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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에 무인년(1938) 五月五日【戊寅】 때마침 오월 오일이라 時當五月五부들 푸르고 앵두가 처음 익었네 蒲綠櫻初熟사람들은 모두 명절을 기뻐하는데 人皆喜佳節누굴 위해 나는 미간을 찌푸리나 爲誰余頞蹙예전에 삼려대부가 충간했다가 在昔三閭忠참소 때문에 추방을 당했는데 以讒見斥逐조국의 멸망을 통한으로 여겨 痛恨宗國亡이날 물고기 뱃속에 장사했네1) 此日葬魚腹〈이소〉와 〈구가〉2)에서는 離騷與九歌글자마다 한 움큼 눈물 뿌렸는데 字字淚盈掬굴원을 경모하는 회옹을 만나 敬慕遇晦翁주해를 지어 읽게 되었네3) 至作註解讀아, 나는 간재 선생의 문인으로 嗟余于艮門삼려대부와 몹시 닮았으니 三閭相似酷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고친 것은 誣師與改稿그 죄가 형벌을 받아 마땅하네 厥罪宜法伏기강이 하나같이 무너졌으나 綱紀一以墮누가 감히 조금이라도 범하랴 誰敢毫髮觸내가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한 채 余不自量力분변하고 토론하여 두 눈 밝혔으나 辨討明雙目죄는 도리어 공훈이 되었고 罪反爲勳勞바름은 결국 사특함으로 돌아갔네 正乃歸邪曲비유하자면 초나라 조정에서 譬彼鄢郢朝충신과 간신의 상하가 바뀐 것 같고 忠佞到首足게다가 거기에 호응하는 자들은 亦復同聲者권세를 좇아 기회주의자가 되었네 趨勢爲蝙蝠천여 명이나 되는 수많은 무리에서 林林千餘徒혈혈단신 나 혼자뿐이었으니 孑孑惟余獨그동안에 당한 일신의 재앙은 其間一身禍말하자니 오싹 소름이 생기네 言之寒生粟천추에 스승의 도가 없어졌으니 千秋師道亡생각하면 마음이 쓰디쓰네 念之心荼毒옛사람이 먼저 터득하지 않았던가 古人先獲否한번 죽더라도 원하는 걸 하겠다고 一死寧所欲다만 두려운 건 중도에 지나치면 但恐過中處훗날 의론이 심해진다는 점이네 不無後論篤삶과 죽음은 규모가 다르지만 生死殊規模맑음과 깨어있음은 궤폭이 같으니 淸醒一軌輻명백히 분변한 수많은 서적이 多少明辨書깊은 산골에 보관되어 있네 藏在深山谷유유하게 백세가 지나고 나면 悠悠來百世나를 알아줄 사람은 누구일까 知我復有孰시절을 느끼고 고금을 슬퍼하며 感時傷今古시 짓고서 공연히 세 번 반복하네 詩成謾三復 時當五月五, 蒲綠櫻初熟.人皆喜佳節, 爲誰余頞蹙?在昔三閭忠, 以讒見斥逐.痛恨宗國亡, 此日葬魚腹.《離騷》與《九歌》, 字字淚盈掬.敬慕遇晦翁, 至作註解讀.嗟余于艮門, 三閭相似酷.誣師與改稿, 厥罪宜法伏.綱紀一以墮, 誰敢毫髮觸?余不自量力, 辨討明雙目.罪反爲勳勞, 正乃歸邪曲.譬彼鄢郢朝, 忠佞到首足.亦復同聲者, 趨勢爲蝙蝠.林林千餘徒, 孑孑惟余獨.其間一身禍, 言之寒生粟.千秋師道亡, 念之心荼毒.古人先獲否? 一死寧所欲.但恐過中處, 不無後論篤.生死殊規模, 淸醒一軌輻.多少明辨書, 藏在深山谷.悠悠來百世, 知我復有孰?感時傷今古, 詩成謾三復. 삼려대부(三閭大夫)가……장사(葬事)했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 기원전 343~기원전 277)이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으나 뒤에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참언에 의해 면직되었다가 다시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湘水)로 추방당했다.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10년간 방랑 생활을 하였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조국인 초나라가 멸망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별세하였다. 이소(離騷)와 구가(九歌)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의 편명(篇名)이다. 모두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뜻을 담고 있다. 굴원(屈原)을……되었네 주희(朱熹)가 《초사(楚辭)》를 주해하여 《초사집주(楚辭集註)》를 엮은 것을 말한다. 그는 〈초사집주서(楚辭集註序)〉에서 "굴원의 사람됨은 그 뜻과 행동이 비록 중용(中庸)을 벗어나 모범을 삼을 수는 없으나 모두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그 충성을 칭송하였다. '회옹(晦翁)'은 주희의 만년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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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절의 〈수미음〉에 차운하다 11수 次康節《首尾吟》【十一首】 강절의 시에 화락한 흥취가 많고 내 시에 우려하고 탄식하는 뜻이 많은 것은 참으로 소양(所養)의 깊이와 자득(自得)의 유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절이 태평하여 아무 일도 없는 날을 만나고 내가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진 때를 당한 것도 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세에 논하는 자가 혹 성정(性情)의 바른 데로 똑같이 돌아간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무인년(1938) 5월 모일에 짓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세상을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世時운수가 다시 오지 않아 이제 끝이 났으니 運不復來今已矣짐승과 함께 살기 어려우니 나는 어디로 갈까 獸難同處我何之비록 해는 여전히 길이 비춰준다고 하지만 縱云白日猶長照한스럽게도 광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네 可恨狂風不盡吹한 선비가 누구와 함께 하늘에 간쟁할까 一士爭天誰與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도를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道時명분 이치는 분분히 언쟁으로 돌아가고 名理紛紛歸口舌선비4)들은 하나하나 기만에 익숙하네 縫章箇箇慣誣欺어찌 학계가 이렇게 어지러울 줄 짐작했으랴 豈料學界斯乖亂순박한 풍속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없네 無路淳風可反移오늘날 참된 선비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니 切願眞儒生此日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학문을 걱정한 때라네 詩是後滄憂學時타고난 자질은 원래 중간 이하인데도 賦質元來中下也공부할 때에 백 배 천 배를 하지 않네 用功又不百千之마음 터놓고 잡초 제거할 계책이 없고 開胸無計去茅塞욕심에 빠져 항상 물가에 임하듯 위태롭네 陷慾常危臨水湄노년에 힘써 두려워할5) 것은 이것뿐이니 乾惕餘年惟此已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분수에 편안한 때라네 詩是後滄安分時세도의 흥망은 하늘의 명에 달려있으나 世道廢興天有命심신의 치란은 스스로 기미를 보아야 하네 身心治亂自觀機구렁텅이6)가 앞에 있음을 잊지 않았거니 不忘溝壑前頭在참된 미치광이 남겨둔 걸 훗날에 알리라 留與眞狂異日知사물에 각기 부여한 걸 내 어찌 참견하랴 物各付之我何預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가소로워한 때라네 詩是後滄堪笑時염자는 계강자 곳간 늘려주는 걸 당연시 했고7) 冉子宜其增季廩소진은 망녕되이 아내가 베틀에서 내려오길 바랐네8) 蘇秦妄欲妻下機사람은 권세와 이익 좇아 혼백이 혼미해지고 人趨勢利迷魂魄귀신은 금전을 따라 지휘를 들어주네 鬼逐金錢聽指揮지금이나 예나 유유하게 이와 같으니 今古悠悠如此已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고립되었을 때라네 詩是後滄孤立時벗들의 평소 지식은 이미 그만두었고 已息交朋平日識심사를 하늘이 알아주기만 바라네 但求心事上天知《역상》9)의 두려울 것 없음을 살펴보려고 欲觀易象無攸懼먼저 《대학》의 자신 속이지 않음에 힘쓰네 先務曾經毋自欺오직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이르니 惟有淸風明月到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노쇠해졌을 때라네 詩是後滄衰老時갖가지 질병이 항상 증세를 더해가니 百般疾病恒添祟일체 영위하는 것에 기심10)을 없앴네 一切營爲幷息機이 몸을 수양하며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修得此身惟待死앞길이 공연히 기로에 임하지 않게 하리 免敎前路枉臨岐지난날을 추억하면 한바탕 꿈과 같으니 追憶經過如一夢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깊이 들어갔을 때라네 詩是後滄深入時천지가 뒤집혀 의관과 신발이 바뀌었고 天地飜傾易冠屨윤리 강상이 뒤섞여 헝클어진 삼실 같네 倫綱紛錯亂麻絲당시에 동해에서 머리털을 보존했을 뿐이니 當年東海惟存髮어느 곳 도원에서 옷을 바꾸지 않을까 何處桃源不改衣바로 지금은 당연히 이것 밖에 없으니 目下當然無此外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이치를 연구할 때라네 詩是後滄硏理時인물의 근원에는 오직 성만 있으니 人物源頭惟性在공부의 전체는 모두 마음이 한다네 工夫全體總心爲성경이 철저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고 敬誠到底方收效격치가 정밀해야 비로소 의심을 없애네 格致精來始去疑실행을 잘하고 못하냐에 달렸을 뿐이니 只在行之能否爾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분명하게 분변한 때라네 詩是後滄明辨時성은 중인, 마음은 임금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性衆心君是何說중화인과 오랑캐 짐승은 정히 의심할 것 없네 華人夷獸定無疑거짓과 진실은 천추의 눈 가리지 못하고 假眞難掩千秋眼승패는 한 판의 바둑과 동일하지 않네 勝敗非同一局棋심문과 신사11)가 모두 이것을 위해서니 審問愼思都爲此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後滄非是愛吟詩시는 바로 후창이 요체를 알아낸 때라네 詩是後滄知要時기절이 사람 놀래키는 것이 큰 것 아니고 氣節驚人非大者문장이 세상에 빛나는 것도 사소한 일이네 文章耀世亦些兒어찌 정일의 심법12)을 지니는 것만 하랴만 豈如精一持心法절로 영화가 있어 얼굴에 윤기가 돈다네13) 自有英華睟面眉이에 이르러야만 할 일을 마쳤다고 하니 到此方爲能事畢후창은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後滄非是愛吟詩 康節詩多和樂之趣, 余詩多憂歎之意, 是固所養淺深自得有無之異.然康節遇太平無事之日, 余當國亡道喪之際, 亦時然也.後之論者, 或可視以同歸情性之正也歟! 戊寅榴夏日.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世時.運不復來今已矣, 獸難同處我何之?縱云白日猶長照, 可恨狂風不盡吹.一士爭天誰與此?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道時.名理紛紛歸口舌, 縫章箇箇慣誣欺.豈料學界斯乖亂? 無路淳風可反移.切願眞儒生此日,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憂學時.賦質元來中下也, 用功又不百千之.開胸無計去茅塞, 陷慾常危臨水湄.乾惕餘年惟此已,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安分時.世道廢興天有命, 身心治亂自觀機.不忘溝壑前頭在, 留與眞狂異日知.物各付之我何預?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堪笑時.冉子宜其增季廩, 蘇秦妄欲妻下機.人趨勢利迷魂魄, 鬼逐金錢聽指揮.今古悠悠如此已,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孤立時.已息交朋平日識, 但求心事上天知.欲觀《易象》無攸懼, 先務曾經毋自欺.惟有淸風明月到,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衰老時.百般疾病恒添祟, 一切營爲幷息機.修得此身惟待死, 免敎前路枉臨岐.追憶經過如一夢,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深入時.天地飜傾易冠屨, 倫綱紛錯亂麻絲.當年東海惟存髮, 何處桃源不改衣?目下當然無此外,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硏理時.人物源頭惟性在, 工夫全體總心爲.敬誠到底方收效, 格致精來始去疑.只在行之能否爾,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明辨時.性衆心君是何說? 華人夷獸定無疑.假眞難掩千秋眼, 勝敗非同一局棋.審問愼思都爲此, 後滄非是愛吟詩.後滄非是愛吟詩, 詩是後滄知要時.氣節驚人非大者, 文章耀世亦些兒.豈如精一持心法? 自有英華睟面眉.到此方爲能事畢, 後滄非是愛吟詩. 선비 원문의 '봉장(縫章)'은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로서 선비의 의관(衣冠)을 말한다. 봉액은 의복의 한 종류이고 장보는 관(冠)의 한 종류이다. 공자가 어린 시절 노(魯)나라에 살 때는 봉액을 입고, 자란 뒤에 송(宋)나라에 살 때는 장보를 썼다. 《禮記 儒行》 힘써 두려워할 원문의 '건척(乾惕)'으로, 항상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조심하며 자기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써 저녁에도 삼가고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 하였다. 구렁텅이 원문의 '구학(溝壑)'으로 산골짜기나 계곡을 말하는데, 떠돌다가 객사한 장소나 곤궁한 처지를 뜻한다. 염자(冉子)는……했고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가 권력자인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이 된 뒤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그의 재산을 늘려 주자, 공자가 크게 노하여 제자들에게 "그는 더 이상 우리 무리가 아니니, 자네들은 북을 울려 성토하며 그를 공격해도 좋다.〔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라고 말하였다. 《論語 先進》 소진(蘇秦)은……바랐네 전국 시대 소진이 집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베틀에서 내려와서 그를 예로써 맞아주지도 않더니, 뒤에 육국(六國)의 재상이 되어 돌아오자 아내를 비롯한 온 집안사람이 소진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秦策上》 역상(易象) 《주역》을 설명한 단사(彖辭)와 효사(爻辭)인데, 주 문왕(周文王)과 주공(周公)이 각각 지었다고 전한다. 기심(機心) 자기의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말한다. 심문(審問)과 신사(愼思) 자세히 따져서 묻는 것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중용장구》 제20장에서 군자가 성(誠)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박학(博學)ㆍ심문ㆍ신사ㆍ명변(明辨)ㆍ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정일(精一)의 심법(心法) 인심(人心)은 사욕에 빠지기 쉽고 도심(道心)은 밝아지기 어려우므로 정(精)으로 도심을 보존하여 기르고, 일(一)로 인심을 성찰하는 수양법이다.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하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얼굴에 윤기가 돈다네 군자의 내면에 축적된 것들이 넘쳐서 몸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드러나는 빛이 얼굴에 윤택하게 나타나고 등에 가득하게 나타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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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산에게 부쳐 보내고 화답을 구하다 寄鄭敬山求和 해와 달14)은 분분하게 번갈아 날고 달리는데 烏兔紛紛迭走飛걸핏하면 해를 넘기도록 서신을 보내지 못했네 音書動輒隔年違강가에서 읊조리는 나는 몰골이 어찌 수척하나 我吟江上形何槁산중에 은둔한 그대는 몸이 절로 살이 쪘네 子遯山中體自肥한번 죽고 곰 발바닥 택한 맹자15) 들어보았고 一死取熊聞孟聖오래 살다가 학으로 변한 정위16)는 가소롭네 久生化鶴笑丁威서로 닦는 걸 늘그막에도 저버린 적 없었으니 交修晩節無相負이것 이외에는 더이상 바랄 것이 아니네 此外非曾更有希 烏兔紛紛迭走飛, 音書動輒隔年違.我吟江上形何槁? 子遯山中體自肥.一死取熊聞孟聖, 久生化鶴笑丁威.交修晩節無相負, 此外非曾更有希. 해와 달 원문의 '오토(烏兔)'는 일월(日月)의 별칭이다. 신화에 해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는 옥토끼가 있다고 하여 해와 달을 가리켜 오토라고 한다. 좌태충(左太冲)의 〈오도부(吳都賦)〉에 "하늘에 올라 해와 달 속의 까마귀와 토끼를 잡고, 날짐승과 길짐승의 소굴을 모두 뒤진다.〔籠烏兔於日月, 窮飛走之棲宿.〕"라는 구절이 있다. 《文選 第5卷》 한번……맹자(孟子) 맹자가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오래……정위(丁威) 정위는 한(漢)나라 때 요동 사람 정 영위(丁令威)의 약칭이다. 그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선술(仙術)을 배우고 뒤에 백학(白鶴)으로 변화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을 가지고 그를 쏘려 하자, 그 학이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면서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 영위가,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 같은데 사람은 그때 사람 아니어라, 어이해 신선 안 배우고 무덤만 즐비한고."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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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 황공8) 정려중수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 아, 이곳은 고(故)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명신(名臣)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여 처음에는 효건(孝蹇)으로, 뒤에는 충건(忠蹇)으로서 끝내 대방성(帶方城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는 날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킬 수 있었으니, 지극한 행실과 큰 절개, 곧은 충정과 위대한 공열은 천하에 강상(綱常 삼강오륜)을 부지하고, 백세토록 나약하거나 완악한 사람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적(事蹟)의 대략적인 내용은 야사(野史)와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굳이 중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종(正宗 정조(正祖)) 을묘년(1795)에 정려문을 세우라는 임금의 명으로 7세손 진규(鎭奎)가 여러 종친과 함께 처음 건립하였고, 97년 뒤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오년(1894)에 추증(追贈)의 은전을 받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현판을 고쳐 써서 게시하는 것과 단청을 새롭게 칠하는 꾸밈은 9세손 간(柬)이 주관하였다. 14년 뒤 정미년(1907)에 세월이 오래되어 목재가 썩게 됨에 따라 무너지는 우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고쳐 건립하여 완전히 새롭게 하였으니, 10세손 경현(慶炫)과 12세손 열주(悅周)가 여러 종친들에게 제창(提唱)하여 중수한 것이다.아,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져 온 천하가 닫히고 막혔으니, 공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도 이 일을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중건이 애당초 세상의 교화를 돕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嗚乎。此故宣廟朝名臣兩蹇堂黃公忠孝褒旌之閭也.公事親至孝。事君盡忠。始以孝蹇。後以忠蹇。卒能殞身立。慬於帶方城陷之日。至行大節。貞忠偉烈。足以扶綱常於天下。起懦頑於百世。若其事蹟梗槩。野史國乘。昭載備錄。此不必架疊焉。至正宗乙卯。棹楔成。命七世孫鎭奎與諸宗創始之。後九十七年。今上甲午。承贈貤之典。因以改題揭板及新丹雘之飾。蓋九世孫柬尸之也。後十四年丁未。以歲久材朽。慮有頽圮之患。將改建而一新之。蓋十世孫慶炫十二世孫悅周。倡諸宗而經營之也。嗚乎。世衰道微。九野閉塞。未知公之忠魂義魄。其亦有以鑑此耶。今日之重建。未始非裨補世敎之一助云爾。 양건당 황공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황대중(黃大中, 1551~1597)으로, 양건당(兩蹇堂)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정숙(正叔)이며, 전라남도 강진(康津) 출신이다.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 약재로 사용하면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효건(孝蹇)이라는 호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해상 전투 중 총탄을 맞아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절게 되자 이순신으로부터 "효건(孝蹇)이 이제 충건(忠蹇)이다."라는 찬탄을 받으며 효건과 충건, 즉 양건당으로 불려졌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남원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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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모선록》 서문 曺氏慕先錄序 스스로 생각건대, 서계(書契)147) 이후로 예전의 말과 지나간 행적들을 모두 갖추어 기록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서 서적을 겹겹이 쌓아 놓으며 그 많음을 싫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읊고 외우면서 그 익숙함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현인을 사모하는 마음은 타고난 본성에서 나와 그치지 않음이 이와 같다.아, 옛날의 현인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선조(先祖)에게 법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칭송하며 기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공류(公劉)의 풍화(風化)에 대한 기술148)이 자기의 집에서 나오고, 공백(龔伯)의 술동이나 대접에 새겨진 명(銘)149)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다면 작게는 보존하여 한 집안의 계책과 교훈으로 삼고, 크게는 전하여 한 시대의 모범과 법식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효자와 어진 사람의 마음이다.나의 벗 조군 석준(曺君錫俊)이 선대의 사실을 기록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조씨(曺氏)는 충의(忠義)의 큰 절개와 효우(孝友)의 지극한 행실로 혹 나라에서 빛나기도 하고, 혹 고을에서 드러나기도 한 것이 전후로 수백 년이 되었지만, 유고(遺稿)가 흩어져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 자손들이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사라지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유실된 것들을 수습하여 세고(世稿)를 편집해 만들고서 길이 전할 계책으로 삼았다.아, 자손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근본을 사모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과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이어 나갈 생각이 어찌 성대하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로 인하여 더욱 힘써서 자신을 맑게 하여 안으로는 가족을 보호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며, 밖으로는 세상을 일깨우고 세속에 모범이 된다면, 이 책이 어찌 한 가문의 건연(巾衍 서적을 넣어두는 상자) 속에서 전해지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自惟書契以來。凡前言往行。無不備錄。連編累牘而不厭其多。朝吟暮誦而不厭其熟。蓋慕賢之心。出於秉彛而有不可已者如此。嗚呼。在先賢猶然。況在先祖而有可以爲法焉。則所欲稱述者。其心爲何如哉。公劉風化之述。出於其家。龔伯尊敦之銘。不在他人。小則存以爲一家之謨訓。大則傳以爲一世之矜式。此孝子仁人之心也。余友曺君錫俊。持其先世事實一冊。請余弁之。竊惟曺氏以忠義大節。孝友至行。或光于王國。或著于鄕里者。前後數百年矣。遺稿散逸。存者無幾。子孫懼其愈久而愈泯。收拾遺漏。編成世稿。以爲不朽計。嗚呼。爲子孫而讀此書。其懷本追遠之情。繼志述事之意。豈不油然而生乎。因此加勉以淑其身。內而保族宜家。外而牖世範俗。則此書豈止爲一門巾衍之傳而已哉。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문자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공류(公劉)의……기술 공류는 후직(后稷)의 증손으로, 하(夏) 나라의 박해를 피해 빈(豳)으로 이주한 뒤에 후직의 유업을 닦아 농사에 힘쓰며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훗날 주(周)나라가 일어날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주나라가 창업된 뒤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에 공류의 풍화(風化)를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 기록하여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였다. 여기에서는 세속의 교화에 공헌한 선조의 기록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공백(龔伯)의……명(銘) 원문의 "공백준대지명(龔伯尊敦之銘)"을 국역한 것으로, 선조가 사용하던 그릇이나 물건에 새겨 놓은 글을 비유하는 말인 듯하다. 참고로 원문의 "공백준대(龔伯尊敦)"는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주에 "옛 기물에 이르기를. '?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감히 아름다운 천자의 명을 대양(對揚)하여 짐의 황고(皇考)인 공백(龔伯)의 술동이와 대접을 받드노니, ?은 미수(眉壽)를 누려 만수무강하게 하소서' 하였다.[古器物銘云 : '?拜稽首, 敢對揚天子休命, 用作朕皇考龔伯尊敦, ?其眉壽, 萬年無疆.']"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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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기 詠歸亭記 지난 정해년(1887) 가을에 나는 여러 벗들의 뒤를 따라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에서 바람을 쐬고 영강(映江)에서 목욕하고서 읊조리며 부춘(富春)의 들녘으로 돌아왔다.1) 이로 인하여 규약을 만들어서 봄가을에 모여 강습하는 일을 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고, 의례가 번다했기 때문에 큰 마을에 소속시켜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고, 한가로운 들녘을 택해 베풀어 행하였는데, 이를 설행한 지 조금 오래되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자, 촌마을의 재력으로는 계속 이어가기 어렵고, 들녘의 장소는 대부분 햇볕에 노출되어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신묘년(1891) 9월 용리(龍里)의 모임에서 집을 짓자는 의론이 제기되어 임진년(1892) 봄에 칠송(七松) 마을에 터를 잡고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겨울 12월에 낙성하였는데, 방과 대청, 문, 행랑 등이 반듯하고 치밀한데다 크고 넓어서 거처할 만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빈한한 선비들의 쇠잔한 힘으로 고생스럽게 부지런히 힘써 모아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성취를 보게 된 것인데, 그 뜻이 장차 무엇을 위해서인가? 고요한 곳을 찾아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한 계책을 위해서인가?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돕기 위해서인가? 글을 지어 벼슬을 구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서인가?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된 도리를 구할진댄 학문이 아니면 불가하고, 학문을 하는 방도를 구할진댄 사우(師友)들이 아니면 불가하니, 사우들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말미암는 것도 또한 그 장소가 없으면 안 된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2)가 본래 인륜을 밝히고 교육을 확립시키는 곳이었지만, 삼대(三代)3) 이후로 인도하고 통솔하는 것이 예스럽지 못하였고, 또 저자와 성곽 안에서는 분주하게 다투거나 열기로 떠들썩한 뜻이 많았고, 고요하고 한가로운 정취가 적었으니, 이것이 서원(書院)이 창설된 이유이다. 그러나 서원의 규례가 또 옛날과 같지 않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선비들이 서로 교제하며 학업을 닦는 곳으로 이곳보다 훌륭한 곳이 아마도 없을 듯하다.이 정자에서 노니는 자들은 《소학》으로 기본을 세우고 《대학》으로 규모를 정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에게 공경하며, 나가서는 스승을 높이고 벗들을 가까이하며,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세우고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몸을 지키며, 강습과 토론으로 이를 밝히고 바로잡음과 경계로 이를 독려하며,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지킴을 고치지 않아서 날로 원대한 것을 궁구한다면 아래로는 가정의 법을 세우고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위로는 세도(世道)를 힘쓰게 사람들을 격려하고 나라의 영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대 학교의 유제(遺制)이고, 또한 오늘날 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뜻이다. 往在丁亥秋。余從諸友後。風乎瑞石。浴乎映江。詠而歸於富春之野。因以創設規約。爲春秋講聚之擧。始以人衆儀繁。屬鉅村輪會。擇閒野設行。行之稍久。會者愈夥。村力難繼。野處多暴。人莫不病之。辛卯九月龍里之會經室之議起。壬辰春卜地于七松之里。秋設役。越明年冬十二月落之。其房室廳堂。牑戶序廂。端密宏敝。可以爰居爰處。然是擧也。以冷士殘力。辛勤拮据。積歲積年。乃始見就者。其意將欲何爲耶。爲尋寂耽閒之計耶。爲燕飮玩戱之資耶。爲作文干進之所耶。嗚乎。士生斯世。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學問之道。非師友不可。所以親師友而道問學者。亦不可以無其所。庠序學校。固明倫立敎之地。而三代以降。導率不古。且在朝市城郭之中。多奔競熱閙之意。少寂寞寬閒之趣。此書院所由起也。然書院之規。又不如古。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遊此室者。以小學立基本。以大學定規模。入則愛親敬兄。出則隆師親友。立心以忠信。持身以端莊。講討以明之。規警以督之。不厭不改。日究遠大。則下可以立家範正鄕俗。上可以勵世道補國光。此是三代學校之遺制。而亦今日經始之意云爾。 지난……돌아왔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라는 물음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자, 공자 이를 허여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산천 유람을 표현하였다. 상ㆍ서ㆍ학ㆍ교(庠序學敎) 중국 고대의 교육기관으로, 《맹자》 〈등문공 상〉에서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하나라는 '교', 은나라는 '서', 주나라는 '상'이라고 불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다.[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 성인이 세운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요순 시대와 함께 '훌륭한 다스림이 행해졌던 시대'라는 의미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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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휴당 선생 최공4) 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옛적 임진왜란의 변고에 절개와 의리를 지키다 죽은 이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우뚝하고 꿋꿋했던 기상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천하에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백세(百世)에 회자(膾炙)되는 분으로는 삼장사(三壯士)5)처럼 더욱 성대한 이가 없었으니, 일휴당(日休堂) 최공(崔公 최경회(崔慶會))가 바로 삼장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대 사람들이 공을 위해 능주(綾州)에는 정려문(旌閭門)을 세웠고, 진주(晉州)에서는 제사를 지냈으니, 대개 능주는 공이 살았던 고향이고, 진주는 순절한 지역으로, 잊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부치는 데에 차이가 있지 않았다.임진년 가을에 진주의 선비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할 것을 도모하여 사문(斯文) 성복윤(成福閏)과 전주일(全柱一), 하용진(河龍辰)에게 부탁하여 호남으로 가서 의론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능주를 지나가다 정려문이 무너지고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 개탄하며 말하기를, "이번 발걸음은 본래 사우를 위해 계획한 것이지만, 지금 정려문이 이와 같으니, 어찌 사우만 중수하고 정려문은 중수하지 않겠는가."하고서 마침내 가던 길을 멈추고서 전대를 열어 목재를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더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아, 선생이 삼강오륜을 일으켜 세우고 명교(名敎)6)를 창도(唱導)하여 권면한 것은 그 공이 천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니, 한 지역의 정려문만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을 일으켜 마음을 부치는 데에 그 장소가 없을 수 없으니, 오늘날의 역사(役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후대 사람들이 진실로 사문(斯文)7)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이어서 이를 수리하여 그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 정려문도 선생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삼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昔在龍蛇之變。伏節死義。前後相望。而其磊磊落落。如靑天白日。輝映於天下。膾炙於百世。未有如三壯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卽三壯士之一。後人爲之棹楔於綾。俎豆於晉。蓋綾是杖屨之鄕。而晉是殉節之地也。所以寓追慕不忘之心者。靡有間焉。壬辰秋。晉之士謀修祠宇。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收議。因過綾。見旌閭頹敝。慨然曰。此行本爲祠宇計。而今旌閭如此。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遂停鞭開橐。聚材募工。不幾日而一新之。嗚乎。先生所以扶植綱常。倡勵名敎者。其功可以與天壤俱敝。非一區棹楔能輕重。然興物寓情。不可無所。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後之人。苟與斯文同志。繼以修之。無失其時。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竊有望焉。 일휴당 선생 최공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일휴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이며, 전라남도 능주(綾州) 출신이다. 양응정(梁應鼎)ㆍ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喪中)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전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와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최경회와 함께 투신 자결했던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 세 사람을 가리킨다.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儒敎)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사문(斯文) 유학(儒學)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사문'을 없애려 하였다면 내가 사문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註)에 "문은 도(道)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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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를 읽다가 '거문고와 책을 스스로 즐기다'305)는 말에 감회가 있어 讀《歸去來辭》, 感琴書自娛之語 멀리 심양306)에 살던 처사의 마음을 생각해보니 緬想潯陽處士心거문고와 책만 안고 운림307)에서 즐거워했다오 琴書獨抱樂雲林책 속의 진미를 탐닉함만 추구할 뿐이었고 只求卷裡耽眞味인세의 묘음에 맞추는 걸 원치 않았다네 不願人間和妙音장단의 곡조는 물고기가 나와 들었을 터이고308) 長短曲應聽水族글 읽는 소리는 산새 울음과 뒤섞였을 것일세 咿唔聲或雜山禽스스로 즐긴 그 깊은 뜻을 그 누가 알리오 自娛深意誰能識부질없이 거문고와 책을 가지고 찾아보노라 謾向絃篇上面尋 緬想潯陽處士心, 琴書獨抱樂雲林.只求卷裡耽眞味, 不願人間和妙音.長短曲應聽水族, 咿唔聲或雜山禽.自娛深意誰能識? 謾向絃篇上面尋. 거문고와……즐기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달랜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한 데서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卷1》 심양(潯陽) 도연명의 고향으로, 그는 팽택 영(彭澤令)의 벼슬을 버리고 심양의 율리(栗里)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운림(雲林) 구름 낀 숲이라는 뜻으로, 은거하는 장소를 비유한다.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도원행(桃源行)〉에 "당시에 산 속 깊이 들어간 것만 기억하노니, 맑은 시내 건너 몇 차례나 운림 속을 찾아갔나.[當時只記入山深, 靑溪幾度到雲林.]"라고 하였다. 장단(長短)의…… 터이고 도연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와 들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호파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물속 물고기가 나와서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여섯 마리 말이 고개를 치켜들고 들었다.[瓠巴鼓瑟而流魚出聽, 伯牙鼓琴而六馬仰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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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으로 읊다 卽事 병든 몸이 경물을 보자 감회가 앞서는데 病夫覽物感懷先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298) 또 일년이 지났네 大火西流又一年늙은 나무엔 가을 매미 울어대니 어찌 그리 쓸쓸한가 老樹殘蟬何蕭索푸른 갈대엔 흰 이슬 맺혀 있으니 더욱 처량하여라 蒼葭白露轉凄然영허299)가 윤달을 만드니 명협300)은 푸른빛이 더해지고 盈虛作閏蓂添碧보름에 밤을 맞이하니 밝은 달은 참으로 둥글도다 三五當宵月正圓맑은 창가에 고요히 앉으매 속된 일이 없으니 靜坐淸窓無俗事문득 입으로 화식을 먹지 못함을 의심하노라301) 却疑口不食人煙 病夫覽物感懷先, 大火西流又一年.老樹殘蟬何蕭索? 蒼葭白露轉凄然.盈虛作閏蓂添碧, 三五當宵月正圓.靜坐淸窓無俗事, 却疑口不食人煙.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 음력 7월이 되었음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7월에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거든, 9월에는 옷을 만들어 준다.[七月流火, 九月授衣.]"라고 하였다. 영허(盈虛)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이르는 말로,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의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주석에서 "해가 하늘과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235일이 더 많은데 이것을 기영이라 하고, 달이 해와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592일이 적은데 이것을 삭허라 한다. 기영과 삭허를 합쳐서 윤달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명협(蓂莢) 요(堯) 임금 때 섬돌 사이에 났던 상서로운 풀로,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하루에 한 잎씩 나다가 16일부터는 하루에 한 잎씩 떨어져 그믐이 되면 다 졌으며, 작은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인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득……의심하노라 자신이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신선인가 의심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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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십삼일 밤 달을 읊다 詠新春十三夜月 강 하늘 아득하여 바라봐도 끝없고 江天渺渺望無窮밝은 달은 높다랗게 하늘에 떳구나 皓月迢迢上碧空얼음으로 둥근 바퀴 만들었나 어찌 저리 맑은가 氷作圓輪何潔淨옥으로 전체를 이루었나 정말 영롱하구나 玉成全體正玲瓏달빛이 서재 촛불에 더해지니 서생은 깨이고 光添芸燭醒書客달그림자 매화 가지에 들어오니 화공이 고뇌하네 影入梅梢惱畵工십오일 밤에 풍년을 점치기엔 아직 이르니 尙早占豊三五夜시골 노인은 등한하여 함께 하지 않는다네 等閒野老不曾同 江天渺渺望無窮, 皓月迢迢上碧空.氷作圓輪何潔淨, 王成全體正玲瓏.光添芸燭醒書客, 影入梅梢惱畵工.尙早占豊三五夜, 等閒野老不曾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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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하에게 주다 贈趙澈夏 객을 맞아 서재에서 기쁘게 주렴 걷으니 迎客書樓喜捲簾푸른 강의 흰 돌들이 길에 촘촘하구나 滄江白石路纖纖정성스레 찾아온 그대의 뜻 알겠으니 慇懃相問知君意얼음 추위를 열흘이나 가하지 말게나226) 莫把氷寒十日添 迎客書樓喜捲簾, 滄江白石路纖纖.慇懃相問知君意, 莫把氷寒十日添. 얼음 …… 말게나 학문을 꾸준히 하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비록 천하에 쉽게 자라는 물건이 있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어 주고 열흘 동안 춥게 한다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것이 없다.[雖有天下易生之物也, 一日暴之, 十日寒之, 未有能生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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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378)에게 주어 면려하다 贈勉觀兒 너를 가르친 지 여러 해 되어 기대가 큰데 敎汝多年期待深외부의 사사로움이 침범할까 항상 두렵구나 外私常恐或來侵가까이 네 아비를 스승 삼기에 부족하더라도 近師乃父雖無足위로 가문의 명성 이으면 마음 세울 수 있으리 上述家聲可立心세상에 자랑하는 조충379)의 기예 부끄러워하고 衒世堪羞雕蟲技사람을 놀래키는 노룡380)의 울음소리 내야하리 驚人應作老龍吟그 원천은 바로 성실과 근면에 있나니 源頭正在誠勤上콸콸 터지는 강하를 누가 또 막겠느냐 沛決江河孰復禁 敎汝多年期待深, 外私常恐或來侵.近師乃父雖無足, 上述家聲可立心.衒世堪羞雕蟲技, 驚人應作老龍吟.源頭正在誠勤上, 沛決江河孰復禁. 관아 김택술의 삼남인 형관(炯觀)을 말한다. 자는 극부(克孚), 호는 건암(健菴)ㆍ기산(麒山)이며, 기린정사(麒麟精舍)를 세우고 남고(南皐)서원ㆍ동죽(東竹)서원ㆍ고부문묘(古阜文廟)의 장의(掌議)를 하였다. 조충(雕蟲)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이다.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재주라는 뜻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오자(吾子)〉에 "부라는 것은 동자 시절에나 했던 조충전각과 같은 일로서, 장부가 되어서는 하지 않았다.[賦者, 童子雕蟲篆刻, 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노룡(老龍) 문단의 대가를 비유한 말이다. 송대(宋代) 용도각(龍圖閣)의 대제(待制)를 소룡(小龍), 직학사(直學士)를 대룡(大龍), 학사(學士)를 노룡(老龍)이라 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泊宅編 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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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다시 짓다 是夜更賦 보리술 두 병에다 과자 안주를 놓고서 麥酒雙甁菓子肴달빛 난간에 둘러 앉아 모두 깊이 사귀네 月欄團坐總深交이슬이 젖어 풀 벌레 소리가 새로 더하고 露滋草蛩新添響밤이 깊어 숲 새들은 이미 둥지에 깃들었네 夜久林禽已定巢옛 학문은 도리어 젊은이에게 의지해야하니 舊學還宜資少輩처음 마음은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하네 初心莫使負終梢시를 줌은 성병495)이나 다투려는 게 아니니 贈詩不是爭聲病한수를 도교에게 묻는 게 무슨 상관이랴496) 寒瘦何關問島郊 麥酒雙甁菓子肴, 月欄團坐總深交.露滋草蛩新添響, 夜久林禽己定巢.舊學還宜資少輩, 初心莫使負終梢.贈詩不是爭聲病, 寒瘦何關問島郊. 성병(聲病) 시부(詩賦)를 지을 때 평자(平字)와 측자(仄字)를 규칙에 따라 골라 써서 성조(聲調)를 맞추는 병폐인데, 여기서는 시 짓는 솜씨의 의미로 쓰였다. 한수를 …… 상관이랴 시의 형식적인 면을 따지지 말고 내용을 잘 살피라는 뜻이다. 원문의 '한수(寒瘦)'는 시풍이 청한하고 파리함을 말한 것이고, '도교(島郊)'는 가도(賈島)와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이 일찍이 당인(唐人)의 시풍(詩風)에 대하여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평론하기를 "원진의 시는 경박하고, 백거이의 시는 비속하며, 맹교의 시는 청한하고, 가도의 시는 파리하다.[元輕白俗, 郊寒島瘦.]"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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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견【규원】에게 답함 答金文見【奎源】 이보다 앞서 인편이 출발하였는데 모두 화급(火急)하여 단지 한 폭의 편지만 써서 여러 형이 돌아가면서 보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소략하기는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뜻밖에 여러 형의 편지를 받았는데 각각 수백언(數百言)이나 되었습니다. 펼쳐 본 뒤 부지런함과 태만함이 서로 현격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에 대한 칭찬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어찌 아우에게 그런 면이 있겠습니까. 한마디 말로 백대(百代)를 넘어 서로 감동하는 자가 있건만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하면서 두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은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아우가 어찌 다시 훈계를 할 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자연히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춘 대가가 있을 것입니다. 등잔을 밝히고 새벽을 잇는다는 것은 전한 사람의 망녕된 말입니다. 예전에 익힌 학업은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지식은 이어지지 않고 그저 오래도록 세월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양(涵養) 운운하신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대체로 공부(功夫)는 동(動)과 정(靜)을 통합하여 말하는 것이지 적연부동(寂然不動) 한쪽만 가리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부에는 본래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때,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때, 성찰(省察)의 때가 있어 적연부동만으로 이 마음의 이치를 밝힐 수 없습니다. 또 적연부동에만 의지하면서 응접(應接)이 저절로 적절해지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아마도 이보새(伊蒲塞)의 기미와 서로 멀지 않을 것16)16) 이보새(伊蒲塞)의……것:불교의 학설에 가깝게 된다는 말이다. 이보새는 범어 upāsaka의 음역으로, 오계(五戒)를 받은 재가 남자 불교 신도를 말한다.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하며 근사남(近事男), 근선남(近善男), 청신남(淸信男),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된다.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양은 본래 학문의 본령입니다. 그러나 또한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분을 부라려서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실심(實心)으로 실천하여 날이 쌓이고 달이 거듭된 다음에야 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前此便發。擧皆火急。只擧一幅書。爲僉兄輪照計。雖涉草草。而其於力不及何哉。料外得僉兄書。各具數百言。披玩以還。甚愧勤慢之相懸也。吹噓過實。弟豈有是耶。以片言單辭。而有曠百世相感者。況竝一世而有再度往復耶。更加藥石。弟豈其人乎。天下自有一副大方可以當之者。焚油繼晷。傳之者妄也。舊業不記。新知無繼。只是悠悠玩愒而已。涵養云云。恐未穩。大抵功夫。是統動靜說。非但指寂然不動一邊說。且功夫固有存養時。有窮格時。有省察時。不可專以寂然不動。而明此心之理也。又不可專靠寂然不動。而欲應接之自得其宜也。若如此說。則與伊蒲塞氣味。恐不相遠。豈不可懼。涵養固爲學問之本領。然亦非撑眉努眼所可辦。必讀書窮理。實心踐履。日積月累而後。可以見功。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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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574)에 차운하다 次歸去來辭 무릇 간 곳이 있은 뒤에야 돌아갈 곳이 있는 법이니, 바로 도공(陶公)575)과 같은 경우이다. 나의 경우에는 애당초 간 곳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는가. 다만 귀숙(歸宿), 귀취(歸趣), 귀결(歸潔)의 취지로 이 글을 지었으니, 보는 사람들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경진년(1940) 6월 모일.돌아가자 歸去來兮인세에 살기 어려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人間難居胡不歸이미 하늘의 운수가 이와 같으니 旣天運之如此어찌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 奚怊悵而獨悲이 몸이 말세 세상에 태어나니 身叔季之末먼 옛날의 일을 따르리라 마음먹는다오 生心古昔之遠追드넓은 천지에도 용납되지 않으니 廣天地之不容어찌 우리 도가 끝내 잘못된 것이겠는가 豈吾道之終非원자의 거친 밥을 달게 여기고576) 甘原子之糠食중씨의 해진 옷을 알맞게 여기며577) 適仲氏之弊衣구복의 하찮음을 믿고 諒口腹之賤小도의의 정미함을 본다오 見道義之精微마침내 영대를 바라보니 乃瞻靈臺천군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구나578) 天君不奔형체는 그림자를 벗하고 形自友影발은 문밖을 나가지 않도다 足不出門잃은들 어찌 잃은 적이 있으랴 亡何嘗亡보존하면 참으로 보존된다네579) 存乃眞存배부름은 고기 밥상을 기다리지 않고 飽不待梁肉취함은 술동이로써 하지 않는다오 醉不以酒樽혹 날이 저물도록 말을 잊고 或竟晷而忘言느닷없이 얼굴 펴고 웃기도 하도다 忽有時而解顔담박한 맛을 진미로 여기고 味至淡而爲珍만나는 상황마다 늘 편안하다오 隨所遇而常安깊은 산에 문을 닫아걸으니 閉我門兮深山온갖 세상일과 상관없게 되도다 總萬事而無關천리의 운행은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理運渺其難測때때로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핀다네 時俯察而仰觀옛날 장저와 걸닉580) 같은 은자들은 昔沮溺之隱者고원한 곳으로 초월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超高遠而不還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는 矧今日之末梢어찌 그 기풍을 따라 배회하지 않으리오 盍趨風而盤桓돌아가자 歸去來兮조그만 방은 노닐기 좋은 곳이로다 斗室足以邀遊책속의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卷中人以爲師가르침을 구하는 동몽에 자신을 부친다오 竊自附於蒙求안자의 즐거움을 사모하고581) 慕顔聖之其樂맹자의 근심한 것을 생각하네 懷孟氏之所憂서자의 높은 풍도를 우러르니 仰徐子之高風밭에서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고582) 食其力於田疇수부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니 服秀夫之卓識애주에서 《대학》을 강학했다오583) 講大學於崖舟진실로 이로써 일생을 마치고 固以此而終身죽어도 고향을 잊지 않으리라 死猶不忘首丘세상이 끝없이 변화함을 보건대 相世變之罔極어찌 그리 도도하게 흘러가는가 何滔滔之一流만약 입에 올린다면 말이 추잡해지니584) 所可道也甚醜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도다 不忍言兮且休그만두어라 己矣乎만년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되리오 桑楡晩景能幾時하고자 해도 일삼을 게 없고 欲爲兮無所事가고자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欲往兮何所之어버이의 남긴 몸을 받들어 스스로 깨끗이 하니 奉親遺而自潔타고난 것 온전히 지킴을 기약할 수 있도다 全天賦之可期세상길의 험난함을 보지 않고 不見世路荊棘오직 밭을 김매는 데 마음을 다하리라 惟勤心田耘耔남들이 비웃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니 任他人口笑罵뱃속에 들어 있는 시서에 부끄럽지 않아라 無愧腹中詩書이것이 진제585)로 돌아가는 것이니 是爲歸來眞諦당장 행해야 할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目下當行復奚疑○후창(後滄) 김공(金公)이 돌아가신 이듬해에 그 문인(門人)이 세상에 공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공의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에 대해 짧은 말이나마 해 달라고 말하였다. 내가 공에게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삼가 생각건대, 공의 고명한 자질과 탁월한 뜻은 진실로 이미 절륜한데, 마침내 구산(臼山 전우(田愚)) 선생에게 질정하러 나아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뜻을 들어 체득하고 온축하며 각고로 노력하고 오랫동안 쌓아 나감으로써 식견과 마음에 보존한 것이 또다시 공정(公正)하고 정밀해졌다. 그러므로 발휘되어 문장을 이룬 것이 간결하고 명쾌하며 곡절 있고 통창하였다.그 성리설(性理說)의 미묘함을 분석하고 학문의 핵심을 밝힌 것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형용해서 모두 극치에 이르렀고, 의리와 이욕의 분계를 논한 것은 추상처럼 엄격하여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과 왕복하여 논변할 때에는 묻기를 좋아하는 도량과 아집을 버리는 용맹함이 말뜻에 넘쳐났다. 그러한데도 이치와 일이 혹 어긋날까 염려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도를 강구하여 대심중생(大心衆生)586)의 바람이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도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공의 체용(體用)이 이에 갖추어졌다.아아, 공은 시운이 험난한 때에 태어나 궁벽한 산과 끊어진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겨 의리를 지키며 자정(自靖)하는 것을 궁극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차 뜻과 사업은 펴지 못하겠지만 세교(世敎)의 책임은 사양할 수 없었으니, 입언(立言)하고 책을 저술하여 선(善)을 돕고 악(惡)을 억누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현의 도(道)와 생민의 강상(綱常)이 모두 다 실추되지 않게 하는 것도 공이 고심했던 바이다.그런데 사문(師門)의 무함하는 변고가 또 동문(同門) 안에서 일어나 인심을 헤아릴 수 없고 화기(禍機)가 번갈아 임박하였는데, 공은 만 길 절벽처럼 우뚝 서서 통렬하게 변론하고 준엄하게 논척함으로써 사도(師道)를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하였다. 이를 좋아하지 않은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공격하여 비록 공의 몸을 곤욕스럽게 하였지만, 끝내 가릴 수 없었던 것은 공이 주송(朱宋)587)의 대의를 본받은 점이다. 후세에 이 유집을 읽고 감회가 이는 자들은 그래도 공이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고 사문(師門)의 통서가 공을 의뢰하여 전해질 수 있었음을 알 것이다.을미년(1955) 동짓날에 안동(安東) 김노동(金魯東)이 쓰다. 有所往而後有所歸, 若陶公是也.余則初無所往, 安有所歸? 但以歸宿歸趣歸潔之意, 作此辭, 覽者諒之.庚辰六月日.歸去來兮, 人間難居胡不歸?旣天運之如此, 奚怊悵而獨悲?身叔季之末, 生心古昔之遠追.廣天地之不容, 豈吾道之終非?甘原子之糠食, 適仲氏之弊衣.諒口腹之賤小, 見道義之精微.乃瞻靈臺, 天君不奔.形自友影, 足不出門.亡何嘗亡? 存乃眞存.飽不待梁肉, 醉不以酒樽.或竟晷而忘言, 忽有時而解顔.味至淡而爲珍, 隨所遇而常安.閉我門兮深山, 總萬事而無關.理運渺其難測, 時俯察而仰觀.昔沮溺之隱者, 超高遠而不還.矧今日之末梢, 盍趨風而盤桓?歸去來兮, 斗室足以邀遊.卷中人以爲師, 竊自附於蒙求.慕顔聖之其樂, 懷孟氏之所憂.仰徐子之高風, 食其力於田疇.服秀夫之卓識, 講《大學》於崖舟.固以此而終身, 死猶不忘首丘.相世變之罔極, 何滔滔之一流?所可道也甚醜, 不忍言兮且休.己矣乎, 桑楡晩景能幾時?欲爲兮無所事, 欲往兮何所之?奉親遺而自潔, 全天賦之可期.不見世路荊棘, 惟勤心田耘耔.任他人口笑罵, 無愧腹中詩書.是爲歸來眞諦, 目下當行復奚疑?後滄金公旣沒之明年, 其門人刊行遺集于世, 謂余爲心期所在, 要有一言.余於公, 曾切高山之仰, 未窺其閫域, 則何能有所發揮之哉? 竊念公高明之姿、超卓之志, 固已絶倫, 迺就正臼山, 得聞天人性命之旨, 體認而蘊蓄, 刻苦而積累, 所見所存, 又復公正精密矣.故發而成文章者, 簡潔爽亮, 紆餘通暢.其剖析性理之微妙, 闡明學問之肯綮, 則毫分縷解, 形其難形, 皆極歸致至, 論義利界分, 則嚴如秋霜, 不可犯.然與人往復辨說, 好問之量、捨己之勇, 溢於意表, 猶恐理與事之或貳, 講究經濟, 大心衆生之願, 未嘗不切于燕居之中,則公之體用, 於斯備矣.嗚呼! 公生當陽九之運, 竄身於窮山斷壟之間, 以秉義自靖爲究竟.然其將志業之未伸, 而世敎之責, 有不得辭焉, 則立言著書, 扶抑尊攘, 靡極不至, 使聖賢之道、 生民之綱, 不盡墜地者, 亦公苦心之所在也.而師門之誣, 又起於同室之內, 人心叵測, 禍機交迫, 公則壁立萬仞, 痛辨嚴斥, 使師道由是而光焉.不說之徒, 譁而攻之, 雖折困公身, 而終不能掩者, 惟公師法朱宋之大義, 則後之讀斯集而興感者, 尙識其爲一世之大儒, 而師門之統緖賴而得傳也.乙未陽復節, 安東金魯東書. 귀거래사(歸去來辭) 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의 은사이며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한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공(陶公) 도연명(陶淵明)으로,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원자(原子)의……여기고 원자는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다. 그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살 때 거친 밥으로 이틀에 한 번 끼니를 때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득(自得)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중씨(仲氏)의……여기며 중씨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이 중유(仲由)인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자로를 칭찬한 말이 있다. 마침내……않는구나 영대(靈臺)와 천군(天君)은 모두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마음이 중앙의 텅 빈 곳에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리니, 이를 일러 천군이라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고 하였다. 잃은들……보존된다네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해진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말을 근거 삼아 말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은자(隱者)로, 세상일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논어》 〈미자(微子)〉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연(顔淵)이 가난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추구했던 즐거움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서자(徐子)의……살았고 서자는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를 가리킨다. 그는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면서 공검의양(恭儉義讓)과 담박명지(淡泊明志)를 숭상하였다. 《後漢書 卷35 徐穉傳》 수부(秀夫)의……강학했다오 수부는 남송(南宋) 말엽의 충신 육수부(陸秀夫)를 가리킨다. 애주(崖舟)는 애산(崖山) 일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다. 남송 말엽에 송나라 조정은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애산으로 도망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항거하였다. 당시 재상인 육수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임금인 위왕(衛王)에게 《대학장구》를 강론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론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만약……추잡해지니 《시경》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만약 말할진댄 말이 추잡해지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진제(眞諦) 불교 용어로, 세속을 초월한 참된 진리를 의미한다. 대심중생(大心衆生) 불교 용어로, 보리살타(菩提薩陀) 또는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주송(朱宋)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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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養黙爲通訓大夫行自如道察訪者道光十五年六月十九日 [施命之寶](背面)吏〃 金貞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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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3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金膺相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45년(헌종11)에 왕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45년(헌종11) 1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任命)하면서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절충장군은 당상관(堂上官)에 해당하는 무산계 정3품 상계(上階)이다. 첨지중추부사는 중추원(中樞院)에 소속된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으로 무관직(武官職)이다. 또한 오위장(五衛將)은 오위(五衛)의 군사를 통솔하던 정3품의 무관직이다. 김응상은 위 두 관직을 겸(兼)하며 임명되었다. 김응상의 오위장 임명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45년(헌종11) 1월 24일조에 "兵批 判書趙冀永進 參判李同淳病 參議金{金+弼}入直 參知李時愚病 同副承旨趙徽林進 以李若愚爲知事 李敏會爲副摠管 沈漢永爲同知 李明學·李顯稷爲宣傳官 鄭基弘 李豐圭 金膺相爲五衛將 金鍾緯 權啓綱爲景福將 張敬信爲昌德將 金熙民爲昌慶將 具洛喜爲宣傳官 閔晢爲全羅兵使 李赫爲大丘營將 李恒坤爲黃海兵虞候 上護軍朴岐壽 護軍徐英淳 李羲肇 洪儼 副護軍鄭基世 金箕祖 趙禹錫 李義純 李儒鳳 曺洛振 趙馨夏 副司直成近默 李豐翼 李鼎顯 尹載善 閔馨在 以上竝單付"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첨지(僉知) 김응상의 임명은 ?승정원일기? 1845년(헌종11) 1월 26일조에 "兵批 判書趙冀永病 參判李同淳入直進 參議金{金+弼}病 參知李時愚病 左副承旨曺錫亨進 同知金鍾緯 僉知鄭基弘 李豐奎 金膺相 護軍李圭祊 以上竝單付"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받은 고신(告身)으로 그의 부인 유인(孺人) 임씨(林氏)와 유인 양씨(梁氏)는 숙부인(淑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다. 같은 해에 김응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호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한 차례 더 고신을 받는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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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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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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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45년 유인임씨(孺人林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孺人林氏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孺人林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45년(헌종11)에 왕이 김응상의 처 유인 임씨에게 내린 고신 1845년(헌종11) 1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처(妻) 유인(孺人) 임씨(林氏)에게 숙부인(淑夫人)의 자품(資品)을 내리면서 발급한 고신(告身)이다. 김응상의 처가 숙부인에 임명된 것은, 그의 남편인 김응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임명된 데 따른 조처였다. 이 문서의 맨끝에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 依法典從夫職"이라고 적혀 있는 기록이 바로 그 의미이다. 절충장군은 당상관(堂上官)에 해당하는 무신(武臣) 정3품의 품계(品階)였으며, 숙부인도 외명부(外命婦)의 3품이었다. 한편 김응상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번에 숙부인으로 봉작(封爵)된 유인 임씨와 또 다른 부인 유인 양씨(梁氏)로, 이때 숙부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김응상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양씨는 남편 김응상과는 19살 차이가 나며, 김응상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해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처(後妻)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했던 김양묵(金養默)은 양씨와는 10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김양묵은 전처(前妻) 임씨의 소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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