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574)에 차운하다 次歸去來辭 무릇 간 곳이 있은 뒤에야 돌아갈 곳이 있는 법이니, 바로 도공(陶公)575)과 같은 경우이다. 나의 경우에는 애당초 간 곳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는가. 다만 귀숙(歸宿), 귀취(歸趣), 귀결(歸潔)의 취지로 이 글을 지었으니, 보는 사람들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경진년(1940) 6월 모일.돌아가자 歸去來兮인세에 살기 어려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人間難居胡不歸이미 하늘의 운수가 이와 같으니 旣天運之如此어찌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 奚怊悵而獨悲이 몸이 말세 세상에 태어나니 身叔季之末먼 옛날의 일을 따르리라 마음먹는다오 生心古昔之遠追드넓은 천지에도 용납되지 않으니 廣天地之不容어찌 우리 도가 끝내 잘못된 것이겠는가 豈吾道之終非원자의 거친 밥을 달게 여기고576) 甘原子之糠食중씨의 해진 옷을 알맞게 여기며577) 適仲氏之弊衣구복의 하찮음을 믿고 諒口腹之賤小도의의 정미함을 본다오 見道義之精微마침내 영대를 바라보니 乃瞻靈臺천군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구나578) 天君不奔형체는 그림자를 벗하고 形自友影발은 문밖을 나가지 않도다 足不出門잃은들 어찌 잃은 적이 있으랴 亡何嘗亡보존하면 참으로 보존된다네579) 存乃眞存배부름은 고기 밥상을 기다리지 않고 飽不待梁肉취함은 술동이로써 하지 않는다오 醉不以酒樽혹 날이 저물도록 말을 잊고 或竟晷而忘言느닷없이 얼굴 펴고 웃기도 하도다 忽有時而解顔담박한 맛을 진미로 여기고 味至淡而爲珍만나는 상황마다 늘 편안하다오 隨所遇而常安깊은 산에 문을 닫아걸으니 閉我門兮深山온갖 세상일과 상관없게 되도다 總萬事而無關천리의 운행은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理運渺其難測때때로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핀다네 時俯察而仰觀옛날 장저와 걸닉580) 같은 은자들은 昔沮溺之隱者고원한 곳으로 초월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超高遠而不還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는 矧今日之末梢어찌 그 기풍을 따라 배회하지 않으리오 盍趨風而盤桓돌아가자 歸去來兮조그만 방은 노닐기 좋은 곳이로다 斗室足以邀遊책속의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卷中人以爲師가르침을 구하는 동몽에 자신을 부친다오 竊自附於蒙求안자의 즐거움을 사모하고581) 慕顔聖之其樂맹자의 근심한 것을 생각하네 懷孟氏之所憂서자의 높은 풍도를 우러르니 仰徐子之高風밭에서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고582) 食其力於田疇수부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니 服秀夫之卓識애주에서 《대학》을 강학했다오583) 講大學於崖舟진실로 이로써 일생을 마치고 固以此而終身죽어도 고향을 잊지 않으리라 死猶不忘首丘세상이 끝없이 변화함을 보건대 相世變之罔極어찌 그리 도도하게 흘러가는가 何滔滔之一流만약 입에 올린다면 말이 추잡해지니584) 所可道也甚醜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도다 不忍言兮且休그만두어라 己矣乎만년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되리오 桑楡晩景能幾時하고자 해도 일삼을 게 없고 欲爲兮無所事가고자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欲往兮何所之어버이의 남긴 몸을 받들어 스스로 깨끗이 하니 奉親遺而自潔타고난 것 온전히 지킴을 기약할 수 있도다 全天賦之可期세상길의 험난함을 보지 않고 不見世路荊棘오직 밭을 김매는 데 마음을 다하리라 惟勤心田耘耔남들이 비웃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니 任他人口笑罵뱃속에 들어 있는 시서에 부끄럽지 않아라 無愧腹中詩書이것이 진제585)로 돌아가는 것이니 是爲歸來眞諦당장 행해야 할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目下當行復奚疑○후창(後滄) 김공(金公)이 돌아가신 이듬해에 그 문인(門人)이 세상에 공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공의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에 대해 짧은 말이나마 해 달라고 말하였다. 내가 공에게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삼가 생각건대, 공의 고명한 자질과 탁월한 뜻은 진실로 이미 절륜한데, 마침내 구산(臼山 전우(田愚)) 선생에게 질정하러 나아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뜻을 들어 체득하고 온축하며 각고로 노력하고 오랫동안 쌓아 나감으로써 식견과 마음에 보존한 것이 또다시 공정(公正)하고 정밀해졌다. 그러므로 발휘되어 문장을 이룬 것이 간결하고 명쾌하며 곡절 있고 통창하였다.그 성리설(性理說)의 미묘함을 분석하고 학문의 핵심을 밝힌 것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형용해서 모두 극치에 이르렀고, 의리와 이욕의 분계를 논한 것은 추상처럼 엄격하여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과 왕복하여 논변할 때에는 묻기를 좋아하는 도량과 아집을 버리는 용맹함이 말뜻에 넘쳐났다. 그러한데도 이치와 일이 혹 어긋날까 염려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도를 강구하여 대심중생(大心衆生)586)의 바람이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도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공의 체용(體用)이 이에 갖추어졌다.아아, 공은 시운이 험난한 때에 태어나 궁벽한 산과 끊어진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겨 의리를 지키며 자정(自靖)하는 것을 궁극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차 뜻과 사업은 펴지 못하겠지만 세교(世敎)의 책임은 사양할 수 없었으니, 입언(立言)하고 책을 저술하여 선(善)을 돕고 악(惡)을 억누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현의 도(道)와 생민의 강상(綱常)이 모두 다 실추되지 않게 하는 것도 공이 고심했던 바이다.그런데 사문(師門)의 무함하는 변고가 또 동문(同門) 안에서 일어나 인심을 헤아릴 수 없고 화기(禍機)가 번갈아 임박하였는데, 공은 만 길 절벽처럼 우뚝 서서 통렬하게 변론하고 준엄하게 논척함으로써 사도(師道)를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하였다. 이를 좋아하지 않은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공격하여 비록 공의 몸을 곤욕스럽게 하였지만, 끝내 가릴 수 없었던 것은 공이 주송(朱宋)587)의 대의를 본받은 점이다. 후세에 이 유집을 읽고 감회가 이는 자들은 그래도 공이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고 사문(師門)의 통서가 공을 의뢰하여 전해질 수 있었음을 알 것이다.을미년(1955) 동짓날에 안동(安東) 김노동(金魯東)이 쓰다. 有所往而後有所歸, 若陶公是也.余則初無所往, 安有所歸? 但以歸宿歸趣歸潔之意, 作此辭, 覽者諒之.庚辰六月日.歸去來兮, 人間難居胡不歸?旣天運之如此, 奚怊悵而獨悲?身叔季之末, 生心古昔之遠追.廣天地之不容, 豈吾道之終非?甘原子之糠食, 適仲氏之弊衣.諒口腹之賤小, 見道義之精微.乃瞻靈臺, 天君不奔.形自友影, 足不出門.亡何嘗亡? 存乃眞存.飽不待梁肉, 醉不以酒樽.或竟晷而忘言, 忽有時而解顔.味至淡而爲珍, 隨所遇而常安.閉我門兮深山, 總萬事而無關.理運渺其難測, 時俯察而仰觀.昔沮溺之隱者, 超高遠而不還.矧今日之末梢, 盍趨風而盤桓?歸去來兮, 斗室足以邀遊.卷中人以爲師, 竊自附於蒙求.慕顔聖之其樂, 懷孟氏之所憂.仰徐子之高風, 食其力於田疇.服秀夫之卓識, 講《大學》於崖舟.固以此而終身, 死猶不忘首丘.相世變之罔極, 何滔滔之一流?所可道也甚醜, 不忍言兮且休.己矣乎, 桑楡晩景能幾時?欲爲兮無所事, 欲往兮何所之?奉親遺而自潔, 全天賦之可期.不見世路荊棘, 惟勤心田耘耔.任他人口笑罵, 無愧腹中詩書.是爲歸來眞諦, 目下當行復奚疑?後滄金公旣沒之明年, 其門人刊行遺集于世, 謂余爲心期所在, 要有一言.余於公, 曾切高山之仰, 未窺其閫域, 則何能有所發揮之哉? 竊念公高明之姿、超卓之志, 固已絶倫, 迺就正臼山, 得聞天人性命之旨, 體認而蘊蓄, 刻苦而積累, 所見所存, 又復公正精密矣.故發而成文章者, 簡潔爽亮, 紆餘通暢.其剖析性理之微妙, 闡明學問之肯綮, 則毫分縷解, 形其難形, 皆極歸致至, 論義利界分, 則嚴如秋霜, 不可犯.然與人往復辨說, 好問之量、捨己之勇, 溢於意表, 猶恐理與事之或貳, 講究經濟, 大心衆生之願, 未嘗不切于燕居之中,則公之體用, 於斯備矣.嗚呼! 公生當陽九之運, 竄身於窮山斷壟之間, 以秉義自靖爲究竟.然其將志業之未伸, 而世敎之責, 有不得辭焉, 則立言著書, 扶抑尊攘, 靡極不至, 使聖賢之道、 生民之綱, 不盡墜地者, 亦公苦心之所在也.而師門之誣, 又起於同室之內, 人心叵測, 禍機交迫, 公則壁立萬仞, 痛辨嚴斥, 使師道由是而光焉.不說之徒, 譁而攻之, 雖折困公身, 而終不能掩者, 惟公師法朱宋之大義, 則後之讀斯集而興感者, 尙識其爲一世之大儒, 而師門之統緖賴而得傳也.乙未陽復節, 安東金魯東書. 귀거래사(歸去來辭) 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의 은사이며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한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공(陶公) 도연명(陶淵明)으로,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원자(原子)의……여기고 원자는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다. 그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살 때 거친 밥으로 이틀에 한 번 끼니를 때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득(自得)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중씨(仲氏)의……여기며 중씨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이 중유(仲由)인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자로를 칭찬한 말이 있다. 마침내……않는구나 영대(靈臺)와 천군(天君)은 모두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마음이 중앙의 텅 빈 곳에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리니, 이를 일러 천군이라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고 하였다. 잃은들……보존된다네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해진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말을 근거 삼아 말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은자(隱者)로, 세상일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논어》 〈미자(微子)〉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연(顔淵)이 가난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추구했던 즐거움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서자(徐子)의……살았고 서자는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를 가리킨다. 그는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면서 공검의양(恭儉義讓)과 담박명지(淡泊明志)를 숭상하였다. 《後漢書 卷35 徐穉傳》 수부(秀夫)의……강학했다오 수부는 남송(南宋) 말엽의 충신 육수부(陸秀夫)를 가리킨다. 애주(崖舟)는 애산(崖山) 일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다. 남송 말엽에 송나라 조정은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애산으로 도망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항거하였다. 당시 재상인 육수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임금인 위왕(衛王)에게 《대학장구》를 강론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론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만약……추잡해지니 《시경》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만약 말할진댄 말이 추잡해지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진제(眞諦) 불교 용어로, 세속을 초월한 참된 진리를 의미한다. 대심중생(大心衆生) 불교 용어로, 보리살타(菩提薩陀) 또는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주송(朱宋)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