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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말이 어눌해지다 偶然言語鈍弱 폐경186)이 쇠약하고 또 풍증까지 있으니 肺經衰弱又兼風말이 분명치 못해 반벙어리와 같구나 語不分明半啞同예양의 심정은 이 일과 상관없거니와187) 豫讓心情非本事주리188) 상태와 같은 이 늙은이는 누구인가 侏離狀態是何翁노망 난 건 남들 얼굴을 보기가 부끄럽기는 해도 癡呆縱愧瞻人面어눌한 건 성인 되는 일을 배우는 데 무방하다오 訥訒無妨學聖功요수에 의심하지 않는다189)는 옛 가르침이 밝게 있으니 夭壽不疑明古訓하늘이 내리는 처분만을 그저 기다릴 뿐이라네 處分只可俟蒼穹 肺經衰弱又兼風, 語不分明半啞同.豫讓心情非本事, 侏離狀態是何翁?癡呆縱愧瞻人面, 訥訒無妨學聖功.夭壽不疑明古訓, 處分只可俟蒼穹. 폐경(肺經) 십이 경맥의 하나로, 대장에 속하고 폐에 이어진다. 예양(豫讓)의……상관없거니와 예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았는데,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죽이자,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병 환자처럼 변신하였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었으며, 시장에서 걸식하며 거지행세를 하면서까지 조양자를 암살하고자 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예양이 숯을 삼켜 일부러 벙어리가 된 고사를 두고 말한 것이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주리(侏離) 방언(方言)으로, 소수민족 혹은 그들의 언어나 문자를 이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오랑캐의 소리를 뜻하기도 한다. 요수(夭壽)에 의심하지 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요절하거나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아 몸을 닦으며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貳)는 의(疑)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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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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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2년 김경술(金暻述)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申二月 日 金暻述 城主 壬申二月 日 金暻述 泰仁縣監 전라북도 태인군 2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72년(고종 9) 2월에 김경술(金暻述)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72년(고종 9) 2월에 태인(泰仁)에 사는 김경술(金暻述)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김경술은 빈한(貧寒)하여 전주(全州)에 사는 사인(士人) 송진택(宋鎭澤)의 친산(親山)을 수호하였다. 1월 27일, 송총(宋塚)의 섬돌 아래 인적(人跡)이 있어 가보니 투장(偸葬)을 하던 역군(役軍)들은 달아나고 김우서(金禹瑞)만 있었다. 하관(下棺)만 한 상태이므로 관만 꺼내면 되지만 김우서 혼자는 어렵다고 하여 우선 용서하고 다음 날 스스로 관을 꺼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김우서는 관에 무고(誣告)하였고 관정에 대령하게 되었을 즈음에 사화(私和)를 청하며 장례에 들어간 돈 5냥을 요구하였다. 김우서에게 잘못한 것도 없이 억지로 사화를 하고, 그가 요구한 장례비 5냥도 빚까지 얻어 지급하였다. 그런데 또 김우서가 관에 김경술을 무고하여 족쇄를 차고 무릎까지 꿇리더니 돈을 더 주면 사화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김경술은 백골을 핑계로 돈을 토색하는 김우서를 엄히 조사하여 처분해 달라고 관에 탄원하였다. 태인현감은 김우서의 무소(誣訴)는 알고 있으니 다시 조사할 것이 없고 밖으로 방송(放送)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수호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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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백언7)【시림】에게 보냄 與族兄伯彦【時林】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가 마침 내렸는데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까. 우리들이 서로 교유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금년에 만나도 다만 지난해의 공부 수준에서 진보가 없고 오늘 만나도 다만 전일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정도이니, 분발하여 힘쓰는 뜻은 도리어 이전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대저 사람이 뜻을 세우는 초기에는 대체로 왕성한 기세가 일어 진보할 가망이 있을 듯하지만 오래되면 의지가 약해지고 마음이 해이해져 끝내 떨치지 못하고 마니, 이는 일반 사람들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우리들의 공부가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 뿐이라면 당일 서로 기약한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일 뿐만이 아니니, 천하의 도리가 또 어찌 진보하지도 않고 퇴보하지도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산중에서 문을 닫은 채 외롭게 홀로 거처하느라 강습하지 않고 경계하는 것도 없으며, 보고 느끼는 것이 적고 다짐한 마음이 해이해져 허송세월을 보내며 진보는 없고 퇴보만 있으니 어찌합니까. 안으로는 부형을 속이고 밖으로는 사우를 속여 부형과 사우의 바람을 끝내 저버리게 하였으니, 이는 소생의 크나큰 죄입니다. 벗과 사우 가운데 만일 매우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들 가련하게 여겨 구제하기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족형께서는 가장 가까이에 살고 깊이 알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부터 왕래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구구하게 허여하는 습속을 절대 본받지 말고 모름지기 맹렬하게 충고하고 통렬하게 꾸짖어,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여 뜻이 어지럽고 마음이 해이해져 명성을 떨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근심이 없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상의 행차가 보름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그때 만나자는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省楸返程。驟雨時至。未審駕旋安穩否。吾輩相從。不爲不久矣。今年相逢。只是去年工夫。今日相逢。只是前日說話。而其奮勵勉作之意。則反有不及於前。夫人於立志之初。多爲銳氣所使。似有進及之望。而及其久也。則意爛心解。終於不振者。此常情通患也。吾輩工業。止於此而已。則不惟不能副當日相期之意。而天下道理。又豈有不進不退者哉。弟杜門峽庄。孑然獨居。講習廢而規警絶。觀感疎而繩約弛。日邁月征。未見其進。而只見其退。奈何。內欺父兄外欺師友。而使父兄師友之望。竟歸差池。則此生罪戾。大矣。知舊士友。苟有相愛之深者。孰不爲之矜然。而思有以救之。况族兄居之最近。服之最深者乎。自今而有往復。切勿效世人區區推與之習。須猛告痛責。使之畏懼修省。俾無意爛心解終於不振之患。幸甚。沙行。望後爲料否。伊時聯鞭之約。倘記念耶。 백언(栢彦)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이다. 보성 출생으로, 기정진의 문인이며, 정의림의 사촌 형이다. 문집으로 《월파집(月波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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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33) 최 어른【익현】에게 올림 上勉菴崔丈【益鉉】 의림(義林)이 약관의 나이에 호중(湖中)을 유람하여 삼가 화서(華西) 선생이 경기(京畿)에서 창도(倡道)하자 원근의 학자가 흡연(翕然)히 따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마땅히 물러나 더욱 힘써서 학문에 조금이라도 진보가 있은 뒤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몇 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왔으니, 개인적으로 놀라고 탄식하며 '나의 학문이 비록 진보하더라도 장차 어디에서 질정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뒤에 신미년(1871, 고종8)에 다시 호중을 유람하다가 삼가 문장(文丈)께서 선생의 고제자로 물러나 전원에서 직접 농사지어 부모님을 봉양하며 자신이 즐기던 바를 미루어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사사로이 삼가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며 '선생이 비록 돌아가셨지만 선생의 도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니, 내 장차 문장께 나아가 절하고 선생의 남은 의론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윽고 문장께서 나와 세도를 위한 계책을 세우셔서 훌륭한 말씀과 곧은 절개가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있으니, 어질다는 명성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 것이 또 어찌 구구한 제가 나아가 질정한 뒤에 있겠습니까. 상대가 어질다는 명성이 이미 자자하므로 제가 배우러 간 뒤에 그 명성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인 듯합니다.) 천 리에 큰 물결이 쳐도 동요됨이 없이 머물러 있은 지 몇 년 되었으니, 북두에 의지하고 달빛 아래 거닐고 싶은 생각을 무엇으로 위로하겠습니까. 의림은 궁벽한 고을의 미천한 종적입니다. 어버이는 늙고 집은 가난하여 구차하게 살아남아 생활하니, 10일 간의 여가를 내어 담장 밖에 나아가 오래된 소원을 이루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남쪽으로 영주(瀛洲)를 바라보며 슬픈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안생 진환(安生進煥)이 가는 편에 감히 이렇게 대신 정성을 펴니, 번거롭게 해 드려 너무나 송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 아끼고 보중하여 나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義林弱冠而遊湖中。伏聞華西先生倡道畿中。遠近學者。翕然從之。自以爲吾當退而加勉。使學有少進而後。有以從事於先生之門也。未幾年。易簀凶音。出於夢外私心驚歎。以爲吾學雖進。將何取正乎。後辛未之年。再遊湖中。伏聞文丈。以先生高弟。退歸田里。躬耕養親。推其所樂。以淑後徒。於是私竊喜幸。以爲先生雖殁。先生之道。猶在於人。則吾且晉拜文丈。得聞先生餘論也。旣而文丈出而爲世道之計。偉韻直節。膾炙萬口。其仁聲之入人也。又豈在於區區就正之下哉。鯨波千里。無撓利稅。而淹留有年。倚斗步月之思。何以自慰耶。義林窮鄕賤蹤也。親老家貧。苟存生活。願得一旬之力。進身棘外。以償宿昔之願。而不可得。南望瀛洲。不勝悵然。玆因安生進煥去。敢此替伸情悃。跡涉煩越。旋切悚仄。伏乞加愛保重。以副家國之望。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대학장구》,《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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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365)을 그리며 懷希淑 언제나 흥을 타고366) 노를 저어 가볼까 一棹何時乘興行봉산에는 밤마다 달만 공연히 밝겠구나 蓬山夜夜月空明꿈속의 혼은 삼분의 고통 견디기 힘들고 夢魂叵耐三分苦시의 격조는 응당 배나 맑음을 알겠네 詩格應知一倍淸요즘 세상 자제들은 모두 태도 속된데 今世芝蘭皆俗態뿌리가 같은 친족은 가장 정이 많다네 同根花樹最多情그대의 성가는 천금처럼 귀중하니 之君聲價千金重원컨대 참공부로 옥을 이루어 부응하게367) 願副眞工用玉成 一棹何時乘興行, 蓬山夜夜月空明.夢魂叵耐三分苦, 詩格應知一倍淸.今世芝蘭皆俗態, 同根花樹最多情.之君聲價千金重, 願副眞工用玊成. 희숙(希淑) 후창의 족제(族弟)인 김현술(金賢述)이다. 흥을 타고[乘興] 흥이 나서 그리운 이를 찾아간다는 뜻이다. 산음(山陰)에 살던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겨울날 밤에 눈이 펑펑 내리자, 흥에 겨운 나머지 멀리 섬계(剡溪)에 살고 있는 친구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밤새 배를 저어 그의 집 문 앞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정작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내 본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온 것이다.[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라고 한 고사에서 원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任誕》 옥을 이루어 부응하게 원문의 '옥성(玉成)'은 역경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가난하고 천함과 근심 걱정은 그대를 옥으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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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촌 황 처사71) 기현에 대한 제문 祭明村黃處士【紀顯】文 오호라! 선생은천품이 우뚝하고기상이 시원하였네풍상을 다 겪고돌아와 과축72)을 정하였네풍월은 끝이 없고송국은 늘 봄 같았네광채를 거두어 숨기고정신을 모았네보배로운 덕은 더욱 살찌고아름다운 명성 가만히 드러났네후손들 가르침에옛 법도 따랐네옛날 을묘년(1855, 철종6)에소자가 책상 지고 배우러 갔었네가르쳐 인도해 주심이 간절하였고교화를 받은 것 흡족하였네한 번 집으로 돌아오고 부터는온갖 일이 침범하였네멀리서 바라본 것이세월이 오래 되었네누가 알았으랴 역책73)이오늘에 있을 줄을상생74)에 달려가 곡하며슬픈 마음 적어 영결을 고합니다 嗚呼。先生天姿挺邁。氣尙磊落。游歷風霜。歸占薖軸。風月無邊。松菊長春。潛光斂輝。聚精會神。寶德加腴。令聞闇章。敎授來裔。依倣古程。音在乙卯。小子負笈。提撕懇到。董蒸浹洽。一自告歸。百故侵尋。涯角相望。歲月已深。誰知易簀出於今日。奔哭象生。綴哀告訣。 명촌(明村) 황 처사(黃處士) 황기현(黃紀顯)을 말한다. 정의림이 10세에 《소학》을 배웠던 스승이다. 과축(薖軸) 현인이 은거하는 곳을 말한다.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고반이 높은 언덕에 있으니, 석인이 한가로이 서성이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考槃在陸, 碩人之軸.]"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역책(易簀) 스승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임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며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상생(象生) 궤연을 말하는데 망자가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기물들을 진열하여 살아있을 때를 그대로 본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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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오 오장 택호(宅鎬) 에 대한 만사 挽竹塢吳丈【宅鎬】 사람들이 오랑캐 풍속을 미워한다고 하는데 人言惡夷俗대부분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네 擧非出心肝여섯 아들이 모두 두발을 보전하고 있으니 六子皆全髮공만 홀로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았다오 公獨此世間이것을 가지고 세 귀퉁이를 반증해보면97) 以是三隅反마음속에 간직한 바를 헤아릴 수 있다네 庶可量所存아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而余何狀人공에게 친애의 정을 받았는가 得爲公所親옛날에 공의 집98)에 방문했을 때 昔嘗造軒屛닭고기와 기장밥99)이 소반 위에 그득하였네 鷄黍盈盂盤오늘 아침에 길이 난 것을 보고 훌륭하게 여기며100) 今朝佳成路흐르는 눈물로 옷깃을 온통 적셨다오 涕淚滿衣巾청산은 이를 데 없이 무정하나니 靑山最無情순후한 덕기를 전부 묻어 버렸구나 埋盡德氣淳 人言惡夷俗, 擧非出心肝.六子皆全髮, 公獨此世間.以是三隅反, 庶可量所存.而余何狀人, 得爲公所親?昔嘗造軒屛, 鷄黍盈盂盤.今朝佳成路, 涕淚滿衣巾.靑山最無情, 埋盡德氣淳. 세 귀퉁이를 반증해보면 원문의 삼우반(三隅反)은 한 가지를 알면 이를 미루어 그와 유사한 것을 유추하여 안다는 뜻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으며,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는데도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더 이상 일러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의 집 원문의 헌병(軒屛)은 마루의 난간과 방 안에 둘러친 병풍이라는 뜻으로, 어른의 가까운 곁을 이르는 말이다. 닭고기와 기장밥 원문의 계서(鷄黍)는 살계위서(殺鷄爲黍)의 준말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뜻이다. 《논어》 〈미자(微子)〉에, 어떤 노인이 공자(孔子)의 문인 자로(子路)를 자기 집에 묵게 하여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길이……여기며 미상이다. 다만 원문의 성로(成路)의 용례를 가지고 따져보면, 효자가 어버이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지내면서 어버이의 묘소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하러 왕래하기 때문에 묘소 아래에 '길이 난다.[成路]'는 용례가 다소 보인다. 이를 근거로 여기서는 공을 안장할 선영(先塋)에 올라와보니, 공의 어버이의 묘소 아래에 길이 난 것을 보고 공의 효성을 훌륭하게 여겼다고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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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 소식을 듣고 개탄하다 聞時耗慨然 빈자든 부자든 둘 다 복극85)이 나뉘게 되니 貧富雙將福極分은사의 홍범86)이 이미 밝게 드러나 있다오 殷師洪範己昭然만약 공산 제도가 천하의 공리라고 한다면 若云共産爲公理성현이 외려 참된 도를 모른 것으로 귀결되리라 賢聖還歸昧道眞조철의 균전법을 맹성께서 말씀하셨는데87) 助徹均田孟聖云지금이야말로 백성에게 시행할 만한 때일세 卽今定可施諸民어찌하여 주장함이 자본주의로 돌아가 如何所主歸資本또다시 탐부에게 제멋대로 병탄하게 하는가 更使貪夫恣幷呑 貧富雙將福極分, 殷師洪範己昭然.若云共産爲公理, 賢聖還歸昧道眞.助徹均田孟聖云, 卽今定可施諸民.如何所主歸資本, 更使貪夫恣幷呑? 복극(福極)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아홉 번째 조목인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을 가리킨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 아홉 번째는 향함을 오복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임을 육극으로써 하는 것입니다.[次九曰嚮用五福, 威用六極.]"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이르고, 육극은 흉(凶)함, 단절(短折), 질병(疾病), 우환(憂患), 가난〔貧〕, 악함〔惡〕, 나약함〔弱〕을 가리킨다. 은사(殷師)의 홍범(洪範) 은사는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은나라가 망할 때에 기자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하였고,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해주어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홍범은 바로 홍범구주를 가리키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칙으로,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복극(福極)이다. 홍범은 본디 하우씨(夏禹氏)가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에게서 얻은 것인데,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기자가 무왕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조철(助徹)의……말씀하셨는데 맹성(孟聖)은 맹자(孟子)를 가리킨다. 균전법(均田法)은 백성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는 토지 제도로, 여기서는 정전법(井田法)을 가리킨다. 조철(助徹)은 은(殷)나라의 조세(租稅) 징수법인 조법(助法)과 주(周)나라의 조세 징수법인 철법(徹法)을 이른다. 조법은 정전법에 의거하여 여덟 집에 각각 70묘(畝)의 땅을 나누어 주고, 중앙의 공전(公田) 100묘를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관청에 바치게 한 것이다. 철법은 정전법에 따라 토지를 구획하여 여덟 가(家)에 각각 100묘의 사전(私田)을 지급하고 중앙의 공전 100묘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조세로 바치게 한 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서 맹자가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을 썼고, 주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돕는다는 뜻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徹也, 助者藉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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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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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76년 김익용(金益容) 난곡기(蘭谷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丙子三月下澣 金益容 丙子三月下澣 1876 金益容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76년(고종 13) 3월에 김익용이 종족 김낙곤의 집 처마에 난곡이라고 쓴 편액을 달면서 지은 기문. 1876년(고종 13) 3월에 김익용(金益容)이 종족 김낙곤(金洛坤)의 집 처마에 난곡(蘭谷)이라고 쓴 편액을 달면서 지은 기문(記文)이다. 김익용은 이 기문에서 김낙곤의 집안이 누대에 걸쳐 여러 효자와 열부를 배출하였다고 칭찬하면서, 이는 마치 심산유곡에 홀로 있어도 향기를 품고 있는 난(蘭)의 모습을 닮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김낙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최씨(崔氏), 종조모(從祖母) 박씨(朴氏) 등이 그 효행과 열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아 3효열(孝烈)로 이름이 높다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김낙곤의 아버지는 세 번이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효행 또한 뛰어나 죽을 때까지 선친에 대한 성묘(省墓)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낙곤의 형 김낙진(金洛晉)도 선친을 본받아 문사(文士)로서의 길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효행도 뛰어났으며, 김낙곤도 77세의 나이였지만 한 겨울에도 삭망(朔望)에 성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김익용은 김낙곤에게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원숙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기문에는 작성연대가 병자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김낙곤이 1911년과 1917년에 부안에 있는 논을 각각 팔면서 작성한 명문들을 통해서 병자년을 1876년으로 추정하였다. (1911년 김낙곤(金洛坤)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7년 김낙곤(金洛坤)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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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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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76년 김익용(金益容) 난곡편액후제(蘭谷扁額後題)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丙子三月下澣 金益容 丙子三月下澣 1876 金益容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76년(고종 13) 3월에 김익용이 종족 김낙곤의 집 처마에 난곡이라고 쓴 편액을 달면서 지은 후제. 1876년(고종 13) 3월에 김익용(金益容)이 종족 김낙곤(金洛坤)의 집 처마에 난곡(蘭谷)이라고 쓴 편액을 달면서 지은 후제(後題)이다. 글의 내용은 같은 시기에 그가 지은 난곡기(1876년 김익용(金益容) 난곡기(蘭谷記) 참조)와 거의 동일하다. 뒷 부분만 조금 다를 뿐이다. 김익용은 이 글에서 김낙곤의 집안이 누대에 걸쳐 여러 효자와 열부를 배출하였다고 칭찬하면서, 이는 마치 심산유곡에 홀로 있어도 향기를 품고 있는 난(蘭)의 모습을 닮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김낙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최씨(崔氏), 종조모(從祖母) 박씨(朴氏) 등이 그 효행과 열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아 3효열(孝烈)로 이름이 높다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김낙곤의 아버지는 세 번이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효행 또한 뛰어나 죽을 때까지 선친에 대한 성묘(省墓)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낙곤의 형 김낙진(金洛晉)도 선친을 본받아 문사(文士)로서의 길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효행도 뛰어났으며, 김낙곤도 77세의 나이였지만 한 겨울에도 삭망(朔望)에 성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세상에 숨어 살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 김낙곤의 모습이,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는 꽃과 닮았다면서 찬탄하고 있다. 이 후제는 작성연대가 병자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김낙곤이 1911년과 1917년에 부안에 있는 논을 각각 팔면서 작성한 명문들을 통해서 병자년을 1876년으로 추정하였다. (1911년 김낙곤(金洛坤)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7년 김낙곤(金洛坤)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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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선【청묵】에게 답함 答梁子善【淸黙】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매 사방의 식물들이 녹음이 짙어 가니, 그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에 더욱 깊어지네. 인편을 통해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 나의 고마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면서 줄곧 건강이 좋음을 알게 되니, 더욱 듣고 싶었던 바이네. 편지지 가득 길고 자세하게 쓴 내용은 명리(名理)의 핵심이 아님이 없으니, 그대 공부가 크게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네.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다는 것은 내포한 의미가 대단히 넓다네.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한다면 뜻을 견지하는 것도 참으로 그 안에 있으며, 몸을 닦는다고 말하면 기운을 함양함도 또한 그 안에 들어 있네. 지금 "몸을 닦아서 기운을 함양함에 이르고, 뜻을 견지하여 마음을 다스림에 이른다."고 한다면 아마도 온당하지 않을 것이네. 또한 "생각이 바르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경계하고 들리지 않음에도 두려워한다50)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일이 없을 때 게으르고 방만한 자가 어찌 생각이 처음 발동할 때 그 기미를 살펴서 검속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학문의 본령이 되는 까닭이네. 존양과 궁격(窮格), 성찰과 극치(克治), 그 무엇이 하학상달(下學上達)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사단과 칠정에 대해 논한 것은 옳네. 대저 사단은 기(氣)가 없지는 않지만 주장하여 말한 것은 리(理)이네. 칠정은 리가 없지는 않지만 주장하여 말한 것은 기이네. 주자의 말은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만약 사단이 리에서 발하고 칠정이 기에서 발하는 것을 가지고 사단과 칠정이 자리를 바꾸고 리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이른다면 대단히 옳지 않네. 선유가 '아마도 옳지 않은 듯하다.'고 한 것은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말을 타는 것에 대한 비유는 또한 훌륭하네. 어린 나이의 초학이 이런 정도로 말을 한다는 것에서 재성(才性)의 아름다움과 지향의 올바름에 실로 경탄이 이네. 餞春屬夏。時物蔥倩。懷人一念。於玆尤至。便頭惠幅。出於料外。區區慰沃。曷以勝喩。仍審侍旁學履。連爲佳迪。尤協願聞。滿紙娓娓。無非名理肯綮。可見盛課之長長。治心修身。所包甚廣。言治心則持志固在其中。言修身則養氣亦在其中。今曰修身以至養氣。持志以至治心者。恐涉未穩。又曰恐思慮之不正云云。此戒愼不覩恐懼不聞之意耶。不然。怠惰放倒於無事之時者。安能省檢於思慮幾微之始也。此存養之功。所以爲學問之本領也。存養窮格。省察克治。夫孰非下學上達之謂耶。四端七情。所論是。大抵四端非無氣。而所主而言者。理也。七情非無理。而所主而言者。氣也。朱子之言。其非此意耶。若以四端發於理。七情發於氣。謂四七異位。理氣互發。則大不是先儒之言。恐不可者。其非此意耶。乘馬之喩亦好。妙年初學。能自說得到此。其才性之美。志尙之正。實可欽歎。 보이지……두려워한다 《중용장구》 제 1 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조심하는 것이요,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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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형신에게 답함 答魏亨信 가뭄과 장마가 서로 자리를 내주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니, 이러한 때가 되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평소보다 배나 된다네. 한 통의 귀한 편지가 바람을 따라 이르니 마음에 위안과 고마움이 이는데 마치 침상을 나란히 하거나 책상을 마주한 것 같으니 90리가 먼 곳인지 잘 모르겠네. 더구나 부모를 모시면서 기쁜 일이 많고 건강도 좋다고 하니, 더욱 멀리서 바라는 마음에 부합하네. 편지지 가득 길고 자세하게 쓴 것에서 깨닫지 못해 분하게 여기고 표현을 못하여 답답하게 여겨30) 격앙하는 뜻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되었네. 이것은 학문이 앞으로 나아갈 노맥(路脈)이니, 서로 헤어진 뒤로 우리 벗의 공부가 반드시 허투루 하지 않음을 알겠네. 편지에서 '헛되이 인생을 보내 초목과 함께 썩어간다.'라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이 일게 하네. 또한 '심지(心地)를 진실되게 하고 각고의 공부를 한다.'라는 말과 '솥을 깨뜨리며 막사를 태우고 삼일의 식량을 지닌다.'31)는 등의 말에서 학문하는 입지(立志)의 참된 법과 요결이 이에 지나는 것이 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네. 早寮相禪。金火交遞。此際懷想。有倍平昔。而一角珍函。颺風而至。慰沃感豁。怳然若聯床對榻。不知三舍之爲闊也矧審省侍歡慶。體度茂謐。尤協遠祝。滿幅縷縷。可見憤悱激昂之意。出於至誠。此是進步路脈。吾友別後功夫。必不草草也。所謂虛住百年。草木同腐。令人感歎。又謂眞實心地。刻苦功夫。及破釜燒廬。持三日粮等語。尤覺痛切。爲學立志。眞詮要訣無過於此。 깨닫지……여겨 분비(憤悱)의 분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통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고, 비는 입으로 말을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입으로 말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거니와,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로써 세 귀퉁이를 유추해서 알지 못하면 다시 더 말해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솥을……지닌다 원래 살아 돌아올 기약을 하지 않고 결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을 지니고서 사졸에게 반드시 죽을 것임을 보여 주었던 것[沈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에서 유래한다. 《史記 項羽本紀》 여기서는 죽을 각오로 공부에 매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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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경에게 답함 答文【濟敬】 난초 같은 흉금과 지초 같은 얼굴은 잊히지 않고 내 눈 속에 있네. 뜻밖에 또한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사람이 사랑스럽고 글씨도 사랑스러워 한 자나 되는 거북이나 한 아름의 구슬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고마운 마음을 어찌 견디겠는가. 인하여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하고, 그 남은 힘으로 책을 읽어서 날로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더욱 걱정하던 마음에 위로가 되네. 당기(堂記)의 체제가 우아하지 않아 쓰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보고 나서 쓸데없는 작품이라 치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학문의 방법은 참으로 한 가지가 아니지만 최초에 제일 먼저 할 것은 뜻을 세움에 있네. 학자가 뜻을 지니는 것은 집에 들보가 있고 농부가 밭이 있는 것과 같으니, 눈앞의 자잘한 일이라도 뜻이 서지 않고서 성취한 자가 없네. 더구나 막중하고 막대한 하늘이나 성인과 같은 공적을 세우는 일임에랴. 온전히 그럭저럭 지내며 뜻이 없는 자는 많고 뜻이 있는 자는 적으니, 값을 매길 수 없는 밝은 구슬을 연못에 던져버리고서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긴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우리 벗은 젊은 나이에 매우 뛰어난데, 만 리 앞길에 월로 갈지 초로 갈지는 바야흐로 지금 수레를 출발하는 처음에 달렸으니, 모름지기 맹렬하게 안목을 붙이고 견고하게 발을 내딛어 커다란 책임을 짊어지며 큰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일찍 이런 뜻이 없지 않았지만 견고하게 유지하지 못하여 드디어 마침내 쇠락하고 시들어져서 슬피 탄식함118)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 일은 또한 어진 후배들에게 복철(覆轍)의 경계가 될 것이네. 그대의 편지에서 때때로 가슴에 새길 가르침을 주라고 하였는데, 나는 절대로 그러한 사람이 못되네. 비록 한 때 위로가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찌 실상과 판이하며 정도에 지나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를 돌아봐주는 두터움에 감동하여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지만, 나 또한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 자신도 모르게 매우 부끄럽네. 蘭襟芝宇。耿耿在阿睹中。謂襮又承惠幅。可愛人可愛字。非尺蔡拱壁之比。感戢曷勝。仍詢重省康寧。餘力咿唔。日造優境。尤符懸情。堂記體裁不雅。不合入用。覽付散墨如何學文之道。固非一端。而其最初第一着。在於立志而已。學者之有志。如屋之有脊樑。農之有田地。眼前小小事。未有志不立而能有所就者。況莫重莫大希天希聖之功哉。渾區悠悠。無志者多。有志者少。使無價明珠。淪棄在淵。而視同笆離之物。豈不可哀也哉。惟吾友妙齡騰異。前程萬里適越適秦。方在今日發軔之初。須猛着眼目。牢着脚跟以任大擔負。以做大事業。如何如何。義也早不無此志。而持之不固。遂成枯落悲歎之歸。此一事。亦加以爲賢輩前車之鑑耶。若來喩所謂時惠鑴誨之云。萬萬非其人。雖一時慰藉之言。而豈浮實過當至如是耶。感傾眷之厚。覼縷到此。此亦不逮之言。不覺愧愧。 쇠락하고……탄식함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자식들을 경계하여 지은 글에 "나이가 시절과 함께 더해지고 의지가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려서 마침내 쇠락하고 시들어지게 되면 궁벽한 오두막에서 슬피 탄식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年與時馳, 意與歲去, 遂成枯落, 悲歎窮廬, 將復何及?]"라고 하였다. 《小學 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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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 김공113) 한섭에 대한 제문 祭吾南金公【漢燮】文 남쪽 고을에서 우뚝 태어나사문을 창도하여 밝혔네널리 배움에 일정한 방소가 없어세 선생의 문하에서 따라 섬겼네취사는 바름을 얻었고조예는 어긋나지 않았네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내니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네운수가 양구114)를 만나사설이 크게 일어났네일대가 물 끓듯 하여피가 천 리에 흘렀네호남의 의사들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네베옷에 콩잎 먹으면서도분기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았네고을의 뜰에 급히 달려가니적들이 모이고 병사들은 흩어졌네죽음 보기를 돌아가는 듯이 여겨조용하고 어지럽지 않았네누가 상용115)이라 하겠는가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네사림들 사기가 더해지니풍운이 우뚝하였네수양산 곁에묘소를 만들었네재필116)로 특별히 기록하여만고에 꽃다운 향기 전하네내 병으로 문상가지 못하니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네남을 통해 글을 지어애통한 마음 깃들이네 挺生南服。倡明斯文。博學無方。從事三門。取舍得正。造詣不差。婆娑邱林。世莫我知。運値陽九。邪說大起。鼎沸一路。血流千里。全湖義士。嗟無一人。布衣藿食。舊不顧身。赴急縣庭。賊聚兵散。視死如歸。從容不亂。孰謂傷勇。不負所學。士林增氣。風韻卓犖。首陽之側。衣履是藏。載筆特書。萬古流芳。我病未奔。心焉如摧。因人緘辭。以寓一哀。 오남(吾南) 김공(金公) 김한섭(金漢燮)을 말한다. 자는 치용(致容), 호는 오남,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이항로가 죽은 뒤에 다시 임헌회(林憲晦)와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 되었다. 장흥과 금릉 대명동에 서당을 열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변을 당해 사망했다. 저서로는 《오남집》이 있다. 양구(陽九) 하늘의 재액(災厄)이 몰아닥치는 불운한 시대를 말한다. 도가(道家)에서는 천액(天厄)을 양구(陽九)라 하고, 지액(地厄)을 백륙(百六)이라 한다. 상용(傷勇)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可以死, 可以無死, 死傷勇.]"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재필(載筆) 문구(文具)를 휴대하여 왕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사관이 역사를 기록함을 이른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사관은 붓을 가지고 가고, 사는 말을 가지고 간다.[史載筆, 士載言.]"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왕이 만약 출행하면 사관이 서구를 잡고서 따른다.[王若行,往 則史載書具而從之也.]"라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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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중134)에 대한 제문 祭文翊中文 우리 두 사람은 처음에 얼굴로만 사귄 것이 10년이었고 마침내 마음으로 사귄 것이 10년이었으니, 취미는 날로 더욱 서로 부합하고 경계는 날로 더욱 서로 친밀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날로 더욱 서로 부지런하였는데, 사생과 유명으로 작별함이 갑자기 오늘에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오호라! 공은 법도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평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고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워 잡아 지키는 것이 여유가 있어, 평탄함과 험준함이 일정하지 않아 겪은 세월이 점점 많아짐에 이르러서도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이 쇠하지 않고 취사가 더욱 정밀하여 그 모으고 머물렀던 것으로 만년의 절개를 보호하고 지켰던 것은 넉넉히 여유가 있었는데, 조물주가 좋지 못하여 좋은 일에 장난이 많았으니, 애통하고 애통하도다!의림(義林)은 부모 잃은 여생에 형제가 드문 외로운 신세로 노년에 의지할 이는 오직 벗들 뿐이었는데, 나를 알고 나를 아끼는 공과 같은 사람이 또 나를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장 생각할 만한 것이 있으니, 공이 돌아가시기 전 5일에 내가 와서 문병하자 공이 손을 잡고 울면서 영결하면서 고아를 부탁하였고, 다음날 또 손수 편지를 써서 작별을 고하면서 다시 앞서의 부탁을 말하였네. 무릇 죽음에 임하여 고아를 부탁하는 것은 반드시 백수(白水)와 병산(屛山)135) 같은 사람이라야 감당할 수 있고, 멸렬하고 용렬함이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 같은 내가 어찌 능히 담당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목석이 아닌 이상 평생의 벗이 돌아가실 때 부탁한 것에 대해 힘은 비록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어찌 갑자기 잊어버리겠는가. 영령이 지각이 있다면 이 어리석은 충심 알아주시게. 吾兩人。始以面交者爲十年。終以心交者爲十年。臭味日益相符。規警日益相密。從逐日益相勤。豈知死生幽明之別。遽在今日耶。嗚呼。公生長法家。擩染有素。稟賦美質。操守有餘。至於夷險不一。閱歷漸多。而好尙不替。取舍愈精。其所以蓄聚住停。爲保守晩節之計者。綽有餘地。造物不媚。好事多戱。痛哉痛哉。義林風樹餘生。終鮮煢煢。殘暮所賴。惟是朋友。誰知知我愛我如公者。又且棄我耶。最有所可念者。公歿前五日。余來問疾。公執手泣訣。託以遺孤。翌日又手書告別。復伸前託。夫臨歿遺孤之託。必白水屛山而後。可以當之。顧滅裂頹塌。如倒水不起者。安能擔負也。然我非木石。其於平生知舊臨歿之託。力雖未逮。心豈遽忘。靈其有知。諒此愚衷。 문익중(文翊中) 문봉환(文鳳煥, 1849∼1890)을 말한다. 자는 익중(翊中), 호는 오계(梧溪),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 권19 〈오계 문공 행장(梧溪文公行狀)〉에 보인다. 백수(白水)와 병산(屛山)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와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를 말한다. 주희의 아버지가 병이 위독했을 때 아들 희(熹)에게 유언으로 말하기를 "적계 호원중, 백수 유치중, 병산 유언충 세 사람은 학문에 연원이 있어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분들이니, 내가 죽거든 네가 가서 그분들을 스승으로 섬기어 오직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籍溪胡原仲、白水劉致中、屛山劉彦沖三人, 學有淵源, 吾所敬畏, 吾卽死, 汝往事之, 而惟其言之聽.]"라고 하였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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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인119)에서 비로 지체하며 족질 형일에게 지어 주다 滯雨新泰仁 贈族姪炯日 종일 내린 장맛비로 신태인에서 지체되니 盡日霖天滯泰仁꽃나무 아래120) 옛정이 더욱 친밀함을 느낀다오 舊情花樹覺尤親바둑은 비록 뜻을 부치나 끝내 놀이로 돌아가고 奕雖寓意終歸戱약은 재물 도모가 아니라 사람 구제를 요한다네 藥不營財要濟人사업은 자연히 원대하기를 기대해야 하고 事業自當期遠大세월121)은 단연코 촌음이라도 아껴야 한다오 居諸斷可惜毫分시를 지은 건 한가한 말을 하려 한 게 아니니 題詩匪作閒言語전전긍긍하며 이 몸을 함께 세우려 해야 하네 兢戰須同立此身 盡日霖天滯泰仁, 舊情花樹覺尤親.奕雖寓意終歸戱, 藥不營財要濟人.事業自當期遠大, 居諸斷可惜毫分.題詩匪作閒言語, 兢戰須同立此身. 신태인(新泰仁) 전라북도 정읍(井邑)에 속한 마을 이름이다. 꽃나무 아래 원문의 화수(花樹)는 친족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모임이나 잔치인 화수회를 이르고, 또한 그러한 화수회를 갖는 것을 뜻한다. 당(唐)나라 위장(韋莊)이 꽃나무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이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라는 시를 지어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으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려.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 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세월 원문의 거저(居諸'는 일거월저(日居月諸)의 줄인 말로, 세월이 흘러감을 이른다. 《시경》 〈패풍(邶風) 백주(柏舟)〉에 "해여 달이여, 어찌 뒤바뀌어 이지러지는가.[日居月諸, 胡迭而微?]"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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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공주에서 비로 지체하며 망제 여호122)를 애도하다 六月六日滯雨公州 悼亡弟汝昊 공산123)에서 비로 지체한 지 열흘이 지났는데 滯雨公山過一旬객창에서 갑자기 또 생일124)을 만나는구나 旅窓忽復遇弧辰평생토록 일찍이 많은 일을 겪었건만 平生亦是曾經事이날은 어찌하여 정신이 배로 피곤한가 此日胡爲倍瘁神망제의 생일은 천왕절과 서로 같고125) 亡弟生同天貺節대연의 감회는 회갑인에게 간절하누나126) 大淵感切甲周人아득히 먼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鄕關漠漠知何處남쪽 하늘 바라보며 눈물로 수건 적시네 遙望南天淚滿巾 滯雨公山過一旬, 旅窓忽復遇弧辰.平生亦是曾經事, 此日胡爲倍瘁神?亡弟生同天貺節, 大淵感切甲周人.鄕關漠漠知何處? 遙望南天淚滿巾. 여호(汝昊) 후창의 첫째 아우 김봉술(金鳳述, 1887~1946)로, 그의 자는 여호, 호는 송은(松隱)이다. 후창이 이날 지은 그에 대한 제문이 《후창집》 권22에 〈제중제여호문(祭仲弟汝昊文)〉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김봉술은 이 해 4월말에 별세하였다. 공산(公山) 공주(公州)의 별칭이다. 생일 원문의 호신(弧辰)은 남자의 생일을 가리킨다. 옛 풍습에 아들이 태어나면 세상에 큰 뜻을 펴도록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에 쏘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후창의 연보에 의하면, 후창은 1884년(고종21) 6월 6일 진시(辰時)에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창동리(滄東里)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禮記 內則》 망제(亡弟)의……같고 천왕절(天貺節)은 송(宋)나라 때 비롯된 절일(節日)로 음력 6월 6일을 가리키는데, 송나라 진종(眞宗)이 대중상부(大中祥符) 4년(1011)에 조서(詔書)를 내리면서 6월 6일은 하늘의 계시를 적은 책인 천서(天書)가 하늘로부터 재차 내려진 날이므로 천황절로 삼겠다고 하였다. 김봉술의 생일도 6월 6일로 후창의 생일과 같다. 대연(大淵)의……간절하누나 대연은 고갑자의 대연헌(大淵獻)으로, 지지(地支) 가운데 해(亥)에 해당한다. 김봉술은 정해년(丁亥年)인 1887년에 태어났고, 그의 회갑은 이 시를 쓴 다음해인 1947년이 된다. 회갑인(回甲人)은 이미 회갑을 맞은 후창 자신을 가리킨다. 김봉술이 회갑이 되기 1년 전에 별세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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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42년 김재명(金在明)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正月二十四日 在明 叔主 壬寅正月二十四日 金在明 叔主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2년(헌종 8) 정월 24일에 김재명이 숙부에게 보낸 서간. 1842년(헌종 8) 정월 24일에 김재명(金在明)이 숙부에게 보낸 서간이다. 김재명은 먼저 숙부의 안부를 물은 다음에 자신이 담병(痰病)으로 인해 여러 날 앓고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조정에서 있었던 고위 관리들의 인사(人事)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병조판서에는 사동(社洞)의 서(徐) 대감이 임명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지만, 그렇다고 종형제가 연이어 좋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도 난처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영백(領伯)에는 이(李) 대감이 제수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조판서에는 교동(校洞)의 김좌근(金左根) 대감이 내정되었다고 하였다. 완백(完伯)에는 서기순(徐箕淳) 대감이 내정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매우 바르다고 말들을 하고 있지만, 그 정사가 어떨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영상(領相)은 일전에 다시 출사(出仕)하였지만 별도로 아뢴 일은 없다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편지를 쓴 김재명은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주서(鄭注書)는 연말에 홍원(洪原) 수령에 임명되어 정초(正初)에 임지로 내려갔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연말에 병상(並商) 편에 보낸 역서(曆書)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는데, 다시 찾았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태현(泰鉉)이의 혼사(婚事)와 관련하여 상대방 집안에서 연말에 사주(四柱)를 돌려보내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듣기에 참으로 민망한 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만갑(萬甲)이는 왜 소식이 없는지, 아직도 길을 떠나지 않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편지에는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근래 운기(運氣)가 전에 비해 더욱 심하여 사람들이 계속 죽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역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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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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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봉남 홍공【채문】에게 답함 答鳳南洪公【埰問】 지난번에 답장을 받고서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 삼가 한가롭게 지내시며 여가가 많으신 가운데 기거가 태평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산은 태곳적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창창하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구절은 당자서(唐子西)43)의 시이고, "일 없이 한가하게 앉았으니 하루가 이틀 같도다. 이처럼 70년을 산다면 문득 140년이 되리.[無事此靜坐 一日是兩日 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라는 구절은 소장공(蘇長公)44)의 말입니다. 이는 노년에 궁벽하고 적막한 가운데 문을 닫고 잡념을 떨쳐버리는 데 있어서 가장 요긴한 계책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종종 체념(體念)하여 뜻에 맞는 것이 있는지요. 의림(義林)은 범절(凡節)에 대해서는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힘쓰고자 하지 않음이 없지만 매양 우마(憂魔 근심)에 마음이 흔들려 끝내 공부를 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고 한 치를 진보하였다가 한 자를 퇴보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과연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형언할 수 없었는데 답장을 받고는 매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영포(令抱 손자)가 어여쁘고 어린이의 예절이 있어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예절을 펼 것이니, 이른바 "젊은이들은 할 일이 있다."45)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더욱 의로운 쪽으로 가르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십시오. 向拜下復。感戢無已。歲色垂暮。伏惟燕養多暇。起居崇適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唐子西詩也。無事此靜坐。一日是兩日。若活七十年。便是百四十。蘇長公語也。此在老年窮寂杜門消遣之地。最爲親帖計。未知種種體念而與之有會否。義林凡節無足奉聞。案頭一着。非不欲黽勉。而每爲憂魔所撓奪。竟未免一曝而十寒。寸進而尺退。若是者。果安能有所成就也。自顧慙怛。無以自喩。而尊書乃反慰藉之若是耶。令抱婉戀幼儀。能執定省之節。所謂小子有造者此也。益盡義方之敎。以開其前程步趨也。 당자서(唐子西) 자서는 송나라 당경(唐庚, 1070~1120)의 자이다. 미주(眉州) 단릉(丹棱) 사람이다. 소장공(蘇長公) 장공은 송나라 소식(蘇軾)의 경칭이다. 소식은 소순(蘇洵)의 장자인 데다 그 문장이 백대(百代)의 으뜸이라고 할 만했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장공(長公)이라고 하고 그의 아우 소철(蘇轍)은 소공(少公)이라고 하였다. 젊은이들은……있다 《시경》 〈사제(思齊)〉에 "그러므로 성인(成人)들이 덕망을 지니고 젊은이들은 할 일이 있으니, 문왕께서 싫어함이 없이 명예로운 선비들을 길러 내셨도다.[肆成人有德 ,小子有造, 古之人無斁, 譽髦斯士.]"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앞으로 진보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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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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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사적【종민】에게 답함 答宋士眞【淙珉】 한 해가 지나가니 그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떻겠는가. 한 통의 편지를 받아보고 놀라서 편지지를 어루만지며 반복해서 읽으니, 마음에 깊이 위안이 된다네. 인하여 부모를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면서 줄곧 건강이 좋다고 하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더구나 이치를 익혀 깊숙이 나아가고 학문의 조예가 높고 넓어짐을 이 편지를 통해 추측할 수 있네. 이른바 "화순함이 안에 쌓여 있어야만 영채의 빛이 밖으로 드러난다."32)는 말은 이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다만 잘 모르겠네만 근래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일을 주로 하는가. 문사를 외우는 것은 우리 선비들의 계책이 아니며 명성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선비들의 좋은 방도가 아니니, 최고의 진전(眞詮)과 으뜸의 법문은 문을 벗어나지 않아도 존재한다네.33)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남에게서 찾지 않으며 안에서 힘쓰고 밖에 힘쓰지 않았던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살갗이 없다면 터럭이 장차 어디에 붙어 있으며34) 터가 있지 않으면 집을 장차 어디에 지을 것인가. 생각건대, 우리 벗은 이미 이런 것에 환하게 알아 처음 시작하는 기본을 세우는 것이 물 샐 틈이 없을 것이네. 어찌 반드시 눈과 귀가 먼 나를 힘쓰게 하여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을 찾거나 빌리려고 하는가.35) 더욱 부끄러울 뿐이네. 더구나 나는 어려서 학문을 하지 못하여 늙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는데, 서산에 지는 해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어찌 이 세상에 경중을 따져볼 만한 것이 있으며 어진 사우 사이에서 오르내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대의 정성스런 질문함을 받았는데 잘못된 것에 대해 용서하지 말라는 그대의 말을 따르니, 혜량하여 너그러이 받아들이기를 바라네. 經歲經年。我思如何。一幅德音。得之若驚。摩挲繙閱。慰沃良深。仍審侍旁經履。一直佳裕。何等願聞之至。況溫理之邃密。造詣之崇廣。卽此來書而可以槪矣。所謂和順積中。英華發外者。非此耶。但未知近來所讀何書。所業何事。文詞記誦。非吾儒活計。聲利追逐。非吾儒長算。太上眞詮。一等法門。不出戶而存焉。此古人所以求諸已而不求諸人。務於內而不務於外者也。不然。皮之不存。毛將焉附。基之不有。室將安築。想吾友已瞭然於此。而所以造端立本者。無有滲漏矣。何必使之勉强盲聾。而索視借聽乃爾耶。旋庸愧愧。況如愚者。少而失學。老而無聞。奄奄晩景。如日下山。何足爲有無於斯世。而上下於賢士友之間哉。特荷垂訊之勤。敢效不恕之言。幸俯諒而恕存之也。 화순함이……드러난다 《예기》 〈악기(樂記)〉에 보이는 말이다. 문을……존재한다네 《대학장구》 전 9장에서 "군자는 집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나라에 교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나의 효(孝)를 신하가 본받으면 임금을 잘 섬기게 되고, 제(弟)를 본받으면 장관을 잘 섬기게 되고, 자(慈)를 본받으면 대중을 잘 부리게 된다.[君子不出家而成敎於國 孝者 所以事君也 弟者 所以事長也 慈者 所以使衆也]"라고 하였다. 살갗이……붙어 있으며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14년 기사에 "가죽이 없다면 터럭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皮之不存 毛將安傅〕"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학문의 토대를 강조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드시……하는가 일신재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 겸사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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