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감선사193)의 비석을 보고 觀眞鑑禪師碑 유학엔 큰 근본과 공인된 도리가 있고 儒有大本與達道허무적멸194)은 불가에서 중히 여기네 虛無寂滅佛所寶동정과 체용은 본래 절로 다른데 動靜體用本自殊뒤섞여 분별이 없어 이미 분명하지 않네 混而無分已糊塗공자는 열고 석가는 다함195)이란 무슨 말인가 孔發釋窮是何言유학 끌어와 불교로 들어갔다 불교를 도리어 높였네 援儒入佛佛反尊고운이 어찌 유학자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마는 孤雲豈非儒家子명성과 실상이 서로 같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無乃名實不相似퇴계196) 이후로 연재197)와 간재198)에 이르렀으니 退溪以後逮淵艮진실로 유래가 있는 천추의 의론이라네 良由以來千秋論 儒有大本與達道, 虛無寂滅佛所寶.動靜體用本自殊, 混而無分已糊塗.孔發釋窮是何言? 援儒入佛佛反尊.孤雲豈非儒家子? 無乃名實不相似?退溪以後逮淵、艮, 良由以來千秋論. 진감선사(眞鑑禪師)의 비(碑)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숭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부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허무적멸(虛無寂滅) 허무는 도(道)의 본체는 허무하다는 노자(老子)의 사상이고, 적멸은 생사를 초월한 열반(涅槃)의 세계로 불교의 사상이다. 공자가……다함 《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鑑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다른 호는 지산(芝山)ㆍ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자학을 심화 발전시켜 이후 도학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서에 《퇴계집》이 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다른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그 반대 운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이 강탈된 것에 대한 통분으로 자결하였다. 저서에 《연재집》이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호이다.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자명(子明), 다른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이다. 임헌회의 문인이며, 후창 김택술의 스승이다.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繼華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냈다. 도학의 연구와 도통의 계승을 중시하였고, 도학의 중흥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