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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74세 생신을 축하하며 師門七十四歲晬辰 스승님께서 칠십사 세의 생신을 맞이하셨으니 玆値師門七四辰어찌 오직 기쁨과 두려움이 우리 부모님께만 있겠나121) 豈惟喜懼在吾親하늘이 무한한 수명을 주셔서 蒼天願假無疆壽유자의 일맥 참된 깨달음을 보전하게 해주소서 保得斯文一脉眞 玆値師門七四辰,豈惟喜懼在吾親.蒼天願假無疆壽,保得斯文一脉眞. 어찌……있겠나 공자께서 "부모의 연세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나니, 한편으로는 오래 사셔서 기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고 한 것을 전용한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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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군이 내 생일에 장수를 바라는 시를 적었기에 차운하여 감사를 표함 金君鍾賢以愚晬日爲詩祈壽次韻謝之 하늘의 명으로 내가 태어났으니 어찌 좋지 않을까마는 帝命我生胡不辰이미 선조의 묘에서 멀어지고 또 부모님과도 이별했네 旣遠先墓幷離親【운명이 좋지 않았다.】 【命不好】칠십사 년 동안 하나의 고질병을 되돌아보니 七十四年懷一疚형체와 기운만 배양하고 정수과 참됨을 저버린 것일 뿐 秪陪形氣負精眞【의로움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義有愧】 帝命我生胡不辰, 旣遠先墓幷離親.【命不好】七十四年懷一疚,秪陪形氣負精眞.【義有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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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자의 묘에 우박 피해가 있었다는 소식이 스승님께 이르니 시를 지어 보냄 3수 夫子廟雹災報至師門 有詩步韻【三首】 성인의 사당에 정월 우박 쏟아지니 聖祠正月雹음기 가득함은 무슨 허물 때문인가 陰氣一何愆재앙이라는 것은 운수에 따른 것이라 災沴多由數하늘에 계신 상제와는 무관한 것이네 非關上帝天중니께서는 하나의 태극이요 仲尼一太極대덕은 음양이 합친 것이라 大德合陰陽요상한 우박이 어찌 가감하리오 妖雹何加損신령이란 본래 일정한 법 있거늘 神靈自有常유학자들 서로 어긋나고 분열하니 儒門相乖裂그 허물은 이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厥咎匪斯何삼가 조심해 예전 습관 되돌아보고 惕念回前習천지의 조화를 맞아 따르리라 導迎天地和 聖祠正月雹,陰氣一何愆?災沴多由數,非關上帝天.仲尼一太極,大德合陰陽.妖雹何加損?神靈自有常.儒門相乖裂,厥咎匪斯何?惕念回前習,導迎天地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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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앙 제태 에게 증정하다 奉贈崔而仰【濟泰】 경인년(1890, 고종27) 1월 8일에 내가 영남에 갔다. 상원일(上元日)에 산음(山陰)에 도착하고 다음 날 강성(江城)에 당도하여 신안강(新安江) 기슭으로 계남옹(溪南翁)73)을 찾아뵈었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 옹의 조카인 이앙(而仰)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과 노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뒤 혼자 말하기를, '나는 계방과 평소에 일면식도 없건만 갑자기 꿈에 나타났으니 무엇 때문일까? 일찍이 계방이 영남에 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만나려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두커니 기다리면서 한참을 있었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적어 놓은 꿈 내용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바로 7일이었다.아, 나와 이앙은 과연 일면식도 없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자못 오래되었다. 동서로 500리를 벗어난 아득히 먼 곳에서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게 서로 감응하는 것이 북채와 북,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을 줄 누가 알았는가. 천지 간에 의기가 서로 감응하여 걷지 않아도 이르게 되고 빨리하지 않아도 빠른 것74)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예전에 호상(湖上)에서 선사(先師)를 모실 때 나와 애산(艾山)75)이 두 차례나 기약도 없이 서로 만나자 선사(先師)께서 이르기를, "기이한 일이다. 어찌 기록으로 남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만약 선사께서 살아 계신다면 또한 어찌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시겠는가.이에 대략 전말(顚末)을 적어 이앙에게 준다. 이앙은 언제나 나를 일깨우고 분발시켜 지극히 어리석고 근기(根氣)가 낮은 이 사람이 동성상응(同聲相應)76)하고 함께 돌아가는 결과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歲庚寅元月八日。余作嶺行。上元日到山陰翌日到江城。訪溪南翁於新安江上。寒暄畢翁從子而仰言曰。疇昔之夜。夢與季方遊。旣覺自語吾與季方。未有一面之雅。而遽爾入夢何也。聞季方嘗有意嶺行。其將從近見遇耶。佇俟久之。果爾果爾。因出所記夢蹟示之。乃七日也。嗚呼。吾與而仰。果無一面。而其有書路往復。則頗久矣。誰知東西遙遙半千里之外。不先不後。相應相感。如桴鼓影響哉。天地間氣類之感。有不行而至。不疾而速者固如此。昔年侍先師於湖上也。吾與艾山。有再次不期之遇。先師曰奇事也。盍記諸。若使先師而在焉。則亦豈不曰奇事也。玆以略述顚末。以呈而仰。願而仰爲之終始警策。使此至愚下根。無愧爲同聲同歸之歸也。 계남옹(溪南翁) 남옹은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걷지……빠른 것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동성상응(同聲相應) 동류(同類)끼리 서로 기맥이 통하여 자연히 의기투합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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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이 연강 아우와 많은 수창시를 남겼다는 얘기를 듣고 뒤늦게 차운하여 만나는 날을 기다려 보여주다 4수 聞可石與蓮岡舍弟多有唱酬 追步其韻 待相見日示之【四首】 가석과 연강의 교분은 금을 끊을 만하니120) 石蓮交契斷堅金평소에 일편단심을 서로 비추는 듯하네 照得平生一片心근래에 연달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때에 邇來唱和連篇日다 기울인 속마음이 몇 굽이나 깊어졌나 傾盡眞情幾曲深가석의 시 짓는 솜씨는 단련한 쇠보다 낫고 可石詩工勝鍊金소릉의 시 짓는 습성은 검남의 마음이로세121) 少陵性癖劒南心시속과 시국에 상심한 말을 시험 삼아 보니 試看病俗傷時語다시 〈풍천〉의 시122)로 얕고 깊음을 따졌다네 更把風泉較淺深침상 곁에 돈 다 없어졌다 한탄하지 말게 莫恨床頭見盡金장부의 생색은 마음 변치 않는 데 있다네 丈夫生色不渝心원컨대 연강 아래에서 호연지기를 길러서 願成浩氣蓮岡下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깊이 가득 차기를 亘塞天高與地深세상에 변치 않는 삶이 일금의 가치인데 世不滄生直一金홀로 세한의 마음을 보존한 줄 누가 알까 誰知獨保歲寒心자운123)을 천 년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子雲未必俟千載난실124)과 체원125)에서 정다운 이야기 깊어지네 蘭室棣園情話深 石、蓮交契斷堅金, 照得平生一片心.邇來唱和連篇日, 傾盡眞情幾曲深?可石詩工勝鍊金, 少陵性癖劒南心.試看病俗傷時語, 更把《風泉》較淺深.莫恨床頭見盡金, 丈夫生色不渝心.願成浩氣蓮岡下, 亘塞天高與地深.世不滄生直一金, 誰知獨保歲寒心?子雲未必俟千載, 蘭室、棣園情話深. 금(金)을 끊을 만하니 돈후한 우정을 나누어 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금을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라고 하였다. 소릉(少陵)의……마음이로세 가석(可石)과 연강(蓮岡) 두 사람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서로 주고받은 시(詩)가 매우 많음을 말한 것이다.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별칭이다. 두보(杜甫)의 시 〈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나의 성벽이 좋은 시구를 매우 좋아하여,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오.〔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26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풍천(風泉)의 시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시는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망한 것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자운(子雲)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다.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요부(堯夫), 즉 송나라 소옹(邵雍)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난실(蘭室) 지란지실(芝蘭之室)의 준말로,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善)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체원(棣園) 후창(後滄)과 연강(蓮岡) 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혹독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절의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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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숙【윤채】에게 보냄 與金漢淑【潤采】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멀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와 새로운 거처와 새해를 맞는 상황을 물어주셨으니, 이것은 일상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동오경(董五經)처럼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없어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바람에58) 결국 서로 어긋났습니다. 곧장 차비를 갖추고 가서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행하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를 물으셨습니다. 고인(古人)은 오히려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으로 보아59) 기년복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살아계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무릇 상복은 처음 제정한 것으로 결정을 하니60) 기년복을 하는 것에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신주를 적고 축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완전히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61) 혜량(惠諒)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不憚崎懾遠入天台山中。爲問新寓新年之狀。此意已非常調可辦。但無董五經前知薄言出外。竟致相違卽欲理屐。以修回謝之禮。而末由也已。問父喪中母死者。古人猶以父在服朞。況父在時母死已久乎。凡服以始制爲斷。服朞何疑也。至於題主及祝辭。則不可專以知生而玖生之也。諒之如何。 동오경(董五經)처럼……바람에 동오경과 정이(程頤)의 고사를 가리킨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숭산 앞에 동오경이란 사람이 있는데, 은자이다. 이천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궁구한 선비일 것이라 생각하여 특별히 찾아갔다. 동오경은 평소 암자를 나간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와 과일을 지고 돌아오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대는 정 선생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이천이 특이하게 여겼다. 그 사람이 '선생이 오시려고 한다는 소식이 매우 크기에 제가 특별히 성안으로 들어가 조금의 차와 과일을 마련하여 장차 선생을 대접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천은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다시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매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또한 남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없었고, 다만 오래도록 사물과 접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고 밝았다.【又嵩山前有董五經, 隱者也. 伊川聞其名, 謂其爲窮經之士, 特往造焉. 董平日未嘗出庵, 是日不値, 還至中途, 遇一老人負茶果以歸, 且曰君非程先生乎? 伊川異之. 曰先生欲來, 信息甚大, 某特入城置少茶果, 將以奉待也. 伊川以其誠意, 復與之同至其舍, 語甚款, 亦無大過人者. 但久不與物接, 心靜而明也.】" 《二程外書 卷12》 아버지가……보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상중이기는 하지만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상복은……하니 상복은 처음 결정한 것을 도중에 상황이 변하더라도 바꾸지 않고 입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생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성복(成服)일에 '부재위모기(父在爲母期 아버지 생존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면 기년을 한다)'의 규정에 따라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는다. 성복을 하고 어머니 상을 치루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부졸위모자최삼년(父卒爲母齊衰三年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사망하면 자최삼년을 한다)'의 규정을 다시 적용하여 자최삼년복(齊衰三年服)으로 바꾸지 않는다. 신주를……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하면 어머니상의 상주는 남편인 아버지가 되므로 신주나 축사에 '망실(亡室)'이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면 상주는 맏아들이 되어 '현비(顯妣)'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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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탄 처사 구공 묘지명 春灘處士具公墓誌銘 종족은 효성스럽다고 하고, 향당에서는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컬어 한 고장의 선한 선비가 되는 데 어긋나지 않는 자가 가까이 우리 고을에 있으니, 춘탄(春灘) 구공(具公)과 같은 이가 그 사람이다.공의 휘는 철수(澈洙), 자는 성서(聖瑞)이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함에 부지런히 고기 잡고 나무하여 몸에 편안하고 입에 맞는 것은 모두 다 마련하여 올렸다. 평소에는 그 공경을 지극히 하고, 병환이 들었을 땐 근심을 지극히 하며, 상을 당했을 땐 슬픔을 지극히 하고, 제사에는 엄숙함을 지극히 하였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이 있지 않았다. 형제 두 사람은 화목하고 우애가 있어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깁고 찧는 것도 모두 함께하였다. 친족과 붕우에게는 온화함으로 대하고 신의로 사귀었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늘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해마다 좋은 때에 초대하여 마음껏 즐기면서 수일 동안 흥겹게 지냈다. 평상시에 겸손하고 공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경전을 연구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실린 대략이다. 아, 부침(浮沈)하는 것은 명(命)이고, 가고 머무름에는 때가 있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였으니, 그 행실은 부침과 가고 머무르는 것을 벗어난 데 있었다.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이니, 평장사 민첨(民瞻)이 그 상대(上代)의 선조이다. 고조 준익(俊翼)은 참봉을 지냈고, 증조 용주(龍珠)는 이조 참의를 지냈고, 호는 오헌(梧軒)이다. 조부 담(壜)은 가선대부이다. 부친 상년(相年)은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통정대부 김상희(金尙喜)의 따님이다. 공참공(工參公)은 종조부 승지 상묵(相黙)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춘탄(春灘)이다. 본생비(本生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판관 이동좌(李東佐)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무진년(1808, 순조8)에 태어났고, 철종(哲宗) 정사년(1857, 철종8) 12월 13일에 졸하였다. 마을 동쪽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송사(松沙) 기공 우만(奇公宇萬)이 그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配位)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현감 정재린(鄭在麟)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희모(希謨)이고, 차자는 경모(慶謨)이다. 딸은 안명록(安命祿)에게 출가하였다. 차자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교륜(敎倫), 교신(敎信)이고, 딸은 이은환(李殷煥)에게 출가하였다. 교륜은 장방(長房)의 양자로 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을 쌓고 積累其善광채는 감추었네. 潛晦其光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영원하리라. 餘慶長長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而不失爲一鄕之善士者。近在吾鄕。若春灘具公。其人也。公諱澈洙。字聖瑞。家貧養親。服勤漁樵。便身適口。無不畢給。以至居致其敬。病致其憂。喪致其哀。祭致其嚴。生死始終。無有憾焉。兄弟二人。雍容湛樂。尺斗縫眷。與之共焉。以至族戚朋友。接之以和。交之以信。賙窮恤匱。常若不及。每歲良辰。招邀酣歡。以爲數日之暢。平居以謙恭持身。以勤儉御家。硏覽境典。手不釋卷。此皆狀辭大略也。嗚呼。陞沈命也。流坎時也。素其位而行。其行在於陞沈流坎之外。此可見公之爲公矣。具氏貫綾城。平章事諱民瞻。其上祖也。高祖俊翼參奉。曾祖龍珠吏參。號梧軒。祖壜嘉善。考相年。工參夫人金海金氏通政尙喜女。工參公取同祖承旨相黙子爲後。卽春灘也。本生妣全州李氏判官東佐女。公以純祖戊辰生。哲宗丁巳十二月十三日卒。葬里東艮坐。松沙奇公宇萬撰其碣銘。配延日鄭氏縣監在麟女。有婦德。擧二男一女。長希謨次慶謨。女適安命祿。二房生二男一女。敎倫敎信。李殷煥。敎倫系長房。銘曰。積累其善。潛晦其光。螽斯椒聊。餘慶長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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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재 전씨 어른과 수창하다 2수 酬鍊心田丈【二首】 연심 어른은 걸출한 기상이 많아 鍊翁多傑氣작은 재목과 서까래가 아니라네 不是細材椽진실함을 믿어 겉치레55)가 없었으나 任悃無邊幅곤궁함56)을 지키느라 늘 위태로웠지 固窮一沛顚온화한 용모는 따스한 햇볕과 같고 和容如暖日웅장한 변론은 쏟아지는 폭포 같았네 雄辯若懸泉의리를 더욱 정밀히 할 뿐이지만 但得加精義단약이 완성되면 바로 신선이라네 丹成卽是仙한평생 처세에 부정함을 따르지 않았고 處世生平不詭隨연옹은 가슴속에 좋은 포부만 지녔지 鍊翁惟有好衿期그리우면 찾아가니 약속한 적이 없었고 相思卽訪曾無約잠시 헤어져도 회포는 다시 끝이 없었네 暫別餘懷更罔涯시편은 두보57)와 육유58)를 공부한 게 아니요 非是詩篇工杜陸첩부가 공손연59)과 장의60)를 배우는 걸 비웃었네 笑他妾婦學衍儀정토사의 맑은 모임 어겼다 탄식하지 마오 莫歎淨寺違淸會이 날이 더디 가서 노닐 수 있으니 正可逍遙此日遲 鍊翁多傑氣, 不是細村椽.任悃無邊幅, 固窮一沛顚.和容如暖日, 雄辯若懸泉.但得加精義, 丹成卽是仙.處世生平不詭隨, 鍊翁惟有好衿期.相思卽訪曾無約, 暫別餘懷更罔涯.非是詩篇工杜、陸, 笑他妾婦學衍、儀.莫歎淨寺違淸會, 正可逍遙此日遲. 겉치레 본문의 '변폭(邊幅)'은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공손(公孫)이 쫓아가서 국사(國士)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변폭을 수식하여 우형(偶形)같이 앉았다 하였고, 그 주석에 포백(布帛)의 변폭을 다듬은 것과 같다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 곤궁함 원문의 '곤궁(困窮)'은 곤궁한 처지에서도 분수를 지키며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하였다. 두보(杜甫) 당(唐)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이백(李白)과 함께 시로 명성을 나란히 하여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두소릉집(杜少陵集)》이 있다. 육유(陸游) 1125~1210. 남송(南宋)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다. 강경한 북벌론자였으므로 조정의 기조가 화의와 북벌을 반복할 때마다 관직에서의 부침이 심했다.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의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향으로 기교를 추구하였으나, 중년 이후 호방함으로 변했고, 만년에는 전원생활에 귀의해서 담담하고 고요한 시풍을 열었다. 양만리(楊萬里)ㆍ범성대(范成大)ㆍ우무(尤袤)와 더불어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불린다. 저서에 《검남시고(劒南詩稿)》 등이 있다. 공손연(公孫衍)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서수(犀首)의 벼슬을 지냈기에 서수로 불렸다. 진(秦)나라를 위하여 제(齊)나라와 위(魏)나라에 유세(遊說)하여 소진(蘇秦)의 종약(縱約)을 깨뜨렸다. 장의(張儀)와 잘 지내지 못하여 진나라를 떠났다가 장의가 죽자 돌아왔는데 진나라에서 이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감무(甘茂)가 이간하여 다시 위나라로 갔다. 장의(張儀)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6국이 각각 강한 진(秦)나라를 섬기게 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6국이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는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과 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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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선생 문공 행장 思齋先生文公行狀 사재(思齋) 선생 문공(文公)의 휘는 빈(彬), 자는 군보(君甫)이며, 남평(南平) 사람이다.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그의 시조이다. 휘 익점(益漸)에 이르러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는데 세상 사람들이 삼우당(三憂堂) 선생이라고 불렀다. 고조의 휘는 화(和), 호는 만은(晩隱)이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하였고, 도승지(都承旨)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증조의 휘는 염(琰)이고, 정읍 현감(井邑縣監)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상행(尙行),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옹(雍), 호는 도암(道庵)이며,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순(忠純)이다. 선비(先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인걸(仁傑)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종23)에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평소 가풍에 무젖었다. 조금 성장하여서는 어진 이를 섬기고 인한 사람을 벗하여 학문에 조예가 있어 펼치고 넓혀서 문망(聞望)과 명성이 원근에 회자되었다. 단종조(端宗朝)에 맹산 현감(孟山縣監)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사무를 본 지 한 해가 지나자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세조(世祖) 초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수석(水石)을 읊조리며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살았다. 새로 서재를 짓고 학규를 만들어 생도들을 권장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을 만년의 계책으로 삼았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웅(起雄)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구연(九淵), 구택(九澤), 구심(九潯)이다. 장방(長旁)은 2남을 두었는데, 우주(遇周)는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복주(復周)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방(二旁)은 4남을 두었는데, 억붕(億鵬), 억도(億道), 억수(億壽), 억명(億明)이다. 공의 묘소는 아무 산 아무 좌(坐)의 언덕에 있다.아, 이렇게 후한 덕이 있고 인망이 매우 두터웠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바다 모퉁이에서 은거하며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식자들의 실망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유풍과 여운이 집안에 전하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사당을 건립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영원토록 제향을 폐하지 않을 것이니, 이른바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16세손 경식(敬植)이 가장(家狀)을 받들어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참으로 감히 승낙할 수 없지만 어진 이를 사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좋아하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고, 게다가 경식은 평소 종유한 친분이 있기에 그 뜻을 또 저버릴 수 없어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대략적으로 기술한다. 思齋先生文公諱彬字君甫。南平人。武成公諱多省。其始祖。至諱益漸封江城君。世稱三憂堂先生。高祖諱和。號晩隱。受學于牧隱李先生。官都承旨。諡景惠。曾祖諱琰。井邑縣監。祖諱尙行。諡敬肅。考諱雍。號道庵。官左贊成。諡忠純。妣河東鄭氏仁傑女。正統辛酉。生公于綾州月谷里。早襲庭訓。擩染有素稍長。事賢友仁。學問造詣。奮張展拓。而聞望聲華。膾炙遠邇。端宗朝。特除孟山縣監。視事踰年。治蹟大著。世祖初解官歸鄕。粧點水石以自寄敖。開講室立學規。以獎進生徒。訓迪子孫。爲晩年計。配密陽朴氏起雄女。三男。九淵九澤九潯。長旁二男。遇周將仕郞。復周府使。二旁四男。億鵬億道億壽億明。公墓在某山某坐原。嗚乎。以若厚德重望。未有試於斯世。而潛光海曲聊以卒歲。其爲識者之缺望何如也。然遺風餘韻。傳之在家。播之在人。建祠設壇。百世不替。所謂屈短伸長。非此之謂耶。十六世孫敬植。奉家狀。託以不朽之文。余以非其人。固不敢承膺。而慕賢好德。出於秉彛。而且敬植有平昔游從之分。其意又不可孤。謹據狀而纂述梗槪如右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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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보름날 七月之望 천시에 오늘은 바로 중원271)이니 天時是日卽中元백종272)이란 별칭이 속론에서 나왔네 白踵之稱出俗論성긴 오동에서 잎 떨어지니 우물가의 집이요273) 葉落疏梧井上屋올벼에서 꽃 피니 언덕 사이의 마을이로세 花開早稻壟間村세상이 지극히 혼란하니 치세를 그리워할 테고274) 世當極亂宜思治몸이 장차 죽게 되었으니 본원을 깨닫는구나 身到將終可悟原이내 뜻을 오늘밤에 그 누구와 얘기할까 此意今宵誰與語다정한 밝은 달이 산문에 들어가누나 多情明月入山門 天時是日卽中元, 白踵之稱出俗論.葉落疏梧井上屋, 花開早稻壟間村.世當極亂宜思治, 身到將終可悟原.此意今宵誰與語? 多情明月入山門.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을 이른다. 도가(道家)에서 1월 15일을 상원(上元), 10월 15일을 하원(下元)이라고 하며 7월 15일의 중원과 함께 삼원(三元)이라 하여 초제(醮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백종(白踵) 중원(中元)의 별칭으로, 백중(百中), 백종(百種), 망혼일(亡魂日)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긴 ……집이요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증별사인제대경지강남(贈別舍人弟臺卿之江南)〉 시에, "오동잎이 금정에 떨어지니, 잎새 하나 은상에 날리누나.[梧桐落金井, 一葉飛銀床.]"라고 하였다. 세상은 ……테고 《시경집전》 〈조풍(曹風) 하천(下泉)〉을 평한 정자(程子)의 해설 중에 "혼란이 극도에 이르면 절로 치세(治世)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亂極則自當思治]"라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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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月夜 맑은 달빛277)이 감호278)의 물결과 같은데 月光澄似鑑湖波좋은 이 밤 아까우니 어이하면 좋을까 惜此良宵可柰何상 위에 황금이 다하니279) 친우가 끊어지고 床盡黃金親友絶머리에 백발이 가득하니 나이가 많기도 해라 頭盈白雪得年多비록 창로가 몹시 무료하다 말하지만 縱云滄老殊無賴봉래280) 신선이 늘 찾아오는 건 기뻐한다오 但喜蓬仙每見過끝없는 세상만사 말할 게 뭐 있으랴 萬事悠悠那足說베게 위 남가의 한바탕 꿈281)에 부치노라 付之枕上一南柯 月4)光澄似鑑湖波, 惜此良宵可柰何?床盡黃金親友絶, 頭盈白雪得年多.縱云滄老殊無賴, 但喜蓬仙每見過.萬事悠悠那足說? 付之枕上一南柯. 달빛 저본에는 '일광(日光)'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일(日)을 월(月)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감호(鑑湖) 일명 경호(鏡湖)로,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마진(馬臻)이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어 절강(浙江) 소흥(紹興)에 관개를 위해 만든 호수이다. 《通典 卷2 食貨2 水利田》 상……다하니 당(唐)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행로난(行路難)〉 시에 "그대는 못 보았나 와상 머리에 황금이 다하여, 장사가 안색이 없게 된 것을.[君不見牀頭黃金盡, 壯士無顔色.]"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곤궁한 지경에 처한 것을 의미한다. 봉래(蓬萊)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봉래산은 본디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거주한다고 한다. 삼신산은 봉래산,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일컫는다. 남가(南柯)의 한바탕 꿈 덧없는 인생을 비유하는 말로,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대낮에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들러 공주에게 장가들어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지내는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꿈속의 괴안국이 바로 나무 밑동의 개미굴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類說 卷28 南柯太守傳》 月:底本에는 "日".문맥을 살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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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에게 답함 答奇會一 영남의 풍기(風氣)는 여러 도와 비교가 되지 않으니 비록 세도가 쇠미해지는 시기일지라도 석유(碩儒)와 명사(名士)가 간간이 서로 이어져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풍속이 성대합니다. 아우는 10년 동안 벗들과 헤어져 홀로 지낸 터라 식견이 열리고 비루함을 씻어낸 것이 적지 않았지만, 다만 못나고 졸렬하여 영남의 벗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것 또한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답문류편(答問類編)》45)은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형과 뇌룡정(雷龍亭)에 모여 2, 3일 동안 살펴보았지만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분주하여 단지 5, 6권만 열독하고 그쳤습니다. 애산 형의 생각은 여러 해에 걸쳐 편집한 나머지 서둘러 일을 끝마치려고 했지만, 아우는 그와 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인하여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에 아직 주석을 붙이지 않은 것은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근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니 행여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기를 바래서이다."46)라는 말을 들어 고하였더니 애산 형도 자못 그렇게 여겼습니다. 지난번에 형의 편지를 받드니 간행할 의향이 있다고 하였는데 근래에는 생각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애산 형에게 고했던 것을 다시 알려드리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만둘 수 없다면 반드시 먼저 한자리에 모여서 충분히 상의하고 충분히 교감(校勘)을 한 뒤에야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께서 혜량(惠諒)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嶺中風氣。非諸路之比。雖在世衰道微之日。而碩儒名士。間間相望。樂善好學。蔚然成風。弟十年離索之餘。其所以開豁淘滌者。不爲不多。而但無狀醜劣。爲貽笑於嶺中。則想亦不少矣。答問類編與艾山兄聚於雷龍亭。奉閱二三日。而驚於應接。所閱只到五六卷而止耳。艾兄之意以積年編摩之餘。急欲斷手。弟以爲不必如此。此是吾儕平生事。因擧程子所謂易傳。未傳自量筋力未衰。尙覬有少進之語。而告之。艾兄頗然之。向承兄敎。有刊行之意。未知近意若何。敢以告於艾兄者。復以奉告。如何。無已則必先一席爛商。十分讎校然後。可以下手也。惟在兄諒。 《답문류편(答問類編)》 조선 순조(純祖)~고종(高宗) 때의 학자인 기정진(奇正鎭)이 옛 지기 및 문인들과 서찰로 문답한 학문적 내용을 분류해 엮은 책으로 15권 6책으로 이루어졌다. 1902년 단성(丹城)에서 기양연(奇陽衍)ㆍ정재규(鄭載圭)ㆍ정의림(鄭義林) 등 문인들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역전(易傳)》에……바래서이다 《근사록》 권3 〈치지(致知)〉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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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송진택(宋鎭澤) 의송(議送)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酉十一月日 宋鎭澤 巡使 癸酉十一月日 宋鎭澤 全羅道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巡使[着押] 2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73년(고종 10) 11월에 송진택(宋鎭澤)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의송(議送). 1873년(고종 10) 11월 전주(全州)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의송(議送)이다. 문서가 훼손되어 소지를 올린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소장처와 그 내용으로 미루어 송진택으로 추정하였다. 송진택은 태인현에 사는 이태한(李太漢)의 투총(偸塚)에 대해 여러 번 관에 정소하였다. 태인현감이 보고한 도형 보장(圖形報狀, 즉 첩정)에 대해 "송민(宋民)의 전후 문서들이 분명하므로 이민(李民)의 억지를 알 만하니 즉각 독굴(督掘)하라"는 순찰사는 제음(題音)을 내렸다. 순찰사의 지시로 태인현감이 차사를 보내 이태한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태한은 요리조리 도망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송진택은 순찰사에게 다시 정소하여 관에서 독굴해 달라고 하였다. 순찰사는 이전의 제음대로 독굴하라고 산재관(山在官, 즉 태인현감)에게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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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에게 보냄 與奇會一 두 서생(書生)이 이미 돌아갔으니 누가 오늘 다시 노형(老兄)이 손수 쓴 서한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서글프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경부담판(京部談辨)〉56)을 삼가 읽어보았습니다. 공정하고 사심 없는 본성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엄밀하고 강직함이 가을 서리처럼 늠름하였습니다. 비록 쓰러질 듯 나약하여 죽을 날이 가까웠지만 한 올의 실 같은 선비의 기상이 죽지 않았습니다. 서한을 통해 형의 체후가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험난한 일을 두루 겪은 것이 이토록 오래되었으니 노쇠한 기력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가호(加護)하여 사문(斯文)이 다행스럽게 여기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백수형(白水兄)의 병이 매우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치달아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덜하거나 심하거나 하는 증상이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달려가서 안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아우는 병이 거듭된 끝에 피곤하고 초췌한 것이 고질이 되었으니 아마도 다시는 평소 모습을 되찾지 못할 듯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어찌하겠습니까. 요즘 세상 소식은 근래 들은 바가 있습니까? 하늘이 내린 재앙을 거두려는 마음을 지녀 혹시 국운(國運)이 융성해지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굴삼려(屈三閭)가 말한 "오래 살아서 세상을 초탈하고자 한다."57)는 것이 애초에 요즘 제가 지닌 뜻이 아닌 적이 없습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형은 서로 소식을 들었습니까? 얼마 전 돌아오는 길에 구동(龜洞 최익현(崔益鉉)이 살던 곳)으로 들어가 조문하였는데 한쪽 사람들의 시끄러운 의론을 그치게 하였습니까? 《면옹유고(勉翁遺稿)》는 한창 간행하려고 계획한 것은 과연 그리했는지요? 비문(碑文)의 정본(定本) 또한 얼마나 산삭(刪削)하여 간추렸는지 보셨습니까? 쌓인 회포가 산처럼 높지만 일일이 고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날씨가 서늘해지거든 한 번 나아갈 계획입니다만 노정(路程)이 성부(城府)를 지나기가 매우 불편하니 어쩌겠습니까. 형이 때에 맞추어 체후를 잘 보전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二生旣告返矣。誰謂今日得復見老兄手筆耶。悲慰不可言。京部談辨。謹已讀之。正大之情。不少沮撓。而嚴密剴直。凜如秋霜。雖靡靡孱弱。幾乎垂盡之日。而一縷士氣。爲不死矣。仍審兄候有不安之節。備經險難。至此之久。而衰老氣力。安得不然。千萬加護。以幸斯文。白水兄所愼。聞甚沈重。馳慮之至。不能定情。未知日間歇劇又何如。未能趨走相省。恨恨弟積病之餘。羸瘁成痼。恐不得復作平時人。勢也何爲。時耗近有所聞否。未知天心悔禍。而祚宋或有其日耶。屈三閭所謂長生度世者。未始非區區今日之意也。艾兄有相聞否。向日回程入吊龜洞。而有以破一邊嘵嘵之口耶。勉翁遺稿方營刊始。果然。而碑文定本。亦見其有多少刪畧耶。積懷如山。有難枚告。第待凉生。爲一造計。而但路過城府。極爲不便。奈何。只祝兄體爲時保重。 〈경부담판(京部談辦)〉 《송사선생문집(松沙先生文集)》 권12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오래……한다 이 내용은 주자가 유덕수(劉德修)에게 답한 편지의 "굴평(屈平)이 이미 지나간 것은 어쩔 수가 없고 앞으로의 일은 알지 못하니, 오래 살아 속세를 초탈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屈平, 以往者不及, 來者未聞, 而有長生度世之願.】"라는 구절을 원용하였다. 《晦庵 續集 卷4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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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선【우종】에게 보냄 與金乃善【佑鐘】 예는 생략합니다. 며칠 전 제 종자(從者)가 와서 말하기를, 존가(尊駕)의 행렬이 제가 사는 부근 점사(店舍)에 이르렀으나 비에 막혀서 잠시 머물러 있다가 곧 처소로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나아가 뵙고 정담을 나누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또 노형(老兄)께서 근래 이사를 하실 계획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자세히 헤아리고 정밀하게 살펴보셨을 터이니 주변 사람이 간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천박한 저의 견해로는 반드시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릇 이사하는 도리는 마을이 어진 곳을 택하거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을 택하거나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정(事情)이 크게 다르거나 아주 부득이한 까닭이 아니고 그저 백 보와 오십 보 사이에 불과하다면 어찌 선조의 유물이 있는 땅을 가볍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어진 마을을 택하든 살아가는 환경을 택하든 과연 지금 있는 곳보다 손실이 없을 수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이렇게 험난한 세월에 당장 살아갈 방도가 더욱 힘들고 고생스럽건만, 오가는 비용과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어떻게 충당하고 어떻게 마치겠습니까. 훗날의 화복은 본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앞의 이해(利害)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어찌하여 이리도 잘못 헤아리십니까. 생각건대 노형(老兄)께서 가난과 곤궁함에 마음이 흔들려 계획을 세우고 마음속으로 계산해 온 날들이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좋은 뜻으로 하는 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심이 담긴 계책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상태가 되셨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민간 속담에서 말하는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알지 못한다."라는 것이 어쩌면 여기에 가까울 듯합니다. 무릇 중요한 일은 한번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 번 만 번 잘 헤아려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省禮。日昨。鄙從來道。尊駕行至鄙邊店舍。爲雨所滯。滯留少頃。旋爲返次云。追念耿耿。恨未得晉拜穩晤也。且道老兄近爲搬移計云。想必有詳量精察。非傍人所可與者。然以淺見。切不能無疑。夫搬移之道。或擇里仁。或取生理。不出二者而已。然非大端懸絶及甚不得已之故。而只是百步五十步之間。則豈可輕棄舊物之地哉。今日之事。以擇以取。吾不知其果能無損於見在之地。而况此險歲。目前計活。尤爲艱辛。其來往之費。土木之役。何以支了耶。日後禍福。固所不知。而目前利害。明若觀火。何其錯料若是也。想老兄爲貧窮所動。經營思算。爲日久矣。是以良言不入忠謀難售。吾恐里諺所謂知得不知失者。或近之矣。夫機事一失。後悔莫追。惟千萬諒之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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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에게 보냄 與朴學仲 경립(景立)이 담헌(澹軒)에서 돌아왔을 거라고 짐작하고 사온(士溫)을 보내 안부를 묻게 했더니, 사온(士溫)이 길을 가던 중간에 경립을 만나 함께 돌아왔습니다. 한창 걱정스럽던 시기에 마음이 매우 흡족하였습니다. 제게 끊임없이 물으시니 노형(老兄)께서는 역시 예학(禮學)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고 세밀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용렬하고 천박한 사람이 어떻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제 의견으로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주장에 비해서 더욱 온당한 듯합니다. 이미 "시기가 지나면 담제(禫祭)67)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면, 담제를 지내는 달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내는 것은 시기가 지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날을 가려 대상제를 지내고 그 다음에 중순이나 하순에 다시 날을 가려 담제를 지내는 것은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왕숙(王肅)이 "그달 안에"라고 한 것 또한 하나의 증거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시기가 지나면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공제(公祭 국가의 제사)와 사제(私祭 사가(私家)의 제사)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상중에는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주장은 본래 부모의 상을 동시에 치르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가벼운 상의 장례를 치른 뒤 무거운 상의 담제를 지내지 않겠습니까. 그렇더라도 가벼운 상이 만약 장례를 치르기 전이라면 무거운 상의 담제를 지낼 수 없습니다. 2년이 되는 날 이미 고사(告辭)를 했다면 대상제(大祥祭) 때의 축문(祝文)은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모두 천박한 견해이고 근거 없는 말이니 노형께서 다시 지당한 논의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축하드릴 만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노형께서 근래 병에 매여 계시니 누구인들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을 닫고 홀로 지내며 쓸데없는 빈객을 맞지 않고 쓸데없는 얘기를 듣지 않으며 오직 성현의 서적에만 침잠 반복(沈潛反復)하실 뿐입니다. 이 때문에 지식이 날로 열리고 사유(思惟)가 날로 넉넉해지니 시력을 일찍 잃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주부자(朱夫子)의 말을 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두 자제가 아침저녁으로 감화를 받는 기회가 되는 것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위로가 됩니다. 意景立自澹軒還。送士溫候之。士溫行到中路。逢景立俱還。企慮之際。甚愜情緖。俯詢縷縷。足見老兄於禮學。亦甚詳密。顧此疏慵淺劣。何足以上下也。鄙意尤菴同春。比沙溪說。似益穩當。旣曰過時不禫。則禫月行祥者。不可謂過時矣。卜日行祥。其次中旬及下旬。又卜日行禫。何所不可乎。王肅所謂是月之中者。亦不可謂非一副證佐矣。且過時不禫一也。豈有公祭私祭之別乎。喪中不禫。本以父母偕喪說也。豈以輕喪葬後不行重喪之禫乎。然雖輕喪若其葬前。則不可行禫也。再期日。旣有告辭。則祥時祝文。似無異同矣。如何如何。此皆淺見臆說。幸老兄更示以至當之論。第有一說可奉賀者。老兄近來爲病所縶。孰不悶慮然閉戶獨居。不接閒人客。不聞閒說話。而所沈潛反復。惟是聖賢書籍而已。是以知識日開。神明日腴足見朱夫子却恨盲廢不早之語也。况爲令允兄弟日夕薰染之地者。豈有量哉。慰仰。 담제(禫祭) 삼년상에서 25개월이 되는 달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낸 뒤 한 달을 건너 27개월째에 지내는 제사이다. 담은 담담한 듯 평안하다는 뜻으로, 대상제를 통해 실제적인 삼년상의 과정을 마무리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친애(親愛)의 정감을 다할 수 있었던 효자(孝子)의 마음을 표상하는 상제(喪祭)이다. 담제를 지내고는 음악을 연주하고 정사(政事)에 복귀하는 등 상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는 정현(鄭玄)의 주장에 따라 27개월째에 지내지만 대상제와 동일하게 25개월이 되는 달에 지낸다는 왕숙(王肅)의 이설(異說)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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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오【현옥】에게 답함 答金豐五【顯玉】 《답문편(答問編)》70)은 이미 일을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그 애를 쓴 마음과 진심 어린 정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형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아마도 여러 무덤이나 책 상자에 들어있는 자질구레한 시문(詩文)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발문(跋文)을 지으라는 부탁은 아우가 적절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대곡(大谷)71)이 죽은 뒤 이미 해가 세 번 바뀌었지만, 체백(體魄)이 여전히 낮은 땅속에 있으니 이것 또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형께서 천 리 밖에서까지 글을 거두어들인다고 들었습니다.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가상(可尙)하여 구름 속의 방장산(方丈山)이 한 층 더 높아졌습니다. 유문(遺文)은 몇 권이나 편집하셨습니까? 보고 싶은 마음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보내주신 정사시(精舍詩)와 서문(序文)을 여러 번 읊조리니 완연하기가 마치 이 몸이 방장산 위에 있자니 산의 기상(氣象)이 천만 가지로 변하여 빽빽하게 주변을 두르고 있는 듯합니다. 방장산은 평소에 선옹(仙翁)의 굴혈(窟穴)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하루아침에 문교(文敎)가 밝아지고 도리를 강설하는 지역이 되어 천고에 황당한 이야기를 깨트리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조정에 나가지 못하는 선비는 산림(山林)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산림의 즐거움을 어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겠습니까. 노형(老兄)께서는 어떤 마음과 어떤 능력을 지녔기에 근실하게 고인을 따르는 것이 매사에 이처럼 우뚝한 기상을 보이십니까? 내년에 가려는 계획을 따르게 된다면 방장산의 뛰어난 천석(泉石)이 혹여 저속하고 비루하다고 저를 가로막지나 않을까요? 애초에 형의 경률(瓊律 상대방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지만, 인편의 재촉을 받아 우선 그만두었습니다. 答問編聞已了緖。其苦心血誠。令人斂衽。非兄與艾山。此書幾不爲諸冢巾衍中散墨耶。跋語之託。弟非其人。豈敢爾也。大谷之沒。三燧已改。而體魄尙在淺土。此亦吾儕之責也。奈何奈何。聞兄千里收文。風義可尙。雲裏方丈。更高一層矣。遺文編得幾卷耶。願見之心不啻飢渴。俯示精舍詩若序。諷詠數回。完然若身在方丈山上。氣像萬千。森羅左右也。方丈素以仙翁窟穴。有名於天下。豈知一朝爲文明講道之區。而破其千古荒唐之說耶。士之不得於朝者。山林。然山林之樂。豈人人所可得。老兄以何心力每事勤遵古人若是磊落耶。來歲行。若如所料。則方丈泉石之勝或不以俗累見拒耶。瓊律初欲賡呈爲便人所促姑爲中止耳。 답문편(答問編) 《답문유편(答問類編)》을 가리킨다. 기정진(奇正鎭)이 옛 지기 및 문인들과 서찰로 문답한 학문적 내용을 분류해 엮은 책으로 목판본이며 15권 6책으로 이루어졌다. 1902년 단성(丹城)에서 기양연(奇陽衍),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 등 문인들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 1835~1885)의 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를 왕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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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해【문규】에게 답함 答朴景行【文奎】 질문 : 제가 생각건대, "하루 종일 부지런히 한다."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또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조심한다."161)고 하였으니, 대개 해가 저물면 사람은 노곤해져서 어두운 기운이 쉽게 탑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한 것입니다. 철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즉 "옛날 병오년 봄 순강(旬講)162) 때 오재덕과 위의 저처럼 논하였는데, 으레 선생께서 '그렇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또한 다른 뜻도 있습니다. 대개 옛사람이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밤중에 있습니다. 장자(장재)가 말한 '낮에는 함이 있고 밤에는 생각함이 있다.'163)라 하였으니 이 때에 더욱 두려워하며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공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어서 다행히 터득하면 그대로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으니,164)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는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답변 : 두 사람 말이 괜찮네. 文奎以爲終日乾乾則足矣。又曰夕愓若。盖日暮人倦。昏氣易乘。故特言之。澈源以爲昔在丙午春旬講時。與吳在德論之如此。而例蒙先生之曰可矣。而今思之。亦有一義。盖古人精思。多在夜中。張子所謂晝有爲夜有思者也。於此時。尤不容不惕厲也。周公之仰而思之。夜以繼日。幸而得之。坐以待朝。其惕若。爲何如也。兩說無妨。 하루 종일……조심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文言)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 厲 無咎〕"라 하였다. 순강(旬講) 열흘에 한 번 여는 강독회를 말한다. 낮에는……있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3 〈유덕(有德)〉 제12에서 "낮에는 열심히 하는 일이 있고, 밤에는 얻는 점이 있어야 하며, 숨을 쉴 때나 눈을 깜빡할 사이에도 존양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라고 하였다. 주공이……기다렸으니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세 왕의 덕을 겸비하여 그분들이 행한 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였다.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으로 날을 이어서,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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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홍【기용】에게 답함 答朴士洪【淇容】 면주(綿州)129)는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워하는 그대는 이처럼 아득히 멀리 있는가. 이슬에 젖은 갈대와 구름에 덮인 나무가 매일 그리움을 일으키네. 낙경이 오는 차에 그대 편지를 받았는데, 나의 위안은 한곡(寒谷)에서 해를 보는 것130) 그 이상이니, 고마운 마음 어찌 그치겠는가. 인하여 부모를 모시고 책을 읽으면서 건강이 매우 좋다고 하니 더욱 듣고 싶었던 바이네. 나는 정신이 소진되어 다만 속이 텅 비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았는데,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고 있네. 그밖에 다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멀리 있는 붕우에게 들어서 보여주겠는가. 참으로 대단히 부끄럽네. 물을 길어오고 짚신을 짜는 것은 아들이 해야 할 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그 일을 하지 않고 한갓 책만 읽는다면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성인이 말한 '부모를 모시고 남은 힘으로 글을 배우라.'131)는 것은 참으로 이런 뜻이네. 한편 평소에 자신에게나 집안일에 무익한 것을 헤아려야 하니, 예를 들면 한가하게 출입하거나 한가하게 대화하는 것 등은 일체 통렬하게 끊어버리고, 익힌 것을 심신(心身)과 성정(性情)의 사이에 증험해보고 움직이고 쉬거나 말을 하고 행동할 즈음에 체험하여 성인의 말로 하여금 종이 위에 적혀진 헛된 문장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많은 스승132)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멀리하지 않는 정성에 감동하여 일부(一副)의 어리석은 말을 해주니, 잘 모르겠네만 남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 말이라고 여겨서 배척하지는 않을 것인가. 綿州不在天上。而所懷伊人。若是闊遠耶。露葭雲樹。無日不與懷。樂卿來。承此惠存。區區慰豁。不啻若寒谷之見陽。感感何已。仍審奉親讀書。候節珍勝。尤副願聞。義林神耗精脫。只有枵然一形殼。尙爾住泊此世耳。餘外復有何說。可以擧似於遠朋哉。良愧良愧。汲水捆屨。此是子職之所不容已者。不修其職。而徒爾讀書果何用哉聖人所謂餘力學文。正此意也。第於日用間。度其無益於身事家事者。如間出入閑說話之類。一切痛斷。驗之於身心性情之間。體之於動靜云爲之除。使聖人言語不至爲紙上虛文。則不患無餘師。如何如何。感遠友不遐之勤。敢以一副瞽曚之說及之。未知不以不恕之言而見斥否。 면주(綿州) 무안현의 옛 이름이다. 한곡에서 해를 보는 것 한곡은 연(燕)나라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추워서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데, 추연(鄒衍)이 옥률(玉律)을 불었더니 따뜻한 기운이 일어 마침내 화서(禾黍)가 자랐다고 한다. 《列子 湯問》 여기서는 상대방의 편지가 추연의 옥률과 같다는 의미이다. 성인이……배우라 앞의 〈여정원경(與鄭元卿)〉에 보인다. 많은 스승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도는 대로와 같은 것이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이 병일 뿐이다. 그대가 돌아가서 찾아본다면 많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夫道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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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영【영주】에게 답함 答朴乃英【瑩柱】 만나보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으니 그리운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이에 한 통의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진귀한 보물과 같네. 인하여 부모를 모시면서 건강이 신령이 보호하여 좋다고 하니 더욱 듣기 바라던 바이네. 나는 병든 모습이 이전과 같으니 달리 할 말이 없네. 보내준 편지에서 눈은 피상적인 것에 내달리기만 하고 마음은 핵심에 어둡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겸손한 말이네. 그러나 또한 어진 그대에게 전혀 이런 병이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네. 나는 그대에게 매번 이것으로 한번 충고해주려고 하였네. 지금 그대는 스스로 그러한 병을 알고 있는데다가, 또한 차의(箚疑)의 몇 가지 조목을 편지 끝에 써서 보냈는데 피상적인 것에 내달리는 습관을 없애고 핵심의 지경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으니, 위안이 됨이 그치지 않네. 옥백(玉帛)과 종고(鐘鼓)는 이미 예악에 쓰이는 것이지만 그 쓰임만 있고 근본이 없으면 장차 어떻게 쓰임이 되겠는가. 만약 '소나무를 심고 잣나무를 심은 뜻'120)에 대해 묻는다면 분명 대답해 줄 말이 없을 것이지만, 과연 그대 편지처럼 그 말을 견강부회함이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전율케 하려는 것.'이란 말과 비슷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겠는가. 관중은 그릇이 적지만 공은 크다고 하였는데,121) 그릇이 적다고 해서 그 큰 공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 또한 성인의 지극히 공정한 마음이네. 不相見久矣。懸懷曷任。一書眞百朋也。因審侍省節宣。神相佳吉。尤協願聞。義林病牀如前。無足提喩。示中眼走皮毛。心昧肯緊。此固撝謙之語。然亦不可謂賢者全無此病也。區區和相向。每欲以此爲一奉規矣。今賢者自知其病。又有箚疑數條。錄在紙尾。其祛皮毛之習。而入肯緊之域。可以見矣。慰仰亡已。玉帛鍾鼓。旣是禮樂之用。則有其用而無其本者。將何以爲用哉。若問以松以柏之義。必無辭可對。果如來諭。又安知傳會其說。不似使民戰栗者乎。管仲器則小而功則大。不可以器之小而不與其功之大。此亦聖人至公之心也。 소나무를……뜻 《논어》 〈팔일(八佾)〉에 "애공이 재아에게 사에 대하여 물으니, 재아가 대답하기를, '하후씨는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사용하였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백성들이 전율을 느끼게 하도록 해서였습니다.'[哀公, 問社於宰我, 宰我對曰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라고 하였다. 관중은……하였는데 《논어》 〈팔일(八佾)〉 제25장에서 "관중의 기국이 작구나!〔管仲之器小哉!〕"라고 한 것과 〈헌문(憲問)〉 제17장에서 자로(子路)가 관중은 인(仁)하지 못하다고 하자, 공자가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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