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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 부호군 부군 행장 伯父副護軍府君行狀 우리 선대는 해양(海陽 해남(海南)에서 금수(錦水)2)의 남쪽에 세거하였다. 절도공(節度公) 휘 응규(應奎)에 이르러 한양(漢陽)에 우거하였다. 절도공으로부터 판서공(判書公) 휘 연(演), 사복공(司僕公) 휘 창문(昌門)을 지나 하남공(下南公) 휘 찬(纘)에 이르러 한양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수의 남쪽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다. 하남공으로부터 장사랑공(將仕郞公) 휘 시한(時罕), 남은공(南隱公) 휘 경통(璥通), 선랑공(善郞公) 휘 만철(萬喆), 학생공(學生公) 휘 유(瑜)·휘 이도(履道)를 지나 휘 채(埰)에 이르러 금수 남쪽에서 낭주(郞州)로 이사하였다. 통정공(通政公) 휘 가석(加錫)에 이르러 또 금릉현(錦陵縣)으로 이사하였다. 정종(正宗) 기미년(1799, 정조23) 3월 29일에 금릉현의 월산(月山) 우사(寓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제철(濟哲), 자는 윤서(允瑞)이다. 천성이 낙천적이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일찍 드러났다. 9세에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영특함이 남달랐다. 1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집안에 네 번의 상사가 있어 안으로는 부엌살림을 도맡아서 할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 땔나무를 하고 농사짓는 일을 모두 공이 직접 부지런히 해서 부친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부양하여 은의(恩意)가 매우 돈독하니 향리에서 모두 찬탄하고 칭찬하였다. 18세에 통정공을 모시고 같은 현(縣) 구상리(九祥里)로 이사하였다. 19세에 경주(慶州) 이씨(李氏) 아무개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이씨는 현숙(賢淑)하여 시부모 및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섬김에 매우 은의가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술년(1826, 순조26)에 이씨가 졸하자 정해년(1827, 순조27)에 김해 김씨(金海金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상을 마치고 능주(綾州) 묵계리(墨溪里)에 우거하였다. 기유년(1849, 헌종15)에 장자 종림(宗林)이 죽었다. 경술년(1850, 철종1)에 김씨가 졸하자 일가족이라곤 4세 된 아이와 20세에 과부가 된 며느리뿐이었으니, 객지에서 외롭고 곤궁한 정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51세였는데, 며느리 양씨(梁氏)가 후손이 미약한 것을 염려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자, 공이 거절하지 못하고 임자년(1852, 철종3)에 조양 임씨(兆陽林氏) 아무개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병자년(1876, 고종13) 8월 6일에 졸하니, 부친의 묘소 계단 아래 장사 지내고 이씨, 김씨를 합장하였다. 공은 체상(體相)이 단아하였고, 풍도(風度)가 훤칠하고 의젓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남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화목한 정은 친척에게 흡족하게 젖었고, 화락한 기풍은 향리에 두루 퍼졌다. 선을 보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고, 악을 보면 자신의 병인 것처럼 하였다. 온화하고 화순한 자태는 늘 봄바람의 온화한 기상과 같았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판단할 때는 목소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는 점이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서 성장하여 몹시 근검절약하였다. 무릇 화려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집안 살림이 부족한지 알지 못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요역(徭役)이 있으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하였다. 경사나 상사, 병문안하거나 조문할 적에는 반드시 제때에 맞추었다. 멀리 떨어진 묘소에 성묘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사방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쇠해지자 자질(子姪)로 하여금 수시로 대신 행하게 하였다. 동규(洞規)를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향리에 살면서 만든 규약3)을 모방하였고, 문안(門案)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통합한 의리4)를 따라서 행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는 친척은 친분이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혼인을 주선하여 가계를 꾸리게 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손님과 벗이 찾아올 때면 번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매우 환대하였다. 백발에 소년 같은 고운 얼굴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으니, 그 기상과 풍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여 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씨는 1남 2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김씨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종림(宗林), 창림(昌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 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임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동림(東林), 희림(熙林)이고, 딸은 이항무(李恒茂)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지 200여 년이다. 게다가 타향에서 떠돌면서 살 곳을 잃어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집안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백부(先伯父)께서 평상시 길이 탄식하면서 매양 문호를 세울 계책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권계한 점이다. 백부께서 돌아가신 뒤에 몇 년 되지 않아 사상(死殤)이 잇따라 외롭고 쓸쓸함이 배로 더해졌다. 게다가 독서하는 가풍이 이로 인하여 사라져 조금의 성취도 없었으니, 이 어찌 선백부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이겠는가. 선백부의 간절한 뜻을 생각하고 가문이 날로 쇠락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고 위축된다. 아, 우리 선백부의 감추어진 광채와 숨은 덕을 누가 수습하여 드러내서 명주(明珠)와 진완(珍玩 진귀한 기호물(嗜好物))이 푸른 바다 모래사장에 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惟我先世。自海陽。世居錦南。至節度公諱應奎。僑寓漢中。自節度公。歷判書公諱演。司僕公諱昌門。至下南公諱纘。自漢中。挈還錦南舊庄。自下南公。歷將仕郞公諱時罕。南隱公諱璥通。善郞公諱萬喆。學生公諱瑜。諱履道。至諱埰。自錦南。移寓郞州。至通政公諱加錫。又移金陵縣。以正宗己未三月二十九日。生公于縣之月山寓舍。諱濟哲。字允瑞。天稟樂易。夙著孝友。九歲就學。穎悟異常。十七歲丁內艱。是時家有四喪。內無主饋。外無執役。炊爨裁線之節。漁樵耕牧之務。無不躬親勤勞以適親體撫養諸弟。恩意甚篤。鄕里莫不嗟異。十八陪通政公。移于同縣九祥里。十九聘慶州李氏某女。李氏賢淑。事舅姑及小郞小姑。極有恩意。家有疾病。輒涕泣廢食。丙戌李氏卒。丁亥系娶金海金氏某女。甲辰丁外艱。服闋。寓居綾州墨溪里。己酉哭長子宗林。庚戌金氏卒。一家百口。只是四歲孩兒與二十歲寡子婦而已。客土孤苦。情景難狀。時公年已望六。子婦梁氏憂嗣續之微。勸之續絃。公不能拒。壬子系娶兆陽林氏某女。壽陞通政大夫副護軍。丙子八月六日卒。葬于考墓階下。李氏金氏合祔。公體相端粹。風度軒雅。立心忠慤。接物和裕。雍睦之情。洽於親戚。愷悌之風。遍於鄕閭。見善如己出。見惡如己病。溫溫愉愉。常如春風和氣。而於義理邪正之際。未嘗不聲氣嚴厲。確然有不可拔者。生長窮約。偏愛儉素。凡華麗之物。不入於家。而於施恤之節。不知家力之不足。公私徭役。必先於人。憂樂問唁。必趁其時。遠處墳墓。省掃無闕。四方知舊。存訊不替。及其衰老。使子姪隨時替行焉。立洞規以倣呂氏居鄕之約。立門案以修程子合族之義。族戚之無依者。分雖疎遠。必爲之昏娶。俾立家計者。十餘人。賓朋至。輒置酒而盡歡。紅顔白髮。言笑款款。其氣象風彩。令人可愛而不可忘。李氏生一子二女。皆夭。金氏生二子二女。子宗林昌林女郭宗協尹滋升。林氏生二子一女。東林熙林。女李恒茂。孫以下不錄。嗚乎。吾家零替二百餘年。加以轉泊失所。不自支存。此先伯父所以平居長歎。而每以門戶之計爲諸兒勉勉處也。伯父歿後。未幾年。死殤相繼。一倍孤弱。且讀書之業。因以汨沒。無有一就。此豈先伯父所望於諸兒者耶。念先志之懇惻。視家戶之日非。不覺哽塞而氣縮。嗚乎。我先伯父潛光隱德。誰能收拾而揄揚之。毋使明珠珍玩。淪落於滄海沙礫之間也耶。 금수(錦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장동면에서 시작되는 탐진강(耽津江)의 지류인 금강(錦江)을 이른다. 여씨(呂氏)가……규약 송(宋)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고 있던 여대균(呂大鈞)이 제정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이른다. 문중과 향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약으로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서로 사귐에는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등의 조목을 정하였다. 정자(程子)가……의리 정자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가법(家法)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족인(族人)을 통합해야 한다. 옛사람에게는 화수회(花樹會)가 있었는데, 위씨(韋氏) 집 안의 종회법(宗會法)을 취할 만하다.[程子曰: '凡人家法,須月爲一會,以合族. 古人有花樹,韋家宗會法,可取也.']" 하였다. 《近思錄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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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扶安郡) 김방제(金邦濟) 등 산지입안(山地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0년(철종 11)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 김방제 등의 산지에 대한 입안 부안군(扶安郡) 하동면(下東面)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의 입안(立案)과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 김방제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으로 이루어진 산송문서(山訟文書)이다. 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全羅監司)의 입안(立案)은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 등 부안김씨의 산지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부안현 김방제는 소윤(少尹)의 본손인데 소윤묘가 있는 산지를 외손인 최가에게 빼앗기고 한성부(漢城府)와 전라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최씨가 석동산에 차장(借葬)한 것은 원래 2총이었는데 후손을 대대로 장사를 지내더니 심지어 소윤(少尹)의 묘 아래까지 압장(壓葬)하였다. 최씨의 외선산(外先山) 늑탈은 풍속을 경계하는 측면에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4명의 최씨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소윤의 묘문(墓門)을 개척(開拓)하며, 산지는 정계를 정하고, 소나무도 함께 본래의 주인(主人)인 김민(金民)에게 주어 영원히 수호하게 한다. 이 송사는 경영(京營)의 관문(關文)과 감결이 있고 제교(題敎)가 있으며, 일의 전말과 산의 형편에 관해서는 원보(原報)에 있으니 뒷날에 상고하기 위해 아래에 열거한다. 지금 이후로 최씨는 무덤만 그들의 것이니 사표(四標) 내의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입안을 만들어 준다."라고 하였다. 입안 아래에는 원보초(原報草)라 하여 부안현감의 첩보(牒報)가 첨부되어 있다. 부안현감은 먼저 김방제의 소장을 요약한 뒤 산지를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고, 감영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김방제 소장 내용은, "석동산은 김방제의 13세조 소윤공 김세영(金世英)과 그의 동생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가 먼저 터를 잡았고, 좌우에 묘가 있어 대대로 수호하였다. 그러다 소윤의 손서인 최생명(崔生明)과 현손서인 최계성(崔繼成)을 소윤공과 군사공의 무덤이 있는 곳에 차장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중간에 소윤공의 자손이 미약하고 흩어져 살게 되자 최씨들이 소윤공의 묘 전록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최진하(崔鎭夏) 등이 소윤공의 묘문을 쪼아내고 용미에 길을 내었으므로 정소(呈訴)하였더니, 당시의 송관(訟官)이 최씨측을 두둔하고, 최씨들이 외가에서 분급 받았다고 억지를 부려 소윤공의 묘를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안현감은 한성부와 전라감영의 지시에 따라 김씨와 최씨를 산 아래에 대령하여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소윤묘 전후좌우에 나무가 빽빽하고, 최씨들은 소윤공의 묘 조금 먼 곳에 최생명의 무덤이 있는데도 여기는 놔두고 소윤공묘의 용미와 섬돌 밑에 7총을 압장하였다."고 하였다. 압장한 7총은 최민에게 분부하여 즉시 파내도록 하고, 사표(四標)를 정하고, 아울러 소나무도 김씨측에 추급하도록 입안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외선산을 늑탈하려고 도모한 최겸석(崔謙錫) 등은 법률에 따라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부안현감의 첩보 뒤에는 1860년(철종 11) 12월 18일의 전라감사의 제사(題辭)와 1860년(철종 11) 12월 12일의 부안현감의 제사, 1860년(철종 11) 12월 20일의 부안현감의 결안제교(決案題敎)가 기록되어 있으며,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감사의 완문 내용은, "부안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金邦濟)의 선조 소윤공의 묘 한 켠을 외손(전주최씨)의 차장을 허락하였는데 그 외손의 손자인 최진하(崔鎭夏)・최광벽(崔光璧)・최익경(崔益坰) 등이 계장(繼葬)을 하고, 위조문권을 만들어 소윤공묘가 있는 산 전국(全局)과 송추(松楸)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제 등 부안김씨들은 산지와 송추를 다시 찾아 줄 것을 한성부(漢城府)에 탄원하였고, 한성부(漢城府)에서는 부안현으로 관문에 보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 결과 전주최씨들이 은혜를 저버리고 산지를 늑탈하려 한 일이 탄로 났다. 지금부터 최익경 등은 사표 내를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완문을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김방제 등 부안김씨에게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의 점유를 인정해 준 것이다. '완문(完文)'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 후 관청의 재량에 따른 처분을 담은 문서이고, '입안(立安)'은 어떤 일에 대해 공증을 해주는 문서이다. 전라감사의 완문 뒤에는 김방제(金邦濟)・김성풍(金性豊)・김정규(金鼎奎)・김상익(金相翼)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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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균【계두】에게 답함 答魏致均【啓斗】 남쪽에서 머물러 있는 구름120)을 바라보니 달려가고픈 마음이 가득 할 때 뜻하지 않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하고 상쾌한 마음을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받고서 조부모님과 부모의 건강을 살피며 지내는 상황에 신의 보살핌으로 복이 많은 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멀리서 바라는 마음에 부합합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나약해져서 아뢸만한 것이 없습니다. 늘 친구들의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그대 고을의 많은 선비의 융성함을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교류함으로써 만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다소의 도움거리로 삼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서, 공자의 상(喪)에 "자공(子貢)이 홀로 3년을 더 거처했다.【子貢獨居三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상복을 더 입었다.【加服】'고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러러 사모하는 처지에 차마 갑자기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3년을 더 머문 것입니다. 《맹자(孟子)》「고자 하」의 "이이여기지지(訑訑予旣知之)"에서 '여(予)'자에는 '인장왈(人將曰)' 3자가 이미 위의 문장에 있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서로 묻는 것이, 벗들과 학문을 익히고 닦는 의리이고 나아가 그대가 공부하는 과정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서할 때는 먼저 대의에 통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대학》을 읽는다면, '명덕(明德)'은 어떤 것이고 '신민(新民)'은 어떤 것인가 하는 종류를 통달해야 하고, 그 글자의 뜻이나 문장의 구두와 같은 것은 소소하게 보고 이해해야지, 성급하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단정하고 엄숙한 자세로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길러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끊어짐이 없게 하면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는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南望停雲。馳懷多時。一角珍緘。獲之不意。感豁之私。有難形喩。因審重省餘經履。神相多祉。實副遠望。義林衰病淟涊。無足奉聞。每念吾友天姿之美。貴鄕多士之盛。恨未得源源。以爲收桑多少之助也。子貢獨居三年。恐非加服之謂。想是瞻慕之地。而不忍遽去故也。訑訑予旣知之。此予字。人將曰三字旣在上文。則恐非別人也。疑難相問。此是朋友講磨之義。而尤可見賢者課程之有在也。然讀書先須務通大義。如讀大學。則如明德是如何。新民是如何之類。若其字義句讀。小小見解不必汲汲爲也。更須端莊存養。隋時隨處。無所間斷。則讀書窮理。尤宜爲力矣。 머물러 있는 구름 친구를 가리키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정운(停雲)〉 서문에서 "정운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이다.【停雲思親友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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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의 운자로 회포를 적어 가석에게 부칠 때 마침 섣달그믐 밤이어서 疊前韻述懷 寄可石時 適除夜 두어 칸 초가집엔 책상 하나에 책이 있고 數間茅屋一床書먹고 입을 것도 없으나 태연히 앉아 있네 無食無衣坐自如단양에선 보내준 보리 양식132)에 얼마나 의지했나 幾賴丹陽遺麥斛촉군에서 쇠수레에 실어 보냈다 말하지 말라 休言蜀郡載金車예전에 소진의 형수는 전후가 달랐다133) 들었으니 曾聞蘇嫂異前後적공의 빈객이 친소가 다름134)도 괴할 것 없다네 不怪翟賓殊戚疎이 밤에 누가 있어 함께 이야기할거나 此夜有誰堪共語후창135)은 홀로 후창과 함께 살고 있거늘 後滄獨與後滄居 數間茅屋一床書, 無食無衣坐自如.幾賴丹陽遺麥斛? 休言蜀郡載金車.曾聞蘇嫂異前後, 不怪翟賓殊戚疎.此夜有誰堪共語? 後滄獨與後滄居. 단양(丹陽)에선……양식 송(宋)나라 범요부(范堯夫)가 보리 500곡(斛)을 배에 싣고 오다가, 단양(丹陽)에서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이 두 달 동안이나 상(喪)을 치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배에 실은 보리를 모두 석만경에게 내준 뒤에 자신은 단기(單騎)로 돌아왔다는 고사를 말한다. 《冷齋夜話 卷10》 소진(蘇秦)의……달랐다 소진은 전국 시대 합종(合從)을 주장하여 육국(六國)의 재상이 되었으나, 한때는 진나라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가죽옷과 황금이 모두 다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오자 형수와 아내가 그를 냉대하였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적공(翟公)의……다름 한(漢)나라 때 적공(翟公)이 처음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빈객(賓客)들이 문을 메웠는데, 그가 파면되자 문 밖에 새그물을 칠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러다 뒤에 다시 정위에 임명되자 빈객들이 예전처럼 앞다투어 찾아왔다고 한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후창(後滄) 이 문집의 저자인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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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열재 어른이 〈노회〉시 세 편을 부치면서 화답을 요구하기에 차운하여 드리다 3수 歲暮悅丈寄《老懷》詩三篇索和 次韻以呈【三首】 때까치 울음소리129)와 게걸음 같은 글씨에 鵙舌之音蟹步書온 세상은 도도하게 취해서 미친 듯하네 滔滔擧世醉狂如백성 죽이고 나라 삼키려 포탄으로 놀라게 하고 鏖民呑國驚彈礮바다에 숨고 하늘 날며 함정과 전차로 위협하네 潛海飛天嚇艇車이미 문명은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는데 且已文明云莫上윤리에 대해선 어찌 온통 소홀한 것인가 其於倫理柰全疎어느 때나 성인이 나와 사람의 도리를 세워 何時出聖扶人道동서에서 만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으려나 安奠東西萬姓居평생 성인의 글 아닌 건 거들떠보지 않아 不識生平非聖書칠순에도 더욱 돈독하지만 결국 어찌 될꼬 七旬彌篤竟何如책상머리엔 붙어사는 좀 벌레만 볼 뿐 床頭只見親蟫蠹책 속에는 말과 수레를 모을 방법 없다네 卷裏無緣簇馬車천년동안 전수한 것을 실추시킬 수 없어서 千載授傳難棄墜마음을 존양성찰130)하나 허술할까 걱정이네 一心存省恐虛疎난리 땐 군자를 그리워함이 더욱 간절하니 亂時愈切思君子치의131)를 만들어 산촌에 사는 분께 보내려네 願造緇衣送峴居문득 천시를 보니 책력이 다하고 忽見天時盡曆書총총히 가는 세월은 골짜기의 뱀과 같네 光陰遽遽壑蛇如몇 년의 망령된 생각을 세 솥에 늘어놓는데 何年妄想列三鼎지난 자취에 헛된 공은 다섯 수레에 가득찼네 往跡虛功盈五車물을 마셔도 박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는데 飮水非憂生計薄단약 달이며 되레 방술이 소홀할까 두려웠네 煮丹却怕術方疎수답하여 새로 시 지으며 좋은 일 많았으니 奉酬新什多佳況내 몸은 혼자 쓸쓸히 지낸 것이 아니었네 不是吾身在索居 鵙舌之音蟹步書, 滔滔擧世醉狂如.鏖民呑國驚彈礮, 潛海飛天嚇艇車.且已文明云莫上, 其於倫理柰全疎?何時出聖扶人道, 安奠東西萬姓居?不識生平非聖書, 七旬彌篤竟何如?床頭只見親蟫蠹, 卷裏無緣簇馬車.千載授傳難棄墜, 一心存省恐虛疎.亂時愈切思君子, 願造緇衣送峴居.忽見天時盡曆書, 光陰遽遽壑蛇如.何年妄想列三鼎, 往跡虛功盈五車.飮水非憂生計薄, 煮丹却怕術方疎.奉酬新什多佳況, 不是吾身在索居. 때까치 울음소리 듣기가 아주 나쁜 왜가리 소리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남만(南蠻) 지방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비유하였다. 맹자가 이르기를 "지금 남만의 왜가리 혀를 놀리는 사람이 주장한 것은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 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존양성찰(存養省察) 본성을 함양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악(善惡)의 기미를 살핀다는 뜻이다. 공자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져 일정한 시간과 방향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마음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하며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강조했다. 《孟子 告子上》 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기에 군자는 혼자만 아는 마음을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하였는데, 이는 움직였을 때〔動〕의 성찰 공부를 말한 것이다. 《中庸章句 第1章》 치의(緇衣)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정성을 뜻한다. 《시경》 〈정풍(鄭風)〉의 편명으로, 현자를 좋아하여 검은 옷, 즉 치의를 만들어 주고 음식을 대접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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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회안》 서문 資學會案序 옛적에는 15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40세에 이르러 벼슬에 나갔는데,152) 그 사이 25년 동안 일신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학교에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뜻이 정밀해지고, 학업이 온전하여 성취함이 쉬웠다. 그런데 학교의 행정이 폐지되어 거행되지 않게 되면서 선비들이 안심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져 이리저리 의식(衣食)을 꾀하는 데 급급하여 뜻이 나뉘고, 학업이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성취가 있기를 바라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우리 마을의 정기현(鄭基鉉)과 김권준(金權俊), 김덕희(金德熙) 세 젊은이들이 약간의 재력을 갹출해 합쳐서 계(契)를 만든 지 이미 몇 년째 되어 가는데, 하루는 나에게 찾아와 계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 젊은이들은 모두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영재들이고, 한창 진보하여 그침이 없는 자들이니, 그 뜻이 반드시 재화를 탐해 이자를 불릴 것을 꾀하고, 또 술과 안주를 마련해서 모여 노니는 즐거움을 위함이 아닐 것이다. 어찌 집안에만 있으면 사세(事勢)와 재력이 혹 미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이 계를 만들어서 서적과 먹 등 학업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원근의 선비들과 종유(從遊)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삼대(三代)153) 시대의 선비를 기르던 규범은 이미 볼 수 없지만, 당시 선비들이 스스로를 위해 도모했던 것도 응당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학(資學)이라 이름을 짓는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있다. 선(善)을 권면하고 인(仁)을 도우며, 충심으로 알려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줌이 이것이다. 한갓 저것만 도움이 되는 줄 알고, 이것이 도움이 되는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는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보존하는 것이며, 내면에 소홀하고 외면에 급급해하는 것이니, 이를 더더욱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제군들은 쑥대와 삼대처럼 서로 부축하여 지탱해주고, 옥과 돌처럼 서로 갈고 다듬어 주면서 오래도록 지켜보아 변하지 말고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서 같은 무리의 물고기가 용과 돼지154)로 나뉘게 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古者十五而入學。至四十而出仕。其間二十五年。一身所須。皆資於學。是以志精業全。易於成就。自學校之政。廢而不擧也。爲士者。無所聊賴。營營衣食。志分業奪。如此而欲望其有成。不亦難乎。吾黨有鄭基鉉金權俊金德熙三少年。出若干力。合而作契。已有年矣。而一日向余。請其所以名之者。余竊覸三少年。皆學文英秀。方進而未己者也。其志必不爲貨利牟殖之計。又爲杯盤遊聚之娛。則豈不以家居事力。或有不逮。故姑爲此擧以爲文墨支用之需。遠近遊從之費耶。三代養士之規。旣不可見。則士之所以自爲謀者。亦不應不如是矣。然則名之以資學。不亦宜乎。然學之所資。有大於此者存焉。責善而輔仁。忠告而善道。是已。徒知彼之爲資。而不知此之爲資可乎。是遺其大而存其小。緩於內而急於外。此尤不可以不知也。願諸君扶持之如蓬麻。琢磨之如玉石。視久勿替。偕之大道。毋使同隊之魚。至有龍猪之分焉。 옛날에는……나갔는데 〈대학장구서〉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부터 공, 경, 대부, 원사의 적자와 백성들 중에 준수한 사람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여 그들에게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다.[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4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가고, 70세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난다.[四十始仕, 七十致仕.]"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용과 돼지 용은 준수한 사람을, 돼지는 노둔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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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4 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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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욕회안》 서문 風浴會案序 "바람 쐬고, 목욕하고, 노래하며 돌아온다."144)라는 것은 인욕(人欲)이 깨끗이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유행함으로써 마음이 평탄하여 드넓고 생기가 충만하여 활발하게 흘러넘치는 경지이니, 바로 증점(曾點)이 본 고원(高遠)한 곳이요, 이른바 요순(堯舜)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 자취를 사모하되 그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이름을 좇되 그 실상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 산에 오르고 강물을 마주하여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을 이따금 여기에 견주며 과시하고 찬미하기까지 한다. 이는 자못 인욕이 다 없어지지 않으면 천리가 유행하지 않아 구구한 한때의 즐거움이 애초에 허랑방탕으로 귀결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남헌(南軒) 장자(張子 장식(張栻))가 말한 "읊으며 돌아온다.[詠歸]"는 말도 도의 본체를 보았다고 이를 수 있다. 맹자도 오히려 행동이 뜻을 받쳐 주지 못한 사람을 광자(狂者)라 하였는데, 하물며 이보다 못한 사람임에랴. 이러한 폐단을 설파한 것이 아니겠는가.정해년(1887)에 나와 고을 친구들이 과감하게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하고, 이로 말미암아 영귀회(詠歸會)를 설립했는데, 그 뒤 을사년(1905)에 우리 마을의 젊은이들이 또 서석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풍속회(風浴會)를 설립했다. 이것이 전후 20년간의 일이니, 어쩌면 이리도 꼭 닮은 것인가.정해년의 유람은 늘 이름만 훔치고 그 실상이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제공(諸公)들은 어느 쪽을 취할 것인가? 또 실상이 없는 자취를 좇아 답습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건대, 변변찮은 내가 벗들에게 미칠 정도의 착실한 점이 조금도 없이 도리어 허랑방탕한 풍속을 창도한 것인가?아, 천하의 형통한 사람들은 어렵고 막힌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바라건대 제공들은 규범과 준칙 속에서 괴로이 검속하고, 연못과 얼음과 가득찬 물과 옥 위에서 전전긍긍하며 보존하여145) 한 치 한 푼을 축적하고 때와 날로 변화함으로써 위태롭던 것이 안정되고, 서툴던 것이 매우 익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세속을 초탈한 깨끗한 형상과 호탕하게 성대한 기상이 어느 때든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는 사이에 있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풍욕회를 설립한 것이 앞으로 실상이 없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전날의 영귀회도 함께 빛날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風浴詠歸。是人欲淨盡天理流行底坦蕩蕩活潑潑也。乃曾點所見高處。所謂堯舜氣象也。後之人。慕其迹而遺其心。循其名而忘其實。至以登山臨水。文酒觴詠。往往比擬而夸美之。殊不知人欲不盡。則天理不行。區區一時之樂。未始不出乎放浪曠蕩之歸而已也。南軒張子所謂詠歸之語。亦可謂見道體矣。孟子猶以行不掩爲狂。而況下於此乎者。其非說破此敝耶。歲丁亥。余與鄕里知舊。果有瑞石之遊。因有詠歸之會。後乙巳。吾黨年少。又往瑞石。歸而設風浴之會。此是前後二十年間事。而何酷似乃爾也。丁亥之遊。常恨夫竊其名而無其實。未知諸公奚取焉。而又且循襲其無實之迹耶。自惟無狀。未有多少着實的及於朋友。而反以放浪曠蕩之風倡之耶。嗚呼。天下之亨。未有不自艱難窒塞中出來。願諸公苦苦檢束於規矩繩尺之中。兢兢持存於淵氷盈玉之上。分累寸積。時移日化。至於杌隉者妥帖。生澁者純熟。則其脫然灑落之象。浩然盛大之氣。將無時而不在於春風沂雩之間矣。然則今日風浴之設。將不至無實。而前日之詠歸。亦與有光焉。勉之勉之。 바람……돌아온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장래 포부를 물어보자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 6명 및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연못과……보존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살얼음을 밟듯, 물 가득 찬 그릇을 받들 듯, 옥을 잡듯이 조심하여 잠시라도 이 같은 마음을 지녀 자신을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시경》 〈소민(小旻)〉에 "전전하며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는 옥을 잡은 듯이 하고,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조심조심 공경하여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장차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듯이 해야 한다.[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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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사우간독》 서문 希庵師友簡牘序 나의 벗 양군 여정(梁君汝正)이 사우(師友)와 평소 주고받았던 서찰을 편집해서 '사우간독(師友簡牘)이라 이름을 짓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외로이 떨어진 곳에서 홀로 공부하는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주고받은 서찰에서 바로잡아 경계해준 말뿐이고, 그 말을 또 아침저녁으로 보며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책으로 엮어서 열람하고 고찰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우리 그대가 서문을 써 주게나."하였다.아, 내가 젊었을 때에는 자못 스승을 섬기며 벗들을 따라다녔는데, 어느덧 태산은 기울어 무너지고,146) 벗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나도 또한 세상의 변고에 곤란을 겪으며 첩첩산중의 궁벽한 곳으로 물러나 칩거하게 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생각하면 까마득하게 선천(先天)의 그림자처럼 무(無)의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지만, 때때로 옛 종이 뭉치 속에서 간혹 당시에 주고받았던 편지를 발견하고 시험 삼아 읽어보면 그 십 년 세월의 면모와 천 리 머나먼 길의 종적이 모두 뚜렷하게 떠오르며 마치 같은 방에서 자리를 함께하는 듯하였다. 또한 서로 기약하며 힘써 노력했던 뜻이 일찍이 이와 같았는데, 스스로 오늘날 성취한 바를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며 심장과 간담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매번 차례대로 편집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했지만, 아득히 세월만 흘려보내며 이루지 못한 지도 10여 년이 되어 간다.지금 보건대 여정이 뜻을 세움은 나보다 늦었으나 성취는 나보다 앞섰으니, 태만한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현격한 것인가? 전수받아 익히는 일에 태만하지 않고 경계하여 바로잡아준 것을 잊지 않았으니, 또한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만약 이 간독을 스스로 문집을 만들어서 남들에게 알려지는 데에 급급해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여정은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하여 한창 나아가기만 하고 그치지 않으니, 어찌 이 간독을 얻은 것에 스스로 만족하여 대뜸 너무 이른 계책으로 삼겠는가. 행위는 같되 마음은 다름을 또한 여기에서 변별해야 한다. 余友梁君汝正。編其師友平日所與往復之書。名以師友簡牘走書於余曰獨學孤居所賴惟是往復規警之語。而其語又不可不朝夕觀省。故編爲卷帙。以便考閱。願吾子爲之序也。嗚呼。余於小少。頗事從逐。旣而泰山傾頹。朋知零散。余亦困於世故。退蟄於窮山萬疊之中。回念過境。茫然若先天影子。銷散於有無之中。而時於舊紙堆。或値當日往復。試以讀之。其十年面貌。千里蹤跡。皆渙然若同堂合席。且相期勉勉之意。曾已如此。而自顧今日所就。不覺骨寒毛聳。而心膽墮地。每欲次弟編輯。以爲警省之資。而悠悠未就者。十有餘年。今見汝正志在我後。而成在我先。人之勤慢不相及。若是其懸耶。其傳習之不怠。規戒之不忘。亦可以見其一端矣。若以此謂自作文集。急知於人。則非其心也。汝正年富力强。方進而不已。豈得此自足。遽爲太早計者耶。同行異情。亦當於此辨之。 태산은……무너지고 스승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대들보가 쓰러지겠구나. 철인이 시들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병이 나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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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연 정석에게 지어 주다 贈崔秉硏正錫 벽절산 속에 한 초당이 있으니 碧節山中一草堂등불 켜고 날 밝도록 학업에 힘쓰누나 焚膏勤業繼朝陽앵무새 같음을 경계한 상채의 말을 일찍이 들었고347) 戒存鸚鵡曾聞蔡사람과 소의 도리를 뒤섞은 자상을 다시 안타까워하네348) 道混人牛更病桑만약 전심하여 육예를 통달할 수 있다면 如使專心六藝透한 손으로 온갖 냇물 막는 게 어찌 어려우랴 何難隻手百川防나 같은 늙은이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如余老矣亡無日훗날 그대 덕분으로 빛날 수 있기를 바라노라 願得他年賴以光 碧節山中一草堂, 焚膏勤業繼朝陽.戒存鸚鵡曾聞蔡, 道混人牛更病桑.如使專心六藝透, 何難隻手百川防?如余老矣亡無日, 願得他年賴以光. 앵무새……들었고 상채(上蔡)는 송(宋)나라 학자인 사양좌(謝良佐)의 호로,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사양좌가 일찍이 당시 사대부들을 평하여 "명리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의 사대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만 잘하는 것이 참으로 앵무새와 같다.[透得名利關, 方是小歇處, 今之士大夫, 何足道? 能言, 眞如鸚鵡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과……자상(子桑)을 자상은 도가(道家)의 무리인 자상백자(子桑伯子)를 가리킨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雍也)〉에 중궁(仲弓)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可也簡]"라고 대답하자, 중궁이 자상백자는 너무 간략한 것[太簡]이 아니겠냐고 말하였는데, 이 대목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자상백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처하자, 공자가 그는 사람의 도리를 소와 말과 같게 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상백자는 아마도 너무 간략한 자일 것이다.[家語記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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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달밤 雪月夜 눈 내린 빈산의 달밤은 참으로 더디 가는데 雪月空山夜正遲시혼은 흥을 타고 그 어디로 향해 가는고 詩魂乘興向何之가을 지난 동산의 국화는 예전 역사340)와 같고 經秋園菊同前史섣달 기다리는 다리 가 매화341)는 후일을 기약한다오 待臘橋梅結後期대숲 집 주인의 노래가 청절한 곳이요 竹館人歌淸絶處솔에 깃든 학의 꿈342)이 편히 이루어지는 때일세 松棲鶴夢穩成時남쪽 지방에 한 해가 저무는 걸 깜짝 놀라니 飜驚南國年光暮기러기의 울음소리에 일삼는 바가 있구나 鴻鴈聲中有所事 雪月空山夜正遲, 詩魂乘興向何之?經秋園菊同前史, 待臘橋梅結後期.竹館人歌淸絶處, 松棲鶴夢穩成時.飜驚南國年光暮, 鴻鴈聲中有所事. 예전 역사 국화를 유독 좋아했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연명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서문 말미에 "중추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지가 80여 일이었다. 일을 따라 마음을 순히 하였으므로 명명하기를 '귀거래혜'라 하니, 을사년(405) 11월이었다.[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고 하고, 그 본문에는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리 가 매화 당(唐)나라 맹호연(孟浩然)의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리는 장안(長安) 동쪽에 흐르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파교(灞橋)를 가리킨다. 맹호연이 일찍이 눈이 내리는 속에 나귀를 타고 파교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고사가 있었는데,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 이를 읊기를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어깨가 산처럼 솟음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학의 꿈 세속을 초탈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한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여이생론시서(與李生論詩書)〉에 "땅이 청량하니 학의 꿈은 맑고, 숲이 고요하니 중의 모습 엄숙하여라.[地涼淸鶴夢, 林靜肅僧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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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지 상덕재 선생 최공 묘지명 左承旨尙德齋先生崔公墓誌銘 선생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치호(致湖), 자는 평원(平遠)이다. 초휘(初諱)는 업(嶪)이었으며, 호는 상덕재(尙德齋),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때 동래후(東萊侯) 휘 지몽(知夢)이 그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조선에 입조(入朝)하였으니 관직은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운(雲)을 낳았는데, 호는 덕암(德庵)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휘 득초(得超)에 이르러 장악원 정랑(掌樂院正郞)을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자혁(自赫)으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조부는 휘 추(湫)로, 호가 난계(蘭溪)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선고의 휘는 근지(近池)로, 호는 월계(月溪)이며, 사성(司成)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참의 민식(閔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명종19) 10월 16일에 서울 남부(南部)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만한 나이에 문득 시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영오시(詠烏詩)〉에 "새 가운데 너는 효도할 수 있으니, 고인이 현자에 견주었네.[鳥中爾能孝, 古人比於賢.]"라고 하였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해 유인(孺人)에 대한 애도가 망극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복을 벗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스승이 그가 자주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혹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반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반은 스승에게 향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독서할 적에는 손을 단정히 모으고 꼿꼿하게 않아 전심치지(專心致志)하되 송독하는 횟수는 한도가 있었으나 연구에는 일정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제자백가 자(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충분히 반복 학습하여서 깊게 통달하고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석담(石潭)1) 이 선생(李先生)이 성리학에 심오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배웠다. 또 임공 숙영(任公叔英), 고공 용후(高公用厚), 홍공 입(洪公雴), 김공 반(金公槃), 고공 전천(高公傳川), 민공 성징(閔公聖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서로 충고하고 절차탁마하며 더욱 스스로 확충하여 훌륭하다는 명성과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낭천(狼川)에 임명되는 명이 있었지만 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과거에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고 요순의 지위가 있으며 요순의 백성이 있는데, 요순과 같은 은택이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채침(蔡沈)이 말하기를 '후세의 군주가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구한다.[求其心]'라는 석 자가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구하는 법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서책에 매우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유현(儒賢)을 친히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이치를 밝히고 그 실제를 행한다면 마음을 구하는 방법이 터득되고 다스리는 근본이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무자년(1588)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訥)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어느 날 주상이 경연에 나아가 《서경》의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론하다가 이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뜻을 물으니, 공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한마디가 또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데 성상(聖上)의 물음이 여기에 미치니 감히 나라를 흥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경인년(1590)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람을 선발할 적에 오로지 문예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장구(章句)나 익히는 학문은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이 아니며, 문장을 짓는 기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장구나 익히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지고 선비를 선발하면서 세상을 경영하고 잘 다스리는 효과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때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천거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계책을 내었기에 드러난 공적이 많았다. 병신년(1596)에 부친상을 당했고, 계묘년(1603)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605)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광해군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을 때 상소를 올려 직간하였는데, 그 상소 중에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 견주는 것인가?"라고 하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세에 비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이세의 행실을 따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더욱 노여워하여 장(杖)을 치고 의금부에 3일 동안 가두었다가 사죄(死罪)에서 1등급을 줄여 진도(珍島)로 유배보냈다. 이에 연관된 시가 아래와 같다.의금부 서리 행차 재촉하여 남쪽으로 문 나서니 禁吏促行南出門이 몸은 살아서 향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此身生不返鄕村소슬하게 비바람 치는 지난밤 꿈에 蕭蕭風雨前宵夢상강으로 날아가 굴원을 보았네.2) 飛入湘江見屈原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즉시 유배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고, 부제학으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장흥(長興)의 와리(瓦里)에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고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다가 정묘년(1627, 인조5) 10월 16일에 졸하였다. 와리 뒤쪽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의 민순(閔絢)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결(潔)은 참봉(參奉), 숙(淑)과 해(海)는 진사이다. 딸은 변극중(邊克中)과 김인복(金寅福)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 14세손 동민(東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을 열어주어 天啓照運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네. 明良際出금당과 옥서3)에서 玉署金堂군신 간에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였네. 都兪密勿세상에 다 베풀지 못했는데 不竟厥施창오의 구름 아득하네.4) 梧雲茫茫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身不見容갑자기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네. 奄竄南荒우레치고 비 내리는 가운데 雷雨繼作동쪽 언덕에 누웠네. 因臥東岡먼 후대에 회상해 보면 追惟百世그 풍도와 운치 더욱 드러나리라. 風韻彌彰 先生姓崔。諱致湖。字平遠。初諱嶪。號尙德齋。貫朗州。麗朝東萊侯諱知夢。其鼻祖也。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是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至諱得超。掌樂院正郞。公之高祖也。曾祖諱自赫司醞寺直長。祖諱湫。號蘭溪。戶曹參判。考諱近池。號月溪。司成妣驪興閔氏參議湜女。明宗甲子十月十六日。生公于京之南部私第。幼有異質。穎悟過人。纔能言。便能綴句。詠烏詩曰。鳥中甭能孝。古人比於賢。七歲丁外艱。孺哀岡極。見者釀涕。服闋。就讀塾師。師見其頻入內庭。或久而不出。問其故。對曰。小子平日戀戀意。半是慈親半是師。師奇之。讀書端拱危坐。專心致志。誦數有程。硏究無方。自四書五經以至諸子百家。循環熟復。淹貫該洽。聞石潭李先生邃於理學。遂往學焉。又與任公叔英高公用厚洪公雴金公槃高公傳川閔公聖徵爲道義交。規警切磋。益自展拓。令聞令望。藉甚一時。癸未中司馬。除禮賓寺參奉。乙酉差江原道都事。以親老不就。旋除造紙署司紙。丙戌有狼川之命。又以親老不就。丁亥擢第。卽拜弘文館校理。上疏辭。略曰。殿下有堯舜之資。有堯舜之位。有堯舜之民。堯舜之澤。未洽於國家者何也。宋臣蔡沈之言曰。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然則求其心三字。豈非今日急先之務乎。求心之法。先聖謨訓。著於簡冊者。至爲詳悉。必須親近儒賢。夙夜講究。以明其理。以踐其實。則求心之法得。而爲治之本立矣。戊子除司諫院獻訥。尋遷司憲府掌令。一日上御經筵講夏五子之歌因問民惟邦本之義公對之甚悉。且曰。孔子云一言而興邦。一言而喪邦。今此一言。亦興喪之所由繫。而聖問及此。敢不爲興邦賀。庚寅拜執義。見科試取人。專尙文藝。啓曰。章句之習。非經綸之學。文詞之術。非治平之策。今取士於章句文詞之間。而望其有經綸治平之效。不其難矣乎。壬辰之亂。柳相國成龍。擧公爲掌書記。參謀機務。多有著績。丙申遭內艱。癸卯除世子侍講院輔德。乙巳移左副承旨。光海辛亥陞都承旨。抗疏直諫。疎中有嚴法刻刑等語。光海大怒曰汝比予於秦二世乎徐對曰殿下若愧比二世則勿行二世之行。光海愈怒。杖囚禁府三日。減死一等。流于珍島。因有詩曰。禁吏促行南出門。此身生不返鄕村。蕭蕭風雨前宵夢。飛入湘江見屈原。癸亥改玉。卽蒙解放。以副提學累徵。不赴。因居于長興之瓦里。以山水文酒自娛。丁卯十月十六日卒。葬瓦里後麓甲坐原。配驪興閔氏參議絢女。生三男二女。男潔參奉。淑。海進士。女適邊克中金寅福。孫以下不錄。十二世孫昌柱南杓十四世孫東珉。以家狀來謁誌銘。銘曰。天啓照運。明良際出。玉署金堂。都兪密勿。不竟厥施。梧雲茫茫。身不見容。庵竄南荒。雷雨繼作。因臥東岡。追惟百世。風韻彌彰。 석담(石潭)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별호이다. 상강으로……보았네 상강은 중국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금당(金堂)과 옥서(玉署)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이곳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조선 시대에는 홍문관이나 규장각 등 문신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치호(崔致湖)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 듯하다. 창오의 구름 아득하네 최치호를 인정해 주었던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오운(梧雲)은 창오(蒼梧)의 구름이라는 말로, 창오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돌려 순 임금 향해 절규하노니, 창오의 구름이 정녕 시름겨워서.[廻首叫虞舜, 蒼梧雲正愁.]"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同諸公登慈恩寺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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