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정금열에게 작별하며 주다 4수 贈別丁金烈【四首】 멀리 떨어진54) 푸른 산속 집을 거듭 찾아가니 重尋七舍碧山居젊은이의 높은 기품 그 누가 그대와 같을까 年少高標復孰如백발로 남에게 미칠 선이 없음이 부끄러우니 白首愧無及人善어찌 그대 위해 띠에 쓸 가르침55)을 준비했으리오 何能爲子備紳書그대와 날마다 함께 기거함이 기뻤는데 喜君日日接興居이내 이별의 한이 생기니 어찌한단 말인가 別恨旋生其柰如단지 마음속에 간직한 뜻 같기를 바랄 뿐이니 只要所存歸一致무상하게 만나고 헤어짐을 굳이 쓸 것 없다오 無常聚散不須書지행을 함께 진전시키고 경에 거해야 하니 知行幷進敬爲居학문의 요결은 종전부터 늘 똑같았다오 學訣從前一轍如처음으로 공부에 착수할 곳을 찾고자 한다면 欲尋下工端始處사서와 육경 책을 익숙히 보아야 한다네 熟觀四子六經書인을 행함은 내게 달려 있고56) 편안한 집57)에 있어야 하니 爲仁由己作安居시작만 있고 끝은 없음보다 부끄러운 게 없다네 有始無終恥莫如간곡하게 권면하여 서로 힘쓰는 날에 勸戒丁寧交勖日석 잔의 이별주로 맹서의 뜻을 정하노라 三盃離酒定盟書 重尋七舍碧山居, 年少高標復孰如?白首愧無及人善, 何能爲子備紳書.喜君日日接興居, 別恨旋生其柰如?只要所存歸一致, 無常聚散不須書.知行幷進敬爲居, 學訣從前一轍如.欲尋下工端始處, 熟觀四子六經書.爲仁由己作安居, 有始無終恥莫如.勸戒丁寧交勖日, 三盃離酒定盟書. 멀리 떨어진 원문의 칠사(七舍)는 210리의 거리를 이른다. 사(舍)는 원래 머물러 유숙하는 것인데, 옛날 군대가 하루에 30리를 가서 유숙하였으므로 30리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띠에 쓸 가르침 원문의 신서(紳書)는 중요한 말을 잊지 않도록 허리에 맨 띠에 적어 두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자장(子張)이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듣고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큰 띠에 써서 기록하였다[書諸紳]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仁)을……있고 《논어》 〈안연(顔淵)〉에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서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그 인을 허여할 것이다. 인을 행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편안한 집 인(仁)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르지 않으니, 슬프다.[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不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임우경에게 답함 答任宇卿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가로막혀 있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네. 그러나 그대는 병이 들고 나는 얽매어 있으니 형세가 참으로 그렇게 되었네. 다만 그대 병이 조금 나아 이전 배운 것을 깊이 연구하여 의심난 조목이 편지에 가득하니, 학문을 즐기는 독실함이 이와 같기에 대단히 기쁘네. 그러나 오랫동안 병을 앓은 뒤에 마땅히 한가롭게 노닐면서 성정(性情)을 함양하여야 하며, 모름지기 정신을 힘들게 하면서 괴롭게 궁리하여 조섭을 해쳐서는 안 되네. 이미 사색한 것이 있다면 또한 평소 대하는 사물에 나아가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切問近思] 공부를 행하며, 반드시 성명(性命)의 허원(虛遠)한 것을 더듬어 상상할 필요는 없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질문한 여러 조목에 대해서는 나의 생각으로 대략 답을 할 것이니, 만일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성(性)은 곧 기(氣)이며, 기는 곧 성이다[性卽氣, 氣卽性]"4)라는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이(理)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네. 그러나 '이는[是]'이라고 하지 않고 '곧[卽]'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섞이지 않는다는 뜻도 볼 수 있네.이(理)에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기품에 맑음과 탁함, 순수함과 잡박함이 있음으로서 말한 것이네. 악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의 발용에 과와 불급이 있음으로서 말한 것이네. 이처럼 말이 절로 같지 않네.천하의 사물이 동(動)할 때 이(理)가 타고 기가 발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기가 동하여 이가 따르고 이가 동하여 기를 끼고 있는 때가 있겠는가. 면재(勉齋) 황간(黃幹)의 이 말은 본래 의심스럽네.천하에 성(性)이 없는 사물이 없으니 즉 또한 인(仁)이 없는 물건이 없네. 그러나 또한 사람의 인으로 사물에게 인을 책임 지워서는 안 되네.'의도가 없다.'는 말에서의 '의(意)'는 사사로운 의이네. 만약 의(意)자를 모두 좋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대학》에서 어찌 '뜻을 끊어버린다.'고 하지 않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고 하였겠는가. 咫尺阻閡。尤庸悵然。然君病我縶。勢固然矣。但美痾稍間溫理舊業。疑難滿紙。其嗜學之篤如此。慰悅萬萬。然久愆之餘。正宜優閒遊泳以養情性。不須勞神苦索以害攝理也。旣有思索。且從日用事物上。下切問近思之功。不必摸想於性命虛遠之地。如何如何。諸條謹以鄙意略略塡去。如有未穩。更以回示也。性卽氣。氣卽性。此固理氣不離處。然不曰是而曰卽。亦可見其有不雜底義。理有善惡。以人之氣稟淸濁粹駁而言。惡亦不可不謂之性。以心之發用有過不及而言。言自不同。天下之動。無非理乘氣發。安有氣動理隨理動氣挾時節耶。勉齋此說。本涉可疑。天下無無性之物。則亦無無仁之物。然亦不可以人之仁。去責那仁。無意之意。是私意也。若以意字都作不好看。則大學何不曰絶意而曰誠意耶。 성(性)은……성(性)이다 《근사록》에 보이는 정자의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탄식할 일이 있어 有歎 세상의 환란이 참으로 이루어져 어쩔 수 없으니 世禍眞成無可柰윤리와 강상이 실추되고 끊겨 의관이 뒤집혔네 倫綱墮絶倒冠裳몸을 빌린 오랑캐들이 사납게 굴게 되었고 假形夷虜能爲虐열을 나게 하는 돈은 점점 미치게 만드네 發熱金錢轉作狂매복이 오시에 숨은 일 너무 늦었고217) 已晩梅眞隱吳市굴원이 남쪽 고을로 추방당한 일 절로 마땅하네218) 自應屈醒放南鄕우레가 칠 일 늦었다219) 그대 한탄하지 말고 雷遲七日君休歎마음속에 양기를 잘 보존하게나 且就心中善保陽 世禍眞成無可柰, 倫綱墮絶倒冠裳.假形夷虜能爲虐, 發熱金錢轉作狂.已晩梅眞隱吳市, 自應屈醒放南鄕.雷遲七日君休歎, 且就心中善保陽. 매복(梅福)이……늦었고 매복은 전한(前漢)의 은사(隱士)이다. 오시는 오(吳) 지방의 시가(市街)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있었던 시장의 거리이다. 매복은 경학(經學)에 뛰어나 군(郡)의 문학(文學)이 되고 남창 현위(南昌縣尉)를 지냈으나, 왕망(王莽)이 정권을 전횡하자 처자를 버리고 구강(九江)으로 가서 은둔하였다. 뒤에 이름을 바꾸고 오나라 시장의 문지기로 있었다고 하며,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漢書 梅福傳》 굴원(屈原)이……마땅하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우레가……늦었다 5월에 양기(陽氣)가 처음 소멸되기 시작하는 구괘(姤卦)가 되었다가, 순음(純陰)인 10월을 지나 1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양기가 처음 회복되는 지뢰복(地雷復)의 괘(卦)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구괘로부터 복괘까지 걸리는 기간이 7개월이 되는 셈인데, 이것을 《주역》 복괘 단사(彖辭)에서는 "그 도를 반복해서 이레 만에 되돌아오니, 이것이 하늘의 운행이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복아66)가 몽사67)의 스승이 된 것을 기뻐하며 喜復兒爲蒙士師 기뻐한 건 본디 몽사의 스승에 있는 게 아니니 可喜本非蒙士師네가 이 일을 해낸다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汝能此事一何奇남의 모범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따르게 할지니 作人模範先從己글이나 익히게 한들 끝내 누구를 이롭게 하리오 溫故文書竟益誰잘못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에 탕왕을 성군이라 했고68) 過不吝時湯謂聖분수를 편안히 여길 수 있었기에 소옹을 지혜롭다 했다네69) 分當安處邵稱知만약 온갖 고생을 감내할 수 있다면 如令煞喫辛酸得틀림없이 앞으로 쾌활한 경지에 이르리라 快活前頭在不疑 可喜本非蒙士師, 汝能此事一何奇?作人模範先從己, 溫故文書竟益誰?過不吝時湯謂聖, 分當安處邵稱知.如令煞喫辛酸得, 快活前頭在不疑. 복아(復兒) 후창의 첫째 아들인 김형복(金炯復)을 가리킨다. 몽사(蒙士) 어린 학도를 이른다. 잘못……했고 《서경》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의 덕을 칭송하며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자신으로 생각하고,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게 하지 않으시어 능히 너그럽고 능히 인자하여 그 덕이 밝게 드러나 만백성에게 믿음을 받으셨습니다.[用人惟己, 改過不吝, 克寬克仁, 彰信兆民.]"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분수를……했다네 소옹(邵雍)은 송나라의 학자로, 자는 요부(堯夫), 호는 안락와(安樂窩),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주역》의 이치에 정통하고 상수학(象數學)에 능하였다. 그의 〈어느 곳이 선향인가[何處是仙鄕]〉 에 "만일 분수를 편안히 여길 수 있다면, 모두가 유별난 생각보다 나을 것일세.[若能安得分, 都勝別思量.]"라고 하였다. 《擊壤集 卷13》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보냄 신미년(1931) 與李愼軒 辛未 근래에 존자께서 걸음하여 그사이 고창의 유영선을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와서 거절을 못했거나 길에서 만나 말을 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어찌하여 친히 몸을 굽혀 찾아가기까지 하신단 말입니까? 음성(陰城)의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을 어른이 참으로 제창했고 "신헌이 또 일어남에 천백 명을 창도했다."는 말이 오진영의 편지가 아닙니까? 어른은 참으로 저쪽에서 뼈 속까지 호남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말하기를, "뼈가 이미 단단하지 않으니 살은 장차 스스로 떨어져나갈 것이다." 한다면 저들이 이미 잘못 안 것이고 어른도 듣기 싫은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마음으로 그 자취를 본다면 혹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당여를 먼저 다스리자는 성토문은 어른이 함께 지은 것이고, 음성 오진영의 골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다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어른이 평소에 한 말입니다. 유영선이 비록 최원(崔愿), 김세기(金世基), 정운한(鄭雲翰), 박제철(朴濟喆)과 같지 않고 권순명과 김용승과는 틈이 있다고 하나 그러나 그는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큰소리로 말했으며, 오진영과 함께 스승의 원고를 고친 진주본 간행에 시종 일을 주선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음성 오진영의 골수 몇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는 자입니까? 삼가 어른께서 이것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나는 유영선에게 오래된 원망도 없으며 어른에게 감히 하자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이 대의(大義)와 관련되는데, 어른은 의리를 제창한 사람이고 유영선은 또한 저쪽의 명인이라 피차가 서로 함께할 즈음에 단지 어른 한 사람만 관계될 뿐만이 아닌 만큼 감히 경솔히 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比聞尊駕間訪敞柳, 信然否? 彼自來而不拒, 遇諸塗而與言, 猶可也, 何至於親屈耶? 夫討陰之役, 丈實倡之, 愼又起, 倡千百人, 非震書乎? 丈, 固彼邊所認爲骨湖者.彼若曰: "骨已不硬, 肉將自脫", 則彼旣誤認, 丈又惡聞.然昧心見迹, 似或然矣.先治黨與之討文, 尊所共製也.骨陰幾人外, 不當盡絶, 尊所雅言也.柳雖與愿世翰喆不同, 又與權金有間, 然其謂震非誣師, 則衆中大言, 而與震終始周旋於改稿之晉印矣.未知此人不入骨陰幾人中者耶? 竊恐丈於此不及細思也.吾於柳非有舊怨, 於丈非敢索瑕, 特以事關大義, 而丈是倡義者, 柳亦彼邊名人, 彼此相與之際, 非但關尊一身, 而有不敢率爾者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戊辰 무진년(1928)지난겨울에 답해주신 편지를 얼굴을 씻고 세 번 거듭 읽음에 더욱더 정당한 의리와 명확한 의론에 감복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책임을 보잘 것 없는 저에게 책임을 지우기까지 하신 것은 바로 맹자가 세 성인을 계승한 공과 같은 것이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마다 나서서 말할 수 있는〔人人能言〕' 대열에 참여해 있게 하고자 하신다면 감히 많이 사양하여 덕으로 사랑해주신 은혜를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선사의 행장과 연보는 일찍이 임경소(林敬所) 어른을 믿고 있었으니, 일문(一門)이 부탁하는 뜻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맡은 바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어른이 불행히도 먼저 돌아가셨고, 지금 또한 변고가 생긴 이후로 노성한 분 가운데 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시기에 이러한 일은 오직 우리 어른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빠를 시일 내에 생각하고 의논하여 곧바로 초안하여 큰일을 마치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근래에 호남의 유림이 공자의 가르침이 사라졌다고 애통해 하면서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를 세우고 시생에게 함께 일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이미 사라진 나머지에서 반이나마 구제하고자 하는 것은, 그 뜻이 이미 지극하고 마음도 서글픕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일은 성공할 만한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저 일인(日人)에게 해악을 받음을 면치 못할 우려가 있으니, 도를 붙들어 지키는 방도가 도리어 먼저 도를 굽히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사양하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만,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질정합니다. 부디 밝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客冬下覆, 盥讀三復, 益服正當之義, 明確之論, 而至以閑闢之任, 責之無似者, 則此正孟子所承三聖之功者, 何敢當何敢當? 但欲參在人人能言之列, 則不敢多讓, 以負德愛之惠也.先師行狀年譜, 曾侍敬所林丈, 非惟一門之屬意, 亦其所自任者, 而此丈不幸先沒, 今且變出之後, 老成中, 無人可爲, 此日此役, 惟吾丈可以當之.幸早入思議, 隨得起草, 期卒大事之地, 如何?近日湖中儒林, 痛孔敎之亡, 立儒敎扶植會, 要侍生同事.其欲捄一半分於已亡之餘者, 意旣至矣, 情亦戚矣.然今日吾輩作事, 非惟無可成之望, 且有不免見累於彼人之慮, 則其所以扶道者, 乃先枉其道也.故辭謝不參, 而敢此仰質, 幸明敎之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방씨의 사계정사158)에서 일재159)ㆍ남명160)ㆍ월사161)의 시에 차운하다 房氏沙溪精舍次一齋南冥月沙韻 오백 년 내려온 가업이 우리나라에선 드문데 半千世業罕吾東문헌은 정사에서 징험하기에 충분하였네 文獻足徵精舍中현판 위엔 일찍이 선현들의 필적 많이 있고 板上曾多先輩筆창문 앞엔 벌써 열 아름의 소나무가 되었네 牕前已老十圍松종정162)에 새기던 그때 뜬구름은 엷었고 鼎鍾當日浮雲薄강학하여 서로 전하니 다듬은 옥처럼 영롱했네 講學相傳琢玉瓏시험 삼아 보니 사계에 끊임없이 물 흐르듯 試看沙溪流不盡덕 있는 가문에 끼친 음덕 또한 끝이 없어라 德門遺蔭也無窮 半千世業罕吾東, 文獻足徵精舍中.板上曾多先輩筆, 牕前已老十圍松.鼎鍾當日浮雲薄, 講學相傳琢玉瓏.試看沙溪流不盡, 德門遺蔭也無窮. 사계정사(沙溪精舍) 원래 방원진(房元震)의 조부로 호가 사계인 방응현(房應賢, 1524~1589)의 정사인데, 병화로 소실된 것을 방원진이 다시 수축하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7에 〈사계정사기(沙溪精舍記)〉가 실려 있다.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으로, 일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노진(盧禛)ㆍ김인후(金麟厚)ㆍ유희춘(柳希春)ㆍ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 5현'이라 일컬어졌다. 저서에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호이다. 자는 건중(楗仲), 다른 호는 산해(山海)ㆍ방장노자(方丈老子)ㆍ방장산인(方丈山人), 본관은 창녕(昌寧),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에 《남명집》ㆍ《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ㆍ《신명사도(神明舍圖)》 등이 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0년(선조33)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중기 4대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에 《월사집》이 있다. 정종(鼎鍾) 동(銅)으로 주조한 솥과 종의 합칭으로, 옛날에는 공훈을 표하는 문자를 대부분 이 종과 솥의 겉면에 새겼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추 초하루에 현광과 함께 읊다 仲秋初吉 同玄狂吟 산재에 가랑비 내려 흥이 조금 좋은데 小雨山齋興稍佳안중에는 가을 색이 정히 끝이 없구나 眼中秋色正無涯곡식이 머지않아 마당에 돌아오고191) 嘉禾不日將歸圃시든 잎은 바람 없어도 절로 섬돌에 지네 病葉無風自墜階세상에 머물며 함께 우거할지 뉘 알았으리 住世誰知同寄寓시를 지어서 마땅히 회포를 토로해야지 寫詩端合吐情懷옛적의 현달한 이들을 그대 응당 알리라 古來賢達君應識사천필의 말192)도 헌신짝처럼 여겼다네 千駟還如一弊鞋 小雨山齋興稍佳, 眼中秋色正無涯.嘉禾不日將歸圃, 病葉無風自墜階.住世誰知同寄寓, 寫詩端合吐情懷.古來賢達君應識, 千駟還如一弊鞋. 곡식이……돌아오고 곡식을 수확하여 타작하기 위해 마당에 가져오는 것이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구월에는 채마밭에다 타작마당을 닦고, 시월에는 온갖 곡식을 거둬들인다.[九月築場圃, 十月納禾稼.]"는 말이 나온다. '가화(嘉禾)'는 본래 옛날 사람들이 길조로 여겼던 특이한 형태의 벼인데 여기서는 곡식을 말한다. 《尙書注疏 微子之命》 사천필의 말 원문의 '천사(千駟)'는 매우 부귀한 것을 말한다. 사(駟)는 말 네 필을 말하므로 천사는 사천 마리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伊尹)은 "말 사천 마리가 묶여 있어도 돌아보지 않는다.[繫馬千駟, 弗視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노사 선생께 올림 上蘆沙先生 삼가 생각건대, 봄추위에 기체(氣體)가 강녕하시며, 작은사랑의 병환은 근래 회복되었으며, 우거하시는 나머지에 온갖 일은 괴로움을 끼치는 데 이르지 않았겠지요? 삼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소생은 겨울 초에 사상(沙上)에서 돌아왔는데, 양친께서 연달아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가 세모가 되어서 겨우 위급한 상황을 넘겼습니다. 이어서 신고(身故)로 또 달포 정도 괴로움을 겪었으니, 이른바 글공부하는 일은 묶어서 시렁 위에 올려놓은 채 겨울을 넘길 따름입니다. 접때 선생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을 때 김석귀(金錫龜), 정재규(鄭載圭)가 전후로 때마침 이르러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은 나머지에 서로 강마(講磨)하여 천년 뒤에 수사(洙泗)의 위의(威儀)21)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소생처럼 혼미하고 어리석은 이도 비록 눈으로 보고서 마음으로 느끼는 유익함이 없지 않았지만 또 어떻게 하면 강마한 것을 깨달아 밝히는 바가 있어서 이 모임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전에 힘쓰지 못하였다는 탄식이 여기에서 배로 간절하였고,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마음도 이로부터 더 보태졌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해를 넘기면서 예전처럼 그대로 답습하며 그 뜻이 희미하게 사라졌습니다. 또 이러한 모임이 또 어느 때 있을지 모르니, 구구한 소생의 마음에 어찌 서운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선생님께서 이사하여 해가 바뀐 때 몸을 빼 문후하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삼가 절서에 따라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답장을 덧붙임해가 바뀌어 그리워하는 마음 간절하던 차에 방금 편지를 보았네. 매우 자세히 적었기에 귀중함이 어찌 보배로운 구슬에 견주겠는가. 다만 책을 보는 한 가지 일은 자못 근심스러운 일로 방해를 받았으니, 세월이 자못 애석할 따름이네. 병든 사람의 노쇠함은 금년 들어 다시 더할 것이 없네. 기력은 기어서 계단을 내려갈 정도이고 정신은 거의 숙맥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이네.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아 이러한 업보를 받는 것이라 부끄럽고 부끄럽네. 여러 가지 사연은 붓을 들 마음이 없어 우선 그만두고, 예만 갖출 따름이네. 이만 줄이고 삼가 사례하네. 伏惟春寒。氣體康寧。小舍廊患節。近見天和。僑寓之餘。凡百不至貽惱否。伏慕不任。小生冬初自沙上還。兩庭連有欠和之節。至於歲未。纔免危津。繼以身故。又經旬月之苦。所謂佔畢之業。束閣過冬而已。曩於侍敎之日。錫龜載圭前後適至。坐春立雪之餘。互相講磨。使千載之下。如見洙泗之儀。昏愚如小生。雖不無觀感之益。而又安能有所發明以不負此會哉。從前不力之歎。倍切於此。而追後圖勉之心。又自此而不能無有加矣。然歸家踰年因循如古。而落落分散。又未知此會之復在何時。則區區下情。曷勝悵然。當此杖屨移寓歲次翻易之際。而未得抽身承候。罪悚。伏乞循序康衛。答附歲翻。懷人切矣。卽見手字極覼縷。寶重奚啻拱璧。第佔畢一事。頗爲憂故所魔。歲月殊可惜。病人衰敗。至于今年。無以復加矣。氣力則匍匐而下階。精神幾乎菽麥不以辨。少不勤學。其果報如此。可愧可愧。諸般說。無心戀筆墨。只得且休。備禮而已。不宣謹謝。 수사(洙泗)의 위의(威儀) 수사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인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이다.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자의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70년 백낙필(白樂弼) 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午正月初二日 白樂弼等 金生員宅 庚午正月初二日 白樂弼 金生員宅 전라북도 전주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70년(고종 7) 정월 초2일에 백낙필 등이 부안에 사는 김생원댁에게 보낸 서간. 1870년(고종 7) 정월 초2일에 완영(完營)의 백낙필(白樂弼) 등이 부안(扶安)에 사는 김생원댁(金生員宅)에게 보낸 서간이다. 완영은 곧 전라감영(全羅監營)으로, 이 서간을 쓴 백낙필은 감영의 아전이었다. 그는 김생원댁에 보낸 서간에서 당시 부안김씨 집안의 현안인 정려(旌閭) 문제가 도계(道啓)에 들어가 있다고 알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부안김씨 집안은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낙필 등은 정려 요청건을 조정에 올려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청(本廳)에 예목전(禮目錢) 30냥을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돈은 공적인 용도로 사용된다고 강조하면서 답장을 할 때 돈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예목전은 통상 '禮木錢'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뇌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이 문서에 적혀 있는 것처럼 관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서간을 쓴 백낙필은 대원군의 지지기반으로 포섭된 전국 각처의 아전 중에 들어갈 만큼 전라감영에서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아전들 중 한 사람이었다. 백낙준은 또 전라감사가 올릴 도계의 내용을 베껴서 보내 주는 친절도 베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문서는 고종 연간에 정려가 급격히 증대되고 있는 현실의 속내를 잘 보여주는 문서로 추정된다. 백낙준은 또 부안김씨 집안의 자제가 과거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여 방목(榜目)에 성명이 실려 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는데, 그 시험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무사재 박 선생21)에 대한 제문 祭無邪齋朴先生文 선생은 호걸의 자질로 학문의 공을 거두었습니다.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였고, 잡아 지키는 것이 굳고 안정되었으며, 정밀하고 은미한 것을 깊이 연구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 해박하였습니다. 학문은 온전하고 덕은 확립되어 시원스럽고 화락하였으며, 천고를 통찰하고 한 시대를 아울렀습니다. 성 동쪽에 집을 지어 유유자적하게 지내면서 광채와 자취 숨기고 감추어 죽을 때까지 스스로 즐겼습니다. 어찌하여 한 번의 운수가 만년에 더욱 기구하여 상사가 거듭하고 식구들이 흩어졌습니다. 백리의 광산(光山)에 거처를 옮겼는데, 거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였습니다.22) 오호라! 하늘이 선생을 내신 것은 무슨 뜻이며 쫓아서 곤액을 준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소자의 거처가 가장 가깝고 감복함이 가장 깊어 들어가서는 궤석에서 모시고 나가서는 장구를 모신지 십여 년이 됩니다. 순순하게 기대하고 면려함에 간곡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그 만분에 하나의 뜻도 부응함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의지하여 우러름에 뒤따르려 해도 미칠 수 없습니다. 단지 용산(龍山)의 수석만 여전히 옛날과 같아 저로 하여금 첨모(瞻慕)함에 다하지 못하는 한이 있게 할 뿐입니다. 눈물을 닦고 슬픈 마음 엮어 감히 이렇게 영결을 고합니다. 先生以豪傑之姿。收學問之功。臨深履薄。持守堅定。硏精鑽微抱負該洽。學全德立。淸通和樂。洞視千古。範圍一世。卜築城東。寄我翱翔。潛光歛跡。卒歳自娛。云何一運。晩而愈奇。死喪相仍。室家分離。光山百里。杖屨移臨。居未幾何。山樑遽折。嗚乎。天之生先生何意。而從而厄之。又何意耶。小子居最近而服最湥。入侍几席。出陪杖屨。爲十餘年矣。諄諄期勉。非不懇至。而因循等待。未有以副其萬一之意。今焉依仰。追從莫及。只有龍山水石。依然如古。而令人有瞻慕不盡之恨而已。抆淚綴哀。敢此告訣。 무사재(無邪齋) 박 선생(朴先生) 박영주(朴永柱, 1803∼1874)를 말한다.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관수재(觀水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의 문인이다. 정의림(鄭義林)·이지호(李贄鎬)·최인우(崔仁宇)·공병주(孔炳柱)·조병호(趙秉浩)·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무사재집》이 있다. 산이……꺾였습니다 스승이나 훌륭한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공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이 죽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는데, 과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애일당 김공52)에 대한 제문 祭愛日堂金公文 성인과 세상이 멀어지고 말씀이 인몰되니풍속이 경박하고 상하였네추향에 실마리가 많으니배워서 익숙한 것을 떳떳함으로 삼네군자가 있지 않으면누가 그 참됨을 깨우치랴처음 동류에서 뛰어난 이오직 공이 그 사람이네지기가 원대하며타고난 것이 높고 밝았네학문으로 겸비하여 이룬 것이더욱 크고 넓었네사문의 은미하고 깊은 뜻공이 실로 참여하여 들었네우리들 강론하며 모임에공이 실로 창도하였네쌍계사에 봄바람 불고취정에서 밤에 달 뜰 때창수가 정다웠고위의가 정연하였네공이 이미 병들었다 하였고나도 돌아와 또 쉬게 되었네날마다 원기를 회복하길 바라며옛 날의 교유 이으려 하였네누가 알았으랴 영원한 작별이갑자기 이에 있을 줄을거문고 부셔지고 줄이 끊어짐53)은만고에 같은 슬픔이네사론이 분열되니거두어 쇄신할 기약이 없네또 한 분의 현인을 잃었으니여생을 어찌하리오내 사는 곳 막히고 멀어오래도록 달려가 문상하는 것 미루었네세월이 한해가 지났으니유풍 여운이 날로 멀어지네구운 닭과 술54) 올리니상생55)은 여전하네큰 소리로 길게 울부짖으니눈물이 샘처럼 쏟아지네 世遠言湮。風澆俗傷。趍向多端。習熟爲常。不有君子。孰覺其眞。出類發軔。惟公其人。志熟磊落。禀賦高明。濟以學問。益大益宏。師門微蘊。公實聞焉。吾儕講聚。公實倡焉。雙寺春風。翠亭夜月。唱酬款款。威儀秩秩。公旣告病。我歸且休。日望天和。擬續舊遊。誰知永別。遽爾在兹。琴破弦斷。萬古同悲。士論分裂。收刷無期。又失一賢。餘生何其。我居阻遠。久稽奔問。星霜一周。風韻日遠。灸雞漬綿。象生依然。大聲長號。淚隕如泉 애일당(愛日堂) 김공(金公) 김치희(金致煕, 1828∼?)를 말한다. 자는 장여(章汝), 호는 애일당,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낙안(樂安)에 거주하였다. 거문고……끊어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이른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자기 음악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는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絶絃]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列子 卷5 湯問》 구운 닭과 술 원문의 '적계지면(炙鷄漬綿)'을 풀이한 말인데, 친구 간에 조상(弔喪)하거나 묘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자가 유자(孺子)로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다. 그는 먼 곳으로 문상(問喪)하러 갈 때 솜을 술에 적셔 햇볕에 말린 다음 그것으로 구운 닭을 싸서 휴대하기 간편하도록 만들어 가지고 가서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아 제수를 올린 뒤 떠났다 한다. 《後漢書 卷35 徐穉列傳》 상생(象生) 궤연을 말하는데 망자가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기물들을 진열하여 살아있을 때를 그대로 본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권49 〈시향천신부(時享薦新附)〉에 "사당에 신주를 보관하여 사시제를 지내고, 침전(寢殿)에는 의관과 궤장 등 살아생전에 쓰던 기물을 두고서 그곳에 새로운 음식물을 올린다.[廟以藏主, 以四時祭, 寢有衣冠几杖象生之具, 以薦新物.]"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겸아70)가 독서하는 것을 기뻐하며 喜謙兒讀書 푸른 등불은 깜박이는데 밤이 얼마나 되었는고71) 靑燈耿耿夜何其큰 소리로 글 읽는 겸아도 참으로 기특하구나 大讀阿謙亦一奇일찍 공부에 힘쓸 뜻을 잃으니 어리석은 너를 어쩌겠는가 早失勤工柰癡汝뒤늦게나마 뜻을 분발하면 호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晩能奮志匪豪誰노천학사는 진정한 사표라 하겠고72) 老泉學士眞師表동백산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네73) 桐栢山人卽己知이로부터 우리 집안에 남은 운수가 있을 터이니 從此吾家餘運在그저 더욱 힘쓰고 망설이거나 의심하지 말거라 只要加勉莫遲疑 靑燈耿耿夜何其? 大讀阿謙亦一奇.早失勤工柰癡汝? 晩能奮志匪豪誰?老泉學士眞師表, 桐栢山人卽己知.從此吾家餘運在, 只要加勉莫遲疑. 겸아(謙兒) 후창의 넷째 아들인 김형겸(金炯謙)을 가리킨다. 밤이 얼마나 되었는고 원문의 야하기(夜何其)는 《시경》 가운데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정사(政事)를 보는 수고를 찬미한 〈정료(庭燎)〉 시에 "밤이 얼마나 되었는고. 한밤중도 아니 되었으나, 정료가 환히 빛나도다.[夜如何其? 夜未央, 庭燎之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천학사(老泉學士)는……하겠고 노천은 송(宋)나라의 문인이자 학자인 소순(蘇洵, 1009~1066)으로, 자는 명윤(明允)이고, 노천은 그의 호이다.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독서를 좋아하지 않다가 늦은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발분하여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여 육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고 마침내 대문장가가 되었다. 동백산인(桐栢山人)은……있었다네 동백산인은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은사(隱士)인 동소남(董召南)을 가리킨다. 동소남은 동백산(桐柏山)에 은거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의(義)를 행하고 부모를 효로 잘 봉양하고 처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당대 대문호인 한유(韓愈)가 이렇게 훌륭한 동소남을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소남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한유의 〈동생행(董生行)〉에 "아, 동생이여! 부모께 효도하고 처자식 사랑함을 남들은 알지 못하고, 오직 천옹만이 알아, 수시로 상서를 내고 길조를 내려주도다.[嗟哉董生! 孝且慈人不識, 唯有天翁知, 生祥下瑞無時期.]"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는 동소남의 훌륭함을 알아주고 세상에 크게 드러낸 한유를 가리킨다. 《小學 善行》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여안74)에게 부치다 寄汝安 흐르는 물처럼 세월이 빨리도 흐르니75) 居諸奔迅若流水올해 제석도 이십 일만 남아 있을 뿐일세 今年除夕餘二旬아 내가 어느새 칠순의 나이가 되었으니 嗟我遽當七耋年몸은 고목 같고 귀밑은 흰 털이 분분하구나 身如槁木鬢雪紛아 그대는 가난하여76) 세상사에 얽매이니 嗟君食貧絆世故몹시 바쁘고 분잡하여 한가한 겨를이 없구나 倥傯紛沓無暇辰동서로 삼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東西相距三十里함께 수세77)한 지 십년이나 되었네그려 與同守歲積十年늙어 가매 약한 마음이 쉬이 감상에 젖으니 老來弱腸易感傷매양 울적함을 품고 밤새도록 시름한다오 每抱鬱陶悄達晨생각을 하지 않아서이지 어찌 멀어서이겠는가78) 未之思也夫何遠고통의 바다에도 때맞춰 조수가 밀려든다네 苦海亦有信潮臻장차 관 속에 들어갈 형을 가련히 여길지니 須憐阿兄將就木번연히 마음 돌려 지난 일을 뉘우치고 있다오 幡然回心悔前塵바라노니 눈 내린 밝은 달밤 창동 집에서 願言雪月滄東屋그대와 묵은해 보내고 새해를 맞고 싶어라 與君送舊又迎新 居諸奔迅若流水, 今年除夕餘二旬.嗟我遽當七耋年, 身如槁木鬢雪紛.嗟君食貧絆世故, 倥傯紛沓無暇辰.東西相距三十里, 與同守歲積十年.老來弱腸易感傷, 每抱鬱陶悄達晨.未之思也夫何遠? 苦海亦有信潮臻.須憐阿兄將就木, 幡然回心悔前塵.願言雪月滄東屋, 與君送舊又迎新. 여안(汝安) 후창의 셋째 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로, 자는 여안, 호는 연강(蓮岡) 또는 척재(拓齋)이다. 또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척재집(拓齋集)》이 있다. 세월이 빨리도 흐르니 원문의 거저(居諸'는 일거월저(日居月諸)의 줄인 말로, 세월이 흘러감을 이른다. 《시경》 〈패풍(邶風) 백주(柏舟)〉에 "해여 달이여, 어찌 뒤바뀌어 이지러지는가.[日居月諸, 胡迭而微?]"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하여 원문의 식빈(食貧)은 거빈(居貧)과 같은 말로, 《시경》 〈위풍(衛風) 맹(氓)〉에 "내 그대의 집에 시집간 뒤로, 삼년 동안 가난하게 살았도다.[自我徂爾, 三歲食貧.]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수세(守歲) 제석(除夕)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새해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을 기다려 맞는 것을 이른다. 생각을……멀어서이겠는가 일시(逸詩)에 "당체의 꽃이여, 바람에 펄럭이도다.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리오마는, 집이 멀어서이다.[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라고 하였는데, 孔子가 이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아서이지, 어찌 멀어서이겠는가.[未之思爾, 夫何遠之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윤일을 위로하다 慰允一 선경169)은 예로부터 하늘의 이치임을 믿을 만하니 善慶從來信上天그대 집안의 복록이 어찌 성대하지 않으리오 君家福祿盍繁延나이 사십170)은 비록 자식을 늦게 보는 때라 해도 强年縱道遲兒子남은 음덕은 어찌 선조를 의뢰하지 않으랴 餘蔭那無籍祖先이미 향산이 백련171)을 여는 걸 보았는데172) 已見香山開白蓮하물며 희무173)가 주의 국운을 이었다고 들음에랴 況聞姬武續周緣한 마디 말로 위로함은 아부하는 게 아니니 一言慰祝非阿好이치로 증험해보면 명백히 그러한 것일세 以理證之明自然 善慶從來信上天, 君家福祿盍繁延强年縱道遲兒子, 餘蔭那無籍祖先己見香山開白蓮2), 況聞姬武續周緣?一言慰祝非阿好, 以理證之明自然. 선경(善慶) 선행(善行)을 쌓아 많은 복록(福祿)이 생김을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나이 사십 원문의 강년(强年)은 강사(強仕)와 비슷한 말로, 나이 40세를 이른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사십을 강이라고 하니, 이때에 벼슬길에 나선다.[四十曰强而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백련(白蓮) 저본에는 '백운(白運)'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운(運)을 련(蓮)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이미……보았는데 향산(香山)은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자호한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다. 백련(白蓮)은 자연 속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단체를 결성하여 어울리는 결사(結社) 가운데 대표적인 백련사(白蓮社)를 이른다. 백련사는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당대의 명유(名儒)인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 등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을 할 목적으로 결성된 결사이다. 백거이와 관계된 결사는 백거이가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결성했던 향화사(香火社)가 있다. 여기서는 백거이의 향화사를 백련사로 대신하여 말한 것이다. 희무(姬武)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가리키는 말로, 희(姬)는 주나라의 성이다. 무왕은 주나라를 창업한 초대 황제로서, 이름은 발(發)이다. 서백(西伯)인 부친 문왕(文王)을 계승하여 상(商)나라를 멸한 후 아우 주공(周公)의 보좌를 받아 봉건적인 통치제도를 수립하였다. 蓮:底本에는 "運".문맥을 살펴 수정.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입석리의 족숙 낙찬 을 삼가 애도하다 敬悼立石里族叔【洛瓚】 지금 세속엔 거짓이 불어나고 있는데 僞滋今世俗공만은 홀로 천진함을 보전하였다오 公獨保淳眞네 아들을 두었으니 남은 경사182)를 알 수 있고 四子知餘慶팔순을 넘었으니 인자에게 보답함183)을 볼 수 있네 八旬見報仁인간 세상의 묵은 빚을 모두 다 갚고는 人間方了債천상 세계로 갑자기 구름 타고 올라갔다네 天上遽乘雲아아 이제는 끝이로다 성재의 모임184)에서 已矣星齋會더 이상 모시고 정담을 나눌 수가 없구나 更無陪話辰 僞滋今世俗, 公獨保淳眞.四子知餘慶, 八旬見報仁.人間方了債, 天上遽乘雲.己矣星齋會, 更無陪話辰. 남은 경사 선행을 쌓아 많은 경사가 생김을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인자(仁者)에게 보답함 《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자는 동하고 어진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여 그가 팔순을 넘도록 산 것은 하늘이 그가 평소 어질었기 때문에 장수하게 하는 것으로 보답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성재(星齋)의 모임 성재는 취성재(聚星齋)를 가리킨다. 취성재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蓮谷里) 석동산(席洞山) 남동쪽에 있는 부안 김씨(扶安金氏)인 군사공(君事公) 김광서(金光敍) 묘소의 재실(齋室)이다. 1819년(순조19)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순조2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부안 김씨의 종회(宗會)를 열곤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봄날 길을 가며 春日途中 옥중의 죄수처럼 처자식에 매였다고 누가 말하나 獄囚誰道繫妻孥시흥에 문을 나서 멋진 경치를 묘사하네 詩興出門佳景摹백성들이 은택에 젖으나 한나라418) 때와 다르고 黎首恩沾時異漢녹색 털 같은 풀이 가느니 노419)의 땅이 아니네 綠毛草細地非瀘평평한 호수에 낚싯대로 처음 낚시 드리워보고 平湖竿試初垂釣작은 채마밭에 부지런히 호미질하고 박을 딸 준비하네 小圃鋤勤備斷瓠산 남쪽에 은거하는 은자를 만나러 가니 爲訪山南幽隱去날으는 학이 임포에게 알리는 걸 보리라420) 應看飛鶴報林逋 獄囚誰道繫妻孥, 詩興出門佳景摹.黎首恩沾時異漢, 綠毛草細地非瀘.平湖竿試初垂釣, 小圃鋤勤備斷瓠.爲訪山南幽隱去, 應看飛鶴報林逋. 한나라 조선(朝鮮)을 비유한 것이다. 노(瀘) 불모지를 비유한 것이다. 참고로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간다.[五月渡瀘, 深入不毛.]"라는 말이 나온다. 날으는……보리라 학(鶴)이 내가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은자에게 알릴 것이라는 뜻이다. '임포(林逋)'는 은자를 비유한다. 임포는 북송 때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행서와 시에 능하였다. 장가를 들지 않고 처자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즐기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친족 대부 석당 선생에게 올림 上族大父石塘先生 문안드린 이후로 편지를 보낼 길이 없어 북쪽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저의 마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깊어 가는 가을에 한가로이 수양하시는 기체는 한결같이 만강하시며, 가족들은 두루 평안하십니까? 연세가 많고 덕이 높아 사문(斯文)이 기댈 곳이 있으니, 이 어찌 한갓 우리 가문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사림과 나라의 복입니다. 보잘것없는 이의 흠모하는 마음은 장수하시기를 항상 간절히 축원합니다. 족손의 가친과 세 형제, 기로(耆老)가 모두 생존하여 하늘이 일락(一樂)22)을 누리게 하였으니 감격스러운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우리 가문은 100여 년 전부터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날로 영락(零落)하니, 후손이 된 자는 마땅히 몇 배로 노력하여 가업을 계승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소자는 세월만 보내며 머뭇거리니 오히려 보통의 아몽(阿蒙)23)이 됨을 면하지 못하기에 이 때문에 두려울 따름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는 도학을 앞장서 밝히시어 사방의 학자들이 모두 종사(宗師)로 삼았습니다. 더구나 소자의 입장에서야 의지할 곳으로 여기는 마음이 어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부모님은 늙고 힘은 미약하여 먼 길을 가서 찾아뵙는 것은 기필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예전에 선생님께서 소자에게 타이르시기를 "기 선생(奇先生)이 근래 그대의 도내에 있는데, 너는 어찌 배우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소자가 이미 공경히 대답하였지만 아직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마땅히 가까운 시일 내에 나아가 배워 선생님의 타이름에 부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拜違以來。便信無階。北望馳悵。曷任下情。伏未審秋深燕養氣體。一享萬康。眷節均宜。年高德邵。斯文有主。此豈徒吾門之幸。實士林邦國之福。區區顒若。常切榠欞無疆之祝。族孫家親三昆季耆老俱存。天餉一樂。情感無量。吾門自百餘年。聲猷不競。日就零替。爲人後承者。當倍蓰勉力。以圖所以紹述之策。而小子悠悠前却。尙不免爲尋常阿蒙之歸。用是瞿瞿耳。伏惟先生倡明道學。四方學者。無不宗師。況在小子而視爲依歸者。豈不倍蓰餘人。而親老力綿。千里源源。有不可必。奈何。昔者先生戒小子曰。奇先生近在汝省內。汝何不從學也。小子旣敬諾。而尙未遂矣。第當從近負笈以副先生之戒。亦豈非先生敎之耶。 일락(一樂) 맹자는 군자가 인생에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 세 가지를 말하면서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그 첫 번째 즐거움이다.[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아몽(阿蒙) 학식이 없고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 여몽(呂蒙)이 군무(軍務)에만 종사하다 손권(孫權)의 권유로 열심히 독서하여 노사숙유(老士宿儒)보다 오히려 나을 정도의 학식을 쌓았는데, 노숙(魯肅)이 도독(都督)으로 와서 여몽과 담론해 보고는 "이미 예전의 오나라의 아몽(阿蒙)이 아니구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三國志 吳書 呂蒙傳》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암 오공69)에 대한 제문 祭松庵吳公文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종시(終始)의 효성이 있었고 집안을 일으킴에 이룩한 사업이 있었으며, 몸가짐에 근칙(謹勅)하다는 명예가 있었고 고을에서는 화락한 풍모가 있었습니다. 자식의 혼사를 다 시켜 자손들이 줄을 이루고, 선을 닮도록 하여70) 아들이 계술하는 것이 다함이 없습니다. 걱정 없이 강녕의 복에 응하고 욕됨이 없이 예순의 장수 누렸습니다. 인생의 사업 끝냈다 하겠고, 세상의 책임 마쳤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유연히 떠나고 호연히 돌아가 근심하며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기미에 나타나지 않았던 까닭이니, 공은 사생의 설을 알고 종시(終始)의 의가 있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향당(鄉黨)에서는 기구(耆舊)의 명망을 잃게 되었고, 글방에서는 위의를 갖춘 현인이 사라졌고, 붕우 간에는 따를 만한 유익한 벗이 없어졌으니, 뒤에 죽을 사람의 비통함은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영원히 돌아갈 날이 정해져 저승과 이승이 장차 막힐 것이라, 제문을 지어 대신 제사 드리며 슬픈 마음 깃들이니, 어둡지 않은 존령이여 보시고 흠향하소서. 公事親而有終始之孝。起家而有成立之業。持身而有謹勅之譽。處鄕而有愷悌之風。昏嫁畢而孫枝成行。式穀似而子述不匱。無憂而膺康寧之福。無辱而享耆久之壽。人生之業。可謂終矣。世間之債。可謂了矣。此所以悠然而逝。浩然而歸。無慽慽怛化之意。見於幾微。公可謂知死生之說。而有終始之義者也。但鄉黨失耆舊之望。庠塾無風儀之賢。朋友乏從逐之益。後死者之悲痛。有不可已者。大歸有日。幽明將隔。緘辭替侑。以寓一哀。尊靈不昧。庶幾鑑饗 송암(松庵) 오공(吴公) 오수화(吴壽華, 1835∼1895)를 말한다. 자는 태중(泰仲), 호는 송암,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신재집》 권18 〈송암 오공 행장(松庵吳公行狀)〉에 보인다. 선을 닮도록 하여 자식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네 자식도 잘 가르쳐서 선을 닮게 하거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동짓날에 회포를 적다 至日書懷 오늘 아침 해가 남쪽에 이르니59) 今朝日南至천시가 이로부터 새로워지고 天時從此新전란 먼지가 맑게 걷힌 때를 만나니 適玆兵塵晴나라의 명운도 새롭게 되는구나 邦命亦維新어이하여 창상자60)는 如何滄上子덕업이 날로 새로워지지 못하는가 德業未日新중년61)의 나이에 덕을 이룬다고 하는데 中身云成德하물며 삼광62)을 순히 따라 새해를 맞이함에랴 順三況歲新이것으로 생애를 마칠 것을 생각하니 言念以此終그저 통탄함만 새로 더함을 느끼겠네 但覺痛恨新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으니 忽然有所悟한 점의 생기가 새롭기도 하여라 一點生意新어찌 위 무공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盍思衛武公구십에도 오히려 스스로 새롭게 했다오63) 九十猶自新천고의 훌륭한 녹죽편64)이여 千古綠竹篇찬란히 빛나는 중광65)이 새롭구나 燁燁重光新애오라지 스스로 위로하고 면려하노니 聊以自慰勉일어나 새로운 새벽빛을 맞이한다오 起迎曙色新 今朝日南至, 天時從此新.適玆兵塵晴, 邦命亦維新.如何滄上子, 德業未日新?中身云成德, 順三況歲新!言念以此終, 但覺痛恨新.忽然有所悟, 一點生意新.盍思衛武公? 九十猶自新.千古綠竹篇, 燁燁重光新.聊以自慰勉, 起迎曙色新. 해가 남쪽에 이르니 원문의 남지(南至)는 동지(冬至)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5년에 "태양이 남쪽에 이르렀다.[日南至]"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注)에 "동짓날에는 태양이 남쪽 끝에 있게 된다.[冬至之日, 日南極.]"라고 하였다. 창상자(滄上子) 후창이 자기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중년(中年) 원문의 중신(中身)은 중년으로 40세에서 50세까지를 말한다. 《서경》 〈무일(無逸)〉에 "문왕이 천명을 받은 것이 중신이었는데, 나라를 누린 것이 50년이었다.[文王受命惟中身, 厥享國五十年.]"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중신은 중년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을 이른다. 어찌……했다오 춘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은 95세의 고령임에도 나라에 경계하기를 "경(卿) 이하로부터 사장(師長)과 사(士)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조정에 있는 자들이면 내가 늙었다고 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조정에서 삼가고 공손히 하여 서로 나를 경계하라."라고 하였고, 또 〈억시(抑詩)〉와 〈빈지초연(賓之初筵)〉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 고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詩經集傳 衛風 淇澳》 녹죽편(綠竹篇) 《시경》에 수록된 〈기욱(淇澳)〉편을 가리킨다. 이는 위 무공(衛武公)의 성대한 덕을 찬미한 시이다. 녹죽은 그 시에 "저 기수 물굽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네. 아름답게 문채 나는 군자여, 자르고 다듬은 듯하며, 쪼고 간 듯하도다.[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중광(重光) 임금의 성대한 덕을 비유한 말이다.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