추어지고 만수를 말하면 일본은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나누어 말하자면 나뉘는 경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현자(賢者 상대방)가 말씀하신 "물은 샘에 근본하고 나무는 뿌리에 근본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氣)는 본래 선후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으로 말하면 이 이(理)가 있은 다음에 이 기(氣)가 있으니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운행으로 말하면 이 기가 있은 다음에 이 이가 갖추어지니 기가 먼저이고 이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성(性)은 본래 오성(五性)의 총체적 명칭이지만 혼연(渾然)하게 뒤섞여 있는 것 가운데 또 찬연(粲然)하게 구분하여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는 것은 마치 화살의 활촉과 같고 각기 껍질이 있는 것은 석류의 씨와 같다."라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합하여 말한다면 하나의 성(性)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나누어 말하자면 오성(五性)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하나의 성이 혼연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오리(五理), 오태극(五太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조리(條理)나 문리(文理)를 이른다면 천하에 어찌 일찍이 오리만 있겠습니까. 태극이 이(理)의 총체적 명칭이라면 세상에서 또 어찌 일찍이 오태극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성(性)이 이(理)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이라면 일성(一性), 오성(五性)이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좁은 견문으로 어찌 조그마한 의미라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강습(講習)의 도리로 볼 때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보잘것없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여 회답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示喩縷縷。足見近日喫緊。甚不草草。夫一本大本。固無二致。然細分之。則一本是理上說。大本是心上說。是故一本與萬殊爲對。大本與達道爲對。且一本萬殊。固無界位。言一本而萬殊已具焉。言萬殊而一本不外焉。然若以分言之。則不可謂全無界位。如賢所謂水本於源。木本於根是也。理氣本無先後。然若以源頭言。則有是理。而後有是氣。謂之理先氣後可也。若以流行言。則有是氣而後是理具焉。謂之氣先理後可也。性固五性之總名。而渾然之中。又不無粲然之可言。以此意會。其象可見。若曰齊頭倂立。如箭之有簇。各有甲殼。如榴之有核則誤矣。合而言之。則謂之一性可也。分而言之。則謂之五性可也。是以朱子不曰一性渾然云云乎。但五理五太極。不成說理是條理文理之謂。則天下何嘗有五理而已乎。太極是理之總名。則天下又何嘗有五太極之可言乎。若夫性是理之結窠處。則謂之一性五性豈有不可乎。謏聞寡見。安足以發明萬一之意。但於講習之道。不容無答。玆以仰布鄙意。幸加三思而爲之回敎之。如何。 일본은……되고 《주자어류》에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이 되는 것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은,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와 수많은 가지와 잎이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27 論語9 里仁篇下 子曰參乎章》 대본은……됩니다 《중용장구》 제1장에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이른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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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견에게 답함 答李光見 한결같은 마음을 독실히 지켜 세속의 어지러운 일에 이끌리지 않으시니 좋은 일입니다. 우러러 기상(氣象)을 생각하자니 저도 모르게 청상(淸爽)함이 부럽습니다. 지금부터 지속해 나가서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용납하지 않게 된다면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즐거움,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ㆍ정자(程子 정호(程顥))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은 인품37)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을 꾸리는 여가에 펼쳐 놓고 감상하는 것이 근래에 「홍범(洪範)」에 있으니 우리 벗께서 심력을 다하는 근실함은 일반 사람이 미칠 수 없습니다. 어찌 옛날의 위 무공(衛武公)38)과 거원(蘧瑗)39)만이 미덕(美德)을 독차지하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박약하고 또 평소에 배양한 힘도 없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쇠퇴한 정도가 더욱 심해서 비록 애써 일으켜 세우고자 하더라도 곧 다시 옛날대로 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벗께서 저를 위해 채찍질하여 때를 놓치고 상황이 지나버린 뒤 끝에 터럭만큼의 수확이라도 거두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기를 처음부터 바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謹守一心。不爲俗撓所牽引。好事好事。想仰氣象。不覺淸爽可艶。從此接續。至於些子不容。則孔顔之樂。孟子之浩然。周程之光風霽月。可以見之矣。幹務餘力。所以被玩。近在洪範。吾友心力之勤實。非常調人可及。衛武蘧瑗。豈惟專美於古也。義林稟氣甚薄。又無素養之力。至於老而頹靡益甚。雖欲作力扶竪。而旋復如故。奈何奈何。願吾友爲之鞭策之。俾有絲毫之收於失時過境之餘者。未始非區區之望也。 화창한……인품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일컫기를, "인품이 매우 높아서 가슴속의 시원함이 마치 광풍제월과 같다.【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하였고, 주희는 정명도(程明道)의 군자다운 모습에 대해 "봄기운처럼 따뜻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웅장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고 칭송하였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朱子全書 卷66 六先生畫像贊 明道先生》 위 무공(衛武公)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만한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고 전한다. 《시경(詩經)》 〈위풍 기욱(淇奧)〉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시로 알려져 있다. 거원(蘧瑗)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 자가 백옥(伯玉)이다. 《장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蘧伯玉, 行年六十而六十化.】"라고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 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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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유인유씨(孺人柳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柳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柳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의 어머니 유인 유씨에게 내린 추증교지 1855년(철종 6)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어머니 유인(孺人) 유씨(柳氏)에게 내린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김응상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어머니 유인 유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즉, 이 문서의 맨 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妣 依法典追贈"라고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 걸쳐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또한 부모(父母)를 추증할 때에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렸다. 김응상의 아버지 김명하(金命河)는 아들과 같은 가선대부로 증직(贈職)되었고 김응상의 어머니 유인 유씨는 그에 걸맞게 정부인으로 봉작되었다. 김응상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바로 유인 유씨와 유인 박씨(朴氏)이다. 두 사람 모두 이때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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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學生金道明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祖考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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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유인정씨(孺人鄭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鄭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鄭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왕이 김응상의 증조할머니 유인 정씨에게 내린 추증교지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증조할머니 유인(孺人) 정씨(鄭氏)를 추증(追贈)하면서 내린 교지(敎旨)이다. 김응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증조할머니 유인 정씨는 숙인(淑人)으로 추증된다. 즉, 이 문서의 맨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妣 依法典追贈"라고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 걸쳐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또한 부모(父母)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리며 조부모(祖父母), 증조부모(曾祖父母)에게는 그의 품계에서 각각 1품씩 강등하여 추증하였다. 김응상에게 내려진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김응상의 증조할아버지 김덕렴(金德濂)은 통훈대부로 정3품에 봉(封)해지며 그의 부인 유인 정씨는 그에 걸맞게 숙인으로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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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李氏贈淑夫人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祖妣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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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鄭氏贈淑人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妣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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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學生金德濂贈通訓大夫司僕寺正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考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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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의 큰 잔칫날에 사의와 여안이 시에 개연히 차운하다 2수 彼人大宴日 士毅汝安有詩 慨然 次韻 【二首】 홀로 가을바람 맞으며 눈물 자욱 씻는데 獨倚秋風灑淚痕저 사람은 삼대가 이미 얽힌 뿌리라네 彼人三世已盤根어찌하여 팔도에 남아 하나 없는 것인가 胡無八域一男子제멋대로 붉은 깃발이 읍촌에 퍼져있네 任爾紅旗遍邑村이전에 병법을 배우지 못해 한스러워라 却恨從前未學兵금수401)가 밝은 하늘 더럽힘을 앉아서 보네 坐看蹄跡褻天明수명 늘릴 술법도 없어 거듭 탄식하는데 重歎難得長年術강가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만 들리네 江上蕭蕭落木聲 獨倚秋風灑淚痕, 彼人三世己盤根.胡無八域一男子, 任爾紅旗遍邑村.却恨從前未學兵, 坐看蹄跡褻天明.重歎難得長年術, 江上蕭蕭落木聲. 금수 원문의 '제적(蹄跡)'은 금수(禽獸)의 발자국으로 악인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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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의 화를 입었을 때 감회를 적다 12월 1일 ○2수 被震禍時 識感 【十二月十日○二首】 스승은 간옹이요 부친은 벽봉269)인데 師曰艮翁父碧峯일찍이 도의로 몽매한 나를 가르치셨지 曾將道義敎昏蒙지금까지 조심조심 받들어 지녀왔으니 至今戰戰奉持去황천에서도 잘 모시고 따를 수 있으리 庶可泉臺好侍從사악을 내치고 정의를 지킴은 추성270)에서 본받고 斥邪衛正法鄒聖목숨 바쳐 스승을 높이는 건 예경에서 익혔다네 致死尊師講禮經부앙해도 이 마음 부끄러움은 없으나 俯仰此心無愧怍단지 학업을 정밀히 닦지 못해 탄식하네 只歎學業未硏精 師曰艮翁父碧峯, 曾將道義敎昏蒙.至今戰戰奉持去, 庶可泉臺好侍從.斥邪衛正法鄒聖, 致死尊師講禮經.俯仰此心無愧怍, 只歎學業未硏精. 벽봉(碧峯) 김택술의 부친 김락진(金洛進, 1859~1909)의 호이다.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키는데,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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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 허명갑을 면려하다 勉許秀才明甲 공부가 깊어지면 글맛이 항상 흘러 넘치고 功深書味常流露덕이 성대해지면 겸손의 빛290)이 더욱 길상하다네 德盛謙光更吉祥이 시를 긴요하게 여기고 반복해 읊조려서 喫緊此詩三諷咏평생 그대를 위해 보배로 삼아야 하리라 畢生爲汝作珍藏 功深書味常流露, 德盛謙光更吉祥.喫緊此詩三諷咏, 畢生爲汝作珍藏. 겸손의 빛 '겸광(謙光)'은 겸손한 덕이 밖으로 성대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겸손하면 높은 이는 더욱 빛나고, 낮은 이도 사람들이 넘을 수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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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15)에서 현판 위의 시에 차운하다 實相寺次板上韻 불교는 예로부터 허와 공을 숭상했는데 佛尙虛空自古時어찌하여 절의 이름은 이와 반대인가 胡然寺號反於斯내악16)을 차지해 숨으니 마음속이 평온하고 占藏萊嶽中心穩삼한17)을 다 겪으니 지난 세월이 더디네 閱盡三韓往劫遲길손아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行客休言無勝槪여러 암자들 다 이곳에서 갈라져 나왔지 諸菴皆得此分枝월사가 훌륭한 솜씨로 시 지어 남겼으니18) 月沙高手留詩跡우리 선조 계옹이 옛 친구를 만난 듯하네 吾祖溪翁見舊知-《월사집(月沙集)》에 이르기를 "변산(邊山)을 유람할 때 참봉(參奉) 김횡(金鋐)19)을 방문했다." 하였다.- 佛尙虛空自古時, 胡然寺號反於斯?占藏萊嶽中心穩, 閱盡三韓往劫遲.行客休言無勝槪, 諸菴皆得此分枝.月沙高手留詩跡, 吾祖溪翁見舊知.【《月沙集》云?遊邊山時, 訪金參奉鋐?.】 실상사(實相寺)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사찰이다. 내악(萊嶽)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변산(邊山)을 가리킨다. 삼한(三韓) 고대 우리나라 남부에 있던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말한다. 월사(月沙)가……남겼으니 《월사집(月沙集)》 제18권 〈부습유록(附拾遺錄)〉 에 〈변산을 유람할 때 참봉 김횡을 방문하여 술자리에서 시를 짓다〔遊邊山時歷訪金參奉鋐酒席口占〕〉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월사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식(李植)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힌다. 김횡(金鋐) 본관은 부안, 호는 죽계(竹溪)이다. 생원시에 장원 입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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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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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오【원례】에게 답함 答李鉉五【原禮】 외지고 누추한 호남 구석의 진부한 늙은이가 무슨 영향력이 있기에, 먼저 편지를 보내주신 은혜를 베푸시면서, 이처럼 친절하고 정성스럽습니까? 저는 그대 스승과는 외람되이 동문의 교분이 있지만 버림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옛 친구는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121) 어찌 조금이라도 견줄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스승의 벗인 까닭으로 나에게 문안하는 것이라면 혹 괜찮겠지만 만약 그대의 스승을 섬겼던 것처럼 나를 섬기겠다고 한다면 실정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이 점점 험난해지고 스승의 학설이 분열되어서, 후배인 젊은 학생이 향해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그대는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선생과 같은 스승을 구해 섬겨서, 밤낮으로 조용히 주도면밀하게 계도해주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것은 이 시대의 좋은 만남일 것입니다. 그대도 역시 마땅히 이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어도, 간혹 지향하는 것이 바르지 않고 식견이 고르지 않아서 편벽되고 방탕하게 되는 귀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스승을 선별하지 않아 초래된 까닭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학문에 힘쓰는 것은 스승을 구하는 데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스승을 구했다면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조예가 얕고 깊어지는 것은 다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僻陋湖隅一腐朽。何足爲有無。而乃蒙執事者先施之惠。若是鄭重耶。愚於尊師門。猥有同門之契。而至見不棄者。以故舊之不寁也。豈可有萬一之比況哉。執事以師之友而見存。則或可而若事之如所事云耳。則非其情矣。如何如何。目今世路低險。師說分裂。後生小學。莫適所向。惟執事得師如艾山先生而事之。日夕從容。誘掖周至。此是今日之好際會。執事亦應如此否。人雖有志於學。而或趨向不正。見識不平至不免爲詖淫之歸者。無非所以不擇師之致也。古人所謂務學不如務求師者。非此義耶。執事旣已得之。則幸之又幸。而所造淺深。只在自己之勉不勉如何耳。 옛 친구는 …… 때문일 뿐입니다 《시경》 〈준대로(遵大路)〉에서 "큰길에 달려 나가 그대의 소매를 부여잡았노라. 나를 미워하지 말지어다. 옛 친구를 갑자기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遵大路兮, 摻執子之袪兮. 我無惡兮, 不寁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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