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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형공 묘지명 茅汀邢公墓誌銘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 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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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 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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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하여 제군에게 보이다 自叙示諸君 중유의 헤진 솜옷에 굴원의 관 높이 쓰고224) 仲袍弊弊屈冠峨흰 머리에 야윈 얼굴로 반평생이 지났구나 霜鬂蒼顔半世過도를 구할 땐 돌을 뚫는 것 같아 탄식했어도 求道堪歎同透石사람을 건네줄 땐 세파를 따르지는 않았네 涉人不肯輒隨波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심회가 사납지만 滿天風雨心懷惡안개 노을 낀 벽지에도 살 계책은 많다네 僻地烟霞計活多도리어 부끄럽네 제군이 멀리서 왔는데 還愧諸君來自遠옆사람이 무성가225)에 잘못 견주는 것이 傍人錯比武城歌 仲袍弊弊屈冠峨, 霜鬂蒼顔半世過.求道堪歎同透石, 涉人不肯輒隨波.滿天風雨心懷惡, 僻地烟霞計活多.還愧諸君來自遠, 傍人錯比武城歌. 중유의 …… 쓰고 중유(仲由)나 굴원(屈原)처럼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았다는 뜻이다. '중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衣敝縕袍],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굴원'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나라 대부이다. 그가 지은 〈섭강(涉江)〉에 "내 어릴 적부터 이런 특이한 복장을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네. 긴 칼 허리에 늘여 차고서, 우뚝 높은 갓 머리에 썼지.[余幼好此奇服兮, 年旣老而不衰. 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嵬.]"라고 하였다. 무성가(武城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쳐 교화를 잘 시켰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는 칭찬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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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형공 묘지명 道谷邢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영(世英), 자는 춘영(春榮), 호는 도곡(道谷)이다. 신라(新羅) 때 휘 옹(顒)이 있었는데, 당(唐)나라 학사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왔으니, 이 분이 상조(上祖)이다. 중대 휘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있어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 분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 문궤(文軌)를 낳았고, 문궤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찬(贊)을 낳았으며, 찬이 진사를 지낸 휘 군철(君哲)을 낳았는데, 군철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경(慶)이니,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용인(用仁)인데, 진사이다. 선고(先考)는 휘 자홍(自弘)인데,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모친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정덕(正德) 2년 우리 중종(中宗) 정묘년(1507, 중종2)에 공을 낳았다.공은 생래적으로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우뚝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경전을 읽으면서 힘써 배웠는데,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하여 발휘하고 확충하여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은 구차하고 소홀한 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모질고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능주(綾州) 도동(道洞)으로 이사한 다음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시냇물을 끌어다 꽃을 심고 한가로이 노닐면서 그윽하고 빼어난 흥취를 두루 만끽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향리에서 이름난 양학포(梁學圃) 제현과 서로 날마다 어울리면서 회포를 시로 읊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암(趙靜庵)이 본주(本州)에 귀양 오자 가서 위문하였다. 이를 인연으로 강론하고 질정하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자 슬퍼하고 상심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심정을 토로하였다.신사년(1581, 선조4) 10월 13일에 사제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5세이다. 죽동(竹洞)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니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있다. 계배(繼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갑좌(甲坐)에 있다. 모두 3남이니, 응지(應祉), 응식(應植), 응희(應禧)이다.12세손 도열(道烈)이 못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만 고루(固陋)하고 용렬하여 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지만 유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도곡의 산은 道谷之山쉬고 노닐 수 있네. 可以棲遲도곡의 물은 道谷之水굶주림도 즐길 수 있네. 可以樂飢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니 山高水長운치는 전과 다름이 없네. 風韻依然백세토록 생각나게 하니 百世興想지나는 사람 머무르네. 過者留連 公諱世英。字春榮。號道谷。新羅時有諱顒。以唐學士。浮海東來。是其上祖也。至中系諱公美。討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是生諱文軌。禮部尙書。是生諱贊。版圖判事。是生諱君哲。進仕於公爲高祖。曾祖諱慶。將仕郎贈戶曹參判。祖諱用仁。進士。考諱自弘。碧潼郡守。妣延安李氏。以正德二年我中宗丁卯生。公生而氣宇峻茂。孝友根天。稍長屹若成人。劬經力學。尤蓫小學近思錄及性理之書。發揮展拓。體用無闕。平生行已。未見有苟且簡慢之意。亦未嘗有斬絶矯激之行。中年移寓綾州之道洞。買山結亭。引流裁花。逍遙徜徉。備盡幽逸之趣。以學行除齋郞。疏辭不就與鄕裏名勝梁學圃諸賢。日相追逐。唱酬遺懷。己卯趙靜庵謞本州。往省之。因以講討問辨。源源不絶。及後命至。不勝哀傷。爲賦一絶詩以寫其情。辛巳十月十三日卒于居第。享年七十五。葬于竹洞艮坐之原。配韓山李氏某女。墓附右。繼配水原白氏某女。墓同原甲坐。擧三男曰應祉應植應禧。十二世孫道烈。走書不侫。謁誌墓之文。顧固陋微劣。固知不敢承當。而曠感餘風。有不忍終辭者。銘曰。道谷之山。可以棲遲。道谷之水。可以樂飢山高水長。風韻依然。百世興想。過者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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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水山金聖則【義鉉】 世味頭俱白。鄕情眼復靑。前期知有限。何必淚空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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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性【金大源】兄故爲留行。又以惜別號韻。因酬之。 雛合本無邊。送迎互有連。淸遊繩此日。佳約筮明年。雪淺任踰嶺。木輕易渡川。歸餘多小思。茅屋夢依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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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立春前一日二日。寄允性兄。 天日會成歲。雄雌各守家。靑春吾已過。華髮子兼斜。晩學難尋道。先知易泳涯。罄懷應不遠。聊寄一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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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日夜懷允性兄 惡離常好合。不見意茫然。梅蘂經春發。栢樽竟夕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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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오【규환】에게 보냄 與梁文吾【奎煥】 이장(李丈)에게 나아가 뵙고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康寧)하시다는 걸 들어 우러러 그립던 마음에 실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자신을 얽어맨 것을 벗어 버리고 문을 걸어 닫고 주변을 깨끗이 치우셨으니 참으로 우리 형께서 큰일을 하려는 뜻을 품으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 성대한 기세는 장차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근래 《삼국지(三國志)》를 소중히 하신다고 하던데, 특별하고 괴이하며 꺼리는 바가 없는 술수에 탐닉하여 좋아하고 아끼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력이 미쳐서 득실을 따져서 궁리(窮理)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이것은 완물 상지(玩物喪志)14)이고 귀로 듣자마자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이며, 나중에 말씀드린 대로라면 또한 초학자의 역량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모두가 우리 형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독서에는 본래 순서가 있습니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책과 같은 신심(身心)과 일용(日用)에 절실한 것을 우선 읽어서 명백하고 평이하며 더할 수 없이 가깝고 더할 수 없이 절실한 바탕에 근거하여 지키는 것이 있도록 한 다음에 세무(世務)를 처리하고 인물을 헤아려 바로잡을 수 있게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손대어 귀착하는 곳이 없기보다는 책 하나에 정밀함을 다하여 한 치 한 자만큼이라도 진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주자께서 "잡서를 보지 말라. 정신이 분산될까 두렵다."15)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이릅니다. 아우도 바로 이 병에 걸려 부질없이 일생을 허비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뒤미쳐 생각하더라도 걱정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완할 계책이 없어 억지로 들은 얘기를 읊어 삼가 우리 형에게 아룁니다. 혹시 광망하다고 여겨 배척하지는 않으실까요. 卽拜李丈。詢叩省候康寧。實慰瞻耿。今年擺脫絆已。杜門掃却。固知吾兄有大有爲之志。而其所沛然。將有不家禦者矣。但近所尊閣。在於三國志云。以其耽於奇偉縱橫之術。而愛玩不置耶。將以餘力及之。而商略得失以爲窮理之一助耶。如前所云。則是玩物喪志。口耳之學也。如後所云。則又非初學力量所可及處。皆非所望於吾兄者。夫讀書固有次第。先其切於身心日用如孔孟程朱之書。使明白平易至近至切之地。有所據守而後。可以經理世務。商訂人物爲未晩也。與其汎濫閒汨。而無所歸宿。曷若致精一書。得寸得尺之爲有進步處也。朱子曰。勿觀雜書。恐分精力。正謂此也。弟正坐此病。亦未免枉過一生。追念耿耿。塡補無計。聊誦所聞。謹爲吾兄陳之。或不爲狂妄而斥之耶。 완물 상지(玩物喪志) 작은 기예에 탐닉한 나머지 원대한 뜻을 잃는 것을 말한다. 송유(宋儒) 사양좌(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고 경계한 말이 《정씨유서(程氏遺書)》 3권에 수록되어 있다. 잡서를……두렵다 《회암집(晦庵集)》 권39 〈여위응중(與魏應仲)〉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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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酉閏四月 崔載信 城主 己酉閏四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기유년 윤4월에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도조(賭租) 빌미로 보리 144뭇을 베어간 최준보(崔俊甫)를 고발한 내용이다. 기유년 윤 4월에 상서면 다회리(上西面 多會里)에 사는 화민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은 정당리(淨塘里)에 사는 최준보(崔俊甫)에게 밭 1두 5승락지를 빌리고 도조(賭租)를 콩(太)와 보리 각각 2두 5승으로 약속하고 경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전에 그의 아들 재용(載龍)에게 5냥을 빌려준 일이 있고,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혹 받은 이자라야 겨우 2냥에 지나지 않았다. 작년 가을 추수 후 이 돈을 상계하고자 도조를 갚지 않았는데, 최준보가 이를 빌미로 자신의 아들과 자신을 찾아와 밭의 보리를 모두 베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을 잘 헤아려 일전에 재용이 빌려간 돈과 이들이 베어간 보리 144뭇에 대해 추급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소장을 접수한 부안현감은 2두의 콩을 갚지 않았다고 하여 백 뭇의 보리를 베어간 것은 지극히 부당한 일이니, 즉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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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酉二月 崔載信 城主 己酉二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기유년 2월에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최효대(崔孝大)가 이자 명목으로 늑탈해 간 조 2석을 추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기유년 2월에 상서면 정당리(上西面 淨塘里)에 사는 화민 최재신(崔載信)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은 자신의 집이 본래 매우 가난하여 장사를 위해 지난 갑진년 같은 마을에 사는 최효대(崔孝大)에게 60냥의 돈을 빌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복한 나머지 하는 일마다 낭패하여 오히려 손해만 보았으나 빌린 돈을 갚지 않을 수 없기에 그해 가산을 처분하여 본전과 얼마간의 이자를 상환하였고, 남은이자 3냥 5전에 대해서는 서서히 갚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효대가 이자를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세금을 내기 위해 간신히 마련해 놓은 조 2석을 늑탈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살펴 최효대가 늑탈해간 조 2석을 추급해 주길 청하였다. 부안현감은 비록 최효대가 마땅히 받아야 돈이나 세금을 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하므로 최재신이 세금을 납부한 후에 남은 것이 있다면 그 때 빚을 받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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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부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尹仁夫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첫 번째 절도(節度)이다. 학문과 공부만 그러할 뿐만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것을 만들어내더라도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면서 공을 이룰 수 있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선을 실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서 모두 "닭이 울면 일어난다."120)라고 말한 까닭이다.책(冊)을 마주하면 반드시 단정하고 장중하며 바른 자세로 조용히 앉아 몸을 구부리지 않고 마음을 놓치지 않으며, 보고 또 보아서 그 내용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는 듯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그 뜻이 마치 자기의 생각을 내놓는 듯하며, 반드시 욕심을 부려서 많이 알려고 힘쓰다가 소홀히 하여 서투르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앉거나 서는 것은 반드시 공경 장엄(恭敬莊嚴)하며 한쪽으로 기울거나 태만하지 말아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말수가 적으며 성급하고 경솔한 말을 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반드시 온순함과 공경스러움을 다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오만하고 고집스럽거나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고, 터럭만큼이라도 아첨하며 따르려는 의도가 있어서도 안 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의리(義理)의 가부를 보아야 하고 이해(利害)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그것을 위해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이처럼 거듭하여 하루하루 쌓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이치와 익숙해져서 근거로 삼아 힘을 얻을 곳이 있게 된다. 그러나 "요(堯)는 어떤 사람이고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저 사람이 장부이면 나도 장부이다."121)라는 마음을 북돋아 분발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떠맡겠다는 뜻이 없다면, 앞의 저 말들 또한 억지로 안배(安排)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기름으로 그린 그림이고 얼음에 새긴 조각처럼 곧 사라질 뿐이다. 어찌 나의 소유라고 여기고 더불어 형이상(形而上)을 말할122) 수 있겠는가.윤군 인보(尹君仁夫)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데 요체가 될만한 말 한마디를 청하였다. 내가 어리석어 지닌 것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직 선현(先賢)들이 이미 한 말을 열거하여 그 마음에 답한다. 인보(仁夫)는 특별히 주의해 주기 바란다. 夙興夜寐。此是日用行己第一節度。不惟學問功夫爲然。雖小小生産作業。未有早寐晏起而能有成者。此孟子於爲善爲利。皆以雞鳴而起。言之也。對冊務要端莊。靜坐不撓體不放心。看來看去。使其辭如誦已言。思來思去。使其義如出己意。切不可貪多務廣。忽略鹵莽也。坐立務要恭莊。不可傾倚怠慢。言語務要簡黙。不可躁妄諠譁。接人務要和敬兩盡。不可一毫有傲頑忮克之心。不可一毫有阿附媚宛之意。處事當見其義理可否。不當問其利害多少而爲之前却也。如是積累。日去日來。自然心與理熟。而有得力可據之地矣。然不有堯何人舜何人。彼丈夫我丈夫。激勵振拔。抵死擔當之志。則彼所云爲。亦不過勉强安排。旋消旋滅。如脂之畵。氷之鏤而已。曷足以爲吾有而與之語上哉。尹君仁夫請一言爲日用顧諟之要。余悾悾無所有。惟是擧先賢已成底說話。以塞其意。願仁夫加意焉。 모두……일어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힘쓰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요(堯)는……사람인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성간이 제 경공에게 이르기를 '저들도 장부이며 나도 장부이니 내 어찌 저 성현들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안연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으며, 공명의가 말하기를 '주공이 문왕은 내 스승이다고 하였는데, 주공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더불어……말할 《논어》 〈옹야(雍也)〉에 "중인 이상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 있지만, 중인 이하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런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가 없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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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우에게 써서 주다 書贈安景禹 학자(學者)는 우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매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단정하고 의젓하며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천리를 기르며150) 빈객을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체득하여 조금씩 쌓아가 세월이 깊어지면 눈앞의 사물은 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고귀함을 비유할 수 없고 만종(萬鍾)의 녹봉으로도 부유함을 견주지 못하며 천하의 모든 사물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이로써 큰일을 처리하고 커다란 변고(變故)에 임하면 장차 그 기세가 패연(沛然)하여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하게 될 것이다.151)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상황에서 출현한다."152)라는 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늙도록 무지(無知)한 처지라 감당하지 못하여 부끄럽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또 그냥 그만둘 수가 없다. 삼가 일상생활에 절실한 학문의 절도(節度)를 적어 주어 이를 대신한다. 學者先須識得天理人欲之分。十分明白。養之於端莊靜一之中。體之於酬酢云爲之際。銖累寸積。日人月深。則眼前物事。無非此箇道理。不以三公而喩其貴。不以萬鍾而較其富。至於擧天下之物而無以尙之。以之處大事臨大變。將沛然而行其所無事矣。所謂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者。豈欺我哉。白首倥倥。愧無以承當。而撫念事契。又不可以但已。謹述學問節度切於日用者。以塞之。 단정하고……기르며 주자의 《대학혹문》에 "단정하고 의젓하고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여 리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할 때에 이 리를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부를 지극하게 한다.[存此心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竆此理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工.]"라는 내용이 있다. 일삼는……것이다 맹자가 "지혜를 미워하는 것은 천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하듯이 한다면 지혜를 미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 임금이 물을 흘러가게 한 것은 일삼는 바가 없이 자연의 형세에 따른 것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또한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한다면 지혜가 또한 클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진정한……출현한다 《회암집(晦庵集)》 권36 〈답진동보(答陳同甫)〉에 다음과 같은 주자의 말이 보인다. 이를 축약한 것이다. "참으로 정대한 영웅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이라도 조심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眞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從戰戰兢兢, 臨深履薄處, 做將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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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용의 자에 대한 설 安子容字說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樞機)이다."155)라고 하였다. 또 "말과 행동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도구이다."156)라고 하였다. 성현의 수많은 말은 비록 담긴 뜻이 다르고 과조(課條)도 가닥이 많지만, 요컨대 말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일을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참된 뜻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먼저 문사(文辭)를 닦아야 하고 인(仁)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하니, 이 두 가지 일에서 공부의 선후를 또 알 수 있을 것이다.안생 규삼(安生圭三)은 자(字)가 자용(子容)이다. 대체로 남용(南容)이 백규(白圭) 편을 세 번씩 되풀이했던 뜻157)을 취하여 말을 조심하는 데 매우 유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을 시작하는 시기와 덕으로 들어가는 초기에 힘써야 할 것을 알아서 핵심을 깨달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학문을 할 때 또한 '불망어(不妄語)'에서 시작하는 경우158)가 있었는데, 부지런히 7년을 행하자 표리가 서로 호응하여 일마다 평온하였다. 자용(子容)은 날마다 이 사람을 본받아 자신의 명(名)과 자(字)를 저버리지 말기 바란다. 易曰。言行。君子之樞機。又曰。言行。君子之所以動天地。聖賢千言萬語。雖指意不同。課條多端。而要歸則不越乎言行兩端而已。然立其誠者。必先有以修其辭。求其仁者。必先有以訒其言。則於此兩端。而其工夫先後。又可知矣。安生圭三。表德子容。蓋取南容復圭之義。而深有意於謹言者也。此於爲學之初。入德之始。豈非知所務而得其要耶。古人爲學。亦有自不妄語始者。力行七年而表裏相應。隨事坦然。願子容日鑑于玆。毋負吾名與字也。 말과……추기(樞機)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말과……도구이다 《주역전의(周易傳義)》 권22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남용(南容)이……되풀이했던 뜻 《논어》 〈선진(先進)〉에 "남용이 백규의 글을 세 번씩 되풀이하여 읽거늘, 공자가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학문을…… 경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2 〈성의장(誠意章)〉에 "유 충정공[유안세(劉安世)]이 사마 온공을 뵙고는 마음을 다하고 몸을 행하는 요점 중에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공은 '성일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이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 可以終身行之者, 公曰其誠乎! 又問行之何先, 公曰自不妄語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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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여【승우】에게 답함 答李寬汝【承愚】 적막한 타향살이에 참으로 그리움이 절실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한 폭의 서한이 훌쩍 날아와 서안에 놓였습니다. 손을 씻고 반복해서 읽자니 한 지붕 아래 한자리에 함께 있는 듯하여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산을 나서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 과연 말씀하신 대로이니 정처 없는 인생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나 쑥대와 같습니다. 예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명(命)'이라는 글자를 벗어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우리 관여(寬汝)처럼 친한 벗만이 지극한 정성으로 가엽게 여기고 앞뒤로 안부를 물어주시는 것이 정중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의(情意)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텅 빈 나머지 새로운 거처의 모든 일이 괴롭고 서글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오직 귀댁에 매우 가까워 이전에 견주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 위안일 뿐입니다. 서울에 가신 춘부장(春府丈)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는지요? 몹시 추운 겨울에 오가는 원로(遠路)가 노년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매우 염려가 됩니다. 서석산(瑞石山) 정상과 백암(白巖)으로 가던 길 중간에 두 차례 책망을 받았다고 운운하셨는데, 말의 맥락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혹시 제가 분별없이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는지요? "사색하는 공부가 적다.……"고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좌우(左右)께서 저를 허물하지 않고 받아들여 자신의 병통으로 여기시니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말을 들으면 기뻐했던 것이 어찌 자로(子路)뿐이겠습니까.33) 대체로 좌우께서는 독실하게 지키는 일은 확실히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일이 매우 쉽지 않지만, 현자(賢者)께서 갖추시기를 기대합니다. 모쪼록 마음을 더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寄寓離索。懷想政切。謂外一幅德音。翩然賁案盥手三復。便若同堂合席。不知身之在遠也。出山入山。果如所喩。人生無根。如飛花飄蓬。前此非不知之。而豈有如今日者耶。要之。一命字出脫不得。順受之外。有何方法。惟親如我寬汝。曲垂矜憐。前後致意。不啻鄭重。此意何可忘。蕩然之餘。新寓凡百。無非辛酸。而惟以貴庄甚邇。從逐較前源源爲慰耳。春府丈洛旆。何時返次耶。嚴冬遠征。非老年可堪之事。殊切關慮。瑞石山上白巖途中。兩次受責云云。不記其語脈云何。或不至於妄發耶。小思索功夫云云。果有此說矣。左右不以爲咎。引以爲病。其受人之量。可敬可敬。聞過則喜。豈獨子路也。大抵左右篤實持守。的有餘地。此在吾儕。甚不易得。然求備之責。於賢者。幸須加意也。 자기……자로(子路)뿐이겠습니까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로는 사람들이 그에게 허물이 있음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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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자후에게 답함 答權子厚 전년에 두 차례 귀중(貴中 상대방이 머무는 지역)의 여러 곳으로 서한을 보냈으나 우리 형에게만 빠트렸습니다. 대체로 뵌 지가 오래되어 갑자기 자호(字號)와 지명(地名)을 잊어버렸습니다. 골똘히 생각하여도 끝내 떠오르지 않아서 함자를 적는 봉투 표면에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내 붓을 잡았다가 도로 놓는 일을 면치 못하고 겨우 순경(舜卿)에게 답한 편지로 인하여 감히 존함을 거론하고 대략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찌 10년 동안 의기가 투합했건만 하루아침에 상대를 잊어버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잊지 않기 때문일까요. 부끄럽습니다. 뜻하지 않게, 혜서(惠書)가 초지(草枝)에서 왔는데 대략 편지를 보낸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시일을 끌었고 또 끝내는 지체되지 않고 전달되었을까요. 이어서 또 지난달 4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 인편이 있으면 소식이 없고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없던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일반적인 인정으로 헤아리자면 누가 버림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잘못을 따지는 일도 없고 망설임도 없이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더욱 근실하시니, 이처럼 보잘것없는 처지에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겠습니까. 아우는 사문(師門)께서 돌아가신 뒤 또 대곡(大谷 김평묵(金平黙))을 잃고 쓸쓸하게 지내며 어울리는 사람이 없고 오직 영남의 몇몇 군자만 멀리서 의지하면서 우러러 받들 뿐입니다. 다만 세상의 변고가 어지럽고 처지가 얽매여 있어 도를 갖춘 이에게 나아가고 덕을 지닌 이에게 묻는 날은 아득히 멀어지고 미천한 모습은 하루하루 심하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따금 동쪽을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허탈한 마음에 한숨이 납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은 부모님 상을 당하고 풍오(豐五 김현옥(金顯玉))와 순경(舜卿 김운환(金雲煥))은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였으니 모두가 간절히 그립습니다. 회옹(晦翁 주희(朱熹))이 말한 "생존하여 살아간다.31)"는 일도 오늘날 또한 매우 쉽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前年兩次修貴中諸處書。而於吾兄獨闕焉。蓋奉接之久。遽忘其表德與地名。雖著意思想。終是不起。而於封面標題處。難以下筆。故竟未免握管還停。而只因答舜卿書。敢擧尊啣。略致意焉。豈有十年受契。而一朝相忘者耶。抑所忘在外。而所不忘在內耶。愧愧。謂外惠幅自草枝來。蓋書出已三年。何其沈滯至此。而又竟不沈滯耶。繼而又拜去月初四日書。嗚呼有便無信。有書無答非止一二。揆以常情。孰不棄斥乎。然而不較不猶。施意愈勤。顧此無狀。何以得此。弟自師門逝後。又失大谷。孑然索居。無與爲徒。而遙遙倚仰。惟在於嶺中數君子而已。但世變支離。身事局束。就道問德。茫然無日。而賤狀衰徵。日深一日。有時東望。不覺曠然發喟也。艾山遭故。豊五舜卿搬移他地。俱切關情。晦翁所謂存活得過者。在今日亦甚不易。奈何。 생존하여 살아간다 《회암속집(晦庵續集》 권4 〈답저행지(答儲行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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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居化民崔拱辰右謹言民無畓泰仁民李正淳畓五斗落只耕食後賭稅無愆而今於注秧之後欲爲移作日前▣耕 今至呈官大抵畓之例奪雖係畓主之任意而臨農奪耕亦關廢農之慮論理許耕事 處分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甲午三月 日官[着押](題辭)賭收趂給所耕準納可謂勤實之時作也畓主雖欲自耕猶不可奪耕況移作乎以此意 分付于畓主毋至換耕之地事十八日[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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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柒年丁巳五月十六日喪人宋鎭澤前手記右手記事段盤龍村案山姑堂山小乫麓安大川爲名人起墾於金塚尾上是如可移居他境而右起墾處以一年禾利例放賣故給価㱏兩貳戔而買得矣右人宋喪制用山於起耕處至近之地是遣以局內守護次右起墾處依本価㱏兩貳戔▣▣▣捧右前放賣成文記爲去乎日後如有▣▣▣▣憑考事標主喪人李直信[喪不着]證筆幼學金洛中[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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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七年丁巳五月十六日喪人宋鎭澤前手記右手記事段盤龍村案山姑堂山小乫麓下有一陳廢處起墾耕食矣右人用山於此地而右起墾處捧価貳兩是遣放賣成手記爲去乎日後爻象之弊則以此憑考事標主幼學朴仁洙[着名]證筆幼學金洛中[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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