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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황남(黃楠)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見所谷化民黃楠 城主 黃楠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대곡 장수황씨가 남원 무민공황진기념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황진 장군 가문의 고문서』, 흐름, 2016. HIKS_Z012_01_A00006_001 모년에 남원 견소곡방(見所谷坊)에 사는 유생 황남(黃楠)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소지. 남원 견소곡방(見所谷坊)에 사는 유생 황남(黃楠)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소지이다. 문서가 훼손되어 정확한 작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련문서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경자년과 계축년에 남원부사에게 소지를 올린 황지순(黃至淳)의 아들로 추정된다. 남원 사동방(巳洞坊) 향약동(鄕約洞)에 있는 황지순의 친산(親山) 아래쪽에 매안방(梅岸坊)에 사는 유성태(柳成泰)가 투장(偸葬)을 하면서 일어난 산송이 그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남은 이 소지에서, 사동방 향약동에 있는 자신의 조부산과 고모산 근처에 유성태가 투장을 하여 전임 성주에게 소지를 올렸으나 "앉아서 보나 서서 보더라도 투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낙과(落科)하였다는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산송(山訟)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10보밖에 떨어져 있더라도 파내지 못하는 무덤이 있으며, 비록 바로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파내야 하는 무덤이 있다는 게 황남의 주장이다. 그러니 유가의 투총은 설령 천보가 떨어져 있더라도 파내야 마땅하고, 설령 그 투총이 보이지 않더라도 파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 간사한 유가가 자신이 송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는 금일에 이르러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제멋대로 구획을 나누어 양계(兩界)를 정하고서는 황남의 조부산 섬돌 아래와 고모산의 용미(龍尾)를 자기 것인양 단단히 움켜쥐고 있어서 오래동안 금양(禁養)을 해 온 곳이 침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으니 이처럼 원통할 데가 어디 있느냐고 황남은 탄원하였다. 따라서 수령님께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잘 살피셔서 유가가 투장한 죄를 엄히 다스려 감옥에 가두고 투총을 파내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남원부사는 이 소지에 대하여 이미 처분을 내린 사안이니 다시 소를 제기하지 말라는 제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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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山民▣…▣鎭謹齋沐百拜上原情于城主閤下伏以朝家典章民生之所以維持也母子倫恩天理之本自至重也是故不遵行國法則亂常之罪至矣不善養父母則不孝之名加矣今夫小子則因流俗之無據而罔逃亂常之罪焉緣他人之妄犯而將歸不孝之地則其爲情景果不哀憐矜惻者哉大抵父母化而歸土禮也墓而守護義也如遇犯葬而勿問則聖▣…▣矣使有偸塚而不顧則母子之恩絶矣如之何其可也小子生纔孩提慈母見背母之喪乃寃喪也母未三十而夭逝母之墳卽寃墳也其與世地母老子長而當變者情地百般有間是乎所前呈中小子幸添城主閤下至恩厚德以去月內掘去次今飭於該面任是乃噫彼無據妄作者拒逆官令尙無掘移之擧仍于玆敢▣…▣更訴爲去乎 參商敎是後特下處分之地千萬伏祝行下向敎是事城主處分癸巳十一月 日任實官[着押][印][印][印][題辭]塚主期於搜覓來訴事初八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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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안병진(安丙鎭) 원정(原情)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巳四月 日 南原居山民安丙鎭 城主 癸巳四月 日 安丙鎭 任實郡守 전라북도 임실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18_01_A00001_001 1893년 4월에 남원(南原)에 안병진(安丙鎭)이 임실군수(任實郡守)에게 올린 원정(原情)으로 어머니 무덤에 근처에 투총을 파내주기를 탄원한 내용. 1893년 4월에 남원(南原)에 안병진(安丙鎭)이 임실군수(任實郡守)에게 올린 원정(原情)이다. 안병진의 어머니 묘가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東面) 왕방촌(旺方村)에 있었는데 지난달 20일 쯤에 갑자기 누구인지 모르는 투총이 생겼으니 관에서 이를 파내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에 관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찾은 후에 다시 소를 올리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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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所谷化民黃楠右謹言民之祖父山與姑母山俱在於巳洞坊鄕約洞一麓而爲局徧少定直禁養矣庚子年分意外近處居柳成泰偸葬於祖父山下姑母山切近之地故其時起訟則 前城主敎是以坐立之未見置民落科大抵山訟之法雖十步有未掘處雖未見有當掘處盖此柳塚雖千步當掘也雖俱未見可掘也民之於柳以世嫌不可共天而共國也生不與共天共國則死何同山而同崗乎是故 前城主題敎雖有禁養則黃楠次知之 處分然民不以爲幸不以爲快方欲?訟期掘之際噫彼柳哥以奸凶餘種自以爲得訟至于今日乃敢私畫分以爲兩界以民祖父山階下姑母山龍尾把作己物盖其禁養之見侵不足爲憤而究以事理則在渠所不敢生意也在民所不可見奪也塚之不掘亦云至寃況可割地使彼讐骨安臥又充其欲哉不勝寃憤玆敢仰訴 洞燭敎是後同柳哥偸葬之罪爲先嚴治牢囚督掘使雪百世之恥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使[着押][題辭]前等已決之訟不必更訴事…▣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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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황평(黃枰)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丑九月 巳洞化民黃枰 城主 乙丑九月 黃枰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대곡 장수황씨가 남원 무민공황진기념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황진 장군 가문의 고문서』, 흐름, 2016. HIKS_Z012_01_A00006_001 을축년 9월에 남원 사동방(巳洞坊)에는 사는 유생 황평(黃枰)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소지. 을축년 9월에 남원 사동방(巳洞坊)에는 사는 유생 황평(黃枰)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소지이다. 황평은 이 소지에서 이인환(李仁煥)이라는 자가 자신의 동생 황철(黃哲)의 양가(養家) 선산은 물론 오래도록 길러온 송추(松楸)를 빼앗으려고 산송(山訟)을 일삼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황철의 양가 선산은 이인환의 선산 기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선산 사이에는 문경주(文景周)의 무덤과 큰 들(大野)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인환은 황철의 선산이 자신들의 안산(案山)이라고 주장하면서 여러 해 동안 산송을 일으켰으나 낙과(落科)하고 말았다. 이인환은 그 뒤에는 황철의 송추를 빼앗으려는 욕심으로 관아와 감영에 소지를 올렸으나 소지를 숨겨놓고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끝내는 적간(摘奸)하라는 제사를 얻어냈지만 이인환은 아직도 문서를 손에 쥐고는 조사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분명 뒷날 간교한 계책을 꾸미려는 속셈이라고 황평은 주장하고 있다. 이인환이나 황철이나 각각 산지기를 두어 선산을 수호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이인환이 소송을 하려는 것은 남의 선산 송추를 빼앗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니, 관에서 즉각 적간(摘奸)에 나서서 선산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황평은 호소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남원부사는 이인환을 데려와서 대변(對卞)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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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居幼學李仁濟(手決)右謹陳情由矣段 丁丑年避亂時 矣身一家 欲入▣▣(智異)山 預運家莊及粮米 留置於山下居奴德守之家爲有如可 及其事㝎之後 同物件乙 還欲輸来 則德守所守雜物 沒數見失是如稱說爲臥乎所 極爲痛駭 不得不還徵是乎等以 其矣略干田畓乙 計價買賣 受明文爲有如乎 同奴德守 乃矣身祖父外邊張門傳得奴也 上年良中 光州居李仁相亦 與矣身外族本府居張宇冑 奴婢相訟 終得決勝是在如中 同奴德守乙 仁相亦 其矣決得奴之所生是如爲白遣 德守生時 矣身家買▣(賣)▣(受)明文田畓乙 亦爲據▣▣(奪設)計 上年秋收時 仁相亦 潛來田畓所在處 与並作者同謀 田畓所出乙 沒數奪去 ▣…▣▣(事)極無據是乎▣(矣) ▣…▣▣(矣)身適以身病 未遑他事 至今迂延 未得呈卞爲有齊 大槩德守亦 李仁相元來▣…▣▣▣(乙良置) ▣(其)矣已賣▣…▣ 固不可推奪是白去乙 况旀本是矣身家次知奴子以 仁相今始相訟決得是乎則 德守生時放賣田畓並▣(奪)▣…▣無理是白乎等以 同德守處 所捧文記乙 粘連仰訴爲白去乎明政之下 洞燭曲折 同田畓 今年所出乙 矣身次知事 及上年李仁相潛奪禾利十五石乙 亦爲徵給事乙 各別行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巡使道 處分乙丑十月 日 議送[題辭]隱狀覆處爲乎矣 事係相訟是去等 依事目 施行事初一日 隻在官巡使[着押][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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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缺)…▣▣(宇)柱〔冑〕相訟奴婢乙決得之後矣身祖父外邊張門▣…▣乙李哥托以決得奴之所生是如爲白遣德守生時矣▣(身)▣…▣受明文田畓乙亦爲據奪設計衿〖今〗秋良中李哥亦潛來田畓所在處与並作者同謀田畓禾利奪去爲有臥乎所事極痛駭爲白齊大槩同德守則与張家所▣(爭)之奴有異故今番李哥決得立案中元不擧論是白遣昔年谷城官立訟時亦無相詰之事是白如可今至七十餘年後始生…▣據是乎旀▣▣內事在六十年前間勿…▣則德守▣…▣奴之所生是乙喩…▣張氏侍養▣▣(孫以)▣…▣奪是乎旀况旀此田畓則▣…▣無端己〖記〗上之物▣…▣居在智異山下故丁丑年避亂時矣身一家欲入於智異山▣…▣(運)家璋及粮米留置於德守之家爲有如乎及其事▣…▣同物件還欲輸來則德守亦所守雜物乙沒數見失是如稱託爲臥乎所極爲痛愕不得不還徵是乎等以其矣若干田畓乙計價買賣受明文爲有如乎厥後德守妻上典稱名人自京下來德守之子愛龍器物己〖記〗上之時矣家明文所付畓庫叚其矣生時已賣之物以依法不爲擧論爲有如乎今者李哥欲爲己〖記〗上是乙喩良置同德守有子孫奴則法無己〖記〗上之理是▣▣(乎旀)設或己〖記〗上與其矣生時放賣之物乙尤不可混同奪取是乎旀又况法典過限後奴婢乙亦不爲推奪是乎則以此以彼李哥所爲極爲無理是去乎同李仁尙處田畓禾利還徵事各別嚴題行下爲只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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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이정전(李正銓) 등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申正月 日 李正銓 李德煥 등 南原府使 甲申正月 日 李正銓 李德煥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3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송준호(宋俊浩), 『朝鮮社會史硏究』, 일조각, 1987.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1824년(순조 24)에 이정전(李正銓) 등이 작성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한 단자(單子). 1824년(순조 24) 정월에 이정전(李正銓)이 이덕환(李德煥) 등 그의 종인(宗人) 80여명과 함께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이다. 이 산송은 1년 8개월여 동안 지속되었으며(1824년 1월~1825년 9월) 이와 관련하여 현재 전하는 소지는 모두 19건에 이른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둔덕(屯德)에 세거(世居)하던 전주이씨들의 산송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송사(訟事) 중의 하나였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산송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정전의 11대조(代祖)이며 동시에 전주이씨 입남원조(入南原祖)인 이담손(李聃孫)의 묘소가 동부(同府) 말천방(末川坊) 분토동(坌土洞)의 선산에 있었는데 그 산 아래에 살고 있던 심목(沈睦)과 심규(沈奎)라는 사람이 위 선산의 경계를 침범하여 그곳에 있던 소나무를 베어 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정전 등이 이에 항의하자 그들은 위 소나무가 심어져 있던 곳이 바로 자기들의 선조인 심언통(沈彦通) 묘소의 백호(묘를 쓴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이므로 자기들의 땅이며 따라서 거기에 있는 송추(松楸)도 모두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정전 등은 관에 거듭 탄원서를 제출하여 선산의 경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담손의 묘소가 있는 산은 크게 세 줄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줄기마다 소유자들이 달랐다. 즉 제일 오른쪽(동쪽)에 있는 줄기는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선산으로서 거기에는 순천김씨로서 처음으로 남원에 들어온 소위 입남원조인 김이권(金以權)과 그의 후손(後孫)의 묘가 있었다. 제일 왼쪽(서쪽)에 있는 줄기에는 위 이담손과 그의 후손의 묘가 있었다. 이담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주이씨 입남원조이다. 그는 또 앞에서 소개한 김이권의 손녀서(孫女婿)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천김씨 선산과 전주이씨 선산 사이에 있는 줄기가 바로 심목과 심규의 선산이었는데 이곳에는 그들의 입남원조인 심언통의 묘가 있었다. 심언통은 금천찰방(金泉察訪)으로 있다가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계기로 남원 말천방으로 은퇴한 인물로서 그도 역시 위 김이권의 손녀서였다. 또 이담손과는 동서간(同婿間)이자 사돈간(査頓間)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이 분토동의 산에는 순천김씨 김이권이 제일 먼저 묻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담손과 심언통은 위 순천김씨와의 결혼이 계기가 되어 후에 각기 산줄기를 달리하여 이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 산내에 3씨족의 선산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산줄기가 나뉜대로 이에 의거하여 경계를 정하였으나 그것에 애매한 점이 있어서 이와 같은 산송이 벌어졌던 것 같다. 위 탄원서를 접수한 남원부사는 이정전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으며 전주이씨와 풍산심씨(豊山沈氏) 양쪽 모두에게 예전처럼 산줄기가 나뉜 곳을 경계로 하여 각각의 선산을 잘 수호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정전의 생각으로는 이때에 선산의 경계를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후일 다시 말썽이 일어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단자(單子)를 올려 선산의 경계에 대해 관(官)에서 공증(立案)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단자를 올린 지 채 3일도 안되어 심목 등이 자기 산지지가 살 집을 짓는다는 구실로 이담손의 묘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집터를 정하고 그 곳을 마구 파헤쳤다. 그래서 이정전은 심목 등을 만나 설득해 보았으나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정전 등은 다시 남원부사와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심목 등을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이정전이 이와 같이 남원부사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는 동안에도 심목 등은 부지런히 집터를 닦고 집을 지어 3월 20일 경에는 서까래를 올릴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에 이정전 등이 여러 차례 거듭한 탄원의 결과로 집을 더 이상 짓지 말고 철거하라는 남원부사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이정전 등은 이 명령에 따라 산지기의 집을 훼철(毁撤)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심목 등이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정전의 산지기 집(즉 직사(直舍))에 방화(放火)를 하려 했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직사와 묘각(墓閣)의 일부를 부수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정전은 또 다시 남원부에 소지를 올려 심목 등을 처벌해 주고 아울러 심목 등으로 하여금 직사와 묘각을 지어 주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정전 등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와 전라도 감영(監營)에 탄원서를 올려 세 가지 사항, 즉 첫째는 이 산송을 일으킨 심목 등을 처벌해 줄 것, 둘째는 심목 등이 훼손한 직사와 묘각을 다시 건립해 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산의 경계에 대해 관에서 공증(公證)해 줄 것 등을 요망하였다. 이 산송은 이듬해(1825년) 3월경에 일단락된 듯하였으나 5월과 8월에 이정전이 또 다른 문제, 즉 소송 도중에 심목 등이 작벌(斫伐)한 송추가(松楸價)의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또 다시 송사가 있게 되었다. (이 문서의 사진에는 제사를 작성한 부분이 훼손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문서가 훼손되기 전에 탈초한 부분이 있어서 원문텍스트에는 이를 삽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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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旨吳生員奴一魯右謹言所志段奴矣宅柴場四十餘年前給價五兩買得於此山無水場而定界昭然載錄於文券是乎所逐年刈來矣去月良中上山依前柴役是乎則山洞朴哥爲姓人稱以渠之墳山在於矣柴場數千步之外是如作梗非常刈置柴草奪取生噫〖臆〗此何無法頑悖之人乎設或矣柴場初無文券處渠以一常人數千步二三里之外禁養果是法外之事而況四十餘年前給価買得之地乎矣身則在於二十里外而渠則住接於近地逐日作梗奪取刈薪圖奪柴場欲買於他人奸計也私難爭詰買得文卷前呈所志帖聯仰訴叅商敎是後上項朴哥捉入案下有文卷柴場橫奪之罪各別重治後從文卷依前定界刈薪以爲御冬之地爲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 處分乙酉八月 日[題辭]卽對官形址摘奸嚴飭禁斷向事 卄六日面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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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년 수지방(水旨坊) 오생원노(吳生員奴) 일로(日老)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戌八月 日 水旨吳生員奴日老 使道 丙戌八月 日 奴日老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4_01_A00010_001 병술년 8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일로(日老)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 병술년 8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일로(日老)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일로는 한 해 전인 을유년에도 같은 내용의 소지를 관에 올렸었다. 즉, 상전 오생원이 40여년 전에 5냥을 주고 시장(柴場)을 매입하여 해마다 나무를 베어왔는데, 산동(山洞)에 사는 박가(朴哥)라는 자가 그 시장에서 수 천보 떨어진 곳에 자신의 산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난동을 부리고 베어 논 시초(柴草)를 빼앗았다. 오생원에게는 40여년 전에 돈을 주고 산 문기가 분명히 있는데도 박가가 소란을 피우며 이미 베어 논 나무를 빼앗고 시장을 탈취하려고 하자, 오생원은 남원부사에게 소를 올려 그를 처벌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남원부사는 상황을 엄밀히 조사한 뒤에 잘못된 행동을 금단하라고 면임(面任)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박가는 관령(官令)도 무시하면서 계속 소란을 피웠다. 이에 오생원이 자신의 노 일로를 내세워 소를 다시 올려 박가를 처벌해달라고 탄원하였다. 남원부사는 면임에게 박가를 잡아다가 조사하라고 다시 제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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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旨吳生員奴日老右謹言所志段矣宅柴場四十餘年▣…▣買得於此山無水場之定界昭然載錄於文券是乎所逐年刈來矣去月良中上山依前柴役是乎則山洞朴哥爲姓人稱以渠之墳山在於矣柴場數千步之外是如作梗非常刈置柴草奪取生臆此何無法頑悖之人乎設或矣柴場初無文券處渠以一常人數千步二三里之外禁養果是法外之事而況四十餘年前給価買得之地乎矣身則在於二十里外而渠則住接於近地逐日作梗奪取刈薪圖奪柴場欲買於他人奸計也年前呈所是乎則 題旨內形址摘奸嚴飭禁斷向事是乎置〔矣〕不遵官令作梗非常故私難爭詰更爲文卷帖聯仰訴叅商敎是後上項朴哥捉入案下有文卷柴場橫奪之罪各別重治後從文卷依前定界刈薪永爲御冬之地爲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 處分丙戌八月 日使[着押][題辭]朴哥將者眼同捉上以爲査處事卄九日面任[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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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오생원노(吳生員奴) 태위(太爲)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申 七月 日 水旨吳生員奴太爲 使道 壬申 七月 日 奴太爲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官[着押], 手記主徐宗元[着名]訂筆 風憲金[着名] 3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4_01_A00012_001 임신년 7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태위(太爲)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 임신년 7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태위(太爲)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지난 임술년에 오생원 일가가 두동(豆洞)에서 동면(東面)으로 이사를 와서는 5냥을 주고 시장(柴場)을 매입했으며, 해당 문기도 받아놓았다. 그 뒤 패악한 초군(樵軍)들이 주인이 없는 시장이라고 하면서 경계를 범했기 때문에 관에 소를 올려 입지(立旨)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시초(柴草)를 베어 왔다. 그런데 기경(己庚) 이후로는 소가 없어서 시초도 베지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이 마을에 사는 간활하기 그지없는 서종원(徐宗元)이라는 상놈이 상전의 시장을 자신의 시장이라고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오생원측은 노 태위를 내세워 시장을 매입할 때 작성했던 문기와 입지, 관련 소지 등을 점련하여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위 서종원을 잡아다가 양반을 무엄하게 대한 죄를 엄히 다스리고 매득한 시장을 다시는 침범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원부사는 조사를 하되 잡아오지는 말라는 제사를 내렸다. 한편 이 소지의 배면에는 같은 해 8월 초7일에 위의 서종원이 오생원 앞으로 작성한 수기가 적혀 있는데, 오생원이 시장을 매입했다는 문기가 분명하므로 시장을 다시 넘겨주고 이후로는 절대 이를 매매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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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居安禧鎭右謹陳情由段民之曾祖考山在於 治下骨若面龍沼洞後麓而腦上階下有偸葬兩塚故搜隻之日階下犯塚姑未搜隻腦上偸塚知以黃敬模之犯葬故今於呈訴圖形之場同敬模謂言階下犯塚果是渠父之塚是如來月初四日掘移之意成手標以給故姑爲捧標而待限不掘則更爲來訴是白在果壓脉處犯葬果難搜隻乙仍于玆更仰訴爲去乎 參商敎是後同壓脉偸塚卽爲令飭於該洞以爲掘去使遠方殘劣之民保先之地 處分事行下向敎是事城主處分乙巳九月 日光陽官[着官](題辭)塚主搜覓前無以掘移事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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巳洞化民黃枰右謹言情由段遐土人心雖曰不淑豈有如李仁煥等乎民不勝憤惋擧槩仰陳伏乞細細垂察焉大抵以山家禁養松楸濫出橫慾非理好訟者渠之長技也民之弟哲養家先山在於李仁煥先山別麓他局而以境界言之自李哥之山之文景周塚越大野別局而稱以渠之案山累年起訟渠自落科是遣又生松楸之慾越文哥之境界欲奪民之弟養家山禁養呈 官呈 營掩匿不見所志而末乃得摘奸之題然終不起隻摘奸者把作渠之文券日後待時之計也彼此定山直守護禁養者積有年所而今始起鬧者有何奸計是喩以此言之李仁煥之橫出非理之慾奪人不當之禁養不卞可知因而置之則難測李哥等日後之奸計故緣由仰訴 叅商敎是後嚴明 題下卽爲摘奸無至禁養見奪之地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乙丑九月使[着押][題辭]李仁煥率來對辨事卄八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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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旨吳生員奴日老右謹陳所志段矣宅柴場二十餘年前給価五兩買得於此山無水場而定界昭然載錄於文券中是乎所逐年刈來矣甲乙以後以無井之致未得刈薪是遣因爲陳置禁養矣至於今年刈薪次上山是乎所豆洞居金哥爲名人素以頑悖行怪之類矣宅柴場限界上邊一麓肆然據奪此何頑習定界非但文記中昭載二十餘年刈取柴場空然見奪於他人極爲冤枉買得文券帖聯仰訴伏乞叅商敎是後上項金哥捉致案下有文卷柴場據奪之罪各別重治後從文卷依前限界刈薪以備御寒晨夕寒凍爲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 處分丁丑八月官[着押][題辭]眼同來卞事初四日兩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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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主前 單子惶恐仰瀆于仁威伏以民先祖春城正墳山在於末川坊坌土洞是乎所以其尊▣(則)親王孫墳墓也以其久則三百▣(年)▣…▣有累▣…▣▣(禁)養亦有已例▣…▣▣(寸)土尺地一草一木孰敢有窺闖於其間者▣(乎)噫人心不古變恠輒出千〃萬〃意慮之外 末川坊居士民▣(沈)奎等民矣山▣…▣稱以渠矣山白虎猝然生臆▣…▣作拿百般作梗是如可末乃搆成虛辭誣呈于官家云〃未知所呈內辭意果何以托說是旀題音內處分亦何以決給敎是加喩旣以呈之則其終不示者獨何心哉民等請以彼山此山之各有界限者一〃条陳伏乞細〃垂察而明断焉盖民山來龍有三麓焉東一麓卽本坊居金氏之先山也中一麓卽末川居▣(隻)民之先山也西一麓卽民先祖春城正墳山也三山分界各有天作之谷〃以爲限各主其麓彼此次知都不過各一麓而已是以東不得犯於中〃不得犯於西其間雖有些少長▣…▣齊▣各守一麓禁養以來者于今三百年於玆矣則此豈非萬世不易之界限而今此沈哥之稱以白虎欲奪他矣山累百年守來主龍者實是萬〃無忌▣…王子王孫之墓大有別於凢他士夫之山則彼之猝然生臆於所重有在之山亦非法▣…▣然得訟則幸▣…▣至於落訟元非我土何害之有故也言念至此寧不寒心若使民等先山咫尺主龍乙▣(猝)▣…▣山之▣…▣聲仰籲爲去▣…▣ 叅啇敎是後 嚴明處決以杜其僥倖之計非理之習使之各主其主▣…城主 處分甲申正月 日 屯德化民幼學李德煥 李仁煥 李圭煥 李運煥 李之煥 李珏煥 宗孫李正銓 李得煥李致白 李致健 李俊錫 李致蕃 李致文 李致輔 李致中 李揆錫 李致孝 李致萬 李杞錫 李輔錫李師錫 李致甲 李致▣ ▣(李)▣▣ ▣(李)▣(龍) ▣(李)▣▣ 李致洪 李致五 李致邦 李致玉 李致禹 李致臣 李致光 李致珏 李致珀 李錫林 李錫璋 李祐永 李箕永 ▣▣(李德)▣ ▣▣▣(李基淵) 李震淵 李行淵 李天植 李根植 李允植 李元植 李可植 李達淵 李豊淵 李翼鎭 李 運 李 灃 李瑚淵 李能淵 李 涉 李鏡淵 ▣▣▣(李用銓) 李度銓 李夏銓 李慶淵 李時淵 李在淵 李學▣ 李▣(翼)▣ 李▣▣ (中間缺) 李▣▣ 李相▣ 李 淡 李 洛 李 瀷 李達源 李學源 李一源 李震源 李一圭 李箕圭 李天圭 李顯圭 李玄圭 李和淵 李爀淵 李▣淵 李▣淵 李▣淵 (以下缺)[題辭]▣(雖)尋常百姓之塚各守境界不可違越是去等况…▣…▣(王)孫山所不過▣…一麓者乎…▣日前沈奎…▣(之)訴 可謂▣…▣▣(瞞弄)另加(以下缺)使[着押][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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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이정전(李正銓) 발괄(白活)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申二月 日 李正銓 南原府使 甲申二月 日 李正銓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1824년(순조 24)에 이정전(李正銓)이 작성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한 발괄(白活). 1824년(순조 24) 2월에 이정전(李正銓)이 산송으로 인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제출한 발괄(白活)이다. 이 산송은 1년 8개월여 동안 지속되었으며(1824년 1월~1825년 9월) 이와 관련하여 현재 전하는 소지는 모두 19건에 이른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둔덕(屯德)에 세거(世居)하던 전주이씨(全州李氏)들의 산송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송사(訟事) 중의 하나였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산송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정전의 11대조(代祖)이며 동시에 전주이씨 입남원조(入南原祖)인 이담손(李聃孫)의 묘소가 동부(同府) 말천방(末川坊) 분토동(坌土洞)의 선산에 있었는데 그 산 아래에 살고 있던 심목(沈睦)과 심규(沈奎)라는 사람이 위 선산의 경계를 침범하여 그곳에 있던 소나무를 베어 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정전 등이 이에 항의하자 그들은 위 소나무가 심어져 있던 곳이 바로 자기들의 선조인 심언통(沈彦通) 묘소의 백호(묘를 쓴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이므로 자기들의 땅이며 따라서 거기에 있는 송추(松楸)도 모두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정전 등은 관에 거듭 탄원서를 제출하여 선산의 경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담손의 묘소가 있는 산은 크게 세 줄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줄기마다 소유자들이 달랐다. 즉 제일 오른쪽(동쪽)에 있는 줄기는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선산으로서 거기에는 순천김씨로서 처음으로 남원에 들어온 소위 입남원조인 김이권(金以權)과 그의 후손(後孫)의 묘가 있었다. 제일 왼쪽(서쪽)에 있는 줄기에는 위 이담손과 그의 후손의 묘가 있었다. 이담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주이씨 입남원조이다. 그는 또 앞에서 소개한 김이권의 손녀서(孫女婿)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천김씨 선산과 전주이씨 선산 사이에 있는 줄기가 바로 심목과 심규의 선산이었는데 이곳에는 그들의 입남원조인 심언통의 묘가 있었다. 심언통은 금천찰방(金泉察訪)으로 있다가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계기로 남원 말천방으로 은퇴한 인물로서 그도 역시 위 김이권의 손녀서였다. 또 이담손과는 동서간(同婿間)이자 사돈간(査頓間)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이 분토동의 산에는 순천김씨 김이권이 제일 먼저 묻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담손과 심언통은 위 순천김씨와의 결혼이 계기가 되어 후에 각기 산줄기를 달리하여 이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 산내에 3씨족의 선산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산줄기가 나뉜대로 이에 의거하여 경계를 정하였으나 그것에 애매한 점이 있어서 이와 같은 산송이 벌어졌던 것 같다. 위 탄원서를 접수한 남원부사는 이정전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으며 전주이씨와 풍산심씨(豊山沈氏) 양쪽 모두에게 예전처럼 산줄기가 나뉜 곳을 경계로 하여 각각의 선산을 잘 수호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정전의 생각으로는 이때에 선산의 경계를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후일 다시 말썽이 일어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단자(單子)를 올려 선산의 경계에 대해 관(官)에서 공증(立案)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단자를 올린 지 채 3일도 안되어 심목 등이 자기 산지지가 살 집을 짓는다는 구실로 이담손의 묘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집터를 정하고 그 곳을 마구 파헤쳤다. 그래서 이정전은 심목 등을 만나 설득해 보았으나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정전 등은 다시 남원부사와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심목 등을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이정전이 이와 같이 남원부사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는 동안에도 심목 등은 부지런히 집터를 닦고 집을 지어 3월 20일 경에는 서까래를 올릴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에 이정전 등이 여러 차례 거듭한 탄원의 결과로 집을 더 이상 짓지 말고 철거하라는 남원부사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이정전 등은 이 명령에 따라 산지기의 집을 훼철(毁撤)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심목 등이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정전의 산지기 집(즉 직사(直舍))에 방화(放火)를 하려 했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직사와 묘각(墓閣)의 일부를 부수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정전은 또 다시 남원부에 소지를 올려 심목 등을 처벌해 주고 아울러 심목 등으로 하여금 직사와 묘각을 지어 주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정전 등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와 전라도 감영(監營)에 탄원서를 올려 세 가지 사항, 즉 첫째는 이 산송을 일으킨 심목 등을 처벌해 줄 것, 둘째는 심목 등이 훼손한 직사와 묘각을 다시 건립해 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산의 경계에 대해 관에서 공증(公證)해 줄 것 등을 요망하였다. 이 산송은 이듬해(1825년) 3월경에 일단락된 듯하였으나 5월과 8월에 이정전이 또 다른 문제, 즉 소송 도중에 심목 등이 작벌(斫伐)한 송추가(松楸價)의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또 다시 송사가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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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년 수지방(水旨坊) 오생원노(吳生員奴) 일로(日老)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丑八月 水旨吳生員奴日老 使道 丁丑八月 奴日老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4_01_A00010_001 정축년 8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일로(日老)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 정축년 8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일로(日老)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상전 오생원이 20여년 전에 5냥을 주고 시장(柴場)을 매입하여 해마다 나무를 베어왔는데, 갑을년 이후로는 우물이 없어서 방치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금년에 오생원측에서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두동(豆洞)에 사는 김가(金哥)라는 자가 오생원의 시장 상변 한 기슭을 제 마음대로 빼앗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오생원이 이곳 시장을 사면서 받은 명문에 시장의 경계가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억울하게 시장을 강탈당했으니 그 김가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려달라고 오생원의 노 일로는 상전을 대신하여 탄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남원부사는 양자를 데려와 대질하도록 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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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旨吳生員奴太爲右謹陳所志事段矣身所居之地本以野地柴草極艱故一村民人此山一麓各有元定柴場是乎矣矣上典新生計所致未備柴場是如可去壬戌良中豆洞居矣上典一家兩班移寓於東面之地而次知柴場有斥賣之事故矣上典給價五兩文而買賣成文之後頑悖樵軍輩稱以無主柴場慮或有侵犯限界之違卽爲呈出立旨而數〔累〕年刈取柴草是如可己庚以後未立牛隻故果未刈取柴草矣至於今年本村漢徐宗元素是奸猾無比之輩稱以渠矣柴場放賣他人處▣注柴場本主未及刈柴卽一年停刈不是異事是遣果暗然放賣實是永奪之凶計也渠以一村常漢少不忌憚隣居兩班如是濫習尤極過甚同人柴場買得文記及立旨所志並帖聯仰訴伏乞叅商敎是後上項宗元捉致 案下爲先重治其無嚴兩班之罪敎是遣買取柴場更無侵犯之地爲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 處分壬申 七月 日官[着押][題辭]査勿行捉來事 十九日狀者(背面)壬申 八月初七日吳生員前手記右手記事段矣身此山柴場果是右宅買得之物的實之文卷昭然故以爲還納是遣日後不可交貸之至如是成手記納上爲去乎後或有他人侵犯之事以此爲凖是齊手記主徐宗元[着名]訂筆 風憲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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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안희진(安禧鎭) 원정(原情)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申九月 日 南原郡山民安禧鎭 城主閤下 丙申九月 日 安禧鎭 任實郡守 전라북도 임실군 任實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18_01_A00001_001 1896년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희진(安禧鎭)이 임실군수(任實郡守)에 올린 원정(原情)으로 자신의 산소 근처에 투장한 무덤을 파내주기를 탄원하였다. 1896년 9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희진(安禧鎭)이 임실군수(任實郡守)에 올린 원정(原情)이다. 투장(偸葬)은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며, 신원을 하기 위해서는 법관의 심리가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투장자를 4년 동안이나 찾았지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으니 관에서 파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임실군수는 투총자를 3년이나 찾으면서 기다렸는데도 한 장의 소장밖에 없는가라고 반문하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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