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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안정회(安貞晦)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閏三月 日 南原山民安貞晦 城主 戊戌閏三月 日 安貞晦 光陽郡守 전라남도 광양시 光陽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18_01_A00001_001 1898년(광무 2) 윤3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정회(安貞晦)가 광양군수(光陽郡守)에 보낸 소지로, 광양군(光陽郡) 골약면(骨若面) 용소동(龍沼洞)에 있는 부친의 산소를 둘러싼 정석규(鄭錫奎)를 고발한 내용. 1898년(광무 2) 윤3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정회(安貞晦)가 광양군수(光陽郡守)에게 올린 소지로, 광양군(光陽郡) 골약면(骨若面) 용소동(龍沼洞)에 있는 부친의 산소 및 송추(松楸)를 둘러싸고 정선유(鄭善有)와 벌어진 산송(山訟)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안정회의 아버지 묘는 골약면 용소동에 있었는데, 지난 기묘년(1879년)에 골약면에 사는 정석규에게 100냥을 주고 매입하여 산소로 쓴 것이다. 또 정가의 묘 옆에 같은 고을 사람 김성룡(金成龍) 집안의 묘도 있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안정회는 50냥을 주고 김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산지기를 두고 수호하여 왔다. 10여 년 전에 정석규가 죽자, 그 동생 정선유가 우종식(禹鍾植)에게 형이 이미 팔았던 산지를 다시 몰래 팔았기 때문에 안정회는 8, 9차에 걸쳐 읍과 감영에 소를 올려 그곳에 있는 묘를 파서 옮기도록 하였다. 그런데 재작년 가을에는 정선유가 안정회 소유 선산의 나무를 몰래 뺏으려고 관에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해 10월 갑자기 안정회의 큰아들이 죽어 겨를이 없는 사이에 정선유가 그곳 산지를 자신의 땅이라고 하면서 큰 소나무 10그루를 팔았다. 이에 안정회는 관에 소를 올려 남의 집 불행을 틈타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의 산을 빼앗으려는 정선유를 법정에 잡아다 엄히 다스려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해 광양군수는 정선유를 조사하여 엄히 다스리고자 하니 그를 데려오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배면에는 정선유가 도피하였다는 면주인(面主人)의 보고와 해당 지역의 도형(圖形), 그리고 사실을 조사하였다는 집강의 보고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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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이유형(李惟馨)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前都事李惟馨 幼學李必馨 南原府使 李惟馨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着名] 2개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문현주, 「조선시대 호구단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모년에 이유형(李惟馨) 등이 작성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한 소지(所志). 이유형(李惟馨)이 그의 동생 필형(必馨)과 함께 작성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한 소지(所志)이다. 이 소지에 의하면, 그들은 얼마 전에 있었던 구가(舊家)의 재환(災患)으로 인하여 다른 곳으로 이거(移居)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재환(災患)이 어떤 재환인지 즉 수재(水災)인지 혹은 화재(火災)인지는 미상이다.) 그들은 새 집자리를 물색하던 중 자신들 소유지 가운데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아내어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그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조전벽(趙全璧)이라는 사람이 이 집터가 그의 양증조(養曾祖) 산소(山所)로부터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공사를 훼방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이유형과 같은 동리에서 거주하다가 얼마 전에 운봉현(雲峯縣)으로 이주한 사람으로서 이유형과 평소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며 운봉으로 이거한 후에도 빈번히 왕래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집터를 개기(開基)할 때에도 와서 이를 축하해 주었으며 이유형이 집터와 산소가 가까운 것에 대해 우려하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에서 "자기(이유형을 가리킴) 땅에 집을 짓는다는데 누가 이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고까지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후에 별안간 태도를 바꾸어 관에 소지를 제출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사를 못하도록 훼방하였다. 그래서 이유형과 그의 동생은 관에 소지를 올려 이를 저지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유형과 이필형이 이 소지를 언제 남원부사에게 제출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필형이 사망하기 전인 인조 14년(1636) 이전에 제출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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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이인제(李仁濟) 의송(議送)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六月 日 李仁濟 巡察使 戊戌六月 日 李仁濟 全羅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着名]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1658년(효종 9)에 이인제(李仁濟)가 작성하여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 1658년(효종 9) 6월에 남원부(南原府) 둔덕방(屯德坊)에 거주하던 이인제(李仁濟)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으로, 도망노 옥상(玉上)과 차산(次山) 등의 처벌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문서의 사진에는 작업연도와 소지를 제출한 곳이 나와 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문서가 훼손되기 전에 탈초한 부분이 있어서 원문텍스트에는 이를 삽입하였으며, 해제 또한 이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인제가 남원부사에 제출한 소지(1658년 이인제(李仁濟) 소지(所志))를 함께 참고하여 살펴보면, 그의 조부 이유형(李惟馨)에게는 옥상(玉上)이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3년 전인 1655년에 노 차산(次山)과 후산(後山) 등 6명과 함께 이웃 고을인 임실현(任實縣)의 관노(官奴)로 투속하였다가 뒤에 도주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유형이 위 옥상과 차산 등을 널리 수소문하여 보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유형은 노 차산과 후산 소유의 전답을 몰수하였는데, 그것은 도망간 노비들이 모두 조상사위(祖上祀位) 노비여서 이들로부터 신공(身貢)을 받지 못하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데 여러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유형은 차산과 후산의 전답을 몰수하여 여기에서 얻어지는 소출(所出)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뒤에 차산이 옥상과 더불어 그의 소유였던 전답을 찾기 위해서 한성부(漢城府)와 형조(刑曹) 등에 갖가지 거짓말로 탄원하여 형조의 관문(關文)을 얻어냈으며(이 관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 관찰사(觀察使)에게 소지를 올려 이유형이 차산의 처인 애덕(愛德)과 그의 자인 생용(生龍)을 살해하였다고 무고하였다. 따라서 이유형의 손자인 이인제는 당시 상중(喪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원부사와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려 그간의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옥상과 차산 등을 엄히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이인제의 나이는 16세였다. 그의 조부인 이유형과 부(父)인 이문주(李文冑)가 모두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그가 직접 소지를 작성하였다.) 이 의송이 바로 그 때 전라관찰사에게 제출된 것이다. 의송은 소지의 일종으로서 관찰사에게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의송에서 이인제는 차산을 그의 사환노(使喚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위노(祀位奴)의 오자(誤字)로 추정된다. 차산은 사위노였으며 그의 모 속비(俗非)도 역시 사위비(祀位婢)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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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이인제(李仁濟) 의송(議送)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丑十月 日 李仁濟 巡察使 乙丑十月 日 李仁濟 全羅觀察使 전라북도 남원시 [着名], 巡使[着押] 3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1685년(숙종 11)에 이인제(李仁濟)가 작성하여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 1685년(숙종 11) 10월에 남원부(南原府) 둔덕방(屯德坊)에 거주하던 이인제(李仁濟)가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으로, 이인상(李仁相)과의 송사(訟事)로 인하여 올린 것이다.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이인제(李仁濟)와 그의 가족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피난하기로 결정을 하고서 양식과 살림살이 등을 산 아래에 거주하고 있던 노(奴) 덕수(德水)(일명 德守)의 집으로 미리 운반을 하였다. 덕수는 이인제의 조부인 이유형(李惟馨)이 그의 외가인 흥성장씨가(興城張氏家)로부터 물려받은 노(奴)였다. 물론 이때 가족 모두가 피난한 것은 아니었다. 아녀자들만 피난하였으며 이인제의 조부인 이유형과 그의 종조부인 이국형(李國馨) 등은 당시에 거의(擧義)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후 청국(淸國)과 강화 조약이 맺어지자 이인제의 가족들은 둔덕방(屯德坊)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때 덕수에게 양식과 집기 등을 돌려 달라고 하자 그는 이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전혀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인제 등은 덕수에게 이를 배상하도록 하였으며 덕수는 할 수 없이 자기 소유의 전답(田畓)을 이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 1684년(숙종 10)에 광주(光州)에 거주하던 이인상(李仁相)(一名 李仁尙)이라는 사람이 덕수의 상전(上典)이라고 주장하며 덕수의 원래 상전이었던 위 흥성장씨가와 소유권 소송을 벌여 마침내 승소(勝訴)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덕수는 이미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애룡(愛龍)도 다른 사람에게 투속(投屬)하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덕수의 재산을 추심(推尋)하여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가 후사(後嗣) 없이 사망하거나 혹은 상전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투속하였을 때에는 상전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인상은 재산을 추심하는 과정에서 덕수가 이인제와 그의 동생 이안제(李安濟)에게 넘겨주었던 전답을 발견하고서 이들에게 이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 몰래 그 전답의 소작인(小作人)들로부터 소작료를 받아갔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이안제는 남원부사에게 소지를 올려 덕수의 전답에 대한 이인상의 반환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인상이 소작인들로부터 거두어 갔던 소작료를 반환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안제와 그의 형인 이인제는 이후에도 남원부사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4차례나 소지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소작료 반환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바로 이 시기에 전라관찰사에게 제출한 소지의 하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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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남원(南原) 둔덕(屯德) 전주이씨(全州李氏)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李安濟 李仁濟 南原府使 屯德李氏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모년에 남원 둔덕에 사는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하려고 작성한 소지(所志). 남원 둔덕에 사는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하려고 작성한 소지(所志)이다. 문서가 훼손되어 정확한 작성연대와 작성자를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안제(李安濟)나 그의 형인 이인제(李仁濟)가 이인상(李仁相)과의 송사(訟事)로 인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하려고 작성한 소지(所志)로 추정된다. 소지의 작성 시기는 1684년(숙종 10) 10월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안제는 이인제(李仁濟)의 동생으로,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피난하기로 결정을 하고서 양식과 살림살이 등을 산 아래에 거주하고 있던 노(奴) 덕수(德水)(일명 德守)의 집으로 미리 운반을 하였다. 덕수는 이안제의 조부인 이유형(李惟馨)이 그의 외가인 흥성장씨가(興城張氏家)로부터 물려받은 노(奴)였다. 물론 이때 가족 모두가 피난한 것은 아니었다. 아녀자들만 피난하였으며 이안제의 조부인 이유형과 그의 종조부인 이국형(李國馨) 등은 당시에 거의(擧義)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후 청국(淸國)과 강화 조약이 맺어지자 이안제의 가족들은 둔덕방(屯德坊)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때 덕수에게 양식과 집기 등을 돌려 달라고 하자 그는 이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전혀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안제 등은 덕수에게 이를 배상하도록 하였으며 덕수는 할 수 없이 자기 소유의 전답(田畓)을 이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 1684년(숙종 10)에 광주(光州)에 거주하던 이인상(李仁相)(一名 李仁尙)이라는 사람이 덕수의 상전(上典)이라고 주장하며 덕수의 원래 상전이었던 위 흥성장씨가와 소유권 소송을 벌여 마침내 승소(勝訴)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덕수는 이미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애룡(愛龍)도 다른 사람에게 투속(投屬)하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덕수의 재산을 추심(推尋)하여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가 후사(後嗣) 없이 사망하거나 혹은 상전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투속하였을 때에는 상전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인상은 재산을 추심하는 과정에서 덕수가 이인제와 안제에게 넘겨주었던 전답을 발견하고서 이들에게 이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 몰래 그 전답의 소작인(小作人)들로부터 소작료를 받아갔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이안제는 남원부사에게 소지를 올려 덕수의 전답에 대한 이인상의 반환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인상이 소작인들로부터 거두어 갔던 소작료를 반환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안제와 그의 형인 이인제는 이후에도 남원부사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4차례나 소지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소작료 반환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바로 이 시기에 남원부사에 제출하기 위하여 작성된 소지의 하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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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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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모년 조종풍(趙鍾豊)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臘月念七 罪弟孤哀人趙鍾豊 臘月念七 趙鍾豊 전라북도 남원시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13_001 모년 12월 27일에 조종풍(趙鍾豊)이 남원 둔덕에 사는 이모(李某)에게 보낸 서간이다. 모년 12월 27일에 조종풍(趙鍾豊)이라는 사람이 남원 둔덕에 사는 이모(李某)에게 보낸 서간이다. 상(喪)을 담한 몸에 연말은 다가오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는 막막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고 산으로 달아나자니 빚쟁이가 독촉할 일도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지난 24일에는 목상(木商) 편을 통해 융통하려고 했으나 목재 값이 두 배나 뛰는 바람에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내년 정월 안으로 빚을 갚기로 선처를 받았고, 정월 보름 뒤에는 저자에서 환부(換付)할 요량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편지를 받는 이모에게 진 빚은 정월 초 6일까지는 갚을 터이니 믿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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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1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人三月十三日 査弟??? 李允燮宅 戊人三月十三日 柳瑩業 李允燮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8년 3월 13일에 류형업(柳瑩業)이 딸의 시댁인 이윤섭(李允燮)에게 우귀(于歸)의 일정에 관한 전달한 간찰 1938년 3월 13일에 류형업이 딸의 시댁인 李允燮에게 于歸의 일정에 관한 전달한 간찰. *추기: 戊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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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0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寅 正月 十二日 弟柳?? 李允燮宅 戊寅 正月 十二日 柳瑩業 李允燮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8년 1월 12일에 류형업(柳瑩業)이 딸의 시댁인 순천 행정(杏亭)에 사는 이윤섭(李允燮)에게 딸의 우귀일(于歸日)을 정하는 문제로 보낸 간찰 1938년 1월 12일에 류형업이 딸의 시댁인 順天 杏亭에 사는 李允燮에게 딸의 于歸日을 정하는 문제로 보낸 간찰. *추기: 戊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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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拜候疏稽顙拜言胡爲乎久阻悵仰尤切謹詢窮冱侍餘棣體万護仰溸無任哀禱罪弟孤哀子當此歲暮難堪者時序之變耳就債事逢時不幸者亦是會禍之數也買賣無勢債路已塞可謂發狂處也這間周旋雖云入量姑未入手而歲除忽當故勢不得已入山而錢主則豈無督促耶向於卄四日市木商便多少間換送稍免錢主許無色矣風日乘常木價倍高木商不爲執換矣必也錢主之來困在目前然某樣善處以正月內爲期則正月望後數市間換付爲料大抵若非錢貴之世則初豈有葛藤之理乎雖有百艱千困一欲掩跡自處可矣貴邊債條一欵姑無按當爲可者充債計給後言之矣當相面盡提明言而除日迫頭奈何正月初六日出付爲計耳嘿諒姑恕如何餘荒迷不次謹候䟽臘月念七罪弟孤哀人趙鍾豊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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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동환(東煥)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寅四月念八日 姻弟服人東煥 甲寅四月念八日 東煥 전라북도 남원시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13_001 갑인년 4월 28일에 동환(東煥)이라는 사람이 남원 둔덕에 사는 그의 처남 또는 매부인 이모(李某)에게 보낸 서간이다. 갑인년 4월 28일에 동환(東煥)이라는 사람이 남원 둔덕에 사는 그의 처남 또는 매부인 이모(李某)에게 보낸 간찰이다. 상대방이 상(喪)을 당했으나, 자신이 이미 예정되었던 서행(西行)에서 돌아와서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이미 장례가 끝나서 갈 수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면서 상대방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인편이 없어서 그동안 기별도 할 수 없었다면서 두역(痘疫)에 걸렸다는데 건강은 어떤지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남채(南菜) 2파를 함께 보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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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51년 안중섭(安重燮)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臘月旬三 族弟重燮 辛卯臘月旬三 安重燮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951년 12월 13일에 족제(族弟) 안중섭(安重燮)이 보낸 서간(書簡). 1951년 12월 13일에 족제(族弟) 안중섭(安重燮)이 쓴 서간(書簡)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 아내의 상변(喪變)을 듣고 놀라 말을 못하겠다. 부부의 정의(情誼)가 두터웠는데 어떻게 슬픔을 감당하는지, 건강은 어떤지, 그때 상대방의 아들이 병중에 부음을 듣고 통곡하였는데 병이 심해지지는 않았는지, 장례는 그사이에 일정을 잡아 치렀는지 듣지 못해 우울하다고 하였다. 자신이 달려가 위로해야 하나 어머니의 병환이 3개월 동안 계속되더니 요즘 심해졌다고 하였다. 붓을 잡을 한가한 상황은 아니나 이 인편을 놓치면 해를 넘기게 되겠기에 잠깐 이 말씀만 드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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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19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寅閏七月十一日 柳弟?? 文定鎬老兄 戊寅閏七月十一日 柳瑩業 文定鎬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8년 윤7월 11일 류형업(柳瑩業)이 문정호(文定鎬)에게 구례 운천리(雲川里) 등지의 벌채 문제로 보낸 간찰 1938년 윤7월 11일 류형업이 文定鎬에게 구례 雲川里 등지의 벌채 문제로 보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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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1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旋 弟柳瑩業 竹?和詞伯 卽旋 柳瑩業 李濟珏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8년 3월에 류형업(柳瑩業)이 구례 두동(斗洞)에 사는 이사백(李詞伯)에게 연꽃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전달한 간찰. 1938년 3월에 어느 날에 류형업이 구례 斗洞에 사는 李詞伯에게 연꽃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전달한 간찰. *추기: 戊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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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禮賢閤喪變承聞驚愕夫復何言伏想伉儷誼重悲悼酸苦何以堪居歲色無多服體上若何其時胤哀帶病向海必中路聞訃攀擗哀毁能無添祟而襄禮間已定行否尙未果否漠未有聞常切紆菀憂戀之忱重燮匍匐往慰豈稽至今慈患三朔沈綿近益添劇回春未易可望情私罔喩果沒把筆閒況而若失此便又將過歲暫此留白惟冀服夫人體上候經自愛不備不慰狀下照辛卯臘月旬三族弟 重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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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이승겸(李承謙)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李承謙 趙性喜 李承謙 趙性喜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모년 12월에 장전(長田)에서 이승겸(李承謙)이 조성희(趙性熹)에게 보낸 서간(書簡). 모년 12월에 장전(長田)에서 이승겸(李承謙, 1862-1864)이 소아선생(小雅先生) 조성희(趙性熹)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눈이 쌓인 12월에 편안하다니 매우 위로가 되며, 담(痰) 결리는 것은 한때 지나는 병이니 약 없이도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세밑에 정신없이 바쁘고 몸에 병도 많다고 하였으며 보내준 물건이 비록 과일이지만 받기에 편치 않다고 하였다. 그믐이 머지않았으니 해를 보내고 맞는 때에 복 많이 받기 바란다고 하였다. 피봉(皮封)에 적힌 소아선생(小雅先生)은 조성희(趙性熹)이다. 고종 때에 동복현감(同福縣監), 임실현감(任實縣監 1886-1889 재임), 태인현감(泰仁縣監), 옥천군수(沃川郡守), 무주부사(茂朱府使) 등을 지냈다. 이승겸은 본관은 한산, 자는 경익(景益)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장전(長田)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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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황원(黃瑗)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六月十八日 弟 黃瑗 安德洙 孝座下 六月十八日 黃瑗 安德洙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모년 6월 18일에 황원(黃瑗)이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에 사는 안덕수(安德洙)에게 보낸 안부 편지. 모년 6월 18일에 黃瑗이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에 사는 安德洙에게 보낸 안부 편지. 황원은 梅泉 黃玹(1855~1910)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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